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1989년 12월. 장인환(張仁歡)
퇴원은 월요일 오전에 할 수 있었다.
하루 정도는 더 입원하는 것이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의사들은 만류했지만, 맙소사, 낯선 사람과 한방에서 먹고, 자고, 똥 쌀 걸 생각하면 끔찍했다. 나아가고 있던 병도 도로 도질 터였다. 일요일 오전까진 근사한 내 영웅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환상적인 입원 생활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것도 일요일 밤 40대 사내인 어느 신장염 환자가 옆 침대에 끼어든 것으로 말짱 종말을 고했다. 그야, 1인실로 바꿔 탈 수도 있긴 있었다. 그러나 만 하루 동안 있는 수치 없는 수치 다 보여준 내 영웅에게 더러운 성질머리로 까탈을 부리는 모습까지 보태고 싶진 않았다. 뭐가 잘났다고 사람을 가리냐, 주제에…… 싶은 자격지심이었다. 안 그래도 새록새록 떠오르는 간밤의 기억들로 부끄러워 죽을 노릇이었다. 몸이 정상을 찾아갈수록 수치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갔다. 토하고, 똥 싸고, 징징대고, 달라붙고, 비명 지르고…… 오오, 쓰버럴! 지우개가 있다면 머릿속을 박박 지우고픈 심정이었다.
결국 한 무더기의 약과, 수시로 수분을 보충해주라는 의사의 조언까지 덤으로 싸들고 아틀리에로 돌아오니 오전 11시였다. 퇴원 수속에서부터, 만 사흘간의 입원 생활로 나온 쓰레기며 짐까지 몽땅 챙겨주고, 마지막엔 택시를 잡아 편히 바래다준 영웅도 얼결에 집 안까지 따라 들어와 있었다. 솔직히 운신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제법 음식을 먹기 시작하고 있었으니 더 이상 그의 간병은 필요 없는 셈이었다.
거실 한가운데에 짐을 부리고 있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그간의 수고와 민폐에 대해 미적미적 사과를 했다. 지난 이틀 동안 눈물 나게 다정한 몸짓으로 자신을 돌보면서도 줄곧 침묵을 고수하고 있던 그는 예상했던 대로 역시 별 대꾸가 없었다. 그저 차분하고 고요한 내 영웅의 표정 그대로 담담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그럼 이제 그만 집에 가봐, 위야. 이틀 밤이나 외박을 했으니 혜윤이 진짜 걱정했겠다.”
“선생님 주무실 때 틈틈이 집에 다녀와서 괜찮습니다.”
몇 톤짜리 추가 달린 것 같던 그의 섹시한 입술이 겨우 떨어지며 담담한 대꾸가 토해졌다. 변함없이 예의 바르고 상냥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요, 어조였다. 지난 이틀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쪽 팔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태도인 그가 고마워 저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 그런가……? 그럼 됐고…….”
“……침실로 가 누우세요. 아직 많이 기운 없으시죠?”
“응, 그럴게. 빨리 가. 현관문 단속하고 잘 거니까…….”
“……아뇨. 오늘까지 여기서 선생님 간병하겠습니다.”
“?!!!”
담담하게 토해진 선언에 눈을 휘둥그렇게 뜰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 그럴 필요는…… 나, 돌아다닐 수도 있고…….”
“음식과 약 챙겨줄 사람은 아직 필요합니다. 선생님, 요리도 살림도 못 하시잖아요. 그렇다고 선생님 어머님 댁 파출부도 안 부르실 거고요.”
그건 그렇다. 김천댁 아줌마를 부르면 자신이 아픈 건 직방으로 엄마에게 전해지니까.
“내일 오전까지 상태 더 보고, 집에 돌아가더라도 그때 가든지 하겠습니다.”
“……하…… 하지만…….”
아마 잔뜩 울상이 돼 있을 것이다. 실은 기뻐해야 할지 곤란해해야 할지, 스스로도 갈팡질팡이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하루를 보낸다는 거야 당근 꿈처럼 달콤할 일이지만, 이미 여태까지의 이틀간도 미안해 죽을 노릇이다. 남창이 서비스 시간 이외에 병간호까지 해야 한다는 규정은 사인해준 각서에도 없다. 물론 그는 친구로서의 당연한 호의라고 생각하겠지만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어마어마한 의미와 무게를 부여하고 있는 자신으로선 좋다고 냉큼 받아먹을 수만은 없는 초콜릿이었다.
