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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2297년 12월. 에녹(Enoch Salisbury Eden) (129/129)

18. 2297년 12월. 에녹(Enoch Salisbury Eden)

“얼굴이 이상합니다. 새하얀 칸다라꽃처럼 많이 하얗습니다. 저는 걱정이 됩니다. 넬슨호로 가서 사라에게 물어보면 병명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병명을 확실히 알 수 있으면 치료도 빨리 마칠 수 있습니다. 저는 넬슨호로 가보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흔적이 남게 돼, 에녹. 나는 사라의 데이터를 삭제할 수 있는 기술까지는 가지고 있지 않아. 아직은 버틸 만하니까 좀 더 두고 보도록 하자.”

“하지만 지금 당신의 체온은 너무 높아요. 39도 4부입니다. 전해질 수치도 불량합니다. 높은 체온은 3일째 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결정에 많이 부정적입니다.”

“……1년만 참으면 될 일을 전부 수포로 돌리고 싶지 않아. 말했잖니. 앞으로 1년 안에 구조선이 오지 않으면 넬슨호는 최종 실종 처리된다고. 그러면 우린 자유야. 넬슨호를 부수지 않고도 이 별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다구. 허나 만약 그전에 구조선이 오게 되면 사라의 기억 장치에 저장된 데이터에 의해서 우리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돼. 너나 나나 붙잡혀서 지구로 송환될 거라구. 너도 얼음 행성에 유배되고 싶지는 않지?”

“……그러나 당신은 현재 많이 아파요. 얼음 행성에 유배되는 것은 싫지만 당신이 아픈 것은 더 싫어요.”

“……죽을 정도는 아니야. 죽을 정도만 아니면 된다, 에녹. 1년이야. 앞으로 1년만 더 참자꾸나. 그럼 그다음부턴 안심하고 넬슨호에서 살아도 돼.”

“……그렇지만…….”

“……1년 후에 돌아가게 되면 그땐 네게 피아노도 쳐줄게. 너 음악 무척 좋아하지?”

“?!!!!!”

“……바하도, 모차르트도, 베토벤도, 다 쳐줄게. 네가 질리도록 쳐줄게…….”

“……!!!!!!!!!!!!!!!!!!!!”

“하하하, 그렇게 좋아? 입 좀 다물어라. 진짜 바보 같구나, 에녹.”

“……!!!!!”

“……이리 가까이 와…… 키스 좀 하자…….”

“…….”

그가 검은 음악 기계를 연주하는 모습과, 그가 아픈 모습과, 자신이 얼음 행성으로 유배를 가는 모습들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엉켜들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켜들었는데, 거기다 그가 키스를 해준다고 말해서 에녹은 그야말로 넋이 나가고 말았다.

처음에 그의 얼굴을 살피고, 그의 원인 모를 질병이 걱정되어 넬슨호로 돌아가자고 부탁하는 것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냥 그의 입술만 생각이 난다. 키스를 하는 생각만 난다.

그가 지난 3일 동안 체온이 올라가고 근육이 몹시 아픈 병이 나는 바람에 자신은 그와 3일 동안 사랑을 나누지 못했다. 키스를 하면 사랑도 나누고 싶어지기 때문에, 그를 귀찮게 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은 키스도 참았다. 그런데 지금 그가 키스를 해주겠다고 한다. 너무너무 기뻐서 가슴이 막 두근거린다. 머릿속이 온통 그와 키스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버리고 말았다.

“……이리 오라니까. 키스 좀 하잔 말이다, 멍청아…….”

그가 팔꿈치로 상체를 지지한 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두근두근 쿵쾅거리는 심장을 막 누르며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아픈 나를 안는 건 싫어……?”

도리도리.

“……그럼 왜 이렇게 몸을 빼는 거야?”

도리도리.

“……안 빼는 거라고?”

끄덕.

“……내가 걱정이 돼서 그래?”

끄덕끄덕.

“……바보…… 역시 멍청이야, 넌…… 욕구 불만이 건강엔 더 나쁜 법이라구…….”

끄덕끄덕. 갸우뚱.

“……이리 와…… 어서…….”

팔꿈치까지 흘러내린 그의 파자마를 목 언저리까지 단정하게 치켜 올려주고 있는데 그가 자신의 목에 팔을 감아왔다. 뜨거운 체온. 잠깐 또 그의 질병에 대한 걱정이 스쳤다가 사라진다. 너무너무 좋아하는 그의 땀 냄새가 코끝에 확 풍겨드는 걸 자각하는 순간,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닿아왔다. 아아, 숨이 멎는 것만 같다. 심장이 너무 심하게 뛰고 있어서 이러다가 밖으로 툭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막 걱정이 된다.

