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2297년 4월. 이은우(李誾踽)
필립의 장례식은 최대한 간소하게 치러진 모양이었다.
아마도 정신적인 쇼크를 받은 때문이겠지만, 사고가 있은 지 사흘 동안 은우는 열병에 시달리느라 침대를 벗어날 수조차 없었다. 제정신을 차렸을 땐 필립의 장례식은 이미 끝난 뒤였다.
의무실 침대에 멍하니 누운 채 선의인 후버 씨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었을 뿐, 저 온순하고 상냥했던 백인 청년을 위해 은우가 해줄 수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울 수도, 조의를 표할 수도 없었다. 불과 사흘 전에 일어난 일이건만, 필립의 죽음은 아주 오래전에 꾼 악몽처럼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의식을 회복하고 다시 만 하루가 지나 그럭저럭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됐을 때, 은우는 넬슨호의 부선장실에서 열린 대책 회의에 불려 나갔다. 부선장과 레드필드 중위, 그리고 네 명의 넬슨호 상급 승무원들로 이루어진 대책 회의는 대책 회의라 하기보단 살인 병사에 대한 처벌 결의 대회에 가까웠다.
살인을 저지른 남자를 위한 변호인은 아무도 없었다. 상관인 레드필드 중위조차 쇼크를 받은 상태였고, 중위는 넬슨호의 승무원들보다도 더 강도 높은 제재 방안을 제안하고 있었다. 즉 조난 캠프(넬슨호)로부터의 영구 추방이었다.
원시의 별에 홀로 추방해버린다는 건 사실상의 사형과 다름없는 중형이었다. 지난 세기에 사멸한 사형제도의 부활에 승무원들은 난색을 표했고, 독실한 종교인이자 인도적인 성향이 강한 부선장도 이를 수용할 리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사고능력이 모자란 저능아다. 중위는 특수 방위군 병사야말로 어떤 열악한 조건하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끔 생존 훈련을 철저히 받았다며 사형은 아니라고 반박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살인한 병사는 지구로부터 구조선이 올 때까지 선내(船內) 감방에 구금한 뒤, 지구에서 정식으로 재판을 받게 하는 쪽으로 결론이 모이게 되었다. 지구로부터의 구조라는 희박한 확률에 매달려 나머지 생존자들의 안전을 위협받게 할 수 없다는 것과, 통제력을 상실한 사병만큼 위험한 존재도 없으며 앞으로도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는 우울한 전망들 같은, 레드필드 중위의 연이은 주장들도 독실한 도덕률로 무장하고 있는 부선장의 의지를 꺾진 못했다. 마침내 남자의 구금 쪽으로 결의가 이루어졌고 선의(船醫)인 후버 씨와 레드필드 중위, 그리고 부선장을 카운슬러로 한 강도 높은 교화 프로그램(세뇌)을 시행하는 방안도 마련되었다.
대책 회의가 계속되던 두 시간 남짓, 은우에게 의견을 묻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서먹서먹한 태도 속에서 은우는 그들이 자신에게도 일정량의 책임을 묻는 듯한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억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능아를 상대로 질투심을 자극하는 행동을 보여 결국 사태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간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왜 모르겠는가.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면, 조금만 더 개화된 시민답게 너그러운 반응을 보였다면, 적어도 필립을 끌어들이지만 않았더라도 문제는 이렇게까지 커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열병의 후유증으로 나른해진 몸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은우는 쓰디쓴 회한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교화 프로그램이 잘 먹히지 않는가 봐.”
은우의 얼굴을 슬쩍 살펴보던 제이슨이 그렇게 운을 뗀 것은 사고가 일어난 지 18일째 되던 날 밤의 일이었다.
맘씨 좋은 연상의 친구는 계속 식욕을 잃고 있는 은우를 위해 수프와 빵을 갖고 숙소에 들이닥쳐선 억지로 그릇을 비우게 만들었다. 30분쯤 부담 없는 수다와 농담이 이어지던 끝에 던져진 얘기라, 처음엔 은우도 사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듣질 못했었다.
“다들 골치 아픈 기색이 역력해. 별로 티는 안 내지만.”
“……에? 예? 뭐가요……?”
금기가 되다시피 한 화제였다. 그날 이후, 넬슨호의 가장 깊고 은밀한 곳에 감금된 남자에 대해선 서로 단 한 마디도 꺼낸 적이 없었다. 은우에게 있어 살인을 직접 목도한 쇼크는 엄청난 것이었고, 그건 제이슨 같은 제 3자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 친구 말야, 계속 자네만 찾는다더군. 승무원들이 말 안 해주지? 레드필드 중위도?”
제이슨이 재차 덧붙이고 나서야 은우는 겨우 알아듣게 되었고,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슬쩍 은우의 눈치를 살피던 제이슨은 뭐라고 더 말을 보태려다가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백짓장처럼 창백해진 은우의 얼굴을 보곤 경솔한 처신을 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미안해. 아직 정리가 안 됐을 텐데…….”
“……교…… 교화 프로그램이 안 듣는다면…… 그……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됐어. 그만두자구. 나중에 얘기하지.”
확연하게 몸을 떠는 은우를 위한 배려겠지만 화제를 돌리기엔 이미 늦었다.
“……나…… 나…… 나…… 날 보고 싶대요……? 아…… 아직도……? 봐…… 봐서 뭘 어떡한대요……? 나…… 나도 죽일 거래요?!”
“은우 군…….”
“……중위 말대로 넬슨호 밖으로 멀리 추방해버리는 게 현명하지 않아요?! 그런 남자…… 너무 위험해!”
“이봐…….”
