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2297년 7월. 이은우(李誾踽) (118/129)

7. 2297년 7월. 이은우(李誾踽)

“……내일은 나도 함께 나갔으면 하는데……?” 

반듯한 정자세를 한 채 열심히 음악에 취해 있는 남자를 향해 은우는 줄곧 기회를 노리며 별러왔던 말을 꺼냈다.

“……식재료 채취하러 나가야 하지 않아? 나도 같이 가도 괜찮겠지?”

꽤나 음악을 좋아하는 것 같은(그것도 상당히 높은 수준의 고급 음악이 취향이었다, 저능아 주제에!) 남자는 어딘가 먼 곳을 헤매고 있는 듯한 아련한 시선으로 은우를 응시했다. 몽환적이면서도 바보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그것은, 남자가 좀처럼 음의 선율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때 짓곤 하는 특유의 아름다운 표정이었다. 22세기의 천재적 작곡가 에른스트 에코가 리바이벌한 바흐의 칸타타가 휴게실 안을 장엄하게 진동시키고 있었다. 은우 역시 나름대로 음악에 감동을 받고 있는 상태라 남자의 심취가 그리 고까워 보이지는 않았다. 보름 전에 입은(은우 역시 그에 가세하기도 한) 지독한 상처들도 어느새 거의 나아서, 남자는 오른쪽 관자놀이 부근에 열 바늘을 봉합한 자국 외엔 저 인간 같지 않은 아름다운 외모로 고스란히 되돌아와 있었다. 아름다운 음악에 취한 아름다운 인간이라니,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 봤다면 남자의 모습에 경탄을 넘어 경이까지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녁 식사를 끝낸 후 휴게실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듣는 것은 어느새 남자의 일상(실은 새로운 복무규정)으로 정착해 있었다. 물론 은우 역시 남자의 시야를 벗어날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된 일정이었다. 음악에 배반당했다곤 하지만 좋아하는 천성만은 억누르기 힘든 은우로서도 이 시간만큼은 남자에게 불평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즐기고 있었다.

“……계속 우주선 안에만 있었더니 답답해서 그래. 진짜 햇빛을 본 지도 꽤 오래되었으니까…….”

“넬슨호 밖은 많이 위험합니다. 생존 지수가 50퍼센트대로 급락하게 됩니다. 생존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 시민은 원래의 50퍼센트에 30퍼센트의 수치가 더 가산됩니다. 저는 당신이 위험해지는 것이 기쁘지 않습니다.”

한동안 소처럼 눈을 껌뻑이며 의식을 집중하는 듯하던 남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네가 옆에서 지켜주면 되잖아. 특수 방위군의 생존 지수는 상당히 높게 나온다고 사라가 그러던데?”

저절로 고동을 빨리하는 심장을 의식하며 은우는 최대한 태연하게 물음을 던졌다. 처음 내비친 외출 의사였기에 남자가 어느 정도는 긴장을 하리라 여겼었지만 의외로 남자의 태도는 조용했다. 그것만으로도 일단 첫 시도는 성공인 셈이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역시 생존 지수가 많이 낮기 때문에…….”

“이봐, 나도 전엔 일상적으로 사냥을 나갔었다구. 몇 번이나 식재료 채취에 동원됐지만 아무 일도 없었어. 게다가 이번엔 네가 함께 있잖아. 별일이야 있겠어?”

“……하지만…….”

“넬슨호 안이 답답하게 느껴진다니까. 설마 날 여기 계속 가둬둘 생각은 아니겠지? 넌 지구로 보내는 구조 신호도 끊어버렸잖아. 그렇다면 나더러도 영원히 이 별에서 살란 소리인데, 서서히 이곳 환경에 생체 리듬을 적응시켜야 하지 않겠어? 그러려면 외부에서 지내는 시간을 점차로 늘려야만 한다구.”

“……그렇지만……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당신은 다치게 됩니다. 저는 그것은 무섭습니다. 당신이 다치는 걸 보는 것은 저는 많이 기쁘지 않아요. 당신이 다치는 걸 보면 심장이 쑤십니다. 당신은 3월 13일 식재료 채취 작업 때 F-16구역의 숨은 골짜기에서 구른 사건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 심장이 많이 쑤셨습니다.”

“그 정도라면 다친 것도 무엇도 아니야. 솔직히 네가 사냥을 나갈 때에도 매일 그 정도는 상처를 입고 들어오면서 뭘 그래? 솔직히 아직도 날 못 믿어서 그러는 것 아닌가?”

토라진 듯 볼멘소리를 내자, 다급하게 수화를 시도하려던 남자가 잠시 멈칫했다. 기계의 무표정을 한 핸섬한 얼굴이 다시금 한쪽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곤란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고동을 빨리해가던 은우의 심장은 반대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곤란해한다는 건 기회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남자가 지금 당장 허락을 하지 않아도 며칠 안으로 허락이 떨어지리란 것은 일목요연했다. 단둘이 거의 하루 종일 붙어서 생활하는 동안 남자의 버릇이며 습성이며 생각들을 제 속보다도 더 확실하게 파악하게 된 은우였다. 괴물은 저능한 만큼 단순해서, 은우가 미끼를 던지면 던지는 대로 확실히 반응하고 있었다.

지난 20여 일 남짓, 은우의 태도가 고분고분해지고 친절해지자, 남자는 넬슨호와 외부를 연결하는 출입 독을 제외한 모든 지역의 출입 독을 개방해서 은우의 자유로운 이동을 허락해주었다.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채 은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모습도 요즘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비로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물론 그렇기에 은우는 서두를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신뢰란 하루아침에 쌓이는 것이 아니다. 괴물의 신뢰를 얻어내기 위해선 자신 역시 괴물을 믿는 척 스스로를 속여야만 했다. 호감을 느끼고 있는 척,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척, 몸도 마음도 거짓의 세례로 흠뻑 적셔져야만 한다.

“……됐어. 네가 정 걱정스럽다면 할 수 없지. 일단 나도 생존법들을 부지런히 익히고 있으니까, 넬슨호 밖으로의 외출은 내가 좀 더 생존 지수를 높인 후에 하도록 하지.”

달래듯 덧붙이자, 당혹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은우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남자의 새파란 눈이 번쩍 하고 빛을 발했다. 크고 맑은 푸른 눈시울에 힘이 들어가며 은우의 얼굴을 삼킬 듯이 들여다본다. 남자가 기쁠 때 짓곤 하는 특유의 눈빛과 무표정이었다. 가련한 영혼. 남자의 자폐증은 남자로부터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웃음마저 빼앗아간 듯했다. 이젠 제 손바닥 이상으로 환하게 읽히는 남자의 표정을 들여다보며 은우는 자신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한순간 남자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 바로 다음 순간, 스스로의 감정 과잉 오버 연기를 한껏 비웃긴 했지만.

“여기서 음악 더 들을 텐가? 난 이제 학습실에 갈 생각인데…….”

떨떠름한 심사로 자리를 털며 남자에게 물음을 던졌다. 어느새 다시 음악에 취해 몽환적이 된 눈이 은우를 홀린 듯 응시했다. 은우를 따라가고픈 욕망과 자유롭게 보내줘야 한다는 은우의 새로운 규정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빛이 역력했다. 은우가 남자를 적절하게 조정하며 받아낸 약속들 가운데 하나는 ‘학습실에서의 공부와 훈련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었다. 일단 한번 약속을 한 사항에 있어서는 꽤나 성실하게 지키고 있는 남자로서는 학습실행(行)으로 인한 이별은 식재료 채취나 취침 시간 때의 이별들과 마찬가지로 견디기 힘든 인내의 시간일 것이다. 무표정한 가운데 간절한 눈빛이 ‘좀 더’를 호소하고 있었다. ‘좀 더’ 함께 있고 싶다고. ‘좀 더’ 바라보고, ‘좀 더’ 어루만지고 싶다고.

정자세로 테이블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남자의 오른손이 주춤주춤 뻗어와 은우의 소맷부리를 어루만졌다. 그저 옷자락만 만지고 있을 뿐 피부에 직접 접촉을 하는 일은 없다. 역시 ‘강간하지 않을 것’과 ‘갑자기 껴안거나 키스하지 말 것’의 규정을 의식한, 성실하다 못해 고지식하기까지 한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나는 너랑 달라서 부지런히 적응 훈련을 하지 않으면 안 돼. 빈둥빈둥 놀 틈이 없다구.”

또다시 남자를 동정해버리는 자신에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달래듯 덧붙였다. 쉬이 동정할 남자가 아니다. 32명의 시민을 살해한 살인마가 아니더냐. 언제 어느 때 다시금 광기를 드러낼지 알 수 없는 이상야릇한 저능아 말이다.