“……요즘은 내 쪽이 더 빠져드는 거 같애…….”

그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앞니로 자근자근 깨물며 말을 한다. 아아, 그 간지러운 자극에 아랫배로 피가 잔뜩 몰리면서 생식기가 또 근질근질해진다.

“……너, 테크닉이 아주 좋아졌거든…… 그거 알아……?”

“…….”

“……내가 음란하다고 생각해?”

도리도리.

음란하다는 건 나쁜 뜻으로 그가 많이 쓰는 말이기 때문에, 무조건 아니라고 하는 게 낫다.

“……아냐, 나 음란해…… 음란해졌어, 아주…….”

이번엔 그의 뜨거운 혀끝이 입술 근처를 날름거린다. 아아, 섹스를 하게 되면 안 되는데……. 그는 많이 아픈데…….

“……누구 씨 때문이라고 생각해?”

도리도리.

땀에 젖은 축축한 몸도, 발갛게 열꽃이 핀 얼굴도, 숨을 쉬기 힘들 만큼 너무너무 예쁘다. 만지기도 겁이 날 만큼 예쁘다. 그는 늘 힘주어 만지면 달걀처럼 막 깨질 것 같아서 자신은 겁이 난다.

두근두근 떨리는 손을 그의 허리에 감고 조심조심 그의 안에 혀를 집어넣었다. 갑자기 그의 팔에 와락 힘이 주어지더니 자신을 그의 몸 위로 쓰러트리고 말았다. 착 감겨드는 축축하고 뜨거운 몸뚱이에도, 입안을 휘졌고 있는 그의 뱀처럼 구불텅거리는 혓바닥에도, 모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아랫도리에 비벼지는 그의 생식기도 벌써 자신의 것만큼 딱딱하게 발기해 있었다. 그가 마구 허리를 흔들어서 자꾸만 거기가 막, 막 자극이 되었다. 아아, 정신이 점점 혼미해진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사냥을 지금 꼭 가야 해?”

도리도리. 일찍 사냥을 갔다 오면 저녁에 좀 더 그와 놀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은 규칙적으로 아침에 사냥을 갔다 온다. 하지만 지금 현재 꼭 반드시 가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흡!!!”

허리춤을 더듬고 들어온 그의 손이 갑자기 자신의 생식기를 꽉 움켜쥐었다. 그만 눈앞이 하얘지며 정신이 나가버렸다.

양손으로 와락 그의 파자마를 찢어발기고 있는 자신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는 섹스를 하면 안 되는 상태라고 망설이는 자신도 잠깐 스쳐갔다. 하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마음이 그 무엇보다도 강렬하게 자신의 생각을 틀어쥐고 있었다.

그의 아랫도리로 손을 뻗어 잔뜩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움켜쥐었다. 그가 손으로 자신을 조여대는 것도 알아차렸다. 아아, 이젠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다. 마구 그를 비벼대면서 혀끝을 그의 안쪽에 깊이 박아 넣었다. 그의 가냘픈 다리가 자신의 허리를 친친 휘감는 것을 마지막으로 생각이 하얗게 사라졌다.

사냥에서 돌아와보니 캠프에 그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실은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할 그가 안 보인다. ……어디를 간 거지……?

동굴을 나와 그가 자주 가는 캠프 주변의 산책로들을 차례로 찾아보았다. 알록달록 예쁜 꽃들이 많이 피어난 꽃동산 숲길도 가보고, 키가 100미터도 넘는 커다란 고사리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동쪽 숲도 가보았다. 북쪽의 해발 5000미터가 넘는 높은 산으로 향하는 길목까지 뒤져봤지만 그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차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하면서 발걸음도 몹시 빨라졌다.

이제 찾아볼 만한 곳은 단 한 군데밖에 안 남았다. 그가 자주 헤엄을 치는 냇물이 있는 남동쪽 계곡이다. 그는 체온이 높은 질병에 걸렸기 때문에 헤엄을 치면 안 된다. 그도 질병이 다 나을 때까지 헤엄을 치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자신은 남동쪽 계곡을 제일 나중에 가보게 된 것이다.

아아, 만약 남동쪽 계곡을 제일 먼저 가보았더라면 그는 조금 덜 아프게 되었을까? 의식도 잃지 않고, 머리에서 피가 막 흐르지도 않게 되었을까?

