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2297년 5월. 이은우(李誾踽) (116/129)

5. 2297년 5월. 이은우(李誾踽)

“안 먹어!!!!! 안 먹는다고 했잖아!!!!!!!” 

와장창!!!!!

테이블에 놓은 음식 트레이를 사정없이 밀어 치우자 수프와 생선구이, 과일 등을 담은 접시들이 공처럼 바닥으로 튀며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접시가 깨지진 않았지만 내용물들은 사방으로 튀어 순식간에 숙소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남자는 회초리를 맞은 것처럼 움찔 몸을 떨더니, 뒤로 몇 걸음 물러나 바닥에 뒹구는 음식 접시들과 은우의 얼굴을 번갈아 멍하니 굽어보고 있었다. 이젠 너무나 익숙해져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표정.

은우가 초조감과 증오감을 견디지 못하고 야만적인 폭력성을 드러낼 때마다, 남자는 저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무표정으로 은우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 표정 없는 아름다운 얼굴에서 쓸쓸함과 슬픔을 읽어낼 수 있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신의 사나운 폭행들에 온순하고 얌전한 무표정밖에 만들어낼 수 없지만, 실은 몹시 겁에 질려 있다는 것도.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갈팡질팡 상처를 받고 있다는 사실도. 저능아라도, 광란해버린 살육자라도, 마음에 상처를 입는 방식은 일반인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은우는 요 며칠간 철저하게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랬다. 그걸 깨닫고 있기에 더 멈출 수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지독한 증오감과 혐오감과 복수심을 어쩌지 못해, 자신은 할 수 있는 한 최악의 방법으로 남자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고통을 되갚아주고 있었다.

“싫댔지?!!! 너랑 식사하기 싫어!!! 구역질 나!!!!! 함께 있는 것도 싫어!!!!! 끔찍해!!!!! 끔찍하게 싫다구!!!!!!! 왜 날 내버려두지 않는 거야?!!!!! 왜 나도 죽이지 않았니?!!!!! 응?!!!!!! 이 괴물아!!!!!! 도대체 왜 내 곁에 달라붙어서 안 떨어지는 거냐구?!!!!!!!”

피가 뛴다. 무섭도록 맹렬한 속도로 피가 뛴다. 한번 속도를 내기 시작한 로켓에 올라타면 막다른 곳에 부딪칠 때까지 멈추지 말아야 한다. 멈출 수가 없다. 시민 윤리? 영혼 헌장? 하! 다 엿이나 먹으라고 그래! 아무렴. 이미 자신도 망가졌다. 광란해버렸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남자가 전염시킨 야만의 광증에 완전히 중독돼버린 것이다.

“나를 놔!!!!! 놔달라구!!!!! 죽여!!!!! 왜 난 안 죽이는 건데?!!!!! 네가 죽여버린 내 친구들처럼 빨리 없애버리란 말야!!!!!!!”

사납게 노려보며 목청이 터져라 거푸 고함을 지르자 남자가 겨우 시선을 바닥에 내린다. 여전히 표정은 없어도 낯빛은 시체처럼 창백하다. 그 넓고 다부진 어깨가 안쪽으로 깊이 움츠러든 채 둥글게 말려 있다. 아아, 잘하고 있다. 피가 끓어오른다. 더 힘껏, 더 악랄하게 후려쳐서 회복 불능으로 만들어야지!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어서 죽여!!!!!!!”

고개를 내린 채 힐끔힐끔 눈알만 굴리며 이쪽을 살핀다. 울 것처럼 겁에 질려 있다. 하! 순식간에 32명을 살해한 극악한 살육자 주제에 겁을 집어 먹다니! 꼴좋다!!!

“빨리 죽이란 말 못 알아들어?!!!!!!! 살고 싶지 않아!!!!! 너랑은 1분 1초도 함께 살고 싶지 않아!!!!!!! 이 방에서 평생 갇혀 살 순 없어?!!!!! 알아들어?!!!!!!! 어서 죽엿!!!!!!!”

챙! 챙강!!! 챙! 와장창……!!! 광란해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이리저리 버둥거리며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진다. 남자가 웬만한 집기는 다 치워버렸기 때문에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크게 상처를 입힐 만한 물건은 잡히지 않는다. 고작해야 음식 접시와 화분과 트레이들뿐이다. 남자는 언제나처럼 피하지 않는다. 언제나처럼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이 선사하는 폭력을 묵묵히 견디고 있을 뿐이다. 물론, 자신 역시 언제나처럼 기를 쓰고 던져보지만 좀처럼 저 압도적인 몸뚱이를 쓰러트릴 수가 없다.

