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2297년 8월. 에녹(Enoch Salisbury Eden)
“……넣는 건 아직 안 돼. 상처가 낫지 않았단 말이다.”
엉덩이 사이 깊은 골짜기를 손으로 더듬으며 키스를 하자 그가 입술 사이로 불평을 말했다. 아직 잠에 취해 있어서 그런지 목소리가 무척 나지막하고 허스키하게 들렸다. 약간 부은 눈꺼풀도 아직 꼭 감겨 있는 채다.
욕망과 안타까움으로 허리 아래가 타는 듯했지만 어젯밤과 다름없이 그저 엉덩이 사이에 대고 문지르는 것으로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기뻐서 하늘로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 같다. 이렇게 그의 예쁘고 부드러운 몸에 자신의 몸을 꼭 붙이고 거기를 비빌 수 있는 것만 해도 꿈을 꾸는 것처럼 믿어지지가 않는다. 이렇게 그의 가는 허리를 꼭 끌어안고 어루만지고 입술로 빨아도 그가 밀쳐내지 않는다. 화내지 않는다. 야단치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이대로 껴안고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너무너무 기쁘고 행복한 기분이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것도 소원하는 기분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그의 등에 몸을 꼭 붙이고 아래를 비비면, 한 번씩 왔다갔다 비빌 때마다 몸이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만 같다. 눈을 감으면 진짜로 떠오르는 착각이 생긴다. 그래서 계속 눈을 감은 채 온몸이 터져버리는 것 같은 그때(그는 그때가 오르가슴이라는 곳으로 올라간 때라고 가르쳐주었다)가 올 때까지 열심히 허리를 흔든다.
충분하다. 이것만으로도 자신은 더 이상 소원이 안 생긴다. 그래서 잠깐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도 참을 수 있다. 그가 허락을 해준다고 해도 자신은 그를 또다시 그렇게 상처 입히는 섹스는 하지 않을 것이다. 분명 그의 몸 안에 자신의 생식기를 집어넣는 것은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몇 백 배는 더 기쁘고 행복한 일이지만, 그를 아프게 할 바에야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훨씬 더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아픈 것은 섹스를 할 때 기쁜 것보다 몇 백 배는 더 슬프고 괴롭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를 상처 입히지 않을 수 있는 때가 될 때까지(그는 테크닉이 좋아지면 상처 입히지 않고도 집어넣는 섹스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테크닉이 무슨 테크닉을 뜻하는 걸까 하고 물으면 그는 대답해주지 않고 그냥 웃기만 했다) 자신은 절대로 다시는 그의 몸 안에 들어가지 않을 거라고 무지무지 많이 다짐했었다.
그저께 아침에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피로 범벅이 돼 있는 숙소 바닥을 보고 자신은 그야말로 기절을 하는 줄 알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잠이 들어버린 그를 보고도 그가 죽어버린 줄 알고 자신은 얼마나 놀랐었던가. 놀랐을 뿐 아니라, 겁이 나서 죽는 줄로만 알았다. 엉엉 울며 그를 흔들어 깨우고, 껴안고 키스하고,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그의 가랑이 사이를 들여다보고, 다시 엉엉 울며 죽지 말라고 외치고 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살아 있고 또 숨을 쉬는 걸 확인하고는 이번엔 기뻐서 엉엉 울었다. 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깨어나 시끄럽다고 야단을 쳤다. 잠 좀 자게 조용히 하라고 눈을 감은 채 짜증을 냈는데, 이상하게도 그가 짜증을 내는 것도 좋아하는 고급 음악 선율처럼 황홀하고 즐겁게 들렸었다.
그래서 이제 그런 굉장히 즐겁지만 그보다 더 많이 무섭고 괴로운 섹스는 하지 않는다. 안 할 거다. 그가 허락을 해줘도 자신은 참을 거다. 이렇게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등에다 키스하고, 엉덩이에다 부비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서 죽을 거 같다. 아아, 또 오르가슴이라는 곳으로 올라간다. 눈앞에서 별이 팡팡 터지는 것 같다. 야전(夜戰)을 할 때 하늘 가득 터지는 전투기 파편들 같기도 하다.
“……흑! 웃, 웃……! 흐윽……!! 흐아앗!!!!!”
생식기에서 쭉 뻗어나간 정액이 그의 가랑이 사이에 부딪쳐 흘러 떨어진다. 아아, 자신의 일부가 그의 몸에 들어가는 느낌이 너무나 황홀한 나머지 사방에서 별과 전투기들이 또 한 번 팡팡 부서진다. 좋고 즐거운 기분을 주체할 수가 없기 때문인지 온몸이 경련을 일으킨 것처럼 움찔거린다. 마구 움찔거리면서 흔들리는 몸이 혹시 그에게서 떨어질까 두려워 그럴수록 그의 상반신을 꼭 끌어안는다. 숨이 가빠서 입술을 활짝 벌리고 부지런히 크게 호흡을 한다. 입으로 빠르게 호흡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의 부드럽고 축축한 피부에 더 이상 키스를 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그래서 그냥 입술만 붙인 채 혀로 마구 핥아주었다. 흥건하게 고인 입안의 침이 자신이 핥아준 그의 피부에 뚝뚝 떨어져 흘러내린다. 그가 간지럽다고 그만하라고 불평한다. 하지만 목소리는 무척 부드럽고 상냥하다. 침대에 엎드려 있는 그가 뒤로 손을 뻗어 자신의 허리와 엉덩이를 쓰다듬어주기도 한다. 아아, 그러면 안 되는데. 그가 이렇게 쓰다듬어주면 자신은 또 발기를 해버리기 때문이다. 어젯밤부터 계산하면 벌써 여섯 번을 했기 때문에 오늘 아침은 더 이상 발기하면 안 된다. 평소에도 안 되지만 오늘은 사냥 날이기 때문에 더 안 된다. 그도 따라가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오늘은 진짜로 기운이 넘쳐야 한다. 힘을 아껴서 그를 더욱더 잘 지켜줘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래서 특수 작전에 투입될 때보다도 더 긴장을 하리라고 굳게 결심을 하고 있다.
