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달턴 저택의 악마
[1]
에단을 처음 만난 것은 내가 열여섯 살 되던 해, 지독한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밤이었다. 매년 여름만 되면 이 지역을 거쳐 가는 폭풍우였으나 그해는 유달리도 거세 그만 내가 몸을 피하고 있던 헛간 지붕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짚 더미에 몸을 숨겨 어떻게든 밤을 나려 했지만 송곳 같은 빗줄기가 살갗을 후벼 파는 데에는 견딜 재간이 없었다. 어디든 지붕이 있는 곳을 찾기 위해 헛간을 나왔다. 갈가리 찢겨 해진 옷이 물까지 먹어 발목을 붙잡았다. 어차피 시커멓게 때에 찌든 몸뚱이, 폭풍우 치는 밤 새삼스레 등을 들고 나와 부끄러운 몰골을 비출 이도 없을 것이었기에 그나마 치부를 가리고 있던 헝겊 쪼가리들을 아무렇게나 버려둔 채 빗줄기 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멀리 언덕 위로 교회 불빛이 보였다. 그곳까지만 간다면 적어도 비를 피할 수는 있을 것이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된 것을 먹지 못해 자꾸 풀리는 다리에 간신히 힘을 실었다. 몇 걸음이나 나아갔을까. 산에서부터 밀려 내려온 거센흙탕물이 나를 왈칵 덮쳐 맥없이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발목에도 차지 않는 흙탕물이었으나 그때는 그것을 모르고 정신없이 허우적댔다. ‘살려 주세요, 제기랄, 살려 달라고요!’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내 아우성은 웅덩이로 내리꽂히는 장대비 소리에 묻혀 코앞에서 푹 사그라져 버렸다. 이대로 죽는 건가? 새삼 밀려드는 고독에 버둥거림을 멈추고 그 자리에 망연히 주저앉았다. 부드러운 흙더미가 무릎을 간지럽히면서 아래로 아래로 흘러 내려갔다.
이럴 줄 알았다면 헛간에 있을 것을 그랬노라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내 발자국은 흙탕물에 묻혀 사라져 버렸다. 지붕도 사라지고 뼈대만 남은 헛간이 멀리서 뿌리 잃은 묘목처럼 제멋대로 흔들리다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비로소 오늘 주님의 품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그간 내가 저질러 왔던 죄악들, 교회를 바라보며 품었던 불경스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엎드린 채 울부짖었다.
“주여, 저는 배운 것이 없는 어린아이였나이다. 하루아침에 가족들을 모두 잃고 덮쳐 온 굶주림과 추위에 감히 불경한 마음을 품었던 이 어린양을 용서해 주소서. 더는 아프고싶지 않습니다, 죽어서만큼은 주님의 품에 안겨 쉬고 싶습니다.”
나의 목소리는 내 귀에도 닿지 않았다. 저 먼 하늘에 계신 그분께는 과연 닿았을까? 두 손을 모아 쥐고 쉴 새 없이 참회의 기도를 부르짖고 있던 그때, 어둠만이 자욱하던 길에 깜박깜박 명멸하던 노란 불빛 하나가 멈춰 섰다. 멀리서 아련하게 말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아 마차의 불빛인 것 같았다. 이런 지독한 날씨에도 마차를 모는 이가 있구나. 그렇게 희미해져 가는 머릿속에 불을 지피는 사이 두 남자의 그림자가 둑길을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등을 들고 있던 남자가 앞장서 다가와 내 코앞까지 불빛을 들이밀었다. 일렁이는 등불 너머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코가 유달리 큼지막해 주먹코라고 불리는 언덕 위 저택의 마부였다. 마을에 자주 내려와 필요한 것들을 사 날랐기에 나도 안면이 있었다.
“어이구, 사람이 맞습니다요."
“누군지 아는가?”
목소리 자체는 조용했지만 이 세찬 빗소리도 뚫고 들릴만큼 감미로운 저음이었다. 다 죽어 가는 와중에도 퀭한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길게 우장을 늘어트린 검은 그림자 언저리만 잡힐 뿐이었다.
“대장장이 앤드루의 아들 앤더슨 같습니다요. 불 때문에가족을 잃은 뒤로는 헛간을 전전하며 다닙죠. 꼴이 이런 것을 보니 폭풍우에 헛간이 무너진 모양입니다.”
“살려 주십쇼. 나리, 살려 주세요.”
나는 정신없이 목숨을 구걸했다. 남자는 잠시 나를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무슨 궁리라도 하는 듯 장갑 끝을 잘근거리다 입고 있던 검은 우장을 벗어 내 어깨에 둘러 주었다. “아이고, 나리!" 주먹코가 호들갑을 떨었다.
