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2297년 8월. 이은우(李誾踽)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전인 이른 아침에 식재료 채취를 마친 것이 다행이었다.
나흘간의 중노동으로 몸이 꽤 지쳐 있어, 40도 가까운 복더위 속에서 돌아다녔다간 일사병을 일으켰을지도 모른다. 현재 온도는 섭씨 27도. 역시 덥지만 그리 못 참을 정도는 아니다.
진공 배낭 속에 든 과일과 5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날짐승 한 마리를 위생 처리하기 위해 은우는 마침 전방에 나타난 냇가에 수송기를 착륙시켰다.
5∼6미터 폭의 자그마한 냇물은 캠프가 설치된 지점에서 2킬로도 안 되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캠프까지 연결하는 상수도 공사를 마친다면 식수를 확보하기 위해 일일이 냇가로 내려오는 번거로움은 덜할 것이다. 캠프를 설치할 때 좀 더 냇가 가까이에 설치할까도 싶었지만 우기 때의 폭우가 걱정되었다. 아직도 우기가 계속되고 있어 현재 수위에서 더 이상 물이 불어날 염려는 없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조금 번거롭더라도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캠프는 사흘 만에 설치할 수 있었다.
위치는 냇가가 있는 현 위치로부터 북서쪽으로 1.7킬로쯤 떨어진 야트막한 바위산 중턱, 사암으로 이루어진 좁은 바위굴 앞이었다. 바로 앞에 수송기를 정박시킬 수 있는 너른 공터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주변이 대부분 커다랗고 편편한 암반으로 되어 있어 순식간에 울창하게 자라버리는 잡목들을 제거하느라 매번 수고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상수도만 끌어들일 수 있다면 거의 100년도 더 버틸 수 있을 천혜의 요지라고 은우는 흡족하게 자평하고 있었다. 물론 그전에 지구로부터 구조선이 와주길 빌고는 있지만.
그저 희박한 행운을 기원하는 도리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쏘아 올리기 시작한 구조 신호를 누군가 알아듣고 행성 DITER-11로 날아와주기를.
그제부터 어제까지 줄기차게 내리던 폭우가 쓸고 지나간 냇물은 무척이나 맑았다. 온갖 흙더미며 갖가지 잡목과 풀들, 하다못해 홍수에 떠밀린 짐승의 사체들까지 뒤섞여, 누르스름한 흙탕물이 된 그것이 노도처럼 휘돌아 나가는 풍경은 경이를 넘어 두렵기까지 했었다. 수송기 안에서 안전하게 감상을 말할 수 있는 자신의 처지가 어찌나 만족스럽게 느껴지던지.
날짐승의 배를 가르고 빈 공간에 소금을 듬뿍 채워 넣은 다음 과일을 씻기 시작했다. 망고와 복숭아를 섞어놓은 듯한 맛인 주먹만 한 과일은 은우가 꽤 좋아하는 것이었다. 밀림 속에서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나무라 아까 이 나무를 발견했을 땐 꽤나 즐거웠었다. 위치까지 표시해두었으니 다른 짐승들이 거덜을 내지 않는다면 수시로 따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씻어낸 식재료들을 다시 진공 배낭 속에 주워 담고 있는데 갑자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푸드득거리는 날갯짓 소리에 무심코 하늘을 보니 전방의 밀림에서 수백 마리의 날짐승들이 일제히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 거대한 장관에 어 하고 자신도 모르게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땅을 흔드는 진동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편편한 바위 위에 죽 늘어놓았던 과일들이 두두거리는 소음과 함께 저절로 굴러 떨어졌다. 정강이까지 냇물에 잠겨 있던 은우의 다리도 흔들리고 있었다. 졸졸거리며 완만한 기세로 흐르고 있던 냇물은 기슭까지 물보라를 일으키며 거세게 들끓고 있었다.
지진이다!!!!! 번개처럼 자각이 뇌리를 스친 순간 은우의 바로 코앞 2미터 지점에서 진흙이 섞인 물보라가 위로 뿜어 올라가며 물살을 거슬러 움직였다. 자각과 동시에 부랴부랴 수송기 쪽으로 달려가려고 했지만 극심한 땅의 진동 탓에 좀처럼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냇기슭 너머 야트막한 구릉지를 울창하게 뒤덮고 있는 밀림이 거세게 요동치며 흔들렸다. 상류 쪽 구릉지에서 자갈들과 바윗돌들이 쿵쾅거리며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바로 몇 초 전까지 드문드문 들려오던 야생 짐승들의 울음소리 대신 천둥소리 같은 우르릉거림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심상치가 않았다. 단순한 미진이라고 하기엔 몸으로 전해지는 진동의 강도며 사방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굉음들이 점점 더 기세를 높이고 있었다. 바짝 긴장한 몸도 급박한 위기 상황임을 동물적인 본능으로 전해주고 있었다.