거의 마지막으로 던진 수프 접시가 정확히 남자의 뺨에 명중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꽤 아팠는지 상처에 손바닥을 가져다대는 것이 보였다. 그래. 너 같은 괴물도 고통은 느끼겠지. 그래. 더 아프게 해주마. 더 상처 입게 해주지. 그 소름 끼치는 살육자의 심장에서 피를 콸콸 뽑아내주마.

끊어질 것 같은 가쁜 숨을 헐떡이며 남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일순 휘둥그레진 눈으로 긴장하는 얼굴 정면에 그대로 이마를 찍어 눌렀다.

빠각!!!

눈에서 불통이 튀는 것만 같았다. 찌르르한 아픔이 정수리를 진동시키고 이내 얼굴 전체로 번져갔다. 개의치 않고 밑에 쓰러진 거구의 몸에 거푸 주먹을 날렸다. 며칠 동안 식사를 못 해 쇠잔해진 몸에서 제대로 힘이 솟구칠 리 없었지만, 이젠 익숙해져버린 남자의 강렬한 체취가 불길 같은 증오심에 기름을 부어주었다. 땀내가 가득 밴 코를 찌르는 사향 냄새에 위가 거꾸로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남자의 머리고 가슴이고 배고, 닥치는 대로 갈기고 걷어찼다.

워낙 악에 받친 몸부림이라선지 남자는 꽤나 당황하고 있었다. 코피가 터져 금세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감싸 쥐었다가는, 무차별로 떨어지는 은우의 주먹을 양손으로 허둥지둥 막아냈다. 단 한 번의 주먹질이면 자신의 공격을 일거에 멈출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남자는 그저 방어에만 급급하고 있었다. 역시 지난 며칠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때리고 차고 물건을 집어 던져도, 남자는 반격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심각한 부상을 입을 정도의 강한 가격이 아니면 손으로 막아내는 일도 없었다. 몸을 둥글게 웅크린 채, 그저 조용하고 끈기 있게 아픔을 참아내곤 했다. 얼굴 이곳저곳이 멍들고, 찢어진 생채기에 핏방울이 들어도 결코 저항하지 않았다. 사자 갈기 같은 숱 많은 붉은 머리카락을 한 주먹씩 쥐어뜯겨도, 그저 눈썹을 보일 듯 말 듯 찌푸린 채 눈을 감을 뿐이었다. 숨죽인 한숨을 색색 토해낼 뿐이었다. 빨갛게 핏기가 오른 얼굴에 아무리 따귀를 갈겨도, 남자는 그토록 강인해 보이는 팔뚝을 휘젓지도, 손으로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저 웅크린 채, 공처럼 둥글게 웅크린 채 꼼짝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았다. 도망치지 않았다.

결국 먼저 지쳐 떨어져 나가는 것은 남자가 아닌 은우 자신이었다. 깨어난 영적 선각자들이 설파하듯, 폭행을 당하는 쪽보다 가하는 쪽이 더 마모되는 것은 진리였다. 정신없이 몸부림을 치다 눈을 떠보면, 자신은 어느새 침대 위에 기진해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우두커니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상처투성이 남자가 있었다. 단단하고 압도적인, 고요하고 고요한 야수였다. 살육자였다. ……자신이 더 마모된다. 더 다친다……. 알면서도 좀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꺼지지 않는 격렬한 불덩어리가 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멈출 수 없다고, 쉽사리 멈추지 말라고 부추기는 시뻘건 불덩어리가.

어느덧 움켜쥔 손가락 관절이 아파왔다. 남자의 얼굴과 몸에 새로운 멍을 추가했겠지만 자신의 손도 그 이상으로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실제 유기체가 아닌 오른손조차도 통각에 있어선 온전한 왼손과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하긴, 실제 유기체보다 더 유기체다운 것이 안드로이드용 신체 부품이 아니던가. 더 업그레이드되었기 때문에 은우는 도리어 피아노를 잃었다.

