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2004년 4월. 김강원(金鋼圓)
연인과 함께하는 베를린에서의 사흘째 밤이었다.
4월 6일. 오늘부터 두 달간 개최될 예정에 있는 베를린 템포레레 쿤스트할레전(展) 오프닝 파티가 열린 날이었다. 템포레레 쿤스트할레는 구동독 의사당 건너편에 위치한 임시 미술관 전시 홀로, 이번에 연인이 초대 작가로서 참여한 전시회는, 템포레레 아트커뮤니케이션 전시 조직이 결성된 지 두 해째를 맞아 특별히 기획한 독일 현대미술과 동양 현대미술의 연계와 흐름을 조망하는 첫 이벤트인 셈이었다.
그저 자신의 집 한편에 마련해준 작업실에만 틀어박혀 그림만 그릴 뿐, 도통 외부로는 관심을 기울이려 들지 않는 연인을 반강제로 끌어오다시피 결행한 베를린행이었다. 피골이 상접했던 거식증의 여파도 거의 회복되는 단계에 있었고, 우울증 치료도 상당 부분 호전을 보이고 있었기에 무모한 욕심을 내본 강원이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강원 자신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속살거리고 있는 연인에 대한 회의와 불안감이 반강제적인 출국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도저히 인정하기 괴롭지만, 자신이 출국한 사이 연인이 떠나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바닥 모를 불안감이 그 정체였다.
다행스럽게도, 일단 베를린에 첫발을 내딛은 연인은 그럭저럭 낯선 환경에 흥미를 보이는 것도 같았다. 도착하자마자 막바지 오프닝 준비 작업이 한창인 쿤스트할레로 찾아가 연인과 자신의 연합 설치 작품이랄 수 있는 전시 홀을 꼼꼼하게 관람했으며, 어젠 자신을 따라 베를린시의 여러 미술관들과 관광지들을 순례하는 데이트에도 흥미를 보였었다(비록 여전히 싸늘한 냉기를 품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만은 거두지 않긴 했지만!). 그리고 오늘, 이번 여행의 표면적인 핑계거리일 오프닝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다. 전시회 개막 파티는 미술에 관심을 지닌 세계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독일과 동양권 각 나라를 대표하는 전시회 작품들도 풍성했다. 몇몇 부스는 아직도 좀 혼돈에 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작품들의 카테고리가 잘 나뉘어 있지도 않았으며, 작품 설명이 잘돼 있지도 않아서였다. 그런데 또 부러 그렇게 느슨히 열린 형태로 전시회가 꾸려지고 있었다. ‘템포레레 아트커뮤니케이션’의 기획 스타일 자체가 매 순간 역동적으로 전시회에 변화와 신선한 생명력을 부여한다는 취지였기 때문이었다. 작품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며 둘러보는 것도 큰 재미였다.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완벽하게 짜인 스타일의 여타 전시회 오프닝들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던 것 같았다. 연인 또한 같은 것을 느끼는지, 참가 작가로서 누구보다도 더 두드러지게 사람들과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있는 형편이었음에도, 느긋하게 사람들과 어울리며 파티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내심 강제를 부리길 잘했구나 하며 흡족해하고 있는데 문득 ‘그 남자’가 시야에 밟혀들어온 것이다.
저녁 8시쯤이었을까? 아니, 실은 그보다 더 일찍 나타나 있었던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2월의 그 밤보다도 그닥 나을 것도 없는, 형편없이 마르고 초췌한 낯빛을 한 남자는 여전히 아름다웠으며 또한 여전히 범상치 않은 카리스마로 주변 이목을 끌고 있었다. 동행이 있는 듯, 어느 예쁘장한 한국 여자가 남자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남자는 무심한 표정으로 아는 체를 해오는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전시장 곳곳을 돌며 구경을 하는 것 같은 남자를 볼 수도 있었다. 남자도 자신을 알아보았으며 간간이 시선까지 마주쳤음에도, 남자는 그저 간단한 목례로 첫인사를 전했을 뿐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조차 않았다.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낯빛이 변한 강원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지극히 초연한 태도였다.
파티가 재미없어진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재미가 없다 뿐인가. 순식간에 까마득한 나락에 떨어진 것만 같은 두려움과 자격지심에 가식적인 사교의 웃음조차 떠올릴 수가 없었다.
당장 연인부터 찾았다. 관계자들과 다소 미흡해 보였던 부분들을 체크하느라 연인을 잠시 방치하고 말았다. 미로처럼 펼쳐진 전시 스테이지를 이리저리 헤매고 다닌 끝에 가까스로 연인을 발견한 곳은 연인의 부스가 왼편으로 바라다보이는 서쪽 홀 통로 끝이었다. 순간, 사지의 힘이 쑥 빠져나가는 것 같은 아득한 절망을 느낀 것 또한 당연한 노릇이었다. 미친 듯이 세동을 거듭하는 심장을 추스르며 20여 분 동안 연인을 찾아 헤맨 까닭이 또한 거기에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연인과 10여 미터쯤의 거리를 두고 우두커니 선 채, 남자는 연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연인은 통로 한편에 놓인 휴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쉬이 피로를 느끼는 한쪽 다리 때문이었으리라. 남자는 막 연인의 부스에서 나오던 중이었던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언제부터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강원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나서도 두 사람은 그렇게 10여 미터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미동도 않은 채 그저 서로의 얼굴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둘 다 표정이 없었으며, 둘 다 낯빛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둘 다 안쓰러울 지경으로 초췌하게 말라 있었으며, 둘 다 온몸과 온 넋에 고요한 우울과 미어지는 슬픔이 내려앉아 있었다. 분명 너무나 다른 외양의 두 사람이었건만, 흡사 쌍둥이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착각이 강원을 사로잡았다. 구역질이 났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연인의 시야에서 남자를 차단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연인의 손목을 부여잡은 채 남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으로 도망치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제발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저 남자 대신, 아니, 저 남자만큼이라도 좋으니 부디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애걸복걸 빌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다리가 바닥에 얼어붙어버린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던 때문이었다. 아니, 실은 도저히 끼어들 수가 없었던 때문이었다. 끔찍스러울 정도로 완벽한 일치를 보여주고 있는 저들 ‘부부’ 사이에!
‘이방인’이었다.
그래, 그랬다. 자신은 그저 철저한 ‘이방인’에 불과했다. 연인의 사랑은 온전히 저 남자만의 것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자각이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간들, 설령 천지개벽이 일어난다 한들, 그 준엄한 진실이 바뀔 수는 없다는 것을.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흐른 후 문득 남자가 강원을 돌아보았다. 첫인사와 그닥 다를 것 없는 목례가 다시 남자로부터 전해졌다. 연인을 말없이 건너다볼 때와 다름없는, 암청색 버버리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자세 그대로 남자가 연인의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는 것이 보였다. 느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은, 담담하면서도 고요한 발걸음이었다. 걷기 시작한 남자는 마침내 오른편 통로를 지나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조용히 사라져버렸다.
석고상처럼 굳어버린 것 같은 연인을 잡아채듯 끌고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전시기획팀의 몇몇 인사들과 아직 회합이 남아 있었지만 거기까진 의식이 가 닿지도 않았다.
택시를 잡아타고 전시장 인근에 자리한 숙소로 돌아오는 데는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사흘째 머물고 있는 호텔 객실로 들어서자마자 미친놈처럼 정신없이 연인의 옷가지부터 벗겨냈다. 스스로에게 무언가를 확인받으려는 것처럼, 연인의 입술에 허겁지겁 키스도 퍼부어댔다. 익숙한 반응 그대로, 연인은 강원의 품 안에서 금세 무너져 내렸다. 헐떡이듯 숨을 토해내며 순식간에 흥분한 몸을 강원에게 들이대기 시작했다. 일방적으로 시작한 거친 입맞춤은 더욱 증폭한 관능의 보답으로 되돌아왔다. 연인마저 허겁지겁 자신의 옷을 벗기려는 통에, 서로를 가로막고 있던 거추장스러움을 모두 떨쳐내는 데는 도리어 시간이 더 걸리고 말았다. 침대까지 가는 시간조차 아까운 나머지 너절하게 반쯤 옷이 벗겨진 서로의 몸을 카펫이 깔린 객실 바닥 위에 부려야 했다. 입을 맞추고, 피부를 핥아 먹고, 입가에 닿는 서로의 몸뚱이 전부를 절박하게 깨물어 뜯고 빨았다. 콧구멍을 크게 벌름거리며 서로의 체취와 페로몬을 주린 듯이 킁킁 흡입했다. 얼굴, 목덜미, 가슴, 겨드랑이, 어깨, 아랫배, 배꼽 등등 상반신 전부를 빨아먹고 더 이상 빨아먹을 곳이 없자 가차 없이 서로의 몸을 돌려 69 자세를 만들었다. 울창하고 새까만 서로의 음모를 더듬고 음경을 빨고 덜렁거리는 고환을 입안에 넣고 사탕처럼 굴리며 씹어 삼켰다. 엉덩이를 어루만지고 꼬집고, 손가락으로 항문을 벌려 쑤시고, 코를 박아 냄새를 맡고, 코끝으로 주름을 헤치고 들어가 내벽을 찔러도 보고, 혀를 뾰족하게 세워 코끝으로 그런 것처럼 똑같이 찔러도 보고, 이로 주름을 씹어도 보고, 물릴 때까지 핥고 빨아도 보았다. 회음부도 빨고, 엉덩이 굴곡을 빨고, 음낭과 허벅지골 사이 어둑한 그늘들도 사납게 씹고 핥고 빨아 당겨, 여간해선 사라지지 않을 마킹을 새기기도 했다. 다시 서로의 물건이 욕심이 나면 도로 음경을 목구멍 끝까지 삼키고 손으로 주물럭거리며 입안에서 피스톤질을 시켰다. 귀두 끝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씁쓸한 서로의 쿠퍼액을 다디단 아이스크림이라도 된 양 죽죽 빨아 마셨다. 결국 극도의 흥분을 참지 못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격하게 허리를 놀렸고, 서로의 입안에다 최초의 파정을 하는 데는 단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눈앞이 하얗게 탈색되는 오르가슴의 순간이 지났건만, 서로에게 만족은 결코 오지 않았다. 잠시 늘어져 있던 몸을 움직여 서로의 입술을 찾아 더듬더듬 기어갔다. 마침내 도착한 그리운 집에다 정신없이 기쁨의 환성을 쏟아부었다. 서로가 뿜어낸 정액 냄새가 진동을 하는 서로의 입술을 정신없이 핥고 빨았다. 채 다 목구멍으로 삼켜지지 않아 얼굴 주변에 낭자하게 튀어버린 정액도 순식간에 서로의 입안으로 삼켜졌다. 힘을 잃고 늘어졌던 서로의 페니스는 다시금 빳빳하게 곤두서고 있었다. 그랬다. 이제야말로 서로의 몸뚱이를 미친 듯이 탐닉하는 본 게임의 시작이었다.