10여 미터쯤 앞에 무리를 이루고 있는 바윗덩어리중 하나가 쩍 하는 굉음과 함께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 이어 귀를 찢어발길 듯 커다란 굉음에 천지가 진동했다. 냇기슭 너머 밀림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잡목들이 30도쯤의 각도로 크게 기우는 것이 보였다. 그중 몇 그루가 우지끈 소리와 함께 반대편으로 무너져 내린 것은 2∼3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의 일이었다. 사방에서 달걀이 썩는 듯한 유황 냄새가 진동을 했다. 냇물은 아예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우르릉거리는 소음과 함께 땅이 갈라지고 바위가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뒤뚱거리는 몸의 중심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며 은우는 수송기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설핏 보니, 수송기 주변의 땅들도 거대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요동치고 있었다. 그나마 주변이 텅 빈 공터라 무너지고 깨지는 갖가지 파편들에 얻어맞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진동하는 땅의 울림에 따라 가슴도 아프도록 두근두근 뛰었다. 크게 뒤뚱거리는 몸 탓에 멀미가 나는지 속이 울렁거렸다. 일체의 판단과 감정이 끊어지고 그저 살아야겠다는 본능만 가득 끓어올랐다.
5미터 전방의 땅이 갑자기 쩍 갈라지며 새하얀 김이 뿜어 나왔다. 은우가 달리고 있는 앞쪽의 땅바닥은 높이 솟아오르고, 반대편 땅바닥은 깊이 함몰하고 있었다. 함몰하고 있는 심연을 향해 박살난 바윗돌이며 흙더미며 나무들이 순식간에 삼켜지고 있었다. 바닥이 40도의 급경사로 높이 솟아오른 바람에 은우의 몸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대로 몸이 뒤집혀 경사면 아래로 몇 미터를 데굴데굴 굴러갔다. 뒤쫓아온 흙더미며 나무뿌리며 돌무더기들이 수십 개의 찰과상을 일으키며 바닥에 널브러진 은우의 몸뚱이 위로 무너져 내렸다. 헐떡이는 숨길을 따라 흙더미와 유황 냄새가 동시에 입안까지 파고들었다.
발작적인 기침을 해대며 필사적으로 몸을 가누었다. 어딘가 멀리서 이명처럼 수송기의 엔진음이 흐릿하게 들려왔다. 물론 착각일 것이다. 다시 공터 쪽을 보니 무너져 내린 땅바닥으로 인해 수송기는 갖가지 잡목뿌리들이 뒤섞인 흙더미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저래서야 이륙은 도저히 불가능할 터였다.
눈앞에 삐죽 솟아나온 나무뿌리를 잡고 간신히 중심을 유지한 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처음보다는 기세를 죽였지만 땅은 여전히 극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은우는 이동을 단념하고 안전한 지점을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어차피 수송기를 타는 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이동을 하기보다는 되도록 안전한 위치에 머물면서 지진이 가라앉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인환아!!!!!
문득 뇌리를 쑤시고 드는 절박한 부름에 은우는 흡 하고 저도 모르게 숨을 집어삼켰다.
―인환아……!!!!! 인환아……!!!!!! 인환아!!!!!!!!
온몸이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몸서리쳐지는 감각에 얼굴의 핏기가 사라졌다. 발끝부터 시작되어 다리, 팔, 어깨, 이어 손가락 끝까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땅이 흔들리는 때문인지, 아니면 극심한 충격 때문인지는 은우도 알 수 없었다.
―인환아!!!!! 인환아!!!!! 인환아!!!!!!!
다시 한 번 머릿속을 직접 강타하는 비통한 부름이 몸서리쳐지는 데자뷔를 불러일으켰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필사적으로 ‘아니야’를 연발하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굳이 여러 번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었다. 오른쪽 측면으로 고개를 틀자마자 20여 미터 상공에서 선회하고 있는 은회색 수송기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흙더미 속에 반쯤 파묻힌 자신의 그것과 모양은 동일하되, 폭파의 흔적인지 여기저기 외피가 부서지고 시커멓게 그은 선체는 어딘가 흉물스러웠다. 워낙에 소리 없이 나타난 터라 더더욱 경악한 은우였지만, 그것은 지진으로 인한 굉음이 워낙 커서 수송기의 엔진음이 묻혀버린 때문일 것이다.
조종석 측면의 출입구가 소리 없이 열리고 있었다. 아니, 역시 주변의 소음이 너무 없어 소리가 없는 것처럼 들렸다. 뻥 뚫린 시커먼 공간에서 불쑥 튀어나온 거구의 몸이 보였다. 익숙한 군장에 익숙한 군복, 그리고 익숙한 몸놀림이었다. 어깨 아래까지 굽이치던 길고 새빨간 머리카락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사방으로 나부끼고 있었다. 음습하고 깊은 눈시울이 희번덕거리며 은우를 쏘아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은우 주변의 착륙 지점을 가늠하고 있는 것이리라. 남자의 허리와 허벅지를 연결하고 있는 가느다란 은빛의 구명줄은 잠시 후에 진행될 남자의 행동을 예고하고 있었다.
