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1989년 12월. 문위(文偉)
복제 테이프를 파는 리어카도, 상점들도 온통 크리스마스 캐럴로 시끄러웠다.
크리스마스가 되려면 아직 열흘이나 남았건만, 진작부터 떠들썩하니 요란을 떨어대고 있었다. 거리 곳곳의 상점마다 각양각색의 트리들이 들어앉은 지도 벌써 꽤 되는 것 같다. 기독교인도 뭣도 아닌 가난한 자신에겐 하등 반갑지 않을 또 다른 겨울 풍경에 지나지 않건만, 역시 사방에서 이렇게 북을 쳐대면 누구라도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막 지나쳐온 옷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루돌프 사슴코를 무심코 따라 흥얼거리다가, 위는 기가 막힌 나머지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신앙이라기보다는 이제 상술의 문제가 돼버린 서양 출신 명절은 위에겐 별로 달갑지 않은 날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엄마는 크리스마스 때면 어김없이 형제들을 반강제로 미사에 데려갔었다.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트리를 장식하고, 그 밑에 가족 전원에게 줄 비밀 선물을 잔뜩 쌓아놓고, 빙 크로스비의 캐럴 음반을 틀었다. 그러곤 성대한 자정 미사가 거행되는 성당으로 형제들을 끌고 직행했다. 종교가 없는 아버지 탓에 자식들에게 신앙을 강요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크리스마스와 부활절만은 아버지도 어쩌지 못했었다.
물론 모두 다 행복했던 연희동 시절의 얘기다. 아버지가 그렇게 가고 집안이 기울면서, 엄마의 순진한 신앙 전선에도 문제가 찾아왔다. 살아남기에 급급한 탓이었겠지만, 아버지가 가신 다음해부터 엄마는 성당엘 나가지 않게 되었다. 결국 가톨릭 신자라면 도저히 행할 수 없었을 방법으로 자신의 목숨을 가져갔다.
당연히 위는 크리스마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캐럴도 듣기 싫어하고, 아기자기하게 포장된 화려한 선물 상자들도 보기 싫어한다. 나약한 기독교 신자들이란 물론 더더욱 마땅치 않다. 그들이 믿는 하느님과 예수님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그 모두가 목을 맨 엄마를 연상시킨다. 행복했던 연희동 시절을 뇌리로 끌어들인다. 썩어 빠진 감상에 젖게끔.
캐럴을 흥얼거리다니, 나사가 빠져도 한참이나 빠졌다. 아아, 물론 무의식적으로 따라 한 것이니 용서해주자고 생각을 고쳐먹는다. 어디를 가나 사방에서 붕붕거리며 귀에 들어오니, 이쯤 되면 세뇌가 아니더냐. 게다가 지금은 몹시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기분이 들뜨는 것도 당연하지 않는가 말이다.
따뜻한 난방이 돼 있던 버스에서 내린 지 10분이 넘어가니 역시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졌다. 올해 들어 처음일 한파가 들이닥쳐서 기온은 영하 8도까지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바람마저 꽤 불어서 체감 온도는 영하 10도 이하일 것이다.
티셔츠에 모직 셔츠에 스웨터에 털목도리까지, 딴에는 두툼하게 속을 채웠었지만 낡은 더플코트로 영하 10도의 추위를 감당하기엔 역시 무리가 있었다. 강이 형의 것이었던 검정색 더플코트는 현재 자신이 가진 유일한 겨울 코트였다. 모양은 꽤 세련됐지만 너무 오래되고 낡아, 보온성 면에선 별로 유효하지 못했다. 역시 좀 더 따뜻한 오리털 파카를 걸치고 왔어야 했나 하고 잠깐 생각했지만, 그러나 후회는 하지 않았다.
그를 만나러 오는 날엔 역시 자신도 좀 멋을 내고 싶은 기분이 든다. 게다가 오늘은 방학을 해서 집에 들렀다 오는 길이었다. 그가 싫어하는 눈치인 촌스러운 교복을 갈아입은 김에 좀 더 멋을 내보자는 마음이 들었었다. 새로운 고객을 물색할 때가 아니라면 별로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는 자신으로선 좀 이례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자신이 개중 나은 옷을 걸칠 때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거짓말 안 보태고 그야말로 하트가 뚝뚝 떨어지는 형상이 된다. 말을 하는 대신 온몸으로 그렇게 좋다는 감정을 표현하는 그에게 무심해지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와는 다른 방식일지언정 자신 역시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가족에 버금갈 만큼 몹시도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소중한 친구가 그리 좋아하는데 까짓 옷차림 하나 신경 쓰지 못할까 보냐. 사치를 부리는 것도 아니고, 고작 옷장에서 개중 나은 걸 골라 걸칠 뿐인 것을.
……오래간만의 사복 차림에 그가 여느 때처럼 하트를 뚝뚝 떨구는 눈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의 아틀리에가 있는 골목길로 접어들기 직전, 마침 지나가게 된 24시간 마트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옷매무새를 슬쩍 살피며, 위는 유치한 기원을 흘리고 있었다. 아니, 눈에서 하트를 뚝뚝 떨어뜨린다기보다는 사실 그의 우울증이 좀 나아졌으면 싶었다.
지난 2주 전쯤부터던가, 그의 태도가 확실히 이상해졌다. 여전히 자신을 향해 숭배와도 같은 애정을 보내고 섹스에도 자지러지는 것은 변함없는데, 무언가 알 수 없는 그늘이 생긴 것이다.
집안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림이 잘 안 그려지냐 하면, 그 또한 아닌 것 같았다. 주의 깊게 살펴본 결과 원인은 자신에게 있었다. 물론 구체적인 이유는 잘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자신 때문이라는 것은 알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에 미묘한 슬픔이 서려 있었다.
툭하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가끔씩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하기도 하고, 어떤 땐 심각할 정도로 괴로운 일이라도 있는 양 눈물까지 글썽거리기도 했다. 역시 자신의 얼굴을 몰래 훔쳐보며. 슬쩍 왜 그러냐고 다그치면,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안타깝고 답답한 표정을 만들곤 했다.