그 남자가 자신의 품에 연인을 안겨준 이래,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연인을 안고 있었다. 거식증으로 말라비틀어졌든, 체력이 달려 오르가슴 끝에 기절을 하든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아니, 걸림돌로 인정하지 않았다. 안고 또 안아도 부족했다. 죽음 같은 오르가슴에 중독된 나머지 정신의 어딘가가 고장나버리는 것만 같은 황폐함을 자각할수록, 연인에 대한 집착에 가까울 허기는 더더욱 지독하게 달려들었다. 연인이 강원 자신의 관능에 길이 드는 데는 물론 단 며칠도 걸리지 않았다. 살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에 섹스에 대한 탐닉은 최고로 훌륭한 방편이었으니까. 자신 또한 한가지였다. 자신 또한, 연인이 안겨주는 쾌락의 방식에 적응하는 데도 단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그 남자의 방식일 터였다. 그랬다. 그 남자는 침실 안, 은밀한 정사의 한가운데에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연인과 자신의 사이에 자리해 있었다. 때론 둘이 아니라 처음에 그랬듯이 셋이서 섹스를 하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까지 일 지경이었다. 순식간에 서로의 관능을 알알이 각인해버린 두(혹은 셋) 몸뚱이가 그대로 짐승이 돼버리는 데는 물론 역시 단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거의 매일매일, 그것도 수시로, 서로의 눈빛을 확인하는 즉시 장소 불문, 발정 난 개새끼들처럼 서로를 향해 얽혀들었다. 한 번의 오르가슴으로 얌전히 끝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처음의 파정은 길고 긴 탐닉의 시작을 알리는 전초전에 불과하기 일쑤였다. 그랬다.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다리 더 벌려보세요, 선생님.”
완전히 발가벗은 서로의 알몸뚱이를 탐하고 탐한 끝에, 마침내 암컷의 눈을 꿰뚫듯 들여다보며 명령을 내렸다.
“……벌름거리는 내 귀여운 꽃잎이 다 보이도록 더 활짝 벌려봐요.”
삽입하기에 이미 충분한 열림이었다. 그럼에도, 음란하면서도 위압적인 어조로 명령을 내리는 것은 역시 고통스러운 자격지심 때문이리라. 어쨌든 이 음탕한 창녀의 몸뚱이는 자신만의 것이었다. 현재 이 사랑스러운 존재를 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 김강원이라는 자아를 지닌 수컷이었다. 연인에게 그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싶었다. 물론 가난하고 치졸한 과시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매번 이렇게 확인을 멈출 수 없는 건, 그것이 나름대로의 의식(儀式)이기 때문이었다. 그 언젠가, 연인이 진짜로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 서글프고도 절박한 기원이었다.
“……옳지…… 예뻐요, 선생님…… 제 것을 기다리느라 엄청 두근거리고 있네요…… 선생님께도 보여드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더 들어 올려서…… 옳지…… 그렇게 음란하게 흔들면서 벌려봐요…….”
연인은 언제나 그렇듯 일체 반항하지 않았다. 허벅지 아래를 양손으로 틀어잡은 채 다리를 들어 올려 비부가 전부 다 드러나 보이도록 활짝 벌려주었다. 거무스름한 항문 언저리와 그 주변까지 드문드문 박혀든 검은 체모, 그리고 닳고 닳은 창부처럼 움찔거리는 섬세한 주름이 훤히 드러나는 음란한 자세에 입안이 바짝 타들어갔다. 입가에 새치름히 웃음을 머금은 채 강원을 흘겨보는 창녀의 교태에, 당장이라도 힘껏 뚫고 들어가고 싶어 내장이 뒤틀렸다. 하지만 조금은 더 애를 태워야 했다. 그래야 연인은 더 욕망에 솔직해졌다. 더 자신만의 창녀가 되었다.
기둥을 움켜잡은 채 입구 주변을 귀두 끝으로 마구 문질러댔다. 슬쩍 주름을 쑤셨다가 도로 빠져나와 한껏 발기한 연인의 페니스와 음낭을 찔러보기도 하고, 두 개의 페니스를 맞잡은 채 거칠게 비벼대기도 했다. 음경과 음낭은 물론 무성한 음모까지, 서로의 성기 전체를 붙여 짓뭉개 녹여버릴 기세로 누르며 문지르며 비비기도 했다. 그러면 정말로 서로의 귀두 끝에서 질금질금 비어져 나오는 뜨겁고 질척한 욕망의 애액이 서로를 녹여버리는 것만 같은 황홀한 환상을 주었다. 연인도 같은 것을 느끼는지 이때만큼은 온전히 자신에게만 집중하며 양팔로 자신의 목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쥐어 뜯어버릴 기세로 갈퀴처럼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는 손가락의 악력을 통해서 연인의 극도로 절박한 욕망이 읽혔다. 곧 연인의 몸을 산산조각 내며 쑤셔줄 자신의 흉기에 대한, 아니, 자신의 몸뚱이에 대한 처절한 욕망이었다. 아니, 아니. 어쩌면 욕망 그 자체에 대한 욕망일지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몸뚱이는 그저 연인의 욕망을 끌어당기기 위한, 잃어버린 생에 대한 집착을 되찾기 위한 적절한 도구에 불과한 것일지도 몰랐다.
“……흐응…… 흐아…… 앙…… 어…… 어서…… 빨리…….”
허스키하게 갈라진 교성이 창녀의 애원을 흘렸다. 뱀처럼 번들거리는 교태 서린 눈시울이 강원의 눈을 게슴츠레 흘겨보며 혀를 날름거렸다. 강원의 키스를 고대하는 음란한 유혹이었다. 좀 더 애를 태우려 여전히 서로의 성기만 안고 부벼대자, 결국 못 견디겠는지 붉게 달아오른 창녀의 얼굴이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며 강원의 입술을 빨아 당겼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입술 안쪽과 잇몸 사이를 혀끝으로 애무하고, 이윽고 입안 깊숙이 혀를 집어넣어 강원의 것을 미끄러지듯 침범했다. 노련하게 혀끝을 꼬아 부딪치고, 까끌한 혓바닥으로 강원의 혓바닥을 부비며 희롱하고, 목구멍 안쪽까지 혀끝을 깊이 박아 피스톤질을 했다. 단숨에 일체의 인내력을 앗아가는, 지독히 음란한 도발이었다. 이것이 그 남자가 가르쳐준 키스 방법이라면 남자는 천하의 난봉꾼이었음에 틀림없다고, 순간 타는 듯한 질투심에 몸서리를 친 강원이었다. 키스만으로 사정할 뻔했다는 항간 얼간이들의 얘기가 남의 사정만은 아니었다.
연인의 정수리 머리카락을 난폭하게 움켜쥐곤 품 안에 연인의 상반신을 끌어당겼다. 부서트릴 기세로 끌어안고 경련 같은 쾌락의 전율을 흘렸다. 연인의 혀뿌리를 잡아채 미친 듯 빨아 당겼다. 몇 번이나 각도를 달리해 겹쳐지는 입술 틈으로 채 빨아 삼켜지지 못한 서로의 타액이 질척하게 흘러내렸다. 그조차 아까워 순간순간 입술을 떼고 굶주린 들개처럼 연인의 입가를 핥고 빨았다. 애무에 반응해 오물오물 도드라지곤 하는 연인의 젖은 입술을 입안에 삼키고 질겅질겅 씹어 먹기도 했다. 아래에서 흥분에 겨워 피스톤질을 하는 연인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겨 붙이곤 마주 허리를 흔들었다. 맞닿은 서로의 페니스 끝에서 뜨거운 쿠퍼액이 샘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연인의 가쁜 교성이 점점 더 날카로워지며 유혹의 음란함도 극에 달했다. 활짝 벌어진 연인의 양허벅지가 강원의 허리를 똬리처럼 틀어쥔 채 힘차게 조여들고 있었다. 두 발바닥으로 자신의 엉덩이를 뱀처럼 요염하게 툭툭 흔들며 쓰다듬고, 그도 모자라 엄지발가락을 세워 강원의 엉덩이 골 안쪽 항문 언저리까지 깊게 쑤시고 들었다. 발가락 끝이 항문 주름을 스치듯 삽입할 듯, 미묘하게 애무할 때마다 하반신은 경련하듯 움찔거리며 기대감으로 들떴다. 여태껏 섹스 중인 상대에게 단 한 번도 박히고 싶다는 욕구를 가진 적이 없건만, 자신의 항문을 희롱하는 연인의 자그마한 발가락은 그저 무조건 안으로 집어삼키고 싶은 사납고도 난폭한 허기를 자극했다. 등을 휘감고 있는 연인의 양팔 또한 한가지였다. 강원의 등 근육을 농염하게 쓰다듬다가는 손톱을 세워 사나운 암고양이처럼 가차 없이 긁어내리기도 했다. 요부였다. 수컷의 몰락을 치명적으로 유혹하는 지독하게 관능적인 살로메의 춤사위였다. 귓가에 착착 감겨드는 연인의 천박하면서도 음란한 밀어는 그 자체로 자신을 향한 사나운 교접 같았다.
“……빨리…… 흐윽…… 응…… 후으응…… 빨…… 리…… 선생님…… 흐앙…… 앙…… 흐악……! 선, 선생…… 님…… 얼른 박아주…… 빨리…… 흐앙…… 앗……! 여기…… 어서 박아줘요…… 주세…… 요…… 제 여기에…… 제 좁은 구멍…… 흐응……? 앙…… 자지…… 선생님 자지…… 자지…… 자지…… 큰…… 헉……! 커, 커다란 자지…… 불알…… 탱탱한 불알…… 커다란 좆…… 선생님…… 커다란…… 멋진 좆…… 좋아…… 나는 너무 좋아…… 박아줘요…… 응……? 얼른…… 어서…… 선생님 커다란 좆으로…… 그럼 여기 안에서 꽉꽉 조여줄게요…… 응……?”
눈앞이 아찔해졌다. 삽입의 욕구가 극점까지 치솟고 있었다. 한계였다. 이를 악문 채 입구 주름에 귀두를 가져갔다. 기둥을 움켜쥔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자지, 자지, 자지, 불알, 좆, 커다란 좆…… 자신의 물건을 향한, 헐떡이듯 신음하듯 주문처럼 거듭 토해지는 천박한 지칭에, 지독한 쾌감으로 몸서리가 쳐졌다. 불쑥 주름을 헤치곤 거대한 북을 치듯 세차게 허리를 튕겨 올렸다. 사나운 흉기가 창이 내리꽂히듯 일직선으로 내벽을 꿰뚫고 들어갔다.
“흐아앙……!”
단숨에 전립선을 긁으며 뿌리 끝까지 삽입하자 감겨든 살로메의 몸뚱이가 길고 긴 전율을 흘리며 쾌락의 비명을 내질렀다. 와락 조여든 내벽의 경련에 진저리를 치며 요부의 상반신을 당겨 안았다. 자신의 성기를 죄는 뜨끈하고 축축한 점막의 감촉이 이다지도 좋을 수가 없었다. 미치도록 좋다는 말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었다. 마침내 연인과 이어져 있다는 뿌듯한 쾌감이, 박혀든 페니스 끝을 거쳐 단전과 척추를 지나 정수리 위까지 관통했다.