출입구 모서리 끝에 간신히 걸려 있던 발이 앞으로 힘껏 도약하는 것이 보였다. 도약의 원심력으로 크게 맴을 돌던 몸이 이윽고 중심을 잡은 듯 수직으로 급강하했다. 190센티가 넘는 커다란 덩치의 몸은 고양이처럼 유연하고 가볍게 구명줄을 놀리고 있었다. 은우는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그 무시무시한 광경을 쳐다보며 숨을 삼키고 있었다.
마비라도 걸린 듯 온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리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뇌 속으로 파고들어온 이상야릇한 절규를 자각했을 때부터 은우의 감각 기관은 거의 제 기능을 하고 있지 못한 듯싶었다. 파괴의 흔적이 역력한 흉물스러운 수송기를 봐도, 그 안에서 뛰쳐나온 음산한 표정의 남자를 봐도, 그 남자가 자신을 도로 쇠사슬에 묶기 위해 줄을 타고 내려와도, 그저 무슨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도저히 일어날 리가 없는 일이 단 1분도 안 되는 찰나의 시간 동안 전광석화처럼 연달아 일어났다. 감각이 마비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천지가 쪼개지는 우레 같은 진동이 귀청을 찢어발길 듯 울려 퍼졌다. 잠시 둔화된 듯하던 땅의 진동이 무섭게 포효하고 있었다. 10여 미터 전방에서 또 땅이 솟아오르면서 은우의 균형 감각을 무너뜨렸다. 다리에 힘을 줘봐야 헛수고일 게 분명했지만, 생존 본능은 움직이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균형을 잡으려던 몸은 잠시 비틀거리다간 이내 아래쪽으로 내던져졌다.
―인환아!!!!!
땅에 전신이 부닥치는 충격과 함께 예의 비통한 부름이 다시금 머릿속을 공명시켰다. 찌르르한 몸의 통증보다도 은우를 아프게 한 것은 물론 머릿속의 부름이었을 것이다.
―안 돼!!! 안 돼!!! 안 돼!!! 인환아!!!!! 장인환!!!!!
축축하고 뜨뜻한 감촉이 바닥과 닿아 있는 피부에서 느껴졌다. 방금 새로 솟아난 부드러운 흙더미에 내동댕이쳐서 충격이 심했음에도 별로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인환아……!!!!! 인환아……!!!!!! 인환아!!!!!!!!
……아아, 시끄러…… 시끄러워…… 부르지 마…… 부르지 말라구……! 그렇게 부르지 마……!!!
어질어질해지는 흔들리는 시야를 가늠하기 위해 기를 쓰며 속으로 고함을 질러댔다. 지진보다도 몇 배는 더 위협적일 부름이었다. 몇 배는 더 아플 부름이었다. 듣고 싶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았다. 왜 그렇게 자신을 부르는지, 부르는 자는 누구인지, 그 무엇도 알고 싶지 않았다.
우르릉거리는 굉음과 함께 여진이 계속되었다. 자꾸만 아래쪽으로 떠밀려가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은우는 거대한 불도저가 지나간 자리마냥 파헤쳐진 흙더미 속에서 지지대를 찾기 위해 손으로 여기저기를 헤집었다. 마침 손에 잡힌 거대한 나무뿌리를 잡고 미끄러지려는 몸을 지탱했다. 여기저기 파헤쳐지고, 무너지고, 또 가라앉은 땅바닥 탓에 더 이상 방향을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저 좀 더 바닥이 평평하고, 좀 더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곳으로 움직이는 외엔 달리 할 일이라곤 없었다. 아, 아니. 물론, 저 무시무시한 추적자를 따돌리는 일도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고개를 빼고 하늘에 떠 있을 수송기를 살폈다. 꽤 많이 미끄러진 듯, 공중에 떠 있는 수송기와의 거리가 상당히 벌어져 있었다. 새로 솟아난 높은 구릉 지대 덕분인지, 바닥에 내려앉았을 남자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비가 되었던 온몸의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아마도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때문일 것이다.
