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 2003년 12월. 장인환(張仁歡) (104/129)

44. 2003년 12월. 장인환(張仁歡)

허리의 아픔을 자각하는 것과 함께 눈을 뜬 것은 새벽 3시가 조금 지난 무렵이었다. 

의식이 들자마자 흠씬 두들겨 맞은 것 같은 근육통이 전신으로 달려들었다. 반사적으로 흐릿한 신음을 흘리자, 허리께를 따끈하게 덮고 있던 것이 와락 조여들었다. 연인의 팔이었다. 자연스레 끌려들어간 얼굴과 상반신이 가 닿은 곳도 연인의 따스한 품 안이었다. 고개를 살짝 들어 살펴보았지만 연인의 눈꺼풀은 꼭 감긴 채였고, 입술도 살짝 벌어진 무방비한 모습이었다. 정원을 밝힌 미등의 불빛이 창문으로부터 스며들어 연인의 이목구비 위로 뚜렷한 음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눈에 띄게 여윈 아름다운 얼굴엔 깊은 숙면의 자취만 선연해서,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퍼지며 가슴이 아릿해졌다. 자신이 조금만 몸을 움직이기만 해도 늘 반사적으로 자신을 품곤 하는 연인의 애정이 절절했다.

가만히 숨을 죽인 채 기다리니, 이윽고 허리와 등줄기를 감은 연인의 양팔에서 슬며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기회다 싶어 살그머니 허리를 빼 연인의 품 안에서 빠져나왔다. 연인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떨어지는 것은 아직도 여전히 절박하게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허리가 꽤나 아픈 때문이었다.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침대를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진 바스 가운을 걸친 뒤 침대 옆에 다리를 뻗고 앉았다. 상체를 기울여 스트레칭을 하자 온몸의 뼈가 삐거덕거리는 것 같았다. 허리는 좀 시원해진 대신 사지의 근육들은 더 아프고, 한계까지 연인을 받아들였던 하반신의 아픔도 역시 선명했다. 그래도 긴 시간 동안 침대 속에서 뒹굴었던 몸을 풀어주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다.

거의 열 시간에 가까운 수면이었던 것 같았다.

어제 오전 10시쯤, 호텔에서 룸서비스로 아침을 먹은 후 바로 서울로 출발했었다. 묘하게 서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서울로 이동하는 내내 연인은 어쩐지 꽤나 초조한 기색이었고, 집에 도착해서도 한동안은 안절부절못한 채 자신을 품 안에서 놓을 생각을 안 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실로 뛰어들어 서로 한 몸처럼 달라붙다시피 하며 시간을 흘렸다. 단 한순간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것은 연인도 자신 못지않은 것 같았다(단 몇 시간의 별리도 못 참고 홍 기사를 재촉해 대전까지 달려 내려간 자신은 확실히 반쯤은 미쳐 있었다고 해야 옳다). 부랴부랴 서로의 옷을 벗기곤 대전의 호텔에서처럼 알몸인 채로 침대 위를 뒹굴었다. 당연히 흥분하게 된 서로의 몸에도 불구하고, 3일 동안 섹스 금지라는 약속만은 지킬 작정이었는지 연인은 그저 포옹과 키스와 애무만을 끊임없이 반복할 따름이었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나왔을 때에도 자신을 무릎에 앉히려는 통에 조금은 진땀을 흘려야 했다. 식탁을 차리고 있던 파출부 아주머니와 미스 원의 얼굴이 슬쩍 붉어진 채 못 본 척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지난 이틀간의 열에 들뜬 듯한 광기가 가라앉고 보니 그제야 조금씩 주변이 의식되고 있었다. 기왕에 볼 꼴 못 볼 꼴 다 보인 것 같은 집안 식구들이지만, 제정신이 들고 보니 확실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식구들 눈치 보랴, 보기만 해도 좋아서 가슴이 저리는 연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랴, 먹는 둥 마는 둥 점심을 해치우곤 운동 삼아 집 뒷산 약수터까지 가벼운 등산을 했었다. 연인은 여전히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없이 약수터를 왕복하는 내내 자신의 손을 단 한순간도 놓지 않았다. 집으로 되돌아와선 역시 당연하다는 듯 앞 다퉈 침실로 달려갔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서로를 껴안고 키스하고 어루만질 수 있는 공간은 침실뿐이었기에. 연인도 그저 손을 잡는 것만으론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키스는 더 깊었고, 어루만지는 손길도 더욱 간절해졌다. 몸을 죄는 포옹도 더더욱 격렬해졌다. 아침에 대전을 출발할 때부터 묘하게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던 연인이 비로소 안정적으로 느껴진 것도 그때쯤부터였던 것 같았다. 마주 안은 몸과 살갗 사이로 전해지던 무언가 날카로운 긴장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지난 이틀 내내 그랬던 것처럼 지복의 희열이 연인의 의식을 도로 사로잡은 것 같았다. 자신을 안고 어루만지는 떨리는 손길에서 전해지는 것은 오로지 서로가 함께 있다는 기적이었다. 극상의 기쁨과 전율과 충만감뿐이었다. 자신이 그러한 것과 한가지로.

정확히 언제 잠이 든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눈을 감기 직전, 창 밖의 주홍빛 노을이 얼핏 기억나는 걸 보면 오후 5시 전후지 싶었다. 연인에게서 감돌던 긴장감이 사라지고, 덩달아 희미하게 곤두섰던 자신의 신경 또한 겨우 느슨해진 때문이었으리라. 따라쟁이 연인도 얼마 안 가 잠이 든 것은 대충 알 것 같았다. 안 그랬다면 자신의 허리가 이토록 아플 까닭이 없었다. 반드시 중간에 깨워 저녁 식사를 하도록 했을 테니까.

하긴 그만하면 오래 버틴 연인이었다. 만 사흘이나 거의 제대로 잠들지 못한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체력이 버티지 못해, 열광에 사로잡힌 와중에도 틈틈이 잠에 빠져든 자신과는 영 다른 연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무쇠라도 한계는 있는 법, 열 시간 가깝게 자는 연인도 생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5분쯤 이리저리 스트레칭을 하고 나니 비로소 척추와 사지의 뻣뻣함이 누그러드는 것 같았다. 설핏 추위가 느껴지던 몸에서도 제법 열기가 퍼지고 있었다. 흐트러진 가운을 제대로 여미곤 침대 아래 바닥에 주저앉았다. 연인의 얼굴이 바로 정면으로 보이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도로 연인의 품속으로 파고들고픈 욕망이 간절해졌다. 허리 상태만 괜찮다면, 당장에라도 그렇게 했을 터였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아름다운 얼굴을 넋을 잃은 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심하게 여위었으나 조금도 훼손되지 않은 아름다움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자기도 모르게 무심코 손을 뻗어 어루만질 것 같아서 침대 아래로 늘어뜨린 두 손을 꼭 움켜쥐어야만 했다. 닿고픈 욕망이 아무리 절절한들, 사흘 만의 단잠에 든 연인을 깨울 수는 없었다.

인내는 기갈과 닮아 있었다. 지난 사흘 내내 그리도 안고, 입 맞추고, 쓰다듬었건만 자신은 여전히 굶주려 있었다. 지독한 허기였다. 10년 가까이 봉인됐던 남자였다. 봉인했던 사랑이었다. 깊고 어두운 수렁 속에, 뼈를 묻듯 파묻어버린 정열이었다. 10년분의 허기를 다 채우려면 꼭 그만큼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만 같았다.

지잉 하고 멀리서 진동음이 들렸다. 몽롱하게 현실감을 상실한 넋이 그를 인지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지이이이잉. 휴대전화 진동음이었다. 소리의 진원지는 침대 맞은편에 놓인 베드테이블 위였다. 멍하니 소리를 따라가던 넋이 이내 소스라쳤다. 진동음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연인을 깨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소리를 증폭시켜 들리게끔 만들고 있었다. 펄쩍 뛰듯 자리에서 일어나 한달음에 테이블로 다가갔다. 예상대로 자신의 것이 아닌, 연인의 휴대전화였다. 3시 46분. 무심코 시각을 확인하며 폴더를 열었다. 새벽에 울리는 전화란 건 대개가 좋지 않은 소식들뿐이라는 판단조차 잠시 잊혔다. 그저 소리를 멈춰야 한다는 일념만 의식을 점령했다.

“……여보세…….”

[죽어가!!! 우리 신애가 죽어간단 말이다, 이 더러운 호모 놈아!!! 또 손목을 그었다구!!! 내 딸이…… 우리 신애가……!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그냥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는데 그걸 왜 못 해줘!!! 그냥 한 번 얼굴만 보여달라는데 그걸 왜?!!! 이 벼락 맞을 놈아!!! 더러운 호모 놈아!!! 니가 그러고도 사람의 새끼냐?!!!]

“……여…….”

대꾸는 더 이상 이어질 수가 없었다. ‘신애’라는 익숙한 이름에 문득 다리에 힘이 풀린 때문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으면서 휴대전화도 놓치게 되었고, 두어 걸음 앞에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떨어진 휴대전화의 폴더가 저절로 닫히는 게 보였다.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몇 초쯤인가, 아니, 몇 분쯤인가가 더 흐른 것 같았다. 지이이이잉. 부드러운 카펫 바닥을 비벼대며 휴대전화가 다시금 진동했다.

조금 숨이 가쁜 것 같았다. 아니, 그저 자신이 지금 숨을 쉬고 있는지가 좀 의심이 되었다. 지이이이잉. 휴대전화는 질기게 울고 있었다. 공명하듯, 자신의 심장까지 턱없이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전원을 꺼야 해.

마음속 어딘가에서 악마가 유혹하듯 속살거렸다.

위야가 깨어나기 전에.

유혹은 달콤했다.

전화받는 걸 걱정해서가 아니야. 아무렴. ‘그녀’가 이제 와 무슨 걱정이라구. 내가 빚도 다 갚았는걸. 그러니까 내 위야랑 그녀는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내 위야가 전화를 받는다고 해도 별로 달라지는 건 없는 거지. 나는 그저 내 위야가 잠에서 깨는 게 싫은 것뿐이야. 사흘 만인걸. 사흘 만의 단잠. 아니, 아니, 거의 한 달 만일걸? 위야가 이렇게 편안히 잠이 든 건. 악몽도 안 꾸고, 자면서 울부짖지도 않고, 새근새근, 아기처럼 잘 자는 그런 건. 그러니까 깨우면 안 되지. 특별히 ‘그녀’가 아니라도 지금은 그저 잠잘 시간. 절대로 깨우게 해선 안 되지. 그래. 배터리를 빼두자. 그럼 되는 거야…….

달콤한 유혹을 따라 멍하니 진동하는 휴대전화로 손을 뻗었다. 막 휴대전화를 집어 들려는데, 느닷없이 허리가 뒤로 끌어당겨졌다. 순간 호흡이 정지하며 심장이 극심하게 요동을 쳤다. 그립고도 강렬한 체취와 함께 등에 바윗돌마냥 단단한 가슴이 부딪쳐왔다. 가운 깃을 헤치고 들어온 억센 손가락들이 아랫배를 완강하게 틀어쥐고 있어 한동안은 옴짝달싹할 수조차 없었다. 휴대전화는 뒤에서 뻗어온 다른 손안으로 재빨리 감춰졌다.

“……젠장……!”

이 가는 소리와 함께 으르렁거리는 듯한 낮은 욕설이 목덜미 뒤로부터 떨어졌다. 끝없이 울릴 것 같은 진동음도 곧 멈추었다. 배터리가 분리된 휴대전화가 침실 한구석으로 내팽개쳐지는 것이 보였다.

“……젠장…….”

다시금 뱉어지는 욕설에선 채 다스려지지 않는 울화가 역력했다. 등으로 전해지는 체온이 점점 더 뜨겁게 느껴졌다. 나머지 다른 한 손도 허리를 휘감은 채 조이고 있어, 그야말로 밧줄로 상반신이 친친 감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힘을 주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의 동요 때문인지, 연인의 팔등과 손은 확연히 떨리고 있었다. 심장이 아릿하게 울며 자동인형처럼 손이 위로 올라갔다. 살짝 겹친 채 가만히 쓰다듬자 떨림은 더 심해졌다. 허리를 조이는 힘도 더 강해져서 저도 모르게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아픔이 느껴졌지만 당장은 사지를 움직일 기력도 없고, 연인도 좀처럼 놔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아 한동안 망연히 시간만 흘려보냈다. 시계 초침 소리와 연인의 거친 숨소리만 고요한 실내를 울리고 있었다.

“……손목을 그었대, 신애 씨가…….”

멍하니 중얼거리자 허리를 틀어쥔 팔 힘은 씨름 선수처럼 어마어마해졌다. 아파, 위야. 더는 참을 수 없어 호소하자 겨우 팔 힘이 누그러졌다.

“……또 그었다던데…… 그럼 전에도 자살 시도를 했던 모양이지? 왜 나한텐 말 안 했어?”

“…….”

“……나쁘다, 진짜…… 너 진짜 나쁜 새끼야…….”

“…….”

“……아침에도 전화 받았던 거지? 그래서 그렇게 하루 종일 불안해했던 거지?”

“…….”

“……정말 이기적이야…… 나만 좋으면…… 아니, 우리만 좋으면 되는 건가? 그녀는 지옥 속에 있는데?”

“…….”

“……넌 진짜 연기를 너무 잘해…… 예나 지금이나 진짜…… 지독한 악당에…… 사기꾼에다가…… 아아, 젠장. 그때처럼 또 감쪽같이 속을 뻔했잖아…….”

“…….”

“……근데 나도 그냥 나쁜 새끼 할래.”

“……?!”

“너 따라서 나쁜 새끼 한다구. 너 보내기 싫어. 그녀한테로 가는 네 뒷모습을 봐야 하는 거…… 이제 더 이상은 사양할래. 그런 건 싫어. 진짜 싫어. 죽어도 싫어.”

상반신이 뒤로 확 돌려세워졌다. 질질 끌리다시피 한 두 다리가 뒤따라 방향을 틀기도 전에 상반신이 끌어안겼다. 코가 딱딱한 가슴 근육에 눌려 아팠다. 뒤통수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눌러대는 연인의 손아귀 힘 탓에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가쁘게 헐떡이며 마주 연인을 끌어안았다. 겨드랑이 틈으로 돌아간 양손은 연인의 등줄기에서 만나 교차했다. 흥분으로 긴장된 근육들이 손바닥 아래서 펄떡펄떡 뛰곤 했다. 갓 낚아 올린 싱싱한 물고기 같았다. 감동적이리만치 뜨거운 생명력. 뺨에 비벼지는 매끈한 피부의 감촉도 역시 델 듯 뜨거웠다. 뾰족하게 솟은 젖꼭지가 뺨 언저리에서 감촉되었다. 사흘간의 괴롭힘 탓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미 상처투성이가 된 성지였다. 슬쩍 입술을 아래로 내려 깨물었더니 온몸을 부르르 전율시키며 애무에 반응했다. 허벅지 사이로 슬쩍슬쩍 비벼오는 페니스도 어느새 꼿꼿하게 발기해 있었다. 전처가 손목을 긋고 죽어간다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물건을 세워대는 지옥의 야수. 역시 나쁜 남자였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악당일 거였다. 상관없었다. 자신도 똑같이 악당이 돼주면 그만이었다. 아무렴, 더는 보내주지 않을 거야. 나쁜 남자가 돼서 의기양양 조소했다. 다 갚았잖아. 이제 이 남잔 완전히 내 거잖아. 근데 왜 또 빌려달라는 거지? 절대 못 줘. 절대 안 줄 거야. 여왕처럼 교만하게 의기양양 선언했다.

턱이 붙잡히더니 얼굴이 거칠게 위로 들렸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입술로 인두처럼 뜨겁게 달궈진 야수의 입술이 허겁지겁 내려왔다. 거칠기만 한 키스는 흡사 약탈 같았다. 미친 듯이 입술이 빨리며 가운이 벗겨졌다. 입안으로 혀가 들어왔다. 뜨겁고 강렬했다. 거친 손길에 떠밀려 허벅지가 활짝 열렸다. 심하게 부어 있는 입구 주름을 헤치는 손가락이 느껴졌다. 무도한 손가락 끝이 주름을 뚫고 진입했다.

역시 성욕 대마왕에 나쁘고 나쁜 야수였다. 뭐, 3일 동안은 섹스 금지라고?

중지 끝이 단숨에 전립선을 긁어내렸고, 아랫배가 찌르르 울리며 지독한 쾌감이 엄습했다. 성기는 통째로 발기해 기왕에 발기해 있던 나쁜 야수의 흉기와 만났다. 페니스끼리 부딪치고, 고환끼리 짓눌렸다. 서로의 짙은 음모들이 질질 흘러내리기 시작한 쿠퍼액과 비벼지며 끔찍한 쾌락을 이끌어냈다.

다리가 화냥년의 음부처럼 활짝 만개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허벅지 위로 자신을 끌어올린 야수의 손길이 정확히 입구를 조준했다. 불쑥. 두꺼운 귀두 끝이 입구를 뚫는 것이 느껴졌다. 기대감으로 달뜬 흥분이 거칠게 할딱이며 화냥년의 입술을 타고 뿜어 나왔다. 목을 휘감은 양팔로 야수의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쥐어뜯으며 허리를 휘었다. 아아, 이 감각! 내벽을 긁으며 묵직하게 파고들어오는 이 지독한 희열! 단숨에 끝까지 밀고 들어와 서로 꼭 달라붙게 되는 이 완벽한 일체감!

활처럼 뒤로 휘었던 허리가 다시 앞으로 끌어당겨졌다. 입술도 다시금 빈틈없이 틀어막혔다. 약탈 같은 키스가 목구멍 깊숙이까지 파고들었다. 한계까지 파고들어온 페니스를 내벽이 심하게 경련하며 거센 파도처럼 와락와락 조여주자, 맞붙은 입술 틈으로 야수의 교성이 크렁크렁 토해졌다. 재촉하듯 허벅지에 꽉 힘을 주어 야수의 허리를 휘감았다. 발바닥으로 단단한 둔부 근육을 꾹꾹 찔러주니, 뚫고 들어온 흉기가 단숨에 전립선을 직격했다. 흐아앙! 눈앞으로 하얗게 빛이 떴다. 오르가슴의 경련이 전신을 사로잡자, 서로를 연결시키고 있는 하반신도 무섭도록 꿈틀거렸다. 아마도 흐릿하게는 남아 있었을 나쁜 야수의 자제력은 그것으로 날아간 것 같았다.

허리가 흔들리고 또 흔들렸다. 속사포처럼 연속적으로 찔러 들어오는 공격을 못 이긴 흥분이 야수의 등줄기를 손톱으로 사정없이 긁어내리게끔 했다. 흐아아. 하앙. 악. 아하앙. 앙. 흐앗. 화냥년의 교성도 자제를 잊은 지 오래였다.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죄책감도, 회한도 깨끗이 날아갔다. 남은 것은 그저 지독한 소유욕뿐. 이렇게 자신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야수에 대한 끔찍한 소유욕뿐이었다.

그래. 안 내줄 거야, 다시는.

나쁜 맹세는 카랑카랑한 교성이 대신했다.

다 갚았어. 내 남자야, 이젠. 다신 접근하지 마.

의기양양, 뻔뻔스러운 오르가슴이 나쁜 선전 포고를 대신했다.

희미하게 소독약 냄새가 났다.

지린내도 조금 나는 것 같았다. 불쾌한 악취에 쫓기듯 눈을 뜨고 보니 익숙한 화장실 안이었다. 집단 강간으로 입은 타박상들과 항문열 상을 치료하기 위해 옮겨진 교도소 내 병동 화장실 안이었다.

아직 몸 이곳저곳에서 통증이 느껴졌지만 움직이는 덴 그닥 지장이 없었다. 병동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은 지 나흘이 지난 덕분이었다.

변기 뚜껑 위에 앉아 손바닥 안에 쥔 것을 내려다보았다. 전과 8범이라는 동료 죄수로부터 어렵사리 구한 물건이었다. 흡사 메스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5센티 크기의 나무칼이었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주사기와 약을 가지고 간호사가 들이닥치기 전에 어서 해치워야만 했다.

망설이지 않고 왼쪽 손목을 그었다. 아릿한 아픔과 함께 붉은 피가 비죽 흘러나왔다. 흐르는 피의 양을 보니 동맥까지 가 닿은 것 같지는 않아서 좀 더 힘을 주어 굵어 내렸다. 두 번째 시도도 그닥 신통치 못했다. 세 번째엔 좀 더 이를 악물었다. 뼈까지 긁어내릴 기세로 그어보았다. 분수처럼 콸콸 쏟아지는 게 확실히 이번엔 성공인 것 같았다. 아픔을 참은 보람이 있다고 설핏 생각했다. 물론 이걸로도 안심할 순 없었다. 손을 바꿔 쥔 후 오른쪽 손목도 그어 내렸다. 제법 요령이 생긴 모양인지, 이번엔 왼쪽 손목처럼 단번에 피분수가 터지기 시작했다. 1분도 안 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푸른 수의(囚衣)를 흥건하게 적신 혈액은 이어 변기 바닥으로 뚝뚝 스미기 시작했다. 곧 끝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은 그저 차분해지기만 했다. 슬픔도, 사랑도, 그리움도, 고통도 꿈처럼 잊혔다. 영원한 안식에 대한 기대로 슬며시 기쁜 마음마저 들었다. 잠깐 엄마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지만 엄마도 자신이 더 이상 고통받는 것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미안해, 엄마. 그냥 나 먼저 갈게. 나중에 꼭 다시 만나자, 응? 효도는 그때 가서 할게. 미안.

엄마의 얼굴마저 사라지고 나니 더 이상 아무것도 뇌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 어지러운 것 같았다. 변기 뚜껑에 등을 기대보았다. 자세는 훨씬 편안해졌다. 시선은 자연스레 천장 쪽으로 향해 있었다. 뿌옇게 빛나는 형광등 불빛이 보였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니 가물가물 잠이 오는 것도 같았다.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멀리서 엄마의 자장가 소리가 들려왔다. 가락이 너무 슬퍼서인지 어릴 때 자신은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삐죽거리며 울음을 터트리곤 했다고, 엄마는 자주 자신을 놀려댔었다. 다 커서도 엄마는 종종 그렇게 「섬 집 아기」 자장가를 불러주며 깔깔거리곤 했었다. 그딴 청승맞은 노래를 어떻게 자장가로 불러주는 엄마가 다 있냐고, 그때마다 자신은 입술을 삐죽거렸었지. 아, 근데 이제 들어보니 참 좋구나. 엄마가 불러주는 섬 집 아기. 뒤늦게 좋아서 피식 웃음이 샜다.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의식이 점점 가물거리고 엄마의 노랫소리도 아득히 멀어졌다. 축축하고 차가웠다.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몸이 무거운 쇳덩어리처럼 축 늘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엄마…….

자꾸만 멀어지는 노랫소리가 안타까워 가만히 불러보았다. 문득 다른 그리운 이름도 부르고 싶어졌지만, 그건 더 이상 자신에게 허락이 안 되는 부름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혼자 가야 했다. 혼자 걸어가야 할 길이었다.

그래. 그건 안 되는 거지, 이제…….

아래로 까마득하게 뻗어 있는 길이 보였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응. 이젠 안 되는 거니까…….

마음을 다지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길고 긴, 어두운 밤길이 시작되고 있었다.

가슴이 미어졌다. 사무치는 고통이었다. 검은 고독이었다.

눈을 뜨니 날이 밝아 있었다. 커튼 너머로 아침 햇살이 흐릿하게 비쳐들고 있었다. 시곗바늘은 8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뽀송뽀송한 알몸엔 파자마가 입혀져 있었다. 성기와 사타구니 사이에서 미끈거리는 감촉의 정체는 연고 같았다. 미친 것 같은 하드한 정사 끝에 혼절한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는데, 역시 연인의 극진한 손길이 다녀간 모양이었다. 침대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꿈속으로부터 그대로 이어진 고독감이 사무치도록 엄습했다. 심장의 통증을 견딜 수 없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떡하면 이 지독한 고통을 잠재울 수가 있을까.

멍하니 물음표를 만들며 상체를 무릎 아래로 깊숙이 웅크렸다. 스스로를 껴안듯 팔을 둘러 태아처럼 가슴을 감싸 안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문소리가 났다. 고개만 비죽 내밀고 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막 방문을 열고 들어선 연인이었다. 보라색 타이. 검정색 실크 셔츠. 은색 베스트에 검정색 콤비 슈트. 막 출근하려던 모양이었는지 오른손엔 검정색 아타셰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우모 보그지(紙)의 비즈니스 콘셉트도 저럴 수는 없을 거였다. 언제 봐도 숨이 턱턱 막히곤 하는 아름다움. 너무 아름다워서 더 먼 연인이었다.

응. 이젠 안 되는 거니까…….

꿈의 끝에 뇌까린 언어가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찔렀다.