“데리고 올라오게.”
마차 안에서 나는 극심한 추위에 덜덜 떨었다. 시야가 흐릿해 앞이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내 생명의 은인이누구인지는 알아야겠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개진개진 젖어 가는 눈을 몇 번이나 깜박였다. 제 주먹만 한 코를 싸쥐고 있는 주먹코는 그렇다 치고, 맞은편에 앉아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남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드는 예배일에조차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사람이었다.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낯선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냉랭한 시선이 마주쳤다. 무심한 눈빛이기는 했지만 이 더러운고아에 대한 경멸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괜한자격지심에 치여 나는 냄새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우장을더욱 바짝 여미면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나리. 생명의 은인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만 누구신지 존귀한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달턴."
생각보다 빠르게 답이 나왔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이름이기도 했다. 나는 당황하여 입술을 뻐끔거렸다. 전대 주인인 제임스 달턴은 죽었다고 했다. 헨리 달턴은 먼발치에서만 보았으나 찬란한 백금발을 한 신사였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남자의 머리는 밤하늘처럼 새까만 빛을 띠고 있었다. 달턴가의 먼 친척이라도 되는 것일까? 남자는 내 반응을 유심히 살피다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빗물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얀 이마 아래로 그의 머리칼만큼이나 새까만 눈썹이 가늘지만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길게 뻗은 속눈썹 아래로 일렁이는 암녹색 눈동자.
나는 그의 눈동자와 같은 색을 본 적이 있었다. 숲 너머에 있는 늪지대에서 한 발짝만 내디뎌도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 주위에 우거진 덤불의 색이었다. 덤불에는 찔레꽃 한두 송이가 피어 새빨간 빛깔을 뽐내며 우리를 유혹했었다. 첫사랑 마거릿이 꺾어 달라고 했던 그 꽃. 장과 손을 맞잡고 간신히 내려가 가시에 찔려 가며 꺾어 마거릿의 부스스한 밀짚 머리에 꽂아 주었던 그.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이미 수렁에 한 발짝을 내디디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남자는 찔레꽃처럼 붉은 입술로 자신의 이름을 읊어 주었다.
“에단 달턴이다."
[2]
달턴 저택의 주인 헨리 달턴 씨는 주일 예배를 볼 때를 제외하고는 좀처럼 마을에 모습을 비치지 않았다. 아주머니들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전대인 제임스 달턴 씨만 하더라도 지방 판사로 재임할 정도로 신망이 두터운 위인이었고 마을 사람들과도 자주 교류하였으나, 그가 죽고 아들인 헨리 달턴이 이 저택을 이어받은 뒤로 저택과 마을이 마치 별세계처럼 유리되어 버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변 옳은 조치였는지도 몰랐다. 나는 주일 예배당을 찾았던 헨리 달턴의 모습을 먼 곳에서 본 적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닳아 빠진 밀짚색이 아닌 정말 태양처럼 반짝이는 찬란한 백금발을 한 남자, 까만 프록코트를 차려입은 채 흑단으로 만든 지팡이를 옆구리에 낀 헨리 달턴은,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가운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항상 양 볼에 보조개가 패도록 엷은 입술을 힘주어 다물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사를 제대로 받아 주지 않는 그를 오만한 사람이라고 욕했다. 하지만 내 눈에 그는 마치 천사 같았다. 심판의 날 신의 권좌 옆에 서서 인간들을 단죄하는 처단자로서의 천사 말이다.
진흙탕 길을 덜걱거리며 달리던 마차가 멈췄다. 주먹코가 먼저 내려 바람에 닫히려는 문을 붙잡았다. 에단은 나를 향해 나가라는 듯 손짓을 보냈다. 나는 그의 신호에 떠밀리듯 마차에서 내렸다. 눈앞에 난생처음 보는 듯한 거대한 집이 우뚝 서 있었다. 하지만 이곳이 어디인지 눈치채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달턴 저택이었다. 매일같이 고개가 꺾이도록 올려다보던 바로 그곳. 황홀감에 취해 저택 창마다 일렁이는 불빛을 우러러보자니 누군가가 잔등을 퍽 두드렸다. “들어가자.” 에단은 그렇게 말하며 성큼 앞장섰다.
하녀들이 문 앞까지 나와 인사하였다. 에단은 뒤따라오는 나를 가리키며 그녀들에게 무어라 지시하였다. 다짜고짜 욕탕으로 끌려갔다. 차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물에 억지로 때를 벗고 몇 년간 구경도 하지 못한 음식들을 허겁지겁주워 먹었다. 창문에 들이치는 세찬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푹신한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꿈결 같은 하루였다.