물론 대꾸는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둘러대 위의 질문을 막고 돌아서선 또다시 눈물을 글썽이니, 위로서도 답답하다 못해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무언가 위에게 원망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복받치는 애정을 주체 못 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으면서도, 때론 그 모든 극과 극의 감정들을 초월해 담담해진 척 냉정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야말로 변덕이 죽 끓듯 해서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급기야 지난주 금요일의 만남엔 대성통곡까지 해버렸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격렬한 섹스를 몇 번이나 실컷 해놓고 줄초상이 난 것처럼 꺼이꺼이 울어대니, 그간 여러 번 그를 달래려 시도했던 위로서도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자신에게 원인이 있었지만, 그것은 자신이 해결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의 문제였다. 그의 마음의 문제. 히스테리인지도 모르고, 우울증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새삼 짝사랑을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것일지도.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그간 그의 모든 불가사의한 변덕들이 자연스레 이해가 되었다. 위 자신이 원인이면서도 자신이 해결할 문제는 아니라는, 저 이율배반도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대충 답답한 기분은 진정이 됐지만 그래도 우울증에 빠진 그를 보는 것은 역시 마음이 편치 못했다.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도 자신이 해결해주고 싶었다. 도와주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그의 기분을 돌릴 수 있을까, 위는 지난 주말 내내 틈만 나면 그런 생각만 곱씹으며 보냈다. 그리고 생각을 골몰할수록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뾰족한 방법이 거의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자신에게 있어 그는 이미 소중한 친구지만 그것은 보장이 안 되는 우정이었다. 그의 감정이 계약을 끝낸 후에도 여전히 그대로라면 자신들은 남남으로 돌아서야만 한다. 여덟 달 남짓밖에 만남이 허락되어 있지 않은 남창과 손님 관계에, 진짜 친구처럼 든든한 의지가 되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그를 가장 기쁘게 할 만한 ‘감정적 보답’ 또한 위로선 절대로 불가능했다. 그를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그건 친구로서이지 그와 같은 연인의 감정이 아니었다.
결국 고객을 성적으로 기쁘게 해주는 것만이 위에게 허락된 유일한 위로 방법이었다. 그리고 최근, 그 유일한 위로 방법조차도 약발이 다한 것은 아닌가, 위는 의심이 들고 있었다.
확실히 그는 요 2주간 자신을 만나는 게 기쁜 것 같지만은 않았다. 아니, 정직하게 말해 우울해하거나 슬퍼하는 적이 더 많았다고 해야 옳다. 그전 주인 12월 초순 무렵엔 우연찮게 혜윤이와 조우하게 되어 희희낙락 자신의 집에까지 들락거리던 그였었다. 혜윤이에게 선배이자 교생이라고 위장을 하긴 했어도 역시 켕기는 구석 때문에 그의 방문을 꺼렸었지만, 막상 집에서의 플라토닉한 만남은 위 자신에게도 예기치 못한 즐거움이 돼주었었다. 그를 성적으로 만족시켜야 한다는 부담이 없다 보니 그를 보다 자연스럽게 대할 수가 있었다. 친구로서의 플라토닉한 시선으로 관찰하면 할수록 위는 그가 점점 더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온순한 성격은 혜윤이와 닮았고, 선하고 상냥한 인품은 죽은 강이 형을 떠올리게 했다. 자신에 대한 끔찍스러운 애정과 배려심은 죽은 엄마 이상이라는 느낌마저 들게 했다. 어떻게 좋아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격도, 외모도, 버릇도, 도무지 싫거나 거슬리는 부분을 찾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유일한 친구랄 수 있는 성준이와는 거의 극과 극이라 여겨질 만큼 개성이 달랐지만, 위 자신이 느끼는 애정도에 있어선 전혀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그 주의 주말엔 혜윤이와 자신에게 저녁을 사주고 되돌아가는 그의 BMW 꽁무니를 멍하니 배웅하곤, 아쉽고 허전한 마음에 한참을 하릴없이 동네 공원을 배회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너무나 즐거운 한 주였기에, 위는 곧바로 이런 황망한 2주가 펼쳐지리라곤 차마 짐작도 못 했다.
물론, 막상 만나서 섹스를 하게 되면 그는 여지없이 자지러졌다. 세 시간 남짓한 만남의 시간을 거의 대부분 섹스를 하는 것으로 보내곤 하니 문제는 없지 않은가 싶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시작하기 전과 끝내고 난 후의 그 우울한 얼굴이라니! 극도의 오르가슴을 이끌어내는 화려한 섹스 테크닉을 아무리 선사해도 그 막강한 우울의 아우라엔 자신으로서도 도무지 대적할 수가 없었다!
역시 슬슬 위기감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게 생겼단 말인가?
아아, 물론 아직 실망하기엔 이르다. 그에게 호감이 생기고부터 자신은 포르노 필름이 없이도 발기가 가능하게 되었다. 발기뿐이랴, 나름대로 그의 몸을 즐길 수 있게까지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일단 호감을 느껴버린 육체에 최상의 테크닉과 서비스를 안겨주는 일은 자신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기왕에도 서비스에 최선을 다해왔지만, 오늘부터는 더더욱 신경을 쓸 생각이다. 좀 더 능란하고 좀 더 배려 있게 그를 안을 수 있도록 해야지. 그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줄 수야 없겠지만, 절대로 자신의 몸에는 불만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새삼 결의를 굳히며 위는 걸음을 빨리했다. 아직 저녁 6시가 채 되지 않았는데도 거리는 벌써 가득 내린 땅거미로 어둑어둑했다. 찬바람에 드러난 얼굴과 귀가 몹시 시렸다. 방한화라고는 빈말로라도 할 수 없는 낡은 운동화 탓에 발도 꽤 시렸다.
갑자기 휘몰아친 강한 바람에 코트 깃을 여미며 마지막 길모퉁이를 돌자, 마침내 그의 아틀리에가 보였다. 반가움과 기쁨에 조건 반사처럼 가슴이 설렜다.
