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2297년 8월. 이은우(李誾踽) (128/129)

17. 2297년 8월. 이은우(李誾踽)

“……바보가……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연인에게 하는 소리라기보다는 자신을 향한 한탄일 것이다.

연인의 가슴팍에 푹 파묻히듯 껴안긴 채 은우는 속삭이고 있었다. 지진으로 뿌리가 뽑힌 거대한 떡갈나무(아니, 떡갈나무 비슷한 모양새의) 가지 틈새엔 두 사람이 간신히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을 만큼의 좁은 구덩이가 패어 있었다. 따스하면서도 축축하고 부드러운 감촉의 진흙은, 사랑을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의 몸뚱이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쿠션이 돼주었다.

연인은 사람 몸통만 한 굵기의 커다란 나뭇가지에 등을 기댄 채, 은우의 몸을 사지로 친친 감고 있었다. 서로의 아랫도리만 벌거벗은 민망한 모습으로 깊이 연결돼 있는 두 사람의 몸뚱이는 음란하면서도 어딘가 비참하고, 또한 성스러워 보였다.

“……진짜 못 말리는 바보였구나…… 진짜로…….”

얇은 티셔츠 너머로 쿵쿵쿵 힘차게 울리고 있는 연인의 심장 소리가 아팠다. 강하고 역동적인 생명의 소리였다. 혼의 울림이었다. 울림은 날카로운 비수로 화해, 규칙적인 리듬으로 은우의 가슴을 할퀴며 지나갔다. 영혼은 쇄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건만, 육체는 그를 비웃고 있기라도 하듯 힘과 젊음과 아름다움으로 넘치고 있었다.

40킬로에 달할 군장을 모두 벗어 던지고 얇은 잿빛 군용 티셔츠 하나만을 마지못해 걸쳐 입은 연인의 모습은, 마치 야수처럼 음산하고 압도적인 생명력으로 넘치고 있었다. 그나마 저 바늘로 찌르는 듯하던 격렬한 광기가 가라앉아, 한 시간 전보다는 훨씬 더 인간다운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일시적으로 은우의 머리에 씌워졌던 ‘뇌활성 증폭기’는 다시 본래 주인에게로 되돌아가, 주인의 붉은 머리카락 틈으로 날카로운 빛을 내쏘고 있었다. 임계 지점인 여덟 시간을 훌쩍 넘기다 못해 이미 나흘째로 접어들었건만, 연인이 여전히 고집스레 착용을 고집하고 있는 저 위태로운 물건이었다.

한 시간 전, 여진으로 여전히 으르렁거리는 포효를 토해내며 요동치고 있는 대지 위에서 자신들은 미친 것처럼 사랑을 나누었었다. 온통 붉게 달아오른 흥분으로 자신의 안에 격렬하게 침입해 들어오면서도, 연인은 저것을 절대 머리에서 풀지 않았었다. 저것을 풀지 않는 한, 자신의 몸과 결합하는 연인은 영원히 ‘나의 위야’가 될 것이다. 가련한 저능아 에녹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몸도, 또 사랑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슬퍼해야 할지, 혹은 기뻐해야 할지 은우는 알 수 없었다. 오로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이제 자신은 저 가련한 저능아를 미친 듯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 자신의 몸을 나무뿌리처럼 얽어매고 있는 이 압도적이고 위험천만한 사내 역시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면서 둘인 이 사랑스러운 사내들을. 자신의 영원한 연인들을.

사모와 숭배와 열정과 연민과 슬픔의 감정들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듯 복받쳤다. 혼을 울리는 그 열기를 도저히 주체하지 못해, 은우는 연인의 가슴팍에 더더욱 세게 얼굴을 밀어붙였다. 사향 냄새가 진동하는 수컷의 몸뚱이를 양팔로 더더욱 힘차게 끌어안았다. 뺨에 닿아오는 생생한 근육의 감촉을 애절하면서도 황홀한 열락으로 음미했다. 그리운 연인의 체취 너머로 취할 듯이 다가들고 있는 것은, 축축하게 젖어 있는 알싸한 흙냄새와, 불지옥의 유황 냄새, 그리고 죽어가는 초목들이 뿜어내고 있는 강렬한 풀 비린내였다.

“……어떡하니, 바보야…… 이제 어떡해…….”

행성 DITER-11에 저녁이 들고 있었다.

연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은우는 산허리 아래 길게 펼쳐진 냇물의 하류를 멍하니 굽어보았다.

거대한 토네이도가 휩쓸고 지나가기라도 한 듯, 대지는 부서지고, 찢기고, 파헤쳐진 온갖 산천초목들의 시체 더미가 즐비했다.

