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 2004년 1월. 장인환(張仁歡) (108/129)

48. 2004년 1월. 장인환(張仁歡)

이상한 일이었다. 

잠이 깨어 일어나 보니 김성준이 원장으로 있는 강남연세병원의 응급실 안이었다. 머리엔 이런저런 줄이 연결돼 있었는데 수면 중에 하는 뇌파 검사였다고 한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시야에 잡힌 이는 연인. 창백하게 질린 낯빛의 연인이 겁에 질린 눈동자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인의 두 손에 꽉 움켜잡혀 있던 자신의 오른손은 땀으로 흥건했다. 연인이 얼마나 오래 붙들고 있었을지 짐작이 되는 부분이었다.

“……장 선생님께선 일곱 시간 전쯤에 기절하셨었습니다. 기억나세요?”

연인의 심상치 않은 표정이 걱정스러워서 잠깐 멍하니 연인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데, 연인의 반대편에서 걱정이 담긴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하얀 의사 가운을 걸치고 있는 김성준이었다.

“……아니, 제가 누군지는 알아보시겠습니까? 말씀을 하시기 힘드신가요?”

점점 더 심각해지는 표정의 김성준이 재차 묻고 있었다. 마냥 가만히 있었다간 진짜로 정신병자 신세가 될 것 같아서 곧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김성준 박사님이시잖아요. 위야의 친구…… 아닌가요?”

흐릿하게 웃으며 농담으로 받아넘겼건만, 김성준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울 뿐이었다.

“……제가 기절했었나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실컷 자고 일어난 것만 같은데…….”

“오늘이 며칠인지는 기억하십니까?”

“……어…… 12월 31일이죠. 위야가 망년회가 있다고 늦는다고 했는데…… 근데 여기 있네? 망년회 잘 끝났어, 위야?”

“…….”

“……표정이 왜 그래……. 걱정해서 그래? 나 괜찮아, 위야. 아까 점심 먹고 그림 그리고 있었는데…… 어, 근데…… 그다음에 어딜 나가려고 했는데…… 기절했나, 진짜? 그담이 잘 생각이 안 나네……?”

“…….”

연인의 땀범벅인 두 손이 무심결인지 자신의 손등을 거듭거듭 쓰다듬고 있었다. 여전히 창백한 낯빛에 서린 어두운 그늘도 그대로였다. 미소 한 자락 없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만 뚫어지게 살피다간, 김성준이 어깨를 툭툭 치자 다소 비틀거리는 불안정한 몸짓으로 김성준을 따라나섰다. 응급실 밖으로 나간 연인과 김성준은 5분쯤 후에 인환에게 되돌아왔다. 퇴원을 해도 된다는 김성준의 사인이 떨어진 모양인지, 연인은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인환의 어깨 위에 말없이 코트를 걸쳐주었다. 창백한 얼굴에 서린 연인의 우울이 자신에게도 전염이 됐는지 자신 또한 더 이상의 수다는 나오지 않았다. 응급실이라곤 하지만 정신병동 특유의 청결한 고요가 지배하는 병원 복도를 지나 현관 밖으로 나오니, 대기해 있던 검정 세단 앞에서 고영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정도 한참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퇴근하지 않고 있었다. 이상했다. 어쩐지 꿈속을 떠돌고 있는 것 같은 어리둥절하고 낯선 느낌으로 김성준의 병원을 뒤로하고 귀로에 올랐다.

차 안에서도, 또 집에 도착해서도, 연인은 흡사 사냥개처럼 인환 자신의 얼굴과 기색만을 뚫어져라 살피고 있었다. 아침에 출근할 때와는, 아니, 마치 스스로 빛을 뿜어내는 것처럼 밝고 쾌활하기만 하던 요즘의 연인과는 180도 다른 분위기여서 왠지 주눅이 드는 기분이었다. 창백하고 굳은 얼굴 못지않게 바짝 굳은 몸에서 전해지는 기운도 눅눅하고 어두웠다.

