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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297년 6월. 이은우(李誾踽) (117/129)

6. 2297년 6월. 이은우(李誾踽)

“……기…… 기분 나쁘니까 빨리 상처부터 치료해!” 

왼쪽 상반신이 피투성이가 된 몰골을 하고 나타난 남자의 모습에 은우는 반사적으로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남자의 왼쪽 어깨로부터 팔뚝 중간까지 사선으로 비스듬히 찢긴 상처에선 잿빛 군용 셔츠가 푹 젖을 정도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핏방울은 젖은 옷소매를 타고 남자의 팔꿈치 아래와 손목을 거쳐 숙소 바닥에도 뚝뚝 떨어졌다. 동맥을 다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꽤나 깊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바닥에 떨어지는 핏방울의 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식재료 채취를 위해 보름 전부터 다시 외부로 사냥을 나가기 시작한 남자였다. 남자는 2∼3일에 한 번꼴로 외출을 해선 두어 시간 만에 필요한 동식물과 과일들을 얄미울 정도로 풍성하게 채취해 오고 있었다. 행운이 따라주는 저능아인지, 아니면 레드필드 중위가 말했던 것처럼 완벽한 생존 훈련을 받은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은우에겐 그토록 피곤했던 작업을 너무나 수월하게 해치우곤 해서, 남자의 느닷없는 부상엔 확실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두 시간이 걸리는 것을 오늘은 어쩐지 네 시간 가까이나 돌아오지 않더니 결국 사고를 당했었던가 보았다. 가장 심한 어깨 쪽이 피투성이이기도 했지만, 얼굴과 몸 여기저기도 긁히고 찢긴 자국들로 가득했다.

차라리 치명상을 입어 영영 돌아오지나 말지 하는 독한 생각을 설핏 해버리는 스스로가 끔찍해서, 은우는 강아지마냥 자신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이 더 초조하게만 느껴졌다.

“괜찮습니다. 아프지 않습니다. 당신이 배가 고플 테니까 식사를 준비해야 합니다.”

꽤 아플 법한데도 아랑곳 않고 빠르게 수화를 하는 남자의 표정엔 고통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그저 은우를 다시 만난 것이 마치 오랜 이별 후에 다시 만나기라도 한 것마냥 못내 기쁜 듯, 무표정한 가운데 새파란 기계의 눈만 번쩍번쩍 빛을 낼 뿐이었다.

“별로 배고프지 않으니까 먼저 치료부터 해! 그따위 꼬락서니로 식사를 가져다줘봤자 구역질만 난다구! 비위 상한단 말이다!”

“……그러나…… 식사 시간이 늦어지는데…… 식사는 반드시 정해진 시간에 하는 것이 규정입니다.”

“규정 좋아하시네! 특수 방위군이 살인을 하는 것도 규정이었냐?!!!”

“…….”

“숙소가 더러워지잖아! 빨리 나가라니까!”

“…….”

재차 날카롭게 외치자 움찔 어깨를 움츠리며 수화를 멈췄을 뿐, 남자는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기계의 무표정이 홀린 듯 멍하니 은우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서 자신이 아무리 화를 내도 남자 혼자 여간해선 방을 나가지 않으리라는 무대포의 고집을 읽는 것은 이젠 식은 죽 먹기였다.

남자가 식재료를 채취하러 나가는 단 두어 시간만이,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하루 동안 은우가 남자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은우로선 그나마 유일하게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었지만 남자에겐 참기 힘든 이별의 시간인 모양으로, 남자는 2∼3일에 한 번꼴인 식재료 채취 작업 후엔 평소보다 더더욱 은우의 곁에 달라붙으려 했다.

“당신이 함께 식당에 가주면 저는 좋겠습니다. 당신과 함께 가는 것이 저는 많이 즐겁습니다.”

지긋지긋해하는 은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예의 앵무새처럼 여느 때와 똑같은 강요를 입에 올리고 있었다. 식사 준비도 함께, 식사는 물론 당연히 함께, 무료한 시간을 때우는 것도 함께, 학습실까지 따라와 원시별에서의 생존 방법들을 익히는 것을 가만히 앉아 뚫어지게 지켜보질 않나(남자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지식인지라 남자가 혹시라도 눈치를 챌까 조마조마한 자신의 마음 따윈 아랑곳없이!), 하다못해 처음 며칠 동안은 은우의 침대에까지 끼어들기도 했던 남자였다.

독신 성향의 인간에게 타인의 체온을 가까이에서 자각하며 잠이 드는 것만큼 끔찍스러운 것도 없어, 처음엔 남자를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며 몰아내려 기를 써봤지만, 애초부터 저능아의 막무가내 고집을 일반인이 당해낼 턱이 없었다. 발로 차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트리면, 남자는 얻어맞은 곳을 쓰다듬으며 얼떨떨한 눈동자로 은우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화가 난 은우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나가라고 해도, 움찔 몸을 떨고 상처받은 표정만 지을 뿐 남자의 고집은 소가죽보다도 더 질겼다. 한동안 멍하니 은우를 바라보다가는,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떨어진 침대 발치에 그대로 자리를 잡고 눕는 남자였다. 그러곤 충성스러운 애완견의 모양새로 먼저 색색 잠이 들어버리니,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밀어도 꿈쩍 않는 남자를 숙소 밖으로 끌어낼 수도 없어 결국 포기하고 잠이 들면, 어느새 남자는 은우의 침대 속으로 파고들어와 있었다(바로 곁에서, 관 속에 든 것마냥 정자세로 손을 가슴 위에 포갠 채 잠이 들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처음엔 얼마나 기절초풍했는지!). 그렇게 막무가내의 신경전을 일주일 넘게 벌이다가 결국 포기를 한 쪽은 당연히 은우일 수밖에 없었다. 저능아를 상대로 말이 통할 리도 없고, 고집싸움은 또한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나마 남자가 아직까지 성적인 자각이 없어, 육체적인 접촉을 시도하려 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 여겨야 할 판이었다.

끔찍스러운 동침은 근 열흘 가까이 계속되었다. 자포자기한 나머지 남자와의 실랑이를 중지해버린 지 다시 며칠, 다행스럽게도 남자의 폭력과 다름없는 동침 요구는 싱거울 정도의 간단한 이유로 끝이 나게 되었다. 계속되는 수면 부족으로 인한 두통과 메스꺼움으로 숙소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은우를 남자가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깨어난 은우를 겁에 질린 파리한 얼굴로 마주 대한 남자는 은우의 독신 성향과 그에 따른 불면증에 관해서 비로소 진지한 자세로 경청하기 시작했다. 당장 그날로 남자의 침대 습격이 중지된 것은 물론이었다.

그렇게 간신히 침대로부터 남자를 몰아내긴 했지만, 그러나 수면 시간 이외의 다른 모든 시간들이란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또 다른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한시도 남자의 시선을 받지 않는 때가 없었다. 남자가 일(군인으로서의 육체 단련과 격투 전술 훈련이 거의 대부분이었다)을 할 때나 쉬고 있을 때, 혹은 음식을 준비하거나 식사를 할 때에도, 은우를 향한 시선의 열기와 집착의 강도는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한번은 식재료로 잡아온 짐승의 가죽을 벗기다가 은우에게 한눈을 파는 바람에 전자 나이프에 손등을 잘린 적도 있었다. 피부 가죽이 벗겨져 피가 철철 흐르는 남자의 손가락을 지켜보며, 은우는 자신이 오른손을 잃었을 때의 일을 떠올리곤 그야말로 몸서리를 쳐야만 했다.

“당신과 함께 식당에 가는 것이 저는 많이 즐겁습니다. 여기서 제가 음식을 다 준비할 동안 기다려주는 것도 즐겁지만, 당신을 바라보며 식사를 만드는 일은 그보다 몇 배는 더 즐겁기 때문입니다.”

거구의 앵무새가 되풀이해 지껄이는 것을 지긋지긋하게 듣고 있다가, 은우는 마지못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자신이 움직이지 않았다간 숙소 바닥은 온통 피바다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숙소를 나와 식당과 반대 방향인 의무실 쪽으로 향하자, 평소처럼 발소리 하나 없이 민첩하게 꽁무니에 달라붙었던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이내 얌전히 은우를 따라왔다. 의무실 문 앞에 도착해서 남자를 뒤돌아보자, 남자는 여전히 번들거리는 새파란 바닷빛 눈동자로 홀린 듯 은우의 얼굴만 주시했다. 아마도 직접 안으로 들어가서 의료 용구를 손에 쥐여줘야만 남자는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는 것도, 또 치료를 요한다는 사실도 비로소 자각할 듯싶었다.

