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2003년 12월. 장인환(張仁歡)
“……3시 비행기니까 시간은 충분해. 독일 전시회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로 나눌 얘기가 많을 테니 느긋하게 시간 보내고 나와. 저기 길 건너편 카페 보이지? ‘뮈토스’라고. 나는 저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얘기 끝나면 휴대전화로 콜 하도록 하고…….”
연인이 망설이는 인환을 향해 재차 권하고 있었다. 인환의 양쪽 뺨을 가만가만 어루만지고 있는 연인의 두 손은 따스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마치 겁먹은 어린아이를 어르는 것 같은 침착한 다독임이었다.
자신은 겁을 먹은 건가? 아니, 겁을 먹었다 하기보다는 당황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이 의원과 휘야 군이 마련해준 4박5일 코스 신혼(!) 여행지로 출발하는 11일 아침이었다. 느지막이 아침을 먹고, 메이드 아가씨들이 꾸려놓은 여행 가방을 끌고 모처럼 연인이 직접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신혼여행만큼은 연인과 단둘만 다녀오고 싶다는 인환의 부탁이 받아들여져, 경호원들과 홍 기사는 물론이고 집을 관리해야 하는 최 씨 아저씨 내외를 제외한 집 식구들 모두에게 4박5일 특별 휴가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예약된 출발 시각에 비해 꽤 일찍 출발한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연인은 인천공항으로 바로 가지 않고 시내 중심가 쪽으로 차를 몰고 있었다. 어디 들를 데가 있나 보다 하고 멍하니 생각하며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긴긴 겨울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연인과 사랑을 나누고 있는 통에 수면 부족 증세는 이제 아예 만성이 돼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차는 오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기억에 있는 세련된 건물이 졸음에 겨운 시야에 확연히 밟혀들었고, 그제야 인환은 소스라쳤다. 갤러리 현대. 현관 외벽에 우아한 대리석으로 장식돼 있는 입간판이 인환으로 하여금 재차 확신을 주었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연인의 얼굴과 눈앞에 나타난 건물을 번갈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차 안에서 빠져나간 연인이 조수석 문을 열고 팔을 뻗어 채 현실감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인환을 차에서 끌어내주었다. 싸늘한 공기가 옷깃을 치고 들어오자, 미처 챙기지 못했던 목도리까지 둘둘 말아주며 시선을 맞춰왔다.
“……어제 저녁 늦게야 확실하게 약속이 잡혀서 네게 미처 말할 틈이 없었다.”
연인이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확실히, 10시가 넘어 늦게 퇴근한 연인은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침대로 끌고 갔으니, 말할 틈은 당근 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앞으로도 자주자주 대면할 남자니까 되도록 빨리 자연스러워지는 것이 좋겠지. 나 또한 네가 그 남자와 친밀하게 어울리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겠고.”
“…….”
“……3시 비행기니까 시간은 충분해. 독일 전시회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로 나눌 얘기가 많을 테니 느긋하게 시간 보내고 와. 저기 길 건너편 카페 보이지? ‘뮈토스’라고. 나는 저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얘기 끝나면 휴대전화로 콜 하도록 하고…….”
담담한 어조였으나 썩 유쾌하지만은 않을 연인의 진심까지 숨겨질 수는 없었다. 빤히 들여다보이는 연인의 눈동자 속엔 애써 갈무리된 질투심과 배려, 그리고 인환에 대한 극진한 애정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아선 그룹 창립 기념 파티에서 남자와 대면한 이래, 줄곧 남자를 떠올리며 남자의 안위를 근심하는 요 며칠 동안의 자신을 연인이 모를 리 없었다. 또한, 질투심 많은 연인의 기질을 배려해 부러 그를 내색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속내 또한 그대로 읽고 있었을 연인이었다. 비록 그 밤, 연인에게 반강제로 안기면서 자신으로부터 남자를 억지로 잘라내지 않겠노라고, 자신의 남자에 대한 플라토닉한 애정을 인정해주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그것이 연인에게 얼마만큼 인내심을 요하는 배려인지를 모를 인환이 아니었다. 말로는 남자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선언했으나, 그게 진정으로 실천이 될지 장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일 연인에 대한 사랑과, 혈육과 다름없을 남자에 대한 배려 사이에서 자신은 여전히 갈팡질팡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인환의 상태를 속속들이 읽고 있었을 연인이기에, 연인의 의지를 증명하듯 인환을 직접 남자에게로 데려다준 것일 터였다.
―……예전처럼 네게서 그 남자를 억지로 떼어놓으려 기를 쓰진 않겠다.
연인의 깊은 눈시울 속에서 부메랑처럼 되돌아온 의지가 읽혔다.
―……차라리 그 남자까지 품어 안아버릴 거다. 그 남자 또한 내가 둘러친 벽 안쪽의 사람으로 인정해주겠다. 그게 네 전부를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
사랑이었다. 한계가 어디까지일까, 감히 상상조차 안 되는 연인의 깊은 사랑이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인은 진심이었다. 남자를 연인의 벽 안쪽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은 절대 허세 따위가 아니었다.
문득 가슴이 저릿저릿하며 목이 꽉 메어왔다. 눈가마저 시큰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아, 참으로 큰일이었다. 정말 울보가 된 것 같았다. 요즘처럼 시도 때도 없이 많이 울어대다간 대책 없이 징징대기만 하는 재수 없는 떼쟁이 게이로 완전히 전락할 날도 머지않을 것 같았다. 정말 밉상이었다. 젊은 날 미메시스로 출퇴근을 하다시피 하면서, 끼를 풀풀 날리는 울보 떼쟁이 공주병 게이들에게 자신은 얼마나 치를 떨어했던가. 근사한 탑들을 유혹하기 위해 부러 내숭을 떠는 그들을 얼마나 혐오했던가. 그러나 봐라. 요즘 자신이 연인 앞에서 벌이고 있는, 그들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울보 떼쟁이의 작태들을 말이다. 연인의 금지옥엽 극진한 사랑에 기대 욕심나는 건 다 움켜쥐려는 이 지독한 이기심을 보라지!
“……또, 또 눈이 빨개지네……. 감격했어, 마누라? 통 큰 서방님이 새삼 멋지다고 절감한 건가?”
말을 잃은 채 그저 연인만 바라보는데, 놀리는 듯 가벼운 중저음이 떨어진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눈꼬리 끝이 가늘게 접히는 게 보였다. 거의 동시에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가며 확연한 웃음이 만들어졌다. 볼 때마다 인환의 가슴을 몹시 설레게끔 만드는 연인표 ‘옴므파탈’ 미소였다. 미세하게 굳어 있는 인환의 입꼬리 끝을 중지 끝으로 살짝 밀어 올리며 자신도 웃으라 한다. 엄지손가락으로는 젖은 눈꺼풀을 꾹꾹 눌러대는 통에 결국 따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가득 고여 있던 눈물 한 방울이 도르륵 굴러 떨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지만.
“……들어가봐라. 그 남자가 기다리고 있을 거다.”
손바닥으로 젖은 뺨을 말끔히 훔쳐준 연인이 재촉했다. 입가엔 여전히 살인적인 옴므파탈 미소가 걸려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연인의 미소만 홀린 듯 바라보고 있자니 연인이 작정한 듯 자신의 몸을 돌려세웠다. 갤러리 현관문을 향해서였다. 그러곤 등을 두어 번 툭툭 두드리는 것으로 마무리. 떠밀리듯 걸음을 옮기는 내내 연인의 시선이 뒤따라왔다. 숭배에 가까운 절절한 애정과 헌신, 그리고 믿음이 소리 없는 눈빛을 통해 알알이 전해지고 있었다.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돌아보면 또 흔들릴 것 같아서였다. 남자에 대한 책임도, 애정도 다 포기하고, 그저 연인에게만 집중하고 싶어질 게 뻔했다. 연인을 아프게 만들지 모르는 남자와의 관계를 끝까지 욕심내는 것이 과연 현명한 결정인가, 의심하고 또 의심할 터였다. 아무런 결정도 못 한 채, 다시금 연인에 대한 사랑과 남자에 대한 연민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어리석은 감정만 흘리게 될 거였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건 용감할 정도로 과감하게 남자의 존재를 허용해준 연인에 대한 모욕이었다. 인환 자신과 남자에게도 모욕이었다. 그랬다. 남자는 친구로 남겠다고 선언했었다. 인환 자신에게 있어서도 남자는 소중한 친구이자 가족이자 소울메이트일 뿐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연인에게 죄책감을 느껴야만 하는 관계라 여겼다면, ‘남자를 끝끝내 버릴 수 없노라고’ 감히 연인을 상처 입힐지도 모를 선언까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을 믿자…….’ 과감하게 갤러리 현관문을 밀고 들어가며 다짐한 마음이었다. ‘연인의 판단을 믿고, 남자의 의지를 믿자…….’ 분명 미래의 그 어딘가쯤엔, 자신을 포함한 세 사람 모두를 온전한 가족으로 묶어줄 더 커다란 사랑이 반드시 존재하고 있을 터였다.
“예, 장 선생님. 저기 오른쪽 통로 끝에 보이는 파란색 출입문 보이시죠? 저기가 바로 전시팀장님 사무실입니다.”
1층 로비에서 안내를 받고 4층으로 올라가자 스무 명이 조금 넘을 직원들이 각자의 테이블 앞에 앉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커다란 사무실이 나타났다. 사무실 입구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자니, 가장 가까이 있던 여직원으로부터 무얼 도와드릴까요 하는 친절한 인사를 받았다. 남자의 이름을 말하자, 인턴 사원으로 보이는 그 젊은 아가씨는 부러 입구 밖으로까지 나와 미로처럼 얽힌 건물 복도를 척척 앞장서더니 목적한 곳까지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말과 함께 젊은 아가씨를 되돌려 보내고 문 앞에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오래 망설이면 또 버릇 같은 우유부단함이 고개를 치켜들 것 같아서 재빨리 문을 노크했다. 잠시 기다려도 어쩐지 대꾸가 없어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역시 대꾸가 없었다. 망설이다 마지못해 살며시 문을 열어보니 네 평 크기쯤 될 세련되고 심플한 사무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 세트 두 개에 데스크톱 두 대, 커다란 철제 캐비닛, 그리고 온갖 미술 전문 잡지와 서적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는 책장들이 보였다. 있어야 할 사람만 눈에 띄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오른쪽 구석으로 3분의 1쯤 빼꼼 열린 또 다른 문이 하나 보였다. 두런거리는 말소리 비슷한 인기척도 들렸는데, 실제 남자의 개인 사무실은 저 빼꼼 열린 문 안쪽인 것 같았다. 과연, 문 가까이 다가가니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까불지 마라, 노분도. 줘 패기 전에 어서 비키지 못해?”
“칫, 그깟 뽀뽀 한 번 하겠다는데 뭐가 그렇게 아까워요? 키스도 아니고 그냥 뽀뽀인데…… 약속한다구요! 진짜 혀는 안 넣을게요. 네?”
“노분도, 좋은 말로 할 때 가라, 응? 할 일이 산더미인데, 정녕 상사 무릎에 죽치고 앉아 상사 성희롱이나 해대는 한심한 놈이 되고프냐? 내년 인사 고과에 성희롱 잡음 하나 추가해줘?”
“에이, 진짜 팍팍하게 나오시네! 한 번만 좀 하게 해줘요, 제발! 남자가 말야…… 범인류애 차원에서 봉사도 하고 그래야지 어쩌면 그렇게 인색해요, 선생님은? 이리 멋있는 얼굴과 몸을 하고 있으면서 독수공방을 고수하시는 건 인류 발전에 막대한 손실이라구요. 장 선생님도 완전히 정리하셨다면서요? 그럼 이제 더 이상 금욕하실 필요도 없는 거잖아요. 얼마나 좋아요? 마침 옆에 손쉽게 안을 수 있는 저 같은 귀여운 후배가 있으니!”
“진짜 맞는다? 당장 내려가.”
“저 많이 무거워요? 죄송해요, 선생님. 요새 살 많이 빠지긴 했는데 선생님은 더 빠지신 걸 감안하지 못했네요.”
“노분도, 경고했다.”
“……애인 무릎에 앉히는 걸 좋아하신다면서요? 그럼 더 귀여워 보인다구 하시구선…… 전 안 귀여워요?”
“하……! 거울이나 한 번 보고 개념 탑재 좀 해라, 멍청아. 이 덩치가 어디 귀여울 군번이냐?”
“치사하게 진짜 이럴 거예요?! 남 아픈 데를 쿡쿡 잘도 찌르시네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미안하지만 저두요, 여자들한텐 제법 인기란 말입니다요! 어쩌다 같은 남자인 선생님한테 꽂혀서 이런 수모를 겪는 거지, 솔직히 요즘 거리에 나가보면요, 등발 멋지다며 들이대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웃는 것도 큐트하고 발랄하다고 다들 얼마나 꼬리를 치는지…… 그런 눈 밝고 감각 넘치고 상냥한 여자들이 세상엔 널리고 널렸다구요!”
“잘됐네. 그중 하나만 골라잡아. 그래서 지금처럼 무릎 위에 올라타고 재롱 떨어보시지. 애인이 귀엽다며 뽀뽀쯤은 실컷 하게 해줄 테니까. 하긴 이 덩치로 애인 깔아 죽일 생각만 아니라면 말이지.”
“선생님!”
“노분도, 제발 치워라, 응?”
“에이 씨, 진짜……!”
“오냐. 나도 여러 번 경고했다, 응……?”
“아……? 아야야……! 으아아아아악!!!!!”
