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 2003년 12월. 문위(文偉) (107/129)

47. 2003년 12월. 문위(文偉)

크리스마스가 이틀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거리의 상점들마다 시끄러운 캐럴과 호사스러운 리스(wreath)며 트리 장식들로 넘쳐나고, 가로수들에까지 트리 전구가 주렁주렁 열려 밤마다 알록달록 무지갯빛을 뿜어대는 일대 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덩달아 위도 어린애처럼 들떠버리는 바람에, 사랑에 빠진 나머지 쓸개까지 빠져버린 얼간이의 비애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는 며칠이 계속되고 있었다. 기념 이벤트로 어딘가 따뜻한 곳으로 연인과 여행을 갈까? 자동적으로 행복한 망상이 달려 나가곤 하는 것도 실소를 물게끔 만드는 한 원인이었다.

물론 그건 현실적으로 어림도 없는 희망이었다. 본사의 직접적인 경영에서 손을 떼긴 했으나, 아직도 자신의 판단을 거쳐야만 하는 회사의 일거리는 차고도 넘쳤다. 게다가 올 한 해는 연인과의 재회에 따른 이런저런 대미지 탓에 회사 일에까지 적잖은 과부하를 일으키고 있었다. 주말은커녕 휴일도 거의 반납하고 달려왔던 지난 몇 년간의 자신에 비한다면 거의 놀고먹는 수준일 요즈음이었다. 윤 실장 이하 중역진의 입에서 수시로 한숨이 터지는 것도 같은 이유이리라. 자신의 부재를 대비해 역할을 맡아줄 믿을 만한 인재가 절실히 필요한 까닭이기도 했다. 물론 서두를 일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반의반만큼이라도 제 몫을 해낼 인재가 그리 쉬이 발견될 리도 없을 터였으니. 물론 그렇다고 전형적인 일 중독자에 불과했던 지난 몇 해 동안의 자신을 그대로 고수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현재 자신에게 있어 최우선 순위는 연인이었다. 연인과 함께할 개인적 시간의 확보였다. 그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신이었다. 하긴 ‘희생’이라는 표현 자체가 적반하장에 언어도단일 노릇이긴 하지만.

어쨌건 특별한 인재가 나타나기 전까지 자신이 회사 일에 여전히 과도하게 묶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면한 현실이었다. 언감생심 크리스마스 기념 이벤트랄지, 혹은 이벤트를 빙자한 남국으로의 신혼여행 따위란 현재의 자신에겐 눈물겨운 ‘여우의 신포도’와 다름없었다.

신혼여행이라니. 지난 11일, 윤열이 형과 휘야 녀석이 기회를 마련해준 덕분에 연인과 떠나게 됐던 4박5일 홋카이도 여행만 해도 간신히 틈을 내 결행하지 않았던가(아무리 고작 4박5일뿐이었노라 억울해한들, 그게 신혼여행임은 빼도 박도 못할 사실이었다!). 다녀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여행을 떠난단 말인가. 슬그머니 운이라도 떼는 즉시 새하얗게 질릴 윤 실장의 얼굴이 안 봐도 비디오였다.

하긴 굳이 여행까지 갈 필요는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크리스마스트리의 번쩍임에 들뜬 마음이란, 역시 그저 뒤늦게 빠진 사랑의 희열에 정신없이 취해버린 한 얼간이의 철없음일 뿐. 굳이 따뜻한 남국만이 세상에서 따뜻한 것들의 전부는 아니지 않나. 야자수 그늘이며, 늘어진 해먹이며, 산호색 해변 등등, 이국적인 풍경으로 도배가 돼 있는 공간들만이 두 사람의 신혼을 기념할 금자탑은 아니지 않나. 아니, 실은 요즈음의 자신이라면 온통 얼음과 어둠뿐인 남극의 한겨울조차 따뜻하게 느껴질 만큼 어마어마한 은총의 빛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그저 연인의 수줍은 미소 한 번, 자신에 대한 숭배와 애정과 헌신에 가득 찬 영롱한 눈빛 한 번, 자신의 물건에 뚫릴 때마다 자지러지는 교성 한 번이면, 그게 바로 신혼의 금자탑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평온한 매일이 계속되고 있었다. 아니, 평온한 천국이 계속되고 있는 매일이었다.