“눈도 깜짝 않고 필립을 죽였다구요! 도대체 그런 야만인을 왜 가까이 두는 거죠?! 중위 말이 맞아요. 이미 통제를 벗어난 미치광이인데 새삼 교화 프로그램으로 세뇌시킨다고 달라지겠어요?! 자칫하다간 우리들 모두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구요! 그따위……! 그따위…….”
“이봐, 자네…….”
“저능한 살인 기계 따윈…….”
“그만해둬!”
제이슨이 테이블을 치며 크게 소리쳤다. 사색이 돼서 부들부들 떠는 은우를 굽어보는 친구의 얼굴엔 깊은 근심이 담겨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엄격한 책망의 빛이 가득했다.
“자네답지 않군. 그야 끔찍한 일을 겪었으니 그자가 두려운 것도 이해는 가네만, 그래도 시민 윤리를 잊으면 곤란하지.”
냉정하고 엄격한 제이슨의 일갈에 자꾸만 터지려던 히스테리가 간신히 가라앉았다. 지독한 수치심은 그다음에 왔다. 맙소사. 사람을 사형시키라는 야만인의 주장을 입에 담은 것이다. 그것도 모처럼 마음을 나누게 된 귀한 친구 앞에서.
“미안해. 내가 경솔했어. 아직 얘길 꺼낼 만한 상황이 아닌데. 괜히 자네 마음만 더 심란하게 만들었군.”
“…….”
“너무 걱정하지 말게. 어쨌든 격리돼 있잖아. 삼중의 시큐리티가 설치돼 있는 감방에서 확실하게 감시를 받고 있으니까 그 친구도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킬 순 없을 거야.”
“…….”
“……얼굴이 많이 상했어, 자네. 불시착하고부터도 조금씩 살이 빠지는 것 같더니 그 일 이후론 정말 심각할 지경이라구.”
“…….”
“우리들 중에 성직자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런 일엔 그분들이 전문이잖아? 솔직히 자네만큼은 아니더라도 다들 꽤 충격을 받고 있다구. 조난당한 일보다 특수 방위군의 살인을 목격한 것이 몇 배는 더 큰 쇼크니까.”
“…….”
“계속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면 후버 씨의 심리 상담이라도 받아보지그래? 정신 전문은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은 의사잖아. 적절한 처방을 해줄 걸세.”
“…….”
“……내일 식량 채취 작업은 안 해도 돼. 부선장에게 부탁해서 바꿔달라고 했어. 몸이 회복됐을 때 만회해도 되니까, 당분간 야외 작업은 쉬도록 하라구.”
되풀이되는 염려의 소리에도 불구하고 은우는 단 한 마디도 대꾸를 줄 수가 없었다. 너무나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조차 없었다. 형편없는 최저의 인간으로 전락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이미 최저의 인간이었다.
“……죄송하지만 일찍 자고 싶습니다.”
새파랗게 질린 채 바닥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던 은우가 겨우 내뱉은 한 마디였다.
“……은우…… 은…… 은우 군……! 일어나, 빨리……! 은우 군!!!”
누군가의 팔이 은우의 어깨를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눈을 찌르는 듯한 밝은 빛과 함께 천둥소리처럼 요란스레 귓전을 두드리는 누군가의 외침은 꾸고 있던 악몽의 연속처럼 끔찍하게 느껴졌다. 온몸이 거미줄에 친친 감기기라도 한 것마냥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일어나라니까! 큰일 났다구! 젠장, 약을 얼마나 쑤셔 넣은 거야?!!!”
외침의 톤은 한결 낮아진 대신 몸에 가해지는 폭격의 강도는 그 배는 더 커졌다. 몇 번 양쪽 따귀를 맞은 후에야 은우는 가까스로 가위와도 같은 수면 속을 탈출할 수가 있었다.
“일어나!!!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한다구!!!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레드필드 중위까지 사살됐단 말야!!! 그놈이 선실을 이 잡듯이 뒤지며 모조리 죽이고 있다구!!!”
따귀를 맞은 뺨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붙잡힌 채 앞뒤로 흔들리고 있는 양쪽 어깨 역시 꽤나 아팠다. 반격을 해서 자신을 때리고 있는 상대를 밀쳐내고 싶었지만 그저 양팔을 허우적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계속되는 불면증을 참다못해 수면제를 주사한 때문이었다. 평소보다 양을 늘린데다, 무엇보다도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여서 효과가 엄청난 것 같았다. 가까스로 눈을 뜨긴 했지만 끔찍한 햇빛 때문에 당장은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아무리 몸에 힘을 주려 해도 물 먹은 솜처럼 전신이 무겁고 나른하기만 했다.
“정신 차려!!! 지금 이럴 때가 아냐, 은우 군!!! 큰일 났다구!!! 제발 정신 차리란 말야!!!”
히스테릭한 고함 소리며 겁에 질린 태도는 낯설었지만 약간의 쇳소리가 섞인 굵은 베이스의 목소리 자체는 매우 낯익은 것이었다.
“……제…… 제이슨……?”
은우는 몽롱하게 자물쇠가 쳐진 기억의 창고에서 겨우 상대의 이름을 꺼내올 수 있었다.
“……무…… 무슨 일이죠? 저…… 좀 더 자야 하는데…… 야…… 약을 주사해서…….”
“이리 기대!!!!! 걸을 수 없으면 그냥 기대기나 하라구!!!!!”
자꾸만 아래로 까라지는 몸을 제이슨의 단단한 팔이 끌어당기고 있었다. 한쪽 팔이 사내의 어깨에 걸쳐지고, 은우는 사내에게 질질 끌리다시피 해서 침대를 벗어났다. 무언가 사고가 터진 듯했지만,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제이슨의 고함 소리도, 납덩이처럼 무거운 몸도, 도무지 꿈인지 현실인지 불분명했다. 온몸이 약기운에 점령당해 생각이나 판단을 할 만한 정신력은 돌아오지 못한 상태였다.
