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2297년 4월. 에녹(Enoch Salisbury Eden)
바라보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따라다니는 것은 절대로 금한다고 레드필드 중위님이 명령했다.
장교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명령이니까 자신은 지킬 것이고, 또한 쉽게 지켜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에녹은 발소리를 죽인 채 버추얼 게임실로 들어가고 있는 그 사람과 필립 랜킨을 정신없이 따라가고 있었다.
명령 위반은 규정 위반이고, 규정 위반은 불쾌한 기분을 이끌어내곤 한다. 규정 위반을 하면 머리가 쪼개지는 것처럼 아프기 때문이다. 머리가 아픈 것은 불쾌하지만, 그럼에도 그 사람을 볼 수 없는 것은 그 몇 배는 불쾌하다고 자신은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규정을 어기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필사적으로 그를 따라다닐 리가 없을 테니까.
……그를 보고 싶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그 사람만을 바라보고 싶다…….
게임실로 들어간 두 사람이 시뮬레이션 넘버를 입력하자, 한쪽 벽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시뮬레이터 이외엔 은빛의 텅 빈 공간이던 게임실 내부는 순식간에 21세기형 사교 클럽으로 돌변했다.
슈트와 드레스 차림을 하고 있는 가상의 남녀들로 가득 들어찬 홀의 모습은 에녹에겐 낯설고도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하긴 일반 시민들이 즐기는 게임 중 에녹에게 익숙할 만한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을 것이다. 버추얼 게임은 일반 시민들의 놀이다. 개화되어 높은 영적 진화를 달성한 일반 시민들만의. 그래서 저능아인 특수 방위군이 가지고 놀기엔 이해 단위가 너무 높다고 장교들이 말해주었었다. 특수 방위군은 전투가 없는 휴가 때마다 휴대용 단말기로 주사위 게임이나 사격 게임 같은 쉬운 게임들을 한다.
복잡한 디지털 이미지들(가상의 남녀들)이 곳곳에 출몰해서는 에녹을 스치며 지나갔다. 시뮬레이션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과 몸을 부딪칠 때마다 에녹은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그들이 몸을 스치는 감각은 실제의 시민들과 똑같아서, 시민들에게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는 복무규정을 상기시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복무규정보다도 자신의 자폐증에 더 원인이 있는 것 같았다. 같은 규정의 제약을 받고 있어도 나머지 세 명의 동료들은 일반 시민들과의 접촉에 에녹보다는 훨씬 덜 민감했으니까.
일반 시민인 넬슨호의 조난자들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 괴롭고, 그들과 몸을 부딪치는 것은 그 이상으로 괴롭다. 가상의 이미지들이라 해도 너무나 실제 사람 같기 때문에 괴로운 것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몰래 그 사람을 따라다니는 상황이므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민은 괴롭지만 군중은 괜찮다. 이렇게 시민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군중’이라고 한다.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군중 속에 나 에녹의 몸을 몰래 숨긴 채 그 사람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홀 안쪽의 테이블에 마주 앉아 두 사람은 한동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필립 랜킨이 뭐라고 말하자 대답하듯 부드럽게 웃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순간 심장이 찔리는 듯한 날카로운 아픔이 느껴져서 에녹은 잠시 바닥으로 고개를 내렸다가는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집중했다.
필립 랜킨이 몸을 일으키더니 그 사람의 어깨에 팔을 감는 게 보였다.
필립 랜킨은 무언가를 요청하는 것 같았고, 그 사람은 고개를 흔들며 곤란해했다. 필립이 요청한 무언가가 그의 규정에 위배되는 모양이었다.
자신이라면 그의 규정을 위반하게끔 해서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멍하니 생각했다. 많이 불쾌한 건 아닐까 하고 열심히 바라보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몹시 좋아하는 조용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규정을 위반해도 필립 랜킨의 요청이니까 많이 불쾌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다시 심장이 날카로운 가시로 푹푹 찔리는 것 같은 익숙한 아픔이 엄습했다.