“……친구로서입니다. 부담을 느끼시면 섭섭해요. 친구로서 선생님 많이 좋아한다는 건 말씀드렸죠?”
“…….”
“뭐, 그리고 오늘은 월요일이기도 합니다.”
“!!!”
단숨에 얼굴로 홍조가 올라왔다. 그와의 약속이 정해진 요일.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월요일이네. 월요일의 세 시간. 자각하자마자 자동적으로 심장 고동이 빨라지며 가슴이 몹시 설레었다. 솔직히 기력이 몹시 떨어져 있어서 섹스를 할 수 있을까 싶기는 했지만, 설령 한 시간 후에 발작으로 죽는다 해도 자신은 기회가 주어지는 한 그와 한 몸이 되는 기쁨을 멈추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섹스는 안 할 겁니다. 아직은 무리시니까요.”
“그…………!! 아…… 아니, 그건 괜찮은데…… 나는…….”
얼굴이 더 울상이 됐을 거다.
전혀 무리 따위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집 안이 떠나가랴 아프다고 엄살을 질러대고 나선 고작 36시간도 안 돼 다시 그를 탐하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아아, 아무렴. 부끄럽고말고. 이 이상 부끄러운 짓거리를 그에게 보여줄 순 없다…….
“……그저 부담되실까 봐 말씀드리는 겁니다. 정 신경이 쓰이시면 오늘치 서비스 대금을 입금해주셔도 됩니다. 하지만 진짜로 그러시면 저도 많이 섭섭할 거예요.”
보일 듯 말 듯, 그의 상냥한 미소를 발견하는 것으로 인환의 주저도 말끔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수치감도. 미안함도. 자격지심도. 슬픈 전생의 기억들도. 그저 이 순간만을 생각하자. 그가 기꺼이 자신과 함께해주는, 이 눈물 날 만큼 기쁘고 행복한 순간만을…….
“……어서 침대로 가 누우세요. 전 장 좀 봐 오겠습니다. 흰죽엔 질리셨을 테니까 달리 입맛을 돋울 만한 죽을 끓여드릴게요.”
그렁그렁 맺히고 있는 감격의 눈물을 짐짓 못 본 척하며 그가 현관으로 걸어가는 게 보였다. 자신이 선물한 브랜드 옷은 쇼핑백에 얌전히 넣어둔 채, 그는 지난 이틀 동안 병원에서도 계속 입고 있었던 교복 위에 오리털 파카를 걸치고 있었다. 개구리 왕자의 허물 같은 초라한 차림새도 그의 아름답고 늠름한 자태만은 조금도 손상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했다. 그가 가진 빛은 그의 내면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야, 객관적으로도 빼어난 외모를 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자신은 그 이상의 용모를 하고 있던 전생의 그의 모습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외모 면으로 치자면 솔직히 영국인인 알렉이 그보다는 훨씬 화려하고 눈이 부신 쪽이었다. 준오도 같은 한국인 출신이지만 결코 그에 못지않은 준수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그러고 보면 그는 어째 매번 그리도 뛰어난 용모만을 타고나는지! 정 도사는 그것도 악업의 영향이라고 부를까). 그러나 그 어떤 얼굴보다도 지금 자신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얼굴은 당근 그의 얼굴이었다. 그의 몸이었다. 그의 몸짓이었다. 기억 속의 알렉도, 준오도, 디에고도, 베르니니 공작도 여전히 사랑하지만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영웅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지난 생의 모든 그를 능가하는 현생의 그가 내면으로부터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전생의 기억보다는 현생의 삶이 더 리얼하게 다가오기에, 그저 익숙한 것에 대한 애착심일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그가 가장 갈고닦인 모습으로 자신 앞에 서 있는 때문일 터였다. 즉 그는 기나긴 윤회를 거치며 갈고닦인 정점의 보석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자신은 그렇게 진화해준 그가 너무나 고맙고 대견스러웠다. 만약 현재의 자신 앞에 그가 알렉의 성격으로, 혹은 준오나 디에고의 기질로 나타났다면 자신은 어쩜 그를 이만큼이나 사랑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진화를 했듯이 자신 역시 조금 진화를 한 것일 테지만.
“……어서 침실로 들어가세요.”
막 현관문을 밀고 나가려던 그가 갑자기 돌아보며 엄하게 채근했다.
