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2003년 12월. 문위(文偉)
“……안…… 안 돼…… 안 해…… 싫어…….”
다리를 벌리고 윤활제를 바른 손가락을 항문 안으로 집어넣으려던 손가락이 와락 틀어잡혔다. 남자의 존재와 과거의 상처 속으로 완전히 침잠해버린 때문인지, 자신의 정성스러운 애무의 손길에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던 연인이었다. 완강하게 힘이 실린 손가락을 보니 새삼 자신의 의도를 자각한 모양이었다. 적어도 오늘 밤만은 자신에게 안기기 싫다는 기분을 이해 못 할 까닭은 없다. 애도의 밤. 남자의 사랑을 죽여버린 날이니 오늘 하루쯤은 고통 속에 있을 남자와 온전히 공명하고 싶다는 무언의 요구였다.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남자에 대한 연인의 설명하기 힘든 미묘한 애정과 집착을 확연히 인지하고 있는 터라 잠시 망설이기도 했던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안아야만 한다고 새삼 의지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안을 거다. 싫어도 참아.”
자신에 비하면 참새의 날개보다도 못할 악력을 나머지 손으로 쉽게 뿌리쳤다. 몸짓은 단호하게, 그러나 표정만은 언제나와 다름없이 헌신적인 애정과 상냥함을 숨기지 않았다. 강간이 아니기에 연인에게 강간을 당한다는 착각을 안겨줄 순 없었다. 호텔을 빠져나올 때까지도 소리 없이 눈물만 줄줄 흘리더니 연인은 집에 돌아오고 나서도 줄곧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작업실에 틀어박힌 연인이었다. 물감조차 바르지 않은 붓들을 하릴없이 만지작거리다가, 요즘 연작으로 작업 중인 100호 크기 캔버스를 멍하니 들여다보기도 하다가는 또 멍하니 눈물을 흘리기를 반복했다. 그러기를 한 시간 남짓, 보다 못해 침실로 끌고 내려왔지만 자정을 한참 넘기고서도 잠을 못 이루며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연인에 달리 방도가 있을 까닭이 없었다. 홀로 고치처럼 웅크러든 채 남자가 촉발시킨 과거의 상처들을 긴 밤 내내 곱씹게 둘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싫…….”
“……싫어도 해야 돼. 너 혼자 아파하는 꼴 더는 안 봐. 더구나 그 남자 때문이라면 더더욱 용납할 수 없지.”
“……싫어…… 제발…….”
“나를 봐. 내 눈을 봐, 인환아.”
“흑…….”
“……그 남자의 상처가 안타까운 거라면 나와 함께 안타까워하면 돼. 그 남자의 고통이 못 견딜 것 같으면 내게 아프다고 투정을 부려. 그 남자와의 이별이 아쉽다면 나도 함께 아쉬워해줄게. 그 남자를 사랑한다면 나와 함께 사랑하면 돼. 아니, 내가 대신 그 남자를 사랑해줄게. 네가 아끼는 것보다 더 많이, 더 아끼고 더 애정을 줄게. 그렇게 해줄게. 그러니까 너 혼자 견디겠다는 말은 하지 마. 다신 너 혼자 네 그림 속으로 숨어들려고 하지 마. 내가 모르는 세상으로 혼자 도망치려고 하지 마. 네 세상에서 나를 배제하지 마.”
“……위야…….”
“그 남자가 네 세상의 소중한 일부라면 널 가지듯 그 남자도 가질 거다. 알아듣나? 네 세상에 속한 것은 전부 다 내 거니까.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전부 다 내 것이니까.”
“…….”
“……그래. 앞으론 절대 너 혼자서 울게 하지 않는다. 그 남자를 원하나? 그럼 말해. 네 옆에 다시 끌어다 앉혀줄게. 악마한테 혼을 팔아서라도 그 남자를 네게 사주마.”
“…….”
“빈말 같아? 질투의 화신인 주제에 웬 헛소리냐고?”