그래. 그건 안 되는 거지, 이제…….

꿈일 뿐인데, 그저 흘러간 과거의 파편일 뿐인데, 고통은 여전했다. 사무치는 고독도 여전했다. 어두운 밤길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지금 이 순간에 도착해 자신의 심장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웃음을 머금고 있던 핸섬한 얼굴이 문득 창백하게 질리는 게 보였다. 눈시울이 휘둥그레지며 먹빛 동공이 크게 열리는 것도 보였다. 아타셰케이스가 방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도 보였다. 막 차오른 눈물이 뿌옇게 시야를 가리는 통에 달려오는 연인의 실루엣이 심하게 흔들렸다.

미미한 진동과 함께 몸이 살짝 앞으로 기우는 것이 느껴졌다. 침대 가장자리에 바짝 다가앉은 연인 때문이었다. 상쾌한 코롱 냄새와 함께 양쪽 뺨으로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연인의 손이었다. 얼굴을 온통 적시고 있던 눈물은 연인의 손바닥과 손가락들 사이로 부지런히 닦여나갔다. 떨리는 손가락 끝에서 연인의 당혹과 아픔과 불안감이 여실히 전해져서 가슴은 더욱 미어졌다.

연인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자신을 품에 안았다간 다시 몸을 떼고 눈물을 닦아주고, 도로 품에 안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얼굴과 정수리 곳곳에 수도 없이 깃털 같은 립 키스를 뿌릴 뿐이었다. 왜 우느냐고, 울지 말라고, 고작 단 두 마디를 건네는 것조차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천하의 악당 주제에 겁은 지지리도 많은 못난 남자였다. 못나기 짝이 없는 위로였지만, 덕분에 사무치는 고독과 고통은 차츰 누그러들고 있었다. 그래. 그저 지나간 과거일 뿐인걸. 이젠 더는 떨어지지 않아도 되는걸. 더 이상은 혼자 걸어가지 않아도 되는걸…….

“……사실은 혼자 가고 싶지 않았어…….”

결심은 섰다. 더 이상 망설였다간 끝끝내 입술을 떼지 못할 거였다. 나쁜 새끼일 순 있어도, 자신은 그 사무치는 고독과 고통까지 외면할 순 없었다. 그 깊은 어둠이 무엇인지를 자신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끝끝내 나쁜 새끼가 될 수 없는 까닭이었다.

“……섬 집 아기는 사실은 네가 필요했었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게…….”

“……?”

“……그냥……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었어…… 생애 마지막으로 보는 게 감옥 화장실 천장이 아니라 네 예쁜 얼굴이었으면 했어…….”

“……!!!”

“……그럼 진짜로 외롭지 않을 텐데…… 아무리 길고 어두운 길이어도 무섭지 않을 텐데…… 아프지 않을 텐데…….”

“……?”

“……그렇게 생각했었어…… 감옥에서 손목을 그었을 때…….”

“윽!!!”

억눌린 괴성이 정수리 끝에 달라붙어 있던 입술로부터 토해져 나왔다. 머리카락 틈새를 헤치며 부드럽게 어르고 있던 연인의 손이 등과 어깨를 휘감아들이더니 엄청난 힘으로 조여대고 있었다. 으으으. 윽. 윽윽. 머리카락 틈새를 뚫고 연인의 괴성은 과호흡처럼 불규칙한 리듬을 타며 길게 이어졌다. 정체불명의 괴상한 으르렁거림이었다.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단말마의 신음성 같기도 했다. 시퍼렇게 날이 선 으름장 같기도 했다.

“……근데 아닌 척했지…… 잊어버린 척했어…… 더 이상 부르면 안 되니까…… 아니, 생각하는 것조차도 안 되니까…… 그래서 그냥 혼자 내려갔지…….”

“……으윽……! 흡……!”

“……하지만 외로웠어…… 실은 너무너무 외롭고…… 무섭고 아팠지…….”

“…….”

“……그러니까 그녀에게 가봐, 위야. 딱 한 번만 얼굴 보여달라는 거잖아. 난 그 딱 한 번이 어떤 의미라는 걸 알아…… 그래서 너처럼 끝끝내 나쁜 새끼는 될 수 없을 거 같애…….”

“……흐으윽……! 윽, 웃, 윽……!”

“…….”

“……그래도 이번엔 그렇게 무서울 거 같진 않아. 참을 수 있을 거 같애…… 10년 전엔 네가 내 거라는 걸 까맣게 몰랐지만 이젠 아니까…… 네가 또 나 버릴까 봐…… 영영 못 보게 될까 봐 그렇게 겁에 질리진 않을 거야…….”

“…….”

“……그러니깐 가봐. 가서 그녀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줘.”

“…….”

“…….”

“…….”

경련처럼 몸을 떨며 울분을 삼키고 있는 세상에서 최고로 나쁜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매끈한 고급 수제 슈트 천의 감촉이 달콤하게 만져졌다. 가만가만 머리카락과 등줄기를 쓰다듬자, 악당은 잘 조련된 맹수처럼 얌전히 발톱을 집어넣었다. 아프게 죄어대던 팔 힘도 누그러지고, 간간이 새던 격한 흐느낌 소리도 차츰 잦아들었다. 펑펑 쏟아지던 자신의 서러움 역시 차츰 줄어들더니 이내 고요해졌다. 연인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애무가 연인을 위로하기 위한 건지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건지 아리송할 노릇이었다.

아무렴. 연인을 토닥이고, 스스로를 토닥였다. 그저 지나간 과거일 뿐이었다. 세상에 누군들 아픈 상처 하나 없으랴. 세상에 누군들 한때 삶을 마감하고 싶은 절망에 빠져보지 않은 자 있으랴. 지나고 보면 다시 또 이리 웃게 되는 것을. 다시 삶이 찾아오는 것을. 사랑이 쥐이는 것을. 흡사 기적처럼. 구원처럼.

“……출근해야 되는데 어떡하지? 근사한 슈트가 내 눈물콧물로 엉망이 됐네…….”

아직 물기가 역력한 목소리를 겨우 끌어내었다. 출근 준비를 완전히 마친 것 같은 바쁜 연인을 붙들고 이 무슨 투정에 어리광이란 말인가. 새삼 현실감도 닥쳤다. 8시가 넘었으니 아침 식사도 마쳤을 거고, 밖에선 고영석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어른답게 마음단속을 하고 연인을 편히 보내줘야 했다. 연인을 따라 나쁜 남자가 되어보려던 위악은 단 하루도 못 가 무너졌지만, 덕분에 더 이상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령 연인이 그녀를 자주 만나야만 하는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더 이상 연인을 빼앗길까 두려움에 떨진 않을 것 같았다. 그거면 됐다. 충분했다. 연인을 그녀에게 보내는 이유로는.

“……누가 따라쟁이 아니랄까 봐 또 울기까지 하구…… 눈까지 빨개져선. 출근해야겠다……. 얼른 나가봐. 월요일엔 중역들이랑 아침 조회 있다며…… 일 끝나곤 신애 씨 꼭 만나보도록 하고…… 알았지?”

웃음기까지 섞어 연인을 재촉했다. 서로 이렇게 꼭 껴안고 있는 건 늘 기쁨 그 자체였지만 마냥 연인을 붙잡고 늘어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지못해 몸을 틀어 억지로 포옹에서 빠져나오려는데, 자신을 죄고 있던 팔 힘은 그럴수록 더 강렬해졌다. 정수리에 달라붙어 있던 입술이 머리통 전체에 반원을 그리듯 차례로 입을 맞추고 있었다.

“……위야……?”

“……내가 아니야.”

잔뜩 허스키하게 가라앉은 중저음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머리카락 틈새를 헤매 다니며 입술을 꼭 붙이고 있는 통에 발음마저 불분명했다. 몹시도 원망스러운 어조였다. 아니, 울분을 억누른 기색이 역력해서 마음이 아렸다. 이를 가는 소리까지 설핏 들리는 걸 보면 정말로 지독하게 분한 모양이었다.

“……날 만나고 싶다는 게 아니야. 상대는 너다.”

“……?”

“사과하고 싶다더군. 내겐 최고의 복수를 했으니 소원도 풀었겠다, 이제 저 혼자만 편해지고 싶은 거겠지.”

“!!!”

“하긴 그 속을 누가 알까. 아직도 원한이 안 풀렸을지도 모르지. 날 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지독한 짓이라도 벌이려고 들걸. 내 치명적인 약점이 무언지를 가장 잘 아는 여자이니 널 지목하는 거겠지. 독한 여자다. 나랑 붕어빵처럼 닮았지.”

“…….”

“그런 여자한테 널 또 내보일까 보냐! 하! 손목을 그었다고?! 쇼 하지 말라 그래!”

“…….”

“안 보내! 안 보여줘! 죽어버리든지 말든지 알 게 무어람!”

“…….”

점점 더 그악스러워지던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저주와 다름없는 선언으로 끝이 났다. 나쁜 남자의 분노가 거세질수록 듣고 있는 마음은 점점 차분해졌다. 연인을 보내야만 한다고 여겼을 때, 미세하게나마 남아 있던 불안과 슬픔의 자취조차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얼굴을 보여줘, 위야…….”

“…….”

“……얼른…… 보고 싶어서 그래. 지금 얼마나 미운 얼굴을 하고 있나…….”

“…….”

“……위야……?”

“…….”

“고집쟁이.”

“…….”

“……하여간 진짜 나쁜 새끼라니깐…….”

“…….”

“……그럼 그냥 대답이라도 해줄래? 분명히 미운 표정 하고 있을 얼굴 안 볼 테니깐.”

“…….”

“……넌 내 거지?”

“…….”

“확실히 내 거가 맞지?”

“…….”

“처음부터 내 거였던 것도 맞지?”

“…….”

“그래. 그런 거면 돼. 충분해. 네가 내 거인 거면. 처음부터 내 거였던 거면…… 죽을 때까지 내 거인 거면 더 이상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

“죽은 다음에도 네 거야.”

불퉁하게 덧붙이는 대꾸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스스로가 듣기에도 진짜 그늘 한 점 없는 상쾌한 웃음이었다. 기분이 전해졌는지 그제야 나쁜 남자의 포옹이 슬며시 풀렸다. 양쪽 어깨를 붙잡은 채 10센티쯤 떨어진 거리에서 연인이 시선을 맞춰오고 있었다.

발갛게 부어오른 눈시울이 보였다. 흥건하게 젖어 있는 뺨도 보였다. 말끔하게 빗어 넘겼던 비즈니스 제왕의 머리카락은 잘생긴 이마 위에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었다. 검고 깊은 시선이 사슬처럼 자신의 눈동자를 죄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에게 데려다줘, 위야.”

양쪽 어깨가 아파왔다. 연인의 손아귀에 사로잡힌 어깨였다. 정말 못 말릴 정도로 이기적인 남자가 아닐 수 없었다. 시퍼렇게 일렁이기 시작한 눈시울엔 그저 분노만이 역력했다.

“그녀에게 데려다줘. 부탁이야, 서방님.”

움찔. 단단한 어깨 근육이 꿈틀 요동치는 게 보였다. 활활 타오르던 먹빛 동공에서 일순 힘이 빠져나가는 것도 보였다. 피딱지가 앉은, 자신이 깨문 애무의 흔적이 선연한 입술 끝이 비죽 올라가는 것도 보였다. 기뻐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갈팡질팡 흔들리고 있는 나쁜 남자의 속내가 훤히 밟혀들었다. 서방님 소리엔 좋아 죽을 것 같고, 그녀에게 데려다달라는 소리엔 울화통이 치밀고 있으리라.

피식 하고 또 웃음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전율스럽고도 달콤한 자각이었다. 아아, 내가 이 남자를 지배하고 있구나 하는, 이 남자는 날 끔찍하리만큼 아끼고 있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각성.

“명령이야, 서방님.”

재차 확인하듯 찌르자, 기어코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가며 웃음이 전염되는 게 보였다. 여전히 촉촉하게 물기가 서려 있는 아름다운 눈시울엔 희열이 가득한 별이 떠 있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연인의 사옥으로 출발한 시각은 그로부터 사흘 후인 목요일 오후 3시 무렵이었다. 사흘 전, 새벽녘의 전화에서 짐작한 대로 당장 그녀를 만나기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발견은 빨랐지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몹시 쇠약해져 있어 주치의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면회가 미루어졌었다.

마지못해 만나는 것을 허락해주긴 했지만, 여전히 어떻게든 그녀와의 대면을 미루고 싶어했던 연인은 주치의의 허락이 영영 안 떨어질 수도 있노라고 지난 사흘 내내 틈만 나면 비아냥거리기 일쑤였다. 제가 저지르고 제가 죄책감에 시달리는 위선 따윈 하나도 불쌍하지 않다고, 그저 시위일 뿐이라고, 정말로 죽고 싶었으면 어디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면 그만인 거라고, 모진 독설들도 서슴지 않았다. 저주에 가까운 독설엔 연인 나름대로의 복수심과 원한이 절절했지만, 그 이상으로 어떻게든 대면을 회피하고픈 껄끄러운 속내가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영원히 주치의의 허락이 안 떨어질 거다.’ 그건 차라리 연인의 간절한 기원에 가까웠을 터였다. 물론, 나쁜 남자의 소원을 하늘이 들어줄 까닭은 없었으니, 다시금 연인의 옛 장모로부터 연락이 온 게 바로 오늘 오전의 일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화를 터트리던 연인이 떠올라 슬며시 웃음마저 비어져 나왔던 자신이었다.

날씨는 맑았고, 자주 불어 닥치는 쌀쌀한 바람만 아니라면 초겨울치곤 제법 따뜻했다.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홍 기사가 운전하는 볼보에 올라 사옥까지 이동하는 20여 분 동안, 인환의 기분은 꽤나 가라앉아 있었다. 겁에 질린 어린애처럼 경호원들을 철벽처럼 두르고(연인의 단서 조항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를 만나야 한다는 것도 달갑지 않았고, 막상 만나려고 하니 또 이런저런 의심과 미묘한 불안감들이 마음을 어지럽힌 때문이었다.

사과를 하려는 목적이라곤 하지만, 그건 확실히 연인 말대로 직접 부딪쳐봐야 확인할 수 있는 문제였다. 무엇보다, 벌써 두 번이나 자살 시도를 했다는 그녀의 상태가 걱정스러웠다. 동일한 절망의 터널을 지나온 자신으로서, 그녀의 현 상태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생생히 절감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정작 만나 사과를 받는다고 해도 과연 그게 그녀의 현 상태에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은 근심이 있었다. 물론 가장 깊은 우려는 그녀의 집착이었다. 어쩌면 내면 깊숙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연인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었다. 10년 전의 자신이 그러했듯이. 만약 그저 표면적으로 정리가 되었을 뿐, 실제론 아직도 연인을 깊이 사랑하고 있다면, 인환 자신에 대한 죄책감과 사과란 것도 그저 핑계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연인과 다시 얽히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욕망의 발현이나 다름없을 거였다. 부디 이것으로 모든 부채가 청산이 되는 거면 얼마나 좋을까. 어쩔 수 없는 이기적인 바람이 뇌리를 가득 채운 20여 분이었다.

“선생님, 도착했습니다.”

차 뒷좌석 문이 열리며 홍 기사의 부름 소리가 들렸다. 차창 너머를 살피니 눈에 익은 거대한 건물 현관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생각에 빠져 있어 정차하는 소리도 미처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허둥지둥 차에서 내리는 자신을 따라 두 명의 경호원들도 현관 앞에 섰다. 홍 기사는 지하 주차장에 차를 넣기 위해 도로 볼보에 타고 있었다.

직접 회사 안으로(그가 일하고 있을 사장실 안으로) 쳐들어갈까, 아니면 로비에서 기다릴까 고민했다. 아무래도 전화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휴대전화를 꺼내 드는데 마침 벨이 울렸다. 연인이었다.

“……어, 위야.”

[어디지?]

단도직입적으로 떨어지는 무뚝뚝한 목소리에서 연인의 심사가 고스란히 읽혔다. 아직도 승복을 못 한 채 분노를 삭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짜 집요하다 하고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도무지 용서를 모르는 남자. 천하에 나쁜 남자. 세상 제일가는 악당. 그럼에도 죽도록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모든 것. 소중하고 소중한 내 연인…….

“……회사 현관 앞이야. 지금 도착했거든. 올라갈까?”

[…….]

“……위야?”

[……로비에서 기다려. 곧 정리하고 내려가지.]

“응.”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1초도 더는 기다리지 않고 전화가 끊겼다. 오늘 오전, 그녀의 모친으로부터 전화가 오기 전까지 흡사 여왕을 모시는 노예처럼 자신을 끔찍이 떠받들던 팔불출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회사로 출발하기 직전까지, 그녀에 대한 성토와 저주와 분노를 쏟아내며 끝까지 생각을 바꿀 수 없냐고 집요하게 꼬드기던 나쁜 남자다웠다.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자 마침내는 잔뜩 굳은 얼굴로 출근을 한 연인이었다.

휴대전화를 코트 주머니에 넣고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얼굴을 아는 안내 데스크의 경비와 아가씨들이 일어서서 인사를 건네왔다. 마주 고개를 끄덕여주면서도 슬며시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이 저들 보스의 남자 배우자라는 걸 저들은 알까? 중역들과 비서진들은 알고 있다는데, 혹 소문이라도 퍼진 것은 아닐까? 보스가 게이라는 사실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어떤 식으로 비치게 되는 걸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자격지심을 따라가다가 피식 실소를 물었다.

‘소돔의 씨.’

그러고 보니 그녀가 안겨준 낙인은 꽤나 질긴 것인가 보았다.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남자라는 걸 알아도, 평생을 함께할 소울메이트이자 운명의 반려라는 걸 절절히 자각을 해도, 연인의 일생을 망친 천하의 호모 후레자식이라는 자격지심은 여전히 앙금처럼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로비 한쪽 끝에 나란히 놓여 있는 소파에 앉아 연인을 기다렸다. 제법 많은 수의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와 로비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다. 대부분이 비즈니스 슈트와 오피스룩을 걸친 회사원들이었는데, 가슴에 출입증들을 걸고 있는 걸로 보아 대부분 연인의 부하 직원들인 것 같았다. 가끔씩 이쪽을 흘끔거리는 시선들도 느껴졌다. 자신의 오른쪽 옆에 단단히 밀착하듯 앉아 있는 경호원 한 명과, 몇 걸음 앞에 선 채 주변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경계하고 있는 또 다른 경호원 한 명의 남다른 모양새가 꽤나 주의를 끌고 있는 때문이리라.

15분쯤을 기다린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방향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보였다. 그들 중 머리 하나가 훌쩍 큰 남자가 화살처럼 눈에 박혀 들어왔다. 연인이었다.

쏘는 듯한 눈길이 곧바로 시선을 부딪쳐왔다. 자신이 연인을 가장 먼저 알아보았듯, 연인 또한 단 1초도 헤매지 않고 자신을 찾아낸 것이다.

깨끗한 감색 캐시미어 코트 위에 늘어진 잿빛의 버버리 체크머플러가 멋스러웠다. 단순하고 일반적인 스타일인데도 마냥 잡지 화보인 남자가 새삼스러워 또 실소가 흘렀다. 헤어진 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보자마자 복받치는 애정과 그리움에 심하게 가슴이 설레는 스스로도 기가 막혔다.

똑바로 이쪽을 향하려던 연인의 발걸음은 옆에서 말을 거는 낯선 여자에 의해 중단되었다. 연인이 대꾸를 하기 위해 발을 멈추자 연인 주변에 무리지어 따라오고 있던 인파들도 거의 동시에 걸음을 멈추는 게 보였다. 인파들 중엔 윤 실장을 비롯, 집에서도 두어 번 본 적이 있는 몇몇 중역들의 얼굴도 있었다. 거래처 직원들이었던 듯, 1∼2분쯤 대화를 나누던 일행 중 몇이 연인과 악수를 나누곤 현관 쪽으로 먼저 걸음을 옮기는 게 보였다. 눈에 익은 중역들과 다른 직원들도 차례로 연인에게 목례를 한 후 도로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이동했다. 무리 중 남은 것은 연인과 윤 실장, 그리고 낯선 여자 하나였다. 170센티쯤은 족히 될 것 같은, 꽤 키가 큰 그 여자는 갈색의 말끔한 비즈니스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나이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사이일까? 시원스레 잘라낸 세련된 샤기 커트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옷차림은 검소했으나, 외모는 뭇 여배우들을 연상시킬 정도로 대단한 미인이어서 새삼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실은 여자의 얼굴 때문이 아니었으리라. 자신이 여자를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여자의 양팔이 놓인 위치 덕분이었다. 여자는 연인의 오른쪽 팔꿈치를 감싸듯 팔짱을 끼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연인은 그런 여자의 태도를 그저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있어서 더욱 놀랐다고 해야 할지……. 타인과의 스킨십을, 그것도 여자라는 종족을 특히나 더 달가워하지 않는 연인을 알고 있기에 꽤나 낯설고도 의아스러운 풍경일 수밖에 없었다.

도로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연인을 향해 여자가 다시 무어라고 말을 붙이는 게 보였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었는지 연인의 미간이 희미하게 찌푸려지는 것도 보였다. 그제야 팔짱을 낀 여자를 부드럽게 물리치는 모습도 보였다. 동시에 이쪽을 향해 되돌아온 시선은 역시 화살처럼 강렬했다. 여자가 또 말을 붙였지만 연인의 고개는 더 이상 여자를 향하지 않았다. 깊고 검은 심연의 동공이 엄청난 압력으로 자신을 옥죄고 있었다.

최면에 걸리듯 몽롱한 기분이 전신을 사로잡았다. 연인과 시선을 마주 얽은 채 깊은 영적인 교류를 나눌 때면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세상에 오로지 단둘뿐인 것만 같은, 오로지 둘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 다른 모든 욕망과 욕구와 의지들이 일거에 스러지는 것만 같은, 절대적인 지복의 희열이었다.

문득 여자의 고개가 이쪽을 향하는 게 설핏 자각되었다. 여자의 시선도 느껴졌다. 연인과 자신을 번갈아 주시하는 것 같던 여자가 다시금 연인의 팔꿈치를 잡는 게 보였다. 연인이 약간 주춤거렸고, 동시에 사슬 같은 시선의 옥죔도 풀렸다.

연인의 팔꿈치를 잡고 있던 여자의 한 팔이 자연스레 연인의 코트 깃을 움켜쥐는 게 보였다. 와락 끌어내리는 힘의 기세도 읽혔다. 순간, 중심을 잃고 아래로 쏠리는 연인의 얼굴을 끌어당긴 여자의 입술이 연인의 뺨에 닿았다. 로비를 오가고 있던 열댓 명쯤의 시선들이 죄다 그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립 키스는 그닥 길지 않았다. 연인이 인상을 확 구기며 즉시 여자를 밀어낸 때문이었다. 으하하하하. 여자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미묘한 소음을 뚫고 이쪽에까지 전해졌다. 얼굴에 걸맞지 않을 걸걸한 웃음소리였다. 웃음과 함께 여자는 손바닥으로 연인의 가슴 언저리를 탁탁 두드리기까지 했다. 물론, 그 역시 그닥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런 여자의 손길마저도 연인의 거센 저항으로 뿌리쳐진 때문이었다. 연인의 시선이 도로 이쪽을 향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약간 멍청해진 자신의 표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휘둥그레진 눈시울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잔뜩 찌푸려져 있던 이맛살이 펴지는가 싶더니, 이내 눈시울과 관자놀이 부근으로 흐릿한 홍조가 만들어졌다. 깔깔깔깔. 여자의 웃음소리가 더 거세졌다. 뭐라뭐라 소곤거리는 것도 같았다. 시선을 자신에게 고정한 채로 연인이 무언가 짜증을 토해내는 게 보였다. 그제야 여자는 웃음을 멈췄고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연인에게 고정돼 있던 시선은 강렬한 주시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여자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질투였다. 아니, 부러움이었을까? 웃음기를 머금은 미인의 얼굴을 찰나적으로 스쳐간 것은 인환 자신도 익히 알고 있는 어떤 특별한 ‘감정’의 색깔이었다. 두근…….

그제야 심장이 아래로 뚝 떨어지며 얼굴이 굳어졌다.

“파티엔 꼭 와요, 장 선생님! 안 그럼 그날 이 남잔 내가 먹어치워버릴 테니깐!”

의미 불명의 외침과 함께 여자가 윙크를 보내왔다. 혀를 낼름 내밀어 메롱도 보내왔다. 차후로 보태진 것은 싱그러운 미소 한 자락. 그러나 도저히 마주 웃어줄 수는 없었다.

여자는 볼일 다 봤다는 듯, 시원스레 이별을 고하며 현관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연인이 이쪽을 향해 걸음을 옮긴 것도 거의 동시였다. 흐릿하게 얼굴을 물들인 홍조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게 더 섹시해 보이기 때문인 건가? 아니, 주제에 표정을 잔뜩 굳힌 채 당당히 다가오는 꼬락서니가 더 얄밉기 때문일 거였다.

