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ide|toxic effect - 1. 2297년 3월. 이은우(李誾踽) (112/129)

1. 2297년 3월. 이은우(李誾踽)

폭포수처럼 눈가에 흐르던 땀방울 하나가 눈자위 안으로 스며들었다. 

은우는 걸음을 멈춘 채 손등으로 거듭 눈꺼풀을 비비며 불편한 통증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몇 발짝 앞서가던 제이슨이 뒤돌아보며 괜찮냐는 물음을 던졌지만 은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괜찮을 턱이 있나. 눈은 쓰라리고,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은 움직일 때마다 찰과상을 입은 피부 표면 곳곳에 성가신 통증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무엇보다도 참기 힘든 고통은 숨통을 죄는 듯한 무더위일 것이다. 밤이 되면 서늘함을 느낄 정도로 기온이 급강하하지만 오후 21시가 조금 넘은 현재 기온은 섭씨 38도에 육박하고 있었다. 자전 주기가 43시간인 행성의 특성상 밤이 되려면 아직 여덟 시간은 더 기다려야만 한다.

그렇게나 더위를 싫어한 자신이었는데, 불시착을 해도 하필이면 불지옥이 무색할 열대 기후가 지표면 전부를 장악하고 있는 원시 행성으로 떨어지다니. 운이 없어도 지독하게 없다고 해야 하나.

아니, 아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일생 행운과는 거리가 먼 사건이 질기도록 되풀이된다면 그건 더 이상 운이라는 말로 표현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건 업이다. 악업. 사제들이 흔히 말하는 카르마. 긴긴 전생의 되풀이를 통해 자신의 에고가 저질러온 악행의 결과물이란 얘기.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도 불가항력의 사건들이 거듭해 일어나 발목을 틀어잡곤 한다면, 달리 그렇게라도 납득을 시키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은가? 뭐가 됐든 그럴싸한 이유를 달아 뿌리 깊은 좌절감을 견디는 수밖엔.

물론 음악을 잃게 되었을 때 그나마 알량하게 남아 있던 순진한 신앙심 따윈 따라서 사라져버린 지 오래인 자신이었다. 오른손이 바스러지고 안드로이드의 의수로 손가락을 대체했을 때, 그토록 사랑하던 음악은 자신의 바스러진 손가락과 함께 날아가버렸다. 기능은 실제 유기체보다 월등했지만 안드로이드로 신체 일부가 대체된 예술가는 현실적으로 결코 인정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때 은우의 심리 마스터를 담당했던 사제는 저 비통한 상실을 겸손하게 납득하고 수용하라고 설교했었다. 모두가 카르마의 소산이라고. 사제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예술가로서의 삶을 이미 여러 번 살았었다고 한다. 되풀이된 생의 카르마가 관성처럼 같은 방식의 삶을 부르고 있지만, 그래선 영혼은 빨리 진화할 수가 없다나. 결국 오만불손한(!) 사제는 은우 스스로의 영혼이 손가락이 부서지는 사고를 일부러 불러들였다는 선고로 은우의 가슴을 난도질하고 말았다.

그 이래, 은우는 사제들이 하는 얘기들을 진심으로 믿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설령 그들의 진리가 사실이라고 해도, 상처 입은 가슴이 그것을 절대 진리라고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시민 윤리니 영혼 헌장이니 하는 것들이 사회를 통합하고 유지시켜나가는 데 가장 합리적이고 유익한 이데올로그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건 이데올로그로서 동의를 표하는 것일 뿐이지, 결코 신앙의 대상으로서는 아니었다. 효율적인 사회 협약 따위에 경건히 옷깃을 여밀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그렇게 저들의 교리들을 냉소해왔건만 역시 연속되는 불운엔 교만이 발을 붙일 여지가 없었던가 보았다. 단지 확률 문제라고 떠넘기기보다, 얼마나 합리적이고 달콤한 위로란 말인가. 넌 뭔가 원인이 있어서 이리 재수가 없는 거니 좀 더 참고 인내해라 하는. 더할 나위 없이 그럴듯한 신경 안정제가 아닌가 말이다.

“넬슨호에 도착하면 후버 씨 진찰을 꼭 받도록 해. 더위 때문에 감각 신경이 둔해져 있는 상태니까 어디 뼈에 금이 가도 자각을 못 할 수가 있다구. 그냥 가벼운 찰과상이라도 그래. 철저하게 소독해두지 않으면 패혈증을 일으킬 수도 있어.”

은우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제이슨이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어조로 다짐을 주었다.

“예, 그렇겠군요.”

“아무튼 천만다행이다. 그 밑에 그런 골짜기가 숨어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덤불이 쿠션 역할을 해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예. 이런 밀림 속에선 사라(넬슨호의 메인 컴퓨터 SARA2280)의 지형도도 별로 쓸모가 없군요. 방위군이 미리 답사하지 않은 곳으로는 사냥을 나가지 말아야겠어요.”

“그래. 무엇보다도 캠프 반경 500킬로까지의 자세한 지형도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겠어. 아까 같은 경우도 사전 답사를 했다면 피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였는데 말야. 부선장을 좀 더 닦달해봐야지. 도대체가 그 사람은 위기의식이란 게 없어서 탈이야. 종교인들은 다 그런가? 불시착한 게 아니라 꼭 무슨 휴가지에 놀러 온 것마냥 천하태평이니…….”

“그래도 사람들이 패닉에 빠지지 않고 그럭저럭 이곳에 적응할 수 있는 건 부선장님 덕분일 겁니다. 전 꽤 현명한 리더라고 생각해요.”

“그야…….”

뭔가 반론을 제기하려던 제이슨은 고개를 가로로 흔들더니 이내 지친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사나운 폭염에 맥을 못 추는 이는 평범한 건축 노동자인 은우뿐만이 아니다. 훈련받은 베테랑 우주선 승무원들 역시 은우처럼 모든 게 당혹스럽고 또 고통스러울 터이다. 더위는 물론, 별 희망도 없이 지구로부터의 구조를 막연히 기다려야만 하는 작금의 처지까지도.

왼쪽 어깨에 멘 불룩한 진공 배낭을 오른쪽 어깨로 바꿔 둘러메는 제이슨의 동작에서도 피로감이 역력하게 읽혔다. 배낭엔 몇 분 전에 자신과 메이슨 둘이 힘을 합쳐 포획한 이름 모를 포유동물 세 마리가 들어 있었다. 몇 시간 후에 있을 저녁 식사 재료로 쓰일 포획물이었다. 넬슨호에 비축돼 있던 식량이 바닥을 보인 지도 이미 석 달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물론 식재료로 쓰일 동식물들은 행성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그러나 식품 관리원도 아닌 비전문가들로서 은우를 비롯한 조난자들이 원시적인 노동 방식에 의지해 식재료를 확보해야만 하는 일은 무척이나 성가시고 또 위험한 것이었다. 노동의 강도로 볼 땐 메크로늄 추출기를 설치하는 공사가 진행 중인 E-558 구역에서의 그것이 훨씬 더 단위가 높았지만 위험도는 그 반대였다. 조난자들의 리더인 부선장이 능력의 유무에 상관없이 두 사람씩 한 조로 묶어 돌아가며 조난자 전원에게 식재료 채취 의무를 부과하기로 한 것도 저 높은 수치의 위험도를 감안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간에 부선장은 좀 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구. 이렇게 열악한 환경인데다가 언제까지 구조를 기다려야 할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어떤 돌발 사태가 일어날지 장담할 수가 없잖아. 아까만 해도 정말 큰일 날 뻔했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말란 보장도 없고…….”

가쁜 숨소리가 섞인 사내의 어조는 신경질적이었다. 거듭해서 토해지는 부정적인 얘기에 스스로도 불길하단 생각이 미쳤는지 제이슨은 다시금 말끝을 흐리고 있었다.

화물선 승무원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해적선의 기습을 받은 적은 두어 번 있었지만, 그것이 이처럼 어느 무인 행성 불시착까지 이어지게 된 경우는 처음이라고 제이슨은 언젠가 말했었다.

불시착한 넬슨호의 살아남은 승무원들 중 하나인 제이슨은 40대 초반의 건장한 사내로, 은우에겐 여섯 달 남짓한 표류 기간 동안 어느새 친구처럼 허물이 없어진 상대였다. 내성적인데다가 무뚝뚝한 기질인 은우로선 이례적일 만큼 빠른 사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긴 생존자라고 해야 고작 34명뿐이고, 험악한 무인 행성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의 사투를 벌어야만 하는 조난자의 처지로선 서로를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래도 사라가 아직은 제 기능을 해주지 않습니까? 메인 시스템은 가동이 불가능해도 최소 생존 모드인 서브시스템을 움직일 동력은 아직 2년 정도는 충분히 버틸 만하구요. 만에 하나 완전히 고립된다고 해도 생존 가능성은 충분한 별이에요. 대체 동력으로 쓸 만한 메크로늄이 매장돼 있다고 하니까 추출기만 완성되면 지금처럼 동력을 절약하기 위해 고생할 필요도 없구요. 물도 충분하고, 생명 활동도 왕성하죠. 아직 치명적인 고등 생명체가 출현하지 않았다는 것도 우리들한텐 유리한 조건인 셈이구요. 만약 진화 초기 단계에 있는 고등 동물이나 영장류들에 노출이 됐다면 우린 그들에게 애저녁에 잡아먹혔을지도 모르죠.”

“흐음. 어두컴컴한 염세주의자치고는 꽤나 희망적인 발언이로군.”

별로 희망적인 얘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하고 덧붙이려던 말을 삼키고 은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자기장도 안정되지 못해서 화산 활동이나 지진이 빈번할 거야. 대기권도 너무 불안정하고. 우기 때의 강수량도 정확하게 데이터가 잡힌 건 아니지. 넬슨호에 언제 홍수가 덮칠지 알 게 뭐람.”

“그래도 고등 인간의 생존 지수가 아주 낮은 건 아니에요. 사라가 확인해주지 않았습니까, 제이슨.”

“그거 별로 좋은 소리로는 안 들려. 생존 지수가 좋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여기 묶일 가능성도 크다는 뜻이니까. 자넨 전부 육체적 생존에 관해서만 집중하고 있잖아. 도대체 이런 원시별에 가족과 떨어진 채 일생 갇히게 될 걸 생각해봐. 살아가는 보람도, 뭣도 없이 무위도식이나 하게 된단 소린데, 부선장처럼 독실한 종교인이 아닌 한 정상적으로 적응할 인간이 얼마나 되겠어?”

“……하긴 그런 문제가 있네요. 전 가족이 없어선지 그 부분에 대해선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역시 가슴 아픈 노릇이겠죠. 사랑하는 이들과 떨어진다는 건.”

“가슴 아픈 정도에서 끝나면 다행이게? 정신 공황을 일으키는 인간이 나온대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구, 이런 상황에선 말야. 물론 자급자족하는 부류도 나오긴 하겠지만…… 벌써부터 연인 냄새를 풍기는 커플도 꽤 있는 걸 보면 말이지.”

“……그래요? 우리들 중에 말입니까?”

“둔하긴. 아직도 눈치 못 채고 있는 인간은 아마 자네뿐일걸? 센다이와 알렉은 확실하고, 게일과 스티브 쪽도 수상하지. 군터와 데프레뉴는 아직 탐색 중인 것 같지만 그치들도 조만간 커플 선언을 할 게 뻔해.”

“……그렇군요. 몰랐습니다. 하긴 동성 취향이 있는 사람들은 무리도 아니죠. 일단 이런 위기 상황에선 서로에 대한 호감도도 몇 배는 상승하는 심리 상태가 되곤 하니까요.”

“남 말 할 처지가 아니야. 자네를 노리고 있는 치도 있는 것 같으니까 조심하라구.”

“아아, 전 동성 취향은 아닙니다. 별로 성욕이 높은 편도 아니라서 결혼의 필요성도 못 느끼는걸요.”

“그러니까 조심하란 얘기야. 자네처럼 독신을 선호하는 치들이야말로 특정 상대를 유혹하는 페로몬이 흘러넘친단 말일세. 반려자에 목매는 쪽보다는 영적인 진화가 훨씬 앞서가기 때문이지.”

“음, 전 반대로 들었는데요, 제이슨? 그러잖아도 대학 재학 중에 관련 검사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진로와 관련해서 제 몸과 정신에 좀 문제가 생겼었거든요. 그때의 심리 마스터들 진단으론, 제게 타자에 대한 애착 지수가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독신으로 살게 될 확률이 90퍼센트 이상이라고 했죠. 다수의 친구나 연인을 만들기가 꽤 힘들 거라고 했어요. 생각나네요. 검사관이었던 심리 마스터들은 절 동정했던 것 같아요. 그들은 한결같이 저더러 승원(僧園)에 들어가 신학자가 되기를 권했지요. 신학자가 되면 그나마 고독을 덜 느끼게 될 거라면서요. 하지만 전 별로 신앙심이 없었거든요. 고독한 것이 반드시 불만족한 삶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구요. 아무튼 그때부터 전 독신 성향자로 낙인이 찍힌 셈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호감을 이끌어낼 수 없는…… 아무튼 저 같은 독신주의자들은 별로 인기가 없단 말입니다, 제이슨. 페로몬이 흘러넘친다니 당치도 않아요.”

