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 2004년 2월. 문위(文偉) (109/129)

49. 2004년 2월. 문위(文偉)

식물인간 상태인 혜윤이의 몸뚱이와 직면한 아내의 충격은 애초 각오했던 최악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1월 1일 새벽, 손목을 긋는 자해는 길고 긴 지옥의 시작이었다. 물론, 최초이자 최후였던 그날의 경우를 빼면 직접적인 자해라든가 자살 시도는 더 이상 벌이지 않았다. 대신 지독한 거식증과 불면증, 그리고 공황 장애란 증세로 아내는 서서히 스스로를 죽여가고 있었다. 성준이의 최선을 다한 치료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문제는 그게 아내의 무의식 속에서 벌어지는 스스로에 대한 심판이자 살인 행위라는 점에 있었다. 아내는 깨어 있는 의식 상태로는 그런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면서도 실제 내면에서는 스스로를 끊임없는 자기 파괴로 몰아가고 있었다.

차라리 의식적으로 자해를 하거나 자살 시도를 하는 편이 더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막을 수가 있다고 성준이는 다른 임상의 예를 들어가며 설명해주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10년간의 뿌리 깊은 우울증마저 재발한 것이 더 위험하다고 했다. 집중적인 약물 치료 또한 그때뿐일 확률이 높아서, 오히려 약물 치료를 중단했을 경우, 아내는 곧바로 더 확고한 의지로 자살을 시도할 수 있다고 했다. 아내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뿌리 깊은 죄책감이 원인이기에 그것이 제거되지 않는 한 상황이 호전되기는커녕 더 이상 나빠지지 않는 것에조차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그리고 그 죄책감의 뿌리를 건드리는 일이야말로 위 자신과 아내 사이의 파탄을 의미하기에, 위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면초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랬다. 아내는 아내 스스로를 증오하는 동시에 아내를 그렇게 만든 위 자신 또한 미치도록 증오하고 있었다. 혜윤이를 그렇게 만든 이는 자신이기도 하지만 또한 위 자신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혜윤이뿐인가. 타계하신 장모님 또한 원인을 따지자면 위 자신이었다. 혜윤이와의 처절한 대면은 아내로 하여금 뒤늦게 장모님에 대한 죄책감마저 의식의 표면으로 끄집어내게 만들었다.

문젠 그런 자신을 단죄한 그대로 미워하거나 증오하면 그만인데, 그 또한 아내에게는 여의치가 않다는 점이었다. 그건 당연히 자신에 대한 아내의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다. 증오해 마지않는 상대를 증오할 수 없는 것, 단죄하고 복수해 마땅한 상대를 단죄하거나 복수할 수 없는 것, 그것이야말로 아내를 이율배반의 지옥 속으로 밀어 넣은 고통의 뿌리였다. 자신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아내는 표면적으로는 자신을 상처 입히지 못했다. 그 첫날의 자해를 끝으로 더 이상 자해라거나 자살 시도를 하지 않는 점이 그 증거였다. 그러나 무의식 속에서는 끊임없이 위 자신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을 했다. 위를 괴롭히는 것은 또한 아내를 괴롭히는 것이었으니, 결국 서로를 향한 처절한 응징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 응징의 방법이야말로 아내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것! 자신의 최대 약점인 아내의 몸에 지속적으로 복수의 칼을 꽂음으로써, 위 자신을 괴롭히는 동시에 아내 스스로를 괴롭히려는 목적이었다. 그러한 무의식적 작용이 지독한 거식증과 불면증, 그리고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늘어져 누워만 있으려는 심각한 우울증으로 나타난 것이다.

혜윤이와 대면한 한 달 보름여 만에 아내의 몸무게는 17킬로그램이나 빠지고 말았다. 음식이란 음식은 일절 아내의 위를 통과하지 못했다. 하다못해 물 이외엔 주스 같은 액체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다. 무언가를 억지로라도 먹이면 그대로 토해내곤 해서 나중에 식도염에까지 걸리는 바람에, 거식증이 한 달째 접어들었을 때에는 억지로 먹이는 방법은 더 이상 취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병원에서 처방된 수액과 영양제 그리고 우울증 치료제만이 아내의 몸에 주입되는 음식물의 전부가 되었다.

피골이 상접하듯 말라가며 생기가 빠져나가는 아내를 속수무책 바라봐야만 하는 나날은 그대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성준이는 아직 희망을 잃을 때는 아니라고 했다. 심리 치료나 최면 치료는 아주 느리게 효과가 나타나니 참을성 있게 기다려보자고. 더구나 혜윤이와 갑작스레 준비 없이 대면한 충격이 큰데, 그 충격조차 제대로 삭힐 시간이 없지 않았냐고 했다. 시간이라는 가장 훌륭한 약이 있으니 여러모로 차도를 보일 거라고, 인내를 가지라고 충고를 주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본능은 경고하고 있었다. 이건 인내나 시간이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어떤 인위적인 치료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내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로지 신의 은총뿐이었다. 그 외에, 장모님과 혜윤이 두 목숨을 앗아간 인면수심의 죄악을 치료할 만한 방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랬다. 필요한 것은 기적이었다. 물론 신의 존재 따위 일절 믿지 않는 자신에겐 그저 암담한 절망만이 남아 있을 뿐이라는 다른 선언이기도 했다.

최후의 최후, 어쩌면 자신의 목숨을 건 마지막 방법이 있으나, 그건 그야말로 아내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할 도박이기에 섣불리 시도할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런 도박을 감행하기엔 아직 이기적인 미련도 있었다. 본능의 경고에 반해, 성준이가 말해주는 희망 또한 붙들고 싶었다. 최소한의 대가를 치르고 나서 아내가 스스로 털고 일어나는 것에 대한 가냘픈 희망이 그것이었다. 그건 아내의 마음속에 깃든 아내 스스로와 위 자신에 대한 증오와 죄책감이 완전히 걷히는 순간을 의미하기도 했다. 증오와 애정이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힘겹게 줄타기를 벌이고 있는 아내의 피눈물은 자신에게도 뼈를 깎는 피눈물이었다. 그리고 비겁하고 이기적인 자신은 그렇게라도 요행을 빌 수밖에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아내가 스스로를 용서하기를. 그리고 또한 위 자신을 용서하기를. 부디 증오가 아닌 사랑으로 저울추가 기울기를, 자신은 필사적으로 빌고 또 빌었다.