곧 따뜻한 그의 침대 속으로 파고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따뜻하고 습한 그의 깊은 곳으로도. 상상만으로도 사타구니 사이가 뻐근해져왔다.
뜀박질을 하다시피 빌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날씨가 몹시 춥다며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는 경비원에게 꾸벅 답례를 하고, 부랴부랴 아틀리에 현관 앞까지 뛰었다. 벨을 누르는 손이 몹시 떨린다. 추위로 손가락 끝이 빨갛게 얼었지만 단지 추위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벨소리가 울리자마자 쿵쿵거리며 달려오는 다급한 발소리가 현관문 안쪽에서 흐릿하게 들려왔다. 보나마다 인터폰을 확인하지도 않고 달려오는 중이리라. 자동문이라 인터폰으로 확인하는 즉시 버튼을 누르면 되는데도 그는 굳이 버선발 마중을 하곤 한다. 그런 그의 사소한 행동조차 자신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애정을 증명하는 듯해서 씁쓸한 기분이 들지만 차마 내색은 하지 못한다.
찰칵.
잠금쇠 풀리는 소리가 아직까지 귀에 쟁쟁한 캐럴 소리보다도 더 유쾌하게 들려왔다.
“……어…… 어서 들어와, 위야! 너…… 너무 춥지, 밖에?!”
떨리는 듯한 어눌한 목소리와 함께 섬세하고 귀여운 얼굴이 반쯤 열린 문틈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아아, 역시 하트가 뚝뚝 떨어지는 사랑스러운 눈! 꽃이 피어나듯 환하게 피어나는 화사한 미소에 마주 웃음을 보내려다가 위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하트가 뚝뚝 떨어지는 눈. 그렇지. 하트가 뚝뚝 떨어지곤 있다만, 바로 몇 분 전까지는 하트 대신 눈물을 펑펑 떨어트리고 있었을 게다! 개구리눈처럼 빨갛게 부어오른 눈꺼풀은 한눈에 보기에도 몇 시간이나 대성통곡을 했을 법한 그의 상태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젠장. 두근두근 맥박 치던 사타구니에 일순 된서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예. 정말 춥네요. 갑자기 추워져서 더 춥게 느껴지는 거 같아요. 주말 잘 지내셨죠?”
짐짓 못 본 체 무뚝뚝한 인사말을 던진다.
……도대체 요새 왜 이러는 거지? 도대체 이 사람이 왜?!!! 그의 우울함이 목구멍을 죄어온다. 자기 보호를 위한 대응 방법을 강구하기에 앞서 안타깝고 초조한 근심이 드는 건, 역시 그가 이미 타인의 범주를 한참 벗어나 자신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소중한 친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타 다른 여자 고객들이 (아마도 자신 때문에) 이렇게 울고불고 했다면 자신은 꽤나 성가시고 짜증스러운 기분을 느꼈을 터. 그리고 그날로 당장 계약 해지의 구실을 궁리했겠지.
“어…… 어어, 그래. 빠…… 빨리 들어와, 위야. 세상에, 아주 꽝꽝 얼었구나…… 뺨이랑 코랑 다 빨개…… 손도 얼음장이고. 장갑 끼고 오지 그랬니?”
벌겋게 부은 눈꺼풀이 신경 쓰이는지 여느 때와 달리 급히 시선을 내리곤 자신의 오른손을 잡아 집 안으로 끌어당겼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그가 잡고 있던 오른손을 양쪽 손바닥으로 감싸고는 열심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답게 섬세하면서도 극진한, 파도처럼 애정이 넘치는 몸짓이었다. 노곤하면서도 달콤한 감각에 등줄기로 찌릿한 전율이 치달았다. 풀죽었던 욕망이 다시금 고개를 쳐드는 것이 느껴졌다. 샤워를 끝낸 지 얼마 안 되는지, 그에게선 코롱과 담배 냄새 대신 뽀얀 보디로션 냄새가 났다. 약속된 시간의 섹스 전엔 늘 맡아지는 그 달콤한 냄새에, 파블로프의 개처럼 아랫도리가 단숨에 죄어들었다.
매혹된 눈길로 한동안 그의 얼굴과 몸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V넥의 새하얀 니트 스웨터와 검은색 데님 팬츠에 감싸인 그의 자태는 언제나 그렇듯이 세련되면서도 아름다웠다. 사흘 만에 보는데도 꽤나 오래 못 본 것마냥 몹시 반갑고도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고 가슴이 설레다니……. 아아, 역시 자신은 이 사람을 너무나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호감이 없다면 아무리 습관처럼 이어지는 의무적인 섹스라곤 해도, 이렇게 보자마자 발기를 할 리가 없다.
굳어들었던 오른쪽 손가락에 따스한 열기가 느껴질 무렵, 비로소 남창 주제에 역으로 서비스를 받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장갑은 답답해서요. 이제 괜찮습니다, 선생님. 금방 녹을 거예요.”
“……응. 그래도 이렇게 문질러주면 가렵지 않거든.”
슬며시 손을 뒤로 빼는 멋쩍은 사양은, 그가 오른손 대신 왼쪽 손을 바꿔 쥐는 것으로 대답이 왔다. 주물러지고, 비벼지고, 마침내 오른손처럼 따스해지자 남자의 부드러운 손길은 이번엔 자신의 뺨으로 기어 올라왔다. 부드러운 손놀림은 여전했지만 자신의 냉기가 옮겨가선지 처음만큼 따뜻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수염이 따가워…… 후후, 금방금방 자라나 봐. 난 많이 느린 편인데…….”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는 어딘가 슬프게 들렸다.
“……매일 면도하면 쓰라리거든요. 신경 쓰이시면 여기 올 땐 단정하게 깎고 오겠습니다.”