3분의 1쯤 열린 문틈으로 방 안 풍경이 전혀 가감 없이 시야로 밟혀들었다. 커다란 사무용 책상 뒤에 앉아 서류를 훑고 있는 남자의 무릎 위엔, 기억에 있는 얼굴의 젊은 청년 하나가 앉아 있었다. 청년은 양팔을 남자의 목에 감은 채 필사적으로 남자의 얼굴을 향해 입술을 들이밀려 하고 있었고, 남자는 한 손으로 그런 청년의 정수리 머리카락을 와락 움켜쥐곤 반대 방향으로 밀고 있었다. 기절초풍한 인환의 심사와는 반대로 남자는 그런 부자연스러운 자세와 상황 속에서도 들고 있는 서류 더미에만 태연하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우면서도 소탈한 두 사람의 분위기에, 그런 상황과 장면들이 얼마나 자주, 또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한동안 티격태격 농담 따먹기 같은 실랑이를 주고받던 남자와 청년은 청년의 저돌적인 공격과 그를 막아내기 위한 남자의 필살기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남자가 청년의 목 뒤, 아마도 급소일 지점을 두 손가락으로 압박하며, 동시에 벌떡 일어나 청년을 가볍게 내팽개친 덕분이었다. 청년은 흡사 돼지 멱따는 것 같은 괴성을 지르며 사무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엄살떨지 마. 그래도 오늘은 물건까진 안 세워서 좀 봐줬…….”
서류 더미에서 청년에게로 힐끗 가 닿았던 남자의 시선이 문득 출입문 쪽으로 이동했다. 그제야 인환의 존재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시선이 부딪쳤다. 어쩌지? 실수한 건가? 아아, 노크도 않고 엿봤다고 사과를 해야 하는 건가? 당황한 자문들이 줄줄이 뇌리를 스쳐갔지만, 당장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잠시, 인환과 거의 똑같을 당혹감이 남자의 아름다운 눈시울을 스쳐가는 게 보였다. 그러나 그건 정말로 아주 찰나의 순간일 뿐이었다. 이내 남자의 얼굴을 환하게 밝힌 건 깊게 볼우물을 만들어내며 퍼지는 남자의 살인 미소였다.
“……오셨군요! 그러잖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날이 몹시 추워졌지요?”
변함없이 따스하고 상냥하고 배려가 넘치는, 그런 몸짓이었다. 그런 분위기였다. 옅은 블루진에 감색 스웨터, 그리고 검정 가죽 재킷이 톱 모델처럼 멋스러운, 변함없이 아름다운 남자였다.
남자가 뚜벅뚜벅 몇 걸음을 걸어 빼꼼히 열려 있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뻗어 나온 오른손. 무의식적으로 마주 손을 뻗어주자 따스하고 힘찬 악수가 되돌아왔다.
“이거야, 원. 저 친구 장난 덕분에 창피한 모습을 보여드렸네요.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말씀드릴 일이 무척 많습니다.”
물론, 변한 것도 있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이 변했다고 해야 옳았다. 남자의 얼굴에서 더 이상 고통의 그림자를 읽을 수 없는 것. 남자의 분위기에서 더 이상 애틋한 연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
친구였다. 그저 온화한 우정만이 은근하게 전해지고 있는, 편안하고 소탈한 친구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연기일까? 멍하니 남자의 미소에 마주 따라 웃으며 자문을 흘렸다.
“……노…… 노크를 했어야 하는데…… 그…… 그동안 잘 지내셨지요……?”
정말 잘 지내고 있나, 남자는? 지금 자신의 눈에 비치는 그대로 쾌활하고 평온하게, 그렇게 시간을 흘리고 있나?
“그럼요, 선생님! 실은 바빠서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 전시는 시즌 오프 시기지만 물밑 작업으로 더 바쁠 때거든요. 르네가…… 아, 르네는 기억하시죠? 저번 개인전 리셉션 때 소개를 시켜드렸었지요. 우리 갤러리 현대의 총감독직을 맡고 있답니다. 아무튼 요즘은 그 르네가 절 실컷 부려먹는 시기거든요. ‘김 선생만 믿어. 김 선생은 내 구세주야’가 제게 떨어지는 르네의 고단수 착취 수법이지요. 그녀의 뜻대로 열심히 달려주는 종마 신세가 요즘의 접니다, 선생님.”
악수로 이어진 손을 나머지 한 손마저 거들어서 잡은 채 남자가 인환을 안으로 끌어들였다. 남자의 친근하면서도 낯선 분위기에 어리둥절한 넋을 채 가다듬지도 않고서 남자가 권해주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뭘 멀뚱하니 서 있어, 노분도? 선생님께 인사 안 해?”
가볍게 떨어지는 남자의 호통에 데면데면한 표정으로 인환을 빤히 굽어보고 있던 청년이 꾸벅 하고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셨습니까, 장 선생님?”
“……네…… 안녕하세요……?”
웃음기라곤 없는 청년의 표정을 모르는 체 마주 고개를 숙였다.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미움받고 있는가……?
그제야 만족한 듯, 경쾌한 활력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몸짓으로 되돌아선 남자가 원래 앉아 있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집어 든 것은 조금 전까지 남자가 내내 시선을 박고 있던 서류 뭉치였다.
“……차 드릴까요, 장 선생님? 커피는 위에 별로 안 좋다고 알고 있어서 특별히 쌍화차를 준비해뒀습니다. 괜찮으시죠?”
서류를 들고 도로 인환의 앞으로 다가온 남자가 물어왔다. 쌍화차는 자신이 즐겨 마시는 차였다. 자주 배앓이를 하기에 커피 같은 카페인 함유 음료 또한 삼가고 있었다. 그걸 남자가 어떻게 알았을까 하고 자문하는 것도 부질없는 노릇이리라.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다시 청년을 향해 시선을 틀었다.
“뭐해? 차 좀 타 오지 않고? 성희롱만 열심이고 쫄다구 일은 게으름 피울 거야?”
“우쒸, 자꾸 성희롱, 성희롱 하지 마세요! 제가 여사원 엉덩이나 더듬는 배불뚝이 아저씨예요?! 칫! 남의 속도 모르고…… 선생님은 진짜 바보 멍청이얏……!”
입이 댓 발이나 나온 거구의 청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잽싸게 방을 나갔다. 흡사 진짜 성희롱을 당해 눈물을 흩뿌리고 뛰쳐나가는 아가씨 모양새여서, 인환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아리송한 심정이 되었다. 대놓고 박장대소를 하는 남자에 ‘아, 웃어야 할 상황이구나’ 하고 뒤늦게 감을 잡긴 했지만.
청년이 사라져간 문을 바라보며 꽤 오랫동안 킬킬거리던 남자가 이윽고 인환에게 시선을 주었다. 웃음의 여파를 그대로 간직한 평화로운 표정이 거기 있었다.
“……내년 봄 ‘쿤스트할레’ 전체 기획안이에요, 선생님.”
들고 있던 서류를 인환에게 내밀며 남자가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 말고도 한국에선 두 명의 작가가 더 참가하는데, 한분은 동양화가시고, 한 분은 설치작가시죠. 세 분 모두 전혀 다른 색깔을 지니신 터라 균형 감각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 좀 고민이 되더군요. 일단 최선을 다해 기획을 잡아보긴 했는데 선생님께서도 찬찬히 살펴보시고 미진한 점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상냥한 어조와 다름없이 상냥한 눈길이 인환을 찬찬히 굽어보고 있었다. 역시 변함이 없었다. 매순간 일체의 주의력을 몽땅 다 자신에게 쏟아붓고 있는 것만 같은 남자였다. 인환 자신을 온전히 믿고 수용하고 있는 남자 특유의 완벽한 개방성이었다. 다만 다른 것은 거기에 확연히 이질적인 색깔이 입혀져 있다는 것. 애인 같기도 하고, 형제 같기도 하고, 동료 같기도 했던 모호한 혼합의 자주색은 이제 보니 선명한 녹색 한 가지뿐이었다. ‘친구’라는 도로 교통 표지판의 녹색 단 한 가지뿐. 자각하지도 못할 정도로 은근히 전해졌던 성적인 전율과 설렘, 그리고 섹슈얼한 남성성은 이제 남자로부터 완벽하게 거세가 돼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깊은 속마음 역시 확연하게 깨달은 인환이었다.
아아, 그랬구나. 역시 자신은 사랑받았었구나. 이 아름답고 축복받은 예술의 천사로부터. 그리고 자신 역시 이 남자를 사랑했었구나. 성적으로 매혹당하고, 연인으로 구애를 받았었구나. 미처 자각하진 못했으나, 분명 과거의 어느 한 시점, 남자의 매혹과 구애를 스스로 용납한 적도 있었구나…… 그도 모자라 어쩌면 남자와의 섹스를 탐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선명한 인식.
찰나의 순간순간, 자신은 분명 이 남자와 사랑을 나누었다. 예술가로서의 완벽한 교감뿐만이 아닌, 그저 단지 서로의 매력에 끌린 연인으로서 서로를 허용한 순간도 분명 있었다. 물론 그건 현재 밖에서 자신을 기다려주고 있는 진짜 연인에 대한 사랑을 봉인해두고 있을 당시라는 전제가 붙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그게 남자를 사랑했었다는 진실을 부정할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미안…… 합니다…….”
무심코 사과의 말이 흘러나오는 걸 막을 방도가 없었다. 아아, 그래. 남자만이 아니었다. 남자 혼자만 북치고 장구 친 게 아니었던 거다. 치명적인 수컷의 매력으로 남자가 자신을 유혹한 것 못지않게, 자신 또한 남자를 향해 은근슬쩍 암컷의 페로몬을 흘렸을 터였다. 자신 역시 남자를 은밀히 유혹한 적이 있는 주제에, 지금 자신은 그런 과거 따윈 모르는 척 배부른 자의 위선으로 남자를 연민하려고 든다. 사랑이란 관념 자체를 봉인해두고 있어 미처 깨닫지 못했다 한들, 남자를 희롱한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모르고 저지른 죄라고 한들 그게 죄가 아닐 수 있을까?
어쩌면 지난 10년보다도 더 힘들었을 지난 몇 달간, 끔찍한 고독과 고통의 순간순간마다 남자는 더운 피가 흐르는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유일한 숨구멍이었었다. 그게 그림뿐이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림뿐만이 아니라, 남자 또한 자신의 자아가 붕괴하지 않도록 단단히 지탱해주던 최고의 매혹이요 위로요 구원이었던 것이다.
“……선생님……?”
굵은 쌍꺼풀이 진 아름다운 눈시울이 당혹으로 크게 뜨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자신의 위선과 비겁을 사과한다고 해도 절대로 남자에게서 용서받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사과를 하는지, 이젠 그저 ‘친구’일 뿐인 남자에게 까닭을 설명할 기회조차 박탈돼버렸지만, 그래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회한의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정말 미안합니다…….”
“……선생님…….”
여전히 깍듯하게 ‘친구’로서의 색을 유지하는 남자가 힘들게 웃고 있었다. 손을 뻗어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려던 친밀한 몸짓은 이내 ‘친구’로서의 경계에 떠밀려 스러졌다. 이리저리 주머니를 뒤진 남자가 손수건을 건네고 있었다.
“……저는 진짜 괜찮습니다, 선생님. 저 때문에 이러시는 거면 제발 근심 거두세요. 선생님께서 이러시면 외려 제 마음이 아픕니다. 많이 아픕니다.”
남자가 다정이 뚝뚝 떨어지는 상냥한 어조로 위로를 주고 있었다. 일체 사심 없는 ‘친구’의 위로에 가슴이 미어졌다. 자신 앞에서 이리 완벽하게 친구로 서기 위해 남자의 가슴은 그간 얼마나 자주 무너지곤 했을까.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을까.
“……선생님, 제발…….”
네, 그만할게요, 선생님. 선생님 때문으론 다신 울지 않을게요. 그럴 염치조차 없다는 걸 아니까…… 선생님께서 더 이상 저 때문에 아프지 않도록…… 다신 울지 않을 겁니다. 저 또한 최고의 ‘친구’로서 선생님 옆에 당당히 서겠습니다…….
남자가 내민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젖은 뺨과 눈가를 닦고, 팽 소리가 나도록 크게 코도 풀었다. 그 품위 없는 소리가 우스운지, 남자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들고 마주 따라 웃어주었다. ‘친구’로서 남자에게 던지는 최초의 미소였다. 어쩌면 과거 어느 한순간엔 연인이었을지도 모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울 자신의 ‘친구’였다.
“……저기요, 장 선생님…….”
남자와의 면담을 끝내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손목시계를 살피니 11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라고 여겼는데 어느새 한 시간 반이나 지나 있었다. 초조하게 기다릴 연인을 떠올리며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인환을 불러 세웠다.
“……실례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선생님께 꼭 한 말씀만은 드리고 싶어서요…….”
노분도라고 했던가? 남자의 무릎을 타고 앉아 있던 젊은 청년이었다. 남자의 무릎 위에 앉아 너스레를 떨 땐 티 하나 없이 밝아 보이던 청년의 표정엔 감출 길 없는 수심이 가득 들어앉아 있었다. 청년을 확인하자마자 무심코 터져 나오려던 실소는 그 즉시로 자취를 감추었다. 다크 네이비의 무난한 양모 슈트에 노타이 차림이 청년의 덩치와 어우러져 흡사 조폭 똘마니 같은 모양새였지만, 유난히 맑은 눈동자와 개구쟁이 같은 선한 인상은 차라리 막 입학한 대학생처럼 풋풋하고 앳돼 보였다.
“……우리 선생님요…….”
혹시 듣는 귀가 있을까, 잠시 주변을 살피던 청년이 망설이는 어조로 말머리를 꺼냈다.
“……장 선생님께서 보시기엔 어떤지 모르지만 많이 힘들어하십니다. 알고 계신가요?”
비장하기까지 한 어조에선 흐릿하게 적대감이 읽혀서 그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그게 선생님 때문인지도 아세요?”
“…….”
“그렇군요. 그런데도 우리 선생님 주변에서 계속 머무시기로 한 거군요.”
“…….”
“……저는…… 저는 솔직히 이해가 안 갑니다. 우리 선생님이나 장 선생님이나요. 어차피 이루어지기 불가능한 관계인 거면 당분간만이라도 안 보는 게 서로를 배려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요.”
“…….”
“……하지만 역시 그건 제 생각일 뿐이고…… 우리 선생님은 저보다는 사람 관계에 있어서 훨 고수시니까 달리 생각이 있으신 거겠죠. 장 선생님도 나이가 있으시니 저보다는 이런저런 인생 경험이 많으실 거고요.”
“…….”
“짐작하실지 모르겠지만 저 우리 선생님 사랑합니다. 진짜 많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 선생님께서 진짜로 마음 정리 다 하시게 되면 진지하게 구애할 작정이기도 합니다.”
“…….”