그야말로 여난(女難)이 아닌가! 여자들을 줄줄이 사탕처럼 꿰고 다니는 건, 14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뭘 잘했다고 저리 당당하단 말인가. 아니지. 얼굴이 빨개진 걸 보면 찔리긴 찔린 모양이야. 찔린 주제에 하나도 안 찔린 척, 표정 관리하는 게 아니꼬운 거지. 이것 봐라? 태연하게 어깨동무를 해? 아무렇지도 않은 척, 변명도 안 하고? 속으론 쩔쩔매고 있으면서 쿨한 척 체면을 차리겠단 말이지?

“가지.”

익숙한 체취와 코롱 냄새가 향긋했다. 어깨동무를 하듯 상체를 감싼 손길이 슬쩍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그 선연한 욕망의 자취에 오소소 소름이 일었다.

자신의 느린 보폭에 맞춰 감싸 안듯 현관 쪽으로 이동하는 그네들의 보스를 뭇 시선들이 끝까지 좇고 있었다. 키 큰 여자가 뺨에 입을 맞출 때부터 현미경처럼 고정됐던 시선들이었다. 익숙한 자격지심이 잠깐의 질투심을 누르고 다시 올라온 까닭이었다.

너무 달라붙지 마. 그렇게 너무 뜨겁게도 바라보지 말구. 그럼 친구나 친지처럼은 보이지 않을 거란 말이야.

현관문을 나서자, 제법 쌀쌀한 겨울바람이 들이닥쳤다. 무심코 코트 깃을 여미자, 곧바로 몸이 돌려세워졌다. 흐릿한 게 몇 번 시야에 너울거린다 싶더니 이내 목덜미가 따스해졌다. 목덜미를 둘둘 만 것은 머플러였다. 연인의 가슴께에 길게 늘어져 있던 버버리 머플러.

슬쩍 고개를 들자, 기다렸다는 듯 먹빛 동공이 따라왔다. 눈길이 얽혀들었다. 역시 사슬처럼 강렬한 시선이었다. 설핏 올라왔던 얼굴의 홍조는 이미 흔적조차 없었다. 흠 하나 잡을 수 없는,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10여 센티쯤 위에서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심하게 여윈 탓에 눈매는 더 깊어 보였고, 여기저기 남아 있는 거친 애무 자국은 고혹적이면서도 섹시했다.

진짜 내숭이네? 표정 좀 봐라? 왕 후까시에 왕 까칠, 시침 뚝 뗄 작정이란 말이지? 조금도 찔린 적 없단 말이지?

“……노려보지 마, 마누라. 그 여잔 아무것도 아니야. 안 회장 막내딸인데 장난기가 좀 심해서 그래. 오늘도 일 때문에 만난 거야. 아선 그룹에서 병원을 하나 새로 지었는데 거기 세팅될 상품들을 몇 종 계약했지. 미국에서부터 일 관계로 알게 돼서 친구가 된 여자일 뿐이야.”

쬐끔 흘겨보는 것으로 찔러보았더니, 역시 금세 꼬리를 내리는 겁쟁이 연인이었다. 자신 보기 창피해서 얼굴이 빨개진 것도 사실이었고, 잔뜩 쫀 것 역시 사실이었다. 아무리 표정을 근엄하게 관리하면 뭘 하나. 이내 이리 자진 납세를 하고 마는 주제에.

묻지도 않은 변명들을 무뚝뚝한 어조로 줄줄이 토해내는 게 우스우면서도 기뻐서 전율이 일 지경이었다. 가슴은 폭죽이 터진 것마냥 설레고, 머플러의 부드러운 감촉을 무심코 쓸고 있는 손가락 끝은 마음속의 희열을 고스란히 증거하며 미세하게 떨어댔다.

역시 그건 은총처럼 내려온 자각이었다. 자신은 연인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도 완벽하게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달이라도 따달라고 한다면, 연인은 정말로 따다주기 위해 기를 쓸 거라는 걸 알았다. 10년 전엔 꿈에서조차 상상해본 적이 없는 지독한 열정이었다. 자신만이 아니었다. 자신만 연인을 신처럼 숭배했던 게 아니었다. 연인도 같았다. 연인도 자신을 신처럼 숭배하고 있었다. 역시 따라쟁이가 아닐 수 없었다. 나쁜 남자에, 겁쟁이에, 쩨쩨한 후까시로 포장하기 좋아하는 따라쟁이였다. 쿨하고 쿨한 아도니스인 줄 알았더니, 알면 알수록 한심하고 모자란 팔불출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자란 연인이 자신은 그토록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아니, 마음에 든 정도가 아니라,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순간순간 각성이 닥칠 때마다 온몸과 마음이 기쁨으로 몸서리를 칠 만큼.

“사장님…….”

뒤에서 고영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홀연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현관 앞에 연인의 메르세데스 벤츠 세단과 자신의 금색 볼보가 나란히 대기해 있었다. 그제야 두 사람만의 낙원에 홀려 있었다는 자각과 함께 익숙한 부끄러움이 닥쳤다. 고영석과 홍 기사와 짙은 검정 양복을 걸친 건장한 경호원 둘은 물론, 연인의 회사 직원들까지, 시선이 닿는 거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죄다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쫓기듯 부랴부랴 차에 오를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연인과 자신은 고영석이 운전하는 세단에, 경호원 둘은 홍 기사의 볼보에 올라탄 후,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장소로 출발했다. 서교동이라고 했다. 러시아워가 아닌 탓에 길이 막히지 않아 도착까지는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동하는 내내 서로 손을 꼭 마주 쥔 채 서로의 깊은 애정을 나누고 있었지만, 둘 다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이미 집을 알고 있을 연인은 표정을 굳힌 채 고영석을 향해 두어 번 방향을 지시했을 뿐이었다). 연인은 연인대로, 자신은 자신대로 꽤나 착잡한 기분에 빠져든 때문이었으리라. 하루 종일 그토록 분통을 터트려대던 연인이었건만 이제쯤은 포기가 됐는지, 그녀의 집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더 몸을 긴장시키며 냉정해져갔다. 그것이 연인이 적을 대할 때면 튀어나오는 버릇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닫고 있는 터라, 보는 자신으로선 그저 착잡한 기분만 더해갈 뿐이었다.

“……저 집인가요, 사장님?”

고영석의 물음에 비로소 전방의 차창을 바라보았다. 대리석으로 마감이 된 높다란 옹벽이 보였다. 집은 옹벽 너머에 있는지 멀리 지붕 끝만 살짝 내다보였다. 생각만큼 초호화 저택은 아니어서 조금 의외다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의 친가가 아닌 외갓집(외삼촌댁)이라고 했다.

세단과 볼보가 나란히 대문 앞 골목길에 주차했다. 고영석과 홍 기사, 그리고 경호원 두 명까지 꼬리로 단 채 연인은 망설이지 않고 벨을 눌렀다. 잠시 후 전자음과 함께 대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누구냐는 확인조차 없는 건 그저 보안 카메라 덕분이라는 걸 짐작했지만, 어쩐지 기분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초대받은 불청객이라고 한다면 바로 자신들일 터였다.

활짝 열린 진청색 철제 대문이 흡사 커다랗게 입을 벌린 용의 아가리처럼 보였다. 문득 부르르 진저리가 쳐졌고, 맞잡은 연인의 손아귀 힘이 와락 강해지며 위로가 전해졌다. 불안해하는 걸 못 알아챌 연인이 아니었으니까. 대문 너머엔 잘 가꿔진 정원이 보였다. 200여 평쯤은 되는 것 같았다. 정원 끝에 이어진 건물은 모던한 모양새의 3층 양옥이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났다. 건물 뒤쪽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먼저 걸음을 뗀 쪽은 의외로 연인이었다. 맞잡은 손은 굳건했고, 걸음걸이 또한 한가지였다. 무심코 따라 걸을 수밖에 없는 단호함이었다. 그 뒤를 고영석과 홍 기사, 그리고 경호원들이 따라붙었다. 포석이 깔린 진입로를 따라 몇 미터쯤을 걸었을 때 뒤에서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집에 도착했을 때부터 느껴졌던 불안감이 더 고조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히 만나겠다고 한 건 아닐까, 새삼 스스로의 결심이 의심이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만큼 뒤에서 들리는 문소리는 불길했다. 옴짝달싹 못 할 덫에라도 갇힌 듯 불길한 답답함. 한 달 전쯤, 그녀와 담판을 짓기 위해 평택의 별장으로 향할 때에도 이처럼 음산한 기분은 들지 않았었는데. 아마도 연인과 함께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평택으로 갈 땐 설혹 다친다 해도 자신 혼자라는 홀가분함이 있었다면, 지금은 달랐다. 연인에게까지 위험이 닥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만약 그녀의 감정에 여전한 독기가 똬리를 틀고 있다고 한다면. 물론, 자신만 다친다 해도 그건 곧 연인을 다치게 하는 격이었다. 이젠 확실히 자각하고 있다. 자신이 연인에게 정확히 어떤 존재라는 것을. 자신이 다치면 연인은 그 이상의 치명상을 입는다. 자신이 치명상을 입으면 그건 곧 연인을 절명시키는 비수가 된다. 자신은 어찌어찌 살아도 연인은 살아날 가망조차 없어진다. 약한 남자였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악당에 철벽같은 갑옷을 두르고 있는 초인이었지만, 그 초인을 절명시킬 아킬레스건은 바로 자신이었다.

현관을 10여 미터쯤 앞두고 건물 정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전체적으로 붉은 벽돌로 마감이 된 바우하우스풍 건물이었다. 전면을 거의 차지하고 있는 암청색 유리창은 꽤 세련돼 보였지만 그리 아늑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어째서 인기척조차 없는 걸까 하고 멍하니 생각을 흘리고 있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문소리가 났다. 현관문이 활짝 열리며 네다섯 명쯤 될 건장한 사내들이 떼를 지어 쏟아져 나왔다. 한결같이 검정 양복 차림에, 체구가 단단해 보이는 젊은 사내들이었다.

손이 아파왔다. 연인에게 움켜잡힌 오른손이었다. 갑작스레 힘이 더해진 때문이었다. 이어진 체온을 통해서 비수처럼 벼려진 연인의 긴장이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뒤를 따르던 경호원 둘이 재빨리 앞으로 치고 나온 것도 바로 그 시점이었다. 양쪽 옆으로 고영석과 홍 기사도 바짝 다가들었다. 경호원들의 건장한 등에 시야가 가려진 통에 더는 앞을 볼 수 없었다.

“……젠장…….”

옆에서 이를 갈아붙이는 짐승의 소리가 났다. 연인의 뜻 모를 저주였다.

“……오랜만일세, 문 서방. 얼굴 보기 참 힘들구먼.”

나지막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상한 연륜이 느껴지는 귀부인의 음성이었다. ‘문 서방’이라는 호칭이 한순간 당혹해진 의식을 일깨웠고, 그제야 사흘 전 새벽녘의 통화가 기억났다.

[죽어가!!! 우리 신애가 죽어간단 말이다, 이 더러운 호모 놈아!!! 또 손목을 그었다구!!! 내 딸이…… 우리 신애가!!……!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그냥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는데 그걸 왜 못 해줘!!! 그냥 한 번 얼굴만 보여달라는데 그걸 왜?!!! 이 벼락 맞을 놈아!!! 더러운 호모 놈아!!! 니가 그러고도 사람의 새끼냐?!!!]

그 새벽녘 악다구니의 주인공이라곤 조금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차분하고 고상한 뉘앙스였다. 그만큼 감정이 안정된 것으로 보여 일순 안심하기도 한 자신이었다. 마침 경호원 한 명이 방향을 조금 옆으로 틀었고, 덕분에 트인 시야를 통해 그녀의 모친을 볼 수 있었다. 새까만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린 노년의 귀부인이 건장한 사내들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모친은 겨자색 저고리에 짙은 자주색 치마라는 격식 있는 한복 차림이었다. 눈가의 잔주름이 언뜻언뜻 눈에 띄긴 했지만 고작해야 50대 초반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빼어난 미모며, 날씬한 몸매와 몸짓에서 드러나는 품위가 어우러져 꽤나 고상하게 보였다(실제론 환갑을 넘은 지도 이미 한참이라고 했다). 목소리만큼이나 상류층 귀부인다운 전형적인 모양새여서 속으로 실소가 흘렀다. 모전여전이라는 말이 이처럼 실감이 날 줄이야.

“……인사가 늦었습니다, 서 여사님. 그런데 저 친구들은 뭔가요? 이건 약속과 다르지 않으십니까?”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연인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사방을 일거에 얼려버릴 만큼 싸늘한 일갈이었다. 무심코 말리고픈 마음이 들 정도로.

“‘서 여사’라…… 참으로 모진 사람이로구만. 사위와 장모 관계가 그리도 단칼에 잘릴 수 있다니, 참으로 놀라워. 내 딸이 그간 얼마나 마음을 다쳤을지 새삼 가슴이 찢어지는군.”

“…….”

“그때 끝까지 결혼을 허락하는 게 아니었는데 우리가 어리석었어. 임신이고 뭐고…… 설령 신애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고 해도 자넬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었는데, 참으로 어리석었어…….”

“…….”

“바깥양반도 자넬 그리 믿고 신용했는데…… 똑똑한 재목이라고…… 큰물에서 놀 재목이라고…… 친아들처럼 아꼈었는데…….”

“지난 얘긴 그만두시지요, 서 여사님. 이렇게 나오신다면 전 돌아가겠습니다. 목숨을 건 부탁이라 해서 화해하는 마음으로 찾아온 제가 어리석었군요. 경호원을 떼로 고용해서 절 위협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 입장이지 않은가? 저 사내들은 뭐지? 설마 신애가 저 사내들도 만나고 싶은 줄 알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겠지?”

“이쪽은 합당한 자기 보호책입니다.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들면서 맨몸으로 들어설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따님께서 제 사람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는 잘 알고 계실 텐데요?”

“그건 나도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했네. 내 딸이 어리석었지. 미친 짓을 저지른 게야. 그래서 사과하고 싶다고 하는 거고. 하지만 나도 자넬 믿을 수가 없거든. 이번엔 자네 쪽에서 복수한답시고 우리 신애한테 무슨 해코지라도 저지르면 어떡하겠는가 말일세.”

“전 그따위 멍청하고 어수룩한 바보가 아닙니다. 만약 하려고만 든다면 훨씬 더 치명적인 것을 준비하겠지요. 물리적으로 상처를 입히는 것쯤은 제 선에선 진정한 복수가 아니니까요.”

“…….”

“다만 하지 않는 건 할 가치조차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따님은 제게 있어 이제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는 사람이니까요. 무언가 제 수고를 기울여 따님을 상대하고픈 생각조차 들지 않고 있지요. 그녀는 이미 제게 죽은 사람입니다.”

마주 쥐고 있는 손의 체온이 문득 싸늘하게 느껴졌다. 아니, 실은 심장이 느낀 싸늘함이었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 장모였던 여인을 향해 이처럼 냉혹한 독설을 태연스레 갈길 수 있다니. 새삼 연인의 기질과 성품에 소름이 끼쳤다. 일단 제 선 밖에 있다 결정된 상대에겐 한계가 없을 만큼 싸늘해질 수 있는 남자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절절하게 자각하고 있음에도, 이렇게 그 실체를 접할 때마다 자신은 섬뜩한 한기를 참을 수 없었다.

노년의 귀부인에게도 연인의 혹독한 독기가 전해진 모양이었다. 그럭저럭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던 고상한 얼굴빛이 일순 창백해지며 미간이 뚜렷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감정의 동요를 억누르는 듯,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것도 보였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나? 이 친구들을 여기 대기시켜둘 테니, 자네도 그 친구들과 함께 정원에서 기다리는 걸로 하지. 신애가 만나고 싶다 하는 이는 저분이신 듯하니, 저분만 안으로 모시도록 함세.”

한동안 감정을 삭이는 듯 보였던 여인이 마침내 차분한 어조로 타협안을 꺼내 들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여전히 서늘한 한기를 풀풀 날리며 나쁜 남자의 대꾸가 떨어졌다.

“경호원들은 밖에서 대기시키도록 하죠. 최소한 서 여사님은 믿기로 한 제 선택입니다. 그러나 따님은 안 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따님이 이 사람에게 사과를 하겠다는 의중도 전 아직 믿을 수가 없으니까요. 저만은 이 사람과 함께 따님을 만나겠습니다. 이 사람과 단둘이 두었을 때 따님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도 안 된다고 하시면 이번 면담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따님의 사과는 들은 것으로 하고 우린 이대로 돌아가도록 하지요.”

감정이라곤 단 한 톨도 들어 있지 않을 것 같은 냉랭한 말이 떨어진 후,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연인과 그녀의 모친과의 팽팽한 신경전이었다. 물론 불필요한 시간이기도 했다. 승패는 뻔했다. 아쉬운 쪽은 연인이 아니었다.

“……들어가보게. 신애 방으로 안내해줄 걸세.”

피곤에 지친 대꾸와 함께 그녀의 모친이 몇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앞을 가로막고 섰던 사내들도 일사불란하게 반대편 옆으로 물러서자, 그들이 가로막고 있던 현관문이 활짝 드러났다. 안에는 앞치마를 걸친 중년 여인 하나와 간호사 복장을 걸친 여자 하나가 불안스러운 표정으로 이쪽 눈치를 살피며 서 있었다. 잠깐 그녀의 모친과 전방의 사내들을 날카롭게 주시하던 연인이 두어 걸음 앞에서 뒤를 돌아보던 경호원 둘에게 눈짓을 주었다. 경호원들과 고영석, 그리고 홍 기사가 연인의 명령에 따라 옆으로 물러섰고, 전방의 사내들도 현관 쪽에서 좀 더 멀찍이 떨어졌다.

연인이 걸음을 떼며 마주 쥔 손을 이끌었다. 맞닿은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연인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아리송했다. 아마도 자신의 것이리라. 자신도 모르게 움켜쥐고 있던 다른 쪽 주먹도 역시 땀으로 흥건했기 때문이었다.

건장한 사내들과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귀부인을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섰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오르자, 앞치마를 두른 중년 여자가 이쪽으로 따라오라는 눈짓을 주며 앞장서는 게 보였다. 안내되고 있는 방향은 거실 중앙에 있던 위층으로 이어진 나선형 계단이었다. 계단을 따라 올라 2층 복도에 이르자, 여자가 복도에서 가장 처음으로 나타난 방문 앞에 서더니 노크를 하는 것이 보였다. 안에서 대꾸가 들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자는 망설이지 않고 문을 살짝 열어주며 들어가라는 눈빛을 보냈다.

연인은 망설이지 않았다. 오히려 망설인 쪽은 자신이었을 것이다. 끌어당겨진 손에 무심코 힘을 주며 버틴 자신이었다. 연인이 막 방문을 들어서다 말고 돌아보았다. 표정을 살피는 눈길이 똑바로 마주쳐왔다. 순간 확연하게 구겨지는 미간을 통해서 자신의 낯빛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안색이 창백해지거나, 또 겁에 질린 얼굴이 됐을 때, 혹은 옛 상처를 더듬고 있을 때면 연인은 늘 저렇게 미간을 구기곤 했으니까. 연인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는 것처럼도 보이고, 혹은 그러한 스스로의 한계를 질타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양쪽 다 연인을 상처 입히는 일이라는 점에선 다르지 않았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잠시 나약해졌던 결단이 되살아났다.

그래, 만나자. 만나서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매듭을 짓자.

속으로 단호한 주문을 되풀이하며 연인에게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찌푸려졌던 연인의 미간이 풀리는 게 보였다. 역시 나약한 따라쟁이가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이 미풍에 흔들리면 연인은 태풍을 만들어낸다. 연인의 손을 마주 쥔 손가락에 힘을 더했다. 다리에도 지그시 힘을 준 후 문턱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섰다.

10여 평쯤 될 간소한 침실이었다. 남쪽으로 면한 창문으로부터 들어온 오후의 햇빛이 바닥에서 부드럽게 부서지고 있고, 가구는 침대와 화장대 겸 콘솔, 그리고 1인용 소파 하나와 모던한 모양새의 사각 서랍장 하나가 전부였다. 1인용 소파는 침대 앞에 깔려 있는 장방형 러그 위에 놓여 있었다. 소파 옆,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것은 은빛이 도는 2미터 크기 스테인리스 걸개였다. 쇠 걸개 위로부터 죽 이어진 IV 수액 줄이 환자의 손등과 이어져 있는 게 보였다. 환자는 침대 위에 상체를 약간 기댄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녀’였다.

그녀는 헐렁한 흰색 면 티셔츠를 걸치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양쪽 옆으로 느슨하게 땋아 내린 상태였다. 화장기라곤 전혀 없는, 지독하게 야윈 얼굴이었지만 그 빼어난 아름다움만은 여전했다. 이쪽을 향한 얼굴은 고요했다. 미동조차 않고서 서늘하게 시선을 보내오는 당당한 자태에선 언제나처럼 여신과 같은 품위와 고고함이 흘러넘쳤다. 양쪽 손목에 두툼하게 감겨 있는 붕대조차 그녀의 긍지와 자존을 훼손하진 못하리라.

문득, 몹시도 오래된 옛 기시감이 얼핏 뇌리를 스쳐가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때도 저렇게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수갑을 손목에 차고 있었었다. 그리고 그때에도 그녀의 여신다운 위엄은 전혀 훼손되지 못했다.

―포기해요…….

먼 시간의 저편에서 부메랑처럼 되돌아온 여신의 일갈이 들리는 듯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내가 당신의 소원을 들어주는 일은 없어요. 절대로. 그러니 당신이 포기하세요…….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무섭도록 뛰었다. 그녀의 맑은 눈길이 자신의 눈동자를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연인과 맞잡고 있는 손 쪽으로 잠깐 동안 시선이 내려갔다가 도로 되돌아온 여신의 시선에선 흐릿한 조소마저 느껴졌다.

―죽어도 안 돼요. 절대로 허락 안 합니다. 위야는 내 거예요. 아직도 몰라요? 여기 배 속에는 우리의 아이까지 들어 있어요. 더러운 소돔의 짐승 따윈 절대로 품을 수 없는 성스러운 생명체죠. 그래요.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위야가 송두리째 내 것이라는 증거이기도 하죠. 그러니 당신이 포기하세요. 난 우리 위야의 털끝 하나도 양보 못 해요. 당신의 더러운 시선이 우리 위야를 훑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치거든요. 당신의 더러운 목소리와 말을 섞는 위야를 상상하기만 해도 화가 나서 미쳐버릴 것 같거든요. 이해하시겠어요……?

창끝으로 심장이 꿰뚫리는 것 같은 아픔이 일었다. 그때와 다름없는 경멸의 시선, 그때와 다름없는 심판의 여신이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포기해!! 그만 포기하시지, 이 추악하고 더러운 소돔의 짐승아!!!

딱딱딱딱. 어디서 이 부딪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지금의 자신이 내는 소리인지, 아니면 과거가 들려준 상처의 파편인지는 분별할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었다. 고통과 자괴감은 여전했다. 이번엔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찝찔한 피 맛이 났다. 아릿한 아픔이 자각되었다. 물리적인 아픔은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질겁한 넋을 가까스로 꺼내주었다. 그녀로부터 시선을 돌리고픈 비겁한 도피 심리도 겨우 가라앉았다.

이럴 수는 없어!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러려고 그녀를 만나려던 게 아니야!

그랬다. 사과를 받아야 할 쪽은 자신이었다. 내 연인이었다. 애초부터 내 것이었다. 내 것을 훔쳐간 쪽이 그녀였다. 도둑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녀가 도둑이었다. 만약 아직도 그녀가 착각하고 있다면, 자신은 그걸 바로잡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래요, 선배님. 바로 그거예요.”

어느새 미소가 사라진 아름다운 얼굴이 문득 중얼거렸다. 쇠약해진 건강 때문인지 몹시도 약하고 가느다란 목소리였으나, 숨어 있는 위엄과 기운만은 여느 건강한 사람들 못지않았다.

“……그래야 제가 완패한 상대다우시죠. 진심으로 사과를 드릴 보람도 있고요.”

처음보다 뚜렷해진 어조가 선명히 귀에 밟혀들었다. 마주할 때마다 늘 독기와 심판과 경멸만 담기던 목소리에선 그저 담담한 평온만 감지되고 있었다.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동시에 전신을 팽팽하게 굳게 만들던 긴장이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그녀와 시선을 부딪친 순간부터 엄청난 속도로 세동하던 심장도 차츰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오래 있기 싫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시지. 이리저리 말 돌리지 마시고.”

옆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잇달아 나지막하게 떨어진 말에선 그저 겨우겨우 억눌린 적대감과 서릿발 같은 분노만이 읽혔다.

“사과를 하겠다는 주제에 상대를 시험하는 교만은 어디서 배워먹은 수작질인지 모르겠군. 딱 5분을 주지. 간단히 하도록 해.”