냇물의 하류로 이어지는 남서쪽 하늘을 절반 이상 웅장하게 물들이고 있는 검붉은 노을은, 지구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자연의 경이로움이었다. 은회색과 청색과 자주색, 그리고 연인의 머리카락 색깔처럼 시뻘건 핏빛이 크고 다이내믹하면서도 섬세한 주제와 변주를 거듭하며 하늘에 다양한 무늬를 수놓고 있었다.

“……이제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아…….”

딱딱하게 근육이 잡혀 있는 연인의 가슴 산에 뺨을 부비며 은우는 한숨처럼 되풀이했다.

“……그 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니 어떡해…… 그 많은 무서운 카르마들을 어떻게 씻어…… 그 사람들한테 뭘로 보상을 할래……? 응……?”

―…….

“……이제 어떡할 거야…… 다음 생은 이제 어떡해…… 어떡하면 좋니…… 힘들어서 어떻게 살아…… 어떻게 살아, 우리…….”

―…….

“……왜 그랬어…… 왜 좀 더 참고 기다려주지 않았니…….”

―…….

“……좀 더 참고…… 내가 널 기억해낼 때까지…… 아니, 다시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왜 참지 못했던 거니…… 조금만 더 기다려줬으면 좋았잖아…… 그랬으면 이렇게 안 됐을 거잖아…….”

―…….

“……왜 삶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

기억에 있는 그대로 과묵한 연인은 여전히 대꾸가 없다. 그저 자신의 등줄기와 어깨와 허리와 엉덩이와 허벅지들을 끊임없이 오가며 타는 듯 굶주린 애무만을 거듭할 뿐이다.

“……저능아라고 핑계 대지 마…… 어쩔 수 없었다고……? 천만에…… 니가 원했었잖아…… 다른 존재들은 어떻게 돼도 좋다고…… 다 죽여 없애도 상관없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잖아…….”

―…….

“……그럼 날 다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어……? 내가 다시 널 사랑해줄 수 있을 줄 알았니……?”

―…….

“……바보야, 그렇게 모르겠어……? 다시 만나는 게 아냐…… 다시 사랑하게 되는 것도 아냐…… 그냥 처음부터 사랑인 거야…… 처음부터 그냥 함께인 거야…… 새로 시작되는 건 없어…… 도대체 왜 그걸 모르니…… 무언가 억지로…… 폭력적으로 지배하려 들지 않아도 난 네 것인데……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네 것일 텐데…… 왜 자꾸 잊어버리는 거야…… 왜 그렇게 조급해…… 조금 앞서가면 어때…… 앞서가면 기다리면 되는걸…… 기다릴걸…… 어련히 알아서 기다려주었을 텐데…….”

―…….

원망은 아니었다.

연인을 원망하다니, 그럴 기력 따위 이젠 없다.

그러기엔 자신은 연인에 대한 북받치는 애정과 연민과 슬픔의 감정들로 지나치게 지쳐 있었다. 너무나 많은 정념의 에너지를 써버려 넋이 만신창이였다.

그저 까맣게 앞을 알 수 없는 여로를 앞두고, 나아가야 할지 물러서야 할지 결정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결정은커녕 그저 끌려가기에만 급급할 것이다. 이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쌓여버린 부정(否定)의 카르마 앞에선 그 어떤 영혼도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진 않는다. 무조건 갚아야 할 절망적인 부채들만이 영겁의 시간으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물론 액면 그대로 자신의 부채는 아니리라. 그러나 바로 연인의 부채이기에, 어쩌면 자신의 그것보다 더 압도적인 무게와 번뇌로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것일 게다. 왜냐하면 연인과 자신은 이미 한 몸이었으므로. 기왕에 하나로 합쳐진 영혼이었으므로.

“……왜 그렇게 제멋대로 자포자기했니? 왜 좀 더 너 자신을 아끼지 않았던 거야…… 저능아로 태어났다고 해도…… 애초 프로그램이 짜인 그대로 그저 열심히 사랑을 베풀기로 했으면…… 운명에 순종했으면…… 모두 다 영혼의 성장을 위한 과제였을 뿐인데…….”

―……너무 앞서가니까, 너만.

“?!!!”

―잡아채지 않으면 나만 혼자 도태돼버릴 테니까.

“……!!!”

―……너는 기다려주지 않았잖나, 결국.

“……위야……!”

―……필사적으로 원해서 이 별로 너를 불러냈다. 안 그랬으면 넌 이번 생에서 날 모르는 채로 살다가 갔을 테니까.

“……그…… 그런…… 그까짓 한 번의 삶쯤이야……. 곧 또, 곧 다른 삶에서 또 만나게 될 텐데…….”

―네겐 ‘한 번의 삶쯤’일지 몰라도 내겐 너 없이 혼자 견뎌내야 하는 지독한 권태다. 도처에 고통뿐인 허무다. 나는 이런 악취미적인 헛발질을 언제까지 되풀이해야 하는지 납득할 수가 없다, 장인환.

“위위……!”

―……너무 힘들어…… 피곤해…… 끝내고 싶어…….