삽입의 순간, 등줄기를 긁어내린 열 개의 손톱이 만들어낸 상처에서 끈적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기왕에도 무수한 손톱 자국으로 낭자한, 등줄기의 각인이었다. 사랑의 문신이었다. 연인이 자신의 것이라는, 연인을 무한히 소유하고 있다는 증표였다. 쓰라린 통증은 이내 저릿한 쾌락으로 변하며 입가에 흡족한 웃음을 만들어냈다. 야비한 정복자처럼 거침없이 웃어젖혔다. 아무렴. 이 사람은 강원 자신만의 것이었다. 적어도 안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절대적으로 자신만의 소유였다. 영원히 연인을 소유하고 싶다고? 간단했다. 이 찰나의 순간을 영원으로 치부해버리면 그뿐이었다. 연인을 사랑하는 데 더 이상의 시간 구분이란 무의미했다. 이 순간, 연인을 사랑할 터였다. 완벽하게 사랑할 터였다. 완벽은 영원의 다른 이름이었다.
재촉하는 요부의 교태를 따라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빠르고 느리게, 빠르고 느리게, 혹은 강하고 얕게, 강하고 얕게, 때론 그저 박아 넣은 채 음란한 진동만을…… 서로를 극치로 몰아가는 섹스 테크닉들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흐앙, 흐앙, 아아앙, 하앙, 핫, 핫, 아앗, 흐앗, 흐아악, 악, 앙…….
발정에 돌입한 암고양이가 자신의 아래에서 고래고래 교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눈앞이 점점 하얗게 변하며 일체의 이성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이성이었다. 까마득한 나락으로 곤두박질을 치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공포감도 따라서 엄습했다. 이 길로 들어서면 이미 인간이 아니라고, 영혼의 어느 한구석에서 천사가 경고를 주고 있었다. 그러나 순간 와락와락 페니스를 조여든 살로메의 교태가 그 한 자락 남은 은총마저 남김없이 앗아갔다. 아무렴, 나락인들 어떠리. 악마가 속살거렸다. 연인과 함께라면 그 어떤 시꺼먼 암흑인들 사양을 할까. 기꺼이 손을 내밀어 저 음습한 것과 악수를 했다. 순간 완전히 빛이 날아간 지옥의 쾌락이 엄습했다.
“……흐으…… 흐앙…… 우아…… 아…… 흐아아악……!!!!!”
창부의 몸뚱이가 미친 듯 경련하고 있었다. 오르가슴의 광휘였다. 지진처럼 해일처럼, 자신 역시 지옥의 오르가슴이 강타했다. 이를 악물고 최후의 최후까지 쾌락을 쥐어짜기 위해 발악을 했다. 폭풍처럼 사나운 기세로 허리를 흔들었다. 창부의 다리를 와락 휘어잡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머리와 양쪽 어깨만 침대 바닥에 눌린 채 자신의 양팔에 번쩍 들린 몸을 뒤트는 자신의 살로메가 흐릿하게 보였다. 엉거주춤 일어서서 허리를 기울인 자세로 한계까지 박고 들어갔다. 서로의 몸뚱이를 잇고 있는 질척한 접합 부위가 눈앞에 선명하게 밟혀들었다. 전율 같은 쾌락과 충족감을 주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음경이 들락날락거릴 때마다 섬세한 주름이 찢어질듯 빨려 들어가고 도로 딸려 나오는 광경은 그 자체가 지독한 오르가슴이었다. 서로 이어진 좀 더 아래, 거꾸로 뒤집힌 채 한계까지 발기해선 미친 듯이 덜렁거리고 있는 창부의 생식기 또한 한가지였다. 허리에 걸치듯 양팔로 휘어잡은 창부의 다리를 힘껏 움켜쥔 채 무아지경 속에서 무서운 속도로 페니스만 비비고 또 비벼댔다. 더 이상 그 어떤 기교적인 섹스 테크닉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박고 박힌 채 무조건 달리고픈 무아경의 본능만이 팽배했다.
두 사람분의 체중을 지지하고 있는 자신의 허벅지 근육이 요동치며 흔들리는 게 보였다. 전신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사방으로 튀고 있었다. 엄청난 괴성을 질러대며 양손을 허우적거리는 창부의 전립선에, 살점을 후벼 파듯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총처럼 앞으로 꼿꼿하게 선 창부의 음경 끝에서 새하얀 포말이 터지는 게 보였다. 순간 엄청난 조임이 자신의 깊게 파묻힌 기둥으로도 전달되었다. 발바닥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점점 더 뻣뻣하게 굳어오는 전신의 충격도 흐릿하게 느껴졌다.
얻어맞은 것처럼 고개가 뒤로 활짝 젖혀졌다. 허리가 무의미하게 몇 번 튕겨지며 정액이 봇물처럼 터지고 있었다.
크으으윽, 큭……!!!
창부의 괴성과 하등 다르지 않을 짐승스러운 교성이 목구멍을 타고 뿜어 나왔다. 끔찍한 오르가슴이었다. 지옥이었다.
새벽인 것 같았다.
문득 서늘한 한기를 자각하며 눈을 떴다. 품 안이 몹시도 허전하게 느껴졌던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연인이 없었다. 잠들기 직전까지 혹여 어딘가로 사라질세라 품 안에 연인을 움켜 안은 채 사지로 꽁꽁 묶다시피 하며 잠이 들었었다. 그런 연인이 품 안에 없다. 무심코 옆을 더듬었다가 싸늘하게 식은 빈 공간만 감지했고, 몽롱하게 남아 있던 수면기는 그것으로 단숨에 날아갔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침대에 앉은 그대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사라졌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그냥 알 수 있었다. 연인은 지금 이 방에 존재하지 않다! 아니, 이 방을 중심으로 반경 몇 킬로미터 어디에조차!
심호흡을 하듯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푸르스름한 여명이 밝아오고 있는 창 밖이 보였다. 시계도 살폈다. 5시 10분이었다. 방바닥엔 어젯밤 정사를 나누면서 벗어 던진 옷가지들이 폐허처럼 널려 있었다. 물론 자신만의 것들이었다. 연인이 입고 있던 소박한 감색 슈트는 연인처럼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단 한 가지, 녹색 줄무늬가 섞인 은색의 실크 넥타이만이 자신의 셔츠 위에 오도카니 버려져 있었다. 베를린으로 출발하기 직전, 자신이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사서 연인에게 선물해준 것이었다. 그저 우연의 일치에 불과할 테지만 마치 언젠가는 버려질 자신의 운명을 예언하고 있는 것만 같은 쓰라린 모양새였다.
점점 더 박동을 빨리하기 시작한 심폐 기능을 가까스로 찍어 누르며 옷을 주워 입었다. 하도 손이 떨리니 셔츠의 단추조차 쉽사리 채워지지 않았다. 이를 갈았다. 언젠가도 이런 일이 있지 않았나? 이리도 초조하고 이리도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허둥거렸던 때가? 사라진 연인을 찾아 바싹 마른 입안의 단내를 삼키며 사방을 찾아 헤매던 때가? 그래. 그런 때가 있었다. 아마도 올여름이었을 게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끈적한 땀이 솟아나오곤 했던, 덥고도 달콤했던 여름의 한때. 데자뷔의 정체와 함께, 남녘 땅 끝 오지 마을에서 연인과 함께 보냈던 꿈같았던 며칠의 기억도 아릿하게 떠올라왔다. 그리고 그 낙원의 끝, 잔인했던 이별의 기억 또한 가차 없이 건져내지고 말았다. 안타까운 기시감에 계집애처럼 엉엉 울음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이를 사리문 채, 간신히 재킷까지 챙겨 입은 다음 객실을 빠져나왔다. 단숨에 호텔 로비로 가 프런트를 지키고 있던 호텔리어에게 연인의 행적부터 물어보았다. 두 시간 전쯤에 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독일어는커녕 영어도 안 되는 연인이라, 그저 손짓발짓을 섞은 한국어로 부탁을 해서 기억에 남아 있노라 했다. 호텔리어의 설명에 새삼 다른 이유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강원 자신의 에스코트가 없는 연인은 베를린에선 미아나 마찬가지였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스스로를 신경 쓰는지, 혼자서는 좀처럼 호텔 안도 어슬렁거리지 않던 연인이었다. 그런 연인이 새까만 어둠 속으로 홀로 걸어 나갔으니, 사소한 트러블이라도 자칫 큰 사고로 발전할 수 있는 문제였다. 기왕의 불안과 초조감은 새로운 위험의 가능성을 만나 한계를 모른 채 치솟고 있었다. 리어를 재촉해 연거푸 택시 회사로 연락을 취했다. 다행히 연인을 데려다준 택시 기사와 곧 통화가 가능했고, 택시 기사로부터 연인이 향했다는 목적지를 전해 듣는 순간 강원은 절망하고 말았다. 혹시나 했던 불길한 예감이 그대로 적중하고 만 것이다.
잠시 후에 도착한 택시를 집어타고 쿤스트할레로 출발했다. 도착하기까지의 20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질겁한 뇌리 속은 온갖 불길한 추측들과 가능성들로 회오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연인을 미친 듯이 낯선 이방의 밤거리로 내몬 이는 물론 그 남자이리라. 쿤스트할레에서 마주쳤으니 무턱대고 그곳으로 되돌아가면 그 남자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여겼을까? 오프닝 파티나 폐막식이 있는 날을 제외하곤 전시 기간 내내 밤만 되면 전시 컨테이너가 완전히 닫혀버리는 그 썰렁한 공간에 대체 누가 남아 있으리라고 거길 간단 말인가. 그게 얼마나 정신 나간 짓인지 연인은 알까? 오프닝 파티가 있었던 어젯밤에도 자정엔 완전 파장을 했으리라. 밤만 되면 그저 부랑자나 인종 차별주의자, 혹은 마약을 찾는 청소년들만 어슬렁거리는 위험천만한 장소라는 걸 자신은 분명하게 각인시켜주지 않았던가. 그걸 잊어버렸단 말인가? 아니면 확실히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찾아간 것일까? 그 모든 위험의 가능성들을 감수하고서라도 반드시 찾아가야만 했을 정도로 그 남자에 대한 마음이 절박했단 말인가? 결국 그 남자의 품 안으로 되돌아가기로 결심을 바꿨단 말인가? 진심으로 연인 스스로와 그 남자를 용서하기로?
그건 아닐 것이다. 만약 연인이 그런 결심을 했다고 한다면, 어젯밤 평소와 다름없이 그토록 짐승스러운 섹스에 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결심한 즉시, 파랑새처럼 자신을 떠나 날아갔을 터였다. 바로 그 남자의 품 안으로. 그렇지. 그랬을 거다. 그저 다시 한 번만이라도 그 남자가 보고 싶었던 거겠지. 그리도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남자이니…… 어쩌면 연인의 존재 이유 자체일 사람이니, 그저 다만 한 번 더 보고 싶었던 게지. 그저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런…… 눈물겹도록 슬프고 가난한 마음 한자락이었을 게다.
궁극적으로 뇌리를 점령한 결론은 역시 뼈가 갈리는 것 같은 독한 질투심으로 변태했다. 강원 자신은 어떡해도 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다는 아득한 절망감…… 연인의 맹목적인 사랑과 숭배를 받는 유일한 남자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
연인에게 있어 자신과의 섹스는 그저 살아보기 위한 절망적인 몸부림에 불과하다는 걸 자신은 안다. 그 남자의 마지막 소원이기도 한 치열한 몸부림이라는 걸, 그 남자도 알고 연인도 또한 안다. 그 남자를 용서할 수도, 연인 스스로를 용서할 수도 없는, 그럼에도 그 남자를 제 목숨보다도 더 끔찍하게 사랑하고 있는 저주와 다름없을 이율배반을 극복하기 위한, 연인 나름대로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 지옥의 이율배반이 극복되지 않는 한 연인은 자신을 떠나지 못한다. 그것이야말로 그 남자가 연인과 강원에게 부여한 또 다른 이율배반의 주문이었다.