저능아들이란 이렇게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면 다른 문제는 좀처럼 인지를 못 하는 건지, 아니면 그게 사랑에 빠진 저능아라는 예외의 경우라 그런 건지. 은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기막힌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대여섯 살배기 어린애를 상대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물론 차라리 남자가 진짜 어린애였다면 이렇게까지 불편하고, 불쾌하고, 짜증스러운 기분은 들지 않을 것이다. 순수한 아이를 돌보고 가르치는 것에 나름대로의 연민과 애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자에게 연민을 주기엔 은우는 여전히 남자를 지독하게 증오하고 있었다.

남자가 살인을 하던, 그것도 나름대로 애착을 주고 정을 기울였던 친구 둘을 바로 눈앞에서 살해하던 장면은 은우에겐 평생 씻을 수 없는 영혼의 상처일 것이다. 게다가 그 친구들은 전적으로 은우 때문에 죽음을 맞았다. 은우 자신이 죽인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물론 시시때때로 자신의 그런 저급한 증오의 감정을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드는 남자의 순수성은 더더욱 은우의 증오심을 부채질할 뿐이었다. 남자가 아무리 순수하고, 또 나름대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남자 나름대로의 어리석은 사정이 있었다손 쳐도, 이성적으로 납득은 갈지언정 감정적인 응어리까지는 조금도 삭혀지지 않았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사제들의 충고는 현재의 은우에겐 허울 좋은 공염불에 불과했다. 개화된 시민으로서 자격 미달이라고 평가된다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남자를 용서하고 납득하는 것이 개화된 시민으로서의 자격 조건이 된다면 은우는 기꺼이 일반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반납하고 야만적인 하급 영혼들의 대열에 동참할 용의가 있었다. 좋은 사람, 건강한 시민, 진화된 영혼, 기꺼이 반납해줄 터이다. 그랬다. 아마도 남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친구 둘과 일반 시민 32명을 사살했다는 사실보다도 은우 자신의 영혼을 이 지경으로까지 추락시켜버린 데 있을지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남자가 은우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또 그런 끔찍스러운 참극을 벌이지 않았다면, 은우는 아마도 평생 자신의 어두운 부분은 직시하지 못한 채, 양식 있는 일반 시민으로서 행동하고, 사고하고, 또 그렇게 만족스러운 자신의 진화 상태에 안심하며 평온한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 외상용 응급 치료 기구가 설치돼 있는 진찰대 옆으로 남자의 팔을 끌고 갔다.

홀린 듯 멍한 시선으로 강아지처럼 은우만을 바라보던 남자는 은우가 손을 대차 회초리를 맞은 것처럼 움찔 몸을 떨었지만, 역시 얌전히 은우에게 끌려 들어왔다. 바닥에 떨어지는 핏방울은 기세를 좀 줄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파상적인 무늬를 만들어내며 진료실 바닥을 더럽히고 있었다.

“벗어.”

“……?”

“옷 벗어. 치료해줄 테니까.”

“…….”

“벗으란 말 안 들리나? 온 우주선을 네 피로 칠갑을 할 생각이냐?!”

재차 다그치자, 새파란 눈동자를 굴리며 은우의 일거수일투족을 해바라기하던 남자가 겨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깨에 짊어진 진공 배낭과 허리와 가슴께에 찬 묵직한 군장들(그곳엔 제이슨을 죽였던 라바트레이저 총을 비롯, 각종 첨단 무기들과 야전 장비들이 차곡차곡 장착돼 있었다), 그리고 검정색 군화를 차례로 벗고 허리 벨트마저 풀더니 그제야 겨우 피투성이 셔츠를 벗어 던졌다.

대충 예상을 했지만 남자의 어깨 상처는 꽤나 깊은 편이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구르며 입은 상처 같았다. 단단한 나뭇가지거나 날카로운 돌부리에 찢긴 모양으로, 상처의 길이도 길이지만 가장 심한 부위는 속의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깊숙이 벌어져 있었다. 남자의 움직임에 따라 근육이 벌어지며 피가 솟구치는 모양은 멀미가 날 정도로 끔찍하게 느껴졌다. 통증이 꽤나 심할 텐데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남자의 표정에, 은우는 새삼 남자의 강렬한 생명력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각처럼 단단하게 뭉친 근육들이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따라서 불끈거리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일반 시민의 그것이 아니었다. 육식 동물처럼 부드러운 유연함은 느낄 수 있으되, 일반 시민의 섬세함이나 유약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골반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검정색 군용 팬츠 위로 단단하게 근육이 잡힌 복부엔 왕(王)자 모양의 굴곡이 선명했다. 실로, 그 얼굴과 마찬가지로 조각처럼 빚어졌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몹시 강인하면서도 빼어나게 아름다운 몸이었다.

……그래, 이런 완벽한 몸을 도구로 살인을 했단 말이지…….

내심 울컥한 비아냥을 흘리며 은우는 진찰대 위로 남자의 상반신을 밀쳤다. 워낙에 완력에 있어선 잽이 안 되는 터라 있는 힘껏 밀었다고 생각했지만 남자는 잠시 비틀거리다간 이내 중심을 잡고 묻듯이 은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앉아. 상처에 봉합기가 지나갈 테니까 아파도 참아. 움직였다간 건강한 피부에도 바늘구멍이 뚫리게 될 거다.”

진통제가 들어 있는 앰풀을 미동도 않고 서 있던 남자의 목덜미에 쏘며 명령하자, 남자는 약간 아픔이 느껴지는지 눈을 몇 번 소처럼 껌뻑이며 진찰대 위에 엉덩이를 묻었다. 상처 부위의 신경을 마비시키는 앰풀의 효과가 나타나려면 적어도 1∼2분이 지나야 했지만 은우는 남자가 앉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남자의 어깨에 봉합기를 통과시켰다.

철인 기계를 연상시키는 남자에게 굳이 배려가 필요할 턱은 없으리라. 아니, 설령 드러난 것과 달리 남자가 꽤나 통증을 느낀다고 해도 은우는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냉혹한 인간이었던가, 씁쓸하게 웃었다가, 바로 이렇게 자신을 변화시킨 남자에, 역류한 위액처럼 다시금 분노가 울컥거린 때문이었다.

위잉 하는 기계음을 내지르며 피부가 다시 맞물리는 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비위가 상했다. 봉합기가 지나간 자리 위로 피 칠갑이 돼 있는 피부 모습도 사정은 한가지였다. 평소에도 유달리 비위가 약했지만 이 정도로 피에 민감하진 않았었다고 멍하니 생각이 들었다. 이 역시 남자가 원인이다. 코앞에서 목도한 살인 장면이(그것도 아끼는 친구들이 불시에 죽어나가는!) 자신의 넋을 이토록이나 겁에 질리게끔 만들어버린 것이다.

울렁거리는 속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서두른 덕분에 치료는 5분여 만에 끝이 나게 되었다(물론 그 5분은 은우의 신경을 갈가리 갈아대는 끔찍한 인내의 5분이었다!). 봉합한 상처 위에 소염제와 윤활제를 도포한 후 붕대를 감고 나자, 남자의 상처에선 더 이상 피도 흐르지 않았고 은우도 가까스로 제정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남자의 왼쪽 목과 팔 아래로 길게 이어진 낭자한 핏자국을 직시해도 처음처럼 구역질이 솟구치진 않았다. 소독제를 적신 거즈로 핏자국을 닦아내고, 온몸 곳곳에 얼룩덜룩한 흔적을 만들고 있는 찰과상들에 꼼꼼히 연고를 발라주고 있을 무렵엔 자신이 치료를 해주고 있는 상대가 그 ‘누구’라는 것조차 별로 의식하지 않은 채 담담히 손을 놀릴 수 있었다.

“……흐…… 으…… 읏……!”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문득 귓가에서 터진 허스키한 신음성에 은우는 왼손에 들고 있던 연고제를 떨어트릴 정도로 기절초풍을 해야 했다.

남자의 얼굴 가까이 상체를 숙인 채 견갑골 근처를 마사지 하고 있던 터라, 남자가 신음 소리를 내며 토해낸 뜨거운 숨결이 고스란히 뺨 언저리로 떨어졌다. 워낙에 타인과의 접촉을 싫어하는 몸인데다, 그 무엇보다도 처음으로 듣게 된 남자의 목소리가 은우를 몹시 당황시켰다. 벙어리라고는 절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그것은 꽤나 자연스럽기도 했고, 그 이상으로 전신의 신경줄을 긴장시킬 만큼 강렬한 위화감을 주는 무언가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흐…… 읏…… 우…… 하아아…….”