한계까지 힘을 써버려 더 이상 팔을 들어 올릴 기운이 없었다. 팔을 들기는커녕 당장 어딘가 주저앉지 않으면 또다시 혼절할 것만 같았다.

엉금엉금 기듯이 남자의 웅크린 몸뚱이에서 떨어져 나왔다.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머릿속의 혈관이 터질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과호흡(過呼吸) 직전인 것 같았다. ……숨을…… 숨을 참아야만 한다…….

침대까지 기어갈 기력도 없어, 탁자 옆 바닥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개구리처럼 사지를 쭉 뻗고 엎드린 채 한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다행히 과호흡은 막을 수 있었지만 몸 컨디션이 바닥이라는 것은 신물이 날 정도로 자각이 되었다. 한계였다. 자살이라도 할 요량이 아니라면 이제 멈춰야만 한다. 안에서 타오르는 불덩이가 어떡해도 꺼지지 않는다면, 뜨겁다, 뜨겁다며 호들갑을 떠는 대신 그저 조용히 불길을 견디는 도리밖에는.

폭력은…… 아니, 증오는 막강한 정념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맙소사, 정념의 에너지라니. 애초에 그런 것들과는 조금도 인연이 없던 자신이었다. 증오는커녕, 사랑의 정념조차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독신 성향의 우울한 인간이 아니었던가. 사랑도 피곤하고 귀찮아 그만뒀는데, 언감생심 증오라니. 복수라니. 가당치가 않았다. 살육자가 전염시킨 광기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을 근본까지 뒤바꿔놓을 수는 없을 터였다. 아무튼 애초부터 싹수가 부족한 자신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렇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피로했다. 이 이상 더 남자를 증오할 순 없었다.

문득 등을 살며시 건드리는 손가락의 감촉이 느껴졌다. 야수 같은 살육자답게, 공기가 흔들리는 기척도 없이 몰래 다가든 남자의 손길이었다. 손가락 마디 두 개 정도가 살짝 닿을까 말까 한 깃털 같은 접촉. 지난 며칠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잔뜩 겁에 질려서는 은우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숨을 쉬는지 안 쉬는지, 혹은 심장이 뛰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아아, 그래. 뭐라 해도 이 저능아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 끔찍한 살육전도 자신을 만나보기 위해서 벌였다고 하지 않는가. 단지 자신과 함께 있기 위해서. 하.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요지는 자네라고 해서 방심하지 말란 얘기야…….

살해당한 연상의 친구가 자신만만하게 예언하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선 진짜 엄청난 괴물을 끌어당길 수도 있으니까…… 자네가 동의하지 않아도 밀어붙이는 치들이 나올 수가 있다구…….

당신 말이 맞았네요, 제이슨. 정말 그렇게 기막히고 황당한 일이 일어나버렸네요.

방바닥에 딱 붙어 있던 뺨이 따뜻한 액체로 축축해져왔다. 별로 울고 싶은 기분도 아닌데 눈물이 쏟아지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카펫을 치워버린 금속 바닥은 꽤 서늘해서 불길처럼 달아오른 몸을 식히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자신이 내친 음식의 잔해들로 여기저기 끈끈한 덩어리들 천지였지만 아무러면 어떤가. 잔혹한 살육자이자 부지런한 하인용 안드로이드일 남자가 곧 말끔히 청소를 해줄 텐데.

열기가 채 식지 않은 뺨에 짓이겨지는 액체는 몹시 간지러웠다. 손을 뻗어 시원스레 문질러버리고 싶지만 그럴 기운조차 없었다. 그건 이리저리 맴을 돌며 자신의 옷깃을 살짝살짝 만지작거리는 남자의 손길도 마찬가지였다. 시원스레 쳐내고 싶지만 그럴 기운이 없었다. 식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뭐라도 먹지 않으면 죽는다.

바닥에 접착제를 바른 것처럼 들러붙은 채, 은우는 조금이라도 기력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기운을 좀 차리면 일어나서 밥을 먹을 생각이다. 남자더러 다시 음식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해볼 기특한 기분도 들었다. 마음을 고쳐먹어선지, 남자를 생각 속에 끌어들이고 있음에도 이상스러울 정도로 평온했다.

