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새장 속의 풍경
[1]
그 일이 있은 뒤로도 에단은 나를 따로 구속하려 하지않았다. 나는 전과 같이 자유롭게 저택을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어리숙했던 당시의 나로서도 그것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혹여나 내가 말실수로라도 밤새 본 일을 털어놓으면 어쩌려고 저러는 것일까?하지만 에단은 마치 내가 그럴 리 없다고 확신하는 듯 인사를 받을 때마다 세상에 둘도 없을 선량한 주인님인 양다정하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 주었다.
내 일은 저녁마다 찾아오는 헨리의 ‘손님들’을 맞이하며도박판 시중을 드는 것뿐이었다. 저택의 사람들은 그것을‘헨리의 분풀이 상대'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상은 에단이헨리에게 한 분풀이의 뒤처리를 도맡는 것이었다. 헨리는매일 밤 도박꾼들을 불렀다. 에단은 그것을 ‘뒤로 받고 싶어 안달이 나 일부러 저러는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카드를한 장씩 뒤집을 때마다 헨리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처럼 절박한 표정을 짓곤 했다. '제발, 신이시여 제발. 그러나신은 항상 그를 외면했다. 아마도 헨리는 도박으로 큰돈을벌어 에단에게서 벗어나고자 했던 모양이었다.
물론 가끔은 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헨리가 좋은 패를 든 판에는 사람들이 일찍 카드를 내려놓아 소소한 돈벌이밖에 하지 못했다. 반면 헨리가 낮은 패를 들고 블러핑을 칠 때면 항상 약속한 듯 거액의 칩이 테이블에 모여들었다. 그는 성미가 급했다. 죽어야 할 때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칩들을 쓸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에단을 불렀다.
일백 파운드. 그것이 그가 부를 수 있는 상한선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를 듣자 하니 전에는 그보다도 많은 돈을 불렀던 모양이었다. 에단은 빌린 금액에 맞춰 대가를 받아 낸다고 하였다. 세 번에 걸쳐 빌려준 삼백 파운드의 대가는 섹스. 아니, 강간이었다. 어차피 저런 굴욕적인 일을 당하는데 왜 한 번에 거액을 뜯어내려 하지 않는 것일까? 내 궁금증은 머지않은 시점에 풀렸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헨리는 두 번째로 백 파운드를 빌려 칩으로 바꾸었다. 시가 연기를 뱉으며 테이블을 두드렸다. 술잔이 비었다는 신호였다. 얼음을 채운 잔에위스키를 가득 따라 주었다. 독한 술을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마신 뒤 헨리는 앞에 놓인 카드를 집어 들었다.
일시에 그것은 말 그대로 '일시에'였다 헨리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그는 주위를 기웃거리며 황급히 카드를 모아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테이블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그가 하는 양을 낱낱이 지켜본 연후였다. 나는 다른 이들이 패를 던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헨리는 백 파운드의 칩을 밀어 넣고 소소한 잔돈푼만을 손에 쥐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슨 조화였을까? 헨리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텁수룩한 수염을 만지작거리다 칩의 절반을 배팅했다.
그때 헨리가 지었던 표정이란. 나는 순간 예전에 예배당에서 마주쳤을 때 보았던 거만한 천사와 같은 그의 모습을 상기했다. 죽어 가던 눈에 부른 불꽃을 당기며 헨리는 떨리는 손으로 칩을 밀어 넣었다. 오십 파운드 올인하고 싶었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배팅을 유도하기 위해 꾹 참은 것이었다.
그의 바람대로 판돈이 점차 올라갔다. 다시 헨리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남은 칩을 모두 쓸어 넣었다. 그리고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다 내게 에단을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그를 말려야 할지 망설였지만 나도 그때에는 그가 마치 이곳에서 쥘 수 있는 최상의 패를 쥐고 있는 것만 같아 허겁지겁 에단의 방문을 두드렸다.
* * *
“얼마면 되겠습니까?"
“이천 파운드."
에단은 물론이거니와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시에 행동을 멈췄다.
“네?”
막대한 액수에 놀란 우리와 달리 에단은 그 액수에 경악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저 옅은 비웃음을 매단 채 되물었을 뿐이었다.
“이천 파운드라고 했다, 에단.”
“이천 파운드요?”
단 한 번의 확인만이 있었다. 에단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세운 채 수표책에 이천 파운드라는 금액을 휘갈겨 주었다. 별다른 공증은 필요 없었다. 헨리는 칩으로 환산하기 껄끄러우니 이대로 내겠다며 에단의 사인이 들어간 수표를 산처럼 쌓인 칩 더미 위에 얹었다. 판돈만 오천 파운드. 누군가가 한숨처럼 중얼거린 말에 나는 저 장난감 더미의 가치를 새삼 깨달았다.