아아, 모르겠다. 모르겠다. 그냥 정신이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눈앞에서 빙글빙글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자신은 지금 그를 찾고 있는 것일까? 불안에 떨며, 극심하게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의 예쁜 얼굴을 찾아보기 위해 이리저리 밀림 속을 떠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실은 이미 그를 찾았고, 시체처럼 하얘진 그를 들쳐 업고 어딘가로 미친 듯이 뛰고 있는 것일까? 알아들을 수 없는 횡설수설을 흘리며 점점 더 의식을 잃어가는 그를 들쳐 업고서 말이다. 관자놀이께, 찢어진 상처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는 새빨간 피에 그만 패닉을 일으킨 채로 말이다.

“……안…… 아…… 그…… 안…….”

그는 남동쪽 계곡 아래, 후미진 바윗돌 틈바구니에서 발견된 것 같았다.

“……아…… 에…… 녹…….”

그는 아주 조금 몸을 씻고 싶었노라고 횡설수설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사냥을 나가기 전인 세 시간 전쯤에 그와 자신은 섹스를 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며칠 동안 씻지를 못해서 그는 꽤 짜증이 나 있었다. 캠프가 설치돼 있는 산등성이 안쪽 동굴은 평지보다 조금 기온이 서늘하지만 그래도 역시 대낮엔 섭씨 30도가 넘는다. 그는 아주 많이 더위에 약하다. 땀도 아주 많이 흘린다. 그래서 매일매일 냇물에 나가 몇 시간이고 헤엄을 치는 일이 많다. 몸도 부지런히 씻는다. 그런 그가 며칠 동안이나 몸을 씻지 못했다. 아주 많이 참다가 결국 씻으러 계곡으로 내려온 것이다. 자신과 아까 섹스를 해버려서 더더욱 참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아…… 그…… 증폭…… 기…… 쓰지…… 마…….”

체온이 무척 많이 높아서, 냇가로 걸어 나갔다가 그만 현기증을 일으켰다고 했다. 이끼가 낀 바윗돌들은 그를 미끄러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관자놀이 부근의 두피가 찢어졌고, 거기서 무척 많은 피를 흘리게 된 것일 거다.

“……안…… 넬슨호…… 가면…… 가면 안 돼…… 안 돼…… 에…… 녹…….”

넬슨호에 가면 안 된다는 걸 안다. 적어도 1년 동안은 출입해선 안 된다. 적어도 1년이 더 지나야 넬슨호는 최종 실종 처리가 된다. 그때까지는 자신과 그는 동굴의 캠프에서 숨어 살아야만 한다. 그래야 자신이 지구로 송환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야 자신이 얼음 행성으로 유배되지 않는다고 한다. 얼음 행성으로 유배되면 자신은 그와 헤어져야만 한다. 그러니 절대로 얼음 행성으로 가선 안 된다. 얼음 행성으로 가지 않으려면 1년 동안 넬슨호에도 가면 안 된다. 물론 가지 않을 거다. 그가 질병에 걸리는 일만 생기지 않는다면.

“……안…… 돼…… 안…… 에…… 녹…… 절대…… 안 돼…… 안 돼…… 에…….”

자신의 등 위에 축 늘어진 몸의 그가 있다.

자신은 땀을 뻘뻘 흘리며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다. 어디로 달려가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는 넬슨호에 가면 절대 안 된다고 한다. 자꾸자꾸 횡설수설 그 말만을 반복한다. 하지만 자신은 그를 넬슨호로 데려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넬슨호에는 사라가 있어서 사라에게 물어보면 그의 병명을 확실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병명을 확실히 알 수 있으면 치료도 빨리 마칠 수 있기 때문이다. 봉합기도 있고 아주 많은 다른 약들도 있고 그래서 그를 재빨리 낫도록 치료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가 가장 안전해지기 때문이다.

마음속 생각에서 그의 명령과 그의 가장 안전해지는 치료가, 서로 자기 말대로 해야 한다고 막 싸운다. 막, 열심히 싸우는데 누가 이기는지 결판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도 지금 어디로 뛰어가야 하는지 잘 모른다. 아, 그렇지. 일단 동굴 속에 숨겨놓은 수송기를 타야 한다. 일단 수송기를 타야 넬슨호에 갈지, 아니면 다른 곳에 가야 할지 결정할 수 있다. 수송기를 타면 어디로든 가야 한다. 캠프에도 가야 하고, 사냥터에도 가야 하고, 메크로늄 추출기 공사를 하는 곳에도 가야 한다.

“……에녹…… 에…… 노…… 오…… 위…….”

그가 정신을 잃어간다. 엉, 엉, 엉, 어디서 엉엉 울고 있는 시끄러운 울음소리가 들린다.

“……위…… 아…… 위위…… 나…… 안…… 위야…….”