어깨까지 깊게 파인 실내용 셔츠 위를 살금살금 더듬던 남자의 손길이 젖은 뺨으로 다가들었다.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은 몹시 주저하면서도 깃털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은우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남자와는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틀고 있었는데도 어느새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역시 기력이 없어 그냥 잠자코 있자니 남자의 손길은 점점 더 대담해졌다. 뺨을 어루만지고, 눈썹을 더듬고, 이어 콧날을 그렸다. 마침내는 입술로 떨어져 살며시 기어 다니며 체온을 전했다. 남자는 은우의 등 뒤에서 한 팔로 체중을 지지하며 덮치듯 엎드린, 매우 불안정한 자세였다. 그럼에도 남자는 굳건히 균형을 유지한 채 은우에게 숨 막히는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이 달라붙을 듯 겹쳐진 건 아니었지만, 남자의 체온이며 체취며 숨결들을 모두 생생하게 느끼기엔 한점 부족함이 없는 거리였다.

특별히 성적인 느낌을 주는 접촉은 아니었다. 과연 성을 모르는 특수 방위군답게 남자의 터치에선 순수하고 애절한 그리움과 어린애다운 호기심 이외엔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은우는 자신이 마치 여자처럼 다루어지는 듯한 위화감에 속이 메스꺼워졌다.

여자를 애무한 적은 있어도 여자처럼 애무당한 적은 없다. 아니, 여자고 남자고를 떠나, 자신은 타인과의 접촉 자체에 꽤나 위화감을 가지고 있는 독신 성향의 사내다. 마지막으로 여자와 섹스를 했던 것이 언제였는지 이젠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그런데 막상 서른을 코앞에 둔 이제 와서 남자에게 강간을 당할 처지에 놓이다니.

물론 아직까지 남자에게서 그런 폭력적인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지난 며칠 동안 남자의 접촉은 지금처럼 매우 조심스럽고 주저하는 몸짓으로 만지다 떨어져나가는 것이 고작이었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남자가 플라토닉한 현재를 고수할지는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남자의 신경망에 성욕 억제제를 주입해줄 장교는 더 이상 없다. 성인 남성이라면 자연스러운 욕구를 남자가 자각하게 되는 건 이제 그야말로 시간문제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변화가 시작됐을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랑을 할 리가 없다는 특수 방위군이 당장 사랑을 하고 있다. 그 사랑을 위해서, 아직까지도 악몽을 꾸고 있다고밖에 생각 안 되는 끔찍한 살인 행각까지 벌였다. 남자의 어디를 살펴보나 절대로 일어날 리가 없는 예외적인 사건투성이였다. 거기에 강간이 하나 더 추가된다고 해서 무에 놀라운 일일 것인가. 오히려 그게 더 자연스러운 수순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도망쳐야 해…….

홀연 희망이 노크를 했다.

……어찌 됐든 도망칠 기회는 잡을 수 있어…….

증오 대신 체념이, 자포자기의 복수심 대신 은밀한 계획이 들어서며 심장을 수런거리게 만들었다.

……그래…… 살살 비위를 맞춰주다 보면 반드시 틈이 생길 거야…… 눈을 피할 20분만 확보할 수 있으면…… 그래…… 그다음에 수송기를 잡아타고 뜨면 그만이라구…… 어디든 멀리 날아가서 꼭꼭 숨어버리는 거야. 그야 넬슨호 밖에서 얼마나 잘 버틸 수 있을진 모르지만, DITER-11의 생존 조건이 아주 바닥인 것도 아니잖아……? 아냐, 설령 바닥이라 해도 이 야수와는 함께 지낼 수 없어…… 이자는 내 인생에 그토록 흔했던 불운 따위가 아냐…… 함께했다간 먹힌다…… 먹힐 거야, 언젠가는…… 온 넋이…… 영혼이…… 중독되고…… 중독되다 못해…… 미치고 말 거야…… 사제들 말처럼 1억 년 진화의 고단함을 고스란히 무로 돌리게 될지도 모르지…… 그래…… 그래, 그럴 순 없어…… 설령 아무도 모르게 밀림 속에서 죽어간다고 해도 문명인의 정신만은 잃을 수 없단 말이다…….

남자의 손가락이 턱 끝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며칠째 자란 수염이 텁수룩하게 뒤덮여 있는, 도무지 여자다운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그것을 남자는 파르르 손가락까지 떨며 애무를 거듭하고 있었다. 숨죽인 한숨이며, 떨리는 손끝이며, 남자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온통 기쁨으로 전율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배가 고파…….”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며 은우는 신음하듯 말을 토했다. 남자의 손가락이 일순 동작을 정지했다. 숨을 삼키는지, 꿀꺽 하고 침 넘어가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음식 다시 가져다주겠나?”

