42. 2003년 11월. 장인환(張仁歡)
정원수의 낙엽들이 거의 대부분 떨어져 내렸다. 새벽에 내린 소낙비 때문이었다. 비는 낙엽들과 더불어 농익었던 ‘가을’까지도 함께 거둬가버린 것 같았다. 아침 최저 기온이 영하 3도까지 뚝 떨어져버렸다. 바람까지 불어대서 체감 온도는 영하 10도나 된다고, 비몽사몽간에 얼핏 들려온 윤 실장의 목소리를 통해 알았다. 인환이 완전히 깨어난 오전 8시 무렵 비는 그쳐 있었고, 과연 창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벌써 11월도 20여 일이나 지났으니 이제쯤은 겨울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만, 영하 10도라면 동장군도 조금 성급한 게 아닌가 싶었다.
눈을 떴다.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주침실 인태리어가 한눈에 들어왔다. 서재에서 그의 품에 안긴 채 울다 지쳐 잠이 든 것이 간밤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침실엔 그가 안아다 옮겼으리라.
이중으로 커튼이 쳐진 방 안은 어둑하면서도 따뜻했다. 잠을 부추기는 환경이었다. 머릿속이 약간 멍한 것만 빼면 더 자고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새벽녘에 고작해야 세 시간 남짓 눈을 붙인 게 다지만, 지난 열흘간 잠이라면 물릴 정도로 자두었으니 아쉬울 게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쉬이 일어설 기운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온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겁고 나른했다. 그나마 좀 회복됐던 에너지가 간밤에 울고불고한 덕분에 도로아미타불이 된 것 같았다. 확실히 몸 상태가 정상을 찾으려면 아직은 좀 더 시일이 지나야 할 듯싶었다. 조급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치유의 시간은 인환의 상상 이상으로 길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몸은 비교적 쉬이 회복되겠지만, 마음과 영혼의 치유까지로 범위를 확장해보면 일생이 걸릴지도 모를 만큼 지난한 일일 터였다. 물론 영영 치유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건 그것대로 할 수 없는 노릇이겠지.
온기가 만져지지 않는 침대 옆자리가 문득 허허로웠다. 그가 보고 싶었다. 걱정이 되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 이상으로 극심하게 상처 입은 그였다. 또 어디서 혼자 소리 없는 고통의 비명을 토해내고 있지는 않은지, 불현듯 초조해졌다.
“……음, 그래요. 걱정을 끼쳐 미안합니다, 모두…….”
그를 찾아 막 상체를 일으키다가 침실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그의 흐릿한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 사람 상태 봐서 회복되는 대로 출근할 테니까 이번 주 중으로 회의 일정 잡아주세요, 윤 실장.”
나지막하면서도 담담한 어조는 인환의 걱정과는 달리 비교적 평온하게 들렸다. 지난 열흘 넘게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는 게 믿기 힘들 만큼, 평소와 다름없이 유려하게 떨어지는 매혹의 중저음이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사장님…… 정말로…….”
몹시 들뜬 윤 실장의 목소리도 보태졌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3분의 1쯤 열린 방문 틈으로 제법 소란스러운 인기척들이 속속 전해지고 있었다. 회사와 집을 번갈아 오가며 출퇴근을 하고 있는 윤 실장 이하 비서진들이며 집 안의 고용인들, 절제된 기쁨이 일렁이는 김성준의 목소리까지도 우렁우렁 들려왔다. 다들 목소리 톤을 한껏 낮추고는 있지만 흥분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얼추 짐작이 갔다. 간간이 그의 짧은 대꾸가 떨어질 때마다 이쪽으로 전해지는 흥분 지수도 높아졌으므로. 지난 열흘간, 온 집안을 암울한 분위기로 몰아넣었던 그의 실어증이 회복됐으니 다들 어린아이처럼 흥분하며 기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터였다. 그가 입은 극심한 마음의 상처까지 온전히 회복됐을 리야 없지만, 일단 실어증이 사라졌다는 것만으로도 다들 한시름 놓았으리라. 물론 인환 자신도 한시름 놓은 것은 한가지였다. 평소와 다름없을 뿐만 아니라 차분하기까지 한 그의 목소리를 훔쳐 듣는 동안, 불현듯 솟구쳤던 불안감과 초조감은 눈 녹듯 스러졌다. 묵직하게 가라앉은 중저음이 주는 위로와 평화는 자장가 이상이었다. 다시금 비몽사몽 졸음이 다가들고 있었다.
거실에서의 들뜬 회합은 그로부터 30분쯤은 더 이어진 것 같았다. 졸음에 침몰당하고 있는데다 워낙 다들 목소리를 낮추고 있어 정확한 대화 내용을 알아들을 순 없었다. 그저 그의 회사 얘기가 대부분이라는 것과, 인환과 ‘그녀’에 대한 이야기도 간간이 오가고 있다는 정도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몰라도 상관없었다. 그가 또 상처받아 아픈 것만 아니라면 어떤 이야깃거리든 다 수용할 수 있었다.
뺨을 간질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은 양쪽 뺨을 쓸고, 이어 이마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는 것 같더니 미간과 콧날을 오밀조밀 어루만지는 감촉으로 이어졌다. 시선도 느껴졌다. 심장을 옥죄는 것 같은 감각이, 시선이 떨어지고 있는 얼굴과 상반신으로 스쳐갔다. 어느새 다시 들어버린 잠을 깨운 것도 얼굴을 어루만지는 직접적인 손길보단 바로 그 시선 때문이었으리라.
눈을 뜨자마자 그린 듯한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보였다. 30센티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가까운 거리였다. 침대 가에 앉은 그가 한 팔로 체중을 지지한 채 상체를 인환의 얼굴 가까이 기울이고 있었다. 방금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은 모양인지, 보라색 캐시미어 스웨터에 옅은 카키색의 치노 팬츠 차림인 그에게선 비누 냄새가 역력했다. 방 안이 여전히 어둑어둑한 탓에 여위고 초췌한 낯빛이 더욱 창백해 보였다. 인환의 얼굴에 고정돼 있던 눈동자는 인환이 눈을 뜨자마자 바로 시선을 맞춰왔다. 눈을 감고 있을 때에도 심장을 옥죄던 시선은 직접 보니 아예 저릿저릿한 심장의 통증으로 다가왔다. 백치처럼 멍하게 보일 정도로 무방비했고, 그럼에도 낙인 같은 고통과 절절한 애정의 증거는 여전했다. 그의 시선이 인환에게 어떻게 비친다는 걸 자각하고 있다면 저리 무방비하게 인환을 들여다보지는 않을 터였다. 숨겨져 있던 속 쌍꺼풀이 보일 정도로 퉁퉁 부은 눈꺼풀은 간밤의 통곡 덕분이겠지.
“……배 안 고파? 아침 먹어야지.”
시선이 마주친 채로 한동안 바라보기만 하자 마주 홀린 듯 내려다보기만 하던 그가 마침내 물어왔다. 시선만큼 단조롭고 무방비한 어조였다.
“……안 고파? 그럼 좀 더 잘래?”
현실감이 결여된 듯한 그의 표정이며 어조가 가슴 아파 가만히 고개를 가로젓자 자동인형처럼 되물어왔다. 새벽 끝 무렵에야 잠이 들었으니 인환이 더 자고 싶어하는 것으로 여긴 모양이었다. 인환이 더 자겠다고 하면 덩달아 식사를 거른 채로 옆에 누워버릴 그라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도 있었다. 잠이 필요한 이는 인환이 아니라 외려 인환이 납치된 이래 거의 잠을 자지 못한 그일 것이다. 식사 또한 한가지. 인환 자신이야 지난 열흘 내내 자고 먹고 하며 충분히 몸이 회복될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는 회복은커녕 지옥 같은 고통 속을 헤매고 있었다. 아니, 지금 이 순간도 그에겐 어쩌면 지옥일 터였다. 그러니 이제부턴 무엇보다도 그의 회복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 인환의 따라쟁이 팔불출이니, 어찌 됐든 몸이라도 정상으로 돌려놓을 수는 있겠지.
“……몇 시야?”
“……9시 조금 지났군.”
“……졸리기도 하지만 배도 고파. 밥부터 먹자. 너도 아침 아직이지?”
답이 떨어지자마자 얼굴 이곳저곳을 끊임없이 애무하던 손길이 떨어져나갔다.
“어디 가?”
서둘러 몸까지 일으키더니 문가로 걸어 나가려는 그를 불러 세웠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돌아보는 몸짓은 여전히 전자동 로봇 같았다.
“메이드더러 식사 가져달라고 하려고. 너 식당에 갈 기운 없잖아.”
그럴 줄 알았다.
“열흘이나 누워 있었는걸. 식당에 가서 먹을래. 답답해서 침실은 더 이상 사양이다, 뭐.”
저릿한 가슴의 통증을 애써 단속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닥 기운은 없지만, 말 그대로 더 이상은 침대에서 미적거리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를 위한 처방이기도 했다. 인환의 지긋지긋한 병상 분위기는 그의 회복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막 침대에서 내려서려는데 겨드랑이 사이로 손이 파고들어왔다. 거의 동시에 공주님 안기로 안아 올려진 인환은 어느새 침실 문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뭐, 뭐하는 거야…… 걸어갈 수 있어, 위야!”
반사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감긴 했지만, 당장 거부의 애원이 튀어나왔다. 짐작대로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철인 체력을 자랑하는 그라는 걸 알지만, 지금은 평소의 그가 아니지 않은가. 식당으로 옮겨지는 내내 그가 혹 어지럼증을 일으키는 건 아닌가,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인환의 근심을 비웃듯, 식탁 의자에 인환을 앉힐 때까지 그는 숨길 한번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침실을 나오면서 어느새 나이트가운도 집어 온 것인지, 파자마 차림인 인환의 어깨 위에 가운을 걸쳐주기까지 한 그였다. 식탁을 차리고 있는 두 아주머니들과 집 안 곳곳을 청소 중이던 메이드 아가씨들이 그런 그와 인환에게 웃음기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얼굴이 붉어졌지만 차마 그를 타박할 순 없었다. 금방 깨질 유리그릇처럼 인환을 다루는 그의 극진한 애정이며 불안감을 절절히 자각하고 있는 때문이었다. 체면이라든가 타인의 이목 같은 것엔 일절 신경조차 가지 않는 게 당연할 것 같은 그의 고통이며 상처를 뼈아프게 자각하고 있는 것도 한가지인 까닭이었다.
“어제까지 계속 죽을 드셨으니 반찬도 부드러운 것들로만 준비했어요, 장 선생님.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어요. 서늘하진 않으세요, 장 선생님? 보일러 온도 좀 높일까요? 청소하느라 좀 전까지 창문을 열어놔서…….”
“괜찮습니다, 아주머니.”
“미스 정, 침실에서 케이프를 하나 가져다주겠어요?”
식탁에 찌개를 나르며 살갑게 물어오는 두 아주머니들에게 던진 인환의 대꾸는 그의 기계적인 명령에 묻혀버렸다. 잽싸게 침실로 사라졌던 미스 정이 무릎담요 한 장을 가져왔고, 담요를 받아 든 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맞은편에 앉은 인환의 어깨를 감싸듯 덮어주었다.
“……별로 춥지 않은데…….”
다시 맞은편에 앉은 그가 조용히 시선을 맞춰왔고, 소극적인 항변은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감기 걸리면 안 돼. 머루알처럼 새까맣고 깊은 눈이 그렇게 애원하고 있었다. 감기 걸리면 안 돼. 더 이상 아프면 안 돼. 인환을 향한 애원이었고, 그 스스로를 향한 맹세 같기도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저 그의 눈을 바라본 것뿐인데도 마치 그가 직접적으로 말을 뱉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뜻이 고스란히 읽히고 있었다. 어젯밤부터 내내 그랬던 것 같았다. 아마도 앞으로도 내내 그러할 터였다. 가뜩이나 말수가 부족한 그인데 이러다간 아예 둘 사이의 대화가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비이성적인 상상에 피식 실소마저 흘렀다.
최 씨 아주머니의 말처럼 자극적이지 않은 반찬 일색인 상차림에 반공기쯤의 밥을 비워냈다. 깔깔하기만 한 입안에다 떨어진 식욕이 그 반공기조차 허락하질 않았지만, 그를 위해 최대한의 시늉을 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팔불출 따라쟁이 아니랄까 봐, 그가 비워낸 몫도 딱 반공기였다. 좀 더 먹지……. 안타까워져서 그와 시선을 맞췄지만 자신과 다름없이 반공기가 현재 그의 최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긴 밥을 먹는 건지, 인환을 바라보는 건지 알 수 없게 식사 내내 인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그로서는 반공기를 비운 것만도 대단한 성과일지 몰랐다. 할 수 없지. 욕심 부릴 일은 아니니까. 조용한 체념의 한숨과 함께 수저를 놓았다.
아이구, 좀 더 드시지요! 쯧쯧, 어쩌나. 입맛이 영 없으신가 봐요. 두 아주머니들이 인환을 향한 건지, 아니면 그를 향한 건지 대상이 아리송한 탄식을 던졌다. 많이 먹었습니다, 인환의 미안한 대꾸는 차를 내오세요 하는 그의 무뚝뚝한 명령에 묻혀버렸다. 딱딱하기만 한 그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두 아주머니들의 기분은 몹시도 좋아 보였다. 그건 거실 쪽에서 조용히 걸레질 중인 두 메이드 아가씨들도 한가지였는데, 원인은 역시 지극히 무뚝뚝한 고용주의 부활 때문일 것이다. 실어증에 걸려 명령 한 마디조차 내뱉지 못하는 고용주보다는, 무뚝뚝하고 사무적인 명령을 던질지언정 건강한 고용주 쪽이 훨씬 든든하겠지.
식후 티타임이 끝나자마자 다시금 인환을 안아 들려는 그의 기색에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막 손을 뻗어오는 그에게 맹렬히 고개를 흔들곤 잽싸게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뻗어온 그의 손을 와락 마주 쥐자, 놀랐는지 흠칫 손을 떠는 그가 느껴졌다. 깍지마저 끼고 단단히 움켜쥐었더니 역시 뿌리치지는 않는 그다. 그렇게 손을 맞잡은 채로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인환을 안아 들지 못해 조금 불만인 듯했지만, 그도 얌전히 인환을 따라왔다. 마치 강아지 같았다.
“……손 놔. 세수할 건데 욕실까지 따라 들어오려고?”
침실에 들어서서도 마주 움켜쥐어오는 강한 악력에 가벼운 타박을 주었다. 막무가내 강아지였다. 손을 놓아주기는커녕 더 힘주어 움켜쥐더니 무표정인 채로 욕실까지 따라 들어오지 않는가. 좀 어이가 없어서 살풋 웃음마저 물고 그를 바라보니, 그제야 손을 놓곤 어깨에 걸쳐진 나이트가운을 벗기더니 욕조 가에 인환을 앉혔다.
“……세수한다니까…….”
재차 떨어진 타박은 아랑곳없이 인환 대신 세면대로 다가간 그가 가져온 것은 전기면도기와 더운물에 적신 타월이었다.
윙윙윙윙. 드넓은 욕실에 울리는 면도기 모터 소리가 생경하게 들렸다. 자신이 아닌 타인의 손길로 면도를 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는 인환의 턱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인중과 양쪽 뺨, 턱 언저리를 오가며 꼼꼼하게 면도를 시키고 있었다. 한나절 만에 턱이 파르스름해지는 그에 비해 3일은 족히 지나야 그나마 수염의 흔적이 보이는 인환이었지만, 침상에 드러누워 있던 지난 열흘 동안 전혀 손을 대지 않았으니, 조금쯤은 사내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가 보기에. 그러니 이리 직접 면도까지 해주는지도.
완벽한 헤테로섹슈얼인 그에 대한 게이로서의 자격지심 때문이었을까? 10여 년 전인 과거나, 재회한 현재나 사내 티를 내는 자신에 있어서만큼은 무의식적으로 신경을 썼던 것 같다. 혹여 수염 자국이 나타날세라 면도만큼은 부지런히 하고 있었으니까. 이 정도로 뺨이 까끌거릴 때까지 수염이 자라도록 방치하다 못해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지 싶다. 그를 만나 사랑하고 고통받았던 지난 14년 이래로. 그만큼 이번 강간의 대미지가 커서인 걸까? 아니면 그의 숨겨진 비밀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인 걸까? 아마도 진짜 원인은 후자일 테지. 인환 자신을 사랑하는 그. 14년 내내 자신을 사랑해왔다는 그. 자신이 남자이고 게이인 것은 그 사랑을 죽이는 데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고 하지. 참으로 간사한 무의식의 작용이 아닐 수 없었다.
윙윙윙윙. 제법 요란스레 울리는 진동음에 섞여 그가 내뱉는 숨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비누 냄새에 섞인 그의 익숙한 체향이 그의 숨결을 따라 인환의 온 신경망으로 촉촉이 스며들고 있었다. 턱과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그의 부드럽고도 조심스러운 손길은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까지 느껴졌다. 감당키 버거운 고통과 슬픔에 짓눌린 극진한 애정이 알알이 배어 있는 손길이었다. 나쁜 놈. 사기꾼 자식. 불쌍한 새끼. 사랑해서 미칠 것 같은 놈.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한 감정의 일렁임에 또 왈칵 목이 메었다.
“……울지 마.”
윙윙윙. 턱과 목 사이를 밀리느라 위로 한껏 치켜든 고개가 무색하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명령이 떨어진다. 울고 싶은 건 또 어찌 알았는지, 역시 귀신이 아닐 수 없다. 눈치만 빠른 나쁜 새끼.
“……울지 마. 기운 빠지니까.”
사각 지대까지 꼼꼼하게 다 깎았는지 시야가 정면의 각도로 돌아왔다. 여전히 턱 끝을 움켜쥔 채로 그가 재차 아니꼬운 명령을 던졌다. 심연처럼 깊고 검은 시선이 인환의 것을 꽁꽁 묶고 있었다. 상할 대로 상한 초췌한 얼굴만 아니었음 잔뜩 욕이라도 퍼부어줄 텐데. 나쁜 놈. 욕도 마음대로 못 하게 왜 이렇게 아파하는 거야. 원망도 실컷 못 하게 왜 이렇게 슬퍼하는 거야. 이거야말로 적반하장이라는 게 아닌가?
“……욕해. 욕하고 싶으면 실컷 욕해도 돼. 평생 욕하고 원망해도 다 들어줄 테니까. 대신 울지만 마.”
귀신. 진짜 나쁜 귀신 놈. 남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오기라도 했나. 아님 나 몰래 산에서 도를 닦기라도 했나.
“……마당쇠가 따로 없네. 진짜 닭살이다, 뭐.”
“…….”
“……나쁜 놈. 독한 놈…….”
“…….”
“……진짜루 독종…… 나한테 이런 거 하고 싶어서 그동안 어떻게 참았대……?”
“…….”
“……나쁜 놈, 나쁜 놈…… 세상에서 제일로 나쁜 새끼…… 사기꾼…….”