바짝 발기해버린 물건이 괴로운 나머지 목소리가 꽤나 탁하게 흘러나온다. 저 사랑스러운 몸뚱이를 당장이라도 침대로 끌고 가고 싶지만, 어디까지나 주도권은 고객인 그에게 있었다. 그가 플라토닉한 무드를 원하면 플라토닉하게, 포르노가 무색할 만큼의 음란한 관능을 원하면 아슬아슬할 지경까지 강하게 밀어붙여준다. 초조해 미칠 지경이지만, 지금 그가 원하는 것은 이렇게 애틋한 플라토닉 무드인가 보았다. 속으로 수학 공식을 차례로 외워대서라도 짐승을 진정시키는 도리밖에 없었다. ‘좀 더 능란하고 좀 더 배려 있게!’ 모처럼의 슬로건까지 세운 오늘이 아니더냐.
“……그럴…… 필요는 없어…… 나는 이게 더…….”
바닥을 향해 있는 얼굴에 설핏 홍조가 끼친다.
“……따끔거리는 여기로 목덜미랑 뺨이랑…… 저기…… 아무튼 그렇게 문질러주면 나, 미치니까…….”
욕망에 정직한 그답게 부끄러워 죽으면서도 솔직히 불어버린다. 아아, 귀여운 사람. 어떻게 이렇게까지 귀여운 걸까, 이 사람은…….
새빨개진 귀여운 얼굴 표정을 보고 싶어 미치겠는데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는 그다. 양팔을 한참 높이로 들어 올려 자신의 뺨을 문지르고 있어, 절대 자연스럽지 못한 자세임에도 말이다. 물론 집요할 정도로 시선을 피하고 있는 이유를 모르지 않기에 억지로 재촉하진 않는다. ……또 왜 우셨어요……? 묻고 싶은 욕망이 목구멍까지 치밀어도, 마냥 참기로 한다. 물어봤자 대답해주지 않을 테니까.
“……저녁밥 안 먹었지?”
“……아직 6시인걸요.”
“……어…… 응, 그렇지…….”
“…….”
“……바…… 밥부터 먹고 하는 건 속 거북해서 싫지?”
“……예, 그건 좀…….”
‘좀 더 배려 있게’의 슬로건을 무시했다. 식후의 섹스는 좀 거슬리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이상으로 그와 상성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마당에야 별문제는 되지 않는다. 게다가 오늘은 그가 원한다면 세 시간을 초과해서라도 함께 있어줄 요량을 하고 있었다. 식사부터 하고, 한 시간 정도 느긋하게 노닥거리며 시간을 죽이다가 자연스럽게 침대로 가도 된다. 그럼에도 곤란한 듯 노라고 대꾸한 건, 무언가 섹스를 피하는 듯한 그의 기색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당장이라도 안고 싶은데, 그가 언제까지 미적거리게 될지 몹시 불안했다.
“……코트 벗을게요, 선생님.”
몸이 다 녹았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뒤로 몰러서자, 그가 마지못한 듯 양손을 거둬들였다. 어쩐지 거실 초입에 선 그대로 움직일 생각을 않는 그를 지나쳐, 위는 거실 안쪽에 위치한 소파까지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소파 위에서 섹스를 한 적도 부지기수이기 때문에, 물론 의도적인 자리 이동인 셈이었다.
코트와 목도리를 벗어 소파 등받이에 얌전히 걸쳐둔 후 그의 눈치를 살피며 나머지 옷들도 천천히 벗기 시작했다. 역시 그의 평상시 패턴을 염두에 둔 교활한 스트립쇼였다(자신이 옷을 다 벗는 것도 차마 기다리지 못하고, 그는 번번이 고양이처럼 엉겨들며 정열적으로 키스 세례를 퍼붓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슬쩍 곁눈으로 살펴보니 그는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정신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기를 머금은 듯 촉촉한 눈시울에 슬픈 기색은 여전했지만 그 섬세한 눈동자 속에 비친 것은 분명 자신에 대한 경탄과 황홀한 매혹이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여전히 거실 초입에 서서 이쪽을 바라만 볼 뿐, 그는 석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황홀한 숭배의 눈길만으로는 아무 역사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창 밖의 매서운 한파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훈훈한 빌라의 온기 탓인지 꽁꽁 얼어붙었던 자신의 몸은 어느새 거의 풀려 있었다. 그가 온기를 나눠준 덕분에, 손가락도 그 싫은 피아노를 쳐줄 수도 있을 만큼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다. 뿐이냐, 아랫도리 무기도 언제든 그를 안을 수 있게끔 레디고 상태건만 그는 어째서 이렇게 삐딱선을 타는지 답답해 죽을 노릇이다.
두꺼운 스웨터와 모직 셔츠를 벗은 뒤 느릿하게 선정적인 동작을 취하며 그의 얼굴에 시선을 보냈다. 잠시 마주쳤던 그의 시선이 다시 허둥지둥 아래로 떨어졌다. 젠장. 명백한 유혹의 몸짓을 알아채고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은근한 재촉을 그대로 무시해버렸다.
감정이 들어간 거친 손놀림에 청바지 벨트를 푸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실내를 울렸다. 그의 어깨가 소리에 반응해 움찔 떠는 게 보였다. 석상 같던 다리가 겨우 움직인다. 소파까지 미적미적 다가오긴 했지만 위의 앞에 우두커니 선 채로 다시 석상이 됐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지금 확실히 자신과의 섹스를 꺼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아, 젠장. 초조감에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고객으로부터 푸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위는 이런 상황에 대한 데이터는 전무한 상태였다. 이젠 기억조차 희미한 첫 번째 고객에게 동정을 잃었을 때조차도 자신은 이 정도로까지 당황하지는 않았었던 같다. 당황하게 되니 그의 시선이 유난히도 의식이 되었다. 바지를 벗다 엉거주춤 멈춰버린 자신이 상당히 꼴사납게 느껴졌다. 수치심에 얼굴은 확확 달아오르고, 바지 앞섶은 절대 숨기는 것이 불가능할 지경으로 잔뜩 부풀어 있었다.