평평한 곳을 찾아 무턱대고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냇가를 따라 걷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수월한 진행이 될 것이다. 땅은 여전히 쿠르릉거리며 여진을 계속했지만 몸이 내동댕이쳐질 정도의 극심한 진동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재빨리 달아나라는 신의 계시일지도 모른다고 은우는 비이성적인 생각을 흘렸다. 사방이 매캐한 유황 냄새와 시큼한 흙냄새, 부러지고 뽑힌 잡목들이 뿜어내는 풀 비린내로 진동을 했다. 먼지와 돌가루와 부서진 이파리들이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공간 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자신의 모습 역시 좀비와 다르지 않을 터였다. 물벼락을 맞아 흠뻑 젖은 온몸은 진흙과 나뭇잎과 잡풀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었다. 반쯤 넋이 나간 정신은 어디를, 얼마나 가야 하나 갈피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진짜로 가야만 할 필요가 있는가 하고 의심까지 들었다.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도로 붙잡혀버렸다. 남자의 사슬에 다시 덜미를 잡혀 어딘가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정말로 자신 혼자 걷고 있는지 도무지 의심스러웠다. 머리든, 가슴이든, 다리든, 몸의 어디쯤엔가 남자와 자신을 연결하는 줄이 단단히 묶여 있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양쪽 허리춤을 틀어잡는 힘찬 악력이 느껴졌다. 버팅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단숨에 휘어잡힌 몸은 그대로 뒤로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딱딱하고 뜨거운 몸의 감촉이 밀착된 등에 느껴졌다. 쥐어 터트릴 것 같은 악력이 상반신을 조이고 있었다. 매캐한 유황 냄새와 흙냄새에 뒤섞여 익숙한 사향 냄새가 코끝으로 확 끼쳐들었다. 갈퀴처럼 은우를 감은 채 움직임을 제압한 남자가 은우의 몸을 돌리더니 사슬 같은 구명줄로 자신과 남자 스스로를 한꺼번에 둘둘 휘감았다. 하늘에 떠 있는 수송기로 당장 끌어올릴 심산인 모양이었다.
“으…… 우아아아아!!!!!”
분노는 아니다. 증오도 아니었다. 온몸을 갈퀴처럼 벌어진 사지로 친친 휘감고 있는 행위에 혐오감을 느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아마도 그것은 막막함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해도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 아득함. 그리고 절망…….
“……으아아아악!!!!!”
휘몰아치는 흙먼지, 유황 냄새, 지축을 흔드는 굉음에 은우의 비명 소리가 흐릿하게 보태졌다. 자신이 낼 수 있는 목소리 중 가장 크게 내질러졌을 소리지만, 천지가 개벽하는 마당에 어느 무력한 인간 하나가 내지르는 비명이 세상에 울림을 줄 리 만무했다.
“우아아아!!!! 아아아!!! 아악!!!!!”
소용없다는 걸 알아도, 무력하다는 걸 알아도, 그러나 비명은 좀처럼 멎지 않았다. 사지를 뒤틀며 남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광을 해대는 것도 도무지 멎지가 않았다. 허리와 가슴을 두 번 감아, 서로의 몸을 단단히 고정한 남자는 은우의 손목을 움켜쥔 채 반항을 멈추게 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남자는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바로 눈앞에 남자의 턱 언저리가 있었는데 그 근처가 맑은 이슬방울들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순간 치밀어 오른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은 동정심도, 그러나 은우의 히스테리를 잠재우진 못했다.
“흐아아!!! 악!!! 아악!!!!!”
―그만해!!! 그만해, 인환아!!! 제발 그만해!!!!!
“아아아아아!!!!! 아아아!!! 아악!!!!!!!”
―이러지 마!!! 인환아, 나야!!! 나야, 인환아!!! 나야!!!
“싫어엇!!!!!”
―인환아!!! 인환아!!!!! 인환아!!!!! 인환아!!!!!!!
은우의 발광하는 사지와 얽혀든 남자의 다리가 크게 휘청거렸다. 그대로 중심을 잃은 몸은, 자리를 잡기 위해 여전히 간헐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땅바닥 위로 곤두박질쳤다. 10도쯤 경사를 이루고 있는 지면을 따라 달라붙은 두 개의 몸뚱이가 몇 바퀴를 데굴데굴 굴러 내려갔다.
“아아악!!! 으악!!!!!! 악!!!!!”
남자의 손이 본능적으로 은우의 몸을 감싼 탓에 바닥에 곤두박질쳐져 구른 충격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아픔을 느끼기엔 온몸과 정신을 사로잡은 광기가 너무나 지독했다.
성글게 휘저어진 진흙 더미와 풀뿌리가 자갈들이 와락와락 비명을 지르며 두 사람의 몸 위로 쏟아져들고 있었다. 은우의 사지가 남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며 주변의 흙더미를 쳐대기 때문이었다. 은우를 깔아뭉갠 자세로 상반신을 누르고 있는 남자의 기세 또한 필사적이었지만, 은우와는 달리 보호하려는 몸짓에는 한계가 있었다. 은우가 무턱대고 휘두르는 주먹에 얻어맞고 할퀴어져 남자의 가슴팍이며 목덜미며 얼굴들은 순식간에 멍 자국과 핏자국으로 낭자해졌다.
―그만해!!! 그만해, 장인환!!! 그만해!!! 제발!!!!!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으아아악!!!!!”