“……그래서 주제넘긴 하지만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는 더 이상 우리 선생님 흔들지 마세요.”
“…….”
“장 선생님껜 달리 배우자분이 있으시지요? 그분을 몹시 사랑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이미 14년이나 된 관계시라고요.”
“…….”
“그런 소중한 반려가 있으시니까 우리 선생님에 대해선 제발 관심 끊어주세요. 서로 친구라는 관계로 남기로 하셨다니까, 일단 장 선생님의 선의는 믿어드리겠습니다. 요는 제 부탁은 그겁니다. 진심으로 ‘친구’ 이상의 그 어떤 흔듦도 자제해주시길 바랍니다. 반려분과의 관계가 힘들다고 우리 선생님께 기대신다거나, 혹시라도 바람피우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우리 선생님께 쉽사리 손을 내밀거나 하지 말란 말씀입니다. 그야 우리 선생님이 살 떨리게 멋진 분이란 건 알지만, 장 선생님도 양심이 있는 분이라면 설마 그런 파렴치한 스캔들은 벌이시지 않겠죠.”
“…….”
“……장 선생님 그림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장 선생님의 뿌리 없는 나약함만은 동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선생님께서 장 선생님과의 관계를 쉬이 단절하지 못하시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장 선생님까지 그에 맞장구를 치시는 건 저로선 솔직히 주제넘은 미련과 욕심으로밖에 안 보입니다. 물론 이건 제 편견일 수도 있겠죠. 그리고 제 이 편견이 깨지게 되는 것도 앞으로 장 선생님의 태도 여하에 달려 있겠고요.”
“…….”
“……제 부탁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
처음 은근했던 적의는 아예 노골적인 선전 포고로 바뀌어 있었다. 선한 눈시울은 부리부리하게 치켜뜨여 있고, 얼굴엔 흐릿하게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 번쩍번쩍 빛을 내는 새까만 눈동자엔 사내로서의 단호하고 흉흉한 각오가 넘쳐났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청년은 고뇌하고 있었다. 핏기를 잃은 입술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고, 양옆으로 늘어뜨려진 두 주먹 또한 보일 듯 말 듯 떨리고 있었다. 남자가 있을 사무실 쪽을 수시로 흘낏거리는 불안정한 태도에서도 청년의 심약함과 순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마도 본래 기질에 반해 청년은 자신에게 각을 세운 것이리라. 그것도 청년으로선 최대한의 용기를 내서.
뭉클한 감동과 따스함이 피를 데우기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남자에 대한 청년의 순수하면서도 맹목적인 애정. 그것은 자신에게도 매우 익숙한 사랑법이었다. 노골적으로 자신의 인격을 의심받고 있는 상황이지만, 청년의 매도가 짐짓 100% 억울한 것도 아니었다.
“……김 선생님은 제게도 그저 소중한 친구일 뿐입니다, 분도 씨.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고요. 그리고 제가 죽을 때까지 사랑할 사람은 현재의 제 연인밖에 없습니다.”
담담하면서도 확고하게 청년이 바라는 맹세를 주었다. 사랑에 빠진 순수한 청년의 맑은 눈망울을 걸고. 그건 스스로를 향한 맹세이기도 했다. 엉망진창으로 무너졌던 과거의 실수를 다시금 되풀이할 정도로 자신은 바보 멍청이는 아니리라. 아니어야만 하리라.
“……김 선생님과 부디 좋은 결과 있으시기를 기도할게요, 분도 씨. 참 좋은 분이 김 선생님 곁에 계신 것 같아서 저도 안심이 됩니다. 저에 대해선 정말 걱정하지 마세요. 분도 씬 김 선생님과 잘되실 겁니다. 진심으로 빌어드릴게요.”
흐릿하게 웃으며 재차 다짐을 주곤 돌아섰다. 마침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인환은 안으로 들어섰다. 1층 버튼을 누른 뒤 청년 쪽으로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청년은 허리까지 접은 인사로 인환을 배웅하고 있었다.
“무례한 언사, 무지 죄송했습니다, 장 선생님!!! 저도 장 선생님께서 무지무지 좋은 분이시라는 거 잘 압니다!!!”
우렁찬 목소리였다. 막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허리를 편 청년과 시선이 마주쳤다. 단단하게 똬리를 틀고 있던 적대감은 더 이상 흔적도 없었다. 역시 부러울 지경으로 순수한 청년이었다. 고작 원하는 대꾸 몇 마디 해주었다고 이리도 쉽사리 호의를 보이다니. 선한 인상의 맑고 투명한 빛만이 젊은 청년의 얼굴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마주 미소를 지어준 순간 문이 닫혔다.
저런 사랑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신도…… 청년만큼 젊고 푸르렀던 젊은 날…… 저리 밝고 맑은 사랑만 했더라면 얼마나……. 갤러리 현대를 나서며 마지막에 걸린 생각의 편린은 그런 씁쓸한 회한이었다. 그런 부러움이었다.
현관문을 밀고 나가자 선뜩한 칼바람이 거침없이 다가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옷깃을 바싹 여미며 사방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반사적으로 갈급하게 연인을 찾는 자신이었다. 연인이 몹시도 그리웠다. 따스하게 자신을 품어줄 늠름한 품 안이 간절하게 그리웠다. 길 건너, 빤히 바라다 보이는 카페와의 거리가 지독히도 멀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카페를 향해 달리듯 걸음을 재촉했다. 맘껏 달릴 수 없게 만드는 불편한 한쪽 다리가 새삼 속이 상했다. 연인은 휴대전화로 부르라고 했지만, 번호를 누르는 그 잠시의 시간도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날카롭고 싸늘한 공기와 입가로부터 하얗게 퍼지는 입김을 헤치며 카페 앞까지 도착해보니 전면이 옅은 갈색 통유리로 된 카페 한편에 연인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연인은 푹신하고 안락해 보이는 소파에 느슨히 기대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연인 앞의 장방형 탁자 위엔 두툼하게 쌓인 각종 신문 더미가 보였다. 한국의 주요 일간지는 물론, 전 세계의 주요 경제지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정독하는 연인의 습관은 신혼여행을 떠나는 오늘까지도 거르기 싫었던 모양이었다. 연인 특유의 무서운 집중력 때문인지, 자신이 유리벽 밖에서 시선을 주고 있는 것도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핏속에서 들끓던 갈급한 그리움이 연인의 모습을 눈에 새긴 순간, 스펀지에 물이 스미듯 서서히 채워지고 있었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 직접 따스한 체온을 맞대고 싶은 마음 반, 그저 이대로 꿈처럼 아름답고 그리운 모습을 눈에 각인하는 것만으로도 지독한 충만감을 느끼는 마음 반이 서로 뒤섞인 채, 일순 자신의 발걸음을 묶고 있었다. 발이 묶인 그대로 그저 멍하니 연인만 바라보았다.
짙은 갈색의 스웨이드 헌팅캡에 블루진, 머스터드색 목폴라 니트 위로 까만색 가죽 라이더 재킷을 걸치고 있는 연인은 캐주얼한 여행복 차림이라 그런지 확실히 평소의 연인보다도 훨씬 더 젊어 보였다. 20대 중반의 대학생이라고 한대도 카페 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를 할 정도의 에너지와 아름다움으로 연인은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누구든 일단 한번 보면 매혹당하거나 사로잡히거나 둘 중 하나일 치명적인 존재감이 아닐 수 없었다. 슬쩍 눈에 들어오는 카페 안 풍경만 봐도, 연인 너머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자란 여자들의 시선은 죄다 끌고 있었는데, 그중 특히 어린 여대생들로 보이는 차밍한 아가씨들 셋은 완전히 연인에게 넋이 나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새삼 특별할 것도 없는 장면에 실소를 흘리고 있는데, 마침 그 여학생들 중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게 보였다. 근사한 S자 몸매에 최신 유행의 옷차림, 얼굴도 꽤나 예쁘장한 편이었다. 하긴 스스로의 용모에 어느 정도 자신이 없었다면 연인에게 감히 말을 붙일 엄두도 못 냈을 터…… 연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빛내며 다가가는 여학생의 모습에, 이어질 장면은 안 봐도 비디오겠구나 하고 인환은 연방 소리 없는 웃음을 물었다.
여자애가 기대감이 서린 상기된 얼굴로 연인을 몇 번이나 불렀고, 겨우 고개를 든 연인이 말을 붙인 여자애에게 주목하는 게 보였다. 처음엔 무심했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지더니 이윽고 잔뜩 미간을 구긴 채로 여자애를 향해 뭐라고 답을 주는 것도 보였다. 고작 세 마디쯤이었을까? 역시 안 들어도 오디오일 것 같았다. 다음 순간, 여자애의 얼굴은 완전 토마토가 되었고, 이내 도망치듯 제자리로 돌아가버렸으니…….
(아마도) 잔인하게 내쳐졌을 어린 여자애가 안쓰러우면서도 지조 있는 연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슴이 뻐근해지는 속내 또한 숨길 수 없었다. 입가에 기쁨에 겨운 웃음을 잔뜩 머금은 채, 한참이나 연인의 절대적인 애정을 만끽했다. 연인의 아름다운 얼굴과 자태만 홀린 듯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여자애가 사라지고 나서도 연인은 한동안 희미한 짜증이 서린 얼굴로 신문을 들추고 있었다. 점차 다시 신문에 몰두하기 시작하는지 곧 무표정이 되더니, 인환에게도 매우 익숙한 완벽한 몰입의 표정이 되었다. 간간이 신문을 넘기거나, 글자를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는 외엔 미동도 않고 신문만 읽는 연인의 모습은 흡사 잘 빚어진 조각 그 자체로 보였다. 아니, 도리어 조각이라고 비교하는 것조차 무색해 보일 지경이었으니, 꿈속에 등장하는 사람처럼 어딘가 몽롱하고 아득하게 보이기도 했다. 하긴 세상에 그 어떤 완벽한 조각이 있어 연인만큼 아름다울 수가 있겠는가. 연인만큼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낼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오래 연인만 바라보고 있었을까. 문득 신문을 접고 손목시계를 살피는 연인이 보였다. 시각을 확인하곤, 마음에 들지 않는지 또 미간을 살짝 구기고 있었다. 들고 있던 신문을 신경질적으로 팽개치는 것도 보였다. 그러곤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는 것도 보였다. 눈에 피로를 느끼는지, 엄지와 검지로 감은 양쪽 눈꺼풀 주변을 꾹꾹 누르는 것도 보였다.
‘……와라.’
문득 연인의 입술이 조용히 움직였다.
‘……빨리 와라, 내 강아지…… 빨리 와…….’
되풀이된 입술의 움직임…… 착각이 아니었다. 그건 방음이 확실한 두꺼운 유리벽을 사이에 둔 덕분에 더욱더 선명하게 감지되는 언어의 움직임이었다. 소리가 없어 더 절박하고 안타까운 부름이었다!
‘……제발…….’
다시 한 번 떨어진 연인의 절실한 감정에 공명하며 전율했다. 뭉클한 감동이 목울대를 치고 올라왔다. 연인도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간절히 부르고 있었다. 자신이 그리워하는 이상으로, 부르는 이상으로, 연인도 자신을 애타하고 있었다.
연인의 부름을 따라 몇 발짝 더 유리벽을 향해 나아갔다. 아니, 연인이 앉아 있는 테이블 쪽이었다. 확연하게 유리벽 쪽으로 바싹 다가서자 창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자신을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물론 사람들의 시선 따윈 더 이상 개의치 않았다. 바로 연인의 정면에 바짝 붙어 선 채 유리벽에 가만히 오른손바닥을 가져다댔다. 정확히는 연인의 얼굴이 비치는 부분이었다. 자신이 서 있는 밖의 지면보다 안쪽의 실내가 몇 계단 더 높은 위치에 있어, 앉아 있는 연인과 서 있는 자신과는 눈높이마저 거의 일치했다. 연인과의 물리적인 거리는 고작해야 1미터 남짓. 다만 그 사이에 있는 두꺼운 유리벽 때문인지, 그 몇 배는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앞섰다. 연인의 얼굴에(정확히는 얼굴이 비치는 유리벽에) 가져다댄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게 되는 까닭이었다. 꽤나 오랫동안 추운 공기에 노출됐던 모양인지, 유리벽에 붙은 손은 딱딱하고 차게 얼어 있었다. 그러나 온 신경이 눈앞의 연인에게 가 있는 터라, 시리다 못해 저린 감각조차 제대로 자각이 되지 않았다.
‘……여기 있어…….’
연인과 똑같이 소리 없는 대꾸를 주었다.
‘……나 여기 있어, 위야…… 여기야…….’
되풀이해 연인을 부르며 유리벽 너머 연인의 얼굴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그렇게 얼마나 간절히 연인을 불러댔던 걸까? 눈을 감은 채 흐릿하게 미간을 구기고 있던 연인이 문득 눈을 뜨는 게 보였다. 순식간에 휘둥그레진 눈시울도 보였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찔 몸을 떨더니, 이내 창 밖으로 고개를 홱 돌리는 것이 아닌가. 유리벽과 1미터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부름이 들렸던 걸까? 텔레파시가 통했던 걸까? 모르겠다. 서로의 절절한 그리움이 통했을 수도, 혹은 단지 주변 테이블들의 시선을 의식하다 자연스레 그 시선들의 방향인 자신까지 눈치챈 것일 수도 있었다. 아무러면 어떤가. 원인이야 어떻든 그저 저렇게 번쩍번쩍 별이 들어앉은 홀린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봐주기만 하면 되는 거지.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저 사랑에 미쳐 있으면 되는 거지.