뜨거운 물기가 느껴지는 눈을 한껏 치켜뜨고 노려보는데 턱 언저리로 젖은 타월이 다가들었다. 면도만큼 꼼꼼한 뒤처리가 얼굴을 이리저리 더듬었다. 더 이상 세수가 필요 없게끔. 깊은 시선은 정성스러운 뒤처리 내내 여전히 인환의 눈을 꽁꽁 사로잡고 있었다. 바닥으로 타월이 내팽개쳐지는가 싶더니 양팔을 움켜쥔 그의 손길이 인환을 일으켜 세웠다. 품 안에 와락 껴안은 채 한참을 있더니 조금 떨어트리곤 다시금 인환의 턱을 들어 올려 시선을 맞춰왔다. 쪽. 쪽쪽. 쪼옥. 개운해진 얼굴 곳곳으로 그의 진한 립 키스들이 떨어졌다. 원수처럼 노려보는 인환이나 부리부리하게 치켜뜬 눈으로 시선을 맞춘 채 립 키스를 해대는 그나 제정신은 아니지 싶었다. 반쯤 미쳤거나 완전히 미쳤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사랑‘에’ 미친 건지, 사랑 ‘때문에’ 미친 건지, 그 또한 아리송하리라.
“……입 벌려봐.”
입술을 마주 댄 채로 그가 명령했다. 그가 밉고 아니꼬우면서도 즉시로 입술을 열어주는 자신도 그만큼이나 팔불출 등신이지 싶다. 입술이 열리자마자 그의 뜨거운 혀가 약탈자마냥 안으로 파고들어왔다. 맹렬히 휘감는 키스와 함께 인환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그의 양팔이 조여지자 서로의 하반신마저 빈틈없이 맞물렸다. 등허리와 엉덩이를 더듬는 그의 두 손바닥마냥 연인의 키스는 불길처럼 뜨거웠다. 그럼에도 그에게서 성적인 흥분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어쩐지 납득이 갔다. 평소처럼 정력적인 그라면 이미 발기하고도 남음직한 접촉이건만, 그의 하반신은 인환과 마찬가지로 미동조차 없었다. 섣불리 성욕을 일으키기엔 그가 느끼고 있을 고통의 강도는 여전히 지독한 것 같았다. 피크까지 치솟았던 미움과 원망의 감정은 가슴이 찢기는 듯한 연민과 사랑에 마주쳐 산산이 부서질 수밖에 없었다. 나쁜 놈. 한계까지 호흡이 몰린 끝에 그가 입술을 떼자마자, 한숨처럼 튀어나온 욕설엔 힘이 없었다. 아니, 그건 이미 욕설이 아닌 애틋한 탄식이었다.
“그래…….”
“……나쁜 놈. 나쁜 놈. 나쁜 놈…….”
“그래, 그래.”
“……괜찮아?”
“…….”
인환 이상으로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가 걱정스러워 탄식은 이내 초조한 물음으로 바뀌고 만다. 여간해선 숨길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그를 아는 까닭이었다. 대답 대신 그는 인환을 안심시키듯 한동안 가만히 인환의 등줄기를 쓸어내리기만 했다. 괜찮아, 괜찮아. 눈물겹도록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입술 대신 속삭이고 있었다.
“……침대로 가서 누워. 나 집에 돌아오고도 계속 못 잤다며?”
“…….”
“……안 아프게 되면 그때 가서 진짜로 실컷 욕해줄 거니까 얼른.”
“…….”
“자꾸 고집 부릴래? 지금보다 더 미워할 거다?”
“…….”
“나도 졸린단 말야.”
괜찮아, 괜찮아. 애무를 대신한 대꾸만 연신 되풀이하던 그가 그제야 움직임을 보였다. 포옹이 풀리고 잠시 살피듯 인환의 눈을 들여다보더니 미처 제지할 틈도 없이 인환을 번쩍 안아 올렸다. 또 공주님 안기였다. 버둥거리면 그를 더 힘들게 할까 봐 그저 혀를 차는 게 반항의 고작이었다. 인환을 안은 채 침대로 다가간 그가 조심조심 인환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인환을 바로 눕히는 대신 그가 다음에 취한 행동은 침대 머리를 30도쯤 들어 올린 일이었다. 헤드쿠션 위에 베개까지 괴고 기대앉더니 인환을 뒤로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의 무릎 틈바구니에 낀 채 기대듯 앉긴 모양새였다. 앞으로 뻗어 나온 그의 양팔은 어느새 인환의 허리에 단단히 감겨 있었다. 등에 빈틈없이 겹쳐진 피부를 통해 그의 따스한 체온이 전해졌다. 그가 얼굴을 묻은 왼쪽 어깨로 쏟아져 내리는 것도 그의 따스한 숨결이었다. 절대로 잠을 잘 태세가 아니었다. 실망했지만, 성숙할 대로 성숙한 거구의 남자를 어린애 다루듯 억지로 재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별로 졸리지 않다는 거 알아. 나나 재우고 싶은 거겠지. 위도 안 좋은데 식사 끝에 바로 누우면 속이 불편해질 거다. 기운은 없을 테니 일단 이러고 있자.”
귀신. 속삭이듯 던져진 그의 변명에 익숙한 푸념만 뇌까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그가 지닌 기왕의 재주들에 독심술까지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네가 실컷 욕하고 원망할 수 있도록 금방 회복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너만 괜찮으면 나도 괜찮아지니까.”
재차 덧붙은 조용한 변명에 또 목이 꽉 메어왔다. 양팔을 교차하듯 인환의 허리를 안고 있던 그의 손가락을 가만히 어루만져보았다. 조심스러운 터치로 시작해서 손장난을 치듯 이리저리 잡아당기기까지 하며 터치가 과감해지자 뒷덜미에 닿은 그의 입가가 조금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흐릿한 미소였다. 쪽 하는 키스 소리와 함께 그가 턱 끝으로 부비는지, 따끔거리는 자극이 뒷덜미에 전해졌다. 아프기보다는 간지러웠다. 대답처럼 부르르 진저리를 치자 그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떨어졌다. 기쁜 듯도 하고 슬픈 듯도 한, 여전히 심장을 저미는 애달픈 소리였다. 그의 웃음도 손놀림도 체온도, 하다못해 내뱉는 숨결 하나하나조차 절절한 애정이 아닌 것이 없었다. 사랑이 아닌 것이 없었다. 고백이 아닌 것이 없었다.
“……어, 언제부터였어?”
힘겹게 토해진 물음은 복받치는 설움과 회한을 억누르기 위한 수단이었다.
“……언제부터였어? 나 사랑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거?”
“…….”
대꾸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 역시 감정이 복받치는지, 뒷목덜미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입술에서 전해지는 숨결은 한동안 꽤나 거칠게 느껴졌다. 자신을 죄고 있는 팔 힘도 아픔이 느껴질 지경으로 강해져 있었다.
“……포천…… 이었나? 석주 씨 설치미술전 도와주러 갔을 때지. 네게 키스하는 거 보고 꼭지 돌아서 독사 새끼 두들겨 팼을 때.”
마지못해 힘없이 떨어진 대꾸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의 대꾸를 따라 기억을 더듬다가 문득 까마득한 느낌에 숨을 헐떡이지 않을 수 없었다. 1990년이었다. 자신의 기억력에 이상이 없다면 1990년 여름의 일. 만나고 거의 1년 만에 자신에 대한 사랑을 자각했다니. 따져보니 무려 13년 전이었다. 그때로부터 헤어지기까지는 햇수로 4년. 4년 동안이나 그는 자신을 감쪽같이 속인 거였다. 지독해. 지독한 놈. 힘껏 입술을 깨물어보지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도저히 막을 수는 없었다.
“……응, 지독하지. 지독한 놈이지, 아무렴…….”
“…….”
“그나마도 자각이 그때였을 뿐이지, 사랑하기 시작한 건 그 이전부터였다.”
“……?”
“……내게 해준 송충이 얘기 기억나나?”
“…….”
“……너를 처음 만난 해…… 89년…… 가을 무렵이었지. 안기부에 끌려갔다가 화풀이하듯 널 강간하고…… 폐렴으로 기절했다가 병원에서 깨어났던가. 넌 짐승 같은 짓을 한 나를 너무나 자연스레 용서해주었다. 마치 그러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그러면서 해준 얘기가 송충이 얘기였어. 허리 잘린 송충이 얘기. 아마 기억이 날 거다.”
“…….”
기억나다마다. 까마득히 어린 사춘기 시절의 체험이었으나, 자신의 인생에 한 획을 그은 일대 사건이었으니 절대로 잊어버릴 일은 없을 터였다.
“……그때부터였다, 네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아니, 널 사랑하기 시작한 거였지, 그때부터. 물론 자각은 그러고도 1년이나 더 기다려야 했지만.”
“…….”
“……곧 알 수 있었다. 만나고 석 달이 채 안 돼 널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걸.”
점입가경이었다. 진짜 독한 놈. 나쁜 놈. 진짜진짜 나쁜 놈의 새끼…….
“……응, 알아. 진짜 나쁜 놈이라니까…….”
힘없이 덧붙이는 말끝엔 자조마저 어려 있었다.
“……어쩌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였는지도 모르지. 아니, 틀림없이 그랬을 거다. 틀림없이…… 널 처음 본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을 거야. 알 수가 있나…… 바보 천치 얼간이에 세상 다시없을 등신이었으니…… 자각도 한참이나 늦었지. ……뿐이냐? 늦은 것도 모자라 알아먹고 나서도 기를 쓰고 내팽개치려 한 개새끼였는걸.”
“…….”
“……그게 제 운명인지도 모르고…… 제 전부인지도 모르고…….”
“…….”
“……잔뜩 멋 부린 명품 옷들에…… 잘 먹고 예쁘게 자라서 뽀얀 살결에, 사랑스러운 웃음에……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는 어눌한 말버릇은 또…… 천사같이 착하기만 한 성미까지…… 어디 하나 반하지 않을 곳이 없어서…… 사랑스러워서…… 좋아서 환장했으면서도…… 병신 같은 새끼가…….”
“…….”
“……잊을 수 있을 줄 알았지……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자만했지…… 너 없이도…… 언젠간 태연히 숨 쉴 수 있을 거라고…… 널 만나기 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죽어갈 뿐인데…… 내 것이 죽어가니 나도 따라서 죽어갔던 건데…… 차마 몰랐지…… 알 수가 없었지, 등신 같은 새끼라. 천하의 거만하고 못된 독종 새끼라…….”
“…….”
짜부라트릴 듯 인환의 몸을 조이고 있는 팔은 거의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팔뿐만이 아니었다. 인환에게 맞붙어 있는 그의 몸뚱이 어느 하나 전율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과거의 어느 한때를 반추하는 모양이었다. 혹은 과거의 시간 전부를 통째로 반추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쳐가는 고통과 슬픔과 기쁨의 기억들을. 그리고 회한들을. 맞붙인 몸뚱이를 통해 생생히 전해지는 그의 고통에 인환 또한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향한 발작적인 격렬한 원망은 또다시 눈 녹듯 순식간에 스러질 뿐이었다. 그가 무언가를 할 때마다 원망과 미움과 연민과 애정이 시소처럼 널을 뛰는 감정은 이젠 아예 습관이 될 모양이었다.
“……또…… 똑같네…….”
흐느낌과 다름없는 대꾸가 흘러나왔다. 복받친 설움으로 잔뜩 쉬어서 자신이 내는 목소리 같지가 않았다.
“……나, 나랑 똑같아…… 똑같이 14년 동안이나 사랑해왔던 거네…… 나처럼…….”
“…….”
“……이, 이런 걸 피장파장이라고 하나? 아, 아님 이하동문? 하하…….”
“……울지 마…….”
“……나쁜…….”
“……울지 마라, 제발…… 제발…….”
“……진짜 나쁜 놈…… 나쁜 놈…… 사기꾼…….”
“인환아…….”
“…….”
억눌린 흐느낌이 흐엉흐엉 통곡으로 바뀌는 데는 채 몇 분이 걸리지 않았다. 다 나쁜 놈 때문이었다. 사기꾼 새끼 때문이었다. 사기꾼 새끼 주제에 독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연인 새끼 덕분이었다. 자신더런 울지 말라고 고까운 명령이나 찍찍 일갈하는 주제에 등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숨 죽여 오열하고 있는 나쁜 놈의 독종 연인 새끼 때문이었다.
어떡하지? 또 눈꺼풀이 개구리처럼 부어오르겠구나. 망할. 불공평해. 예쁜 연인은 눈꺼풀이 부어도 도리어 없던 쌍꺼풀까지 생기는데…….
중언부언 얼토당토않은 푸념을 뇌까리며 마음껏 울어댔다. 간밤처럼 그의 품에 안겨 통곡하고 있지만 간밤만큼 찢어지도록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다. 아프긴 아프되 무언가 후련한 기분도 슬몃 드는 울음이었다. 밖으로 뿜어내는 울음의 양에 비례해서 고통도 줄어드는 게 아닐까 싶었다. 살풀이 같았다. 그렇다면 굳이 참을 필요는 없을 거였다. 마냥 울다 보면 언젠간 더 이상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날도 오지 않을까 싶었다. 그랬다. 자신도, 그도 더 많이 울 필요가 있었다. 치료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서로 상처가 너무나 커서 치료가 거의 불가능할 것 같지만, 어떻게든 시도라도 해봐야 할 거였다. 정말로 몸 안의 수분이란 수분은 다 빠져나갈 때까지. 눈시울이 짓물러 터질 때까지.
“……으…… 으흑…… 윽…….”
혼곤한 잠을 깨운 것은 어딘가로부터 들려오는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였다. 비명 소리 같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의식을 차리기엔 지극히 흐릿한 신음 소리이기도 했다.
“……흑…… 윽…… 으헉……! 그만……! 하지 마……! 으윽! 큭! 으으…….”
까무룩 나락으로 떨어지려던 의식이 재차 들려온 단말마의 신음에 문득 소스라쳤다. 전율하듯 번쩍 뜬 시야로 가득 밟혀든 것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밤인 모양이었다. 시간은 가늠할 수 없었다.
몇 번 눈을 깜빡이는 동안, 실컷 통곡을 거듭하다 잠든 아침나절의 기억이 건져졌다. 그대로 서너 시간 혼절하듯 잠에 빠졌다가, 회사 일로 들이닥친 윤 실장 일행에 의해 깨워져 늦은 점심을 먹고, 그가 서재에서 결재 서류에 사인을 하는 사이 정원에서 이른 겨울 공기를 마신 기억도 건져졌다. 두어 시간 만에 윤 실장 일행이 돌아가고 연인의 손에 침실로 끌려들어간 기억도, 그대로 품에 껴안긴 채 곯아떨어진 마지막 기억도 났다. 확실히 연인은 지독히도 수면 부족 상태였던 모양이었다. 사전에 낮잠이라곤 없는 평소의 모습이 무색하게 그는 침대에 눕자마자 다시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허기진 잠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든다는 건 그만큼 긴장이 풀려서일 것이다. 점차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잠든 그의 얼굴을 한동안 들여다본 게 잠들기 직전의 마지막 기억이고 보면 자신 또한 한가지였던 모양이다. 따라쟁이라 그를 비웃을 계제가 아니었다. 하긴 잠든 연인의 품에 안겨 누웠으니, 함께 잠드는 외에 달리 할 일이 있을 턱도 없긴 했지만.
“……흐으윽! 아니! 앗! 크윽! 안 돼……! 흑……!”
옆에서 문득 토해진 신음성에 비몽사몽 기억을 반추하던 인환이 비로소 소스라쳤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깨어난 원인은 저것이었다.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섬뜩한 귀곡성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재빨리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침대 머리맡을 더듬어 스탠드를 켰다.
“……위야……?!”
등을 보인 모습으로 모로 돌아누워 있는 그가 보였다. 상체를 약간 웅크린 자세인 그는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낯빛의 프로필이 보였다. 이마며 콧등이며 식은땀 범벅이었다. 스탠드 불빛에 밝아진 실내건만 그는 깨어날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깨우는 게 좋을까, 아니면 악몽을 몰아내는 수준에서 진정시키는 게 좋을까. 고민의 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따라쟁이 팔불출답게 어느새 부들거리는 자신의 두 손으로 그의 팔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이, 일어나, 위야! 일어나!!!”
조심스러웠던 손길은 순식간에 거친 드잡이로 변했다. 흔들고 불러도 좀처럼 깨어나지 않는 연인에 와락 겁이 났다. 심장이 아프도록 세동을 거듭했다. 악몽을 꾸는 게 아니라 어딘가 아픈 건지도 몰랐다. 혼수상태일지도 몰랐다.
“으으윽……! 안…… 안 돼! 흑! 죽어…… 죽어버렸!!!”
“위야!!! 위야, 일어나!!! 일어나봐!!! 위야!!!”
“윽, 윽, 흑! 으악!!!”
“위야!!!”
“죽어어어어…… 엇!!……!”
찢어지는 것 같은 비명 소리와 함께 그가 전광석화처럼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갑작스러운 기세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인환의 몸이 뒤로 떠밀린 것도 당연한 노릇이었다. 엉덩방아를 찧다시피 뒤로 넘어졌지만 머리털이 쭈뼛 일어설 지경으로 겁에 질렸던 넋은 조금이나마 진정이 됐다. 핏발이 선 채 휘둥그레진 눈을 한 연인이 잽싸게 팔을 뻗더니 넘어진 인환을 일으켜 세운 때문이었다. 넘어질 때만큼이나 창졸간의 일이었다. 제대로 의식을 차렸을 때는 인환은 온몸이 짜부라질 지경으로 연인의 품에 끌어안겨 있었다. 전력 질주 끝의 육상 선수마냥 사나운 숨결을 토해내며 연인은 여전히 사시나무 떨듯 떨어댔다. 양팔로 인환의 상체를 친친 감고 있다 못해 양쪽 다리까지 인환의 하반신을 친친 감은 채 거세게 옥죄고 있었다. 격렬하고 혼란스러운 몸짓을 통해 그가 얼마나 지독한 악몽을 꾸었는지 얼핏 알 것 같았다. 그나마 어디가 아픈 건 아닌 모양이어서 안쓰러운 와중에도 가슴을 쓸어내린 인환이었다. 얼굴만큼이나 식은땀 범벅인 연인의 몸은 축축하다 못해 비라도 맞은 듯 푹 젖어 있었다. 스웨터와 치노 팬츠의 실내복 차림으로 잠든 것 같았는데, 손끝에 만져지는 것은 매끈한 알몸이었다. 알몸으로 자는 걸 편안해하는 연인이니 아마도 자다가 벗어 던졌을 것이다.
“……나, 나쁜 꿈 꿨어? 놀랐어…… 어디 아픈 줄 알고…….”
마주 안고 조심조심 그의 등을 쓰다듬자 그가 대답하듯 격렬하게 몸서리를 쳤다.
“죽일 거야! 다 죽여버릴 거야! 다 찢어발겨버릴 거야……!”
원한에 사무친 음산한 저주가 비명처럼 토해졌다. 상대가 자신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인환은 본능적으로 들이닥친 공포감에 저절로 모골이 송연해졌다. 상처받은 야수의 포효였다. 지독하게 상처 입은 나머지 네 편 내 편 할 것 없이 다 파괴해버릴 것만 같은 막무가내의 증오요, 저주였다.
“갈가리 찢어발겨서 씹어 먹어줄 테다! 뼈까지 아득아득, 피 한 방울 남겨주지 않을 테다아아악!!!!!”
거듭된 저주의 끝은 다시 비명이었다. 몸부림이었다. 통곡이었다. 조여진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것처럼 아팠다. 그의 거친 포옹이 인정사정없이 들이닥친 때문이었다. 물론 몸의 아픔보다 더한 것은 마음의 아픔이었다. 인환을 끌어안은 채로 이리저리 몸뚱이를 뒤트는 그의 몸짓은 흡사 펄펄 끓는 기름통에 빠진 야수의 몸부림 그것이었다. 제대로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끔찍한 악몽 속에 있었다. 지옥 속에 있었다.
“죽어!!! 죽어!!! 죽어어엇!!!!!”
“……위야…….”
“죽어버려어어!!!!!”
“……위야, 제발…….”
