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1989년 12월. 문위(文偉)
차가 고양시로 접어들었을 때만 해도 그는 약간 의아한 기색만 품었을 뿐 전혀 눈치는 못 챈 것 같았었다.
1번 국도를 타고 벽제 인터체인지를 지나라고 지시했을 때에도 그는 ‘설마’ 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지금. 관산동 주공아파트단지 앞에서 그는 마침내 차를 세운 채 온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자동차 핸들 위에 이마를 묻고서 상체를 한껏 웅크린 자세에서 그의 충격과 당혹을 읽을 수 있었다. 차를 세운지 10여 분째, 단 한 마디 말도 못 하고서 벌벌 떨고만 있는 그에게서 깊은 번민과 갈등을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위는 기다려줄 것이다. 그의 충격이 가라앉아, 자신의 이 ‘보시’를 그저 하나의 크리스마스 선물 이벤트쯤으로 여겨주기를.
크리스마스 연휴를 낀 금요일치고는 도로는 그리 막히지 않는 편이었다. 신촌에서 고양시까지 한 시간 남짓 만에 도착했을 때는 날은 이미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위가 먼저 들를 곳이 있다고 했을 때에도, 그는 그저 서울 중심지 어디쯤으로 상상했던 듯싶다. 점점 시내에서 멀어지는 쪽으로 방향을 지시하는데도 그의 들뜬 기분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었다.
진심에서 우러난 행복의 아우라를 풀풀 날리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과연 자신이 잘하는 짓일까 위는 잠깐 의심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이미 완전히 마음 정리를 했을지도 모르는데, 이제 와서 괜한 벌집을 쑤시는 것은 아닌가. 오늘만 해도, 그는 저 ‘전생’에 관련된 화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이렇게 해주는 것이 궁극엔 그를 더 확실하게 안정시키는 일이 되리라는 사실이었다.
외부의 강요로 이미 획득된 확신이나 신념을 바꾼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흔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것이 종교적인 성향까지 띠고 있다면 더 말해 무엇하랴. 차라리 확실하게 못을 박아서 어정쩡한 집착을 잘라내게끔 하는 편이 훨씬 더 정신 건강엔 유효하리라.
애초부터 자신처럼 어느 특별한 종교를 가진 사람이 아니니 집착을 끊을 계기를 마련해준다면 다시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수없이 많은 갖가지 점을 치고, 귀신 이야기를 즐기고, 또 예수 영화를 찾는 불신자(不信者)들이 모두 다 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저 어느 특별한 신비 체험으로 촉발된 감정상의 문제이니 신비를 신비로 두지 않고 일상으로 끌어내리면 된다. 마치 연초 토정비결을 보듯 가벼운 기분으로 ‘전생’이라는 문제에도 접근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게다가 이것은 자신의 ‘거래’와도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였다.
그를 사지로부터 안전하게 지키는 대가로 자신은 저 땡중에게 머리를 조아려주기로 서원했었다. 누군가 외부에 다른 절대자를 상정하지 않는 자신이기에, 자신의 서원에 대해서는 더욱 철저해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위는 거래를 했다. 그 ‘누군가’와.
물론 그 ‘누군가’는 위 자신이었다. 뭐, 백번 양보해서 자신 속에 내재한 신성(神性)이라면 신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하느님, 부처님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지만, 위는 자신에게는 아주 철저하게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과 위는 거래를 했다. 전적으로 그를 위해 용납할 수 없는 일을 용납해보자고.
돌팔이 땡중 앞에서 맹세만 하면 내생(來生)에 그의 연인이 된다니. 하. 정말로 코웃음을 칠 일이지만, 믿어주기로 맹세한다. 진심으로 믿어주고, 만약 정말로 내생이 존재한다면, 그 바로 다음 생에서는 그의 연인이 돼주자고.
뭐, 못 할 까닭은 또 뭔가. 위는 지금도 그를 아주 좋아한다. 만약 그가 여자의 성을 갖고 태어났다면 자신은 확실히 그에게 반했을지도 모르는 일. 다음 생에 이성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면, 까짓 연인이 못 되어줄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정말로 아끼는 그가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아파하고 있다. 지금도 그 문제만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짠해지는데 까짓 내생의 연인 노릇쯤이야!
그가 단말마의 고통으로 까맣게 밤을 지새운 그날, 위는 그렇게 결심했다. 절대 가벼운 기분도, 절대 장난도 아니다. 진심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진지하게 맹세를 줄 것이다.