매일 아침, 연인의 따스한 체온을 품은 채 침대 속에서 눈을 뜰 때마다, 순간 들이닥치는 가슴 벅찬 희열과 지복에 전율하는 천국의 시간들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재수 없는 놈이 자신이라 여겼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만약 진실로 세상에서 가장 재수 없는 인간이 자신이라면 이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는 지나치게 속이 좋은 족속임에 틀림이 없었다. 속이 좋다 못해 바보 천치임에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 같은 천하의 개 호로새끼한테 이런 눈부신 은총이 나릴 까닭이 없지 않은가.

빛이었다. 사방이 온통 무지개색 빛으로 넘쳐났다. 거리에서 부딪치는 뭇 사람들에게서는 물론, 나무나 자동차, 지나다니는 개들과 들고양이들과 회색빛 빌딩들, 심지어 시꺼먼 아스팔트에서까지 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알아채곤 문득 시력에 문제가 있지 않나 의심을 했을 정도였다. 그토록 넘치는 빛의 무지개를 자신의 영혼에게 끊임없이 비춰주고 있는 이는 물론 자신의 소중한 연인이었다. 그 빛은 스펀지에 물이 스미듯 자신의 헐벗고 가난한 영혼 속에 차츰차츰 스며들며 자신을 바닥부터 송두리째 변화시키고 있었다. 자신은 더 이상 생존에만 급급한 겁쟁이 남창 소년이 아니었다. 더 이상 세상을 증오하며 복수심으로 이를 사리물기만 하는 비참한 희생자가 아니었다. 제대로 웃을 줄 모르는 냉혈한이 아니었다. 세상과 단단한 벽을 치고 털을 잔뜩 세운 채 자신의 영역 안에 들어온 존재들만 기를 쓰고 보호하려는 미운 고슴도치도 아니었다. 세상을 움직일 재물이나 권력이라면 어떻게든 다 차지할 욕심으로 기를 쓰고 스스로를 몰아대던 성공지상주의자도 아니었다.

흐르고 있었다. 물처럼 유연하면서도 부드럽게, 무언가가 자신의 안에서 흐느적흐느적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동안은 그 느른한 흐름의 정체를 미처 알지 못했었다. 그저 다만, 연인만 생각하면 보지 않아도 얼간이처럼 시도 때도 없이 입술이 벌어지고, 회사 부하 직원들이 슬금슬금 훔쳐볼 지경으로 툭하면 박장대소를 터트리고, 문득 눈에 들어온 화원의 꽃무더기를 매혹돼서 멍하니 건너다보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지 못해 화원 안으로 들어가 연인을 위한 꽃바구니를 주문하고, 연인과 연말연시 불우이웃돕기 모금 방송을 시청하다 선천성 심장병에 걸린 어린애의 사연에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고, 회사 홍보 차원이 아니라면 생전 불우이웃돕기 성금이란 것을 마음에서 우러나 내본 적이 없는 냉혈한 주제에 기꺼이 수술비 전액을 턱하니 기부하고, 예수쟁이들이라면 치를 떠는 주제에 우연히 지나치게 된 성당에 끼어들어가 대상 없는 기도까지 올리게끔 만드는, 그런 이상야릇한 흐름이라는 것만 얼추 짐작할 따름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그것의 정체를 자각한 계기가 도래했으니, 그 역시 연인이 원인이었다.

며칠 전 밤, 하루건너 연인을 초죽음으로 만들곤 하는 격렬한 정사의 끝에, 오르가슴의 전율을 어쩌지 못해 훌쩍거리는 연인을 품에 꼭 끌어안은 순간, 마지막까지 녹지 않고 심장 근처에서 덜컹거리던 최후의 한 덩어리마저 완벽하게 녹아버린 것을 자각한 것이다. 그제야 그것이 언젠가부터 자신의 심장에 들어와 박혔던 빙산의 자취라는 것을 깨달은 자신이었다. 오래고 오랜 시간, 스스로를 꽁꽁 묶고 있던 얼음의 주박이라는 것을.