벌써 단단하게 굳어져버린 생식기를 감싸 쥔 채 마지못해 그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엉거주춤 침대 가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잘 참네……? 웬일이냐, 카사노바 씨……?”
그가 들릴 듯 말듯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며 웃는다. 그는 침대 시트에 뺨을 붙인 채 눈꺼풀을 감았다 떴다 하며 잠에서 깨어나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다. 그는 아침잠이 많은 것 같다고 또 한 번 생각한다. 아침잠이 많은 그도 자신은 무척 많이 좋아한다. 그가 지금처럼 열심히 깨어나려 애쓰는 모습이 너무너무 예쁘고 귀엽기 때문이다.
회색 시트를 둘둘 말아 가슴에 품은 채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엎드려 있는 그가 너무너무 예쁘다. 자신의 땀과 정액으로 범벅이 돼 있는 피부는 촉촉하게 젖은 채 흐릿한 조명 빛을 받아 매끄럽게 빛나고 있다. 졸린지 눈을 게슴츠레하니 뜨고 하품을 하고 있는 모습도 너무너무 귀여워서 가슴이 막, 막 두근거린다. 욕실로 가서 몸에 찬물을 뿌려야 하지만(그래야 발기한 생식기를 원래대로 만들 수가 있기 때문이다!) 금세 잊어먹고서 멍하니 그만 바라보고 있다. 그를 바라보는 일은 아무리 오래 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한번 바라보기 시작하면 뭐가 뭔지, 다음 시간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다 까먹어버리고 정신없이 그만 바라보게 돼버린다.
자신이 또 그렇게 다 까먹어버리고 한참 동안 서 있었던 모양인지, 그가 고개를 들고 자신을 쳐다본다. 잠깐 흠칫 놀랐지만 한쪽 손으로 발기한 생식기를 가리고 있기 때문에 창피한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다. 발기한 생식기를 자신 이외의 사람에게 보여주는 짓은 창피한 짓이라고 그가 말했었다. 창피한 짓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좋은 짓이 아니라는 건 안다. 그래서 그에게도 창피한 짓은 하지 않도록 열심히 주의를 하고 있다.
“……바보, 뭘 해야 할지 또 까먹은 거냐……?”
그가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다. 목소리에 웃음이 들어가 있다. 역시 무척 나지막하고 또 상냥하다.
그의 눈동자에 퐁당 빠질 것처럼 홀려서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쳐다보고 가서 샤워해. 샤워하려던 거지?”
끄덕. 끄덕.
두 번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진짜로 굉장하다. 자신도 까먹어버린 자신의 다음 할 일을 모두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무언가 까먹어도 조금도 걱정을 하지 않는다. 그가 대신 기억을 해서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만 쳐다보라니까…… 피부에 구멍 나겠다…….”
그가 후후 하고 소리를 내서 웃는다. 그 웃음소리가 너무 듣기 좋아서 자기도 모르게 침대 가에 무릎을 꿇고 앉아버렸다. 그의 오동통한 엉덩이 옆에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그의 손을 꼭 쥐고 입가에 가져갔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그의 손가락 하나하나에다 키스를 하고 있었다. 가슴을 두근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는데 귀찮다고 밀쳐내지는 않는다. 휴우. 다행이다.
“……간지러워…….”
그가 또 후후, 웃는다. 손가락을 입안에 넣고 하나씩 빨면서 그의 후후, 웃는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서로 시선이 마주쳐서 오래도록 서로의 눈동자만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심장이 두근두근하며 몹시 빨리 뛰었다. 그래서 그런 건지 그의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은 것처럼 보였다. 눈물을 흘리는 건가 하고 잠깐 갸우뚱했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후후 하는 웃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후후 할 때처럼 똑같이 눈꼬리가 내려가고 입술 끝이 살짝 벌어진 채 올라가 있었다.
“……불쌍한 녀석…….”
그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이상하게 슬프게 들렸다. 역시 이상해서 갸우뚱했지만 얼굴은 계속 웃고 있다. 그런데 눈시울은 확실히 촉촉하다. 이상해서 그 눈시울만 열심히 쳐다보고 있는데, 계속 거기만 바라봐서 그런지 자신도 슬플 때처럼 가슴이 몹시 아파왔다.
“……왜 울어……?”
그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묻는다. 그제야 자신의 눈시울이 뜨거워져 있다는 것이 자각됐다. 오른쪽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아, 진짜 이상하다. 정말정말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데 자신은 왜 눈물을 흘리는 걸까. 왜 슬픈 기분이 드는 걸까. 그의 눈시울이 젖어 보여서 열심히 바라본 때문인가 싶었지만 지금 자세히 보니 그는 확실히 울지는 않고 있었다. 그저 눈을 약간 크게 뜬 채 조용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왜 우는 거야? 내가 또 너 야단을 쳤나?”
도리도리. 이번엔 가로로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왜 우는 건데?”
도리도리. 잘 몰라요. 이상해. 그냥 가슴이 막 아파서……. 다시 한 번 크게 도리도리를 했다. 도리도리 속에 할 수 없는 말도 함께 전해지기를 멍하니 빌었지만 그가 알아들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는 한참 동안 말없이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신도 한참 동안 열심히 그의 눈을 마주 쳐다보았다. 다시 한 번 서로 시선을 마주친 뒤 오래도록 서로의 눈동자만을 바라보았다. 퐁당 하고 그의 까만 눈동자 속에 온몸이 빠져 들어가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러는 동안 눈물은 어느새 그쳤다. 슬픈 기분이 사라졌나 보았다. 퐁당 하고 빠지면서 그의 눈동자에 슬픔도 빠트렸나 보았다.
“……빨리 가서 샤워 해. 모처럼 비도 그친 것 같으니까 사냥 일찍 끝내고 수영하고 싶다.”
그가 갑자기 자기 손을 빼앗아가며 말했다. 자신을 전부 푹 빠지게 한 까만 눈도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그가 빠르게 돌아누웠기 때문이었다. 모두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한동안 얼떨떨해서 멍하니 그의 뒤통수만 바라보았다.
“……샤워하라니까.”
그가 엄한 목소리로 재차 명령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세운 뒤 욕실로 뛰어갔다. 욕실 문 안으로 들어가며 한 손으로 가린 아랫도리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몸에 찬물을 뿌리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생식기가 쪼그라들어 있었다.