흠칫 기겁을 해선 서둘러 침실로 뛰어들었다. 또 멍하니 전생의 그를 생각하고 말았으니,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찔리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그가 얼마나 달가워하지 않는 주제일지, 그간 먹은 눈칫밥이 얼마인데 모를 리가 없는 자신이다.
다시는 그 앞에서 전생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이다. 정 도사 앞에 가서 맹세를 해달라는 주제넘은 요구도 물론 다시는 어림없었다.
자신 역시 차츰 기억 속에서 전생을 지워버릴 것이다. 아무리 슬퍼도, 가슴이 아파도, 언제까지 과거에 연연해 현재를 우중충하고 질척하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미리 겁먹고 기죽는 것도, 참으로 유치하고 나약하고 얄팍한 보신의 짓거리일 것이다. 정말로 그렇게 안 좋은 악업을 자신이 타고났다면 또 어쩌겠는가. 그저 현재를 열심히 사는 것으로 갚아나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을 것이다. 절망한 나머지 머리에 총이라도 쏘지 않는 한. 아, 하긴 총 쏴봤자 다음 생에 또 태어나겠지. 자살한 덕분에 곱빼기가 돼버린 악업을 떠안고서.
욱신거리는 명치끝의 통증이 또 경고를 주었다.
아아, 알았다구. 더 이상 생각 안 할게. 안 한다구.
부지런히 머릿속의 망상을 지우고는 오직 현재의 그만을 떠올렸다. 이틀 동안,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마음씀씀이로 자신을 돌봐주었던 내 영웅만을 눈앞에서 생생히 재생시켰다. 끝도 없이 리플레이를 시킨 것은 물론이었다.
나른하고 행복한 충만감이 온몸을 감싸오기 시작했다. 아아, 또 졸음이 오는 모양이다. 그가 곧 돌아올 텐데 잠을 자고 싶지는 않다. 1분 1초가 금쪽인 그와의 한때가 다시금 펼쳐지고 있었다. 오늘 밤은 되도록 오래오래 잠들지 말자고 맹세했다. 그가 자신의 곁에서 잠이 드는 무방비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또 볼 수 있을 테니까.
멀리서 그가 돌아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비몽사몽 잠에 빠져들면서도 인환의 얼굴은 빙그레 웃고 있었다.
“……데…… 데, 데, 데, 데이트……?”
[예.]
“……데…… 데…… 데…… 지…… 지, 지, 진짜……?”
[하하, 예. 데이트라고 해도 그저 밖에서 밥 먹는 거 정도죠. 어디 갈 데가 한 군데 있긴 한데 거기만 들렀다가 나와서 저녁 먹어요, 선생님. 고수부지에서 불꽃놀이 한다니까 그것도 한번 구경해보구요.]
“……그…… 그…… 그…… 그게…….”
[……마침 금요일이 크리스마스이브더군요. 저야 별로 그렇지만, 선생님은 크리스마스 분위기 좋아하시잖아요.]
“……그…… 그…… 그…… 그…… 그건…….”
[아직 몸도 완전히 회복하신 게 아니라 섹스로 무리시켜드리고 싶지 않아서요. 날도 날이고요.]
“……그…… 그…… 그…….”
수화기를 움켜쥔 손이 저절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말을 제대로 하려고 해도 자꾸 더듬거리는 횡설수설만 튀어나왔다.
금요일이었다.
그가 오는 날. 그와의 약속이 되어 있는 날. 게다가 월요일 약속보다 두 배나 많은 시간을 그와 공유할 수 있는 날.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은데 ‘데이트’란다. 그가 밖에서 ‘데이트’를 하잔다. 그러니 지금 자신의 손이 온전할 리가 있겠는가. 심장이 온전할 리가 있겠는가. 말이 온전히 나올 리가 있겠는가 말이다.
그야 밖에서 만나는 경우도 간혹 있긴 있었다. 그러나 그건 대부분 자신이 그를 졸라서 이루어지는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이번 달 초에 혜윤이를 소개받고 나선, 그가 눈치를 주는데도 불구하고 세 번이나 그의 집에 찾아가는 뻔뻔스러운 짓까지 감행했었다. 즉 데이트란 고객인 자신의 제멋대로인 고집에 의해서만 어쩌다 떨어지는 감로수였던 거다. 근데 그가 스스로 데이트를 신청해주다니.