에단은 수표책을 접어 품에 넣었다. '위스키 한 잔.' 짤막한 명령에 잔을 채워 대령했다. 나는 그때 에단의 붉은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간 것을 분명히 보았다. 불안해졌다. 테이블에는 정적만이 가득 차 있었다. 다들 누구의 패를 먼저 뒤집을지 눈치를 살폈다. 다시 말하지만 헨리는 성미가 급했다.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을 깨고 카드를 내던졌다. 환호성 같은 소리를 내지르면서.
"풀 하우스라네!"
양쪽의 두 사람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들고 있던 카드를 던졌다. 헨리는 감격에 젖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양팔가득 칩들을 끌어안았다. 맞은편의 남자가 제지하지 않았다면 오천 파운드가 모두 헨리의 것이 되었을 순간이었다.
문득 에단을 보았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마시지도 않는 술잔을 입술에 댄 채 미소를 감추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테이블 가까이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맞은편의 남자가 뾰족한 수염을 쓸면서 자신의 카드를 하나하나 넘겼다. 하트 에이스, 클로버 에이스. 다이아 에이스. 그리고.
…스페이드 에이스.
“계속하실 겁니까?"
"아니, 우리도 이쯤 접어야겠네."
“나도 다 털렸거든. 허, 그나저나 달턴 씨의 상심이 크시겠구먼. 잘 달래 주시게.”
헨리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혼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메마른 눈에서는 물기조차 배어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어쩐지 그가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천이백 파운드."
모두가 응접실을 빠져나간 뒤 에단이 나직이 말했다. “확실하지 않은 패에 모든 것을 걸어선 안 되지요.” 억양 없는 목소리였지만 그 의도만은 명백히 전해졌다.
“예나 지금이나 어리석기 그지없군요.”
한 모금 정도밖에 마시지 않은 잔을 테이블에 내려 두었다. 에단은 헨리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마주보았다.
“일단 들어가서 씻으세요. 앤디, 따뜻한 허브 차와 스콘을 가져다 드리도록. 배라도 채워둬야 할 것이다. 이천이백파운드의 값을 하려면."
헨리는 저항하지 않았다. 일생의 기회를 눈앞에서 날려버린 직후라 그런지 그는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오며 정신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풀 하우스. 풀 하우스였어. 내가 이겨야 했는데. 방금 전까지 이 손에 풀 하우스가 있었는데.”
따뜻한 밀크 티와 스콘, 그리고 사과잼 약간. 헨리는 그것에 손을 대지 않았다. 뒤늦게 치밀어 오른 분노를 이기지 못해 팔을 휘둘렀다. 찻잔과 식기들이 산산조각 나 버리고 말았다. 파편을 치우는 동안 그는 소리 죽여 흐느꼈다. 에단이 들어올 때까지 쭉.
“먹을 것은?”
파편들을 보여 주었다. 에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 일어나세요."
“오늘은 쉬고 싶어. 나중에 하면 안 되나? 이자를 붙이건 말건 마음대로 해. 하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냐."
"하하."
나는 헨리가 그냥 에단의 말에 얌전히 따르기를 바랐다. 그는 에단을 이길 수 없었다. 만일 그가 에단이 자신을 강간해 왔음을 폭로한다 할지라도 저택의 고용인들은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미친 주인님께서 이제는 별끔찍한 소리를 다 하시는구나. 그렇게 혀를 차겠지. 헨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당해 온 치욕스러운 일들을 털어놓을 사람이 아니었다.
에단은 헨리의 가느다란 팔뚝을 잡아당겼다. 헨리는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그에게 끌려 비틀비틀 일어섰다. 젖은 눈으로 에단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눈빛으로 애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에단은 헨리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아무 말도 않은 채 방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여 실크 가운을 바리바리 싸 들고 이들의 뒤를 따랐다.
복도를 걷는 동안 둘 모두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코너를 두 번 돌았을 때 헨리는 자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아챘다.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끌려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먼 복도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던 하녀 둘이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피하는 것이 보였다. 큰 주인님이 또 발작을 일으키시나 봐. 그녀들은 아마 이런 대화를 나누며 실성한 헨리를 성심으로 돌보는 에단을 치하할 것이다.
“잘못했어.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하겠다고 하잖아!” “늦었습니다.”
“내가,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 에단! 그래, 네놈이 시키는 대로 저, 저 하수인 놈에게 다리라도 벌릴까? 뭐든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돌아가게 해 줘 제발!"