‘내 아내를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라. 살아갈 수 있게만 만들어주면 아내를 온전히 네게 주마.’ ‘평생이 걸린들 상관치 않는다. 죽을 때까지 아내를 소유한대도 나는 절대 관여하지 않겠다. 그저 살려만 다오. 살려만 다오…….’
남자의 처절한 흐느낌과 더불어 강원에게 던져진 지옥의 맹세였다. 남자는 제 살과 피를 발라 세 사람을 하나의 저주로 묶는 지독한 주박을 서로에게 펼쳤다. 그랬다. 연인의 불행이 지속되는 것만이 자신이 연인을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이 끔찍한 아이러니를 자신은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연인은 여전히 불행했다. 여전히 아파했으며, 여전히 옛 상처로부터 흘러나오는 피고름으로 온 넋과 정신이 피폐해져 있었다. 아아, 그래. 안다. 안다. 물론 잘 알고말고. 그럼에도 자신은 연인을 보내기 싫었다. 죽어도 보낼 수가 없다며 맹세를 준다. 그 남자에게로는 절대 다시는……. 이것은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절체절명의 기회였다. 자신에게 떨어진 놀라운 신의 은총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쉬이 포기할 까닭이 없었다. 언젠가 정말로 연인이 스스로를 용서하게 됐을 때, 그 모든 상처가 다 낫게 됐을 때, 새로이 연인의 사랑을 받게 되는 이는 그 남자가 아닌 부디 자신이기를, 매 순간 제(祭)를 올리듯 간절하고 간절하게 빌고 있었다.
택시가 쿤스트할레 본부 컨테이너 앞에 도착했을 무렵, 날은 거의 밝아 있었다. 까맣게 타들어가다 못해 돌아버릴 것만 같던 강원의 의식은, 기사에게 잠시 대기해줄 것을 요청하고 택시에서 내려섰을 땐 처음으로 연인에게 살기 어린 증오심마저 느꼈을 정도로 극한까지 치달아 있었다. 사랑이 극에 달하면 증오심마저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난생처음으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 언젠가, 연인이 말도 없이 사라졌다가 되돌아온 며칠 후, 그 남자가 연인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른 심정을 강원은 그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연인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호텔 방에서 연인의 부재를 자각한 이래 40여 분 남짓, 그간 뇌리를 스쳐갔던 온갖 걱정과 근심과 불안과 질투와 애정과 증오의 소용돌이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연인은 연인의 부스가 설치돼 있는 제 3 전시관 입구 계단에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한 모습으로 얌전히 앉아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전시 컨테이너 주변엔 노숙자나 다른 부랑자들의 모습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저 이른 출근을 위해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는 직장인들의 모습만 간간이 눈에 띌 뿐이었다. 아마도 전시 오프닝을 맞아 시에서 특별 단속에 들어갔던 모양이었다.
목숨보다 소중할 존재가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그토록 가슴속에서 들끓던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연기처럼 사라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칼끝처럼 긴장했던 온몸의 근육들과 신경줄들도 순식간에 느슨해지며 극심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연인과 10여 미터쯤의 거리를 사이에 둔 채 걸음을 멈추고 섰다. 당장이라도 바닥에 주저앉아버릴 것만 같아 한동안 가만히 선 채 소중한 존재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숨길을 가라앉히고, 사지의 떨림을 진정시키고, 질겁해 날아갔던 생기가 돌아오기를 고요히 기다렸다.
그렇게 2∼3분쯤을 흘려보냈을까. 무심한 표정으로 길 건너 맞은편 도로만 응시하던 연인의 시선이 문득 이쪽을 향했다. 그토록 애틋하고 간절한 사인을 보냈건만, 그제야 겨우 강원의 존재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무릎 위에 기대고 있던 한쪽 팔을 자연스레 늘어뜨렸을 뿐 연인의 표정에선 그 어떤 놀람이나 동요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미안한 기색조차 없었다. 그저 담담하고 무심한 얼굴로 강원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을 뿐이었다.
서운한 나머지 가라앉았던 분노의 감정이 도로 똬리를 틀려는 조짐마저 느껴져, 잠시 입술을 깨물며 마음을 다스려야만 했다. 상처 입어선 안 되었다. 연인의 무심함과 무정함에 이렇게 일일이 상처를 입는다면 저 지옥 같은 이율배반의 저주가 풀릴 때까지 자신은 온전한 정신 상태를 유지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물론, 자신이 병드는 것까진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정신이 무너진다면 그 여파로 연인에게 어떤 위해가 가해질지는 상상하기조차 끔찍했다. 이미 만신창이인 현재의 연인에게 있어 그나마 자신이라는 유일한 숨구멍조차 박탈하는 게 된다. 그러니 자신은 결코 상처 입을 수 없었다. 상처 입는다고 쳐도 그를 상처라 인정하지조차 말아야만 했다. 강해져야만 했다. 강철보다도 차갑고 바윗돌보다도 더 굳건하게 중심을 잡고 연인의 곁을 지켜야만 했다.
“……걱정했습니다…….”
힘들게 끌어낸 단 한 마디에 역시 힘겨운 웃음을 실었다. 왼쪽 뺨에 살짝 볼우물을 만들어내는, 연인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자신의 섹스어필이었다. 역시 대꾸는 없었다. 여전한 무표정으로 빤히 자신의 얼굴만 들여다보는 연인의 서늘함에 문득 가슴이 아렸다. 단 몇 시간 전, 그토록 전율스러운 쾌락에 젖어 서로의 몸뚱이를 탐하고 공유한 것이 마냥 꿈만 같았다. 지난 두어 달 내내 그랬듯이, 완벽한 타인의 그것으로 변한 차가운 눈길이 강원의 얼굴이며 몸을 살피듯 쳐다보고 있었다. 피하지 않았다. 가슴이 아픈 나머지 순간적으로 피하고픈 욕구가 절실했지만, 역시 그 어떤 경우라도 자신 쪽에서 먼저 피해선 안 되는 아픔이었다. 연인이 왜 자신에게 이런 눈길을 보내는지 물론 자신은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연인은 분노하고 있었다. 그 남자와 동조해 연인을 더한 나락으로 떨어뜨렸다며, 온몸으로 절규하고 있었다. 그건 그 남자와 연인, 두 사람만의 지옥에 강원마저 끌어들인 데 대한 짙은 회한과 분노, 그리고 슬픔이었다. 그리고 실은 그 배후에 자리하고 있는 속내야말로 강원 자신을 향한 연인 나름대로의 절실한 애정과 연민, 그리고 배려였던 것이다. 어떻게든 연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잘라내고자 하는, 연인 나름대로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이미 짐승의 섹스에 길이 들다 못해 타락할 대로 타락해버린 서로의 육체와는 별개로.
“……절 깨우지 그러셨어요. 정말 걱정이 돼서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이 주변이 그리 안전한 지역이 아니라고 미리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정 오고 싶으셨다면 절 깨워 말씀을 해주셨어야죠.”
연인과는 다른 따스한 온기만을 투정 같은 잔소리에 실어 보냈다. 부디 자신의 웃음에 조금이라도 얼어붙은 마음이 녹기를 기원하며 연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짙어지는 연인의 체취에 심장이 박동을 빨리하는 것이 느껴졌다. 호흡까지 가빠지며 자동으로 발기하는 몸은 지난 두 달간 마약처럼 치명적으로 중독된 정사의 영향이리라. 연인 또한 한가지인지, 흐릿하게 올라오는 귓불의 홍조며, 순식간에 창녀의 관능으로 젖어드는 게슴츠레한 눈시울이 애틋했다.
서로의 눈을 빨아들일 듯 들여다보며 서로를 향해 전율처럼 흐르는 관능의 교감을 만끽했다. 당장이라도 땅바닥에 깔아뭉갠 채 뚫고 들어가고픈 처절한 욕망에 치가 떨렸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참지 않으면 안 될 터였다. 연인의 눈이 경고하고 있었다. 치명적인 창녀의 유혹만큼이나 싸늘한 한기가 날카로운 가시를 드러내며 서로의 미친 관능을 단죄하고 있었다.
손을 뻗어 품에 안아 들기 직전, 찬찬히 연인의 전신부터 살폈다. 어떻게든 짐승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소박한 감색 슈트며 제대로 단추도 잠그지 않은 구겨진 셔츠가 먼저 눈에 들어와 박혔다. 뒤죽박죽 엉킨 채 사방으로 뻗친 머리카락도 보였다. 바짓가랑이 틈으로 슬쩍 드러난 복숭아 뼈를 보니 맨발에 구두를 신은 모양이었다. 가까스로 거식증에서 회복된 마른 몸에 셔츠와 슈트는 마냥 헐렁하기만 해 안쓰러웠고, 앙상하게 드러난 발목과 자해의 흔적이 여전한 가는 손목도 가슴이 아리긴 한가지였다. 왈칵 목이 메는 감정의 흔들림을 애써 누르며 연인을 일으켜 세웠다. 역시 일체의 저항 없이 자신의 팔이 이끄는 대로 순종적으로 안겨드는 몸뚱이였다.
오랫동안 초봄 한기에 노출된 몸은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한동안 품 안에 꼭 껴안은 채 자신의 온기를 연인에게 전해주었다. 차가운 얼굴을 자신의 얼굴로 문지르고, 등과 어깨와 엉덩이 등등, 자신의 손이 닿는 한 모든 부분을 조금이나마 열기가 오를 때까지 힘껏 문질러주었다. 거리를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행렬이 점차 늘고 있었고, 그만큼 뭇 시선들의 힐끔거림이 느껴졌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온 신경이 품 안의 존재에게로 가 있어 다른 데 쓰일 에너지 따위 남아 있을 까닭이 없었다.
이윽고 차츰 따스해지는 몸뚱이를 감지하며 재킷 안쪽에 연인의 얼굴을 푹 파묻게 한 후 가만히 뒤통수를 쓸어주었다.
“……문 사장에게 데려다드려요?”
여전히 완전한 수용의 몸짓으로 품에 안겨드는 연인을 향해 조용히 물음을 던졌다. 물론 최악을 각오한 물음이기도 했다. 평소보다 더 심상치 않은 연인의 눈빛을 통해서 어떤 의지를 읽은 까닭이었다.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움찔 어깨를 떠는 몸뚱이에 서글픈 실소가 물렸다. 마주친 내내 일체의 흔들림조차 보여주지 않던 인형 같은 연인이 비로소 사람다운 반응을 나타낸 것이다.
“……어느 호텔에 묵고 있는지 압니다. 자세한 일정까진 알아내지 못했지만 우리가 베를린을 뜨는 날, 그 사람도 함께 서울로 되돌아가겠죠. 그 사람과 함께 돌아가시고 싶어요?”
“…….”
“말씀해주세요, 선생님께서 무얼 원하시는지. 저는 언제든 선생님 뜻대로 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나를 버려요.”
“!!!”
“……여기서 더 망가지기 전에…… 나를 버려주세요, 김 선생님.”