남자의 탁한 신음성이 재차 토해지며 바싹 달라붙어 있던 은우의 뺨과 관자놀이 부근을 건드렸다. 등줄기로 섬뜩한 전율이 스쳐 지나가며 온몸의 털들이 쭈뼛 곤두섰다. 막연했던 위화감의 정체가 슬며시 그 본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심장이 맹렬하게 요동치며 위험 신호를 보내왔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핏줄기가 심장이 뛸 때마다 쿵, 쿵, 쿵, 북처럼 고막을 두드렸다. ……맙소사……! 상체를 뒤로 빼서 남자의 표정을 살피지 않아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저 허스키한 음성은…… 심상치 않은 신음성은…… 그랬다! 남자는 성적으로 잔뜩 흥분해 있었다!!!

벼락같은 깨달음과 함께 은우의 얼굴은 불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것이 수치감 때문이 아니라 공포 때문이라는 것을, 은우는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란 걸 예상하곤 있었지만 자신이 받고 있는 충격은 예상을 훨씬 상회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성적으로는 모르는 척 태연하게 남자로부터 물러나 최대한 거리를 두었지만, 당장은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아……! 아…… 으…… 앗……!”

석상처럼 곧은 자세로 앉아 있던 남자의 상반신이 은우에게로 기울었다. 처음부터 가까이 밀착해 있던 터라, 남자가 상반신을 10도쯤 기울이는 것으로 남자의 얼굴은 그대로 은우의 목덜미에 파묻히고 말았다. 마치 축축하고 뜨거운 불덩어리가 닿은 것만 같았다. 성적인 흥분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남자의 몸이 생생하게 감지되고 있었다. 진찰대 위에 늘어져 있던 남자의 오른손이 가랑이 사이로 파고들어가는 것이 얼핏 느껴졌다. 한껏 발기된 스스로의 생식기를 움켜쥔 남자가 익숙한 움직임을 시작하는 것을 계기로, 밧줄처럼 은우를 죄고 있던 경직이 가까스로 풀렸다.

“……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비명 같은 다급한 고함 소리를 내지르며 은우는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오는 남자의 상반신을 힘껏 밀어젖혔다. 역시나 잠깐 휘청거렸을 뿐, 이내 중심을 잡은 남자는 여전히 수치스러운 행위에 몰입해 있었다. 탄성이 좋은 검정색 군용 팬츠 속으로 들어가 있는 남자의 오른손은 민망할 정도로 부지런히 피스톤 운동을 되풀이했고, 뚫어져라 은우의 얼굴을 굽어보고 있는 남자의 붉게 상기된 눈시울도 음란한 색향으로 흘러넘쳤다. 평상시 남자가 보여주는, 저 어린아이처럼 맑고 순수한 눈빛이 아니었다. 이미 성을 뼛속까지 알고 있는 눈빛이라는 것을, 분명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은우는 순간 뼛속까지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남자는 그간 아마도 꽤 여러 번 사타구니 사이로 손을 가져가 스스로를 위로했을 터였다. 그것도 틀림없이 은우 자신을 안주거리로.

“……젠장, 그만두지 못해?!!!”

자신의 새된 고함 소리가 진료실 안을 나이프처럼 후비고 들었다. 지나치게 넓어 텅 빈 듯한 느낌마저 주는 황량한 공간이 불쾌한 메아리로 진동하고 있었다. 메아리의 직격탄을 맞은 남자가 움찔 긴장하며 어깨를 움츠리는 것이 보였다. 은우가 손찌검이라도 할까 예상한 모양이었다. 그만큼 자신의 표정이며 목소리엔 극단까지 치받친 분노가 떠돌고 있을 터였다.

자신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저절로 꽉 움켜쥐어져 있는 두 주먹 또한 남자의 음란한 얼굴을 갈기고픈 욕구로 전율하고 있었다. 남자에 대한 공포감보다도, 이 순간 은우를 사로잡고 있는 감정은 분노였다. 타인의 면전에서 태연히 자위행위를 하는(설령 사리 분별이 잘 안 되는 저능아라 할지라도!) 남자의 몰상식보다도, 남자를 그렇게 만든 원인이 자신이라는, 아니, 남자가 자신을 안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몸서리가 쳐질 만큼 혐오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만두랬지?!!!!!”

재차 소리를 질러도 남자는 그저 슬금슬금 은우의 눈치를 살필 뿐, 사타구니 사이를 주무르고 있는 손길을 거둘 조짐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붉게 상기되어 있는 남자의 촉촉한 눈시울에는 극단에 이른 욕망과, 의문과, 슬픔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마치 자위행위를 하는 것을 왜 제지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듯한, 그래서 야단(남자의 표현을 빌면)을 치는 은우 때문에 깊은 슬픔을 느끼고 있는 듯한, 그런 표정이요, 그런 눈빛이었다.

하기야, 자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리라. 분명 남자는 몸의 변화를 자각하곤 특수 방위군 훈련 교본이라도 보고 자위행위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신체 건강한 성인 남자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라는 것도. 다만 남자는 그것이 배설 행위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개인적인 일이라는 ‘상식’에까지는 미처 판단이 가 닿지 못했을 것이다. 그 부족한 판단력을 대신해서 하나하나 의문점을 가르쳐주고 명령을 내려줄 특수 방위군 상관이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특수 방위군에게 상관이란 중추 신경과 다르지 않을 터, 고립무원의 행성에서 그 유일한 중추 신경을 말소시켜버린 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저능아 스스로가 아닌가. 동정의 여지가 없었다. 때문에 은우는 사라져버린 중추 신경을 대신해 남자에게 일반 시민의 상식들을 가르쳐줄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광란한 살육자에게 시민의 상식이라니,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의 꼬락서니가 아닌가.

……그렇지. 아무리 내게 다가오려고 노력해봐라. 너는 그렇게나 역겨운 괴물일 뿐인 거다. 그래. 아무리 혐오스러운 짓거리를 태연히 해치워도 그것이 왜 혐오스러운지는 절대로 알려주지 않을 거다. 야단(!)을 치고, 화를 내고, 적대감과 야유를 있는 대로 퍼부어 네게 고통을 안겨주긴 할지언정 말이다…….

야비한 저주와 비뚤어진 복수심이 잔뜩 들어간 눈빛으로 남자를 쏘아본 뒤에 은우는 간신히 남자로부터 등을 돌렸다. 은우의 사나운 질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맹렬한 기세로 손가락 장난을 멈추지 않는 남자를 계속 바라보는 것도, 남자가 오르가슴에 오를 때까지 자신이 안주거리가 되는 것도 몸서리가 쳐졌다. 청결하고 드넓은 진료실 안은 어느새 남자의 땀과 피비린내와 사향 냄새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불쾌감에 금방이라도 구토가 치밀 것만 같았다.

본능에 가까울 몸짓으로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이미 갇혀 있는 것이 버릇이 돼 있었던 터라, 출입문 가까이 갔을 때에는 저절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지만,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자동으로 활짝 열어젖혀진 문에 은우는 만세라도 부르고 싶어졌다. 함께 있을 때만은 남자가 문들을 잠그지 않는다는 사실도 비로소 뇌리에 떠올라왔다. 남자가 바로 눈앞에서 감시하는 동안엔 은우의 움직임을 충분히 컨트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리라. 제기랄.

“……우…… 우아아아……!”

막 열린 출입문을 향해 크게 한 발을 내딛으려는데, 의미를 알 수 없는 불분명한 괴성이 느닷없이 울려 퍼졌다.

짐승의 포효 같기도 하고, 광기에 사로잡힌 분열병 환자가 내지르는 비명 소리 같기도 한 그것은, 은우의 바로 뒤통수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익숙한 짐승의 사향 냄새가 코 안으로 확 끼쳐들었다고 자각한 순간, 허리가 뒤로 활처럼 휘어졌다. 남자의 두 팔이 양쪽 어깨를 틀어쥔 채 뒤로 힘껏 끌어당긴 때문이었다.

쿵, 쿵, 불길하게 박동을 빨리하던 심장이 순간 아래로 뚝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심장을 따라 온몸을 휘돌던 혈액 또한 바닥으로 쫙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아차……! 실수를 하고 말았다는 낭패감과 알 수 없는 절망감이 악몽처럼 스멀스멀 의식을 점령해가고 있었다. 어쩌면 남자는 자신을 단지 붙잡으려고만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남자의 시야만 벗어나지 않으면 남자는 넬슨호 안에서 은우가 어디로 가든 충분한 자유는 주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미 정수리까지 치솟은 공포로 판단력을 잃은 은우에게 있어선 남자의 우악스러운 손길이란 단지 강간자나 살육자의 그것으로밖엔 생각되지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추측이나 의심이 아닌 선명한 확신으로 은우의 숨통을 죄고 있었다.

