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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297년 4월. 에녹(Enoch Salisbury Eden) (115/129)

4. 2297년 4월. 에녹(Enoch Salisbury Eden)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지식과 사물에 대한 인식들이 서서히 잊혀가는 감각은 언제나 에녹을 슬프게 했다. 

그것은 마치 밤에 불빛이 하나둘씩 꺼져가는 특수 방위군 주둔지의 야경을 생각나게 했다. 수많은 방 창문을 밝히던 선명한 불빛들이 하나둘 꺼져가듯, 명확했던 기억과 지식들은 하나하나 천천히, 그리고 조용하게 사라져갔다.

뇌 속에도 주둔지의 야경처럼 셀 수 없이 많은 방들이 있다고 한다면, 에녹은 일반 시민들에 비해 불이 켜진 방을 아주 조금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셈이었다. 아주 약간의 방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시커멓게 꺼져 있던 에녹의 방들은 ‘뇌활성 증폭기’를 작동시키는 딱 여덟 시간만큼만 하나도 남김없이 활짝 불이 켜진다. 그리고 그 굉장한 기계가 꺼지는 것과 동시에, 영롱하고 오색찬란하게 반짝이던 수많은 불빛들도 다시금 원래대로 하나둘 잠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그러면 에녹도 본래의 모호하고, 불가사의하고, 막막한…… 에녹만이 저 멀리 홀로 떨어진 슬프고도 고독한 세계로 되돌아가버리고 만다.

……인환아…….

아마도 맨 마지막의 불 켜진 방이었을 어떤 소중한 것이, 안개처럼 홀연 사라져버린 것을 어렴풋이 자각하며, 에녹은 그 사람의 예쁜 얼굴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팔목에 부착된 작전 시계를 통해 시간과 기억을 재구성하며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작전 시계엔 혼자만의 작전을 끝낸 지 다섯 시간 46분이 지났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뇌활성 증폭기’의 작동을 정지시킨 지는 29분이 지났다고 한다. 29분. 29분이면 본래의 저능아 에녹으로 완전히 돌아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물론 뇌 속의 수많은 불빛들이 사라진 감각은 여전히 아련히 남아서 이렇게 가슴을 아프게 전율시키고는 있지만 말이다.

막 넬슨호에서 도망치려던 그 사람을 잡아 필사적으로 끌어안았던 기억이 있다. 그가 잠이 든 것은 그때였을 것이다. 잠든 그를 안아 들고 넬슨호로 되돌아온 것도 흐릿하게 기억난다. 물론 그 이후의 기억은 더 이상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아마도 자신은 그를 숙소에 데려다 눕히고 작전의 마무리를 했을 것이다.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지 못했다면 지금 이렇게 자신이 그를 바라볼 수는 없을 테니까.