필립 랜킨은 그 사람의 연인이라고 한다. 연인은 ‘사랑하는 사람’의 뜻이라고 특수 방위군 훈련 교본 제 1권 45장에 나오는데, 에녹은 그것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리송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비슷하지만 아주 약간 다르다고 한다. 아주 약간 다른 게 얼마만큼 다른지 에녹은 모른다.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안다. 자신에게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저 사람. 이은우. 30세. 건축 노동자. 지구별 대한민국 출신.
아무튼 에녹은 그 사람 이은우를 좋아하고, 어릴 때 자신을 보살펴주었던 보육원 마마들도 좋아하고, 특수 방위군 훈련 교관 팔머 대위님도 좋아하고, 특수 방위군 심리 마스터인 라마나도 좋아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특수 방위군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면 안 된다고 한다. 그 또한 규정이다. 그래서 자신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걸 거다.
그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인 필립 랜킨에게 얘기하고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많이 기분이 나쁘다. 그때의 기분 나쁨은 머리가 아니라 심장과 목구멍 속에서 나온다. 심장이 날카로운 가시로 푹푹 찔리는 것처럼 아프기 때문이다. 목구멍이 끊어질 것처럼 조여들면서 아프기 때문이다. 심장과 목구멍이 아픈 것은 머리가 아픈 것보다도 훨씬 더 기분이 나쁘다. 몇 배, 몇 십 배는 더 나쁘다. 그래도 그 사람을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일단 한번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단 한순간도 멈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보고 싶다. 그 사람이 보고 싶다. 보고 또 봐도, 보고 싶다는 마음이 홍수처럼 흘러넘치기만 한다.
한동안 조용한 웃음을 보내며 필립의 요청을 거부하던 그 사람이 카페 한구석에 놓인 커다랗고 까만 기계 앞으로 다가갔다. 그건 피아노라는 음악 기계였다. 그 모양을 바라보며 필립 랜킨이 박수를 치니 디지털 이미지의 군중들도 각각의 테이블에서 그 사람에게 시선을 보내며 열심히 박수를 친다.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던 군중들의 웅성거림과 컴퓨터 파일 음악 소리들이 어느새 사라지고, 빗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기분 좋은 피아노 소리가 대신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피아노를 두드리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등줄기가 찌릿찌릿할 만큼 굉장히 기분 좋은 울림이 에녹의 전신을 황홀하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리저리 휘몰아치는 듯한 소리의 율동에 넋을 잃고 빠져 들어갔다.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눈을 감고 그 흐름에 전신을 맡기고 싶었지만, 그 사람을 바라보고 싶은 욕구가 더 강했다. 그 사람이 미묘하게 어깨를 흔들고, 팔을 움직이고, 손가락들을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소리의 율동도 따라서 변화하는 걸 알아채는 기쁨은 소리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이상으로 굉장한 것이었다.
저능아인 특수 방위군에게 복잡한 숫자들과 파동들의 조합인 고급 음악은 유익하지 않다고 한다. 그것이 군의 공격력을 떨어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투에 참가하기 직전에는 고급 음악을 들으며 노는 것이 전면 금지된다. 규정이다. 고급 음악이 일으키는 온몸의 울림을 무척 좋아하는 에녹으로선 슬픈 규정이 아닐 수 없다. 행성 DITER-11에 조난되고 나서, 매일매일 그 사람을 만나고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다음으로 즐거운 일은 또 매일매일 언제라도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행성 DITER-11에 있는 동안은 전투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언제까지나 이 별에 조난돼 있고 싶은 이유는 이렇게나 많았다.
그렇게 좋아하는 음악을, 지금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그 사람이 만들어내고 있다.