“…….”
“아아, 그래. 물론 질투 나지. 피가 부글부글 끓다 못해 혈관이 터질 지경인걸. 네가 그 남자를 마음에 담고 있는 것만 생각하면……. 느껴지나? 아무렴. 느끼지 못할 리가 없지, 이렇게 지금도 그 남자를 찢어발기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데. 설령 그게 나를 사랑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의 애정이라고 해도, 네가 가진 사랑이라면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전부 다 빨아 마시고 싶은 욕심쟁이니까, 나란 놈은.”
“…….”
“……하지만 말이다, 그게 네 고통을 담보로 하는 욕심이라면 그건 안 할 거다. 이미 충분히 네게 고통을 줬다. 더 이상은 내가 사양이야. 그러느니 차라리 내가 아플 거다. 내가 조금 더 견디든지 조금 더 굶주릴 거다. 아파하는 널 다시 또 보느니…….”
“…….”
“그래…… 그 남자와 나눠 가진 사랑에 여전히 이를 갈아붙이긴 하겠지만…… 예전처럼 네게서 그 남자를 억지로 떼어놓으려 기를 쓰진 않겠다. 차라리 그 남자까지 품어 안아버릴 거다. 그 남자 또한 내가 둘러친 벽 안쪽의 사람으로 인정해주겠다. 그게 네 전부를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
“…….”
슬픔과 피로에 지친 우울한 눈시울이 자신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항의 의지는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으로 보였다. 자신의 진심이 온전히 전해진 걸까? 모르겠다. 스스로도 아직은 채 납득하지 못한 진심이 아닌가. 그저 기름칠을 한 듯 술술 흘러나오는 사기꾼의 달변에 홀린 것뿐일지도 모르지. 아아, 그래. 그런 연인이 아닌가. 옛날부터 자신에겐 지독히도 잘 속아 넘어가는 연인이었었다. 눈물겹도록 순수하고 순진한 내 강아지였다. 내 아내였다. 내 사랑이었다. 그런 내 강아지에게 고통을 주는 것만은 죽기보다 싫으니, 단지 그래야만 한다는 어렴풋한 방향성만 자각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남자를 진실로 자신의 벽 안쪽에 받아들이는 일은 인내심 하나만큼은 자타가 공인하는 자신으로서도 지난한 연옥의 길일 터였다. 그러나 해야만 할 일인 것 같았다. 그것도 반드시 완수해야만 할 지상 명령인 것처럼 느껴졌다. 몇 시간 전, 남자를 향해 기꺼이 손을 내민 연인을 진저리가 쳐지는 지독한 질투심과 함께 목도하며 절실하게 직면한 깨달음이었다. 저 남자를 연인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해내는 것은 이제 도저히 불가능하다. 만약 완전히 분리해내려면 연인의 어느 한 부분조차 가차 없이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될지 모른다…… 하는 끔찍한 이율배반.
“……아…… 안아줘…….”
허스키하게 가라앉은 중얼거림과 함께 연인이 마침내 팔을 뻗어왔다. 자신의 목덜미로 부드럽게 감겨드는 두 손은 어린아이처럼 애처롭고 무방비했다. 애초에 퉁퉁 부어 있던 눈시울에 다시금 촉촉한 물기가 퍼지고 있었다. 내장이 텅 비는 것만 같은 헛헛한 아픔이 반사적으로 가슴을 직격했다. 역시 익숙해질 수가 없다. 씁쓸하게 수긍을 한다.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는 회한이었다. 연인의 눈물을 지켜봐야만 하는 것은. 고통을 직면해야만 하는 것은. 자신은 예전에도 너무나 많은 아픔을 연인에게 주었다. 백년, 천년이 가도 결코 잊을 수 없을, 아니, 잊어서도 안 될 끔찍한 상처들이었다. 거기에 다시 또 무언가를 추가할 순 없었다. 설령 단 1밀리그램에 불과한 아픔일지라도. 그래, 차라리 남자를 받아들이고 말지. 사랑하고 말지. 네가 그자를 떼어내고 이렇게 아픈 걸 바라봐야만 하는 거라면.