“죽일 거야!!! 네놈들!!! 손대지 마!!! 그에게 손대지 마!!! 죽인다!!! 다 죽여버린다!!! 니놈 새끼들 죄다 죽여버릴 거야!!! 니 새끼들!!! 씨발, 니 새끼들!!! 아아악!!!!!!”
“위야, 괜찮아…… 나 괜찮아…… 진짜 괜찮아, 진짜야…….”
어떡해…… 하느님,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죽어어어어어!!!!! 씨발, 죽어어어어어!!!!!!!!”
자각은 순간이었다. 자연스레 알아졌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괜찮다는 입바른 변명도 더 이상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차마 흘릴 수 없었다. 그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얼굴을 들이박고 있는 오른편 어깨가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습기로 금세 축축해졌다. 온몸이 요동치듯 경련하고 있었다. 지옥 속에 있는 연인 때문인지, 자신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흐억, 흐억. 흐아악. 귀청으로 피부로 코끝으로…… 온 넋으로 파고드는 괴성 또한 사람의 것인지 짐승의 것인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지옥성이 땅 끝까지 진동했다. 끔찍했다. 연인의 저주대로 죄다 죽어주는 게 차라리 구원 같았다.
문득 소스라쳤다. 익숙한 온기를 찾아 반사적으로 침대 옆을 더듬으니 그가 없었다. 얄팍하게 남아 있던 수면기는 그것으로 단숨에 날아갔다. 인환이 잠들기 직전까지도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던 연인이었다. 이를 갈아붙이고, 사지를 벌벌 떨고, 소리 없이 눈물만 줄줄 흘리던 연인이었다. 그러면서도 인환을 품어 안은 팔에서 필사적으로 힘을 풀지 않았었다. 마치 인환의 몸뚱이가 구명줄이라도 되는 양. 인환 또한 그를 안아주는 외엔 달리 위로할 방법이 없어 그 이상으로 필사적이었었다. 그렇게 서로를 부여안은 채 흐느끼며 떨며 잠들었었다.
파노라마처럼 단숨에 펼쳐지는 간밤의 기억에 쫓기듯 침실을 빠져나왔다. 연인이 걱정돼 초조한 건지, 자신을 안아주는 연인의 팔이 없어 초조한 건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저 무조건 연인의 얼굴을 봐야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둑어둑했던 침실을 벗어나자마자 눈부신 빛이 시야를 점령했다. 날이 밝고도 한참이 지난 듯했다. 거실은 고요했다. 주방에서 식기 세척기 돌아가는 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온다는 점만 빼면 인기척이라곤 잡히지 않았다.
“……위야…….”
저도 모르게 그를 부르며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마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어머, 선생님! 일어나셨어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선생님?”
현관문 안으로 들어서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이들은 빨래바구니를 양손에 든 메이드 아가씨 미스 원과 미스 정이었다.
“……위는…… 사장님은…….”
“안녕히 주무셨어요, 선생님? 사장님께선 회사에서 급한 연락이 와 출근하셨답니다. 점심때쯤엔 들어오신다고 말씀 전하라 하셨답니다.”
젊은 아가씨들의 아침 인사를 씹은 자신조차 채 자각하지 못하고 불쑥 튀어나온 물음에 대한 답은 주방 쪽에서 떨어졌다. 파출부 아주머니였다. 생기 넘치는 세 여자들의 등장과 ‘출근’이라는 단어가 주는 일상성이 인환의 이성을 얼추 찾아주었다. 불안해할 일은 없는 것 같았다. 출근을 할 정도면 적어도 어젯밤처럼 지옥 같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진 않다는 증거였다.
“……선생님?”
신음 같은 한숨을 길게 토하며 살짝 어깨를 떨자, 가까이 다가온 아주머니가 걱정스러운 부름을 던졌다.
“……괜찮으세요? 안색이 여전히 안 좋으세요.”
“……괜찮습니다. 위야…… 아니, 사장님은 언제 나가셨지요?”
“9시쯤에 윤 실장님이 와서 모셔가셨답니다.”
“……밥은 좀 먹고요?”
“예, 선생님. 전처럼 많이 드시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제에 비하면 꽤 드시고 나가셨어요. 안색도 한결 나아지셨구요. 사장님께선 오히려 선생님이 걱정이라고 아침 식사 꼭 드시게 하라며 신신당부하셨는걸요.”
“…….”
“씻고 나오시겠어요? 아침상 차려드릴게요.”
“…….”
“선생님?”
“…….”
평온한 아침이었다. 간밤의 고통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현실과 기억의 괴리가 주는 위화감이 꽤나 커서 인환은 한동안 어리둥절한 채 아주머니를 건성으로 상대하고 있었다. 물질을 하는 중이었던 듯 노란 고무장갑을 낀 아주머니의 손이며 아침볕이 가득인 거실 풍경, 그리고 세탁실로 사라져버린 메이드 아가씨들의 자취까지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시선은 결국 자신의 흐트러진 파자마 차림으로까지 도달했고, 그제야 인환은 제대로 정신을 차렸다.
“……어? 아, 예……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주머니.”
황망히 대꾸를 흘리곤 떠밀리듯 침실로 되돌아왔다. 콘솔 경대에 얼핏 비춰 본 몰골은 예상대로 가관이었다. 머리는 까치집에 눈두덩은 퉁퉁 붓고, 잔뜩 구겨진 파자마는 상의 단추가 두 개는 풀려 있었다. 집안 식구들에게 그간 워낙 못 볼 꼴을 많이 보여준 터라 더는 창피하단 생각조차 들지 않긴 했지만.
……괜찮은 걸까? 벌써 출근해도 될 정도로 그는 회복한 걸까? 어젯밤엔 그렇게나 아파했으면서…….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던 근심이었다. 물론 괜찮을 리는 없었다. 자신이 준 상처였다. 그의 사랑을 거의 자각하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은 그녀와 기꺼이 거래를 했다. 어젯밤은 물론이고 지난 열흘 남짓한 지옥의 시간은 그 대가이리라. 막연히 상상한 것과 실제로 확인을 하는 것은 그리 극단적일 정도로 차이가 있었다. 그는 인환 자신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상처 입었고, 또한 고통받고 있었다. 그것이 고스란히 인환 자신의 것이 돼버린 것 또한 당연한 수순이었다. 더 이상 아낄 것도, 더럽혀질 것도 없는 몸뚱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보았다. 아니, 더 이상 아끼지 않고 더럽힐 자격이 자신에겐 없는 것 같았다. 안 될 것이다. 더 이상은. 더 이상 자신의 몸을 함부로 훼손하는 일은 이젠 결코 할 수 없으리라.
“……출근했다구요? 그 몸을 해가지고 벌써요?!!!”
식당에서 막 아침 식사를 끝낼 무렵이었다. 거실로부터 들려온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인환은 소스라쳐 일어났다. 미처 예상 못 한 상대였다. 아니, 지난 열흘 남짓은 물론, 어제 아침만 해도 얼핏 들었던 목소리이기에 예상을 하지 못한 자신이 더 이상스러운 일이었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서 거실 쪽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자니 활짝 열린 식당 문틈으로 익숙한 덩치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게 보였다. 방으로 도망가야 하나, 아님 인사라도 건네야 하나…… 황망한 고민만 흘리는 사이, 곧 문가에 도달한 덩치의 시선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언뜻 보면 연인과 착각할 만큼 꼭 닮은 잘생긴 청년이었다. 놀라운 유전자의 법칙이라고, 볼 때마다 신기해 감탄을 불러일으키곤 하는, 연인과 흡사한 커다란 키에 엄청난 덩치였다. 그럼에도 연인의 깊은 눈빛이라거나 진중한 성격을 대변하는 어두운 무표정과는 확연히 다른 가벼운 분위기가 뭔가 안도하게끔 만드는 청년이기도 했다. 언뜻 모습은 비슷해도 극과 극처럼 다른 존재인 것을. 저 청년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연인을 사랑해왔던 자신에 적이 안심하는 것이다. 한편으론 회한에 젖기도 한다. 만약 그 먼 옛날, 촌스러운 교복 차림의 저 청년을 연인보다 먼저 보았더라면 자신은 그렇게까지 지독한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수려한 외모에만 잠시 혹했다가는 그저 그런 타인으로 자연스레 멀어졌을 것을. 연인과 조우하기 전, 숱하게 마주쳤던 어설픈 짝사랑의 상대들에게 늘 그래왔듯이. 만약 그랬더라면 인환 자신은 물론 연인 또한 그토록 힘든 시간의 터널을 지나오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서로 모르는 타인으로 영원히 엇갈린 채, 각자 평온한 삶을 누리게 되었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말이다.
“……어, 어?! 당신?!!!”
찌푸린 미간이 채 제자리를 찾기도 전, 당혹스러운 빛이 청년의 검푸른 동공을 스쳐가는 게 보였다. 인환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놀란 것 같았다. 휘둥그레진 시선으로 청년은 한동안 인환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인사를 해야 할지, 아니면 그대로 도망칠지에 관해 여전히 해답을 찾지 못해 황망해 있던 인환 역시 한동안 말을 뱉을 수 없었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해 인사말을 건네려는 순간 청년이 홱 몸을 돌리는 게 보였다.
“나, 나중에 뵙죠…….”
들릴 듯 말 듯, 어눌한 목소리였다. 문가에서 덩치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덩치만큼 쿵쾅거리는 커다란 발소리도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도련님? 벌써 가시게요?”
“……혀, 형도 없는데요, 뭘…….”
여전히 당혹한 목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얼떨떨했다. 자신에 대한 아무런 힐난 없이 청년이 얌전히 사라졌다는 게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청년의 태도도, 표정도 인환의 예상치를 완전히 빗나가버려 뭐라 표현하기 힘든 이상야릇한 기분을 주었다. 청년과 마주하게 되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극심하게 상처 입는 게 다였었는데. 게다가…… 청년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나, 나중에 뵙죠……’라고. 식당엔 자신 혼자뿐이었으니 분명 자신에게 한 말이 맞았다. 도저히 믿기 힘들었지만, 어조조차 평상시의 힐난조가 아니었다. 이상하긴 해도 그건 나름대로 공손한 인사말이었다. 더구나 당시엔 미처 자각하지 못했지만, 등을 보이며 사라지던 청년의 뒷덜미며 귓불 끝은 어쩐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여우에 홀린 기분이었다.
전화가 걸려온 건 청년이 사라진 지 5분이 채 안 지난 시점이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아주머니가 내려준 녹즙을 억지로 마시고 있는데 미스 정이 다가와 무선 전화기를 내밀었다.
“사장님이세요, 선생님.”
심장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걱정과 불안과 설렘이 동시에 가슴속에 들이닥쳐, 수화기를 건네받는 손이 가늘게 떨리기까지 했다. 언뜻 평온해 보이는 일상이지만, 실은 평온과는 거리가 먼 연인이었다. 자신이었다.
“……왜, 왜? 괜찮아?”
[괜찮은가?]
“…….”
[…….]
거의 동시에 비슷한 물음이 수화기를 통해 오갔다. 거의 비슷하게 불안정한 목소리였다. 그게 또 기가 막히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서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것도 같았다.
[……후우…… 괜찮은 거지? 휘 녀석이 들렀다며? 녀석이 또 뭐라고 하진 않았어?]
마침내 억눌린 한숨과 함께 연인이 재차 되풀이했다. 여위고 초췌할 얼굴이 눈에 선했다.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을 깊은 눈시울도 선했다. 광기 어린 고통에 몸부림치던 간밤의 모습도 순간 시야를 스치고 지나갔다. 심장이 옥죄었다.
“……아니. 그냥 인사만 하고 갔어. 너 있는 줄 알고 왔다가 그냥 간 거야.”
[인사만 하고 갔다고?]
“……응, 진짜로. 처음으로 공손하게 인사해줘서 기뻤는걸.”
[…….]
“……넌 괜찮아? 벌써 출근해도 돼?”
[아아. 본사에서 급한 연락이 와서 잠깐 나올 수밖에 없었어. 그래도 곧 들어가니까…….]
“……무슨 나쁜 일이 생긴 건 아니고?”
[나쁜 일은……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야. 이젠 다 해결되기도 했고.]
“……응.”
[밥은 잘 먹었지?]
“응.”
[잠은?]
“어?”
[요새 밥 먹으면 곧바로 졸기 바빴잖아. 잠은 안 와?]
“응, 별로……. 오늘은 기운도 나서 좀 이따가 운동도 해보려구.”
[다행이다. 수영장에 더운물 채우라고 할까?]
“어? 아니, 수영은 그렇고 그냥 산보나 좀 할 거야.”
[……그래. 아직 수영은 무리겠군. 몸도 덜 회복됐는데 무리하다 감기라도 들면 낭패니까.]
“……응…….”
육체적으로는 거의 회복이 됐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그가 연달아 토해내는 대화의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그의 자제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감지가 되는 초조와 불안만큼 자신의 섣부른 장담은 먹혀들지 않을 터였다. 당분간은 그의 인환 자신에 대한 불안과 염려를 잠재울 방법 따윈 쉬이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산책은 일단 정원에서만 해. 새로 뽑은 경호원들 아직 소개시켜주지 않아서 서먹서먹할 테니. 나도 곧 집에 들어가니까 답답하면 내가 데리고 나가줄게.]
무뚝뚝한 명령조에도 불구하고 초조하게 인환의 기분을 살피는 기색이 역력했다. 불안해서 자신을 밖에 내보내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도 않은, 그의 복잡한 심사가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그 저변에 깔린 절절한 애정에 목이 메기도 하고, 새삼 이토록 연인에게 근심거리가 되는 스스로에 화가 나기도 해서 한동안 대꾸를 하기가 힘들었다.
[……인환아?]
“…….”
[……인환아, 화났어? 나 곧 들어가니까 답답하더라도 조금만…….]
“……화, 화나기는! 답답하지도 않아. 그냥 너 들어올 때까지 기다릴게. 같이 산책하면 더 좋지 뭘.”
[…….]
불안으로 급격하게 가빠졌던 그의 숨소리가 차츰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그게 또 가슴 아파, 어느새 눈시울 가득 눈물이 고였다. 깜빡이는 즉시 그대로 볼을 타고 흘러내릴 기세여서 한동안 깊게 숨을 골라야 했다.
[……곧 들어갈게. 기다려.]
“……어…….”
[……금방 들어가. 미안…….]
“…….”
[……보고 싶다…….]
“…….”
[……미치겠군…… 전화라도 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
마지막 말은 거의 이를 가는 듯한 나지막한 한탄이었다. 고통과 그리움과 불안으로 점철된 절절한 어조에,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그…… 러지 마…… 불안해하지 마, 위야. 나 얌전히 너만 기다리고 있을 거니깐…….”
[…….]
“……이젠 알아, 내 몸이 네 거라는 거. 네 거라는 거 확실히 아니까 예전처럼 함부로 다루지 않아. 많이 조심할 거야, 많이……. 더 이상 네가 아프지 않도록…… 그러니깐 불안해하지 마, 응……?”
[…….]
“…….”
[…….]
“……위야……?”
[……곧 들어갈게…….]
간신히 떨어진 대꾸엔 여전히 힘이 없었다. 다짐에 가까운 자신의 고백이 기대했던 만큼 그의 불안을 잠재운 것도, 그를 기쁘게 한 것도 아니란 걸 알았다.
[……곧 들어갈 테니…… 무사히…… 후우…….]
수화기를 떼어놓는지, 고뇌에 찬 긴 한숨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듯하더니, 좀 더 먼 감으로 윤 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수화기를 움켜쥔 손바닥에 땀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숨을 삼키고 있듯, 인환 또한 숨을 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곧 들어갈게. 이만 끊자.]
곧 들어온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는지 모르겠다. 할 줄 아는 말이 그것뿐인 것처럼. 그러고도 좀처럼 전화를 끊지 못하는 그를 생각해 먼저 억지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 멀리서 사장님 하고 채근하는 윤 실장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온 때문이었다. 수화기를 가슴에 안은 채 고개는 자연스레 거실 괘종시계를 향했다. 오전 11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곧’이라는 의미가 정확히 언제를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5분 후일 수도, 다섯 시간 후일수도 있었다. 전자보다는 후자 쪽에 가까우리라. 물론 그 어느 쪽이든 꼼짝 않고 그를 기다릴 자신이었다. 해를 좇는 해바라기처럼 ‘그’만을 고대할 거였다.
“……TV라도 틀어드릴까요, 선생님?”
과일 접시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아주머니가 물어왔다. 전화를 끊은 지 30분쯤 흐른 후였다.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창 밖만 응시하고 있는 자신이 걱정스러웠던 모양이었다. TV든 오디오든 제대로 집중할 턱은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것보다는 적어도 무언가를 하는 것처럼은 보일 것이고, 그것이 그나마 집 식구들에게 덜 걱정을 끼치리란 걸 알고 있었다. 결국 시야는 을씨년스러운 초겨울 정원 풍경 대신 버라이어티 쇼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는 화면으로 가득 채워지게 되었다. 정원 풍경이 뇌리까지 전해지지 않았듯 쇼 프로그램 역시 그러했다. 웃음과 박수 소리와 광고 소리들만 무의미하게 시야를 스치고 지나갔다. 해를 좇는 해바라기에겐 아무래도 좋을 풍경들이었다. 아무래도 좋을 시간들이었다.
마침내 시곗바늘이 1시를 조금 넘긴 시각, 정원 쪽에서 차 소리가 났다. 소스라치듯 소파에서 몸이 일으켜 세워졌다. 죽음처럼 방기해 있던 의식이 비로소 깨어난 순간이었다. 고요하게 숨을 죽이고 있던 심장의 고동도 점차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시간을 제대로 의식하기 시작한 순간부턴 1초가 1분 같고 1분이 한 시간 같았다. 초조하게 그가 들어올 현관문만을 뚫어져라 눈으로 후비고 있는데, 현관 가까이 기척만 느껴질 뿐 그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립고 가슴 저린 목소리와 더불어 밖에서 두런거리고 있는 목소리들은 꽤 여럿이었다. 익숙한 최 씨 아저씨와 홍 기사, 그리고 고영석 외에도 낯선 사내들의 목소리가 함께 섞여 있었다. 다섯 시간 같은 5분의 시간이 흐른 후, 결국 안으로 들어선 이는 그 한 사람뿐이었다.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사장님?”
“다녀오셨습니까?”
“사장님, 어서 오세요.”
“다녀오셨어요, 사장님?”
최 씨 아주머니와 파출부 아주머니, 그리고 두 메이드 아가씨들이 현관 앞에 나란히 서서 그를 마중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꾸를 준 그의 시선은 줄곧 거실 안쪽을 헤매고 있었다. 정확히는 인환이 서 있는 소파 근처를. 현관 안으로 들어서는 즉시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에 덜미를 잡힌 채 인환은 미동도 않고 그만을 응시했다. 인환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돼 있듯 형형한 눈동자 또한 한가지였다. 구두를 벗고, 코트와 머플러를 벗어 메이드 아가씨에게 건네고, 곧바로 소파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중에도 시선은 흡사 사슬처럼 집요하고 격렬했다. 창백하게 여윈 얼굴에 또다시 가슴이 욱신 저려왔다. 병자의 기색이 완연한 주제에 여전히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얼굴이라 더 가슴이 아팠다. 빈틈없이 완벽한 비즈니스 슈트 차림이라 아프고, 또 아팠다.