“헨리, 당신도 이제 아실 때가 되었을 텐데요. 저는 당신의 온전치 못한 의견 따위에 신경을 기울일 만큼 한가한 사람이 못 됩니다. 선택을 했으면 대가를 치르십시오."
에단은 곧장 그에게 다음 선택지를 주었다.
“제 발로 들어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강제로 끌려 들어가시겠습니까."
“에단, 에단!"
"좋습니다."
에단이 다시 손을 뻗었다. 헨리는 몸서리를 치며 그의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알겠어. 내 발로 들어갈게. 벌게진 눈가를 손등으로 훔치면서 헨리는 구겨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겁먹은 눈동자가 에단과 나, 그리고 방문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시선을 들었을 때 그는 오만한 달턴 가의 주인, 헨리 달턴이 되어 있었다.
세 번의 노크. 가냘픈 목소리가 응답했다.
“누구세요?”
“조, 아버지다.”
헨리의 전부인 한나 달턴은 몸이 약한 귀부인이라고 했다. 그녀는 결혼한 지 1년 만에 아들 조슈아를 낳다 산고로그만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헨리는 한나가 죽은 뒤 재혼도 하지 않은 채 술과 노름에 빠져 스스로를 망가트렸다. 그사이, 어머니를 닮아 유달리 연약한 그의 아들은 침실에 틀어박혀 매일매일 밭은기침으로 하루를 보냈다.
헨리가 아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따라 들어가려 하였으나 에단이 앞을 막았다. 가볍게 고개를 젓더니 문을 닫았다. 나는 가운을 꼭 끌어안은 채 한참 동안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다시 둘이 나왔을 때, 헨리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절뚝절뚝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그는 약한 신음을 흘렸다. 부축해 주고 싶었으나 나는 에단이 지시하지 않은 일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헨리가 그 자리에 무릎을 꺾고 구역질을 했을 때에는 에단의 지시를 채근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저택 복도에 지저분한 것을 토하는 것을 원치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손짓하게 무섭게 나는 웃옷을 벗어 헨리의 입에 가져다 댔다. 나오는 것은 알콜과 익숙한 체액뿐이었다. 그는 끅끅 울음을 삼키며 에단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의연하게 대처하려는 것 같았지만 에단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무너지고 말았다. 입술에 묻은 오물들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버렸어.”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군요.”
“윽, 하지만 너란 놈은 어떻게 조의 곁에서 그런 짓을 시킬 수가..….…….”
“헨리, 제가 당신에게 많은 것을 바랐습니까? 아들의 앞에서 다리를 벌리라고 명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나는 그제야 그에게서 지독한 냄새가 풍기고 있음을 알아챘다.
"기저귀라도 채워야지 안 되겠군. 앤디?"
“예, 주인님.”
“갈아입을 옷을 가져와.”
나는 들고 있던 가운을 내밀었다. 그때 에단은 꽤나 흡족해했었다.
“벗어요.”
“하인들이……."
“앤디, 망을 봐라.”
이 시간에 복도를 오가는 하인들은 없었다. 그래도 망을 보는 시늉은 해 주었다. 헨리는 좌우가 훤히 뚫린 복도 한가운데에서 바지를 벗었다. 셔츠를 마저 벗어 아랫도리에 묻은 오물을 닦은 뒤 맨몸에 가운을 걸쳤다.
"치워라."
에단은 다정하게 헨리를 부축해 주었다. 늘 소각을 하던 자리에 가서 옷을 태웠다. 손에 지독한 냄새가 밴 것 같아 몇 번이나 지푸라기에 문지르고 또 흐르는 물에 벅벅 닦았다. 소똥과 말똥에 파묻혀 살던 날이 엊그제 같건만 사람의 감각이라는 것은 참으로 간사했다. 벌써 이런 냄새에 속이 미식거리니 말이었다.
방으로 돌아가니 헨리는 제대로 참지 못한 '벌'을 받고 있었다. 꼬리처럼 긴 호스를 낀 채로 바닥을 기어 다니는 것이었다.
“배가 터질 것 같아, 윽, 살려 줘, 에단………!"
그가 애원했지만 에단은 그의 안에 펌프질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다행이 안이 깨끗해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은 맑은 물뿐이었다. 헨리는 올챙이처럼 볼록해진 배를 부여잡으면서 숨넘어가는 소리를 질렀다.
“저, 주인님.”
"뭐지?"
나는 지시하지 않은 일을 해선 안 됐다. '저번 심부름꾼 아이는 마차에 치어 죽었지'라던 주먹코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 울렸다.