“……어…… 어떻게 알았어……?”
울음기가 섞인 가느다란 목소리가 겨우 토해진다.
“……정 도사네 주소 어떻게 안 거야……?”
여전히 핸들에 이마를 박고 있지만 아까보다 어깨 떨림이 심하지 않은 걸로 봐서 충격은 가라앉은 듯싶었다.
“……미메시스에 찾아갔었습니다. 사장님께 직접 여쭤봤지요.”
“……해영이 형이 가르쳐줬다구?”
“예.”
“……의외네…… 해영이 형, 너 별로 맘에 들어 하지 않는데…….”
“저도 제 친구로 삼고 싶은 분이라고는 생각 안 합니다.”
“후후, 그렇겠지…….”
“……만약 생각이 바뀌신 거라면 이대로 돌아가도 상관없습니다.”
“…….”
“선생님을 위한 일이니까요. 선생님 마음만 편하시다면 전 어느 쪽도 좋습니다.”
“……동정…… 하는 거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 넌 시시한 동정 따윈 안 하는 녀석이지. 그리고 나 좋아해주잖아. 존중해주고 있잖아. 진심으로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내린 결정이겠지.”
“예, 그렇습니다.”
“……정말 해줄 수 있어?”
“예.”
“……영혼결혼식 같은 거야. 그야, 믿지 않는 네게는 웃기게 들리겠지만, 그래도 찝찝하지 않겠어?”
“그런 종류란 것도 압니다. 조금이라도 찝찝하게 생각했다면 올 생각도 안 했을 겁니다.”
“……정말…… 저…… 정말 나 사랑해줄 수 있다고……?”
“선생님께서 여성이었다면 이미 사랑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
“…….”
“……선생님……?”
“…….”
“……선생님…….”
“…….”
겨우 안정을 찾아가는 듯싶던 몸의 떨림이 심해지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보다 더 떨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두 손으로, 관절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핸들을 꼭 쥐고서, 그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상체는 더더욱 웅크러들어, 아예 핸들 속으로 틀어박힐 듯한 기세였다.
안쓰러운 나머지 가슴이 몹시 아렸다. 힐끗 그의 심장을 열어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에 대한 안타깝고 애절한 감정의 편린을.
그의 어깨로 손을 가져가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잔뜩 힘을 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냘픈 몸뚱이는 의외로 쉽게 딸려왔다. 가능한 한 깊게 안아주었다. 가슴팍에 얼굴을 푹 파묻히게 하고, 그의 허리가 활처럼 휘어들 정도로 힘껏 상반신을 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어깨가, 새가슴이,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으로 감싸인 자그마한 두개골이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 같은 착각이 들어 무서웠다. 달걀처럼 깨지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힘주어 안아도 와락 부서져버릴 것만 같은. 그런 섬약한 사람.
“……대신 단 한 가지만 약속해주세요, 선생님.”
“…….”
“……오늘 이후로는 이곳에 다시는 걸음하시지 않겠다고요.”
“…….”
“전생에 대해서도, 혹은 미래 생에 대해서도 절대 연연하지 않으시겠다고요. 그저 앞만, 현실만 바라보시겠다고요.”
“…….”
“……예? 약속해주실 수 있죠?”
“…….”
“……선생님?”
“……좋…… 아…….”
“…….”
“……좋아…… 너무 좋아…….”
“…….”
“……너무너무 행복해서 죽을 거 같아…….”
“…….”
재킷 안쪽에 걸친 두꺼운 스웨터가 서서히 젖어들고 있었다.
촉촉한 습기는, 잔뜩 억눌린 듯한 목소리에서도 전해졌다.
소리 없는 흐느낌을 내며 우는 귀여운 사람의 정수리에, 위는 살짝 깃털 같은 키스를 내려주었다.
“……으악?!!! 이, 이놈의 화상!!! 너, 또 왔냐, 장인환?!!!!!”
“으이, 씨! 그래요, 또 왔어요! 어차피 단속할 신도도 별로 없으면서 되게 튕기네!”
“이눔이?!!! 신도가 없긴 왜 없어!!! 초파일날 와봐!!! 안마당에 연등이 한가득이야!!!”