“……오늘은 내키지 않으십니까?”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자신이 듣기에도 날카로운 물음이 떨어지자, 석상이 됐던 그의 몸이 움찔 하고 떠는 것이 보였다. 냉기가 뚝뚝 듣는 목소리에 스스로도 정나미가 떨어졌지만 영판 자제가 되지 않았다. 수치스럽고, 초조하고, 황당해 미치겠는데 자신의 욕망은 수그러들 기미도 보이지 않은 채, 벌건 대낮보다도 밝게 활짝 드러나 있었다. 남창에게도 자존심이 있냐 하고 묻는다면 지나가는 개도 웃을 일이지만, 주제넘게도 위는 자존심에 꽤나 타격을 입고 있었다. 드문 일이고 보니 배려심이고 나발이고 없었다.
‘좀 더 능란하고 좀 더 배려 있게!’라니. 그야 일단 그가 자신을 원하고 있는 것이 전제가 돼야만 가능한 일이 아니더냐. 아예 자신의 몸을 거부하고 있는 마당에 능란한 테크닉이고 상냥한 배려고 죄다 빛 좋은 개살구가 아니냔 말이지.
“오늘은 그만둘까요?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신 것 같은데, 별로 위로가 되지 못하는 것 같군요. 옷 그냥 입겠습니다.”
“그…… 그렇지만 너 지금…….”
허벅지까지 끌어내렸던 바지를 도로 끌어올리며 물음을 던지자,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한 목소리가 다급하게 부정한다. 그의 시선이 가 닿은 곳은 자신의 사타구니 사이였다! 젠장할!!!
맹렬한 수치심과 함께 순간적인 분노로 눈앞이 하얘졌다. 젠장, 젠장, 젠장! 귀엽고 뭐고 다 취소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신경하단 말인가!
“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요즘은 선생님을 안는 게 습관이 돼서 포르노 필름이 없이도 바로 흥분을 해버리죠. 이건 돌아가기 전에 화장실에서 해결 보면 됩니다.”
“……그…… 그런……! 나…… 난…….”
“기분이 내키지 않으실 텐데 억지로 서비스를 드려서야 저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다음에 보충해드릴 테니까 싫으시면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아…… 아니, 그저…… 나는…… 그게 아니라…….”
“남창의 욕구까지 일일이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건 그저 습관이니까요.”
“…….”
서늘한 냉기가 풀풀 날리는 밉살스러운 말들은 잘도 흘러나왔다. 그만을 유일한 고객으로 삼은 요 두 달 남짓, 단 한 번도 이렇게 그를 밀쳐낸 적이 없어선지 막상 냉기를 뿌리고 나니 마음이 몹시 언짢았다. 이건 졸렬한 화풀이가 아닌가 하고 잠깐 반성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색이 된 그는 잔뜩 몸을 굳힌 채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휘둥그레진 눈. 벙하니 벌어진 분홍빛의 귀여운 입술. 퉁퉁 부은 개구리 눈꺼풀을 숨길 생각도 못 하고서, 위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동자에선 상처와 원망과 애정과 슬픔과 숭배가 폭풍처럼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휘둥그레진 눈시울에 기어이 참지 못한 눈물이 단숨에 고여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뺨 아래로 닭똥처럼 뚝뚝 떨어졌다.
날카로운 가시로 가슴이 푹 찔리는 것처럼 아픔과 후회가 느닷없이 들이닥쳤다. 맙소사. 도대체 자신은 무슨 짓을 하고 있단 말인가!
“……선…… 생님……?”
“…….”
“……선생님, 전…….”
“……그…… 그래…… 어…… 언제나 그래…… 난 참지 못해도, 넌 너무 잘 참았어…… 너무 잘 참아서 참지 못하는 날 더럽다고 했지…… 더럽다고 했잖아…… 네가……. 나…… 난…… 그래서…….”
“?!!!”
“……아…… 아니, 지금 그랬다는 게 아니구…… 웃…… 흑…… 윽…… 내 말은…… 그러니까…… 옛날에…… 아…… 아주 예전에…… 아아, 아…… 그치만 넌 안 믿지……? 그…… 그야 넌 안 믿을 거지만…… 그치만…….”
숨죽인 흐느낌 때문인지 자꾸만 툭툭 끊어지는 어눌한 목소리를 가까스로 쥐어짜 내며 그가 호소하고 있었다. 뭔가 제대로 된 얘기를 시작하려나 싶었지만 또 두서가 안 맞는 횡설수설이었다. 옆으로 축 늘어진 양손은 완강하게 주먹을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힘겹게 얘기를 꺼내고 있다는 건, 관절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꽉 움켜쥔 그의 두 손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 그렇지만 난…… 그…… 그런 거 기억나버렸는데 어떡해…… 그럼 어떡해…… 그…… 그런 말 죄다 기억나버려서…… 너…… 네게 안기는 거 무서워…… 유혹하면…… 또…… 또 너 그런 말 하겠지……? 아니…… 말은 안 해도 생각은 할지도 몰라…… 맘속으로…… 몰래 비웃으면서…….”
“……?!!!!!”
“……그…… 그래…… 너무…… 너무 생생해…… 저…… 저…… 정말 진짜같이 느껴지는데…… 장난으로 해본 건데…… 근데 그게 되는 거야…… 해영이 형이…… 해영이 형이 그런 말 했을 때에도 난 그냥…… 그…… 그냥 장난으로…… 자, 자, 장난인 줄만 알았는데…… 그, 그, 근데 진짜잖아…… 진짜 되더라구…… 막, 막, 이상한 풍경들이 보이고…… 네가…… 네가…… 넌 아닌데도…… 근데 너였어…… 진짜 너였어…… 너였단 말야, 위야…….”
“……선생님……?”
“……나 더럽다고…… 비…… 비, 비, 비역질…… 비역…… 조…… 좋아하는 남색가…… 사촌이라고…… 너, 나 주…… 주…… 죽도록 미워해…… 했잖니…… 더럽게…… 기회 잡아 유혹했다구…… 그…… 그…… 근데…… 그래…… 그 말이 맞아, 알렉…… 나, 나…… 나…… 나 또 이렇게 너 유혹하고 있어…… 더럽게…… 비열하게…… 이번에도 또 기회 잡아 너 유혹해…… 그러고 있어…… 나…… 나 저주받은 건가? 왜 매번 이래야 해……?”