―안 돼!!!!!
갑자기 눈앞에서 번쩍 불꽃이 일었다. 목 관절이 뚜둑 하는 소리가 나며 고개가 왼쪽 옆으로 크게 돌아갔다. 남자가 은우의 뺨을 때린 것이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그대로 내리친 모양인지, 한동안은 아픔에 정신을 차릴 수조차 없었다. 돌아간 고개를 따라 바로 코앞에 있던 흙더미가 부슬부슬 흘러내리며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깔깔하고 비릿한 흙 맛이 알싸하게 입안에 감도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절대로 안 보내줘!!!!!! 죽어도 못 해!!!!! 죽어도 안 보내줘!!!!!!!
옆으로 돌아갔던 고개가 다시금 잽싸게 원위치되었다. 남자의 두 손이 은우의 얼굴을 남자의 정면으로 끌어당긴 때문이었다.
한 손으로 은우의 가슴을 찍어 누른 채 다른 한 손으로 은우의 턱을 움켜쥔 남자는 이리저리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은우의 눈을 무섭도록 노려보고 있었다. 처음 직시하는 남자의 얼굴은 불같은 격렬한 광기로 타오르고 있었다. 과연 저 얼굴이 자신이 알고 있는 저능아의 얼굴인가, 순간 무시무시한 공포감과 전율을 동반한 위화감이 은우의 피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시뻘겋게 충혈된 흰자위가 무시무시했다. 시퍼런 불길처럼 날름거리며 번들거리고 있는 푸른 눈동자가 경악스러웠다. 단 나흘 만에 뺨이 홀쭉하게 드러날 정도로 말라비틀어진 아름다운 얼굴 윤곽이, 새하얗게 핏기를 잃고 있는 시체 같은 낯빛이 믿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줄곧 홍수처럼 눈물을 쏟아내면서도 총명하게 빛나고 있는 이지적인 눈매가 낯설었다.
“……누구……?”
들릴 듯 말 듯한 허스키한 목소리가 지축을 흔드는 굉음 틈으로 아득하게 들려왔다. 자동인형처럼 토해진 자신의 목소리였다.
……정말로 얼굴만 같은 다른 사람이었다. 눈앞의 이 낯선 사내가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가련한 저능아일 리가 없다. 맹세를 하라고 하면, 정말로 죽은 엄마를 걸고 맹세할 수 있었다. 음악을 걸라고 해도 걸 수 있다. 피아노를 걸라고 해도 한 치도 망설이지 않을 거다. 이 사내는 남자가 아니다. 에녹이 아니다. 자신이 넬슨호에 버려두고 온 저 가련한 저능아가 아니다. 절대로, 결단코 아니다!!!
―죽여버릴 거야!!!! 차라리 죽여버리겠다, 장인환!!!!! 내게서 죽어도 도망치겠다면 그래, 죽어라!!!!! 지금 당장 죽어!!!!!
“……?”
―그래, 죽여버릴 거다!!!!! 끝까지 고집을 부려봐라!!!!! 너도 죽이고 나도 죽어주지!!!!! 어차피 바닥까지 떨어진 영혼이다!!!!! 너를 잃는다면 전부를 잃는 건데…… 그래,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어!!!!!!! 없다구!!!!!! 없단 말이다, 장인환!!!!!!!
“……?”
―왜 도망치는 거야?!!!!! 어째서 혼자만 멀리 가버리는 거냐?!!!!! 왜?!!!!! 도대체 왜?!!!!!!!
“……?”
―얼마나 오랫동안 찾아 헤맸는데!!!!!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기다렸다구!!!!! 미쳐버리는 것처럼 오래…… 너무 오래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잊지 않고 널 기다렸단 말이다!!!!! 너만 기다렸단 말이다!!!!!! 그런데 왜 도망치는 거냐?!!!!! 왜 도망치냐구!!!!!!!
“……?”
―날 몰라?!!!! 날 기억 못 해?!!!!!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거냐?!!!!!!
“……누…… 누…… 구……?”
―알고 싶어?!!!!! 내가 누군지 알고 싶은가, 이제?!!!!!
“…….”
―좋아, 알게 해주지!!!!! 기억나게 해주마!!!!! 뇌수가 터져서 녹아버린대도 이제 상관 안 해!!!!! 절대로 헤어질 수 없어!!!!! 넌 네 거다!!!!! 과거에도 내 거였고, 현재도 내 거고, 미래에도 내 것이 될 거야!!!!! 왜냐하면 영원히 널 놔주지 않을 테니까!!!!! 그래!!!!! 진화 따위 어떻게 돼도 좋아!!!!! 역진화를 하다못해 무지렁이 바퀴벌레로 윤회한대도 상관 안 해!!!!! 왜냐면 난 너만 가지면 되니까!!!!! 너만 내 것으로 차지하면 돼!!!!! 그래!!! 난 그럴 거다!!!!! 그렇게 하고 말거다, 장인환!!!!!!!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은 비 오듯 흐르는 눈물과 상처로 얼룩져 소름이 끼칠 만큼 기괴해 보였다. 시뻘겋게 충혈된 흰자위는 금방이라도 눈꺼풀을 뚫고 튀어나올 것처럼 희번덕거리고, 새파란 동공에선 알 수 없는 열기와 광기가 불을 뿜었다.