“그야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렇겠지. 하지만 독신자들과 영적인 파장이 맞는 소울메이트들에겐 다르다구. 사제들이 말하듯이 서로가 강력한 카르마로 연결이 돼 있는 경우겠지. 아무튼 그런 상대가 나타났을 경우 독신자가 상대에게 미치는 매혹이란 것은 상상을 초월한단 말일세.”

“소울메이트라뇨? 지구 대변혁을 거치면서 진화에 역행하는 그런 부정적인 관계들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습니까?”

“대부분은 그렇지. 지구 대변혁 이후에 인류의 영적인 진화가 비약적으로 진행된 건 사실이니까. 비교적 평탄한 속도로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대다수의 영혼이라면 소울메이트가 없는 게 당연하긴 하지. 하지만 대다수가 그렇다는 거지 그 존재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라네. 자넨 통계청에서 발간한 ‘범죄 발생과 진화 수치의 연관성에 관한 리포트’를 읽어본 적 있나? 그 리포트에 의하면 소울메이트 관계가 원인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영혼들이 아직도 전체 영혼 중 2∼3프로에 이른다고 하더군. 드물긴 해도 그로 인한 야만적인 비극들이 현재도 틈틈이 일어난단 말일세.”

“……설마…….”

“설마가 아니라니까. 20년 전쯤에 나도 그런 치들을 목격한 적이 있지. 내가 성단 간 운송선을 탄 지 몇 년 안 됐을 땐데, 달기지에서 만난 친구들이었어. 한 친구는 달기지의 기상학자였고 다른 한 친구는 나와 같은 화물선 승무원이었지. 승무원인 친구는 기상학자를 만나자마자 정신없이 빠져들었지만 기상학자는 끝까지 그 친구의 구애를 거절하더군. 그는 뿌리 깊은 독신 성향이었거든. 결국 어떻게 된 줄 아나? 끔찍한 비극으로 끝나버렸다네. 승무원인 친구가 기상학자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해버렸거든. 당시 굉장한 스캔들이었지.”

“……놀랍군요…… 살인이라니…… 게다가 자살까지…… 맙소사…….”

“그때 알았지. 독신 성향의 친구들을 진짜 조심하자고.”

“하하, 전 전염병이 아니라구요, 제이슨.”

“요지는 자네라고 해서 방심하지 말란 얘기야. 경우에 따라선 진짜 엄청난 괴물을 끌어당길 수도 있으니까. 자네가 동의하지 않아도 밀어붙이는 치들이 나올 수가 있다구. 말했다시피, 지금은 무력감과 두려움으로 다들 정신 지수가 낮게 퇴행해 있는 상태니까.”

“……그럴 리가요……. 아무리 특수 상황이라고 해도 우리가 그 정도로 진화에 역행하는 폭력성을 드러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비 오듯 흘러 떨어지는 얼굴의 땀을 소맷부리로 훔쳐내며 은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계속되는 제이슨의 수다는 거의 엽기적인 느낌마저 주어서, 의미의 반도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페로몬이니, 유혹이니, 소울메이트니, 살인이니, 자살이니…… 현재의 은우로선 너무나 생소하고 위화감이 드는 주제였다. 온몸의 감각 기관을 강력하게 장악하고 있는 더위의 고통만이 생생하게 자각되고 있을 뿐이었다. 어서 빨리 넬슨호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잠시라도 눈을 붙이고픈 일념뿐이었다. 물론 주제 자체는 상당히 자극적이었기에,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귀로를 그나마 견딜 만하게 해주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뭐, 나도 그렇게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 친구 같은 경우는…….”

“……그 친구요?”

“…….”

“……필립 말입니까?”

“……아니, 그게…….”

조용하고 서글서글한 인상의 백인 청년 하나를 문득 떠올리고 되물었지만 제이슨은 말끝을 흐렸다.

“제게 대한 필립의 호의는 알고 있습니다만, 별로 그런 쪽으론 생각을 못 해봤네요. 하지만 설령 필립이 제게 성욕을 느낀다고 해도 강제로 뭘 어떻게 할 저급한 성품이라곤 생각되지 않는데요? 그 친구, 내성적이긴 하지만 그래 봬도 꽤 균형 잡힌 정신력을 갖고 있어요.”

“……필립이 아니라…….”

“필립이 아니라구요? 그럼 누굴 말씀하시는 거죠?”

정말로 궁금해져서 고개를 들고 제이슨의 얼굴을 살피자, 생각에 잠긴 갈색 눈이 마주 시선을 보내왔다. 소탈해 보이는 그 눈에 희미한 의혹이 서려 있었지만 대답은 주어지지 않았다. 먼저 시선을 피하고 다시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한 쪽도 제이슨이었다.

“……아냐, 아무것도. 하여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일단 자네가 그럴 의향이 없다면 동성 취향의 사람들에겐 조금 거리를 두는 편이 좋을 거야. 인류의 도덕성은 꽤나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화를 거듭해왔지만, 늘 예외라는 게 존재하니까 말야. 예의 ‘달기지에서의 비극’처럼 능력이 떨어지는 자들이 일으키는 범죄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라구.”

“그렇군요. 무슨 얘긴지 알겠어요, 제이슨.”

“게다가 말했다시피 우린 지금 조난당한 처지야. 엄청 스트레스를 불러일으키는 상황이란 말이지. 그 어느 때보다 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요구되는데, 치정 사건 같은 것으로 멤버들 간의 연대감에 그늘이 져선 곤란하다구.”

“하하, 치정 사건이라니!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네요. 소울메이트니 살인이니, 물론 자살도 그렇구요. 아무튼 중등학교에서 역사 공부라도 하고 있는 기분입니다, 제이슨.”

꽤나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던 제이슨도 은우가 기막힌 웃음을 흘리자 마침내 호탕한 너털웃음으로 답을 주었다. 스스로도 지나치게 오버를 했다고 납득한 모양이었다.

“젠장. 이게 다 조난된 때문이잖아. 툭하면 사람들을 야만적인 정서 불안 상태로 몰아간다니깐.”

씁쓸하게 덧붙이는 제이슨이었지만 은우의 가라앉았던 기분은 덕분에 좀 나아져 있었다. 진심으로 우러나서 유쾌하게 웃어본 게 언제인지, 생각하면 참으로 까마득했다.

“……아무튼 값비싼 화물이 실려 있으니까 지구에서도 쉬이 넬슨호의 수색을 포기하진 않을 거예요. 희망을 갖자구요, 제이슨.”

흐릿하게 웃으며 내뱉는 격려의 말을 은우는 스스로도 별로 믿지 않고 있다고 멍하니 생각하고 있었다.

웜홀 진입 직전, 넬슨호가 마지막으로 이동할 공간에 대한 정확한 좌표가 지구로 송신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지구에서 사라진 넬슨호를 추적하기란 바닷가 모래알 속에서 바늘 찾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제이슨의 말대로 자신들은 어쩌면 정말로 이 난폭한 행성에 일생 격리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어떨지 몰라도, 불운이 동거하고 있는 자신의 경우라면 그래도 전혀 이상스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은우였다. 솔직한 얘기지만, 넬슨호의 조난도 실은 은우 자신 때문에 일어난 비극일지 누가 알겠는가.

원하는 것은, 아니, 희망이라는 것은, 어쩐 일인지 손을 뻗을 때마다 매몰차게 자신을 밀쳐내기만 할 뿐이었다. 지금쯤은 이미 지구에 도착해 있어야 할 넬슨호가 이곳에 불시착함으로써, 겨우 적응하게 된 은우의 건축 노동자로서의 삶도 다시금 날개가 꺾인 셈이었다. 지구 본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을 건축 매니지먼트 자리는 이미 다른 이가 차지했을 것이다. 정말 운(!) 좋게 이 행성을 탈출한다고 해도 자신이 돌아갈 자리는 이미 없다.

지난 5년간 해왔던 은하계 변방에서의 건축 일을 다시 시작하지 않는 한, 새로운 승진 기회를 잡기란 어렵다는 것도 은우는 알고 있었다. 물론 이미 일에 대한 흥미도, 열의도 잃어버린 지 오래인 자신으로서, 그 험한 오지에서의 건축 일을 다시금 시작할 까닭도 없었다. 은우의 미래는, 사랑하는 음악을 포기해야 했던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불투명하기 그지없었다.

“체, 그놈의 잘난 화물 덕에 이 지경이 됐는데, 이젠 그따위 걸 희망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니…….”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어린애처럼 투덜거리는 제이슨에게 막연한 죄의식을 느끼며 은우는 얼마 안 남은 귀로를 재촉했다. 거대한 양치식물들로부터 뻗어 나온 덩굴이 점차 그 수를 줄이고 있다는 기분이 들 무렵, 마침 끝없이 되풀이될 것 같던 정글이 갑자기 사라지고 15미터 폭의 작은 강이 나타났다. 모선인 넬슨호로 자신들을 데려다줄 단거리 수송기는 강변 옆 자갈밭 한구석에 자신들이 떠났을 때 모습 그대로 얌전히 세워져 있었다. 넬슨호가 불시착해 있는 구릉지는 강가를 따라 북서쪽으로 40킬로쯤을 올라가야 보일 것이다.

두꺼비 모양의 납작한 수송기를 보니 은우는 반가운 마음에 만세라도 부르고픈 심정이었다. 더 이상 무성한 밀림을 헤치며 폭염 속을 걷지 않아도 된다.

사냥감을 뒷좌석에 실은 후, 운전석에 올라탄 제이슨은 재빨리 수송기를 이륙시켰다. 순식간에 100여 미터를 수직 상승한 수송기가 넬슨호가 있는 구릉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채 2분도 걸리지 않았다.

착륙 직전 고개를 내리고 아래를 살피니, 하늘을 찌를 듯 빽빽하게 뻗어 있는 열대우림의 틈새로 은빛으로 번쩍이는 넬슨호의 거대한 선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완만한 유선형으로 물결치듯 뻗어 있는 선체의 지붕 부분은 지름이 300여 미터에 달했다. 움직일 수 없게 된 유령선이라는 게 믿을 수 없을 만큼, 그것은 꽤나 크고 압도적인 모습으로 보였다. 물론 아무리 거대해봤자 34명의 생존자들에겐 거의 무용지물인 타이탄일 것이다.

실로 5년 만인 지구로의 귀향이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는 것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좀 더 기다려 안전한 정기 여객선을 타지 않았던 자신의 어리석은 결정에 대한 완벽한 면죄부는 되지 못할 것이다.

번쩍거리는 거대한 유령선으로부터 시선을 돌리며 은우는 새삼 뼈아픈 후회를 곱씹지 않을 수 없었다.

“쓸 만한 걸 잡았습니까, 제이슨?”

“토끼(토끼와 모양이 비슷해 붙인 이름이었는데 크기는 토끼의 두 배는 되었다) 세 마리야. 저녁 식사 감으론 충분하겠지?”

“괜찮은데요! 물론 충분하고도 남죠!”

“땀범벅이네? 고생했어, 제이슨. 은우 씨도.”

넬슨호 근처 강가에 수송기를 착륙시키고 밖으로 나오니, 강가에 나와 멱을 감고 있던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은우들을 맞아주었다. 오늘 오전, 메크로늄 추출기 작업을 위해 메크로늄 광산이 있는 E-558 구역으로 이동했던 이들이었다. 사내들이 타고 돌아왔음직한 다른 수송기 한 대도 20여 미터쯤 떨어진 모래톱 위에 우뚝 세워져 있었다.

먼저 돌아와 멱을 감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걸 보니, 작업이 꽤나 힘겨웠던 모양이었다. 40도에 가까운 불볕더위 속에서 수작업에 가까울 원시적인 공사를 진행하고 있으니 쉬이 지치는 것이 당연하리라.

은우 같으면 에어컨디셔너로 적정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쾌적한 선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련만, 사내들은 살인적인 무더위는 아랑곳 않고 유유자적한 물놀이에 흠뻑 빠져 있었다. 허리 아래 수건만 두른 반라 차림으로 강변을 어슬렁거리는 모양새는 진화 초기 단계에 돌입한 뭇 원시인들의 모습과 거의 흡사해 보였다.

하긴 조난된 지 어느새 6개월로 접어들고 있었다. 초기의 낙담과 패닉 상태가 가라앉자, 생존자들 사이에선 나름대로 원시 환경에 적응해보려는 생존 의지가 세워지고 있었다. 안전한 방주인 넬슨호에서 벗어나 열악한 외부 환경에 노출되는 시간을 늘리려는 사내들의 행동에는 그런 무의식적인 저의가 담겨 있을 것이다.