“……아…… 안 버릴 거야…….”
주르륵, 관자놀이로 굴러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혀로 핥으며 연인의 안으로 뚫고 들어갔다.
“……안 버릴 거야, 그 사람…….”
응, 그래. 조용히 수용하며 천천히 허리를 놀렸다. 내 강아지가 힘들어하지 않도록, 그저 치료와 위안에 그치도록, 광포하게 내달리려는 수컷의 욕망을 안간힘을 쓰며 제어했다.
“……지…… 지켜줄 거야…… 그…… 그 사람이 다시 행복해질 때까지…… 곁에서 바라봐주고 격려해줄 거야…….”
하나로 결합된 기쁨이 온몸의 신경줄을 저릿하게 진동시키고 있었다. 부드럽게 전립선을 찔러주면, 되돌아오는 황홀한 조임이 기쁨을 배가시켰다. 연인의 입술에서 떨어지는 무정한 선언들에 들개처럼 사나운 질투가 들끓고 있으면서도, 서로가 하나인 절대의 희열과 충만감만큼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는 것이 이상야릇했다.
“……혼자 둘 수 없어…… 그러기 싫어, 위야…… 여기…… 아, 안 그럼 내 여기도 부서질 테니까…… 흐앗……!”
어린아이처럼 손가락으로 꾹꾹 눌리는 사랑스러운 가슴팍에 입술을 눌렀다. 꽃망울처럼 피어 있는 유륜을 핥고, 삐죽 솟은 젖꼭지를 입안으로 빨아들였다. 그저 짭조름한 소금기밖에 없을 텐데도 어째서 매번 이렇게 달콤하기만 한 걸까, 새삼 신기했다. 아무렴. 이리 신기하고 신기한 물건인걸. 소중하고 소중한 내 보물인걸. 그러니 부서지게 둘 순 없지. 안 그래? 차라리 내 스스로를 부서트리고 말지.
“……나야…… 그 사람은 나야…… 나…… 우앗……! 그, 그 사람 세상이 내 세상이야…… 내 그림…… 내 자아…… 그, 근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어……? 사랑해…… 나 그 사람 진짜 많이 사랑해, 위야…… 흐윽! 앙……! 그……! 흐앗! 악……! 거기!!!”
그래. 그래, 내 강아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러니까 넌 그저 웃어주기만 해. 기뻐하기만 해. 이렇게. 이렇게 날 머금고 좋아서 날아오르기만 해.
“……그러니까…… 혼자…… 혼자 어두운…… 버려둘 수 없어서…… 흐아앙……! 흐악!!……! 앗, 앗! 악……! 그…… 그만……! 안…… 안 돼! 아악! 거기! 아앗! 흐앙! 흐아아앗!!!”
느리게 찌르고, 부드럽게 문지른다. 꾹꾹 압박하고, 빙글빙글 돌려도 본다. 슬픔에 짓눌려 있던 내 강아지의 눈빛에서 다시금 빛나는 생기가 피어오를 때까지. 붉고 붉은 열기가 새파랗게 타오를 때까지. 서서히 취해들다 끝내 인사불성으로 탐닉하게 될 때까지. 지금 당장 하나로 이어진 자신으로만 내 강아지의 넋이 가득 차게 될 때까지. 그래. 그저 이렇게 느리고 느리게 내 강아지를 몰아간다. 고통은 없어. 내 사랑, 이제 더 이상 고통은 없다.