……이상하다…….
잠시 전도 이상하고, 지금도 이상하고, 전부 다 이상하다고, 그리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또 이상하다고, 이상한 생각들이 뒤죽박죽 한참 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차가운 물줄기를 갑자기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이크. 온몸의 신경줄이 펄쩍 뛰어 일어나며 긴장을 했다.
몰의 온도를 따뜻하게 바꾸고 몸에 비누칠을 하는 사이 그의 예쁜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풍덩 빠져버릴 것 같은 까만 눈동자를 눈앞에 꺼내놓으며 열심히 생각했다.
이상한 생각들은 어느새 다 까먹고 있었다.
거의 자지 않는 낮잠을 자버린 건 많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에녹은 임무 수행 중에 낮잠을 자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물론 임무가 없을 때에도 낮잠 같은 건 자지 않는다. 낮잠을 자기 시작하면 게으른 버릇이 들고 전투력도 떨어진다고 교관님들이 말했기 때문이다. 동료 사병들 중에는 교관님들의 조언이 있었어도 낮잠을 자버리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지만, 에녹은 교관님들의 조언을 따르는 편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낮잠 같은 건 자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비몽사몽 몽롱하게 꿈속을 떠돌다가 소스라쳐서 일어나보니까 마지막으로 시계를 확인했을 때보다 두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잠들기 전의 마지막 기억은 쨍쨍 내리쬐는 햇빛 아래서 그가 열심히 헤엄을 치는 모습이었다. 몽롱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좀 더 앞의 일들로 기억을 더듬어나갔다.
그와 함께 사냥을 끝낸 다음, 점심 식사용으로 포장해 온 고기 요리와 과일을 수송기 안에서 먹었다. 그가 따로 만들어 온 달콤한 과일 주스도 나눠 마셨다. 수송기 안에는 냉방 장치가 돼 있어서 사냥을 하면서 달아오른 몸을 시원하게 식혀주었다. 비를 맞은 것처럼 줄줄 쏟아졌던 땀들도 수송기 안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상쾌하게 말라서, 그래도 헤엄을 치겠다는 그의 말에 조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헤엄치는 걸 정말로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데 넬슨호가 행성 DITER-11에 불시착하고 6개월쯤 지날 때까진 외부의 강에서는 단 한 번도 헤엄을 치지 않았다. 그가 강에서 헤엄을 치기 시작한 건 자신과 단둘이 살게 된 후부터다. 뭔지는 모르지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가 그냥 사라졌다. 아무튼 그는 강에서 헤엄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여러 날 만에 햇빛이 비치게 된 강물에 많이 들어가고 싶어했다. 그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아무리 걱정이 돼도 자신은 참아야 한다.
상처도 거의 아물었으니 같이 헤엄을 치자고 하는 그에게, 에녹은 강가에서 기다리겠다고 대답했다. 자신도 헤엄을 치다간 그를 지켜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물살이 센 지점까지 자주 헤엄을 치기 때문에 자신이 잘 보고 감시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다 오늘은 어제까지 내린 폭우로 불어난 강물이 전부 다 빠지지 않아서 더더욱 물살이 셌다. 물론 자신이 눈을 부릅뜨고 지키고 있을 것이므로 그는 안전할 것이다.
한두 번 더 같이 헤엄을 치자고 말하던 그는 자신이 계속 고개를 흔드니까 후후 하고 웃으면서 강가로 내려갔다. 곧 옷을 벗고 팬티 차림이 된 그는 풍덩 하고 강물로 다이빙을 했다. 눈이 시릴 만큼 밝게 쏟아지는 햇빛이 그가 일으킨 물보라에 반사돼 보석처럼 번쩍번쩍 빛났다. 강물을 가르며 물고기처럼 이리저리 헤엄을 치는 그는 더 빛이 났다.
에녹은 그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언덕 위 그늘에 앉아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그냥 이리저리 강물 사이를 왔다갔다 헤엄만 치는 건데도 그를 바라보는 일은 언제나 조금도 질리지 않는다. 질리기는커녕 보기만 해도 즐겁고, 기쁘고, 아랫배가 뜨뜻하게 차오르는 행복한 기분이 된다.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었을 때처럼.
20분쯤 헤엄을 치던 그가 다시 뭍으로 나와서 수송기 쪽으로 걸어갔다. 목이 말랐나 보다. 과일 주스가 든 아이스 보온병을 자신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가지고 와서 마시고는 자신에게도 한 잔 따라주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몸이 땀범벅이었다. 목이 마른 것도 새삼 느껴졌다. 주변 온도를 체크해보니 섭씨 38도 6부였다. 휴우. 정말 너무너무 덥다.
그를 따라 자신도 강물에 들어가 헤엄을 치고 싶은 기분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자신도 물에 들어가서 헤엄을 치며 놀아버리면 그를 안전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건네준 얼음이 들어간 과일 주스를 재빨리 꿀꺽꿀꺽 들이켰다. 주스를 다 마시고 컵을 내려놓으니까 그가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한번 보기 시작하더니 많이 오랫동안 계속 바라보아서, 자신도 멍하니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의 눈동자만을 들여다보았더니 또 퐁당 하고 그의 까만 눈동자 속에 온몸이 빠져 들어가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어났다.
“……침 떨어진다, 저능아…….”
그가 문득 소리 없이 후후 하고 웃었다.
소스라쳐서 입가를 닦았더니 정말로 침이 턱 아래로 길게 흐르고 있었다. 그의 예쁜 얼굴에 정신이 팔려서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입가를 닦으려고 하는데, 그가 갑자기 양팔로 자신의 목을 감아왔다. 너무나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눈을 꼭 감은 그가 자신의 입술에 키스하고 있었다. 너무나 힘껏 자신의 입술을 빨아대서 조금 아픔이 느껴졌다.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힘껏 깨물더니 곧 입안에 혀를 집어넣고 자신이 너무나 좋아하는 딥키스를 해주었다. 그의 혀가 자신의 혀 깊숙한 곳까지 착 감겨들었다. 목을 감고 있는 팔에도 굉장히 커다란 힘을 주고 있어서, 그의 몸은 상반신은 물론 하반신까지 자신에게 찰싹 달라붙게 되었다.