외출복에서 잠옷으로 갈아입고 욕실로 들어가려고 하니 연인도 재빨리 옷을 벗고 따라 들어왔다. 요즘엔 거의 연인과 같이 샤워를 하는 형편이라(물론 대부분 샤워만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살짝 가슴을 두근대며 다가온 연인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인환과 연인의 몸에 샤워기로 물을 뿌리고, 비누칠을 해주고, 다시 샤워기로 말끔히 씻어내는, 일련의 과정이 말없이 진행되었다. 달랐다. 과정은 똑같은데 분위기는 전혀 달라서 역시 잔뜩 주눅이 들어버린 인환이었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감겨주고, 물기를 닦고, 밖으로 나와 드라이어로 머리카락을 말려주는 과정까지, 역시 절차는 똑같되 분위기는 살얼음판 같은 긴장이 서린 30여 분이었다. 연인의 눈치만 살피다가 겨우 침대에 들었을 때, 시곗바늘은 1시 4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대로 모로 누워 자신을 품에 안은 연인이었지만, 평소답지 않게 파자마를 벗긴다든지, 이런저런 애무와 키스로 자연스레 섹스의 절차를 밟는 일은 없었다. 그저 품에 안고 가만히 등과 엉덩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너무 늦어서 그런가? 점점 더 말똥말똥해지는 의식에 자문해보았다. 혹은 너무 피곤해서? 벌써 새벽 2시이니 너무 늦은 것 같기도, 또 피곤해서도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기절한 자신의 상태가 걱정돼서 성욕 따윈 생기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아, 그래. 이게 가장 적당한 대답 같구나. 딱딱하게 굳은 표정과 근육들이 확연히 드러난 증거였다. 참, 나. 그까짓 것 가지고 뭘…… 기절 같은 건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간간이 하는 편으로 알고 있다. 정신적으로 심하게 휘둘리거나 하면 종종 그렇게 의식을 잃는 경우가 있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왜 기절을 한 거지……? 두근…….

생각의 꼬리를 따라가다가, 문득 전신으로 소름이 달려 나갔다. 왠지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갑자기 온몸이 차가워지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흡사 악몽을 꾸고 있는 순간처럼. 자신도 모르게 연인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진저리를 치자, 어쩐지 연인의 몸도 바짝 긴장을 하는 것 같았다. 자신을 끌어안은 팔에 와락 힘이 더해진 것을 보면.

“……기분이 이상해…….”

말을 한다고 채 의식도 못 한 채 멍하니 중얼거리는데 연인의 포옹이 더 거세졌다.

“……뭔가 이상하긴 한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위야.”

“…….”

“……왜 이렇게 불안하지?”

“…….”

“……지금 꼭 이상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은데…… 근데 왜 이런 게 악몽 같지? 네가 너무 걱정하는 것 같아서 그런가?”

“…….”

“……걱정하지 마, 위야. 나 가끔 기절 같은 거 하고 그러잖아. 요즘은 감기도 잘 안 걸리고…… 암튼 몸 튼튼 마음 튼튼이니깐 이렇게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응……?”

“…….”

“……근데 아무 말도 안 하니까 진짜 무섭잖아. 변태에 밝힘증인 주제에 안으려고도 안 하고…….”

“…….”

“……헤헤…… 지금 네가 ‘내가 아직도 위위인 줄 아니?’ 하고 물어보면 어쩜 나 비명 지를지도 모르겠다.”

“…….”

실없는 농담에 좀 기분이 풀린 걸까? 모로 누워 있던 연인이 자신을 똑바로 눕히곤 위에서 몸을 겹쳐왔다. 마주 보이는 연인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워서 가슴이 아팠다. 자신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연인의 오른손이 가만가만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고 있었다. 하체는 서로의 다리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고, 상반신도 가슴 아래 부분까지는 딱 달라붙어 있었지만, 허리에 두르고 있던 왼팔로 자신의 어깨 옆 침대 부위를 짚어 체중을 지지하고 있는 덕분에 그리 무거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역시 전형적인 섹스의 전초전 같은 체위였음에도 연인은 간간이 입술에 키스만 하고 어루만지기만 할 뿐 흥분의 그림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퇴근해서 여태까지 응급실에서 벌을 선 거라면 꽤나 피곤할 것 같은데도 정신이 말똥말똥한 자신만큼 어딘가 긴장이 서려 있었다. 소굴을 지키는 늑대처럼 무언가를 잔뜩 경계하는 것도 같고,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는 것도 같았다. 차츰 더 걱정이 깊어졌다. 기절했든 어쨌든 자신은 덕분에 일곱 시간 가까운 숙면을 취한 셈이지만 연인은 숙면은커녕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 피로가 가중돼 있을 터였다. 그리고 자신이 잠들지 않는 한 연인 또한 결코 잠들지 않을 것 같은 확실한 예감이 들고 있었다. 문제는, 일곱 시간을 자다 깨어난지라 도무지 자고 싶지 않은 자신이었다.