“헹, 자비로 단 건지, 진짜 시주 돈으로 단 건지 누가 알아! 그리고 이것도 다 정 도사 업장이라면서요?! 그러게 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냐구. 첨부터 나는 빼달라고 그랬잖아. 나 그런 거 무섭다구. 근데 기어코 꼬셔서 남 속을 있는 대로 다 뒤집어놓고서 뭘. 뒤집어놨으면 바로잡아주기도 해야지, 애프터서비스도 몰라요? 요샌 애프터 정신 없으면 붕어빵 하나도 못 파는 시대라구요. 하물며 부처님을 팔면서 이래도 되는 거예요?”
“애프터서비스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할!!! 신외에 무물이며 아생연후에 만사재기중이라!!!”
“상대가 못 알아먹을 말 같은 건 주워섬기지도 마요. 못 알아먹는다고 기가 죽지도 않는 나니까. 난 그림만 알면 돼.”
“이런 뻔뻔스러운 놈!!! 무식한 게 자랑이구나!!! 저승사자 불러다 지옥에 보내서 혓바닥을 잘라버릴 놈!!!”
“맙소사, 저게 어디 자비로운 선방 스님이 내뱉을 소리야?”
“선방 스님이 자비롭다고는 누가 그러더냐, 이놈아!!! 무식한 놈이 무식한 소리만 지껄이는구나!!! 얼굴은 또 왜 그렇게 반쪽이 됐어?!!! 그놈의 드런 식탐 때문이로구만!!! 이 중생 저 중생의 고기를 닥치는 대로 먹으니 탈이 안 나고 배겨?!!! 꼴좋다!!!”
정 도사라는 자는 첫인상도 그렇고 말본새도 그렇고, 위의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그런 인물이었다.
속가에서는 최고의 엘리트 코스로 고등 교육을 받았고, 불가에서는 남방, 북방, 육조 혜능을 두루 섭렵하고, 티벳 불교와 요가, 카발라, 아봐타, 정토회, 가톨릭, 감리교, 하다못해 단학선원과 국선도, 심령술과 UFO는 물론 현대 물리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종교 장사에 관해서라면 거의 빠트리지 않고 두루 섭렵했다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게이 땡중이었다.
외모만으론 적동색 개량 한복을 걸쳤다 뿐이지, 그나마 선원 하나를 이끌고 있는 조실스님의 면모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키는 170 정도의 단신이고, 몸집도 크지도 작지도 않은 평균 체형이었다. 나이는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으로 보였다. 헤어스타일도 이발소에서 단정하게 정리한,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중년 샐러리맨들과 한가지였다. 선방의 주지가 아니라 무슨 보험사 영업소 소장이나 하면 딱 좋을 그런 분위기요, 그런 풍모였다.
물론 땡중의 그 모든 조건들에 일체의 가치 판단도 할 생각이 없었던 위로서는 그저 담담한 시선으로 땡중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어차피 다시 볼 사내는 아니었다. 잠시 스쳐갈 인연에 섣부른 가치 판단을 한다는 것도 주제넘은 짓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내에 대해 주제넘다는 것이 아니라, 위 자신에게 주제넘다는 의미였다.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이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니, 그네를 판단하고 심판할 근거들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런 위의 무심한 자세는 상대에게도 전해졌는지, 그를 대할 때처럼 허물없고 친근한 접촉은 일체 없었다. 그저 아주 잠깐, 인상 좋은 보험사 영업맨의 얼굴로 보일 듯 말듯 애매한 미소를 보내왔을 뿐이었다.
달마선원이라는 현판이 붙은 30여 평 크기의 원룸식 선방은 무슨 변두리 동네 경로당 같은 풍모였고(실제 위치도 높이가 해발 400미터도 안 될 변두리 야산 용화산 자락 초입에 있었다), ‘영혼결혼식’이라고 그가 자못 거창하게 이름을 붙인 예의 그 맹세 의식도 생각할수록 우습기 짝이 없는 어정쩡한 것이었다.
사내가 기거한다는 요사채는 4층짜리 허름한 연립 주택의 1층에 있었고, 5분쯤 투닥거리며 거친 안부 인사를 챙긴 사내가 그를 향해 ‘그럼 절하고 갈 테냐?’ 하고 물었으며,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의식은 시작된 모양이었다. 사내가 곧바로 자신들을 안내한 곳이 예의 그 달마선원이었다. 연립 주택에서 산으로 5분쯤 올라가니 붉은 슬레이트로 지붕을 인 경로당 건물이 나왔다.