그랬다. 부드럽고 따스한 일련의 흐름은 빙산이 녹고 있는 신호였다. 주박이 풀리고 있다는 사인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아버지가 집 뒤 야산에서 목을 맨 이래, 꽁꽁 얼어붙어버렸던 자신의 겨울이 어느새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얼음이 녹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매순간 따뜻할 수밖에 없었다. 매순간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에서 무지갯빛을 감지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타오르기 시작한 내면의 태양은 이제 그 어떤 살벌한 냉기로도 결코 다신 얼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띠리리링∼∼디링∼디링∼∼∼.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모처럼 만의 제법 이른 퇴근길. 거리에 만연한 성탄 분위기가 촉발시킨 일련의 상념들에 몰두해 있던 넋이 비로소 현실로 되돌아왔다.

♥♥♥내 강아지♥♥♥

액정을 가득 메운 발신자 표시에 저절로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가며 웃음이 물렸다. 설마 자신이 10대 애들처럼 휴대전화에까지 이런 닭 짓을 하게 될 줄이야. 그런 스스로가 오히려 대견하게 여겨질 정도이니 이쯤 되면 사랑병도 이만저만 중중인 사랑병이 아닌가 싶다.

“음, 왜?”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감정과는 달리 대꾸는 간결하기 짝이 없다. 기쁨이 지독하면 외려 어조가 더 무뚝뚝해지는 버릇이 안타깝기만 하다. 일생 참는 것에만 길이 들고 보니, 웬만한 의지 가지고는 30년 가까이 다져진 말버릇을 고치기가 몹시도 지난한 것이다.

[……바빠? 저…… 괜히 전화한 거 아닌가?]

애잔하면서도 사려 깊은 내 강아지의 어조에 안타까움이 제트코스터처럼 빠르게 증폭한다. 젠장. 어째서 속마음의 반의반만큼도 상냥한 표현이 나와주지 않는가 말이다!

“아니. 지금 퇴근하는 길이다. 거래처 약속이 취소된 덕분에 일찍 들어가게 됐군.”

[우아, 정말?! 잘됐네……! 요 며칠 계속 늦어서 좀 그랬는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걱정이 돼서…….]

기쁨을 숨기지 않는 연인의 소박한 반응에 안타까움은 이내 뻐근한 충족감으로 변태한다. 연인으로부터 사랑받는다는 실감. 이 지독한 희열과 자부심. 거대한 땅덩어리를 정복한 뭇 제왕이라도 이 순간의 자신만큼 자존감과 긍지를 느끼진 못하리라.

“……잘됐지. 오늘 밤엔 오래간만에 느긋하게 사랑할 수 있을 거다. 오타루 료칸에서처럼 아예 오늘부터 사흘 밤 내리 잠을 재우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각오해두도록.”

[………………!!!!!]

“왜 말이 없어? 싫어?”

[……시, 싫은 건 아니지만…….]

“그럼 무서워? 그 밤들처럼 좋아서 몇 번이나 까무러칠까 봐?”

[……………………!!!!!!!]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이 점점 더 짙어진다. 온통 시뻘게져 있을 연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상냥한 밀어는 잘 주워섬기지 못해도 수줍어하는 연인을 당황시키는 음담패설만큼은 거침이 없는 건, 연인의 이런 반응이 몸서리가 쳐지도록 사랑스럽기 때문일 게다. 도무지 마흔을 바라보는 아저씨라는 게 실감이 안 난다. 처음 만났을 때의 꽃다운 청년 그대로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 같은 연인은 로또보다 더한 횡재일 크나큰 축복이라 여긴다. 하긴 어떤 모습의 연인인들 사랑스럽지 않으랴.

[……오…… 오래간만도 아닌데…… 이…… 이틀 걸러 한 번씩은 꼭 하면서 뭐가 오래간만이라는 건지…… 그제랑 어젯밤엔 연달아 하기까지 했으면서…….]

억지로 끌어올렸을 불퉁한 어조에는 여전히 분홍빛 수줍음만 한가득일 뿐이다.

“잠들기 직전 고작 한두 번 맛보기로 하는 게 하는 건가? 10년 동안 굶주린 원한을 생각하면 매일 밤 기본 서너 시간씩은 뛰어야 그나마 한 거 같을걸? 주에 한 번 정도는 24시간 논스톱 마라톤을 실천해보기도 해야 하고 말이지. 회사 일이 바쁘지만 않다면 애저녁에 그렇게 했을 거다.”

[……지, 진짜 너무해…… 너무 밝히잖아…… 소…… 속았어, 완전…… 옛날엔 진짜 쿨하고 멋진 모범생이었는데…… 알고 보니깐 지독한 변태에다 밝힘증에…… 너, 너 같은 사람을 뭐라고 부르는 줄 알아? 세, 섹스 머신이다!!!]