물비린내가 남아 있는 축축하고 서늘한 몸의 감촉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자신의 입안을 폭풍우처럼 휘젓고 있는 혀의 감촉은 더 많이 정신을 잃게 해서 온몸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찌릿찌릿 아랫배에 전기가 오르면서 순식간에 생식기가 발기했다. 많이 놀랐기 때문에 한동안 가만히 그의 키스를 받기만 하다가 참지 못하고 그의 허리에 손을 뻗으려는데 그가 갑자기 자신을 밀쳐냈다. 그러잖아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약간 뒤로 밀렸을 뿐인데도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꽈당!
자신의 커다란 몸무게가 땅바닥을 울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어서 엉덩이는 아프지 않았다. 그냥 여전히 정신만 없었다. 잠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얼떨떨해서 고개를 흔들고 눈을 깜빡거렸다.
“푸하하하…… 꼴좋다∼∼∼!”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세우며 시선을 드니 그가 와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강물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어질어질했던 눈앞이 제대로 보였을 때쯤엔 그는 이미 힘껏 다이빙을 해서 물속에 들어가버린 후였다.
가슴이 막 두근두근 뛰었다. 얼굴도 화끈화끈 달아오른다. 아랫도리는 그보다 더 뜨겁게 달아서 불끈불끈 흔들리고 있었다. 딱 달라붙은 군용 팬츠가 거북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아, 하지만 오늘은 더 이상 자위를 하면 안 된다. 참아야지. 참을 수 있을 거다.
자신이 서 있는 곳과는 반대편 능선으로 헤엄쳐 가는 그가 보였다. 그의 팔이 크게 날갯짓을 하며 강물을 가를 때마다 그가 일으킨 물보라가 보석처럼 번쩍번쩍 빛이 났다. 너무나 눈이 부셔서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봐야만 했다.
그를 바라볼 때면 늘 그러는 것처럼 시간도 잊고, 장소도 잊고, 하다못해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리는 상태가 돼버렸다. 멍하니 그가 물살을 가르며 이쪽에서 저쪽으로 헤엄치며 왔다 갔다 하는 모습만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자꾸 눈꺼풀이 감기며 졸음이 쏟아졌다.
그를 계속 지켜봐야만 한다고 다짐하며 감기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뜨기 위해 기를 썼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무지막지하게 강한 누군가의 손이 눈꺼풀을 자꾸 아래로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눈앞도 흐릿해졌고 몽롱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기슭을 굽이쳐 흐르는 강물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강물 너머 울창한 밀림 안쪽에서 들려오는 각종 날짐승들의 울음소리도 점점 웅웅거리는 이상한 것으로 변했다. 그러곤 바닥으로 몸이 쑥 꺼지며 죽음 같은 잠이 덮쳐들었다.
아마도 사냥을 할 때 많이 긴장을 한데다, 날씨가 무척 더워서 그랬던 것 같아. 비틀비틀 몸을 일으켜 세우며 에녹은 나름대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아직도 온몸이 나른한 것이 힘이 없었다. 이상하게 머릿속이 쿵쿵 울리며 아픔이 느껴졌다. 두통이었다. 다행히 그늘에서 잠이 들어 일사병은 안 걸린 것 같았지만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기운이 없고 두통이 나는 건 높은 온도에서 땀을 지나치게 흘린 때문일 것이다. 역시 나름대로 이유를 찾아내곤 강가로 시선을 집중했다.
당연히 물살을 가르며 헤엄을 치고 있어야 할 그가 보이지 않았다. 햇빛 때문에 잘 못 보는 건가 싶어 두 손으로 차양을 만든 다음 다시 뚫어지게 강가를 살폈다. 그러나 역시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두근…….
갑자기 심장이 아래로 뚝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두근…… 두근…… 두근…….
좀 더 부지런히 시선을 옮겨가며 다시금 샅샅이 강변을 살폈다. 없다. 눈을 부릅뜨고 살피는데도 그의 물에 젖은 까만 머리카락이나 물살을 가르는 팔의 움직임, 또 그때마다 하얗게 부서지는 물보라들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점점 고동을 빨리해가던 심장은 이젠 아예 폭발을 할 것처럼 거세게 고동치고 있었다. 숨이 가빠왔다. 바닥을 딛고 있는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어서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이 들었다.
―은우 씨!!!!!
목정이 터져라 불러보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그저 입술만 벙긋하게 벌어진 채 부들부들 떨고만 있을 뿐이다.
―은우 씨!!!! 은우 씨!!!!! 은우 씨!!!!!
재차 처절하게 불러보지만 여전히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휘청거리는 다리를 필사적으로 가누며 강가로 내려갔다. 일단 강바닥을 뒤져봐야 한다. 물에 빠졌다면 아직 떠오르진 않았을 것이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은우 씨!!!! 은우 씨!!!!! 은우 씨!!!!! 애타게 부르는 부름은 하나도 나오지 않으면서 꺽꺽거리는 흐느낌 소리만 요란스럽게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왔다. 휘청거리는 다리로 급히 달려가니 중심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기어코 불쑥 튀어나와 있는 조약돌에 발부리가 걸려 앞으로 심하게 넘어지고 말았다. 무릎이 깨지고 손바닥이 찢어졌는지 축축한 핏방울이 스며 나왔다. 너무나 겁에 질려 있어서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 다시 뜀박질을 했다. 간신히 강가에 도착해 그가 다이빙을 했던 커다란 바윗돌 위에서 옷을 벗었다. 여전히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땀으로 착 달라붙어 있는 옷을 벗기가 꽤 힘이 들었다. 허벅지 아래 걸린 바지를 내리다가 포기하고 군화부터 벗었다. 군화를 벗기 위해 상체를 아래로 굽히니 눈앞이 핑 돌며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안 돼……. 큰일 났다. 이렇게 흥분하면 안 된다. 겁을 먹고 흥분을 하면 특수 방위군은 아무리 쉬운 임무라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어떠한 위기 상황에서도 군인은 침착해야만 임무를 제대로 완수할 수 있다!