그가 만들어내는 음의 파동은, 컴퓨터 파일로 듣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기분이 좋게 느껴졌다. 그 사람의 몸짓과, 음의 파동들이 한데 어울려 진동하는 장면은 초콜릿 크림 케이크처럼 달콤하게 에녹의 눈을 기쁘게 했다. 그 사람이 더 많이 좋아졌다. 조금 전에도 세상에서 제일로 좋았지만, 지금은 그보다도 더 좋아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당신이 좋아……! 당신을 볼 수 있어서 너무너무 기뻐……! 난 당신이 정말 좋아요!!!
그가 만들어내는 파동에 상반신을 살랑살랑 흔들어대며 에녹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이 기분을, 이 즐겁고 행복한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터진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들이 몽롱한 감각 속을 떠돌고 있던 에녹을 현실로 들어 올렸다.
실내를 가득 채웠던 달콤했던 울림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필립 랜킨과 가상의 군중들이 너나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저 필립의 행동을 따라 할 뿐인 시뮬레이션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에녹은 열광하는 군중들이 미웠다. 가장 기쁜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 사람을 가장 좋아하는 것도 자신이었다. 흉내쟁이 시뮬레이션 주제에 자신 이상으로 좋아하는 티를 내다니. 자신은 이렇게 그들 틈에 숨어 꼼짝 않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데도…….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선 그 사람을 필립 랜킨이 끌어안는 게 보였다. 또 찌르는 듯한 가슴의 통증. 시뮬레이션 군중들보다도 필립 랜킨이 더 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아프다. 물론 일반 시민을 밉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규정 위반. 특수 방위군은 일반 시민을 밉다고 생각해선 절대 안 된다. 시뮬레이션의 가상 인간이나 은하 연맹의 평화를 위협하는 적들은 미워해도 되지만, 시민들에게 그런 마음을 품는 것은 군법 회의에 회부될 정도로 심각한 규정 위반이다.
……미워하면 안 된다. 미워하지 않는다. 나, 에녹 쉴스버리 이든은 필립 랜킨을 절대로 미워하지 않는다……. 그렇게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고 나자 머릿속의 통증이 겨우 가셨다. 그의 음악을 보고 들으며 파도처럼 엄습했던 기쁨도 알 수 없는 슬픔의 감정으로 재빨리 시들고 있었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이렇게 좋아서, 기뻐서 견딜 수가 없는데 좋아하면 안 된다고 한다. 기뻐해도 안 된다고 한다. 레드필드 중위님도 그렇게 명령하고, 그 사람도 그렇게 명령한다. 레드필드 중위님은 특수 방위군이 일반 시민과 함께 살 수는 없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한다. 규정 위반이다. 하지만 행성 DITER-11에 조난됐기 때문에 이미 일반 시민과 함께 살고 있다. 특수 상황. 특수 상황에선 규정을 지키기 힘들다고 레드필드 중위님이 먼저 말했었다. 그럼 계속 특수 상황이면 계속 그 사람을 좋아해도 되는 게 아닐까?
또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규정 위반일 생각을 중지하라는 신호지만, 생각을 멈추고 싶지 않다. 그 사람은 필립 랜킨을 사랑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한다. 필립 랜킨이 그 사람의 연인이기 때문에 에녹 자신은 좋아하면 안 된다고 한다. 그럼 필립 랜킨이 사라지면 그를 좋아해도 된다는 말일까?
아……! 아야야……! 머리가…… 머리가 깨지는 것처럼 아프다……! 규정 위반. 규정 위반. 생각을 멈춰야만 한다…….
계속 껴안으려는 필립 랜킨과, 밀어내려는 그 사람이 함께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눈시울 근처가 빨갛게 상기돼 있는 그 사람은 언제나의 그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곤란하다는 듯 필립 랜킨을 밀어내면서도 몸짓은 부드러웠다. 필립 랜킨의 어깨 너머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듯한 시선도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했다. 즐거운 듯한, 기뻐서 견딜 수 없는 듯한 얼굴이었다.