“……그 사람은 어떻습니까?”

메이드 미스 원에게 벗은 코트를 건네며 죽 늘어선 집 식구들 모두에게 버릇 같은 질문을 던졌다. 밤 9시가 조금 넘은 시각. 늦은 퇴근이었다.

“……김 박사님께서 보내신 간호사가 조금 전에 들러서 영양 주사를 놓고 갔습니다. 선생님은 다행히 잠이 드신 것 같구요.”

최 씨 아주머니가 조심스럽게 보고를 주었다. 하긴 보고랄 것도 없었다. 세 시간 전에 수액 주사를 맞고 있다는 보고를 메이드 미스 정을 통해 이미 받았으니까. 지난 한 달 반 가까이 집 식구들의 보고는 대개 녹음된 앵무새였다. ‘누워 계세요.’ ‘영양제를 맞고 계세요.’ ‘기절하셔서 김 박사님이 와 계세요.’ ‘울고 계세요.’ ‘아까 3시쯤에 산책을 하셨는데 10분 만에 도로 들어오셨어요. 기운이 없으셔서 쓰러지실 뻔했거든요. 홍 기사님이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계셔서 다행히 바로 부축해드릴 수 있었어요.’ ‘누워 계세요.’ ‘전복죽을 조금 드셨는데 또 토하셨어요.’ ‘우세요.’ ‘울고 계세요.’…… 거기서 벗어나는 예는 거의 없었다. 어쩌면 그나마 다행일 수도, 아니면 그 자체로 지옥일 수도 있는 최악의 중계방송이었다.

모두 별채로 퇴근하라고 이른 뒤, 침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체취가 코끝으로 다가들었다. 반사적으로 찔끔 반응하는 아랫도리에 실소가 터졌다. 지옥 속에 있는 아내에게 여전히 끊임없이 발정을 해대는 자신은 짐승인 걸까, 사람인 걸까? 악귀(惡鬼)인 걸까, 걸귀(乞鬼)인 걸까? 아니, 정확히 색귀(色鬼)려나?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등을 보인 채 누워 있던 여윈 몸뚱이가 꾸물꾸물 움직이는 게 보였다. 잠든 것이 아니었나? 멍하니 물음을 던지며 침대 가에 엉덩이를 걸친 채 상체를 기울였다. 지속적인 불면증 탓에 잠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아내였다. 잔다는 말에 살짝 안도했던 속내는 이내 허전한 실망감으로 변했다. 막 상체를 돌려 이쪽을 올려다보는 말간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왔어……?”

가라앉은 목소리에선 생기라곤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퀭하니 마른 얼굴이며 몸을 감싸고 있는 헐렁한 흰색 면 티 아래, 사방 뼈마디가 두드러져 보이는 몸뚱이는 절대 정상적인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암 말기에 접어든 환자거나, 그야말로 거식증 환자에게나 적합할 전형적인 얼굴과 몸뚱이였다. 아, 또 하나 예가 있긴 했다. 연희동 집에 가져다둔 몸뚱이 하나도 이런 몰골을 하고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잠만 자는 가련한 몸뚱이. 살아 있는 시체. 바로 누이의 몸뚱이였다. 아내를 이 지경으로까지 극단의 고통으로 몰아가고 있는 몸뚱이.

그런가? 새삼 깨달음이 온다. 이건 누이의 복수인 건가? 누이를 이런 비참한 꼴로 만들어버리고는 자신만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보겠다고, 사랑하는 아내의 가랑이 틈바구니에 폭 싸여 희희낙락 천국에서 살아보겠다고, 호들갑스레 설친 벌인가. 누이와 똑같이 만들어버리겠다고 누이가 저주를 걸고 있는 건가?

“……어, 얼굴빛이 너무 안 좋아…….”

그 한마디를 뱉는 것조차 힘이 드는지 몹시도 헐떡이며 말을 맺는 아내다. 고개를 기울여 아내의 핏기 없는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한다. 흐릿한 땀 냄새 외엔 생명의 냄새라곤 일절 감지되지 않는다. 아내는 음식을 넘기지 못하면서부터 체취마저 변하기 시작했다. 아니, 변했다하기보단 아예 체취가 거의 안 난다고 해야 할까. 그건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것보다도 더 섬뜩한 무시무시한 변화였다. 차라리 오늘 새벽에 자위행위 끝에 뿌려둔 자신의 정액 냄새라도 그냥 둘 걸 그랬다고, 조용한 후회를 씹는다. 뭐, 당장 실천을 하면 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성준이는 차라리 가끔씩이라도 아내와 섹스를 나누는 게 치료엔 더 좋을 것이라고 충고하지만, 솔직히 아내가 완전히 부서질까 질겁하고 있는 자신의 속내를 모르기에 그런 무신경한 충고도 할 수 있는 것일 게다. 아예 먼지처럼 부서져 흩어질까, 꼭 끌어안는 것조차 두려워 벌벌 떠는 절박한 남편의 마음 따위 녀석이 알 리가 없다.

바싹 마른 입술을 핥고, 그 나마의 습기를 찾아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따스하고 축축하다. 그래. 깊은 안쪽엔 그나마 아직은 생명이 살아 있다. 절망할 단계는 아냐. 힘을 내야지. 참아봐야지.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 건 당연하지 않나. 그러니 범사에 감사하고 인내해야지, 문위…….

“……밥은…… 제,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거야? 왜 자꾸 이렇게 말라…….”

입술이 떨어지자 근심 어린 타박이 떨어진다. 하, 자꾸 마른다라. 적반하장도 이만하면 초일류급이다. 아내 걱정으로 꼬치꼬치 마르는 지아비를 걱정하신다? 또 기가 막힌 실소가 샌다. 무의식 속에선 자신을 상처 입히기 위해 기를 쓰면서도, 깨어 있는 의식하에선 이리 지순한 현부(賢婦)가 따로 없다.