“푸하하하하하…….”

기어이 터진 박장대소에 얌전히 운전 중이던 고영석이 힐끗 백미러를 훔쳐본다. 잠시 마주친 시선에서 웃음기가 감지되는 건 역시 자신의 음담패설을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는 반증이겠지. 아무러면 어떤가. 자신은 연인처럼 수줍음 많은 순둥이가 아닌 것을. 변태에다 밝힘증에 섹스 머신인 지상 최고의 악당인 것을.

[……그, 그만 웃어!]

“……하하하하하…… 하…… 큭큭큭…….”

[섹스 머신이 무슨 자랑인 줄 아나…… 완전 변강쇠에다…… 아니, 이대근이다, 이대근…… 이제부터 네 별명은 이대근으로 할 거다, 뭐…….]

“아하하하하하…….”

[어우, 씨! 진짜 약 오르게…… 그만 웃으라니깐……! 전화 끊어버릴 거다?!]

“푸하하하…… 푸후후…… 후…… 미안…… 안 웃을게, 마누라. 끊지 마라. 집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네 귀여운 목소리나 들으면서 가게…….”

[…….]

“……거리에 트리가 많이 보인다.”

[…….]

“……보기 좋아. 마치 네 눈동자 같아서.”

[…….]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 집 거실에도 진작 트리 하나 장식해놓는 건데…… 최 씨더러 하나 만들어보라 그럴까?”

[……함께 만들어야지, 뭘…….]

“음?”

[……그…… 그런 건 함께 만들어야 의미가 있는 거라구. 일 바빠서 정신없는 주제에 트리는 무슨…….]

“그런가?”

[……그, 그리구 옛날엔 너 그런 거 안 좋아했잖아. 명절이나 무슨 기념 이벤트 같은 거…… 유치하다고 생각했으면서…… 그래서 일부러 안 만들었었는데…… 진작 만들라고 그랬음 좋았잖아…….]

“트리 만들고 싶었어?”

[응…….]

“왜, 만들어보지? 네가 하고 싶은 일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다 하라고 했잖나. 내게 부탁할 일 생겨도 언제든 말하라고 했고…….”

[……어어, 근데…….]

“내가 재미없어할까 봐 가만있었나?”

[……그것도 그렇구…… 이 나이에 좀 주책인 것도 같구…….]

“…….”

문득 아려오는 가슴에 깊이 심호흡을 해본다. 잃어버린 시간이 서로에게 남긴 트라우마는 깊고도 깊다는 것을 새삼 절감을 한다. 연인을 버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젊은 날 어느 한때, 서로 가슴을 두근거리며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었을까? 그 아래 숨겨둘 서로를 위한 선물을 몰래몰래 준비했을까? 모르겠다. 가슴이 온통 얼음으로 뒤덮였던 젊은 날의 자신이 진정 연인을 따라 호들갑스레 이벤트를 준비했으리라는 상상은 초입부터 그대로 막혀버린다. 다만 아쉬운 것은 지금 현재의 자신…… 아니, 현재의 연인이다. 세월의 풍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거울 속 잔주름을 들여다보며 잃어버린 젊은 날의 크리스마스트리를 아쉬워하는 나이 든 연인이다. 내면의 영혼만은 여전히 섬세하고 순수하기만 한 자신의 소중한 천사다.

“……내년엔 함께 만들어보자. 몰래 선물도 준비하고…….”

[……정말?]

“음, 정말…….”

[헤헤, 신난다…….]

“그래, 신난다. 마누라가 신나하니 서방님도 비로소 신바람이 나는군.”

[아참, 선물 하니까 생각난다! 있지, 윤열 씨한테 내 그림 한 점 선물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다시금 명랑하게 재잘거리기 시작한 내 강아지의 어조에서 더 이상 크리스마스트리에의 회한은 읽히지 않는다. 가슴 깊이 안도하며 연인의 기분에 동조했다.

“네 그림을? 윤열이 형한테?”

