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1989년 12월. 문위(文偉)
“……얼굴색이 많이 안 좋으세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선생님?”
“……그럼, 괜찮고말고. 그냥 좀 속이 안 좋아서 그래, 위야. 그냥 하룻밤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하지만…… 그래도 정말 낯빛이…… 다른 날 보충해도 되니까 무리하실 필요는 없어요, 선생님. 몸 상태 안 좋을 때 섹스는 별로…….”
“무슨 소리! 진짜로 괜찮다니까. 헤헤. 믿어, 위야. 그리구 지난 나흘 동안 나 얼마나 기다렸는데. 오늘은 여섯 시간이나 너랑 함께 있을 수 있잖아. 밖에 나가서 맛있는 저녁도 사 먹구, 또 카페 가서 차도 마시자.”
“…….”
창백하게 질려 있는 낯빛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는 지나치게 명랑해 보였다. 지난 2주간의 전생 우울증(위는 그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들은 다음부터 그의 지난 2주간의 상태를 전생 우울증으로 명명했다) 조짐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확실히 자신이 진심으로 얘기를 들어주고, 또 그 진심에 따라 그의 어리석은 제안을 거절한 것이 꽤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흘 전인 월요일 밤, 자정이 거의 다 돼 그의 집을 나설 때 보여주었던 표정보다도 그는 한결 밝아 보였다. 적어도 이제 그놈의 ‘전생 우울증’ 걱정은 안 해도 될 모양이었다.
다만, 한눈에 보기에도 많이 창백한 낯빛이 마음에 걸렸다. 가벼운 몸살기라거나 그의 말대로 속이 조금 안 좋은 정도라면 다행이겠지만 어쩐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 건강 상태가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장애인이라는 선입견 탓인지 자신은 그의 건강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좀 예민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속이 안 좋으시다면서 외식을 해요?”
“안 좋으니까 더 질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구! 헤헤, 그리고 다음 주가 크리스마스잖니! 거리가 온통 축제 분위기인데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답답하잖아! 아무튼 난 진짜 괜찮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기다?!”
맙소사, 또 웬 크리스마스?! 기대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흥분하는 모습이 영판 철부지 어린애다. 그러고 보니 입고 있는 옷차림도 예사롭지가 않았다. 빨간 벨벳 재킷에 암갈색 캐시미어 팬츠, 목에 두른 저 화려 찬란한 건 또 뭐냐. 화려한 포인세티아 문양이 들어간 실크스카프가 아닌가! 원래부터가 멋쟁이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확실히 오늘은 좀 더 유별나다. 크리스마스예요 하고 온몸으로 광고를 때리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그 유치찬란한 제스처도 마냥 귀엽기만 해서, 속으로 빙그레 미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에…… 예, 그럼……. 그래도 무리는 하지 마세요, 선생님. 언제라도 상태가 나빠지시면 제게 말씀하시구요.”
“응, 응! 그럴게, 위야! 그럴게!”
이렇게 괜찮다고 자꾸 고집을 부리니 별수 없이 서비스를 해줘야 할 것 같다. 그러나 확실히 오늘은 그의 몸 상태에도 촉각을 곤두세워야 함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저, 이거…….”
바로 나가야 되는 건가 하고 물으려는데, 그가 소파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쇼핑백 두 개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크리스마스잖아. 너한테 어울릴 거 같아서 사봤어. 입어볼래?”
꺼내보니, 검정색 양가죽 재킷에 검정색 캐시미어 팬츠, 그리고 한눈에 보기에도 명품으로 보이는 검정색 가죽 로퍼였다. 크리스마스는 그저 핑계에 불과하겠지. 저절로 미간에 주름이 세워지려는 걸 간신히 억제하며 위는 씁쓸하게 뇌까렸다. 지난 10월, 그와 결정적으로 사이가 좋아지고부터 틈틈이 주어지곤 하는 고가의 선물 공세였다. 그의 순수한 기분을 거스르기가 안쓰러워, 애써 묵인하고는 있었지만 언젠가는 확실히 못을 박아둬야만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라 아직은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지만(하긴 한 달에 두서너 번꼴이면 자주인 셈인가)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예전의 여자 고객들도 그런 식으로 자신의 애정을 구걸하곤 했던 기억이 선명해서였다.
“……고맙습니다. 잘 입겠습니다, 선생님.”
깍듯한 목례를 하며 선물을 받아 들었다. 자신은 선물을 준비 못 해 죄송하다는 말은 하려다 말았다. 자신은 크리스마스에 선물 따위를 준비하는 팔자 좋은 인종이 아니니까.
“지금 입어봐, 위야! 갈아입고 시내 나가자! 헤헤, 사람들이 다 너만 쳐다보겠지만.”
그야말로 함박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나는 사랑스러운 웃음에 껄끄러웠던 심사가 일거에 사라졌다. 뭐, 아직은 좀 더 지켜보자구. 반사적으로 미소를 보내려던 스스로를 질책하며, 위는 짐짓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좋아하는 티를 내면 그의 선물 공세는 더 심해질 수도 있었다. 물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그의 미소이지 그의 선물이 아니기도 했지만.
보채는 듯한 그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슬쩍슬쩍 훔쳐보며 옷을 갈아입었다. 그가 마음에 들어 하는 자신의 유일한 겨울 코트를 세탁소에 맡기느라 오늘은 할 수 없이 교복에 오리털 파카 차림이었다. 그에겐 넝마처럼 보일 옷가지를 벗고, 그야말로 천천히 왕자님(맙소사!)으로 변태하고 있는 자신에 그의 얼굴은 마치 꿀을 삼키고 있는 것만 같은 표정으로 변했다. 다 갈아입었을 때에는 당근 하트가 뚝뚝 떨어지다 못해 새빨간 하트의 산을 이룰 지경이었다. 쑥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은 위 자신에게도 복권 당첨과도 같은 유쾌한 즐거움이었다.
“……지…… 진짜 멋지다, 위야……!”
“예, 고맙습니다.”
“……하느님, 어떻게 이렇게 잘생길 수가 있을까……!”
“…….”
“……너 진짜 배우해라. 그래야 돼. 이런 극상의 아름다움을 썩히는 건 진짜 죄악이라구…….”
“……후후, 그건 선생님만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거짓말. 넌 거울도 안 보냐? 나, 오버하는 거 아니다, 진짜……? 너랑 밖에만 나가면 사람들이…….”
“나가실 거면 길 막히기 전에 빨리 나가요, 선생님. 곧 러시아워일 텐데.”
계속하게 내버려뒀다간 낯간지러운 일장 연설이 시작될 것 같아, 잽싸게 말을 잘랐다. 황홀한 시선으로 자신의 몸을 핥아 먹을 듯이 지켜보던 그가 마지못해 눈을 깜빡거리며 시선을 거둬갔다.
“……응, 응. 그래야지.”