“……네가 마르는 걸 원하니까.”

모처럼 진실을 쑤셔본다. 자극하지 말고 기다려보라지만 자신은 더 이상 성준이처럼 느긋할 수가 없다. 전문가의 말보다 자신의 본능을 더 신뢰한다. 특히 이번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어서만큼은 더욱 그러하다. 아내의 상태는 이미 위험 수위를 넘었을 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안다. 온 넋이, 온 감각이, 온 정신이 경고의 신호를 보내오고 있다. 더 이상 방치하면 진짜로 위험해진다고. 극단의 처방이 필요하다고.

“너처럼 마르고 너처럼 죽어가길 바라니까.”

아내의 눈을 들여다보며 또박또박 선언한다. 이내 휘둥그레지는 순한 눈망울. 곧 눈시울 가득 들어차오는 고통. 지독한 고통. 고통. 고통. 또 고통……. 누군가 가슴을 갈기갈기 난도질을 하는 것만 같은 통증이 엄습한다. 못 해. 도저히 못 하겠어. 엄습한 통증은 최악을 가정해야 한다는 두려움과 만나 이내 백기를 든다. 허세 가득한 독기 또한 금세 가라앉고 만다.

기운이 없어 부들부들 떨리는 아내의 두 팔이 자신의 목을 감아온다. 툭 하고 곧 침대 위에 도로 떨어져버릴 것 같아, 보물단지처럼 자신의 손으로 감싸 쥔다. 앙상하게 뼈마디가 걸리는 손가락에 기어이 목이 멘다.

“……아닌데…….”

한숨 같은 가냘픈 부정.

“……너 아픈 거…… 나, 진짜 싫은데…….”

그렇지. 그 또한 진실이지. 차라리 내 고통을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어느 한쪽을 택했다면 네가 이리 되지도 않았겠지. 뒤통수의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쓰다듬는 손길엔 절대적인 애정만 그득하다. 차마 남편을 지옥으로 몰아넣고 싶어하는 독부(毒婦)의 그것이라곤 상상조차 안 가는, 눈물겨운 애정이다.

“……그래. 그렇다면 얼른 털고 일어나. 얼른 이겨내고 일어나봐. 그러면 믿어줄게.”

“…….”

처연하게 물기가 어리는 눈시울이 보인다. 계속 팔을 들고 있기가 힘에 부치는지, 자신의 목에 감긴 양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다. 서둘러 풀어 내리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당장이라도 아내 곁에 눕고 싶었지만 일단 샤워부터 해야 했다. 자신이 혹 묻혀 들여왔을지도 모를 일체의 세균들 때문이었다. 면역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는 아내라 사소한 감염도 조심해야만 한다.

서둘러 슈트를 벗고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샤워기 아래 서니 미처 자각 못 했던 지독한 피로감이 엄습했다. 샤워조차도 귀찮을 지경이었지만, 가능한 한 철저하게 몸뚱이 구석구석을 씻어 내렸다. 씻으면서 보니 욕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몰골 또한 확실히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다. 물론, 아내의 꼴에 비하겠냐마는.

샤워를 마치고 물기를 닦은 몸에 바스 가운만 걸친 채 욕실을 나왔다. 아내는 침대 헤드쿠션에 등을 기댄 자세로 앉아 있었다. 헐렁하게 늘어진 면 티가 아내의 지독히 마른 몸을 더더욱 부각시켜주고 있었다. 파자마 바지가 걸쳐진 하반신도 가시처럼 마르긴 한가지였다. 포동포동 만져지던 귀여운 똥배까지도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으니 말해 무엇 하랴. 또 왈칵 목이 메는 통에 부러 딱딱한 얼굴로 아내를 외면했다.

침대 옆 협탁 서랍에서 어제 아내에게 읽어주다 잠든 책을 꺼내 들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아내처럼 쿠션에 등을 기댄 자세로 아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멍하니 자신의 일거수일투족만 좇고 있던 아내의 몸을 끌어당겨 품에 끌어안았다. 말랐어도 자신의 몸뚱이에 요철처럼 착 들러붙는 사랑스러운 몸뚱이였다. 정수리와 목덜미 그리고 얼굴 곳곳에 차례로 키스를 했다. 기원을 담은 의식의 키스였다. 부디, 조금만…… 조금만 아프고 떨치고 일어나줘…… 조금만 우릴 증오하고 용서해줘…… 그래서 하루빨리 건강한 내 마누라로 되돌아와줘…… 제발 그래주라, 내 강아지…….

기원을 끝내고는 상체를 돌려 아내의 등을 끌어안았다. 마주 안는 것보단 그렇게 안는 것이 책을 읽기 편한 자세였기 때문이었다. 등 뒤 헤드쿠션 각도를 더 세워 자세를 안정시키고 아내의 허리를 좀 더 당겨 안았다. 벌어진 사타구니 사이에 아내의 마른 엉덩이가 닿았고, 미리부터 아내의 체취와 감촉에 반쯤 일어서 있던 페니스는 언제나 그랬듯이 완전히 발기했다. 아내의 허리를 꼭 끌어안아 발기한 성기를 가능한 한 아내의 몸에 밀착시켰다. 기운 없는 몸뚱이는 쓰러질 것처럼 자신의 품 안으로 기대왔다. 뺨에 닿은 아내의 머리카락에서 흐릿하게 지워진 샴푸 냄새가 났다. 그러고 보니 사흘째 머리를 감겨주지 못했다. 기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아내이기에 샤워조차도 가려서 시켜줘야만 했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엔 머리부터 감겨주자고 뇌리에 새기며 한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펼쳐들었다.