미동도 않고 화살처럼 꿰뚫듯 한참 동안 자신만을 응시하던 연인이 느릿느릿 유리벽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는 게 보였다. 정확히는 자신을 향해서였다. 길고 늘씬한 왼팔이 쭉 뻗어오는 것도 보였다. 활짝 편 연인의 손바닥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자신이 손바닥을 붙이고 있는 부분에 마주 닿아오는 손이 보였다. 길고 단단한, 섬세하면서도 아름다운 손이었다.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서 마주 붙이고 보니, 자신의 것보다 손가락 마디 한 개 반 정도는 크고 긴 손이었다. 피아니스트 신동의 손이었다. 찬 공기에 차여 시리고 저리던 자신의 손으로 문득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물론 실제로 연인의 온기가 전해질 만큼 유리벽이 얇은 건 전혀 아니었으니, 그저 심리적인 착각에 불과할 터였다. 멍하니 마주 댄 연인의 온기만을 바라보다가 다시 연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열정이 전율처럼 흘러넘치는 먹빛 동공의 사슬이 아팠다. 사랑이 깊으면 아픔도 깊어질 수가 있구나. 설핏 뇌리를 스친 진리에 웃음이 났다. 추위로 파랗게 굳어진 입술 끝을 따라 흐릿한 미소가 걸렸다. 따라쟁이 연인은 어째 이번엔 웃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입술만 움직일 뿐이었다.
사랑해.
연인이 고백했다.
사랑한다, 장인환.
소리 없는 입술의 움직임으로 되풀이, 되풀이해 맹세했다.
영원히 사랑할 거다. 너만을 영원히.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아아, 자신 역시 연인의 따라쟁이였던가 보았다. 사슬처럼 강렬하고 아픈 절박함으로 연인의 눈동자만 홀린 듯 응시했다. 살을 에는 칼바람 추위도 잊히고, 카페 안팎에서 자신들을 휘둥그레진 경악과 호기심의 눈으로 힐끔거리는 수많은 뭇 시선들도 잊혔다. 시간도 사라지고, 공간도 사라졌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연인과 자신, 단둘뿐이었다.
응, 나두.
자신도 고백했다.
나두 사랑해, 위위.
소리 없는 입술의 움직임으로 되풀이, 되풀이해 맹세했다.
영원히 사랑할 거야. 너만을 영원히.
흡사 살기를 품은 것처럼 새파란 열정의 빛을 뿜어내던 연인의 눈시울이 살며시 젖어드는 게 보였다. 하얗다 못해 푸르게 비치던 흰자위 주변으로 설핏 핏기가 서리는 듯싶더니 이내 눈꺼풀이 내려왔다. 연인의 입술이 천천히 다가왔다. 자석처럼 이끌린 자신의 입술도 연인의 입술에 포개졌다. 입가에서 토해지는 새하얀 입김이 유리벽에 퍼지며 뿌연 김을 만들어냈다.
차가운 입맞춤이었다. 너무 차가워서 더 뜨겁게 새겨지는 입맞춤이었다. 맹세였다. 오, 그대여. 나의 연인이여. 내게 입 맞춰주어 나와 그대의 구별이 사라지게 하고 나에게 영원한 기쁨의 상태를 주소서. I do, I do. Oh, yes, I do…….
성스러운 결혼의 의식이었다.
줄곧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인천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하면서도, 면세점을 구경하면서도, 기내에서도, 홋카이도 신치토세 공항에 도착해서도, 쾌속 전철을 타고 목적지인 오타루치코 역으로 이동하면서도 내내 손을 잡고 지냈다. 가는 곳마다 뭇 사람들의 숙덕거림과 힐끔거림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두렵지 않았다. 혼자가 아닌 둘이기에, 영원히 이대로 함께일 것을 알기에, 더 이상 세상이 두려워 움츠릴 까닭은 없었다.
오타루치코 역에 도착해 역사 밖으로 나오니 사방이 온통 눈 천지였다. 도로나 인도 외에, 채 치워지지 않은 공간들엔 30센티 가까운 눈 더미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고, 그 위로 여전히 꽃비처럼 날리는 함박 눈발이 고요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새하얀 눈발과 파란 일몰이 함께 내리고 있는 신비롭고 고풍스러운 거리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한동안 멍하니 선 채 우아한 소도시를 일별했다.
공기가 서울에서보다도 더 추운 때문인지 연인은 일단 숙소부터 찾아가자고 제안했다. 인환의 코트 깃이며 목도리를 여며주는 연인의 세심한 배려를 보니 인환이 감기라도 들까 염려하는 것 같았다. 추운 것은 상관없었지만 거추장스러운 짐만이라도 일단 부려야 아름다운 거리도 맘껏 둘러볼 터였다.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자, 헌팅캡 속 깊은 눈시울도 흐릿하게 따라 웃는 게 보였다.
택시를 타고 5분 만에 도착한 ‘긴린소’라는 료칸은 메이지 시대에 처음 개관해 역사가 130년이나 된다는 오타루의 최고급 전통 료칸이었다. 오타루 시내보다 꽤 높은 고원 지대에 위치해서 그런지 료칸 현관 앞 정원에 서서 보니 오타루 항구와 도심이 멀찌감치 눈 아래로 보였다. 쇼와 13년 당시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건물의 외양은 흡사 일본의 전통 박물관에라도 들어선 것처럼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이 넘쳤고, 눈 쌓인 고아한 정원이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이시카리만과 알록달록 불빛이 켜지기 시작한 항구의 풍광, 그리고 료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청정한 대자연의 모습이 어우러져, 그 이상으로 멋들어진 숙소도 달리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세계 각국을 제집처럼 드나들 안 회장이 추천한 숙소답게 고급스럽고 운치가 있으며 아늑한 장소였다.
료칸 오카미(여지배인)의 환대를 받으며 체크인을 하고 예약된 객실로 올라가니 역시 유서 깊은 일본 전통 대저택에라도 들어온 듯한 착각을 주는 실내가 두 사람을 맞았다. 20평쯤 될 이로리(일본식 화로)까지 있는 전통 다다미방에는 그림이며 가구, 장식용 수반이나 화병 등등 어느 하나 고아하고 예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감탄의 한숨까지 터뜨리게끔 한 것은 남쪽과 서쪽 벽을 전부 다 차지하고 있는 창 밖으로 펼쳐진 항구와 바다의 풍광이었다. 서쪽 전면엔 아담하게 꾸며진 객실 전용 로텐부로(노천 온천)까지 딸려 있었다. 일본은 젊을 때에도 그닥 취향이 아니라 그저 친구들 따라 도쿄에 잠깐 들러 쇼핑이나 하다 간 게 다였는데, 막상 뒤늦게 찾아와보니 젊었을 때 느꼈던 거부감 같은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부감은커녕, 만약 그때 이런 아름답고 낭만적인 여행지며 그에 딸린 숙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제주도만큼이나 자신에겐 단골 휴양지 목록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신혼여행’이라는, 아니, 꿈조차 감히 꾸지 못했던 연인과의 여행이라는 사실에 편견이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연신 감탄의 한숨을 연발하며 전망이 탁 트인 창 밖을 내다보기에 여념이 없는데, 객실을 안내하며 따라 들어온 나카이 상(손님 수발을 드는 여종업원)이 일본어로 뭐라고 말을 하는 게 들렸다. 시선을 돌리니 두 무릎을 꿇고 앉아 찻상 세팅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아마도 차를 끓여줄 것을 질문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객실의 아름다움에 홀린 나머지 나카이 아가씨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간에도 꾀꼬리처럼 노래하는 일본어로 계속 나붓나붓 설명조의 대화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나중에 연인에게 물어보니 내용은 전부 객실 이용에 관한 상투적인 안내의 말과 식사 시간에 대한 확인 등, 전부 료칸 서비스의 일환이었지만, 젊은 아가씨 특유의 상기된 표정엔 연인을 향한 매혹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기모노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차림새도 낯설었고, 흡사 에도 시대 종처럼 무릎을 꿇고 앉은 모양새까지 미안할 지경으로 낯설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고민하는 인환과 달리 연인은 꽤나 익숙한지 무관심하달 정도로 태연하게 아가씨를 응대하고 있었다.
줄곧 창가에 서 있는 인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아가씨의 얘기를 들어주던 연인이 갑자기 단호한 어조로 무언가를 말했고(여기서 또 연인의 유창한 일본어 실력까지 비로소 실감한 인환이었다!) 찻물을 끓이던 중인 아가씨는 잠깐 당혹한 표정으로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더니 이내 허리를 굽힌 정중하고 나긋한 인사와 함께 방을 나갔다.
“……차는 괜찮으니 둘만 있고 싶다고 했지.”
묻는 눈길을 보내자마자 태연하게 떨어진 연인의 변명이었다. 안 그래도 연인과 단둘이 료칸에 묵는 것에 대해 조금 켕기고 있었는데(남자 둘이 호텔이나 료칸에 묵을 경우 일본에선 십중팔구 게이로 오해를 받는다고 했다. 자신들의 경우 확실한 게이이긴 했지만), 확실하게 확인 사살을 해준 모양이었다. 친구 사이가 아닌 연인 관계라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다고도 했지.”
무뚝뚝한 어조로 덧붙인 한술 더 뜬 언질엔, 인환도 그저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윤열이 형이 전망이 좋지 않은 방으로 예약해주었으면 더 좋을 걸 그랬군.”
황당한 눈으로 책망할 말을 찾고 있는데(굳이 4박5일이나 묵어야 할 숙소의 종업원들에게 게이라는 사실을 밝혀 주목을 받을 필요까진 없지 않나 싶었으니까) 이내 곁으로 바싹 다가든 연인이 자신의 어깨를 감아들이며 중얼거렸다. 근사한 전망이 펼쳐지고 있는 창 밖으로 시선을 주고 있는 연인의 표정엔 무언가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도대체 왜? 남은 황홀해서 좋아 죽겠는데 이래저래 초를 쳐도 유분수지! 나카이 상에게 한 커밍아웃보다도 더한 황당한 대꾸는 금세 떨어졌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창 밖만 쳐다보느라 나한텐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잖나. 설마 숙소의 전망과 라이벌이 될 줄은 미처 몰랐었군.”
어깨동무를 해온 팔의 손가락이 간질이듯 한쪽 뺨을 애무하고 있었다. 창 밖 풍경에 시선이 고정된 조각 같은 핸섬한 프로필엔 진심만이 가득해서 놀릴 수조차 없었다.
“7시 반에 저녁 식사 가져오라고 했으니까 그전에 온천욕을 하는 게 좋겠다. 밥 먹곤 오타루 시내로 나가 산책 겸 이것저것 구경을 해도 좋겠지. 물론, 난 그냥 이대로 여기서 내일 아침까지 사랑을 나누는 쪽을 선택하겠지만, 넌 분명 반대하겠지?”
“……다, 당근이지! 저렇게 예쁜 풍경인데! 눈도 예쁘게 오고 있고…….”
부랴부랴 단호하게 대꾸했다. 말로는 자신의 뜻을 존중할 것 같지만 정말로 이대로 숙소에 틀어박힐지도 모를 연인이었다.
“후후, 그래. 우리 예쁜 마누라는 눈을 좋아하지. 옛날에도 눈을 좋아하더니 여전하군. 하긴 난 이렇게 여전한 마누라가 좋아. 좋아서 미치지. 그러니까 오늘은 마누라 마음대로 하자고.”
문득 인환의 얼굴로 향한 얼굴엔 싱글싱글 기분 좋은 웃음기가 가득했다. 어깨동무가 풀리고 양팔이 잡힌 인환의 상반신이 연인을 마주 보는 자세로 돌려세워졌다. 연인의 두 손이 가 닿은 곳은 코트 깃, 정확히는 코트 깃을 여미고 있는 단추였다. 애무하듯 부드러운 시선이 인환의 얼굴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며 천천히 옷을 벗기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과 아름다운 표정 둘 다에 홀리는 사이, 코트와 머플러, 재킷과 바지, 그리고 양모 조끼와 셔츠가 차례로 방바닥에 떨어졌다. 팬티까지 벗기는가 싶어 조금 긴장을 한 것이 무색하게, 연인은 다다미방 한쪽 벽장에서 암청색 유카타를 꺼내더니 제법 익숙한 손놀림으로 인환에게 입혀주었다. 품도, 길이도 인환에겐 엄청 커서 허리 부분을 꽤나 많이 접어 올린 다음 끈으로 묶어야만 했다. 부드러운 면의 감촉이며 발목 부근에서 스커트처럼 끌리는 야릇한 기분에 생경해하는 사이, 연인은 그 위에 다시 품이 넓고 우아한 은색의 오비마저 둘러주었다.
“……엄청 섹시한걸. 도로 벗기고 싶어졌어…….”
어딘가 번득이는 시선으로 연인이 전신을 훑어 내리는 통에 등줄기로 살짝 식은땀이 뱄다. 표정이 너무나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저녁이고 뭐고 다 관두고 이불부터 펴라고 종업원을 닦달할 게 뻔하니 참아야겠지?”
동의를 구하는 말인지 혼잣말인지도 아리송했다. 너무나 낮고 허스키해진 중저음이었다. 마치 섹스 직전의 그것처럼.
“전용 로텐부로도 이따 밤에나 쓰는 게 좋겠지? 단둘이 탕에 들어가게 되면 역시 또 유혹을 못 이길 거야. 1층에 공중 노천탕도 있다니까 거기로 가자.”
말이 전하는 의미와는 달리 한동안 얽혀드는 연인의 젖은 시선에는 은밀한 욕구만이 선명했다. 연인에게서 전염된 심장이 두근두근 맥동하는 사이, 이윽고 긴 한숨을 내뱉은 연인이 인환을 놓아주고 돌아섰다. 인환의 옷을 벗길 때에는 스트립쇼를 시킬 기세로 느릿하게 뜸을 들이더니만 스스로 옷을 갈아입는 속도는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팬티 하나만을 걸친 늠름한 나신을 채 감상할 틈도 없이 연인은 금세 인환의 모습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멋들어진 ‘사무라이’로 변신을 했다.
맙소사, 어째서 같은 옷인데 저렇게까지 다른 걸까. 빛과 그림자처럼 선명한 차이에 좌절할 의욕마저 사라지는 형편이었다. 자신에겐 바닥까지 질질 끌리던 유카타는 키 크고 늠름한 연인에겐 흡사 맞춤옷처럼 딱 들어맞았다. 들어맞다 뿐이냐, 옆구리에다 일본도라도 하나 차면 그대로 ‘사무라이’ 영화의 한 장면일 것 같았다. 정말로 연인표 사무라이에 홀딱 반해서는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유카타 위에 오비를 걸치고 타월 두 개까지 꼼꼼히 챙겨 든 연인이 인환의 손을 잡아왔다. 멍하게 풀린 자신의 눈동자를 굽어보고 있는 눈빛은 마냥 따스하면서도 깊었다. 눈매에 확연히 서린 웃음기는 잘생긴 입꼬리에까지 자연스레 이어져 있었다.