연인의 체취가 설핏 짙어지는 순간, 인환의 몸은 단단한 품 안으로 힘껏 끌려들어갔다. 아프게 조여지는 상반신에 한숨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정수리 위로 토해지는 연인의 따뜻한 숨결에서도 떨림 같은 신음이 건져졌다. 정수리는 물론 머리통 이곳저곳에 발작적인 립 키스가 몇 번이나 거듭 떨어져 내렸다. 등과 어깨를 한동안 옥죄던 양팔이 살짝 풀리더니 등줄기를 쓰다듬는 커다란 손바닥이 느껴졌다. 단단하고 강한 마찰력에도 불구하고 미세한 떨림은 좀처럼 숨겨지지가 않았다. 인환 자신이 떨고 있듯 그도 꽤나 떨고 있었다. 왜 서로 떨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알 것도 같았다.
얼마 동안 등을 이리저리 어루만지던 손길은 다시금 거세게 힘이 들어간 양팔의 포옹 탓에 한쪽 어깨와 허리 근처에서 사슬처럼 고정되었다. 아픔이 느껴질 정도로 뜨겁고 거친 포옹이었지만 넋은 기쁨으로 전율했다. 연인의 기세에 뒤질세라 마주 안은 인환의 양팔에도 세차게 힘이 들어갔다. 슈트 재킷 아래로 만져지는 딱딱한 등근육의 감촉을 필사적으로 더듬었다. 자신의 손길이 이리저리 움직여갈 때마다 그것은 기쁨을 숨기지 못한 채 경련 같은 떨림을 되풀이했다. 처음보다 가빠진 연인의 숨결이 정수리에 훅훅 토해지고 있었다. 여전히 떨리고 있는 커다란 손가락이 뒤통수로 슬금슬금 올라오더니 품 안에 파묻히다시피 숙이고 있던 인환의 고개를 들게 했다. 불길이 일고 있는 형형한 시선에 가슴이 철렁할 새도 없이 서둘러 내려온 입술에 숨길이 틀어막혔다. 연인은 맞붙은 서로의 코끝이 뭉개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허겁지겁 입안으로 파고들어온 혀가 아리도록 인환의 것을 탐했다. 격렬함을 차마 견디지 못한 고개가 점점 뒤로 넘어가도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인환의 뒤통수를 꽉 움켜쥐고 있던 연인의 손바닥은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는 혀뿌리만큼이나 포악하고 무자비했다. 금방 폭발할 듯한 아슬아슬한 밀도에도 불구하고 인환 또한 그를 막지 않았다. 떨어져 있던 몇 시간 동안 연인이 품고 있었을 극도의 불안감이 절절히 전해진 때문이었다. 그랬다. 그건 키스라기보단 차라리 울음이었다. 비명이었다.
“……숨 쉬어…….”
탁하게 가라앉은 중저음이 명령했다. 길고 긴 입맞춤 끝에 간신히 떨어진 입술 틈으로 흘러나온 목소리였다.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자, 곧바로 아랫입술이 깨물렸다. 범인은 서로의 타액으로 흠씬 젖어 있는 연인의 입술과 새하얀 치아……. 아랫입술에 이어 윗입술이, 그리고 입술 양끝과 턱 주변이 차례로 같은 신세가 됐다. 여러 번 거듭 깨물리고 빨리고 핥아졌다.
“……이상해.”
여전히 서로의 코와 입술을 딱 붙인 채로 연인이 중얼거렸다. 어딘가 어리둥절한, 몹시도 괴로운 어조였다.
“……이렇게 안고 있는데도 불안해.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아…….”
“…….”
“……괜찮아. 이렇게 평생 그대로라 해도 어쩔 수 없지. 이게 벌인 거면 더 좋아. 기꺼이, 달게 받을 거다…….”
“…….”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한 고통스러운 중저음에 가슴이 미어졌다. 위로할 말 따윈 단 한 마디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떨리는 손끝으로 연인의 등줄기만 필사적으로 쓰다듬을밖에…….
“……떨지 마…….”
떠는 것은 외려 연인이었다.
“……왜 이렇게 떨어, 자꾸…….”
좀처럼 멈추지 않는 쪽도 연인이었다.
“……난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지 않은 쪽도 한가지였다. 허세일 뿐이었다. 혹은 염려일 뿐이었다. 인환 자신을 향한. 그래도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괜찮지 않다고, 허세부리지 말라고 감히 다그칠 수도 없었다. 부정하면 더 힘들어할 걸 알고 있었다. 다그치면 더 아파할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자꾸만 비집고 나오려는 눈물도 가까스로 참아냈다. 양쪽 관자놀이 틈으로 파고 들어온 그의 손가락이 가만가만 두피를 쓰다듬고 있었다. 5센티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감은 눈꺼풀이 파드득 떨리는 게 보였다.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간 입술 끝도 보였다. 연인은 흐릿하게 웃고 있었다. 키스인지 애무인지, 구분이 모호한 절절한 입맞춤이 인환의 얼굴 곳곳으로 끝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괜찮으니까…… 점심 먹고 뒷산으로 산책 가자. 지치면 삼청동 길로 빠져서 카페 같은 데 들러도 되고……. 너 좋아하잖아, 분위기 있는 카페들…….”
키스와 함께 느릿하게 떨어지고 있는 것은 나지막하고 아름다운 중저음이었다. 어딘가 먼 곳을 헤매는 듯한 아득하고 슬픈 울림이었다. 아마도 먼먼 과거의 어느 한때, 추억이라는 이름의 서글픈 회한이리라. 더 이상 그런 예쁜 것들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런 철부지 애송이란 자신 속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미 어딘가 부서져 망가져버렸다고, 차마 고개를 가로저을 수 없었다. 부정하면 아마도 연인은 더 슬퍼할 터였다. 아니, 슬퍼하다 못해 아파서 견딜 수 없어 할 거였다.
연인의 악몽은 그날 밤에도 여전히 되풀이되었다. 평생 그대로라도 달게 받을 거라더니, 무슨 예언 같았다. 아니, 예언이 아닌 저주의 주문이었던가 보았다.
어젯밤과 다름없이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섬뜩한 귀곡성에 깨어나야 했다. 짐승 같은 괴성을 질러대며 몸부림치는 연인을 가까스로 깨워야만 했다. 연인의 몸뚱이 또한 어젯밤과 다름없이 눈물과 식은땀 범벅이었다. 깨어나고도 한참을 똑같은 분노와 증오와 살기로 몸부림치며 괴로워했다. 이젠 기억조차도 희미한 누군가들을 향해 고래고래 죽음의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그런 연인을 부여안고서, 울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음은, 또한 인환 자신의 사정이었다. 지옥 속에 있는 연인을 따라 자신도 지옥 끝까지 곤두박질쳤다.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지옥성이 땅 끝까지 진동했다. 인환으로선 여전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연인 스스로 지쳐 떨어질 때까지 이를 악물고 견디는 외엔. 섹스라도 하면 차라리 더 나으련만, 연인의 몸은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흥분의 기미라곤 일절 보이지 않았다. 그저 미친 듯이 서로를 끌어안고, 떨고, 흐느끼고, 입을 맞췄다. 그렇게 속수무책 시간을 죽였다. 서로의 고통이 그럭저럭 잠잠해질 때까지.
마침내 지쳐 잠에 빠진 것이 그로부터 몇 십 분 후인지, 혹은 몇 시간 후인지 몰랐다. 다시금 눈을 떴을 땐 창 밖으로부터 흐릿하게 여명이 밟혀들고 있었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인환의 잠을 깨운 것은 얼굴을 간질이듯 어루만지고 있는 다정한 손길이었다. 다크 서클이 한 발이나 내려앉은 창백한 얼굴이 코앞에서 웃고 있었다. 한 팔로 체중을 괸 자세로 덮치듯 인환을 마주하고 있는 연인이 보였다. 수염 자국 하나 없는 멀끔한 턱 끝이며, 걸치고 있는 물빛 셔츠와 감색 카디건이며, 애저녁에 샤워까지 마친 모양이었다. 잘생긴 눈꼬리는 축 처져 있고, 새하얗고 고른 치아가 거의 들여다보일 정도로 크게 벌어진 입가가 기분 좋게 느슨해져 있었다. 깊고 검은 동공은 별처럼 반짝거리고, 흥얼거림 같은 이상야릇한 자장가가 핏기 없는 입술 사이로 들릴 듯 말 듯 흘러나오고 있었다. 간밤의 지옥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한 표정이었다. 한동안 멍하니 그런 연인을 마주 보다간,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간신히 마주 웃어줄 수 있었다.
“……일어났어, 마누라?”
겨우 말아 올린 입가와 눈꺼풀에 쪽쪽 하는 입맞춤을 떨군 그가 나지막하게 인사말을 건네왔다. 역시 간밤의 끔찍스러운 저주들을 의심하게끔 만드는, 충만한 기쁨이 서린 어조였다.
“……지독해…… 지독한 음치다, 정말…….”
연인 못지않게 착 가라앉은 자신의 대꾸가 들렸다. 간신히 만들어낸 웃음처럼 그닥 힘겹지는 않았다.
“아아, 들었나?”
뜬금없는 대꾸에도 제대로 알아듣고 적당한 답을 흘리는 연인이다. 쑥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대꾸가 무색하게, 얼굴 가득 뻔뻔스러울 정도로 기분 좋은 웃음은 여전했다. 슈베르트의 자장가. 비몽사몽 중에도, 들쭉날쭉한 음정과 박자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알아먹은 스스로가 용타 싶었다.
“……그, 그렇게 오랫동안 흥얼거리는데 어떻게 안 들어…… 자장가로 모닝콜을 할 수 있는 것도 재주겠다. 그거 신종 괴롭힘이지?”
부러 입술을 비죽이며 흘겨보자 껄껄 하는 시원스러운 웃음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그늘 한 점 들어 있지 않은 호탕함이라 역시 쓰디쓴 비애를 느꼈다. 연기는 아닐 거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도 그의 진심이고, 간밤의 지옥 또한 오롯이 그의 몫일 터였다.
점차 웃음소리가 잦아드는가 싶더니 곧 입술이 내려왔다. 처음엔 부드럽게 시작했다가, 얼마 안 가 숨을 참기 힘들 정도로 격렬해진 연인의 모닝 키스였다.
“……하아아…….”
쪽, 쪽쪽, 쪼오옥……. 겨우겨우 떨어지나 싶더니 큭큭거리는 속웃음에 이어 인환의 입술을 아예 삼켜버릴 것처럼 빨아들이는 진한 립 키스가 떨어졌다. 립 키스에 이어진 것은 가슴을 사무치게 만드는 절절한 주시. 과장된 웃음기는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머루알처럼 검고 아름다운 동공 속엔 헤아리기 힘들 만큼 짙은 어둠과 우울이 진득하니 들어앉아 있었다. 홀린 듯 멍하니 마주 보고만 있자 한참 만에 연인의 입술이 떨어졌다. 무언가 말하기 힘든 것을 어쩔 수 없이 말해야 하는 것처럼 어조는 느릿하고 신중했다.
“……오늘 좀 멀리 차를 타고 가야 할 곳이 있는데 괜찮을까?”
“……멀리……?”
“음, 조금 멀리. 세 시간쯤 드라이브를 해야 할 거 같은데…… 아니, 왕복이면 여섯 시간이로군.”
“……여섯 시간이나? 어딜 가는데? 나도 꼭 가야 하는 곳이야?”
“그래. 너도 꼭 가줬으면 해. 물론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몸 상태가 괜찮아야 하지만…….”
“…….”
어디냐고 굳이 묻는다면 그는 대답해줄 것이다. 그러나 어쩐지 더 이상의 추궁은 나오지 않았다. 연인은 꽤나 힘들어하고 있었다. 반드시 가야 하는 곳이긴 한데 그 이상으로 가고 싶지 않은 것 같은, 아니, 가는 게 두려운 듯한 기색이 느껴진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자신이 아니라도 힘들어하는 그를 더욱 힘들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알았어. 함께 갈게.”
“…….”
“……위야?”
“……진짜 괜찮은가?”
“그럼…… 이젠 죽 대신 밥도 먹기 시작했는걸. 더 이상 몸이 까라지지도 않고……. 왕복 여섯 시간 드라이브쯤이야 거뜬하고도 남지.”
“…….”
분명 원할 답을 주었건만, 연인은 어째 대꾸가 없었다. 깊고 어두운 주시가 한동안 계속되다간, 다시금 한숨 같은 키스가 되풀이해 떨어졌을 뿐이었다.
“……씻고 아침 먹자. 올라올 때 러시아워에 걸리지 않으려면 서둘러 출발하는 게 좋겠지.”
이마 위로 흩어진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그가 힘없이 뱉은 말이었다. 그렇게 힘들면 가지 말지.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온 염려를 겨우 도로 삼켰을 정도로 그의 표정은 지독하게 어두웠다.
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치고 움직일 채비가 얼추 끝났을 때는 오전 9시 무렵이었다. 놀랍게도 일행은 연인과 인환뿐만이 아니었다. 어제 오후 소개받은 새 경호원 두 명과 연인의 경호 기사 고영석, 그리고 홍 기사는 물론 마침 도착한 윤 실장과 다른 비서진 한 명까지 가세하고 보니 총 두 대의 승용차를 가득 채운 여덟 명의 사내들이 모이게 되었다. 파출부 아주머니가 음식물로 보이는 커다란 사각보퉁이 네 개까지 쥐여주어서, 그야말로 무슨 단체 피크닉 같은 분위기마저 풍겼다. 물론 여전히 어딘가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는 연인이며, 고용주에게 전염이라도 된 듯 윤 실장 이하 다른 사내들의 표정도 밝지만은 않아서 농담으로라도 피크닉이랄 수는 없었지만. 고영석이 운전하는 검정 세단엔 연인과 인환, 그리고 경호원 한 명이 자리를 잡았고, 홍 기사가 운전하는 볼보엔 윤 실장 일행과 다른 경호원 한 명이 자리를 잡았다.
차는 고속도로와 국도를 이리저리 빠지며 남쪽으로 두어 시간쯤을 달려 내려갔다. 한동안은 감히 짐작조차 못 한 목적지였지만, 그 두어 시간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시야 가득 밟혀든 익숙한 풍경들에 인환의 눈은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불안스레 가슴이 뛰고 숨이 가빠진 것은 물론이었다. 동요를 채 감추지 못한 양손가락 끝이 덜덜 떨려왔다.
캐묻듯 돌아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연인의 시선이 파고들었다. 연인은 흐릿하게 웃고 있었다. 차라리 울고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은 뼈아픈 웃음이었다. 드라이브 내내 인환의 손을 꼭 움켜쥔 채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였다. 출발 직전, 입고 있던 평상복에 간단히 코트만을 걸치자 연인은 직접 드레스 룸에까지 인환을 데리고 가더니 검은색에 가까운 점잖은 싱글 슈트로 갈아입히기까지 했었다. 그러고 보니 연인 또한 짙은 감색의 더블슈트 차림이었다. 정장을 해야만 하는 모임이냐고 묻자 연인은 지금처럼 뼈아픈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었다. 알 것 같았다. 전부 다 알 수 있었다. 연인이 왜 그리 힘들어했는지. 왜 울음보다 못한 괴로운 웃음을 억지로 물었었는지…….
원주였다. 엄마가 잠들어 있는 곳…….
비록 이 계절에 찾아온 적은 없지만, 6월 기일에도 찾아온 적이 손에 꼽을 정도지만, 볼 때마다 이리도 사무쳤던 여정을 자신이 차마 못 알아챌 까닭이 없었다.
“……2, 26일이었나……? 2, 26일이지, 오늘……?”
복받치는 감정을 어쩔 수가 없어 가까스로 토해낸 물음이었다. 연인의 형형한 눈빛에 붙들린 시선은 파도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마주 쥔 연인의 손가락에 아프도록 힘이 더해지고 있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시울로 뚫어져라 직시할 뿐, 연인은 일절 대꾸가 없었다. 상관없었다. 굳이 답을 기대한 물음도 아니었다. 익숙한 풍경을 자각한 순간, 이미 속속들이 다 기억해내고 있었으므로.
11월 26일은 엄마의 생일이었다. 가신 지도 어느덧 8년째건만, 그동안 단 한 번도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한 생일상이었다. 반드시 챙겨드려야 했던 기일조차 빠진 적이 부지기수였다. 챙길 염치도, 여유도 없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던 참담한 세월이었으니 말해 무엇 할까. 기왕에 불효자인 것을 새삼 챙겨드린들 좋아하실까. 그게 괴로워서 더더욱 기를 쓰고 기억 한구석에 묻어두려 했던 날짜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를 쓰고 묻어두려 한들 온전히 묻힐 리도 없는 날짜가 아닌가.
“……아…… 아파…….”
움켜잡힌 손가락 마디가 짓눌리다 못해 통증이 왔다. 무심코 신음을 흘리자 연인이 소스라치듯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관절을 절단 낼 것 같던 악력이 느슨하게 풀리는 것과 동시에 사슬처럼 휘감아오던 시선도 거둬졌다. 연인의 시선은 어느새 반대편 차창을 향해 있었다.
“……뻔뻔스럽지…… 아무렴, 뻔뻔스럽고말고…….”
한참 후에 흐릿하게 떨어진 연인의 말이었다. 고통스러운 회한이 뚝뚝 떨어지는, 잔뜩 젖은 목소리였다. 그러곤 다시 찾아든 침묵. 반대쪽 차창에 고정된 연인의 시선은 단 한 번도 이쪽을 향하지 않았다. 차가 보덕산 중턱에서 멈춰 설 때까지. 차마 손마저 놔줄 순 없었는지, 서로의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차도록 연인은 깍지 낀 손을 풀지 않았다. 정말로 뻔뻔스러웠다. 뻔뻔스러운 연인이었다. 잘도 손을 잡고 있구나. 누구 때문인데. 내가 누구 때문에 엄마 가슴에 대못을 박았는데. 누구 때문에 엄마를 잡아먹었는데. 잘도, 잘도……. 묻어두었던 원망과 미움이 노도처럼 끓어올랐다. 순간적으로 피를 태운 그것은 다행히 나타났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힘없이 스러져버렸다. 미움보다 더한 연민이, 원망보다 더한 애정이 살을 에고 뼈를 갈랐다. 이럴 줄 알았겠지. 알면서도 찾아온 거겠지. 후득후득 듣는 눈물을 감추지 않은 채 연인의 손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절대 놓을 수 없었다. 어차피 불효자식이었다. 기왕에 천인공노할 후레자식이었다. 새삼 엄마 때문에 이 뻔뻔스럽고도 불쌍한 남자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오래 미워할 수도, 오래 증오할 수도 없었다. 죽어도, 아니, 죽은 후에라도 그건 불가능할 터였다.
차는 원주시를 지나 보덕산 입구까지 한참을 더 올라갔다. 더 이상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지점까지 왔을 때, 연인은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우게 했다. 생일 상차림일 음식 보퉁이 네 개를 홍 기사와 고영석에게 나눠 들게 하곤 여전히 인환의 한 손을 거머쥔 채 거침없이 산을 타기 시작했다. 제법 외지고 가파른 등산로건만 저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흡사 인환보다도 더 길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연인을 주저하게끔 하는 것은 단지 인환의 불편한 한쪽 다리뿐. 인환이 힘들어하진 않는지, 연인은 몇 번이나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인환을 살폈고, 느리면서도 줄기차게 엄마의 무덤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15분쯤을 더 올라갔을까. 마침내 야트막하고 양지바른 둔덕이 눈에 들어왔다. 제법 잘 손질돼 있는 봉분과, 납작하게 펴진 화강암 제대, 그리고 비석들이 어우러진 익숙한 묘역이 보였다. 봉분 주위로 조성된 누런 잔디밭은 갖가지 갈빛 낙엽들로 가득 덮여 있었다. 계절이 계절인 탓에 앙상하게 헐벗은 나뭇가지들이 더없이 을씨년스러웠다. 6월 기일에 눈에 담았던 것보다도 더 삭막하고 외로운 풍경에 가슴은 다시금 먹먹해졌다. 날카로운 바늘로 심장이 찔리는 것 같은 통증을 어쩌지 못해 입술을 질끈 깨물고 아픔을 참아내야 했다. 참담했다. 어느새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 범벅인 연인의 얼굴 표정도 참담하긴 한가지였다. 일체의 표정이 사라진 창백한 안색이건만 복받치는 감정은 단 한 치도 숨겨지지 않았다. 서로의 속내가 거울 보듯 훤히 읽히는 때문이리라. 아니, 인환 자신이 이리 참담한데 연인이라고 온전할 리가 없다는 걸 뻔히 아는 까닭이었다. 아픔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을 터였다. 넋을 잃고 한동안 엄마의 봉분만 바라보았다. 연인 또한 한참 동안 봉분에 시선을 준 채 미동조차 없었다.