다음 날 나는 저택의 심부름꾼 소년들이 입는 깔끔한 옷이 입혀진 채 에단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양피지 위에 깃펜으로 무언가를 적고 있던 에단이 코끝에 걸치고 있던 외알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반듯하게 올려두고 내 모습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좋아.”
그는 무엇이 그리 흡족한지 옅게 웃었다. 이내 에단은 하인들을 물렸다. 방에는 우리 둘만이 남았다. 나는 괜히 겁에 질려 어깨를 바짝 움츠린 채 큼직한 신발 안에 갇힌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에단이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앤더슨이라고?”
"예? 예!"
“앤디라고 불러도 되나?”
“네, 나리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비렁뱅이 아이라고 들었는데 예의가 바르구나."
“예전에 집이 불타기 전에는 높으신 분들께 심부름을 다니는 일도 하였습니다.”
“마음에 드는구나.”
에단은 끼고 있던 하얀 장갑을 벗었다. 손등에 옅은 손톱 자국 같은 것이 나 있었다.
“내가 없었다면 너는 어제 죽었을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나리.”
“입이 무거운 시종이 하나 필요하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한다면 너는 이 저택에 머물며 좋은 옷과 푸짐한 식사를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다.”
“참말이시옵니까?"
“월급도 따로 지급하도록 하지."
에단은 내게 은화 한 닢을 던져 주었다.
“한 달치를 미리 주겠다.”
나는 난생처음 보는 은화를 한참 동안이나 만지작거렸다. 그가 왜 내게 일을 시키려 하는지 무엇을 믿고 이런 막대한 돈을 쥐여 주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은화를 돌려주며 무슨 일인지 먼저 알려 주기 전까지는 대답 못한다고 할 만한 배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그가 도로 은화를 빼앗을세라 주섬주섬 주머니에 갈무리해 넣었다.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든 그만두어도 좋다. 다만 세 가지만 명심하도록. 하나, 앞으로 볼 일들에 대해 평생 함구할 것. 둘, 내가 지시하는 일에는 어떤 이유도 묻지 않을 것. 셋, 내가 지시하지 않은 일은 어떤 것도 하지 않을 것. 이것을 어길 경우 네 목숨을 보장하지 못한다. 거부하고 싶다면 이 자리에서 그 은화를 내려놓고 나가도 좋아.”
에단은 내게 두 번이나 기회를 주었다. 그 기회를 거부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주머니에 든 차가운 은화의 감촉이 좋아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그가 시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것이 설혹 신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 할지라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어차피 그 폭풍우 속에서 대장장이 앤드루의 아들 앤더슨은 한 번 죽었으므로,
“좋아.”
에단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가서 쉬도록. 내가 부르기 전까지는 자유롭게 지내도 좋다.”
전날의 폭풍우는 거짓말처럼 개어 있었다. 허리를 꺾은 나무들만 그 악몽 같은 밤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원사들이 뿌리 뽑힌 나무를 바로 세우고 꺾인 가지들을 치우고 있었다. 나는 돌계단에 웅크리고 앉아 그들이 하는 양을 구경했다.
“세상에, 앤더슨이냐? 씻겨 놓고 나니 사람이 달라 보이는구나.”
수레에 젖은 나무를 가득 싣고 채찍을 휘두르던 주먹코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와 탄성을 뱉었다.
"작은 주인님께서 널 심부름꾼으로 쓰겠다고 하시더구나. 제대로 훈련을 받은 심부름꾼들이 허다한데 왜 굳이 널쓴다고 하셨는지는 알겠지? 집도 없이 벌거벗고 떠도는 네놈이 불쌍해 구제해 주려 하시는 게야. 작은 주인님은 참으로 심성이 고우시거든."
그는 '작은 주인님' 에단의 이야기를 할 때면 목소리가 들뜨곤 했다.
“그러니 전 주인님께서도 작은 주인님께 이 가문을 물려주고 싶어 하셨던 게야. 하지만 잘 되질 못했지.”
그리고 헨리에게 화제가 닿을 때면,
"주님께서는 무슨 뜻으로 저런 위인을 맏아들로 나게 한 것인지, 원. 전 주인님과 마님 모두 인격자셨는데 어쩌다 저런 아들이 태어났는지 모르겠어. 그래도 작은 주인님이 계셔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 이 집은 다른 무뢰배들의 손에 넘어갔을 게다.”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왜 작은 주인님은 주일 예배에 나오지 않나요?”