“……그런 눈초리는 위험하다고 했는데, 마누라. 정말로 조심성이 없군…….”
기분 좋은 중저음과 함께 달콤한 입맞춤이 떨어졌다. 장난처럼 시작한 키스는 점점 진지해지며 꽤나 오래 지속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진짜 위험스러워졌다. 허리를 감고 있는 연인의 팔과 이리저리 쓰다듬는 손바닥의 감촉이 차츰 격렬해지는 것과 한가지로 딱 달라붙어 있던 서로의 하반신이 차츰 일어서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그렇듯이 주도권은 연인에게 있었다. 정신을 못 차리고 연인에게 몰입해 있는 인환을 연인이 힘겹게 밀어냈다. 쪼옥 하고 마무리 립 키스까지 마친 연인이 서로의 코를 붙인 채로 소리 없는 웃음을 흘렸다. 자신만큼 가쁜 숨길이 연인의 입술을 통해서도 한동안 뿜어 나왔다.
“……계획대로 여행 일정을 착실히 보내려면 매일 밤 이부자리가 펴지기 전까지는 서로 30센티쯤은 떨어져서 다녀야겠는걸?”
그러나 단단히 틀어쥔 포옹만 풀었을 뿐, 연인의 손은 인환의 한 손을 꽉 움켜쥔 채였다. 서로의 흥분 상태를 가라앉힐 심산이었는지 연인은 인환의 손을 잡은 채로 눈이 내리고 있는 창 밖 야경을 향해 몸을 돌려세웠다. 새까만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 항구와 시내 중심가가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새하얀 눈들로 가득 뒤덮여 있는데다 형형색색의 불빛들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는 탓에 뽀얀 박명이 땅거미의 짙은 어둠을 당당히 막아주고 있었다. 역시 연인 못지않게 인환을 취하게끔 만드는 신비로운 아름다움이었다.
“……가자.”
문득 떨어진 연인의 말은 왠지 무뚝뚝하게 들렸다. 서로의 흥분이 가라앉기가 무섭게 재촉하듯 도로 출입문 쪽으로 인환을 끈 연인이었다. 전망과 라이벌이 됐다고 하더니, 확실히 농담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역시 놀리기도 무색한 진지함이라 그저 속으로 웃음을 사리물며 연인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다다미가 깔린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 긴 복도를 따라 걸어가니 목적하던 공중목욕탕이 나왔다. 객실마다 로텐부로가 딸린 탓인지, 탕 안엔 막 온천욕을 끝내고 나오는 60대 노인 외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욕장 안으로 들어가니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엄청난 추위가 닥쳐들었다. 확실히 사방이 탁 트인 한겨울 노천탕다웠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에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는 뜨끈한 온천물이 흘러넘치고 있는 거대한 욕조 안으로 뛰어들었다. 자신의 몇 배는 추위에 강할 연인은 그런 자신을 약간 걱정이 서린 눈초리로 굽어보며 느긋하게 샤워를 마친 후 탕 안으로 들어섰다.
“……웬만해선 감기엔 걸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래도 좀 걱정이 되는군. 언제든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으면 미리 말을 하도록 해라.”
바로 옆에 자리를 잡은 연인이 신중한 어조로 잔소리를 했다. 이미 뜨거운 온기에 잠식당한 후라, 추위 따윈 말짱 날아가버린 인환은 그저 말갛게 웃는 것으로 연인의 염려를 일축했을 뿐이었다. 주변을 살펴볼 여유도 되살아나서, 대나무 발로 칸막이가 쳐진 외벽이며 새까만 현무암 바위들로 자연 상태의 계곡처럼 운치 있게 꾸며진 욕장 안, 안개처럼 위로 퍼져 올라가는 온천수의 김, 그리고 칸막이 너머 눈 내리는 고요한 정원 풍경을 매혹돼서 바라보았다. 역시 객실 창가에서 바라본 오타루시 전경처럼 신비롭고 몽환적인 풍경이었다.
문득 연인과 거의 밀착돼 있던 왼쪽 종아리가 간질거렸다. 보니, 연인이 종아리에 발바닥을 딱 붙이곤 발가락으로 꼬물거리듯 애무를 하고 있었다. 그제야 옆으로 고개를 돌려 연인의 얼굴에 시선을 주었다. 또 전망에 질투가 난다고 할까 싶어 잠깐 긴장했건만, 연인의 고요한 표정에 서린 것은 부드럽게 갈무리된 절절한 애정뿐이었다. 물에 젖어 이마 위로 가닥가닥 늘어진 머리카락이며, 온천의 열기가 올라 흐릿한 홍조가 서려 있는 양쪽 뺨이며, 욕장 안의 뽀얀 주홍색 불빛을 받아 늠름하게 반짝거리는 황금색 어깨 근육이며, 그 어느 때보다도 숨이 막힐 지경으로 섹시하고 아름다운 연인이었다. 또 위험한 눈초리로 바라본다고 매도할까 봐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외면했지만, 그새 홀라당 넋이 나가버린 자신을 눈치채지 못할 연인이 아니었다. 대답처럼 들려온 것은 연인의 나지막한 웃음소리였다. 욕장의 높은 천장과 사방 벽에 부딪친 그것은 두 배의 매혹적인 울림으로 귓전에 되돌아왔다. 순간, 얼굴로 열기가 확 끼쳐든 것은 뜨거운 온천수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으리라.
“……좀처럼 사람이 들어오지 않는군. 이래서야 객실에 딸린 로텐부로나 진배없겠는걸? 언제 누가 들어올지 모르니 아슬아슬 스릴도 있겠고 말이지.”
웃음기 어린 중저음이었다.
“……아아, 우리 어여쁜 마누라 쪼는 소리가 다 들려요. 서방님이 당장 덮칠까 봐, 겁에 질린 귀여운 새가슴이 마냥 동당동당 뛰고 있네? 하지만 안심하세요, 마나님. 가족들이 특별히 마련해준 신혼여행인데 마냥 섹스만 바라는 변태에 밝힘증 서방님이라 한들 양심은 있지요. 제대로 착실하게 허니문 절차를 모두 밟을 생각이니까 염려 놓으시도록.”
점점 놀리는 어조로 변해가는 연인에 딱히 제 발이 저린 것도 아닌데 얼굴은 점점 더 붉어지기만 했다.
설마 기대한 건가? 그저 음란한 눈빛 한 번, 아름다운 웃음 한 자락만으로도 연인에게 팔랑팔랑 유혹당하곤 하는 자신이니, 무의식적으로 기대를 했다고 해도 그를 완강히 부인할 수만도 없을 터였다.
“……가만있어봐. 주물러줄게…….”
문득 마비가 있는 종아리에 닿아온 연인의 두 손에 소스라쳤다. 옆에 나란히 앉아 있던 연인은 어느새 인환의 맞은편으로 이동해 있었다. 반쯤 무릎을 꿇은 자세로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왼쪽 종아리를 가만가만 주무르기 시작한 연인이었다. 서로가 뜨거운 물에 가슴 언저리까지 잠겨 있어, 드러난 상체만으로는 흡사 연인이 인환의 앞에서 깊숙이 고개를 숙인 채 인사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물에 젖은 조각 같은 이목구비가 도무지 시선을 돌릴 수 없게끔 인환의 넋을 묶고 있었다.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까지 느껴지는 온천수의 효능에 연인의 힘과 부드러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마사지까지 더해지니 몸은 차츰 기분 좋은 나른함으로 늘어지고 있었다. 간간이 천장에서 떨어지는 차가운 물방울만 아니었다면, 비몽사몽 흐려지는 이성 탓에 마주한 연인의 아름다운 얼굴을 품에 끌어안았을 터였다. 불편한 왼쪽 다리의 종아리와 발까지 충분히 마사지를 끝낸 연인의 손길은 이번엔 오른쪽 다리로 옮겨지고 있었다. 연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교성에 가까운 기분 좋은 신음이 흘러나오는 통에 역시 제 발 저린 얼굴이 수시로 빨개지곤 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벌써 야한 음담패설로 놀렸을 연인인데 어째 조용히 마사지만 계속할 뿐이었다. 내리깐 눈꺼풀 아래로 주무르는 다리를 들여다보다가는 다시 위로 시선을 올려 자신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기도 하면서. 연인의 깊고 짙은 먹빛 동공은 여전히 진지한 열정과 애정만으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퐁, 퐁, 퐁당. 촤악. 졸졸졸졸.퐁, 퐁당…….수면에 떨어지는 천장의 물방울 소리와 연인이 자세를 바꾸거나 힘 있게 팔을 움직일 때마다 출렁이는 물소리, 그리고 계속 흘러넘치고 있는 온천수의 물줄기 소리 외엔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열심히 귀를 기울이면 눈 내리는 소리까지도 들릴 것 같았다. 더 이상 완벽할 수 없을 것 같은 충만한 침묵이었다. 다른 그 어느 때보다도 연인과 함께라는 지복의 기쁨이 넋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인환아.”
오른쪽 발가락 관절을 하나하나 주무르기 시작한 연인이 문득 침묵을 깼다. 마침 어깨에 떨어진 차가운 물방울에 흠칫 몸을 떨자 바닥을 향하고 있던 연인의 시선이 똑바로 인환의 눈을 직시해왔다. 잠시 전의 충만한 침묵처럼 깊고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는 눈길이었다.
“……만약에 말이다. 옛날에…… 말이다…….”
담담한 표정과는 달리 무언가 망설이는 것처럼 매혹의 중저음은 느릿하게 울리고 있었다.
“……14년 전에…… 너와 내가 처음 만나게 됐던 그 봄에 말이다…….”
정말로 말을 꺼내기 힘든 것 같았다. 고요한 시선이 다시 바닥을 향하며 눈꺼풀이 내려앉은 게 보였다. 물에 젖은 긴 속눈썹이 움푹 팬 아름다운 눈시울에 어둑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만약 그때 네가 그 남자도 만나게 되었다면 어땠을까?”
두근…….
“……그 남자를 먼저 만나게 됐다거나…… 아니면 나와 거의 동시에 만나게 됐더라면 말이다. 과연 어땠을 거 같나?”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나는 그때 네게 아무런 관심조차도 없는 가난한 남창에다 세상에 대한 복수심만 잔뜩인 소년 가장에 불과했고, 그 남자는 유복한 집안에서 사랑과 기대를 듬뿍 받고 성장한 매력적인 유학생이었다. 너와 서로 예술에 대한 공감대까지 형성돼 있었지. 마침내는 널 사랑하게까지 되었다. 네게 다정하게 구애를 하지. 그럼 넌 어떻게 했을까?”
“…….”
“……그래도 넌 나를 선택했을까? 나를 사랑하게 됐을까? 그 남자가 아닌?”
“…….”
아래로 내리깔린 연인의 시선은 좀처럼 인환에게 되돌아올 조짐이 없었다. 안타까웠다. 그 어느 때보다도 연인의 눈빛을 보고 싶은데, 상상 이상으로 마음 아파하는 건 아닐까 초조하기만 한데, 연인의 시선은 요지부동이었다.
“……그 남자가 빛이라면 나는 어둠이었다. 뭐, 지금도 거기서 그리 신세가 나아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하여튼 그런 나를 선택했을까, 너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마사지를 계속하던 양손가락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숨까지 멈춘 것 같았다. 미동도 않고 있는 연인이지만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연인의 긴장은 선명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자의식과 자부심이 강하고 더구나 남자에 대한 질투심 또한 유난한 연인이 품을 법한 의문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지극히 치졸하고 유치한 의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인환은 유치하거나 치졸하다 여길 수 없었다. 가볍게 웃어젖히며 연인을 놀릴 수도 없었다. 숨을 멈춘 것은 과연 연인일까, 자신일까? 손끝까지 떨릴 정도로 긴장한 것은 과연 자신일까 연인일까? 시선을 마주치기 버거울 정도로 대답이 만들어낼 상처가 두려운 쪽은 연인과 자신 중 과연 누구일까?
“……몰라…….”
힘들게 대답을 토해내며 연인의 정수리로 손을 뻗었다. 물에 젖은 부드러운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무의식적인 애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 단 한 마디의 간단한 대꾸 때문이었을까? 연인의 몸이 움찔 진저리를 치듯 흔들리는 게 보였다. 내리깔린 눈꺼풀 때문에 눈빛을 읽을 수 없는 것이 여전히 안타까웠다. 바짝 말라버린 입안이 뜨겁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널 사랑하게 됐는걸.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김 선생님이 아니라 너인걸.”
“…….”
“……김 선생님처럼 밝게 빛나지도 않고…… 엄청난 거짓말쟁이에 사기꾼에 용서하기 힘든 상처를 내게 입히기도 했지만…… 그렇지만 너무 사랑하는걸…….”
“…….”
“……만약이라는 말은 정말 그저 만약이라는 말일 뿐이지 현실로 일어난 일은 아니잖아…… 그야 모르지. 김 선생님과 널 동시에 만나게 됐고, 넌 내게 무관심했던 반면 김 선생님은 내게 열렬히 구애를 하는 일이 벌어졌다면 김 선생님을 사랑하게 됐을지도 모르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그게 더 자연스러우면서도 수월한 길이니까. 하지만 그래봤자 그것도 그저 가능성에 불과하지. 정말 김 선생님을 사랑하게 됐을지는 확신할 수 없을 거야. 다만…….”
“…….”
“……그냥 지금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널 먼저 만날 수 있었던 건 내가 김 선생님이 아니라 널 사랑할 운명이었기 때문인 거 같아.”
다시 한 번 연인의 몸이 움찔 전율했다. 자신의 오른쪽 발목과 발가락을 모아 쥐고 있던 연인의 손아귀 힘이 문득 강해진 것도 같았다.
“……처음부터 널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나고…… 널 만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게 되고…… 교생 실습을 모교로 나가고…… 그러다 드디어 만나게 된 거겠지. 만약 내가 김 선생님을 사랑할 운명을 선택했다면 한국에서 그림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나도 김 선생님처럼 파리로 유학이라도 떠났을 거야.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난다. 울 엄마가 나 재수할 때 파리나 뉴욕 아트스쿨로 유학 보내줄 생각도 하셨었거든. 근데 난 외국어엔 쥐약이라서…… 아니, 암튼 그림 외에 공부란 공부는 다 초주검이라서, 어떻게든 한국에서 개길 생각만 했었지.”