“……사장님, 일단 묘역 청소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얼음처럼 굳어 있던 두 사람을 깨운 이는 윤 실장이었다. 윤 실장과 다른 비서 청년이 익숙한 손길로 봉분과 묘역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그들을 따라 경호원 두 명과 고영석, 그리고 홍 기사도 나란히 봉분 청소에 가세했다. 소스라치듯 어깨를 떠는 것으로 홀연 정신을 차린 연인까지 달려드니, 20여 평방미터쯤 될 묘역은 청소기가 밀고 지나가기라도 한 듯 금세 말끔해졌다. 노르스름하게 마른 잔디 이파리들이 고상한 수의마냥 우아하게 봉분을 덮고 있었다. 반질반질 광까지 나게끔 잘 닦은 화강암 제대 위엔 아주머니가 정성껏 꾸려준 생일상이 화려하게 차려지고 있었다. 지방(紙榜)을 모시고 제대 앞에 꿇어앉아 향을 피우는 것으로 상차림을 마무리한 연인이 비로소 뒤에 선 인환을 돌아보았다. 연인의 창백했던 얼굴은 짧은 등산과 가벼운 노동의 여파로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리 와, 인환아. 인사 드리자.”
뻔뻔스럽다고 자진 납세를 던진 이래 겨우 다시 맞춰진 시선이었다. 애써 담담한 척하고 있지만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눈시울이 훤히 보였다. 따끈한 밥과 탕이며 각종 산적류, 과일과 떡은 물론 정종 등등, 화려하게 차려진 제대를 목도하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엄마의 생일상을 차려드린다는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연인에게 다가가는 대신 그저 멍하니 연인의 눈만 바라보아야 했다. 인환의 복잡한 심사를 고스란히 읽고 있는 듯, 오른손을 이쪽으로 뻗고 있을 뿐 연인도 더는 재촉하지 않고 있었다. 운 흔적이 역력할 자신의 눈시울을 뚫어져라 굽어보고 있는 깊은 눈동자 속에도 재촉의 기미는 없었다. 연인은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자진해서 마주 손을 잡아주기를. 같이 인사를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해주기를.
윤 실장 이하 다른 일행들은 청소가 끝나고 생일상이 차려진 것과 동시에 멀찍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제대 앞엔 넋을 잃은 인환과 그런 자신을 절박한 눈길로 기다리고만 있는 연인뿐이었다. 천지간에 연인과 자신 둘뿐인 것만 같았다. 묵묵한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갔다. 1분인지, 10분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싸늘한 초겨울 바람이 웅웅, 울음을 울며 간간이 산등성이를 훑고 지나갔다. 바람 소리와 메마른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 외엔 산은 적요했다.
바스락.
“……자…… 장 선생님, 부디……!”
발밑에서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와 윤 실장의 절박한 부름 중 어느 쪽이 더 먼저였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아마도 거의 동시였으리라. 무심코 뒷걸음질을 친 자신과, 그런 자신을 연인 대신 안타까이 불러준 윤 실장이었다. 낮지만 간절한 기원이 느껴진 덕분이었을까? 서너 걸음 뒷걸음질을 치던 다리가 다시금 뻣뻣하게 굳어들었다. 뒤로 고개를 돌리니 연인도 하지 않고 있는 채근을 절절한 눈빛으로 실어 보내고 있는 윤 실장이 보였다. 무언가 할 말을 참고 있는 듯, 윤 실장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인환과 그네의 보스를 번갈아 응시하고 있었다. 눈빛으로 간섭하지 말라는 보스의 제지를 받았는지, 창졸간의 간절한 주시는 이내 바닥으로 떨어졌다. 윤 실장의 보스에 대한 충성심을 얼추 가늠할 수가 있는 대목이었지만, 솔직히 인환으로선 윤 실장에게까진 손톱만큼도 감정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지금 내면에서 격돌을 일으키고 있는 극단의 양가감정을 추스르는 것만 해도 힘에 부쳤다.
잠시 윤 실장을 향했던 시선이 이내 맞은편의 연인에게로 되돌아왔다. 다시금 새하얗게 핏기가 가신 연인의 얼굴이 보였다.
……못 하겠어…….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마주친 눈빛 속에서.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속내가 훤히 읽히는 마음의 창을 통해서.
……못 하겠어, 미안…… 미안해. 하지만 못 하겠어. 지금은 네게 다가갈 수가 없어……. 엄마…… 불쌍한 울 엄마…… 너무너무 불쌍한 울 엄마 땜에…… 울 엄마가 불쌍해서…… 가여워 견딜 수가 없어서 그렇겐 못 하겠어…….
연인의 먹빛 동공이 회오리바람처럼 격랑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자신이 보내는 텔레파시를 정확히 알아듣고 있다는 증거였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기라도 하는 듯 어깨가 껑충 들썩였다. 바싹 마른 창백한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도 보였다. 혼란과 아픔과 회한이 뒤범벅된 연인의 표정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웅웅웅, 휘유우우우…….
산등성이를 타고 싸늘한 삭풍이 휘돌아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스락야스락, 바싹 마른 낙엽 더미가 여운처럼 이끌려 사라지는 소리도 아득했다.
실은 다가가고 싶었다. 이쪽으로 간절히 뻗은 연인의 저 창백한 손을 열광적으로 마주 잡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둘이 같이 인사드리고 싶었다. 엄마, 이 남자가 내 반려예요. 이제야 내 온전한 반려가 돼주었어요. 먼먼 시간을 돌아 겨우 내게 와주었어요. 그러니 인사 받아주세요. 용서해주세요…… 그리 엄마에게 용서를 빌고 싶었다. 허락을 받고 싶었다. 어쩌면 연인보다도 더 필사적일 소망과 기원을 품고서.
그런데도 할 수가 없었다. 연인 쪽으로는 단 한 발짝도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움직여지기는커녕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절절한 소망 그 이상으로 연인이 미웠다. 증오스러웠다.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연인도, 그런 연인에게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천하의 후레자식인 자신조차도.
눈시울이 불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시야는 순식간에 뿌옇게 흐려졌다. 두어 번 눈꺼풀을 깜박거리자, 한순간 맑아졌던 시야는 다시금 뿌옇게 흐려지다가 도로 맑아지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제 맘대로 조절되지 않는 눈을 부릅뜨고서 연인의 눈빛을 읽기 위해 필사적으로 초점을 맞췄다. 고통과 동요로 크게 일렁이던 연인의 먹빛 동공은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비스듬히 말려 올라간 입술 끝이 보였다. 연인은 웃고 있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연인의 심장을 꽉 움켜쥐고 있었을 기대와 희망을 죄다 털어내버린 것 같은 표표한 웃음이었다. 인환을 향해 줄기차게 뻗어 있던 오른손이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지는 게 보였다.
“……울지 마.”
“…….”
“……난 괜찮으니까 울지 마, 인환아. 쉬이 용서 못 하는 게 당연하지. 절대로 쉬울 리가 없는 건데…….”
“…….”
“……괜찮아. 이번에도 혼자 인사 드려야 하는 건 아프지만 내년에 또 기회가 있을 테니까…….”
“…….”
“……알잖나. 난 뻔뻔한 놈이랬지? 내년도, 후년도, 내후년도, 또 그 후년들에도…… 함께 인사드릴 수 있는 시간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지 않나…….”
“…….”
“……평생 그대로라 해도 괜찮다고 했지? 죽어서도 기다릴 수 있을 만큼 난 염치없고 뻔뻔한 놈이란 말이다.”
“…….”
“……난 괜찮아…… 정말 괜찮다, 장인환. 괜찮아. 그러니 더 이상 울지 마라. 어머님께서 세상에 나신 날인데, 이 좋은 날 자꾸 우는 모습 보여드리는 것도 불효다…….”
괜찮지 않은 걸 뻔히 아는데 또 괜찮다고 한다. 또 허세를 부린다. 인환 자신만 염려한다. 안다. 다 알고말고. 그런데도 다가갈 수가 없다. 단 한 걸음도 연인 가까이 다가가지지가 않는다.
……엄…… 마…… 아아, 엄마…… 엄마, 엄마, 엄마아…….
어느새 뒤돌아선 연인이 보였다. 어두운 감색 재킷에 감싸인 늠름한 등이 흡사 태산처럼 무겁고 거대하게 보였다. 인환보다 한참 뒤에 서 있던 윤 실장이 단정한 걸음으로 연인 옆으로 다가서는 것도 보였다. 연인과 마찬가지로 어딘가 익숙한 몸짓이었다. 윤 실장을 따라 나머지 사내들도 연인과 윤 실장의 뒤로 죽 늘어섰다. 모두 엄마의 생신 제사에 참가하는 모양이었다. 아들인 자신이 마치 남의 일인 양 방관하고 있으니, 도리어 객들이 주인 된 형국이랄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노릇일 게다. 오늘 생신상의 제주는 인환이 아닌 연인이었다. 엄마에게 있어 연인은 어쩌면 영영 초대받지 못할 객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동안 묵묵히 봉분 쪽에 시선을 두던 연인이 이윽고 큰절을 두 번 올리는 것으로 제(祭)가 시작되었다. 절을 마치고 일어선 연인에게 윤 실장이 술잔을 건넸고 연인이 받아 들자 윤 실장은 잔에 술을 부었다. 술이 가득 채워진 잔은 향불 위에서 세 번 돌려진 다음 모사기(사당이나 산소에서 조상에게 제를 지낼 때 띠의 묶음과 모래를 담는 그릇)에 다시 세 번에 걸쳐 나뉘어 부어졌다. 빈 잔을 윤 실장에게 돌려주고 일어난 연인이 다시금 두 번에 걸쳐 엄마에게 큰절을 올렸다. 연인의 절이 끝나자마자 바로 뒤에 일렬로 늘어서 있던 나머지 사내들도 연인을 따라 일제히 큰절을 올렸다. 사내들과 함께 두 번째 큰절로 바닥에 부복한 연인은 엎드린 자세 그대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십여 분을 훨씬 넘어가도록. 그런 연인에 당혹감을 내비치는 사내들에 반해, 윤 실장만은 시종 담담한 표정으로 연인을 주시했다. 윤 실장의 여유로운 표정에서 역시 익숙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마치 그런 연인을 이미 예상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사장님…….”
15분쯤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윤 실장의 얼굴에서도 점차 초조한 기색이 읽히는가 싶더니 조심스러운 부름과 함께 윤 실장의 손이 연인의 어깨를 슬쩍 흔들었다. 움찔 소스라치는 연인의 상반신이 보였다. 흡사 채찍이라도 맞은 모양새였다.
“아아…….”
신음인지 탄식인지, 나지막한 한숨 소리와 함께 마침내 연인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잠시 서서 봉분 쪽을 굽어보다가 다시 제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 연인이었다. 이번엔 직접 잔에 술을 따라 엄마에게 건네고 있었다. 보이는 건 그저 연인의 뒷모습뿐이었지만, 연인의 미세한 몸짓 하나하나에서 연인이 지금 얼마나 정성을 기울여 예를 올리는지 절절히 알 수 있었다. 시종 뿌옇게 변하곤 하는 시야 속에서 그런 연인의 가슴 저린 모습만 알알이 뼛속에 새겨졌다. 보지 않아도 연인의 표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얼마나 아프고 절박할지 잘 알았다. 그런데도 몸은 여전히 뻣뻣하게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인환 자신에겐 연인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 지금이 차라리 다행일지도 몰랐다. 독하게 고집을 부리고 있는 주제에, 가차 없이 연인을 단죄하고 있는 주제에, 연인의 상흔을 직접 목도한다면, 극단의 양가감정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자신의 넋은 지금보다도 더 갈가리 찢길 터였다.
도착 무렵 머리 위에 떠 있던 해가 어느새 서쪽을 향해 방향을 틀고 있었다. 기일에조차 제대로 모셔지지 않던 엄마의 묘제도 얼추 끝을 보이고 있었다. 시립(侍立), 하시저(下匙箸), 사신(辭神), 납주(納主), 철찬(撤饌), 그리고 마지막 음복(飮福)까지…… 인환 대신 제주가 된 연인은 그토록 지극한 정성답게 단 하나의 절차도 생략하지 않았다. 그 모두를 마치고 나니 시곗바늘은 어느새 오후 3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천하의 불효자에 후레자식일 당신의 외아들은 제사 내내 낯선 이방인의 입장을 고집스레 고수했다. 점심때가 한참을 지났으니 음복(제사가 끝난 후 제사 음식을 나누어 먹는 행위)에만이라도 참여하라는 윤 실장의 간곡한 청조차도,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로 냉랭히 외면했다. 생신날 엄마한테 절도 안 한 후레자식 주제에 감히 엄마가 드시던 걸 주워 먹을 수 있을까 보냐. 제수 음식 몇 점을 묵묵히 집어 먹고 있던 연인도 두 번은 권하지 않았다. 근심과 아픔을 숨긴 표표한 얼굴로 그저 뚫어져라 인환을 바라보았을 뿐. 말하지 않아도 훤히 드러나는 서로의 속내 덕분이겠지. 강제로 먹이지 않는 한 도저히 무언가를 먹을 기분이 아닌 자신을 연인은 차고 넘치도록 이해하고 있을 터였다.
오후 3시 20분. 말끔히 치워진 묘역을 뒤로하고, 주객이 전도된 제주 일행과 어느 불퉁한 이방인 하나가 마침내 귀로에 올랐다.
제사 내내 멀찍이 떨어져 있던 인환의 손은 다시금 연인의 단단한 손아귀에 틀어잡히고 말았다. 몇 시간 전, 산을 오르던 때와 한가지였다. 연인은 인환의 불편한 걸음걸이에만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채 귀로를 서둘렀다. 보덕산 입구 주차장까지 걷는 내내 인환도, 연인도 줄곧 침묵을 고수했다. 아마도 연인은 아픔을 참고 억누르기 위해 말을 삼가고 있을 것이고, 자신은 지독한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미안하고 또 미안한 나머지 말은커녕 연인의 얼굴조차 제대로 바라보기 힘들어서다. 밉고 또 미워 죽겠는 바람에 그 미안하다는 단 한 마디의 사과조차 토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일촉즉발의 침묵에 빠진 보스와 인환의 눈치를 살피느라 나머지 사내들도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채 차에 올랐음은 물론이었다.
보덕산을 출발한 차가 원주시를 지나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든 지 20여 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연인은 마침 나타난 어느 고속도로 휴게소에 차를 세울 것을 명령했다. 보덕산 입구 주차장에서 일행 대부분이 요의를 해결한 것을 알기에, 인환은 뜬금없는 정차에 의아했다.
차 안에서도 서로의 손이 녹아 뭉그러질 정도로 움켜쥔 채 놓지 않던 연인에게 끌려 휴게소 매점으로 들어갔다. 각종 음식 판매대와 테이블 좌석, 그리고 수많은 인파들로 50여 평 남짓한 매점 공간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쌀쌀한 초겨울 날씨 덕분인지, 따끈한 국밥 냄새며 우동 냄새, 그리고 자장면 냄새 등등 각종 더운 음식물 냄새들이 실내의 북적임에 일조하고 있었다. 그런 장바닥 같은 북새통 속에서도 빈 테이블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던 건 고영석의 날카롭고 재빠른 눈썰미 덕분이었다. 고영석이 빈자리를 찾아 연인과 인환을 이끌었지만, 정작 보물찾기의 달인인 고영석과 경호원들은 물론, 홍 기사 차를 타고 뒤따라왔던 윤 실장 일행들까지 다 앉을 만한 좌석은 없었다. 결국 여섯 명이나 되는 나머지 장정들은 공중의 눈에 띄지 않도록 연인과 인환이 앉은 테이블에서 제법 떨어져서 대기해야 했다. 그들 중 한 명인 홍 기사에게 연인이 우동 한 그릇을 사 오라고 명령했고, 잠시 후, 테이블 위에 우동 한 그릇이 오롯이 배달되고 나서야 인환은 연인의 뜬금없던 정차 명령을 겨우 이해하게 되었다.
“……그거라도 먹어. 어머님 드시던 게 아니니 먹을 수 있지?”
맞은편에 앉은 연인이 가만가만 재촉했다. 제사가 끝나고 처음으로 인환에게 떨어진 연인의 말은 어딘가 간질간질할 지경으로 상냥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쁜 새끼……. 이쯤 되면 또다시 왈칵 목이 멜 수밖에 없는 사정이 아닌가.
“……울지 말고…….”
테이블을 파고 들어갈 기세로 고개를 푹 숙인 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는 우동 그릇에만 시선을 박고 있건만, 귀신같이 눈치를 채는 ‘나쁜 새끼’다. 도통 오래 미워할 기회라곤 일절 주지 않는 독하디독한 새끼다. 눈물겹도록 소중한 자신의 연인 새끼다…….
“……붇기 전에 어서 먹어. 배 많이 고프잖나. 차 안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 다 들었다, 장인환…….”
연인의 손에 의해 둘로 쪼개진 나무젓가락이 인환의 오른쪽 손가락에 쥐였다. “자, 얼른” 하는 부드러운 채근과 함께. 노란 단무지 종지까지 우동 그릇 옆에 부록처럼 진열되니, 도저히 더 이상은 참기가 힘들었다.
“……나, 참…… 울지 말고 먹으라니까…….”
“…….”
“……자꾸 가슴 아프게 왜 이러냐, 인환아…….”
“…….”
“……먹어, 응? 집에 도착하려면 두 시간은 더 가야 하는데 속 쓰려서 안 돼…….”
“…….”
“……고집쟁이. 이런다고 내년에 또 안 찾아뵐 줄 아나? 나 원래 뻔뻔한 놈이랬지? 어머님께서 용서해주실 때까지 줄기차게 쫓아다닐 거다. 더불어 듬직한 사윗감으로 인정해주신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전화위복이겠지?”
안타까운 호소는 결국 웃음기가 실린 어깃장으로 이어졌다.
……사윗감?! 사윗가아아암?!!! 듬직이 어쩌고 어째?! 하, 나 원 기가 막혀서! 그래, 너 잘났다, 나쁜 놈!!! 세상에서 제일로 뻔뻔스러운 놈!!! 사기꾼에 초, 초 대빵 거짓말쟁이에 치사 뻔돌이 같은 놈!!!
속으로 꾸역꾸역 욕설을 뇌까리며 우동을 먹기 시작했다. 울다가 먹다가 하느라 입으로 먹었는지 코로 먹었는지, 나중에 생각해보니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지독히도 달콤한 맛이었다는 것만 선명하게 뇌리에 남았다. 태어나 이때까지 먹어본 우동 중 가장 맛있었다고.