“조난이 장기화되고 있으니까 메크로늄 추출기 공사도 재개해야 하고. 난 건축 노동자지 공학도가 아니거든. 추출기 공사를 마무리 지으려면 기초부터 기술을 익혀둬야 한다구.”

추출기가 완성되기도 전에 넬슨호와 남자로부터 영원히 떨어지게 되겠지만 어느새 입버릇이 된 거짓말은 천연덕스럽게 잘도 흘러나왔다. 추출기 공학 기술을 익히고 있는 게 아니라 외지에서의 생존법을 습득하느라 여념이 없다는 것을 알면 남자는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남자를 보기 좋게 따돌리고, 남자가 찾을 수 없는 행성 반대편으로 날아가 비밀 캠프를 설치할 계획이라는 걸 알면. 남자가 사라에게 명령해 중단해버린 지구로의 구조송신도 다시 시도할 요량이라는 걸 알면. 남자는 절망할까? 은우 자신을 영원히 보지 못하게 되면 죽어버릴 거라고 말했던 것처럼, 절망한 나머지 혹시라도 자살을 하는 것은? 아니면 미쳐버리는 것은? 아아, 저능아도 미칠 수가 있을까? 상처를 받기도 하는 것을 보면 미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럼 한 곡만 더 듣고 갈까? 아직 시간도 이르니까.”

막 연주가 끝난 칸타타의 선율을 되뇌며 적선하듯 되묻자 남자의 푸른 눈에서 다시금 영롱하게 별이 번쩍거렸다. 어린아이마냥 순수한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죄책감과 더불어 다시금 처연하단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거듭 마음이 흔들리는 스스로가 무서워져서 슬쩍 바닥으로 시선을 피했다. 죄책감은 무슨. 자그마치 32명이나 죽인 괴물이라구. 입술을 깨물며 익숙한 독기를 끄집어내려 애썼다.

“……게임실에 갑니다. 당신과 제가 함께 갑니다.”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번역기가 동시에 울렸다. 남자를 외면한 채 속으로 복잡한 심사를 곱씹고 있던 터라, 당장은 남자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임실에 갑니다. 함께 갑니다.”

어리둥절해서 남자를 응시하니 남자는 어느새 은우 곁으로 다가와 은우의 소맷부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역시 기쁨의 별이 번쩍번쩍했다.

“……무슨…… 게임실? 버추얼 게임실?”

“네, 버추얼 게임실에 갑니다. 함께 갑니다. 게임실에서 한 곡 더 들을 수 있습니다.”

옷깃에 달린 번역기에선 나지막하고 침착한 목소리가 새어나왔지만 은우의 소매를 끌어당기는 남자의 태도엔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기쁨으로 인한 흥분이었다.

“실사 연주를 보며 음악을 듣고 싶은 거야? 에른스트 에코의 실황은 재생 상태가 나빠. 버추얼로 봐도 별로 실감이 안 난다구.”

은우의 부정적인 대꾸엔 아랑곳없이 남자는 은우의 소맷부리를 움켜쥔 채로 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의기양양 흥분한 남자의 태도는 흡사 즐거운 소풍에 참가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뛰다시피 앞서가는 남자에게 허겁지겁 이끌리면서도 별로 짜증스러운 기분은 들지 않았다. 짜증보다는 시시각각 남자에게 동정심을 일으키는 스스로의 우유부단한 감정 상태에 더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단숨에 은우를 게임실 안으로 끌어들인 남자가 잡고 있던 은우의 옷소매를 놓더니 컴퓨터에 시뮬레이션 넘버를 입력하는 것이 보였다. 저능아가 버추얼 게임 같은 고감도 게임을 즐긴다는 것도, 또 게임 시뮬레이터를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도 기묘해서, 은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의 행동을 주시했다. 남자가 입력 완료 버튼을 누르자 게임실 내부는 순식간에 21세기형 사교 클럽으로 돌변했다.

슈트와 드레스 차림을 하고 있는 가상의 남녀들로 가득 들어찬 홀의 모습에 멍하니 방기된 시선을 주고 있던 은우는 문득 뇌리를 스치는 기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불길한 데자뷔에 몸서리가 쳐지며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맙소사……! 그러고 보니 자신은 그 일 이래로 게임실엔 발길조차 하지 않았다!

“……무…… 무얼…… 하…… 하…… 하…… 하는…….”

너무나 화가 치밀어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발끝에서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있단 말인가. 그때와 똑같은 시뮬레이션이었다. 21세기형 재즈 클럽. 똑같은 군중에, 똑같은 실내 풍경. 필립이 쳐주기를 부탁했던 똑같은 그랜드 피아노가 홀 한가운데에 유혹적인 자태로 놓여 있었다.

눈을 꼭 감은 채 부정하듯 기계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시선을 피해보지만 역부족이었다. 감은 눈꺼풀 안쪽으로 피아노 다리 옆에 나뒹굴고 있는 필립의 시체가 보였다. 휘둥그렇게 까뒤집어진 눈망울. 반쯤 벌어진 입술 끝으로는 빨간 핏줄기가 턱 아래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단숨에 은우의 이성을 집어삼킨 악몽은 좀처럼 은우를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체가 된 필립의 모습이며, 남자가 필립의 목을 부러뜨리는 끔찍한 장면들이 뇌리에서 쉴 새 없이 리플레이 되고 있었다.

“음악. 고급 음악. 까만색 음악 기계. 음악을 만들어주세요. 한 곡. 당신의 음악.”

셔츠 깃의 번역기가 울린다.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괴물의 의사를 대신 전달해주는 실로 비정하기 짝이 없는 기계였다.

“……이…… 피…… 피아노는…….”

……피아노는 다신 치지 않아…….

자연스레 대꾸하고 게임실을 나오면 된다고, 차가운 이성이 폭주하려는 감정을 타이르고 있었다. 지난 20일간 애써 이룩한 괴물과의 신뢰를 잃는 행동을 해선 곤란하다고. 그러나 비등점까지 새빨갛게 차오른 분노는 이성의 소리를 무시했다. 아니, 제대로 들리지조차 않았다. 듣고 싶지도 않았다.

“당신의 음악. 아름다운 음악. 한 곡을 만들어주세요. 그때처럼. 저는 음악이 좋은데 당신의 음악이 제일 좋아요.”

열띤 몸짓으로 수화를 마친 괴물이 다시금 은우의 소맷부리를 잡아끄는 것이 느껴졌다.

“손대지 마!!!!!”

악에 받친 고함 소리와 함께 저도 모르게 괴물의 손을 쳐냈다. 시체를 파먹는 수많은 구더기가 온몸을 기어 다니는 것만 같은 혐오감에 극심하게 몸서리가 쳐졌다. 어째서 화가 나면 눈시울까지 뜨거워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고, 은우는 치를 떨며 눈을 깜빡여댔다.

은우의 사나운 반응에 움찔 긴장하는 괴물의 기척이 느껴졌다. 얼굴조차 보고 싶지가 않아서 바닥으로 시선을 내린 채 허둥지둥 게임실 밖으로 몸을 돌렸다. 괴물의 손이 다급하게 팔꿈치를 잡아왔다.

짜악!!!

반사적으로 날아간 손바닥이 괴물의 뺨을 치는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손대지 말랬지?!!!!!”

얼얼한 충격이 손바닥을 거쳐 손목과 팔 안쪽의 신경줄을 타고 찌르르하니 전달되었다. 내리뜬 시야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괴물의 커다란 발이 밟혀들었다. 군함처럼 거대한, 실로 무지몽매한 살육자다운 발이라고 이를 갈았다.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정도로 괴물이 증오스러워 눈물이 났다. 한순간이나마 괴물을 동정했던 자신이 기가 막혔다. 가슴이 발기발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손대지 마…… 내 몸에 손대지 마…… 손대지 말라구…….”

간신히 내뱉은 목소리엔 마음속에 품은 화염 같은 독기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독기가 진짜로 독이 되어 괴물을 쓰러트릴 수 있다면 자신은 괴물을 이미 몇 번이나 죽이는 데 성공했을 것이다. 하긴 무자비한 살육을 감행한 장소와 시간을 고스란히 재현하고도 죄책감은커녕 자각조차 못 하는 둔하고 어리석은 괴물이 마음만의 독기를 자각이나 하랴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게임실을 빠져나왔다. 혹시라도 괴물이 따라올까, 폐가 터질 것처럼 달렸지만 뒤를 따르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괴물이 부재한다는 판단은 버린 지 오래인 자신이었다. 곁에 없어도 늘 괴물의 존재를 곁에 느꼈다. 곁에 있을 때의 찐득찐득한 광기 서린 집착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남자의 위험성을 자각할 때마다 원죄처럼 다가드는 공포감이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싫다! 싫다! 아아, 싫어서 견딜 수가 없어!!!