사랑의 기적. 마리안느 윌리엄슨 지음. 아내가 잠들 때까지 요 며칠 동안 아내에게 읽어주고 있는 책이었다. 마음 치료에 좋다고 성준이가 권해주는 책들을 매일 밤 지속적으로 읽어주곤 있는데 하나같이 도통 속 편한 헛소리만 같아 자신으로선 우습기 짝이 없지만, 아내는 그럭저럭 귀를 기울이는 눈치였다. 읽어주다 보면 어느새 짧게나마 잠이 들곤 하는 아내였으니까. 물론, 서로를 상처 입히기로 작정한 아내가 그 반대로 치유에 도움을 주는 책들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까닭은 없었다. 그저 단지 의식적으로 주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 표면적으로나마 아내가 귀를 기울이게끔 만드는 요인일 것이다. ‘내용은 잘 받아들여지지가 않지만 네 목소리만큼은 진짜 듣기 좋아.’ 아내가 어젯밤 들려준 한마디 비평이었다. 역시 허무한 웃음을 짓게 만든, 서글픈 비평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은 아주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을 자기 삶 속에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자기를 받아주는 어떤 모임에도 속하고 싶지 않다는 게 그루초 막스 신드롬이다. 내가 멋진 사람이라는 누군가의 발견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은 나 자신이 멋진 사람임을 스스로 발견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자기 인정은 에고에게는 죽음이다…….”

나지막하게 되풀이되는 낭독에 아내의 몸이 차츰 나른하게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허리를 감고 있는 손바닥으로 살살 아랫배를 어루만져주며 목소리를 더욱 낮춰 낭독을 계속했다. 그렇게 40여 분쯤 지났을까? 새근새근 평온한 숨소리가 오롯이 귓가에 밟혀들고 있었다. 살그머니 책을 내려놓고 등을 받친 쿠션을 빼냈다. 제법 익숙해진 기민함으로 아내를 살며시 침대에 바로 눕힌 후, 자신도 바스 가운을 벗어 던진 다음 불을 끄고 아내 옆에 누웠다.

워낙 불면증이 심해 일단 잠이 들면 시체와 다름이 없는 아내였다. 모로 몸을 틀어 아내를 품에 안은 후, 팔베개를 해서 아내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팍에 기대게 한 채 조심스레 자위를 했다. 요 한 달 반 남짓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저 발기를 풀기 위한 목적밖에 없었기에 빠르게 손을 놀렸다. 사정까진 5분이 채 넘지 않았다. 아내의 가랑이 사이에 뿌려지는 정액을 흐릿하게 자각하며 억눌린 교성을 물었다. 우울한 기분 탓인지 눈물도 조금 흘린 것 같았다. 축축해진 가랑이 사이를 아내의 파자마 자락에 대충 닦아낸 뒤 다시 아내를 품 안에 껴안고 잠을 청했다. 피로한 휴식이었다.

쿵 하는 흐릿한 울림을 들은 것 같았다. 아니, 몸이 자각한 것 같았다. 눈을 떴다. 누군가 칼로 의식을 후빈 것 같은 소스라치는 전율이 흘렀다. 아니, 생명의 위협을 순식간에 자각한 야성의 본능이었다.

전광석화처럼 옆을 더듬어 아내의 부재를 확인한 즉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화살 같은 투시로 단숨에 방 안을 더듬어 목적한 대상을 찾아냈다. 아내는 욕실과 침실 사이 어중간한 지점에 쓰러져 있었다. 상반신이 욕실 쪽에 걸쳐 있으니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을 확률이 컸다. 머리가 꽉 조여드는 것만 같은 압박감이 들었다. 아니, 심장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조용히 이를 악물고 아내에게 뛰어갔다.

떨리는 손길로 맥과 숨길부터 확인했다. 두부 외상은 일단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안심할 계제는 아니었다. 차라리 출혈을 보이는 쪽이 더 안전한 것이 두부 손상이었으므로. 쓰러진 방향과 자세, 그리고 살짝 부어오른 왼편 광대뼈를 보니 앞으로 쓰러진 모양이었다. 역시 뒤로 쓰러지는 것보단 꽤나 양호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숨길을 턱턱 틀어막는 지독한 공포심을 도저히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영양 결핍과 빈혈로 아내가 실신한 것은 닷새 전 아침이 처음이었다. 그 이후로 한 번 더 그런 일이 있었고, 집 식구들에게 아내로부터 단 한순간도 눈을 떼지 말라는 당부를 주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로 두 번 더 실신할 것 같은 경우가 있었는데, 집 식구들의 재빠른 판단으로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를테면 욕실이나 계단 같은 곳에서 실신하는 경우였다. 그런데, 바로 지금 그 ‘위험한’ 상황이 닥친 것이다.

악악 하고 비명이라도 지르고픈 히스테리를 필사적으로 찍어 누르며 구급차를 불렀다. 새벽 4시 무렵이었다. 별채의 식구들은 깨우지 않았다. 깨워봤자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이번만큼은 철저하게 전문가들의 손에 의해서만 처리해야 할 상황이었다.

몇 분 만에 구급차가 왔다. 두 명의 구급 대원은 전문 요원들답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조심스레 아내를 들것에 실었다. 구급차에 실린 아내는 10여 분 만에 인근 종합병원의 응급실로 옮겨졌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길고 길었던 10여 분이었다.

두 명의 응급 레지던트들이 달려들고, 각종 검사 오더가 떨어지는 와중에 아내는 깨어났다. 사방의 칠흑 같던 어둠이 물러가는 순간이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아내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다리도 떨리고 있었다. 아니,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안 돼. 이를 악물었다. 더 이상은 안 돼. 더 이상은 못 해. 이럴 수는 없어. 더는 이렇게 둘 수 없어. 속으로 악악 비명을 질러대며 맹세했다. 이번엔 깨어났지만 다음번엔 또 결과가 어떨지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 불시의 뇌진탕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도 죽음은 아내의 도처에 있었다. 도처에 숨어 똬리를 튼 채, 호시탐탐 그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끝까지 욕심을 부리다가 통째로 다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여기까지였다. 베팅의 순간이었다.