“……그게 무슨……? 선생님……?”
“……하…… 하지만 어…… 어쩔 수 어, 어, 없…… 어…… 없잖아…… 너무…… 너…… 너무 사…… 사랑하니까 어쩔 수 없었잖아…… 어…… 어차피 버릴 거면서…… 사실은 지가 먼저 손을 댔으면서…… 유혹했으면서…… 여…… 여자들 없으니까…… 심심하다고 꼬여댄 게 너면서…… 그러구선 나한테 막 뒤집어씌웠어…… 내가 너 사랑한다는 거 알고서 막 비웃으면서…… 막, 막…… 나…… 나한테…… 나한테…… 아아, 너무 아파…… 정말 아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어…… 어떻게 그렇게 못됐을까, 넌……. 그래도 난 네가 너무 좋아서…… 너무…… 너무너무 좋아서…… 못되고…… 잔인하고…… 무신경하고…… 그래도…… 난 그래도 정말 너무 좋아서…….”
닭똥 같은 눈물은 얼굴에서 아예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개구리 눈꺼풀을 감아 눈물을 짜낼 때마다 어찌나 흉하게 얼굴을 찡그리는지, 본래의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은 온데간데없이 찾을 수가 없었다. 훌쩍훌쩍 콧물을 들이삼킬 때마다 어깨가 크게 들썩거렸다. 힘없이 아래로 축 늘어진 두 팔은 하도 심하게 떨려 경기라도 들린 듯싶었다. 억눌린 흐느낌의 사이사이에 말을 뱉어내자니 꽤 힘이 든 모양으로, 워낙 어눌했던 말투는 거의 말더듬이 수준으로 전락해 있었다.
“……가슴이 너무 아파…… 너…… 너무…… 아파서 죽고 싶었지…… 아아, 그래…… 난 죽고 싶었었어…… 정말 죽고 싶었다구…… 그래…… 그 결혼식 날…… 난 정말 항구로 갔어…… 바다에 빠져 죽으려구 항구로 갔다구…….”
“……선생님, 도대체 지금…….”
“……그…… 그때도 넌 그렇게 날 버렸지…… 준오(俊吳)였을 때랑 어쩜 패턴도 그렇게 꼭 같을까…… 내가 먼저 좋아했으니까 그게 잘못이었다는 건가……? 좋아하면 다 더러운 건가……? 아, 아니지…… 호모라서 더러웠던 거지, 애초부터…… 더럽다고…… 더…… 더럽다고…… 그래서 다시는 안 보겠다고 했지…… 더러운 놈이니까 아무 데나 가서 다른 남색가나 찾아보라고…… 다…… 다른 남색가라구…… 흑…… 젠장…… 넌…… 넌 그렇게 잔인했어, 알렉…… 그…… 그렇게 잔인하게 날 버리고 레이디 애쉬튼과 결혼해버렸다구…….”
“……선생님, 무슨 말씀이신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혹시 무슨 나쁜 꿈이라도…….”
“……바보, 꿈일 리가 없잖아……!”
“……?”
“……주…… 죽으러 갔어…… 진짜야…… 부두 위에 서서 바닷물을 내려다보고 있더라구…… 물에 비치는데…… 옷도…… 검은색 모직 코트랑…… 밤색 바지랑…… 아아, 지금도 다 생생하단 말야…… 근데 그게 어떻게 꿈일 수가 있냐구…… 흑…… 윽, 웃…… 넌 안 믿을 거야…… 그딴 거 안 믿을 거야…… 알아…… 그러니깐 창피해서 말 못 해…… 나도…… 나…… 나도 첨엔 안 믿었으니깐…… 장난으로…… 다…… 미메시스 단골들 다 해봤다고 하고…… 해…… 해영이 형도 한번 해보라고 그래서…… 다 보여…… 아니, 기억이 나…… 전부 다…… 옷도…… 신발도…… 각반이 달린 검정 가죽 구두를 신고 있는데, 낡아서 물이 새어들어와…… 그 습기 때문에 발가락 틈에 습진이 생겼는데 무지 가렵고 쓰라렸다구, 젠장…….”
“…….”
“……아아…… 얼마나 비참했는지 몰라…… 넌 결혼하구…… 넌 그것도 모자라 날 쫓아냈어…… 아아, 나쁜 놈…… 너, 진짜 나쁜 놈이야…… 비열한 놈이야…… 흑…… 윽…… 그래도 좋은 걸 어떡해…… 좋아서…… 조…… 좋아서…… 다른 아무것도…… 그냥…… 밀려들어오는 바닷물을 그냥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너무 괴로워서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을 해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나…… 가슴이 너무 아파서…….”
“…….”
“……어……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넌…… 넌 준오였을 때도 그러더니…… 아냐, 그때보다 더 심했어…… 너무너무 심했어, 알렉…… 난 또 왜 그럴까, 맨날…… 지금도…… 왜 맨날 나만 널 사랑하는 걸까…… 너무…… 너무 비참해…… 다…… 단 하나라도 좋으니까 너랑 행복하게 살았던 거 없나…… 그런 거…… 행복하게 사랑한 거 없나 하고…… 자꾸 해봤어, 자꾸…… 왜냐면 무섭잖아…… 그런 거 너무 무섭잖아…… 지금도 슬픈데…… 나만…… 나만 널 좋아하는데…… 전에도…… 앞으로도 계속 그런 거면…… 그런 거면 나 어떡해…… 저주받아서…… 이…… 이…… 이번에도…… 이번에도 그때처럼 그렇게 되면 어떡하냔 말야…… 나쁜 놈…… 진짜 나쁜 놈이었어, 알렉은…… 준오 놈도 싫어…… 일생 저주할 거야, 나…… 그…… 근데 왜 위야인 거야…… 위야는 아냐…… 위위…… 나의 위위…… 내가 얼마나 많이 좋아하는데…… 위야는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알렉처럼 나쁜 놈이 아닌데…… 그런데…….”
“…….”