한동안 미동도 않고 있던 연인의 손길이 종아리 뒤쪽 비복근을 가만가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굳은 것 같던 어깨 근육의 긴장도 풀린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고개는 숙인 채였다.
“……다른 길은 없었을 거야. 너를 사랑하지 않는 나는 상상할 수도 없어, 위야…….”
왼쪽 발이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연인의 양쪽 손이 발목을 쥐고 들어 올린 때문이었다. 덕분에 앉아 있는 자세의 중심이 흔들렸고, 뒤로 등을 기대며 욕조 가장자리를 양손으로 움켜쥐어야 했다. 마침 천장에서 고드름처럼 차갑게 식은 물방울 몇 개가 얼굴과 어깨 위로 연달아 떨어져 내렸다. 무심코 진저리를 치며 눈을 감았다 뜬 순간, 연인의 입술이 발등으로 내려왔다.
두근…….
부드럽게 입술 끝을 부비는 가벼운 입맞춤은 곧 혀를 내밀어 발등과 발가락 하나하나를 핥는 짙은 애무로 변했다. 강렬한 자극임에도 성적인 도발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저 심장만 요란스럽게 두근거릴 따름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인환의 발에 입을 맞추고 있는 연인의 표정은 너무나 진지하고 고요했으니까. 흡사 신에게 헌신을 맹세하는 성직자의 오체투지를 연상시키는 경건함과 고요가 연인의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위…… 위야…….”
심하게 두근거리고 있는 심장 탓에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 나왔다. 연인의 머리카락 속에서 길을 잃고 있던 손가락을 새삼 움직여보았다. 심장의 울림을 그대로 따라 하듯 미세하게 떨고 있는 손가락이었다. 머리카락을 헤쳐도 보고, 두피도 어루만졌다. 잘 빚어진 조각 같은 두개골격도 가만가만 더듬어보았다. 그래도 발가락들을 하나하나 입안에 넣고 빨아 당기는 연인의 경건한 키스는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위위…….”
이유도 모른 채 애절하게 터져 나온 부름을 되풀이해 던져보았다. 막 새끼발가락을 입안에서 풀어준 연인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수면 위로 시선이 마주쳤다. 너무나 고요해서 그 어떤 속내도 읽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저 다만 천천히 다가오는 연인의 얼굴을 통해 연인이 키스를 하리라는 것만 알아챘을 따름이었다. 인환의 가랑이 사이로 상체를 기울인 연인이 살짝 고개를 틀어 입술을 겹쳐왔다. 온천수의 알싸한 냄새가 고스란히 밴 연인의 체취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차례로 빨리다가 이윽고 안으로 민감하고 섬세한 침입이 시작되었다. 두 개의 뜨거운 혀가 포옹하듯 살며시 겹쳐졌다. 까끌거리는 감촉이 혀 뒤쪽을 부드럽게 문지르기 시작하자 전신의 힘이 빠지며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뒤로 젖혀진 상반신이 점점 더 뒤로 넘어갔다. 허리가 활처럼 휘려는 찰나, 연인의 양팔이 뻗어와 단단하게 감겨들었다. 구명줄을 잡듯 양팔로 연인의 목을 끌어당겼다. 생명줄까지 완전히 빨아 당기는 것만 같은 뜨겁고 격렬한 키스였다. 완전한 숭배와 헌신의 오체투지였다. 거룩한 합일이었다.
밖에서 아득하게 인기척이 들린 것 같았다. 연인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고 참았던 숨길이 겨우 트였다. 심하게 헐떡이며 늘어지자, 연인이 품 안에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파묻게 해주었다. 등과 견갑골 주변을 살살 어루만지는 손바닥의 감촉은 마냥 상냥하고 부드러웠다. 흐릿하게 자각했던 인기척이 점차 확실해지며 미닫이문 바깥 탈의실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두런거리는 일본어 소리도 났다. 아마도 곧 탕 안으로 미지의 이방인들이 들이닥칠 터였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곤 고개를 가로로 흔들었다. 연인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 고개를 들자 연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시선을 맞춰왔다. 자신의 불안감을 고스란히 자각한 듯, 유연한 몸짓으로 포옹을 풀어준 연인이 자신으로부터 1미터쯤 떨어진 곳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영혼과 정신과 몸이 모두 심하게 흔들린 자신과 달리 연인의 표정은 여전히 고요하기만 했다. 시선마저 맞은편 정원에 주고 있어, 흡사 서로를 모르는 타인 같았다. 잠시 전의 열기가 꿈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물론 그것이 자신의 불안감을 배려한 연인의 천연덕스러움이라는 걸 이해하면서도, 온몸 가득 충만하게 채워졌던 연인의 온기가 떨어지고 보니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서운함마저 느껴졌다.
탈의실과 이어진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70대쯤 될 노인과 그 아들쯤의 연배로 보이는 장년의 사내, 그리고 열두서너 살쯤 돼 보이는 어린아이 하나가 나란히 탕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언뜻 인환과 시선이 마주치자 예의 바르게 목례를 하는 일본인 일가족이었다. 인환도 마주 목례를 했고, 허리에 타월을 두른 그들은 한쪽 샤워부스에 옹기종기 모여 앉더니 저들끼리 두런두런 얘기를 하며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욕조 안으로 들어설 무렵쯤엔 다행히 흥분했던 몸은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은 여전해서 인환은 서둘러 욕조 밖으로 빠져나왔다. 연인 또한 1∼2분쯤의 간격을 두고 자신을 따라 나왔고, 간단히 비누칠을 하며 샤워를 시작한 자신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연인의 남다른 수려한 용모를 그제야 알아본 듯, 자신들과 바통 터치를 하다시피 욕조 안에 들어앉은 일본인 3대 일가족의 시선이 연인을 수시로 힐끗거리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온천수 밖으로 나오니 역시 엄청난 찬 공기가 살을 후비듯 파고들었지만, 워낙 더운 기가 몸속 깊이 침투해 있던 터라 처음보단 견딜 만했다. 그래도 서둘러 샤워를 끝내고 탈의실 밖으로 나왔다. 몸의 물기를 닦고 막 유카타를 걸쳐 입고 있는데 탈의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인이었다. 허리에 타월만을 두른 청동상 같은 늠름한 몸을 한 연인이 다른 타월로 머리를 털며 시선을 보내왔다. 괜찮아? 눈빛이 묻고 있었다. 흥분했던 자신을 알고 있는 연인이니 뭐가 괜찮으냐는 의미인지는 이해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곤 바닥으로 시선을 피했다. 흐릿하게 부끄러움이 느껴진 때문이었다.
유카타 깃을 겹치고 허리띠를 묶으려는데 가까이 다가선 연인이 허리띠를 빼앗듯 가져갔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적당히 길이까지 조절해선 순식간에 매듭을 지어주는 연인이었다. 이 정도는 혼자 할 수도 있다고, 짐짓 반항을 해보려다 말았다. 또 누가 욕탕 안으로 들어오면 어떻게 하냐고. 그러나 실은 몹시도 달콤하다는 것, 흡사 중세의 몸종보다도 더 세심하게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극진히 돌보려는 연인에게 완전히 취해 있다는 것…… 그것이 자신의 솔직한 속마음이었다. 연인은 젖은 인환의 머리까지 드라이어로 간단히 말려준 다음에야 자기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아, 이번엔 젖은 머리카락을 이마에 가닥가닥 늘어뜨린 섹시한 사무라이가 돼 있었다. 물가에서 한바탕 격전을 치르기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가자.”
인환과 똑같이 짙푸른 유카타 위에 오비를 걸친 사무라이는 당연한 것처럼 인환의 손을 잡아끌었다. 미로 같은 료칸 복도를 더듬어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까지 그렇게 손을 마주 잡은 채 나란히 걸었다. 서울에서 이곳 오타루시 료칸으로 오는 여정 내내 그랬던 것처럼. 3층 자신들의 객실로 올라가는 동안, 종업원 기모노를 입은 나카이 상 한 명과 객실 손님들로 보이는 유카타 차림의 남자 둘, 그리고 역시 유카타 차림의 여자 세 명과 마주쳤다. 처음엔 하나같이 무심했던 그들의 표정 없는 얼굴은 두 사람의 마주 잡은 손에 한 번 놀라고 곧이어 연인의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두 번을 놀랐다. 아아, 아무래도 4박5일 내내 들리지 않을 뒷담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모양이었다. 여정 중 부딪쳤던, 그저 한 번 스쳐 지나가고 말 사람들 앞에서야 인환도 대범해질 수 있었지만, 4박5일을 동고동락할 사람들이라면 그래도 사정이 좀 달라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개운치 않아하면서도, 연인의 손을 뿌리칠 생각 따윈 전혀 하지 않은 자신이었다. 그랬다. 실은 몹시도 달콤하다는 것, 그저 자신밖에 안중에 없는 열렬한 연인이라는 것, 뭇 타인들의 시선 따윈 더 이상 의미를 두지 않을 만큼 연인이 자신에게 흠뻑 취해 있다는 것…… 달콤하고 달콤한 그 현실을 매 순간 실감하고 싶은 것이 자신의 솔직한 속마음이었다. 이 아름다운 남자가 자신의 연인이라는 것을, 자신의 반려라는 것을, 가능하다면 전 세계 방방곡곡에다 광고라도 하고팠다, 자신은. 누군가 그런 자신을 속물근성이라 비난한대도 할 수 없었다.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얻은 남자였다. 목숨까지 걸었던 사랑이었다. 죽었다가 살아난 자신이었다. 세상에 자신처럼 목숨을 걸고 사랑을 얻어낸 자가 있다면, 이런 자신을 감히 비난하지 못하리라. 요즘도 자주 꿈을 꾼다. 자신의 죽음을, 절망을, 지옥을,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는 과거의 상처를 꿈꾸고 있다. 요즘도 수시로 현재를 믿을 수 없어하는 자신이다. 실은 꿈속이 실재고 현재가 꿈이라면 어떻게 하나, 수시로 질겁하곤 하는 자신이다. 그때마다 지옥 같은 옛 고통과 상처가 생생한 현실로 엄습한다. 연인은 여전히 아득히 멀리 있고, 자신은 홀로 먼 길을 떠나는, 시리고 차가운 지옥이 까마득히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아직은 괜찮다. 아직은 더 속물로 지내야만 한다. 매 순간 연인의 애정을 확인해야 하고, 매순간 연인의 헌신을 밖에다 자랑해야만 한다. 세상에, 운명에, 조물주에……. 이 남자가 확실히 자신의 연인이라고, 자신의 연인이 맞으니 감히 이상한 현실 따윈 창조해내지 말라고. 방방곡곡, 너나할 것 없이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광고라도 써 붙여야만 한다.
“……차 마실래?”
방 안에 들어서자 연인이 티 포트에 녹차 잎을 한 스푼 떠 넣으며 물어온다. 나카이 상 아가씨가 끓여주려다 혼비백산 도망친 그 티 포트였다. 흐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연인이 포트에 전원을 넣었다. 저녁 6시 30분을 조금 더 넘긴 시각. 창 밖은 완전한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공중탕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풍성하게 날리던 눈발은 완전히 그쳐 있었다. 연인은 나카이 상에게서 들었다며, 내일은 눈이 그칠 거라고 얘기했다. 여기저기 관광을 하는 데도 무리는 없을 거라고.
오색찬란한 불빛들이 빛나고 있는 항구와 오타루시가 고스란히 내다보이는 창가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연인과 차를 마셨다. 전망을 구경하다가 키스를 하기도 하고, 일 관계로 수시로 일본에 들르곤 했다던 연인의 몇 해 전 얘기도 들었다. 아, 그래서 일본어가 그렇게 유창하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그때 경험했던 일본식 접대 문화나 요정 얘기, 어느 미인 게이샤랑 밤을 보냈던 얘기도 들었다. 거절했는데도 자꾸만 달라붙으려 해서 화를 내고 뛰쳐나왔다는 얘기도. 그렇게, 접대해준 거래처 중역의 화를 돋우는 바람에 하마터면 큰 계약을 날릴 뻔했다는 얘기도. 그 당시엔 인환을 찾느라 혈안이 돼 있었기 때문에 아예 흥분조차 되지 않았었다는 충격적인 고백도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와 이혼하기 몇 해 전부터 성욕을 거의 잃었었노라고. 인환과 재회하고 나서야 몇 년 만에 욕망이 되살아났다는 고백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이 고이고 말았다. 재회한 첫날, 그리도 난폭하게 인환을 강간한 배후에는 오랫동안 찾아 헤매게 만들어버린 미움과 야속함, 그리고 절대 다신 놓치면 안 된다는 절박감 이외에도 통제가 불가능할 지경으로 폭주한 욕망 탓도 크다고. 발기 부전 상태는 마누라뿐만이 아니었다는 연인의 마무리 너스레에 그저 눈물만 주르륵……. 안타깝게 웃으며 혀와 입술로 눈물을 닦아주는 연인이었다.
“……이대로 함께 사랑만 하다가 늙어가자, 인환아…….”
연인이 핥아주던 뺨에 그대로 입술을 붙인 채 중얼거렸다. 풋풋한 녹차 향이 밴 입김이 달콤하게 콧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10년을 허무하게 낭비해버렸지만 우리에겐 그 몇 배는 더 긴 시간이 남아 있을 테니까…… 더 이상 안타까워하지도 말고, 아파하지도 말고…… 지금처럼만 서로 사랑만 하다가 죽자…… 한 날 한시에 죽어버리자, 인환아…….”
“…….”
“아니, 네가 먼저 죽으면 나는 그냥 따라가면 되니까 네가 먼저 죽는 게 좋겠다. 내 강아지는 여리고 겁 많은 새가슴이니까 힘들고 모진 짓은 차마 못 할 거야. 그런 독한 짓은 나나 잘 어울리지. 그러니까 우리 강아지가 나보다 먼저 죽어야 해. 물론 운 좋게 한 날 한시에 심장이 멎어버린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긴 하겠지만…….”