재킷에 어울리는 자주색 캐시미어 코트를 한 팔에 걸친 후, 자신의 품 안에 착 감겨들듯이 팔짱을 껴오는 그의 귀여운 얼굴을 굽어보며, 위는 차마 꺼내지지 않았던 말을 속으로 뇌까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건 당신이죠…….
―당신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얼굴은 어디에도 없다구요…….
―당신이 여자였다면 아마 나, 진짜로 빠져들었을지도 몰라요…….
어딘가 위험스러워지려는 듯한 생각의 흐름을 허둥지둥 잘라내며 위는 감겨든 그의 손을 힘 있게 움켜쥐었다.
“손이 차요, 선생님. 제 주머니에 함께 넣을게요.”
상냥하게 중얼거리자, 녹아내릴 것 같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미소가 대답으로 돌아왔다.
소공동까지 차를 타고 나가 롯데호텔 뷔페를 먹었다.
1인분에 8만 원씩이나 하는 엄청난 가격에 속이 쓰렸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깐깐하게 굴기엔 그의 상태가 계속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들어왔으니 본전이라도 뽑자는 심사로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그는 전복죽과 호박죽을 몇 숟갈 뜨다 말았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얼굴빛도 점점 더 창백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식사를 끝내고는 라이브 연주를 하는 압구정동의 어느 재즈 바에 가서 차를 마셨다(그는 크림이 들어간 홍차를, 자신은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는 여자들에, 쉴 새 없이 밀려드는 부킹 신청들에, 한 시간도 못 채우고 바로 나와야 했지만, 역시 좋아하는 내색은 하지 않았다. 자신을 자랑거리로 여기면서도, 막상 자신에게 여자들이 달라붙으면 금세 우울한 얼굴이 돼버리는 그가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신경은 쓰였지만, 그가 바로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소리마저 들으니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맺히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실은 호텔에서 식사를 끝낸 시점부터 자꾸만 몸이 흥분을 하고 있었다. 빨간 벨벳 재킷이 너무나 잘 어울려, 유난히 화사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자꾸만 시선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처음엔 얼굴로, 그다음엔 자연스럽게 몸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불순한 상상은 당연히 그의 알몸을 떠올리는 것으로 변태했고, 그가 오르가슴을 맞을 때의, 말할 수 없이 음란하면서도 유혹적인 자태가 눈앞을 어슬렁거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습하고 뜨거우면서도 꽉 조여드는 그의 내부를 떠올리며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나머지 초조해지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 역시 습관이란 꽤나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이토록 그의 몸에서 즐거움을 취하고 있었다니. 흥청망청, 벌써부터 송년회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거리를 뒤로하고 BMW에 몸을 실었을 때에는, 그의 맹렬한 질투심이 고맙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상태를 살펴봐야겠지만(확실히 나올 때보다도 더 낯빛이 안 좋았다) 가능하다면 집에 들어가자마자 그와 꼭 섹스를 하고 싶었다.
“……가죽 재킷이라 지금 입기엔 조금 춥지, 위야?”
카페를 나서자마자 다가드는 칼바람에 저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자 그가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확실히 오리털 파카에 비한다면야 ‘겨울 멋쟁이 얼어 죽는다’의 형국이지만, 얼굴을 스쳐가는 공기는 그리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주초에 영하 8도까지 떨어졌던 기온은 4∼5도쯤 올라 많이 풀려 있었다.
“……더위엔 좀 약하지만 추위는 그럭저럭 견디는 편입니다. 또 재킷 안에 누빔 처리가 돼 있는걸요. 따뜻한 편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어깨를 뒤로 젖히듯 하며 허세를 부렸다. 솔직히 좀 춥긴 춥다. 하지만 저렇게 하트가 뚝뚝 떨어지는 눈초리를 하고 바라보는데 차마 걱정을 끼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죄책감은 물론 더더욱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막 BMW에 키를 꽂아 넣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파랗게 핏기를 잃은 입술을 보니 점점 더 걱정이 되었다. 보기에도 따스해 보이는 캐시미어 코트를 걸친 그가 도리어 추워 보였다. 차를 주차해둔 곳까지 걷느라 15분 동안 칼바람을 맞은 때문이리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아니, 그러기를 기도했다. 절대로 눈에 보이는 그대로 상태가 나쁜 것은 아니리라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한 일은 화장실로 달려간 것이었다.
집에 가까워올수록 점점 더 파랗게 질려가던 얼굴이 빌라가 보일 무렵쯤엔 거의 흙빛이 돼 있었다. 너무나 걱정이 된 나머지 몇 번이나 괜찮으냐고 물어보았지만 괜찮다는 답변만 되돌아왔다. 운전에 집중하느라 뚫어지게 앞만을 바라보면서도 대답을 하는 얼굴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가 떠돌았다. 백짓장이 다 된 얼굴로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등에 으스스한 전율이 흘렀다. 여태까지 감지하지 못했던 묘한 광기 같은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화장실로 뛰어든 그는 위 속에 든 내용물을 남김없이 토해냈다. 등을 두드려주는 자신에게 부끄러워 죽겠다는 어린애 같은 소리만 되풀이하며. 실컷 토해낸 뒤엔 이번엔 대변이 보고 싶다고, 그건 죽어도 못 보여준다며 울먹이며 부탁을 해와서 위는 마지못해 욕실에서 쫓겨 나왔다. 심상치가 않았다. 정말로 당장 병원에 데려가야 할 것 같았다.
5분쯤 후, 파리해진 얼굴로 욕실을 나오는 그에게 당장 병원에 가자고 하니, 먹던 약이 있으니 먹으면 금방 증상이 가라앉을 거라고 고집을 부렸다. 무슨 약이냐고 다그쳐 묻자 위염약이라고 가냘픈 답변이 흘러나왔다. 위가 약해서 평소에도 자주 탈이 난다고.
“……그…… 저…… 오늘은 속에 러닝도 입고 나갔었으니까 진짜 금방 괜찮아질 거야.”
……러닝? 러닝이라니 무슨 러닝……?
뜻 모를 횡설수설과 함께 주방으로 가서 약봉지를 털어 넣는 그에게 강제로라도 끌고 가야겠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역시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불가사의한 광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니, 광기라기보다는 주술적인 느낌에 가까웠다. 그는 무언가 기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강박 관념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에게 환한 미소 세례만 퍼붓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속이 뒤집혀도 웃고, 설사를 해도 웃고, 분명 배가 몹시 아플 텐데도 웃었다. 행복해 미치겠다는 듯이, 해바라기처럼 환하게 웃고 또 웃었다. 늘 웃는 표정으로 화장을 한 광대 같았다. 비밀을 간직하고 뭍에 오른 인어공주 같았다. 발바닥을 찌르는 통증에도 불구하고 왕자를 향해 가냘프게 웃는 인어공주. 그렇게 가련하고, 한심하고, 동시에 섬뜩해 보였다.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일단 쉬셔야 해요! 이런 몸으로 무슨 섹스를 한다는 겁니까?!”