발가락 맨 끝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이 온몸의 신경줄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갔다. 잊혔던 두려움이, 저 불길한 살육자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가 단숨에 은우의 온 넋을 사로잡고 있었다. 남자가 더 이상 자신을 잡지 않는다 하더라도 은우는 아마도 더 이상 꼼짝할 수 없을 터였다. 익숙한 경직이 온몸을 빳빳하게 굳혀버린 것이다.

어깨를 틀어잡고 있던 남자의 두 손가락이 가슴 쪽으로 떨어지더니 이내 사슬처럼 상반신을 죄어들었다. 등에 빈틈없이 달라붙은 남자의 몸이 생생하게 감촉되었다. 가슴이며 배며 허벅지며 온통 딱딱하기만 한 근육덩어리가 부들부들 경련하고 있었다. 은우의 몸 역시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리고 있어, 실제로 누가 더 떨고 있는지 가늠은 불가능했다.

“……우…… 우…… 아…… 아…… 그…… 가…… 가…….”

짐승의 괴성이 은우의 목덜미께에 달라붙어 있는 남자의 입술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것 같았지만 온전한 단어가 되기엔 한참이나 부족한 발음이요, 억양이었다. 갈퀴처럼 쫙 벌어진 채 은우의 허리와 가슴 부근을 꽉 움켜쥐고 있던 손이 벌벌 떨며 피부 곳곳을 헤매 다니고 있었다. 크고 마디가 굵은 손가락은 마치 촉수처럼 휘감겼고, 피부에 닿아오는 손바닥의 감촉은 뜨겁고도 절박했다. 그것이 격렬한 애무의 손길이라는 것을 자각하기까지는, 물론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상반신과 마찬가지로 딱 달라붙어 있는 하반신 가운데, 딱딱하게 치솟은 남자의 분신이 은우의 엉덩이에 막무가내로 비벼지고 있었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입안으로 군침이 돌았다. 실내에 산소가 부족하기라도 한 것마냥 폐에 압박감이 느껴져 시시각각 호흡이 가빠졌다. 재빨리 마음을 추스르지 않으면 과호흡 상태에 빠질 것만 같았다.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데, 이 지독한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게끔 적절하게 대처를 해야만 하는데, 백지처럼 텅 빈 머릿속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굳어든 몸과 다름없이 감정조차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혐오도, 분노도, 그 지독한 공포감조차도 잘 실감이 되질 않았다. 이렇게 온몸을 꼼짝달싹하지도 못한 채 벌벌 떨고 있는 걸 보면 분명 공포에 질려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두렵다는 감각은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하얗게 변한 시야가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것만 아득하게 감지가 됐다. 강간을 당하리라는 막연한 예감이 하얗게 변한 망막 주위를 짧게 스쳐갔다. 피처럼 새빨간 예감이었다. 아니, 선고였다.

“……흐…… 으읏……! 흣……! 우아…… 아…… 아아……!”

극점으로 치닫는 교성과 더불어 불덩어리 같은 짐승의 숨결이 은우의 목덜미 근처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남자의 입술이 스치듯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목덜미를 빨고 있었다. 입술이 지나간 자리마다 화상 같은 낙인이 찍힌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감촉은 불에 달군 쇠꼬챙이처럼 뜨겁고, 소리는 온몸이 통째로 빨리는 것마냥 탐욕스럽고 음탕하기 그지없었다. 그 끈끈하고 음험한 소음들이 아랫도리에서 비벼 올려지는 성기의 리듬과 정확하게 호응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었다. 직접 삽입을 하지 않았다 뿐이지, 여느 수컷의 교미 행동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을 몸짓이었다. 분명 섹스 경험이 없을 순수한 짐승이건만 본능은 습득된 지식의 유무와는 별개로 정확하게 짐승을 이끌고 있는 모양이었다. 섹스라고 부르기엔 테크닉도, 관능도 형편없는 막무가내의 몸짓이었지만, 그 열기만은 은우가 이때껏 경험해본 섹스 파트너들(최고의 섹스 테크닉을 선사하는 버추얼 섹스 파트너들을 포함해서)과 비교해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아니, 실은 그 누구도 상대가 못 될 정도로, 짐승의 그것엔 폭풍처럼 사납고 위태로운 무언가가 격렬하게 몰아치고 있었다.

“……으…… 헉……! 흑……! 우…… 흐아아앗!!!”

숨이 넘어가는 듯한 수치스러운 괴성이 짐승의 목구멍을 울리며 터져 나왔다. 철갑처럼 은우를 죄고 있던 짐승의 팔에 더더욱 힘이 가해졌다. 맞붙어 있던 하반신이 몇 번 크게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짐승은 은우를 안은 채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와당탕!!!!!

장정 둘이 진료실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는 꽤나 요란스러웠다. 몸에 가해지는 충격 역시 상당했지만, 밑에 누워 은우를 옴짝달싹할 수 없게끔 죄고 있는 짐승이 쿠션 역할을 해서인지 통증은 별로 감각되지 않았다. 하긴 무언들 실감이 나겠는가.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몸도 마음도 나무토막처럼 굳어, 은우는 지금 자신이 숨을 쉬고 있는지 아닌지, 짐승의 팔 안에 갇혀 죽부인처럼 자위 대상이 되는 이것이 현실인지 환각인지조차 도통 의심스러웠다.

입안 가득 고인 군침이 천치처럼 둥그렇게 벌어진 입술 양끝을 타고 줄줄 흐르고 있었다. 양쪽 아래턱을 지나 목덜미 아래로 굴러 떨어진 그것이 셔츠 깃 안으로 스며드는 감촉을 멍하니 불쾌하다고 여기는 자신이 있었다. 등허리를 적시는 뜨뜻하고 축축한 감촉은 더더욱 불쾌하다고. 그것이 짐승이 토해낸 정액이라는 판단도 어렴풋이 자각되었다. 짐승이 은우의 등에 달라붙어 허리를 흔들기 시작한 것은 채 5분도 안 됐을 시간이었지만, 마치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등 뒤의 짐승은 여전히 개처럼 헐떡거리며, 신음하며, 자신을 꽁꽁 옭아매고 있었다. 여전히 뜨겁고, 격렬하고, 또 위태로웠다. 짐승의 침입에 따라 온몸의 체액이란 체액이 마치 지옥의 불길 속에 갇히기라도 한 것마냥 지글지글 끓어올랐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아, 그렇지. 상처 입은 남자를 치료하려고 했었지……. 멍하니 생각이 깨어나고 있었다. 생각의 실마리를 따라가고 보니 피비린내가 뒤섞인 역한 사향 냄새가 새삼 코끝을 물어뜯었다. 울컥 치민 토기를 참지 못하고 은우는 몇 번이나 헛구역질을 해야 했다. 구역질을 일으킬 때마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혈압이 치솟았다. 눈시울 안쪽으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더니 생리적인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노란색의 시큼한 위액이 기왕에 만들어진 타액의 물길을 따라 목덜미 사이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새하얀 진료실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굼벵이처럼 꿈틀거리며 한동안 사정의 여파를 견디던 짐승이 다시금 움직임을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어느새 바짝 치솟은 짐승의 생식기가 새삼스레 파고들 곳을 찾아 전율하고 있었다. 크르륵, 크륵, 탁하고 끈적끈적한 야수 같은 교성이 다시금 은우의 귓가로 쑤셔들었다. 맙소사. 실로 놀라운 회복력이 아닐 수 없었다.

뻣뻣하게 치솟은 짐승의 생식기에 짓이겨지는 엉덩이의 감촉이 끔찍했다. 싫어서, 혐오스러워서,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자의식이 안개가 낀 듯 흐릿해진 시야를 스치며 흘러갔다.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나약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는 기원도 설핏 뇌리를 스쳐갔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몸을 옴짝달싹할 수가 없는 걸까. 짐승이 두려워서일까? 짐승이 자신을 해치는 것이? 설마. 새삼 죽음이 두려울 까닭도 없는데.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몰라…….

아, 그래.

……영영 이 짐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거야…… 행성 DITER-11로부터도…… 불운만이 동거하고 있는 이 지긋지긋한 인생으로부터도…….

이것은 절망일 것이다. 절망이 온몸을 묶고 있는 까닭이다. 움직여봤자, 기를 쓰고 뛰어봤자, 애초부터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는 절망. 자신에겐 너무나 익숙하기만 한 실패에의 전조.

……그렇지…… 일생 무인지경의 별에 갇혀서 짐승 같은 남자의 정액받이 노릇이나 하다 죽을 거야…… 그럴 거야…… 애초부터 그럴 운명이었던 거야…… 그래…… 소용없어…… 소용없다구…….