[어. 우리들 신혼여행까지 준비해주시고, 휘야 군하고도 화해하게 해주셨잖아. 그간 여러 가지로 너무 잘해주셨는데 그냥 가만히 있기가 좀 그래서, 위야. 곧 새해도 되니까 설 선물이다 하고 드리면 괜찮은 핑계다 싶기도 하구…… 며칠 전에 통화했을 때 그러시더라. 안 회장님 댁에 초대받아 가셨다가 내 그림을 보시구선 너무 감동하셨대. 그림은 잘 모르시는데 내 그림은 진짜 맘에 드신다구…… 헤헤, 암만 생각해도 그저 팔이 안으로 굽으셔서 그런 것 같지만, 아무러면 어때? 무조건 내 그림이 좋으신 거면 나야 그것만으로도 횡재한 기분인걸. 아무튼 그래서 드리고 싶어, 위야. 일단 내 그림에 대한 1차적인 권한은 전부 네게 있으니깐 네 허락부터 받으려구. 괜찮지?]

괜찮지 않을 까닭이 있나. 시댁에 잘하는 마누라란 보물단지와 다름없는 것을!

“……팔이 안으로 굽은 거 맞으니까 야심작은 선택 목록에서 빼는 게 좋을 거다. 윤열이 형, 예술이라면 윤수일의 「아파트」와 밀레의 「만종」 수준이 전부지. 나보다도 더 까막눈이다. 졸작을 들이민들 그게 네 작품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집안 가보로 삼을걸.”

[아하하하…… 그런 게 어딨어! 최근에 작업한 것들 중에서 제일 괜찮은 걸로 드릴 거니깐 그렇게 알아. 알았지?]

“…….”

연인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음악처럼 심금을 울리고 있었다. 뭉클한 감동과 함께 왈칵 목이 메었다.

사랑스러웠다.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당장이라도 연인을 보고 싶고 품에 안고 싶은 절절한 그리움이 손끝까지 저릿하게 만들었다. 순간적으로 심장을 강타한 열기에 숨조차 쉬기 버거웠다.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하는데, 한동안은 입에 지퍼라도 채워진 듯 말이 토해지지가 않았다.

도움은 의외의 곳에서 왔다. 육중한 철제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시선을 들어보니 익숙한 저택의 윤곽이 시야 가득 밟혀들었다. ‘우리 집’이었다. 연인의 사랑스러움에만 홀딱 취하는 사이, 어느새 우리 집에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어?! 차 소리 난다! 벌써 도착한 거야, 위야?!]

“…….”

[위야……?]

“……나올래?”

[어?]

“……정원으로 나와보라고…….”

[아아, 마중 나오라고? 헤헤헤…… 울 서방님, 돈 벌어 오시느라고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요 하고 대접하란 소리지? 오케바리! 지금 총알처럼 튀어 나가드립지요, 서방님!]

전화는 끊지 말고 나오라는 주의를 줄 틈도 없었다. 단숨에 끊긴 휴대전화에선 더 이상 아무런 감미로움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휑한 아쉬움만큼 절절한 애정이 물밀 듯 용솟음쳤다.

엔진음이 정지하며 차가 부드럽게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정면 차창 밖으로 현관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두툼한 연두색 스웨터에 베이지색 면바지 차림의 연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걸어 나오는 것도 보였다.

고영석의 에스코트를 기다리지 않고 차 문을 박차고 걸어 나갔다. 연인의 뒤로 파출부 아주머니를 비롯, 메이드들이며 경호원들의 얼굴도 얼핏 스쳐갔지만, 금세 의식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뇌리를 가득 채운 것은 오직 연인뿐…… 어딘가 거친 기색으로 달려드는 자신이 이상한지,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연인뿐이었다. 사랑스러워서 미쳐버릴 것 같은 내 강아지였다.

“……위야……?”

팔을 뻗어 미친 듯이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단 몇 분 동안의 안타까운 그리움을 양팔의 힘에 몽땅 다 때려 부었다. 조여진 갈비뼈가 아픈지 가냘픈 신음 소리가 들렸다. “야, 하…… 하지 마!” 하고 당혹을 감추지 못하는 수줍은 항변도 들렸다. 다 무시했다. 아니,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집 식구들에게 신경을 쓰기엔 가슴속을 들끓고 있는 사랑이 너무나 버거웠다. 당장 토해내야만 했다. 안 그랬다간 압력을 이기지 못한 심장이 그대로 폭발해버릴 터였다.