“……그…… 위…… 흐앙! 앙, 후앗! 악……! 위…… 야아…… 거기! 거…… 좋아!!……! 아아아…… 아아악!!!”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우왕좌왕 허우적거리던 내 것의 손가락이 미친 듯이 등줄기를 긁어내린다. 찌릿하게 할퀴어지는 통증은 그대로 몸서리쳐지는 쾌락이 된다. 뇌가 흔들린다. 심장이 미친 듯이 펌프질을 해대며 사방으로 새빨간 열류를 방사한다. 아래로 깊숙하게 연결된 사랑스러운 몸뚱이가 희열에 차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오르가슴이다. 아무렴. 아프게 하지 않아. 앞으로 다신 아프게 안 해. 페니스가 끊어지는 것 같은 지독한 조임이 뇌수를 강타한다.
……그래. 그냥 이렇게 기뻐 울기만 해. 그러면 내가 대신 울어줄게. 대신 그자를 사랑해줄게…….
마지막으로 가장 깊숙이 꿰뚫기 위해 진저리를 치며 허리를 뒤틀었다. 사슬처럼 조여드는 내벽의 진동을 뚫고 끝까지 빠져나왔다가 도로 힘차게 들이박았다. 즉시로 빨판처럼 와락 달라붙은 내벽이 파도처럼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순간, 자신의 아랫배 위로 봇물처럼 끼쳐드는 뜨거운 포말이 느껴졌다. 정액을 뿜어내며 경련하듯 불끈불끈 파동을 보내는 내 강아지의 귀여운 페니스를 자신의 무성한 체모 틈바구니에 파묻은 채 미친 듯이 비벼주었다. 음란한 자극이 오르가슴의 희열을 극대화시키는지 내 강아지의 몸뚱이 전체가 벼락을 맞은 것처럼 자지러졌다. 순간 뿌듯한 수컷의 자부심과 흡족함에 입가엔 절로 짐승의 웃음이 걸렸다. 아직…… 그래, 아직이어야만 했다. 자신의 오르가슴은 좀 더 내 강아지를 기쁘게 해준 다음이어야 했다.
뒤로 활처럼 죽죽 휘는 연인의 허리를 필사적으로 끌어안았다. 가능한 한 서로의 몸뚱이 전부가 붙어 있어야 했다. 연인의 단 한 부분이라도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나는 것이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팔과 다리로 휘감아들이고 손아귀와 발가락으로 갈퀴처럼 움켜쥐었다. 새하얗게 홉뜬 내 강아지의 눈시울이 보였다. 교성조차도 사라져버린 오르가슴의 광휘가 폭죽처럼 내 강아지를 부서트리고 있었다. 벙하니 벌어진 입술을 자신의 것으로 틀어막았다. 혀를 깊숙이 밀어 넣고 핥고 또 핥았다. 찌르고 또 찔렀다. 남자의 키스 따윈 내 강아지의 넋 속에서 말끔히 지워버릴 기세로, 유린하고 또 유린했다. 부들부들 오르가슴의 여운으로 물결치며 여전히 끊어질듯 자신을 조여대고 있는 내벽을, 또한 사납게 찍어 눌렀다. 전립선만을 미친 듯이 직격하는 피스톤질에 내 강아지의 페니스가 다시금 딱딱하게 발기하고 있었다. 하하하 하고 통렬한 웃음보가 터졌다. 보고 또 봐도 좋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 강아지가 발기하는 대견한 모양새라는 것은! 눕혀졌던 몸뚱이를 번쩍 들어 올려, 앉은 자세로 더 깊숙이 뚫고 들어갔다. 한계까지 들어가 박힌 자극에 내 강아지의 몸이 창끝에 꿰인 수사슴마냥 갈팡질팡 버르적거렸다. 두툼한 귀두 끝으로 뭉근하게 극점을 짓이기자 흐앙, 흐앙, 울부짖으며 와락 안겨들었다. 그물처럼 사지를 벌려 낚아채듯 품 안에 끌어들였다. 서로의 다리와 팔을 교차한 채 밧줄로 친친 동여맬 것처럼 서로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숨길을 들이마시고 서로의 입술을 빨고 서로의 성기를 들이박았다. 그저 빠르고 강하게, 박고 또 박기만 했다. 맹목적인 서로에의 몰입이었다. 침대 스프링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어둠이 정중앙을 가로질러가는 깊고도 깊은 밤, 침실 안은 거칠고 사나운 서로의 숨소리와 짐승스러운 섹스의 교성만이 난무했다. 자신의 압도적인 에너지를 채 따라오지 못하던 내 강아지가 마침내 두 번째 오르가슴을 맞고 있었다. 