어지러움과 약간의 두통이 아내가 진술하는 증상의 다였지만, 의사들이 제시하는 단 하나의 검사도 빠트리지 않았다. 결과가 나오고 전문의의 진단이 떨어졌을 땐 다음 날 오전 9시 무렵이었다. 다행히 가벼운 뇌진탕 증세만 있을 뿐 뇌에 이상은 없다고 했다. 아내를 처음 진찰한 응급의들은 뇌진탕이 문제가 아니라 급격한 체중 감소가 더 심각하다고 했다. 여기서 더 체중이 빠진다면 위험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물론 자신 역시 치가 떨릴 지경으로 뼈저리게 자각하고 있는 저 ‘위험’이었다.

아내를 퇴원시키고 오전 10시 무렵 회사에 출근했다. 지각 출근으로 약간의 일정 조정만 했을 뿐, 그날 계획된 모든 일거리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제대로 처리해냈다. 서두른 끝에 6시 정시 퇴근도 가능해졌다.

퇴근하기 직전, 그 남자에게 전화를 넣었다. 처음엔 의심쩍은 기색으로 자신의 말을 조용히 경청하던 남자는 얘기를 끝내자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남자의 감정적 반응은 별 의미가 없었다. 담담하게 거래에 응할 것인가 말 것인가만 타진했다. 남자가 한동안 침묵을 지키는 동안에도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어차피 그 남자에게 더 이상 잃을 패는 없었다. 더구나 이건 그 남자에겐 천재일우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거절할 까닭이 없었다. 4∼5분쯤의 숙고가 이어진 끝에 남자가 대꾸했다. “그쪽의 패배를 기원하지.” 자신의 그것만큼 간결한 답변이었다. 역시 꽤 마음에 드는 수컷이었다. 아내를 사이에 두고 그 남자와 경쟁했다는 사실이 새삼 뿌듯한 만족감을 주었다. 전화를 끊고 귀로에 올랐다.

퇴근길엔 잠시 성준이에게 들러 결심을 알렸다. 사색이 된 친구의 만류를 담담히 뿌리치고 ‘우리 집’으로 향했다. 언제까지나 ‘우리 집’이길 바라는 ‘우리 집’이었다. 아내와 자신만의 안식처였다.

일단 결심이 서니 의외로 머리는 맑았다. 어차피 확률은 50대50. 자신이 이기면 소유하고, 자신이 지면 자유를 주리라. 아니, 생명을 주리라.

“……그 사람은 어떻습니까?”

집에 도착해, 죽 늘어선 집 식구들에게 버릇 같은 질문을 던졌다.

“……누…… 워 계세요, 사장님…….”

메이드 미스 원이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대꾸를 주었다.

“……그, 그래도 오후엔 잠시 작업실을 들여다보시기도 한걸요! 표정도 많이 밝아 보이셨고요!”

더 침울해진 자신의 표정을 슬쩍 훔쳐보는 것 같더니 서둘러 덧붙이는 미스 원이다. 하긴 요즘 다들 이랬다. 좀처럼 차도를 보이지 않는 아내의 상태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해 전하는 일에 스트레스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새삼 집 식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이도 오늘로써 끝일 테니, 더 이상 미안할 일은 없겠지만.

“저녁 시중은 필요 없으니 다들 그만 퇴근하세요. 아내와 단둘이 있고 싶습니다.”

담담한 명령과 함께 코트와 재킷을 메이드들에게 건네고 침실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아내의 체취를 흠뻑 들이마셨고, 여지없이 발기하는 페니스에 실소했고, 안개처럼 죽음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는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기척을 느낀 모양인지 역시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아내가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비몽사몽 잠이라도 들었었는지, 눈빛은 게슴츠레했고 표정도 나른했다. 새벽에 욕실에서 쓰러진 훈장일 푸릇한 멍이 왼쪽 광대뼈를 흐릿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부기는 그리 크지 않아 언뜻 보면 못 알아챌 정도의 가벼운 상흔이었다. 고마웠다. 흔적을 거의 안 남긴 타박상도, 뇌에 별 이상을 보이지 않은 가벼운 뇌진탕도. 자신의 결심이 서기까지, 그저 가벼운 경고만을 던져준 아내의 무의식도.

“……왔어……?”

점점 더 상투적인 인사말만을 내뱉고 있는 야속한 입술을 덥석 빨아들였다. 세상의 세균들을 몽땅 다 끌고 들어온 양손은 무의식적으로 만지고픈 욕구 탓에 뒤로 단단히 뒷짐을 지었다. 이온 음료를 마셨는지 희미한 복숭아 향이 나는 입안을 감격해서 빨아들였다. 오렌지 주스는 안 되지만 이온 음료까지는 거부하지 않는, 그나마 몸뚱이의 자비에 또 한 번 감사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나가서 오늘 진짜 피곤했지……?”

입바른 염려이자 애절한 진심이기도 한 아내의 말에 슬프게 웃었다.

“……샤워하고 나오마.”

어딘가 선을 긋는 것 같은 자신의 기운을 감지해서일까? 뒤따라오는 아내의 시선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 것은.

부지런히 샤워를 마치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실내복을 주워 입었다. 아내가 멋지다고 감탄했던 차림새를 기억해내 특별히 골라 입었다. 물 빠진 빈티지 진에 은빛의 실크 셔츠였다. 증오에서 사랑 쪽으로 시소의 기울기를 옮기기 위해서라면 자신은 드렉퀸처럼 기괴한 꼬락서니로라도 분장할 용의가 있었다. 흡사 전투에 임하는 갑옷을 고르는 것 같은 절박한 비장함이 느껴져 실소했다. 그렇다면 이건 아내와의 전투인 셈인가? 장미의 전쟁(마이클 더글러스와 캐서린 터너 주연의 1989년작 영화. 부부의 이혼 전쟁을 모티프로 하고 있음)? 또 한 번 기가 막힌 실소를 물었다.

셔츠를 입고 바지 벨트를 채우고 있자니, 하루 종일 제대로 된 음식을 넘기지 못한 위장이 새삼 요동을 치는 것이 느껴졌다. 겸사겸사 오랜만에 아내와 식탁에 마주 앉자고 다짐을 했다. 혹시라도 식욕을 느낄까, 거식증 초기엔 억지로라도 식탁에 앉히곤 했는데 그 부질없는 시도를 그만둔 지도 꽤 되었던 것이다.

“……예뻐…….”