“……안 할 거면 그냥 자자, 위야. 응? 너 많이 피곤하잖아. 난 진짜 괜찮으니깐…….”

연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자신의 근심을 전했다. 도리어 연인이 걱정이니 먼저 자라는 의미를 알아들었으리라 여겼는데, 대답은 그저 입술 위로 떨어진 조용한 키스였다. 섹스의 사인이었다.

조용히 파자마가 벗겨지고, 조용히 다리가 벌어지며 몸이 열렸다. 삽입도 마냥 고요한 삽입이었다. 삽입 직전 반쯤만 발기했던 연인의 성기가 몇 번 안에서 움직이는 사이 완전히 발기했고, 그제야 서로는 땀을 뻘뻘 흘리며 서로의 몸에 몰두했다.

점점 더 절실하고 격렬해지는 흐름에 빨려 들어가면서도 여전히 불안한 의식의 한 끈을 놓지 않는 것 같은 연인이 어렴풋이 자각되었다. 유별나게 부드러운 결합이었으며 유별나게 절제된 결합이기도 했다. 순간적으로 의식이 날아가버리는 오르가슴에 올라도 연인은 부릅뜬 눈으로 자신의 표정만 정신없이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한 증거일, 사정 직전에 자신의 안에서 페니스를 빼버리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몸짓까지 보여준 연인이었다. 섹스도 그저 자신을 안정시키거나 재우기 위해 마지못해 하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였을까? 자신 또한 어딘가 평소와 다른 긴장을 느낀 것은. 여전히 무언가 어긋나 있는 것만 같은 비현실감이 순간순간 온 신경줄을 사로잡았던 것은. 무언가 이게 아닌데, 무언가 너무 무서운 거 같은데 하고 가슴을 두근거리며 고개를 갸웃해야만 했던 것은.

언제 잠이 들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두 번째 오르가슴에 올라 사정한 직후였으리라 추측되었다. 기진한 채로 정신이 아득해졌는데 그 이후로 기억이 없었다. 문득 눈을 떴을 땐 여전한 한밤중이었다. 얼핏 시계를 살피니 3시 55분. 아마도 한 시간 남짓 잠들지 않았나 싶었다.

자신을 어미닭처럼 품고 있는 연인의 몸이 가장 먼저 자각된 감각이었다. 연인은 모로 누운 채 팔과 다리로 자신의 허리와 허벅지를 반쯤 감은 채 잠들어 있었다. 얼굴이 연인의 가슴 언저리에 딱 달라붙어 있어 땀 냄새가 섞인 연인의 짙은 체취가 폐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온몸이 식은땀 범벅이었다. 맞닿은 연인의 뜨거운 체온이 무색할 지경으로 자신의 온몸은 싸늘하게 식은 채였다. 시트가 허리께까지 흘러내려가 있는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맨살에 느껴지는 침실 기온은 제법 따뜻했고, 무엇보다도 화덕 같은 연인의 체온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추위가 느껴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연인의 품 안에서 살며시 빠져나왔다. 혹시 잠을 깨울까 봐, 숨까지 멈춘 채 주의를 기울였다. 다행히 피로에 지쳤을 연인은 미동조차 없었다. 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 알몸에 파자마를 입고, 그 위에 나이트가운을 걸쳐 입었다. 그래도 여전히 추위가 느껴져서 마침 스툴 위에 벗어두었던 양모 재킷까지 가운 위에 겹쳐 입었다. 그래도 역시 오한이 멈추지 않았다. 어떡하지? 감기가 들려는 건가? 낭패감에 쫓기듯 침대 위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잠들어 있는 연인이었다. 무방비한 아름다운 얼굴을 굽어보고 있자니 뼛속까지 시린 외로움이 엄습했다. 또한 잠들기 전부터도 내내 의식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흐릿한 불안감과 두려움도 함께 따라왔다. 추운 것도 괴롭고, 외로운 것도 괴롭고, 두려움도 괴로웠다. 정원 가로등 불빛만 흐릿하게 비쳐들 뿐인 침실의 어둠도 못마땅했다. 그렇다고 잠든 연인을 생각 않고 불을 켤 수도 없었다.