은우의 턱을 움켜쥐고 있던 남자의 오른손이 가슴 부근에 위치한 재킷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곧바로 빠져나온 손가락 틈엔 5센티 크기의 주사 앰풀이 들려 있었다. 오른쪽 목덜미 끝으로 따끔한 충격이 느껴졌다. 남자가 은우의 목에 주사를 놓은 것이다. 휘둥그레져서 남자의 몸짓을 눈으로 좇고 있는 사이, 남자는 자신의 머리를 서클릿처럼 둥글게 감싸고 있는 은색의 가느다란 띠를 벗더니 은우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그것이 일반 시민에겐 사용이 금지된 ‘뇌활성 증폭기’라는 것을 자각했을 즈음엔 이미 은우의 머리엔 작동 예비 단계에 돌입한 흉물스러운 서클릿이 채워진 후였다. 그러나 설령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은우에게 반항을 할 여유나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고 해야 옳다. 전광석화처럼 진행된 남자의 그 모든 몸짓엔 은우를 옴짝달싹할 수 없게끔 하는 단호한 의지와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기억해내!!! 기억해낼 때까진 풀어주지 않을 거다, 장인환!!!
남자가 손목 끝에 팔찌처럼 감고 있는 조절기의 버튼을 누르는 것이 보였다.
―말했지?!!! 뇌수가 터져서 녹아버린대도 멈추지 않을 거라고!!! 여덟 시간이 한계라고 놈들이 협박을 했지만, 봐라!!! 나흘째 사용하고 있는데도 뇌수는 터지지 않더군!!! 아니, 이제 슬슬 한계인지도…… 네 뇌수가 터지기 전에 내 머릿속이 먼저 터져버릴지도 모르지!!!
갑자기 눈앞에서 수천 와트의 전등이 터진 것처럼 환하게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니, 눈이 아니라 이마였다. 빛은 이마 한가운데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그 구멍을 타고 스며들고 있었다. 머리가 깨지는 것 같은 극심한 통증이 뇌리 구석구석 퍼져갔다. 뇌가 짓눌리는 것 같기도 하고, 뜨거운 액체가 흘러들어 안쪽을 태우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채찍을 맞은 것처럼 온몸에 극심한 전율이 흘렀다. 전율은 금세 온몸이 뒤틀리는 거센 경련으로 변했다.
“으…… 흑…… 헉……! 흣……! 흐아아아악!!!!!”
끔찍스러운 비명이 저 멀리 울창한 밀림 속으로 퍼져갔다. 쩍 벌어진 지축에서 지옥의 향기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파!!! 아파!!! 아파!!! 아파앗!!!!!
어린애처럼 울부짖으며 머리를 움켜쥔 채 몸부림쳤다.
―인환아!!!!! 인환아!!!!! 인환아!!!!!
남자의 손이 자신의 손 위에 겹쳐지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부릅뜬 눈두덩 위로 그의 시퍼렇게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다가들었다. 광란하듯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몸은 남자에게 무시무시한 힘으로 짓눌리고 있어, 그야말로 옴짝달싹도 못 한 채 가파른 진동만을 거듭하고 있었다. 온통 시커먼 진흙과 동강난 나무뿌리와 희뿌연 백골 같은 유황 연기뿐이었다. 고통, 고통, 고통, 오로지 고통뿐이었다. 마치 온몸이 가루로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불처럼 뜨거운 남자의 이마가 자신의 이마를 짓누르며 시선을 맞춰왔다. 남자의 부리부리하게 빛나는 격렬한 눈빛은 어딘가 낯이 익었다. 눈물을 방울방울 흘려 내보내고 있는 시뻘건 눈시울도 기억에 있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두통 속에서 은우는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쳐가는 수만 가지 기억들을 한눈에 지켜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인생의 비밀, 먼먼 우주의 신비, 신(神)의 존재와 부재, 영원과 순간, 물질과 비물질, 사랑과 증오, 또한 카르마와 인연들이 온통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은우의 전 존재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생(生)이, 영겁과도 같은 압도적인 생의 시간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솟아올랐다가는 꺼져갔다. 그것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망망대해의 한가운데에 떨어진 것처럼 극적이고, 압도적이며, 또한 비극적인 영원의 기록이었다. 결코 보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또한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던 슬픈 역사였다. 환희에 찬 충만함이었다. 생명의 정점이었다. 한 점 특이점으로 뭉치는 블랙홀 같기도 하고, 영원 끝까지 퍼져나가는 긴긴 시간의 흐름 같기도 한 그것의 한복판에 ‘남자’가 있었다. 남자의 눈이 있었다.