따스하고 따스한 목덜미 맨살에 얼굴을 비벼댔다. 향기롭고 향기로운 체취를 실컷 들이마셨다. 자신의 품 안에 꼭 들어맞는 안성맞춤의 몸뚱이를 끌어안고 또 끌어안았다. 머리카락 속을 헤치며 부비부비를 하고, 얼굴 이곳저곳에 환장할 립 키스를 뿌리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각도를 바꿔가며 정열적으로 입을 맞췄다. 마중 나온 집 식구들이 얼굴을 붉히며 도망치듯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쯤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고용주의 채신머리 따위 애저녁에 내던져버린 지 오래였다. 내 강아지를 사랑하는 데 방해가 되는 거추장스러운 치장들은 지켜줄 하등의 가치가 없는 것들이었다.

현관문 안쪽에서 괘종시계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5시였다. 흡족했다. 이제부터 안을 거였다. 저녁도 대충 침대 위에서 때울 거였다. 긴 밤 내내, 안고 또 안을 거였다. 안고 또 안아도 부족할 거였다.

막 서쪽으로 지기 시작한 햇살이 한겨울 정원에 따스하고 부드럽게 내리쬐고 있었다. 마치 품에 안은 연인의 체온 같았다. 죄인에게 내려진 가장 자비로운 은총이었다.

망년회 겸 중역진의 회식 장소가 마련된 논현동으로 이동하는 도중이었다. 12월 말일인데다 러시아워인 저녁 7시 무렵이라 거리는 꽤나 막히고 있었다. 몇 분이라도 시간을 단축해보려고 고영석이 이리저리 숨겨진 골목길들을 누비고 있었는데, 그리 효과는 없어 보였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연인에게로 향하는 차 안이라면 초조감과 더불어 짜증까지 한 발이나 치솟았을 테지만 직원들과의 회식 자리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조금쯤 늦어진들 어차피 형식적인 참석이니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한 시간 정도 대충 분위기만 띄워준 후 곧바로 우리 집으로 유턴할 작정이다. 보고 또 봐도 그저 그립고 아쉽기만 한 자신의 소중한 ‘아내’에게로 돌아갈 터였다. 전문적인 헤드헌터를 고용해 인재들을 물색하기 시작했으니 조만간 이런 허기진 갈증과도 이별을 고할 수 있을 게다. 1∼2년 정도는 적응하도록 일을 가르쳐야 하겠지만, 그 이후부턴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과부하의 상당량을 신입 CEO에게 덜어낼 수 있을 게다. 아내와 함께하는 여유 시간을 드디어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상상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걸리고 기분이 들떠 올랐다.

띠리리링∼∼디링∼디링∼∼∼,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혹시 아내의 호출인가 싶어 순간 심장이 들썩거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발신자 표시 액정엔 휘야라는 이름이 번쩍이고 있었다. 박동을 빨리했던 심장의 흥분은 이내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휘야 녀석과 연계된 어두운 그늘이 독처럼 빠르게 혈관 속을 잠식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가능하면 피해버리고 싶은 자신의 나약한 비겁에 쓴물만 올라왔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따위는 더 강력한 욕망을 만나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아니, 부서지고 있는 스스로를 매 순간 절절히 자각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가봐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벌써 들여다본 지 1년이 가까워오고 있지 않은가. 정확히는 아내와 재회한 후엔 단 한 번도 찾아가보지 않았었다. 미국에서 보살피고 있을 때에야 거리 문제라고 핑계를 댈 수도 있었을 게다. 그러나 휘야 녀석이 완전히 한국에 정착하면서 거리마저 더 이상의 핑계거리가 될 수 없었다.

그 가련한 ‘몸뚱이’가 한국에 도착한 지도 오늘로써 닷새 남짓, 더 이상 찾아가보길 미뤘다간 다혈질인 휘야 녀석은 물론 윤열이 형까지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 그래. 가보긴 가봐야 한다. 직면해야만 한다. 자신의 죄악을, 지독히도 어리석기만 했던 최악의 선택을, 그리고 그 선택이 낳은 비극적 희생을…….