황송한 나머지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꿈이냐 생시냐,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을 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쉬이 믿어지지 않아 자꾸만 되묻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말이다.
“……지…… 지…… 지…… 진짜……? 정말이지……?”
[하하, 그렇다니까요.]
“…….”
[저런, 또 우세요?]
“…….”
[맙소사, 그럼 오늘 데이트 안 합니다?]
“안 돼!!!!!!!!!”
[읏……!]
“미…… 미안! 시…… 시끄러웠지? 하…… 하지만 우는 거 아냐! 절대로 안 울어!!!”
[하하, 예. 그럼 이따 5시에 신촌에서 봬요, 선생님. 시간 맞춰서 나갈 테니까 너무 일찍 오셔서 기다리지 마시구요. 몸도 아직 안 좋으신데 한데서 오래 기다리시면 감기 걸리실 거예요. 아, 옷도 따뜻하게 입고 오시구요. 강바람은 꽤 추우니까요.]
“……어…… 어어…….”
[그럼 들어가세요. 5시에 뵙겠습니다.]
“……어어…….”
뚜, 뚜, 뚜, 뚜, 뚜, 뚜, 뚜, 뚜, 뚜…….
전화가 끊기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던 것 같다. 몇 초가 흘렀을까. 아니, 몇 분이 흘렀을까. 수화기의 파상음이 문득 귀청에 아프게 자각이 되었고, 인환은 그제야 겨우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
위층에 사는 깐깐한 올드미스 아줌마가 시끄럽다고 바닥을 쿵쿵 칠지도 모른다. 그래도 개의치 않고, 인환은 환희에 찬 비명을 고래고래 질러댔다.
쓰버럴, 꿈이 아니다!!!!!!!!!!!
날씨는 화창할 정도로 맑았다.
눈이 올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울 것이다. 기온은 5시 10분 전인 현재, 영하 3도. 겨울의 한가운데로 진입해가는 시점을 생각하면 그리 춥다고는 할 수 없지만 추위를 꽤 타는 인환에겐 역시 조금 춥게 느껴졌다.
그러나 등에 땀이 날 정도로 뜨뜻한 여우털 코트로 중무장을 한 자신이다. 감기 따위 이 무적의 여우털 코트까진 차마 뚫지 못할 것이다. 그가 특별히 따뜻하게 입으라고 부탁까지 했는데, 절대로 감기 따위 들 수 없다.
몇 번째 확인하는 건지 모를 시계를 다시 한 번 살폈다. 5시 53분. 곧, 곧 그가 나타나겠지. 내 아름다운 연인. 내 영웅. 내 사랑. 뭐, 그렇다는 얘기다. 따뜻하게 입고 나오라는 부탁은 들어주었지만, 일찍 나와 기다리지 말라는 지적은 무시했다. 흐흐, 어차피 그가 모를 테니까 선의의 거짓말은 괜찮다.
인환이 지금 서 있는 신촌역 앞(정확히는 현대백화점 앞)은 그야말로 북새통이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크리스마스캐럴들로 북새통이고, 연인을 기다리는 인파로 북새통이고, 연인과 만나 바쁘게 어딘가로 가는 사람들로 북새통,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친구들로 북새통, 선물 사러 나온 누군가의 가족들로 북새통, 그 가족들에게 선물을 팔기 위해 나온 상인들로 북새통, 그리고 그 모든 인간, 인간들을 온통 토해놓은 자동차들까지 모두모두 북새통이다.
그 북새통들에 뒤섞여 연인을 기다리는 자신이 있다.
게이라는 것을 자각한 순간부터 평생 이루어질 리가 없다고 단념했던 꿈. 동경. 그리고 낭만……. 다른 무수한 선남선녀들처럼 크리스마스이브에 거리로 나와 연인과 데이트를 하는 일……. 지금 자신은 그것을 이루려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역사적인 날이었다.
반대편(서강대 방면) 횡단보도 부근에서 심상치 않은 공기가 느껴진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무리들 사이로 작은 균열이 생기고 있다. 홍해처럼 거대한 균열은 아니지만, 늘 확실한 센세이션을 거리에 뿌리곤 하는 그 누군가의 역력한 자취. 헉. 흥분과 기대로 숨이 턱하니 막히는 걸 보니 틀림없다.