선원의 내부 풍경은 보통 절의 대웅전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출입문 맞은편에 석가모니불을 비롯해 총 세 개의 불상이 봉안돼 있었고, 그 앞에는 불전함이 놓여 있었다. 그 외에도, 위로선 정체를 알기 힘든 갖가지 불교적인 장식물들이 나름대로의 정밀함과 단아함을 드러내며 내부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다.
먼저 사내가 불상을 마주 보고 간단한 예불 의식을 하는 것 같았다. 그다음엔 그와 자신에게도 108배를 할 것을 주문했다. 한 번도 불상 앞에서 절을 해본 적이 없어, 그 위화감이란 꽤나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나름대로는 최대한 진지하게, 또 정성을 기울여 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자신들이 108배를 하는 동안 사내는 옆에서 계속 경을 읊었다.
108배가 끝난 후에 주어진 과제는 참선이었다. 그도 마찬가지겠지만, 도시 참선이란 게 정확히 어떤 것인지, 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는 자신으로서, 참선을 하라는 건 그저 멀뚱멀뚱 앉아 있으라는 의미와 한가지였다. 물론 시키는 대로 ‘멀뚱멀뚱 앉아 있어’주었다. 그렇게 멀뚱멀뚱 10분이 지나자, 경 읽기를 끝낸 사내가 불전함에 돈을 넣고 다시 삼배를 하라고 했다. 역시 그렇게 했다. 그는 꽤나 많은 양의 지폐를, 자신도 얄팍한 지갑이나마 탈탈 털어 2만 3천 원을 집어넣었다.
그랬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총소요 시간은 30∼40분 남짓. 어정쩡하고, 영문도 모르겠고, 몰라도 그리 불편할 것은 없고, 그러나 그와 자신을 향한 마음만은 진지했던, 꽤나 이상야릇한 맹세 의식이었다.
법당을 나오자마자 그는 사내와 또 한 차례 괄괄한 입씨름을 주고받았다. 다소 어안이 벙벙했던 자신과는 달리, 내내 울면서 의식에 참여했던 그와는 한참이나 거리가 있는 행동이었다.
연립 주택 앞에 도착하자 저녁 공양을 하고 가라는 사내의 권유가 있었다. 자신이 거절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잽싸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여기 다시는 오지 마. 안 올 거지?”
사내가 실실 웃으며 그에게 묘한 다짐을 주고 있었다. 묘하다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희망 사항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크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는 또 울고 있었다. 후득후득 듣는 굵은 눈물방울을 손등으로 쓱쓱 문지르며.
“……자네 형은 좋은 곳으로 갔어, 위 군. 아주 편히 갔다네. 그러니 그렇게 잔뜩 털을 세울 필요는 없다구.”
사내에게 표표히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선 지 몇 초 만이었을까? 문득 뒤따라온 나지막한 일갈에 등줄기로 섬뜩한 한기가 달려 나갔다. 휘둥그레져서 돌아보니, 사내는 예의 영업맨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을 지그시 굽어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사내의 시선을 틀어쥔 채 맹렬하게 노려보았다. 옆에 선 그가 눈치를 채고 당혹해 어쩔 줄 모를 만큼 독기 어린 시선이었으리라.
하긴, 그가 수시로 들락거린 모양이니 자신의 신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수작이 빤히 보였다. 무심한 척, 관심 없는 척, 담담하게 대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확실한 그물을 치는. 하. 순진한 그라면 모를까, 자신에겐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수법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따라온 줄 알아? 당신 마수에 걸려들고 싶어서? 천만에. 이건 오로지 이 사람을 위해서야.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라구. 이 사람 역시 내 팔 안에 들어온 내 가족이니까…….
사내가 알아들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눈칫밥으로 먹고 사는 점쟁이 종류일 테니 자신의 속내를 못 알아챌 리 없었다.
그걸로 만족하고 다시 몸을 돌렸다. 여봐란 듯이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른 것은 물론이었다.
……빼앗아 왔어…… 이제야말로 완전히 사내가 쏜 ‘전생 조울증’으로부터 이 사람을 빼앗아 온 거다…….
느긋한 만족감이 전신의 신경줄을 타고 찌릿찌릿 퍼져갔다. 그의 어깨를 감싸 안은 팔에 좀 더 힘을 주었다.
108배를 하느라 온통 땀투성이가 됐던 몸에 스며드는 한기는 유달리 더 춥게 느껴졌다.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추위를 타는 그가 걱정이 돼 내려다보니, 무척 따스해 보이는 두툼한 털코트를 걸친 그는 추운 기색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따뜻하게 입고 오라는 당부를 깍듯이 지켜준 것이다. ……귀여운 사람……. 사랑스럽다는 감정이 손끝까지 흘러넘쳤다. ……아아, 정말로 귀여운 사람…….