물론 더위에 진저리를 치는 은우에겐 그런 사소한 노력들조차 몹시 버거웠다. 동력이 바닥나 더 이상 넬슨호에서 버틸 수 없게 된다면 할 수 없겠지만, 은우는 자신의 생존 지수를 높이기 위해 지레 힘겨운 적응 훈련부터 할 생각은 없었다. 정말로 운이 좋아 지구로부터 구조선이 날아온다면 다행이고, 설령 이대로 영영 낙오된다고 해도 살아남기 위해 무언가 치열한 사투를 벌일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견디며 최대한 문명의 담요인 넬슨호의 안락함에 기댈 생각이었다.

물론 은우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몹시 지쳐 있다는 것을. 아니, 살아가는 일 자체에 흥미를 잃고 있다는 것을. 필사적으로 살아남아,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 일은 현재의 자신에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은우 씬 옷 꼴이 말이 아니네? 짐승들과 한바탕 레슬링이라도 했나 보지?”

“예, F-16 구역에 숨은 골짜기가 하나 있더군요. 발을 헛디뎌 좀 굴렀습니다. 정확한 위치를 표시해둘 테니까 다른 분들도 참고해주세요.”

“저런! 어디 다치진 않았나?”

“괜찮습니다. 좀 긁힌 것뿐입니다, 다카하시 씨.”

“얼굴에도 상처가 있어요, 미스터. 여긴 감염이 빠르니까 어서 치료받도록 하세요.”

“그래, 케인.”

인사와 더불어 염려의 말을 덧붙이는 사내들에 예의 바른 대꾸를 던진 후, 은우는 제이슨의 뒤를 따라 넬슨호 쪽으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넬슨호는 10여 미터 폭으로 숲을 휘돌아 나가는 강기슭으로부터 250여 미터쯤 올라간 가파른 구릉 위에 비스듬히 서 있었다. 20도쯤의 각도로 선체가 기울어 있는 것은 불시착의 여파로 선체의 일부가 땅에 처박힌 때문이었다. 강가로부터도 그렇고, 숲으로부터도 그렇고, 넬슨호까지 접근하려면 암벽 등반이나 다름없는 수고를 기울여야 하지만, 우기(雨期) 때 강물이 불 것을 감안하면 착륙지로선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출입구까지의 진입로를 따라 길게 설치된 지지대로 한 손을 뻗으며 가파른 경사를 오르려던 은우는 바닥에 드리운 자신의 그림자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든 또 다른 그림자에 문득 몸을 굳혔다. 발자국 소리도 없이 순식간에 다가온 누군가에 본능적인 위화감을 느낀 때문이었다.

둘러멘 배낭끈을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 것을 어렴풋이 자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잿빛의 반팔 군용 셔츠 차림인 누군가의 상반신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은우보다 적어도 15센티 이상은 키가 클 사내의 상반신이었다. 겨드랑이와 목 언저리 부근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짙은 색을 띠고 있는 잿빛 셔츠는 은하 연맹 방위군의 그것으로, 은색의 특수 부대 휘장과 붉은색 상병 계급장이 오른쪽 가슴 부근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셔츠에선 물비린내와 뒤섞인 거품 비누의 상쾌한 향기로도 채 스러지지 못한 역한 사향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강렬한 ‘사내’의 체취였다. 너무나 강렬해서 도무지 그 주인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을 그런 체취……. 강가에서 멱을 감고 있던 사내들 중에 이 사람도 섞여 있었던 모양이라고 멍하니 생각이 흘렀다. ……곤란해……. 충분히 지쳤단 말이다, 지금은……. 신경질적인 원망도 자연스레 뇌리를 스쳐갔다.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에 무심코 뒤로 물러서려던 은우의 움직임은 상대방이 은우의 왼쪽 팔을 와락 움켜쥐는 바람에 곧바로 저지되고 말았다.

아픔이 느껴질 만큼 단단한 악력이었다. 상대방의 피부와 접촉해 있는 피부에서 이상야릇한 친밀감이 느껴졌다. 언젠가 한 번 접촉해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 익숙하고도 그리운 촉감. 독신 성향의 자신으로선 좀처럼 느껴보기 힘든 기묘한 감각이었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그 기묘한 감각이 위화감으로, 이어 무의식적인 거부감으로 탈바꿈하는 데는 물론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은우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위로 시선을 끌어올렸다.

파르스름하게 깎인 수염 자국이 역력한 턱 언저리가 보였다. 3센티 길이의 흉터가 오른쪽 입꼬리 끝에서 턱 아래쪽으로 비스듬히 나 있는 것도 보였다. 치열한 전투의 흔적일 것이다. 그 흔한 성형 수술을 하지 않은 것은 상대가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 특수 방위 군인인 때문일지 모른다. 큼직큼직하게 음영이 두드러지는 강렬한 이목구비가 저절로 은우의 시선을 끌었다. 암만 봐도 빼어나게 잘생겼다는 평가가 단숨에 뇌리를 스칠 정도로 보기 드문 미남자다. 대충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얼굴. 거칠고 험한 자연 조건에 주기적으로 노출되곤 하는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얼굴 피부는 검게 그은 채 곳곳이 갈라 터져 있었지만, 잔주름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얼마나 햇볕에 탄 건지, 짙은 호박색에 버금갈 만큼 피부가 거무스름했다. 물론 아무리 피부가 까매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두개골 형태나 굵은 쌍꺼풀이 진 깊은 눈시울은 확실한 앵글로색슨 계열 백인의 그것이었다. 목 아래까지 자라 사자 갈기처럼 화려하게 물결치는 빨간 머리카락도 동양계나 흑인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뚜렷하게 도드라진 앞이마가 그림처럼 매끄러운 선을 그리고 있는 뭉툭한 콧날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있다. 꽤나 두툼해 보이는 옅은 분홍빛의 커다란 입술은 관능적이면서도 금욕적인 느낌을 동시에 주었다. 거기서 1밀리만 더 두꺼웠다거나, 혹은 더 컸다면 단숨에 균형이 깨질 그런 완벽한 아름다움이었다. 젖살이 빠져 움푹 들어간 뺨과 깊은 눈매 때문인지, 미간과 광대뼈가 조각처럼 뚜렷하게 보였다. 지나치게 앞으로 도드라진 뭉툭하고 단단한 턱선이 유일한 약점이라 할 만 했는데, 그러나 그조차도 사내답게 선이 굵고 강렬한 이목구비와 불안정한 균형을 이루며 섹시한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홍보 업계나 예능 계열로 나갔더라면 대단한 선풍을 일으키며 전 지구적인 히어로가 됐을 그런 이목구비. 처음 이 사람을 봤을 땐 이렇게 매혹적인 용모로 어째서 군인이 된 걸까 하고 한순간 의문을 품었을 정도로 빼어난 아름다움이었다. 물론 감탄이 섞인 막연한 의문은 남자의 새파란 눈동자와 정통으로 마주친 순간 일거에 사라지게 되었지만 말이다.

무기질의 눈이었다. 깊숙하게 가라앉아 있는 새파란 기계의 눈이 뚫어져라 은우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성과 감성이 균형적으로 발달한 일반 성인(成人)의 지혜라곤 조금도 찾아보기 힘든,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로봇처럼 기계적인 무감정이 정신의 전부를 지배하고 있는 모르모트의 눈동자. 너무나 오랫동안 어둠에 깊숙이 침윤된 나머지, 도저히 어떻게도 제 색깔을 찾을 수 없게 된 새까만 수의(壽衣). 깊고 어두운 블랙홀……. 새파란 바닷빛을 띠고 있는 유리알 같은 그것은, 강렬하고 균형 잡힌 이목구비에 걸맞게 드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빼어난 아름다움도 남자의 눈동자 속에 드리운 맹목과 어리석음을 완벽하게 상쇄시키진 못할 것이다. 맹세컨대 진화된 인간의 그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저능아나 자폐아로 태어나, 어쩔 수 없이 기계적인 적응 훈육을 받게 된 특수 진압 부대원의 어둡고 음습한 부정의 에너지가 먹구름처럼 사내의 눈동자 속을 떠돌고 있었다.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니게 살아간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삶의 모습일까? 영혼을 가졌으면서도 영혼이 없는 기계로 살아간다는 것은?

확신할 순 없지만 절대로 긍정적인 삶은 아닐 것이다. 은하 연맹 정부가 아무리 그럴듯한 논리로 특수 진압 부대의 정당성에 대해 주장한다고 해도, 은우는 그를 좀처럼 납득할 수가 없었다. 기계처럼 보여도 진짜 기계는 아니다. 기계 같은 인간이 살상을 한다 해서 ‘생명 살상’이라는 압도적인 부정의 에너지를 완전히 중화시킬 수 있을 까닭이 없었다. 남자의 눈동자 속을 떠도는 저 음습한 기운은 아마도 그에 따른 당연한 인과응보일 터이다.

……이 사람은 절대로 예능인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은하 연맹에 속한 어떤 인류도 진화 속도가 한참이나 뒤처진 가련한 기계 인간을 광고 모델로 쓰지는 않는다…….

남자와 첫 대면을 했을 때처럼 당연한 납득이 은우의 뇌리를 스쳐갔다. 함께 진화해가는 고등생명체로서 대단히 교만한 시각이라는 자괴감에도 불구하고, 남자에 대한 처연한 연민의 감정 탓에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오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연민은 남자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나 위화감을 자각하는 딱 그만큼의 무게로 은우의 양심을 찌르고 있었다.

“……에녹……?”

긴장감이 여실히 드러나는 쉰 목소리가 겨우 입 밖으로 토해졌다. 남자의 어깨 너머로 남자를 대변해줄 만한 다른 이의 얼굴을 찾았지만, 나머지 일행들은 여전히 강가에서 멱을 감는 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피로한 의사소통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모양이었다.

물 먹은 솜처럼 지쳐 있는데 자폐증에다가 벙어리인 특수 방위군이 대화 상대라니, 정말 너무하다고 은우는 새삼 속으로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래? 무슨 할 말이 있나, 내게?”

“…….”

표정 없는 눈동자 가득 은우의 얼굴을 담은 채 사내는 미동도 없다.

“아프니까 먼저 이 손 좀 놔주겠어?”

“…….”

억지로 웃음을 끌어내며 최대한 달래듯 남자의 손을 어루만지는 자신의 몸짓은 역시 그에 대한 막연한 불신과 위압감이 암암리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머리로는 매우 부당한 처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은 절대 인간을 해치지는 않는다. 해치기는커녕, 인류를 보호하고 돕는 것을 지고의 사명으로 여기고 있는 은하 연맹군 소속 특수 진압 부대원이다.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안내견처럼 맹목적인 충성심으로 인류에게 헌신과 복종을 바치는 자에게 배타적인 선입견을 품다니, 배은망덕이 따로 없을 몰염치한 심보였다. 그럼에도 은우는 마치 덫에 걸린 동물처럼 자신을 강하게 휘어잡고 있는 남자의 손아귀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가능한 한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닫힌 마음과, 또 그에 따른 죄의식이 남자에 대한 연민의 감정과 뒤죽박죽 공존하고 있었다.

“……아프다니까? 제발 이 손 좀 놔줘, 에녹. 부탁일세.”

거듭 되풀이하자, 아프다는 의미가 겨우 전달이 됐는지, 부러트릴 기세로 왼팔을 조여오던 악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자는 당혹한 것처럼 부랴부랴 자신의 오른손을 거둬들였지만 얼굴은 여전히 기계처럼 무표정했다.

“……훨씬 낫군.”

남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예의상의 미소를 던져줄 마음도 들지 않았다. 소매를 걷어 확인하지 않아도 왼팔엔 분명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을 터였다.

“자네 같은 군인들은 어떤지 모르겠네만 나 같은 일반 시민들은 신체에 갑작스러운 완력이 가해지면 많이 당황한다네. 나는 특히 더 그런 편이지. 그러니 앞으로는 조금 조심해줬으면 좋겠군, 에녹.”

독신 성향이라 약간의 결벽증이 있다는 설명은 굳이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설명한다고 해도 아이큐 60의 저능아에다 성욕마저 통제당하고 있을 동정의 남자가 독신 성향이 무언지 제대로 이해할 까닭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는 건가?”

“…….”

확인하듯 담담하게 되묻자, 남자는 기계적으로 두 번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알 같은 푸른 눈이 희미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은우의 온화한 어조 속에 숨겨진 비판의 기색을 알아챈 것 같았다. 그 눈을 보고 나니, 은우 역시 온순한 하룻강아지를 때리기라도 한 것처럼 기분이 꺼림칙해졌다. 한계치에 이른 피로감이 전신을 더욱 묵직하게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

“……일에 관련된 얘기인가?”

“…….”

“아니면 사적인 얘기?”

“…….”

기계처럼 서늘하고 고요한 무표정으로 매번 고개를 가로흔드는 사내에 어쩔 수 없이 짜증이 치밀었다. 차라리 넬슨호의 승무원들처럼 ‘언어 번역기’를 휴대할 걸 하고 잠깐 후회가 될 정도였다. ‘언어 번역기’가 있으면 드물게나마 수화를 사용하는 남자와의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랬다간 지금보다 더 남자와 얽히는 일이 많아질 것 또한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맙소사, 절대로 사양이다! 차라리 잠깐 답답하고 말지…….

얄팍한 계산속이 미미한 회의감을 일순간에 몰아내주었다.