무언가에 쫓기듯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왔다. 통로에만 뽀얀 조명이 밝혀져 있던 어두운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전등 스위치부터 죄다 켜놓았다. 순식간에 대낮보다도 밝은 빛이 사방에서 비추고 있었다. 그래도, 추워…… 어두워……. 무심코 뇌까리다가 소스라쳤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좀 옆에 있어주었으면……. 재차 뇌까리는 자신은 정말로 이상야릇했다. 이 깊은 밤중에 누군가가 본채 안에 있을 까닭이 없었다. 어차피 저녁 식사 시중만 끝나면 모두 별채로 퇴근해버리는 집 식구들이었다.

……추워…… 어두워…… 외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뇌리 속에서 주문 같은 저주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자신이 아니었다. 자신 안의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중얼 흐느끼는 것 같았다. 애원하는 것 같았다. 질겁한 누군가가, 그 누군가가…… 누군가가……. 생각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누군가가…… 누구…… 지? ……누구야……?

거실 한가운데를 빙빙 돌고 있었다. 자신이 아니었다. 자신 속에 있는 누군가였다. 불안하고, 겁에 질렸으며, 지독히도 춥고 외로운…… 가련한 그 누군가였다.

주방으로 갔다. 무언가 따뜻한 것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면 덜 추울 것 같았다. 덜 무섭고 덜 불안할 것 같았다. 차가 좋을 거야. 따뜻한 차. 인삼차도 좋고, 대추차도 좋지. 쌍화차는 더 좋고. 커피랑 홍차는 더 좋지만 그건 잠이 잘 안 오니까 패스. 이리저리 불안스레 흔들리는 시야로 문득 식탁 위의 대나무 상보가 밟혀들었다. 파출부 아주머니가 다음 날 쓰일 음식 재료들을 준비해 덮어두곤 하는 상보였다. 열어보니 새하얀 가래떡 한 바구니가 나왔다. ‘내일 아침엔 떡국을 끓여드릴게요, 선생님. 떡국 좋아하시죠?’ 파출부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울렸다. ‘사장님도 그러시고 다들 설을 쇠신다지만 그래도 새해 첫날엔 떡국이 제격일 거 같아서요. 내일 아침엔 딱 썰기 좋게 꾸덕꾸덕 마를 테니 적당하게 썰어서 맛나게 끓여드릴게요, 선생님.’ 재차 선하게 웃으며 전해지는 다정에 자신은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 그래. 이렇게 대답했지. ‘야아, 신난다! 좋아요, 아주머니. 위야도 떡국 좋아하니까 반대 안 할 거예요. 하긴 한식 요리라면 반찬투정 같은 건 절대 안 하지만요.’ 그러곤 막 쪄낸 찰진 가래떡 한 조각을 집어 우물우물 씹어 먹고는 현관 밖으로 나갔었지. 홍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약속 시간에 늦을까 봐 서두른 기억이 있어. 그래, 아주 중요한 약속이었거든. 그래, 아주 중요한…… 중요하지…… 아무렴, 아주 중요하고말고. 연인의 소중한 가족을 찾아가는 거니까. 아아, 이젠 자신의 가족도 되는구나. 자신은 연인과 결혼했으니까…….

우두커니 선 채 가래떡만 하염없이 바라본 것 같았다.

순간순간 뇌리를 스쳐간 끔찍한 장면에 그대로 전신이 얼어붙지만 않았다면 아마도 자신은 다시 연인이 잠들어 있는 침실로 되돌아갔을지도 몰랐다. 따스한 차 한 잔을 마시고 난 다음에, 제법 따스해진 체온에 감사하면서, 역시 무서운 건 아무것도 없어 하고 자신의 이상한 착각들에 실소하면서.

소름 끼치는 냉기가 뼛속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자신보다 더 늙어버린 혜윤이의 주름투성이 얼굴이 보였다. 피골이 상접하게 말랐다는 표현이 적당하리라. 골격의 모양새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마르고 쪼그라든 몸에 중년의 쪼그라든 피부, 그리고 감정 없는 중년의 무표정이 아직도 기억에 있는 맑고 밝고 예뻤던 어린 소녀 문혜윤의 이목구비를 이상야릇하게 채색하고 있었다. 늙어도 너무 늙은 몸뚱이였다. 얼굴이었다. 아니, 그건 이미 ‘늙은 몸’조차도 되지 못했다. 죽은 얼굴이었다. 생명력이라곤 단 1그램도 느껴지지가 않는 살아 있는 시체였다.