담담한 요구였다. 서늘한 한기가 풀풀 날리던 표정 그대로 너무나 냉담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시린 아픔이 다시 한 번 가슴 한가운데를 할퀴고 지나갔다. 품 안의 몸뚱이는 그럭저럭 따스한 온기를 품기 시작했건만, 심장이 자각하는 마음의 한기는 여전했다.
“……내 쪽에선 못 해요. 이미 난 흡혈귀처럼 선생님의 생기를 파먹고 있는 형편이니까. 아마도 이게 나의 위야가 노린 야비한 계산이겠죠. 나 스스로는 절대 선생님 곁을 떠나지 못할 거라는 거.”
“…….”
“과연 세상 최고의 악당답지 않아요? 정말 자기만 좋으면 그만인 거야. 자기 것만 지켜지면 그 때문에 누가 망가지든 하나도 상관없다는 거지. 과연 내 위야답다고 해야 할까…… 징그럽다 못해 소름이 끼쳐요. 진짜 타고난 악당에, 사기꾼에, 거짓말쟁이에…… 그런 악마가 내 남자죠. 정말 사랑해, 나의 위위…….”
“…….”
“……더 이상 그딴 마귀의 손아귀에서 놀지 마요. 선생님의 세상으로 떠나세요. 나는 못 하니까. 나는 이미 그런 악마에 완전히 길이 들어버린 마녀거든요. 마귀라는 걸 알아도 도저히 사랑하는 걸 멈출 수가 없거든. 그 남자 뜻대로 조종돼도 나로선 어쩔 수가 없는 거야.”
“…….”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결정해요. 언제까지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짐승이 돼야만 할까요? 이대로 선생님께서 언제까지 버티실 수 있을까요?”
“…….”
“……제발 부탁드립니다. 김 선생님은 빛이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절대로 우리들처럼 끝까지 짐승이 될 수는 없는 분입니다. 김 선생님의 세계로 돌아가세요. 나 따윈…… 아니, 우리 두 마귀 새끼들 따윈 김 선생님 인생에서 완전히 내팽개치시라구요.”
“강원.”
“……?”
“강원이라고 불러주시겠습니까?”
“…….”
“김 선생님이 아니라 그냥 강원이라고요. 선생님 목소리로 불리는 제 이름을 듣고 싶어요. 소원입니다.”
“…….”
“……제가 연하니까 그냥 편하게 강원아 하고 불러주시겠습니까? 그저 평범한 연인 사이처럼요.”
“…….”
“……그렇지요. 선생님께서 지금 제 소원을 들어주실 수 없듯이 저 또한 선생님의 지금 부탁은 들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
“저를 내치고 싶으신가요? 선생님의 인생으로부터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다만 그건 선생님께서 문 사장에게 되돌아가시겠다는 결심이 서실 때여야만 합니다. 문 사장 곁으로 돌아가 그 사람과 행복할 자신이 있으시다면 그때 보내드릴 겁니다. 그렇게 거래를 했지요, 문 사장과. 선생님께서 그 사람과 행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서실 때만 그 사람에게 돌려보내드리겠다고. 그러니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그 사람에게 돌아가시겠다면 전 언제든 물러날 용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외의 경우라면 전 선생님 곁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때까지 선생님은 오직 저만의 소유입니다.”
“……망가지는데도요? 김 선생님의 정신도 우리들처럼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말 텐데도요?”
“상관없습니다.”
“나는 김 선생님을 사랑하지 않아요.”
“신경 쓰지 않은 지 오래입니다.”
“앞으로도 사랑하게 될 일은 없어요.”
“그건 모르는 일이죠.”
“나는 내 위야만 사랑해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내 사랑은 ‘영원’입니다.”
“그런 선생님 전부를 사랑합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시는 선생님 그대로 제게 와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 사람을 100만큼 사랑하시면서 동시에 저 또한 50만큼, 아니, 10만큼만 사랑해주셔도 상관없습니다. 일단 사랑해주시기만 하면 누가 더 많이 사랑받느냐는 제게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선생님께서 10만큼은 절 사랑하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
문득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는 어깨가 느껴졌다. 품 안에 가뒀던 얼굴을 천천히 들어 올리니 예상대로 눈시울 가득 물기가 들어차 있었다. 언뜻 보면, 가슴이 저릴 정도로 상냥하고 다정하기만 했던 예전의 연인다운 표정이었지만, 눈빛에 서린 냉랭한 분노는 단숨에 행복한 착각을 부숴버렸다.
“10만큼 사랑하지도 않아. 10은커녕 5도 못 되지. 아니, 2, 3도 못 될걸? 맹세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이건 단 1그램도 사랑이 아니야.”
“…….”
“그저 단지 욕정이야. 섹스일 뿐이지. 끔찍하게 추잡하고 더러운 섹스.”
“…….”
독기가 서리서리 내려앉은 사나운 일갈에 가슴이 찢어발겨졌다. 물론 모르는 체했다. 상처 입으면 안 된다. 상처 입은 자신 따위를 인정한다면, 정말로 자신은 망가질 터였다. 연인의 저주대로 그리 될 거였다. 자신이 망가지고 나면 연인 또한 그때야말로 산산조각 나버릴 테지. 절대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다.
“추잡하고 더러운 섹스라도 선생님과 나누는 쾌락이라면 성녀와의 그것과도 안 바꿀 겁니다.”
“…….”
담담하게 대꾸를 건네자, 연인의 눈시울 가득 들어차 있던 물방울이 기어코 아래로 떨어졌다. 동시에 아래로 내려앉은 연인의 눈꺼풀은 진심을 숨기기 위한 방패막일 터였다. 희미하게 떨리고 있던 입술이 앙다물렸다. 이를 가는 소리도 들렸다. 연인의 한 맺힌 저주였다.
“그러니 포기하세요. 제가 먼저 선생님을 버리는 일은 없습니다. 정히 제 품을 떠나고 싶으시다면 그 사람에게로 돌아가겠노라고 말씀만 하세요. 그러면 됩니다.”
“…….”
“……어떻게 할까요? 문 사장이 묵고 있는 호텔로 데려다드릴까요?”
“…….”
이를 갈아붙이다 못해 파들파들 전율하고 있는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며 도박을 건다. 연인의 선택에 따라 천당과 지옥이 갈리는 최악의 베팅을 건다. 절대로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을 신(神)과의 베팅이건만, 또한 하지 않을 수 없는 비참한 운명을 안다. 저주받은 운명의 희롱을 안다.
“……용서 못 해…….”
“…….”
“……절대로 용서 못 해…… 안 해…….”
“…….”
한 맺힌 흐느낌에 간간이 섞여 나오는 연인의 저주에 비로소 안심을 한다. 자신의 승리다. 일단은. 연인은 다시금 그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을 한다. 어제처럼, 그제처럼, 혹은 한 달 전처럼 여전히. 같은 저주, 같은 불행, 같은 슬픔을…… 선택한다, 다시 한 번. 또한 자신의 승리다. 연인의 저주를 담보로 한. 연인의 불행을, 슬픔을 담보로 한. 지옥을 담보로 한……. 연인의 불행에 죄책감이 인다고? 연인 이상으로 고통스럽다고? 아아, 아무러면 어떤가. 뭐라 해도 지금은 자신이 승리하지 않았나. 창백한 불행을 이끌고 연인을 따라 날아왔을 그 남자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절대 고독의 무게를 짊어진 채 홀로 되돌아가리라. 두 사람분의 불행이 지옥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을 그 남자만의 소굴로.
“……그럼 이제 저와 함께 돌아가도 문제는 없는 거겠죠?”
내리감겼던 눈꺼풀이 사납게 홉뜨이는 게 보였다. 갈가리 찢어 죽이고 싶다는 욕망을 감추지 않는 야수의 눈길이었다. 강원 자신을 향한 절실한 증오처럼 보였으나, 실은 연인 스스로를 향한 단죄요 처벌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허나 일단 속아주는 체한다. 그래야만 연인이 제대로 숨을 쉰다. 그래야만 제대로 자신의 생기를 빼먹고 살아나간다.
“……함께 돌아가서 서로 기분 좋은 걸 하도록 하죠, 선생님.”
부러 선정적인 색기를 음색에 담아 연인의 짐승을 꼬드긴다.
“……우리만의 ‘끔찍하게 추잡하고 더러운 섹스’ 말입니다.”
시선을 얽은 채 재차 음산하고 유혹적인 수컷의 교태를 흘린다. 왼쪽 입술 끝을 비죽 끌어올려 연인을 매혹시키곤 하는 보조개도 만들어낸다. 흡사 화려한 공작새가 부챗살처럼 날개를 펴듯. 과연 서리서리 한이 맺힌 저주의 눈시울에 짐승이 깃들기 시작하는 게 보인다. 살로메의 눈길이다. 욕정을 품는 사내의 목을 따주길 원하는, 치명적인 유혹의 속삭임이다.
두 팔로 연인의 허리를 단단히 감아들였다. 수컷을 향해 활짝 치켜든 암컷의 얼굴로 천천히 입술을 가져갔다. 가쁘게 헐떡이기 시작한 암컷의 입안에서 달큰한 매혹의 단내가 났다. 쪼듯이 주변을 핥고,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빨아 당겨 관능의 맛을 다셨다. 그 아래 달라붙은 두 몸뚱이는 부비적거리는 탱고를 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무도한 침입이 살로메의 입안을 파고들어갔다. 짐승들의 교접을 향한 무아경의 전초전이었다. 섹스의 시작이었다. 끔찍하게 추잡하고 더러운 그것이었다.
베를린에서 돌아온 지 열하루가 지났다.
4월도 하순으로 접어든 월요일 오후. 연인이 자신에게로 온 지 63일째 되는 날이었다. 강원은 모처럼 월차를 내, 주말에 이어 연인과 함께 집에서 조용히 망중한을 보내고 있었다.
보통 때라면 강원이 달라붙지 않는 한 온종일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을 연인이지만, 그날만큼은 어쩐지 붓을 들 생각조차 않는 연인이었다. 그저 조용히, 강원이 은연중에 원하는 대로 줄곧 강원의 곁을 맴돌며 제법 연인다운 친절을 베풀어주고 있었다. 연인을 무릎에 앉힌 채 과일을 떠먹여주도록 허락한다거나, 소파에 나란히 앉아 어깨를 기댄 채 영화를 본다거나, 혹은 잘 가꿔진 자그마한 정원이 내다보이는 거실 발코니 앞에 마주 앉아 음악을 들으며 차를 마신다든가 하는, 지극히 ‘연인’다운 모션을 기꺼이 취해준 것이다. 평소처럼 냉랭한 한기가 도는 시선으로 독촉하듯 빤히 자신을 쳐다보는 일도 없었고, 섹스를 할 때 이외엔 그저 물감 범벅이 된 채 작품으로의 도피를 감행하는 바람에 강원의 가슴을 몹시도 시리게끔 하던 차가운 방치 행위도 없었다. 시답잖은 수다로 말을 걸어도 어쩐 일인지 고분고분한 동조의 대꾸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예스나 노 이외에 필요한 말만 마지못해 단답형으로 떨궈주던 그간의 무심이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확실히 그날의 연인은 유난히도 조용했으며, 평화스러워 보일 정도로 부드럽게 가라앉아 있었다. 과거의 따스함까지는 아니었으되, 자신의 품 안에 떨어진 이래 계속된 적대감과 증오의 표출을 생각하면 그저 감지덕지라고밖에 할 수 없는 놀라운 변화였다.