“……사적인 얘기도 아니라면 도대체…… 하여간 일단 선내로 들어가서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필요 이상으로 냉정해지는 자신의 태도에 다시금 죄의식을 느끼며 은우는 말끝을 흐렸다. 남자로부터 고개를 돌려 반대편의 넬슨호 쪽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일방적인 대화가 답답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남자에 대한 거부감이 시선에 드러날까 걱정스러워진 때문이었다.

넬슨호 쪽으로 두세 발짝쯤 걸음을 옮겼던가 보았다. 거의 무의식적인 행동이어서, 은우로서도 그런 자신을 자각한 것은 남자의 손이 다급하게 뻗어와 다시금 왼팔을 잡아챈 바로 그다음 순간이었다. 남자의 다른 손이 오른쪽 뺨 전체를 움켜쥐듯 거칠게 쓸어대는 감촉은 보다 선명하게 자각되었다. 눈물이 찔끔 쏟아질 만큼의 찌르르한 아픔이 곧바로 뇌리를 점령했다. F-16 구역을 구르며 입은 찰과상 때문이었다.

“……아…… 아야야……! 무슨 짓이야?!!!”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남자의 손길을 뿌리쳤다. 휘둥그레지는 남자의 눈이 설핏 보이는가 싶더니 남자는 기겁해서 은우로부터 떨어져나갔다.

심장이 불규칙적인 리듬으로 빠르게 율동하고 있었다.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달려 나가며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은우가 놀란 이상으로 남자는 기절초풍을 한 모양이었지만, 남자를 배려해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몇 발짝 뒤로 물러선 채 멍하니 이쪽을 굽어보는 남자를 한동안 날카롭게 노려본 후, 은우는 거친 기세로 남자에게 등을 돌렸다. 뛰다시피 넬슨호 쪽으로 걸음을 옮긴 것은 물론이었다.

……제기랄…… 뭐야, 저 녀석……!

겨우 넬슨호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던 몇 분 후, 남자가 남긴 통증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남자에 대한 불만과 거부감은 여전히 앙금처럼 남아 은우를 괴롭히고 있었다. 남자가 힘겹게 전하고자 한 말이 은우가 입은 상처에 대한 염려라는 것을 겨우 자각한 때문이었다. 친절하고 상냥한 남자의 마음씀씀이는 남자의 자폐인다운 어리숙한 태도와 소통 수단의 부재 덕에 은우에게 쉬이 전해지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은우를 괴롭힌 것은, 남자의 의도를 자각한 지금도 남자에 대해 여전히 거부감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 상태였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속물이었던가 하고 씁쓸한 자조를 흘리지 않을 수없었다. 자신이, 타고난 출신 배경이나 능력에 따라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고 선을 긋는 저급한 종류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은우였었다. 그러나 최근, 에녹이라는 특수 방위군에 대한 자신의 행동을 살펴보건대, 아무래도 자신에 대한 기존의 너그러운 평가는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될 모양이었다.

출입구 옆의 소독 캡슐로 들어가 소독을 명령하자, 뿌연 소독제와 더불어 서늘한 기운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파고들었다.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다리의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더 이상 스스로를 책망할 기력도 없을 만큼 피로감이 극에 달한 것 같았다. 소독 캡슐 바닥에 주저앉아 눈을 감은 채 은우는 한동안 쾌적한 공기를 만끽했다.

지친 육체가 비로소 제대로 휴식을 취하기 시작한 것에 비해, 정신과 마음은 여전히 꺼림칙한 불쾌감과 자책감으로 무거웠다. 생각을 끊고 싶어도, 은우의 적대적인 몸짓을 멍하니 지켜보던 남자의 표정 없는 얼굴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차별하고 있다니…… 장애를 입고 태어난데다, 그럼에도 인류에 대한 헌신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특수 방위군을…… 정말 넌 최저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남자의 목소리가 그렇게 은우의 저열함을 비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진료실에서 닥터 후버로부터 상처를 치료받은 뒤, 은우가 망설임 끝에 들른 곳은 선내 휴게실이었다.

중앙 통제실 옆에 위치하고 있는 휴게실은 저녁 식사 이후 잠이 들기까지의 몇 시간 동안 대부분의 조난자들이 모여 무료한 시간을 죽이는 장소였다. 버추얼 게임을 즐기거나 운동으로 몸을 단련하기도 하고, 때론 춤을 추거나 술을 마시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도 하는 곳이었다. 각자의 숙소에서 밀회를 즐기는 커플들이나 학습실에서 기능 계발에 몰두하는 성실파들이 아니라면 대부분은 이곳에 모여 있기 마련이었다. 100여 평 크기의 홀 안에는 적당한 위치에 테이블과 소파가 놓여 있고, 한쪽 벽에는 가상공간이나 외부 풍경을 볼 수 있도록 조성된 창문이 있고 그 반대쪽에는 버추얼 게임 룸과 체력 단련실로 이어지는 출입문들이 있었다. 실내 가득 부드럽게 퍼지고 있는 재즈 선율 틈으로, 술기운에 반쯤 방기된 사내들의 걸걸한 목소리들과 웃음소리들이 양념처럼 섞여들고 있었다.

“상처는 치료했어요, 은우 씨?”

은우가 실내로 들어서자,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필립이 인사와 함께 크게 손을 흔들었다. 필립의 맞은편에는 은우의 동료 건축 기사인 모이어스가 앉아 있었다. 2미터에 가까운 커다란 키와 어울리지 않는 왜소한 몸집의 모이어스는 이미 상당히 취한 듯, 벌게진 얼굴로 의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응. 다들 저녁 식사는 끝냈나 봐?”

찾고 있던 상대를 눈으로 좇느라 실내를 이리저리 굽어보며 은우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테이블 곳곳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있는 열댓 명의 사내들 틈에서 찾고 있던 남자를 발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은우가 안으로 들어서는 즉시 필립과 거의 동시에 그네도 이쪽으로 시선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조용히 이쪽을 굽어보는 기계의 시선에 저절로 얼굴이 굳어드는 것이 느껴졌지만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곤 눈인사를 했다.

“이리 오세요. 바카르디 칵테일 한잔하실래요? 어니가 이곳 옥수수사탕나무로 럼주를 빚었는데 맛이 꽤 그럴싸해요. 만들어 올까요?”

상냥한 인사말과 더불어 은우를 맞아들이는 필립의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밝은 미소라고 멍하니 생각을 흘리며 따라 웃었지만, 은우는 가볍게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청년의 초대를 거절했다.

“……아니. 오늘은 너무 지쳐서 일찍 잘 거야, 필립. 잠깐 에녹과 얘기할 게 있어서 들렀어.”

실망한 듯 미소가 흐려지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청년에게 덧붙이며 은우는 남자가 앉아 있는 게임 룸 입구 쪽 테이블을 향해 걸음을 옮겨 갔다.

가까이 다가가는 은우에, 무표정하게 시선을 보내오던 남자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보였다. 동작은 느릿했지만 남자가 느꼈음직한 당혹감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몸짓이었다. 이쪽을 빤히 굽어보던 시선도 은우가 가까이 접근하자 이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설마 은우 쪽에서 남자에게 접근을 하리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왁자하게 터진 웃음소리에 흘깃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남자와 두 테이블쯤 떨어진 곳에 모여 앉아 있던 사내들 넷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단순한 주사위 게임에 한껏 몰입해 있는 커다란 덩치의 사내들 넷으로, 남자와 동료인 특수 방위군들이었다. 일반인들처럼 정상적인 정신 능력을 갖고 있는 장교는 그들 중 단 한 사람 레드필드 중위뿐이었고, 나머지 셋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한두 가지쯤의 결함을 지니고 있는 사병들이었다. 레드필드 중위는 절대적인 권위로 네 명의 부하 사병들을 일사불란하게 통솔하고 있었다. 레드필드 중위의 중재역이 없었더라면 넬슨호의 승무원들은 물론 은우 같은 일반인들은 특수 방위군들과의 공존에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그만큼 저들은 일반인들에게 있어선 매우 위협적이면서도 이질적인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6개월 전, 지구로 귀환 중이던 넬슨호가 해적들의 습격을 받게 되기까지 은우는 은하 연맹 방위군 소속 특수 진압 부대원들의 모습을 실제로 본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럴 것이, 특수 진압 부대는 전부 은하의 변방 행성들에 주둔해 있었고, 장교급 병사가 아닌 한 저들이 모(母)별인 지구나 여타 행성들로 이동할 수 있는 자유는 현실적으로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일반 사병의 박한 봉급으로 고가의 우주여행 경비를 감당한다는 것이 무리인데다, 무엇보다도 일반인 거주 지역으로 이주하기 위해서는 특수 진압 부대를 전역해 일반 방위 군인이 된다거나, 보통의 시민이 돼야만 하는 것이 그 전제 조건이다. 게다가 군대를 그만두고 나서도 5년간의 순화 교육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엄격한 법 규정은, 저들을 일반인들과 더더욱 유리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엄격한 규제가 요구되는 나름대로의 타당한 이유가 있긴 했다. 이른바 저들이 ‘생명 살상’이라는 압도적인 부정의 에너지를 떠안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은하계 전반에 있어 연맹의 평화를 위협할 만한 커다란 분쟁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 편이었다. 물론 그렇게 평화스러운 균형을 유지시켜주는 것은 은하 연맹 방위군의, 정확히는 특수 진압 부대의 막강한 군사력이었고, 지구를 포함 은하 연맹에 속해 있는 행성인들이라면 모두 그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우주여행이 자유로울 만큼 문명을 발달시킨 대부분의 행성들이 호전성을 버린 것은 사실이었지만, 가끔 정도에서 이탈해 있는 호전적인 원시 행성 또한 분명히 존재했고, 연맹 법을 무시한 채 약탈을 일삼는 것을 통해 모별의 빈약한 재원을 충당하려고 하는 호전적인 행성인들 또한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막강한 군사력의 저변엔 대체로 저급의 유전자를 타고나는 지구인이라거나 상대적으로 자원이 고갈되어 점차로 사멸해가는 노후한 행성 출신의 행성인들이 대부분 동원되고 있다는 현실이 공공연한 비밀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랬다. 아무리 진화된 행성이라도 대부분의 인간들이 꺼리는 밑바닥 일은 존재하게 마련이다. 또한 어쩔 수 없다곤 해도, 생명체를 살상해야만 하는 군대야말로 고도의 진화 과정에 역행하는 최악의 밑바닥 일임엔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조건에 몰린 인간들이 마지못해 투입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물론 말이야 번지르르했다. ‘우주의 평화를 위해, 또는 진화된 문명과 진화된 인류를 수호하기 위해 고귀한 희생정신을 바탕으로 뭉친 특수 방위군’이라는 알량한 명예가 그것이었지만, 은하 연맹에 속한 행성들의 시민 어느 누구도 그를 곧이곧대로 믿는 순진한 이들은 없었다.

3세 이전에 행해지는 유전자 검사를 통해 선별되는 하급 인간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유아기 때부터 특수 진압 부대원으로 훈련되고 또 그렇게 성장하도록 반 강요당한 그들에게 다른 일을 선택할 만한 능력이나 자유 의지가 남아 있을 까닭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문명권과는 거리가 먼 호전적인 하급 행성들을 공격하거나, 악명 높은 해적들의 토벌 작전에 동원되고 있는 활동 모습을 가끔 뉴스 화면을 통해 볼 수 있었을 뿐, 일반인인 은우가 지구는 물론 여타 행성들에서 저들의 모습을 실제로 볼 확률이란 거의 전무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6개월 전, 해적들의 넬슨호 습격과 그에 따른 불시착이 없었더라면 말이다. 해적들의 무차별 공격으로 괴멸 직전까지 간 위기의 순간, 넬슨호는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저들에게 구조 신호를 보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도움을 주러 달려온 것은 총 승무원이 30명에 불과한 소형 정찰기 한 대에 불과했다. 아무리 가공할 위력을 자랑하는 전설의 특수 방위군이라도, 그 서너 배는 넘을 화력을 갖춘 해적선과 온전히 전투를 치르기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찰기는 해적들이 잠시 후퇴할 만큼의 가벼운 타격만을 입히곤 기세등등하게 달려온 것이 허무할 지경으로 단숨에 완파되고 말았다.

폭발 직전, 살아남은 방위군 다섯이 재빨리 넬슨호로 피신한 것만도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선장을 잃고 통제력을 상실한 넬슨호 승무원들을 대신해서 저들이 조타실을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넬슨호로선 처음인 해적선의 기습인데다, 선장을 포함해 반 이상의 탑승객이 중상을 입어, 남은 승무원들은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레드필드 중위를 포함 총 다섯 명의 방위군들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던 넬슨호 승무원들을 재빨리 규합한 후, 웜홀 진입을 시도했다. 무리한 웜홀 진입을 견뎌낼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만큼 넬슨호의 상태는 최악이었지만 다른 대안은 존재하지 않았다. 잠시 달아나긴 했어도 해적들이 한번 노린 먹이를 쉽사리 단념할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또한 빈사지경인 넬슨호의 상태를 훤히 꿰고 있었다. 고장 난 전함을 수리하는 즉시 저들은 다시금 단숨에 넬슨호를 탈취하려 들 터였다.