지난 20여 일간의 필사적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있었다. 뿌리 깊은 불신과 공포감보다도 더 견딜 수 없는 건 아마도 이 절망감일 것이다. 후려치듯 단숨에 의지를 꺾어버리는 막막한 어둠. 괴물의 무지와 무심함은 너무나 간단히 은우의 가면을 부서트려 버렸다. ……조금만 더 참아볼 것을……. 공포와 절망을 비집고 뒤늦은 후회가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목을 졸랐다.

‘연인 흉내’라는 견디기 버거운 연기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재시작은 처음보다 더 힘겨울지도 모른다. 혐오감을 참으며 남자를 어루만지고, 구토증을 내리누르며 남자의 사향 냄새를 들이마시지 않으면 안 된다. 처음보다 더 다정하게. 상냥하게. 만져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포옹이나 키스까지 해줘야 할지도 모른다. 혹은 섹스까지 필요할지도.

눈시울을 뜨겁게 달군 눈물이 뺨을 타고 굴러 떨어졌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고 암담한 나머지 후회를 곱씹을 기력조차 없었다.

숙소가 보였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다시피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잠가봤자 남자가 마음만 먹으면 자물쇠는 쉬이 열릴 터였다. 어떡해도 자신은 남자의 덫에 걸린 쥐새끼였다.

결심을 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 쓰러지듯 잠에 빠진 지 두어 시간 남짓, 소스라치듯 깨어 일어난 은우는 숨을 몰아쉬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남자가 햇빛을 완전히 차단하는 차양을 내린 모양인지, 방 안은 잠들기 전과는 달리 어둠침침한 스탠드 불빛만이 뿌옇게 떠돌고 있었다. 시곗바늘은 오후 2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구의 자전 주기로야 한밤중이지만 밖은 아직도 습하고 뜨거운 열대의 땡볕이 쏟아지고 있을 것이다.

심장이 몹시 두근거리고 전신의 근육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얼굴이며 등줄기며 식은땀 범벅인 것을 보니 지독한 악몽 속을 헤맨 것 같은데, 꿈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나마 꽤 휴식이 됐는지 머릿속은 명료했고, 잠들기 직전까지 뇌리를 점령하고 있던 아득한 절망감도 홀연 사라지고 없었다.

두근두근 뛰는 심장 고동에 맞춰, 아직은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홀연 희망이 노크를 했다. 침대 머리맡의 파자마로 얼굴의 땀을 훔치며 결심을 세우는데도 그저 작업에 나갈 때처럼 담담한 기분만 들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면, 섹스라는 극약 처방으로 남자의 신뢰를 되찾아 오는 건 쉬운 일일 것이다. 아깐 잠시 몸 컨디션이 나빴을 뿐이라고 상냥한 변명을 날린 다음 안아줘야지. 그야, 혐오감으로 치가 떨리겠지만 삽입 섹스만 아니라면 그럭저럭 참을 수는 있을 거다. 어차피 경험이 없는 버진이 아닌가. 키스와 수음 정도로도 놈은 자지러지겠지.

욕실로 들어가 땀범벅인 몸을 말끔히 씻어냈다. 조난된 이래 단 한 번도 쓰지 않은 아로마 향수도 몇 방울 몸에 뿌렸다. 옷매무새도 최대한 단정한 차림으로 신경을 썼다. 상의는 남자가 좋아하는 색인 흰색의 아마 셔츠를 입고, 하의는 건축 작업을 할 때 입곤 하는 특수 코팅된 카고 바지를 걸쳐 입었다. 리드는 자신이 하겠지만 혹시라도 흥분을 주체 못한 남자가 강간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므로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작업용 카고 바지는 사람의 힘으론 찢을 수도 없고, 웬만해선 강제로 벗기기도 힘든 옷이었다. 물론 남자가 의지를 세운다면 아주 못 벗길 리 없을 테지만, 은우는 그전에 남자를 만족시킬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독신 성향이라지만 자신 역시 남성의 섹스를 타고난 몸이었다. 남성의 욕망과 쾌락의 메커니즘이라면 여느 남성과 다를 바가 없는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었다.

결심을 굳히고, 몸을 씻고, 그리고 옷을 다 갈아입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더 빨리 준비를 마칠 수 있었을 게다.

다만 준비하는 내내 여전히 빠른 심장 박동이 좀 마음에 걸렸다. 차가워진 머리 대신 몸이 패닉을 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계속 스스로를 분석하려 들었다간 또 채찍처럼 절망감이 떨어질 것만 같아, 기억나지 않는 악몽의 영향이리라고 서둘러 납득해버렸다.

긴긴 밤이 될 것이다. 감정과 판단과 생각을 끊어낼수록 그나마 견디기 수월할 터였다.

방을 나서기 직전 다시 한 번 시계를 확인했다.

26시 18분. 남자 역시 잠자리에 들었을 시각이었다. 단 한 번도 남자가 자는 숙소로 찾아간 적은 없지만, 남자가 며칠 동안 자신의 침대로 끼어들었을 때의 규칙적인 수면 습관을 생각하면 거의 확실했다.

자신이 찾아가면 남자는 놀랄 것이다. 아니, 워낙에 상식이 통하지 않는 저능아이니, 그저 그 크고 천진해 보이는 눈망울을 희번덕거리며 기뻐 날뛰기만 할지도 모를 일. 혹은 (가장 바람직스럽지 않은 반응이지만) 겁에 질려 잔뜩 움츠러든 채 은우의 저의를 의심할지도. 색다른 처벌법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몸에 손을 댈 때마다 강력한 거절이 떨어졌으니(거절이라기보다는 대개 거침없는 폭력이) 이때까지의 경험만을 생각한다면 남자가 그렇게 의심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남자는 논리적 사고력이 부족한 저능아였다. 상처는 입지만 상처를 통해 배우고 진화하는 능력은 결여돼 있다. 그리고 은우가 아직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까닭도 바로 남자의 그런 특수한 핸디캡 덕분이었다. 남자의 무지와 순수성은 한편 남자의 막강한 무기였지만, 반대로 은우에게도 유리한 방패가 되어주고 있었다. 실로 기가 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출입문을 열고 숙소를 빠져나왔다.

복도는 은우의 숙소와 마찬가지로 어둠침침하게 느껴질 정도로 조도가 한껏 낮춰져 있었다. 복도 한쪽 끝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창문엔 은회색의 육중한 차양이 내려져 있었다. 평상시처럼 눈을 찌를 듯한 햇빛을 각오하고 있던 은우는 기묘한 위화감에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익숙한 체취가 희미하게 맡아져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들릴 듯 말 듯한 미세한 소음도 들려왔다. 소음은…… 소음 역시 익숙해져버린 누군가의 숨소리였다. 가뜩이나 세동을 거듭하던 심장이 더더욱 빠르게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한껏 예민해진 더듬이가 익숙한 자취를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숨소리도 체취도, 모두 지나쳐온 은우의 숙소 출입문 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출입문 오른편에서 1미터쯤 떨어진 곳에 설치돼 있는 비상 탈출 캡슐 앞에서였다. 탈출 캡슐 앞쪽에 5미터 정도의 빈 공간이 있어, 숙소 안에서 걸어 나오던 중인 은우로서는 쉬이 발견하기 힘든 사각 지대인 셈이었다. 만약 복도 창문에 차양이 내려져 있지 않았다면, 별로 위화감을 느낄 새도 없이 그냥 지나쳐갔을 터였다.

사방 2미터 크기의 커다란 계란 모양인 비상 탈출 캡슐 아래, 크고 시커먼 덩어리가 보였다. 6피트가 조금 넘어 보이는 그 덩어리는 자세히 보니 군인들이 사용하는 야전(野戰) 침낭이었다. 침낭 옆에는 완벽하게 군장이 갖춰진 야전 배낭과 무기들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벽 쪽으로 늘어져 있는 침낭 말미에 5센티쯤 비어져 나온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속도를 높여가던 심장이 일순 아래로 뚝 떨어졌다. 낯익은 숨소리도, 체취도 모두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자가 언제부터 자신의 숙소 문 앞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침낭 옆을 가지런히 지키고 있는 군장의 완벽함으로 미루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경악, 염증, 공포, 혐오, 연민, 증오, 분노, 슬픔, 체념, 납득, 이해, 그리고 다시 증오……. 수만 가지 격렬한 감정들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늘 은우보다 먼저 일어나 문 밖에서 아침 식사가 준비됐다는 언어 번역기 소리로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남자였다.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남자를 먼저 자겠다는 핑계를 대며 반강제로 숙소에서 몰아내는 쪽은 은우였다. 긴 밤, 숙소 밖에서의 남자가 무슨 짓을 벌이는가는 은우로서도 알 수 없었고, 또 알고 싶지도 않았었다. 이렇게 집 지키는 개처럼 자신의 숙소 앞에서 진을 치고 있을 줄이야, 차마 상상도 못 했다.