“……물…… 제이슨 물 좀 주세요…… 이건…… 도저히 못 걸어요…… 정신부터 차리지 않으면…….”
채 몇 걸음도 떼지 못하고 바닥으로 늘어지는 은우를 향해 제이슨이 뭐라고 욕설을 퍼붓는가 싶더니, 갑자기 온몸으로 찬물이 쏟아져 내렸다.
“으…… 으앗!!!”
무시무시한 충격에 저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제이슨이 욕실에서 떠 온 찬물을 통째로 들이부은 것이다. 전류가 이는 듯한 냉기에 몸서리를 치며 은우는 몽롱했던 신경줄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이제 됐지?!!! 어서 일어나라구!!!!!”
자신에게 찬물을 뿌렸던 커다란 볼을 바닥에 내던지며 제이슨이 다시금 꽥꽥거렸다. 쏘는 듯한 햇빛이 창 밖으로부터 비쳐들고 있었다. 아직도 해가 중천인 걸 보니 잠든 지 두세 시간도 안 된 모양이었다. 심하게 눈을 깜빡거리며 은우는 시끄러운 거구의 사내에게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서 기를 썼다. 최악의 몸 컨디션에 작열하는 햇빛은 쥐약과 다름없었다. 아마도 자신을 깨우기 위해서였겠지만, 은우는 무정하게 차광 차양을 걷어버린 사내의 처사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왜 그래요? 제이슨……?”
원망이 들어간 물음은 사내의 눈에 비친 공포를 읽는 순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커다란 덩치에 완강하고 사내다운 얼굴이었던 중년의 사내는 사색이 되어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과감하고 자부심 강한 성격의 사내에겐 도무지 어울리지도 않거니와, 그런 만큼 사내에게선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목덜미 뒤가 뻣뻣해지며 온몸의 털이 주뼛 곤두서는 것이 느껴졌다. 두근두근, 심장이 고동쳤다. 은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제이슨이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전신에 소름이 끼치며 식은땀이 솟았다. 한 마디도 설명은 없었지만 은우는 어쩐지 알 수 있었다. 그건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두려움과 공포심이었다. 이젠 내용조차 떠오르지 않는 좀 전의 악몽보다도 더 끔찍한 상황일 것이다.
“……그…… 그…… 그 친구인가요? 그 친구가 또 무슨……?”
“나가자구! 일단 수송기를 타고 넬슨호부터 벗어나야 해!”
멍하니 고개를 가로젓는 은우를 향해 사내가 칼로 자르듯 선언했다. 자신을 향해 뻗은 사내의 손을 쥐는 순간, 쾅하는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실내가 크게 요동쳤다. 은우의 숙소로부터 멀지 않은 구역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었다.
“E구역 시큐리티야!!! 젠장, 저것마저 파괴됐으면 더 이상은 속수무책이라구!!! 어서 빨리!!!!!”
비명 같은 제이슨의 고함 소리가 머뭇거리던 은우를 재촉했다. 사내에게 잡힌 손목이 앞으로 크게 기우는 것과 동시에 은우는 달리기 시작했다. 덩치가 큰 만큼 그리 재빠르지 않은 사내의 움직임도 평소의 힘이 돌아오지 않은 은우에겐 벅찬 것이었다. 거의 끌려가다시피 사내와 보조를 맞추느라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다행히 맨발이라 매끈하게 닦인 진입 통로 바닥에 미끄러지는 것은 막아주었다. 극한의 공포심도 최선의 속도를 내는 덴 도움이 되었다. 불안정한 움직임은 제이슨에게 의지하고, 상체를 앞으로 숙인 채 은우는 소형 수송기들이 정박해 있는 D구역 격납고 쪽으로 줄달음쳤다.
달리고 있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 크게 울릴 뿐, 넬슨호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몇 분 전의 커다란 폭발음도 환청이 아니었나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실내를 떠도는 메케한 타는 냄새만이 그것이 현실이었다는 것을 가냘프게 주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해버린 것 같았다. 거대한 유령선 안을 떠도는 기분이었다. 살아 있는 생명의 자취라곤 조금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생각을 곱씹을수록 은우는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싸늘한 공포감에 전율해야 했다.
지축을 흔들 정도의 폭발이 있었음에도 메인 컴퓨터 사라가 보안 경고를 하지 않았다. 작동을 멈춘 것이 틀림없었다. 아마도 그것이 이 무덤 속 같은 침묵의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조작하지 않는 한 사라가 작동을 멈추는 일은 없다. 사라조차 작동을 멈춘 상황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두들 어떻게 된 건지, 제이슨에게 묻는 것조차 겁이 났다. 정확히 사정을 전해 듣는다면 그나마 달릴 힘조차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얼마를 달렸을까?
사내의 억센 손에 이끌려 막 E구역을 벗어난 직후였다.
‘그것’은, 정확히 D구역 격납고 출입문에 세로로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두 사람이 격납고가 있는 모퉁이 쪽으로 막 방향을 틀었을 때, ‘그것’은 코를 찌르는 메케한 악취와 함께 단숨에 시야로 뛰어들어왔다.
푸르스름하게 피부가 변색된 시체!
넬슨호 승무원 중 한 사람인 더치 해리스였다!