다행히 넬슨호는 끝까지 버텨주었다. 무리한 웜홀 진입도, 생존 조건 데이터가 전무한 미지의 소행성에의 불시착도, 넬슨호를 완전히 짜부라트리진 못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6개월.

생존자는 총 34명이었다. 넬슨호 승무원이 그중 절반 이상인 열아홉 명이었고, 은우 같은 일반 승객이 열 명, 그리고 나머지 다섯 명이 특수 방위군들이었다. 어쩐 일인지(아마도 좀 더 불운한 상황이겠지만) 그중 여성은 단 한 사람도 끼어 있지 않았다. 실로 기묘한 조합의 조난자 명단이 만들어지게 된 셈이다.

“은우 씨, 이든 상병이 무슨 실수라도 한 겁니까?”

남자의 테이블 앞에 멈춰 선 은우를 비로소 발견한 모양으로, 레드필드 중위가 테이블 건너에서 불쑥 물음을 던져왔다.

은우와 남자를 번갈아 살피는 눈초리에도 진지함이 깃들어 있고, 어조도 약간 날카로운 걸 보니 역시 지휘관으로서의 책임 의식이 투철한 장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뇨, 중위님. 그냥 에녹과 좀 할 얘기가 있어서요. 별일은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언어 번역기를 드릴까요? 휴대하지 않고 계시죠?”

“……예, 부탁드립니다.”

잠시 망설였지만 은우는 곧 고개를 끄덕이고 장교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중위가 헛기침을 하자 게임 삼매에 빠져 있던 나머지 세 명의 사병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하게 목례를 전해왔다. 은우도 고개를 숙여 답례를 했지만 배 속이 거북해진 느낌이 들었다. 군인들의 과도한 예의범절엔 역시 좀처럼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걸치고 있던 군용 점퍼 깃에서 번역기를 떼어내 은우에게 건네주는 레드필드 중위의 시선은 여전히 날카롭게 남자를 향해 있었다. 남자는 은우가 다가갈 때처럼 엉거주춤 일어선 자세 그대로 이쪽을 빤히 굽어보고 있었다. 처음의 당황한 기색이 사라져 본래의 기계적인 무표정으로 돌아가 있는 남자를 바라보는 레드필드 중위의 모습은 일반 시민에 대한 예의범절을 명령하는 엄격한 상관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무리 훈련이 돼 있다곤 해도 저능아들 일색인 사병들은 일반인들과 제대로 섞이기 힘들다는 것을, 레드필드 중위는 뿌리부터 자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머지 세 명의 사병들을 대하는 것 이상으로 레드필드 중위는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남자의 경우, 비전투 시의 아이큐가 60선으로―전투 시엔 뇌를 활성화시키는 증폭기를 장착해 300선까지 높아진다고 했다. 훈련되지 않은 일반인이 증폭기를 사용하면 대부분 정신 분열을 일으킬 정도로 위험한 기계이지만 그도 밑바닥 인생인 저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항이었다. 장기간의 적응 훈련이 ‘뇌활성 증폭기’가 주는 위험성을 얼마만큼 줄여주는지는, 아니, 양질의 삶을 얼마만큼 보장해주는지는, 저들 자신이 돼보지 않는 한 아무도 장담할 수 없지 않을까?―다른 사병들에 비해서 비교적 높은 수치였지만, 심한 자폐 증상이 있는데다 벙어리라는 약점까지 덧붙어 있었다. 더구나 작전 수행 능력에 있어선 여타의 특수 방위군들 중에서도 거의 최상급에 속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양처럼 온순하고 순종적으로 보여도 그만큼 무자비한 폭력성과 공격성이 내재돼 있다는 의미였으니 레드필드 중위가 유별날 정도로 남자를 경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번역기를 받아 셔츠 앞섶에 매단 은우는 다시금 몸을 돌려 남자의 앞으로 되돌아왔다. 코앞까지 다가가자 역시 깍듯한 남자의 목례가 전해졌다. 여전히 거북한 기분으로 답례를 하고 은우는 재빨리 남자의 맞은편 의자에 엉덩이를 묻었다. 마주 서 있을 때보다는 그나마 남자가 덜 위압적이라는 생각에 서둘러 앉은 은우였지만 남자는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좀처럼 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치 자리에 앉는 허락을 구하듯 어깨를 약간 앞으로 숙인 채 은우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모습이 야단을 맞고 있는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처연해 보여 은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남자를 만나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적 약자에게 배려 없는 행동을 한 것은 자신이건만, 실수를 했다고 여겨 주눅이 들어 있는 쪽은 오히려 남자였다.

저녁을 먹는 내내 찝찝했었다. 남자에게 사과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과, 남자 역시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협을 줬으니 피장파장이라는 비겁한 생각이 내면에서 전투를 벌였었다. 결국 양심이 승리해 은우는 남자에게 사과를 하기로 결심을 굳혔었다.

“……일단 자리에 앉지그래, 에녹? 계속 올려다보자니 고개가 아프다구.”

“…….”

“앉으라니까.”

쑥스럽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지만 온화한 미소를 얼굴로 끌어왔다. 부드러운 어조로 재차 채근하자 남자는 뻣뻣하게 굳은 몸짓으로 은우의 앞에 마주 앉았다. 줄곧 자신의 얼굴을 향해 있던 남자의 푸른 눈은 테이블 한쪽으로 비껴가 있었다. 등을 수직으로 세운 채 양쪽 팔을 테이블 위에 나란히 올려놓은 자세는 군인다운 전형적인 부동 자세였다. 길고 마디가 있는 아름다운 두 손가락도 무언가를 움켜쥔 것처럼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역시 야단맞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처연해 보여 은우는 속이 쓰렸다.

“……아깐 미안했어. 갑자기 접촉해와서 좀 놀랐거든. 실은 날 걱정해준 거지? 상처 입었다고?”

주저하며 용건을 말하자, 테이블 위로 비껴가 있던 남자의 시선이 단숨에 은우의 얼굴로 부딪쳐왔다. 은우의 사과가 의외였는지 가뜩이나 크고 아름다운 남자의 눈동자는 더더욱 휘둥그레져 있었다.

“……상처는 대단치 않아. 유혈이 낭자했던 것에 비해 봉합도 필요 없을 만큼 가벼운 찰과상이었으니까. 봐, 이제 매끈하지?”

“…….”

“……아무튼 자네 마음도 모르고 과민 반응을 했어. 성숙한 시민답지 못한 처신이었다고 생각해. 기분이 나빴다면 용서해주게.”

거듭 사과의 말을 흘리자 남자는 세차게 고개를 휘저으며 부정의 뜻을 전달했다. 긴장돼 있던 남자의 어깨가 비로소 부드럽게 풀리는 것이 보였다. 기계적인 무표정은 여전했어도 은우를 마주하고 있는 눈동자엔 희미한 온기가 들어앉아 있었다. ……역시 사과하러 오길 잘했어……. 저녁 내내 스스로를 괴롭히던 자책감과 후회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기분까지 들뜨는 것 같았다. 그 덕분인지 남자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조차도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실은 특수 방위군과 대화하는 것은 익숙하지가 않거든. 자네들을 처음 본 것도 이곳에 불시착하고 나서니깐 말일세. 그 뭐냐…… 아무래도 자네들에게 지나치게 위압감을 느끼는 모양이야, 내가.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좀처럼 고쳐지지가 않는군.”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내는 일에도 별다른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남자가 자신의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같은 일이 반복됐을 때 남자가 조금이라도 덜 상처받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내가 좀 덜떨어진 인간처럼 굴더라도 놀라거나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말아줬으면 좋겠네. 무슨 말인지 이해하나?”

얘기하는 내내 뚫어지게 은우의 눈을 들여다보던 남자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정말로 말이 없는 남자였다. 이래서야 언어 번역기도 필요 없지 않은가. 벙어리라서가 아니라 그저 남자의 성격 자체가 말을 잘하지 않는 타입 같았다. 하긴 태어날 때부터 자폐증을 낙인처럼 달고 살았다고 하니 무리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특수 방위군의 강도 높은 훈련으로도 자폐증을 완전히 치유할 수는 없다고 들은 기억이 있다. 그저 사회 적응력을 높여주는 선에서 증상을 완화시킬 뿐이라는 얘기.

……가엾어라……. 다시금 남자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고개를 든다.

정신과 관련된 질병은 영혼과 진화의 문제와 직결돼 있다. 영혼에 문제를 안고 태어나는 자는 사회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 그저 열심히 생을 살아가며 본인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단련하고 진화시키는 외엔.

물론, 상대적으로 일반 시민들보다 속도가 더딜 뿐, 그네들 역시 언젠간 그네들의 어깨에 지워진 업들을 정화시켜 함께 진화의 대열에 참가할 것이다. 결코 얄팍한 동정심을(그 이면에 들어앉은 우월감까지) 보일 필요는 없다.

“……그래. 이해해줘서 고맙군. 그런데 자넨 게임 같은 건 안 좋아하나 봐? 매번 자네 빼고 동료들만 즐기는 모습을 봐서 말야.”

용건은 끝냈지만 바로 자리를 터는 것도 마음에 걸려 은우는 부드럽게 화제를 바꿔보았다. 건너 테이블 쪽은 남자의 동료들이 내지르는 괴성과 웃음소리들로 소란스러웠다.

잠깐 대화를 나눈다 해서 가뜩이나 사교성 제로인 은우가 말이 없는 특수 방위군과 친구가 될 턱은 없을 것이다. 물론 되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남자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든 이 순간을 좀 더 이용하고 싶었다.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어갈 수만 있다면 남자를 좀 더 이해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자와 부딪칠 때마다 심신을 긴장시키거나 또 그로 해서 양심이 아파지는 일 또한 줄어들지 않겠는가?

“……볼 때마다 자넨 혼자 앉아 있더군. 묵상을 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하긴 묵상을 할 거라면 시끄러운 여기보다 기도실이 낫겠지. 술도 못 마시는 것 같던데…… 아무튼 그냥 가만히만 앉아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

“…….”

“……하긴 혼자 숙소에만 틀어박히는 건 좀 외롭지. 더구나 우린 조난자들이니까.”

“…….”

“……아무튼 자네도 혼자 있는 것보다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게 좋은 것 같군. 그렇다면 이렇게 혼자 않아 있지 말고 사람들과 좀 더 어울려보지그래? 지금처럼 이렇게 얘기도 해보고, 버추얼 게임도 함께 즐겨보고 말야. 구식이긴 하지만 재밌는 프로그램들도 꽤 있던데. 난 21세기 중반 프로그램들을 주로 즐기는 편이지. 지구 대변혁 직전의 역사나 장소들 속으로 들어가 이런저런 놀이를 하는 게 재밌거든.”

“…….”

되풀이해 부담 없는 질문들이 이어져도 남자의 손가락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언어 번역기가 음성을 토해내는 일은 아마도 일절 없을 모양이었다.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그저 멍하니 은우의 얼굴만 들여다볼 뿐이어서, 은우 역시 차츰 기운이 빠지고 있었다. 역시 안 되는 걸까? 자폐증의 특수 방위군과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간다는 것은?

혹 비사교적인 자신에게만 한정되는 태도인가 의심해봤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은우는 남자가 은우를 제외한 나머지 32명의 조난자들 어느 누구와도 제대로 어울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각자 분담된 소소한 책임들을 완수하기 위해 임시로 짝이 되는 이들과 어울릴 때에도, 남자는 필요할 때 외엔 일절 대화가 없었다.

“……자넨 재미가 없는가 보네?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게 힘들어? 역시 자폐증 때문일까?”

“…….”

“……그래도 혼자 있는 것은 싫겠지? 휴게실에 자주 오는 걸 보면…… 거의 매일 오는 것 같던데…….”

“…….”

“……나도 그래. 사교성은 없지만 혼자 있는 건 역시 좀 그렇거든. 여기 그냥 앉아서 사람들이 즐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좋아하지.”

“…….”

슬슬 끝내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굳히며 은우는 여전히 대꾸가 없는 남자로부터 시선을 돌려 실내를 휘 둘러보았다. 마침 이쪽을 보고 있던 필립과 눈이 마주쳐서 은우는 부드러운 미소로 반가움을 표시했다. 활짝 웃음을 보내오는 필립 덕에 구원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벽에 대고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생각과 함께 어느 순간부터 남자에 대한 거부감과 초조감이 다시금 가슴을 점령했하고 있었다.

“저는 당신을 보기 위해 매일 옵니다.”

느닷없이 울린 언어 번역기 소리에 은우는 흠칫 어깨가 떨릴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평균적인 성인 남자의 그것으로 변조된 목소리는 몹시 자연스러워서 전혀 기계음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필립을 향해 있던 고개가 자연스레 정면의 남자 쪽으로 돌아간다.