혹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닐까, 설레는 와중에도 자주 미심쩍은 시선으로 연인을 유심히 살펴보곤 한 강원이었다. 물론, 어젯밤부터 시작해 오늘 새벽까지 거의 날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이어진 마라톤 섹스 탓에 많이 지친 것처럼 보이긴 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체력의 부대낌 이외에 어디가 특별히 아픈 것 같지도 않았다. 처음 그 남자의 품에 안겨 이 집에 도착했을 당시의 피골이 상접했던 몰골을 생각하면 지금 현재 눈에 비치는 연인의 피로감이라는 것은 걱정을 한다는 것이 도리어 미안할 지경이었다. 육체적인 면에 있어서만큼은 확실히 연인은 거의 회복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정상인처럼 식욕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더 이상 병적으로 음식을 거부하는 일도 없었다. 다만 여전히 연인을 괴롭히고 있는 불면증과 지독한 우울증은 지속적인 상담과 치료를 요했는데, 물론 그조차도 처음 몇 주 동안의 심각성에 비해선 상당한 호전을 보이고 있는 편이었다.
평화로운 시간이 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너무나 오랜만의 평화여서 그것이 혹 행복의 다른 이름은 아닌가 수시로 의심이 들곤 했다. 이질적인 만큼 종종 기이한 위화감이 의식을 사로잡기도 했다. 한순간은 행복을 느끼기도 했으며, 또 그다음 순간은 희미한 불안감에 몸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연인의 얼굴만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하다가,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은 고통을 자각하곤 소스라치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연인을 품에 꼭 끌어안곤 애무와 키스의 소나기를 퍼붓곤 했다.
오후 4시 무렵이었다.
두 시간 남짓 영화를 보다가 거실 창가에 찻상을 마련해 연인과 마주 앉아 보이차를 우려 마시던 중이었다.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부드러운 햇살이 정원 가득 내리꽂히고 있었다. 정원 한편에 심어진 25년생 벚나무에서 요 2주간 화려하게 만개했던 벚꽃이 지고 있었다. 아름다우면서도 서글픈 낙화에 취한 듯 연인은 정원 쪽으로 하염없이 시선을 주고 있었다. 오로지 연인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자신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아, 벚꽃에까지 절실한 질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주 앉은 연인을 끌어당겨 품에 안고도 싶고, 섹스를 하고 싶은 욕망 또한 수시로 떠올랐지만, 그 이상으로 이 평화롭고 온화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은 기분도 절실했다. 그저 설레고 들뜬 시선만 연인에게 고정한 채 양가감정이 주는 괴로운 줄다리기를 감내할 따름이었다. 옅은 핑크색의 스웨터에 크림색 면바지 차림인 연인은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벚꽃의 낙화와도 기가 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다고, 사랑에 빠진 사내의 속절없는 숭배는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예뻐요…….”
문득 연인의 아스라한 감탄이 떨어졌다. 막 입안으로 넘긴 보이차를 성급히 꿀꺽 삼키곤 새삼 연인의 표정을 살폈다. 연인이 자진해서 강원에게 말을 붙이는 것은 도대체 그 얼마 만의 일일까. 또 한 번 가슴이 몹시 설레었다.
“……벚꽃이 참 예뻐……. 오타루 운하에 내리던 눈송이 같아요…….”
재차 떨어진 평범한 두 마디 감탄사는 그대로 달콤한 시어처럼 들렸다. 역시 사랑에 빠진 사내의 속절없는 숭배였다.
“……오타루? 일본 홋카이도에 있는 도시 말인가요, 선생님?”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가누며 재빨리 기억 창고를 뒤져보았다. 언젠가 문화계 지인으로부터 들었던, 오타루에 여행 가서 털게를 실컷 먹고 왔다던 뜬금없는 소리가 구원이 돼주었다.
“……예. 그 오타루시요. ……눈 오는 날의 오타루는 참 예뻐요. 저기 벚꽃이 날리는 정원처럼. 그때도 하늘하늘 내리는 눈송이들이 꼭 떨어지는 벚꽃 잎 같다고 생각했죠.”
“……그런가요? 저도 한 번 보고 싶군요. 선생님께 아름답게 비쳤다면 제 눈에도 쏙 들어올 것 같네요. 벌써 4월이니 눈을 보기엔 이미 늦었을 것 같고…… 올겨울에 함께 가볼까요, 그럼?”
“…….”
“……왜요? 별로 안 내키세요?”
“…….”
“선생님?”
“……갈 수 없어요…….”
“……?”
“……아마 다신 갈 수 없을 거야…….”
내내 정원 쪽에만 시선을 두고 있어 표정을 정확히 읽을 수 없었지만 목소리만으로도 변화는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담담한 감탄으로 시작했던 벚꽃과 오타루 눈꽃에 대한 찬사는 천천히 조용한 슬픔으로 갈무리되고 있었다. 알 것 같았다. 오타루 눈꽃은 그 남자와 관련이 있을 터였다. 그 남자와의 추억이 서린 곳이니 다신 갈 수 없다는 뜻일 테지. 아니, 가지 않겠다는 선언일 게다. 그 남자가 아니라면 다른 누구와도.
사랑에 빠진 사내의 속절없는 설렘은 이내 서늘한 한기를 만나 얼어붙어버렸다. 시리고 시린 냉기는 가슴을 얼리고, 이어 뇌리까지 꽁꽁 얼려버린 것 같았다. 무언가 다른 데로 화제를 돌려야만 하는데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손에 들린 찻잔까지 떠는 걸 보니 사지의 기력마저 얼려버린 모양이었다.
“……미안합니다…….”
문득 떨어진 사과에, 잠시 찻잔으로 떨어졌던 시선을 연인에게 도로 가져갔다. 올곧은 시선이 강원을 향하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김 선생님. 저를 용서해주세요.”
따스하고 사려 깊은, 자신이 익히 알아왔던 소중한 이의 눈빛이 거기 있었다. 지난 두어 달 남짓한 사이에 영영 잃어버렸다 여긴 ‘전적인 애정’과 ‘신뢰’의 시선이었다. 그리운 ‘소울메이트’의 시선이었다.
“……이상하죠? 오늘만큼은 선생님께 위악을 떨고 싶지가 않네요.”
고요한 슬픔이 서린 젖은 눈시울이 담담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흐릿하게 입가에 머문 미소는, 이해와 연민과 애정과 신뢰로 가득 들어차 있는 연인의 눈빛에 더해진 꿈결 같은 보너스였다.
“……이상하게 평화스러운 날이에요. 마치 누군가로부터 제 전부를 용서받은 것만 같은 따스함과 은총이 느껴져요.”
“…….”
“……그래서 그런가? 선생님께 막 대하는 게 오늘은 참 힘이 드네요. 그냥 솔직하게, 마음속에 품은 전부를 다 드러내고 싶어져요. 그게 누구든…… 마치 고해를 하는 심정이라고나 할까요?”
“…….”
“……그래서 드리는 제 솔직함입니다. 그동안엔 사과를 할 염치조차도 없어 더더욱 끔찍한 마귀가 되곤 했지만…… 그런데 오늘만큼은 이상하게 용기가 생기네요.”
“…….”
“……물론 지금은 용서가 안 되실 테지만…… 언젠가 먼 훗날에는 꼭 그렇게 해주셨으면 참 좋겠어요…….”
“…….”
“……언젠가 먼 훗날…… 이번 생이 다해서 어딘가 알 수 없는 다른 세상으로 영혼이 넘어가 죄 갚음을 하고 난 후엔 말이죠…… 그때야말로 정말 선생님의 용서를 받게 되면 참 좋을 거 같아요…….”
“……서…… 선생님……!”
입안이 바짝 마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상했다. 느닷없이 왜 이렇게 불안한 기분이 엄습하는 걸까. 마치 당장이라도 눈앞의 연인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꿈처럼 안개처럼 혹은 저 앞에 흩날리는 낙화처럼, 아스라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맞아요, 김 선생님. 전 과거 어느 한순간엔 김 선생님을 사랑한 적도 있었을 거예요.”
“…….”
“그리고 김 선생님 말씀처럼 어쩜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게 10만큼일지, 20만큼일지, 혹은 50만큼일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아마 그 사이 어디쯤이 아닐까 추측이 되네요.”
“…….”
“하지만 제 사랑의 ‘전부’는…… 아니, ‘의미’는 김 선생님이 아닙니다. 알고 계시죠?”
“…….”
“내 위야를 사랑하는 감정의 깊이는 저울의 수치로 측정이 되지가 않아요. 그건 100일지도 모르고, 1000일지도 모르고, 혹은 그보다 더한, 측정이 진짜로 불가능한 무한수일지도 모르겠어요. 아니, 어떨 땐 아예 마이너스 수치일 것 같다는 기분이 들 때도 있지요. 마이너스 100? 아니, 마이너스 1000쯤……?”
“…….”
“……당신이 너무나 소중하고 아프지만, 그렇다고 당신을 내 위야처럼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아요. 내 위야처럼 당신이 증오스럽지도 않고, 내 위야가 나중에 나를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을 안을까 봐 불안해하는 것처럼 당신으로 해서 불안해지지가 않아. 내 위야가 사라지면 나도 사라질 거지만, 당신이 사라지면 나는 그저 일생 죄 갚음을 하며 우는 것으로 당신을 추모하는 데에서 그칠 거예요.”
“…….”
“……이런 저를 부디 용서해주시길 바라요, 김 선생님. 언젠가 먼 훗날에는…… 상냥한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던 저를…… 그런데도 이렇게 당신을 망가뜨려야만 했던 제 죄를…… 내 위야의 죄를…….”
“…….”
“……그래서 선생님의 용서를 받게 되면 그땐 선생님께 제가 가진 가장 좋은 것들로만 선물을 드리고 싶어요. 나의 존경과, 나의 그림과, 나의 예술과, 나의 헌신과, 나의 우정을…….”
“…….”
“……언젠가의 그날이 부디 하루빨리 도래하기를 바랍니다. 하긴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신의 영역에서는 시간이란 것도 의미를 잃는다고요. 아니, 시간이란 개념 자체가 원래는 존재하지 않는다나요? 그렇다면 그 먼 미래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일 수도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 먼 미래의 이 순간에, 화가 장인환은 그네의 빛의 천사이고 소울메이트인 김강원 선생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빕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선생님께 지을 그 모든 죄들에 대해 온 영혼을 걸고 빕니다. 저를 용서해주세요. 내 위야를 용서해주세요. 부디 우리를 용서해주세요…….”
“…….”
연인이 고개만을 살짝 숙인 정중한 목례를 했다.
방바닥을 향한 고개는 꽤나 오랫동안 도로 올라오지 않았다. 살랑살랑. 부드러운 봄바람 소리가 정원의 나뭇가지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왔다가 다시 조용히 사라져갔다. 바람의 끝자락을 따라 소리 없이 후득후득 떨어지고 있는 낙화가 눈물겨웠다.
아득하게 벨소리가 울린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전에 얼핏 자동차 엔진음도 들린 것 같았다. 문득 소스라친 자신과 달리 조용히 고개를 든 연인이 대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딩동, 딩동, 딩동…….