꿈에도 예상치 못한 그의 히스테리에 망연자실한 나머지, 위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까지는 신경이 가 닿지도 않았다. 아니, 신경이 가 닿는다고 해도 워낙 횡설수설이라 도저히 이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울증이 심해진 나머지 드디어 미치기라도 한 건가 생각하니 뒷덜미로 한기가 치달았다. 말투도, 말의 의미도, 태도도, 영락없는 정신병 환자가 아닌가. 버리는 건 뭐고 결혼은 또 뭔가? 더럽다고 했다고? 이 내가? 아니지, 알렉이랬나? 알렉? 내가 알렉이라는 이름이었나? 맙소사, 생각할 가치조차 없었다. 역시 우울증이 깊어지다 못해 정신분열증을 일으킨 게 틀림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늘은 그가 다른 날에 비해 상당히 말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강하게 추궁을 하면, 다른 날처럼 얼버무리지 않고 저 정신병적인 횡설수설 뒤에 숨은 진짜 의미도 솔직히 실토를 할 것만 같았다.
그야, 자신이 해결할 순 없을 것이다. 어찌 됐건 ‘그의 문제’일 뿐일 테니까. 그러나 더 이상 모른 체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도, 자신이 해결해주고 싶었다. 도와주고 싶었다. 가엾게도, 이렇게 괴로워하다니. 이렇게 펑펑 울고 있다니. 자신보다도 일곱 살이나 많은 다 큰 어른 남자가. 하긴 무늬만 어른이지 이게 어디 진짜 어른이더란 말이냐. 영락없는 응석받이 고양이 꼴이 아니냐.
“……미…… 미…… 미안…… 나…… 지…… 진짜 정신없지……? 미안…… 미안, 위야…… 미안…….”
누구인가가 누구와 결혼했다며, 원망이 섞인 절절한 시선으로 한참 동안 누구를 성토하던 고양이가 마침내 바닥으로 고개를 떨어트리는 게 보였다. 대꾸도 못 하고 뻣뻣하게 굳어버린 누구의 품 안으로 벌벌 떠는 고양이 몸이 와락 달라붙은 것은 물론이었다.
겨우 제정신이 드는 모양인지, 더 이상의 횡설수설한 성토도, 원망이 들어간 눈빛 공격도 없었다. 원래의 온순하고 귀여운, 너무나 소중해지고 만 친구이자 고객으로 되돌아와 누구의 육체를 뜨겁게 탐하고 있었다. 몇 분 전이라면야 쾌재라도 불렀겠지만, 그토록 기갈에 날뛰던 누구의 욕망은 어느새 얌전히 풀이 죽어 있었다.
“……내…… 내…… 내키지 않는 게 어딨어…… 난…… 나, 네 몸이라면 언제나 환장한다는 거 알잖니…….”
“…….”
“……아…… 안아줄래……?”
눈물콧물 범벅이 된 얼굴이 위의 티셔츠 위로 잔뜩 비벼지고 있었다. 영락없는 고양이의 어리광. 벌벌 떨며 허리춤으로 다가들던 양팔은 뒤로 돌아가 자신의 등을 힘껏 끌어안았다.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들어온 그의 치부가 천천히 오른쪽 허벅지 위에 비벼지며 욕망을 호소하고 있었다. 울고불고 횡설수설을 하는 바람에 미처 눈치를 못 채는 사이, 그는 잔뜩 발기해 있었다. 몇 분 전, 섹스를 피하던 기색이 믿어지지가 않을 지경이었다.
“……선생님…….”
“……아…… 안아줘, 위야…… 그냥…… 지금은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구 그냥 안아줘…….”
줄초상이 난 것처럼 서럽게 울어대는데, 그런 얼토당토않은 일장 연설을 들어버렸는데, 어떻게 태연히 섹스를 한단 말이냐!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위는 차라리 그게 더 나을는지도 모른다고 얼핏 생각을 턴했다. 여자 고객들이 히스테리를 부릴 때에도, 일단 섹스로 만족을 취하고 나면 조금은 얌전해졌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섹스만으로 끝내진 않을 거다. 어떡해서든지 오늘은 반드시 그의 입을 열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의 여윈 등줄기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전희를 시작했다. 일단 울음부터 멈추게 해야 했기에 얼굴 쪽으로 입술을 내려 깃털 같은 위로의 키스를 거듭했다. 장마철 빗줄기처럼 끊임없이 줄줄 흘러내리는 그의 눈물은 당혹스러우면서도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품 안으로 결사적으로 파고들어오며 고양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는 그는 역시 너무나 귀여웠다. 자신의 하반신에 절박한 듯 비벼지는 단단한 것이 이 귀여운 사람의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아랫도리로 단숨에 피가 몰려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자들이 나오는 포르노 필름들을 보며 가까스로 발기를 끌어내던 자신을 생각하면 스스로도 믿기 힘든 놀라운 변화였다.
“……좋아…… 좋아해, 위야…… 좋아해…….”
바짝 붙인 입술 사이로 흐느끼듯 쏟아지는 절절한 밀어. 고백할 때마다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걸 알고 있다. 사랑은 노라고 못을 박아 넣은 자신을 배려하고 있었다. 그 들릴 듯 말 듯 애달픈 고백에, 위는 어쩐지 가슴이 뭉클하게 죄어들었다. 코까지 시큰거린 나머지 입술만 핥으며 부드러운 접촉을 시도하던 혀끝을 그의 안으로 깊숙이 집어넣었다. 부드럽고 촉촉한 생물이 바르르 떨며 자신의 것에 착 감겨들었다. 달콤하면서도 음탕한 감각이 단전 아래까지 일직선으로 쭉 뻗치며 열기가 솟구쳤다. 조루인 그는 이미 한계 상황에 부닥친 것 같았지만 자신 역시 당장이라도 뚫고 들어가고픈 욕구로 눈앞이 새하얘졌다. 부랴부랴 그의 허리 벨트를 풀고 팬티와 함께 단숨에 끌어내렸다.