멋을 낸 보람이 있는지 침실로 들어서자마자 아내의 가냘픈 탄성이 들렸다. 나른한 눈길엔 익숙하다 못해 문신처럼 선명한 자신에의 숭배와 찬사가 가득하다. 증오의 상대라 해도 여전히 아름답다고 봐주는 아내다. 용서를 못 하는 나머지, 복수의 수단으로 자기파괴를 감행하고 있어도 여전히 자신의 몸에 매혹되는 아내다. 절대적인 숭배와도 닮은 애정으로 여전히 자신의 발아래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아내다.

“……예쁜가? 난 우리 마누라가 예뻐서 미치는데……?”

담담히 대꾸하며 아내를 향해 양팔을 뻗었다. 겨드랑이 사이와 허벅지 중간에 팔을 꿰어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현저하게 줄어든 몸무게 탓일까. 흡사 애완견을 안은 것처럼 가벼운 존재감에 새삼 가슴이 미어졌다.

“……위야……?”

“……저녁 먹으려는데 혼자 먹고 싶지 않아서 그래. 그냥 마주 앉아만 있어줘도 상관없으니까 식당에 가자.”

“…….”

자신의 목덜미를 양팔로 살며시 감아들이며 품 안에 머리를 기대오는 아내다. 예스의 사인이다. 하긴 노라고 말했대도 강제로 끌고 갔겠지만. 이판사판이 아닌가. 사느냐 죽느냐가 아닌가. 냉정한 마누라의 사소한 저항 따위에 질겁할 군번은 이미 저만치 날아가버린, 간덩이가 부을 대로 부어버린 서방님이 아닌가 말이다.

식탁 의자에 아내를 앉히고 잿빛의 트레이닝팬츠와 검정색 니트 스웨터 차림인 아내가 혹시라도 한기를 느낄까 싶어 무릎담요를 가져다 어깨에 둘러주었다. 기운이 없는 것은 당연지사고, 그래도 의자에 앉을 정도로는 버텨주고 있는 아내의 몸뚱이에 감사했다.

따로 식탁을 준비할 필요는 없었다. 식탁 위엔 몇 가지 반찬들과 빈 밥공기가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가스레인지 위 냄비에 든 것은 반쯤 식은 동태찌개였다. 밥솥에서 밥을 퍼 담고, 찌개 냄비도 식탁으로 날랐다. 모래알을 씹는 것처럼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 음식들을 기계적으로 삼켰다. 아내야 어쨌든 자신은 자해를 하면서까지 증오할 대상이라곤 없었으니까. 맞은편에 앉은 아내는 그런 자신을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그릇에 수저가 부딪치는 소리와 자신이 음식물을 씹어 삼키는 소리 외엔 진공 같은 침묵 속에서 식사를 끝냈다. 더 이상 속이 뒤틀리지 않는 것에 감사하며 식탁을 치웠다. 포트에 찻물을 올리고 아내를 위해선 인삼차를, 자신을 위해선 녹차를 준비했다. 설마 인삼차마저 거부할까 싶어 묻듯이 아내의 눈을 보니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 정도는 마실 수 있다는 사인이다. 아니, 마셔주겠다는 적선이다.

차를 우린 다음 아내를 안아 거실 소파로 옮겼다. 도로 식당으로 가 우려둔 녹차와 인삼차 잔을 들고 아내의 옆에 몸을 부렸다. 적당히 마시기 좋게 식은 두 개의 찻잔을 소파 앞에 놓인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대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아내의 의아한 눈길이 자신을 따라왔다. 아내에게 건네줄 줄 알았던 찻잔을 탁자 위에 놓아버린 때문이리라. 대답 대신 셔츠 앞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그것’을 꺼내 들었다. 부스럭거리며 포장을 푸는 소리에 아내의 시선도 ‘그것’에 모였다. 그건 사방 10센티쯤 될 크기의 평범한 약 봉지였다. 아내의 우울증 약이 처방돼 있던 봉지와 똑같은 모양새에 아내의 눈빛에 서렸던 의문은 곧 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봉지에서 꺼낸 가루약을 아내의 인삼차 잔은 물론 자신의 녹차 잔에도 털어 넣자 도로 묻는 듯한 눈길이 자신의 얼굴을 향했다. 아내의 의문이 가득한 눈길을 의식하며 약이 잘 섞이도록 두 개의 잔을 천천히 흔들었다.

“……그거 내 약 아니야……?”

자신의 무심해 보일 침묵이 답답했는지 마침내 아내가 입을 열었다. 찻잔을 도로 탁자에 내려놓고 아내를 돌아보았다. 멍하니 초점 없던 동공엔 어느새 선명한 이지(理智)가 되돌아와 있었다. 의문이 섞인 미묘한 불안감과 함께. 역시 자신의 태도에서 이미 무언가를 읽은 게 틀림없었다. 자신의 기척에 관한 한 아내는 여전히 예민한 더듬이를 갖고 있었다. 고마운 건지 애틋한 건지, 또 목이 울컥 메었다. 칼처럼 긴장돼 있는 신경에도 불구하고 뜬금없는 감동까지 느끼는 순간이었다.

“……아니야.”

억눌린 감정 탓에 더 무뚝뚝해진 대꾸를 던지고는 아내를 끌어당겨 무릎 위에 앉혔다. 역시 막판이 되니 용기가 스러진 걸까? 차마 아내의 눈을 직시할 수가 없어 마주 앉는 대신 아내의 등을 자신에게 기대게끔 돌려 품은 것이다. 아내의 어깨와 허리를 두 팔로 꼭 휘감은 채 뒷목덜미에 입술을 눌렀다.

“……그…… 럼……?”

“…….”

“……그, 그럼 무슨 약인데……?”

“…….”

“……위…… 위야……?”

떨림이 들어간 아내의 목소리에서 확연한 불안감이 읽혔다. 더는 늦출 수 없었다. 피할 수도 없었다. 이를 악물었다. ‘용기를 내라, 문위!’ ……베팅의 순간이었다.

“……고통 없이 완전히 잠들 수 있는 약.”