좀처럼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그의 걸음걸이는 몹시 불안정해서 확실하게 부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직 식중독의 영향권에 있어서라기보단 흥분과 감격 탓일 것이다. 그에겐 그야말로 결혼식과도 다름없을 중요한 의식을 치른 것이다.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으로 흥분하고 감격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아니, 실은 결혼식보다도 몇 배는 더한 무게감일지도 모른다. 현생을 비롯해, 거듭 계속될 수많은 미래 생의(흥, 그런 게 진짜 있다면 말이지만!)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의식이었다. 단지 한 생의, 그것도 길어야 고작 30∼40년의 시간을 함께할 뿐인 동반자를 구하는 이 생(生)의 결혼식과 비교가 되겠는가 말이다. 물론 자신이야 ‘불확실한 영겁’보다는 이 생의 30∼40년에 훨씬 더 큰 무게감을 부여하는 쪽이었지만. 그러나 오늘은 자신의 믿음이나 신념보다는 철저하게 그의 믿음과 신념을 따라주기로 한 날이었다. 그가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식을 치른 흥분과 감격에 떨고 있다면, 자신 역시 그에 합당할 역할을 끝까지 따라줄 필요가 있었다.
……결혼식이라…….
이제 고 2의 새파란 애송이가 결혼식에 대해 품고 있는 감정이란 빤하다. 극히 피상적인 TV 속 드라마와 한가지랄까. 아무리 상상력을 작동시켜봐야 드라마 엔딩 신들에서 보여주는 극히 유치하고 과장된 퍼포먼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얘기.
그야, 자신의 인생 플랜에서 결혼식도 결코 빠질 수 없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긴 하다. 적당한 나이에 순결하고 아름답고 착한 여자를 만나 자연스럽게 동반자 관계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먼 미래의 얘기. 의사가 되는 과정은 다른 일반 인생 플랜보다 훨씬 더 길고 지루한 시간과의 싸움을 필요로 한다. 웬만한 성취를 이루기까지 적어도 앞으로 10년은 더 달려가야만 한다는 것. 인생의 동반자를 얻는 일 또한 그 10년 후에나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였다.
그러나 그렇게 빈약한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계도 현재 자신의 정직한 모습이었다. 빈약하면 빈약한 대로, 설령 그것이 TV 드라마처럼 유치한 퍼포먼스를 흉내 내는 데 그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현재 자신이 그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가 될 터였다.
눈앞에서 끊임없이 색색의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변화무쌍하고, 화려하고, 또 판타스틱하기까지 한 폭죽이 터질 때마다 구경꾼들 무리에서는 연방 탄성과 환호가 쏟아져 나왔다. 시원하게 탁 트인 하늘과 강물을 배경으로 크고 화려한 본 게임이 펼쳐지면, 관중석이 있는 고수부지 쪽에선 개구쟁이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이 터트리는 약소한 규모의 부대 게임도 있었다.
한강변을 따라 길게 이어지고 있는 넓은 고수부지 잔디밭은 수많은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각종 간식거리며 폭죽, 그리고 풍선들을 파는 잡상인 무리들에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사들까지 가세해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는 북새통이었다. 날이 날이다 보니 당연한 장관인지도 모르겠지만, 위에게는 그야말로 별세계일 작태들이요, 또한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산단 말이지! 서울이 크다 크다 했지만 실로 이 정도 클 줄이야 하고 새삼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불꽃놀이란 달리 데이트 코스가 생각이 안 나 딴에는 열심히 궁리해본 끝에 나온 탁월한 결정이었다.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는, 또한 관심도 없는 자신으로선 그나마 열심히 신문을 뒤져본 끝에 발견한 꽤 괜찮은 아이디어였지만, 막상 와보니 자신의 아이디어가 얼마나 ‘대중적’인 것이었는지 뼈저리게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결혼식’의 분위기와(물론 TV 드라마 속 이미테이션에 불과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닮아 있는 것도 달리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폭죽은 물론 하객들도 그야말로 넘쳐났다. 어쩌면 자신은 진짜로 꽤나 탁월한 결정을 한 것인지도 몰랐다.