벨소리는 우리 집 대문의 그것이었다. 꽤나 집요한 방문객인 듯, 몇 초 사이의 간격을 두고 벨은 끈질기게 울고 있었다. 석상처럼 굳어버린 자신의 사지를 어찌해볼 틈도 없이, 연인이 먼저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제가 나가볼게요, 김 선생님.”
특유의 느릿하면서도 약간 불안정한 발걸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연인이 보였다. 현관 앞에 깔린 포석을 지나, 벚꽃이 흩날리고 있는 정원을 가로지르는 것도 보였다. 하늘하늘 떨어지는 낙화를 배경으로 쏟아지는 햇빛 속의 연인이 흡사 신기루처럼 아른거리고 있었다. 당장 어딘가 먼 피안의 세계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서글픈 신기루였다. 갑자기 벼락같은 각성이 내리쳐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현관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한동안 사지를 꽁꽁 묶고 있던 얼음의 주박이 그제야 풀린 것이다. 심장이 몹시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온몸의 근육이 긴장을 하고 있었다. 치명적인 위기에 대한 경고로써 본능은 달갑지 않은 신체적인 반응부터 보여주고 있었다.
멀리, 막 대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는 연인이 보였다. 서울에선 보기 드문 전통 한옥 집 대문이라, 솟을대문에 기와지붕까지 높게 얹혀 있어 대문 밖 손님의 정체는 짐작조차 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강원의 온 신경이 경고하고 있었다. 문밖의 손님은 불청객이었다. 그것도 매우 매우 불길한 불청객이었다. 예감이었다. 전조였다. 막아야 했다.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그러나 이미 한발 늦어버린 자신이었다. 바짝 마른 입술에 혀로 침을 바르며 힘껏 내달렸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연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강원과 4∼5미터쯤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활짝 대문을 열어젖힌 연인이었다. 크게 몇 걸음을 내딛은 뒤 손을 뻗었다. 두 팔로 연인의 어깨를 와락 휘어잡았다. 어리둥절해하는 연인을 배려할 여유조차 없었다. 숨이 턱에 닿아 심하게 헐떡이며 연인을 등 뒤로 숨겼다. 얼굴을 굳히고 전방의 ‘적’을 향해 사납게 눈을 굴렸다. 일생일대의 적을 맞아 털을 세우는 짐승의 야생성이 극도로 치솟았다.
“……제수씨……?”
까맣고 왜소한 남자의 생경한 호칭이 가장 먼저 의식을 치고 들어왔다.
“……혀…… 형수!!!”
“장 선생님, 괜찮으세요?”
흡사 그 남자의 복제품 같은, 커다란 덩치에 호스트마냥 미끈하게 빠진 청년의 더 생경한 외침과, 그 옆에 선 날카로운 인상의 훤칠한 사내의 우려 섞인 안부 인사는 두 번째로 의식에 내리쳐진 무자비한 회초리였다. 뒤에 선 연인으로부터 아 하는 나지막한 감탄사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강원 자신만큼, 아니, 솔직히 자신이 입은 충격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커다란 쇼크를 받았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고요한 기척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움켜쥐고 있던 연인의 왼쪽 손목으로부터 경련보다도 극심할 떨림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지러웠다. 딛고 있던 바닥에 지진이 일어난 것마냥 시야가 크게 출렁거리는 어지럼증이었다.
“……선…… 생님……?”
세 번째 회초리는 한숨처럼 작고 가냘픈 어떤 부름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던진 거대한 감정의 회오리는 앞선 두 번의 충격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뒤에 선 연인이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전광석화보다도 빠르게 몸을 돌려 연인을 끌어안았던 것은 거의 본능이었으리라. 헐떡이는 연인의 숨길이 턱 언저리에 토해지고 있었다. 품 안에 끌어들인 몸뚱이는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가슴이 아렸다. 그러나 미처 그 안쓰러움을 보듬을 틈도 없이 연인의 완강한 손길이 강원을 밀어내고 있었다. 경련하듯 떨며 비틀거리고 있는 몸뚱이로부터 흘러나오리라고는 미처 상상조차 못 한 엄청난 힘이었다. 의지였다. 자신으로부터 두 걸음을 앞서 나간 연인의 등이 보였다. 여전히 떨고, 여전히 비틀거리는 몸뚱이였다. 그러나 그저 그렇게 불안정하게 서 있는 것만으로도 쉬이 범접하기 힘든 서릿발 같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감히 다가서기 힘든 거대한 벽 앞에 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가갈 수가 없어……. 뼛속까지 치미는 절망감 속에서 멍하니 뇌까린 자신이었다. 다 끝났어. 끝장이야…….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한 연인의 얼굴이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휠체어에 실린 자그마한 몸뚱이를 향해서였다. 강원의 시선도 멍하니 연인의 시선을 따라갔다.
휠체어엔 어느 늙은 여자가 하나 앉아 있었다. 너무나 바싹 말라 거의 기아 난민 수준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늙은 여자였다. 아니, 자세히 보니 늙었다는 말엔 좀 어폐가 있었다. 이목구비 자체나 표정만 보면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는데, 심하게 주름이 진 피부와 피골이 상접하도록 마른 탓에 그렇게 보였을 뿐이었다. 흡사 죽음 직전의 노인들에게서나 보일 법한 그런 피부 상태가 여자를 노인으로 착각하게끔 만들었을 것이다.
“……우리 선생님…… 우리 인환 선생님이시죠……?”
아아, 그래. 확실히 그랬다. 재차 여자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앳되다 못해 소녀처럼 맑고 청순한 그런 종류였다. 고작해야 스무 살을 갓 넘겼을까? 물론 그건 아닐 것이다. 여자의 실제 생물학적 나이는 28세였다. 강원은 그 사실을 아주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식물인간 상태로 10년을 버텼다고 하니, 아마도 소녀라는 평가 또한 정확할 것이다. 여자는 정확히 10년 전에 세월이 멈춰버린 것이다. 그것도 열여덟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그리고 그 비극적인 사고야말로 연인을 현재의 죽음보다도 못한 절망으로 밀어 넣은 원흉이었다.
“……우아, 맞다……! 진짜 우리 선생님이시구나…… 많이 늙으셔서 못 알아볼 뻔했어요, 선생님! 근데 자세히 보니까 진짜 우리 선생님 맞아요. 너무 오랜만이죠, 선생님?”
여자가 웃었다. 주름투성이 메마른 얼굴이 소녀의 해맑은 웃음을 물고 있었다.
“……근데 저두 진짜 많이 보기 흉해졌죠? 선생님보다두 더 늙었더라구요. 깨나 보니깐.”
“…….”
“……며칠 전에 자다가 일어났는데 거울 보고 진짜 까무러치는 줄 알았지 뭐예요? 웬 할머니가 서 있는데 완전……! 꿈에서 엄마랑 아빠랑 강이 오빠랑 신나게 놀고 있었거든요? 그냥 하루 동안만 놀고 있는 줄 알았는데, 글쎄, 그게 벌써 10년이나 지났다지 뭐예요?”
“…….”
“……윤열이 오빠나 위야 오빠, 성준 오빠, 휘야 오빠 전부 다 얼굴이 별로 변하지 않아서 전 그 말이 좀 뻥인 줄 알았거든요? 저 위로해주려구 다 입을 맞춰서 하는 ‘하얀 거짓말’이요. 근데 오늘 우리 선생님 얼굴 보니까 그 말이 진짜 맞는 건가 봐요. 우리 선생님도 참 많이 늙어 보이시거든요. 헤헤, 늙어 보이신다는 말 야속하지 않으시죠? 전 선생님보다두 더 늙어 보이는걸요. 그죠?”
“…….”
“……우리 선생님…… 혜윤이가 너무 많이 사랑하는 우리 선생님…… 너무너무 불쌍한 우리 선생님…….”
“흐읍!!!”
짐승의 억눌린 울부짖음이었다. 기어코 터진 신음성과 함께 연인의 가냘픈 몸뚱이가 땅바닥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사지가 바닥에 꽁꽁 묶여버린 듯한 충격에 미처 움직일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사이, 불청객 가운데 둘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연인을 향해 형수라는 호칭을 쓴, 그 남자와 복사판일 듯한 청년과 날카로운 인상의 잘생긴 인텔리전트였다. 전광석화처럼 뻗어 나온 사내들의 팔이 양쪽에서 부축을 한 덕분에 연인은 땅바닥에 고꾸라지는 신세를 가까스로 모면하게 되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휘청거리며 연인은 휠체어를 향해 기다시피 다가가고 있었다. 마침내 여자의 바로 앞까지 다가간 연인이 쓰러지는 건지, 무릎을 꿇는 건지 알 수 없는 휘청거림으로 여자 앞에 무너져 내렸다. 사내들도 더는 연인을 부축하지 않았다. 부축을 허락하지 않은 연인 때문이었다. 연인의 후들거리는 두 팔이 여자의 무릎을 덮고 있던 담요 위로 얹혔다. 와락 조여진 연인의 팔 안에 끌려들어간 것은 여자의 두 다리였다. 연인의 얼굴 또한 어느새 여자의 두 다리를 감싸고 있던 담요 위에 푹 파묻혀 있었다.
“……우리 집으로 돌아가요, 선생님. 위야 오빠 대신 우리 식구 다 같이 모시러 왔어요.”
“……윽, 흑, 윽…… 으으으…… 웁…….”
파도처럼 출렁이며 오열을 참는 연인의 어깨가 보였다. 몸을 감싼 옅은 핑크색의 스웨터가 휘날리는 벚꽃 잎처럼 아득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낙화였다. 황홀한 낙화였다.
“……다 들었어요…… 그동안 위야 오빠랑 결혼하신 것도…… 저 때문에 떠나셨다는 것두요…….”
“……으우흑…… 윽, 우앗…… 윽, 흑…… 웁, 읏…….”
“……근데요, 선생님. 저 진짜로 괜찮거든요. 사고 나서 열 살이나 갑자기 더 먹어버린 건 좀 억울한데, 하늘나라 가서 엄마랑 아빠랑 강이 오빠 만나고 온 건 진짜 좋았거든요. 그래서 저 절대 선생님 미워 안 해요.”
“……윽흑…… 윽, 우앗…… 윽, 흑…… 으아…… 아아…….”
“……저 원래부터 선생님이랑은 죽이 척척 맞았잖아요. 이심전심으루다가 맘도 직방으로 통하고요. 기억나시죠, 선생님?”
“……흐으윽…… 욱…… 윽, 흑…… 아아아…… 흐어어엉…….”
“……울지 마세요. 제발 울지 마세요, 선생님. 저두 눈물 나잖아요…… 네……?”
“……흐아…… 아…… 윽, 윽…… 흑…….”