숨이 멎을 듯 강한 악력이 상반신을 죄어왔다. 엉덩이 위로 비벼지는 피스톤 운동에 맞춰 겨드랑이 틈을 훑던 짐승의 손이 앞으로 교차해 가슴을 끌어안은 때문이었다. 그대로 몸이 뒤집어졌다. 엎드린 자세가 된 은우의 등 뒤로 여전히 찰싹 몸을 붙인 채 짐승은 그럴싸하게 교미흉내를 내고 있었다.

차고 매끄러운 리놀륨 바닥에 오른쪽 뺨이 짓눌린 채 은우는 짐승의 격렬한 리듬에 따라 심하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상반신을 죄어오던 짐승의 손길은 은우의 어깨와 팔과 등줄기를 오가며 정신없이 쓰다듬고 있었다. 몇 분이 흘렀을까, 한참 동안 셔츠 위를 헤매 다니던 커다란 손바닥이 이윽고 안으로 파고들 만한 계기를 발견했다. 허리춤에서 빠져나온 셔츠 깃에 걸려 짐승의 손가락이 은우의 맨살에 닿았다. 열에 들뜬 뜨거운 손가락이 마치 전기에라도 감전된 것마냥 움찔 전율하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 닿는 맨살의 따뜻하고 매끈한 피부 감촉에, 동정이었을 짐승도 몹시 놀란 모양이었다. 한동안 꼼짝 않고 미세하게 떨고만 있던 손가락은 이윽고 더듬이처럼 벌벌 떨며 셔츠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랫배를 스치고, 갈비뼈를 더듬고, 이윽고 가슴으로 올라가 긴장으로 빳빳해진 유두를 슬쩍 건드렸다.

“흐…… 아아……!”

허스키한 탄성과 함께 남자의 상반신이 기쁨으로 부르르 전율했다. 허벅지 안쪽과 엉덩이 틈에서 비벼지던 수컷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 듯했다. 피스톤 운동이라기보단 거의 경련에 가까운 진동이 짐승의 하반신으로부터 은우의 척추에까지 전해졌다. 유두를 쥐어뜯을 듯한 격렬한 기세로 짐승의 손가락이 가슴팍을 와락 움켜쥐었다. 줄곧 더듬이만을 세운 채 망설이며 본능을 따라 헤매던 짐승이 비로소 확고한 등불을 발견한 듯한 움직임이었다.

찌르르한 통증이 심장을 지나 척추를 타고 뒤통수를 후려쳤다. 단숨에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한 충격이 가까스로 몸의 경직을 깨트렸다. 아니, 깨트린 것 같았다. 상반신이 용수철처럼 튕기듯 크게 휘청거렸다. 움직일 수 있다는 자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두근……. 크게 뛴 심장의 혈류가 전신의 신경줄을 바짝 긴장시키며 온몸 구석구석까지 뻗어갔다. 마비됐던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감각이 돌아오며 혐오감과 공포가 머리꼭대기까지 왈칵 치솟았다.

“……으…… 으으…… 우…… 으아아아아아!!!!!”

어디선가 귀를 찢는 듯한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무척이나 낯설고 거슬리는 괴성이었다. 도무지 믿기 힘들었지만, 은우 자신의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분명했다.

퍼억!!!

오른손으로부터 찌르르한 통증이 전달됐다. 아아, 역시 믿기 힘들었지만 자신은 오른쪽 의수를 사용해서 무언가를 힘껏 때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가격을 당한 부위가 꿈틀 하고 경련을 하며 뒤로 물러서는 것이 느껴졌다. 찰거머리처럼 자신을 죄고 있던 짐승의 상반신이었다. 충격이 꽤나 심했는지 짐승은 자신의 몸과 사이를 더욱 벌리며 옆구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한계까지 공포에 질린 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빠악!!!!!

눈앞에 보이는 피투성이 어깨에 있는 힘껏 머리를 박았다.

“크윽……!”

불분명한 신음 소리와 함께 짐승의 몸이 떨어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짐승은 몹시 고통스러운 듯 공처럼 몸을 웅크린 채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는 어깨를 감싸 쥐었다. 봉합기로 꿰맨 상처가 도로 터져버린 듯, 진료실 바닥은 순식간에 비처럼 뿜어 내린 핏방울로 낭자했다.

박치기를 한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피를 보아선지 다시금 구토감이 치밀며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동자를 필사적으로 굴리며 출입문 쪽으로 크게 발을 뻗었다. 그러나 다리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뒤쫓아 온 짐승의 손이 은우의 정강이 부근을 와락 움켜쥔 때문이었다. 뱀이 똬리를 트는 것마냥 짐승의 팔은 사력을 다해 정강이를 죄어오고 있었다. 기를 쓰고 다리를 빼내려 해도 도무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아아악!!!!!”

공기를 찢는 비명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공포를 동반한 쇼크의 직격탄을 맞은 심장이 마치 가슴을 뚫고 튀어나오는 것만 같았다. 사방이 피 칠갑을 한 것마냥 시야가 붉게 보였다. 미친 듯이 몸부림을 쳤다. 중심을 잃은 몸이 짐승의 위로 넘어져 바닥에 부딪친 부위로 설핏 통증이 지나간 것 같았다. 물론 제대로 자각조차 되지 않았다. 고통보다, 통증보다 더 끔찍한 괴물이 있었다. 메두사처럼 자신을 집어삼키고 있는 괴물이었다.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댔다. 촉수처럼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짐승의 팔이 조금 느슨해진 틈을 타 몇 걸음 안쪽으로 이동했다. 무기로 사용할 만한 물건을 잡기 위해서였다. 단 몇 걸음 만에 도로 발목이 붙잡히고 말았지만, 은우의 손엔 어느새 지름 22센티 크기의 날카로운 봉합기가 들려 있었다.

손잡이를 꽉 움켜쥔 채 정신없이 휘둘렀다. 본능적으로 휘감긴 눈꺼풀 안쪽에서 반딧불 같은 작은 빛들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명멸했다.

쾅!!!!

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짐승이 받은 타격이 은우의 손과 팔에까지 전해졌다. 후려친 반동으로 봉합기를 든 팔과 상반신이 크게 휘청거렸다. 중심을 잡을 여유는 없었다. 다시금 있는 힘껏 봉합기를 휘둘렀다.

쾅!!! 콰앙!!!

“아…… 읏……! 아악!!!”

쾅, 쾅, 쾅!!! 콰앙!!!!!

“큭……! 윽……! 흑!!!”

빠각!!!!

“크……! 흐악!!!!!”

부딪치는 소리, 어딘가가 바스러지는 소리, 끔찍스러운 비명 소리들이 이명처럼 저 멀리서 들렸다.

아비지옥 같은 몸부림의 끝에 홀연 분별이 돌아왔다. 막무가내의 타격을 멈추고 눈을 뜨니, 잔뜩 몸을 웅크린 채 꿈틀거리고 있는 짐승의 거대한 몸이 보였다. 짐승은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아니,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설핏 판단이 들었다. 짐승의 벌거벗은 상반신뿐 아니라, 길고 탄탄한 근육질의 다리에 딱 피트 돼 있는 새까만 군용 팬츠는 온통 새빨간 피투성이였다. 그도 모자라 사방으로 이리저리 튄 핏방울은 진찰대 위며 바닥, 진찰대와 가까운 한쪽 벽에까지 몸서리가 쳐질 만큼 잔혹한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아아, 정말로 죽어버렸으면…… 죽어버려, 괴물아!!! 악에 받친 저주가 번개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자신이 살인을 했다는 죄책감 따윈 손톱만큼도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물론, 이리 쉬이 죽어 없어질 괴물도 아닐 것이다.

핏빛으로 낭자한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색색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가 폐를 타고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호흡을 절제해야 한다! 희미하게 남은 이성이 어딘가 멀리서 아득하게 속살거렸다.

가까스로 호흡을 가누며 시뻘게진 짐승으로부터 몸을 돌렸다. 경련처럼 후들거리는 다리로는 좀처럼 속도를 낼 수 없었지만, 다행히 끙끙거리는 짐승의 신음 소리만 어렴풋이 따라올 뿐 더 이상 자신을 죄는 팔은 다가들지 않았다.

단 몇 걸음 만에 진료실을 벗어나 사력을 다해 뛰었다. 간신히 흐리멍덩했던 시야가 바로잡혔지만 치미는 구토감과 흥분에 좀처럼 속도를 낼 수 없는 것은 여전했다. 어떻게든 속도를 내야만 한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숨을 골랐다.

“……우…… 으아아아아아!!!!!”