……왜 안 된다는 걸까? 왜 자신은 안 된다는 걸까? 이렇게 좋아하는데 왜 좋아하면 안 되는 걸까? 왜 자신은 저 필립 랜킨처럼 그를 만질 수 없는 걸까? 껴안을 수 없는 걸까? 입술을…… 저렇게 열심히 그 사람의 입술에 붙일 수 없는 걸까……?
꼭 껴안은 채 입술을 맞붙이고 있는 두 사람이 눈을 찌르는 것처럼 충격적으로 보였다. 며칠 전 휴게실에서 커플 선언을 한 센다이와 알렉의 그것과 똑같은 이상야릇한 몸짓.
‘키스’다. 연인끼리만 한다는 비위생적인 행동.
밀어내려던 그 사람이 필립 랜킨의 힘에 눌려 피아노 의자에 다시 앉았다. 위에서 덮치듯 그 사람을 끌어안고 있는 필립 랜킨의 몸짓은 마치 그 사람의 입술을 물고서 뜯어 먹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보건 위생에 나쁠 텐데 어째서 저런 이상한 짓을 하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에녹은 필립 랜킨 대신 자신이 그의 입술에 닿았으면 좋겠다고 멍하니 생각했다. 필립 랜킨 대신 그를 만지고, 껴안고, 입술을 부딪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간절히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원하는 것을 자각한 때문인지 불쾌하고 나쁜 기분이 걷잡을 수 없으리만큼 끓어올랐다. 필립 랜킨에 대한 미운 감정도 어쩐지 멈출 수가 없었다. 시뮬레이션 군중들이 키스하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우스갯소리를 던지며 휘파람을 불어대고 있었다. 센다이와 알렉의 그 짓을 볼 때 넬슨호의 조난자들이 보인 행동과 다르지 않았다. 조난자들도 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센다이와 알렉 때는 신경도 쓰지 않았었지만, 만약 그들이 저 디지털 이미지들처럼 그 사람과 필립 랜킨을 향해서 똑같이 휘파람을 분다면 자신은 조난자들도 필립 랜킨과 다름없이 제일 많이 미워할 것이다.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끔찍한 두통으로 눈에서 불이 나는 것만 같았다. 찌르는 듯한 심장의 통증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이러다 실신하는 것이 아닐까, 문득 다가든 의심에 에녹은 무서워졌다. 몹시 미운 필립 랜킨을 그 사람으로부터 떼어버리기 전에 실신할까 봐 무서웠다.
두려움은 일체의 주저함을 잘라내버렸다. 규정 위반을 경고하고 있는 지독한 두통도 무시했다. 에녹은 큰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뛰다시피 다가가니 시뮬레이션 군중들이 몸 이곳저곳을 부딪쳐오며 싫은 소리를 내뱉었다. 특수 방위군이 올 곳이 아니라며 나가라고 버럭 화를 내는 이미지들도 있었다. 평소라면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며 도망쳤을 테지만 이상하게도 아무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머리가 찌르는 듯 아프다. 눈 주위가 불이라도 난 것만 같다. ……빨리 필립 랜킨을 치워버려야지. 더 이상 그 사람을 만지지 못하게, 그 사람의 입술을 잡아먹지 못하게 던져버려야지. 소거시켜버려야지. 그럼 그 사람을 계속 바라봐도 돼. 좋아해도 돼…….
마치 적들과 육박전을 치를 때처럼 온몸의 근육이 긴장되었다. 망설임 없는 살의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거의 코앞으로 다가든 필립 랜킨의 뒷덜미를 힘껏 잡아챘다. 약간이라도 저항이 있을 것을 예상했지만 필립 랜킨은 너무나 쉽게 에녹의 손아귀로 딸려 들어왔다. 필립 랜킨의 포옹이 풀리자 그 사람이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모습이 설핏 보였다.
“무…… 뭐……?!! 무슨?!!!”
“……에…… 에녹?!!!”
“무…… 무슨 짓인가?!!! 이…… 이거 놓지 못해?!!!”