어딘가 멀리서 특수 방위군 훈련 교관님의 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 침착해야만 해!!!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다시 바지를 벗기 시작했다. 일단 강물 속을 살펴보고 다른 데를 찾아보면 된다. 눈에 안 보인다고 그가 반드시 물에 빠졌다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헤엄치다 지쳐서 나왔을 수도 있고, 더워서 혼자 넬슨호로 돌아가버렸을 수도 있다. 아마 자신이 잠이 들었기 때문에 안 깨웠을 거다.
간신히 옷을 다 벗은 알몸으로 강물에 뛰어들었다. 뜨겁게 달구어진 몸에 갑자기 닿은 강물은 얼음장처럼 차게 느껴졌다. 정신없이 물살이 센 곳까지 헤엄쳐 갔다. 자신이 앉아 있던 숲 그늘에선 잘 안 보이는 지점까지 헤엄친 다음 잠시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혹시나 했지만 불쑥불쑥 솟아 있는 바위 그늘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다시 앞으로 헤엄을 쳐 갔다. 차라리 물속에 들어오니 온몸의 떨림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두려움도 조금 가라앉아서 침착하게 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는 헤엄을 잘 친다. 사실 그가 물에 빠질 확률은 극히 적다고 사라도 말해주지 않았던가. 일반 시민이라 자신보다 한참은 생존 지수가 낮지만 그의 뛰어난 수영 실력으로 보면 물에 빠질 확률은 적은 편이었다. 그러니까 너무 많이 겁내지 말고 차근차근 찾아보자고 즐거운 생각을 계속 머릿속에서 끌어냈다. 즐거운 생각을 하고 있으니 힘이 없어 흐느적거리던 팔다리에도 다시 많은 힘이 모여들었다. 힘이 많이 모여드니 더 빨리 헤엄을 칠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자그마한 폭포가 시작되는 지점을 20여 미터쯤 앞둔 지점까지 급류를 타고 헤엄쳐 갔을 때, 문득 시끄러운 소음이 하늘에서 들려왔다. 그저 빠르게 헤엄을 치는 데만 혼이 팔려 처음엔 듣지 못하다가 계속 자신의 머리 위를 맴돌며 도는 듯한 비행기 엔진 소리에 저절로 움직임이 멎었다. ……저건 수송기 소리인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흐릿하게 머릿속을 스쳐갔다.
바로 근처에 있던 커다란 바위를 붙잡은 뒤 하늘로 고개를 쳐들었다. 역시 수송기였다. 자신이 외부로 사냥 작업을 나갈 때 몰곤 하는 수송기였다. ……아까 사냥을 끝내고 강변 근처 모래톱 공터에 세워둔 수송기가 왜 저기 떠 있는 걸까……? 다른 수송기인가? 하고 한순간 고개를 갸웃했지만, 넬슨호의 조난자들을 소거시킨 날 다른 수송기들은 다 파괴시켰다는 것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그가 도망을 칠까 봐 넬슨호 격납고 속에 있던 다섯 대를 모조리 폭파시켰다.
……역시 저건 아까 자신이 공터에 정박시켜둔 유일한 수송기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100미터쯤의 높이에 떠 있던 수송기가 조금씩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의 바로 위 20미터쯤 되는 지점에 고도를 유지한 채 정지했다. 고개를 빼고 조종석을 바라보았지만 검게 선팅이 돼 있어 누가 조종사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조종사가 선팅 모드를 제거하지 않으면 밖에서 내부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누가 조종을 하고 있는 거지……?
멍한 질문의 끝으로 번쩍하니 번개가 치는 것처럼 현명한 대답이 뇌리를 스쳤다. 바보!!! 그가 조종하고 있는 게 당연하잖아!!!!!
행성 DITER-11에 자신과 그 이외엔 인간이라곤 없다.
순간 밀물처럼 걷잡을 수 없는 환희가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아아, 그다! 그 사람이다! 그가 조종하고 있어! 그는 물에 빠진 게 아니야!!! 날 데리러 왔나 보다!!!!! 너무나 좋아서 물속임에도 불구하고 펄쩍펄쩍 뛰었다. 팔을 마구 휘저으며 손을 흔드니 사방으로 거센 물보라가 일었다. 아아, 은우 씨!!!!! 은우 씨!!!!! 은우 씨!!!!!
[……나다, 에녹. 위험하니까 물에서 나와.]
그가 수송기의 외부 스피커를 켜고서 말하고 있었다. 그가 조종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미 확신하고 있었음에도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뛸 듯이 기뻤다. 하하 하고 그가 웃을 때처럼 예쁘게 웃고 싶었지만 자신은 자폐 증상이 있기 때문에 그처럼 웃을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냥 열심히 두 팔을 크게 휘저으며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으로 너무너무 기쁜 기분과 즐거움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어서 물에서 나와. 날 찾고 있었지?]
끄덕끄덕.
신이 나서 여러 번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도 열심히 고개를 흔들다가 물을 조금 먹어 기침이 나왔지만 그래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찾고 있었다. 물에 빠진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 바로 조금 전 그가 나타나기까지 엄청나게 겁에 질렸던 자신의 마음을 그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면 그가 알아줄까?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을 그가 잘 알아봐줄까……? 아마 그럴 것이다. 자신은 까만 선팅이 돼 있어서 그를 볼 수 없지만, 그는 조종간의 컴퓨터 화면으로 줌인 된 자신을 자세히 볼 수 있을 것이다.
[……물에서 나와. 조금만 더 앞으로 가면 폭포가 있는 건 알지? 물살이 급해서 휩쓸려 들어갈 거야. 빨리 나와.]
괜찮은데……. 자신은 그보다 훨씬 강하고 헤엄도 잘 치기 때문에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당장 나와!!!!!]
여전히 물장구를 치며 팔을 흔들고만 있자 그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차, 너무 미적거렸나 보다. 그는 기다리는 걸 무척 싫어하는데. 그가 야단을 칠까 봐 서둘러 강기슭 모래사장이 있는 곳으로 헤엄쳐 갔다. 그를 찾으며 급류 쪽으로 헤엄칠 때에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는데, 되돌아오는 데는 5분도 채 안 걸렸다. 자신이 움직이는 데 따라 그가 탄 수송기도 하늘 위를 빙빙 돌며 따라왔다.