"모두 소각하고 왔습니다."
에단은 그제야 펌프질을 멈췄다. 헨리의 안에 꽂았던 호스를 뽑았다.
“제가 백을 셀 동안 참아 보십시오. 그렇다면 이천이백파운드의 가치를 인정해 드리죠.”
불가능하다는 것은 에단이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열을 세기도 전에 멀건 물이 꾸르륵 꾸르륵 스며 나왔다.
“긴 밤이 되겠구나.”
조용히 펌프를 치웠다. 에단은 눈을 까뒤집고 경련하는 헨리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그의 말대로 밤은 길었다. 그리고 헨리의 명줄 역시 길고도 끈질겼다.
[2]
“작은 주인님과 큰 주인님은 사이가 좋지 않으신가요?"“왜 그런 걸 묻지?"
하녀장님이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가끔 두 분의 분위기가 그래서요
."
괜한 것을 물은 것 같아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하녀장님은 한번 숨을 몰아쉬더니 내게 거위깃털 총채를 내밀었다. 그녀 대신 찬장 위의 먼지를 털었다.
"하긴, 너도 몸을 사리려면 알 것은 아는 게 좋겠구나. 대신 입을 무겁게 해야 한다. 알겠니?”
그녀는 몰랐을 것이다. 내 입이 그녀가 상상하는 그 어떤이들보다도 무겁다는 사실을.
"너도 지금까지 봤으면 알겠지만 사이가 좋지 않다기보다 큰 주인님께서 일방적으로 작은 주인님을 괴롭히고 계신 거야.”
정말이지, 나는 이 말에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함구령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었다.
“작은 주인님이 대단하신 분이지. 그만큼 돈도 버셨으면 따로 사는 것이 행복하실걸. 나름 전 주인님과 마님에게 은혜를 갚으려 하시는 것 같은데.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저택을 사 버리셨으면 좋겠어."
“두 분 사이에 안 좋은 일이 있었나요?"
“큰 주인님께서 어릴 적부터 작은 주인님을 무던히도 괴롭히셨단다. 사생아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전 주인님께 누가 될까 봐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불쌍한 작은 주인님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틈이 날 때마다 주먹을 휘둘렀지. 한번은 전 주인님께서 여행을 다녀오며 작은 호두까기 인형을 하나 사 오신 적이 있었어. 마침 그 가게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귀한 인형이었다나 봐. 전 주인님은 두 아들 가운데 한 아이에게 인형을 선물로 주고 싶어 하셨지. 가정교사였던 스튜어트 부인에게 누가 더 공부를 열심히 하였냐고 물으셨어. 결과는 당연했단다. 작은 주인님이었지. 작은 주인님께서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로 받은 날, 큰 주인님은 자신이 선물을 갖지 못한 데 크게 화를 냈어. 방안에 있는 장난감들을 모두 집어 던지면서 미친 아이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 전 주인님께서는 버릇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하셨나 봐. 양 종아리에 흉이 지도록 회초리를 치셨단다."
'먼지를 모두 털었어요, 하녀장님. 그녀는 내가 내민 총채를 다시 받아 들었다. 찬장 위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먼지가 묻어나지 않자 만족스럽게 웃었다.
“하는 김에 마른 걸레로 창틀도 닦아 주는 게 어떻겠니?"
“네, 맡겨만 주세요.”
원숭이처럼 창틀로 올라가 그 주위를 꼼꼼히 닦았다. 하녀장은 그 모습을 감독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날 밤, 호두까기 인형이 뭐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부서져 버렸단다. 작은 주인님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그것을 발견했지. 하인들에게 조각들을 보여 주며 다시 조립을 해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될 리 있나. 모두들 누가 범인인 줄은 알았지만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지. 전 주인님도 마찬가지였어.”
“그것 참 끔찍한 일이네요.”
그렇지만 호두까기 인형의 원한을 갚고자 저런 짓을 하는 것은 아닐 테고. 하녀장이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아직 창틀 꼭대기까지는 손이 닿지 않았다. 까치발을 딛고 서서 간신히 위칸을 닦았다.
“뭐, 그래도 따지자면 그런 것보다야 마님의 일이 컸지.” “마님이요?”
"큰 주인님의."
한나 달턴. 헨리의 전 부인이자 조슈아 달턴의 어머니. 마른 수건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님은 원래 에반스 가의 막내따님이셨단다. 에반스는 전 마님의 처녀 적 성씨였지.”