처음의 쉬운 제압과 달리 비로소 공격 자세를 취한 필립 랜킨이 고함을 지르며 심하게 저항했다. 뒤에서 오른팔과 목덜미를 감고 제압한 상태라 저항은 그저 어린아이 같은 몸부림에 그치고 있었다. 체격에 비해 몹시 힘이 없는 남자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일반 시민은 완력이 몹시 약하다고 교본에서 읽은 것 같다. 힘센 특수 방위군은 그래서 더더욱 일반 시민 가까이 가선 안 된다는 얘기도. 달걀을 손바닥에 쥐었다가 와락 깨트리고 말았던 어릴 때의 훈련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일반 시민은 달걀과 같다고 교관님이 말했었다. 조금만 힘을 줘도 와락 깨져버리는 달걀처럼 연약하다고. 특수 방위군은 그래서 일반 시민과 멀리 떨어져서 그들을 수호해야 한다고. 실수해서 달걀처럼 깨트려버리면 안 되기 때문에.
머리가 다시 찌르는 것처럼 아파왔다. 규정 위반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연약한 일반 시민을 소거하는 것은 규정 위반. 달걀처럼 깨트려버리는 것은 규정 위반.
하지만 필립 랜킨인데? 필립 랜킨이 있으면 에녹은 그 사람을 만날 수가 없다. 바라볼 수도 없다. 그런 것은 싫다. 너무너무 괴롭다. 그래서 지금은 규정을 지킬 수가 없다. 필립 랜킨을 소거시킨다. 나, 에녹 쉴스버리 이든은 그 사람을 바라보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로 즐겁기 때문이다.
“이거 놔!!! 놓지 못해?!!! 에녹!!!!!”
적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연약한 상대가 주는 위화감에 한동안 당혹했지만, 뇌수가 터져버릴 것만 같은 지독한 두통이 방아쇠가 돼주었다. 쇳소리 같은 비명도, 버르적거리는 연약한 몸이 주는 불쾌한 기분도 재빨리 결말을 내라고 자신을 부추기고 있었다.
“왜 이래?!!! 마…… 맙소사……! 뭘?!!!”
“그만둬!!! 에녹!!!!!”
“……흑?!!! 큭!!! 욱!!!!!”
“에녹!!!!”
너무나 시끄럽다. 만져지는 감촉도 너무 기분이 나쁘다. 얼굴 가득 땀이 흐르는 것도 몸싸움 때문이 아니다. 만지면 괴로운 몸을 만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숨이 가쁘다. 지독한 두통으로 머릿속이 짓이겨지는 것만 같다. ……빨리 끝내버려야지…….
몸서리를 치며 에녹은 연약한 목덜미에 감긴 팔에 나머지 팔을 가져가 껴안듯 살짝 비틀었다. 뚝 하는 소리는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일 것이다. 꾸르륵거리는 신음이 목구멍을 울리는가 싶더니 심하게 요동치던 필립 랜킨의 두 다리가 몇 번 경련을 하다 그대로 축 늘어졌다. 몹시 연약한 상대였나 보았다. 그럴듯한 반격도 없었고, 소거 역시 너무나 손쉬웠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만지면 괴로운 몸을 더 이상 만질 필요는 없다. 생명 에너지가 소거된 유기체를 앞으로 힘껏 내던지자, 시뮬레이션 인간들 몇과 부딪치던 그것은 커다란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여기저기서 당혹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가상 인간들이 내지르는 소리였다. 그들 중 유일한 진짜 인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새까만 피아노 다리 하나를 부여잡은 채 벌벌 떨고 있는 그 사람이 보였다. 그 사람의 시선은 3미터 앞쯤에 뒹굴고 있는 필립 랜킨의 시체에 고정돼 있었다. 그 사람은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다. 벌벌 떨리는 입술. 그 이상으로 마치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떨리는 몸. 자신이 그 사람도 소거시키리라고 판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몹시 걱정되었다. 무서워하지 말라고 안심시켜주고 싶었지만, 그는 언어 번역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 머리로 말해주는 기술이라도 쓰고 싶은데……. 