마침내 그가 다이빙을 하던 곳까지 와서 모래사장으로 걸어 나왔다. 햇살에 뜨겁게 달구어진 조약돌과 모래들이 발바닥을 따끔따끔 찔러댔다. 뜨거운 발바닥도, 줄줄 흘러내리며 피부를 간지럽게 만드는 물방울도 모두 이상하게 웃기고 신이 났다. 토끼처럼 껑충껑충 뛰며 오른쪽 모래톱으로 달려갔다. 이 근처에서 수송기를 착륙시킬 수 있는 곳은 그 모래톱 공터뿐이기 때문이다.
[……어딜 뛰어가는 거냐? 옷부터 입어.]
엄하게 던져진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달리기를 멈췄다. 바로 머리 위에서 빙빙 돌고 있는 수송기 스피커 소리다. 아니, 그의 명령 소리다.
―공터로 뛰어갑니다. 옷은 공터에 도착해서 입을게요.
열심히 수화를 해보지만, 그는 번역기를 달고 있지 않은 듯 스피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강가에 벗어둔 옷가지들과 수송기를 번갈아 쳐다보다가는 할 수 없이 옷을 가지러 되돌아갔다. 생식기도 발기하지 않아서 별로 창피한 일도 아닌데 왜 옷부터 입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조금 불만이 생겼지만 그래도 그가 명령하는 일이니까 얌전히 따르자고 결심했다. 그가 물에 빠지지 않고 자신을 데리러 와준 걸 머릿속에 떠올리면 조그만 불만들은 다 참을 수 있었다. 그럼, 그럼. 그가 물에 빠지지 않았잖아. 아아, 정말 진짜로 기쁘다! 다시금 심장이 터져버릴 것처럼 즐겁고 기쁜 기분이 무럭무럭 솟아나왔다.
[……그래. 이제 간다, 에녹.]
부랴부랴 옷을 주워 입은 다음 군화를 신고 있는데 하늘에서 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따라 이리저리 수송기를 돌리는 그도 너무 좋고 신이 나지만 말을 걸어주는 건 더욱더 좋고 신이 난다. 손바닥으로 햇빛을 가리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이 혹시라도 보일까 열심히 올려다보았다.
[……간다구. 못 알아듣는 거냐?]
―네, 저도 금방 공터로 달려갈게요. 옷 지금 막 다 입었습니다.
언어 번역기가 없어 못 알아듣는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반사적으로 수화를 하게 된다. 그가 재촉하지 않아도 무지 빠르게 달려갈 자신이다.
[……지구에서 구조선이 올 때까지 딴 마음 품지 말고 잘 지내.]
―……?
[……간다. 이럴 수밖에 없는 나를 용서해주렴…….]
―……?
[……구조선이 오면 나도 다시 여기로 올게. 그땐 잠깐이지만 또 볼 수 있을 테니까…….]
―…………? 네……? 무슨……. ……은우 씨……?
[……죽는다느니 그런 바보 같은 소린 하지 마. 일단 구조를 기다려봐야 하니까…… 아무튼 그때 다시 볼 수 있을 테니까 지금처럼 건강하게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복무 규정도 열심히 지키도록 해.]
―은우 씨……?
[……이게 최선이야. 너나 나나 올바른 처벌을 받고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돼. 그러니까…….]
―……?
[……잘 지내. 건강해라…….]
―……? ……? ……? 은우…… 네……??
머리 위 20미터쯤 위치에 떠서 조용히 선회하고 있던 수송기가 느닷없이 수직으로 상승했다. 2∼3초도 안 되는 극히 짧은 순간에 갑자기 수백 미터를 상승해서 수송기는 순식간에 콩알만 한 모습으로 변했다. 눈을 찌를 것만 같은 햇빛이 사방에서 내리쬐고 있어서 콩알만 해진 수송기는 제대로 알아보기조차 힘이 들었다.
두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열심히 뒤를 눈으로 좇는데 수송기는 다시 북쪽 방향으로 기수를 돌리더니 순식간에 북쪽 끝으로 날아가버렸다. 10초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만 뭉게뭉게 떠 있는 하늘엔 콩알처럼 변한 수송기의 모습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사라질 리가 없는데……?
혹시 자신이 잘못 봤나 싶어, 남쪽과 동쪽, 그리고 서쪽 하늘까지 샅샅이 살펴보았다. 아무리 눈을 가늘게 뜨고 열심히 올려다봐도 까만 콩알 수송기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기다리면 다시 보일까 봐 한참 동안 기다리며 다시 수송기가 보이기를 기다렸다.
……이상하다? 갑자기 사라질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 이상하네…… 정말 이상해…….
이상한 생각들이 몇 번이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왜 이상한 건지 잘 이해할 수가 없어서 마냥 하늘만 쳐다봤다. 동쪽 하늘도 보고 서쪽 하늘도 보고 남쪽 하늘도 보고, 다시 처음 사라진 북쪽 하늘로 고개를 돌리고는 더 많이, 더 열심히 쳐다봤다. 열심히 쳐다보면 이상한 생각들은 다 사라질 터였다. 그리고 분명 수송기가 다시 나타날 터였다. 그랬다. 자신은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다.
침을 꿀꺽 삼키며 커다랗게 심호흡을 했다. 이상하게 가슴이 자꾸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그가 물에 빠졌을까 봐 놀랐을 때처럼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잘못 생각한 거였다. 그는 물에 빠지지도 않았고 수송기를 타고 멋있게 나타나주었다. 그렇지. 그러니까 이번에도 아무 일도 없을 거다. 조금 기다리면, 그는 또 멋있게 짠 하고 수송기를 타고 하늘에 나타날 것이다.
그렇지.
그랬다.
자신은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오래 하늘을 쳐다봤는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눈이 시큰거리더니 눈물이 흘러나왔다. 너무 강한 햇빛 속에서, 너무 오래 하늘을 바라봤기 때문인 것 같았다. 너무 깜깜한 어둠 속에서, 너무 오래 하늘을 바라봤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한 번 터지더니 눈물은 좀처럼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야가 흐려져서 더 이상은 하늘을 쳐다볼 수 없었기 때문에 에녹은 비로소 고개를 내리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뿌옇게 변한 시야로 칠흑 같은 어둠이 다가들었다. 멀리 250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 우뚝 정박해 있는 넬슨호에서 뿌옇게 퍼져 나오고 있는 불빛만 아니라면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어둠이었다.