단신인 20대 흑인 청년은 라바트레이저 총에 명중된 시체 특유의 퍼렇게 변색된 피부를 한 채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크게 부릅뜬 눈자위까지 푸르게 변색돼 있어 사람이 아니라 작업용 안드로이드처럼 보였다.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아 은우는 시체로부터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식은땀이 전신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간신히 안정을 찾아가던 몸이 다시금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다. 쇼크로 정신이 멍해져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 지경이었다.
“제…… 젠장!!!”
헐떡이는 숨소리를 간신히 억누르며 제이슨이 옆에서 거칠게 욕설을 퍼부었다. 최대한 톤을 죽인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어…… 어쩌죠?”
“맨몸으로 밀림 속을 헤맬 순 없어! 안전하게 탈출하려면 반드시 수송기를 타야 한다구!”
망연자실한 채 은우가 혼잣말처럼 물음을 던지자 제이슨이 다짐하듯 울부짖었다. 낙담과 공포와 절망이 다부진 사내를 금방이라도 쓰러트릴 것만 같았다. 사내의 시선을 따라 은우도 쥐 죽은 듯 고요한 격납고 출입구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해리스의 시체 너머 4미터 크기의 격납고 문은 반쯤 부서진 흉물스러운 몰골을 한 채 음험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메케한 악취를 동반한 거무스름한 연기가 부서진 출입문 틈을 비집고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내의 의견이 백번 옳긴 했지만, 안으로 들어가 확인해보지 않아도 격납고 안의 상황은 일목요연했다. D구역으로 들어섰을 때부터 더더욱 탁해진 공기며 부서진 출입문, 그리고 해리스의 시체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자신들을 노리고 있는 살인자가 이미 격납고 안의 수송기들을 완파시켰음을 의미했다.
몇 분 전의 폭발음은 D구역 반대편인 E구역 시큐리티에서 들려왔었다. 살인자는 현재 E구역 시큐리티로부터 자신들의 뒤를 쫓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D구역 격납고가 폭파된 것은 E구역 시큐리티가 폭파된 시점보다 훨씬 이전이란 뜻이 된다. 아마도 휴게실을 공격하는 동시에 격납고의 폭발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사라의 작동을 정지시킨 것은 그보다도 더 전이었을 것이고.
그랬다. 살인자는 살육에 들어가기에 앞서 스스로의 행동에 제동을 걸 만한 방해 요소부터 완벽히 차단했다. 가장 강력한 보안 장치일 사라를 정지시키고, 이어 탈출 루트를 봉쇄한 뒤, 조난자들이 남아 있는 부실들을 하나하나 훑으며 살육을 감행했다. 몸서리가 쳐졌다. 저능아라곤 믿어지지 않는 치밀하고 계획적인 살육 수법이었다.
……치밀하고 계획적인 살육 수법…… 저능아라곤 믿어지지 않는…… 저능아일 리가 없는……?!!! 맙소사!!! ‘뇌활성 증폭기’?!!!! 전신이 새삼스러운 공포로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사냥용 총이라도 가져오는 건데…….”
무기를 언급하는 제이슨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멀리서 들렸다. 사냥용 종. 사냥용 총……. 한기가 든 몸이 경련하듯 거듭 몸서리를 쳐댔다. 꿈만 같다. 깨어나지 못하는 악몽의 되풀이……. 살기 위해서 살인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니, 절대 현실일 리가 없다. ‘개화한 인류는 의도적인 살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허용해선 안 됩니다. 한 번의 살인은 영혼 진화 사이클을 1억 년 이상 후퇴시키기 때문입니다.’ 영혼 헌장 제 5조. 21세기 중반 지구 대격변 이후 선포된 절대 진리. 은하 연맹의 일반 시민은 살인을 할 수 없다. 해선 안 된다. 살인을 하느니, 살해를 당하는 편이 영혼에겐 훨씬 더 유익한 일이기 때문이다. 살인이 허용되는 인간은 아직 개화하지 못한 특수 방위군뿐. 그렇지, 넬슨호가 해적들의 습격을 받았을 때에도 살상은 특수 방위군만의 몫이었었다. 광란한 살육자가 숨어 있던 특수 방위군만의…….
“……총이 있다 해도 전문가를 이길 순 없어요.”
목소리를 쥐어짜 내듯 가까스로 내뱉은 것은 제이슨을 위해서였다. 연상의 친구는 공포로 이성을 잃고 있었다. 시민 윤리도, 영혼 헌장도 말끔히 잊어버릴 정도로.
“……무기를 휴대했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죠. 아시잖아요. 설령 무기를 손에 쥐여준다고 해도 일반 시민이 특수 방위군을 상대로 게임이 될 리 있겠습니까? 우린 살인 따윈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솔직히 그놈에게 총을 쏘실 수 있겠어요, 제이슨?”
“……그…… 그럼? 이대로 포기하자구?! 앉아서 그놈이 죽이러 올 때까지 기다리자구?!”
“……외부 작업용으로 강가에 세워둔 두 대가 있죠? 그걸 타자구요. 우리보다 먼저 빠져나간 사람이 있다면 할 수 없겠지만요.”
힘겹게 대안을 던지자, 자포자기의 빛이 내비치던 제이슨의 표정에 다시금 의지가 깃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 그렇군! 맞아, 그게 있었지!”
“…….”
“우리보다 먼저 빠져나간 이들은 아직 없을 거야. 놈이 탈출한 게 30분도 채 안 됐다니까. 시큐리티 안에서 병사 하나를 사살하고 밖에서 지키고 있던 나머지 병사들도 순식간에 해치웠다고 해. 그 직후에 덮친 곳이 휴게실이었지. 레드필드 중위조차 별 반격도 못 하고 즉사했을 정도니 나머지야 상상이 가지? 평소대로 휴게실에서 한잔하고 있었다간 나도 벌써 끝장이 났을지도 몰라. 막 잠자리에 들려는데 비상 콜이 떨어지더군. 케인이었지. 휴게실에서 간신히 도망쳐 나왔대. 케인 말고도 몇은 더 빠져나왔는데 대부분은 손을 쓸 수 없었다더군. 그치들도 격납고 쪽으로 움직인다고 했는데 어쩐 일인지 아까부터 연락이 안 돼. 젠장! 사라가 작동한다면 최소한 서로 통신이라도 가능할 텐데…….”