순식간에 재킷과 팬츠를 벗고 흰 셔츠 차림이 된 그가 침실로 자신의 팔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걱정이 된 나머지 목소리에 시퍼런 날이 서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야, 호텔 레스토랑에서부터 줄곧 그를 품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지만 이렇게 힘들어하는 그를 안고 싶을 까닭이 없었다. 자신은 섹스에 환장한 파렴치한이 아니다.
“……하…… 하지만 너 그럼 그냥 가버릴 거잖아…… 아직 12시 되려면 세 시간이나 남았는데…… 섹스 할 필요 없으니까 그냥 가버릴 거면서…… 아까워서 어떡해…… 1분 1초가 내겐 금쪽인데…… 정말 아까운데 어떡해…….”
하! 뭐라구?!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온다. 병이 난 친구를 팽개쳐두고 그냥 가버릴 매몰찬 인간으로 자신을 보고 있단 말인가?
하긴 그간 그 앞에서 철저하게 지킨 시간 관념을 생각하면 그가 오해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일이니까’다. 그는 고객이고, 자신은 일정 시간 동안 고객을 만족시켜야만 하는 남창이니까. 그러나 그와 자신의 관계가 단지 그런 표피적인 관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걸 그는 모른단 말인가? 알게 모르게 쌓이고 있는 그와 자신 사이의 깊은 유대감과 신뢰가, 고작 ‘남창과 고객’이라는 부도덕하고 얄팍한 관계 따위로 가당키나 할 줄 아는가?
서운하고 기가 막힌 나머지 한참 동안 눈만 부릅뜬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시체처럼 창백한 낯빛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필사적인 열기를 전해오는 그였다. ……젠장, 역시 정상이 아니야…….
“……괜찮아지시는 거 보고 갈게요. 염려하시지 않아도 돼요.”
일일이 설명하고, 섭섭한 심사를 토로하는 것도 부질없어 보여 간단히 결론만 말했다. 맙소사, 꺼져버릴 것 같은 인어공주다. 애초부터 말이 통할 리가 없다. 그는 바다의 말을 하고, 자신은 육지의 언어를 쓴다. 서로의 간절한 마음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저…… 정말……?”
순식간에 희색이 만면에 가득한 얼굴로 되묻는 그의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예. 그러니까 빨리 침대에 누우세요!”
그저 침대로 옮기기 위해 안은 것뿐이건만, 자신의 목 뒤를 휘감아오는 그의 두 팔은 필사적이었다. 목을 조이는 것만 같은 격렬함에 처음엔 얼굴을 찌푸렸지만, 쪽, 쪽, 쪽, 쪽 하고 낯간지러운 소리를 연발하며 발작적으로 쏟아붓는 키스 세례엔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구강 청정제를 통째로 들이부었는지 그의 입에서는 민트향이 강하게 풍겨 나왔다. 역시 광기가 느껴지는 기묘한 위화감이 그의 모든 몸짓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그를 침대에 눕힌 뒤, 셔츠를 벗기고 파자마로 갈아입혔다. 옷을 갈아입혀주고 나서도 자신의 손을 놓을 생각을 않는 그 때문에 할 수 없이 그의 곁에 누워 아프다는 배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모로 몸을 튼 채 무릎을 끌어올린 괴로운 자세로, 그는 한동안 자신의 부드러운 손길을 가만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차츰 약기운이 도는 때문인지, 어느새 표정도 편안해지고 꾸벅꾸벅 졸기까지 하고 있었다. 배를 쓸어주고 있던 손을 위로 올려 대신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기 시작한 지 10분 남짓, 그는 마침내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곤히 잠이 들었다.
잠이 들자마자 본능적으로 품 안에 파고드는 그를 꼭 껴안아주며, 위는 어쩌면 ‘전생 우울증’의 영향일지도 모른다고 설핏 생각했다.
……아니, ‘전생 조울증’인가? 그렇군. ‘전생 조울증’ 하고 이름을 붙여보니 얼추 아귀가 들어맞는다. ‘전생 우울증’이 다 나은 게 아니라, 나은 것처럼 보였던 것뿐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병명이 ‘전생 우울증’이 아닌 ‘전생 조울증’이니까. 우울한 울증에서 명랑한 조증으로 갑자기 환골탈태를 하는 바람에 자신은 잠시 착각을 했던 것뿐인지도 모른다. 맙소사, 산 넘어 산이었다!!!
……정 도사인지 부채도사인지 뭔지, 어디 걸리기만 해봐라. 사기꾼 같으니! 감히 내 소중한 친구를 놀려? 순수하고, 남을 의심할 줄 모르고, 한없이 착하기만 한 이 사람을?!!!
그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이유에서지만, 정말로 그 괘씸한 땡중을 만나봐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시간에 맡겨두기엔 그 이상한 사기꾼이 그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자신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장난 삼아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 그를 절대 개구리로 만들 수는 없었다.
익숙하면서도 황홀한 쾌락이 사타구니 사이를 조이고 있었다.
비몽사몽간에도 위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힘껏 허리를 튕기며 기분 좋은 흡착 속으로 파고들었다. 깊이. 깊이. 더 깊이. 더, 더 깊숙이…….
힘껏 허리를 튕기면 튕길수록 타는 듯한 갈증은 더해만 갔다. 자꾸만 멀어지는 욕망의 끄트머리를 찾아 손을 더듬었다. 뜨거운 체온이 느껴지는 가느다란 두 손가락이 기다렸다는 듯이 깍지를 껴왔다. 안도감이 뒤섞인 기쁨이 가슴 가득히 퍼져갔다. 사랑스러운 손가락을 와락 움켜쥔 채 앞으로 끌어당기며 다시 힘껏 흉기로 찔러 들어갔다.
“흐앗!!!”
바로 코앞에서 토해지는 숨넘어가는 교성에, 생식기는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발기했다. 꽉 맞물려든 축축하고 뜨거운 내벽이, 자신의 흉기가 불끈거릴 때마다 대답처럼 뜨겁게 수축하며 열정을 돌려주었다. 사랑스러움에 가까이 있는 얼굴을 끌어당겨 키스했다. 축축하고 부드러운 혓바닥 안쪽 깊은 곳으로 자신의 열기를 옮겨주었다. 온 마음을 다해 옮겨주었다.
……사랑스러워…….
흐릿하게 밀어를 속삭이며 다시 힘찬 인서트.
“흐극!!!”
흡반 같은 깊은 키스와 함께 다시 힘껏!
“흐…… 흐아앗!!!”
너무나 좋아하는 목소리…… 너무나 좋아하는 젖은 흐느낌…… 애틋한 교성…….