방 안으로 들어선 후 내내 자신만을 향해 있던 시선이 비로소 연인에게로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치며 엄청난 살기가 교환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일방적인 살기였다. 연인은 인정사정없이 쏘아 들어갔고, 그녀는 그저 그를 온전히 수용했을 뿐이었다. 조마조마했던 것과는 달리 여전히 담담하기만 한 그녀의 표정이 그를 증명하고 있었다.

“……애인 손 꼭 붙들고 배신당한 전처 앞에 나타나는 철면피한 전남편보단 낫겠지. 하긴 나도 그럴 만한 빌미를 제공하긴 했지만 말야. 역시 좀 아프군. 더 이상 사랑하진 않는 것 같은데도…….”

“사랑이란 말은 입에도 올리지 마. 역겨우니까.”

“……후후, 여전히 독이 바짝 올랐네? 그런데 어째 선배님을 데려다줄 결심을 다 했을까? 실은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다 생각하고 있을 텐데?”

“자해 공갈단이 돼서까지 만나고 싶다고 떼를 쓰는 데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이 사람은 나나 당신처럼 독종이 못 되니까. 그리고 난 이 사람 부탁은 절대 거절할 수가 없거든. 아무리 갈아 마시고 싶은 여자라도 이 사람이 만나고 싶다면 만나게 해주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알아먹겠나? 난 온전히 이 사람의 것이란 의미지. 머리카락 한 올, 숨 한 번까지 몽땅 다 이 사람 것이거든. 처음부터 그랬지.”

“……위, 위야……!”

연인을 바라보는 그녀의 말간 눈시울에 고요하게 눈물이 맺히는 게 보였다. 뺨으로 굴러 떨어지진 않았지만, 순간 그녀의 눈시울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분명 깊은 상처와 회한이었다. 가슴이 아팠다. 이 순간만큼 연인이 원망스럽게 느껴진 적도 없는 것 같았다. 한껏 미움을 담아 연인을 노려보았지만, 그녀에게 고정된 연인의 시선에선 여전히 흉흉한 살기만 맴돌 뿐이었다. 정말로 그녀가 눈앞에서 피를 토하면서 죽은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은 냉혹함이었다.

“……괜찮아요, 선배. 차라리 잘된 일이죠. 저에 대한 저이의 감정이 속속들이 다 까발려지고 나니 더 이상 기대할 거리가 없다고 해야 할까…… 아니, 실은 완전히 정나미가 떨어졌다고 해야 할까…… 헤어질 때도 저인 절 감쪽같이 속였거든요. 한때나마 제가 저이 가슴속에 들어간 적은 있었노라 착각하게끔 만들었죠. 그저 세상의 흔하디흔한 보통의 부부처럼 차츰 열정이 식어가고 권태에 빠진 거라 생각한 거죠. 처음부터 그저 지독한 사기꾼일 뿐이었는데…… 덕분에 전 최근까지도 얄팍한 기대감을 품고 있었죠. 언젠가 다시 한 번 만나 사랑에 빠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몇 년, 서로 떨어져 있다 보면 권태는 새로운 신선함으로 업그레이드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이혼했다 재결합하는 부부들도 꽤 많으니까요. 한 달 전 그 사건으로 저이의 속내를 낱낱이 벗겨내지 못했더라면 전 아직까지도 그런 바보 같은 꿈을 꾸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

물기가 선연한 아름다운 눈시울이 자신에게로 되돌아왔다. 담담한 표정에선 무언가를 초월한 듯한 홀가분한 자유마저 느껴졌다.

“……선배님의 용서를 받고 싶어요.”

“…….”

“……한 달 전 사건에 대한 건 아닙니다. 그건 선배님과 저의 정당한 거래였으니까요. 우리 세 사람의 악연을 떠나 제 잃어버린 아기에 대해선 저나 선배님이나 청산할 빚이 있었죠. 그 몫이라 여겨주세요. 저도 그리 여길 겁니다.”

“…….”

옆에서 뿌드득 하고 이 가는 소리가 났다. 호흡마저 거칠어지는 게 느껴져서 나머지 한 손을 가져가 마주 잡은 손등을 살며시 쓰다듬어주어야 했다. 괜찮아. 진정해. 제발 진정해줘, 위야. 부탁이야. 간절한 마음을 담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한 달 전 사건은 확실히 자신이 아닌 연인을 겨냥한 독화살이었기에 연인의 동요와 분노는 당연한 결과였다. 그녀도 연인을 자극할 셈은 아닌 모양이었는지, 흘낏 연인을 살피는 그녀의 표정엔 착잡함이 드러나 있었다.

“……그럼 무엇에 대해서입니까, 신애 씨? 그 일이 아니라면 무엇에 대해서 제 용서를 받고 싶으신 거죠?”

더 이상 지체했다간 연인의 울화통만 더 키울 것 같아서 힘겹게 말을 꺼내놓았다. 정신적인 긴장이 하도 커서 목소리마저 떨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차분하게 떨어지는 어조에 적이 안심한 자신이었다.

연인에게서 자신에게로 되돌아온 시선이 한동안 빤히 자신을 응시했다. 너무나 창백하고 말라서 처연해 보이는 아름다움이었다. 얼룩 한 점 없는 흰색 티셔츠에, 소녀처럼 땋은 머리가 더없이 청초해 보였다. 저토록 여리고 아름다운 여자에게 죽음에 이르는 절망감을 선사한 연인과 자신이 지독하게 끔찍스러운 괴물처럼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전에 한 가지만 대답해주세요, 선배님.”

“……?”

“……저이를 사랑하시나요?”

“…….”

“진심으로요. 진심으로 저이를 사랑하세요?”

“…….”

“…….”

“…….”

“……그렇군요…… 이런 끔찍한 절망을 겪으시고도…… 아니, 이런 끔찍한 절망을 안겨준 상대인데도 사랑하시는군요. 그것도 장장 10년이나 말이죠…… 정말 놀라워요……. 전 단 한 달도 못 버틸 만큼 끔찍한데 말이죠…….”

“…….”

“……정말 대단한 사랑이네요. 그런 시간을 겪어내고…… 그런 고통을 겪어내시고…… 그러고도 저이를 사랑하신다니…….”

“…….”

“……그래요, 선배님. 제가 졌어요. 인정합니다. 전 저이를 그렇게까진 사랑할 수 없어요. 만약 제가 선배님 입장이었다면…… 선배님 같은 일을 저이한테 당했더라면 전 죽어도 저이를 사랑할 순 없었을 거예요. 사랑은커녕 용서하지도 못했겠죠. 죽을 때까지 저주하고 또 저주했겠죠. 제 사랑은 그래요. 약하고 이기적이죠. 전 선배님처럼 될 순 없어요.”

“…….”

“……선배님을 ‘소돔의 씨’라고 매도하며 선배님의 사랑을 모독했던 저를 용서해주세요.”

“!!!!!”

“……어리석었어요. 어리석었던 거예요, 제가. 눈앞을 ‘편견’이라는 커다란 들보가 가리고 있어서 몰라봤던 겁니다. 아니, 어쩌면 영혼 깊숙이에선 실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감히 남자 따위에게 지는 자신이란 교만한 자존심이 결코 용납하지 못했겠죠.”

“…….”

“……이젠 알아요. 선배님의 그것도 사랑이라는 걸. 아니, 실은 제가 품었던 사랑보다도 훨씬 더 큰 사랑이라는 걸.”

“…….”

“……부디…… 용서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젊은 날의 제 교만을…….”

“…….”

“……그 철없던 교만이 선배님께 입힌 상처를 용서해주시겠어요?”

“…….”

그녀의 맑은 눈시울에 다시금 물기가 어리더니, 뺨으로 기어코 굴러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담담한 표정에 그저 물기만 두어 방울 떨어진, 산뜻한 눈물이었다. 진심이 담긴 속죄였다.

가슴이 아픈 것 같았다. 목이 꽉 메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처럼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몇 방울의 눈물로 씻겨 내려가기엔 기왕의 상처와 회한이 지독한 까닭이었다.

문득 자문해보았다. 자신에게 그녀를 용서할 자격이 있는가? 알 수 없었다. 진실로 용서받아야 하는 쪽은 자신일지도 몰랐다. 스스로를 ‘소돔의 씨’라 줄곧 낙인찍어온 이는 그녀가 아닌 자신이었을지도 몰랐다. 설령 그게 그녀의 진심이든, 혹은 그녀 말대로 철없는 교만이 부린 객기이든, 그를 진실로 받아들인 쪽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상처란 스스로가 상처라 여기지 않으면 상처로 화하지 못한다. 아픔은 그저 아픔일 뿐, 그를 상처로 받아들이고 마음속에 각인 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기도 한 것이 아닐까?

“……신애 씨를…… 용서해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제 자신도 진심으로 용서하고 싶군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살짝 갸우뚱하는 게 보였다. 눈물 자욱이 선연한 뺨 가운데 볼우물이 살짝 패는 것도 보였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순수한 기쁨의 웃음이었다.

“……성북동에 들렀다가 가면 안 될까?”

막 차를 출발시킨 고영석의 뒤통수를 멍하니 건너다보며 연인에게 부탁을 띄웠다.

“……성북동 말이야. 옛날 내 아틀리에 있었던 곳…….”

잠깐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 것 같던 연인이 흠칫 어깨를 떠는 게 느껴졌다. 마주 쥔 손에서도 연인의 적지 않은 동요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전방을 향했던 시선을 돌려 연인에게로 가져갔다. 이미 이쪽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던 먹빛 동공은 어쩐 일인지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싫다는 걸까? 아니면 좋다는 뜻?

“……10년 동안 가보지 못했거든. 추억이 너무 많은 곳이라 가면 많이 아플 것 같아서 겁났었어.”

갑자기 상반신이 와락 끌어안겼다. 아야. 얼굴을 연인의 품 안에 묻은 채 무심코 신음성을 뇌까렸다. 조여진 갈비뼈가 아팠다. 정말이지 못 말릴 연인이었다. 격정을 참는 버릇을 들이게 하든가, 팔 근육의 힘을 떨어트리게끔 하든가, 아무튼 무언가 조처를 취해야 할 것 같았다. 안 그랬다간 언젠가 진짜로 갈비뼈에 금이 갈지도 몰랐다.

“……성북동으로 갑시다, 영석 씨.”

운전석을 향해 허겁지겁 명령이 떨어졌다. 사냥감을 시식하기 직전의 갸르릉거리는 표범 같은 어조였다. 상반신만 끌려갔던 몸뚱이는 하반신까지 완전히 끌려들어가 연인의 허벅지 위에 앉혀지게 되었다. 뺨과 정수리와 귓불과 목덜미와 입술 사이로 소나기 같은 키스가 퍼부어지고 있었다.

“성북동 빌라 말씀이십니까, 사장님?”

“그래요.”

고영석의 시선이 신경 쓰인 나머지, 연인의 느닷없는 격정으로부터 벗어나려 몸부림을 쳐봤지만 한동안은 속수무책이었다. 쪽쪽거리는 낯부끄러운 소리를 감출 생각도 않고서, 연인은 앞에서 되돌아온 물음에 웅얼거리듯 대꾸했을 뿐이었다.

뭐가 이토록 연인을 흥분시키는 걸까? 삼키듯 달려든 열정적인 입맞춤에 마지못해 응하며 멍하니 물음을 던져보았다. 음악 소리가 들렸다. 곡명은 알 수 없는 엔야의 노래였다. 자신들의 애정 행각을 배려한 고영석의 센스였다. 그게 차라리 더 부끄럽다는 사실을 저 단단한 사내는 알까?

까끌거리는 혀의 감촉이 농염하게 입천장을 쓸었고, 이내 아랫배가 저릿해졌다. 곤란해. 또 차 안에서 정사를 벌이고 싶진 않아서 기를 쓰고 욕망을 참아냈다. 발기 부전 증세가 사라지고 나니 이만저만 난처한 게 아니었다. 한창때 같지야 않아도 연인이 작정하고 덤비면 자신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위야, 제발…….”

간신히 입술이 떨어졌을 때, 진심을 담아 연인에게 호소했다. 정말로 발정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집 식구들이 눈 뻔히 뜨고 지켜보는 앞에서는. 코와 코를 맞붙인 채로 숨을 헐떡이며 연인이 하하 하고 웃었다. 연인의 입안으로부터 달콤한 단내가 났다. 자신의 허리를 안고 있는 손의 떨림이며 미미한 홍조를 띠고 있는 관자놀이에서, 연인도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나마 표정만은 멀쩡하게 웃고 있어서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 같지는 않았다. 다행이었다. 제정신일 때의 연인은 웬만한 남자들은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훌륭한 자제력을 보여주곤 하니까.

“……미안…… 너무 좋은 나머지 지나치게 흥분했군.”

쇳소리가 섞인 매혹의 중저음이 속삭였다. 뭐가 하고 물어보려던 물음은 그대로 삼켜졌다. 바로 코앞에 달라붙다시피 해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연인의 눈물을 그제야 발견한 때문이었다. 연인의 발개진 눈시울 주변과 뺨 언저리엔 어느새 촉촉한 물기가 그득했다. 새하얀 치아가 다 보일 정도로 활짝 벌어져 있는 입술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더 안타깝게 느껴지는 눈물이었다.

“……왜 그래…… 응……?”

저도 모르게 연인의 눈가로 두 손을 가져가 눈물을 닦아주며 물어보았다. 바보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우는 걸 보니 분명 좋아서 우는 모양인데, 그래도 연인이 우는 것은 뭐라 해도 보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네가 성북동으로 가자고 하니까지, 마누라.”

“…….”

“내겐 생애 유일한 천국의 시간들이었는데, 네겐 꺼내기 싫은 슬픈 기억들인 것만 같아서 그간 눈치만 살피고 있었지. 언젠가 네 상처가 다 아물게 되면 함께 다시 가보자고 부탁할 작정이었거든. 아주 먼 미래에나 달성될 꿈들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지.”

“…….”

이번엔 자신의 목이 메어왔다. 나쁜 놈. 울려면 혼자나 울 것이지. 하여간 진짜 나쁜 놈이라니깐. 사랑스러움에 겨운 원망까지 뇌까려졌다. 눈물이 맺히는 걸 간파한 연인의 혀가 살며시 눈꼬리에 다가들었다. 따뜻하고 촉촉한 혀의 감촉이 조금씩 젖어드는 눈꺼풀을 가만가만 핥고 있었다. 가슴이 에일 지경으로 상냥하고 다정한 애무였다.

“……아틀리에로 쓰던 빌라가 아직 남아 있을까? 나 감옥에 있을 때 엄마가 팔았다고 했거든. 누가 새 주인이 됐는지 모르지. 10년이나 지났으니까 어쩜 재건축이 됐을지도 몰라. 그렇지?”

간신히 설움을 삼키며 물어보았다. 연인을 향한 물음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향한 애수였다. 그러나 되돌아온 것은 미처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선물이었다.

“재건축은 아직 안 됐다. 대신 주인은 그사이 두 번이나 바뀌었지. 얼마 전에 내가 다시 사들일 때까지.”

“?!!!”

“외관은 별로 바뀌지 않은 대신 실내 장식은 완전히 바뀌었더군. 지금은 신혼부부 한 쌍이 전세로 살고 있지. 내년이 계약 만료라 그 사람들 나가면 다시 예전처럼 실내 장식을 바꿔볼 생각이야. 네 마음이 내키면 옛날처럼 아틀리에로 써도 좋고, 아니면 아예 빌라를 통째로 사서 작은 화랑으로 개조해도 좋겠지. 네 그림만 상설로 전시할 수 있는 화랑으로.”

“…….”

“……울지 마…… 내 소중한 마누라를 울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

“……한국에 돌아와서 맨 먼저 찾아간 곳이 그 빌라였지. 더 이상 네가 없다는 걸 아는데도……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옛날 연희동 집을 쫓아다닐 때처럼 그 빌라랑 근처를 수시로 헤매고 다녔지. 함께 들어가 차를 마셨던 카페, 만화책과 비디오들을 빌렸던 비디오 대여점, 감자탕집, 샌드위치 가게, 아침저녁으로 운동하곤 했던 경신고등학교랑 성균관대학교 운동장들…… 고즈넉한 골목들과 예쁘게 가꿔진 정원이 있는 집들…… 녹음이 우거진 서울성곽의 긴 그림자…… 혹시라도 네가 찾아오진 않을까…… 나처럼 옛날이 끔찍하게 그리워져서 혹 보러 오진 않을까…… 기대도 하면서…… 내가 깨버린 천국이 그리워서…… 몸서리 쳐지게 그리워서…… 울면서 화를 내면서 헤매고 또 헤매 다녔었지.”

“…….”

“……울지 마라. 나도 자꾸 울고 싶어지니까. 나더러 네 따라쟁이라면서? 여기서 더 한없이 울릴 생각이라면 계속해도 좋고.”

“…….”

시선을 얽은 채 눈물만 줄줄 흘리는 자신을 따라 역시 고요히 눈물만 흘려대던 연인이 이윽고 다시금 자신을 품에 끌어들였다. 코트 깃 틈으로 얼굴을 파묻게 하곤 어린아이를 쓰다듬듯 머리카락을 살살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사무치도록 좋은 연인의 체취와 체온에 푹 안겨서 한참을 울었던 것 같았다. 아마도 연인 또한 한가지였을 것이다. 겨우 서로의 설움이 멈춘 것은 차가 성북동 빌라 앞에 도착한 무렵이었다. 아니, 더 이상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지점까지 도착했기에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른 덕분이었으리라.

10년 만에 보는 아틀리에는 외관상 그다지 변화가 없어 보였다. 외벽에 장식용으로 칠한 페인트 색이 약간 달라졌으며, 정원의 나무들에 연륜이 더해진 외엔 그다지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빌라를 둘러싼 나지막한 철제 담조차도 그대로였다. 마침 세 들어 사는 신혼부부가 외출 중이라 집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일말의 아쉬움은 뒤를 기약할 수 있는 기쁨이 되어 돌아왔다. 어차피 오늘이 아니라도 또 얼마든지 구경을 올 수 있을 터였다. 찬란한 청춘의 추억은 10년의 세월마저 견디고 온전히 살아남아 있었다.

연인과 손을 맞잡은 채 빌라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한참을 구경했다. 막 지기 시작한 노을빛을 받아 주홍색으로 빛나는 아틀리에의 창문과 외벽들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하고, 기억에 있는 정원의 나무둥치들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한때 온갖 우편물들로 빼곡하게 차 있던 우편함들을 열어보기도 했다. 연인과는 벌써 안면이 있는 듯한 경비실 수위와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눈에 인이 박이도록 빌라를 구경한 다음엔 천천히 성북동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웬일로 경호원들이며 홍 기사, 고영석까지 빌라 앞에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린 연인이었다!).

길을 따라 온갖 추억들과 그리움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연인과 만 5년을 함께하며 오르내리곤 했던 그리운 거리였다. 카페와 술집과 비디오 대여점과 아이스크림 가게를 지나쳤다. 상점들의 모양새는 대부분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업종의 종류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아마도 주인들과 건물의 쓰임새들만 잦은 부침을 겪었을 터였다. 가끔 10년 전에도 같은 장소에 동일하게 존재했던 상점을 발견할 때면 기뻐서 가슴이 벌렁거리곤 했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걸음을 멈춘 채 멍하니 가게 안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호기심에 찬 따가운 시선들이 자신들을 따라왔다. 워낙에도 눈길을 끄는 연인과 손까지 마주 잡고 있으니, 뭇 시선들이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순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에 더 이상은 개의치 않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연인 또한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호모라고 손가락질 좀 받으면 어떠랴. 호모들의 사랑이라 해도 사랑은 사랑이었다. 여신의 사랑보다 절대로 못할 것 없는 숭고한 사랑이었다. 자랑스러운 사랑이었다. 아아, 그랬다. 자신은 이제 더 이상 ‘소돔의 씨’가 아니다.

바삭바삭 마른 낙엽들이 뒹구는 서울성곽 앞이었다.

자신의 느린 보폭에 맞춰 나란히 걷던 연인이 문득 걸음을 멈춘 채 자신을 마주 돌려 세웠다. 양손으로 뺨을 감싼 채 약간 고개를 들게 하더니 시선을 맞춰왔다. 초겨울 한기가 무색할 만큼 따스한 손길이었다. 연인의 뒤로 길게 드리워 있는 서울성곽의 거무스름한 그림자가 보였다. 지극히 고색창연한 풍경 속에, 반대로 지극히 현대적인 모양새의 아름다운 남자가 그림처럼 녹아들어 있었다.

아득한 데자뷔가 다시 한 번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몇 시간 전, 그녀를 대면했을 때처럼 고통스럽고 서글픈 그것이 아니었다. 상대가 그녀가 아니라 연인인 때문이었으리라.

아득한 시간의 저편에서 농구공이 통통 튀며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청춘의 땀방울과 정열로 퍼덕거리는 새파란 에너지가 금방이라도 꼬리를 물고 나타날 것만 같았다. 사위는 이미 까만 땅거미로 물들고, 멀리 맞은편으로 보이는 거리의 입간판이며 가로등에도 하나둘씩 불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예뻐…….”

쉰 듯한 나른한 중저음이 연인의 입술을 타고 조용히 흘러나왔다. 사슬처럼 자신을 묶은 채 관통하듯 응시해오는 먹빛 동공에 심장이 아프도록 뛰고 있었다.

“……너무 예뻐…….”

되풀이해 토해진 중얼거림은 흡사 탄식 같았다.

자신의 뺨 위에 포개듯 손바닥을 겹치고 있던 두 손이 조심조심 머리카락 속을 헤치기 시작했다. 피아니스트 신동이었던 아름다운 남자의 아름다운 양손가락이었다. 확실하게 제 갈 길을 찾아낸 듯, 단호하면서도 절절한 애정이 넘실거리는 극진한 손길이었다.

깊은 음영이 진 뚜렷한 이목구비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검푸르게 일렁이는 깊은 눈시울이 천천히 감기는 게 보였다.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우는 것도 보였다. 자신의 머리카락 속을 한없이 헤매 다니며 절실한 애정을 전해주고 있던 손가락들의 신호를 따라 자신도 서서히 눈을 감았다.

……키스를 하려는 모양이네……. 몽롱해진 머리가 느릿하게 경고를 주고 있었다. ……걱정이네…… 길거리 한복판인데…… 아직 사람들이 심심찮게 오가는 것 같은데……. 현재의 것인지 과거의 것인지 아리송한 근심이 잠시 뇌리를 스쳐갔다.

“……괜찮아…….”

살짝 마주 댄 따스한 입술 끝에서 허스키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정말? 하고 물어보려는 찰나 곧바로 입술이 틀어막혔다. 벌어진 입술 틈을 비집고, 보다 뜨겁고 말캉한 감촉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다 마른 줄 알았던 눈시울에서 다시금 뜨거운 물기가 솟아나고 있었다. 빈틈없이 맞물린 입술 틈으로 서로의 촉촉한 타액이 슬며시 흘러내리고 있었다. 파고든 부드러움은 따뜻하고 다정하게 입안 구석구석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것은 욕망이 아니었다. 숭배의 키스였다. 헌신의 키스였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할 것 같은 키스였다.

탕, 탕, 탕, 탕, 탕……. 힘차게 울리는 러닝머신의 진동음에 맞춰 연인의 허벅지 근육이 파도처럼 물결치는 게 보였다. 전신을 적시고 있는 흥건한 땀 덕분에 잿빛의 트레이닝팬츠는 짙은 자주색의 민소매 티셔츠와 마찬가지로 연인의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군살은커녕, 요 몇 달 사이 몇 킬로그램쯤은 살이 내린 탓에 아름다운 몸은 그야말로 뼈와 근육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저대로 사진을 찍어 잡지사에 보낸다면 당장 모델을 하라며 섭외 전화가 줄을 이을지도 모를, 섹시하고도 완벽한 모델의 몸매였다.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카락은 이마를 가닥가닥 덮고 있고, 뺨은 활력 넘치는 에너지와 열기로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보면 볼수록 홀린 듯한 한숨만 흘러나왔다. 지금 20여 평 크기의 체력 단련실 안을 웅장하게 울리고 있는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처럼 어디를 살펴도 흠집 하나 찾을 수 없는 완벽함이었다.

김성준의 OK 사인이 떨어져 어제 아침부터 다시금 운동을 시작한 연인이었다. 주말인 오늘 아침엔 이른 새벽부터 출근 직전까지 계속된 탐욕적인 정사로 운동을 거르는가 싶었는데, 점심때가 좀 지나 퇴근한 연인은 곧바로 체력 단련실로 직행했다. 운동 끝날 때까진 접근 금지라는 억울한 명령까지 내린 연인이었다. 함께 있으면 자신이 유혹을 하는 통에 자꾸만 안고 싶어진다는 게 그 마뜩잖은 이유였다.