‘차라리 죽어버리지.’ 뼛속까지 시린 냉기에 벌벌 떨면서 이를 갈았다.

‘그렇게 늙은 몸뚱이에 갇혀 고통을 당하느니 차라리 아예 죽어버리지.’ 원한에 찬 짐승이 으르렁거렸다.

‘미련 많고 추하게 그게 무슨 꼴이니? 너 혜윤이 맞아? 우리 예쁜 혜윤이 맞아? 내 천사 혜윤이가 맞는 거니?’ 욕하고 때리고 발길질을 했다. 늙고 추해진 고깃덩어리를 향해서였다.

‘네 오빠들도 그래. 어떻게 그런 너를 너라고 믿을 수가 있니? 너 아니지? 그 속에 있는 거 너 절대 아니지? 그럴 리가 없잖아. 네가 그렇게 괴물일 리가 없잖니. 근데 왜 니네 오빠들은 널 가두고 있는 그 이상한 몸뚱이를 아직도 살려두는 거야? 오빠들은 네 비명이 들리지 않는 걸까? 네 신음 소리가 안 들려? 세상에, 진짜 잔인하다. 그렇지 않니? 온몸에 욕창 흉터가 덕지덕지 앉은 걸 보고도 그런 잔인한 짓을 계속한 걸까? 진짜 잔인하다, 진짜 잔인해. 걱정 마, 혜윤아. 내가 어떻게든 해줄게. 내가 자유롭게 해줄게. 이제부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기다려봐. 지금 내가 간다. 내가 갈게, 혜윤아…….’

중얼중얼, 악에 받친 의지에 따라 싱크대 문을 열어젖혔다. 온갖 종류의 주방용 칼들이 즐비하게 꽂혀 있는 참나무 정리대가 보였다. 가장 적당한 것 같은 칼을 골라 꺼내 들었다. 길이가 20센티쯤 될 길고 날카로운 과도였다. 물끄러미 손에 쥔 과도를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번개처럼 환한 데자뷔가 뇌리를 강타했다.

[……죽였어…… 요?]

어린 혜윤이가 묻고 있었다.

[……오…… 오빠…… 우…… 우…… 울 위야 오빠를 죽인 거예요……?]

하얗게 질린 자신의 어린 천사 혜윤이가 멍하니 묻고 있었다. 혜윤이의 휘둥그레진 시선이 들어가 박힌 곳은 자신이 들고 있던 식칼이었다. 새빨간 액체로 범벅이 돼 있는 식칼이었다. 아직도 자신의 손가락을 뜨뜻하게 적시고 있는, 연인의 선홍색 피였다.

미심쩍어하며 휘둥그레졌던 눈이 경악으로, 이어 끔찍한 공포로 변하는 데는 그닥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한 가녀린 몸이 보였다. 얼굴이 너무나 창백해서 쓰러지는 게 아닐까 싶은 걱정에 문득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게 더 공포였는지 움찔 몸을 떠는 혜윤이였다. 다시 한 번 눈앞이 번쩍하며 벼락이 내리꽂혔다. 총알처럼 뛰쳐나가는 혜윤이의 하늘색 더플코트 자락을 얼핏 본 것 같았다. 새빨간 피가 뚝뚝 듣는, 날카로운 칼날을 통해서였다. 시리고 시린 푸른빛이었다.

바짝 마른 입술에 혀를 내밀어 침을 발랐다. 번개가 사라진 자리에 더 이상 공포는 없었다. 그저 뼛속까지 파고든 추위와 어둠과 고독뿐이었다.

고개를 떨군 채 손에 쥔 과도를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10년 전의 그 식칼과는 모양새가 비슷하긴 했지만 크기만은 확연히 달랐다. 뜨겁고 끈끈했던 연인의 피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혜윤이의 모습을 한 몸뚱이에 찔러 넣어도 연인의 그것과 똑같이 뜨겁고 끈끈하게 느껴질까?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지. 답은 금방 나왔다. 연인을 찔렀을 땐 연인이 살아 있었지만, 혜윤이는 이미 죽었지 않은가. 그건 그저 혜윤이의 형태를 잠깐 빌린 다 늙은 고깃덩어리일 뿐, 진짜 혜윤이는 아니지 않은가.