그럼에도 이렇게 생각하기조차 두려운 까닭은 역시 자신의 소중한 아내 때문이리라. 혹시 이로써 또 아내가 상처를 입게 될까, 아니, 상처 입는 것을 넘어 아예 넋이라도 나가버릴까 미치도록 두려웠다. 과거의 고통과 상처에 대해 차츰차츰 마음을 열어가고 있는 아내였다. 아니, 실은 아직도 치료 중에 있는 아내였다. 그런 아내에게 아마도 가장 커다란 고통일 존재는, 현재로선 직면하는 것조차 끔찍할 지옥의 회오리와 다름없을 터였다. 그것이야말로 가능하다면 뒤로, 더 뒤로, 대면을 미룰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이유였다.

띠리리링∼∼디링∼디링∼∼∼.

휴대전화는 꽤나 끈질기게 울어대고 있었다. 침울해진 시선으로 한동안 멍하니 액정만 들여다보다가 마지못해 폴더를 열었다.

“……그래, 휘야. 나다.”

[혀, 형!!!!!]

두근…….

[혀, 형이야?!!! 형!!! 혀, 형!!! 어…… 어떡하지?!!!]

지독하게 겁에 질린 동생의 목소리였다. 아득하고 무기력한 데자뷔가 영겁의 시간을 돌아 귓전을 강타했다. 톤이 낮아지고 듬직해진 성인의 그것이라는 점만 다를 뿐, 저것은 20여 년 전, 학교에 전화를 걸어 강이 형의 죽음을 전하던 어린 동생의 그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을 불길한 아우라였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지독한 일이 벌어진 거다!’ 더 이상 듣지 않아도 어쩐지 알 수 있었다. 전지한 영혼은 온갖 미세한 전조와 흔적과 경험들을 깡그리 취합해서 제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미, 미, 미, 미안해, 형!!! ……그 사람…… 아, 아니, 혀, 형수가 기절했어!!! 하, 한참을 기다리는데도 안 깨어나!!! 미, 미안……! 미안해, 형!!!]

“…….”

[……마침 성준이 형도 있어서 지켜보고 있는데…… 아, 앞으로 한두 시간이 지나도 못 깨어나면 병원에 데려가 검사를 해야겠다고 해서…….]

“…….”

[형, 듣고 있어?!!! 우선 형부터 부르라고 성준 형이…… 아씨, 참!!! 나도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뭐!!!]

“…….”

[어, 어차피 이제 한 가족이니까…… 여기 놀러오겠다고 해서 그냥 오라고 해버렸는데…… 커다란 그림을 하나 가져왔더라고…… 윤열이 형 주라고…… 신년 선물이라고…… 그러다 혜윤이 방으로 데려갔는데…… 형, 나 잘못한 거 아니지?!!! 어차피 이제 다 한 가족이잖아!!! 형수잖아!!! 그, 그러니까 이제 과거야 어쨌든 함께 잘 살면 되는 거잖아!!! 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어차피 만나야 할 거면 빨리 만나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그, 그랬는데…….]

“…….”

[……보, 보자마자 기절할 줄 내가 알았나, 뭐!!! 형, 그렇지?!!! 나 잘못한 거 아니지?!!! 그냥 형수가 조금 놀란 것뿐일 테니깐…….]

“……안…… 된다고 했지…….”

멀리서 윙윙거리는 헬리콥터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저 그 비슷한 이명 소리일 뿐인지도 몰랐다.

“……당분간은 안 된다고…… 내가 허락할 때까지는 만나게 하면 안 된다고…….”

탁하게 거슬리는 자신의 목소리도 들렸다. 겁에 질리다 못해 오줌이라도 지릴 것만 같은 어린 중학생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가, 강이 형이 죽었대애, 혀어엉……. 어린 동생의 울부짖는 소리도 들렸다. 혀, 형수가 기절했어!!! 하, 한참을 기다리는데도 안 깨어나!!! 다 큰 청년이 된 동생의 바리톤도 찢어지는 메아리가 되어 귓전을 울렸다. 시간이 역행하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뒤죽박죽 회오리처럼 얽혀들며 시꺼먼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안 돼…… 안…… 이럴 수는 없어…… 아…… 직은 안 돼……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인환아…….”

[……혀…… 형……?]

“……그러지 마…… 만나게 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내가…… 인환아…….”

[……형…… 지, 지금 무슨…… 형!!!]

“……안 되지…… 아직은 만나게 하면 안 되는데…… 강이 형도 그렇게 가면 안 되는 건데…….”

겁에 질린 한 어린 중학생이 조용히 덧붙이고 있었다. 체념 같기도, 혹은 절망 같기도 한 흐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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