활처럼 뒤로 넘어가는 허리를 깍지 낀 손을 한 채 팔로 감싸 안았다. 좋아하는 몸이 양팔을 활짝 뒤로 젖힌 자세로 푸드덕거리고 있었다. 천사 같았다. 푸드득. 푸드득. 하늘을 향해 날갯짓하는 천사. 아아, 자신은 천사와 교미하고 있었다!!!
“흑! 흑! 흣! 우앗!!! 흐앗!!! 악!!!!”
“……흐…… 흐읍……!”
“악! 아악! 앗! 아응! 흐으읏……! 흐앗!!!”
“웃……! 으…… 훕……!”
더 이상 완만한 속도를 견딜 수 없었다. 참을 수 없이 격한 정열이 사타구니 사이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자신의 취향 그대로, 자신이 원하는 방식 그대로 온 육체를 방기했다.
“흑! 흑! 흑! 후앗……!!! 으앗!!! 악!!!!!”
“……으…… 흡……! 웃, 흡……! 흣……!”
“흐읏……! 흑……! 흐앗……!! 으…… 응……! 아……! 앗! 앗! 으앗!!!”
“……읍…… 흣……! 우…… 흐…… 헉!!!”
“우왓, 앗, 악!!! 아악……!! 아……! 아흑……!! 아…… 위…….”
“……훅, 훅, 훅, 흣…… 훕…… 읍…… 윽……!”
“우앗……!! 아…… 아파……! 흐앗……!! 위야…… 흑……! 흐앗!!!”
“윽……! 아아……! 핫……!”
“……아…… 하아……! 아파……!! 읏……!! 아아아악!!!!!!!”
“…………?! 으…… 으윽!!!! ……?!!!!!”
“아아악!!! 아파!!! 아파, 위야!!! 아파!!!! 배 아파!!!!! 흐앗……!”
“?!!!!!!!!!”
찢어질 듯한 비명이 귀청을 파고들었다.
비몽사몽 정점을 향해 가던 욕망에 느닷없이 찬물이 끼얹어진 것처럼 위는 기절초풍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자신의 배 위에 올라타 앉아 있는 알몸이 트럭처럼 시야로 밟혀들었다. 그였다.
상반신을 앞으로 푹 꺾은 채 그는 잔뜩 몸을 뒤틀고 있었다. 아랫도리는 자신의 페니스와 연결돼 있고, 두 손은 자신의 손과 깍지를 낀 채라, 움직임의 폭은 극히 제한돼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불안정한 자세를 더더욱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왼쪽으로 30도쯤 모로 튼 상반신은 자신이 손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거의 어깨 관절이 끊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서…… 선생님……?”
“우아앗!!!”
앞으로 푹 수그러졌던 고개가 한껏 뒤로 꺾이며 또다시 단말마의 비명이 터졌다. 순간 따귀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온몸이 채찍처럼 긴장하며 위기 상황을 전달해주고 있었다. 비몽사몽 정신을 잠재우고 있던 수면 욕구도, 극점을 향해 치닫고 있던 성욕도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상황 정리가 되며 스스로에게 냉정해질 것을 요구했다.
그에게 무리가 가지 않도록 최대한 부드럽게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깍지 낀 손에 그가 엄청난 악력을 가해오는 통에 할 수 없이 서로 손가락을 얽은 그대로 그의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역시 조심하느라 잔뜩 긴장된 움직임으로 서로 연결돼 있던 하반신을 분리했다. 한순간 뒤로 꺾인 듯싶던 그의 상반신은 분리와 동시에 옆으로 푹 고꾸라졌다. 손가락의 악력이 순간 느슨해져 간신히 자신의 것을 빼낼 수 있었다.
“……흐…… 으으…… 아…… 아파……! 흐앗……!! 아파…… 아파, 위야…… 너무 아파……! 흐앗!!!”
흐느끼는 듯한 신음과 째지는 듯한 비명을 번갈아 토해내며 그는 전율하고 있었다. 양팔로 상체를 감싸 안아 웅크린 자세로 명치끝을 누르고 있어, 그의 얼굴을 제대로 살필 수는 없었다. 누에고치처럼 둥글게 웅크린 자세도, 그 자세 그대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몸도, 모두 지금 그가 느끼고 있을 단말마의 고통을 절절하게 드러내주고 있었다.
저릿한 아픔이 송곳처럼 가슴을 할퀴며 지나갔다. 그러나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위기 상황일수록, 무언가 자신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주는 상황에 봉착할수록, 자신은 훨씬 더 냉정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고통에 떨고 있는 친구의 모습을 침착하게 관찰할 수 있는 것도 자신의 그러한 기질에 힘입은 바 클 터였다.
친구의 상태를 점검하고, 확실하게 그를 지킬 수 있는 최선의 선택들을 점검했다. 물론 단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 안에 행해진 점검이었다.
재빨리 침대에서 빠져나온 뒤 창가에 면한 콘솔로 다가갔다. 벽시계의 시간을 체크하며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다행히 손도 발도 그리 떨리지는 않았다. 머릿속은 유리알처럼 맑았다.
119를 눌러 구급차를 요청했다. 5분 내로 도착하겠다는 답변을 받아내곤 곧바로 옷을 주워 입었다. 그가 선물한 고가의 옷 대신 익숙하고 편한 자신의 것을 걸쳤다. 익숙하고 편해야 만일의 사태가 닥친다 해도 몸은 좀 더 유연하게 움직일 것이다.
만일의 사태라니. 순간 피식 하고 냉소를 흘리는 자신의 모습이 콘솔 거울 너머로 잡혔다. 창백한 낯빛. 언제 저렇게 창백해진 건가. 상당히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로구나 하고 순순히 인정했다. 몇 번에 걸친 소중한 존재들과의 이별은 별것 아닌 상황에도 자신을 히스테리 상태로 몰아가곤 한다. 몸이 약한 혜윤이가 감기로 조금만 열이 올라도, 자신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결과를 상상해버리고 만다.
여전히 신음과 비명을 번갈아 토해내며 몸을 뒤틀고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옷을 입히기 위해서였다. 입원하면 어차피 환자복으로 갈아입을 테니 간단히 속옷과 코트만 걸치게 하면 될 것이다.
고통에 겨워하면서도 자신의 손에 필사적으로 매달려오는 그를 떼어내며 얼마 안 되는 옷가지를 주워 입히는 건 꽤나 성가신 일이었다. 하지만 성가실수록 더 좋다고, 아니, 더, 더 성가셔달라고 속으로 누군가와 거래를 하는 자신이 있었다.
얼마든지 성가셔도 좋으니까, 실컷 자신을 부려먹어도 좋으니까 별일이 아니기만 하면 된다. 그저 시시한 복통나부랭이거나, 최악의 경우 맹장염 정도이기를.