연인의 입술이 이마와 정수리 근처를 해매며 키스의 비를 내리고 있었다. 멀리 서쪽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연인의 붉게 충혈된 눈시울에 담긴 것은 온통 허무뿐이었다.

―……앞서가건, 느려지건, 혹은 도태되건, 그래봤자 모두 힘겹고 힘겨운 아비규환이다. 끝없는 수레바퀴다. 그저 ‘진화’해야만 한다는 맹목의 의지일 뿐이다. 무지한 맹목만 남는다.

“…….”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네가 곁에 존재하기에 견뎌낸다. 기꺼이 고통뿐인 수레바퀴 속으로 끼어들어간다. 왜냐하면 그곳엔 너도 존재하니까.

“……위위…….”

―……너를 다시 만나고…… 다시 사랑하게 되고…… 사랑으로 아프고…… 너로 인한 눈물…… 고통…… 기쁨…… 환희…… 우울…… 정복…… 승리…… 패배…… 행복…… 그 모든 체험들 때문에 나는 다시 시작하게 된다.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내가 삶에 부여한 목적 이외에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은 진리다. 진화를 위한 기나긴 윤회의 역사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에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 거대한 움직임에 목적은 없다. 나는 그것을 선택했다. 최종적인 무의미를 우주의 유일한 의미로 규정하기로.

“…….”

―그러나 너는 다르지. 무의미한 우주에 유일하게 의미를 부여한 게 너다. 나에겐 너만이 의미가 있다. 그러니 네가 없는 삶이란 내겐 무의미와 한가지다. 고도로 진화된 높은 레벨의 영혼이나, 수없이 많은 생명을 살상한 지옥의 아귀나 역시 구분은 무의미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구분은 ‘네가 함께하느냐’와 ‘함께하지 않느냐’, 그 단 두 가지일 뿐이다.

“…….”

―……우나……?

“…….”

―……울지 마라, 인환아……. 내 사랑…… 내 생명…… 내 모든 것……. ……너까지 절망시키자고 하는 소리는 아니다. 너는 지금 모습 그대로 아름답고 선량하게 진화를 계속해가면 된다.

“…….”

―너는 내가 모든 것에 염증이 나서 쉬고 있는 사이 혼자서만 세 번을 더 환생했다. 나 없이 세 번의 인생을 더 살면서 이러저러한 연놈들과 어울리더군. 덕분에 나보다 몇 배는 더 빠르게 앞서 나갔지. 앞서 나가는 것까진 좋은데, 이러다간 날 완전히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참을 수가 없었지. 할 수 없이 닥치는 대로 몸을 받아 환생했다. 예상대로 넌 너 혼자서만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도로 빼앗아 와야 했다. 내 수준으로 끌어내려야만 했다.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다…… 이번 생에서의 내 조건은 장애가 너무 많았다. 그 장애들로 너 있는 곳으로 내가 가는 건 전혀 불가능했다. 이미 몇 생쯤 더 앞서 진화한 너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당연하지. 역진화란 그리 쉽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니까. 그건 나 같은 삐딱한 놈이나 내지를 수 있는 불꽃이다.

“…….”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너만 필요한데…… 오로지 너만 있으면 되는데…… 아무리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너는 내게 와주지 않았다. 특수 방위군 주둔지의 야경이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운 풍경인지 너는 모를 거다, 장인환.

“…….”

―무엇이든 해야 했다. 너를 내 곁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온 우주의 부정적인 에너지들을 할 수 있는 한 다 이용했다. 기왕에 획득해두었던 ‘진화 포인트’까지 대신 팔았다. 사줄 놈은 많았지. 빛이 있으면 암흑도 존재하는 법. 말했다시피 난 역진화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귀로, 축생으로, 설령 무간지옥 바퀴벌레 무리로 떨어진다 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영혼의 성장이고 개나발이고, 내겐 죄다 우스꽝스러운 사기극일 뿐이지. 너를 내 곁에 묶어둘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

―……울지 마…… 정말 너를 울리고 싶진 않다…… 절망을 주고 싶지 않아…… 그저…… 아무래도 좋으니까 너와 함께만 존재하고 싶은 거다.

“…….”

―아까 ‘다시’ 만나는 게 아니라고 했지, 넌. ‘다시’ 사랑하게 되는 것도 아니라고. 그냥 처음부터 사랑인 거라고. ……처음부터 그냥 함께…… 새로 시작되는 것도 없이……. 그래, 그 말이 사실이다. 너는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내 것이라는 사실만 인지하고 있으면 된다.

“…….”

―……그 맹세 의식 기억하나? 정 도사라는 땡중이 해준.

“…….”

―넌 그때 대단한 실수를 한 거다. 하찮은 나 따위의 사랑을 구하기 위해 네 스스로 족쇄에 묶이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 거지. 그때의 결혼식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내가 용을 쓴다고 해도 앞서가는 너를 붙잡을 수는 없었을 거다. 윤회라는 메커니즘은 절대로 호락호락한 시스템이 아니다.