자신 또한 감당하기 힘든 희열로 곧 터져버릴 것 같은 에너지를 거침없이 개방한 순간이었다. 내 강아지의 허리를 사슬처럼 휘감은 채 최후의 일격을 감행했다. 스스로를 묶는 금제가 길었던 만큼 정열은 위험천만할 수준으로 증폭돼 있었다. 막 전립선을 찔러든 귀두 끝으로 정액이 봇물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온갖 근육들의 경련이 극심한 나머지 사지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엄청난 쾌락의 화살이 회음부로부터 정수리 위까지 단숨에 꿰뚫었다. 충격이 지독해서 그대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죽음과 다름없을 무시무시한 쾌락이었다. 정말 이 끝에 죽음이 대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설핏 공포가 스쳐갈 지경이었다. 누군가 이리도 지독한 쾌락을 자신에게 허용해주었다면 그 대가는 오로지 죽음뿐일지도 모른다고. 물론 개의치 않았다. 이 순간, 내 강아지의 넋은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었다. 내 강아지의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존재 또한 자신만이 유일했다. 고통은 없었다. 상실도, 이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언제든 죽어도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완벽한 합일이었다. 서로의 세상엔 오로지 함께 죽기 위한 지독한 쾌락만 존재할 따름이었다. 그래, 그래. 끝까지 달려가본들 그저 그뿐이었다.
[사장님과 직접 얼굴까지 마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휴대전화 폴더 너머, 남자의 어조는 차분하면서도 냉담했다. 남자를 향한 일말의 동정심은 그로써 말끔히 날아가버린 셈이니, 위로서도 환영해 마지않을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휴일 내내 연인과 침대에 달라붙어 있다시피 하다 출근한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일체의 일정을 뒤로하고 남자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잠시라도 미적거린다면 결심이 흔들릴 것 같아서였다. 이대로 완전히 남자를 떼어내버리라고, 연인이 상처받든 말든 억지로라도 둘 사이를 찢어발기라고, 시시때때로 속살거리는 내면의 유혹에 지게 될 것 같아서였다. 이른 아침부터의 화해 요청에 남자는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다만 이쪽의 지극한 관용 따윈 조금도 헤아려줄 마음 따위 없다는 듯, 지극히 사무적이고 쌀쌀맞은 응대로 일관하긴 했지만.
“동감이야. 당분간은 서로 조심해줘야겠지. 솔직히 그쪽 얼굴을 보고 다시 주먹을 뻗지 않으리라고는 나도 장담하지 못하겠거든.”
[…….]
“……예의 내년 쿤스트할레 건에 대해서는 그쪽 뜻대로 진행하도록 해. 작품 선정이나 전시 기획이나 제반 과정 일체를 그쪽에 일임하지. 홍보나 기타 등등 매스컴 쪽 대응도 알아서 처리해주겠지?”
[물론입니다.]
“다만 국내 일정들에 대해서는 일단 유보해두도록 하지. 내 ‘아내’는 전시에 관한 한 일체의 권한을 그쪽에만 주고 싶어하지만, 솔직히 그건 합리적인 판단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쪽이 제법 유능하고 바쁜 남자라는 건 나도 잘 알거든. ‘아내’의 작품에만 오타쿠처럼 달려든다면 그쪽 경력에도 차츰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일이고. 마인 아트와 그쪽의 공조 방향으로 가는 게 내 ‘아내’에게나 그쪽에게나 서로 득이 되리라는 판단이지.”
[…….]