시퍼렇게 번들거리는 야수의 눈이었다.
아니, 기계처럼 아무 표정이 없는 고요하고 단아한 눈동자였다. 새까만, 아기의 그것처럼 맑은 눈동자였다. 쌍꺼풀이 없는 대신 크기는 상당히 커서 쌍꺼풀이 있다면 되레 그 완전무결한 균형이 깨질, 몹시도 아름다운 눈매가 아기 같은 눈동자를 살포시 감싸고 있었다.
그리운 눈이었다.
아프도록 가슴을 죄는…… 살아도, 설령 죽어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내 연인의 영원한 눈동자였다.
―선생님……?
그리운 눈동자가 부드러운 어조로 은우를 부르고 있었다.
―만남의 횟수를 지금보다 더 늘려줄 수 있으신지요……?
고요하고 담담하면서도 촉촉한 물기가 어린 나지막한 바리톤.
―한 번 더 하실래요……?
한번 터진 기억의 봇물은 노도처럼 순식간에 은우를 덮쳐들었다.
―……네, 선생님? 저도 선생님 참 좋아해요. 알고 계시죠……?
―……자주 생각해요. 선생님이 게이가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럼 평생 사이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을 텐데 하고…….
―……폭력이란 그런 거죠…… 일단 태어나면 무섭도록 전파력이 강해요…… 바이러스보다도 더 쉽게 감염이 되죠…….
―……되찾을 겁니다, 반드시…….
―……언젠가 이 집을 되찾게 되는 날엔 더 이상 쓰레기들에게 밟히는 일도 없겠죠…….
―……아무도 내 가족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거야…… 받은 만큼 돌려줄 거니까…… 그 이상으로 돌려줄 거니까…… 죽일 거야…… 강이 형처럼 해줄 거야…… 윤열이 형처럼 박살을 내줘야지…… 막지 못해…… 아무도 막지 못해요…… 못 하게 할 겁니다, 누구도…….
―……꽃이 핀 것 같아요…… 선생님 재킷…… 진달래처럼 예뻐요…….
―……고마워서요…… 연습해보시겠다고 한 거…… 정말 고마워서요…….
―……선생님 잃고 싶지 않아요. 정말 저 그래요, 선생님…….
―……성준이를 잃고 싶지 않듯이 선생님도 같아요…… 제겐 똑같이 소중해요…….
―……제겐 똑같이 소중해요…… 똑같이 소중해요…….
뼛속까지 녹아내리는 듯한 황홀한 고백이 아랫배를 찌르르하게 달구며 정수리 위까지 뻗쳤다.
―……마지막이니까…… 오늘…… 마음껏 해요, 선생님…….
―……최고로 즐겁게 해드릴게요…… 실컷 해요…… 서로…….
―……어젯밤엔 선생님이 취하셔서 별로 많이 하지는 못했거든요…….
―……오늘…… 하루 종일…… 침대에서 나오지 마요…… 좋죠, 선생님……?
―……침대에서 나오지 마요…… 좋죠, 선생님……?
―……좋죠, 선생님……?
가장 찬란했던 생(生)이, 가장 빛났던 사랑이, 오랜 기다림과 고통 끝에, 마침내 보답받은 연인의 영혼이 들릴 듯 말 듯 달콤하게 소곤거리고 있었다.
“……위…….”
……정열적인 손아귀에 틀어잡힌 두 다리가 활짝 열렸다…….
“……위위……?”
……열린 문틈 사이로 그의 거대한 몸이 도둑처럼 스며들고 있었다…….
“……위야……? 위야니……? 너, 위야니……?”
―…….
자신의 얼굴에 딱 달라붙어 광기 서린 시퍼런 눈을 번들거리고 있는 낯선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홍수가 난 것처럼 끝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남자의 눈물이 은우가 듣고 싶어하는 대답을 대신 들려주고 있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낯선 남자의 얼굴을 어리둥절해서 들여다보고 있는 이 순간에도, 온몸을 전율시키는 행복한 기억들은 노도처럼 사방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득하게 이성을 상실해가는 시선을 들어 자신은 필사적으로 연인의 자취를 주워 모으고 있었다. 몸짓 하나하나, 표정 하나하나, 그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흐릿한 홍조가 연인의 뺨과 눈가를 아릿하게 물들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니, 그러한 기억이 뇌리를 스쳐갔다. 큼직하고 맑은 연인의 눈동자가 빨아들일 것처럼 뜨겁게 자신의 눈을 굽어보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맑고 투명한 밤처럼 새까만 눈동자였다. 키스를 유혹하듯 무방비하게 벌어진 입술은 도톰하고 붉고 섹시했다.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든 뚜렷한 이목구비는 어딘가 이국적이면서도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극상의 아름다움이었다…….