“큰 주인님에게 누가 될까 봐 몸을 감추시는 게다. 대신 저택에 작은 기도소를 꾸렸지."
“저는 마을에서 작은 주인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요.”
“저택 내의 비밀이었거든."
주먹코는 바짝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 작은 주인님은 전 주인님과 이방인 여자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야.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저택 안에서만 숨어 살았지. 비록 어미 쪽 출신이 천하기는 하지만 전 주인님의 인품을 빼어 박아 나무랄 데 없이 자라셨단다. 마님께서도 자신의 피를 이은 아들보다 작은 주인님을 더 아끼셨으니 말을 다했지."
비밀이라고 하였으나 마을 사람들도 알음알음 에단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소문이란 것은 항시 그랬으니까. 다만 그때 나는 마을 사람들과 은밀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만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저택의 사생아 이야기와 같은 것을 알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윗분들의 거대한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에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저택의 사람들은 모두들 내게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전의 심부름꾼 소년은 경솔하여 불의의 마차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라는 하녀장의 말에 불현듯 아침에 에단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세 가지 사항을 어길 시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는. 괜한 생각이겠지. 마차에 치이는 것은 꽤 흔한 부류의 사고라고 들었으니까. 나는 애써 불안한 생각을 밀어내며 갓 구워 낸 하얀 빵을 양 볼 가득 욱여넣었다.
[3]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부엌에서 설거지를 거들었다. 누가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밥을 얻는 생활이 영 익숙하지 않아서였다. 내가 먹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소일거리였는데도 기특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이런 모든 것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앤디, 작은 주인님께서 부르신다!”
밖이 온통 컴컴해진 뒤에야 집사 길버트 씨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서둘러 멜빵을 메고 가죽 신발을 꿰어 신었다.
“이 시간쯤 항상 호출을 하실 거다. 다음부터는 미리 준비하고 있어."
“네!”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백발을 깔끔하게 빗어 넘긴 키다리 늙은이 길버트 씨는 흐뭇이 웃으며 외알 안경을 추켜올렸다. 하지만 들은 바에 의하면 실수가 잦을 경우 저 인자한 얼굴이 사납게 구겨질 수도 있다고 했다. 매사에 조심, 또 조심해야지. 나는 길버트 씨의 그림자를 피해 가며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그가 날 데려간 곳은 에단의 방이 아니었다. 저택 중앙의 커다란 응접실이었다. 길버트 씨가 손수 문을 열어 주었다. 안은 온통 시가 연기로 자욱했다. 쭈뼛거리는 내 뒤로 길버트 씨가 속삭였다.
“별일은 아닐 거다. 재떨이를 갈거나 술병이 비면 새로 내오는 정도의 잔심부름을 맡길 테니 잘 따르거라."
“네.”
곧 문이 닫혔다. 누군가가 재떨이를 휙 밀쳤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새 재떨이를 찾아 달려갔다. 카펫이 폭신하게 깔려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재떨이를 갈며 그들이 둘러앉은 테이블을 곁눈으로 훔쳐보았다.
도박판이었다. 네 남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테이블에 둘러앉아 시가 연기를 자욱이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한 사람은 내게도 낯이 익은 사내였다. 금발에 푸른 눈. 천사와 같이 오만하던 얼굴이 욕망과 번뇌로 찌든 채 콧잔등을 찡그리며 이를 갈고 있는, 그런데도 아직 그 아름다움이 퇴색되지는 않은 이 저택의 주인, 헨리 달턴.
다른 사람들의 앞에는 많은 칩이 쌓여 있었으나 그에게는 오로지 붉은 칩 열 개만이 남아 있었다. 헨리는 절그럭절그럭 칩을 만지작거렸다. 눈살을 찌푸린 채 세 남자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들고 있던 카드를 엎어 버렸다.
‘제기랄. 그래, 될 대로 되라지."
열 개의 칩을 테이블 가운데로 내던졌다. 카드를 한 장씩 뒤집을 때마다 잔을 쥐고 있던 헨리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리고 마지막 카드를 뒤집은 순간 그는 빈 잔을 내 쪽으로 집어 던졌다. 간신히 피했다. 부드러운 융단 위에 떨어진 잔이 퍼석 소리를 내며 바스러졌다.
“새 잔을 가져와, 멍청한 녀석!”
날카로운 음성이 귓전을 찢었다. 나는 허둥지둥 유리 파편을 주워 모았다. 손가락을 벤 바람에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그런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냅킨으로 손을 싸매고 새 잔을 대령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빈 술병을 집어 던졌다. 다행이 병은 깨지지 않았다.