치사하고 유치한 선 긋기라는 걸 알지만 ‘아내’라는 달콤한 호칭을 부러 끝까지 고집하는 자신이었다. 과연, 듣기가 괴로운지 폴더 너머 남자는 한동안 어둑한 침묵을 고수했다. 내내 얄미울 정도로 침착하게 대응해오던 남자치곤 쉽사리 무너지는 게 아닌가, 피식 씁쓸한 실소마저 걸렸다. 생각만큼 후련하다는 기분도, 확실한 경계를 세웠다는 느긋한 실감도 들지 않았다. 흡사 다친 상대를 향해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꺼림칙함은 물론, 동병상련의 연민과도 닮은 어쭙잖은 동정심만 자극이 되고 있었다. 절대 달갑지 않은 심사였다. 그러나 무시할 수도 없는 솔직한 속내이기도 했다.
연인을 잃었을 때의 지옥을 자신은 여전히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 지옥이 남긴 독한 상처는 매 순간 기회 있을 때마다 벌어지며 영영 마르지 않을 것만 같은 피고름을 수시로 흘려대고 있다.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은 요즘의 천국 속에서도. 그 미칠 듯한 허기와 상실감과 고뇌가 남자라고 해서 다를 것인가? 남자라고 한들…… 연인에 대한 사랑이 다를 것인가……. 어젯밤 연인에게 키스를 하는 남자를 눈앞에서 보았을 땐 당장 찢어발겨도 속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남자에 대한 계획을 바꾸고 나니 심사는 더더욱 복잡해지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차라리 완벽하게 미워하고 경계나 해야 할 적이라면 훨씬 더 가뿐할 것을.
[……더 이상 나를 경계할 필요는 없다, 문위.]
한참 만에 전해진 나지막한 선언이었다. 서로 더 이상 예의라는 가면을 뒤집어쓸 필요가 없어서일까? 자신만큼이나 거침없이 떨어지는 하대에 뒤엉킨 실타래마냥 복잡했던 심사가 일거에 풀리는 것 같은 통쾌함마저 느껴졌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앞으로도 계속 서로 들이댈 사이가 아닌가. 정말 언젠가는 그쪽을 친구로 여기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지. 연인이 아끼는 만큼 그쪽을 아끼게 될지도. 아니, 반드시 그렇게 만들 생각이다, 김강원. 그대는 썩 마음에 안 드는 일일 것도 같지만.
[장 선생님은 이제 내겐 그저 소중한 친구일 뿐이다. 그렇게 정한 이상 룰은 지킨다.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아마도 그건 내가 죽을 때까지 지켜질 룰이겠지. 철저하게 친구로서 대하고 친구로서 애정을 드릴 거다. 서로의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어떤 시도도 없을 거야. 만약 그걸 의심하고 있다면 이제라도 완전히 나를 내쳐라. 너와 장 선생님 모두로부터.]
“…….”
[…….]
“……사과하지. 스스로도 유치한 짓거리라는 건 자각하고 있었지.”
[……물론 사랑을 그만둔다는 의미는 아니야.]
“…….”
[사랑을 그만두고 안 두고는 의지로 되는 문제가 아니니까. 허나 약속하겠다. 남자 대 남자로. 앞으로 장 선생님을 차지하려는 어떤 유혹도 없을 거다. 설령 장 선생님께서 순간적으로 흔들리시게 되는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차라리 내 쪽에서 막겠다. 그 정도의 각오도 없이 애정 깊은 부부 사이에 끼어들겠다고 덤비지는 않아. 적어도 가정을 깨는 파렴치범은 사양하고 싶다.]
“…….”
[……언젠가 네가 그랬지. 둘 사이엔 내가 모르는 14년의 역사가 있다고. 그래. 그 14년의 역사…… 신물이 날 정도로 절감했다. 장 선생님의 마음이 지금 누구에게 가 있는지도 안다. 그 마음을 아는 이상, 존중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겐 그저 패배자의 자기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겠지만 그게 내 사랑이다. 그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존재로 행복하다면 그 행복까지 감싸 안아야만 한다고. 무조건 소유하고픈 이기심을 충족시킨다고 해서 그 사람이 행복해지나? 중요한 건 자기만족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복이다. 그 사람이 행복해야 내가 숨을 쉰다. 내가 산다. 그래. 그게 내 사랑이다, 문위.]