“……어…… 리석은 선택을 한 거 아니야…….”

―그래, 그래. 그렇지, 내 사랑…… 내 귀여운 인환이……!

“……나…… 는…… 나…….”

―……울지 마라, 제발…… 나는 독한 아귀 새끼지만 네게만은 면역이 없다……. 우는 너를 바라봐야 하는 것은 세상 어떤 독한 고통보다도 더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 그래서 바퀴벌레로 떨어지면…… 그러면 또 그 거리는 어떡할 건데…… 지금보다 더 멀리 차이를 벌려놓고서…… 앞으론 더 힘들어질 텐데…….”

―못 알아들었나? 내겐 그따위 차이는 의미가 없다. 더 힘들고 덜 힘들고의 차이도 없다. 어차피 다 아수라장이다. 아귀 같은 피로와 고통뿐이다. 내게 의미 있는 일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네가 있느냐, 혹은 없느냐일 뿐이다.

“……그…… 그래서 어떻게 좁힐 건데…… 다…… 다음번엔 날 어떻게 붙잡을 거냐구…….더 이상 팔아치울 진화 포인트나 있어……? 아니, 당장 이번 생은…… 이번 생은 또 어떻게 할 거야…… 지구에서 구조대가 오면 어떻게 하냐구…… 또 헤어지는 거잖아…… 그런 거잖아…… 이렇게 죄다 기억나게 해버리고…… 나쁜 놈…… 또 사랑하게 만들고…… 이렇게 못 견디게 만들어놓고…… 또 헤어지게 되면 죽어버릴 거야, 나…….”

―…….

“……왜 말 못 해?! ……이 증폭기는 언제까지 사용할 수 있어?! 언제 뇌가 터져버리는 거냐구……!

―…….

“……뇌가 터져버리면…… 혹은 저능아 에녹이 얼음 행성에 죽을 때까지 유배돼버리면…… 그러면 또 나 혼자 남겨지나……? 이제 네 대신 나 혼자서 외로워하고…… 그리워하고…… 그리고 또 고통받으면 되는 건가? 그럼 만족해? 네 속이 시원해……?”

―……지구로부터의 구조 가능성은 극히 희박해. 여하튼 함께 있고자 하는 의지만 붙들고 있으면 된다.

“바보! 장담할 수 있어?!”

―…….

“장담 못 하지?! 거봐, 앞으로 얼마나 힘들어질지 알겠지?!”

―…….

“……뭐가 거기서 거기라는 거야, 바보…… 영리한 척하는 바보 얼간이……!”

―……설령 구조선이 오더라도 숨으면 된다. 넬슨호만 버리면 된다구. 행성 DITER-11은 지구의 세 배 반인 크기다. 문명을 완전히 버리면 어떤 첨단 기술도 우리를 찾아내지는 못할 거다.

“……첨단 기술이 아니라 영력이 높은 사제들에게 수색을 의뢰할 수도 있잖아! 그 사람들은 아주 사소한 흔적만으로도 네가 32명의 일반 시민을 살해한 사실을 밝혀낼 수 있단 말야!”

―……너는 지나치게 비관적이로군. 비관적인 가능성만을 열거하고 있다. 그리고 지나치게 미래에 연연한다, 장인환. 우리가 현재 함께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

아아, 그건 그랬다. 미래를 아무리 걱정해봐야 부질없는 일이다.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미래의 시간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뇌활성 증폭기’ 탓에 순수 영혼일 때의 어마어마한 지혜와 통찰력을 기억해내고 있는 연인도 미래까진 완전히 점치지 못한다. 물론 연인의 말이 백번 옳다. 미래의 불확실한 가능성을 걱정하며 비참해하느니 지금 현재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인 기쁨을 만끽하는 편이 영혼의 성장에도 매우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맙소사. 영혼의 성장에 관심조차 없는 연인은 오히려 ‘영혼의 성장’에 근접한 사고방식을 하고 있고, 반대로 그것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자신은 오히려 역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 기가 막힌 아이러니라니.

“……그럼 ‘뇌활성 증폭기’의 작동만이라도 중지해줘, 위야. 그건 해줄 수 있지?”

자신의 젖은 얼굴을 구석구석 쓸어내리는 연인의 혀가 입가로 내려와 키스한다. 그 그립고 몸서리쳐지는 감각에 희열이 복받치면서도, 역시 앞날의 우울한 전망들이 앙금처럼 남아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도처에 위험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연인과의 결합을 시샘하는, 언제라도 달려들어 자신을 후려치고 연인을 빼앗아갈 가혹한 카르마의 수레바퀴가.

―……그건 곤란하다, 장인환. 나는 또다시 저 한심한 육체의 감옥에 갇히는 게 싫다. 무지 속에서 산다는 게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넌 몰라.