대충 파자마 바지와 티셔츠를 입힌 위에 그의 자주색 캐시미어 코트를 걸쳐준 뒤, 그가 조금이라도 통증을 덜 느끼는 자세를 만들도록 거실 소파로 안아 옮겼다. 역시 필사적으로 엉겨드는 그를 달래듯 떼어놓곤 자신의 지갑을 살펴보았다. 아침에 확인했던 그대로 토큰 몇 개와 천 원짜리 몇 장으로 채워진 지갑은 별 쓸모가 없을 것이다. 망설임 없이 그의 크로스백을 살피니 50만 원이 넘는 지폐와 크레딧 카드가 줄줄이 딸려 나왔다. 카드는 두고 지폐만 자신의 지갑에 옮겨 담았다.
그다음에 챙긴 것은 입원 물품. 아무래도 입원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뭐, 까짓 입원 정도는 양보할 수 있다. 맹장을 째도 일주일은 입원을 해야 하는 노릇이니까.
간단한 세면 도구와 타월, 그리고 그의 속옷들을 챙겨 쇼핑백에 주워 담았다. 그가 선물했던 고가의 옷이 담겨 있던 쇼핑백이었다. 고가의 옷은 그의 침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을 터였다.
시계를 살폈다. 11시 14분. 119에 전화를 건 지 5분이 지났다. 더 이상 준비할 일이 없어 다시금 소파로 다가가 그를 살폈다.
여전히 공처럼 웅크린 몸. 덜덜 떨리는 사지. 흐느끼듯 토해지는 신음. 비명. 흙빛의 얼굴. 파랗게 질린 입술…….
아아, 이럴 때마다 자신이 의사였으면 하고 바란다. 아픈 가족을 돌보고, 고통을 덜어주고, 궁극엔 완전히 낫게 해주고, 행여 정수리에 총알이 박히는 일이 생긴다 해도 그것이 타살인지 자살인지 명확히 원인을 규명할 수 있는, 그런 의술을 갖고 싶다고.
전율하듯 떨고 있는 어깨에 살짝 손을 뻗어보려다가는 흠칫 주저하며 도로 끌어들였다. 분명 손을 대자마자 그는 고양이처럼 품 안에 엉겨들겠지. 안아주는 것은 나쁘지 않으리라. 아니, 나쁘기는커녕 자신은 지금보다는 훨씬 덜 겁에 질릴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지금 그를 안아서는 안 된다. 만져서는 안 된다. 자신은 여전히 그 누군가와 거래하고 있었다. 얼마든지 겁에 질려도 상관없으니까, 겁에 질린 나머지 겁쟁이 쪼다처럼 오줌을 지려도 괜찮으니까, 제발 별일이 아니기만 하면 된다고. 그저 시시한 복통나부랭이거나, 최악의 경우 맹장을 적출하는 정도로 마무리지어주십사. 꼭 그렇게 해달라고 흥정을 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그 누군가와.
앵앵거리는 사이렌 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무심코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173개째를 헤아리고 있자니 마침내 현관 벨소리가 울렸다. 총알처럼 튕겨 일어나 현관으로 갔다.
들것을 든 119대원 셋이 우르르 들어왔다. 형광색에 가까운 현란한 제복에 어딘가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대원 중 하나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그에게 말을 시키고, 다른 하나는 맥박과 호흡 상태를 체크했다. 간간이 자신에게도 여러 가지를 물어왔다. 2∼3분 후, 그다지 생명이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대원들의 표정은 처음보다 많이 느긋해져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대원 중 하나가 자신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넸다. 잔뜩 긴장해 있는 꼬락서니가 불쌍해 보였나? 막연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꾸를 얼버무렸다.
물론 거래를 계속하고 있는 자신은 그들처럼 쉬이 안심하지 않았다. 섣부른 추측으로 손해 보는 장사를 할 순 없었다.
들것에 실린 그가 다시 구급차까지 조심스럽게 옮겨졌다.
빌라 현관을 지키고 있던 낯익은 얼굴의 경비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 세운 채 구급차로 옮겨지는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막 졸다가 깼는지 사내의 눈두덩은 조금 부어 있었다.
입원 물품을 챙긴 쇼핑백을 겨드랑이에 낀 채 구급차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가까운 종합병원으로 달려가는 5분 남짓, 구급 침대 위에서 파리하게 떨고 있는 그의 얼굴만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괜찮아지실 겁니다. 자세히 검사해봐야 알겠지만 기능성 위장 장애(위경련)는 통증은 심해도 생명에 지장은 없는 병이니까요.”
구급 침대 바로 옆에서 그의 상태를 체크하고 있던 구급대원이 자신을 돌아보며 재차 일별했다. 역시 뻣뻣하게 굳어서 꼼짝을 못 하는 자신이 불쌍해 보였던 모양이다.
“……친구분이신가요? 아니면 동생?”
역시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친구인지 동생인지 불분명한 대답에도 사내는 알아들은 양 씨익 웃어주었다. 역시 진짜 관계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긴장을 풀어주려 말을 붙인 것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얼굴이 별로 안 닮으셨네요.”
당연하지. 그가 자신처럼 우락부락하게 생겨먹었으면 아무리 고객이라도 요즘처럼 한껏 즐기며 그를 안지는 못할 것이다.
그가 몸을 뒤틀며 고통을 호소했고, 사내의 시선은 다시금 그에게로 떨어졌다. 병원에 거의 도착했다고, 조금만 더 참으라고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를 주는 사내의 목소리는 구원처럼 들렸다. 다섯 시간처럼 여겨진 5분이었기 때문이다.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흘리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자신 역시 으스러져라 주먹을 쥐고 있었던지, 쇼핑백을 집어 들며 보니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구급차가 병원에 도착하자 그는 곧바로 응급실로 옮겨졌다.
두 명의 의사와 여러 명의 간호사가 그에게 달라붙는 걸 확인하고 숨을 돌리려는 찰나, 그가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며 구토를 시작했다. 당혹한 얼굴의 간호사가 잽싸게 휴지통을 대주어 응급실 바닥에 오물이 토해지는 불상사는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몇 분 동안 의사의 문진이 계속되었고, 차트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링거액 두 개를 그의 손등에 연결한 간호사가 옆 침상의 환자에게로 이동하자, 그 옆에 있던 의사가 몇 가지 검사가 필요하니 일단 입원 수속부터 밟으라고 했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병명을 물었던 것 같다.
“일단 자세한 검사를 해봐야 합니다. 기능성 위장 장애로 추측되는데 장폐색인 경우도 있으니까요. 장폐색은 좀 위험하지만 최근 개복 수술을 하신 것도 아니고, 또 아직 젊으시니까 가능성은 희박하니 안심하십시오.”
“……위염 증세가 있다고 했어요. 아까도 그래서 약을 먹으면 낫는다고 해서…… 방치를 했습니다. 그때 빨리 병원에 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자신도 모르게 변명조가 된다. 그의 생명줄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니 눈앞의 새파란 레지던트가 마치 대통령이라도 된 양 조심스러워진다. 비굴해지고 만다. 정말 안심해도 됩니까? 제발 그를 살려주세요. 무사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가운 자락을 잡고 애원을 하는 꼴불견은 다행히 아직 연출하고 있지 않다.