명령을 따라주는 척하며 몰래 숨어 들어와 연인의 뒤태를 훔쳐보기 시작한 지 10여 분, 무언가로 저 완벽한 모습을 남기고 싶은 욕구가 스멀거린 것도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다시 옆방의 아틀리에로 가 스케치북과 목탄을 가져왔지만, 모델에 집중하는 사이 그림 작업은 어느새 뒷전이 되고 말았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그저 관용어구가 아니란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꽃의 아름다움에 취해 무능한 화가는 그저 바라보기에만 급급하고 있었다.

체력 단련실에 숨어든 지 30분 가까이 흐른 것 같았다. 러닝머신 타이머가 울리고 서서히 속도를 줄인 연인이 빠른 보폭으로 다시 10분쯤을 걸었고, 그 10여분마저 지나고 나서야 마침내 발판에서 내려왔다. 연인이 다음으로 옮겨간 것은 러닝머신 옆에 놓여 있던 벤치프레스였다. 등을 대고 누워 엄청난 크기의 덤벨을 들어 올리기 시작한 지 또 10분 정도의 시간이 흘러갔다. 윗몸일으키기와 바벨 운동도 차례로 이어졌다. 벌써 한 시간도 더 넘은 것 같은데도 잠시도 쉬지를 않았다. 무서운 집중력과 의지력이었다. 처음 방 안으로 들어설 때부터 오디오 스피커를 울리고 있던 「합창」의 4악장 프레스토도 그간 몇 번이나 리플레이 돼야만 했다. 연인의 얼굴과 몸은 온통 비 오는 듯한 땀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 마무리 스트레칭까지 마치고 나서야 타월로 얼굴을 문지르며 냉장고 쪽으로 돌아선 연인이었다.

막 서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초겨울 오후의 햇살이 대여섯 가지 최첨단 운동 기구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는 체력 단련실 안을 가득 비추고 있었다. 흡사 물을 한바탕 뒤집어쓴 것 같은 모양새의 황금빛 몸이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실 지경으로 현란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비로소 한쪽 구석에 나붓 앉아 있는 인환 자신을 발견한 모양인지, 잠시 휘둥그레지는 연인의 눈시울이 보였다. 심연처럼 깊게 가라앉아 있던 먹빛 동공이 별처럼 일렁이기 시작한 것도 보였다. 입술 양끝이 올라가며 희열에 가득 찬 웃음이 떠오르는 것도 보였다. 거칠고 가쁜 호흡 탓에 크게 오르내리고 있던 가슴 근육으로 한쪽 손을 가져다대는 것도 보였다. 깜짝 놀랐다는 의미의 수신호였다. 단숨에 다가오려는 연인을 역시 같은 수신호로 제지했다. 두 팔을 쭉 뻗어 홱홱 휘두르며 겨우 목소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물부터 마셔.”

그러다 탈수증 생기겠다. 뒷말은 눈으로 보태야 했다. 깜짝 놀란 것은 연인뿐만이 아니었다.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얼마나 넋을 놓고 있었는지, 연인과 시선이 부딪칠 때까지도 미처 현실감을 끌어오지 못한 인환이었다.

연인은 반쯤만 자신의 명령을 들어주었다. 리모컨으로 오디오를 끈 다음,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들곤 곧바로 자신의 앞에 마주 쪼그리고 앉은 것이다. 갑자기 정적이 내려앉은 실내라 그런지 연인의 기척이나 숨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귀에 전해졌다. 샅샅이 헤집는 듯한 열렬한 시선이 자신의 이곳저곳을 핥고 있었다. 얼굴이며, 머리카락이며, 편한 실내복 차림인 빈약한 몸뚱이며, 손에 든 스케치북과 목탄까지.

“……물 마시라니까…… 모…… 목 안 말라?”

흡사 도둑질을 하다 들킨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고, 목소리에도 떨림이 깃들었다. 연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가 닿은 스케치북과 목탄 때문이리라. 그러고 보니 자신은 얼마 만에 연인을 그려보겠다고 요량을 세워본 걸까? 도둑질하다 들킨 것 같은 심정이 드는 것도 어쩜 당연한 반응인지 모른다. 먼먼, 옛 시간에는 거의 다 그러했었으니까. 연인을 그리는 것은 늘 몰래몰래, 그나마도 실제처럼 그리는 것은 절대 엄두도 못 내곤 했었으니까. 혹여 연인이 발견해 화를 내지는 않을까 근심하며 붓을 놀리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한때 연인이 다정하게 대해주던 이별 전 몇 달을 제외하면 늘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 짧은 허용의 시간조차도 완전한 표현의 자유는 주어지지 않았었다. 연인인지 실제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사실적인 표현은 스스로가 제동을 걸었으니까. 그러니 이 반응은 어쩜 과거가 남겨준 트라우마일지도 모를 일이다. 연인을 그리려면 도둑질을 하듯 몰래몰래 그려야만 한다는 슬프고도 가난한 트라우마.

“……나 그리고 있었나?”

노곤한 피로감과 기쁨이 역력한 중저음이 유혹하듯 물어왔다. 병마개를 따서 500ml 생수 한 병을 단숨에 비워내면서도 시선은 흡사 화살처럼 자신에게만 박혀 있었다.

“……어, 그게…….”

“……보여줄 수 있어?”

체력 단련실 한쪽 구석으로 팽개쳐지는 생수병이 보였다. 멍하니 생수병을 따라갔던 시선이 연인에게로 되돌아왔다. 깊은 주시가 버거운 나머지 아래로 슬쩍 시선을 내렸더니, 땀에 젖어 짙은 음영이 만들어져 있는 민소매 티셔츠와 트레이닝팬츠가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맙소사. 더더욱 심장을 버겁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알몸을 보는 게 차라리 덜 민망하지, 땀에 푹 젖은 채 온몸의 굴곡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며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모양새라니! 그 어떤 야한 차림새도 이보다 더 음란해 보일 수는 없을 거 같았다. 설상가상, 옷차림 탓에 유난히 더 도드라져 보이던 가랑이 사이 그것은, 남의 속도 모르고 불쑥 발기해 있었다. 길고 굵은 음경과 양쪽 묵직한 고환의 형태까지 확연하게 들여다보였다. 당사자가 태연한 만큼 보는 쪽이 더 수치감을 느낀다고 해야 할까.

“……제, 제대로 그리지도 못했는데…… 어……?!!!”

얼굴로 열기가 몰려드는 것을 자각하며 시선이 우왕좌왕 돌아가고 있는데, 들고 있던 스케치북을 홀연 빼앗겼다. 물론 연인의 짓이었다.

형태만 대충 떠올라 있을 지면을 진지하게 훑어보던 눈길이 자신에게로 되돌아왔다. 여전히 샅샅이 자신을 헤집는 듯한, 버거울 정도로 열렬한 시선이었다. 또 슬쩍 옆으로 시선을 비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기가 힘들다고 홀연 생각이 스쳐간다. 소름이 오소소 일 만큼, 심장이 아프게 조여들 만큼 절실하면서도 깊은 애정이었다. 속속들이 다 까발려진 날것의 열정이 해일처럼 전해져오는데 어찌 마음이 평온할 수 있겠는가. 한계 이상의 희열을 느끼는 것도, 한계 이상의 행복감을 자각하는 것도 모두 동시에 두려움을 동반한다는 걸 눈앞의 이 매혹적인 남자는 알까? 혹시라도 이것이 그저 한낮 오수(午睡)에 꾸는 찰나의 꿈은 아닐까 의심하곤 하는 가난한 마음을 알까?

“다 그린 게 아니지? 이래선 모델이 나인 줄 모르겠는걸?”

“……마, 말했잖아, 제대로 그리지도 못했다고…….”

“더 그리고 싶나? 러닝머신 위에 다시 올라가볼까?”

놀리는 것 같은 뉘앙스에 무턱대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다 말고 그저 보는 데만 넋을 놓아버리지 않았나. 애초부터 시간이 부족해 완성을 못 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정답. 기특하다, 울 마누라. 지금은 우선 다른 쪽으로 힘을 쏟고 싶으니까 모델 역할은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지.”

바닥으로 향했던 시선 끝에 스케치북이 놓였다. 연인이 바닥에 가만히 내려놓은 것이다. 대신 코앞으로 바짝 다가든 것은 땀범벅인 연인의 얼굴이었다. 땀 냄새 탓에 더 짙어진 수컷의 체향이 아찔했다. 촉촉하게 열기가 오른 섹시한 눈시울이 기를 쓰고 피하고 있던 자신의 시선을 붙들었다. 무릎을 꿇은 채 거의 엎드리다시피 상체를 기울이곤 올려다보니 그 어느 쪽으로도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심장의 박동은 거세지고, 얼굴의 열기도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연인이 지금 무얼 원하는지는 그저 마주한 눈길 한 번, 숨길 한 번만으로도 충분했다. 지난 목요일 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사흘 내내 밤마다 이어진 길고 과격한 정사였다. 어젯밤 늦게까지도 모자라 오늘 새벽녘부터 다시 시작해 출근 직전까지 그토록 달라붙었었는데, 또 하자고 달려드는 병적인 방탕이 기가 찼다. 더 기가 찬 건, 속으로 연인에 대한 불평을 뇌까리면서도 어쩌면 연인보다도 더 흥분해버리는 자신의 무절제한 몸뚱이였다. 엉덩이 사이 깊은 골에 숨겨진 입구가 천박한 기대감으로 벌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지난 며칠간의 부대낌을 고스란히 증거하듯, 입구는 물론 안쪽 깊숙이까지 느껴지는 얼얼한 통증조차 무색할 지경이었다. 아랫배로부터 찌릿한 기대의 전율이 퍼지기 시작한 지는 이미 오래고, 피가 급속도로 몰리기 시작한 성기 끝에서도 축축한 수액을 질금거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파블로프의 개 같은 조건 반사였다. 연인의 음란한 유혹의 시선과 눈이 마주친 직후부터인지, 아니면 연인의 발기한 몸을 목격한 직후부터인지,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었다.

“……예쁜 마누라의 예쁜 ‘거기’가 음란해지니, 확실히 서방님도 좀처럼 절제가 안 되는군. 운동할 때만은 유혹하지 말라고 신신당부까지 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이렇게 찾아주시는걸. 10년이나 굶주린 서방님으로서야 그저 황송할 따름이지.”

비죽, 연인의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가며 가지런하고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뻔뻔스럽고 사악하기 짝이 없는 짐승의 웃음이었다. 기가 막혀서! 지금 누가 누구를 유혹한다는 거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렇게 야하게 쳐다보면서 페로몬을 줄줄 흘리는데 어떻게 안 넘어갈 수가 있냐구! 와락 힘을 준 눈시울로 적반하장의 사악한 짐승을 째려보았다.

“그, 그거 하려고 들어온 거 아닌데……!”

울컥 터져 나온 억울한 항변은, 그러나, 도둑처럼 잽싸게 다가든 입맞춤으로 도중에 끊기고 말았다. 입술이 살짝 깨물리자 전신으로 찌르르한 전율이 왔다. 흐릿한 열락의 한숨과 함께 힘을 잃은 눈꺼풀이 푸들거리며 내려앉았다. 더 이상의 저항이 불가능할 완전한 항복의 표현이었다. 마치 그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벌어진 입술 틈으로 뜨겁고 말캉한 짐승의 혀가 단숨에 밀려들었다. 뱀처럼 요염하게 꿈틀거리는 자극이 민감한 안쪽 점막을 헤치며 색정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잇몸 안쪽의 짙은 성감대를 애무하는 뜨거운 혀의 감촉과, 가슴 근처를 더듬는 손바닥의 접촉에 전율했다. 능란한 탕아의 애무는 아랫배와 허리춤을 지나 얇은 면 실내복 팬츠 틈으로 쉽사리 접근했다. 속옷까지 헤집고 들어온 손가락이 체모를 더듬다간 이내 성기를 통째로 감싸듯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가볍고 부드럽기만 한 터치가 힘주어 움켜쥐는 것보다도 더한 자극을 준다는 것을 새삼 자각한 순간이기도 했다.

“……젖었어…….”

간신히 숨을 토할 수 있게끔 떨어져나간 혀가 자신의 입술 위를 할짝거리며 중얼거렸다. 나른하게 내려앉은 중저음이 거듭 음탕한 밀어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알고 있나? 벌써 흠뻑 젖어 있다, 여기…….”

귀두 끝을 문지르던 손가락이 슬쩍 뒤로 빠지더니 민감한 주름을 스쳤다. 간밤 내내 시달려 붉게 부어올라 있던 상처가 질겁해 소리 없는 신음을 흘렸다. 움찔움찔. 두려움 이상으로 기대가 섞인 조바심이기도 했다. 길고 우아한 가운뎃손가락이 슬쩍 위아래를 스치다간 이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흐읏……! 앙…… 흐아앙…….”

일단 침입한 손가락은 일체의 군더더기 없이 전립선 근처를 직격했다.

“……흐앗!!!”

찌걱찌걱, 착착. 피스톤질을 따라 이어지는 젖은 마찰음이 지독히도 수치스러웠다. 절대 참아지지 않는 교성만큼이나. 끝까지 와 박힌 끝마디는 빙글 휘젓고 쿡쿡 찔러댔다. 붉게 부어오른 민감한 내벽은 손가락이 드나들 때마다 조이고 풀고를 경련처럼 가쁘게 반복했다. 쓰린 아픔만큼이나 지독한 쾌락이었다. 연인의 중지가 들고나는 리듬을 따라 자신의 허리도 연인의 하복부를 향해 용두질을 하고 있었다. 박히는 게 아니라 박는 것 같은 황홀한 착각이 일었다. 귀두 구멍으로부터 말간 쿠퍼액이 줄줄 새고 있었다. 간밤 내내 쥐어짜인 덕분에 더 이상은 단 한 방울도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았건만, 절대 마르지 않을 샘인 모양이었다. 더, 더. 더 해줘. 더 거칠게. 더 강하게. 더 두꺼운 걸로. 아아, 제발……. 점점 하얗게 비어가는 의식 속에서 염치모를 창녀의 애원만 절박해졌다.

“……뭐라고……?”

허스키한 탕아의 중저음이 다시금 귓전을 유혹했다. 목소리만으로도 단숨에 갈 것 같은 치명적인 매혹이었다.

“……인환아, 뭐라고 했어? ……어떻게 해달라고……?”

흐릿해진 시야로 연인의 얼굴이 보였다. 욕정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는 야수의 얼굴이었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먹빛 동공에서 불길이 일고 있었다. 눈시울은 게슴츠레하고, 서로의 타액으로 젖은 채 번쩍거리는 입술은 소름이 끼치도록 관능적으로 보였다. 쪼듯이 자신의 콧망울과 입술을 번갈아 빨고 있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박아달라고 애원해봐. 어서. 더 크고 더 두꺼운 걸로 쑤셔달라고 해봐.

“흐아앙∼∼∼! 하앗! 앗……!”

가파르고 절박한 교성이 대꾸처럼 토해졌다. 쑤셔지는 구멍으로부터 올라오는 직접적인 자극 때문인지, 아니면 소리조차 삼켜진 음란한 밀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연인의 어깨와 팔을 움켜쥐고 있던 양손아귀의 힘이 와락 더해졌다. ……얼른. 얼른. 제발, 위야……. 비참할 정도로 비굴하게 애원했다. 물론 눈으로만.

“……소리를 내…… 들려줘, 내 강아지…….”

저릿저릿한 유혹이 다시금 귓전을 관통했다. 영향력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을, 오만하면서도 무자비한 명령이었다.

“……애원을 해…… 내 두꺼운 걸로 해줘…… 마음껏 박아줘…… 하고 애원을 해봐…… 내 걸 삼키고 싶다고 빌어봐…… 여기…… 여기 네 뜨거운 구멍 속으로…… 예쁘고 귀여운…… 응? 인환아…….”

“……해…….”

“……응……?”

“……두꺼운…… 박…… 부탁…….”

“……응? 뭐라고……?”

“……제…… 바알……! 흐아앙∼∼∼!”

“……응…… 응, 인환아! 내가 좋지? 날 원하지?”

“……하앙! 핫! 흐앗! 아앙……!”

창녀의 교성을 헐떡헐떡 내뱉으며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양손에 필사적으로 힘을 주며 연인의 상체를 끌어당겼다. 아랫배에 비벼지고 있던 연인의 부푼 성기를 향해 끝없이 용두질을 치대며 애원했다. 원해! 원해! 원해! 내 사랑! 내 예쁜 연인! 나의 하느님!

내벽을 채우고 있던 손가락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허기를 자각할 틈도 없이 갑자기 몸이 바닥으로 밀쳐졌다. 만세를 부르게끔 자신의 양쪽 손목을 위로 옭아맨 연인이 바지와 팬티를 한꺼번에 끌어내리고 있었다. 끈질기게 여유를 부리며 자신의 애걸을 유혹하던 연인의 기척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거칠고 갈급한 야수였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자신의 위로 성기만을 꺼내 든 연인이 몸을 겹쳐왔다. 양다리가 활짝 열린 채 몸이 반으로 접혔다. 연인이 두 손으로 허벅지를 움켜쥔 채 무방비하게 벌어진 치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독한 욕망으로 잔뜩 핏발이 선, 붉은 시선이었다. 새까만 음모와 번들거리는 쿠퍼액과 붉게 상기된 입구 주름이 여과 없이 연인의 시야에 노출되고 있었다. 극에 달한 욕망 탓에 수치감을 느낄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어서 박아주기를, 바라고 바라는 그 단 하나의 흉기로 자신을 산산조각 내주기만을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다행히 야수도 주저하지 않았다. 핥는 것 같은 탐욕의 시선이 잠시 움찔거리는 주름을 지그시 응시하다간 이내 자세를 잡고 귀두를 겨냥했다. 움찔. 귀두 끝이 불쑥 주름을 파고들었다. 내벽을 가르고서 거침없이 파고드는 압도적인 부피감에 숨이 턱 막혔다. 과연 손가락이 주던 부족함과는 차원이 다른 충만감이었다. 고통이었다. 쾌락이었다.

“흐윽!!! 윽!!!”

단숨에 뿌리 끝까지 박혀든 꼬챙이에 온몸이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버르적거렸다. 지독한 기쁨에 겨운 화냥년의 진저리를 치다가 와락 감았던 눈을 떴다. 바로 코앞에 벌게진 야수의 눈이 있었다. 미간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고, 반쯤 벌어진 아름답고 섹시한 입술에선 타액이 길게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표정은 어딘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졸린 것처럼 몽롱해 보이기도 했다. 물론 저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자신은 알고 있었다. 그건 기쁨이었다. 자신이 이 순간 몸서리가 쳐지도록 절절히 자각하고 있는 감정과 한가지인 바로 그것. 비로소 한 몸이 된 결합에의 황홀경. 그저 한 몸인 것으로 충분한, 더 이상 이 생에서 원하는 것이 없을 것 같은, 아니, 이대로 그저 죽어버렸으면 싶은 지독한 충만감이었다. 그를 반영하듯, 일단 결합을 완성한 야수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흡사 거대한 흉기의 모양을 자신의 내벽에 알알이 새겨 넣기라도 하듯, 뜨겁고 뭉근하게 율동하며 자신의 안에서 조용히 머물렀다. 흡사 쏘아보는 것만 같은 열광적인 숭배의 시선이 자신의 시선을 꽉 움켜쥔 것과 한가지로.

“……좋아…….”

야수가 몸서리를 치며 탄식했다. 고개가 거칠게 흔들리며 젖은 머리카락이 사납게 찰랑거렸다. 얼굴 가득 맺혀 있던 야수의 땀방울들이 자신의 얼굴 위로 꽃잎처럼 떨어져 내렸다. 가쁘게 토해지는 서로의 더운 숨길이 단 1센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서로 섞여들었다.

“……너무 좋아…….”

으르렁거리듯 되풀이하더니 자신의 허벅지를 아프도록 휘어잡고 있던 야수의 한쪽 손이 결합 부위로 내려갔다. 서로의 음모를 헤치고는 서로의 성기를 어루만지고, 이윽고 맞물린 주름을 더듬었다. 마치 확인이라도 하듯이.

“……느껴지나? 여기…… 우리가 하나로 달라붙어 있는 게 느껴져?”

뭉클한 감동과 함께 눈물이 비죽 솟아올랐다. 헤엄치듯 이리저리 허공을 헤집던 두 팔로 연인의 등을 감아들였다. 땀으로 푹 젖어 있는 티셔츠를 헤치고 들어가 뜨겁고 미끈거리는 근육을 정신없이 쓰다듬었다. 대꾸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말로써 토해지면 정말로 울어버릴 것 같아서였다. 자신의 말없는 대꾸가 기뻐 견딜 수 없는 듯, 야수는 만져지는 곳마다 움찔움찔 전율하는 근육의 율동으로 정직한 속내를 드러냈다. 흑, 읏, 윽…… 채 삼켜지지 못한 채 터지는 쾌락의 신음성조차 환희에 겨운 짐승의 포효 같기만 했다.

“……10년이야…….”

“…….”

“……10년이었다. 자그마치 10년 동안 너와 다시 이렇게 하고 싶어서 미쳐 있었다. 그걸 아나?”

“…….”

“……네가 이렇게 절박한 눈길로 나를 바라봐주고…… 나는 나를 향해 한계까지 발기한 네 사랑스러운 물건을 내려다보면서…… 그래, 이렇게 네게 파묻고 싶었다. 너는 내게…… 나는 네게…… 서로 깊이깊이 쑤셔 박은 채 죽고 싶다고, 미친 소원을 빌었었다. 그걸 아나?”

“…….”

“……죽을까?”

“…….”

“……이대로 그냥 죽어버릴까, 인환아?”

“…….”

야수는 진심이었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시울이 집어삼킬 것처럼 자신을 응시하며 호전적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거부의 대꾸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물론 거부할 생각 따윈 없었다. 자신 역시 한가지일 소원이었으므로.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이것으로 충분했다. 다 이루었다. 정말로 이대로 죽고 싶었다. 이 완벽함 속에 사라지고 싶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열렬히 응시했다. 서로의 심장 박동에 공명하듯, 결합 부위의 맥동에 공명했다. 마음을 일치시키는 것도 모자라 서로의 숨길과 혈류의 흐름조차 일치시켰다. 일순 시간이 정지했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응…….”

누군가가 울며 대답했다.

“……그래. 우린 지금 막 죽어버렸으니까…….”

또 다른 누군가가 희열에 차서 중얼거렸다.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매혹적인 웃음소리와 함께. 그 누군가는 자신일 수도, 또 연인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둘 다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더 이상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누군가가 웃으며 울며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또 다른 누군가도 동조하듯 리듬을 타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나인 감동이 파도처럼 넋을 강타했다. 기쁨에 떨며 전율하며 흐느꼈다. 입을 맞추고, 빨고, 어루만지고, 섹스를 했다. 죽음이 함께한 오르가슴이었다. 하나이기도 하고 둘이기도 한 지복이었다. 죽음이었다. 삶이었다. 영원이었다.

연인의 손길이 잠시 중심을 잡지 못해 휘청거리던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타월로 정성스레 닦였던 몸 이곳저곳은 다시 물기로 가득해졌다. 자신의 몸부터 닦아주느라 연인의 몸은 아직 흥건히 젖어 있던 때문이었다.

“……큰일이로군. 이래서야 모임에 갈 수 있겠나?”

포옹을 풀지 않은 채 근심 어린 중저음이 나지막하게 속삭여왔다. 자신의 체중을 온전히 기대도록 품 안에 상체를 꼭 끌어안은 연인이었다. 등줄기와 엉덩이를 오가며 살살 어루만지는 손길은 애정이 넘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한 시간이 넘는 하드 섹스 끝에 그대로 기절, 비좁은 욕조 속에서 연인의 품에 안긴 채 겨우 제정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체력 단련실 안에 붙어 있는 간이 욕실이었다. 의식은 말짱했지만, 연인이 자신을 말끔히 씻겨줄 때에도, 또 관장을 시켜줄 때에도 제대로 몸을 가누기 힘들었었다. 연인이 물기를 닦아주는 동안엔 그저 서 있는 것뿐인데도 자꾸만 다리에 힘이 풀렸다. 지난 사흘 내내 하룻밤도 거르지 않고 이어진 길고 하드한 정사만으로도 체력은 이미 한계에 이르렀었는데, 좀 전에 나눈 극치의 희열과 오르가슴은 불에다 기름을 부은 격이 되어버렸다. 카펫이 깔려 있었다곤 해도 딱딱한 바닥에서 거칠게 휘둘린 것도 체력을 바닥까지 고갈시킨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움직일 때마다 쓰라린 통증을 주는 사타구니 사이는 물론, 온갖 근육들과 뼈마디마디 할 것 없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게 처음부터 따라오지 말랬잖아. 외출할 때까지는 멀찍이 떨어져 있어야 했는데…… 자업자득인 건 아나?”