“……그…… 하지만…….”

―……저들이 여덟 시간의 한계를 정한 건 나처럼 긴 윤회의 과정을 통해 영혼이 축적한 모든 지식과 지혜를 기억해낼까 봐서였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 저들은 우리를 효과적으로 부릴 수 없을 테니까. 물론 삶을 살아갈 때, 영혼의 모든 지식을 기억해내는 것이 진화엔 별로 유익하지 못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노력의 여지를 앗아가니까. 그러나 이미 기억해내버린 이상, 원래의 바보였던 나로 돌아가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다. 과부하의 위험은 상존하지만 그것 역시 누구나가 질병의 가능성에 노출돼 있다는 것과 같은 맥락의 건강 염려증에 불과하다. 그리고 저능아 에녹으로서는 이 원시의 환경에서 너를 제대로 지켜낼 수가 없다. 넬슨호를 폭파시켜버리면 더더욱 이 별에서의 생존 지수는 낮아진다. 내가 깨어 있어야만 해.

“하지만 진짜로 뇌가 터질지도 모른다잖아!!!!!”

안타까운 나머지 저절로 언성이 높아진다. 텔레파시로 말을 하니,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냉랭한 말을 주워섬기면서도 온몸에 떨어지는 연인의 달콤한 키스는 멈추지 않는다. 입안 깊숙이 혀를 묻어오며 깊은 키스를 시작한 연인에, 상반신을 뒤틀며 입술을 떼어냈다.

키스로 자신의 애원을 막을 심산이겠지만 자신 또한 필사적이었다. 자신은 연인만큼 강하지 않다. 생사여탈에 대해 초연할 수도 없다. 연인의 목숨은 곧 자신의 목숨이라는 걸 연인은 왜 알아주지 않는 걸까!

은우는 입술을 깨물며 필사적으로 말을 골랐다.

“……드…… 들어봐, 위야. 우선 생존 지수 말인데, 기억하지 못했을 때라면 모르지만 이제 기억하니까 내가 에녹을 도와줄 수 있단 말야. 에녹도 물리적인 생존 지수는 엄청나게 높으니까 대신 머리를 써야 하는 일만 내가 협력하면 되지. 둘이 힘을 합하면 그리 위험하지만은 않을 거라구.”

―…….

“……나, 무서워…… 이제 진짜 무서워졌어, 위야. 이제 너 없으면 나 견디지 못해. 구조선에 발견돼서 너를 얼음 행성에 빼앗기는 것도 무섭지만, 그보다 네가 내 앞에서 뇌가 터져 죽는 게 그 몇 십 배는 더 무서워…….”

―…….

“……어차피 네가 죽으면 또 나 혼자서 살아가야 해. 지난 300년 가까이 그랬던 것처럼. 근데 난 이제 그럴 자신 없어, 위야…… 너 없이 나 혼자 살아갈 자신…… 그거 진짜 없어, 위야. 진짜…….”

―…….

“……차라리 많이 미흡하더라도 에녹이랑 함께 있는 게 더 유리하지 않겠어? 너도 좀 답답하겠지만 영리한 채로 나와 헤어지느니 좀 모자란 대로 나와 함께인 편이 더 좋지 않아?”

―……함께한 시간의 길이는 그리 중요한 의미가 되지 못한다. 얼마나 충만하게 1분 1초를 함께했는가가 더 중요하지. 양이 아니라 질의 문제라는 얘기다. 나는 에녹으로서 백 년 동안 네 곁에 머무느니, 문위로 10년을 함께하는 편을 택하겠다.

“…….”

―……겁내지 마라. 그리고 역시 그건 가능성에 불과하다. 인간이 암에 걸릴 확률이 50퍼센트라고 해서, 실제로 50퍼센트의 인간이 다 암에 걸리는 것이 아니다, 장인환.

“…….”

묵직하게 속을 채우고 있는 은우의 진심은 연인의 완강한 고집에 떠밀려 하찮은 ‘건강 염려증’ 따위로 전락하고 있었다. 그게 서러워 몸을 뒤틀면 연인은 부드럽고 섬세한 애무의 스침으로 은우의 애정을 북받치게 했다. 절망적일 미래에 대한 전망에 괴로워하다가도, 연인의 다정다감한 포옹 한 번에 단숨에 천상의 잔디밭 속을 나뒹굴었다. 연인의 비참한 조건에 애통함을 흘리면, 연인은 단호하고 정열적인 키스 하나로 몸서리가 쳐질 만큼의 천박하고 강렬한 육욕을 이끌어냈다.

물론 그것은 은우의 몸(이라기보다는 영혼)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에 가능한 지배력일지도 몰랐다. 긴 긴 윤회를 거치며 서로와 마주 서고, 껴안고, 사랑하고, 증오하고…… 또 그로 해서 진화와 역진화를 거듭할 수 있었던 소울메이트. 바로 그 소울메이트 관계만이 발휘할 수 있는 상대에 대한 압도적인 지배력일 터였다.