“급성 위염도 기능성 위장 장애 증상을 일으키기도 하지요. 그러나 역시 자세한 건 검사를 해봐야 합니다. 곧 검사실로 이동하셔야 하니까 입원 수속하고 오세요.”
자동인형처럼 의사의 말에 복종했다.
수속을 밟고, 간호사에 의해 이리저리 이동하는 그의 병상을 졸졸 따라갔다. 여전히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를 달래고 어르며 갖가지 검사를 마친 뒤 입원실로 옮겼을 때는 병원에 도착한 지 거의 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다시 30여 분 정도를 더 기다려야 했고, 그는 자신의 부축을 받아 수시로 화장실을 오가며 구토와 설사를 반복했다. 열이 꽤 높아서, 손에 만져지는 몸은 뜨겁게 느껴졌다. 흙빛인 안색과 달리 전신은 식은땀 범벅이었다. 통증이 심해서일 테지만 그토록 부끄럼을 타는 그도 이번엔 자신이 상반신을 부축해주는 자세로 얌전히 앉아 설사를 했다.
“……창피해…… 보지 마…… 소리…… 소리도 듣지 마…… 창피해 죽겠어…… 죽어버릴 거야…….”
거듭 토해지는 신음성의 사이사이에 스스로를 저주하는 것까지는 물론 막을 수 없었다.
이토록 고통에 시달리는데 태연하게 그를 살피다 나가버리는 간호사들에 차디찬 반감이 생길 무렵(힐끔힐끔 자신의 얼굴을 훔쳐보는 것으로 봐서는 그를 살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을 보러 병실에 들어오는 것이 분명했다), 마침내 의사가 차트를 들고 나타났다.
‘식중독’으로 인한 ‘기능성 위장 장애’.
의사가 알려준 병명이었다. 장폐색이 아니니 3∼4일 입원 치료만 받으면 곧 호전될 것이라고 했다. 대단치 않은 질병인 것처럼 담담히 말을 전하는 의사 옆에서 그는 여전히 배를 움켜쥔 채 몸을 뒤틀고 있었다. 우중충한 환자복까지 입으니 그야말로 버려진 강아지처럼 가련해 보였다.
“어제 오늘 사이에 상한 어패류나 기타 특별히 독성을 일으키는 음식을 드신 것 같군요. 원인은 식중독이지만 확실히 만성 위염 증세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물론 위내시경 검사 결과를 확인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곧 해당 약을 쓸 테니까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경련이 가라앉으면 견딜 만하게 되실 겁니다.”
격려랍시고 내뱉는 말도 무성의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반감을 드러내진 않았다. 자신은 여전히 거래 중이었다. 아아, 어차피 당신들에겐 수많은 다른 환자들 가운데 하나일 테지. 그저 약간 배탈이 난 정도에 웬 호들갑이냐 싶겠지. 하루걸러 되풀이되는 당직 근무에 피곤하고 지치기도 하겠지. 다 이해해. 이해한다구…….
긴긴 밤이 계속되었다.
위경련 증세는 한 시간여 만에 가라앉았지만 그는 여전히 극심한 복통과 두통에 시달렸다. 고통이 심해서인지 지쳐 잠에 떨어졌다가도 금세 깨어나 배를 움켜쥔 채 신음했다. 구토의 빈도는 조금씩 줄어드는 것 같았지만 설사는 여전했다. 그저 물밖에 안 나오는 것 같은데도 20∼30분 간격으로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새벽 무렵이 됐을 때는, 지칠 대로 지쳐 자신의 품 안에 축 늘어진 채 오줌 줄기 같은 설사를 변기로 흘려보냈다. 바짝 말라 그저 가느다란 호흡만을 토하고 있는 입술에선 더 이상 창피해 죽고 싶다는 저주조차 흘리지 못했다. 단 몇 시간 만에 얼굴은 반쪽이 됐고, 몸도 수분이 몽땅 빠져나가선지 깃털처럼 존재감이 없었다.
간호사들은 두 시간 간격으로 드나들며 링거액을 갈고 주사를 놓아주었다. 시간대별로 혈액과 배설물도 채취해 갔다.
그가 고통에 시달리며 까맣게 밤을 새우는 사이 자신 역시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자신 역시 지치고 피로했지만, 더더욱 지치고 피로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아직 거래 중이었다. 아직. 아직.
8시가 되자 전공 교수가 레지던트들을 줄줄이 이끌고 회진을 왔다. 어제의 담당 레지던트도 끼어 교수에게 경과와 소견을 말했다.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고 했다. 7시가 넘자 그는 겨우 잠이 들었고, 구토 증세와 설사도 현격하게 빈도를 떨어트리고 있어, 자신도 레지던트의 말에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다만, 30분 전 간신히 숙면에 든 그를 회진이랍시고 깨운 그들에게 적대감을 느꼈을 뿐이었다.
“……이제 좀 덜 아파…….”
들어올 때처럼 가운 자락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져버린 무리들을 배웅하고 침대로 다가가니, 그가 힘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살 거 같네…….”
가만히 주의 깊게 살펴보니 눈빛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거의 열 시간 만의 감지덕지한 생기였다. 흙빛을 띠고 있던 안색도 조금씩 핏기가 돌아오는 것 같았다. 빙고. 거래는 성사를 목전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아직 안심하기엔 일렀다. 승부는 항상 마지막의 변수가 중요한 법이었다.
“……미안…….”
“…….”
“……위야, 미안…….”
“…….”
고통으로 긴 밤 내내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던 눈시울에 새로이 이슬이 맺히는 게 보였다. 그나마 다른 종류의 이슬이라 반가웠다. 고통으로 울지 않는 거라면 다 좋다. 얼마든지 울며 응석을 부려도 된다.
“……창피해서 죽을 거 같아…….”
“…….”
“……아아, 젠장…… 이제 니 얼굴 어떻게 봐…… 어떻게…….”
“…….”
다시 찾은 수줍음도 그지없이 반갑다. 빨리 다 나아서 예전처럼 자신 앞에서 멋을 부리고 허세도 부렸으면 좋겠다. 예전처럼 오줌 하나 싸는 것도 창피해해줬으면 싶다.
“……너무 졸려…….”
트럭처럼 덮치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눈을 감으니 눈시울 가득 들어차 있던 눈물이 눈꼬리를 따라 길게 흘러내렸다. 눈을 감는 즉시 고른 숨소리를 내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지친 모양이다. 당연했다. 단말마의 고통에 시달리며 밤을 홀딱 새운 몸이니 지치는 것이 당연하지. 쉴 새 없이 주입되고 있는 링거액이 아니라면 탈수를 일으킬 만큼 온몸의 수분이란 수분도 다 토해냈으니.