한동안 남자의 침낭 옆에 그대로 못 박힌 채 은우는 회오리처럼 휘몰아치는 감정들을 삭이느라 고심했다. 분노를 드러낼 수도, 혐오감과 공포감을 드러내는 것은 더더욱 할 수 없었다. 여기서 또 감정대로 움직였다간 남자와 자신 간의 신뢰는 회복 불능의 것이 될 터였다.

짧게, 그러나 확실하게 남자를 설득하면 기회는 쉬이 잡힐 거다. 빠르면 며칠, 길어봐야 한 달 정도. 그러면 자신은 자유다. 모든 준비는 거의 마친 상태였다. 일단 넬슨호만 벗어나게 되면, 외부에 정박해 있는 유일한 수송선을 잡아탈 수만 있게 되면, 그 이후는 만사 오케이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스럽고, 또한 가련한 짐승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있다.

한참 동안 호흡을 가다듬으며 필사적으로 자기최면을 걸었다. 남자와의 섹스도 그리 혐오스럽지는 않을 거라고, 견딜 만할 거라고 애써 다독였다. 조금 더 불쾌한 육체노동일 뿐이라고.

“……에…… 에…… 녹……?”

목소리는 탁하긴 하지만 그럭저럭 상냥하게 끄집어내졌다. 침낭 머리맡에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않아 남자의 어깨 부근에 손을 가져다댔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몹시 상냥하고 다정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요, 몸짓이었다. 잠시 전의 격렬한 감정적 동요가 가라앉고 나니 한결 더 용기가 솟았다. 착 가라앉은 냉정한 이성이 어딘가 배후에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성은 잘하고 있다며 은우를 격려하고 있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어?”

“……ZZZ…… ZZ…….”

“……에녹……? 에녹, 일어나…….”

“……ZZZ…… ZZ…….”

“……에녹!”

“……Z…… 아…… 우…… ZZ……?”

“……맙소사, 여기서 자고 있었어? 언제부터?”

“……아…… 우아……? 읏!!!!!”

남자의 눈꺼풀이 나른하게 몇 번 깜빡이더니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로 코앞의 은우를 비로소 자각한 듯싶었다. 남자가 단숨에 상반신을 일으키는 바람에 은우는 기겁해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역시 본능적인 혐오감과 공포감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라고, 심하게 술렁거리는 심장을 가까스로 다독이며 은우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침낭의 지퍼가 목까지 채워져 있기 때문인지 상반신을 세운 남자는 중심을 잡기까지 심하게 몸을 뒤뚱거렸다. 물론 그조차도 지퍼를 찢어발길 듯이 열고 순식간에 침낭을 빠져나온 남자의 기세는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팽개치듯 침낭을 벗어 던진 남자가 번들거리는 푸른 눈으로 황홀한 듯 은우를 굽어보고 있었다. 마치 점호를 받는 사병처럼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몸짓이며, 아직 잠이 채 달아나지 않은 나른한 눈꺼풀이며, 모든 몸짓이 남자의 혼란과 기쁨을 고스란히 증거해주고 있었다. 무언가 규칙(혹은 규정)에서 벗어난 상황이긴 한데 이유는 알 수 없는, 그러나 그럼에도 이 예외적인 상황이 기뻐서 견딜 수 없는 것 같았다.

남자의 허둥거림 덕분에 은우는 한결 더 침착해져서, 냉정하게 머리를 굴리며 남자를 관찰했다. 역시 어제 저녁의 사건은 남자에게 그리 대미지를 주지 않은 듯싶었다. 20여 일 만의 냉랭한 거절이었지만, 남자는 저능아다운 단순한 논리로 그저 자신이 뭔가 또 야단맞을 ‘규정 위반’을 저지른 것이라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은우를 바라보는 기계적인 눈동자 속에선 여전히 은우에 대한 극진한 애정과 헌신과 복종의 감정들이 조용하면서도 열렬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매일 여기서 잔 거야? 내가 쫓아냈을 때부터?”

“…….”

남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들기 전에 샤워를 했는지 남자의 불타는 것 같은 새빨간 머리카락은 선인장처럼 사방으로 뻗쳐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자라버리는 수염이 남자의 강인한 턱선과 인중에 어둑한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번쩍번쩍 빛이 나는 푸른 눈도, 뻗친 머리카락도 마냥 천진하게만 보여 은우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동정심을 느끼는 편이 혐오감과 공포심을 품은 채 남자를 만지는 것보단 그나마 견디기 수월할 테니까. 물론 얄팍한 동정심이니만큼 남자의 아주 사소한 몸짓 하나만으로도 자신은 혐오와 공포 심리로 되돌아갈 것이다. 변덕스러운 DITER-11의 허리케인처럼, 남자의 행동도 예측 불허였고 그에 따라 휘둘리는 자신의 감정 역시 한가지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내가 잘못했어…….”

주저나 회한이 심장을 짓누르기 전에 후려치듯 말을 꺼냈다. 남자의 고개가 옆으로 갸웃하니 기우는 것이 보였다. 은우의 사과나 제안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듯, 파도처럼 새파랗게 춤추고 있는 푸른 눈이 뚫어버릴 기세로 은우의 눈을 응시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자는 건데…… 내가 너무 고집을 부린 모양이로구나…….”

어차피 저능아와 제대로 된 소통은 불가능하겠지. 멍하니 비아냥을 흘리며 남자의 팔에 손을 가져갔다.

부드러우면서도 탄성이 느껴지는 군용 재킷 소매가 만져졌다. 붉은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화려한 견장이 어깨와 왼쪽 가슴에 붙어 있는 은회색 재킷은 남자의 그림 같은 외모와 어우러지니 무슨 최신 유행의 고급 슈트 같은 느낌마저 주었다. 재킷 안쪽의 검정 티셔츠도, 다리에 찰싹 피트 되는 검정색 군용 팬츠도 몹시 우아하고 아름다워 보여서 도무지 군복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소매를 쥔 손가락에 좀 더 힘을 가하자, 소매 아래 남자의 탄탄한 근육으로 뭉친 팔뚝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랐는지 남자의 몸이 움찔 긴장하며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휘둥그레진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잡은 팔을 놓지 않았다.

“……괜찮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살며시 속삭이자, 남자의 눈이 더더욱 휘둥그레졌다. 팔뚝을 잡고 있던 손가락을 어깨로 이동시켰다. 부드럽게, 어루만지듯이 쓸어 올리자 남자의 기계적인 무표정은 그야말로 얼이 빠진 듯 멍청한 얼굴로 변했다. 낯빛이 하얗게 질리는 게 보였다.

나머지 한 손을 들어 남자의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바짝 굳어든 몸이 만져졌다. 허리와 겨드랑이 틈을 거쳐 등줄기를 유혹적으로 오르내리며 애무를 보내자 남자가 흐느낌 소리 같은 탁한 신음성을 토해냈다.

온통 돌처럼 단단한 근육밖에 만져지지 않는 늠름한 사내다운 몸이 강아지처럼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영락없는, 겁에 질린 숫처녀의 기색이라 속으로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은우에게 그토록 공포감을 주는 광란한 살육자이건만, 이 순간 살육자에게 공포감을 주는 쪽은 도리어 은우 자신인 모양이었다.

“……괜찮다니까…….”

달래듯 속삭이며 남자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반항은커녕 어떤 대응도 엄두가 안 나는지 뻣뻣하게 굳은 채 벌벌 떨고 있는 거구의 몸은 놀라울 정도로 가볍게 안겨들었다. 은우보다 한참은 덩치가 큰데다 키도 커서, 안는다기보다는 도리어 남자에게 안긴다는 말이 더 적당한 표현이었지만.

“……우…… 으…… 아…… 아아…….”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진 남자의 웅얼거림이 귓가에 신음처럼 토해지고 있었다. 경악과 기쁨과 두려움과 의문과 애정이 남자의 온 넋을 송두리째 들끓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축 늘어져 있는 두 팔을 뻗어 마주 안을 생각은 차마 못 하는 듯했지만 아랫배에 닿아 있는 남자의 생식기는 이미 극도로 부풀어 있었다. 피부에 닿아오는 단단한 기둥이 바르르 떨고 있는 것이 선연했다. 울컥 치밀어 오른 혐오감을 지그시 내리누르며, 남자를 안은 팔에 와락 힘을 주었다.