―……겁내지 말라니까……. 너는 지나치게 비관적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삶의 본질이나 이 망할 우주의 식용 가축 시스템을 관조하는 시각은 그토록 긍정적이면서 어째 소소한 부분에선 그렇게 새가슴이냐.

“……나…… 나쁜 놈…….”

그러나 이 압도적인 단호함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데자뷔이기도 하다.

“……지…… 진짜 나쁜 놈이야, 넌…… 언제나 자기밖에 생각 안 해…… 이…… 이렇게 걱정돼서 죽겠다는데…… 심장이 찢어진다는데…… 아랑곳 않고 저 좋을 대로만 움직여…… 넌 항상 그래…… 그랬어…….”

아무리 전속력으로 돌진해도 번번이 연인의 완강한 벽에 부닥쳐 나가떨어지고 마는 아득함. 이 철통같은 의지. 서릿발 같은 확고함.

―……그렇지. 나는 너보다 훨씬 뒤처져 있다. 뒤처져 있다는 건 그만큼 에고가 강하다는 의미인가. 너는 그런 모자란 나를 늘 넘치는 관용으로만 대했다. 내 심성이 추하고 모나며 진화가 더딘 까닭은 너의 그 지나친 관용에 기인하는 측면도 크다. 너도 알다시피 그런 이유로 소울메이트는 진화의 측면으로는 아주 나쁜 관계다. 그러나 나는 그렇다고 해서 너와의 소울메이트 관계를 끊을 생각은 없다. 알겠지? 나는 네게 영원을 걸었다. 그러니 너도 이렇게 모자란 나를 거듭 사랑해줘야만 한다.

……이길 수 없다…….

“……뻔뻔해…… 진짜 뻔뻔해…… 아아, 진짜 나쁜 놈…… 너보다는 에녹이 훨씬 더, 몇 십 배는 더 사랑스러웠어…….”

……아아, 그렇지.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자신은 연인과 싸워 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랬나?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연약함은 때로 좋은 무기가 되기도 하는 법이니까. 흠, 이거 재미있군. 나 자신에게 질투를 하게 되는 일이 생길 줄이야……. 그러나 조심해라. 아무리 내 자신이라도 질투는 질투, 네게 에녹을 돌려주지 않기 위해서 이 증폭 서클릿을 평생 벗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 질투심과 독점욕이 어느 정도인지는 기억하고 있겠지?

“……웃지 마…… 진짜로 웃지 마, 나쁜 놈…… 남은 이렇게 아프기만 한데…… 사랑하는데…… 이렇게…… 차라리 기억하지 말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야…….”

―……쉬…… 울지 마라…….

……이길 수 없어…… 절대로 이길 수 없어, 이번에도…….

“……아아, 진짜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울지 마라…… 말했지? 나는 네게 있어서만큼은 면역이 없다…… 철면피라도 아픔은 느낀다…… 놀린 거 아니다. 네 고통을 하찮게 여기는 것도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 머리는 터지지 않는다. 그건 단지 가능성일 뿐으로…….

……이 남자는 또 자신을 아프게 할 거다…… 자신의 가슴을 난도질 해놓고 말 거다, 이번에도…….

“……거짓말하지 마…… 나쁜 놈…… 이기적인 놈…….”

―……울지 마라, 제발…… 드디어 만나게 됐는데…… 300년이나 떨어져 있었는데…….

……늘, 늘……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번에는 바로 코앞에서 머리가 터져버리는 것으로 자신의 가슴마저 갈가리 찢어놓을 거다…….

―……기다렸었다, 인환아…… 널 정말로 간절히 기다렸었다…… 정말로 간절히…… 그러니 울지 마라…… 문위로서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널 다시 한 번 사랑할 수 있게 해다오.

“……그럼 날 죽여, 지금…….”

―……?

……그래, 그렇겐 못 해…….

“……증폭기 떼지 못할 거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날 죽여, 나쁜 놈.”

―……?!!!!!

……절대 못 해……!!! 또다시 날 만신창이로 절망하게 놔두지 않을 거야!!!!!

“……나도 말했지? 너 없이 나 혼자 살아갈 자신 없다구. 내 눈앞에서 네가 머리 깨지는 꼴도 못 본다구. 그러니까 나부터 죽여.”

―…….

“진심이야. 네가 못 죽이겠다면 내가 해. 날 네 위치로 끌어내리겠다고 했지? 나도 환영이야. 방법도 아주 간단하지. 자살은 살인의 수십 배는 더 나쁜 역진화 요건이니까.”

―…….