복받치는 감정을 견디지 못한 눈물이 마침내 홍수처럼 흘러나왔다. 울음소리를 흘릴 염치 따윈 없었기에 은우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어 간신히 흐느낌을 참아냈다. 온몸의 관절이란 관절이 삐거덕거리며 경련이 이는 것처럼 온몸이 떨렸다. 맙소사. 꿈이었다. 악몽이었다. 정말로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리가 없다. 이런 일은 버추얼 게임에서조차도 차마 가정할 수가 없는 상황일 거다.
“……자네 말이 옳았어. 통제를 벗어난 사병은 시한폭탄과 같다는 걸 깨달았어야 했는데. 필립을 죽였을 때 추방해버렸어야 했다구. 아니, 그 즉시로 사살해버렸어야 했는지도. 맙소사,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다들 지구에 가족이 있다구. 내 아이들은 이제 열네 살과 일곱 살이란 말야! 무인 행성에 불시착을 하고도 잘 버텨왔는데 이따위 어이없는 일로 죽어가야만 하다니!”
격앙돼 있는 제이슨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시처럼 은우를 찌르고 있었다.
“……죄…… 송…… 해요…… 죄송해요, 제이슨…….”
“설마, 자네 잘못이겠어? 어차피 미친놈이었을걸. 모든 게 다 그놈의 악업 때문인 게 분명하다구. 하긴 내 카르마 탓인지도 모르지. 만약 이번 생에서 놈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내 영혼의 성장에 필요한 일이란 뜻이겠지. 아아, 젠장! 젠장, 젠장, 젠장……!”
“…….”
지금까지 은우의 삶은 불운한 사건과 우울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에도 은우는 절망하거나 겁에 질려본 적은 없었다. 가장 최악일 음악을 잃었을 때에도 은우는 굳건하게 상실을 견뎌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 어떤 상실과 불운도 이처럼 느닷없고, 황당하고, 통제 불능일 정도로 자신을 쓰러트리진 못했었다. 자신 때문에 사람들이 죽다니. 자신 때문에. 처음부터 남자의 구애를 받아줬다면 혹시 달라지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그네가 하고픈 대로 맡겨두었다면 쉬이 질려 떨어져나가지 않았을까? 사리 분별이 취약한 저능아이니, 어쩌면 일반인들보다 다루기는 훨씬 쉬웠을지도 모른다. 그저 얼굴을 보게 해주고, 상냥한 말을 해주고, 키스 정도는 허락해줘도 됐을 텐데. 정 원한다면 섹스도 하게 해줬을 거다. 만약 이 정도로 남자를 광란하게 만들 줄 미리 알았더라면.
“울지 마. 자책은 나중에 하라구. 아무튼 지금은 목숨부터 부지하는 게 우선이야.”
커다란 사내의 손이 다시금 은우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일단 강가로 내려가보자구! 어서!”
확실하게 의지를 굳힌 모양인지 건장한 사내는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다. 잡아끄는 손길에도 엄청난 악력이 들어가 있어, 은우는 실에 매달린 꼭두각시 인형처럼 간신히 균형을 유지한 채 사내를 따라 달릴 수밖에 없었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내리는 눈물 탓에 시야는 거의 알아보기 힘들었다. 한번 자제심이 끊어지고 나니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목을 죄는 듯한 공포감은 통째로 회한에 휩쓸리는 것을 막아주었다. 원초적인 공포감과 그로인한 동물적인 생존 본능이 계속 달릴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광란한 살육자는 은우와 제이슨보다도 훨씬 더 빠를 것이다. 더 강할 것이다. E구역 시큐리티가 폭파된 시점을 고려하면 자신들은 살육자보다 고작해야 몇 분 정도 앞서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만약 그자가 자신들의 진행 방향을 알고 있다고 하면 눈 깜짝할 순간에 추월할 수 있는 극히 미미한 격차에 불과했다.
심장이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피치를 올린 채 달리고 또 달렸다.
평상시엔 부족한 운동량을 채울 수 있는 좋은 조깅 코스로 여겼건만, 넬슨호 출구까지의 거리가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살육자에게 위치가 파악될 위험이 있었기에 구역마다 나타나는 이동 캡슐은 무용지물이었다.
영원 같기도 하고 찰나 같기도 한 질주의 끝에 마침내 출구가 보였다. 3미터 폭의 지름을 하고 있는 원형의 이중 출구였다.
혹시나 하고 기대를 가졌었건만 100여 평쯤 될 출구 앞 공터엔 다른 사람의 그림자라곤 단 하나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사위는 자신들이 내는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 이외엔 여전히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장딴지와 허벅지 근육은 욱신거리고, 심장은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사방으로 고개를 빼돌리며 살육자의 자취를 살피던 제이슨이 무지막지하게 틀어쥐고 있던 은우의 손목을 겨우 놓아주었다. 수동 개폐 장치로 다가가기 위해서였다. 사내가 암호를 입력하고 스위치를 누르자 요란스러운 신호음과 함께 감압 카운트가 시작됐다. 소름 끼치는 고요 속에 갑자기 터져 나온 소음이라선지 유달리 크게 느껴졌다. 감압이 이루어지는 30초는 피를 말리는 것만 같은 30초였다. 언제 어디서 살육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자신들은 여전히 위험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감압이 끝나고 마침내 A도어 록이 풀렸다. 제이슨이 한발 앞서 튀어나갔고, 은우도 그 뒤를 따라 달렸다. B도어 록 앞에 선 사내는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단숨에 수동 개폐 장치를 누르자, ‘기깅’ 하는 묵직한 소음과 함께 10미터 폭의 출입 독(dock)이 땅바닥으로 내려갔다.