그가 죽는 건 아닐까 겁이 와락 난다. 흐아아아아아…… 흐아아…… 흐엉…… 헝…… 시끄러운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져간다. 아아, 누군지 정말 시끄럽다.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한다. 눈물도 막 나오고 있나 보다. 왜냐하면 눈앞이 자꾸 흐려져서 발을 헛딛는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발을 헛디뎌서 몸이 기우뚱기우뚱해도 절대로 넘어지면 안 된다. 왜냐하면 지금 자신은 그를 등에 업고 있기 때문이다. 체온이 무척 많이 올라가는 질병에 걸린 그를 말이다. 그를 업고 있으니까 절대로 넘어지면 안 된다. 그냥 빨리 어디든 달려가야만 한다. 그의 생존 지수를 높일 수 있는 곳으로. 가장 안전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곳으로. 아아, 그렇다. 이제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를 가장 안전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곳은 넬슨호다. 넬슨호로 가야 한다.

막 정확한 방향을 정하고 뛰어가려는데 갑자기 어디서 전투기 소리가 들려왔다.

아, 저 소리는 아는 전투기의 엔진 소리다. 아주 많이 낯익은 엔진 소리. 그렇다. 이제 기억났다. 특수 방위군의 전투기 엔진 소리다.

그런데 왜 특수 방위군의 전투기 소리가 들리는 걸까? 그것도 아주 많은 전투기의 소리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 쪽으로 몸을 돌린 다음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얗게 뭉게구름이 떠 있는 하늘엔 전투기가 뿌리고 지나간 메크로늄의 분사 스펙트럼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아주 보일 듯 말듯, 먼지처럼 조금 남은 잔상이지만 자신은 그래도 정확히 알아볼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최고급 훈련을 받은 특수 방위군 정예 부대원이기 때문이다. 은하 연맹에 속한 대부분의 우주선들이 사용하는 연료의 성질과 특성, 그리고 연료가 분사될 당시 방출되는 복사 파장의 스펙트럼 종류까지 자신은 전부 암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것은 정확히 은하 연맹 특수 방위군 소속 전투기임이 확실히 판명되었다. 그런데 왜 저것이 행성 DITER-11의 하늘 위를 지나간 것일까?

“……흑…… 으…… 위…… 아…….”

흠칫.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그렇지. 특수 방위군 전투기 소리 때문에 잠깐 까먹고 말았었다. 그가 아프다! 그가 지금 자신의 등에서 무지무지 아프고 있다!!!

“……으…… 우…… 아…… 위…… 야…… 위야…… 위위…… 흑…… 으…….”

등에 업힌 그가 또 한 번 괴로운 신음 소리를 흘렸다.

눈물이 또 핑 돌아 금세 눈앞이 잔뜩 흐려졌다. 눈꺼풀을 힘껏 감았다가 다시 떴다. 아, 다행이다. 사야가 다시 맑아졌다. 흘러내린 눈물 때문에 뺨이 간질거린다. 그를 등에 업고 있어 간지러운 얼굴을 긁을 수 없다. 하지만 참을 수 있다. 잠깐 까먹고 있었던 무서운 기분도 다시 엄습했다. 다리도 다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참을 수 있다. 참지 않으면 안 된다. 빨리 달려가야만 한다. 빨리 달려가지 않으면 그의 생존 지수가 급강하한다. 그가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흑, 흑, 윽, 욱, 흐어어엉…… 욱…… 흐어어어어……. 아아, 시끄러워 죽겠네……. 눈앞이 또 잔뜩 흐려져서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떴다. 빨리 수송기를 타야겠다. 특수 임무다. 너무 덥다. 땀이 너무너무 많이 흘러나온다. 아주, 아주 중요한 특수 임무다. 그러면 ‘뇌활성 증폭기’도 착용해야만 한다.

―‘뇌활성 증폭기’를 활용하라!

―임무 수행 중 장교의 명령 체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막다른 난관에 부딪쳤을 때에는 ‘뇌활성 증폭기’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일반 시민 이상으로 뇌를 활성화시켜주므로 대부분의 난관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주일에 여덟 시간 이상 ‘뇌활성 증폭기’를 사용하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 검증되지 않았지만 뇌간과 뇌수에 과도한 자극을 일으켜 뇌사 상태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는 훈련 교관님의 엄격한 강령들이 마치 좋아하는 고급 음악 소리처럼 달콤하게 느껴졌다.

아아, 다행이다.

이제 무서운 기분이 조금만 느껴졌다.

눈물도 아주 조금만 나온다.

이제 더 빨리 뛸 수 있겠다.

다리를 좀 더 크게 뻗어 캠프로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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