“…….”
[……너도 내게 한 가지만 약속해줄 수 있나?]
“…….”
[……만약…… 언젠가 만약 그 사람이 네 옆에서 더 이상 행복하지 않은 때가 오면 그땐 내게도 기회를 주겠다고…….]
“…….”
[……그 사람이 널 거부하거나…… 혹은 너로 해서 힘들다면 너도 나처럼 한발 물러서서 그 사람을 지켜봐주겠다고…… 그래서 내게도 그 사람에게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허락해줄 수 있나?]
“…….”
[……그럴 일은 일어날 리 없다는 건가? 그 사람이 네게 권태를 느낄 순 없다고? 시간을 이기는 영원한 사랑이 세상에 몇 프로나 되리라 생각하나?]
“…….”
[글쎄, 나도 사랑에 확률 따윈 믿을 게 못 된다는 걸 알지만, 내 입장이야 뭐든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으니 말야. 불쾌한가? 아, 물론 네가 약속할 수 없다고 해도 뭐라고 비난할 마음은 없어. 내게 약속을 요구할 권리조차 없다는 상식 정도는 아니까. 그저 단지 네 상태를 판단할 뿐이지. 그 사람 마음을 영원히 네게 붙잡아둘 자신까진 없는 모양이라고.]
“닥쳐.”
[후우…… 그래, 사과하지. 이건 도발이 맞아. 하지만 다시 한 번 묻지. 약속해줄 수 있나? 만약 그런 때가 오면 내게도 기회를 주겠다고?]
“주지. 네 말대로 만약 아내가 내 곁에서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면 네게도 기회를 주겠다. 다만 확률론에 있어서만큼은 그쪽의 대사를 고스란히 되돌려주고 싶군. 과연 지금의 네 사랑은 영원할까? 내 아내에 대한 네 마음의 유통기한은 과연 언제까지일까? 1년? 2년? 혹은 5년? 아아, 나처럼 14년을 넘기고도 여전히 지금처럼 미칠 수나 있을까? 꽤나 궁금해지는 부분이로군.”
[…….]
도발에 넘어간 때문은 아니었다. 담담함을 가장한 남자의 절박한 진심이 설핏 읽힌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것 같은 남자의 가난한 열망. 그랬다. 그건 동정이었다. 전부를 가진, 이미 승자로서의 여유였다. 그렇다고 해도 평소라면 짜증과 울분부터 터졌을 텐데 그저 평온하기만 한 속내가 마냥 신기하게까지 느껴진다. 아, 역시 남자에 대한 계획이 바뀐 게 문제인가? 마음껏 경계조차 세울 수 없을 만큼 속이 말랑해진 건가?
[……그래. 이제야말로 정말 깨끗이 물러설 수 있을 것 같군.]
한동안 대꾸가 없던 남자가 여전히 담담한 기색으로 말문을 열었다.
[안 된다고 했으면 나로서도 널 끝끝내 인정할 수 없었을 거다. 아니, 나 자신에게조차 실망했겠지. 자신감이 부족한 겁쟁이 따위에게 졌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거야.]
씁쓸한 웃음기마저 서린 목소리였다. 그제야 남자의 요구가 단지 ‘지푸라기 잡기’용 미련만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동시에 자신을 시험한 것이다. 망할 자식! 거의 사라졌다고 여긴 남자에 대한 호승심과 짜증이 새삼 불쑥 고개를 치켜든 순간이기도 했다.
“……그만 끊는 게 좋겠군. 용건은 서로 대충 다 교환한 것 같으니.”
[……이봐. 내가 진 것은 14년이라는 질긴 역사 때문인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떤가?]