“달턴 씨는 이쯤에서 털고 들어가 쉬시죠? 밤이 늦었습니다.”
“그래요. 오늘 좀 무리하신 것 같은데."
“허허, 초대해 주신 성의를 생각해 좀 져 드릴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말입지요.”
정중한 음성 뒤에 깔린 조롱을 나조차도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세 남자는 손가락 끝으로 콧수염을 배배 꼬아 가며 서로 의미 있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헨리는 씩씩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새 술병을 가져온 내 멱살을 다짜고짜 움켜쥐었다. 파란 눈동자에 새하얀 불꽃이 튀었다.
“에단을 불러와!"
“네?”
“내 말이 말 같지 않나, 이 멍청한 놈!”
갈 길을 잃은 분노가 나를 향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 헨리의 분풀이 대상이 되어 주는 것인가? 이렇게 스스로의 역할을 예단할 즈음, 문이 열렸다.
새까만 그림자가 문틈으로 스며드는 달빛을 비집고 들어왔다. 에단이었다. 새 카드를 섞던 남자들도 엉거주춤 일어나 그를 향해 목례를 건넸다. 헨리에게 보이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기에 나는 새삼 의아해졌다.
"그 손 놓으십시오, 헨리. 제 시종입니다."
헨리는 어금니를 콱 악문 채 집어 던지듯 멱살을 놓아주었다. 그 바람에 나는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또 무슨 일이십니까?"
“널 부를 이유라면 뻔하지 않아? 돈이 필요해.”
뻔뻔스런 태도였으나 에단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늘은 이쯤 해 두시죠?”
정중하게 권할 뿐이었다.
“닥치고 돈이나 내놔.”
헨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두세 번 더 권유할 줄 알았건만 에단은 별다른 대꾸 없이 수표책을 꺼냈다.
“얼마가 더 필요하십니까?”
“오………… 칠십………… 백 파운드.”
망설임 끝에 나온 금액을 쉽게도 휘갈겼다. 백 파운드라. 나로서는 어느 정도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 거액이었지만 순식간에 장난감 같은 칩 열 개로 화해 버렸다. 그제야 나는 방금 전 헨리가 내던진 열 개의 붉은 칩이 백 파운드였음을 깨달았다.
에단은 내게 다른 지시를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들어오기 전처럼 재떨이를 나르고 술잔을 바꿔 주었다.
헨리는 도박에 소질이 없었다. 순식간에 붉은 칩들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 버렸다.
“백 파운드 더.”
에단은 군말 없이 그 말에 따랐다. 이백 파운드가 허망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헨리가 세 번째로 백 파운드를 더 요구하였을 때에단은 단호하게 '하루에 세 번뿐이라고 했잖습니까?'라고 대꾸했다. 처음의 백 파운드도 그의 돈이었던 모양이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 악마 같은 놈! 내 돈을 내가 쓰겠다는데 네놈이 왜 참견을 하는 거냐? 당장 내놓지 못해, 이천박한………!”
헨리는 가는 목덜미에 푸른 힘줄을 세워 가며 악을 썼다. ‘약을 드실 시간이네요. 에단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 예의 바르게 웃으며 헨리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갖은 욕설이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억지로 턱을 벌리고 알약을 쑤셔 넣었다. 브랜디를 병째 들어 그에게 쏟아 부었다.
다른 사람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카드를 나눴다.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소란을 떨던 헨리가 어느 순간 축늘어졌다.
“부축해.”
냉큼 달려가 헨리를 둘러업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에단은 마지막까지 정중함을 잃지 않고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4]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헨리는 당시 심각한 도박 중독증세를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가산의 대부분을 탕진하여오로지 저택 하나만이 남은 상황에서 도박에 진 분노를 술로 풀어 정신마저 온건하지 못하다는 진단을 받았다던가.법원은 헨리의 재산권 행사를 금지하고 그의 이복동생이자 유능한 자산가인 에딘에게 헨리와 그의 아들의 후견을맡겼다. 덕분에 헨리는 도박에 쓸 돈이 모자라더라도 이 집과 저택에 딸린 드넓은 밀밭과 산야를 팔아 치울 권리를행사할 수 없다고 했다.