“…………? ……? ……!!!!!”

잠시 의미를 반추하는 것처럼 잠잠하던 품 안의 몸뚱이가 이내 회초리를 맞은 것처럼 움찔했다. 끌어안은 두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가늘게 시작했던 몸뚱이의 떨림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진정을 시키듯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드러난 뒷목덜미와 귓불과 정수리에 조용히 키스의 비를 뿌렸다.

“……그…… 그…… 그…… 그게…….”

“……더는 못 보겠어서.”

“……?”

“……떨지 마, 마누라. 강제로 뭘 어쩌겠다는 게 아니니까. 네가 원하지 않는 결정은 안 해.”

“…….”

“……느리게 죽어가는 걸 지켜보느냐, 아니면 단숨에 끝내는 쪽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야. 나는 너보다는 독하지 못한가 봐. 두렵고 괴로워서 더는 지켜볼 수가 없어.”

“…….”

“……너랑 나…… 도저히 용서 못 할 것 같으면 길게 끌지 말고 지금 끝내자고.”

“…….”

“……너 혼자 사라져도 어차피 난 따라갈 거야. 그건 알지?”

“…….”

“……그러니까 여기서 끝내자. 네가 결정을 해. 지금 여기서 완전히 용서하고 서로에 대한 심판과 복수를 끝낼지, 아니면 끝까지 마무리를 할지. 나는 네 선택을 그대로 따를게.”

“…….”

“……반드시 해야 할 일인 것 같으면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해치워버려. 나는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괜찮으니까. 죄의 대가도 치르고 너를 갖는 일이기도 하지. 나로선 별로 손해 보는 일도 아닌 셈인가? 물론 네가 그 반대를 택해준다면 더 좋긴 할 거야. 우린 기왕에도 너무 많은 것을 놓쳐왔으니까.”

“…….”

“……사는 재미랄까…… 앞으로도 너하고 함께 누리고 싶은 게 참 많으니까. 그런 것들을 다 버려두고 빨리 가버리는 건 많이 아쉽지. 하지만 뭐……. 어차피 네가 우리를 용서해야 그런 것들도 가능한 셈이니 상관은 없어.”

“…….”

“……어떡할래? 그만 끝낼래?”

“…….”

속은 칼끝처럼 긴장해 있는 주제에 거침없이 떨어지는 달변이 가증스러웠다. 그야말로 사기 전문 도박꾼답다고 해야 할까.

지진처럼 경련을 일으키고 있던 몸뚱이가 차츰 떨림이 누그러지더니 이내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하긴 오래 긴장을 유지할 만한 체력이 아니었다. 가슴이 아팠다. 자신은 끝까지 이 여린 강아지를 밀어붙이기만 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사실이 지긋지긋했다.

질질 늘어지는 몸뚱이를 조심조심 돌려 안은 다음 소파 위에 눕혔다. 겨우 시선을 마주칠 용기도 생겼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더 이상 자신이 할 일은 없었다. 모든 걸 운에 맡기는 수밖에.

“……그거 할 수 있을까?”

문득 가냘픈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고요한 눈길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또렷한 이지가 서린 눈빛이 거기 있었다. 기력이 없어 축축 늘어지는 사지와는 180도 다른 단단함이었다. 순간, 가슴이 꽉 조여드는 것만 같은 아찔한 쇼크가 뇌리를 강타했다. 서로의 패가 보였다. 운명이 가진 패와 자신이 가진 패. 그리고 결과도 선명하게 드러나버린 패. 몰락의 패.

“……저거 마시고도 그거 할 수 있어?”

단순하면서도 진지한 의문이었다. 아내가 그랬던 것처럼 마치 그 대신이기라도 하듯 이번에 자신의 사지가 벌벌 떨고 있었다. 개의치 않았다. 끝이 보였다. 자신의 패배였다. 더 이상 무에 두려울까.

“……물론이지. 하고 싶나?”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아내의 양쪽 뺨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입술을 기울여 얼굴 곳곳에 깃털 같은 입맞춤을 되풀이했다. 머릿속이 백지가 된 것 같았다. 그저 아득하고 아득하기만 했다.

“……응. 너랑 하다가 완전히 잠들면 그게 천국이잖아.”

“…….”

“……하자, 위야. 지금 무척 하고 싶어졌어.”

“…….”

아랫도리에 닿아오는 아내의 발기가 느껴졌다. 정확히 48일 만의 발기였다. 쓰라린 기쁨이었다.

천천히 아내의 옷을 벗겼다. 알몸으로 소파 위에 늘어져 있는 마른 몸뚱이를 들여다보며 자신의 것도 벗어 던졌다. 여전히 몸이 떨렸다. 다행히 안는 데 불편을 줄 정도는 아니어서 적이 안심을 했다.

아내 위에 몸을 겹치기 직전, 아내가 차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탁자 위에 반쯤 식어버린 찻잔을 들어 하나는 아내에게, 남은 하나는 자신이 마셨다. 달콤하면서도 씁쓰름한 맛을 음미할 틈도 없이 단숨에 털어 넣고 아내에게 입을 맞췄다. 아내의 입안에서 풍기는 인삼 향이 감미로웠다.

느리고 긴 애무를 했다.

느리고 긴 입맞춤을 했다.

아내의 온몸, 단 한 부분도 빠짐없이 핥고 빨아 짙은 마킹을 새겼다. 윤활제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자신의 타액만으로도 충분했다. 자신의 입안에 아내의 입구를 품고 길고 긴 애무를 뿌렸다. 아내는 천천히 자연스레 몸을 열었다.

점점 더 열락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아내의 얼굴을 황홀하게 들여다보며 아내의 몸 안 깊숙이 자신을 파묻었다. 기진해 헐떡이면서도 별처럼 빛나는 애정 어린 시선이 자신을 묶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자신을 향해 손을 뻗어오는 아내에, 그 이상일 절대의 애정으로 마주 잡았다. 영원한 사랑의 맹세에 입을 맞추고, 영원한 결혼 의식일 웨딩 링처럼 서로의 깍지를 꼈다.