재차 몸서리가 쳐지는 게 남자에 대한 혐오감 때문인지, 아니면 미래에의 계획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은우는 남자가 자신의 속내를 알아채지 않기만을 빌었다. 물론 ‘뇌활성 증폭기’를 머리에 쓰고 있지 않은 이상 남자가 은우의 마음을 읽을 까닭은 없다. 뭐라 해도 아직까진 온순하고 순종적인 저능아에 불과했다.

한동안 뻣뻣하게 몸을 굳히고 있던 남자가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움직이는 기척이 거의 없는 평소의 남자가 아니었다. 쿵, 쿵, 쿵, 묵직한 체중을 여실히 증거하는 커다란 발자국 소리를 울리며 단숨에 출입문까지 달려갔던 남자는 다시 몸을 돌려 번개처럼 은우에게 되돌아왔다. 이번엔 뒤가 아닌 정면에 무릎을 꿇고 앉는 남자의 하반신이 보였다. 탄탄하게 근육이 잡혀 있는 사내다운 긴 다리가, 믿기 힘들 정도의 우아한 몸놀림으로 급하게 접혀들고 있었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와 정통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볼 때마다 감탄을 자아내는, 그림처럼 아름답고 단정한 이목구비가 50센티도 안 될 거리에서 은우의 시선을 깊숙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아직도 조금씩 코피가 흘러내려, 인중과 입가는 온통 불그스름한 핏자국이 가득했다. 그도 모자라 온 얼굴이 은우가 만들어낸 타박상들로 얼룩덜룩했지만, 그 어떤 흉한 상처도 남자의 빼어난 아름다움까진 손상시킬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 인간 같지 않은 면모가 도리어 은우의 뿌리 깊은 증오감과 혐오감을 더욱 부채질한다는 사실은 실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속내가 드러날까 슬며시 시선을 내리니, 남자가 늘 입고 있는 잿빛의 반팔 군용 셔츠가 보였다. 땀으로 푹 젖은 그것은 남자의 몸에 착 달라붙어 조각 같은 굴곡을 이루는 가슴과 배 근육을 선명하게 드러내주고 있었다. 아아, 차라리 지능만큼 모자란 용모를 하고 있었다면, 자신은 이자를 동정했을지도 모른다. 남자의 속에 살육자가 들어앉은 것을 몰랐던 처음 그 무렵처럼.

언제나의 무표정에 새파란 눈동자만 번들번들 빛내는 것으로 남자는 지금 그네가 느끼고 있을 환희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온몸을 핥아 먹는 듯한 그 짐승스러운 시선에 은우는 다시 한 번 속이 울렁거리는 토기를 느꼈지만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어쨌든 비위를 맞추기로 작정을 했다. 탈출할 수 있을 때까진 남자의 그 어떤 끔찍한 모양새에도 적응을 해야만 할 것이다.

넋을 놓은 채 한동안 은우의 얼굴만 뚫어지게 들여다보던 남자가 문득 어깨를 움찔하며 소처럼 눈을 깜빡여댔다. 은우의 얼굴에 홀려 되돌아온 목적마저 잊고 있었던 듯한 몸짓이었다. 남자의 정체를 모른다면 귀엽다고까지 생각될 정도로, 그것은 너무나 천진난만하고 꾸밈이 없는 사랑스러운 몸짓이었다. 보통의 20대 중반 성인 남성이라면 흉내조차 불가능할 몸짓이 자연스레 어울리는 건, 역시 남자가 아이큐 60대의 저능아이기 때문일 것이다.

셔츠와 마찬가지로 몸에 딱 붙어 늠름한 다리 근육을 고스란히 드러내주고 있는 검정색 군용 팬츠 주머니에서 남자가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것이 보였다. 내용물을 쥔 손이 망설이듯 은우에게 내밀어졌다. 활짝 펴진 남자의 손바닥 안에 들어 있는 그것은 지름 3센티 크기의 둥글고 납작한 기계였다. ‘언어 번역기’였다.