신호등이 파란 불로 바뀌자 50명도 넘을 거대한 인파가 이쪽 편으로 몰려온다. 그 한가운데, 군상들 속에 확실한 균열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한 카리스마가 보인다. 막 어스름한 땅거미로 물들기 시작한 거리에 그쪽만 훤히 빛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검정색 양가죽 재킷. 검정색 캐시미어 팬츠. 그리고 한눈에 보기에도 명품으로 보이는 검정색 가죽 로퍼. 만세! 자신이 선물한 옷을 입어주고 있다! 우이씨, 당연하지! 홍해가 갈라지는 게 당연하지! 쫙 갈라져 양쪽에서 힐끔힐끔, 눈이 휘둥그레져서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 훔쳐보는 게 당연하지! 안 그래도 눈에 확 띄는데! 본래의 천품에 걸맞은 날개를 둘렀으니! 쓰버럴, 제왕의 강림이다!!!!!!
[……선생님……?]
제왕이 크게 손을 흔들며 자신을 부르자 제왕에게로 쏠려 있던 시선들이 이번엔 일제히 자신에게로 향한다. 우씨, 쪽 팔려. 하지만 할 수 없지. 제왕을 연인으로 두려면 이 정도 불편과 쪽 팔림쯤은 능히 감수해야 하는 법.
“……위야!!!”
마주 손을 흔들어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툭툭, 어깨를 치대며 스쳐 지나가는 인파들에 상대적으로 약한 자신의 다리가 휘청거린다. 갑자기 움직이려니 아직 기력이 딸리는 탓에 어질어질 시야가 흔들린다. 그러나 그 어느 것에도 개의치 않고 더욱 발걸음을 빨리했다. 빨리해봤자 절름거리는 다리가 그보다 빠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달려간다. 그보다 빠르진 않지만, 그보다 더 뜨거울 마음으로 달려간다.
[……거기 그냥 서 계세요, 선생님. 제가 갈게요.]
시끄러운 캐럴 소리와 군중들의 웅성거림, 사방에서 빵빵거리는 수많은 자동차 소리들에 섞여 연인의 목소리는 전혀 닿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연인의 입술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보일 듯 말 듯 은근한 미소가 살짝 걸린 그의 도톰하고 섹시한 입술이.
연인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부탁했으므로 그만 열정을 내리눌렀다. KFC 입구 앞에서 멈춰 서자 대신 좀 더 빨리 달려와 조우해준 연인의 상냥함에 환한 미소를 날려주었다. 거의 표정이 없는 단아한 이목구비는 담담하면서도 차분하게, 그러나 신사의 배려가 물씬 풍기는 고요한 미소로 답을 줘서 인환을 다시 한 번 감격에 떨게 했다.
……야아, 드디어 만났다!!!
그의 따스한 오른손이 자신의 왼손을 잡아끌더니 단단하게 어깨를 감싸 안았다. 무작위로 치고 지나가는 인파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한 그 기사다운 몸짓에 또 한 번 왕 감동.
“……일단 차 있는 곳으로 가요, 선생님. 차 갖고 오셨죠?”
주변의 소음을 누르려는 듯,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쯤 올라가 있다. 그립고도 그리운 그의 체취를 흠뻑 들이마시며 고개만 끄덕끄덕. 가슴이 벅차오르는 바람에 잘 말이 안 터진다. 무언의 몸짓으로 방향을 지시하며 연인의 팔에 의지해 인파를 헤치고 나갔다. 보폭을 신중하게 자신의 수준에 맞추면서도 늠름하고 늘씬한 연인의 움직임엔 거침이 없었다.
차를 주차해둔 연세대 방면 보도도 여전히 인파로 북새통이었다. 그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연인인지라, 자신들이 지나가는 길목마다 자그마한 규모의 갈라진 홍해가 만들어졌다. 부러움과 동경과 호기심에 찬 뭇 시선들이 꽁무니까지 따라붙었다. 한편 쪽 팔리고, 그 이상으로 자랑스러움에 뿌듯했다. 죽 이어진 이 길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유치한 생각도 했더랬다.
……야아, 드디어 데이트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무언가 굉장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오늘은 자신의 일생을 바꿀 역사가 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쩜 이번 생뿐만이 아닌, 이 다음 내생과, 또 그다음 내생과, 또 또 그다음 내생들까지 바꿀 역사가. 영원 그 자체를 뒤바꿀 역사가. 어쩐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예감이 들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연인과 데이트를 한다아!!!!!
……하긴…….
……오늘 자체가 이미 역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