꾸역꾸역 면발을 삼키는 와중에도 연인의 시선은 인환의 얼굴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어찌나 얼굴이 따끔따끔한지 아예 살가죽이 타서 없어질 것 같았다. 실은 우동으로 체하게 만들려는 속셈이 아닐까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젠장, 무슨 우동이 이리 더럽게 맛있어…….
“……물도 좀 마셔. 체할까 봐 걱정된다. 커피 사 오라고 할까?”
물 컵을 입가에 대주며 다정과 상냥이 뚝뚝 떨어지는 매혹의 중저음이 물어온다. 소름이 오소소 돋을 지경으로 간지러웠다. 얼굴이 문득 빨개진 건 우동 때문이 아니었다. 젠장, 이런 목소리와 태도로 사람들을 꾀면 눈앞의 남자는 세상에서 최고로 잘나가는 호스트가 될 거다. 호스트질만으로도 억만장자가 될지도 모른다. 차마 내치지 못해 입가에 대진 물을 한 모금 마셔주었더니, 연인의 손이 정수리 위로 다가들었다. 하얗고 단단하고 우아한 피아니스트 신동의 손가락이 다소 거칠게 느껴질 만큼 열정적인 부비부비를 했다. 단정하게 옆으로 빗어 넘겼던 인환의 머리카락은 금세 까치집처럼 뒤엉키고 말았다. 그게 또 좋아 죽겠는지, 연인은 “하하” 하고 호방한 웃음보를 터트렸다. “귀여워서 미치겠다” 하는…… 결코 익숙해지기 힘든 망발과 함께.
잘 먹은 우동, 진짜로 체할 것만 같았다. 형형한 눈길로 핥는 것만으론 긴긴 인고의 세월이 안겨주었을 허기가 미처 채워지지 않았던가 보았다. 어떻게 참았을까, 그동안엔? 이리 닭이 되어 날아가고플 지경으로 절실한 애정 표현은커녕, 감정조차 필사적으로 죽이고서…… 도대체 어떻게 견뎌냈을까, 이 남자는? 이 독하고, 독하고, 또 독한 남자는? 새삼 또 울컥 치받는 설움과 회안에 더 이상 우동이 넘어가지 않았다.
“……하, 하지 마…… 사람들이 보잖아…….”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간신히 감정을 다스릴 핑계를 찾았다. 이러다간 하루 종일 눈물을 멈출 수 없을 터였다.
“……창피하게…… 게이들이라고 아주 광고를 하지 그러냐…….”
마지못해 고개를 들고 연인을 노려보았다. 부러 외면할 때도 온몸이 타는 것 같더니, 아니나 다를까,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불길처럼 형형한 눈빛이 굶주린 늑대마냥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주체 못 할 애정과 염려와 근심으로 뒤범벅이 돼 있는 눈빛이었다. 전혀 갈무리되지 못한 열기는 흔들리는 인환의 시선을 꽁꽁 옭아맨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얼굴을 달군 혈액의 흐름이 더 거세지는 게 느껴졌다. 틀림없이 귓불까지 새빨개져 있을 것이다.
“……미…… 민망한 애정 행각으로 시각 공해 일으킨다고 단체로 항의 받을지도 몰라…….”
과장만은 아닐 게다. 기왕에도 수없이 내리꽂히고 있는 뭇 시선들을 느끼고 있었다. 연인에게 한 손을 잡힌 채 매점 안으로 들어섰을 때부터였다. 안 그래도 눈에 확 띄는 남자가, 시꺼멓고 볼품없는 또 다른 사내의 손을 꼭 움켜쥐고 들어섰으니 시선들의 융단 폭격이 오죽할까. 게다가 우동을 먹는 내내 인환에게 퍼부어진 연인의 애정 표현이란…….
하하 하고 재차 시원스러운 웃음을 터트렸을 뿐 기다리고 있던 대꾸는 없었다. 연인은 그저 하염없이, 여전히 불길을 일으키고 있는 형형한 눈길로 인환의 전부를 삼키고 있을 뿐이었다. 머리통을 까치집으로 만들었던 손이 재차 다가와 가만가만 인환의 얼굴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눈꺼풀과 이마와 뺨을 눈물겹도록 다정하게 어루만지고 있는 손가락 끝은, 인환이 겨우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미안…… 자꾸만 욕심 부려서…….”
“…….”
“……그리고 고맙다. 오늘 일 묵인해줘서.”
“…….”
진짜로 미안한 게 누군데, 뭐가 미안하단 걸까. 불효자도 무시한 생신상까지 거나하게 차려준 게 누군데, 뭐가 고맙다는 걸까. 세상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을 대단한 남자가 이렇게 손끝까지 떨어댈 정도로 불안해하면서 뭐가 그리 좋다고 웃는 걸까? 뭐가 예쁘다고 이리 애정을 펑펑 쏟아부어주는 걸까. 끝내 용서하지 못해 또다시 지독한 상처를 주고 만 자신인데…….
더는 주변 시선을 핑계 댈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온갖 계층과 연령대의 남녀노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휴게소 매점 안의 소란이 홀연 까마득히 잊혔다. 시선을 마주한 연인만 온 넋을 가득 채웠다. 지금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안아주고 싶었다. 안고, 미안하다 말하고, 자신은 더 많이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잔뜩 겁에 질린 이 남자를, 불안하고 또 불안해서 자신의 눈치만 살피는 이 가련한 남자를, 주제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하 껄껄 실없는 허세만 터트리곤 하는 남자를…….
띠리리링∼∼디링∼디링∼∼∼.
연인의 코트 안주머니로부터 날카로운 전자벨이 울렸다. 익숙한 「로망스」의 선율이 연인을 찾고 있었다. 둘만의 몽환적인 공간은 그것으로 단숨에 박살이 났다. 다행이었다. 일촉즉발. 몇 초만 더 저 가슴 시린 응시와 애무가 계속됐더라면 자신도 더는 참지 못했을 거다. 공간도, 시간도 죄다 잊고서 연인을 향해 두 팔을 뻗고 말았겠지.
띠리리링∼∼디링∼디링∼∼∼.
재차 질기게 울려대는 휴대전화에 살짝 미간을 구긴 연인이 마지못해 인환으로부터 손을 거둬들였다. 화염을 일으킬 듯 숨 막히게 달라붙던 시선도 슬쩍 옆으로 비켜갔다. 인환의 얼굴에 다정한 애무를 거듭하던 연인의 오른손은 곧 코트 안주머니로 들어가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있었다.
“……회장님……? 아, 예. 접니다. 그간 가내 무고하셨습니까?”
폴더를 열고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연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시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윤 실장 일행에게 손짓을 했고, 명령을 받은 일행 중 윤 실장과 경호원 한 명이 재빨리 다가와 연인의 옆에 섰다. 정중하게 변한 말투며 조심스러운 몸짓에서, 단말기 너머 상대가 연인이 꽤나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먼저 자주 안부 인사를 드려야 도리인데…… 아닙니다, 회장님. 심려해주신 덕분인지 몸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예, 예. 그 사람도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예, 조금…… 천만다행으로…… 고맙습니다, 회장님. 여러 가지로 심려를 끼쳐드리네요. ……예?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창립 기념일…… 파티…… 예. 기억이 나네요. 12월 6일이었지요? 아……! 아아,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지금 주변이 꽤 시끄러워서요. 밖에 나가 제가 다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예, 회장님. 그럼…….”
폴더를 닫은 연인의 시선이 인환에게로 되돌아왔다. 갈무리되지 않은 격렬한 감정의 빛은 여전했다. 자신의 표정을 살피고, 미소를 물고, 상냥하게 허락을 구했다. 금방 올게,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잠깐 밖에서 통화 좀 하고 올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덧붙은 언어는 사족에 불과했다.
“윤 실장, 잠깐 이 사람 좀 부탁합니다. 영석 씨는 절 따라오시고, 건영 씨와 지섭 씨는 이 사람에게 좀 더 신경을 써주시기 바랍니다.”
몇 십 미터의 거리와 몇 분의 시간 동안 떨어져 있는 것이 고작일 텐데도, 두 명의 경호원에게 서늘하게 주의를 주는 연인이었다. 2미터를 가뿐히 넘는 압도적인 키와 덩치의 사내들은 연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인환의 양편에 서서 철통같은 방벽을 만들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홍 기사까지 가까이 다가서니, 안 그래도 시선 집중이었던 인환 일행은 그야말로 매점 안에 모인 인파들 대부분의 시선을 끌고 말았다. 물론, 그 가장 중심에는 연인이 있었다. 심하게 여위고 창백한 안색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래서 더더욱 고혹적인 아름다음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는 연인이었다. 어두운 감색 슈트에 새까만 캐시미어 롱코트라는 고아한 차림새까지 더해지니 표정 하나하나마다 후광이요, 몸짓 하나하나마다 움직이는 화보가 되었다. 고속도로 휴게소라는 대중 공간이 유명 패션 디자이너의 런웨이 장소거나 로맨틱 멜로 영화의 촬영지쯤으로 변태하는 순간이었다.
연인은 경호원들과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한 다음에야 비로소 안심이 됐는지, 매점 출구 쪽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노골적인 뭇 시선들의 공격을 한 몸에 받는 것도 아랑곳없이.
“……정말 매번 뵐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사장님께선 배우나 탤런트를 하셔도 크게 성공하셨을 겁니다. 어딜 가나 이리 사람들의 시선을 끌곤 하시니, 참……. 선생님께서도 동의하시죠?”
윤 실장의 감탄성이 테이블 맞은편에서 들려왔다. 보니, 윤 실장의 시선 또한 연인이 사라진 매점 입구 쪽을 향해 있었다. 윤 실장도 인환과 같은 생각으로 연인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이 찌를 듯한 뭇 공중의 시선을 윤 실장이라고 왜 모르겠는가.
“후후…… 예, 윤 실장님. 확실히 그냥 일반인으로 썩히기엔 많이 아까운 용모지요…….”
“몇 년 전에 제가 LA에서 사장님을 수행했을 땐데요, 선생님. 자회사 사주가 주최하는 어느 칵테일 파티에 초대받아 갔다가 실제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으시는 걸 목격했답니다. 팀 허드슨이라고 할리우드의 신인 감독이었죠. 사장님께선 코웃음을 치고 마셨지만, 하하…… 전 그게 어찌나 아깝던지요.”
“……그, 그런 일이 다 있었어요?”
연인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인환에게 고개를 돌린 윤 실장은 그네답지 않게 스캔들 비슷한 보스의 뒷담을 펼치고 있었다. 엄마의 묘역에서 윤 실장을 본의 아니게 푸대접한 뒤라 희미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터였다. 자신과는 달리 상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여서 속으로 마음을 놓은 인환이었다. 깊숙한 사귐은 아니라도, 인환은 나름대로 눈앞의 이 반듯하고 진중한 사내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좋아하는 상대로부터 미움을 받는 일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무심해질 수 없는 문제였다.
“정말이랍니다. 그 젊은 감독은 물론 저보다 더 안타까워했지요. 대스타 제목을 썩히게 됐다고요.”
“저런…….”
“우동은 다 드신 건가요? 달리 드시고 싶은 건 없으십니까?”
부드러운 표정으로 사내가 물어왔다. 좀 더 그 ‘LA발 스카우트 스캔들’에 관해 듣고 싶었지만 윤 실장은 그쪽으론 수다 욕구가 사라진 모양이었다. 배가 부르다고 사양하자 사내가 다시 차 종류를 권했고, 이번엔 인환도 거절하지 않고 녹차 라테를 부탁했다. 편안한 미소와 함께 잠시 자리를 뜬 윤 실장은 그네 몫인 카푸치노와 인환의 녹차 라테를 들고 다시 테이블 맞은편으로 와 앉았다.
“……그러고 보니 올해 들어서만 벌써 네 번째네요. 사장님께서 이곳을 찾으신 것도…….”
“……?”
“……지난해에도 대여섯 번쯤은 된 것 같고…… 지지난 해까지 합하면…….”
서로의 차가 반쯤 비워질 무렵이었다. 한동안 묵묵히 커피만 홀짝이던 윤 실장이 다시 툭 던지듯 말을 붙여왔다. 느슨해져 있던 공기가 순간 팽팽한 긴장을 띤 것은 순전히 인환만의 책임이리라. 거울을 보지 않아도 자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사장님께서 한국 지사장으로 취임하시고 귀국하신 때가 2000년 10월경이니 그때부터 헤아려봐야겠지요. 다 합하면 얼추 스무 번쯤은 되겠네요. 저도 사장님을 따라 그리 자주 걸음을 한 터라, 몇 해 전 작고하신 제 조부님 묘소보다도 더 익숙한 장소가 됐답니다.”
“……윤 실장님…….”
“……술이랑 이것저것 제수 음식들을 챙겨 내려왔습니다. 그나마 제가 동행해드린 것만 스무 번쯤이지, 사장님께서 홀로 찾아뵈신 횟수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을 겁니다. 선생님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셨는데 쉽사리 좋은 소식이 들리지 않았지요. 부정적인 보고가 전해질 때마다 너무나 힘들어하셨습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이곳으로 걸음 하시곤 했지요. 묘역에 도착하면 간단히 제를 올리기도 하셨고, 때론 그저 가만히 무릎을 꿇고 않으셔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하염없이 시간을 흘리다 올라가시곤 했지요.”
“…….”
“……그나마도 기일이 있는 6월엔 차마 염치가 없어 찾아뵙고 싶어도 찾아뵐 수가 없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혹시라도 선생님께서 찾아오실까, 흥신소 사람만 대신 내려 보내셨지요.”
“……아…… 안 갔어요…….”
힘겹게 일갈하자, 단정하고 사려 깊은 눈이 송곳 같은 주시를 주었다. 인환이 대화 주제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걸 짐작하면서도 거듭 제 하고 싶은 말을 멈추지 않는 건, 역시 엄마 묘역에서 취했던 인환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그토록 손을 잡아주길 희망하던 연인을 끝까지 냉랭하게 외면한 자신을 향한 윤 실장 나름대로의 섭섭함의 토로일 것이다. 혹은 존경하는 보스가 가차 없이 까이는 것에 대한 억울함과 안타까움 탓이겠지.
“……지난해에도, 지지난해 기일에도요. 부러 찾지 않았네요. 저, 제가…… 조금…… 유달리 힘들 때라…….”
입안이 말랐다. 어쩔 수 없이 변명조가 되는 건 윤 실장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은 아니리라.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픈 상대는 따로 있었다. 중요한 비즈니스 상대와의 통화를 위해 잠시 곁을 떠난 소중한 이였다. 물론 하고 싶어도 도저히 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진심으로 용서하지 못하는데, 미안하단 말을 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그것도 인환 자신이 가슴에 대못을 박아 죽인 엄마를 만난 직후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러니 대신 미안해할 수밖에 없다. 대신 사과할 수밖에 없다. 연인이 아니라면 그 누구한테든.
“……불효자라…… 어차피 그래서…… 자주 찾아뵙지 못했어요. 위야처럼은 도저히…… 도저히…….”
……미안해…….
“……그런 사장님을 가까이에서 지켜봐왔으니까요, 선생님. 주제 넘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도 자꾸 기원을 드리게 되네요. 선생님께서 사장님을 하루빨리 용서해주시면 사장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실까요…… 언젠가 선생님을 찾아내게 되면 마음을 고백한 후에 두 분이서 함께 큰절을 올리고 싶다고 그리 간절히 소원하셨었는데 말입니다.”
미안해, 위야…… 용서하지 못해서 미안해…… 손을 잡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절대 용서받을 수 없을 거라 그리 장탄식을 하시곤 했는데요…….”
함께 인사드리지 못해서…… 함께 용서를 빌지 못해서 미안해…… 네 편 들어주지 않아서…… 그래도…… 그랬는데도…… 엄마를 자주 찾아와줘서 고마워…… 내 대신 엄마의 원망을 받아줘 고마워…… 얼마나 자주 찾아뵀던 거니……? 좀처럼 반기지 않으셨을 텐데, 그간 얼마나 힘들었었니……? 내 대신 얻어맞았던 거지……? 욕먹고 비웃음당하고 냉대받고 벌서고 그랬니……? 엄마가 뭐라고 그래……? 쳐 죽일 놈이라고…… 다신 찾아오지 말라고 호통을 치시디……? 너 같은 나쁜 새끼한텐 나 못 주겠다고, 절대 사윗감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어깃장이라도 놓으셨어……? 정말로 절대 용서해주지 않을 거라고 그러셨니……? 아냐…… 아냐, 아냐…… 그러시진 않았을 거야…… 너 모르지? 울 엄마 마음이 얼마나 비단결인지…… 남한테 모진 소린 절대로 못 하시는 분이란 말야…… 그런 착한 울 엄마가 너 계속 때리고, 어깃장 놓고, 비웃고, 그러실 리 없거든……? 절대로 용서 안 해줄 거라고 패악을 부리실 리 없거든? 그러니까…… 그러니까…….
서울에 도착한 것은 6시 30분 무렵이었다. 짧아진 해 대신 어느새 시꺼먼 땅거미가 사위를 물들이고 있었다. 차가 동부간선도로에 진입했을 때 러시아워에 걸리는 바람에 집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날이 저문 7시 20분 무렵이었다. 러시아워를 피해보겠다고 제법 일찍 출발한 것이 무색하게 된 셈이었다. 윤 실장 일행을 태운 홍 기사 차는 강남역 근처에서 따로 떨어져 각자의 집으로 일행들을 배웅했고, 고영석도 연인과 인환을 삼청동 집에 데려다준 직후 남은 경호원 한 명과 함께 바로 퇴근했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쓰러지듯 거실 소파에 몸을 부린 건 지독한 피로감 때문이었다. 물 먹은 솜처럼 온몸이 나른하고 무거웠다. ‘그 일’로 몸이 꽤나 축난 건 사실이지만, 고작 하루 동안의 드라이브에 이리도 지칠 까닭은 없었다. 틀림없이 육체가 아닌 정신적인 문제다.
코트와 재킷을 벗어 미스 원에게 건넨 연인도 인환이 널브러진 소파 앞 카펫 위에 무릎을 접고 마주 앉았다. 무의식적인 행동인 듯, 연인의 두 손이 인환의 허벅지 위로 올라와 가만가만 쓰다듬기 시작했다. 제법 힘이 들어간 걸 보면 주무르는 것 같기도 했다. 모호한 연주를 시작한 피아니스트 신동의 손가락으로부터 연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겨갔다. 바닥에 앉은 자세 탓에 마주친 연인의 시선은 인환의 한참 아래에 있었다. 표정 없던 얼굴이 시선이 마주치는 즉시 해바라기처럼 환하게 피어난다. 핏기 없이 메마른 입술 끝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것도 보였다. 자신처럼 완전 널브러지는 기세는 아니어도 초췌한 얼굴 가득 서린 검은 기운은 역시 짙은 피로감이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자는데다 인환의 반만큼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연인이니 오죽할까.
“……피곤해도 저녁은 먹고 자야지.”