한나 달턴, 아니 한나 에반스는 전 마님의 조카딸이었다. 나이 많은 자매들과 달리 헨리, 에단과 나이가 엇비슷해 어린 시절부터 저택을 오가며 정혼자 비슷한 취급을 받아 왔다고 했다. 한나는 항상 불그스름한 머리를 양 갈래로 곱게 따고 수수한 원피스를 입은 채 이곳에 놀러와 또래 남자아이들이 읽어 주는 이야기책에 귀를 기울였다. 몸이 약해 들판을 뛰어놀진 못하였으나 그녀는 잘 웃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길 좋아하는 사랑스러운 소녀였다고 한다.
혼기가 찼을 때 한나는 당연한 수순처럼 에단과 사랑에 빠졌다. 에반스 가문에서는 사생아인 에단을 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 만일 그가 달턴 가문을 잇게 된다면 둘의 연분을 생각해 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했다. 그때 전 주인인 제임스 달턴은 포악한 헨리가 아닌 에단에게 가문을 물려주는 일을 고민하고 있었다. 헨리는 격노했고 이 모든 일이 한나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에단에게서 한나를 빼앗고자 했다.
“큰 주인님은 그렇다면 마님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말인가요?”
“아니, 그것은 좀 이상하더구나. 마님이 돌아가신 직후 사람이 돌변한 것을 보면 본디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싶고."
결국, 한나는 에단을 버렸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에단은 저택을 떠났고 얼마 되지 않아 제임스 달턴과 그의 아내가 여행길에 사고를 당해 이 저택은 헨리 달턴의 손에 넘어왔다고 했다.
나는 하녀장의 이야기를 모두 믿지는 않았다.
“그런데 작은 주인님께서는 어찌 그렇게 큰돈을 버셨을까요?”
"글쎄, 무엇을 해도 두각을 드러내던 분이었으니 어떤 대단하신 분의 후원을 받은 게 아닐까?”
창틀에서 뛰어내리는데 언제 들어왔는지 주먹코가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전쟁 특수로 떼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역시 남자는 큰 도시로 나가 봐야 해.”
전쟁이라니. 아득한 먼 나라의 이야기 같은 것을.
“에구머니, 무기라도 만들어 팔았다는 건가요?”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뭐 자세한 것은 나도 모르나 전쟁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소문은 들었지.”
***
궁금증은 그때부터 한 달쯤 지났을 무렵, 에단의 심부름으로 헨리의 도박 친구들 중 한 사람을 찾아갔을 때 풀렸다.
“사람은 운 때라는 것이 있지. 네 주인도 봐라. 평생 채권팔이나 하며 유태인 꽁무니나 쫓아다닐 팔자인 것을 큰판에 한번 끼어들었다가 인생이 폈잖느냐.”
“큰판이요?”
“말해도 알아듣지 못할 일이지만 국채를 가지고 장난질을 좀 쳤지. 너도 알다시피 얼마 전까지 프랑스와 전쟁이 있지 않았냐. 워털루에서의 승전보를 남들보다 먼저 입수한 에단 패거리들이 채권을 대거 팔아넘겼지. 사람들은 채권 가격이 떨어지자 우리가 패배했다고 지레짐작하며 국채를 내다 팔았어. 국챗값이 휴지 조각이 되자 에단네가 이를 다시 긁어모았지. 그렇게 번 돈이 흠, 천문학적인 수치라고 하더군.”
그의 말처럼 무슨 소리인지는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도박과 비슷한 일을 하여 돈을 번 것이려니 싶었다.
에단은 그 도박에서 승리했고 헨리는 패배했다.
"자, 가져가라."
남자는 내게 에단의 사인이 들어간 수표를 돌려주었다.
“이건 계약에 없던 물건이거든.”
하트 플러시를 만든 헨리가 어제 또 미쳐 날뛰며 에단에게 빌려 달라고 했던 바로 그 수표였다. 헨리는 이에 대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지만 수표는 다시 에단에게 돌아왔다.
패인을 곱씹는 헨리에게 이 사실을 말해 줄지 망설였다. 하지만 나는 에단이 지시하지 않은 일은 할 수 없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패자의 곁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뼈아픈 일인지는 그간의 비렁뱅이 생활에서 몸소 느껴 왔기에 나는 승리한 악마의 하수인이 되는 길을 택했다.
수표를 가져다주었다. 에단은 내게 수고했다며 은화 한닢을 던져 준 뒤 그것을 촛불에 태워 버렸다.
헨리는 오늘 밤에도 도박 친구들을 부를 것이다.