“……위…… 위위……? 위위야……? 내 위위야, 너……?”
―…….
“……진짜 내 위야야……? 그래……? 내 위야가 와줬어……?”
―…….
푸른 눈에 새빨간 피처럼 붉은 머리를 한 낯선 남자는 여전히 말이 없다. 그러나 은우는 알 수 있었다. 대답을 하지 않아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아도, 자신이 연인을 못 알아볼 리가 없다. 낯선 푸른 눈을 하고 있어도, 피처럼 새빨간 붉은 머리를 하고 있어도, 기억 속을 떠돌고 있는 뚜렷하고 강인한 이목구비보다 훨씬 깊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는 백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도, 에녹이라는 이상야릇한 이름을 갖고 있어도, 자신이 연인을 못 알아볼 리가 없다. 연인의 냄새를 모를 리가 없다. 자취를 못 알아챌 리가 없다.
……잔뜩 구겨진 채 연인의 짙은 체취를 뿌리고 있는 군청색 반팔 면 티가 보였다. 낡을 대로 낡아서 거의 보풀이 일어날 듯한 개구리 왕자의 허물이었다. 연인의 버겁고 아픈 현실이었다. 어쩐지 괴로워져서 시선을 내려 자신을 내려다본다. 연인의 늠름한 어깨와 팔뚝에 걸쳐진 채 활짝 열려 흔들리고 있는, 자신의 볼썽사나운 짝짝이 다리가 보였다. 맞붙은 하반신이 격렬하게 쳐 올려질 때마다, 허벅지 아래로 늘어진 자신의 새하얀 바스 가운 깃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마치 푸드득거리는 날갯짓처럼 보였다.
……이대로 날아올라 다시는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으면…….
애절하고 절망적인 소원을 오래도록 되뇌고 있는 과거의 기원이 부메랑처럼 현실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랬다. 내 하늘이었다. 내 생명이었다. 영원이었다.
내 모든 것이었다.
영원히 함께하자고 맹세했다. 절대로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했다. 수만 번을 죽고, 수만 번을 다시 태어나도 서로를 잊지 말자고. 서로만을 사랑하자고 피를 나눴다. 생명을 나눴다. 영혼을 나눴다.
아아, 그랬다.
자신들은 소울메이트였다……!!!
“……그렇구나…… 위야구나…… 아아, 내 위야구나…… 위위…… 나의 위위…… 내 사랑스러운 위야로구나…….”
―…….
은우의 양쪽 관자놀이를 두 손으로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낯선 남자가 조용히 눈을 감는 것이 보였다. 눈꺼풀이 감기자 흥건하게 차올라 있던 눈물이 기다렸다는 듯 후둑후둑 은우의 얼굴 위로 떨어져 내렸다. 망설이지 않고 남자의 뺨으로 두 손을 가져갔다.
조금 힘을 주자 남자의 얼굴이 힘없이 아래로 딸려왔다.
멀리서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여진으로 흐느끼고 있는 지축의 소리였다. 새로 솟아나고, 반대로 함몰한 지축이 다시 아귀를 맞추고 있는 소리였다. 하나로 합쳐 기쁨에 겨운 나머지 열렬하게 입술을 부비는 소리였다.
연인의 입술은 까칠하니 말라서 껍질이 벗겨져 있었다. 얼마나 갈라졌는지 혀로 핥자 찝찔한 피 맛이 느껴졌다. 파르륵 전율을 흘리며 은우의 키스를 받아들이던 남자가 갑자기 부서트릴 것처럼 은우의 허리를 껴안아왔다. 물어뜯을 듯한, 마치 잡아먹는 것만 같은 격렬한 입맞춤과 함께였다. 그에 질세라 은우도 연인의 목에 팔을 감았다. 허벅지와 종아리를 남자의 허리와 다리에 휘감고 있는 힘껏 끌어당겼다. 나무뿌리처럼 서로를 얽는 맹렬한 포옹이었다. 연인의 휘몰아치는 혀가 목구멍 깊숙이 파고들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아니, 좋아했던 연인의 깊은 키스였다. 아랫배를 찌르르 전율시키며 생식기가 뻣뻣하게 발기했다. 단숨에 한계까지 치닫는 극심한 욕망에 허리를 뒤틀며 은우는 연인의 몸에 더더욱 힘주어 달라붙었다. 입안에서 불길을 일으키며 경련하고 있는 연인의 혓바닥을 있는 힘껏 물어뜯었다. 목구멍으로 줄줄 흘러들어오고 있는 연인의 타액도 굶주린 듯이 탐욕스레 빨아 마셨다.
절대로,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더 열심히 사랑하고, 더 열심히 행복하자고.
몇 만, 아니, 몇 천억 번째일지도 모를 맹세를 되뇌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