목이 뻐근했다. 다리도 몹시 아팠다. 낮에 섭씨 40도 가까이 올라가 사방을 달구던 기온은 어느새 10도 이하로 뚝 떨어져 있었다. 행성 DITER-11의 일교차는 30도 가까이나 된다. 밤이 된 걸 보니 거의 열여섯 시간은 지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배도 고픈 것 같았다. 하지만 음식을 먹을 시간은 없다.
그는 오지 않는다.
그렇게 이해하기까지 열여섯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자신을 버린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기까지 눈이 멀 정도로 하늘만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확실하게 이해했으니까 이제는 서두를 일만 남았다. 그를 찾아내야만 하는 임무가 떨어졌다. 아주 중요하고, 긴급하고, 또 위험한 임무다.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잠을 잘 수도 없다. 아무리 다리가 아파도 앉아서 쉴 수 없다.
뻣뻣하게 굳어서 로봇처럼 움직이는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홍수가 난 것처럼 줄줄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쉴 새 없이 눈꺼풀을 깜빡거려야 했다.
단거리 수송기는 마하의 속력으로 하늘을 난다. 장거리 우주선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속력이지만 열여섯 시간을 날면 이미 이곳의 정반대편에 있는 지역까지라도 충분히 도착했을 시간이다. 알 수 없는 절망감에 가슴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수송기는 넬슨호 안에도 있다. 넬슨호 안에 있는 다른 수송기로 그를 쫓아가면 된다.
강기슭에서 250여 미터의 구릉을 올라가야 넬슨호가 있다 급경사인 진입로를 기를 쓰고 주파하니 다리 근육의 아픔이 서서히 풀려갔다. 다만 시야는 여전히 뿌옇기만 했고 명확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시신경에 무리가 온 모양이었다. 넬슨호 안으로 들어가 일단 시력 보호제를 눈에 주입해야 할 것이다. 그다음 군장을 갖추고 사라를 작동시켜 그가 도망쳤음직한 지역을 추출해내야 한다. 그를 찾는 전 과정은 특수 방위군이 은하 연맹의 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오지 행성의 구석구석을 찾아 괴멸시키는 작전 모형을 그대로 따르면 될 것이다. 데이터를 뽑아 수송기의 컴퓨터에 입력한 뒤 사라와 연결해서 연료 추적 장치를 가동시켜야 한다. 넬슨호의 수송기가 쓰는 연료는 메크로늄이다. 메크로늄 분사 잔여물은 공기 중에 7일간이나 희석되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에 추적은 가능하다. 즉 7일 안에만 찾아내면 된다.
―……간다. 이럴 수밖에 없는 나를 용서해주렴…….
스피커를 통해 들리던 그의 상냥한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다.
―……구조선이 오면 나도 다시 여기로 올게. 그땐 잠깐이지만 또 볼 수 있을 테니까…….
그가 직접 말을 할 땐 하나도 못 알아들었었는데 이제 조금씩 이해가 된다.
―……죽는다느니 그런 바보 같은 소린 하지 마. 일단 구조를 기다려봐야 하니까…… 아무튼 그때 다시 볼 수 있을 테니까 지금처럼 건강하게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복무 규정도 열심히 지키도록 해.
지구에서 구조선이 올 리는 없다. 사라의 구조 신호는 자신이 꺼버렸다. 그러니까 그와는 영영 만날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게 최선이야. 너나 나나 올바른 처벌을 받고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돼. 그러니까…….
뭐가 최선이라는 걸까. 그는 내 연인이다. 그가 그렇게 말해주었다. 연인은 함께 지내야 한다. 헤어지는 건 연인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가 틀린 거다.
―……잘 지내. 건강해라…….
‘잘 지내. 건강해라’는 ‘잘 있어. 안녕’이나 ‘안녕, 또 만나자’ 같은 작별 인사다. 작별 인사를 하다니 정말 도망을 쳤나 보다. 그가 뭔가 착오를 일으켰나 보다. 우린 연인 사이인데. 함께 즐겁고 행복하게 키스를 하고 섹스도 하는 연인 사이인데 도망을 치다니 참 이상하다. 그는 왜 도망을 치는 걸까…….
넬슨호 안으로 들어왔다.
사라를 불러 인간이 생존하기 가장 좋은 기후와 지형 조건을 갖춘 지역을 첫 번째부터 백 번째까지 산출하라고 일렀다. 그다음 의무실로 가서 시력 보호제를 눈에 주입했다. 자꾸만 눈물이 흘러 시력 보호제 흡수에 어려움이 있었다. 찬 거즈로 일단 눈을 진정시킨 뒤 다시 주입했다. 만일을 위해 근육 이완제도 몸에 주입했다. 열여섯 시간을 한자리에 서 있어서 근육이 잔뜩 긴장돼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자주 사용하면 안 좋지만 근육 이완제를 쓰면 최상의 육체적 조건으로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근육 이완제의 효과가 돌아 한결 유연해진 몸놀림으로 그의 숙소로 갔다. 그의 냄새가 가득 배어 있는 숙소에 들어가니 또 눈물이 날 뻔해서 숨을 조금씩 참으며 작전을 진행했다. 훈련 교관님의 엄한 강령을 여러 번 복창하기도 했다.
―어떠한 위기 상황에서도 군인은 침착해야만 임무를 제대로 완수할 수 있다!
―어떠한 위기 상황에서도 군인은 침착해야만 임무를 제대로 완수할 수 있다!
―어떠한 위기 상황에서도 군인은 침착해야만 임무를 제대로 완수할 수 있다!
기억을 더듬어 숙소 한쪽에 치워두었던 자신의 군장을 하나하나 빠트리지 않고 몸에 완벽하게 장착했다. 모두 40킬로나 나가는 무게지만 단 하나라도 빠트리면 작전 수행에 무리가 따른다. 교전 규칙 8조 34항에 명시된 복무 규정이다.