[3]
푸른 밀밭이 올리브빛으로 무르익을 계절이 되자 내게 또 다른 일이 주어졌다. '대가'를 치르는 와중에 헨리가 정신을 잃는 일이 잦아지니 에단은 내게 그가 제대로 식사를 하는지 감시하는 임무를 맡겼다. 다행히도 아침에는 두 주인님이 늘 함께 식사를 하기 때문에 밤새 헨리의 뒤처리를 해 준 뒤 아침에 일찍 눈을 뜰 필요는 없었다. 점심시간과 티타임, 그리고 에단이나 손님이 없는 날의 저녁 식사만 곁에서 지켜보면 되었다.
“요즘 소화가 잘 안 되시는 모양이야. 술 때문에 속병이든 거지.”
주방장 파울 씨는 야들야들한 송아지 고기를 구우며 연신 투덜거렸다.
“고생 좀 해야 할 거다. 조금만 질겨도 소화가 안 된다, 제대로 굽지 않았다, 너무 구웠다.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모르겠거든.”
나는 그가 던져 준 구운 감자를 호호 불어 가며 머리통이 떨어지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종일 주방에 갇혀 있어 그런지 파울은 나만 보면 시답잖은 불만들을 토로하기 바빴다. 그래도 그럴 때마다 먹을 것을 하나씩 쥐여 주기 때문에 듣기 거북하지는 않았다.
“였다. 또 집어 던지거든 하녀들에게 치우라고 해라.”
헨리는 발코니에 앉아 있었다.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이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던 책장을 팔락팔락 뒤적였다. 그는 읽던 페이지를 체크할 생각도 않고 턱을 괸 채 저 멀리서 흔들리는 밀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막 식사 시간임을 알리려는데 나지막한 음성이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When, in disgrace with Fortune and men's eyes,
I all alone beweep my outcast state,
And trouble deaf heaven with my bootless cries,
And look upon myself and curse my fate,
Wishing me like to one more rich in hope,
Featur'd like him, like him with friends possess'd,
Desiring this man's art and that man's scope,
With what I most enjoy contented least;
Yet in these thoughts myself almost despising,
Haply I think on thee, and then my state,
Like to the lark at break of day arising
From sullen earth, sings hymns at heaven's gate;
For thy sweet love remember'd such wealth brings
That then I scorn to change my state with kings.
운명과 세간의 시선의 눈 밖에 난 채
나 홀로 버림받은 처지를 한탄할 때,
헛된 아우성으로 귀먹은 하늘을 어지럽히고
자신을 돌아보며 운명을 저주하네.
나는 바랐네, 희망이 만발한 사람이 되길.
잘생기고 친구들도 많은,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랐네.
이 사람의 재능 저 사람의 능력을 갈망하며
결국 나 자신이 가진 것에도 만족하지 못했다네.
그러나 이런 생각에 스스로를 경멸하다가도
문득 그대를 생각하면, 그때 내 마음은
이 음울한 대지를 박차고 새벽하늘로 솟아올라,
천국의 문에서 찬양하는 종달새 되네.
그대의 달콤한 사랑을 떠올리면 풍요에 넘쳐
왕의 자리를 준다 하여도 바꾸지 않으려네.
- 윌리엄 셰익스피어, <소네트 29번>
나는 헨리가 그렇게 감미로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지 그날 처음 알았다. 그동안 내가 들어온 그의 음성은 술에 취해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고 에단에게 애원을 하고 흐느끼는 그런 비참한 것들뿐이었기에.
나는 식사가 식는 것도 잊은 채 한 발짝 뒤에 물러서 그의 낭송에 귀를 기울였다. 헨리는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있었다. 그의 머리카락만큼이나 찬란한 금빛을 띤 목걸이줄이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손바닥 안에는 역시 황금으로 치장을 한 펜던트가 있었다. 루비가 박힌 뚜껑을 열었다닫으며 그는 펜던트 안의 누군가에게 연신 시를 읊어 주었다.
훈훈한 바람이 금빛 머리칼을 산들산들 흔들었다. 오후의 따스한 태양이 그를 감쌌다. 올리브빛 밀밭을 배경으로구름 하나 없는 새파란 하늘 아래서 그는 지금껏 내가 단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만 들고있던 쟁반을 떨어트릴 뻔하였다. 손에 재차 힘을 주었지만절그럭거리는 소리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누구냐.”
날선 목소리가 정신을 깨웠다.
“오늘부터 나리의 점심 시중을 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헨리는 마치 내가 그의 펜던트를 훔쳐 갈 못된 도둑 까마귀라도 된다는 양 경계하며 그것을 품 안에 감췄다.
“이번에는 또 무엇을 탔지?”
“예?”