“흐윽……!”

아래를 찌르는 생식기의 감촉과 함께 남자가 음란한 탄성을 토했다. 위협적으로까지 느껴지는 딱딱한 감촉에 속으로 몸서리를 치는 자신에 비례해서 남자의 흥분은 점점 더 극으로 치닫고 있는 듯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안심해…….”

“……우…… 우…… 흡……! 흐아……!”

“……만져도 돼…… 기분 좋지……?”

“……우…… 아아! 흑……!”

“……더 기분 좋게 해줄 수 있어…… 안으로 들어가자…….”

남자를 숙소로 끌고 들어가기 위해 살짝 몸을 떼자, 남자가 기겁한 듯 팔을 뻗어왔다. 은우가 떨어질 것이라 예상한 모양인지 그때까지 미동도 않고 은우의 행동을 수수방관하던 남자가 마침내 반응을 보였다.

어마어마한 악력이 상반신을 조여오고 있었다. 델 듯 뜨거운 체온과 코를 찌르는 사내의 체취가 노도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찰싹 달라붙은 남자의 하반신이 경련하듯 은우의 치부를 후려쳐댔다. 삽입 시의 피스톤 운동과 똑같은 그 원색적인 몸짓은, 발정기의 성욕을 주체 못 해 툭하면 발기해 허리를 흔들어대는 수캐처럼 음란하면서도 비참해 보였다. 은우의 왼쪽 목덜미 한가운데 들이박힌 남자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무턱대고 은우의 피부 위에 비벼지고 있었다. 애무라기보다는 역시 몸부림에 가까운 짐승의 욕구요 열기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뻣뻣한 수염 자국이 가득한 남자의 뺨이며 턱에 아픔보다는 혐오감을 더 많이 느꼈다. 질척한 타액을 줄줄 흘리며 탐욕스럽게 목덜미를 핥아대는 남자의 혓바닥도 혐오스러운 나머지 몸서리가 쳐졌다. 물론 그렇다고 고개를 비틀어 남자의 접촉을 피해버리는 어리석은 반응은 단연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기회를 차버리는 어리석은 짓은 단 한 번으로 족했다.

“……침대에서 하는 거야, 섹스는…….”

남자의 무지몽매한 기세에 자꾸만 뒤로 활처럼 휘어지는 상반신을 가까스로 가누며 상냥하게 속삭였다. 남자의 귓가에 숨을 불어넣으며 등줄기와 엉덩이를 부드럽게 쓸어주는 손동작도 멈추지 않았다.

“……그만…… 침대로 가자니까……?”

“으…… 우…… 윽, 윽……! 큭……!”

“……옷을 벗고 하면 더 즐거워져…… 내 말 믿지, 에녹……?”

“우아아아아!!!”

다시 한 번 몸을 떼어내려 하자, 뱀처럼 은우를 친친 감은 거구의 야수가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질러댔다. 부러트릴 것처럼 상반신을 조여오는 통에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들 지경이었다. 발작과도 같은 격렬한 흥분 상태였다. 당장 사정을 하게 해주지 않는 한 남자를 떼어내긴 힘들어 보였다. 하긴. 숙소 침대에서 은밀하게 하건, 사방으로 통해 있는 우주선 복도에선 하건, 장소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거대한 타이탄인 넬슨호는 물론, 지구보다 세 배는 클 행성 DITER-11에 인간이라곤 자신과 남자 단둘뿐이었다. 거기다 수치를 아는 분별력을 인간의 필요조건에 포함시킨다면 오로지 자신 하나뿐이란 얘기가 된다.

남자의 탄탄한 엉덩이를 주무르고 있던 손을 천천히 앞으로 이동시켰다. 남자의 몸을 단단히 감싸고 있는 군용 팬츠의 앞섶은 손가락 하나를 지퍼 틈에 끼워 넣는 것만으로 쉽게 벌어졌다. 대신 몸에 딱 피트 되는 디자인이라 그런지 벨트를 풀어도 허벅지 위에서 멈춘 허리춤은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았다. 완전히 남자를 벗기는 것은 포기하고 그대로 생식기에 손을 가져갔다.

뜨겁고 강하고 지칠 줄 모르는 흉기가 손바닥 안에 가득 들어찼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움켜쥔 뒤 손가락으로 뿌리까지 쓸어 올리자, 발정한 짐승은 듣기에도 민망한 교성을 소리소리 질러댔다. 온몸을 경련하듯 떨며 남자가 맹렬하게 허리를 흔들어대는 통에 익숙한 공포가 고개를 들었지만, 다행히 남자는 은우의 행동에 수동적으로 따라올 뿐이었다. 소년 시절 곧잘 하곤 했던 자위의 기억을 더듬어 손가락의 강약을 조절하자 남자는 훌쩍거리기까지 하며 온몸의 힘을 풀었다. 은우의 손놀림에 따라 허리를 흔들어대고, 어린애처럼 필사적으로 매달려왔다. 숨을 틀어막는 악력으로 상반신을 조여오던 남자의 양팔은 은우의 양쪽 어깨 위에 늘어진 채 스스로의 체중을 지지하는 데만 사용되고 있었다. 역시 경험이 없어선지, 그리 뛰어난 테크니션이라곤 할 수 없는 은우의 손놀림에도 남자는 자지러졌다. 은우의 목덜미에 처박힌 얼굴은 불덩어리처럼 달아올라 경련하고, 온몸의 털이란 털은 다 곤두선 것처럼 전율을 흘리고, 무아지경으로 벌어진 두툼한 입술에선 쉴 새 없이 쾌락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예상에서 크게 빗나가지 않는 남자의 반응에 서서히 안도하며 은우는 정점을 향해 속도를 높였다.

“흐아아아아!!!!!”

남자의 생식기를 감싸 쥔 지 2분이 채 됐을까 말까 할 무렵, 남자가 마침내 숨넘어가는 괴성을 토해냈다. 남자의 손이 틀어잡고 있는 어깨가 바스러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픔이 가해졌다. 줄곧 은우의 목덜미에 포개져 있던 남자의 고개가 뒤로 활짝 꺾였다. 불룩하게 도드라진 남자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단단한 엉덩이 근육이 악어 꼬리처럼 힘차게 율동하고 있었다. 남자의 허리가 서너 번 튕겨 올라가는가 싶더니 이내 은우의 손바닥 안으로 따뜻한 액체가 쏟아졌다.

“……으…… 흑…… 윽…….”

남자의 다리가 앞으로 푹 꺾이며 은우에게 온 체중을 걸어왔다. 부서트릴 것처럼 어깨를 죄고 있던 남자의 손이 아래로 떨어지더니 이내 은우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은우를 뒤로 밀듯이 휘청거리는 거구의 몸은 산사태가 덮치는 것처럼 답답하고 압도적으로 느껴졌다. 다리에 잔뜩 힘을 주고 있긴 했지만 워낙에 체격 차이가 심해 은우는 한동안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기 위해 애썼다.

심하게 몸을 떨며 남자는 사나워진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얼굴을 은우의 목덜미에 파묻고 있어 표정을 살필 수는 없었지만 희미하게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은우의 목덜미를 적시는 뜨뜻한 액체의 정체는 땀과 타액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울 정도로 좋았다는 건가 하고 은우는 냉정한 머리로 남자를 관찰했다. 남자의 흐느낌이 섹스의 만족감을 증거하고 있는지는 잘 알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불만족한 기색 또한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쨌든 남자로선 처음이었다. 그것도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안겨 최초의 오르가슴을 맞았으니 다른 여러 가지 불만족스러운 핸디캡들은(이를 테면 은우의 솜씨 없음이랄지, 그저 수음에 불과한 섹스랄지 하는) 상쇄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은우 또한 동정을 바친 첫 번째 여자친구의 얼굴은 잊었지만, 그녀와의 전율스러웠던 섹스 체험은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첫 경험이란 확실히 세상의 중심축이 뒤바뀌는 메가톤급 충격인 법이다. 테크닉이 딸린다든지, 혹은 삽입 섹스가 아니라든지 하는 문제는 역시 별로 신경을 쓸 일은 아니다.

자신이 그녀를 추억하듯이 남자가 10년쯤 후에 자신을 추억할까,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물론 생각할수록 독한 혐오감으로 마음이 차갑게 얼어붙을 뿐이었다.

은우는 싸늘한 비웃음을 흘리며 기쁨으로 전율하는 거구의 짐승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남자의 땀과 정액으로 더럽혀진 손가락을 남자의 화려한 군용 재킷 위에 대충 닦아내기 위한 몸짓이었다. 물론 남자는 이 역시도 상냥한 애무의 하나로 받아들일 것이다.