……그래, 못 해!!! 절대 못 한다, 위야!!! 어떻게든 싸워볼 거야!!! 널 이기고 말 거야, 이번에야말로!!!!!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천만에. 네 그 망할 증폭기로도 날 완벽하게 커버할 순 없을걸? 게다가 여긴 생존 지수도 무척 낮지. 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내 신체 조건이라면 아주 쉽게 꺼져버릴 수 있을 거야.”

―…….

“……널 사랑해. 너무너무 사랑해, 위야. 내 위위…… 내 영웅…… 내 온 생명…… 그래서 너랑 싸울 테야, 이번에야말로. 너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일은 이젠 두 번 다시 겪지 않을 거야.”

―…….

“……그러니까 어서 죽여. 아니, 그럼 네 위치로 떨어지지 못하나? 역시 내가 혼자 처리해야 더 유리한가? 아무래도 그럴…… 훕……! 음…….”

독하고 모질게 쏘아지던 언어는 연인의 격렬한 키스로 가로막혔다. 허리가 뒤로 활처럼 휘었다. 연인이 허리를 움켜쥔 채 뒤로 밀어붙인 때문이었다. 연인과 연결돼 있던 하반신으로 저릿한 아픔이 달려 나갔다.

텅 하며 바닥에 등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뒤통수가 흙더미 속에 틀어박혔다. 저도 모르게 눈꺼풀에 질끈 힘이 들어갔다. 어질어질한 머리 위로 흙부스러기와 바스러진 나뭇잎들이 부슬부슬 쏟아져 내렸다.

입술이 통째로 씹히는 것만 같았다.

뒤로 넘어지느라 잠시 느슨해지는 듯하던 하반신의 연결이 연인의 갑작스러운 진입으로 단숨에 극점까지 조여들었다. 양쪽 허벅지를 움켜쥔 연인의 손아귀가 활짝 몸을 열었다. 잠시 뒤로 물러났다간 도로 힘껏 튕겨졌다.

“흐읍!!!!!”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뒤로 한껏 경추가 꺾이며 신음 섞인 교성이 터졌다. 물론 소리가 돼 나오진 못했다. 연인의 입술에 의해 완벽하게 봉쇄된 숨결은 그저 잔뜩 폐를 부풀리게 했을 뿐이었다.

“……으…… 흐읍!!!!!”

활짝 벌린 치골을 치며 다시 한 번 깊은 인서트. 머릿속으로 또다시 휑한 충격이 스쳤다.

쏟아져 내리는 흙더미 탓에 좀처럼 눈을 뜰 수 없었다. 정신없이 팔을 뻗어 연인의 기척을 찾았다. 연인의 단단하고 우람한 어깨를, 기둥처럼 굳건한 목덜미를, 바짝 솟아난 젖꼭지가 자리한, 딱딱하면서도 음란한 가슴 근육을. 팔을, 등줄기를, 얼굴을…….

탁, 탁, 탁, 탁, 타타탁…… 탁, 탁, 탁, 타탁…… 탁, 타탁…….

거칠고 파상적인 단속음이 거슬렸다. 뒤집혀 뽑힌 나무뿌리에 자신의 정수리가 부딪쳐지고 있는 소리였다. 아픔이 느껴져서 연인의 등 쪽으로 팔을 쭉 뻗어 상체를 들어 올릴 수 있도록 힘을 주었다. 아, 살았다. 30도쯤의 각도로 상체를 들어 올리니 눈을 찌르는 흙부스러기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겨우 눈을 뜨고 그리운 내 영웅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무자비하고, 무모하고 짐승스러운 수컷으로 자신을 겁탈하고 있는 가련한 남자를.

시뻘겋게 충혈된 야수의 눈이 잡아먹을 것처럼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간절한 염원을 담아 마주 보내주었다.

흥건한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은 벙하니 벌어져 있었다.

……그의 목에 팔을 감은 채 자신의 것으로 열심히 연인을 쪼았다. 거칠게 갈라져 있는 표면을 핥고, 섹시한 입꼬리 아래, 짧게 죽 그어진 흉터에도 키스했다.

안에 자리한 달콤한 뱀의 혓바닥이 헐떡거리며 격한 호흡을 토해내고 있었다.

……흘러 떨어지는 타액을 주린 듯 받아마셨다.

땀으로 가닥가닥 뭉친 새빨간 머리가 불꽃처럼 너울거리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긁어보고, 잡아당겨보고, 종내는 와락 움켜쥐어 끌어당겼다. 한 올도 남김없이 다 뽑아서 자신의 심장 속에 가둘 수 있다면!

……아아, 탐이 난다. 이 늠름하고 아름다운 수컷의 몸이 탐이 난다. 광란한 야수의 태워버릴 듯 뜨거운 정열을 원한다. 욕망을 품는다. 미쳐버릴 정도로…….