진지한 어조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아리송했다. 쳇, 먼저 유혹해놓고선 누구더러……. 짐승에다 성욕 대마왕인 자기를 탓해야지, 적반하장이 따로 없다! 마주 안은 연인의 허리께를 살짝 꼬집는 것으로 불만을 대신하자 연인이 큭큭 웃음을 물었다. 뺨에 댄 맨살을 통해 연인의 유쾌한 울림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그래, 내가 죄인이지. 마누라만 보면 전후 사정 안 가리고 발정해서 미치는 놈이니 어쩌겠나. 그래도 후회 따위 전혀 안 되는걸? 정말 좋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너는 어때?”

“…….”

“흐음…… 내 수줍은 강아지한텐 곤란한 질문인가?”

“…….”

“아하하하하…….”

다시 한 번 엉덩이 근처를 꼬집으며 불만스러운 대꾸를 주자 매혹의 중저음이 시원스러운 웃음을 되풀이해 토해냈다. 듣기만 해도 황홀한 웃음소리는 우아한 첼로 연주곡처럼 나지막하게 욕실 안을 울리다간 천천히 스러졌다.

“아무래도 넌 그냥 집에서 쉬는 게 좋겠다. 그런 번잡스러운 곳에서 이리 지친 널 시달리게 할 순 없어.”

곧이어 덧붙은 어조에선 다시금 진지한 근심이 전해지고 있었다.

“……괜찮아. 단것도 먹었으니깐 금방 기운 날 거야…….”

연인의 극진함이 절절히 자각되는 바람에 많이 쑥스럽기도 하고, 또 조금은 심장이 간질거리기도 해서 부러 담담한 어조를 만들어보았다. 정사 후에 자신을 씻기고 돌보는 연인의 극진한 배려는 이젠 완전히 습관이 된 것 같았다. 자신 역시 그에 점점 더 길이 들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흡사 공주님이라도 된 것 같은, 교만한 착각을 부추기는 불건전한 길들이기가 아닐 수 없었다. 뼛속이 녹는 것처럼 기쁘면서도 한편 그런 유치한 어리광을 경계하는 자신이 있었다. 공주님이라니! 이미 불혹을 바라보는 팍 삭은 게이 주제에!

“……상태 봐서 데려갈 거다.”

머리카락 틈으로 파고든 연인의 손가락이 조물조물 두피를 쓰다듬는 바람에 가뜩이나 기운 없는 머릿속은 더욱 몽롱해졌다. 담담히 토해낸 선언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잠이 들었을지도 몰랐다. 제법 단호한 어조에 조바심이 났다.

“싫어. 오늘 꼭 같이 갈 거야.”

반항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자 새까만 먹빛 동공이 정면으로 보였다. 깊은 애정이 절절하게 흘러넘치고 있는 연인의 눈시울이었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어 어딘가 멍한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안서영이라고 했지? 그 멋진 아가씨?”

“?”

“너 쳐다보는 눈빛이 장난 아니더라? 진짜 게이 마누라 있다구 커밍아웃은 한 건가 몰라?”

“……?”

“파티엔 꼭 와요, 장 선생님! 안 그럼 그날 이 남잔 내가 먹어치워버릴 테니깐!”

“…….”

갑자기 허를 찔린 것 같은 연인의 표정은 곧 이상야릇하게 일그러졌다. 기를 쓰고 폭소를 참는 것 같은, 그런 부자연스러운 이목구비. 바로 코앞에서 들여다보고 있어 조금도 숨겨지지가 않았다. 흥, 그야 우습기도 하겠지. 며칠 전 회사 로비에서 마주친 샤기 컷 ‘그녀’의 말꼬리를 그대로 흉내 냈으니. 사방에 치명적인 페로몬만 줄줄 흘리고 다니는 주제에, 뭐? 그저 친구일 뿐이라구? 젠장, 알 게 무어냐! 정말로 유혹이라도 당하게 될지. 반드시 참석해서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를 위태로운 불륜(!)을 눈 크게 뜨고 감시해줄 테다!

“……체면 차리지 마시고 그냥 웃으시지요, 바람둥이 서방님?”

불퉁하게 쏘아붙이자 크게 휘둥그레지는 아름다운 눈시울. 시선을 마주 얽은 채 숨 막히는 몇 초가 흘러갔다.

“푸하하하하하…….”

폭풍우처럼 터진 웃음소리였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연인이 엄청난 힘으로 자신의 상반신을 조여 안은 때문이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헝클어졌다. 연인의 길쭉한 손가락들이 미친 듯이 머리카락 속을 휘젓고 돌아다니고 있는 덕분이었다. 바닥으로부터 맨발이 들렸다. 엄청난 기세로 끌어안는 것도 모자라, 연인이 자신의 허리를 휘감은 통째로 번쩍 들어 올린 덕분이었다. 아프도록 끌어안긴 채 이리저리 흔들리는 통에 와락 겁이 날 지경이었다. 자신들이 서 있는 장소는 물기로 흥건한 욕실의 대리석 바닥이었던 것이다! 그저 연인의 기막힌 운동 신경만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연인을 강타한 웃음 폭탄은 꽤나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숨이 가쁠 지경으로 한참을 웃다간, 자신을 와락와락 조여안고, 다시 또 키들키들 웃어젖히다간, 자신의 얼굴 곳곳에 소나기 같은 열광적인 키스를 퍼붓기도 했다. 다시 한 번 말해봐. 다시 서방님이라고 불러봐. 흡사 흐느끼는 것 같은, 감동이 역력한 젖은 목소리로 귓가에 절절한 애원을 속삭이기도 했다. 어림없는 소리. 누구 좋으라고 리바이벌이냐, 젠장(실은 극도로 흥분한 연인 탓에 욕실 바닥에 둘이 거하게 미끄러질 것 같아서였지만!). 어쩐지 시뻘게진 낯빛을 하고서, 기뻐 까무러칠 기세인 연인의 얼굴만 맹렬하게 노려보았다.

“……너를 위해 살 거야…… 오직 너 하나만 바라보고 살 거다, 장인환…….”

폭풍의 끝…… 마침내 신음처럼 토해진 중저음은 진짜로 젖어 있었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자신을 품어 안은 채, 자신의 어깨 위에 얼굴을 파묻고서 가슴 뭉클한 맹세를 되풀이했다.

“……앞으로 내 인생에 새겨질 문신이라면…… 그래…… 오로지 너 하나뿐일 거다…… 그럴 거다, 장인환…….”

어느새 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가슴이 아픈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연인이 무식할 정도로 팔에 힘을 준 때문이라고. 진짜로 아프다고, 갈비뼈가 부서질 것 같다고 투정을 부릴 찰나, 그제야 연인이 안은 팔의 힘을 누그러뜨렸다. 서로 간에 약간의 틈이 벌어지고, 연인의 젖은 눈시울과 마주친 순간 연인의 입맞춤이 내려왔다. 부드럽게 핥듯이 경배하고, 허락을 구하듯 순례자처럼 천천히 안으로 스며들었다. 헌신의 입맞춤이었다. 맹세였다. 뼈에 새겨질 낙인이었다.

6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해는 벌써 져서 어둑한 땅거미가 창 밖 가득 몰려와 있었다. 아선그룹 창립 기념 파티는 저녁 7시부터라고 했다. 늦게 들러도 좋다고 안 회장답게 소탈한 초청을 주었지만, 간단한 기념식도 열릴 예정이라 시간에 맞추는 게 예의일 거라고 연인은 부연해주었다. 제대로 옷차림을 가다듬고 출발하려면 아슬아슬한 시간대였다. 무절제한 섹스에 탐닉하게 만든 연인이 새삼 원망스러운 시점이기도 했다.

정말로 자신이 가도 되는 걸까? 그것도 연인과 함께? 뒤늦게 현실적인 근심도 되살아났다. 인환의 이름까지 확실하게 인쇄돼 있는 초대장을 보긴 했지만, 여전히 의구심은 들고 있었다. 안 회장은 연인과 자신의 관계를 이미 훤히 꿰고 있다고 했다. 열렬한 그림 애호가인데다, 자신의 그림에도 무척이나 호감을 품고 있는 팬이기도 해서 가능하면 초대를 받아들이는 게 어떻겠냐고 연인은 말해주었지만, 확실히 그런 공적인 장소에 연인과 함께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것엔 일말의 두려움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액면 그대로 안 회장의 호의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스스로를 향해서는 어쩐지 궁색한 변명처럼 느껴졌다. 연인과 함께하고는 싶다. 샤기 컷의 멋들어진 재벌 집 영양 앞에서 자신이야말로 연인의 진정한 배우자라고 당당하게 선언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뭐라 당당한 연기를 한대도, 자신은 아직 대부분의 세상으로부터 지탄의 대상일 뿐인 게이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연인 또한 한가지. 그 사실이 그저 은밀한 소문거리가 아니라, 만천하에 공식화될지도 모르는 자리에 거침없이 나설 정도로 자신은 강심장이 아니다. 물론 자신이야 괜찮다. 화가로서의 명예든 뭐든,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잘 아니까. 하지만 연인은 다르지 않나. 세상을 상대로 사업을 벌이는 남자가 아닌가. 그런 연인에게 자신의 존재란 그저 숨기고 또 숨겨도 위험할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조심성 없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어도 괜찮은 걸까? 걱정스럽게도, 연인은 과거의 연인과는 생각이 많이 달라진 모양이었다. 그것도 완전 180도에 가까울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를 광고할 생각까지야 없지만, 그렇다고 숨길 생각 또한 없노라고 했다. ‘정면 돌파’라 했던가? 어젯밤, 안 회장의 초대 건을 두고 나누었던 줄다리기 끝에 나온 연인의 담담한 선언이었다. 커밍아웃의 스캔들 정도엔 맞서 싸울 의지가 생겼노라고, 또 그만큼의 힘과 권력은 갖추었노라고, 연인은 조용하게 되풀이했다. 그리고 그건 연인과 자신 두 사람 모두를 위한 싸움이기도 하다고. 한 번 양보하면 두 번을 움츠러들어야 한다고 했다. 두 번 움츠러들게 되면 네 번은 비겁해진다고도 했다. 서로를 그렇게 겁에 질린 패배자로 방치할 순 없노라고 했다.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의 사랑을 그렇게 만만하게 취급하게 내버려둘 순 없노라고. 연인의 그 단호한 선언이야말로, 인환으로 하여금 눈물범벅이 돼서는 안 회장의 초대에 응하기로 결심을 하게끔 만든 계기였다. 그랬다. 실은 샤기 컷의 멋들어진 재벌가 영양 때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이게 과연 옳은 길일까? 연인이 혹여 나중에라도 후회하는 건 아닐까……? 거무스름한 땅거미로 물든 창 밖과, 바스 가운을 걸쳐 입던 중인 연인을 번갈아 쳐다보며 되풀이해 자문한 물음들이었었다. 체력단련실을 벗어나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런 일말의 번민은 인환에게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모임은 많을 텐데…….”

살피는 시선으로 인환의 상태를 샅샅이 꿰뚫어 보던 연인이 또 근심 어린 회의를 전했다. “갈 거야!”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불퉁한 대답을 끝으로 그제야 떨어져 나간 집요한 고민이었다. 그래, 가야지. 가서 연인의 옆에 설 것이다. 자신은 더 이상 ‘소돔의 씨’가 아니다!

단단한 고집을 드러낸 자신의 눈동자를 한동안 직시하던 연인이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그래, 함께 가자. 깊고 검은 동공엔 연인의 항복 또한 드러나 있었다. 서로가 세상을 향해 단단한 갑옷을 두르기로 동의한 순간이기도 했다.

둘 다 바스 가운만 두른 속 보이는 차림으로 서둘러 1층으로 내려왔다.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며 집 안을 둘러보았지만 다행히 본채엔 집 식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인환이 잠시 기절한 틈에 연인이 내선 전화로 모두에게 퇴근을 명령한 것을 나중에 가서야 알았다). 이미 출발 준비를 마친 경호원들과 고영석도 현관 밖에서 대기 중인 것 같았다.

연인은 인환의 얼굴과 몸에 로션과 연고를 발라주고, 드라이어로 머리카락을 말려주는 것도 모자라 갈아입을 슈트와 넥타이까지 꼼꼼히 챙기고 나서야 연인 스스로의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인환이 모든 준비를 끝내고 느긋하게 지켜보는 동안 정작 연인은 젖은 머리 그대로 가운을 벗어젖히고 있었다. “머리카락 젖었잖아.” 걱정스레 염려를 챙겼건만, “괜찮아. 가는 도중 마를 테니” 하는 대수롭지 않은 대꾸만 되돌아왔다. 벌거벗은 채로 드레스 룸으로 걸어 들어가는 연인을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형 고양잇과 짐승처럼 유연하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에 취한 나머지 ‘젖은 머리카락’에 대한 근심은 순식간에 잊히고 말았다. 물결치는 등 근육과 탄탄하게 올라붙은 엉덩이 위로 붉고 날카로운 손톱 자국들이 낭자했다. 자신이 할퀸 정사의 자취였다. 수치도 모른 채 창녀처럼 애걸하고 또 애걸한 쾌락이었다. 덩달아 뇌리를 점령한 달콤한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깊고 깊은 곳에 숨은 내벽이, 무도하고 두꺼운 흉기의 급습을 받기라도 한 것마냥 저릿하게 욱신거렸다. 얼굴로 뜨끈한 열기가 오른 것은 물론이었다.

잠시 후, 검정색 턱시도와 코트를 꺼내 들고 되돌아오는 연인이 보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물결치는 대흉근, 그리고 아랫배와 허벅지 근육들이 보였다. 무성한 치모 아래, 힘차게 덜렁거리는 거대한 페니스와 팽팽하게 긴장돼 있는 건강한 음낭도 보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점점 더 숨이 가빠지는 것도 느껴졌다. 차마 더는 마주 볼 수가 없어 슬며시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온몸 구석구석이 눈이 부실 지경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섹시한 유혹 자체일 완벽한 몸뚱이였다. 10년 만에 욕망을 되찾은 음탕한 창녀는 언제든 깨어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저 치명적인 매혹에 걸려드는 즉시, 이성은 순식간에 날아가버릴 터였다. 그리고 그게 저 아름다운 상대에게 발각이 되는 즉시, 상대 또한 짐승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중독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마약보다도 치명적일 중독……. 조심해야 했다. 이러다간 정말로 1년 내내 섹스만 하다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진심으로 경계를 세웠다. 두려운 문제는 그게 조금도 과장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죽을까? 연인은 진심으로 권유했었다. 이대로 그냥 죽어버릴까, 인환아? ……그에 자신은 뭐라고 대답했던가? 지독한 황홀경 속에서 자신은 어떤 대꾸를 주었었던가……?

“……이리 와, 인환아.”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상냥한 부름이 달려왔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 촉촉하게 젖어 있는 머리카락이 도리어 더한 매혹을 주는 완벽한 아름다움이 눈앞에 있었다. 인환을 향해 한 팔을 뻗고 있는, 새까만 실크 턱시도와 새하얀 드레스셔츠와 역시 새까만 보타이로 한껏 치장을 한 검은 아도니스였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심장의 떨림을 필사적으로 감추며 배시시 웃어주었다. 웃음의 의미를 읽으려는 듯, 잠깐 고개를 갸우뚱하던 아도니스가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자신이 다가가야 하는 단 몇 초의 기다림도 못 참겠다는 듯이. 허리께로 아도니스의 단단한 팔이 감겨들었다. 와락 끌어안긴 창녀의 몸뚱이는 상쾌한 코롱 냄새가 섞인 익숙한 체취에 전율했다. 이마 위로 쪼옥 하고 강렬한 입맞춤이 떨어졌다.

“……그런 눈초리를 하고 웃으면 안 돼, 마누라.”

허스키한 중저음이 귓가에서 현란한 바람을 일으켰다.

“……남의 회사 잔치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

“진짜 부서트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

다시 쪼옥. 이번엔 뺨이었다. 쪽, 쪽, 쪽. 다시 세 번 연거푸 떨어진 지점은 왼쪽 목덜미와 턱선 사이. 셔츠 깃 위로도 드문드문 눈에 띄고 있는, 붉은 낙인이 꽃비처럼 흩뿌려진 지점이었다. 마지막 일점(一點)엔 아쉬운 듯 꽤나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아아, 그럼 그렇지. 귀신을 속이지, 귀신을.

“……가자.”

겨우 풀려난 상반신 대신 왼쪽 손이 틀어잡혔다. 어루만지듯 손바닥을 꼭 쥐었다간 이내 단단히 깍지를 끼어왔다. 자신만큼이나 희미한 떨림이 느껴지는 손가락이었다. 이윽고, 반대편 손에 턱시도만큼 멋들어진 검정색 캐시미어 코트를 집어든 아도니스가 힘 있게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 창녀는 아도니스를 원망했다.

‘그냥 발가벗겨도 괜찮잖아.’

예상을 깨고 지극히 신사다운 이성을 풀어헤친 아도니스가 못내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진짜로 부서트려도 괜찮단 말야.’

실은 두려워하면서도 기대를 했던 건가 보았다. 진심으로 1년 내내 섹스만 하다 죽고 싶었던 건지도 몰랐다. 정말 철딱서니 없는 창녀가 아닐 수 없었다.

“출발합시다!”

문득, 담담하면서도 힘 있는 명령이 옆에서 떨어졌다. 달아오른 얼굴로 찬바람이 선뜩하게 다가들고 있었다. 온 신경이 자신을 옆에 품은 연인에게로 가 있어 현관 밖으로 나온 것조차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현관 앞에 검정 세단과 황금색 볼보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그 옆에 나란히 서 있는 고영석과 홍 기사, 그리고 건장한 체구의 경호원 두 사람도 보였다. 연인의 명령을 접수한 고영석이 재빨리 검정 세단의 뒷좌석 문을 열어주는 것도 보였다. 어둑한 정원 너머, 아스라이 펼쳐져 있는 서울 도심은 흡사 크리스마스트리처럼 각양각색의 불빛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잘난 남자란 모름지기 스캔들까지도 화려해야 하는 법이죠. 여자가 봐도 근사한 세기의 공주님과 결혼했다가 이혼한 걸로도 모자라 세컨드 연애 상대까지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였던 거면, 완벽하게 잘난 증명을 한 셈이라고나 할까요?”

“…….”

“약혼하네 마네 하는 소문까지 돌아서 조마조마하게 만들더니, 결국엔 우리 위야 씨의 양다리 걸치기로 화려하게 깨지고 말았다더라고요? 휴우, 그 소식 듣고 제가 얼마나 안심했던지! 스캔들까진 봐주겠지만, 솔직히 그 여배우란 여자, 위야 씨의 재혼 상대로는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거든요. 알아보니깐 얼굴은 반반하지만 머릿속만큼은 텅텅 비었다고 하더라구요. 게다가 완전 공주병에 도끼병! 그도 모자라 중증의 허영기에 쇼핑 중독증까지 있었다고 합디다. 우리 위야 씨가 그딴 바보 멍청이 앞에서 무릎 꿇고 청혼하는 장면만 상상해도 밥맛이 다 뚝뚝 떨어지더라라니까요? 제가 옆에 있었음 두 손 두 발 들고 말렸겠지만, 아시다시피 전 그때 홍콩 지사로 쫓겨가 있을 때라 말이죠.”

“…….”

“그건 그렇고, 아무튼 그 양다리의 상대가 일곱 살 연상의 천재 게이 화가라니! 우리 위야 씨, 마지막 피날레까지 스캔들러스함의 극치를 달린 모양입디다? 노 프로블럼! 완전 항복이에요. 처음 봤을 때부터 심상치 않은 존재감으로 조신한 처자 가슴 떨리게 만들더니만, 끝까지 실망을 시키지 않는 오라버니이십니다, 우리 위야 씨는. 안 그런가요, 장 선생님? 진짜 굉장한 남자 아녜요?”

“……그…… 글쎄요…….”

“흠, 애인 칭찬이라 많이 부담스러우신가 보다. 영 반응이 신통찮네……?”

“……………….”

“하긴 나만큼 잘난 미인이 뜨거운 관심과 애정을 드러내는데, 위기감을 안 느끼신다면 그도 좀 심각한 문제겠죠?”

“…….”

“어라? 정말 태연하신 표정이시넹?! 진짜루 저언혀 위기감이 안 느껴지시남유∼∼∼?”

출처를 알 길 없는 사투리마저 섞자, 여자의 말투는 훨씬 더 소탈하고 정감 있는 것으로 변했다. 여자의 도회적인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투리라니. 도통 이질적이고 우스꽝스러울 그 시골스러운 말투는, 그러나 여자의 드물게 총명하고 세련된 분위기와도 묘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얼굴은 인형처럼 앳되고 귀여운 인상의 미인인 데 반해, 전형적인 오피스 레이디처럼 노숙한 크림빛의 스리피스 정장 차림이 신기할 정도로 잘 어울리는 것과 한가지였다. 하긴 대한민국 재계 1∼2위를 다투는 재벌 그룹의 창립 기념 파티에 드레스가 아닌 평상복으로 등장하는 대담한 모양새 자체부터가 여자의 독특한 개성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여자의 정체란 바로 그 그룹의 직계손이 아닌가 말이다. 천재적인 아이큐까지 타고나 일찌감치 경영권 후계 서열 최상위에까지 랭크돼 있다고 하니, 여자가 지닌 존재감이란 것은 단연 이 화려하고 떠들썩한 모임의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스스로의 위치에 대한 자각이 있는 건지, 여자는 현재 여자의 차림새에서 유일하게 격식에 맞을 것 같은 9센티 굽의 하이힐마저 불편하다며 힐을 벗어둔 채 인환의 옆에 앉아 있었다. 그것도, 한쪽 발을 의자 위에 접어 올려선 양손으로 발바닥까지 주무르고 있었으니, 아무리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호텔 복도 한구석이라지만 여자의 지나칠 정도로 격의 없음에 인환은 두려움마저 일 지경이었다. 아무리 기자나 매스컴 관계자들은 철저하게 차단된 모임이라고 하지만, 세간의 눈이라는 것은 언제든 쉬이 매스컴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은 굳이 매스컴 관계자가 아니더라도 뭇 시선에 노출되는 즉시 세상 밖으로 생중계될 여지가 차고 넘친단 얘기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여자의 소탈한 태도와 쾌활한 성격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이리 좌불안석의 심정이 되는 것은.

그랬다. 파티 장소인 아선 호텔 리셉션 홀에서 빠져나와 화장실에 들른 것부터가 실수라면 실수의 시작이었다. 게다가, 모임 내내 인환을 호위하다시피 달라붙어 있던 지극정성의 연인마저 떨궈놓고 혼자 빠져나오고 말았다. 안 회장 이하 재계의 거물급 인사들과 격의 없이 자연스레 어울리는 연인을 감탄하면서 훔쳐보는 일에도 조금은 시들해졌을 무렵이었다. 홀 한쪽에 마련된 뷔페 요리를 두어 접시 비우고, 샴페인 한 잔과 이름 모를 칵테일 서너 잔도 홀짝거렸었다. 역시 홀 한쪽, 아선 그룹의 역사가 일목요연하게 나열된 사진들도 구경하다가 화장실을 핑계로 홀 안을 빠져나왔었다. 천여 명이 넘는 인파에 질렸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집을 나설 때 우려했던 것처럼, 연인의 동성 배우자로서 주목을 받는다든가 하는 일 따윈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워낙에 모여든 사람들의 면면이 내로라하는 정재계의 거물급 인사들이었던 터라, 인환 같은 보통 사람들은 아예 주목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건 어떤 면으로 연인 또한 한가지여서(‘재계의 떠오르는 샛별’ 정도가 모임에서 연인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였다) 젊은 여자들이라거나 혹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게이들이 아니라면 연인에 대해 유별난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현실을 자각하고 나니 그동안의 긴장이 일거에 풀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기념식이 끝나고 30여 분이 지났을 무렵부턴 진심으로 느긋하게 파티를 즐기게 된 인환이었다. 인환의 세상과는 꽤 많이 동떨어진 세상의 사람들이나, 잘 이해가 안 되는 정관계 사교 시스템을 구경하는 일은 신기하면서도 흥미로웠다. 물론 그건 연인이 속한 세상이었다. ‘연인의 세상’이었기에 신기로울 수도, 또 흥미로울 수도 있었다. 그렇게 다시 한 시간쯤을 초대객용 테이블에 앉아 정신없이 딴 세상을 구경하다간 자연스레 다가든 지루함에 홀을 빠져나다. 꽤나 오랜만에 마주하게 된 대단한 인파도 자신을 쉬이 질리게끔 했을 것이다. 느긋하게 화장실 볼일을 보고 미로처럼 얽혀 있는 호텔 복도를 탐색했다. 그러다 발견한 공간이 이곳이었다. 거대한 리셉션 홀들은 물론, 복도 곳곳에 마련된 간이 휴게 공간으로부터도 꽤 떨어져 있는데다 화장실로부터도 거리가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 공간이었다. 복도 벽을 등지고 가로로 길게 놓인 3인용 소파 양편에 2미터에 가까울 거대한 파키라 화분과 벤저민 화분이 어둑한 그늘까지 만들어주고 있어 그야말로 조용히 쉬기엔 안성맞춤인 공간이었다. 물론 그 평가는 채 1분도 안 돼 깨지고 말았지만(자신이 홀을 나설 때부터 냉큼 쫓아온 게 틀림없었다. 연인이 줄곧 방패가 돼주던 홀 안에서도 자주 여자의 번뜩이는 시선과 마주치곤 했으니까).