조금씩 제정신이 돌아오는지 남자의 축 늘어졌던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은우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도 다시금 강한 악력이 가해지고 있었다.

“……들어가서 자야지? 아니면 한 번 더 하고 싶나?”

부드럽게 몸을 뒤로 빼며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남자의 등줄기를 어루만지던 양손을 앞으로 가져와 여전히 목덜미 속으로 파고들려고 하는 남자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온통 붉게 상기된 아름다운 얼굴은 음탕한 정사의 자취로 선연했다.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푸른 눈이며 땀범벅인 이마와 콧등, 타액으로 촉촉하게 젖은 채 부풀어 오른 입술까지, 더 이상 섹스를 모르는 어린애의 순순한 표정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이슬 같은 눈물이 조용히 솟고 있는 붉은 눈시울만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어리바리한 표정으로 멍하니 은우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의 몸에 자진해서 손을 뻗어준 은우의 행동이 이상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이다. 어쩌면 겁을 집어먹었을 수도 있었다.

물론 남자가 아무리 저능한 머리를 쥐어짜도 은우의 저의를 읽을 수는 없으리라. 아, 물론 친절하게 ‘특별한 저의’를 설명해줄 은우도 아니었다.

……넌 그저 내가 봉사해주는 대로 얌전히 따라오면 되는 거야…….

속으로 싸늘하게 일갈하며 남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춥. 가볍게 아랫입술을 빠는 소리가 경쾌했다. 살짝 내리뜬 눈꺼풀 너머, 또다시 휘둥그레지는 남자의 눈시울이 보였다. 부드러운 미소를 흘리며 다시 한 번 남자의 입술에 키스했다. 찝찔한 맛에 토악질이 날 것만 같았다.

“……또 하고 싶은가 보군.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구…….”

속내를 알 리가 없는 남자에게 녹아드는 미소를 흘려주며 속삭였다. 흘낏 아래로 시선을 내리니, 남자의 드러난 치부는 어느새 다시금 발기해 활처럼 위로 치솟고 있었다. 실로 드물게 거대하고 단단한, 그 얼굴처럼 흠 하나 잡을 데 없는 아름다운 흉기의 모양새에 치를 떨면서도 은우는 가면 같은 웃는 얼굴을 바꾸지 않았다. 까짓 조금 더 불쾌한 육체노동일 뿐이 아니더냐.

제법 단호한 몸짓으로 팔을 끌어당기자 남자는 조금 비틀거리며 은우를 따라왔다. 앞섶만 벌어진 군용 팬츠 틈으로 잔뜩 발기해 덜렁거리는 페니스가 불편한지 남자의 걸음걸이는 유난히 불안정하게 보였다. 물론 봐주지 않고 더더욱 거칠게 남자를 끌어당기는 은우였다. 숙소 안으로 들어서서도 의외의 규정 위반 사태에 안절부절못하는 남자를 방치한 채, 부러 느릿느릿 침대를 정돈하고 갈아입은 옷가지들로 어지러워진 방 안을 치웠다.

슬쩍 보니 남자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진 않고 있었다. 뺨에 걸린 눈물이 간지러운지 쓱쓱 닦아내면서도 발기한 치부는 가릴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실로 저능아다운 모습이라 역시 싸늘하게 비웃어주었을 뿐, 은우는 남자의 당혹과 혼란을 태연히 지켜보았다. 역시 은우의 심사를 알 길 없는 남자는 늘 그렇듯이 홀린 듯한 시선으로 은우의 행동만을 해바라기처럼 좇았다.

벗어둔 옷가지 외엔 별로 치울 것도 없는 숙소를 5분 가까이나 꿈지럭거리며 정리했다. 정리를 끝낸 후에는 숙소 문 밖에 내팽개쳐진 남자의 침낭이며 군장들을 안으로 옮겨 들였다. 남자를 받아들인다는, 아니, 남자의 연심을 수긍하고 연인이 되어준다는 무언의 의사 표시였다. 그제야 어렴풋이 은우의 의도를 알아챈 것 같은 남자는 기쁨만도 아니고 당혹한 것만도 아닌, 그러나 확실히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을 만들고 있었다. 자기의 군장은 자기가 철저히 관리해야 하는 특수 방위군이건만, 당장의 패닉을 소화하기에도 바쁜 남자는 그저 은우의 행동만을 망연자실 지켜볼 뿐이었다.

숙소 한편에 남자의 짐을 차곡차곡 부리고 나니 더 이상 꾸물거리며 남자를 괴롭힐 소스가 없었다. 실내의 조도를 한껏 낮춘 다음 느릿느릿 남자에게 다가갔다. 거의 방 안의 형태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조도를 낮춘 덕분에 남자의 당혹하고 얼빠진 표정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창피한 줄 알아야지…….”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남자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남자가 역시 펄쩍 뛰듯 몸을 긴장시키며 기쁨의 신음을 흘렸다. 힘주어 안으니 여전히 거세게 불끈거리는 남자의 생식기가 아랫배를 찔러댔다.

“……일반 시민은 발기한 생식기를 이렇게 여봐란 듯이 자랑하진 않아.”

말속에 숨은 비웃음을 알 길 없을 남자는 귓가에 속삭여지는 은우의 일침에도 부르르 몸을 떨며 황홀한 열락을 드러냈다. 대답처럼 부들부들 떨리는 남자의 양팔이 은우의 상반신을 와락 껴안았다. 역시 뼈를 부러트릴 기세의 강한 악력. 섹스의 테크닉도 모르고, 부드럽고 상냥한 애정 표현 또한 한 번도 해본 적 없을 짐승스러운 포옹이었다. 파들파들 떨고 있는 몸 안쪽, 맹렬하게 팔딱거리는 남자의 심장 고동이 맞붙은 가슴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졌다. 잔뜩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몸은 이미 경험한 쾌락에의 기대로 미칠 것처럼 흥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연인을 안으면 곤란해. 팔의 힘을 풀고, 부드럽게…… 옳지. 연인을 아프게 하고 싶진 않겠지?”

허리에 둘러진 남자의 팔을 쓰다듬으며 남자를 달랬다. 숨이 막힐 것처럼 강하게 상반신을 죄던 남자는 단숨에 팔의 힘을 풀었다.

“……야단치는 거 아니야. 안아도 되긴 하지만 좀 더 부드럽게 하라는 거지.”

속삭이듯 덧붙이자 벌벌 떨고 있던 팔이 다시금 조심스럽게 힘을 가해왔다. 명령들에 거의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남자에 은우는 점점 더 자신감이 생겼다. 생각했던 이상으로 남자는 다루기가 쉬웠다.

“……그래, 잘했어. 그렇게 하는 거야. 내 말대로만 하면 서로 기분 좋은 섹스를 나눌 수가 있지. 어때? 내 말대로만 하겠다고 약속하겠나?”

은우의 어깨 위에 파묻혀 있던 남자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그래, 착하다…….”

강렬한 사향 냄새가 진동하는 남자의 목덜미 사이에 살짝 키스를 하며 속삭였다. 남자의 몸이 또다시 부르르 떨더니 아랫배를 찌르고 있던 생식기가 좀 더 위로 치솟았다. 남자의 허리께에 닿아 있던 손을 천천히 위로 끌어올려 재킷을 움켜쥐었다. 뒷걸음질 치듯 침대로 걸음을 옮기자, 남자는 여전히 은우의 상반신을 감싸 안은 채 뒤뚱거리며 따라왔다. 중심을 잡기 힘들 텐데도 팔을 풀려는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은우 역시 남자가 사랑스럽다는 듯, 포옹을 풀지 않은 채 뒷걸음질만 했다. 거추장스럽고, 냄새 나고, 혐오스러운 거구의 몸이지만 싫은 내색은 눈곱만큼도 보이지 말아야 한다.

마침내 침대 발치에 도착해 거추장스러운 거구의 몸을 침대로 밀었다. 서로 포옹한 채여서 은우의 몸 역시 남자의 몸 위로 함께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침대 스프링의 출렁거리는 진동에 맞춰 남자의 큭큭거리는 교성이 귓가를 때렸다. 은우의 등 뒤를 휘감고 있는 팔이 흔들거리는 두 사람의 몸을 단단히 고정하고 있었다. 가슴이며 아랫배며 치부까지 단 한곳도 빈틈이 없을 정도로 착 달라붙어 숨이 막히다 못해 구토증까지 치밀었다. 남자의 긴 다리마저 나무뿌리처럼 엉키듯 은우의 다리를 휘감고 있었다. 남자의 뜨거운 체온이 전해져 어느새 은우의 얼굴은 땀범벅이었다. 더 힘들어지기 전에 빨리 끝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위기의식이 느껴졌다.