“…….”
“……그래서 만약 내세라는 게 있다면 다시 한 날 한시에 이 세상에 태어나는 거야. 네가 어디에서 태어나더라도 나는 금세 널 알아볼 테니까…… 그래, 그때야말로 내가 먼저 널 알아볼 테니까…… 14년 전에 내가 널 아프게 한 것처럼 날 아프게 해도 상관없으니까…… 그래도 난 널 끝끝내 사랑할 테니까…… 그렇게 서로 다시 만나 사랑을 하자, 인환아…….”
“…….”
가슴이 사무치도록 감동적인 고백이었지만 어쩐지 긍정의 대답은 할 수가 없었다. 내세라는 관념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남은 긴 시간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그저 아득하기만 했다. 고통의 시간이 워낙 길었던 까닭일 터이다. 아직도 이 행복이 좀처럼 현실인지 믿을 수가 없는데, 남은 긴 인생이라니, 혹은 환생이라니, 도무지 실감을 할 수가 없었다. 남아 있는 더 긴 시간은, 혹은 ‘영원’은 더 이상 아프지 않을까? 만약 또 지난 십여 년처럼 아프리라고 가정한다면 자신은 과연 다시 태어나 연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 답은 ‘모르겠다’였다. 현재의 인환으로선 그저 현재의 행복과 기쁨을 실감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므로.
대꾸 없이 그저 한 방울의 눈물만 떨어뜨리자, 연인의 위로하듯 다정하고 부드러운 키스가 시작되었다. 입술을 빨고, 입안을 훑고, 얼굴 곳곳을 더듬고, 목덜미는 물론 유카타 틈으로 슬쩍 비치는 쇄골과 어깨와 가슴팍을 애무했다. 자신도 연인의 애정에 질세라 연인과 똑같이 연인의 몸 곳곳을 애무했다. 온천수 효과인지, 확실히 더 부드럽고 매끄러워진 서로의 피부 감촉에 황홀해하면서. 점점 더 애무의 정도가 짙어지면서 흥분하기 시작한 서로의 가랑이 사이를 서로의 손안에 품고서 거의 섹스에 가까울 페팅을 하기도 했다. 서로의 귀두 끝에서 뿜어 나온 애액으로 금세 서로의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들었고, 그러면 연인은 젖어든 연인의 손은 물론, 인환의 손까지 입가에 가져가 서로가 토해낸 사랑의 흔적을 말끔히 빨아 삼키곤 했다. 인환 또한 그런 연인의 손이며 입술에 거듭거듭 짙은 입맞춤을 퍼붓곤 했다. 손이며 입술에서 풋풋한 서로의 정액 냄새가 진동하는데도 조금도 더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더럽기는커녕 서로의 몸에서 나온 그 어떤 것도 그저 안타깝고 그립고 소중하기만 하다고 여겼다. 이상한 건, 서로 한계까지 발기했으면서도 연인이 삽입 섹스까진 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저 서로의 몸 곳곳을 애무하고, 키스하고, 아슬아슬하게 참을 수 있을 딱 그만큼의 짙은 페팅만을 거듭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정식으로 허니문 첫날밤을 보내기 위한 연인 나름대로의 경건한 의식이라는 것을, 인환도 그날 밤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긴 했지만.
테이블 위에서 시작된 키스와 애무는 어느새 다다미 바닥에 서로 몸을 겹친 자세로 이어지고 있었다. 얌전하게 여며졌던 서로의 유카타 자락은 끈이 풀린 채 날개처럼 펼쳐져 있었고, 유일한 속옷인 팬티마저 벗어버린 지 오래였다. 알몸인 서로의 앞쪽 맨살을 꼭 붙인 채 끊임없이 서로를 어루만지고 비비고 키스했다. 마지막 경계로써 단지 걸치고 있을 뿐인 서로의 유카타가 엉망으로 구겨지고 있었지만 그를 염려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서로의 뜨거운 체온과, 촉촉하고 매끄러운 피부 감촉과, 알싸한 체취와 페로몬과 갖가지 체액의 냄새에 취해 무아지경으로 서로의 육체만 탐할 뿐이었다.
문득 출입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헐떡이며 서로의 성기를 마주 쥔 채 입술을 빨고 있던 둘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소스라쳤다. 재차 노크 소리가 났고 연인이 일본어로 잠깐 기다리라는 대꾸를 던졌다. 그다음은 전광석화였다. 연인은 채 흥분을 삭이지 못해 갈팡질팡하던 인환을 욕실로 밀어 넣었고, 바닥에 널려 있던 유카타 허리끈과 팬티를 치웠으며, 흩어졌던 연인의 옷매무새도 감쪽같이 정리했다. 연인이 다시 출입문을 향해 일본어로 들어오라 외쳤고, 곧이어 다다미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욕실 문틈으로 보니 갖가지 음식이 차려진 커다란 쟁반을 든 여자 두 명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기억에 있는 오카미와 나카이 상이었다. 손목시계를 살피니 정확히 7시 반. 저녁 식사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욕실에서 인환이 숨을 돌리는 사이, 방 한가운데에 있던 좌식 테이블 위에 흡사 그림처럼 아름다운 상차림이 만들어졌다. 역시 무릎을 꿇은 자세로 연인에게 이것저것 설명을 하는 중년의 오카미에게 연인이 무언가 간단하게 대꾸를 주었고, 그제야 여자 둘이 서둘러 방을 나갔다. 나중에 들어보니, 원래는 식사 내내 옆에 붙어 앉아 식사 시중을 들어주는 게 그들의 서비스이자 예의라고 했다. 일본 전통 코스 요리인 가이세키 요리의 특성상 시중이 불가피하지만, 역시 두 사람만 있게 해주는 것이 더 고마운 서비스란 말로 그들을 물리쳤다고 했다.
여자들이 나가고 나서도 한동안 욕실 안에서 숨을 고른 후에 밖으로 나갔다. 끈이 없어 손으로 간신히 유카타 자락을 여미고 있는 자신을 지켜보던 연인이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치워둔 자신의 유카타 끈을 찾아 묶어주었다. 옷깃이 여며지며 알몸이 살짝 드러나자 연인의 시선이 곧바로 자신의 치부를 핥듯이 일별하는 게 느껴졌다. 찰나에 불과했건만, 시선의 열기는 어마어마해서 그대로 또 살짝 발기하고 만 인환이었다. 민망한 반응까지 샅샅이 살핀 연인이 모르는 척 담담한 얼굴로 옷깃을 여미곤 띠를 둘러주었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옷매무새를 고쳐주는 연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부끄러운 짓은 서로 똑같이 저질렀건만, 어째서 또 자신만 얼굴이 붉어져야 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희미한 수치감에 어쩔 줄 모르는 인환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연인은 그런 인환을 식탁 앞에 앉혀주는 에스코트까지 마치고 나서 자신도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민망한 마음에 연인을 외면하는 대신 진수성찬이 차려진 호사스러운 식탁 위로 시선을 고정했다. 장방형의 커다란 상 위에 펼쳐놓은 가이세키 요리의 음식 차림은 가히 예술이라 할 만큼 아기자기한 그릇과 음식의 조화가 현란하기 그지없었다. 동그란 대바구니 안에는 유리잔에 담은 성게 알, 대나무 잎으로 싼 반찬, 카스텔라처럼 보송보송하게 구운 계란, 그리고 식전술로 따끈하게 데운 정종까지 한 잔 따라져 있었다. 미처 허기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건만, 막상 화려한 식탁을 보니 배 속이 꾸르륵거리며 신호를 보내왔다. 연인은 그런 인환을 웃음을 머금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내내 건너다보면서 젓가락으로 연신 음식을 집어 인환의 입가에 대주었다. 좀 전의 민망함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라 거절하려 했지만, 그러자면 또 거절의 말을 해야 했는데 어쩐지 그게 더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없이, 어미 새가 물어다주는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처럼 마지못해 연인의 시중을 받아들였다.
예상대로 음식은 모두 기가 막히게 맛이 있었다. 워낙에 일식 요리를 좋아하는 터라, 정갈한 식재료에 환상의 솜씨까지 곁들여진 정통 일식 요리에 안 빠져들 수가 없었다. 전채 요리를 거의 다 먹어치웠을 무렵, 다시 오카미와 나카이 상이 본 요리 쟁반을 들고 객실로 들어섰다. 본 요리는 도자기 그릇에 담긴 싱싱한 생선회와 털게, 대게 등 게찜을 필두로 홋카이도 근해의 생선은 모두 등장한 듯 생선요리의 산해진미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산 전복 한 마리를 직접 화로에 굽는 전복 버터구이였는데, 생선보다는 고기 요리를 더 좋아하는 연인도 제법 맛있게 먹어치우는 모습을 보여주어 인환을 안심시켰다. 본 요리 이후에도 두 명의 종업원은 세 번이나 더 주방과 객실을 오가며 마지막 디저트 코스까지 완벽한 식사 시중을 들어주었다. 전복 버터구이를 끝으로 이미 빵빵하게 배가 부른 상태였건만, 연인은 자신에게 떠먹여주는 일에 재미가 들린 모양인지, 디저트로 나온 와인 셔벗까지 한 스푼 떠먹여주고 나서야 남은 음식들을 제대로 비워내기 시작했다. 이상한 오기가 나서 인환도 그냥 구경을 하는 대신 연인에게 떠먹여주는 것으로 작은 복수를 감행했다.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몇 번은 얌전히 받아먹어주던 연인도, 열댓 번째쯤 젓가락을 가져갔을 때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악랄한 협박을 해왔다. 더 이상 연인을 흉내 내면 종업원들이 상을 치우러 들어올 때를 맞춰 자신을 안을 거라고! 절대 빈말이 아니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심장이 철렁해선 젓가락을 내던질 수밖에 없었다. 나지막이 웃음을 터트리며 털게 찜을 발라 먹고 있는 연인을 노려보았지만, 막상 시선이 마주치니 또 얼굴만 빨개졌다. 민망한 닭 짓은 서로 똑같이 저질렀건만, 어째서 또 자신만 얼굴이 붉어져야 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거의 한 시간 반이 넘는 긴 저녁 식사 시간이 겨우 끝이 났다. 엄청난 식욕으로 디저트까지 말끔히 비워낸 연인은 외출하게 옷을 갈아입으라는 언질을 주었다. 가볍게 시내나 산보하자며 덧붙이는 연인의 말에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연인의 배려가 반갑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시계를 살피니 어느새 9시 10분. 관광 비슷한 것을 하기엔 이미 늦은 시각이었지만, 버거울 정도로 부른 배도 그랬고,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불빛들로 저녁 내내 자신을 유혹하던 창 밖의 그림 같은 야경을 무시해버리기 싫었다.
두툼한 거위 털 파카와 솜을 넣어 누빈 스키팬츠, 그리고 털목도리와 털모자에 털장갑까지, 친친 감은 차림새로 중무장을 하곤 연인과 함께 오타루시 중심가로 나섰다. 대부분의 상점들이나 크고 작은 관광용 박물관들은 거의 문을 닫은 상태였지만 간혹 열린 아기자기한 상점들이나 한적하면서도 이국적이고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 자체만으로도 구경하는 보람이 있었다. 특히 매혹적이었던 것은 항구로, 거의 1킬로미터에 달하는 오타루 운하의 아름다움은 상상 이상이었다. 운하를 따라 길게 지어진 옛 석조 창고들을 개조해 오픈했다는 갖가지 상점들과 레스토랑들의 불빛들이며, 그 지붕마다 주렁주렁 열린 길쭉한 고드름과 그에 비친 뽀얀 가로등 불빛들은 흡사 동화 속 풍경처럼 아기자기하면서도 환상적이었다. 채 덜 치워진 보도 위를 뽀득뽀득거리는 서로의 눈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정신없이 거리를 구경했다. 운하를 따라 관광객들을 겨냥해 군데군데 벌여놓은 자그마한 좌판식 노점상들도 구경하고, 인환과 연인처럼 눈 덮인 오타루시를 구경 나온 일본인 관광객들도 구경했다. 좌판엔 오타루 명물이라는 오르골들도 보였고, 운하를 그린 자그마한 액자들과 양초들도 보였다. 2월엔 인근 도시 삿포로와 마찬가지로 눈빛거리축제라는 축제가 열리는데, 그때 도심 곳곳에 세워지는 설상들과 제등 안엔 이 수백 개의 양초들이 밝혀진다고 했다.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연인의 눈치를 보며 액자 두 개와 양초 몇 개를 샀음은 물론이었다(오르골은 한눈에 보기에도 조잡스러워 보여서 포기했다. 낮에 오면 전문 오르골 박물관이나 매장에서 더 근사한 것을 볼 수 있다며 연인이 잔소리에 가까운 설명을 해준 덕분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구경하는 사이 점점 더 발이 시려서 문득 시계를 살피니 어느새 10시 30분이 넘어 있었다. 한 시간 반이 넘게 시내를 누비고 돌아다닌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비가 있는 다리까지 꽤 뻐근한 아픔이 느껴지고 있었다. 일단 자각을 하고 보니 순식간에 짙은 피로감과 추위를 느꼈다. 설핏 진저리를 치며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자 디지털 카메라에 시종 인환의 모습만 부지런히 담고 있던 연인이 카메라를 치우고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캐멀색의 무스탕 코트에 블랙 진, 멋들어지게 목을 감고 있는 연한 갈색의 캐시미어 머플러, 그리고 오늘의 여정 내내 쓰고 다니던 짙은 갈색의 스웨이드 헌팅캡을 눌러쓴 연인은 그 자체로 최고의 모델이었다. 마치 100년 전으로 시대가 점프한 듯 고색창연하면서도 소박한 옛 석조 건물들을 배경으로 한 지금의 연인을 찍는다면, 그 이상 멋들어질 윈터 컬렉션 사진도 달리 없을 터였다. 디지털 카메라를 독점하고선 인환만 찍어대며 도무지 넘겨줄 생각을 않으니 그저 안타까울밖에.
“……왜 그래? 어디 불편한가?”
단숨에 근심이 깃든 눈동자가 살피듯 인환의 전신을 훑고 있었다. 차마 마비가 있는 다리가 아프다곤 할 수가 없어, 그냥 피곤하니 숙소로 돌아가자는 말만 전했다. 문답무용. 표현하는 이상을 알아들은 연인이 대뜸 등을 보이며 무릎을 굽히는 게 보였다.