헨리는 자신이 팔 수 있는 모든 보석과 금붙이를 팔아넘겼다. 그래서 이제 그에게 돈이 나올 구멍은 이복동생 에단, 그뿐이었다. 에단은 하루 세 번 헨리에게 도박에 쓸 돈을 빌려주었다. 얼마를 부르건 기꺼이 내주었다. 천 파운드,만 파운드와 같은 거액을 요구할 수도 있건만 헨리는 이상하게 백 파운드 이상의 돈은 요구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침대 위에 헨리를 내려놓았다. 잠이 든 것인 줄 알았는데눈을 또렷이 뜨고 있었다. 겁먹은 눈동자로 나를 보며 우우, 이상한 소리를 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에단을 보았으나 그는 그저 한쪽 벽면을 가리키기만 할 뿐이었다.
"저기서 지시를 기다리고 있어."
헨리가 두 팔을 허우적거렸다. 나는 그의 손을 피해 뒷걸음질 쳐 에단이 가리킨 벽면에 바짝 붙어 섰다. 잠시 그 자리에 멈춰 헨리의 몸부림을 지켜보던 에단이 나지막이 물었다.
“내가 말한 세 가지 사항, 명심하고 있겠지?"
“네.”
"좋아."
겉옷을 벗었다.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우려 상체를 기울였다. '지시하지 않은 일은 하지 말라고 했다. 유달리 차갑게 얼어붙은 목소리에 나는 그만 마른 침을 삼키고 말았다.
에단은 조끼까지 벗어 던진 뒤 소매 단추를 풀었다. 그후, 마치 분노를 가라앉히듯 심호흡을 한번 하였다. 타이를잡아당겼다. 검은 끈이 드레스 셔츠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사이 우우, 하는 울부짖음이 점점 사람의 음성을 찾아갔다.
“에단, 에단, 이 저주받을 자식! 신이 널 용서치 않을 것이야!"
유달리 붉은 입술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셔츠를 반쯤 푼 채 에단은 침대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헨리에게다가갔다.
“마치 예상치 못한 일이라는 듯 말씀하시는군요.”
“저리 가! 이 악마 같은 놈・・・・・…!”
“하하. 주제에 맞지 않는 화대나 받는 싸구려 남창 주제에."
에단은 가볍게 웃으며 헨리의 머리채를 그러쥐었다. 아름다운 금발이 형편없이 헝클어졌다. 갖은 욕설과 저주가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에단이 그의 얼굴을 베개에 파묻어 버렸으니까.
“아버지께서는 늘 말씀하셨지요. 무엇을 얻으려면 그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처음부터 합의한일이잖습니까? 돈을 빌리지 않으면 저도 당신을 이렇게 할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도 삼백 파운드를 빌려가셨죠. 하하, 하. 설마 이런 것을 기대하며 일부러 도박패들을부르시는 겁니까? 아, 하긴. 이제는 굳이 풀어 주지 않아도이렇게 무엇을 삼키고 싶어 안달을 하긴 합니다만."
나는 내 눈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신에게 맹세코 예상치 못했다. 약 때문인지 헨리는 팔다리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에단은 축 늘어진 헨리의 양팔을 뒤로 틀어부드러운 실크 타이로 단단히 묶어 버렸다. 엎드린 자세로 엉덩이를 높이 치켜든 채, 헨리는 간간히 고개를 쳐들고 울부짖었다.
"오, 신이시여! 그만, 내가 잘못했어! 하지 마. 제발! 에단, 에단!"
바지를 벗겼다. 하얀 엉덩이가 드러났다. 에단은 작은 병에 든 액체를 그곳에 들이부었다. 살집이 많지 않은 양 엉덩이를 활짝 벌렸다. 진득한 액체가 가득 묻은 손가락을 그 안에 밀어 넣었다.
“아흑, 아, 안 돼, 에단, 신이시여, 맙소사. 저를 구원하소서, 아아!"
노기에 차 있던 목소리가 차츰 젖어 들어갔다. 곧 헨리는 찌걱거리는 소리에 맞춰 엉덩이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구원해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은 공평하군요? 참으로 다행이지 않습니까?”
손가락 네 개가 그 좁은 구멍을 비집고 들어갔다. 찢기기 직전까지 활짝 벌어진 구멍은 그러나 더 굵은 것도 삼킬 수 있다는 듯 움찔움찔 경련하며 안을 채울 것을 갈구했다. 단이 자신의 바지를 내릴 때까지 나는 그들이 하는 행위가 어떤 함의를 품고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부정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남자였고, 형제였으며 명망 놓은 달턴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설마………….
"무엇을 먹고 싶은지 똑똑히 말하세요, 헨리."
“안 돼, 안 돼. 에단 제발…………!"
“시키는 대로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혹독한 밤이 될 테니까요.”
에단의 것은 아직 풀이 죽은 채였다. 나는 어쩐지 얼굴이 홧홧하여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헨리는 에단이 원하는 말을 해 주지 않았다. 대신.