“도망 나오셨나 봐요, 장 선생님?!”

귀에 익은 쾌활한 목소리가 잠시 고요해졌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여자가 한 손엔 하이힐을, 나머지 한 손엔 클러치백을 걸친 파격적인 모습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듣자하니 원래는 헤테로라던데요, 우리 위야 씨? 장 선생님이 게이로선 유일한 상대라던데…… 제가 여자라구 너무 방심하시는 거 아닙니깝쇼?”

아아, 물론 그 후로 내내 이런 식이었다. 지나치게 솔직한 건지, 아니면 지나치게 들이대는 건지, 이 귀여운 인상의 30대 미인은 거의 일방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격의 없는 수다로 인환의 혼을 쏙 빼놓고 있었다.

“생각해보세요. 전 머리도 꽤 좋구…… 제 자랑은 아니지만, 아마 위야 씨보다도 한참은 더 좋을걸요? 얼굴도 이만하면 한미모 하는데다, 성격도 끝장 좋거들랑요? 머리 텅 빈 여배우 나부랭이랑은 비교조차 안 되는 수준입지요, 미안하지만. 이만하면 장 선생님이 지니신 매력들보다 절대 못하다고는 보지 않는데, 장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남유? 우리 위야 씨가 언젠간 절 ‘특별한 여자’로 봐주는 때가 오긴 할까요?”

“……그, 그게…….”

“니예? 이미 특별한 여자라굽쇼?”

“……멋진…… 물론 아주 멋진 분이십니다, 서영 씬…….”

“아유, 백번 지당하신 칭찬을 참! 절대 빈말씀이 아니신 거 저두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요. 호호호호…… 그럼 그때가 오면 제게 우리 위야 씨 양보해주실 의향도 있으신 거죠?”

“……그…… 그건…….”

이마에 진땀이 났다. 생각해보니 주변 공기가 너무 더운 것도 같았다. 칵테일 몇 잔의 알코올 성분 때문인지, 혹은 오랜만에 입은 양복이라 답답함을 느껴서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아니, 실은 이 심하게 쾌활한 미녀의 진의를 짐작할 수 없는 것이 가장 답답했다. 며칠 전 연인의 사옥에서 마주쳤을 때 여자의 눈빛에서 읽은 건 분명 어떤 형태의 진한 애정이었다. 그렇다고 여자의 거침없는 선전 포고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여자의 어조는 시종 가볍고 유쾌하기만 했으니, 한편으론 여자가 지금 인환을 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위야는 그냥 친구라고 하던데…… 서영 씨와는 그저 친구 사이일 뿐이라고…….”

결국 애매하게 대꾸를 흐리고 있는데 여자의 코웃음이 말문을 가로막았다.

“흥, 그 말을 믿어요? 장 선생님 이제 보니 너무 순진하시당! 외모는 천상 옆집 아저씬데 마음씨는 순수 그 자체신가 봐요오오? 예술을 하셔서 그런가? 흐음…….”

“……별로 순진하다고는…….”

“에이, 순진하신데요, 뭘. 남자들의 그런 말을 믿어요? ‘걔랑은 친구 사이일 뿐이야’ ‘그 사람은 그저 동료야’. 고거이 글씨 남자들이 꼬투리 잡힐 때마다 하는 상투적인 변명이란 걸 아직도 모르시남유?”

“…….”

“친구가 ‘여자친구’ 될 때도 있는 거고, 동료가 애인 될 때도 있는 거고 그런 거지, 세상에 미리부터 딱 정해진 관계란 게 어딨겠남유? 아니 그러요? 게다가 저처럼 우리 위야 씨랑 같은 세계에서 뒹굴다 보면 이심전심 통하는 것도 많게 되고, 회식 자리 같은 데서 만나 서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믄 어느 날 갑자기 필이 팍 꽂히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 아니겠어요? 서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설라무네, 서로의 체취를 들이마시며 서로 발끝까지 긴장해선 가슴을 막 두근거리고…… 서로의 눈길에 술잔이 담기는지, 술잔에 서로의 눈이 담기는지 비몽사몽…… 카아∼∼ 호접지몽이 따로 엄구만유! 기냥 필이 팍팍! 안 느껴지시남유, 장 선생님?”

“……위, 위야는 술 안 마십니다…….”

“에? 아, 맞다! 차암, 그 점 하난 우리 위야 씨가 진짜 김새는 부분이긴 하징…….”

“그래. 김새는 남자 마누라한텐 이제 그만 관심 좀 끄고 일어나시지, 안서영?”

두근…….

느닷없이 끼어든 중저음의 방향을 따라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미간을 살짝 구긴 꿈처럼 아름다운 남자가 벤저민 화분 너머에서 이쪽을 굽어보고 있었다. 새까만 실크의 턱시도 차림이 안 그래도 빼어나게 수려한 용모를 더욱 두드러지게끔 만드는, 늠름한 장신의 남자였다. 연인이었다.

반사적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의 울림을 자각하며 깊게 심호흡을 했다. 연인을 마주할 때마다 홀라당 넋이 나가버리곤 하는 팔불출 표정을 경계하기 위해 살짝 입술을 깨물어도 보았다. 여자를 힐끗 주시하며 찡그렸던 미간은 인환과 시선을 마주하는 즉시 부드럽게 풀렸다. 깊숙한 먹빛 동공이 별처럼 빛나는 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감지되는 열정 때문이리라. 뭉클 하고 또 심장이 울었다. 아, 그렇지. 팔불출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아니, 자신보다 더할 팔불출이 바로 저 앞에 있었다. 사랑에 취한 얼빠진 표정조차 숨이 막히도록 매혹적인, 인환의 따라쟁이 팔불출이었다.

연인의 한 손엔 우유로 보이는 하얀 액체가 가득 찬 유리잔이 들려 있었다. 호사스러운 호텔 복도를 배경으로 무슨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컷을 연출하고 있는 연인에겐 도무지 언밸런스할 아이템이었으나, 그조차도 이상할 정도로 잘 어울리는 우유 컵이었다.

“에이, 씨! 아빠더러 좀 오래 붙잡고 있어달라고 했더니 벌써 튀어나왔네! 누가 의처증 환자 아니랄까 봐 완죤 사냥개가 따로 없구만! 여기 숨어 있는 건 어찌 알았대?!”

연인의 등장과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선 여자가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뒤뚱거리는 위태로운 자세로 그제야 하이힐에 발을 끼우고 있었다.

“회장님께서 찾으시니 어서 가보시지?”

“아빠가? 왜? 난 이제부터 프리웨이라고 선언하고 왔는데?”

“낸들 아나? 이건 너희 집 잔치 아니냐?”

“이상하네? 기념식도 다 끝났구, 눈도장 찍을 인사들도 대충 다 거쳐 왔는데 새삼 또 무슨 볼일이시래? 진짜 아빠가 부르시는 거 맞아, 위야 씨?”

연인은 대답 대신 한쪽 어깨만 으쓱했을 따름이었다. 잠시 연인에게 미심쩍다는 시선을 주던 여자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행사장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약간 뒤뚱거리는 것 같은 어색한 걸음걸이가 확연히 두드러져 보였다. 정말로 하이힐이 꽤나 불편을 주는 모양이었다. 안쓰럽기도 하고, 조금 우습기도 한 모양새라 인환의 입가엔 저절로 실소가 물렸다. 그대로 사라지나 싶던 여자는 막 복도 모퉁이를 돌기 전에, 다시금 진의가 모호한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 참, 위야 씨 다음 스캔들 상대는 제가 되는 겁니다, 장 선생님? 허락받은 걸로 알고 있어도 되지요잉∼∼∼?”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얄미울 정도로 귀여운 모션으로 손을 흔든 여자가 마침내 벽 너머로 완전히 사라졌다. 일방적인 폭탄을 쏘아올린 것 치고는 너무나 깜찍한 미소요, 사랑스러운 몸짓이었다.

“젠장, 저 여자가 또 무슨 헛소리 지껄이는 거야? 버젓이 남자친구까지 있는 주제에!”

여자가 앉아 있던 자리에 연인이 대신 자리를 잡으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막혀하는 기색은 얼핏 읽혔으되, 인환이 느끼는 반의반만큼도 동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애…… 애인이 있어……?”

“당연하지. 그것도 얼굴 멀끔하게 생긴 천재 수학자다. MIT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더군. 저 나이에, 저 성격에 애인 없다는 게 말이 되나.”

결국 그저 놀린 것뿐이었나? 하지만 그 눈빛은 분명……. 아리송했던 저울이 한쪽으로 살짝 기울긴 했으나, 어딘가 석연치 않은 기분은 여전했다. ‘짝사랑’의 감에 관한 한 자신을 능가할 점쟁이가 있을까 보냐 싶었다.

“하긴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명랑하던걸. 남자들한테 진짜 인기 많을 거 같애. 집안까지도 귀족이니 마음만 먹으면 어떤 남자라도 사로잡을 수 있을 거 같다…….”

“저 여자 입버릇이지. 자기 같은 여잔 딱 1프로라고. 세상에서 딱 1프로만 존재하는 여자 중의 여자, 엑기스라나? 무서운 건 그게 저 여자의 진심이라는 거다. 뭐가 ‘되지요잉’이냐, ‘되지요잉’이! 나 원 참, 나잇값도 못하고 귀여운 척은…….”

“……귀여운 아가씨긴 하지 뭘. 너랑 동갑이라는 게 난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걸…….”

“귀엽긴 개뿔이…….”

“후후, 많이 친한가 봐? 성준 씨 말고 네가 이렇게 편하게 대하는 친구는 처음 보는 거 같애.”

“…….”

“미국에서 알게 됐다고 했지? 어떻게 친하게 됐는지 말해줄 수 있어?”

“…….”

“……표정이 굳어지네…… 왜? 얘기하기 별로야?”

“……음, 나중에. 언젠가 나중에 말해줄게.”

“……?”

“……그런 얼굴 할 필요 없어. 별건 아니다. 그저…… 그래, 그저 다만 지독한 시절이라서…… 당분간은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그래.”

“…….”

“……마셔라.”

심연처럼 깊어진 동공으로 한동안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생각이 미쳤는지 들고 있던 우유 컵을 내미는 연인이다.

“술 마셨잖나. 속 부대낄지 모르니까 이거라도 마셔둬.”

손에 직접 쥐여주기까지 하는 우유 컵의 저의에 잠시 어리둥절해졌다가, 덧붙인 연인의 상냥한 말에 문득 코끝이 찡해졌다. 컵을 받아 든 자신의 오른손을 커다란 두 손바닥으로 꼭 감싸 쥐기까지 한 연인의 시선이 핥듯이 자신을 살피고 있었다. 술기운이 발갛게 오른 낯빛이 마음에 안 드는지 슬쩍 미간을 구기기도 하다가, 최면에라도 걸린 듯 얌전히 우유를 받아 마시는 자신의 눈동자를 지그시 응시하기도 하다가, 종내는 입가에 번진 하얀 흔적이 못내 사랑스럽다는 듯 행복한 웃음을 머금기까지 했다.

“……별로 마시지도 않았는데…….”

슬쩍 주변 눈치를 살피는 것 같던 연인이 재빨리 고개를 기울여왔다. 쪼옥. 번개처럼 빠르게 혀로 자신의 입가를 핥아준 연인이 낙인처럼 강렬한 립 키스를 찍곤 다시 재빨리 떨어져나갔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고작 1초쯤 될 키스였을까? 키스와 함께 바닥까지 떨어진 심장이 엄청난 기세로 뛰고 있었다. 시침을 뗀 무표정으로 연인이 자세를 원위치하고 나서도 인환의 심장은 한참이나 더 빠르게 벌렁거려야만 했다.

“……파장까지 자리를 지키겠노라고 약속한 게 후회스럽군. 당장이라도 집에 가고픈데 말이다.”

“…….”

“안 회장은 좋은 사람이지만, 지나치게 간섭을 하는 오지랖도 좀 있거든. 당신 눈엔 내가 애송이로만 보이나 봐. 쓸데없이 자존심만 세우는……. 나로서야 별 필요가 없으니 이리저리 연줄을 만들지 않는 건데 말이지.”

“…….”

“컵.”

멍하니 연인의 멀쩡한 얼굴만 바라보는데 도로 손이 뻗어온다. 양손에 쥐고 있던 빈 컵을 빼앗듯 가져간 연인이 옆 소파에 얌전히 세워놓는 게 보였다.

“……그런 눈초리는 위험하다고 했지?”

맞은편 벽에 시선을 준 채로 연인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전율스러운 색기가 은밀하게 깔리는,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짐승을 들쑤시는 눈빛이라는 걸 아나? 세상도 말짱 잊고 홱 돌아버릴 것 같단 말이다. 지금 당장 널 발가벗긴 다음에…… 안고 또 안아서…… 실컷 하고…… 그렇게 부서트리고 싶어져서…….”

“…….”

“……하고 또 하는 거다…… 여봐란 듯이…… 저 안에서 점잔만 빼는 속물들도 온통 넋이 나갈 정도로…… 보이냐? 그래, 이 사람이 내 마누라다…… 내가 사랑해서 미치는 내 예쁜 마누라다…… 네 안에다 깊이 박은 채 막 허리를 치대면서 여봐란 듯이 자랑을 하는 거지…… 나만큼 행복한 놈 있으면 나와봐라 하고…… 아, 이건 좀 변태스러운가? 후후…….”

“…….”

“……그러니까 그런 귀여운 눈초리는 우리 집 침실에서나 보여주는 게 안전하지. 조신한 서방님을 짐승도 모자라 변태로 만들어버리는 눈길이니까…….”

“…….”

적반하장일 진짜 위태로울 밀어들을 연달아 나지막하게 토해낸 입술이 겨우 조용해졌다. 조각 같은 프로필은 여전히 시침을 뗀 무표정이었다. 맞은편 벽에 고정된 아름다운 먹빛 동공도 태산처럼 고요했다. 다만 인환과 어깨가 살짝 닿아 있던 왼팔만이 은밀하면서도 분주했다. 슬금슬금 다가온 피아니스트 신동의 손가락이 인환의 오른쪽 손가락 끝을 살짝 더듬었다. 네 손가락 끝을 부지런히 오가며 하프를 뜯듯 간질이던 손가락이 마침내 인환의 새끼손가락 하나를 택해 살짝 걸어왔다. 어린아이들끼리의 그것처럼 순수한 약속을 걸듯. 남의 잔칫집 한복판에서 대놓고 손을 잡는 것만은 지극히 위험한 변태도 눈치가 보였던 모양이었다.

“……비겁해…….”

“……?”

“……지금도 먼저 키스해놓구…….”

“…….”

“……매…… 맨날 먼저 유혹하면서 내 탓만 해…… 나쁜 놈이야, 진짜…….”

“…….”

미동조차 없던 조각 같은 프로필이 입꼬리 끝만 살짝 올라가며 미소를 머금는 게 보였다. 희열에 차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인환처럼 물밀 듯이 밀려드는 애정과 성욕을 지그시 누르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정말로 억울한 마음에 열심히 노려보지만, 좀처럼 시선을 맞춰주지 않는 것이 야속했다. 살짝 마주 댄 어깨와 달콤하게 이어져 있는 새끼손가락만으론 몹시도 허기가 졌다. ……부족해. 보는 것만으론 너무 부족해. 아니, 만지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안는 것만으로도 부족할 거야. 너무너무 부족할 거야. 너는 늘 내게 부족하기만 해. 언제나 네가 고파. 배 속이 지독한 허기로 뒤틀리기만 해. 그걸 아니? 이 지독한 그리움을 아니……? 가슴 저린 진심을 눈에 담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절절한 진심은 공기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마주 엮인 새끼손가락 끝을 통해 찌릿찌릿 전기가 흐르고 있었다. 시선을 묶지 않아도, 말로써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것은 절대적인 애정의 교감이었다. 기를 쓰고 외면하고 있는 연인의 얼굴이 서서히 붉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귓가와 관자놀이 근처, 그리고 깊은 음영이 진 아름다운 눈시울은 어느새 소녀처럼 핑크빛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길고 긴 속눈썹이 파드득 떨리는 것도 보였다. 연인이 희열과 성적인 자극에 버거워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하지 말라니까…….”

“…….”

“……눈길 돌려라, 마누라. 눈에 띄는 아무 객실로나 끌려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

“농담 아니다.”

“…….”

점점 더 낮아지는 허스키 보이스엔 현실적인 위협이 담겨 있었다. 마주 쥔 새끼손가락에서도 전율 같은 떨림이 전해졌으니, 확실히 과장된 농담만은 아닌 것 같았다. 마지못해 고개를 돌리고 연인처럼 맞은편 벽에 시선을 고정했다. 천장과 별 사이의 장식 이음새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화려한 실크 벽지의 무늬를 더듬어보기도 했다. 세기의 명화를 들여다보기라도 하듯, 엄청난 흥미와 집중력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래야 했다. 그래야만, 옆에 앉아 있는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다시 보고픈 유혹을 누를 수 있었다.

옆에서 잔뜩 긴장된 한숨이 나지막하게 토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애틋한 설렘과 애정의 두근거림, 그 이상의 저릿한 관능까지 절절히 드러나는 숨소리였다. 빠르고 강하게 뛰고 있는 연인의 심장 소리까지 선명히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연인과 완벽히 공명하고 있을 자신의 심장 소리까지도. 지금 누가 더 상대를 탐내고 있는지, 혹은 누가 더 사랑에 겨워하는지, 심장의 울림만 가지고는 도저히 판단할 수가 없을 거였다.

멀리서 은은한 실내악 소리가 들려왔다. 행사장 안에서 연주되고 있는 음악 소리일 터이다.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거의 들릴 듯 말 듯해서, 오히려 주변의 고요한 침묵과 평화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었다. 서로를 에워싸고 있는 환경이 지극히 개방적이고 정적인 덕분에 폭풍 같은 열정과 성적인 긴장감으로 들끓고 있는 서로의 내면이 더 민감하게 읽히는 것과 한가지였다. 하나로 연결된 새끼손가락과, 고즈넉하고 정적인 호텔 복도와, 아득하게 울리는 음악 소리를 통해 서로의 절실한 감정이 여과 없이 서로의 넋을 공명시키고 있었다. 둘이면서 하나로 존재하는 듯한 완벽함과 충만감. 서로가 극치의 사랑을 주면서 또한 받고 있다는 명징한 인식. 그건 단순히 ‘행복’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할 완벽한 일체감이었다. 흡사 오르가슴의 그것처럼 엄청난 희열이었다. ‘사랑’이었다. 오직 ‘사랑’뿐이었다.

흐릿한 균열이 느껴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아니, 얼마만큼이나 서로는 서로에게만 취해 있었던 걸까? 5분? 10분? 아니, 20분?

‘다른’ 시선이 느껴졌다. 다른 기척이 다가오는 것도 느껴졌다. 아니, 다른 향기가 더 먼저 다가왔던 것도 같았다. 흐릿한 담배 냄새와 결합된 코롱의 냄새. 무척이나 세련되면서도 남성적인 체향이었다. 물론 기억에 있는 체향이었다. 기억에 있다 뿐이냐, 그리운 마음이 왈칵 목구멍을 타고 올라올 정도로 친밀한 체향이기도 했다. 완벽한 합일에 몰두해 있던 두 사람의 희열은 다른 체향에 의해 그렇게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 느닷없는 균열을 먼저 알아차린 쪽도, 그 즉시 극도의 경계를 세운 쪽도 물론 연인이었다.

연인의 고개가 인환 쪽으로 돌아왔다. 아니, 정확히는 인환의 어깨 너머, 다른 체향을 가진 남자를 향해서였다. 서서히 굳어지는 이목구비가 보였다. 깊은 음영이 진 아름다운 눈시울에 서리처럼 내려앉는 한기도 보였다. 온몸의 유연한 근육들이 채찍을 맞은 것처럼 순간 바짝 긴장하는 것도 느껴졌다. 아슬아슬하게 끝마디만 걸려 있던 새끼손가락 대신 연인의 왼손이 통째로 자신의 것을 감아왔다. 아픔이 느껴질 정도로 인정사정없는 악력이 손가락을 조여대고 있었다. 심장은 이제 다른 이유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것의 원인이 반가움인지, 혹은 두려움인지, 스스로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인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시선도 천천히 왼편으로 이동했다. 오른편 모퉁이로 이어지는 복도 끝을 뒤로하고 늠름한 장신의 남자가 서 있었다. 자신들이 앉아 있는 소파로부터 5미터쯤 떨어진 거리였다. 환하게 밝혀진 백열등 불빛은 남자의 정체를 단숨에 낱낱이 드러내주고 있었다. 연인만큼이나 선명하고 카리스마적인 존재감을 주는 남자…… 김강원이었다!

남자는 검정색 면바지와 짙은 세피아빛 양모 재킷 차림이었다. 재킷 안쪽엔 크림색의 터틀넥 스웨터를 받쳐 입었고, 바짓단 아래로 비죽 보이고 있는 것은 갈색과 금색이 적절히 섞인 소가죽 스니커즈였다. 소탈하면서도 세련된 감각과 멋이 흐르는, 남자의 전형적인 평상복 차림이었다. 잘생긴 한쪽 손가락에 들린 장방형의 파일 케이스조차도, 남자의 그리운 평소 모습을 연상케 해서 얼핏 목이 메었다. 아무리 진솔한 차림을 하고 있다 한들 무슨 베테랑 영화배우의 그것처럼 화려하고 압도적인 매혹을 흩뿌리곤 하는 존재감조차 평소 그대로…… 아마도 갤러리 현대나 다른 전시 현장에서 열심히 뛰다가 바로 달려온 듯싶었다. 애초부터 재벌 그룹의 창립 기념 파티 따위에 오체투지를 할 남자는 절대 아니지만, 꽤 늦은 시각, 그것도 저런 평범한 옷차림으로 태연히 끼어든 남자의 진솔함과 대범함엔 새삼 감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여윈 건가? 남자를 멍하니 응시하며 자문을 해본다. 잘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에도 워낙 초췌한 얼굴이었기에, 그때가 더 심각했던 건지, 아니면 지금이 더 최악인 건지는 판단이 안 선다. 하긴 우열을 가릴 필요조차도 없는 것 같다. 지금 모습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니까.

시선이 마주치자 남자가 살짝 웃는 게 보인다. 미소를 따라 왼쪽 입꼬리 너머로 움푹 패는 보조개에 그만 참지 못하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고통과 고뇌로 역력히 훼손된 이목구비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살인적인 매혹이 여전해서였다. 남자에게 저 지독한 연옥을 선물해준 장본인인 주제에, 여전히 남자를 그리워하는 스스로의 뻔뻔스러움이 여전해서였다. 안녕…… 아름다운 사람…… 내 수호천사…… 등이 붙은 쌍둥이…… 안녕, 안녕…… 하고 다시 인사하게 된 게 너무나 기뻐서였다.

살인 미소를 머금은 수호천사가 한동안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눈동자를, 얼굴 구석구석을, 그리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몸 구석구석을, 샅샅이 투시하듯 쓸고 내려가는 따뜻한 시선이다. 마지막…… 연인과 연결돼 있던 오른손에 시선이 머물렀을 땐 아릿한 애수가 천사의 미소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번 인터뷰 기사가 실려서 전해드리려고요…….”

힘겹게 토해진 젖은 목소리였다. 매혹적으로 팬 보조개가 시종 남자의 뺨을 장식하고 있는 걸 보면 남자는 거듭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쩐 일일까? 왜 자신의 눈엔 남자가 우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왜 눈물을 펑펑 흘리며 서럽게 울고 있는 것으로 보일까? 고통과 고립과 고독으로 사무치는 얼굴로 보일까?

“……몇 번이나 연락을 취했는데 받지 않으셔서요. 많이 걱정했습니다. 부러 절 피하신 겁니까, 선생님?”

부드럽게 이어진 항변은 ‘항변’이라는 말뜻조차 무색하게끔 들렸다. 멍하니 고개를 흔들었다. 몰랐다. 연락이 없기에 그대로 인연이 끊긴 줄만 알았다. 왜 아니겠는가? 지독한 꼬락서니만 보여주지 않았나. 남자에겐 최악의 배신을 때리지 않았나. 자신을 향해 침을 뱉고 돌아선다고 해도 달게 받으리라고 마음을 다지지 않았나. 그런데 연락을 했다고? 그것도 몇 번씩이나? 금시초문이었다.

“……제기랄!”