주먹을 쥔 채 테이블 위에 뻣뻣하게 놓여 있던 남자의 두 손이 가슴 높이까지 올라와 있었다. 마디가 있는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우아하게 움직이며 대화의 물꼬를 트고 있었다. 남자의 새파란 눈동자가 묘하게 번쩍이며 은우의 눈동자를 틀어쥐고 있었다.

문득 심장이 소란스레 뛰고 있는 것이 자각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켜보는 은우였다. 혼잣말을 하던 내내 기다려왔던 남자의 대꾸는 더 이상 반가운 것이 못 되었지만, 의외였던 만큼 은우를 몹시 당황시켰다. 느닷없이 토해진 사실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전해진 의미가 놀라웠다. 한순간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얼핏 이해가 안 가기도 했다.

―당신을 보기 위해 옵니다.

……당신을……? ‘당신을’이라니, 누구……? 나…………? 날 보기 위해 온다구……? 여기에……? 여기 휴게실에……?

“다른 사람들은 힘이 듭니다. 바라봐도 즐겁지 않습니다. 저는 혼자 지내는 것이 적당합니다. 자폐 증상이 있기 때문이라고 교관들이 말해줍니다. 그래서 휴게실에 오는 것은 즐겁지 않습니다. 당신을 바라보는 것은 즐겁습니다. 그래서 참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말하고 보는 일은 힘들기 때문에. 당신을 보는 건 힘든 것보다 더 즐겁기 때문에 참아야 합니다. 당신을 보는 건 규정에 어긋나지만 즐겁습니다. 많이 즐겁습니다. 특수 방위군은 살인을 하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 가까이에 가선 안 됩니다. 규정입니다. 넬슨호가 불시착해서 조난되었기 때문에 규정을 지키기 힘들다고 레드필드 중위님이 말했습니다. 그래서 당신 가까이 가도 됩니다. 보러 가도 됩니다. 규정을 안 지키는 사건은 즐겁지 않습니다. 당신을 바라보는 건 즐겁지 않은 사건보다 더 즐거운 사건입니다. 그래서 저는 휴게실에 매일 옵니다. 제 이름은 에녹입니다. 에녹 쉴스버리 이든. 알파벳은 E-N-O-C-H-S-A-L-I-S-B-U-R-Y-E-D-E-N. 은하 연맹 특수 방위군 WF-37241 진압 부대 소속 에녹 쉴스버리 이든 상병입니다. 당신은 휴게실에 매일 오지 않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쯤 옵니다. 그래서 즐겁지 않습니다. 저는 매일 오기 때문에. 당신을 바라보지 못하게 되는 날이 더 많습니다. 그런 날들은 즐겁지 않습니다. 그날들은 당신을 식당에서만 잠깐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은 식사를 조금만 먹습니다. 영양 밸런스가 나쁜 식사법입니다. 특수 방위군은 영양 밸런스가 나쁘게 먹는 것은 규정 위반입니다. 당신은 특수 방위군이 아니니까 규정을 지키지 않습니다. 영양 밸런스가 나쁜 것은 당신 건강에 나쁩니다. 그래서 저는 걱정만 합니다. 그래서 식당에서 잠깐 보는 것은 걱정을 많이 하기 때문에 많이 즐겁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휴게실에 매일 오면 좋겠다고 자꾸만 생각합니다. 그러면 걱정하지 않고 오래오래 당신을 바라볼 수 있을 텐데. 그러면 당신이 일주일에 두 번 오는 것보다 더 즐거울 텐데.”

꽤 오랫동안 일방적으로 되풀이되던 남자의 손놀림(수화)이 겨우 멈췄다.

……그러면 당신이 일주일에 두 번 오는 것보다 더 즐거울 텐데……. 언어 번역기가 마지막으로 토해낸 음성을 멍하니 되새김질하며, 은우는 거칠어진 숨길을 가쁘게 가다듬어야만 했다. 자기도 모르게 그동안 쭉 숨을 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놀랐다는 말로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당혹감을 정확히 표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실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저능아다운 단조로운 어조로 내뱉어진 남자의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아무리 사교에 서툰 은우라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머리가 텅 빈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온몸을 화석처럼 굳힌 채 은우는 마주 앉은 장신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큼직큼직하게 음영이 두드러지는 강렬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그림처럼 은우의 시선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암만 봐도, 빼어나게 잘생겼다는 평가가 단숨에 뇌리를 스칠 정도로 보기 드문 미남자. 그러나 그 눈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로봇처럼 기계적인 모르모트의 눈동자가 가만히 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적인 감정이라곤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그것에서 방금 전 언어 번역기가 토해낸 말속에 포함된 열렬한 연심을 읽어내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열렬한 연심’이라구? 맙소사!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말도 안 돼!!!

“……그…… 그…… 그거 고마운 호의로군…….”

“오늘은 제일 즐거운 시간입니다. 당신이 제 테이블에 와서 말을 걸어준, 처음 발생한 사건입니다.”

가까스로 쥐어짜낸 은우의 대꾸에 다시금 언어 번역기의 음성이 포개졌다.

“오늘은 넬슨호가 행성 DITER-11에 불시착한 지 5개월 27일째 되는 날입니다. 당신은 오늘 처음 제 테이블에 와서 말을 걸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제일 즐겁습니다. 당신을 가까이에서 쳐다봐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일 즐겁습니다. 특수 방위군은 살인을 하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 가까이에 가선 안 됩니다. 규정입니다. 넬슨호가 불시착해서 조난되었기 때문에 규정을 지키기 힘들다고 레드필드 중위님이 말했습니다. 특수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특수 상황에선 규정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을 가까이에서 쳐다봐도 되기 때문에 저는 그래서 즐겁습니다. 저는 그래서 넬슨호가 많이 오래 조난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마침내 움직임을 멈춘 남자의 손가락과 함께 너무나 인간 목소리에 가까운 기계음을 토해내던 언어 번역기도 겨우 침묵에 들어갔다.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고 기계처럼 무표정한 새파란 바닷빛 눈동자가 여전히 은우의 시선을 밧줄처럼 끌어당기고 있었다. 조여대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또다시 숨을 참고 있었던 모양으로, 가쁘게 헐떡이는 호흡에 시야가 어질어질 흔들렸다. 섭씨 20도의 적정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쾌적한 실내인데도 은우의 이마엔 식은땀이 잔뜩 배어나와 있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제일 즐겁습니다. 당신을 가까이에서 쳐다봐도 되기 때문입니다…….

백지가 돼버린 머릿속에선 그 어떤 자연스러운 대꾸도 떠오르지 않았다.

―당신을 가까이에서 쳐다봐도 되기 때문에 저는 그래서 즐겁습니다…….

농담으로 흘려버릴 수도, 느긋하고 세련된 거절의 말을 뱉을 수도 없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이 불유쾌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픈 욕구만이 강렬하게 들끓고 있을 뿐이었다.

“……미…… 미안한데……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 쉬어야겠군…….”

우물우물 빈약한 변명을 흘리며 은우는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혹시 남자가 쫓아오는 게 아닐까 두려움으로 입에 침이 말라들 지경이었지만, 다행히 남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여전한 무표정으로 은우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황망히 휴게실을 빠져나오자 은우를 향해 촉수처럼 뻗어오던 남자의 시선이 가까스로 차단되었다. 뒤로 닫히는 휴게실 문소리를 들으며 은우는 셔츠 앞섶에 고정돼 있던 언어 번역기를 사나운 기세로 쥐어뜯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발로 짓밟아 뭉개자 지름 4센티 크기의 섬세한 번역 기계는 빠각 하는 잡음과 함께 단숨에 박살이 났다. ……번역기 따위 다시는 달고 다니나 봐라……! 어린애 같은 화풀이의 비참한 잔재가 시야를 가득 점령하고 나서야, 은우는 폭포수처럼 뿜어 나오고 있는 맹렬한 분노를 간신히 자각할 수 있었다. 그 대상이 남자가 아닌 은우 자신임엔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남자의 충격적인 고백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고, 그 두려움 이상으로 남자에게 혐오감까지 느껴야 했던 졸렬한 자기 자신 말이다.

“……뭐야…… 젠장, 동성에게서 고백받은 게 처음도 아니잖아.”

신음하듯 중얼거리며 은우는 쓰게 웃었다. 물론 특수 방위군 병사의 고백을 받았다는 일반 시민의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확실히 이상야릇하고 그로테스크한 사건임엔 틀림이 없었다.

“……젠장, 그래서 이제 어쩌지……?”

숙소를 향해 걷는 동안 은우의 충격과 분노는 어느새 곤혹스러운 근심으로 바뀌어 있었다.

지구 시각으로 밤 11시건만 아직도 해가 질 생각을 않는 창 밖을 잠시 노려보던 은우는 거친 기세로 창문 셔터를 내리고 조명등을 켰다. 샤워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식재료 채취 작업에서 돌아온 직후 샤워를 했기에 씁쓸하게 마음을 접어야 했다. 동력을 절약해야 하는 마당에 하루 두 번의 샤워라면 사치일 것이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은우는 이를 닦으며 욕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평범하고 얌전한 인상의 동양인 얼굴이다. 짧게 자른 검은 머리. 옅은 갈색 빛이 도는 검은 눈. 동양계치곤 좀 밝은 피부색. 눈꼬리가 약간 아래로 처진 쌍꺼풀 없는 검은 눈은 차분하고 맑아서 연심을 가진 상대에겐 조금 매력적으로 비칠 법은 하다. 그러나 그것도 개중 나을 뿐이지 특별히 잘생겼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다. 나지막한 콧날도, 형태가 희미한 입술 모양도 ‘단정’이라는 평가와는 거리가 멀다. 그저 보기 싫을 만큼 흉한 인상은 아니라고 말해질 정도의,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목구비. 키도 남자로선 크지도, 작지도 않을 176센티 평균으로, 약간 말랐지만 건축 노동자의 일에 무리가 없을 만큼은 적당하게 근육이 붙어 있는 듬직한 몸집과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즉 얼굴이나 몸 어디를 보나 흔하디흔한 지구의 ‘평균 남자’다. 독신 성향의 조용한 성격도 그런데, 외모까지 이렇게 존재감이 희박하니 웬만해선 타인의 주목을 끌기 힘든 것이 당연하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자신이 도대체 어떻게 저 이질적인 남자의 관심을 끌 수 있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야, 연애 상대로서는 별로 인기가 없는 은우에게도 몇 번은 고백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고백 사건이 거의 대부분 그럴듯한 연애로 발전하지 못했던 것은 물론 은우의 뿌리 깊은 독신 성향 때문이었다.

사춘기 시절엔 은우도 두서너 번 상대의 마음에 응해 사귐을 시작한 적이 있었지만, 그조차도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끝이 나곤 했다. 상대 여성에 대한 호의가 아니라, 연애에 대한 호기심이나 자신의 남다른 기질에 대한 반발 심리 같은 것으로 시작을 했으니 잘될 까닭은 없었으리라. 결국 20대로 접어들면서 연애의 무의미함이랄까(물론 은우에게 있어서의 평가겠지만) 재미없음을 뼛속까지 자인하게 된 뒤로는 은우는 고백을 해오는 모든 여성들에게 부드러우면서도 한편 냉정한 거절로 일관하고 있었다. 두서너 번쯤 동성의 남자들에게 어택을 받았을 때에도 별일이네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냉정히 거절을 보내는 건 다르지 않았다. 상대가 상처 입지 않게끔 거절하는 일도 나름대로의 스트레스라, 20대 전반기의 한창때는 고백해오는 상대들에 대해 묘한 적대감까지 품어버리는 일도 있을 정도였다. 당시엔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거나, 이어진 사고로 그 사랑하던 음악을 빼앗겨 절망해 있을 때였으니, 타인이 제대로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물론 서른 살 생일을 코앞에 둔 현재로선 자신은 그렇게까지 오만하지는 않다. 아무리 독신 성향이라 해도 타인에게 조금도 매력을 주지 못한다면 그 또한 자기혐오를 일으킬 일이었으므로. 최근 몇 년간은 드물게 호의를 보여오는 그들에게 감지덕지한 마음까지 품었을 정도였다. 연인은 못 될지언정 친구라도 되고 싶을 정도로. 하긴 독신 성향의 인간이 친구는 제대로 사귈 수 있으랴만.

그런 변변치 못한 생(生)의 와중에 특수 방위군 에녹이 고백을 해온 것이다. 무인 행성에 조난을 당했다는 고단한 상황에서 만난 지 6개월이 되었고, 6개월이 됐다곤 해도 그자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것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은우가 그자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이라곤 그자가 특수 방위군이라는 것과, 용모가 군인엔 어울리지 않게 무서울 정도로 매혹적이라는 것, 덧붙여 자폐 증상이 있는 벙어리라는 사실뿐이었다. 아, 그렇지. 그자가 저능아라는 사실은 그 어떤 조건보다도 더 결정적인 사실일 것이다. 아이큐 60선의 저능아였기에 그자는 특수 방위군이 됐다. 일반인들과는 접점이 거의 없는, 의사소통도 거의 불가능한 특수 진압 부대원이 말이다. 저능아인 그자가 사랑 고백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나 제대로 하고 있었을까 의심스럽긴 하지만, 아무튼 그건 틀림없는 열렬한 연심의 고백이었다.