“에단, 이 저주받을 놈! 네놈을 낳은 창녀가 악마라고 소리치다 미쳐 자살했다지? 이제 보니 그년의 말이 맞았어.악마 같은 새끼! 당장 이것 풀지 못해!"
이렇게 욕설을 퍼부어 주었다. 에단이 큭큭 소리 죽여 웃었다.
"앤디."
"네? 네, 주인님."
"왼편 벽에 걸려 있는 주머니를 가져와."
그곳에는 가죽 주머니가 하나 걸려 있었다. 덜덜 떨리는손으로 그것을 내려 품에 안았다. 안에서 무언가가 덜그럭거리며 움직였다. 애써 모르는 체하며 에단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는 안에서 굵고 길쭉한 외설스런 형태를 한 물건을꺼냈다.
“아, 안 돼! 에단, 네 것을 줘. 차라리 네 것을 달라고 이 악마 놈아!”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면 힘든밤이 될 것이라고요.”
“잘못했어, 알겠다. 네가 하라는 대로 할 테니까, 히익,싫어, 힉, 안 돼, 아, 아아, 아!"
나는 그것이 사람의 몸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헨리는 그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집어삼켰다.
“잘 세워 보도록 하십시오. 제대로 하지 않으면 이 몰골그대로 응접실로 모셔다 드리지요. 술과 노름, 섹스에만 혈안이 된 그 작자들이 과연 이런 꼴을 한 당신을 두고만 볼까요?"
“흐읏, 에단, 읏, 안 돼, 그것만은…………!”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내렸다. 나는 다시 에단이 지시했던 그 벽에 기대섰다. 헨리는 흐느끼며 에단의 것을 가득 물었다. 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을 바짝 끌어당겼다. 으큭, 헨리가 신음했다. 에단은 고통스러워하는 헨리의 무릎을 걷어찼다.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입을 벌린 채 히이익, 끔찍한 신음을 내질렀다. 아랫도리에서 밀려드는 통증에 허리를 펄떡거리는 그를 에단은 놓아주지 않았다. 제대로 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는 다시 에단의 것을 구음해야 했다.
“울고 계십니까? 당신이 고통을 표할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해요? 뻔뻔스러운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오만하고, 멍청하고, 포악한………!”
기침 소리. 웩, 무언가를 게우는 소리.
“잘못했어. 에단, 제발 용서를………….”
“용서?!"
이어지는 날카로운 파열음. 그제야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헨리는 눈물과 땀과 알 수 없는 체액에 젖어 엉망이 된 채 울고 있었다. 에단은 씩씩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나 곧 평정을 찾았다. 두 손을 뻗어 엄지손가락으로 헨리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엉망이 된 머리칼을 헤치고 땀에 젖은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헨리, 나의 하나뿐인 형님.”
결박한 손을 풀어 주었다. 가슴팍을 떠밀어 반듯하게 눕혔다. 헨리는 경련하듯 떨며 침대보를 움켜쥐었다. 하얀 손등에 푸른 힘줄이 솟았다.
“저는.....….”
에단은 헨리의 안에 박힌 그 커다란 물건을 잡아당겼다. 천천히.
"당신을………….”
반쯤 나왔을 때 헨리는 그만 참았던 숨을 토했다. 에단의 손길도 멈췄다. 그는 헨리의 눈을 똑바로 내려다보며 또 박또박, 어린아이의 뇌리에 단어를 새기듯 그렇게 말했다.
“결코 용서치 않을 겁니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안에 박혔던 것이 빠져나왔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그것은 과장을 보태 당시 내 팔뚝만큼이나 굵직했다. 내가 그것에 정신이 팔린 사이 에단은 헨리의 입안에서 세운 자신의 것을 그의 아랫도리에 그대로 찔러넣었다. 헨리는 허리를 휜 채 고개를 젖혔다. 벌어진 입에서 비명이 나오려다 그대로 목울대 아래로 가라앉았다. 아아, 아, 아․ 탄식만이 혀를 타고 흘렀다. 처음에는 고통뿐인 것 같았다. 하지만 에단이 허릿짓을 할 때마다 그는 쾌락에 젖어 들었다. 여자처럼 간드러지게 내지르는 그 목소리는 분명 물레방앗간에서 밀회를 즐기던 누이의 신음과 다르지 않았다.
“아, 아아, 에단, 빌어먹을, 이 악마, 악마가! 힉, 히익!"
“삼백 파운드의 대가치곤 싸지 않습니까? 이것이 싫다면 돈을 빌리지 않으면 됩니다. 하지만 헨리, 나의 형님. 당신은 또다시 ……….”