그가 잠들고 30분이 지났을 무렵 그를 위한 아침 식사가 도착했다. 물같이 멀건 미음에 간장, 그리고 백김치가 덩그마니 놓인 그것을 대신 먹어치우고 그를 깨우진 않았다. 일단 잠을 자게 하는 것이 더 낫고 링거액으로 수분과 포도당이 주입되고 있으니 하루 정도는 차라리 굶는 게 더 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후 두 시간 남짓을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잤다. 자신도 그 틈에 옆의 빈 침대에(2인실이었지만 다행히 새 환자는 들지 않았다) 쓰러져 죽음 같은 단잠을 잘 수 있었다. 두 시간 후에 간호사가 와서 다시금 그의 피를 뽑고, 받아둔 배설물을 가져갔다. 깨어난 그는 두 시간 전보다도 낯빛이 한결 나아 보였다. 화장실로 가서 설사를 한 번 했지만 구토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할퀴는 것처럼 배도 여전히 아프다고 했지만 그래도 어젯밤에 비해선 하느님이라고 말하며 가냘프게 웃었다. 침대에 다시 그를 눕히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주었다. 이젠 조금 만지는 것 정도는 스스로에게 허락해줘도 될 듯싶었다. 물론 아직 거래가 끝난 건 아니다. 알고 있다.
노랗고 하얀 두 종류의 링거 바늘을 줄줄이 매단 손이 자신의 손등에 겹쳐진다. 꼭 눌리는 감촉에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던 움직임을 멈췄다.
“……나 벌 받았나 봐…….”
한숨 같은 고백.
“……억지 부리고 있었거든, 그동안…….”
“…….”
“……슬프면 웃고, 기쁘면 더 많이 웃고, 화나도 웃고, 아파도 웃었거든.”
“…….”
“……먹기 싫어도 열심히 먹고, 아니, 싫을수록 더 열심히 먹고, 싫어하는 친구들 불러내 만나고, 걔네들 선물도 사주고, 지하철 노숙자들에게 지폐 많이 던져주고, 대신 좋아하는 그림은 안 그렸어.”
“…….”
“……이해가 가니? 너무 속 보이는 짓이지?”
이해. 물론 간다. 지금 자신이 거래하고 있는 방식과 닮아 있으니까. 아니, 복사판일까나? 쌍둥이다. 복제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더라. 정 도사는 내게 업이 많다고 하고…… 그야 모든 중생들의 업장이 다 그렇다고도 했지만…….”
씨팔. 저절로 욕이 나온다. 하지만 참는다. 아직 거래 중이다.
“……책 보니까 보시하면 선업이 쌓인다고 하더라구…… 그래서 그동안…… 응, 지난 3주 동안 열심히 속 보이는 짓을 했지. 그럼 혹시라도 운명이 바뀔까 싶어서…….”
“…….”
“……너만 죽도록 짝사랑하다 결국 혼자 비참하게 죽는 운명 같은 거 말야…….”
“…….”
“……열심히 세상에 보시하다 보면 어쩜 다음 생에서는 너도 날 좋아해줄지도 모르니까…….”
“…….”
“……헤헤, 진짜 속 보이지? 내가 부처님 같아도 소원 안 들어주시겠다. 보시는 그런 거 아니잖아. 나는 특별히 믿는 신앙은 없지만 만약 진짜로 신이라는 게 있다면 신은 그렇게 유치한 거래는 하지 않으실 것 같애. 신이 보험사 영업맨과 같은 종류라면 그게 진짜 신이겠어? 진짜로 유치 짬뽕이지. 그런 신이라면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해. 그래서 난 영업맨 같은 신을 팔고 다니는 예수쟁이들이나 땡중들이 진짜 웃겨. ‘여기 붙으면 평생, 아니, 내생, 삼생, 영생까지도 안심하고 보장됩니다.’ ‘만 가지 재해 보장을 약속합니다.’ ‘이 번호로 전화하세요.’ 진짜 웃기지……?”
“…….”
하나도 우습지 않다. 거래란 그런 거다. 서로 손해 보는 장사를 할 위인이 누가 있나.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아마도 좀 더 영악할 신이란 놈은 말해 무엇 하랴.
“……그렇게 웃긴 짓을 나도 하고 있었으니 벌을 안 받을 수 있겠어? 진짜 신이 보고 있다가 참다못해 정신 차리라고 알밤을 먹인 거지…….”
다시 위통이 느껴졌는지 그가 흐릿하게 신음을 흘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겹쳐졌던 손가락을 힘껏 감아 들이더니 자신의 손을 그의 배 근처로 가져갔다. 손바닥을 그의 배에 맞대게 하곤 천천히 쓸기 시작해서 무방비하게 끌려갔던 손에 힘을 기울였다. 부드러우면서도 정성을 담은 마사지를 시작하자 그가 신음하면서도 입꼬리를 말며 웃었다.
“……아아, 좋다…… 위야 손이 약손…… 위야 손이 약손…….”
시골 할머니들이나 내뱉을 법한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스르륵 눈을 감는다. 또 잠이 쏟아지는 모양이었다. 더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자게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자신의 거래에 대해서는 나중에 전해도 된다. 자신이 지금 거래를 트고 있는 ‘누군가’가 그는 아니었으니까. 정 도사인지 부채도사인지, 그놈의 땡중을 찾아가 그가 원하는 맹세를 때려주겠다고 흥정을 건네는 대상이란 것은.
아아, 역시 싫은 일 중에서도 가장 싫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보시’란 그런 게 아닌가. 미래의 이득을 위한 투자다. 확실한 보험 상품. 잘못 알고 있는 건 그다.
그래. 당신은 보험사 영업맨과 한가지다. 전엔 망설이다 기회를 놓쳤었다. ‘보시’를 통해 원하는 것을 구할 생각이란 꿈에도 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아버지도 잃고, 형도 잃고, 엄마도 잃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확실히 주판알을 튕겨보고, 내줄 것은 내주고, 받을 것은 받는다. 이번의 그는 확실히 돌려받을 거다.
아아, 그래. 어디 말해보시지. ‘여기 붙으면 평생, 아니, 내생, 삼생, 영생까지도 안심하고 보장됩니다’라고. ‘만 가지 재해 보장을 약속합니다’ ‘이 번호로 전화하세요’ 하고…….
점심 식사가 배달될 무렵 다시 깨어난 그는 정말로 눈에 띄게 안색이 좋아져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찾아들던 화장실도 가지 않았고, 배도 한결 덜 아프다고 의기양양해했다. 몇 번이나 창피해 죽겠다며 희미하게 얼굴을 붉혔다.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눈치를 슬슬 살피기도 했다. 입에서 구취가 심할 거라고 화장실에 가서 양치를 했다. 탈수증으로 약간 어지러워했지만 더 이상 자신의 부축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반쪽이 된 자신의 얼굴을 거울로 들여다보고는 울상이 되더니 다시금 자신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아아아, 진짜 죽겠네…… 어떡해, 어떡해…… 이런저런 추한 꼴 다 보이고…….”