“……정말예요. 저 엄마랑 아빠랑 강이 오빠 다시 만나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만나서 실컷 어리광부리고 행복하게 놀다가 돌아왔는걸요. 더 열심히 잘 살라고 격려도 해주셨구요. 아, 참! 엄마 아빠한테 이런 얘기도 들었걸랑요? 새언니한테 잘하라구요. 위야 오빠 부인으루다가 참 예쁜 올케가 생겼으니까 사이좋게 잘 살라구 했거든요. 근데 전 그 사람이 신애 언니를 말하는 건 줄 알고 벌써 안다고 했더니 엄마가 웃으며 그러시는 거예요. ‘그 아가씬 우리 집안사람이 아니란다’ 하고요. 위야 오빠네 올케는 다른 사람이랬어요. 그래서 제가 놀래가지고 그럼 누군데요 하고 물었거든요? 근데 엄마가 막 즐겁게 웃으시더라구요. 참 맘씨 곱고 참한 며느리라고 하면서요. 엄만 아주 마음에 쏙 든다고 했어요. 그니깐 저도 시누이 티 내지 말고 앞으로 잘하라고요. 그동안 위야 오빠가 새언니 속 무지 많이 썩혔기 땜에 우리라도 잘하지 않음 안 된다나요? 안 그럼 위야 오빠 버리고 도망갈지 모른다고요. 암튼 그러다가 깨났는데, 엄마가 말해준 그 새언니가 글쎄 남자인데다 제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우리 선생님이실 줄이야! 와우, 진짜 깜짝 놀라고 말았지 뭐예요, 선생님?”
“흐아아아아아……!!!”
“그러니까 얼른 우리 집으로 가요, 선생님! 저 진짜루 괜찮다니까요? 아니, 사실은 괜찮은 거 이상이죠, 솔직히 말하면요. 사실은 지금 너무 좋아서 꿈을 꾸는 거 같은걸요! 하루 자고 일어났더니 우리 집은 진짜루 엄청 부자가 돼 있고요, 너무너무 좋아하는 우리 선생님이랑 위야 오빤 다시 화해를 하다못해 부부가 됐구요, 옛날 연희동 집도 도로 우리 집이 돼 있고요, 위야 오빠네 삼청동 집은 더 궁전이더라니까요?! 게다가 윤열이 오빠까지…… 맨날 경찰들한테 쫓기면서 힘든 운동만 했는데…… 제가요, 선생님. 진짜 맨날맨날 가슴이 조마조마했걸랑요, 울 윤열이 오빠 땜에요. 강이 오빠처럼 잘못될까 봐서요. 근데 이젠 대한민국 최고의 존경받는 국회의원이라고 하지 뭐예요? 저두 옛날처럼 코피 흘려가며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대빵 부자인 울 위야 오빠가 평생 놀고먹게 해준다고도 하죠, 글구 저 만화가 해도 된다고 위야 오빠가 허락해줬어요. 아시죠, 선생님? 저 만화 무지 좋아하는 거요. 사실은 만화가가 꿈이었는데 다들 그게 배고픈 직업이라구 그러는 바람에 사실은 아무한테도 말 안 했었거든요. 근데 이젠 위야 오빠가 돈 무지 많이 버는데다 휘야 오빠도 돈 많이 벌고 그래서 저는 이제 아무 걱정 않고 만화가 되는 공부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정말 진짜 짱으루 근사하죠? 그러니깐 이건 그냥 괜찮은 정도도 아니라니깐요? 정말 하늘나라 엄마 아빠가 제 소원들을 몽땅 다 들어주려고 마법이라도 부린 것 같다니까요, 선생님?”
“흐어어어엉……! 어어흑!……! 흐어어…… 어아아아…….”
“선생님…….”
“혜윤아, 그만해라. 선생님 너무 흥분하셨어.”
“어떡해……! 울지 마요, 선생님! 선생니임……!”
“……흑, 흑…… 흑…… 흐아아아아아…….”
“아따, 싸게 싸게 차 안으로 뫼시지 안 허고 뭐더야?!!!”
“……그, 그만해요, 형수…….”
“장 선생님, 진정하시고 이리 기대세요. 차 안까지 부축해드리겠습니다.”
“혜윤이 너도 어서 들어가자. 아직은 찬바람 너무 오래 쐬면 안 좋아.”
“휘야, 너도 이리 와서 선생님 왼팔 좀 붙들어드려라. 영 힘을 못 쓰시네…….”
“어, 성준 형!”
사내 둘이 흥분과 전율과 흐느낌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조차 못하는 연인을 양쪽에서 부축해 짙은 청색의 봉고차 안으로 이끌고 있었다. 끌려가는 연인도, 끌고 가는 사내들도, 그것이 아주 당연한 귀결이라는 듯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새까만 얼굴에 감색의 골프 점퍼를 걸친 소탈한 풍모의 이 의원도 여자가 탄 휠체어를 봉고차 안에 싣고 있었다. 뒤에 남겨진 강원을 신경 쓰는 이는 그들 중 아무도 없었다.
마침내 연인과 휠체어에 탄 여자를 흡사 보물단지라도 되는 듯 차 안으로 소중히 숨겨놓은 사내들이 도로 차에서 뛰어내렸다. 손발이 척척 맞는, 민첩하고 군더더기 없는 작전 수행 능력이 눈부실 지경이었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이 따로 없었다. 그제야 우두커니 선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강원을 눈치챘는지, 날카로운 인상의 미남이 문득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마지못해 예의를 챙기는, 차가운 인사였다. 흡사 그 남자처럼 선 밖의 인간에겐 무관심 그 자체인 사내라고, 얼핏 사내에 대한 평가가 스쳐갔다. 유유상종이구나 하는 악의에 찬 비아냥도. 아니지, 피는 못 속인다인가? 이리 떼처럼 우르르 몰려와선 남의 사랑을 단숨에 강탈해 가는, 그것도 일절 미안하다는 표정조차 없이 태연스레 훔쳐가는 뻔뻔스러움이 너무나 그 남자네 집안답지 않은가. 당해낼 턱이 없었다. 그 남자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저 무자비한 떼거리를 자신 혼자 어찌 당할까 보냐.
간단한 목례를 마친 사내가 봉고차 운전석으로 사라지고, 그 뒤를 이어 그 남자의 복사판 같은 청년도 조수석에 몸을 부리고 있었다. 이제 차 밖에 남겨진 이는 강원 자신과 이 의원뿐이었다. 제 짐들이 제대로 안전하게 실렸나 하는 꼼꼼한 눈길로 슥 차 안을 훑던 이 의원의 눈길이 강원의 것과 마주쳤다. 찰나의 순간, 도저히 숨길 수 없었던 자신의 엄청난 한과 증오가 읽혔던 걸까? 밝게 웃음을 물고 있던 이 의원의 표정은 곧 착잡한 사려 깊음으로 변했다. 물론 강원의 입장에선 악어의 눈물과 다름없을 같잖은 친절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건 두 번째였다. 저 작달막하고 새까만 피부의 거인이 자신으로부터 연인을 강탈해 가는 것이. 마치 가차 없고, 단호하고, 폭력적인 자신의 비참한 연애운처럼. 그리고 그조차도 아마 이것으로 마지막이겠지. 마지막. 최후. 막다른 골목. 이별…….
자신을 향해 몇 걸음 다가오려던 이 의원의 발걸음이 뚝 멎는 것이 보였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 속에서 이 의원의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는 당혹감만 오롯이 드러나 있었다.
“아무런 말씀도 하지 마십시오. 만약 단 한 마디라도 뱉어내신다면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하게끔 당신의 사지를 전부 바스러트릴 수도 있습니다.”
어딘가에서 잔뜩 상처 입은 짐승의 거친 포효가 들려왔다. 윙윙거리는 이명과 함께였다. 불길 같은 분노와 빙산 같은 냉혹한 차가움이 거칠어진 짐승의 내면에 공존했다.
“……내 소중한 사람에게 지금 보신 것을 전하지도 마십시오. 그냥 조용히 내 영역에서 사라지십시오.”
빈사 상태의 짐승이 재차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아무런 힘도, 위용도 되지 못할 패자의 투레질일 뿐이었다. 이제 세상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을 터였다. 쓰러져 죽어가는 짐승의 울부짖음 따위에 관심을 기울여줄 산 생명은 없었다. 그랬다. 그것이 이치였다. 살아야 할 생명은 무리지어 살고, 죽어 사라져야 할 생명은 그저 홀로 방치된 채 모두에게서 잊히는 일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우주의 공평한 이치였다. 이제 강원의 세상에 살아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단 한 사람, 함께 살아주길 바랐던 소중한 반려는 산 사람의 세상으로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단 한 번의 뒤를 돌아봄도, 일말의 망설임조차도 없이.
눈물이 비 오듯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눈꺼풀을 질끈 감아보아도 시야는 마냥 뿌옇게 안개가 서리곤 했다. 뿌연 저 너머 세상에서 이 의원의 새까만 얼굴이 아래로 향하는 게 보였다. 천천히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이 의원은 이마까지 땅에 댄 대역죄인의 몰골로 한참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코웃음을 쳤다. 그래봤자 같잖은 악어의 눈물일 뿐이었다. 돌아서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 의원이 하루 종일 무릎을 꿇은 채 빌든 말든, 자신의 세상이 변하는 것은 없었다. 어차피 마지막이었다. 최후였다. 막다른 골목…… 영원한 이별이었다.
솟을대문의 빗장을 질러 자신만의 소굴로 칩거했다. 정원을 반쯤 걸어 들어왔을 때,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피식 실소가 물렸다. 역시 산 사람은 산 사람의 세상에서 잘 살게 마련이었다. 빈사 상태의 짐승 따위 누구도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일 까닭이 없었다. 상관없었다. 단 하나, 생애 유일한 상대가 아니라면 그저 지금처럼 어느 누구의 개입도 없이 홀로 상처를 핥는 편이 훨씬 간소하고 깔끔한 결말이었다.
―……넌 이 남자와 살아…… 따뜻한 체온과…… 부드러운 피부와…… 생기와…… 내 강아지의 빛을…… 이 남자가 다시 네게 돌려줄 거야…… 그러니 너도 이 남자를 사랑하고 살아…….
문득 그 남자의 비통한 목소리가 섬광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그 밤, 연인을 자신에게 넘겨주며 울부짖던 그 남자의 절망이었다. 희망이었다.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살아주면 돼. 그러면 나도 행복할 거다.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내 남은 무엇은 네가 전부 가져갔으니까…… 그래, 그러니까 네가 행복하면 네 속에 있는 나도 행복해지는 거야. 알아듣나? 알아듣지……?
이제 자신도 같은 선언을 연인에게 들려줘야 하나? 문득 쓴웃음이 일었다.
남자는 옳았다. 과거야 어쨌든 남자는 스스로를 제물로 삼아 사랑을 완성시켰다. 그것은 나름대로 성스럽게까지도 느껴지는, 위대하고 찬란한 그 무엇이었다. 그 본을 옆에서 생생히 목도한 목격자로서, 같은 존재를 목숨처럼 사랑한 또 다른 수컷으로서, 자신 역시 동일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래. 당신이 행복하면 되는 거야…….
돌아가야 할 곳으로 되돌아가는 연인을 향해 가만히 인사했다.
―……이제 더는 고통받지 않고, 당신이 그리도 꿈꾸었던 우리들의 그 멋진 ‘방’에서 그 남자와 영원히 함께 행복하면 되는 거야.
조용히 축복을 주었다.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당신을 사랑하는 나는 이미 완전히 사라졌으니까. 당신이 전부 가져가버렸으니까. 그러니 당신이 행복하면 나도 따라서 행복해지는 거야, 선생님…….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았다.
온통 뿌옇게 변한 세상에서 나풀나풀 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낙화였다. 하늘하늘, 사랑이 떨어지고 있었다. 별이 지고 있었다. 진혼(鎭魂)의 축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