멀리서 짐승의 울부짖음이 메아리쳤다. 극도의 공포감으로 저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역시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짐승과 얼마만큼 사이가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짐승 역시 필사적으로 자신을 쫓아오고 있을 터였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짐승은 어차피 접근할 때 기척을 숨기는 재주를 갖고 있는 은하 연맹 최고정예의 특수 방위군이었다. 아무리 기를 쓰고 달아나도 1분 뒤, 혹은 2분, 아니, 바로 몇 초 뒤에 자신은 남자의 품 안으로 끌려들어갈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달아나야만 한다. 지금 달아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으리라.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짐승이 섹스에 눈을 떴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은 거침없이 유린될 것이다. 무자비하고, 무지하고, 탐욕스러운 짐승에!

뚜! 뚜! 뚜우∼∼∼!

복도 천장에 설치된 통신기로부터 비상 신호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폐가 부풀어 터져나갈 지경으로 출구를 향해 질주하던 은우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뚜! 뚜! 뚜! 뚜우∼∼∼뚜! 뚜! 뚜! 뚜! 뚜! 뚜우∼∼∼∼!

[보안 등급 A-8 사태, 보안 등급 A-8 사태, 넬슨호의 각 구역을 차단합니다. 구역 차단 카운트다운 1분 전…….]

뚜! 뚜! 뚜! 뚜! 뚜! 뚜우∼∼∼∼!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을 위해 각자 숙소에서 대기해주시길 바랍니다. 기관실 승무원을 제외한 모든 승무원은 중앙 통제실이 위치한 D구역으로 모두 집결해주시길 바랍니다. 구역 차단 카운트다운 50초 전…….]

뚜! 뚜! 뚜! 뚜우∼∼∼뚜! 뚜! 뚜! 뚜! 뚜! 뚜우∼∼∼∼!

메인 컴퓨터 사라가 소름 끼치는 경보음과 함께 너무나 침착하고 상냥한 여성의 목소리로 절망을 선고하고 있었다. 짐승이 사라의 특수 보안 시스템을 작동시킨 모양이었다. 아아, 자신은 저능아인 짐승을 꽤나 얕잡아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직 D구역조차 벗어나지 못했다. 죽어라 뛴다 해도 50초 안에 넬슨호를 벗어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리라. 넬슨호를 빠져나가긴커녕 E구역으로 진입이나 할 수 있을까? 아아, 물론 불가능하겠지. 이제 고작 D구역 반을 달려왔을 뿐인걸.

[구역 차단 카운트다운 24초 전. 기관실 승무원을 제외한 모든 승무원은 중앙 통제실이 위치한 D구역으로 모두 집결해주시길 바랍니다…….]

따뜻한 액체가 화덕처럼 달구어진 뺨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간지러운 느낌에 손바닥으로 쓸고 보니 자신의 눈물이었다.

[구역 차단 카운트다운 17초 전…….]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 피식피식 웃으며 폐가 파열할 것만 같은 호흡을 고르고 있는데 문득 경보음이 사라지며 색색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짐승의 숨소리였다.

절망한 다리가 견디지 못하고 앞으로 푹 꺾이는 것이 어렴풋이 자각되었다. 잠시 휘청거리던 몸은 무릎을 꿇은 자세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봐야지 하고 실낱같이 남은 의지가 멍하니 뇌까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그조차도 연이어 울려 퍼진 짐승의 소리에 의해 말끔히 사라지고 말았지만.

[……저는 당신이 그만 야단쳤으면 좋겠습니다.]

언어 번역기가 토해내는 기계의 음성이 천장의 통신기를 타고 또박또박 흘러나오고 있었다. 짐승이 토해내는 격한 숨소리와, 지나치게 차분해서 냉정하게까지 느껴지는 기계의 음성은 폭소가 터질 지경으로 언밸런스했다.

[……당신이 야단치면 저는 슬픕니다. 도망치면 더 많이 슬픕니다. 하지만 제가 잘못했으니까 당신이 야단을 칩니다. 당신을 만지면 안 됩니다. 당신은 독신 성향의 사람입니다. 독신 성향의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만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래서 당신을 만지면 안 됩니다. 그것은 당신이 명령한 특별한 규정입니다.]

은우로부터 50여 미터쯤 떨어져 있을 D구역 통로 모퉁이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의 소리 없는 기척을 생각하면 도무지 같은 종류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추격자는 사방에 자신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군화 소리는 천장의 통신기를 통해 토해지는 격한 숨소리와 동일한 리듬을 타고 있었다. 불안정한 걸음걸이에 똑같이 불안정한 호흡 소리. 흐릿한 신음성이 섞인 부상자의 소리였다.

[……그런데 14분 전에는 특별한 규정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특별한 규정. 이상합니다. 내가 이상해졌습니다. 이상해져서 당신의 특별한 규정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나는 자위를 합니다. 지금부터 14분전에 나는 자위를 했습니다. 당신이 나를 만져서 나는 아래에 있는 배와 성기가 근질근질해졌습니다. 자위하기 전에는 아랫배와 성기가 근질근질해집니다. 6일 전부터 나는 자꾸 거기가 근질근질합니다. 당신을 생각하면 너무나 많이 근질근질합니다. 그래서 나는 성기를 만집니다. 성기를 만지는 것은 자위입니다. 나는 자위를 합니다. 배와 성기가 근질근질한 것은 성욕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특수 방위군은 성욕이 생기면 안 됩니다. 규정 위반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나는 규정을 지켜야 하는데 자꾸 성욕이 생깁니다. 일반 시민은 성욕이 생기면 연인이나 배우자와 사랑을 나눕니다. 연인이나 배우자가 없으면 자위를 합니다. 나는 연인이나 배우자가 없기 때문에 자위를 합니다. 그런데 특수 방위군은 성욕이 생기면 안 됩니다. 그래서 자위를 하는 건 이상합니다. 하지만 당신을 보면 자꾸 성욕이 생깁니다. 그래서 일반 시민처럼 자꾸 자위를 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6일 동안 매일 밤 21번을 했습니다. 규정 위반이지만 성욕이 생기기 때문에 참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자위가 너무너무 좋습니다. 14분 전엔 당신이 저를 만져서 더 많이 자위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당신이 만지면 너무 기분이 좋기 때문입니다. 성욕이 아주 많이 생깁니다. 그래서 당신을 만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특별한 규정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열심히 지켜야 하는데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규정이 잘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만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을 만지면 너무나 기분이 좋기 때문입니다. 밤에 혼자 자위하는 것보다 당신의 몸에 나의 몸을 붙이고 자위를 하는 것이 백배는 더 기분이 좋았습니다. 정말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정말 너무나 기분이 좋으니까 몸이 다 녹아서 아이스크림처럼 흘러내리는 것 같아요.]

짐승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은우는 잔뜩 부릅뜬 눈으로 모퉁이 끝을 노려보았다. 온몸을 점령하고 있는 흥분과 쇼크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의식을 한곳에 모으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승의 차분한 해명 탓인지 숨이 막힐 듯한 공포감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히스테리 상태에 빠진 육체는 변화한 감정을 배반하며 습관처럼 와들와들 떨어댔다. 차라리 공포와 직면한다면 몸이 정상을 되찾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만 정말 많이 기분이 좋아도 당신을 만지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의 특별한 규정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당신은 많이 힘듭니다. 잠도 못 자고 쓰러지게 됩니다. 나는 당신이 쓰러지는 것이 너무너무 무섭습니다. 그래서 나는…….]

6피트가 훌쩍 넘는 시커멓고 압도적인 그림자가 마침내 통로 끝에 나타났다. 50여 미터나 떨어져 있어 그 자세한 형상은 살필 수 없었지만, 조금씩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시커먼 거구의 몸은 그 자체로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공포 게임의 한 장면이었다.

반라의 상반신은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쓴 것마냥 온통 시뻘건 핏자국으로 가득했다. 얼굴 역시 외부에서 입은 상처에 은우가 입힌 상처가 더해져 피멍과 핏덩이로 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오른쪽 관자놀이와 뺨으로 이어지는 곳에 5센티 길이의 벌어진 상처가 있어 심장이 뛰는 리듬에 맞춰 조금씩 피가 솟고 있었다. 사자 갈기처럼 제멋대로 자란 새빨간 머리카락은 짐승의 어깨 아래서 짐승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파도처럼 물결쳤다. 붉은 머리와 붉은 피, 그리고 거의 적동색으로 변한 짙은 군용 팬츠까지 온통 무시무시한 괴물의 형상을 하고 있는 가운데, 표정 없는 새파란 눈동자만이 인간의 그것임을 마지못해 증거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고 있는 은우를 발견하자마자 잠깐 크게 뜨였을 뿐, 이내 평소처럼 홀린 듯한 무표정으로 되돌아와 뚫어지게 은우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붉게 충혈이 돼 있는 눈자위는 피투성이 얼굴과 상반신만큼이나 섬뜩했지만, 그것이 짐승의 눈물 때문이라는 것을 자각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나야 했다.