거실 불빛은 대낮처럼 환하고, 서로가 채 옷도 벗지 못한 상황이란 것도 두 사람의 열기엔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했다. 콘돔을 쓰는 것도, 윤활제를 발라 배려해야 한다는 서비스 정신도 머리에 가 닿지 않았다. ……일단 들어가고 나서 생각하자…… 그도 당장 원하니까……. 절박한 욕구에 몸서리를 치며 위는 흐릿하게 스스로에 대한 변명을 주워섬겼다.
소파에 앉아 그를 무릎 위에 앉힌 자세로 다급하게 삽입을 시도했다. 지퍼만 내린 채 페니스를 꺼내 들고 입구를 찾는 통에 평소의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너무 서두른 탓일지도 모른다. 딱딱한 흉기는 그의 회음부와 엉덩이 굴곡을 비틀거리며 한참을 헤매 다닌 끝에 겨우 뜨거운 그의 내부로 파고들 수 있었다. 최대한 빨리,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뚫고 들어가기 위해 온 신경을 아래로 집중시켰다.
아픔이 느껴졌다. 역시 윤활제 없이 들어가는 건 무리가 있었다. 그도 고통을 느끼는지, 거의 사정 직전까지 갔을 물건이 점차로 각도를 줄이고 있었다. 도로 빼고 윤활제를 쓸까 하는 망설임은 절박한 욕구에 밀려 금세 사라졌다. 반쯤 들어간 상태에서 그의 니트 스웨터 속에 양손을 집어넣은 뒤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반사적으로 그의 두 팔이 자신의 목을 감아왔다. 마침 가까이 다가온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혀를 밀어 넣으며 다시 인서트.
격렬한 조임에 눈에서 스파크가 일었다. 고통스러운 그의 신음 소리를 자신의 것으로 막아 깊이 빨아 당겼다. 아, 다 들어갔다. 하반신이 끊어질 것만 같은 고통스러운 조임은 그와 완벽하게 결합했다는 만족스러움과 성취감엔 비할 바가 못 됐다. 그대로 움직임을 멈춘 채, 농염한 키스를 되풀이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이완되기를 기다렸다. 더 이상 치명적인 초조감은 들지 않았다. 아무렴. 이미 한 몸이었다.
입술을 빨고, 혀를 물어뜯고, 타액을 빨아 마셨다. 키스가 물리면 얼굴을 핥았다. 눈물로 온통 젖어 있는 얼굴은 짭짭한 소금 맛이 났다. 입술을 옮겨갈 때마다 그의 몸에선 흐르듯이 달콤한 땀 냄새와 보디로션 냄새가 났다. 허리로, 등으로, 양쪽 허벅지로, 이리저리 손을 옮겨가며 핥듯이 애무를 했다. 굳어들었던 사랑스러운 몸이 서서히 녹아들고 있었다. 찌르는 듯한 고통 대신 어루만지듯 착 감겨오는 점막은 쾌락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사랑스러움에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눈치를 살피며 포인트를 가늠했다. 단단히 기합을 넣곤 힘껏 찔러 올렸다.
“……흐앗……!”
맞붙은 입술 틈으로 흘러나오는 그의 애틋한 교성에 움직이고픈 욕망이 걷잡을 수 없으리만큼 치솟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느리면서도 강렬한 단 세 번의 공격에 그의 몸은 마지막 경계마저 허물어뜨렸다. 단숨에 하반신이 경직되며 그의 허리가 활처럼 뒤로 넘어갔다.
“……흐…… 아아…… 아앗!!!!!!”
그의 페니스가 맞물린 자신의 아랫배 위로 뜨겁고 축축한 체액이 양껏 뿌려졌다. 뒤로 휜 채 오르가슴의 여운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몸을 다시 앞으로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바짝 엉덩이 근육을 긴장시킨 채 위는 그의 벌어진 입술을 힘껏 빨아들였다. 쪼고, 물고, 깊이 들어가고, 불길 같은 리듬은 하반신의 스퍼트와 감각을 공유했다. 느리게, 빠르게, 혹은 걷잡을 수 없는 포르테로. 감각이 명하는 대로 마음껏 속도와 세기를 조절했다. 물론 그도 처음 몇 분뿐이었고, 이어 시간과 공간이 완벽히 사라지는 폭풍 같은 무아지경이 왔다.
그의 새하얀 니트 스웨터를 조심조심 벗겨냈다.
흐느적거리듯 자신의 목에 걸쳐 있던 양팔을 달래듯 들어 올려 카디건 소매를 빼고, 붉게 달아오른 채 기진맥진해 헐떡이는 얼굴을 앞으로 기울여 목폴라를 통째로 끄집어냈다. 양말을 벗기는 건 좀 더 까다로웠는데, 그의 허벅지가 자신의 허리를 착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다리를 더듬듯이 해서 허벅지의 조임을 풀자, 그가 마음에 안 드는지 들릴 듯 말 듯 신음을 흘렸다. 아직 서로의 하반신이 이어져 있어 움직임을 크게 하면 고통을 느끼는 듯했다. 자신 역시 종류가 좀 다른 고통을 느껴야 했음은 물론이었다.
자신의 옷을 벗는 것은 좀 더 까다로운 기술을 요했는데, 차라리 결합을 풀고 할까 잠깐 유혹이 들 정도였다. 엉덩이를 약간 들어 바지춤을 내리자 그가 아프다고 하며 자신의 목에 감았던 팔을 더더욱 조여왔다. 티셔츠를 벗을 때에도, 목 쪽으로 두 팔을 들어 올려 단숨에 벗어 던지자 그 반동이 전해졌는지 그는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 울상이 되었다. 이미 두꺼비처럼 눈이 부어 절대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얼굴이라, 위는 설핏 웃음을 흘리며 소중한 이의 귀여운 반응을 무시했다.
소파 위에서 옷까지 입은 채 두 번을 했지만, 물론 아직은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반드시 들어야만 할 고백도 있었다. 결합한 채, 부드럽게 달래고 또 달래서 반드시 이유를 알아내고 말리라고, 위는 새삼 다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