곁에 선 그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일산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동안, 그는 운전하는 내내 여전히 줄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궁상맞은 여자처럼 굴어 창피해 죽겠다고 중얼거리면서도, 혹시라도 자신이 염증이라도 낼까 열심히 눈치를 살피면서도, 눈물은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그의 기분을 십분 이해하기에 그저 잠자코 지켜봐주는 것으로 그를 배려했다. 달래면 더 흥분할 테고, 타박하면 그의 행복감에 찬물을 끼얹는 짓이 돼버릴 테니까.
기나긴 눈물의 홍수는 서울에 도착해 어느 깔끔한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 늦은 저녁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간간이 이어졌다. 식중독의 여파 때문인지, 아니면 역시 흥분한 때문인지, 그가 새 모이에 불과할 양의 죽을 몇 모금 마시고 있는 동안 자신은 불고기 정식으로 포식을 했다. 물론 짬짬이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눈물을 흘리는 그는 역시 못 본 척했다.
그렇게 절대로 눈물을 그칠 것 같지 않던 그도 형형색색의 장관 앞에서는 그만 입이 딱 벌어졌다. 우선 그 수많은 인파에 놀라고, 이어 불꽃놀이의 장관에 더 놀란 모양이었다. 아니, 실은 분위기에 더 흥분을 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두 시간 전의 ‘결혼식’을 그대로 연상시키는 그 현란한 축하 분위기에.
한동안 조용히 하늘만 주시하다가, 설핏 시선을 내리니 어느새 그의 눈물은 말끔히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입은 벙긋하니 벌어지고, 눈은 휘둥그렇게 뜬 채, 수많은 폭죽이 명멸하는 하늘을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겨우 눈물의 홍수가 멈춘 것이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옆으로 고개를 틀고 자신을 향해 시선을 보내왔다. 여전히 휘둥그렇게 눈을 뜬,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새까맣고 깊은 눈동자에선 수천 수백의 폭죽 파편들이 명멸하고 있었다. 처음엔 홀린 듯한 눈동자에, 그리고 그다음은 벙하니 벌어진 새초롬한 입술에 시선이 머물렀다. 자연스레 키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허락이 필요했기에 다시 그의 눈동자로 시선을 모았다. 홀린 듯한 눈동자엔 자신과 거의 다르지 않을 원망(願望)이 깃들어 있었다.
무시하기엔 지나치게 많은 수의 눈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설핏 뇌리를 스쳐갔다. 더구나 남자와 남자가 키스를 한다는, 평범한 하객들에겐 대단히 도발적인 짓거리가 되리라는 아슬아슬한 자의식도. 자신 역시 타인의 시선들에 완전히 무심할 수만은 없는 일개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주저와 망설임들을 제치고 흘러넘치는 마음이 있었다. 감정이 있었다.
……결혼한 거잖아…….
달콤한 유혹이 종소리처럼 마음을 흔들었다. 그의 마음인지 자신의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
……결혼했잖아, 우리…….
위는 망설이듯 그의 어깨 끝에 손을 얹었다. 부드럽게 어깨를 쓸어내리던 손길은 자동적으로 뒤로 넘어가 그의 등을 바싹 끌어안고 있었다.
약간 고개를 옆으로 틀어 천천히 입을 맞췄다.
차갑게 얼어붙은 뺨과 달리 그의 입술은 무척이나 따스했다. 파르륵, 전율을 흘리고 있는 입술에 살짝 혀끝을 대자, 그는 유혹하듯 떨리는 내부를 열어주었다. 미끌미끌하고 뜨겁고 착 안겨드는 그것에 깊숙이 혀를 감았다. 타는 듯한 감각이 아랫도리를 지나 등줄기를 거쳐 정수리 위까지 뻗쳤다. 등을 안은 팔에 저도 모르게 와락 힘을 주었다. 혀끝은 안으로, 안으로, 그의 내면 깊숙이 파고들었다.
순간, 수레바퀴처럼 파상적인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터지는 거대한 폭죽이 하늘을 갈랐다.
우와아아아아∼∼∼∼∼.
괴성에 가까운 커다란 탄성이 사방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감은 눈꺼풀 위로도 크고 거대한 불꽃의 덩어리가 현란하게 명멸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폭죽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영혼에서 터진 불꽃이었는지는, 위는 정확히 판단할 수가 없었다.
모두 다 알 수 있도록, 다만 그저 이렇게 오래도록 그를 껴안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의 깊은 곳에…… 오래도록 키스를 묻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