남자는 은우의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 역력한 몸짓으로 번역기를 달아줄 것을 부탁하고 있었다. 번역기를 든 자기 손바닥과 은우의 눈을 번갈아 바라보는 시선엔 간절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아아, 저능아 살육자라도 짝사랑하는 상대와는 꽤나 의사소통을 하고팠던 모양이었다.

속으로 씁쓸한 비웃음을 날리며 은우는 번역기를 받아들어 셔츠에 꽂았다.

“고맙습니다.”

꽂자마자 번역기는 기다렸다는 듯 작동을 시작했다. 물론 눈앞의 남자가 수화를 시작한 때문이었다.

“지금은 너무너무 즐거운 시간입니다. 당신이 야단을 그만 치고 있습니다. 언어 번역기도 달아주셨습니다. 당신에게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지금 시간이 너무너무 즐겁습니다. 당신이 너무너무 좋습니다.”

마디가 있는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남자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번역기는 그 미묘한 동요까지는 좀처럼 포착해내지 못하는 듯싶었다. 번역기를 통해 토해지는 평균적인 성인 남성의 목소리며 어조는, 남자의 태도와 달리 지극히 평온하게 들렸다. 인중에서 말라붙어가는 코피가 간지러웠는지 재빨리 그 주변을 문지른 손가락은 다시금 우아하면서도 경쾌한 템포로 춤을 춘다. 남자의 커다랗고 새파란 눈동자는 손가락 춤에 맞춰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무표정한 가운데 어떻게 저렇게 눈만 희번덕거릴 수 있는지 그것도 참 재주지 싶다.

“당신이 야단치면 몹시 슬픕니다. 야단을 치는 당신이 몹시 힘들어하기 때문에 더 슬픕니다. 하지만 저는 심각한 규정 위반을 했기 때문에 야단을 맞아야 하니까 슬퍼도 참아야 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조금만 야단을 쳤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당신이 야단을 치지 않습니다. 아아, 너무너무 좋습니다. 당신이 너무너무 좋습니다. 가슴이 너무 빨리 두근두근 뜁니다. 저는 너무 좋으면 가슴이 너무 빨리 두근두근 뜁니다. 아아, 당신이 참 좋아요…….”

“배가 고파.”

홍수처럼 쏟아지는 저능아의 고백에 넌더리가 난 나머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남자가 또다시 어깨를 움찔하며 소처럼 눈을 깜빡여댔다. 은우의 냉담한 지적에 그제야 되돌아오기 전의 목적을 기억해냈으리라. 역시 귀엽고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버릇. 살육자 주제에 그따위 천진한 꼬락서니는 용서할 수 없다고, 은우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배고프다니까!”

날카롭게 덧붙이자 남자는 펄쩍 뛰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10분 만에 음식을 가져오겠습니다. 빨리빨리 가져오겠습니다.”

번역기가 대꾸를 다 토해내기도 전에 남자는 어느새 숙소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용수철처럼 단숨에 튀어나간 몸이 쿵, 쿵, 쿵 하는 커다란 발자국 소리를 울리며 복도에서 멀어지는 기척이 들렸다.

야수의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은우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눈앞이 빙빙 돌았다. ……이래서야 어차피 당장은 달아날 수도 없지만……. 비틀거리는 몸을 애써 가누며 출입문 가까이 걸어가보았지만, 혹시나 했던 기대는 바로 접어야 했다. 잠금 암호가 입력된 출입문은 은우의 명령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능아 주제에 꽤나 철저하지 않은가. 젠장. 뭐가 천진난만이고, 뭐가 순수하다는 거냐. 저놈은 그저 광란한 스토커에 불과할 뿐이다.

울화통이 터지니 어지럼증이 더 심해졌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침대로 다가가 몸을 눕혔다. 철저해봤자, 저능아다. 머리싸움이라면 놈도 정상인을 당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빙빙 돌아가는 시야를 손바닥으로 가리며 은우는 자신 역시 철저해지자고 다짐했다.

놈을 이길 수는 없지만, 놈을 감옥에 가둬 살인에 대한 처벌을 내릴 수는 없지만, 놈을 피할 수는 있다. 더 이상 살인을 하지 않게끔 다른 방식으로 가둘 수는 있을 것이다. 원시의 무인 행성 DITER-11에서 놈 홀로 영원히 살아가라고. 절망하라고.

그랬다. 참고 기다리다 보면 기회는 반드시 잡힐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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