다시 한 번 입술에 침을 발랐다. 어떡하면 혜윤이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을까, 심각하게 궁리했다. 10년 전처럼 식칼을 쓰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실패할 확률도 컸다. 그 산 증거가 저기 저 침실 안에 있지 않는가. 자신은 이렇게 춥고, 외롭고, 어두운데 혼자서 잘만 자고 있는 남자가 아닌가. 하, ‘연인’이라고? 저게 자신의 연인이라고? 우리 예쁜 혜윤이를 그리 잔인하게 방치하는 게? 저게 내 남편?

칼 손잡이를 움켜쥔 손이 벌벌 떨렸다. 한순간 치민 극도의 증오심 때문이었다. 저기 침실에 잠들어 있는 남자에 대한 증오였다. 분노였다. 용서 못 해. 이를 갈았다. 절대 용서 못 해. 뼈와 살에 대고 맹세를 했다. 복수할 거야. 우리 혜윤이를 그렇게 아프게 한 거, 우리 예쁜 천사를 그렇게 만들어버린 거, 아니, 나더러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버린 거, 절대로 용서 못 해. 죽어도 용서 안 해. 복수할 거야. 우리 혜윤이보다 더 아프게 만들어줄 거야. 고통을 줄 거야……. 치를 떨며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온몸이 경련을 하듯 흔들리며 휘청거렸다. 머릿속이 어질어질하며 구토감이 일었다. 순간 힘이 풀려버리는 바람에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기절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안 돼. 반사적으로 회초리를 들며 이를 악물었다. 또 기절할 순 없었다. 그럼 또 자신은 아까처럼 말짱 잊어버릴지도 몰랐다. 이 아픔을, 이 고통을, 이 미움을, 이 분노를, 이 증오를, 그리고 이 지독한 상처를 또 잊어버릴 터였다. 그가 자신에게 던져준 이 지독한 고통을, 지옥을, 말짱 다 잊고 희희낙락 그 남자에게 가랑이를 벌리고 창녀가 돼서 교성이나 내지를 거였다.

바짝 긴장한 정신이 칼처럼 의식을 벼렸다. 복수. 복수. 복수. 복수……. 같은 단어만 주문처럼 외고 또 외웠다. 그에게 가장 뼈아플 복수. 복수. 복수. 복수……. 그래, 그건 단 하나뿐이었다. 그로부터 자신을 잘라내는 것. 다시는 못 쫓아오게 완전히 도망쳐버리는 것.

전광석화보다도 빠르게 내려진 결론이 그 이상으로 빠른 결단을 불렀다. 왼쪽 팔을 들어 올렸다. 파자마와 가운과 재킷이 덕지덕지 겹쳐진 소매 단을 위로 쭉 밀고, 손목을 불빛에 자세히 비춰 보았다. 길게 그어진 옛 흔적들이 적나라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니 그닥 어려울 것도 없었다. 옛 흔적들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문제였다. 칼날 끝을 수직으로 해서 망설이지 않고 그어 내렸다.

단숨에 분수처럼 피가 튀어 올랐다.

히죽거리는 웃음이 샜다. 그래, 이건 복수야. 흡족하게 뇌까렸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목숨은 목숨으로. 생명은 생명으로. 더구나 그게 자신이 끔찍이도 아끼는 피붙이에 대한 대가라면 더더욱 그래야 하겠지.

주방 바닥이 금세 핏물로 범벅이 되었다. 기세를 타듯 피 분수는 끊임없이 위로 뻗쳐올랐다. 흡사 축제 같았다. 복수의 축제였다.

쾅!!!!!

문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침실에서 헐레벌떡 뛰쳐나온 남자가 보였다. 벌거벗은 몸뚱이가 조각처럼 아름다운 남자였다. 자신을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홱홱 돌릴 때마다 긴장된 온몸의 근육들이 힘차게 물결치는 게 보였다. 자신을 늘 창녀로 만들어버리곤 하는 가랑이 사이 거대한 성기도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아름다웠다. 마지막까지 지독하게 아름다운 그 모습에 이가 갈렸다.

남자의 시선이 드디어 주방 쪽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시선이 마주쳤다. 경악으로 휘둥그레지는 눈이 보였다. 순식간에 핏기를 잃는 얼굴도 보였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으로 진저리를 치는 남자의 아름다운 나신도 보였다. 히죽 하고 의기양양한 웃음이 샜다. 아프니? 하고 달콤하게 물음을 던졌다.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하고 재차 약을 올렸다. 앞으론 더 아플 테니까. 차라리 죽는 게 더 낫겠다고 엉엉 울며 하느님께 애원하게 될 테니까.