……자신이 독신 성향이었나? 타인의 육체에 거부 반응을 일으켰었나? 아아, 모르겠다. 이제는 알 수 없다. 그저 이 전신을 태울 것만 같은 극한의 욕망이 진실이라는 것만 안다…….

자신의 한쪽 허벅지를 억세게 움켜쥐고 있던 연인의 손가락이 문득 숱 많은 붉은 머리카락 틈으로 옮겨간다.

은색 서클릿이 반짝 하고 빛을 발하는 것이 보인다.

음산한 비정의 기계다.

기계는 단숨에 연인의 이마에서 벗겨지고 있었다.

찰랑찰랑.

새빨간 불꽃의 머리카락이 자신의 심장 언저리를 가볍게 후려친다.

저 앞, 검붉은 땅거미가 밀려들고 있는 허공 어디쯤인가로 서클릿이 날아간다.

반짝.

마지막으로 강렬하게 그 자취를 각인시키더니 시커먼 흙더미 위에 팽개쳐졌다.

―……울지 마…….

시뻘겋게 충혈된 야수의 눈이 뜨겁게 호소한다.

―……울지 마라…….

벙긋하니 벌어진 축축한 입술이 명령한다.

―……뭐든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까…….

기둥처럼 우람한 사내다운 목덜미가, 시퍼런 기계의 눈동자가, 단단하고 우람한 어깨 근육이, 불끈거리는 가슴이, 자신을 감싸 안는 강인한 두 팔이, 끈적하게 감겨드는 손바닥이…… 진심의 맹세를 준다.

―……울지 마…… 너를 울리고 싶진 않다…… 절망을 주고 싶지 않아…… 그토록 오래…… 간절히 너만을 기다렸는데…….

져주겠다고 얘기한다. 이번에야말로 진심으로 자신에게 져주겠다고…….

―……울지 마라, 제발…… 우는 너를 바라봐야 하는 것은 세상 어떤 독한 고통보다도 괴롭다…….

깊이깊이 파고든 연인에, 온몸을 잔뜩 수축시키며 맞았다.

―……나를 이기고 싶으면 이겨라. 나도 네가 원하는 걸 원할 거다. 네가 원하는 것만 하겠다, 이번에야말로…….

애정이 가득 묻어나는 커다란 손끝이 셔츠 틈을 헤치고 들어와 어루만진다. 착 감겨드는 손바닥에 젖꼭지가 바짝 곤두선다.

―……단 한 번도 너만을 위해 살아낸 생(生)이 없다…….

등으로 넘어간 연인의 우람한 팔이 자신을 연인의 품 안으로 끌어당긴다. 아아, 기뻐서 견딜 수가 없다. 이렇게 안기고 싶었다. 이렇게 온전히 자신만으로 그를 채우고 싶었다.

―……알렉으로는 사욕만을 위해서 살았다…… 준오로는 나라를 위해서라는 대의명분 때문에 널 이용했다…… 그리고 문위는 가족이 더 우선이었다…… 나는 그것이 가장 견딜 수 없었다…… 사무치는 회한이었다…… 단 한 번도 너만을 위해서 온전히 나 자신을 던지지 못했다는 사실이…….

사지를 힘껏 뻗어 연인을 마주 품어 안았다. 연인이 다시 힘껏 안으로 들어왔다. 바짝 응축한 채 물고 놓지 않았다.

―……그러나 이젠 너만을 위해 살 거다…… 네가 원하는 대로…… 네가 원하는 방식 그대로…… 네가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도록…… 네가 날 완전히 이길 수 있도록…….

순간, 슈웅 하는 빗살을 남기며 거대한 폭죽이 하늘을 갈랐다. 수레바퀴처럼 파상적인 소용돌이가 사방에서 명멸했다.

―……울지 마라…….

힘껏 마주 죄어오는 연인의 사지가 흐릿하게 넋을 건드렸다.

―……울지 마라, 장인환…… 제발…….

……결혼한 거잖아…….

연인이 망설이듯 자신의 어깨 끝에 손을 얹었다. 부드럽게 어깨를 쓸어내리던 손길은 자동적으로 뒤로 넘어가 자신의 등을 바싹 끌어안고 있었다.

―……울지 마…… 인환아…… 인환아…… 나의 인환아…….

……결혼했잖아, 우리…….

약간 고개를 옆으로 튼 연인이 천천히 입을 맞춰왔다. 파르르 전율을 흘리고 있는 입술에 연인의 혀끝이 살짝 다가들자, 자신은 유혹하듯 떨리는 내부를 열어주었다. 혀끝은 안으로, 안으로, 자신의 내면 깊숙이 파고들었다.

우와아아아아∼∼∼∼∼.

괴성에 가까운 커다란 탄성이 사방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 결혼한 거지, 위야……?

영원과 순간이 저 멀리서 함께 폭발하고 있었다.

까무룩 떨어지는 오르가슴과 함께, 은우는 싱긋 웃고 있었다.

―……울지 마…….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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