부드러운 채근이 떨어졌다. 허벅지를 어루만지던 손가락이 문득 위로 올라와 인환의 슈트 재킷을 벗기더니 소파 테이블에 걸쳐놓는다. 역시 무의식적인,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넥타이까지 느슨하게 풀어준 부드러운 손길은 이내 얼굴로 이동해 이마 위로 조금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이마와 양쪽 뺨들을 가만가만 쓰다듬기 시작했다. 마주 앉아 바라보고 또 어루만지고 있는 스스로를 믿기 힘들다는 듯, 불안한 듯 신기한 듯, 그렇게 인환의 얼굴만 하염없이 해바라기하고 있는 연인의 표정은 어딘가 몽환적으로 보였다. 퀭한 눈시울은 형형히 빛나고, 느슨하게 아래로 휜 입술 끝은 웃고 있다.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으로 충만한 웃음이 찬란하다. 일체의 번뇌를 다 덮어버릴 기세로, 눈이 시리도록 빛나고 있다. 그런다고 가려지는 게 아닌데. 가려지기는커녕 웃으면 웃을수록 더 드러나는 위화감인데. 연인의 얼굴 곳곳에 낙인처럼 새겨진 어두운 고통이 얇은 빛의 장막을 뚫고 검은 아우라를 잔뜩 피워 올리고 있었다.
“……점심을 우동 한 그릇으로 때웠으니 저녁이라도 제대로 먹어두는 게 좋아. 아주머니한테 상 차리라고 할 테니 욕실로 가서 씻고 나와. 응? 옷도 편한 걸로 갈아입도록 하고.”
얼굴의 웃음기가 고스란히 전이된 다정한 중저음은 연가(戀歌)처럼 달콤하기만 했다. 욕실로 가라면서도 오른손에 이어 왼손까지 얼굴로 올라와 눈물겹도록 다정한 애무에 가세했다. 그리 하염없는 두 손으로도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인지, 마침내 무릎걸음으로 성큼 다가든 핸섬한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쪽. 입술 위로 따스하고 촉촉한 접촉이 왔다. 살짝 옆으로 고개를 기울인 연인의 립 키스였다. 코롱 냄새에 섞인 그리운 체향…… 그리고 흐릿한 오렌지 냄새. 전화를 마치고 다시 매점으로 들어온 연인의 손에 들려 있던 그 오렌지였다. 올라오는 차 안에서 먹어보라 연인이 손수 까주었던 오렌지는 결국 몽땅 연인의 차지가 돼버렸었다. 윤 실장의 ‘고자질’에 다시 감정이 복받치는 바람에 아무것도 목 안으로 넘어가지 않아서였다.
쪽. 쪽. 쪼옥. 한번 시작하니 주체할 수가 없나 보다. 진한 립 키스가 얼굴 여기저기 소나기처럼 퍼부어진다. 수시로 거실을 들락거리는 아주머니들과 메이드 아가씨들조차 의식에 없는 것 같았다. 하긴 애초부터 그런 걸 신경 쓸 연인이 아니지. 점점 더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연인의 어깨를 살짝 밀자, 그제야 마지못해 떨어지는 연인이었다.
10센티쯤 떨어진 거리에서 바라본 연인의 표정은 흡사 사탕을 뺏긴 골목대장처럼 불퉁해 보였다. 더 하고 싶은데 하면 안 되나. 눈빛 가득 열렬한 텔레파시가 토해진다. 무방비한 그 얼굴이 사무치도록 사랑스러운 나머지 가슴이 미어졌다. 연인의 손을 와락 휘어잡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얼떨결에 따라 일어선 연인이 뭐라 하기도 전에 재빨리 주침실로 끌고 들어갔다.
침대 위에 연인을 앉히고 그 앞에 마주 서서야 연인의 주저하는 기색이 사라졌다. 사려 깊은 시선을 보니, 왜 느닷없이 침실로 연인을 데려왔는지 까닭을 헤아리고 있는 모양새였다. 대답은 물론 몸으로 해주면 될 일이었다.
손을 뻗어 연인의 넥타이를 풀기 시작했다. 드레스셔츠의 단추도 풀어 내던지자 단단하고 유려한 근육이 잡힌 아름다운 상반신이 드러났다. 무릎을 꿇고 앉아 벨트 버클을 푸는 데까진 성공했는데, 가속도가 붙었던 움직임에 제동이 걸린 것도 바로 그 시점이었다. 바지까지 벗기기 위해선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연인의 협조가 절실했다. 물론 연인은 당장은 협조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연인의 하반신으로부터 얼굴로 불만스러운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까닭을 헤아리고 있는 듯한 부드러운 눈시울이 보였다.
“……하자고…….”
불쑥 내뱉자, 연인의 잘생긴 한쪽 눈썹 끝이 슬쩍 치켜 올라간다. 대꾸는 없었다. 구체적으로 뜻을 전했건만 연인의 비협조적인 몸짓은 그대로였다. 연인의 양쪽 팔꿈치를 잡고 일으켜 세우려는데 이건 완전 고래힘줄보다 더했다. 질기게 미동조차 않는 연인에 문득 초조해졌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진 흡사 섹스 중독증 환자처럼 자신을 걸신들린 듯 탐하곤 하던 그였다. 연인이나 자신이나 일단 몸과 마음의 상처를 추스르는 게 급선무여서 그동안은 통 흥분하지 않는 연인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흡사 거세된 남자처럼 플라토닉한 접촉만 고수하려는 연인의 태도에도 그저 자신을 배려한 때문이라 여겼었다. 그런데 아닌가? 그저 싫은 건가? 배려 차원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을 향해서는 더 이상 욕구가 생기지 않는 건가? 그 일로 더 이상 섹스 하고 싶지 않을 만큼 상처 입어버린 건가?
“……나…… 이제 안고 싶지 않아?”
개선 장군마냥 거침없던 기세는 꺼질 듯한 물음으로 바뀌었다. 갑자기 눈앞이 하얘졌다.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지? 정말 망가진 거면 어떡하지……?
저 8일간의 유린이 정확히 어떤 모습이었는지 인환은 모른다. 직접적인 윤간 장면이 촬영됐던 며칠조차 그저 마약에 취해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다. 그러나 연인은 다를 것이다. 그 테이프를 보았고, 뇌리에 정확히 입력시켰으며, 그로 해서 극심하게 상처 입었고, 그 상처의 후유증으로 지금도 여전히 지옥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 정말로 섹스에 정나미가 떨어졌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흡사 9년 전, 연인과의 결별 이래 더 이상 발기하지 못하는 자신처럼.
“……내…… 내 몸에 이제 흥미 없어진 거야? 더…… 더, 더…… 더 이상 원하지…….”
“장인환!!!”
벽력같은 외침이 불안에 떨고 있는 인환을 단칼에 잘라냈다. 기를 쓰고 일으키려 해도 꼼짝 않던 몸이 벌떡 일어나는 게 보였다. 양쪽 팔이 거세게 틀어잡혔다. 악 소리가 터질 만큼 무시무시한 악력이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는 검푸른 동공이 보였다. 엄청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얻어맞는 게 아닐까, 움찔 몸이 소스라쳤다. 물론 연인이 자신을 때릴 리는 없었다. 그건 그저 본능적인 몸짓일 뿐이었다. 두려운 전율은 양팔을 움켜쥐고 있는 연인의 두 손을 통해 연인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순간 고통스레 일그러지는 얼굴이 보였다. 크게 부릅떴던 눈꺼풀이 내려앉으며 파르륵 경련하는 것도 보였다. 기왕에 창백했던 안색은 아예 백짓장이었다. 두려운 와중에도 당장 연인이 쓰러지는 게 아닐까 엄청 걱정이 되었다. 얼굴로 거세게 내뿜어지는 연인의 숨결이 뜨거웠다. 한동안 눈을 꼭 감은 채, 연인은 힘겹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장인환…….”
마침내 한결 안정된 중저음이 한숨처럼 토해졌다.
팔을 움켜잡고 있던 연인의 오른손이 인환의 왼손목까지 내려왔다. 붙잡힌 손목은 곧 연인의 사타구니 사이로 이끌렸다. 지퍼가 내려지고, 속옷까지 단숨에 헤쳐지더니 까칠하고 무성한 치모가 손바닥 가득 감촉되었다. 좀 더 아래로 끌려 내려간 손은, 마침내 뜨겁게 일렁이기 시작한 연인의 위험스러운 흉기와 접하게 되었다.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쓱쓱. 위아래로 두어 번 연인이 문지르게 했고, 기왕에 반쯤 발기해 있던 그것은 이내 속옷까지 뚫을 기세로 힘차게 솟구쳤다.
“……확실히 느껴지지……?”
나지막하게 던져진 물음은 부드럽고 또 부드러웠다.
창백했던 연인의 얼굴에 흐릿하게 핏기가 서리고 있었다. 관자놀이 부근은 어느새 분홍빛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흥분의 여파이리라.
“……마음만 돌려 먹으면 언제든지 이렇게 될 수 있어. 직접 만지지 않아도 돼. 그저 네 냄새만 한 번 맡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
“……네 눈빛만 슬쩍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몇 번이나 할 수 있어. 밤낮으로 먹지도 자지도 않고 이 짓만 하라고 하면, 그건 더 횡재한 기분이겠지. 네 속에 박아 넣고…… 단 한순간도 빠져나오려 하지 않을 거다. 넌 잘 모르는 것 같지만.”
“…….”
“……그런데 요새 안 하는 건…….”
“…….”
“굳이 할 필요가 없어서야. 내 마음을 숨기지 않고 다 전했으니, 이렇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거든.”
“…….”
“기다릴 생각이지. 네가 나처럼 하고 싶어질 때까지. 아주 나중에…… 네가 다 나아서 날 갖고 싶어지면 그땐 진짜로 네 속에 들어가서 절대 안 나올 거야. 3박4일쯤은 거뜬히 말이다.”
“…….”
발갛게 달아오른 아름다운 얼굴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아랫배를 찌를 듯 꼿꼿하게 발기해 있는 페니스가 인환의 손바닥 아래서 경련하고 있었다. 그저 다정하고 상냥하기만 한 표정이 의심스러울 지경으로 흉흉한 기세였다. 어느새 질척하게 스며든 쿠퍼액이 주인의 쑥스러움도 아랑곳 않고 인환의 손을 흠씬 더럽히고 있었다. 멍하니 손가락으로 조몰락거리자 혈관이 도드라진 뜨거운 음경에 불끈 하고 힘이 더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흐웁. 순간 억눌린 신음이 연인의 메마른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왔다. 연인의 플라토닉한 웃음과 여유는 그것으로 끝장이 났다.
연인의 또 다른 한 팔이 인환의 상반신을 거칠게 품어 안았다. 등줄기를 휘감은 단단한 연인의 팔에 좀 더 힘이 들어갔다. 사슬처럼 아프게 조여대는 포옹에 가쁜 한숨이 토해졌다. 어깨와 목덜미 사이로 연인의 얼굴이 파묻혔다. 촉촉하게 땀이 배어나온 연인의 뜨거운 체온에 몸이 떨렸다. 연인의 흥분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달라붙은 인환의 몸에도 고스란히 전해져 심장을 전율시키고 있었다. 잔뜩 미간을 구긴 연인의 수음질이 거세졌다. 인환의 손등에 겹쳐진 연인의 손가락이 음낭과 음경을 한꺼번에 틀어쥔 채 빠르게 끄덕거리고 있었다. 극점까지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억눌린 교성을 간간이 뱉어내며 2∼3분쯤 허리를 흔들던 연인이 이윽고 뻣뻣하게 몸을 굳힌 채 엄청난 양의 정액을 뿜어냈다. 배출과 동시에 연인이 포옹을 풀고 침대 머리맡의 휴지로 손을 뻗었지만, 연달아 거침없이 분출하는 정액은 이미 인환의 손바닥을 흠뻑 적시고도 모자라 인환의 아랫배 근처를 온통 더럽히고 말았다. 늦었다는 걸 자각했는지 연인도 뽑아 든 휴지를 도로 내버리곤 다시금 인환의 상반신을 끌어안은 채 오르가슴의 여파를 견뎠다.
거친 호흡을 토해내며 미세하게 떨고 있는 거구의 몸이 점점 더 인환 쪽으로 체중을 싣고 있었다. 힘들어한다는 증거였다. 엉망인 컨디션으로 자위를 했으니 말해 무엇 할까. 거의 탈진 상태나 다름없을 것이다. 지난달 뉴욕으로 출근하기 전날 안기고 마지막이었으니 근 한 달 만의 행위일 것이다. 평소의 배는 될 엄청난 양에 훨씬 짙은 냄새를 풍기는 정액으로 보아 거의 틀림없을 터이다.
후들거리는 거구의 몸을 조심조심 침대 쪽으로 밀자, 별 저항 없이 뒤로 벌렁 쓰러지는 연인이다. 그 와중에도 상반신을 휘감은 연인의 포옹은 풀리지 않았다. 덕분에 인환의 몸까지 연인의 위로 속수무책 쓰러지고 말았다. 장정 둘의 체중이 갑자기 실린 매트리스가 출렁 하고 요동을 쳤다. 서로 꼭 끌어안은 채 눈을 감고 진동을 음미했다. 연인이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겹쳐진 인환의 몸도 오르락내리락했다. 연인이 기운을 차릴 때까지 한동안 가만히 누워 시간을 죽였다. 따스하게 전해지는 체온도, 옷가지 너머 감촉되는 근육과 피부의 친숙함도, 짙은 정액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인 아릿한 체취도, 마냥 좋기만 해서 가슴이 설레었다. 어느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품 안의 연인은 완벽했다. 자신만의 완벽한 우주였다.
“……옷…… 세탁해야겠다.”
5분쯤 지났을까, 한결 차분해진 숨을 섞어 연인이 중얼거렸다. 희미하게 수치감이 서린 걸 보니 연인은 여전히 쑥스러워하고 있었다. 가만가만 인환의 등줄기와 머리와 엉덩이를 번갈아 쓰다듬는 손길에서도 연인의 당혹감이 전해졌다.
그저 인환에게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주고 싶었을 뿐, 자위까지 갈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자제력을 잃은 게 뭐 그리 부끄럽다고. 사내라는 동물이 다 그런걸. 그리 입 밖에 내어 위로하면 더 쑥스러워할 것 같아 그냥 모른 체하기로 했다.
자신에게 마음을 고백한 이래, 새삼 내외하는 것 같은 기색을 종종 보이는 연인이다. 막 첫사랑을 앓는 풋풋한 소년처럼. 그게 또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워서 위화감을 느끼는 와중에도 인환은 연인에 대한 애정이 북받치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나쁜 놈에 사기꾼에 독종이지만, 이럴 때만큼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다 받아주고 싶어진다. 이 남자가 원하는 거라면 그게 뭐든. 전부 다 이해해주고, 용서해주고, 물리도록 열렬히 사랑해주고 싶어진다.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진다. 더는 아프지 않도록 연인의 아픔까지 몽땅 다 대신 받고만 싶어진다. 회한과 원망과 미움의 양가감정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손도…… 닦아야겠다. 끈적끈적하고 냄새도 지독하군. 아예 샤워를 하는 게 좋겠지? 밥 먹으려면……. 딱 10분만 더 쉬고 샤워하러 가자…….”
연인의 정액 범벅인 자신의 왼손을 끌어올려 손가락마다 쪽쪽 입을 맞추더니 연인이 마지못해 중얼거린다. 샤워고 밥이고, 실은 이렇게 달라붙어서 언제까지고 노닥거리고픈 연인의 심사가 고스란히 읽혀서 웃음이 났다. 정말로 나쁜 새끼다. 더 이상 미워할 수가 없다. 원망할 수가 없다.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내년 기일에 다시 가…….”
연인의 품 안에 깊숙이 파묻혀 있던 얼굴을 살짝 들고 연인과 시선을 맞췄다. 움푹하니 들어간 깊은 눈시울이 더할 나위 없는 절절한 애정을 품고서 이쪽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거무스름하게 내려앉은 다크 서클이 가슴 아파 반사적으로 아래 눈두덩에 키스했다. 혀끝으로 더듬고 정성을 다해 가만가만 핥아주었다. 그러면 이 안쓰러운 어둠이 사라질 것 같았다.
“……내년에 함께 또 울 엄마한테 가자. 그땐 나도 네 옆에서 인사드릴 수 있을 거야. 아니, 꼭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
연인의 눈시울이 휘둥그레진다. 많이 놀랐나 보다. 나른하게 기진맥진해 있던 온몸이 굳어들었다. 멍하니 멍청하게 입까지 벌어져선 뚫어져라 불화살 같은 시선만 쏘아 보내고 있다.
“……내가 안 괜찮아, 너 평생 기다리는 거. 평생 벌 받으며 괴로워하는 거…… 넌 괜찮을지 몰라도 난 안 그래. 내가 더 힘들어. 그럴 거 같애. 그래서 안 되겠어.”
“…….”
“……내년 엄마 기일까진 너 용서하도록 이를 악물고 노력할 거야. 그러니깐 너도 열심히 노력해줘. 악몽 안 꿀 수 있게…… 더는 힘들어하지 않게 노력해줘야 해.”
“…….”
“……내가 네게 저지른 나쁜 짓들도 다 용서해주고…… 그렇게 상처 입힌 것도…… 그만 다 잊어주고…… 아, 아무튼…….”
젠장. 또 목이 멘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그새를 못 참고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떨어진 눈물은 연인의 뺨에 파문을 일으키더니 연인의 관자놀이 쪽으로 뜨끈한 물길을 만들어냈다. 자신이 울고 있는 건지, 연인이 울고 있는 건지 아리송해졌다. 연인의 눈시울 또한 붉게 변한 때문이었다.
“……나 때문에 너 아픈 거 싫어. 고집 부리지 말고 성준 씨한테 부지런히 치료도 받아. 실어증 고쳐진 것 말고는 마음 다친 거 하나도 낫지 않았잖아. 최선을 다해서 극복해줘. 더는 아프지 않게…… 아니, 아프다가도 금방 나을 수 있도록. 그럼 내년 기일엔 울 엄마한테 데려가줄게. 못돼 먹은 사윗감이라고 소개도 해주고, 못돼 먹었지만 그래도 잘나고 예쁜 내 신랑이니 조금만 봐달라고…… 그만 용서해달라고 대신 부탁도 해줄게. 그땐…….”
“…….”
“……그, 그렇게 함께 인사드리도록 하자…… 진짜로 부부가 돼서…….”
“…….”
“……하지만 너무 좋아하진 마.”
“…….”
“……그때까진 너 실컷 미워하고 원망하고 욕도 해줄 거야. 세상의 험한 욕이란 욕은 다 배워서 잔뜩 퍼부어줄 거야. 엄마 기일 되려면 아직 반년이나 더 남았으니깐 미리 너무…….”
더 이상 말을 계속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연인의 눈빛도 볼 수 없었다. 등줄기와 뒤통수를 와락 조인 연인의 커다란 손바닥 덕분이었다. 다시금 연인의 품 안에 파묻힌 얼굴이 연인의 물결치는 가슴 근육에 온통 짓눌렸다. 갈비뼈가 으스러져라 죄어들었다. 코와 입이 틀어막혀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연인의 두 다리가 허벅지 위까지 올라와 하반신마저 친친 휘감겼다. 그대로 한 바퀴를 굴러 위치를 역전시킨 연인이 위에서 경련하듯 온몸을 떨고 있었다. 숨길은 다시금 폭풍을 맞은 것마냥 거칠게 일렁이고 있었다. 가슴팍에 짓눌렸던 얼굴이 다시 위로 치켜 올려졌다. 겨우 숨길이 제대로 트이는가 싶더니 이번엔 온 얼굴로 소나기 같은 키스가 퍼부어졌다. 순식간에 온통 연인의 눈물과 타액 범벅이 된 얼굴로 가쁘게 숨을 헐떡여야 했다. 하지 말라고 괴롭게 중얼거려보아도 연인의 광기 어린 흥분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런 게 로또 맞은 기분이겠지?”
사나운 쇳소리가 맞붙은 입술 끝에서 터져 나왔다. 웃는 건지 울부짖는 건지 모호한 절규였다. 키스를 하다가, 뺨을 비벼대다가, 또는 볼살과 턱을 질겅질겅 깨물다가…… 어찌나 흥분을 했는지 정말로 미친놈 같았다. 미친 야수 같았다.