“어떤 망할 것을 집어넣어 날 괴롭히려 든다 하더냐?”
“나리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건 그냥 로스트비프일 뿐인데요."
“약을 탔을 거 아냐! 그놈이 올 때까지 몸을 뒤틀며 괴로워하라고, 저주받은 언어를 쏟으며 또 나를 모욕할 준비를해 두는 것이겠지!"
“아닙니다. 정말이지 저는 나리의 건강을 위해 식사를 챙겨 드리라는 명밖에 받지 않았습니다.”
“빌어먹을 꼬마 악마 놈. 저주받은 혓바닥만 닮아 가는구나."
억울했다. 그래도 에단의 지시를 거역하고 나올 수도 없었다. 탕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 위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헨리는 내 무례를 사사건건 책잡는 대신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접시들을 모조리 발코니 아래로 집어 던졌다. 정원을 정돈하던 하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나리. 건강을 생각하셔야죠.”
"나가!"
“주인님께서 나리의 식사를 모두 챙겨 드리라고…………”
“그 자식이 없을 때만이라도 자유롭게 두면 안 되는 거냐? 내가 하루 종일 그놈의 그림자에 숨통이 조여야 네 속이 시원하겠어?!”
“전 그저……………”
"저리 꺼져!"
멱살을 움켜쥐었다. 헨리에게는 몇 번 맞아 본 적이 있었다. 주먹으로 뺨을 후려쳐도 그가 때리는 것은 그리 아프지 않았다. 눈만 내리깐 채 이를 악물었다. 그때 헨리의 품에서 무언가가 굴러 떨어졌다.
황금빛 펜던트였다.
"아......!"
헨리는 황급히 멱살을 쥔 손을 놓았다.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가는 펜던트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펜던트는 허망하게도 발코니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난간 아래로 따라 뛰어내리려 드는 헨리를 간신히 붙잡았다. 바로 1층으로 내려가면 충분히 주울 수 있는데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않는지 자꾸만 난간 밖으로 양팔을 버둥거렸다.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나리! 여기 계세요. 당장 다녀오겠습니다!"
하녀들이 접시를 치우기 위해 몰려들고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들이 헨리의 펜던트를 발견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빤히 쳐다보는 와중에 훔쳐 갈리도 없건만 그것은 헨리가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 아닌 치부인 것만 같아 나는 숨이 턱에 차도록 계단을 뛰어내렸다.
목걸이는 정원수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사다리를 가져와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헨리는 내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간신히 펜던트를 되찾은 뒤 그에게 흔들어 보였다. 헨리는 바짝 긴장했던 어깨를 늘어트렸다. 비틀거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다시 그에게로 가기 위해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떨어질 때의 충격 때문인지 펜던트 뚜껑이 열려 있었다. 닫으려다 우연히 정말로 우연하게-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빨간 머리칼을 늘어트린 수수한 여인이 보일 듯 말 듯 웃고 있는 아주 작은 초상화가 담겨 있었다.
돌아가신 마님, 한나 달턴도 붉은 머리였다고 했다. 계단을 오르며 새삼스레 펜던트 안의 초상화를 다시 보았다. 순박하고 사랑스럽기는 했으나 아무리 좋게 보아도 ‘아름답다’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한 얼굴은 아니었다. 내 첫사랑 마거릿도 이 정도는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감히 할 정도로. 아니, 어찌 미인의 반열로 친다 하더라도 헨리와 에단, 그 두 세련된 미남들의 사랑을 동시에 받았다는 이야기만큼 화사한 미녀는 아니었다.
펜던트를 내밀었다. 헨리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았다. 안을 열어 사진을 확인했다. 한숨을 쉬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점심은 됐다.”
그래도 에단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손거스러미를 뜯으며 머뭇거렸다.
“나중에 차나 내오도록.”
적어도 오후 티타임은 갖겠다는 의미였다. 그때 식사가 될 만한 것을 내가면 되지 않을까? 그가 먼저 무엇을 먹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 자체가 오랜만이라 나는 그쯤에서 만족하고 방을 나왔다.
헨리는 약속대로 티타임에는 내가 내온 것들을 조금씩 먹어 주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헨리가 먼저 내게 말을 걸게 된 것이.
[4]
“워즈워스의 시집을 가져와. 책장 두 번째 칸에 있을 거다.”
“죄송합니다만 나리, 워즈워스가 어떤 모양인지를 알려주십시오."
헨리는 내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펜을 가리킨 이후에야 워즈워스의 스펠링을 묻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나는 냅킨 한구석에 적힌 글자의 모양을 유심히 보고 나서야 그가 원한 책을 찾아 줄 수 있었다.