혹여 부서지지 않을까, 가슴을 떨며 최대한 느리고 부드럽게 삽입을 되풀이했다. 마지막이니만큼 죽어도 잊지 못할 쾌락을 선사하고도 싶었지만 그조차 미련한 집착이란 것을 알았다. 다만 오래고 오래도록 시간을 들여 아내의 몸 안에 머물렀다. 자신은 세 번 파정하고 아내는 한 번에 그치게 했다. 기력이 바닥을 달리는 아내이기에 다른 이를 위해 쓰일 정기 또한 남겨두어야만 했다. 그래야 목적한 대로 아내에게 생명을 줄 수 있을 터였다. 아내는 그 단 한 번의 파정을 끝으로 죽음 같은 숙면에 빠져들었다. 잠이 들지 않으면 진정제 주사라도 놓을 생각이었는데 다행한 일이었다. 삶에 대한 완전한 포기가 그리도 지독했던 불면증마저 가져가버린 모양이었다.

기진해 잠든 아내의 몸 안에서 도로 빠져나와야 하는 일은 뼈를 깎는 고통이었다. 매 순간 차라리 이대로 함께 가버릴까 하는 악마의 유혹과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아내의 선택대로, 죄 갚음을 하고 영원히 함께 동면에 들까……. 물론 아내에 대한 궁극의 사랑은 끝끝내 그 저열한 유혹을 물리쳐주었다. 소유하는 이상으로 자신은 아내의 따뜻한 체온을 갈망했다. 살아 있는 미소를 원했다. 더운 피가 흐르고, 푸릇푸릇한 기운이 맥동하는 사랑스러운 근육과 살갗을 원했다. 생명을 원했다.

숙면에 든 아내의 몸 안에서 마지막으로 미친 듯이 포효를 했다. 양팔을 소파 위에 단단히 고정한 채, 최대한 아내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연결된 사타구니 부위만 비비고 또 비벼댔다. 마지막이었기에 파정 또한 늦추고 또 늦추기 위해 기를 썼다. 그러나 마침내 짐승의 성욕도 더 이상 어쩌지 못하는 순간이 왔다. 아내의 몸 안에 사납게 뿌려지는 정액을 자각하고 온 넋으로 떨어진 것은 오르가슴의 광희가 아닌 지옥의 절망이었다. 움찔움찔 경련하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토해낸 다음 천천히 아내와 분리했다. 뽑아든 성기를 따라 자신이 뿜어낸 정액이 주르륵 따라 나왔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단 한 방울이라도 도로 집어넣으려 기를 썼다. 역시 부질없는 집착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하하, 실소를 터트렸다.

온 몸뚱이가 땀범벅이었다. 온 얼굴은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눈물로 범벅이었다. 소리 없는 통곡 탓이었다.

비틀비틀 기진한 몸뚱이를 일으켜 세웠다. 드레스 룸으로 가서 가장 따뜻할 것 같은 털 코트를 가져와 아내의 알몸에 둘렀다. 침실에서 담요도 하나 가져왔다. 소파 옆에 벗어 던진 옷가지들을 대충 주워 입고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결론이 났군.]

수면기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바리톤이 바로 치고 들어왔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조금 넘어 있었다.

“지금 데려가겠다.”

담담히 대꾸를 주고 전화를 끊었다.

냉정하게 벼려진 이성을 유지하며 외출 준비를 했다. 볼보의 차 키를 찾아 현관 밖에 주차돼 있던 차에 시동을 걸고, 히터를 틀어둔 뒤 거실로 되돌아왔다.

아내의 몸을 감싸고 있었던 옷가지들을 모아 침실로 들어갔다. 아마도 앞으로 유일하게 아내의 체취가 배어 있을 귀한 것이기에 여행용 케이지를 하나 찾아 그 안에 소중히 집어넣었다. 집 식구들에게 이 케이지만은 손대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줄 의지도 새겼다.

드레스 룸으로 가 코트를 걸친 뒤 다시 거실로 나왔다. 곤히 잠든 아내의 몸을 담요로 둘둘 감쌌다. 혹시라도 이동 중에 감기라도 들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었다. 현관문 밖엔 늦겨울 마지막 기세를 피워 올리기라도 하듯, 영하 15도가 넘는 한파가 들이닥쳐 있었다.

담요에 친친 감긴 아내를 번쩍 안아 들고 확인하듯 소파 주변을 일별했다. 찻잔 두 개와 소파에 군데군데 묻은 정액의 얼룩 외엔 달리 처리해야 할 것은 없었다. 정사의 흔적은 내일 아침이면 말끔히 치워질 것이다. 자신만 보면 수시로 얼굴을 붉히곤 하는 메이드 아가씨들에 의해.

아내를 안고 현관 밖으로 나왔다. 서슬 퍼런 칼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혹여 아내에게도 들이닥칠까, 서둘러 조수석으로 밀어 넣은 뒤 자신도 운전석에 올라 문을 닫았다. 히터를 틀어두었던 차 안은 제법 따뜻해져 있었다. 그칠 줄 모르고 흘러내리는 눈물 탓에 시야가 자꾸만 흐려졌다. 이를 악물고 한동안 심호흡을 했다. 창자가 끊어지는 것만 같은 아랫배의 통증은 분명 심리적인 착각에 불과하리라. 두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의 물기를 대충 닦아냈다. 체질화된 인내심이 마침내 효력을 발휘한 걸까? 감정의 폭풍은 다시금 얼추 가라앉았다.

등받이에 기댄 채 잠들어 있는 아내에게 몸을 기울려 안전벨트를 매주고, 자신의 것도 단단히 고정한 다음 차를 출발시켰다. 대문을 빠져나가며 흘낏 사이드미러를 살폈다. 군데군데 켜진 정원의 가로등이 뿌옇게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운명의 어둠으로부터 ‘우리 집’을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소심한 파수꾼처럼 보였다. 압도적으로 내려앉은 어둠에 비해 부질없는 저항이었다.

휘오오오오오.

쥐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집 안 구석구석으로부터 섬뜩한 귀곡성이 들려왔다. 무자비한 칼부림을 시작한 한파의 포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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