자신은 단 하나의 일반 시민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단 하나라도 남겨뒀다면 그 단 하나의 시민이 다시 자신을 감옥에 가뒀을 것이다. 살인을 한 특수 방위군 에녹은 일반 시민인 이은우의 곁에 가까이 가면 안 된다고, 몹시 야단을 칠 것이다. 심각한 규정 위반을 해서 이제 특수 방위군으로도 쓸모가 없다고 야단을 칠 것이다. 야단을 치고, 괴로운 순화 교육을 시키고, 그러고는 마침내 감옥에 가둘 것이다. 그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도록, 이렇게 바라볼 수 없도록, 자신을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몇 겹의 시큐리티가 쳐진 깊숙한 감옥에 가둘 것이다. 하지만 하나도 남지 않았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소거시켜버렸다. 32명이다. 총 32명의 일반 시민을 살해했다. 규정 위반. 규정 위반. 심각한 규정 위반. 심각한 규정 위반을 하면 반드시 부대로 복귀해야 한다. 규정이다. 부대로 복귀해 엄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특수 상황이다. 행성 DITER-11에 넬슨호가 불시착해서 조난됐기 때문이다. 자신이 타고 있던 정찰기는 격추됐고, 보호하려던 넬슨호마저 일부 파손돼서 부대로 복귀할 수가 없게 되었다. 부대를 대신할 가짜 부대를 생각해둬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은 엄한 처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심각한 규정 위반을 했기 때문이다. 진짜 부대로는 갈 수 없다. 그러니까 가짜 부대로 가야 한다. 하지만 가짜 부대가 어디 있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빨리 생각해둬야 한다. 빨리 부대로 가서 보고하고 엄한 처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원래는 가짜 부대로 복귀하면 안 되지만, 지금은 특수 상황이라서 할 수 없다. 특수 상황엔 규정을 지키기 힘들다고 레드필드 중위님이 말했었다. 그래서 진짜 부대로 복귀하지 않아도 된다. 행성 DITER-11에 오래오래 조난되면, 특수 상황이 오래오래 이어지면, 진짜 부대로 복귀하지 않고 오래오래 그 사람을 바라봐도 된다. 오래오래, 그 사람만 마음껏 바라봐도 된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오래오래, 그 사람만 마음껏!’이라는 기쁜 생각이 새삼 물밀 듯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밀려든 기쁜 생각과 함께 앙금처럼 남아 있던 슬픈 기분이 사라지며 몹시 즐거워졌다. 마음껏 바라봐도, 마음껏 함께 있어도 이제 자신을 야단칠 시민들은 없다. 행성 DITER-11에 조난된 사람은 이제 그 사람과 자신 단둘뿐이다. 그 사람과 자신. 나, 에녹 쉴스버리 이든 상병이 너무너무 좋아하는 그 사람과 자신 단둘뿐.

너무너무 좋아하는 그가 지금 숙소인 넬슨호의 자그맣고 아담한 방 침대에 누워 조용히 잠들어 있다. 자신인 에녹 쉴스버리 이든 상병은 그 옆에 앉아 열심히 그를 바라보고 있다.

너무 오래 잠을 자는 것이 아닌가, 그의 건강 상태가 염려되어 혈압과 맥박 수와 혈당치 같은 기본 검사를 해봤지만 혈당치가 좀 낮은 것 이외엔 별 이상은 없었다. 맨발로 도망치느라 상처가 난 예쁜 발바닥엔 약을 바르고 봉합을 해주었다. 의사처럼 정확히 치료는 못 하지만, 가벼운 외상 정도는 괜찮게 복구시키는 기술을 익혀두고 있다. 특수 방위군은 자주 외상을 입기 때문이다.

그의 꼭 감긴 눈이 안타깝다. 빨리 깨어나서 자신을 바라보는 예쁜 갈색 눈을 보고 싶다. 감옥에 갇혔을 때 많이많이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미안하다고도 말해야 한다. 그도 일반 시민이니까 살인을 한 자신을 야단칠 것이다. 몹시, 아주 많이 야단을 칠 것이다. 그가 좋아하는 다른 시민들도 소거를 시켰기에 많이 슬퍼할지도 모른다. 화를 내고, 자신을 가두려고 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는 달걀처럼 힘이 약하기 때문에 힘센 자신을 가둘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화를 낸다면 자신은 감옥에 갇히는 것보다도 더 슬플 것이다. 그가 조금만 화를 냈으면 좋겠다. 아주 조금만.

그가 화를 아주 조금만 다 내고, 야단도 조금만 다 치고 나면, 그땐 그를 만지고 싶다고 말해볼 생각이다.

필립 랜킨이 했던 것처럼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꼭 붙이고 싶다고 말해야지. 두 팔로 꼭 껴안고 싶다고도 말해야지.

아아, 상상을 했더니 지금 당장 만지고 싶어서 허리가 들썩거린다. 입술을 붙이고 싶다. 비비고 싶다. 껴안고 싶다. 꽈악. 꽉. 아주 꽈악 껴안고 여기저기 비비고 싶다. 등으로 찌릿찌릿 전기가 흐르는 것만 같다. 이상하다. 얼굴이 왜 이렇게 뜨거워지는 거지. 심장이 막, 막 쿵쾅거리며 뛴다.