“……다시는 당신을 만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당신에게 꼭 달라붙어서 자위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야단치지 말아주세요. 도망가지 말아주세요.”

조금씩 거리를 좁혀오며 짐승이 수화를 재개하자 은우의 셔츠 깃에 박혀 있던 언어 번역기와 천장의 통신기에서 동시에 차분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스테레오로 울리니, 새삼 짐승의 그것이 아니라 언어 번역기의 목소리일 뿐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하긴 저리 흉측한 피범벅의 괴물이 이렇게 차분하고 얌전하게 변명을 아뢸 리가 없다. 이해를 구해올 리가 없다. 그렇지 않은가? 저건 광란한 특수 방위군일 뿐이다. 미쳐버린 도착자에 불과할 뿐인 거다.

“……저는 당신이 야단을 치면 너무 슬픕니다. 당신이 도망가버리는 것은 더 많이 슬픕니다. 제발 도망가지 말아주세요. 야단치지 말아주세요.”

짐승은 비틀거리면서도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해 어느새 3∼4미터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여전히 은우의 눈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더 이상 접근하려는 기색은 없었다. 은우가 또 야단을 칠까(아니, 실은 폭력을 휘두를까 봐) 두려워서일 수도 있고, 혹은 은우가 짐승을 두려워한다는 걸 알고 미리 조심을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짐승이 다짐하듯이 다시는 은우의 몸을 만지지 않으려는 때문인지도.

“……특별한 규정. 당신의 특별한 규정을 반드시 엄수하겠습니다. 특별한 규정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당신이 잠을 정상적으로 잘 수 있습니다. 저를 야단치지 않습니다. 도망치지도 않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꼭 특별한 규정을 지킵니다. 저는 아이큐가 많이 낮기 때문에 자꾸 잊어먹습니다. 자위를 너무 많이 좋아하기 때문에 더 많이 잊어먹습니다. 그렇지만 특별한 당신의 규정은 꼭 지킵니다. 절대로 당신을 만지지 않을게요.”

가까이서 보니 짐승의 몰골은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다. 얼굴과 몸의 어느 부위에서도 성한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사냥에서 돌아온 직후만 해도 저 지경까진 아니었는데. 봉합기와 자신의 의수는 상상 이상으로 짐승에게 강력한 타격을 입힌 모양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막무가내로 휘두른 터라 손상이 더더욱 컸을 것이다. 평소의 복종적이고 온순한 태도를 생각해봐도 짐승이 제대로 된 방어를 했을 것 같진 않다. 짐승이 조금이라도 방어의 몸짓을 취했다면 은우 역시 온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신기할 정도로 정확히 납득하고 있는 것이 또한 짐승이었다. 평소 짐승이 하는 표현을 빌면 은우의 몸은 깨지기 쉬운 연약한 달걀이었다.

“……나, 에녹 쉴스버리 이든 상병은 반드시 당신을 만지지 않을게요. 몸에 꼭 달라붙지도 않을게요. 특별한, 아주아주 특별한, 중요한 규정. 절대로 위반하면 안 되는 규정. 규정을 위반하면 벌을 받음.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규정. 규정. 아주 중요한 규정. 그러니까…….”

핏방울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액체가 짐승의 무표정한 눈시울을 타고 홍수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관자놀이의 벌어진 상처에서 솟아나는 핏방울과 어우러져 한층 더 무시무시한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더 이상 공포감은 들지 않았다. 패닉은, 서서히 물러가고 있었다. 온 넋을 사슬처럼 사로잡고 있던 히스테리도 어느 순간부터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냉정해진 정신이, 시선이, 빤히 짐승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자신을 살피고 있었다. ……아아, 도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저 어리석고 가련한 저능아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야단치지 말아주세요. 도망치지 말아주세요. 저는 너무 많이 슬픕니다. 너무 많이 무섭습니다. 저는 당신이 너무 좋아요. 너무너무 많이 좋아요. 당신을 생각하는 것이 참 좋아요. 당신을 보면 더 많이 좋아요. 당신은 참 많이 예쁩니다. 예쁜 당신을 보는 것이 정말 많이 좋은데. 당신을 보지 못하면 저는 죽어버리고 말 거예요. 죽어버릴 거예요. 자살. 자살. 자살은 나쁜 일입니다. 심각한 규정 위반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을 보지 못하면 저는 너무 많이 슬프기 때문에 죽습니다. 그러니까 도망가지 말아주세요. 제발. 당신의 특별한 규정을 위반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위반하지 않을 게요. 용서해주세요. 제발. 제발.”

피범벅인 손가락이 남자의 가슴께에서 빠르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 결과물일 언어 번역기의 목소리는 남자가 토해내는 절박감의 100분의 1도 채 표현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멍하니 들었다. 홍수처럼 눈물이 흘러 눈시울이 아플 법한데도, 남자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 은우를 향한 새파란 시선을 좀처럼 거둘 줄 몰랐다.

눈시울에 통증이 느껴져 설핏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은우 또한 울고 있었다.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해바라기하는 공룡 같은 남자의 실루엣이 점점 더 뿌옇게 흐려졌다. 눈꺼풀을 깜빡여 눈물을 떨쳐내 보지만 이내 새롭게 차오른 눈물 때문에 시야는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아아, 이게 도대체 무슨 악연이란 말인가! 이러다가 내가 먼저 저 어리석은 저능아를 죽이고 말겠구나……. 쓰라린 회한의 가운데, 서둘러야만 하겠다는 절박한 생각이 멍하니 자각되었다.

단지 자신의 몸이 유린되는 게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강간을 당하고, 폭행과 살해의 위협을 느끼고, 그리고 마침내 공포에 질린 나머지 자신은 정말로 광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바로 몇 분전에 그러했듯이. 광란한 나머지 아무런 죄책감이나 죄의식 없이 판단력이 모자란 저능아를 향해 치명적인 무기를 휘두를지 모른다. 정말로 살인을 저지를지 모른다!!!

한참 동안 석상이 된 채 눈물만 흘리고 있던 남자가 이윽고 바닥에 주저앉는 것이 보였다. 상처투성이인 몸이 몹시 고통스러운 모양으로 남자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공처럼 몸을 웅크린 채 양쪽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기왕에 흘린 피의 양만 해도 상당할 터, 당장 치료를 하지 않으면 출혈 과다로 쇼크를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었다.

……서둘러야 해…….

“……봉합해야 할 곳이 더 많아졌군…….”

흠칫.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간신히 말을 꺼내자 웅크린 남자의 어깨가 움찔 전율했다. 무릎걸음으로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남자 특유의 강렬한 사향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서둘지 않으면 미쳐버릴 거야…… 그럴 거야…….

“……미안해. 아깐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렇게 상처 입힐 생각은 없었는데…….”

팔을 뻗어 피처럼 새빨간 남자의 머리카락에 살며시 손을 댔다. 손가락은 습관처럼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남자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질 만큼의 용기는 모이고 있었다. 자신이 손을 대자 남자 역시 부르르 몸을 떨며 전율했다. 이마는 여전히 바닥에 박은 채로 은우를 쳐다보진 않았지만, 양쪽 관자놀이 부근을 휘감고 있던 손가락 중 하나를 뻗어 더듬이처럼 은우의 소매 깃을 찾아 헤맸다. 다시는 만지지 않겠다는 나름대로의 맹세를 상기시키는, 몹시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곳곳에 피가 엉겨 붙어 있는 손가락은 벌벌 떨리며 은우의 소매 깃을 생명줄처럼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울컥한 감정의 응어리가 목구멍으로 치받쳤다. 이 무자비하고, 잔혹하고, 또한 어리석으며 동시에 순수한 짐승을 연민하는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에 대한 연민인지 까닭을 알 수 없는 설움이었다.

……아아, 이게 도대체 무슨 악연이란 말인가! 언제, 어디로부터 비롯된 악연이란 말인가!

“……진료실로 돌아가자.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출혈 과다로 죽게 돼.”

목이 메어 자꾸만 툭툭 끊어지는 말투에 상냥함을 포갠다. 계산된 상냥함이지만 저능아는 속에 숨은 저의 따윈 꿈에도 눈치채지 못하리라.

“……다시 치료해주마. 그리고 이제부턴 내 특별한 규정은 지키지 않아도 되니까…….”