독이 바닥에 채 닿기도 전에 두 사람은 넬슨호 밖으로 껑충 뛰어내렸다. 10피트에 가까운 높이에서 뛰어내린 터라 중심을 잡기 위해 두어 번 바닥을 구르지 않으면 안 됐다. 흙더미 속에 섞여 있는 자잘한 자갈들이 발을 찔러대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지만, 아픔을 자각할 새도 없었다. 숨통을 막는 듯한 무더위와 눈을 찌르는 햇빛이 몇 배는 더한 자극으로 달려든 때문이었다.
수송기를 세워둔 강기슭까지는 250여 미터 남짓, 화살처럼 퍼붓는 햇빛을 아랑곳 않고 눈을 부릅뜬 채 수송기의 자취를 찾아보았지만, 사각 지대인 협곡에 위치한 탓에 그림자 한 꼭지조차 볼 수 없었다.
“뭐해?! 멈추지 말고 달려!!!”
벌써 5미터쯤을 앞서간 제이슨이 돌아보며 외쳤다.
아련히 들려오는 강물 소리며 피부를 스치는 미풍, 무엇보다도 강렬한 햇빛이 은우의 공포감을 어느 정도 완화시켰던가 보았다. 잠시 전의 넬슨호 안이 소름 끼치는 죽음의 세계였다면 현재의 행성 DITER-11은 밝은 생명력으로 넘치고 있었다. 극한의 긴장으로 인한 피로감과 물리적인 통감들이 넬슨호 안에 있을 때 이상으로 밀어닥쳤지만, 은우는 비로소 움직일 기력이 솟아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빨리 오라니까?!!!!!”
제이슨의 재촉엔 여전히 필사적인 분위기가 들어앉아 있었다.
공기를 찢을 듯한 커다란 톤으로 재차 일갈한 제이슨이 다시 몸을 돌려 질주하는 것이 보였다. 은우도 다시금 피치를 올렸다. 과도한 빛에 눈이 시렸지만 시야를 확보하는 데 좀 전만큼의 어려움은 없었다. 쉴 새 없이 흐르던 절망의 눈물이 어느새 멈춘 때문이었다.
강가까지의 진입로는 30도쯤 경사가 진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지친 탓인지 구르듯이 산등성이를 내려가는 제이슨의 몸놀림은 많이 둔해져 있었다. 사내가 발을 구를 때마다 메마른 흙더미가 부서지며 뽀얗게 먼지가 일어났다. 몇 미터 뒤처져 따라 내려가고 있는 은우의 주변도 불그스름한 먼지로 가득했다. 바닥을 딛는 발바닥 표면이 타는 듯이 뜨거웠다. 수시로 찔러드는 날카로운 조약돌 탓에 통증은 점점 더 배가되고 있었다. 벗겨진 피부에선 피가 배어나오고 있을 터였다. 물론 소소한 통증에 구애될 만큼의 여유가 은우에게 남아 있을 턱은 없었다.
은우가 막 경사면을 벗어나 강기슭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제이슨은 은우보다 20여 미터쯤 앞서 있었다. 자주 뒤를 돌아보며 은우를 채근하던 사내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는 것이 보였다. 역시 자신을 돌아보는 건가 싶었지만 사내의 눈길은 은우를 넘어 넬슨호 쪽을 향해 있었다. 오른손을 들어 올려 차양을 만드는 것이 보였다. 가늘어지는 눈시울. 투박한 사내다운 얼굴이 왼편으로 약간 기우는 것도 보였다. 사내가 불확실한 어떤 것을 확인할 때의 버릇이었다.
사내의 시선을 따라 은우가 막 반대편으로 상체를 돌리려는 찰나, 보랏빛 섬광이 번쩍 하고 빛을 발했다. 워낙 햇빛이 강렬해서 섬광의 보랏빛은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 화살처럼 은우의 시야를 스쳤을 뿐이었다.
쏟아지는 햇살의 일부거나 순간적인 착시 현상으로 착각할 만큼의 재빠른 명멸.
섬광의 정체가 라바트레이저 총의 에너지장이라는 깨달음은 아주 나중에 왔다.
제이슨의 다부진 몸이 전기라도 맞은 듯 30센티쯤 움찔 튀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보이지 않는 전류는 이어 사내의 몸을 드잡이하듯 앞뒤로 크게 뒤흔들어댔다. 익숙한 사내의 눈시울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두툼한 입술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멍하니 벌어진 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피부의 변색은 그 직후에 왔다. 버추얼 시뮬레이션 같았다. 1∼2초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 심장을 중심으로 사지의 말단까지, 피부란 피부가 마치 물감이 퍼지듯 일거에 푸르스름해졌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장면을 은우의 뇌세포가 채 받아들이기도 전에 제이슨의 육중한 몸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이미 몸이 굳어버린 탓인지, 그것은 마치 6피트 크기의 나무 기둥이 쓰러진 듯한 둔탁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비명은 없었다. 더 이상의 경련도, 피부 변색도 없었다. 유언을 말할 몇 초의 유예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보랏빛 섬광으로부터 땅바닥으로의 추락까지 총 소요 시간은 고작해야 2∼3초 남짓. 죽음은 그렇게나 재빠르고 느닷없었다.