“업혀.”
연인의 단호한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주변부터 살핀 인환이었다. 꽤 많은 수의 관광객들이 운하 주변에 가득 포진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시선을 끄는 연인인지라, 손잡고 걷는 내내 자신들을(물론 인환은 그저 덤에 불과했겠지만) 따라다니고 있던 시선들을 느끼고 있는 터였다. 어느 호기심에 찬 여자 둘은 대담하게 말까지 붙인 적도 있지 않았는가(물론 그녀들은 한국인이었다). 택시 정류장까진 충분히 걸을 수 있다고 했지만 연인은 막무가내였다.
“업혀, 얼른. 안 그러면 여기서 키스해버린다?”
하! 정말 야비한 협박이 버릇이 된 모양이었다. 무서운 것은, 그게 단지 협박만이 아니라는 걸 연인은 물론 자신조차 절절하게 자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지못해 양손에 쇼핑한 물건을 들고 연인의 등에 업혔다. 자신의 양쪽 허벅지를 두 팔로 단단하게 감아들인 연인이 가뿐하게 자신을 들쳐 업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택시 정류장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였지만, 그 10분은 인환에게 있어 한 시간 이상의 상대적인 시간으로 고무줄처럼 늘어나 있었다. 무수한 시선의 화살을 견디기 위해 연인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는데, 실은 그게 더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말았다는 사실은 한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자신은 꿈에도 몰랐지만, 자신을 업고 걷는 연인을 간간이 도촬하는 여자 관광객들도 있었다고 한다!). 연인에게서 끔찍이 배려받고 사랑받는다는 달콤한 자각과 자부심,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게이로서의 겁 많은 자격지심이 동시에 넋을 흔들던 10분이었다. 뜬금없이 솟구친 하반신의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 기를 써야만 했던 아찔한 10분이기도 했다. 뺨에 따스하게 전해지는 연인의 체온과 체취, 그리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곳곳에서 물결치는 단단한 근육의 감촉이 그 원흉이었다. 두꺼운 옷들이 사이에 가로막고 있었기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살짝 발기해버린 창피한 몸을 연인에게 고스란히 들켰을 터였다.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와선 곧바로 옷을 벗고 객실에 딸린 로텐부로 온천수에 뛰어들었다. 40도가 훨씬 넘는 뜨거운 물에 차갑게 식은 피부가 닿자, 간질거리다 못해 저릿한 아픔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그만큼 빠르게 몸이 달아오르며 다리의 뻐근한 통증과 전신의 피로감이 누그러지는 것도 함께 느껴졌다. 곧바로 욕조 안으로 따라 들어온 연인이 다짜고짜 자신의 온몸을 주물러주기 시작했으니, 그 효과는 더더욱 배가됐다고 해도 무방할 터였다.
그렇게 20분쯤을 온천수 속에 잠겨 있었더니 이내 눈꺼풀이 내려앉으며 졸음이 쏟아졌다. 비몽사몽 고개를 꾸벅거리며 졸고 있는데, 문득 연인의 팔이 겨드랑이 틈으로 파고들어왔다. 그대로 공주님 안기로 안겨 물기가 닦이고, 커다란 타월에 둘둘 말린 채 이부자리 속으로 옮겨졌다. 방을 나서기 직전까지 음식상이 차려져 있던 좌탁 대신 그 자리엔 정갈한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다. 미안할 지경으로 친절한 나카이 상 아가씨의 솜씨이리라. 푹신한 보료에 두툼하면서도 새털처럼 가벼운 거위털 이불이 안 그래도 비몽사몽이던 정신을 말끔히 앗아갔다. 자신의 몸을 품에 꼭 껴안은 채, 머리와 등줄기를 끊임없이 쓰다듬고 있던 연인의 따스한 손길만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조금만 재울 거니까, 내 강아지……. 장난스러우면서도 어딘가 안타까운 중얼거림도 설핏 들린 것 같았다.
아득히 멀어진 꿈의 끝에 간질거리는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온몸을 가볍게 압박하고 있는 뜨거운 체온도 느껴졌다. 자꾸만 묵직하게 가라앉으려는 의식을 억지로 일깨우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검푸른 어둠이 내려앉은 실내가 흐릿하게 보였다. 그보다 더 어두울 그림자는 현재 인환의 몸 위로 묵직하게 겹쳐진 거구의 몸뚱이일 터이다. 턱 언저리로 이동해 핥고 있던 뜨겁고 촉촉한 감촉이 도로 입술 위로 돌아왔다. 쪽, 쪽, 추웁……. 달콤하면서도 선정적인 접촉음이 그나마 남아 있던 수면기를 말끔히 거둬갔다. 찌걱, 찌걱, 찌걱……. 사타구니 사이에 겹쳐진 딱딱한 흉기가 은밀하게 비벼지는 소리는 그보다 더할 전율스러운 자극이었다. 그제야 뿌듯하게 저려오는 하반신의 욕망을 자각한 인환이었다. 위에서 도발하고 있는 검은 그림자 못지않게 자신 또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완전히 발기해 있었다. 물론, 그렇게 만든 은밀한 도둑 또한 지금 자신을 위에서 덮치고 있는 검은 그림자일 터였다. 아늑하고 따스한 이불 속, 알몸에 닿아오는 가슬가슬한 시트의 감촉이 느껴졌다. 목 언저리까지 이불을 푹 뒤집어쓴 채로 연인이 몸을 겹치고 있어, 약간 서늘하게 느껴지는 실내의 공기가 무색하게 서로의 피부엔 조금씩 땀이 배고 있었다.
어렴풋이 빛나는 벽시계의 야광 빛을 보니 새벽 2시쯤인 것 같았다. 얼마나 오래 잠들었었던 걸까? 한 시간 반 남짓? 아니면 두 시간? 시체처럼 자신을 침몰시켰던 극심한 피로감은 거의 사라진 것 같았지만, 솔직히 더 자고픈 욕구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미 욕망에 침몰해버린 감각만 아니라면, 연인에게 애원을 해서라도 도로 잠이 들었을 것이다.
“……미안…….”
막 농염한 키스를 끝낸 입술에서 허스키하게 가라앉은 중저음이 흘러나왔다.
“……좀 더 재워야 할 것 같긴 한데…… 나도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서…….”
번쩍거리는 은총의 빛이 어둠 가운데 유성처럼 흘렀다. 그건 바로 코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연인의 눈동자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면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어둠 속이라 더욱 빛을 발하는 연인의 사랑이었다. 사랑의 ‘핵’이 그 속에 있었다. 최면에 걸린 것처럼 멍하니 연인의 ‘핵’을 응시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양팔을 뻗어 다정하게 연인의 목을 끌어안았다. 입가에 닿아오는 잘생긴 귓불을 입술 사이에 물고 상냥한 키스를 던졌다. 전적인 수용의 언어였다.
한쪽 다리가 들리며 연인의 어깨 위에 걸쳐졌다. 항문 언저리로 질척한 느낌이 드는 것을 보니 어느새 윤활제까지 발라놓은 모양이었다. 연인이 한 손을 내려 귀두 끝을 입구에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항문 언저리와 회음부를 젖은 귀두 끝이 몇 번 비벼대자 순식간에 기대감으로 달뜨는 창녀의 욕망이 엄습했다. 주름 사이를 슬쩍슬쩍 헤치고 들어올 듯하다간, 도로 빠져나가며 핏줄이 도드라진 두꺼운 기둥으로 은근하게 비벼대기도 했다. 젖은 귀두 끝이 자신의 발기한 성기와 음낭을 툭툭 건드리며 찌르기도 했다. 지독히 음탕하면서도 섬세한 움직임이었다. 헐떡이듯 가쁘게 숨길을 토해내는 입술 위로 쪽 하고 애정 어린 립 키스가 떨어졌다. 10센티쯤 도로 물러난 연인의 시선이 어둠 속에서 물끄러미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별빛이 들어앉은 강렬한 시선에 압도된 채 숨을 멈춘 사이, 귀두 끝이 천천히 입구 주름을 헤치며 뚫고 들어왔다.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기 힘든 삽입 직후의 버거운 충족감에 몸을 떨며 내벽을 한껏 수축시켰다. 자신만큼 기쁘면서도 괴로운지, 연인의 그림자도 흠칫흠칫 몸을 떠는 게 보였다. 천천히 허리를 밀며 연인이 뿌리 끝까지 삽입하자 너무나 좋은 묵직한 두께와 감촉이 자신의 내부와 요철처럼 맞물렸다.
일단 삽입을 마친 연인은 가만히 몸을 겹친 채 거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간혹 참지 못하고 부르르 진저리를 치는 것을 보니, 자신만큼 결합의 쾌락에 겨워하는 것 같았다. 인환의 머리카락을 빗질하듯 가만가만 쓸어 뒤로 넘겨주기도 하고, 이마와 입술에 번갈아 깃털 같은 립 키스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이제 움직일까……?”
문득 연인이 밀어처럼 다정하게 속삭여왔다.
“……응…….”
쪽. 다시 떨어진 립 키스. 이번엔 떨어지기 직전 입술 표면을 살짝 문지르기까지 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양손이 목에 둘린 인환의 양팔을 풀더니 보료 위에 쫙 펼치곤 깍지를 껴왔다. 연인이 깊은 결합을 하기 직전이면 자주 취하곤 하는 섹스 모션 가운데 하나였다. 전적으로 수용하듯 마주 겹쳐진 손가락들을 힘주어 꽉 움켜잡았다. 빳빳하고 가슬가슬하게 풀을 먹인 보료와 이불의 시트가 두 사람분의 체중을 받아 부스럭거리는 기분 좋은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안 재울지도 몰라, 인환아…….”
“……어…… 응……?”
“……많이 참아서…… 일단 시작하면 오늘 밤 내내 안 재울지도 모른다고…….”
“……응…….”
난 또 뭐라고……. 흐릿하게 웃으며 다시 다가든 연인의 입술에 마주 키스를 보냈다. 잠들지 말라면 안 자면 되는 거지, 뭘……. 연인의 아랫입술을 오물오물 빠는 키스에다 상냥한 대꾸를 실어주었다. 초야(初夜)잖아……. 소리 없는 밀어도 보탰다. ……온 가족의 축복으로 신혼여행을 왔으니까…… 우리들의 진짜 첫날밤인 거잖아……. 재차 더했다. ……그러니까 뭐든…… 뭐든지 다……. 흐윽……!
뒤로 슬쩍 빠져나가는가 싶던 두껍고 긴 페니스가 도로 힘차게 내벽을 찔러들었다. 전립선을 비끼듯 긁으며 침투한 흉기에 손가락이 와락 조여들며 교성이 흘렀다. 대답처럼 마주 쥐어오는 연인의 손가락을 필사적으로 움켜쥐는 사이, 다시 한 번 내벽 깊은 곳으로 공격이 들어왔다. 이번엔 전립선 근처에 머물며 뭉근히 비벼대는 귀두의 자극에 눈앞에서 번쩍번쩍 하얀 번개가 쳤다. 필사적으로 숨을 헐떡이며 눈을 홉떴다. 위에서 음란하게 허리를 돌리고 있는 완벽한 짐승의 몸뚱이가 보였다. 자신의 눈동자에 철저하게 고정된 검푸른 동공에선 여전히 번들거리는 은총의 빛이 유성처럼 흘렀다. 사랑의 ‘핵’이었다.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압도적인 사랑에 쫓기듯 더 위로 시선을 옮겼다. 흐릿하게 천장이 보였다. 좀 더 옆으로 이동하니 통유리창이 보였다. 그 너머 희뿌옇게 눈꽃이 일렁이고 있는 깊은 밤도 보였다. 저녁에 잠시 그쳤던 눈이 다시금 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흉기가 빠져나갔다가 다시 치고 들어왔다. 이번엔 그대로 전립선 한가운데를 직격하는 지독한 자극이었다. 흐앙, 흐앙, 흐앙……. 몸을 꼬며 교성을 참지 못하자 다시 한 번 격렬한 공격이 떨어졌다. 빠르게 몇 번이나 쑤셔대는 통에 진저리를 치며 도로 연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압도적인 사랑의 ‘핵’이 버거워 피했건만, 연인은 그게 불만이었던가 보았다. 어둠 가운데 흐릿하게 드러나는 새하얀 치아를 통해 연인이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피하지 마…….”
다시 전립선 근처를 귀두로 문지르며 허스키하게 떨어지는 중저음에, 곧바로 사정할 것만 같은 극치의 쾌락이 닥쳤다. 연인의 허벅지에 걸쳐졌던 한쪽 다리를 위로 틀어 올려 애원하듯 탄탄한 엉덩이 근육을 조여댔다. 더, 더, 더 해줘. 더 힘껏 박아줘. 더, 더……. 차마 말로 토하지 못하는 창녀의 애원이었다.
“……응…… 그래, 내 강아지…… 원하는 대로 다 해줄 테니까 내 눈을 피하지만 마…….”
자비라곤 일절 없는 사나운 폭군의 명령이었다.
응, 응…….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꿇었다. 다시 비죽 입술 끝이 올라간 폭군의 키스가 떨어졌다. 이번엔 거의 물어뜯기는 것만 같은 강렬한 접촉이었다. 입안으로 혀가 물밀 듯이 파고들어오며, 폭풍 같은 피스톤 운동이 시작되었다. 성급한 애원을 후회했을 정도로 온몸이 부서지는 것만 같은 지독한 쾌락이 이리 떼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죄다 연인의 거대한 페니스로 꿰뚫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가장 두려운 것은 연인의 심연처럼 새까만 먹빛 동공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의 ‘핵'이었다. 단 한순간의 외면도 결코 허락지 않는 절대적인 집착이요 애정이었다. 연인은 그렇게 눈빛으로, 성기로, 서로를 불태워 없애버릴 것처럼 격렬하게 자신을 꿰뚫고, 또 꿰뚫고 있었다. 고통인지 희열인지, 판단조차 몽롱하게 흐려지는 쾌락의 극치였다. 온 넋이 새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눈 내리는 오타루의 밤. 숨 가쁜 초야(初夜)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