계속 예쁜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손을 뻗어 만지고 싶은 욕구를 참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할 수 없이 고개를 침대 아래쪽으로 푹 숙이고 잠깐 시선을 피했다. 자신은 그가 한 달 전쯤에 해준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나 같은 일반 시민들은 신체에 갑작스러운 완력이 가해지면 많이 당황한다네…….

그는 만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실은 특수 방위군과 대화하는 것은 익숙하지가 않거든…… 그 뭐냐…… 아무래도 자네들에게 지나치게 위압감을 느끼는 모양이야, 내가…….

특수 방위군을 많이 무서워하는 것도 같다. 그는 달걀이고, 자신은 힘 센 특수 방위군이니 그가 무서워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런 그를 제멋대로 만질 수는 없다. 먼저 만지겠다고 얘기하고 만져야 한다. 만지라고 허락해주면 좋겠지만, 혹시 허락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열심히 부탁해보고 나서 만질 거다. 그러려면 그가 먼저 깨어나야 한다. 그가 잘 때 만지다가 정말 달걀처럼 깨져버리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그를 만지는 상상과 그에게서 허락을 받는 상상만 하다 보니, 가물가물 흐릿한 환영이 떠오른다. 뒤에서 그의 가슴을 꼭 끌어안았던 것만 같은. 아아, 아니. 환영이 아니다. 몇 시간 전에 도망치던 그를 그렇게 뒤에서 끌어당겼던 것 같다. ‘뇌활성 증폭기’를 작동시키고 있을 때라 기억은 마냥 흐릿하기만 하지만, 확실히 안았던 것 같다. 꼭. 꼭. 양팔로 힘을 주어 껴안았던 것 같은…… 안타까워서…… 너무너무 안타깝고 슬퍼서…… 안고 또 안았던 것만 같은…… 안고…… 입술을 누르고…… 누르고…… 빨아서…… 깊이깊이 빨아들여서…….

심장이 또다시 쿵쾅쿵쾅 떠들썩하게 뛰기 시작했다. 뜨거워진 얼굴에선 땀까지 솟아나오고 있었다. 그를 보지 않아도 만지고 싶은 욕구는 줄어들지 않을 모양이었다. 결국 다시 그의 얼굴로 시선을 가져갔다가 다시 침대 발치로, 이어 그의 가슴과 허벅지로, 머리카락으로, 귓불로, 정강이로, 발바닥으로, 정신없이 헤매 다녔다. 다 욕심이 난다. 그의 몸은 어디를 바라봐도 즐겁기 때문에 몽땅 다 눈에다 담아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눈이 아주 많이 크면 한꺼번에 다 담을 수 있을까? 아차, 이러다간 정말로 달걀을 깨트리겠다! 더럭 겁이 난 에녹은 프로펠러처럼 고개를 휘휘 돌리는 것으로 곤란한 생각들을 간신히 털어냈다.

곤란한 생각들이 달아난 공동(空洞)에 다행히 현실적인 자각이 파고들었다. 배 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어 하고 생각해보니 작전을 수행하느라 오늘 하루 종일 굶고 있었다는 게 기억났다. ‘뇌활성 증폭기’를 작동시킨 여덟 시간과, 그전에 ‘뇌활성 증폭기’를 빼앗기 위해 감옥에서 동료인 페터슨을 소거시키는 작전을 수행하던 시간 34분과, 페터슨을 소거시키는 작전을 열심히 계획했던 네 시간 23분을 모두 더하면 총 열네 시간 정도를 굶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아, 생각해보니 너무 오래 굶었다. 이렇게 오래 굶으면 신진 대사가 나빠진다. 빨리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해야 해.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져서 에녹은 그 사람의 침대 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막상 그의 숙소를 나가려고 하니 뒷덜미에 줄이라도 매달린 것처럼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예쁜 그 사람을 계속 바라보고도 싶고, 혹시 자신이 없을 때 그가 깨어나 도망칠까 봐도 걱정이 되었다. 계속 보고픈 마음은 앞으로도 계속 볼 수 있으니까 잠깐 아쉬워도 참자고 고쳐먹었지만, 그가 도망칠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걱정이 됐다. 식당까지 가는 데 3분, 왕복이 6분, 음식을 꺼내 먹는 데는 적어도 15분이 필요하다. 모두 21분. 생각해보니 21분 정도면 만약 도망친대도 그를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시간이다. 아, 그렇지. 그의 숙소 출입문에 자신만 아는 패스워드를 입력해두어야겠다. 그러면 그를 혼자 두고 나갈 때마다 항상 밖에서 문을 잠그고 다녀올 수 있게 된다.