감지덕지하고 있다고? 연인은 못 될지언정 친구라도 되고 싶다고?

맙소사! 비록 순간적이었을지언정 그에게 혐오감을 넘어 증오심마저 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 그는 다른가? 왜 다른 이들에게서 고백을 들었을 때처럼 자신은 약간은 감지덕지해가며 그를 호의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가? 왜 자연스럽게, 그가 상처 입지 않도록 거절할 수 없었는가?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회한은, 여전히 앙금처럼 남아 있는 그자에 대한 혐오감만큼이나 은우를 괴롭히고 있었다.

……피아노를 치고 싶어……. 문득 뇌리를 스친 기원이 무서워졌다. 맙소사, 피아노를 치고 싶다니. 자신은 어지간히도 동요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치약 거품이 가득 들어찬 입안을 물로 헹구며, 은우는 뇌리 속을 가득 점령한 불쾌한 감정들 또한 한시라도 빨리 사라져주기를 간절히 빌었다.

넬슨호 승무원 중 한 명의 생일 파티가 있어 휴게실에는 모처럼 34명의 조난자들 전원이 모여 있었다. 무슨 재료로 만들어진 건지 알 수 없는 커다란 생일 케이크와 럼주, 그리고 각종 안주들이 사람들에게 돌려진 지도 한 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주크박스에선 클래식에서 재즈, 그리고 명상 음악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취향을 반영한 곡들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알코올이 들어가고 나니 아무래도 분위기가 들뜨게 마련이어서 삼삼오오 모여 앉은 테이블마다 목청을 높인 수다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조난 상태의 장기화를 두려워하는 나머지, 평상시엔 금기가 되다시피 하고 있는 각자의 고향과 가족에 관한 감상적인 얘기들도 심심찮게 들려올 정도였다.

은우는 출입구 쪽에서 가장 가까울 테이블에 앉아 자리에서 일어설 기회가 오길 기다리며 마지못해 파티를 견디고 있었다. 그러나 근 2주 가까이 휴게실엔 그림자도 내비치지 않았던 터라 은우의 테이블에 모여 앉은 일행들은 좀처럼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필립은 물론 모이어스며 제이슨까지, 무언가 작정이라도 한 것마냥 기를 쓰고 은우를 대화에 끌어들이거나 술을 권하거나 했다. 평소 이상으로 친밀함과 호의가 느껴지는 걸 보면, 친구들도 지난 2주 동안 은우에게 생긴 미묘한 변화들을 무의식적으로나마 눈치를 챈 걸지도 모른다. 일단 휴게실에 발길을 끊은 것도 그렇고, 조난자 전원이 모이는 식사 시간 겸 브리핑 시간인 아침 8시와 저녁 7시 모임에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보이콧하는 일까지 있었다. 공적인 임무를 마치는 즉시 숙소에 틀어박혀 꼼짝을 하지 않는 것 역시 좀 이상해 보였을지 모른다.

아무리 독신 성향이라지만 어둠침침한 별종으로까지 여겨지는 건 괴롭다. 낙심천만인 조난 상황에서 어째서 이따위 일까지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물론 이유는 알고 있다. 모든 게 다 저 남자 때문이다. 은우네 테이블과는 거의 극과 극이라 할 만큼 떨어져 있는 위치에 앉아, 이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남자. 지난 2주간, 저 남자를 피하기 위해 은우는 ‘어둠침침한 독신 성향의 사내’라는 증거를 온몸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기랄, 그만 쳐다보란 말이다!

새삼 배 속을 휘젓는 맹렬한 불쾌감에 은우는 남자를 향해 속으로 거칠게 욕설을 퍼부었다. 남자 쪽으로는 필사적으로 시선을 주지 않았기에 한 번도 눈이 마주치진 않았지만, 휴게실 안으로 들어선 지 한 시간 남짓, 은우가 저 집요하고도 노골적인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도저히 더는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즈음, 마침내 하나둘 자리를 뜨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고 은우 또한 망설이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어라, 자네 벌써 가게?”

취기로 벌게진 얼굴의 제이슨이 섭섭한 듯 물었고, 한창 고향 얘기에 열중해 있던 필립과 모이어스까지 말을 멈추고 시선을 보내왔다.

“예, 속이 좀 안 좋아서요. 오랜만에 마셨더니 영 할퀴네요.”

은우의 창백해진 낯빛이 속이 좋지 않다는 변명에 신빙성을 부여해준 모양이었다. 소박하고 사람 좋은 친구들은 은우를 붙잡는 대신 염려의 말과 함께 싹싹한 작별 인사를 전했을 뿐이었다.

도망치는 듯한 큰 걸음으로 휴게실을 나온 은우는 외부의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북쪽 라운지에 도착하고 나서야 겨우 보폭을 줄였다. 토하고 싶을 정도의 불쾌감은 여전했지만 일단 집요한 시선에서 벗어나고 나니 그나마 견딜 만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확실한 거절의 말을 했다면 남자의 태도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성향을 말해주고, 무엇보다도 자신은 이성애자이며 결정적으로 그자에 대해 연애 감정 따위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은우는 확신할 수 없었다. 도대체 아이큐 60의 저능아에다가 특수 방위군인 사내에게 자신의 의사가 제대로 관철될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사랑에 빠진 특수 방위군이라니 들어본 적도 없다. 특수 방위군과 연애를 했다는 일반 시민 얘기도 금시초문이다. 데이터 전무인 연애 시뮬레이션이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은우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신의 대답을 들은 후에 되돌아올 남자의 반응이.

이성적으로는 위험한 남자는 절대 아니라며 스스로를 질책해보지만 남자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과 두려움은 어떻게 해도 사그라지지가 않았다. 확실하게 거절의 말을 해서 불길한 어떤 결과를 이끌어내느니 차라리 이렇게 못 들은 척 어영부영 넘어가는 게 더 현명하지 않을까 하는 비겁한 회피 심리가 현재의 은우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더 이상 어떤 어택도 가해오지 않는 남자의 태도도 그러한 은우의 회피 심리를 부채질했다. 보통의 연애 매뉴얼처럼 남자가 고백에 대한 대답을 요구한다거나, 혹은 데이트를 신청한다거나 하는 건 감히 상상조차 할 수도 없었다. 고백을 받은 지 2주 남짓, 남자는 하다못해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거는 일조차 없었다. 지난 6개월간 그래왔던 것처럼(남자의 고백이 있기까지는 자각하지 못했었지만 남자의 집요한 주시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란 것쯤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맙소사!) 그저 멀리서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렇다. 달라진 건 없었다.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고,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는다. 그저 이렇게 애매한 형태로 시간을 죽이고 있다 보면 남자의 연심 또한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다, 라…….

문득 자각한 교묘한 허세에 은우는 피식 쓴웃음을 흘렸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니. 이렇게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서도 말인가? 마주칠 때마다 촉수처럼 뻗어오는 기계의 시선이 싫어서 몸서리를 치고, 최대한 그를 피해 필사적으로 숨어 다니고 있는 주제에……?

자조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금 숙소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 방금 지나쳐온 통로 끝에서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순간, 본능처럼 움츠러드는 자신의 몸에 은우는 머리꼭대기까지 화가 치솟았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건 육감이 아니라 일종의 확신이었다.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남자가 이렇게 자신을 쫓으리라는 걸. 감정을 강요하고, 불편한 긴장감을 유발시키며, 집요하게 자신을 괴롭히리란 걸. 그간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하고 혐오한 것은 아마도 남자의 저 예견된 행동 때문일지도 몰랐다.

“뭐야?!!! 내게 뭐 할 말이 있나, 에녹?!!!”

큰 소리로 일갈하자, 10여 미터쯤 떨어진 위치에서 다가오던 남자가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30평방미터의 라운지를 기점으로 사방에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연결 통로들이 전부 다 울릴 정도의 외침 소리였다. 다행히 통로엔 은우와 남자 외엔 아무도 없었지만, 누군가 있었다고 해도 은우는 감정을 자제하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피곤해! 이만 들어가 쉬어야 할 것 같으니까 할 말 있으면 나중에 하라구!”

남자의 표정 없는 얼굴을 노려보며 씹어뱉듯이 덧붙이자 놀랍게도 남자의 손가락이 가슴께로 올라와 수화를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일순 낭패감이 일었지만 언어 번역기를 휴대한 기억은 없다. 은우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무언가 열심히 지껄이는 남자의 몸짓은 공허하면서도 우스꽝스러웠다. 무표정했던 남자의 얼굴에 희미하게 초조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1분쯤 지속되던 무언의 움직임은 은우의 차디찬 냉소와 더불어 힘을 잃고 아래로 축 늘어졌다.

“그렇지. 안됐네만 언어 번역기도 없어. 그런 걸 휴대하는 건 습관이 안 돼서 말야.”

남자의 허벅지께에 늘어져 있는 크고 아름다운 손가락을 노려보며 은우는 싸늘하게 덧붙였다. 남자가 벙어리인 것이 무척 다행이라는 야비한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죄책감조차 들지 않는 것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지난 2주간의 피로감과 초조감은 은우로 하여금 정상적인 모럴 감각마저 밀어내고 있었다.

“그럼 나중에 보지.”

마지막으로 따귀를 때리는 것처럼 작별 인사를 건넨 후 몸을 돌려세웠다. 막 앞으로 걸음을 내딛으려던 은우의 움직임은, 그러나 와락 움켜잡힌 오른팔로 해서 크게 상반신을 휘청거렸을 뿐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일련의 차가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내내 온순한 반응만을 보이던 남자가 느닷없이 손을 뻗어왔던 것이다.

“이 손 놓지 못해?! 갑자기 만지지 말랬지?!!!”

비명 같은 고함 소리가 고요한 통로에 커다란 울림을 일으켰다. 무지막지하게 가해지던 완력이 순식간에 떨어져나간 것과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극심한 동요로 심장이 아픈 것처럼 쿵쾅거렸다. 간신히 눌려 있던 남자에 대한 공포감이 남자의 접촉과 함께 은우의 온 신경줄을 채찍처럼 강타한 때문이었다.

몸을 돌리고 바라보니, 남자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자세로 은우를 굽어보고 있었다. 당혹해 휘둥그레진 눈이 무표정한 얼굴과의 언밸런스함 때문에 몹시 기괴하게 보였다. 은우의 팔을 움켜쥐었던 오른손은 내리지도, 세우지도 않은 어정쩡한 위치에서 남자가 호흡을 토할 때마다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야단맞은 어린아이 같은 몸짓으로 굳어버린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은우의 비상식적인 공포감도 서서히 가라앉아갔다. 그러나 한번 놀란 심장은 여간해선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여전히 맹렬한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긋지긋했다. 또다시 이렇게 놀라고 싶지 않았다. 최악의 결과가 무서워 남자를 무턱대고 피했지만 이 이상의 최악이 더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작금의 은우는 이 두려운 남자에게 온 정신이 묶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도 매우 부정적이면서도 야만적인 상태로. 어떻게든 결판을 내지 않으면 자신은 좀 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이 남자에게 휘둘릴 터였다.

“……미안…….”

침착하자고,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며 은우는 필사적으로 말을 골랐다. 초조감을 진정시키듯 혀를 내밀어 메마른 입술을 핥았다. 바짝 말라 소리를 지르는 새 찢어진 모양인지 입술에선 찝찔한 쇠 맛이 느껴졌다.

“……소리 질러서 미안하네, 에녹. 전에도 말했잖아. 갑자기 만지면 놀란다고.”

“…….”

“……만약 내 대답을 듣기 위해 이러는 거라면 이 기회에 확실히 말해줘야겠군. 솔직히 지난 2주간 자네 시선이 몹시 불편했거든.”

“…….”

“……그래서, 자넨 내가 좋단 얘기지? 그, 연애 대상으로?”

“…….”

“미안하지만 자네 마음은 받아들일 수 없어. 실은 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거든.”

“…….”

“지구에 달리 배우자가 있다는 말이 아니야. 여기 우리들 안에, 그래, 조난자들 중 한 사람이지. 아직 고백은 안 했지만 조만간 할 생각이야. 그가 내 마음을 받아들인다면 결혼까지도 할 생각을 갖고 있지.”

“…….”

“혹시 내가 자넬 거절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나?”

“…….”

“그건 아니야. 만약 지난 6개월 동안 날 보고 있었다면 자네도 짐작이 갈 텐데?”

“…….”

“그래. 필립이야. 필립 랜킨. 그 친구와 내가 자주 어울린다는 건 자네도 알지 않나? 나보다 한참 젊지만 어른스럽고 침착한 친구지. 아동 보육사가 직업이라 그런지 붙임성도 좋고 착해. 딱 내가 사랑하는 스타일이지.”

“…….”

“……아무튼 그래서 호의는 고맙네만 자네 마음은 받아들일 수가 없어. 되도록 빨리 정리해줬으면 고맙겠군. 솔직히 자네 태도가 신경 쓰이거든. 필립이 날 충실하게 생각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

“…….”

“물론 자네를 위해서도 그래. 이런 경우엔 되도록 빨리 마음 정리를 해야 상처가 덜하지.”