미풍이 불어왔다. 뜨겁고 습한 남서풍이었다.
이글거리는 햇빛은 여전히 인정사정없이 땅바닥으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지구의 자전 주기로 치면 지금 시간은 밤이지만 행성 DITER-11의 자전 주기로 계산하면 밤은 아직도 멀리 있었다.
더웠다. 숨이 턱턱 막힐 지경으로 더웠다. 은우는 더위를 끔찍이도 싫어했다. 젠장. 불시착을 해도 하필이면 이런 불지옥에 해버리다니. 처음부터 행운 따윈 천리만리 거리가 있었던 거다.
작업용 안드로이드처럼 푸르게 변한 친구가 보인다. 영영 깨어나지 못할 가위 같은 악몽이다. 납덩이처럼 발이 무겁다. 몇 톤짜리 추가 매달린 것처럼 손을 뻗을 수가 없다. 입술이 움직이지 않는다. 혀가 굴러가지 않는다.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온몸의 세포가 돌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린 모양이다. 그렇다. 바닥에 누워 있는 연상의 친구만 굳어버린 게 아니다. 아마도 자신 역시 라바트레이저 총을 맞았을 것이다. 자신 역시 이미 숨이 끊어진 채 뻣뻣한 시체가 돼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옴짝달싹하지 못할 수가 없지 않느냐. 그래. 뺨을 간질이는 끈끈한 남서풍은 죽은 자가 꾸는 꿈이다. 눈이 시릴 정도의 밝은 햇빛도, 화려 찬란한 총천연색 밀림도, 푸르른 강물도, 모두모두 죽은 자가 꿈꾸는 심판의 악몽.
등 뒤의 비탈길에서 흙더미와 조약돌들이 굴러 떨어진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살육자의 움직임은 그저 끝없이 흘러 떨어지는 흙더미와 조약돌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들로만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달그락 달그락. 주룩주룩. 달그락 달그락. 주룩주룩. 달그락 달그락. 주룩주룩.
뽀얗게 일어난 먼지가 은우 주변을 뭉게뭉게 감싸기 시작했다. 대신 조약돌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마침 또다시 들이닥친 남서풍을 타고 역한 사향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강렬한 ‘사내’의 체취였다. 너무나 강렬해서 도무지 그 주인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을 그런 체취…….
뻣뻣하게 굳었던 사지가 갑자기 풀리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몸 밑의 땅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자신이 흔들리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위화감을 느끼며 은우는 경련하듯 떨리고 있는 자신의 사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얇은 실내복 바지를 적시며 사타구니 사이로 뜨뜻한 기운이 퍼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오줌을 싸버린 것이다. 뜨뜻한 물줄기가 허벅지 안쪽을 지나 종아리와 발목을 거쳐 메마른 땅바닥으로 줄줄 쏟아져 내렸다. 바짝 마른 땅바닥은 쏟아져 내리는 물기를 탐욕스럽게 머금으며 둥글고 검은 얼룩을 만들어냈다.
역한 사내 냄새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있었다. 얼룩과 그리 다르지 않을 시커먼 그림자가 점점 가까이 접근하더니 얼룩과 겹쳐지는 것이 보였다. 좀 더 가까이 다가온 그림자는 바닥의 얼룩을 추월해 앞으로 길게 드리운 은우의 그림자 위로 천천히 포개졌다. 그것은 은우를 완전히 가리고도 머리 하나는 더 위로 움푹 솟아 있었다. 은우보다 적어도 15센티는 더 커보였다.
오른쪽 어깨로 단단한 악력이 느껴지는 손가락이 감겨들었다. 뼈가 바스러지는 듯한 아픔을 채 자각할 틈도 없이 손가락은 이내 가슴 쪽으로 내려갔다. 축축하고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를 후려치듯 단숨에 접근했다고 느낀 순간, 은우의 상반신은 살육자의 품 안으로 통째로 끌려들어갔다.
상체가 짜부라지는 듯한 통증. 살육자의 두 팔이 은우의 가슴과 어깨 앞에서 교차해 단단히 끌어안은 때문이었다. 뻣뻣하게 굳은 채 벌벌 떨고 있는 몸에선 저항의 의지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설령 저항할 의지를 세웠다고 해도 살육자의 압도적인 힘을 당해낼 순 없었을 것이다.
등으로 살육자의 불끈거리는 가슴 근육과 복부 근육이 생생하게 감촉되었다. 오른쪽 목덜미와 어깨 사이에 살육자가 얼굴을 파묻는 게 느껴졌다. 땀인지 침인지 알 수 없는 끈적한 액체들이 은우의 드러난 목덜미 위로 마음껏 짓이겨지고 있었다. 짐승처럼 헐떡거리며 살육자가 숨을 토할 때마다 비릿하고 습한 단내가 살육자의 입술을 타고 뿜어 나왔다. 땀으로 흠뻑 젖은 살육자의 얼굴 피부는 델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억세게 죄어들고 있는 팔뚝도, 불끈거리는 근육들도 마치 불이 붙은 것만 같았다.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지열까지 더해져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래, 차라리 폭발해버렸으면……. 육체도, 정신도 당장 미쳐버릴 것만 같은 끔찍한 감각의 폭격 속에서 절망적인 소망이 하나 떠올라왔다.
살육자가 키스하고 있었다. 뒤에서 자신을 포옹한 채, 목덜미며 어깨며 귓불이며 뺨이며 관자놀이 할 것 없이, 살육자의 미친 듯한 입술과 혀가 빨고 지나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짐승처럼 헐떡이며 오락가락하는 격렬한 흡입에 피부가 찢겨나가는 것만 같았다. 살육자의 키스가 얼굴을 헤맬 때마다 코를 찌를 듯 파고드는 강렬한 사내의 체취는 구역질과 더불어 어지럼증을 불러일으켰다.