잠시 전신에 마비가 온 것처럼 온몸을 떨고만 있던 남자가 전광석화보다도 빠르게 움직였다.

단숨에 과도가 빼앗기고, 피분수를 뿜어내던 손목이 사납게 들어 올려졌다. 허리에 늘어져 있던 나이트가운 끈이 순식간에 손목을 묶는 압박 붕대가 됐다. 칼로 자를 때는 몰랐는데 붕대로 감길 때는 지독하게도 아팠다. 신경질이 나서 남자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나쁜 놈, 나쁜 놈, 개새끼, 소새끼, 죽일 놈, 씨팔, 좆팔, 쌍놈의 새끼……. 남자는 얄미울 정도로 들은 체도 안 했다. 그래도 얼굴만은 여전히 지독하게 상처 입은 처참한 모양새여서 속으로 흡족한 웃음을 흘렸다.

어디서 찾아냈는지 가느다란 흰색 노끈을 가져와 상박 동맥까지 졸라 죽일 기세로 묶고 있었다. 색색거리는 남자의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숨을 토해낼 때마다 심한 단내가 났다. 전직 의사 출신답게 훌륭하게 응급 처치를 마친 남자가 주방 전화기로 구급차를 부르고 있었다. 별채로 전화를 넣어 집 식구들을 깨우는 소리도 들렸다. 가장 시급한 일을 마친 다음엔 도로 자신의 옆으로 와 무릎을 꿇었다. 손에 들린 젖은 행주로 자신의 얼굴이며 목덜미며, 피가 튀었을 곳곳을 닦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집 식구들이 들이닥쳤다. 최 씨 내외와 고영석이었다. 주방 쪽을 바라보다 경악하는 식구들의 얼굴을 보자니 핏속에서 펄펄 끓던 증오가 스륵 힘을 잃는 게 느껴졌다.

알몸인 그를 먼저 발견한 최 씨 아주머니가 침실로 달려가 그의 옷가지를 가져오는 게 보였다. 차마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하고 남편인 최 씨에게 건네주었는데, 건네주는 마디 굵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미세하게 남아 있던 미움조차 그 가슴 아픈 장면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하느님! 도대체 자신은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파노라마처럼 지난 몇 분이 뇌리를 스쳐갔다. 끔찍했다. 끔찍한 괴물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순식간에 목이 메고 가슴은 찢어발겨졌다. 필사적으로 연인의 얼굴부터 찾았다. 1미터쯤 떨어진 거리에서 최 씨 아저씨가 건네준 옷가지를 번개처럼 빠른 동작으로 주워 입고 있는 연인이 보였다. 참혹하게 일그러진 표정에, 기어이 참지 못한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또 아프게 했구나. 하느님, 또 연인에게 죽음 같은 고통을 주고 말았구나. 저 앞에서 절망이 시꺼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갑자기 눈앞이 하얘졌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의식을 잃을 것 같았다. 아마도 몸 밖으로 빠져나간 혈액 탓이리라. 옆으로 스륵 가부러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연인이 단숨에 코앞까지 다가들었다.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들어온 양팔이 자신의 상반신을 연인의 품 안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괜찮아.”

잔뜩 쉰 목소리가 신음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괜찮을 거야, 인환아. 다 괜찮아질 거야…….”

엄청난 힘으로 자신을 조여 안는 연인을 마주 안아주기 위해 팔을 뻗어보았지만, 채 반도 올라가지 못한 두 팔은 도로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뿐이었다. 연인의 얼굴이 자신의 목덜미에 들어와 박힌 채 여전히 가쁜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입가에 닿아오는 자신의 피부 곳곳에 소나기 같은 키스를 해대고 있는 입술에서는 여전히 심한 단내가 뿜어 나왔다. 와락와락 자신을 죄고 있는 팔이며 얼굴이며 어깨며,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냥 괜찮아, 괜찮아 하는 말만 앵무새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눈꼬리를 타고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느님, 정말 자신은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이 불쌍한 남자한테 도대체 무슨 잔인한 짓을 저질러버린 걸까? 하얗게, 하얗게 전신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죄인이 누군데…… 감히 우리 혜윤이를 그렇게 만든 괴물이 누군데, 연인한테 뒤집어씌우려고 했을까?

“……미안…….”

기어이 의식을 잃기 직전, 가까스로 토해낼 수 있었던 사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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