“…….”

“……내 말들 이해가 가나?”

“…….”

“……그래. 아마 다는 알아듣기 힘들 거야. 솔직히 자네 같은 친구들이 연애 감정을 느낀다는 자체가 좀처럼 일어나기 힘든 일이니까. 아무튼 그렇다면 레드필드 중위에게 조언을 구해보게나. 틀림없이 나보다는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줄 거야.”

“…….”

남자에 대한 경계심으로 여전히 가슴을 두근거리면서도 은우는 끝까지 침착하게 말을 마칠 수 있었다. 편한 대로 필립을 끌어들인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작은 의심이 들었지만 상대가 저능아라는 점이 은우의 조심성을 완화시켰다. 독신 성향이라 받아들일 수 없다거나, 단지 남자가 취향이 아니다 하는 정도보다는 좀 더 강력한 거절의 이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은우의 말을 다 이해하고 쉬이 단념하진 못하더라도, 확실히 사랑하는 상대가 있다면 기대의 여지조차 없는 확고한 거절의 이유가 된다.

일단 자신이 방아쇠는 당겼으니 나머지는 레드필드 중위로 하여금 뒤처리를 하게 만들면 된다. 물론 필립에게도 도움을 청해야만 하겠지. 정말 불쾌하고 난처한 상황이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의외로 쉽게 잡힐지도 모른다.

“알겠지? 나도 중위님께 부탁해둘 테니까…….”

“…….”

말끝을 흐리며 살피듯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지만, 남자의 얼굴에선 그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자신의 거절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확히 이해하고도 그런 무표정밖에 지을 수 없어서 그런 건지 추측할 수가 없었다. 확실하고도 냉정한 은우의 거절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는지에 대해서도 도무지 짐작은 불가능했다. 남자는 은우가 돌아봤을 때 그대로 어깨를 약간 앞으로 굽힌 어정쩡한 자세로 은우를 멍하니 굽어보고 있었다.

그 새파란 기계의 시선에 마지못해 예의상의 미소를 던진 후, 은우는 남자의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잠시 긴장했지만 남자가 은우의 팔을 움켜쥐어오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상관없어…….

자꾸만 조급해지려는 발걸음에 초조감을 느끼며 은우는 씹어 뱉듯이 뇌까렸다. 남자의 조용하고 무표정한 시선이 여전히 뒷덜미에 느껴졌다.

……자네가 이해하든 말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다구……. 상처를 입었든 말든 미안하지만 동정심도 안 생긴단 말이지…….

또다시 냉혹하고 야비한 비아냥. 역시 죄책감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남자의 마음 상태를 신경 쓴다는 것 자체가 남자에게 붙잡혀 있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은우는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덫에 걸려 필사적이 된 사냥감 주제에 사냥꾼을 동정할 만큼 자신은 넉넉한 그릇이 못된다.

연결 통로의 한쪽 창문에서 비쳐드는 햇빛이 여전히 눈을 찌를 듯이 밝았다. 집요한 햇빛은 질리도록 은우의 뒤에 따라붙고 있었다. 꼬리까지 물고 늘어지는 듯한 남자의 집요한 시선 또한 한가지였다. 해가지지 않는 열대의 밤이 지긋지긋했다. 남자의 시선은 더더욱 지긋지긋했다.

이튿날 저녁, 은우는 식당에서 빠져나오고 있던 제이슨을 사람들의 왕래가 뜸한 기도실로 불러 사정을 설명했다.

레드필드 중위에게 남자에 대한 관리 감독을 부탁하고, 필립에게 협력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낸 후에야 겨우 제이슨에게 전말을 고백할 용기가 생긴 것이다. 서른을 목전에 둔 다 큰 어른 주제에 애정 문제로 갈팡질팡이라니. 어쩐지 수치심이 느껴져서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친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낙천적인 거구의 사내는 이미 알고 있었노라고 답을 해서 은우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어쩐지!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깐! 그러잖아도 자네한테 귀띔하려고 했단 말야, 그 친구!”

“……에? 아…… 알고 계셨습니까?”

“당연하지! 조금만 눈치가 있는 치들이라면 아마 다 짐작하고 있을걸? 휴게실에서건 식당에서건, 아니면 모선 밖으로 나갈 때도 그래. 그 친구 틈만 나면 자네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아직까지 못 알아챈 자네가 둔한 거라구.”

“……그럴…… 전 조금도…….”

“전에도 얘기했잖아. 자네 같은 치들은 진짜 엄청난 괴물을 끌어당길 수도 있다고.”

놀라서 휘둥그레지는 은우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굽어보며 제이슨이 말을 잘랐다.

“……그게 에녹을 말씀하시는 거였습니까?”

“그래. 나도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지. 특수 방위군은 전투력을 상승시키기 위해 성욕까지도 통제시킨다잖아. 자네도 들어본 적 있지? 사춘기 때부터 성욕 억제제를 병사들 신경망에 주입한다고 하더군. 뭔가 냄새가 구리지? 성욕 억제제로 감정이나 욕망까지도 조절을 한다니, 정말 비인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니깐. 아무튼 그들이 종교 지도자들처럼 동정을 유지할 수 있는 건 단지 그들이 저능아이기 때문만은 아니란 얘기지. 그래서 처음엔 꽤 놀랐어. 설마 했지. 자네를 바라보는 그 친구의 눈빛은 분명 사랑에 빠진 자의 그것이었으니까.”

“……무…… 물론……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죠, 저도…….”

“기절초풍할 일이지. 특수 방위군이 사랑에 빠지다니 말야. 그것도 일반 시민을 상대로.”

“…….”

“……그래서 그 친구 반응은 어때?”

진지한 어조로 제이슨이 물음을 던졌다.

“반응요?”

“아까 식당에서 말야. 자네하고 필립 분위기가 꽤 뜨거웠잖아. 필립하고 그렇게 약속이 돼 있는 줄 모르고, 난 또 자네가 녀석의 마음을 받아준 줄 알았지.”

“……그건 연기니까…….”

놀란 가운데서도 어쩐지 상황을 즐기는 듯한 필립의 들뜬 태도가 떠올라 은우의 대꾸는 어둡게 흐려졌다. 현재 은우의 가장 큰 두통거리는 이상야릇한 특수 방위군 병사였지만 필립 또한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필립의 호의야 전부터 어렴풋이 눈치를 채고 있었기에, 연인 행세를 해야 하는 이 상황이 혹시 필립을 자극하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고 있었다. 맙소사, 정말 산 넘어 산이 아닐 수 없었다!

“꽤 그럴듯하던걸? 특히 필립은 그야말로 희희낙락하고 있던데?”

“……솔직히 필립도 걱정이 됩니다. 녀석에게도 마음은 없다고 확실히 못을 박아두긴 했지만 어쩐지…….”

“필립은 걱정하지 마. 자네가 확고한 이상 억지로 밀어붙일 타입은 아니니까. 자네도 알잖아?”

제이슨은 자신 있게 은우의 또 다른 근심을 잘라냈다. 자신과 같은 일반인이고, 서로의 속내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친밀해진 필립이라면 확실히 걱정할 정도는 아닐지도 모른다. 온순하고 서글서글한 인상의 백인 청년은 욕망조차도 어딘가 식물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런 필립이 무리하게 애정을 구하는 모습은 어쩐지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하긴 그럴 녀석은 아니죠, 필립은. 차라리 이 기회에 확실히 거절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 녀석, 섭섭하긴 하지만 우정만으로 만족한다더군요. 가슴이 아팠습니다.”

“가슴 아플 것까지야. 당분간 아쉬워는 하겠지만 그래도 조만간 곧 정리할 수 있을 거야. 필립은 그런 친구지. 솔직히 독신 성향의 애인이라니 사귀어봤자 골칫덩이라구. 쌀쌀맞아서 섹스 하는 맛도 없을 거고. 독신 성향의 애인과 자느니 차라리 버추얼 시뮬레이션의 섹스 파트너랑 즐기는 편이 훨 낫지.”

“하하,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독신 성향이라고 다 쌀쌀맞은 건 아니라구요.”

“허세부리지 마. 소문에 들으니까 대부분 불감증이라더구만. 자네도 버추얼 섹스조차 별로 즐기질 않잖아.”

“젠장. 프라이버시 침해입니다, 제이슨.”

“솔직히 불어. 쌓이면 어떻게 해결하는 거지? 시시하게 그냥 손장난으로 털고 마나? 아니면 정말 승원의 사제들처럼 무의식적인 몽정이 끝?”

제이슨의 거듭되는 짓궂은 희롱에 기막힌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음담패설을 해도 그것이 별로 불쾌하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사내가 담백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 친구 반응이 어떠냐니깐? 어제 그렇게 퇴짜를 맞고 오늘 그 장면을 봤으니까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있었을 거 아냐?”

한바탕 터진 호쾌한 웃음 뒤에 다시 진지해진 어조로 제이슨이 물음을 던졌다. 사내 또한 은우만큼은 아닐지언정 예외적인 사태에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손에 잡힐 듯 전해졌다. 예의 달기지에서 목도했다는 참극이 사내로 하여금 한갓 ‘남의 연애사’ 따위로 간단히 취급하지 못하게 하는지도 몰랐다.

“……잘 모르겠어요. 여전히 그냥 바라보기만 하더군요. 별로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친구는 아니잖습니까.”

오늘 하루, 남자와 마주친 두 번의 식사 시간 내내 지금까지와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은 남자의 태도를 떠올리고 은우의 얼굴은 다시금 굳어졌다. 하루아침에 달리질 일이 아니란 것은 각오하고 있지만, 역시 앞으로의 반응을 예측할 수 없는 만큼 불안했다.

“중위는 뭐래? 중위한테도 얘기했다면서?”

“예. 엄하게 타이르겠다고는 했는데……. 솔직히 별로 믿음이 가진 않습니다. 그 사람도 몹시 당황하더군요. 특수 방위군이 일반인에게 연애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면서요. 성욕을 느끼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연애 감정이 생길 수 있냐는 거죠. 그저 친근한 동료애나 우애의 감정 같은 걸 거라고 하더라구요. 표현이 서툴기 때문에 제가 오해했을 거라나요. 어쨌든 주의를 주고 관리 감독에도 더 신경을 쓰겠다고 약속해주긴 했습니다.”

“흠, 당장 해결될 일은 아니니까 너무 초조해하진 말라구. 일단 그 친구를 확실히 통제할 수 있는 장교도 있잖나. 감정이야 쉬이 단념이 안 될지 몰라도 장교의 통제를 받고 있는 한 특별히 두드러지는 모션을 걸어오진 않을 거야. 특수 방위군의 명령 체계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고 하니까.”

“그렇긴 해도…….”

위로의 의미에 가까울 제이슨의 대꾸에 떨떠름하게 반론하려던 은우도 말끝을 흐렸다. 확실히 특수 방위군의 명령 체계는 절대적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세뇌에 가까울 만큼 철저해서 항명 사고는 단 1퍼센트의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단 지켜보자구.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

싱긋 웃음을 짓는 제이슨의 얼굴이 전방에서 비쳐드는 촛불 빛에 옅은 주홍색으로 보였다.

자신들과 마주 보이는 위치에 1.5미터 높이의 제단이 설치돼 있고, 제단 위에서는 수십 개의 촛불이 부드럽게 일렁이며 200여 평 크기의 드넓은 기도실을 흐릿하게 밝히고 있었다. 진짜 촛불이 아닌 시뮬레이션에 불과하지만, 수십 개가 각자 불규칙하면서도 실감 나게 일렁이는 그 모양은 사람들로 하여금 단숨에 경건한 명상 상태로 이끌어주는 훌륭한 종교 도구였다. 신앙심이 별로 없는 은우조차도 기도실에 들어오면 저절로 진리와 신의 존재에 대해 경외감을 느끼게 되곤 한다. 확실히 고해하기엔 딱 좋은 곳이라고 멍하니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고해의 내용까지 생각하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지만. 지구에서 아내와 자식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래서 그들과 생이별을 할까 봐 자못 풀이 죽어 있는 제이슨이 볼 땐 그 얼마나 팔자 좋은 고민일 것인가.

“네. 확실히 머리 싸매고 고민할 일은 아닌 거 같죠?”

새삼 자각한 수치심에 뒷덜미가 뜨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력 2297년 3월 29일. 행성 DITER-11에 불시착한 지 193일째다. 정작 중요하고 다급한 문제는 이상야릇한 정박아 사내의 러브 어택 따위가 아니었다. 삶에 대한 열의와 의미를 다시 찾아내는 것. 은우에게 당면한 가장 큰 과제이자 문제일 것이다. 어쩌면 이번 해프닝도 자신의 나태한 사고방식에 대해 영혼이 부과하는 엄격한 훈련 과제인지도 모른다.

두어 번 은우의 등을 툭툭 치는 것으로 격려를 마친 제이슨의 뒤를 따라 기도실을 나서며, 은우는 그렇게 스스로를 질책했다. 앞으로 남자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좀 더 여유를 갖고 대처하자고, 단단하게 의지를 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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