통화를 서둘러 마무리하려 한 까닭은 역시 남자의 어쭙잖은 시험으로 흔들린 속내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수컷의 유치한 호승심 때문이었다. 그런 자신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 재수 없는 자식은 여전히 냉담한 어조로 수다를 질질 끌고 있었다. 평소 놈의 태도와 비교해보면 위화감마저 불러일으킬 정도로 생경한 계집애들의 시시콜콜함이었다.
[……운이 없었지. 주제넘은 비약이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 없나? 만약 그 사람이 너보다 나를 먼저 만나게 되었다면 과연 어땠을 거 같나? 아니, 공정하게 가지. 어차피 서로 페어플레이 하기로 했으니. 너와 나, 동시에 만나게 됐을 때…… 그 사람은 과연 둘 중 누굴 선택했을까? 궁금하지 않나?]
“……한 번뿐인 인생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없다. 그야말로 실패자들의 허울 좋은 자기변명일 뿐이지. 먼저 만나야만 할 예정이었기에 아내는 너보다 먼저 날 만난 거다. 날 사랑할 운명이었기에 먼저 만나게 된 거지. 대답이 됐나?”
[…….]
“…….”
[…….]
“…….”
[후…… 후후후후후…… 큭큭…… OK. 알아들었다, 문위. 적당히 공정하고 적당히 무난한 결론이로군. 그리고 ‘약속’ 고맙다. 힘들게 구걸한 만큼 반드시 기억 창고에 저장해두도록 하지.]
“…….”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문 사장님. 일간 다시 연락드리지요. 들어가십시오.]
뚜…….
일순 휴대전화를 내던지고픈 욕구가 치밀었지만 깊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만약이라. 만약이라구? 하. ‘만약’ 같은 개소리를 하고 있군, 김강원. 그래. 그렇게라도 마음을 추슬러야겠지. 그래야만 실연의 아픔이 줄어든다면 말리진 않겠다. 미안하지만 동시에 만났다고 해도, 설령 네가 먼저 만났다고 해도, 내 강아지가 내 것이라는 현실엔 절대 변화가 없을 거다. 고작 예술혼이 조금 통한다고 해서 무조건 사랑이 싹트고 배우자가 되는 거라면 이 세상의 예술가들이란 예술가들은 전부 동종 직업의 상대하고만 결혼해야만 하는 거겠지. 하! 대체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윤 실장, 결재 서류 가져오세요. 일 시작합시다.”
꼬리를 물고 지나가는 불유쾌한 상념을 자르기 위해 인터폰부터 눌렀다.
[예, 사장님.]
어쨌든 연인이 현재 내 것이라는 사실은 네가 어떻게 해도 움직일 수 없는 운명이라는 얘기지, 김강원. 연인의 마음이 누구에게 가 있는지 안다고 했지? 그래. 그 사실만 잊지 말아주었으면 좋겠군. 페어플레이라. 그래, 그래. 앞으론 나도 페어플레이라는 걸 해줄 테니…….
그러나 윤 실장과 정 대리가 차례로 안으로 들어서고 두툼한 서류철이 코앞으로 내밀어지고 나서도 불유쾌한 상념은 좀처럼 잘라내지지가 않았다. 그것이 결코 남자의 도발에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는 자신이 있었다. 연인과 영혼을 공유하는 남자에 대한 비틀린 자격지심 또한 아니라고 부인하는 속내가 있었다. 그저 단지 아직은 시작일 뿐이기 때문이라 여겼다. 남자를 자신의 영역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첫날이기 때문이라고, 남자를 적으로 간주하고 날을 세웠던 지난날의 관성이 남아 있어서일 뿐이라며 기를 쓰고 부인하는, 한 겁쟁이 소년이 거기 있었다. 14년 전, 공주님처럼 눈부신 연인 앞에서 그저 살아남기에만 필사적이었던, 한 가난하고 초라한 어린 남창이 거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