“……아까처럼 기분 좋게 해줄 테니까 조금 떨어져봐.”

속삭이듯 명령했지만 남자는 이번엔 어쩐 일인지 바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은우의 목덜미에 축축한 얼굴을 비벼대며 감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복잡하게 얽힌 다리 사이 치골 부분에 발기한 물건을 비벼대니 점입가경이 아닐 수 없었다.

“……말 들어. 내 말대로만 하겠다고 약속했잖아…….”

“……우…… 우아…… 흑…….”

초조해지려는 심사를 참으며 재차 속삭이자, 남자는 흐느끼듯 불만의 웅얼거림을 토해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의 입술은 어느새 은우의 목덜미를 탐욕스럽게 빨아 당기고 있었다. 쯥쯥거리는 타액 소리와 가쁜 숨소리, 그리고 서로의 옷감이 부딪치는 소리가 조용한 숙소 안을 음란하게 울려대고 있었다. 젠장.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둘까 보냐.

“……내 말 안 들을 거면 즐거운 섹스는 못 해.”

잠시 동안 남자가 하고픈 대로 내버려두다가 조금 냉정한 어조로 내뱉었다. 저능아 주제에 눈치는 있는지 남자는 단숨에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쳐들었다. 흐릿하게 거무스름한 음영으로만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30센티쯤 위에서 은우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독신 성향이랬잖아. 너무 달라붙으면 괴로워진단 말이다.”

“!!!!!”

“네가 좋긴 하지만 다른 사람과 달라붙는 건 습관이 돼 있지 않아. 말했지? 억지로 하게 되면 잠도 못 자고 쓰러지게 된다구. 그러니까 내가 익숙해질 때까지 너도 협조를 해주지 않으면 곤란하다구.”

“……우……! 우아아……! 아……!”

“……괜찮아, 야단치는 거 아니야. 이제부터라도 내 말에 따라주면 되는 거니까. 알겠어?”

“……우으…… 으…… 웃…….”

“내가 만지라고 할 때까진 날 만지지 마. 키스도 하지 말고. 힘줘서 껴안는 것도 곤란해. 대신 내가 널 만져줄 테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웅얼거리는 불분명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고개가 위아래로 크게 끄덕여졌다.

“그래. 자, 이리 와.”

“…….”

남자의 어깨를 끌어당겨 서로 마주 보는 자세를 하고 모로 누웠다. 남자는 거의 피크까지 발기한 욕망으로 헐떡이면서도 얌전히 은우의 말에 복종했다. 밀어내는 은우의 소맷부리를 안타까운 듯이 꼭 움켜쥔 채 나머지 한 손을 자신의 치부로 가져가고 있었다. 더 이상 참기 힘들었는지 자위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같은 수컷의 성을 가진 자신이기에 지금 이 순간 남자가 얼마나 괴로울까를 생각하면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 사정직전에 여자에게 밀쳐진 꼬락서니와 한가지였으니 말이다.

……조금 더 불쾌한 육체노동일 뿐이라…….

적선하듯 남자의 손에 자신의 손바닥을 포개며 은우는 심술궂은 생각을 흘리고 있었다. 분명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체험일 테지만 자신은 어쩌면 이를 즐길 수도 있다고. 자신의 뜻대로 남자를 조종하며 괴롭히는 재미에 푹 빠질지도 모른다고. 물론 그 바로 다음 순간, 은우는 자신의 그런 저열함과 야비함에 비참한 자괴감을 동시에 느껴야만 했다.

도대체 자신은 어디까지 떨어질 것인가. 온화하고 조용한, 도무지 타인이나 타 생명체에게 적대감이라곤 품어본 적이 없던 본래의 평화로웠던 자신은 어디로 갔는가. 아니, 실은 이것이 자신의 본모습은 아닐까? 심술궂고, 무자비한 복수심에 불타며, 눈곱만큼도 용서를 모르는 차가운 인성. 애초부터 독신 성향이라는 것 자체도 의심스럽지 않은가. 어째서 보통 사람처럼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는가. 어째서 타인의 접촉을 싫어하는가. 조용하고 온화한 게 아니라, 실은 관계하고 싶지 않아서 마음을 닫는 게 아닌가.

그렇게 자신에게 혐오감이 깊어질수록 그것은 또한 역으로 남자에 대한 증오로 변태를 거듭했다. 남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일생 모르고 지나갔을 결함이었다. 일생 모르고 만족하며 살았을 영혼의 그늘이었다. 이 순간, 은우는 남자와 자신을 동시에 증오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남자의 손등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간질이자 남자가 끙끙거리는 괴성을 토해냈다. 30센티쯤 떨어져 있는 남자의 얼굴은 땀과 눈물과 침으로 흐릿하게 빛나고 있었다. 희뜩희뜩 보이는 새하얀 눈자위는 은우의 얼굴만을 삼킬 듯이 주시하고 있었다. 남자의 손을 완전히 치우고 자신의 손가락으로 페니스를 완전히 감싸 쥐자 남자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흔들며 울부짖었다. 은우의 셔츠 소맷부리를 움켜쥔 손가락은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은우의 얼굴로 고스란히 떨어지는 남자의 뜨거운 숨결은 금방이라도 과호흡증을 일으킬 것처럼 심하게 헐떡거렸다. 은우를 안고 싶은 욕망으로 거의 광란 상태에 빠지고 있는 듯했지만, 남자는 필사적인 의지로 스스로의 광기를 참고 있었다. 욕망과 고통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평소에도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남자는 그에 대한 생생한 산 증거처럼 보였다. 사디스틱한 기쁨이 은우의 신경줄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갔다.

힘을 주어 뿌리까지 훑어 올렸다. 폐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신음이 남자의 목울대를 울리며 터져 나왔다. 부지런히 용두질을 해주자 남자는 고개를 사방으로 흔들며 쾌락과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경기 들린 것처럼 흔들거리는 남자의 머리를 품 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남자의 뜨거운 체온에 가슴이 데는 것만 같았다. 온통 땀범벅인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거칠게 쓰다듬자 남자는 괴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허리를 흔들었다. 셔츠 깃에 남자가 마구 얼굴을 비벼대는 바람에 은우의 앞섶은 금세 습기로 축축해졌다. 남자는 또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홍수처럼 펑펑 쏟아지는 눈물이었다. 혀를 내밀어 입술이 닿는 부위마다 은우의 가슴팍을 개처럼 핥고 있었지만 타액만으로는 이렇게 자신을 적실 수 없을 터였다. 광란하고 있는 얼굴과 하반신과는 별개로 남자의 두 손은 사슬에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한 손은 은우의 소맷부리를, 한 손은 재킷 앞자락을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허락이 떨어지기까지는 만지지도 껴안지도 말라는 명령을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입술 끝에 미소가 걸렸다. 복수심에 불타는 야비한 웃음이었다. 방 안이 어두워 남자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되었다.

“우으…… 큭……! 흐악……!!! 흐아아아……!”

절정을 향해가는 남자의 괴성이 시끄러워 저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역시 남자가 보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가슴팍에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들어박힌 남자의 얼굴 덕분에 남자의 커다랗게 벌어진 입이 그대로 전달이 됐다. 정열을 가장해 남자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뒤 약간의 틈을 만들었다. 본능적으로 다시금 얼굴을 파묻으려고 하는 남자에게 머리카락을 아프도록 쥐어뜯는 것으로 제재를 주었다. 물론 막 오르가슴에 이른 남자는 아픔조차 못 느끼는 듯싶었다.

남자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손가락과 페니스를 움켜쥔 손가락에 동시에 힘을 주었다.

“크으…… 흑……! 크아아악!!!!!!”

숨넘어가는 야수의 비명이 숙소 벽을 타넘어 넬슨호 구석구석 퍼져갔다. 인간이라곤 단둘뿐인, 아니, 자신 혼자뿐인 유령선이었다. 야수가 살해한 32명의 원혼이 넬슨호 구석구석에서 야수의 고통스러운 포효를 듣고 있을 터였다.

조금만 기다리라고, 은우는 조용히 뇌까렸다.

곧 당신들의 복수를 해주겠노라고, 무지하고 무자비한 살육자에게 최고의 형벌을 내려주겠노라고, 독하게 맹세를 전했다.

꿈틀거리는 야수의 생식기로부터 뜨겁고 끈적끈적한 정액이 피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은우의 오른손을 흥건하게 적시고도 흘러넘친 야수의 씨앗은 청결하게 세탁된 은우의 침대 시트를 마음껏 유린하고 있었다.

어차피 버려질 침대라고 비웃었다. 죽은 유령들과 야수 한 마리만 어슬렁거릴 숙소라고. 조만간 인간은 아무도 살지 않으리라고.