중얼중얼 궁시렁대며 반쯤 허리를 접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양치를 했다. 다시 침대로 되돌아와선 간병인을 구하면 되니까 그만 집에 가보라고 허세를 부렸다. 물론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방학이라 학교 갈 일도 없고, 설령 수업이 있다 해도 결석을 했을 것이다. 단지 집에 혼자 있을 혜윤이가 걸렸지만 별일은 없을 것이다. 그가 다시 잠이 들면 전화를 넣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고집스레 집에 가보라는 생색을 내더니, 자신이 거듭 끝까지 간병하겠다고 의지를 보이자, 마침내 행복한 속내를 차마 감추지도 못하고 활짝 웃었다. 꽃처럼 피어나는 귀여운 미소. ‘전생 조울증’ 증세가 아닌, 진심으로부터 우러난 미소 같았다.
침대에 들어 종알종알 이런저런 수다를 떨기 시작하다가는 5분도 못 돼 다시 잠이 들었다. 30분쯤 그의 상태를 지켜보다가 역시 그의 죽을 대신 먹어치웠다. 아침 점심 계속 죽만 집어넣으니 더욱 허기가 느껴졌다. 쟁반을 물리곤 병원 지하 식당으로 내려와 제대로 된 식사를 했다. 혜윤이에게 전화도 걸었다. 드문 외박이라 꽤나 걱정을 했던 모양인지 혜윤이의 목소리엔 잔뜩 원망이 담겨 있었다. 밤에 못 하면 아침에라도 전화를 주지 하고 울먹이는 겁 많은 동생에게 미안하다고, 저녁에 피자 사 갖고 잠깐 들르겠다고 다독였다. 그가 갑자기 입원해서 연락할 틈이 없었다고 정직하게 이유도 설명해주었다. 거듭 원망 섞인 불평만 해대더니 그가 아프다는 소리에 혜윤이의 목소리엔 금세 근심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혜윤이도 그를 무척이나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겨우 생각해냈다.
“……많이 아프시대?”
“아냐. 그냥 가벼운 식중독이래. 2∼3일 입원하면 낫는다고 하니까 걱정하지 마라.”
“다행이다……!”
휴우 하는 겁 많은 한숨이 귓가를 간질였다.
여리고 섬세하고 착한 내 누이. 그리고 그런 누이의 성품을 쏙 빼닮은 그. 자신이 아니라, 마치 그가 누이와 실제 남매간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의 말대로 정말 전생이라는 게 있다면 그와 누이는 진짜로 친남매였을지도. 그토록 단기간에 마음을 열고 또 애정을 주고받는다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전화를 끊고 부랴부랴 병실로 돌아오니 그는 여전히 꿈나라였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다가, 오후 늦게까지 장장 네 시간이 넘도록 깨지도 않고 잠을 자는 그가 차츰 걱정이 되었다. 주사를 놓기 위해 들어온 간호사는 약에 안정제 성분도 들어 있다고 귀띔해주었다.
“모든 병이 다 그렇겠지만 식중독에도 수면은 가장 좋은 치료제죠.”
어딘가 자신만만해하며 덧붙이는 여자가 처음으로 예쁘게 보였다. 그동안은 환자보다 환자 보호자인 자신에게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어 성가시고 짜증마저 느껴졌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그에 대한 걱정으로 혼이 반쯤 떠나 있는데 여자들의 추파까지 감당하기란 정말 짜증스러웠었다. 물론 그 짜증만큼, 자신이 지불해야 할 가치도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아, 그래. 물론 그래서 참는다. 살랑살랑 꼬리를 치는 연상의 여자에게 싱긋 웃는 미소도 덤으로 얹어주기까지 하면서.
저녁 무렵에 깨어난 그가 처음으로 미음을 먹었다.
회진을 온 늙은 전공 교수가 이제 진짜로 안심하셔도 되겠다며 웃었다. 사실인 것 같았다. 이제 거래는 완료된 모양이었다.
비록 반쪽이 되었지만 낯빛도 거의 평소 상태를 되찾고 있었고, 더 이상 극심한 복통을 호소하는 일도 없었다. 통증은 묵직하고 완만한 둔통으로 변했고, 설사도 거의 멈췄다.
금세 의기양양해진 그는 이제 퇴원을 해도 되냐고, 앞서가는 욕심을 부렸다. 물론 교수의 허락이 떨어질 리 없었다. 교수는 3∼4일은 보통의 식사를 할 수도 없는데다, 탈수증이 심해서 계속 링거를 맞을 필요가 있다며 적어도 하루 이상은 더 입원을 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그는 대답을 듣고 낙담하는 것 같았지만 그리 동요는 없어 보였다. 사실 동요라고 한다면 ‘전생 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을 요 3주 남짓이 오히려 더 그를 극심하게 동요시키고 있었을 터이다. 아직 완전히 그 영향권에서 빠져나온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번 발병으로 그도 어느 정도의 마음 정리는 한 것 같았다.
의사들 무리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또 잠이 들었다. 역시 적어도 한두 시간은 깨어날 것 같지 않았기에, 위는 그 틈에 집엘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말을 않고 나가면 신경을 쓸 게 뻔했으므로 잠시 다녀오겠다는 메모를 베갯머리에 남기고 길을 나섰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꽤 피로가 느껴졌다.
아침에 잠깐 눈을 붙인 것을 제외하고 24시간 가까이 잠을 자지 않았으니 피로가 느껴질 만도 하리라. 그래도 오늘 밤은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 같다. 병실에 새 환자가 들지만 않는다면 더 편히 잘 수 있을 것이고, 다른 환자가 든다 해도 보조 침대에서 눈을 붙이면 된다. 그와 달리, 자신은 낯선 이들과의 동침이라거나 불편한 침대 따위에 숙면을 방해받을 정도로 섬세한 신경은 아니었으니까. 어젯밤 잠을 못 이뤘던 것은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작 식중독 따위에’라고 한다면 역시 할 말은 없다. 그러나 혜윤이가 잔병치레를 할 때에도 자신은 긴장으로 반쯤은 넋을 놓아버린다. 역시 신경증이다. 혜윤이와 휘, 윤열이 형, 성준이, 그리고 현준 형에 더해 그의 존재도 어느새 자신에게 신경증을 일으키는 가족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그가 사지(死地)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 ‘보시’만 마무리 지으면 ‘누군가’와의 거래도 종료된다. 이제 자신의 숙면을 방해할 요소는 당분간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없기를 바란다. 쫓기고 있는 윤열이 형도 제발 끝까지 무사했으면.
먹먹한 두통이 느껴지는 머리를 긁어내리며 하품을 하고 있는데 마침 버스가 왔다.
혜윤이가 좋아하는 불고기 피자를 잊지 말자고 되뇌며, 위는 정차한 버스를 향해 껑충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