물론 지금은 중요한 전투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뇌활성 증폭기’를 사용할 수는 없다. 말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 에녹은 생전 처음으로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대가 정상적으로 발달했는데도 말을 못 하는 것은 자폐 증상 때문이라고 보육원 마마들이 말해주었었다. 학교에서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다른 자폐 증상들은 많이 치료됐지만, 말을 하는 것만은 전혀 호전되지 못했다. 사제님은 에녹의 영혼이 극복해야 할 과보가 많고 진화가 더디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는 거라고 말씀하셨다. 아쉬워하지 말고 개화된 영혼이 될 때까지 참고 인내하라는 설법도 해주셨다. 사제님은 현명한 말씀만 하시는 아주 높은 분들이기 때문에 에녹은 그 설교를 믿었다. 그래서 조금 전까지 벙어리인 자신을 아쉬워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너무나 아쉽고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이 더 이상 떨지 않게 만들 수 있을 텐데. ……당신은 절대로 해치지 않습니다. 나, 에녹 쉴스버리 이든은 당신을 제일 많이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다정하고 상냥하게 그렇게 말해줄 텐데.
멀리 출입구 쪽에서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니 넬슨호 승무원들 몇이 눈을 크게 뜨고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 중 하나가 게임을 중지시킨 모양인지, 홀 안을 가득 채웠던 사람들이며 테이블과 의자들, 피아노와 화려한 장식품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슨 일이야?!!! 은우 씨?!!!”
“뭐…… 뭐야, 저건?!!! 서…… 설마, 필립?!!!”
“맙소사, 레드필드 중위를 불러!!! 부선장님께도 연락하고!!! 빠…… 빨리!!! 빨리!!!!!”
머리가 너무 아프다.
눈을 제대로 뜨기조차 힘이 들었다.
자신은 곧 실신할 게 확실했다. 아마 채 몇 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초조한 마음에 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허리를 굽힌 다음 떨고 있는 그의 어깨를 살짝 만져보았다. 얇은 티셔츠 너머로 따스한 그 사람의 체온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찌르르한 전율이 등줄기로 치달았다. 너무나 기분 좋은 전율이었다. 극심한 머리의 통증에도 불구하고, 초콜릿 크림 케이크를 먹은 것처럼 온몸이 달콤해져 기분이 좋았다.
좀 더 기분 좋은 감촉을 찾아 살짝 어루만지자, 뚫어져라 필립 랜킨의 시체만 응시하고 있던 그 사람의 예쁜 눈이 자신을 향한다. 시선이 마주쳤다. 너무너무 좋아하는 밝은 갈색의 눈동자. 갸름한 모양새의 눈시울이 휘둥그렇게 커진다. 부드러운 모양새의 입술도 벙긋하니 벌어지는 것이 보인다. 곧이어 이상야릇하게 찌그러지는 눈썹. 비명을 지를 모양이다.
……어떡하지……?
괴로운 비명을 지르는 그 사람은 보고 싶지 않다. 자신의 손을 거세게 뿌리치며 경련하는 그 사람도.
“……으으…… 욱……! 으아아아아!!!!!”
아프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머리가 아픈 것보다도 훨씬, 훨씬 더 견딜 수 없을 것만 같다.
다행히 견딜 수 없을 고통은 금세 사라졌다. 눈앞이 어두워지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된 것이다.
……다행이다. 이제 그 사람을 좋아해도 된다. 확실히 그렇게 만들고 나서 실신해서 다행이야…….
멀어지는 의식의 틈으로 한 가지 기쁜 생각이 실처럼 매달린다. 에녹은 필사적으로 그것만 붙들었다.
온몸이 밑으로 쑤욱 꺼져드는 것 같은 아득한 느낌과 함께 새까만 어둠이 냉큼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