그랬다. 넬슨호는 인간으로부터 영영 잊힌 우주선이 될 터였다.

“……그만해. 지치지도 않는 거냐, 넌? 정말 발정 난 원숭이 같구나.”

잠에 취한 허스키한 음성으로 쏘아붙이자 등 뒤에 달라붙어 있던 남자가 움찔 몸을 굳혔다.

조도를 제로로 해둔 실내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잠이 든 시각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꽤 숙면을 취한 듯 피로감은 없었다. 타인과 거의 몸을 맞댄 채로 숙면을 취한 자신이 좀처럼 믿기 힘들었지만 어쨌든 숙면 후의 기분 좋은 나른함이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아마도 일어날 시간이 한참은 지났을 것이다.

잠결에 옷을 벗어 던진 모양으로 은우는 아랫도리에 팬티만 걸친 상태였다. 거의 벌거벗다시피 한 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남자 또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가슴이며 팔이며 배며 다리 할 것 없이, 은우를 친친 휘감고 있는 남자의 몸엔 까칠한 체모가 가득했다. 엉덩이 틈으로 은밀하게 비벼지고 있던 남자의 뜨거운 치부로도 무성한 치모가 생생하게 자각되었다.

불쾌하고 역겨운 느낌은 여전했지만 더 이상 공포감이나 불안감은 들지 않았다. 어젯밤부터 새벽녘에 이르기까지, 긴긴 시간 동안 남자를 상대해주는 사이, 남자가 은우에게 결코 위험한 종류가 아니란 사실을, 적어도 성적인 면으로는 뼛속까지 각인할 수가 있었다.

은우의 손에 의해 셀 수 없을 만큼의 절정을 맞고도 남자는 조금도 지칠 줄을 몰랐다. 긴 밤 내내 스스로가 토해낸 정액으로 온몸이 범벅이 돼서도 툭하면 발기를 해대는 남자에 먼저 지쳐 떨어진 쪽은 은우였다. 아마도 대여섯 번째쯤은 될 오르가슴에 헐떡이며 괴성을 질러대는 남자를 마지막으로, 은우는 기절하듯 잠이 들었었다. 침대 위에 축 늘어진 은우의 손을 다시금 치부 사이로 가져가는 남자의 몸짓을 어렴풋이 감지한 게 어젯밤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자신이 잠들고 나서도 남자는 자위를 반복하며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운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도 모자라 남자는 또 이렇게 은우의 등에 달라붙었다. 한창때의 청년이 난생처음으로 섹스의 쾌락을 배웠으니, 어느 정도 빠져드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기가 막힌 나머지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은우를 품에 안은 포즈로 남자는 모로 누워 있었다. 남자의 한 팔은 은우의 머리를 괴고 있었고, 나머지 한 팔은 허리를 타 넘어와 아랫배에 걸쳐 있었다. 허락 없인 달라붙지 말라는 약속을 의식한 듯 포옹에 힘을 주고 있진 않았지만, 어느 모로 보나 두 사람의 몸뚱이는 접착제로 붙여놓은 형상이었다.

팬티 속에서 봉긋 솟아 있는 은우의 치부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고 있는 남자의 손가락이 느껴졌다. 허리에 둘러진 남자의 나머지 한 손이었다. 엉덩이 안쪽 깊은 골짜기 틈에 발기한 섹스를 비벼대는 몸짓도 마냥 도둑처럼 은밀하고 조심스러웠다. 얇은 팬티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남자의 거대하고 위험스러운 흉기는 난폭함을 숨긴 채 억제된 쾌락을 구하고 있었다. 물론 그 모두 은우가 잠에 빠진 줄 알고 몰래 한 짓거리였을 것이다. 자기로서야 최대한 조심한다고 했겠지만, 맙소사, 그게 도대체 언제까지 숨겨질 수 있단 말인가.

“……그만 떨어져. 잠 좀 제대로 자자구.”

재차 날카로운 일침을 던지자, 한동안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경직시키고 있던 남자가 주춤주춤 뒤로 몸을 빼는 것이 느껴졌다. 은우의 사타구니 틈을 더듬고 있던 손가락도 허리춤으로 물러나 머뭇거리며 은우의 팬티 끝을 만지작거렸다.

제동을 걸지 않으면 남자는 밤이나 낮이나 물건을 세워댈 기세였다. 하루 한두 번은 참을 만하겠지만, 맙소사! 하루 24시간 남자의 발기한 생식기만 만지작거린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했다. 확실히 쐐기를 박아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잠도 안 자고 쉴 새 없이 해댔다간 일어설 기력도 없어질 거다. 사냥도 못 나갈 거야. 사냥도 못 나가면 날 어떻게 먹여 살리려고 그래?”

설사 3일 밤낮을 새운대도 기력이 떨어질 짐승은 아니지만 은우는 한껏 위협조로 덧붙였다.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몸을 긴장시키는 것이 느껴졌다. 다소 과장된 위협임에도 남자는 액면 그대로 믿는 눈치였다. 은우의 팬티 끝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이 단숨에 떨어져나가고, 남자가 허리를 흔드는 통에 삐걱거리던 침대 스프링 소리도 서서히 사라졌다. 새삼 남자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이제 눈 좀 붙여. 나중에 또 기쁘게 해줄 테니까.”

남자의 가쁜 숨소리가 차츰 고요해지고 있었다. 정수리 근처에 남자의 숨결이 닿고 있는 걸 보면 그리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적어도 피부 어느 곳에서도 남자의 체온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의 가는 숨소리나, 땀 냄새와 정액 냄새가 뒤섞인 남자의 강렬한 체취만 아니라면 남자가 자신의 침대 위에 함께 누워 있다는 사실도 별로 자각하지 못할 것 같았다. 긴 밤 내내 함께 있은 탓인지 남자의 체취에도 별로 위화감이 들지 않았다.

……남자에게 익숙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설핏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자각에도 자기혐오보다는 오히려 편안한 마음이 되는 자신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익숙해진다면 그만큼 연기하기도 쉬워진단 얘기다.

나른한 수면욕이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지구 시간으로 치면 아침 9시가 넘었을 것이다. 외부에서의 생존법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익히려면 시간은 꽤나 촉박한 편이었다. 일어나 부지런히 하루 일과를 시작해야 하지만 모처럼 쏟아지는 단잠이 안타까웠다. 이렇게 마음 편히 단잠을 자본 것이 도대체 얼마 만이란 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부터 남자의 생식기를 만져주는 건데…….

달콤하게 쏟아져 내리는 단잠을 욕심껏 붙잡으며 은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점점 침몰해 들어가는 의식의 끝으로 머리카락이 당기는 듯한 희미한 접촉이 느껴졌다. 봄바람처럼 여리고 조심스러운, 거의 자각하기도 힘든 미세한 터치였다. 남자가 뒤에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만두라고, 단 한 마디 명령이면 남자는 기겁해서 손을 거둘 테지만 어쩐지 그럴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토록 자신에게 접촉하고 싶어하고, 애정을 구하고, 또 그리움과 욕망에 몸부림치면서도 거의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저능아 주제에, 아니, 실은 저능아라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철저하게 약속을 지키려는 근성 하나는 존중해줘도 마땅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남자가 살인극을 벌인 이래, 아니, 실은 남자를 처음 본 이래로 은우는 지금 이 순간 어쩌면 처음으로 남자의 존재를 납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인정이 처음으로 남자에 대한 확고한 통제력을 자각한 시점이라는 것도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은우가 남자를 그토록 두려워하고 경계하고 또 거부했던 까닭은 어쩌면 자신으로선 남자를 도무지 감당할 수 없다는, 남자는 그 어떤 존재에게도 통제되지도, 또 지배되지도 않으리라는 무의식적인 선입견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그 선입견이자 판단은 유효했지만, 남자의 일부분에 있어선 은우가 완벽한 통제력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통제력을 이용해 자신은 남자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낼 터였다.

깃털이 내려앉은 것처럼 간질간질한 감촉이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간간이 키스 소리 비슷한 미세한 소음이 들리는 걸 보면 남자는 은우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래도 여전히 불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얼마 안 있으면 영영 혼자가 될 테니 이 정도는 봐줄 수도 있지…….

속으로 적선하듯 남자에게 던지는 비아냥엔 심술궂은 교만함이 담겨 있었다. 물론 자신의 그런 저열한 감정에도 별로 죄의식이 들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평화스럽게만 생각되었다.

잔뜩 억눌린 듯한 남자의 미세한 숨소리를 몽롱하게 헤아리며, 은우는 달콤하고 어두운 잠의 터널로 깊숙이 빠져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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