에녹은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얼굴을 한 번 더 돌아보고 나서야 그의 숙소를 살그머니 빠져나왔다. 출입문을 봉쇄하고 패스워드도 입력했다.

문을 잠그니 안심은 되지만, 그래도 최대한 그와 떨어져 있는 시간을 줄이자는 판단이 들었다. 그도 오랫동안 식사를 못 했을 테니 깨어나면 배가 고플 것이다. 그와 자신이 먹을 음식을 가지고 빨리 돌아와야지. 식당 이외의 장소에 음식을 가지고 가서 먹는 것은 위생에 문제가 있는 행동이지만 이것도 특수 상황이니 괜찮다. 특수 상황에선 규정을 어겨도 많이 문제가 되진 않는다. 에녹은 특수 상황이 너무 좋다는 생각을 했다.

오래오래 조난돼서 특수 상황이 오래오래 계속됐으면 좋겠다. 아무도 모르게, 행성 DITER-11에서 오래오래 그 사람과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 아아, 그러면 더 이상 아무런 기쁜 소원이 없을 것이다.

즐거운 상상으로 가슴을 설레며 에녹은 식당 쪽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좋아하는 고급 음악이 통로 천장의 통신기를 타고 황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작전을 완료한 후, 넬슨호의 메인 컴퓨터를 다시 작동시키고 한 맨 처음의 일은, 넬슨호의 사방에서 음악을 들으며 놀 수 있게 만든 일이다. 아아, 너무너무 즐겁고 기쁘다.

성공한 작전을 증명하듯, 넬슨호 어디에서도 일반 시민들이 보이지 않는다. 시체도 하나 눈에 안 띄는 걸 보면 자신은 뒤처리도 깨끗이 마친 모양이다. 흡족하다. 하긴, 뇌의 방들에 전부 불이 켜졌을 때의 자신은 일반 시민들보다도 몇 배나 기능이 좋아진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어려운 작전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다고 한다.

여덟 시간이 아니라 열 시간, 아니, 100시간씩 ‘뇌활성 증폭기’를 사용하면 참 좋을 텐데. 그럼 자신도 모자란 저능아가 아니라 완벽한 일반 시민으로 오래오래 지낼 수 있을 텐데.

흡족한 기분의 끝에 약간 아쉬운 기분도 보태졌지만, 그 문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뇌활성 증폭기’를 일주일에 여덟 시간 이상씩 사용하면 뇌가 깨져버린다고 교관님들이 말했었다. 달걀처럼 깨져버린다고 한다. 그건 너무너무 무섭다.

“식사 모드!”

마침내 도착한 식당 출입구로 들어서며 에녹은 씩씩하게 외쳤다. 얼마 안 있어 다시 식재료 채취를 하러 외부로 나가야 할 것 같지만, 당분간 두 사람이 먹을 식량은 남아 있을 것이다. 시민들처럼 많이 맛있게 요리를 하는 건 아니지만, 자신도 영양 밸런스가 나쁘지 않게는 만들 수가 있다. 흡족했다. 모두 모두 흡족했다.

음식을 가지고 어서 빨리 그 사람에게로 가고 싶어 에녹은 서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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