묵직한 군장을 매달고 곧바로 이동한 곳은 D구역 격납고였다. 폭발로 녹아내린 출입구를 보니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다. 무언가 잊고 있었던 중요한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거듭 쏟아져 들어온 기억의 파편이 휑하니 드러난 격납고 안의 풍경과 함께 머릿속에 일렬로 죽 늘어섰다.
갑자기 온몸의 힘이 빠지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공포와 초조감으로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랬다. 격납고 안의 수송기들은 단 한 대도 남김없이 완벽하게 파괴돼 있었다.
아아, 이제 기억났다. 바보 에녹. 저능아 에녹. 또 까먹고 있었던 거다. 사라를 통해 엔진과 주조정 컴퓨터에 바이러스를 주입하고, 그도 안심이 안 됐는지 자신은 압착 폭발물까지 격납고 안에 설치했던 것이다. 물론 ‘뇌활성 증폭기’를 장착한 자신이 한 짓이라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러나 500여 평방미터의 거대한 공간 안에 모습을 드러낸 수송기들의 모양새는 그저 고철덩어리라고 해도 거짓말이 아닐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고철덩어리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폭파 장치를 하는 자신의 모습이 파편처럼 드문드문 떠올라왔다.
한동안은 온몸이 얼어붙어버린 듯 옴짝달싹도 못 한 채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너무나 두려워서 이번엔 눈물조차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비상사태였다. 수송기 없이는 7일 안에 그를 찾는 것은 전혀 불가능했다. 7일 안에 찾을 수 없다는 건 영원히 찾을 수 없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정말로 지구로부터 구조선이 온다면 모르지만, 그것 역시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면 자신은 절대로 다시 구조 신호를 재개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었다. 구조선이 와서 자신과 그가 이 행성 DITER-11을 떠나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그와의 영원한 이별을 의미했다. 지구로 끌려가 재판을 받고 그와 영원히 헤어지느니 자신 혼자 영원히 걸어서라도 그를 찾을 터였다.
―어떠한 위기 상황에서도 군인은 침착해야만 임무를 제대로 완수할 수 있다!
훈련 교관님의 엄한 강령을 필사적으로 되뇌었다.
―어떠한 위기 상황에서도 군인은 침착해야만 임무를 제대로 완수할 수 있다!
―어떠한 위기 상황에서도 군인은 침착해야만 임무를 제대로 완수할 수 있다!
열심히 호흡을 고르며 두려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기를 썼다. 두려움에 빠지면 작전 성공 가능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아니, 성공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교관님이 말했었다.
―‘뇌활성 증폭기’!!!!!
몇 번씩이나 훈련 교관님의 엄한 강령을 되풀이하는 사이, 불쑥 희망이 솟구쳤다.
……아, 그렇지……!
―‘뇌활성 증폭기’를 활용하라!
―임무 수행 중 장교의 명령 체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막다른 난관에 부딪쳤을 때에는 ‘뇌활성 증폭기’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일반 시민 이상으로 뇌를 활성화시켜주므로 대부분의 난관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주일에 여덟 시간 이상 ‘뇌활성 증폭기’를 사용하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 검증되지 않았지만 뇌간과 뇌수에 과도한 자극을 일으켜 뇌사 상태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는 훈련 교관님의 엄격한 강령들이 마치 좋아하는 고급 음악 소리처럼 달콤하게 느껴졌다. 아아, 그랬다. 자신은 몇 달 전, 넬슨호의 어둡고 무서운 감옥에 갇혀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었던 그 끔찍했던 시간에도 ‘뇌활성 증폭기’를 사용했었다. 동료 사병에게서 기계를 빼앗아 그 무시무시한 감옥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곤 일반 시민들이 다시는 그와 자신을 떨어트리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고, 그의 연인이 되고, 그리고 그와 키스도 하고 사랑도 하고 섹스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희망은 생각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수송기가 모두 다 파괴됐어도 방법은 있을 것이다. 일반 시민보다 머리가 좋아지면 무언가 다른 현명한 작전을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다.
과호흡으로 치닫고 있던 거친 숨결이 겨우 가라앉았다. 무릎이 푹 꺾일 정도로 기력을 상실했던 다리에도 조금씩 힘이 돌아오고 있었다. 다만 앙금처럼 남아 있는 두려움이 양손을 여전히 부들부들 떨리게 만들었다. 그중 하나인 오른손에 들려있던 라바트레이저 총을 왼쪽 손으로 고쳐 들었다. 자유로워진 오른손은 허벅지 중간에 장착돼 있는 ‘뇌활성 증폭기’를 꺼내 들고 있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활성 작용을 돕는 정맥 주사를 목덜미에 쏘고 바로 머리에 장착한 뒤 작동을 시작했다. 안전을 위해 몇 가지 신체 상태를 체크해야 하지만, 조급한 마음은 조심성을 잊게 만들었다. 설령 뇌가 터져버린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를 영원히 만날 수 없다면 차라리 뇌가 터져 죽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갑자기 눈앞이 폭죽이 터진 것처럼 밝아졌다.
머리가 깨지는 것 같은 통증이 왔다. 온몸이 감전된 것처럼 극심한 경련이 시작되고 있었다.
“……으…… 우…… 윽……! 으으…… 으아아아아악!!!!!!!!!!”
시끄러운 비명 소리가 어딘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아마도 자신이 내지른 비명일 것이다. 머리를 움켜쥔 채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아마도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지독한 고통, 고통, 또 고통!!!!!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가루로 분해되는 극심한 통증 속에서, 에녹은 자신의 뇌가 서서히 깨어나는 감각을 어렴풋이 자각하고 있었다. 부서져 흩어졌던 수천 수억의 퍼즐 조각들이 단숨에 제자리를 찾아 맞춰지고 있었다. 주둔지의 야경처럼 셀 수 없이 많은 방들에 일제히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오색찬란하게 반짝이는 그들을 하나하나 일별하며 에녹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인…… 환…… 아……?
빨라진 리듬과 높아진 음색의 이름 모를 고급 음악이 정수리 끝에서 황홀하게 울려 퍼졌다. 시꺼먼 하늘이 쩍 갈라지며 무명과 무지가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인환아!!!!!
각성은 전적으로 갑작스레 스며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