땅바닥이 빙글빙글 돌았다. 저절로 눈자위가 뒤집히며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감은 눈꺼풀 뒤로 번쩍거리는 별 무더기가 나타났다. 정신만은 잃지 말자고 멍하니 되뇌었지만 가능할 것 같진 않았다. 안개가 낀 것처럼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다.
―인환아!!!!!
문득 뇌리를 파고든 애통한 부름에 은우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인환아……!!!!! 인환아……!!!!!! 인환아!!!!!!!!
천둥처럼 감각을 뒤흔드는 부름이었지만 실제 귀를 통해 들렸는지는 의심이 들었다. 아니, 확실히 고막을 두드리며 물리적으로 들려온 부름은 아니었다. 그것은 뇌 속의 신경줄을 직접 건드리는…… 더 깊고, 더 강렬하고, 더 애절한 그런 것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이 심장을 뚫고 척추를 지나 정수리 끝까지 뻗쳤다. 잊으면 안 되는 무언가 중요한 것, 몹시도 소중하고 소중한 것을 잊고 있었다는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직후 소스라쳐선 잃어버린 꿈속의 기억을 더듬을 때의 그런 기분. 그런 데자뷔.
―인환아!!!!! 인환아!!!!! 인환아!!!!!!!
다시 한 번 머릿속을 직접 강타하는 비통한 부름이 울렸다.
“……누구……?”
반사적으로 대꾸가 흘러나왔다. 목소리는 너무나 낮아서, 직접 입 밖으로 뱉어진 것이 아니라 그저 머릿속으로 되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러지……? 어디야……? 어디 있어……?”
되풀이해 내뱉은 목소리는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기를 쓰고 목소리를 쥐어짜 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신을 부른 상대가 못 알아들었을까 겁이 났다. 아니, 못 알아들었을 것이다. 좀 더 목소리를 내야 한다. 정신을 차려야만 해. 초조한 나머지 꼭 감겨 있던 눈을 부릅뜨고 의지를 세워보지만, 구역질과 어지럼증과 쇼크로 빙글빙글 도는 넋을 추스르기엔 역부족이었다. 땅바닥으로 사정없이 곤두박질치는 듯한 자신이 있었다. 아니, 자신의 정신이 있었다.
―왜 도망치는 거야?!!!!! 어째서 혼자만 멀리 가버리는 거냐?!!!!! 인환아!!!! 인환아!!!! 인환아!!!!!!
점점 새까매지는 의식의 틈을 비집고 고통과 슬픔에 찬 부름이 다시금 회초리처럼 내리쳐지고 있었다. 부름은 너무나 비통하고 절박해서 난폭하고 음산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날카로운 빛살을 내리꽂고 스쳐가는 전격처럼, 그것은 은우의 잠든 넋을 순식간에 할퀴며 지나가고 있었다. 어디서 부르는지, 누가 부르는지, 혹은 누굴 부르는 건지(자신으로 느껴졌지만 자신은 인환이란 사람은 아니었다) 너무나 찰나의 각인이라 이성의 분별력은 감히 따라가지도 못했다.
―가지 마!!!!! 가지 마, 장인환!!!!! 날 혼자 두지 마!!!!! 혼자 두지 마, 인환아!!!!!!! 인환아!!!!!!!!
안타까움과 슬픔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걷잡을 수 없는 설움이 복받쳤다. 누구지?!!! 왜 그래?!!! 어디야?!!! 어디서 부르는 거야?!!! 당신 누구야?!!!
불가사의한 부름을 향한 의문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늘어졌다. 눈앞이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는 것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문득,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려는 은우의 넋을 잡아 끌어당기는 어마어마한 악력이 느껴졌다. 탄탄하고 강인한 근육으로 뭉친 살육자의 두 팔이었다.
두 팔은, 무시무시한 힘을 가해오며 은우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포옹도 키스도, 안타까운 슬픔과 비통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애절한 단장(斷腸)의 부름이 전하는 것과 똑같은 슬픔과 비통함이었다. ……믿을 수 없어……. 새까만 어둠에 침몰하기 직전, 불현듯 해답이 찾아들었다. ……믿을 수 없어……. ……믿을 수 없어……. ……믿을 수 없어……. 되풀이, 되풀이해 부정을 주장해보지만, 극점까지 몰린 본능이 확고하게 ‘yes’를 말하고 있었다.
‘텔레파시’ 같은 초감각적 지각 능력은 영적 수련이 깊은 사제나 종교 지도자들이나 갖고 있지만, 일반 시민도 일시적으로는 그런 능력을 습득할 수 있다고 했다. 바로 ‘뇌활성 증폭기’를 사용하는 것인데, 물론 부작용이 심각하기 때문에 사용은 엄격히 통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의 주기적인 사용이 유일하게 허락된 인간들이 있었으니, 바로 저능아 집단인 특수 방위군이었다.
……설마…….
그랬다. ……부름은…… 부름…… 은…….
부.름.은. 살.육.자.의. 머.릿.속.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믿을 수 없어…….
절망에 차서 다시 한 번 부정을 말해보았다. ……아니, 실은 믿고 싶지 않은 거겠지…….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깨달음이 무서웠다. ……어째서 이렇게 눈물이 멈추지 않는 걸까……. 코앞까지 들이닥친 새까만 심연이 차라리 구원 같았다.
축축한 군침이 입가를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감각을 마지막으로, 은우는 마침내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