“……하지만 괜찮아…… 재수 옴 붙은 놈인걸…… 주제에 대박을 기대하면 안 되지…… 아무렴, 욕심 내지 않을 거야…… 그렇게 살 거다, 장인환…… 일생 이대로 벌 받으면서 살 거야…… 욕심 부리면 빼앗길지도 몰라…… 이마저도 뺏길 거야…… 그러니 안 돼…… 다시 뺏기면 살 수 없어…… 미쳐서 발광하다 죽을 테니…… 원통해서…… 한이 남아 죽어도 귀신이 돼 너만 사방으로 찾아 헤매겠지…… 그러니 안 돼…… 암, 안 되고말고…….”
입맞춤인지 푸념인지 비명인지, 뒤죽박죽 폭풍 같은 열정을 토해내던 야수의 입술이 잠깐 떨어지는가 싶더니 크게 상반신을 뒤틀며 진저리를 치다간 도로 본드처럼 달라붙었다. 이번에야말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입술은 물론, 얼굴도, 가슴도, 다리도…… 친친 휘감은 채 어찌나 조여대는지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미친 야수 좀 진정시켜보려던 입술은 끝끝내 자유를 찾지 못한 채 그대로 잡아먹히고 말았다. 후루룩 냠냠 짭짭 질겅질겅. 살점도, 핏방울도 몽땅 다 집어삼킨 야수가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렸다. 삼키고 또 삼켜도 부족한 듯, 으르렁거리는 포효 속엔 지독하게 음습하고 악마적인 허기가 들어앉아 있었다.
빈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쩐지 야수는 진짜로 용서를 바라지 않는 것만 같았다. 아니, 용서해주면 더 불안해할 거라 울부짖고 있었다. 잔뜩 겁에 질리고 두려운 나머지, 온 넋을 떨고 몸부림치며, 필사적으로 용서에 저항하고 있었다. 평생을 갇혀 살아 영영 뛰지 못하게 된 것 같았다. 억누르고 또 억누르는 바람에 단 한 가지도 스스로 원하지 못하게 된 것도 같았다. 치명상을 입은 채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야수였다. 쉬이 손을 뻗을 수 없었다. 죄다 물어뜯을 기세였다.
그날 밤, 연인은 자다가 두 번을 더 깨어났다.
단말마의 신음성과 식은땀 범벅인 몸을 뒤틀고 일어나더니, 사지를 벌벌 떨며 소리 없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밤들처럼 증오가 가득한 비명과 저주는 더 이상 토해지지 않았다. 그게 더 나아진 상태인 건지는 확실히 판단할 수 없었다. 악몽은 여전했고, 고통의 강도 또한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인환은 희망의 끈을 놓을 생각은 없었다. 자신은 노력할 터였다. 연인 또한 적어도 노력은 해보겠다고 약속해주었다. 14년은 긴 시간이었다. 기나긴 고통엔 그만큼 기나긴 화해가 필요할 것이 자명했다. 그러니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연인처럼 그나마도 다 잃을 것을 겁내 시도조차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벌벌 떠는 연인의 몸을 꼭 끌어안은 채 다짐했다. 익숙해지자고. 조금만 덜 아파하고, 조금만 덜 눈물 흘리자고.
시체 같은 무표정으로 고요하게 눈물만 줄줄 흘리는 연인의 뺨을 어미 새처럼 핥아주며 맹세했다. 좀 더 강해져서 언젠간 꼭 연인과 자신을 용서하자고. 길고 길게 아팠던 자신들의 14년을 용서하자고.
금요일이었다.
엄마의 묘역에 다녀온 다음 날 하루를 더 쉰 연인은 그다음 날인 오늘 아침 다시 출근을 했다. 김성준에게 정신과 치료를 받으라는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 덕분에, 아침 일찍 김성준의 병원에 들렀다가 회사로 직행한 모양이었다. 서너 시간이 지나도록 연인이 돌아오지 않아 막 전화라도 걸어보려는데 휴대전화가 울었다. 연인이었다. 이미 회사에 도착해 밀린 보고를 받고 있고, 오후엔 그간 미뤄졌던 임시 주주 총회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했다. 주주 총회만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올 거라고 여러 번 다짐을 주는 연인이었다. 제 걱정 같은 것은 하지 말고 마음 편히 기다리라고.
윤 실장이 거의 매일 집으로 결재 서류들을 물어 오긴 했어도 근 한 달 동안 이어진 보스의 공백을 메우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며칠은 더 쉬면서 몸과 마음을 치료하길 바랐지만, 연인은 이미 일 전쟁에 돌입한 것 같았다. 안타까워 죽겠어도 그건 인환이 참견할 영역이 아니었다. 일에 있어선 지독하게 완벽주의자인 연인이니 본인이 기왕에 작정을 했다면 말릴 수 없으리라. 그럼에도 수화기 너머에서 느껴지는 연인의 심리 상태는 여전히 정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인환에 대한 여전한 근심과 여전한 불안감이 미세하게 걸러졌다. 소소한 신변잡기 안부를 나누고, 애정이 뚝뚝 흘러넘치는 짓궂은 성희롱도 당하고, 몇 번이나 하하하 하고 웃는 싱그러운 웃음소리를 들어도 소용없었다. 연인의 근심과 불안은 도로 고스란히 인환의 것이 되었다. 연인과의 통화를 끝낸 후 바로 김성준에게 전화를 건 것도 그 때문이었다. 벌써 출근해도 괜찮은지, 오늘 진찰한 결과는 어떤지, 자신보다는 비교적 객관적일 전문가의 판단을 듣고 싶었다.
[차라리 회사에 출근하는 게 더 나을 겁니다.]
더듬더듬 어눌한 말로 우려하는 바를 전하자, 담담히 되돌아온 김성준의 대꾸였다. 연인의 병명인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은 쉽게 치료되지 않으며, 독한 놈이라 그나마 회복이 빠른 케이스라 했다. 육체에 무리가 가지 않는 한 예전의 일상성을 회복하는 편이 치료에도 도움이 된다고.
[……물론 장 선생님의 협조가 매우 중요합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덧붙인 말이었다. 연인은 인환의 상태에 과할 정도로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인환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성향은 얼핏 치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만, 역으로 인환의 상태가 양호하다면 덩달아 그만큼 빨리 호전될 가능성도 크다는 얘기였다. 인환 역시 과거의 상처에서 완벽히 벗어난 게 아니기 때문에 둘 다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흔들리지 말아달라는 모호한 부탁을 마지막으로 김성준의 전화가 끊겼고, 인환은 한동안 멍하니 김성준의 간곡한 부탁의 말을 곱씹어야 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머리는 복잡해지고 근심만 증폭될 뿐이어서 곧 마음을 돌리긴 했지만. 어찌 됐든 회사에 출근하는 것이 빠른 치료에도 도움이 된다면 일단 출발은 괜찮다는 얘기가 아닌가. 미리 근심하고 부정적인 추측에 골몰해봤자 자신에게도, 연인에게도 절대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였다. 그 즉시로 4층 작업실에 올라가 붓을 든 것은. 자신 또한 빠르게 일상성을 되찾는 편이 그의 치료에도 도움이 될 터였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오전 중에 세 시간쯤 그림을 그렸고, 점심을 먹었고, 점심을 먹은 후엔 한 시간 가까이 수영을 했다.
며칠째 계속 됐던 때 이른 추위는 제법 많이 풀려 있었다. 낯 기온도 영상을 되찾았기에 최 씨 아저씨에게 수영장 물을 데워달라고 부탁했었다. 피부에 닿는 물은 따스하고, 공기는 상대적으로 몹시 차가운 상태에서 하는 실외 수영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흡사 한겨울 노천 온천 같기도 해서, 새삼 연인의 배려에 고마운 마음이 든 인환이었다. 인환만을 위한 호사라면 에너지 낭비라는 생각에 꺼려졌겠지만, 낮에 상주하는 경호원들이거나 최 씨 아저씨를 위시한 집 안의 남자들도 종종 인환이 하지 않는 틈을 타 수영을 즐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난 달 뉴욕으로 출국하기 직전까진 가끔 연인과도 함께 수영을 했으니, 완전히 낭비되는 에너지만은 아닌 셈이었다. 물론 혹한이 시작될 12월 말경부턴 데운 물로도 지금처럼 수영을 즐기긴 힘들어질 것이다.
수영을 끝낸 후, 혼곤해진 몸을 추스를 겸 잠깐 낮잠을 잤고, 다시 4층 작업실로 직행해 물감을 개기 시작했다. 붓을 잡은 지 한 시간쯤 더 지났을 무렵이었다. 몇 번이고 되풀이된 노크 소리에 소스라쳐 대꾸를 주자, 빼꼼 열린 작업실 문틈으로 미스 정의 귀여운 얼굴이 나타났다.
“……아래층에 손님들이 오셨어요, 선생님! 괜찮으시면 뵙고 가고 싶다세요! 제 생각엔 꼭 만나보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얼굴이 조금 상기돼 있고 목소리도 흥분된 어조였다. 미스 정의 상태를 봤을 때 꽤나 중요한 손님인 듯했다. 작업용 앞치마를 벗으며 누구냐고 묻자, 미스 정은 대답 대신 생글거리는 웃음만 지었다.
“……저기, 내려오실 거면 비밀로 해달라고 하셨거든요. 그니까 저 야단치시면 안 돼요, 선생님.”
하. 그렇게까지 말하는 데야……. 추궁할 생각도 없지만, 추궁해도 여간해선 알려주지 않을 것 같았다.
미스 정을 따라 내려가면서도 그다지 손님에 대한 호기심은 일지 않았다. 집에 찾아올 사람들이래야 빤했다. 김성준이거나 연인의 동생인 문휘, 그리고 이 의원 정도리라. 엄밀히 말하면 인환의 손님이 아닌 연인의 손님, 아니, 연인의 ‘가족’들만이 연락 없이도 언제든 이 집에 발을 들일 자격이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거실로 들어서자 익숙한 인영 둘이 인환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게 보였다. 한쪽은 베이지색 점퍼에 쥐색 코르덴 팬츠 차림인 이 의원, 다른 한쪽은 블랙진에 암갈색 양모 코트 차림인 문휘였다. 거실 창 밖으로 어슬렁거리는 그림자 두서너 명은 이 의원의 비서진일 것이다.
내려오며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한 덕분일까? 동요하지 않고 이 의원의 호의적인 인사에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예상한 그대로라 그리 놀라지도 않았고, 이 의원보다 몇 배는 더 인환을 긴장시키곤 하는 청년도 사흘 전에 한 번 부딪친 전적이 있었다. 사흘 전, 나름대로 예의 바르고 기묘했던 대면 탓에 청년에 대한 두려움은 제법 희석된 상태였다. 물론, 그렇다고 차마 반갑다고까지는 인정할 수 없었지만. 어찌해도 아직은 많이 부담스럽고 또 불편한 사람들이었다.
“……아…… 앉으세요, 의원님. 휘, 휘 군도 여기……. 위야는 아침에 출근했는데 곧 들어온다고 했으니…….”
흐릿하게 붉어지는 얼굴을 자각하며 소파에 앉을 것을 권하자, 이 의원은 더 짙게 미소 지었고 청년의 잘생긴 얼굴엔 당혹감이 떠올랐다.
“……위야를 만나러 온 게 아닙니다, 제수씨. 제수씨를 뵈려고 왔지요. 제수씨도 이리 앉으세요. 위야 녀석한테서 많이 괜찮아지셨다고 들었는데 얼굴색은 여전히 좋지 않으시네요. 하루 빨리 건강을 회복하셔야 할 텐데 정말 걱정입니다.”
미처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이 의원의 두 손이 인환의 오른손을 꼭 움켜쥐었다. 인환의 손을 잡은 즉시 인환이 먼저 권해주었던 소파 한쪽에 인환을 앉혔고, 곧이어 이 의원도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충격은 한 템포 느리게 왔다.
나란히 앉은 이 의원이 상반신만 살짝 튼 자세로 인환을 굽어보고 있었다. 이 의원의 두 손에 잡힌 오른손에 따스하고 친밀한 체온이 전해지고 있었다. 분명 현실인데, 전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마주한 이 의원도, 이 의원에게 붙잡힌 손도, 인상 좋은 하회탈 얼굴에 활짝 퍼져 있는 웃음도, 그리고…… 제수씨…… 제수…… 씨…… 라는 호칭은……. 가만, 제수씨라고? 제수씨라고 했나, 지금……? 그 ‘제수’씨……?
“……그래서 제수씨 드시라고 보약 좀 지어보라고 했는데 일단 맥부터 짚어봐야 한다지 뭡니까, 망할 돌팔이 자식이…… 아, 예. 그 망할 자식은 제 감방 동기이기도 하고, 조금 유명한 한의사이기도 해요. 특히 침을 잘 놓는 편인데 영등포시장 근처서 개업하고 있지요. 좌우간, 그래서 보약은 뒤로 미뤄야 하겠고, 우선 이것부터 가져왔습니다.”
이 의원의 점퍼 안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꼬깃꼬깃 구겨진 편지 봉투 하나였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인환의 손가락을 가만히 펼친 이 의원이 봉투를 쥐여주곤 다시 그 위에 그네의 양손을 포갰다. 위화감을 느낄 새도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친밀한 스킨십이었다.
“……일본 왕복 항공권이랑 홋카이도에 있는 료칸 예약 바우처예요. 내달 11일부터 15일까지 4박5일 일정입니다. 12월이면 온천 여행을 하기 그만인 계절이지요. 위야 녀석이 신혼여행도 시켜주지 않았다길래 괘씸해하고 있었는데, 마침 어제 일본 왕복 항공권이 공짜로 들어왔지 뭡니까. 정치 자금도 아니고, 뭐, 좀 뇌물 성격이 짙긴 하지만 이 정도는 뜯어먹어도 큰 흠은 안 될 거예요. 어차피 돈만 남아도는 졸부 땅박이 놈인데요, 뭘. 얍실한 쥐새끼야 내동 그러다 죽으라죠.”
“…….”
“……잘 나왔어요. 처음 봤을 때부터 잘 나온 웨딩 사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의원의 시선이 벽난로 위 벽에 걸려 있던 웨딩 사진으로 향했다가 다시 인환의 얼굴로 되돌아왔다. 기왕에 흐뭇한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입술이 좀 더 크게 벌어지자, 축 처진 눈매도 입술을 따라 길게 찢어져 눈동자라곤 아예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영락없는 깜장 하회탈이었다.
“웨딩 사진을 찍었으니 신혼여행도 가셔야지요. 언젠간 제대로 된 혼인식도 올리셔야 하고요. 좌우간 신혼여행만큼은 제 능력으로 보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야, 빚만 산더미인 저에 비해 녀석은 돈을 억수로 벌어들이고 있는 부르주아이니 이만한 일로 생색내는 것도 몹시 우세스럽긴 합니다만, 하하.”
“…….”
“……능력 모자란 형이지만 그래도 형 노릇은 제대로 하고 싶은 욕심이랍니다, 제수씨…….”
“…….”
“……위야 녀석이랑 한 며칠 푹 쉬다 오세요. 료칸도 아선의 안 회장에게 물어서 제일 괜찮은 곳으로 예약해두었답니다. 시설도 좋고 조용하고, 홋카이도 온천 여행지 숙소로는 최고랍니다.”
“…….”
“……예, 예약은 제가 했잖아요, 형!!!”
옆으로 어둑한 그림자가 어리는가 싶더니 느닷없는 외침이 끼어들었다. 완전히 넋이 나간 눈이 무의식적으로 옆을 보았다. 연인과 붕어빵인 얼굴이 보였다. 놀라운 유전자의 법칙이었다. 얼핏 연인과 비슷한 얼굴에 비슷한 덩치의 청년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거구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 있고, 수려한 얼굴은 홍시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료칸 말예요…… 윤열이 형은 컴맹에다 일어도 모르니깐…….”
먼저의 흥분한 외침과는 달리 한결 톤이 내려간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고, 말투 또한 확연하게 더듬거리고 있었다.
“……저, 저 아니었음 제대로 예약도 못했을걸요, 형은? 초 인기 있는 숙소라 제 덕분에 간신히 추가 예약이 된 건데, 형 혼자만 생색내기예요……?”
“아따, 이눔아가 시방 뭐 잘혔다고 주딩이질이여? 형수헌티 싸게싸게 사과허고 오라캤더니 천하에 모지리맹키로 낯빠닥 벌게가꼬 기냥 도망 와싼 눔이?”
“……혀, 형!!!”
“고라고 모다 분탕질을 쳐 싸놓고, 몰랐다고 허면 다냔 말이시? 용서해주실 때꺼정 쌔빠지게 빌라 캤더니, 성 말이라문 허냥 귀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로 듣는당께?”
“…….”
“아따, 몰뚱하니 서서 무다고 자빠졌냐? 당아도 사과럴 안 허고 뻐둥길텨?!”
“……이, 이 사람도 잘못한 게 많은데 왜 나만……!”
“뭐시여?! 이 사람?! 시방 형수헌티 이 사람이라고 씨불였어야?!”
“…….”
“오매, 저눔 싸난 눈구녁 좀 보소! 느자구 없능거! 시방 너가 성헌티 귀싸대기럴 맞고 자퍼 환장얼 혔어! 그라제?! 시방 니눔 눈탱이가 밤탱이맹키로 맹글어뿌까?”
“……아, 씨발…… 젠장…….”
“당아도 잘혔다고 뻐둥길텨?! 언능 무릎 꿇지 모더야?!!!”
“……!!!!”
이 의원의 어조가 점점 더 엄격해지다가 마지막엔 경천동지할 호통으로 변했다. 이 의원의 호통이 떨어지자마자 붉게 상기돼 있던 청년의 얼굴이 일순 창백해졌다. 도톰한 청년의 입술이 앙다물리는 게 보였다. 잔뜩 굳어든 덩치가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줄곧 이 의원을 향해 있던 청년의 시선이 문득 인환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눈빛에 잠시 반항기가 서리는가 싶었지만, 이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단단하게 굳어든 청년의 표정에서 무언가 결연한 의지 같은 것이 읽혔다.
청년의 커다란 덩치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한쪽 무릎이 접히고, 눈꺼풀이 반쯤 내리덮이는 게 보였다. 청년의 고개도 눈꺼풀을 따라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마침내, 인환 앞에 완전히 무릎을 꿇은 자세가 된 청년이 더듬더듬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죄송…… 합니다…….”
청년의 목소리였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정말, 청년의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제가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문득 눈앞이 아득해졌다. 현기증 탓인지 무릎을 꿇은 청년의 뒤통수가 커다랗게 흔들려 보였다.
“……혜, 혜윤이 일은 아직도 많이 원망스럽지만…… 그렇지만 저도 많이 잘못한 걸 깨달았습니다.”
심장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것 같았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목구멍이 아플 정도로 숨이 가빴다. 귓속에선 윙윙 이명이 일었다. 청년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 그래서 사과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진심으로요…… 형 실어증 고쳐주신 것도 고맙고…… 아무튼 겸사겸사…… 그래서 컴맹인 윤열이 형 대신 료칸도 예약하고…… 아아, 물론 윤열 형 비서분들 시켜도 되는 거긴 했지만…….”
정말 이게 청년의 목소리라고? 질겁한 넋이 확답을 구했다.
“……용서해주세요, 형수…….”
응, 물론이지…….
어딘가로부터 자비로운 대답이 떨어졌다.
그리고, 곧 구원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