마치 지하 저 밑바닥에서부터 울리는 것 같은 그런 낮은 웃음소리.
“다리를 벌리려는 구실로 도박패들을 부르겠지요."
"아니야.…………. 아냐!"
“음탕한 남창. 사생아를 밸 수 없다는 점이 아쉽군요
.”
“하지 마, 내 안에…………. 안 돼, 제발………. 아………!”
침대보를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헨리는 길쭉한 발가락을 바짝 오므린 채 허벅지 근육을 바들바들 떨었다. 악문 잇새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에단은 그의 안에 자신의 정을 남김없이 털어 내듯 두어 번 더 추삽질을 한 뒤에야 빠져나왔다.
"뒤처리를 하도록."
헨리는 흐느끼고 있었다.
“어, 어떻게 해야……………”
나는 주머니에 꽁꽁 싸매 놓은 은화를 만지작거렸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서도 그 은화를 사수하고자 더듬더듬 지시를 받아들였다.
“욕실까지 데려가면 그 뒤는 알아서 할 거다. 씻는 동안 침대보와 이불을 새것으로 갈아 두도록. 걷어 낸 침대보는 밖에 가져가 태워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나?”
"흐, 흔적을 남기지 말라는 말씀이십니까?"
에단은 빙긋 웃었다.
“그래. 역시 영리하군. 마음에 들어.”
나는 마음에 든다는 그의 말을 전처럼 기껍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5]
침대보를 태우고 돌아오니 에단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대신 물기를 닦을 생각도 없이 나온 헨리가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어스름한 달빛이 스며 들어오는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그가 사나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당장 꺼져, 악마의 하수인 같은 놈
“!"
나는 억울했다.
“제, 제가 악마의 하수인이라면 크, 큰 주인님께서는 악마와 그, 그런 일을 한 타락한 마녀십니까?"
그래서 아마도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였던 것 같다. 한쪽 뺨이 화끈거렸다. 귓가가 먹먹했다. 맞을 짓을 했기에 나는 억울함을 표하지도 않았다. 헨리는 내가 들고 있던 수건을 빼앗듯 가져가 물기를 닦았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꽉 악문 채 가져다준 나이트가운을 걸쳤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전 정말 작은 주인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몰랐습니다. 그냥 심부름을 하면 된다기에……………”
“됐다. 입 다물어."
“예…………”
“얼마를 받았지?"
“은화 하나………… 요.”
“전보단 많군. 그놈은 백동화 세 개에 명줄이 끊겼지." “네?”
파르스름한 달빛에 헨리의 얼굴이 유달리 창백하게 비쳤다. 그의 찬란한 머리칼도 지금은 마치 세파에 찌든 백발처럼 새하얗게만 보였다.
“에단, 그놈은 악마야.”
나는 주머니 속의 은화를 재차 그러쥐었다.
“그놈의 어미는 에단을 낳은 뒤 악마가 나타났다고 부르짖으며 미쳐 날뛰다 옥상에서 거꾸러져 죽었다고 하더군. 유모가 그 이야기를 해 줬을 때 나는 믿지 않았어. 그 여자는 아버지를 짝사랑하고 있었거든. 아버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를 취해 아이를 낳았다는 것에 분노해 헛소리를 지어낸 것이려니,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아니었어."
헨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가늘고 길게 이어졌다. 나는 이불을 떠넘기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내 방을 찾을 수 없어 같은 자리를 몇번이나 맴돌았다. 문득 섬뜩한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대신 탁, 문을 닫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앤디.”
방금 전만 해도 아무도 없었던 그곳에 검은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주, 주인님!”
“지시한 대로 잘 처리했나?”
"예, 예, 주인님."
“잘했다. 들어가 쉬도록."
에단은 그렇게 말하며 내 한쪽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한기가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여름밤이었건만 폭풍우가 몰아친 뒤여서일까, 추웠다.
“쭉 가서 오른쪽으로, 다섯 번째 방이다."
“예? 예, 가, 감사합니다. 주인님."
그의 그림자는 길었다. 달려도 달려도 그의 그림자에서벗어날 수가 없었다. 오른쪽 코너를 돌 때 비로소 나는 에단의 그림자를 떨쳐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방 앞에 이르러서야 돌아볼 용기가 생겼다.
기나긴 그림자 끝으로 가느다란 그림자가 길게 뻗어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것이 전날의 폭풍우로 잎이 떨어진 채흔들거리던 나뭇가지의 그림자였는지 아니면 참말로 악마의 꼬리였는지,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