……제정신을 놓기 전에 서두르지 않으면…….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가락을 좀 더 아래로 내려 귓불을 어루만지자 저능아가 휘둥그레진 눈을 하고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눈물핏물로 범벅이 돼 있는 얼굴은 찢기고 부서진 채 저 비인간적일 정도의 아름다운 형태를 거의 잃고 있었다. 눈시울 깊은 곳에 들어앉아 새파랗게 번들거리는 바닷빛 눈동자만이 깊고 깊은 우물 저 아래서 빛나는 맑은 물마냥 한결같은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강간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만지는 것 정도는 허락해줄 테니까…….”

……그래…… 하루라도, 한시라도 빨리 기회를 잡으려면…….

저능아가 고개를 치켜드는 바람에 애무할 대상을 잃어버린 손가락이 허공에서 잠시 주춤거렸다. 안드로이드의 의수인 오른손. 어차피 진실과 거리가 먼 손가락. 아무리 기술적으로 완벽해도 인간의 유기체가 아닌 한 진정한 예술로는 인정되지 않는다. 단순한 생존 기능을 충족시키는 외엔 쓸모가 없는 천한 손. 거기에 천한 쓰임새가 하나 더 추가된다고 해서 새삼 안타까워할 일은 아니리라. 쓰디쓴 모멸감과 함께 망설임 없이 저능아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거짓을 가져갔다.

눈물핏물 범벅인 이마와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자 휘둥그레진 저능아의 눈은 더더욱 크기를 늘려가 거의 화등잔만 해졌다. 커다란 하늘처럼 뻥 뚫린 새파란 동공에선 여전히 홍수처럼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은우가 처음 손을 댔을 때부터 전율하듯 떨고 있던 몸은 이젠 아예 경련을 일으킨 것처럼 후들거렸다.

아아, 그래. 광란한 저능아라고 해도 슬프긴 하겠지. 기쁨도 느끼겠지. 그 슬픔과 기쁨의 종류가 어떤 것인지는 도무지 짐작도 못 하겠지만, 광란한 저능아라도 이 느닷없고 폭력적인 삶이 녹녹하지만은 않을 거다. 자신이 괴로운 것처럼, 이 이상야릇한 괴물 또한 고통을 느끼고 있으리라. 아니, 어쩜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 이상의 고통을 느끼며 몸부림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니냐.

“……어떻든 이 DITER-11에 우리 둘뿐이잖나…… 서로 협력하고 배려하지 않으면 생존 지수는 극히 낮아지겠지…… 아무리 그래도 자살을 할 수는 없잖겠어……?”

아무리 해도 위화감뿐인 사내다운 얼굴을 천천히 부드럽게 애무했다. 이마를 어루만지고, 뺨을 쓸고, 짓이겨져 피딱지가 앉은 도톰하고 섹시한 입술을 깃털처럼 가볍게 훑었다. 얼굴 탐색을 끝내고는 목덜미와 어깨를 다시금 차례로 탐색했다. 몸은 얼굴보다도 더 몸서리가 쳐지는 거부감을 주었지만 그럭저럭 참을 수 있겠다는 판단은 끌어낼 수 있었다.

저능아의 완벽한 신뢰를 끌어내지 않는 한 기회는 절대로 잡히지 않을 것이다. 한계 상황에서, 서로의 육체를 공유하는 연인이거나 피를 나눈 가족, 혹은 굳건한 우정으로 뭉친 관계가 아니면 완벽한 신뢰는 끌어낼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가족은 물론, 일반 시민과 저능아가 우정으로 뭉치는 일 또한 가능할 리가 없다. 그렇다고 연인이 돼줄 수는 더욱 없지만(맙소사, 차라리 혀를 깨물고 말지!) 연인 흉내 정도는 내줄 수 있을 거다. 영원히 떨어지기 위해서, 영원의 몇 만 분의 일 정도는 가까이 밀착해줄 용의가 있단 얘기다. 어쨌건 자신은 진화된 교양을 갖춘 일반 시민이다. 저능아 특수 방위군쯤이야 마음만 먹으면 쉬이 속여 넘길 수 있는 노릇 아닌가.

……그래. 절망할 일이 아니다. 처음부터, 다시. 마음을 더 단단히 먹고 제정신으로 살아갈 방안을 찾아야만 한다…….

끈끈하게 굳기 시작한 핏덩이가 잔뜩 묻어나는 어깨를 거듭 어루만지다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저능아의 머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온갖 체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의 감촉에 역시 소름이 끼쳤다. 머리카락 색깔까지 타오르는 핏빛이라니.

부지불식간에 달려드는 혐오감은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사라지기는커녕 시시각각 더해가리란 걸 안다. 혐오하고 또 혐오하다 못해, 증오하다 못해 자신의 이성을 광란으로 이끌 악연이다. 그러니 더더욱 참지 않으면 안 되리라.

“……흐…… 아…… 우…… 으…… 아아……!”

짐승의 괴성이 저능아의 목구멍을 울리며 터져 나오고 있었다. 울부짖음 소리 같기도 하고, 벅찬 환희의 소리 같기도 한 이상야릇한 괴성이었다. 자신이 머리를 안아 든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빳빳하게 굳어든 몸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여전히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만지는 것을 허락해주긴 했지만 아직 겁을 내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이토록 심하게 두들겨 팼으니 자신을 못 믿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일어나자. 빨리 치료해야 돼.”

“……우…… 우아…… 아아아…….”

“……도망치지 않아…… 그러니 자살한다는 소린 그만둬…… 알지?”

“……우…… 으윽…… 흣…… 윽…….”

“……우린 한배를 탄 거야…… 서로 돕지 않으면 정말 둘 다 죽게 될지도 모른다구…….”

“……으…… 윽…… 웃…….”

“……나도 네가 필요해…….”

“…….”

“……진짜야, 에녹…… 솔직히 네가 없으면 누가 매일 식량을 조달해주겠나…… 안 그래……?”

“…….”

“……그동안 심술을 부린 건 처음 출발이 나빠서 그랬던 거고…… 아무튼 오늘을 계기로 나도 좀 달라질 테니까…….”

“……아…… 그, 구…… 우…….”

“……괜찮아…… 만져도 된다고 했지? 미리 말하기만 하면 놀라지 않으니까…… 그래, 별로 기분이 나쁘지도 않으니까…….”

“……우…… 우…… 아…….”

수초처럼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 틈으로 오른쪽 의수를 밀어 넣는다. 아껴주고 있다고, 연인이 되어줄 수도 있다고, 달콤하고 유혹적인 애무로 거짓을 속삭여준다. 거짓된 손으로 거짓을 얘기한다. 그러니 괜찮다. 참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 손으로 피아노는 절대 치지 않을 거다. 더럽혀진 손으로는 절대로. 두 번 다시.

있는 힘껏 깨문 입술 위로 뜨거운 액체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공처럼 자신의 품 안에서 몸을 웅크린 채 저능아 역시 펑펑 울고 있었다. 머리카락 속을 더듬고 있던 손을 좀 더 아래로 내려 저능아의 등을 끌어안는다. 실제 손과 구분해낼 수 없을 만큼 잘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의 의수를.

제대로 안기 위해 상체를 앞으로 숙여 저능아의 어깨 위에 얼굴을 묻었다. 뜨겁고 축축한 피부가 뺨을 짓뭉개는 것마냥 혐오스럽다. 다행히 코가 마비된 모양인지 구토가 치밀 정도로 역한 짐승의 냄새는 별로 자각되지 않는다.

사랑스럽다는 듯, 한껏 애정을 담아 짐승의 어깨 위에 뺨을 비벼댔다. 온통 딱딱하게 솟아 있는 근육의 감촉이 역겹다는 생각이 저 멀리서 스쳐갔다.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자 복받치는 눈물이 굳어버린 감정을 대신했다.

애무를 더해갈수록 큭큭거리는 짐승의 괴성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진저리를 치며 은우는 짐승을 안은 팔에 더더욱 힘을 가했다.

……피아노는 다시는 치지 않을 거다…… 그래…… 오늘부턴 눈길조차 주지 않아…… 이 거짓된 손으로 널 만지는 일은 결코 없을 거다…… 결코…….

2297년 6월 19일.

넬슨호가 행성 DITER-11에 낙오된 지 9개월째.

광란한 짐승은 지구로의 구조 요청 신호마저 중단시킨 상태였다. 웜홀 진입 좌표를 송신하지 못한 상황에서 구조 요청 신호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런데 남자는 그 유일한 희망마저 잘라내버렸다. 불시착한 이래 계속 쏘아 올려지고 있던 신호를 꺼버린 짐승의 의도는 물론 일목요연했다. 죽을 때까지, 아니, 어쩌면 죽고 나서도 영원히, 짐승은 행성 DITER-11에 은우와 짐승 스스로를 가둘 작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랬다. 구조는 거의 가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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