으르렁거리는 욕설이 오른쪽 옆에서 들렸다. 움켜잡힌 손이 아팠다. 맞닿은 손으로 생생히 전달되는 분노를 통해 남자를 보이콧한 진범을 알게 되었다.

“아아, 역시……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저를 아예 외면하고 싶어하시는 것은 아니었군요.”

“…….”

“그렇다면 앞으로 있을 차기 작품전은 전부 마인 아트 쪽에서 독점하게 할 거라는 말씀도 선생님 뜻은 아니신 거겠죠? 내년 봄 쿤스트할레의 초대 작가로 위촉되신 것도 거절하셨더군요. 아무래도 제가 중간 다리가 되는 것이 저어되신 때문이겠지요, 문 사장님?”

역시 금시초문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미국은 물론 유럽 쪽 루트까지 뚫어보려는 고마운 야망을 펼쳐 보인 적도 있었다. 워낙에 자신보다 남자를 신용했기에, 별 이변이 없는 한 자신 역시 남자의 야망에 끌려가주기로 작정을 한 적도 있었다. 물론 그건 화가로서의 명예를 쓰레기통 속에 처박아버린 일련의 사건이 있기 전까지의 작정이긴 했지만 말이다.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아파, 위야…….”

기어코 주룩 흘러내린 눈물은 정말 손가락이 아파서였다. 질투에 환장한 야수가 제가 가진 힘도 모르고 자신의 손을 부서트릴 기세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변명을 했다.

“아파…….”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재차 호소하자 그제야 야수의 악력이 느슨해졌다. 찢어 죽일 기세로 남자를 노려보는 수컷의 질투는 여전해서 가슴이 아팠다. 연인을 불안하게 만드는 자신도 아프고, 그렇다고 남자를 그리워했던 자신을 부인할 수도 없고, 남자의 고통에 공명하고 있는 자신을 절실히 자각하는 것 또한 멈출 수 없었다.

“……선생님과 잠시 말씀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문 사장님. 허락은 필요 없을 줄 압니다.”

내내 자신을 향해 있던 남자의 시선이 연인에게로 이동했다. 북풍한설처럼 냉랭한 일별이었다. 마주 노려보는 연인의 그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아서 가슴이 미어졌다.

……아, 그랬지. 그렇지, 참……. 이 사람도 나를 사랑해. 나를 사랑해, 아주 많이…….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을까, 어떡하면…….

“얘기해. 방해하지 않을 테니.”

연인이 이를 갈며 대꾸했다. 느슨해졌던 악력이 다시금 거세지는 게 느껴졌다.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면서 당신 얼굴까지 바라봐야만 하는 고단함만은 사양하고 싶군. 여태까지 비겁한 숨바꼭질을 즐겼으면 그 정도 편의쯤은 봐줘야 공정하지 않겠나?”

“…….”

“뭐가 두려운 거냐? 당신이 그토록 소원하던 선생님의 사랑을 얻었잖나? 아, 그 사랑에 자신이 없단 뜻인가? 내게 선생님을 빼앗길까 봐? 14년의 역사네 뭐네 으름장을 놓더니 그도 그저 유치하고 심약한 허세에 불과했던 모양이지?”

“…….”

한순간 주변을 덮친 살기로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진심이었다. 남자의 도발이 떨어진 직후, 연인은 진심으로 남자를 죽일 뻔한 것이다.

“……떨지 마.”

으르렁거리는 듯한 명령이 떨어지고 나서야 자신이 와들와들 떨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연인과 남자 사이에 무시무시한 신경전이 오가던 몇 십 초 내내.

“괜찮아, 인환아. 떨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다. 안 건드려. 네게 속한 소중한 건 무슨 일이 있든 지킨다. 설령 그게 저 주제넘은 남자라고 해도.”

침울하게 울리는 중저음이 겁에 질려 있던 심장을 직격했다. 몇 십 초 전의 끔찍스러운 살기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평온하게 갈무리된 어조였다. 일단 결단이 내려지자 연인은 주저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아프게 잡혔던 손에 자유가 왔다. 호위병처럼 고집스레 버티고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것도 보였다. 단 몇 걸음 만에 남자가 처음 등장했던 복도 끝에 도달하는 것도 보였다. 물론 더는 전진하지 않았다. 여차하면 단숨에 되돌아올 수 있을 위치에서, 등을 보인 자세 그대로 바위처럼 버티고 섰을 뿐이었다.

“……짐작하고 있긴 했지만 진짜 경계가 지독한 파트너로군요. 선생님과 통화하기가 이렇게 힘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앞으로도 제가 많이 피곤해질 것 같아요. 오늘도 파티에 참석하셨다고 안 회장님께서 연락해주시지 않았더라면 언제 다시 뵙게 됐을지 아찔한 기분마저 듭니다.”

웃음기 어린 남자의 말에 이끌리듯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꽃보다 아름다울 미소가 화사하게 피어나는 게 보였다. 여전히 울음 같은 웃음에 또다시 가슴이 미어졌다. 젖어드는 눈시울이며 잔상처럼 남은 몸의 미약한 떨림을 감지했는지 남자가 안타까운 표정이 되었다. 이내 길게 토해진 한숨…….

“……저 때문이라면 그러지 마세요, 선생님. 제가 겪고 있는 이것이 그저 고통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

“……보내주신 ‘삼색 코너’ 시리즈 1은 이별의 뜻이 담긴 선물이었습니까?”

“…….”

“……다행이다…….”

“…….”

“……혹시라도 그런 뜻일까 근심했습니다. 제 감정을 알고 계시니 부담을 느끼신 나머지 그런 결정을 하신 건 아닐까 무척 겁이 났지요. 작품 자체는 환장할 정도로 마음에 들었지만 순수하게 기뻐할 수가 없더군요.”

“…….”

“……선생님.”

“…….”

“선생님…….”

“…….”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제…… 발……!”

“…….”

“…….”

“…….”

“…….”

“……아니요, 선생님. 선생님께서 사랑하는 이가 누구인지 이젠 압니다. 그러니 제 감정은 여기까지입니다. 억지로 애정을 달라 구걸하는 것이 올바른 사랑법은 아니니까요.”

“…….”

“……소유하는 것만이 사랑의 완성이 아니듯이 말이지요.”

“…….”

“제가 고통받는 것이 선생님께도 아픔이 된다는 걸 압니다. 아픔을 드리는 사랑이라면 그 역시 올바른 사랑법은 아니겠죠.”

“…….”

“그래서입니다. 제가 집착을 놓는 것이 현재로선 고통을 줄이는 유일한 길이니까요. 선생님을 아프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절대……. 만약 제가 조금이라도 선생님을 괴롭힌다면 그 어떤 그럴싸한 변명도 통하지 않을 겁니다.”

“…….”

“……그렇지요. 깨끗이 접고 물러나는 것도 아름다운 완성이 될 수 있겠죠.”

“…….”

“……오늘부로 선생님은 제 친구입니다. 혼이 공명하는 소중한 친구일 뿐입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인연을 끊을 생각일랑 말아주세요. 저는 앞으로도 선생님이나 선생님의 작품과는 언제까지나 공명하고 싶으니까요. 그게 제가 선생님께 바라는 유일한 소원입니다.”

“…….”

“……큐레이터 재주는 괜찮은 편이니까, 여러모로 제 재주를 써먹어도 주세요. 장담하지만 선생님을 세계에 알릴 자신이 있습니다. 이 바닥에서 제법 실력을 쌓은 치들도 제 앞에선 웬만해선 명함도 못 내밀 감각일 거예요. 알고 계시죠?”

“…….”

“……울지 마세요. 질투심 많은 파트너 씨께서 절 무섭게 쏘아보고 있네요.”

“…….”

“……선생님…….”

“…….”

“…….”

남자의 화사한 살인 미소가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눈앞에 온통 뿌옇게 안개가 서린 때문이었다. 자꾸만 눈을 깜빡이는데도 잠시 맑아지는 것 같던 시야는 이내 다시금 부옇게 흐려지곤 했다. 남자도 더는 말리기 힘들다 여겼는지, 한참 동안 자신의 얼굴만 들여다보았을 뿐이었다. 가끔은 난처하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기도 하면서, 또 가끔은 매혹적인 살인 미소를 머금기도 하면서.

친구 같았다. 정말 이젠 그저 사이좋은 친구인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미소였다. 몸짓이었다. 아아, 하지만 어떻게 영혼마저 속일 수가 있을까? 등이 붙은 샴쌍둥이가 아닌가. 수호천사가 아닌가. 보지 않아도, 직접 말로 하지 않아도, 혹은 만지지 않아도, 어쩐지 속속들이 다 읽히는 존재가 아닌가. 웃고 있어도 실은 울고 있다는 걸 안다. 여전히 아파하면서 피를 흘린다는 걸 안다. 그런데 어떻게 웃을 수 있나. 어떻게 쉬이 눈물을 멈출 수가 있나. 이렇게 아파하는데. 이렇게 슬퍼하는데. 등이 붙은 자신의 아름다운 샴쌍둥이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선생님. 등이 따끔따끔 장난이 아니로군요. 아무래도 위로는 문 사장님에게 양보해야겠는걸요?”

초조한 듯, 한쪽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던 남자가 마침내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게 보였다.

“……받으세요, 선생님. 뉴욕 타임스 인터뷰 기사입니다. 번역문도 뒤에 끼워져 있으니 같이 읽어보세요. 문화 섹션 권두로 올렸더군요. 그 친구한테 입김 좀 넣은 보람이 있더라고요.”

멍하니 내민 손바닥에 파일 케이스가 들렸다. 파일케이스를 쥐여주느라 잠시 손등 위에 머물렀던 남자의 손끝은 언젠가 느꼈던 온기답지 않게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럼 일간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담담한 작별의 인사말이 떨어졌다. 허리 가까이 상반신을 굽힌, 절대 평범하지 않을 몸짓도 이어졌다. 한동안 굽힌 허리를 펴지 않고 있는 남자의 정수리 부근과, 손안에 들린 파일들을 번갈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정성껏 돼 있는 스크랩 기사들을 기계적으로 넘기는 자신의 손가락이 몹시도 떨리고 있다. 어딘가 낯설어 보이는 자신의 사진들도 보이고, 영문으로 된 자신의 이름자도 보이고, 뒤페이지에는 가지런한 글씨체로 기록된 한글 기사문도 보였다. 그것이 눈앞에서 지나칠 정도로 정중하게 작별 인사를 던지고 있는 남자의 필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조차 없었다.

마침내 자세를 바로 한 채 시선을 보내오던 남자를 향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찰나의 순간, 비통하게 일그러져 있던 남자의 표정을 설핏 본 것 같았다. 지극히 짧은 순간이어서, 실은 환영에 불과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흐릿해진 시야로 제대로 밟혀든 것은 여전히 화사하게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매혹적으로 패인 볼우물과, 웃음기가 선명한 아름다운 눈매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눈꺼풀을 감았다 떴을 땐 벌써 남자의 늠름한 등이 보이고 있었다. 야속할 정도로 단호하게 돌아선 남자가 성큼성큼 앞서나가고 있었다. 몇 걸음 만에 연인이 기대서 있는 복도 모퉁이까지 당도했고, 막 벽 너머로 사라질 찰나였던 것 같았다. 자신이 남자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한 것은. 너무나 서두른 때문인지 불편한 한쪽 다리에 찌릿한 통증까지 느껴졌다.

파일 케이스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설핏 들은 것 같았다. 젠장할 하는 연인의 익숙한 욕설도 들린 것 같았다.

“김 선생님!!!”

비명 소리 같은 누군가의 절박한 외침은 보다 더 확실하게 들을 수 있었다. 막 어둠 저편으로 사라지려던 남자가 움찔 몸을 떠는 게 보였다. 두 걸음이었다. 남자와 절름발이 화가의 거리는 고작해야 단 두 걸음. 그러나 찰나 동안 화가의 뇌리를 스쳐간 절박감은 2만 킬로미터보다도 더 아득히 멀 거리였다.

돌아선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고통으로 훼손된 처참한 표정이 차마 갈무리될 틈도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휘둥그레진 눈시울엔 어느새 물기가 흥건했고, 무방비하게 벌어진 입술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낯빛은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아아, 그래. 그래.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모르는 척할 수가 있을까. 숨겨도 속속들이 다 알아지는 고통인 것을. 문신처럼 뼛속 깊이 각인된 상처인 것을. 10년 전의 자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절망인 것을. 안 그런가? 기왕에도 등이 붙은 샴쌍둥이가 아닌가? 말하지 않는다고, 보지 않는다고, 만져지지 않는다고 모른다 할 수 있는가. 모르는 체할 수 있는가.

팔을 뻗었다. 2만 킬로미터의 거리를 단숨에 건너뛸 수 있을 절박함으로. 찌릿하게 울리는 다리에 한껏 힘을 주어 도움닫기를 했다. 갈퀴처럼 벌린 양팔로 남자의 목을 와락 끌어당겼다. 담배 냄새가 섞인 상큼한 코롱 향이 콧속으로 확 다가들었다. 남자의 단단한 가슴팍을 얼굴에 각인하는 순간, 허리가 엄청난 힘으로 조여졌다. 남자의 양팔이 자신 못지않을 폭풍 같은 기세로 자신의 상반신을 품어 안은 때문이었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것만 같은 격렬함이 넋을 뒤흔들었다. 미친 듯이 펄떡거리는 남자의 단단한 근육이 전신으로 부딪쳐오고 있었다. 파고든 남자의 손가락들에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뒤엉키고, 등줄기와 엉덩이를 아프도록 애무하는 남자의 손길에 전신의 피부가 불꽃처럼 달아오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딱딱하게 발기한 남자의 거대한 성기가 사타구니 사이로 파고들더니 막무가내로 자신의 것을 비벼대고 있었다. 막지 않았다. 막을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마지막이었다. 남자의 마지막 사랑이었다. 뼈가 바스러지는 실연의 고통을 기꺼이 수용하고, 남자는 다음 순간 친구로 돌아갈 터였다. 못 해줄 것이 없었다. 다 주고 싶었다. 자신이 줄 수 있는 거라면 다 주어야 했다. 그로써 남자의 이 지독한 고통과 절망과 고독을 줄일 수만 있다면. 얼굴이 들렸다. 눈물범벅인 남자의 입술이 폭풍처럼 자신의 것을 덮쳤다. 역시 막지 않았다. 막기는커녕 열렬히 호응했다. 입술을 활짝 열고, 불길처럼 타오르는 남자의 혀와 타액을 맹렬히 빨아 당겼다. 안으로 침범한 남자의 열정은 자신의 입안 구석구석을 폐허로 만들다시피 처참하게 유린했다. 빨리고 깨물리고 비벼지고 찔렸다. 남자는 숨길마저 삼킬 기세로 정신없이 자신의 타액을 빨아 마셨다. 몇 번이나 각도를 바꿔가며 침입하고 또 침입했다. 흡사 섹스 같은 키스였다. 섹스와 다름없을 격렬함이었다. 내벽 안쪽 깊은 곳으로 남자의 성기가 물밀 듯 꿰뚫고 들어오는 것만 같은 착각은 그저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자신의 입안을 사납게 몰아대며 유린하고 있는 남자의 혀는 그 자체가 남자의 거대한 흉기였다. 기를 쓰고 찌르고 또 찔러대는 허리 아래의 피스톤질 또한 입안을 뚫고 들어와 박고 있는 성기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뜨겁게 공명하고 있었다. 내벽 깊은 곳에서 휘몰아치는 남자의 압도적인 에너지와 열기에 전신이 산산이 녹아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피가 끓고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물론, 절대로 막지 않았다. 외려 더 깊이 들어오도록 온 넋을 열고 남자를 수용했다. 들어와 가져가라고, 원하는 만큼 다 가져가라고 빌고 또 빌었다. 그래서 더는 아프지 않기를. 더는 외롭지 않기를. 어둡지 않기를. 아아, 그래…… 10년 전 자신이 그러했듯…… 길고 긴 어두운 밤길을 홀로 걸어 내려가지 않기를…….

갑자기 허리가 뒤로 확 끌어당겨졌다. 동시에 남자에게 빨리고 있던 혀가 남자의 이 사이를 스치며 뒤로 뽑혀나갔다. 익히 알고 있는 야수의 엄청난 악력이었다. 등줄기를 휘감고 있던 남자의 팔 힘 또한 여전히 압도적이어서 잠시 동안은 흡사 몸이 두 동강이 나는 것만 같은 격통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샌 자신의 비명 소리가 남자에게 흐릿하나마 이성을 되돌려준 원인이 된 것 같았다. 남자의 양팔에서 설핏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자각한 순간, 전신은 등에 달라붙은 연인의 품 안으로 완전히 곤두박질을 쳤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그저 잠시 어지러운 것뿐인지, 아니면 기절을 하려는 것인지 일체의 판단력이 날아갔다. 거칠게 헐떡이는 자신의 숨소리가 기관총 소리보다도 더 요란스레 귓전을 때리고 있었다. 입안과 입가와 온몸의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얼얼했다. 남자가 휩쓸고 지나간 폐허의 자취였다. 엄청난 살기가 뒤쪽에서 뿜어 나오고 있었다. 숨길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몸이 뒤로 돌려세워졌다. 감당하기 힘들 지경으로 빠르고 거친 움직임에 이번에야말로 기절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스쳤다. 휘청거리는 몸은 다행히 단단한 팔이 옴짝달싹 못 하게끔 죄고 있었다. 파닥거리는 눈꺼풀을 겨우 뜨고 시선을 모았다. 횃불처럼 타오르고 있는 연인의 눈이 보였다. 벌겋게 핏기가 오른 낯빛도 보였다. 질투의 불길에 완전히 휩쓸린 위험천만한 야수가 거기 있었다. 투시하는 것 같은 시선이 전광석화보다도 빠르게 인환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판단(아니, 실은 진단이었을까) 또한 재빨랐다. 무시무시한 악력으로 허리를 죄고 있던 연인의 양팔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찰나의 망설임조차 쓰러질 것 같은 자신의 상태를 염려해서였을 뿐이라는 것을, 인환은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반걸음쯤 떨어져 있는 연인이 보였다. 거친 호흡을 가까스로 가누며 연인을 향해 손을 뻗어보았지만 닿지 않았다. 용수철처럼 튕기듯 뒤돌아 선 연인 때문이었다. 어느새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지극히 압도적인 야수의 뒤태. 연인의 흉흉하면서도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안 돼……. 무의식적인 저항이 넋을 울렸다. 필사적인 절박감에도 불구하고 소리로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안 돼, 안 돼, 안 돼……. 큰 보폭으로 걸음을 내딛는 연인이 보였다. 남자를 향해서였다. 남자는 어딘가 어리둥절한 것 같기도 하고,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양쪽 뺨과 눈시울 근처는 눈물로 온통 범벅이 돼 있고, 그림처럼 고운 입매 또한 격렬한 키스의 자취일 두 사람분의 타액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남자의 멱살을 움켜쥐는 연인의 왼손이 보였다. 거대한 해머처럼 위태롭게 변태한 연인의 오른쪽 주먹도 보였다. 안 돼!!! 소리 없는 비명이 뇌리를 강타했다.

엄청난 일격이 남자를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하얗게 변한 고통과 공포를 눈을 질끈 감는 것으로 외면했다. 새액. 새액. 색. 천식 환자처럼 기분 나쁜 숨소리가 귓전에 낭자했다. 자신의 숨소리 같기도, 그저 단순한 이명 같기도 했다. 끔찍한 예언을 직시하며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를 기다렸다. 새액. 새액. 색. 색…….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들리는 거라곤 어느 천식 환자의 숨소리뿐이었다. 그랬다. 무언가가 내리쳐지는 폭력도, 폭력에 떠밀려 부서지는 소리도 없었다. 오로지 길고도 긴 침묵뿐. 사위는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무시무시한 고요가 내려앉아 있었다. 흡사 태초 직전의 압도적인 고요처럼.

눈을 떴다. 세 걸음쯤 앞에서, 동상처럼 정지해 있는 거구의 남자들이 보였다. 멱살이 잡힌 남자와 멱살을 잡은 남자, 해머처럼 주먹을 그러쥔 남자와 그 주먹 아래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남자였다. 두 남자는 서로 시선을 마주 얽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잡은 남자는 잡힌 남자를 향해 여전히 독한 증오와 분노를 품은 채 노려보고 있었지만, 찌를 듯했던 살기는 어느새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 상대를 향해 잡힌 남자는 평온해 보이기까지 하는 담담한 일별을 주고 있을 뿐이었다. 더 이상 잡은 남자를 도발할 생각도, 그렇다고 잡은 남자의 폭력에 굴할 생각도 없는, 잘 벼린 사내다운 에너지와 존재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표정이었다. 눈물과 타액 범벅인 얼굴만 아니라면.

“위야 씨……!!”

멀리서 여자의 외침 소리가 들렸다. 기억에 있는 목소리였다.

“맙소사, 뭐하는 짓이야! 남의 집 잔치에 재 뿌리려고 작정을 했어?! 어럽쇼, 강원 씨 아냐?! 지금 두 사람 무슨 시추에이션인 거예요?! 설마 제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상황은 아니겠죠?!”

당혹감이 짙게 밴 여자의 외침이 거듭 달려왔다. 저 목소리가 누구더라? 아, 맞다. 안서영이었지. 미국에서 알게 됐다던 연인의 친구. 어쩐지 여자의 첫인상답지 않은, 단호한 질책이 담긴 어조에 어른스러운 느낌마저 들어서 고개를 갸웃한 인환이었다.

색색거리는 천식 환자의 숨소리가 차츰 사라지고 있었다. 대신 귓전을 채우기 시작한 것은 여자의 빠른 발걸음 소리와 기왕에도 흐릿하게 실내를 떠돌고 있던 음악 소리였다.

목소리만 들리던 여자의 얼굴이 복도 모퉁이에서 나타났다. 당혹감이 어린 성숙한 표정은 확실히 첫인상에서 받은 소녀의 그것이 아니어서, 또 한 번 고개를 갸웃한 인환이었다. 여자가 미동도 않고 있던 거구의 남자들을 향해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대거리를 날렸다. 여자의 단호한 나무람은 얼음땡으로 대치하던 두 남자들의 주박을 푸는 최후의 계기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남자의 멱살을 놓고 두어 걸음 물러서는 연인이 보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한 얼굴로 구겨진 옷차림을 가다듬는 남자의 소탈한 몸짓도 보였다. 양손바닥을 크게 펼쳐 온갖 물기로 가득한 얼굴을 쓰다듬는 모습도 보였다. 손바닥으로 옮겨졌던 물기는 다시 남자의 재킷 자락에 아무렇게나 닦여나가고 있었다. 아주 잠깐, 손바닥에 얼굴을 문지르다 고개를 치켜든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 것 같았다. 그야말로 ‘아주 잠깐’이어서, 실제로 시선이 마주친 것인지 의심조차 드는 찰나의 순간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서로의 마음을 읽는 데는 지극히 충분한 찰나이기도 했다.

안녕 하고 남자가 이별을 건넸다.

안녕, 내 사랑……. 이제 놓아줄게요. 당신의 아픔까지 제가 다 가져갈 테니…… 그러니 이제 당신은 부디 행복해지세요…….

고요한 작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남자가 뒤돌아섰을 때, 인환은 단 몇 분 동안 자신이 기꺼이 수용했던 최고의 연인을 완전히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수호천사였고, 등이 붙은 샴쌍둥이였고, 동시에 전 우주에서 자신의 세상을 유일하게 공명해줄 유일한 소울메이트였다. 그런 남자였다, 자신이 지금 버린 소중한 이는. 아마도, 자신의 세상에서 가장 상냥할 영혼이었다. 형제였다. 연인이었다.

한동안 배 속 깊이 머물러 있던 설움이 또다시 목울대를 치고 올라왔다. 막지 않았다. 자신은 울어줄 필요가 있었다. 순식간에 흥건한 물기가 차오른 눈꺼풀을 애써 깜빡이며 쓰라린 이별을 감싸 안았다.

연인 대신 친구의 배역을 맡은 남자가 걸어가는 게 보였다. 10년 전, 남자와 같은 길을 걸어 내려갔던 샴쌍둥이의 뒷모습도 오버랩 됐다. 길고 긴, 어두운 밤길을 향한 고독한 일보(一步)였다. 남자의 어깨 위에 선명하게 내려앉은 고독이 쓰라려서 울었다. 그 새까만 절망이 절절해서 울었다. 아아, 그랬다. 역시 남자는 인환과 하나였다. 아니, 인환 자신이었다. 등이 붙은 샴쌍둥이이자, 수호천사였다. 자신 홀로 걸어 내려갔던 어둠의 10년을 시샘한 나머지, 남자 또한 그를 기꺼이 짊어진 터였다. 흡사 분신의 고통을 뒤늦게나마 똑같이 품으려는 샴쌍둥이처럼. 그게 또 억울하고 한스러워서 울었다. 서럽고 서러워서 울고 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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