“글을 읽지 못하나?"
“알파벳만 조금 알아보는 정도입니다."
"심부름을 시키기 번거롭군. 길버트에게 지시를 해 둘 테니 그에게 글을 배워.”
에단의 하인으로 헨리를 모신 지도 몇 달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헨리의 말을 액면 그대로 이해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감사합니다, 나리!”
그가 가장 행복해하는 시간, 점심 식사를 마치고 티타임을 가지기 전까지 발코니에 앉아 한나의 초상화가 담긴 팬던트에 시를 읽어 주는 그 시간 동안 내가 주위를 빙글빙글맴돌며 책을 읽어 보려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그도 눈치챘을 것이다. 글을 가르쳐 줄 만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내가 그들에게 부탁을 할 수는 없었다. 에단이야 내가 글을 읽는 여부가 자신의 일에 영향을 끼칠 일이 없으니 무시를 했을테고 말이다.
집사장 길버트는 내가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사실이 놀랍다는 투였다. 영리하여 당연히 알고 있겠거니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길버트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작은 이야기책 하나를 막힘없이 읽게 되었을 때 헨리는 내게 낡은 성경책 한 권을 선물로 주었다. 어린 시절 보던 것이라 이제는 필요가 없는데 성경을 차마 버릴 수가 없어 꽂아 두었던 것이라며,
***
“성경이군."
햇살이 좋던 어느 날, 돌층계에 웅크리고 앉아 성경을 읽고 있던 중 에단과 마주쳤다. 다급하게 일어나 고개를 숙였지만 에단은 인사를 받는 대신 내가 들고 있던 성경에 관심을 표했다.
“큰 주인님께서 글공부를 위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얼버무릴까 하다가 괜히 책을 잡히고 싶지 않아 실토했다.
"글공부라. 기특하구나."
“감사합니다, 주인님."
에단에게는 비밀을 만들지 않는 것이 좋았다. 그가 모든것을 알리 없는데도 나는 그가 항상 내 속을 꿰뚫어 보고있는 것 같은 섬뜩함을 느꼈다.
“공부라. 그래, 공부는 제때 해 두는 게 좋지."
누구에게 들으라는 것일지 모를 소리를 하면서 에단은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뒤 저택으로 들어갔다.
며칠 뒤, 조슈아 달턴의 기숙 학교행이 결정 났다. 주정뱅이에 도박 중독자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에단의 주장 때문이었다. 헨리만큼이나 체념이 빠른 조슈아는 집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응석도 부리지 않고 얌전히 짐을 챙겨 새벽같이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때 나는 조슈아를 처음 보았다. 뒷모습뿐이었지만나는 의아해졌다.
헨리는 금발이었다. 한나는 붉은 머리.
그러나 푹 눌러쓴 모자 아래로 삐져나온 조슈아의 머리카락은 어둠처럼 새까만 빛을 띠고 있었다.
[5]
“당장 조를 데려와! 조, 조! 몸도 약한 아이를 그런 빌어먹을 곳에 집어넣어 어쩌려는 거야? 에단, 에단 이 저주받을 자식! 분풀이를 하려면 내게 해! 어린아이에게 그런 짓을 하지 말고!”
“귀족가의 자제들도 다니는 곳입니다. 일류 의료진들이학교 내에 상주하고 있어요. 형님께서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에단의 고개가 돌아갔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 사이로수풀에 몸을 숨긴 맹수의 그것과 같은 눈동자가 매섭게 번뜩였다. 헨리는 뺨을 때린 손을 슬그머니 내려놓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부들부들 떨다 다시 반항적인 태도로 에단을 올려다보았다.
“조를 데려와, 에단. 네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잖아. 대체뭐가 부족해서 조에게까지 이러는 거냐.”
“다른 사람이 들으면 제가 형님과 조슈아를 괴롭히고 있는 줄 알겠습니다, 헨리. 저와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다면 돈을 빌리지 마세요. 조슈아의 일도 마찬가집니다. 저는 그 아이의 앞날을 위해 그런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이제 스스로를 돌아볼 때도 되었잖습니까?"
에단은 헨리의 어깨를 잡아 억지로 침대에 앉혔다. 헨리는 셔츠를 벗기는 에단의 손을 거부하지 못했다.
“알코올 중독과 도박 중독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 쓰레기."
에단은 밀어를 속삭이듯 다정한 어조로 이런 말을 읊조렸다.
“몸뚱이는 쾌락에 찌들어 피를 나눈 이복동생을 침실로 끌어들이고 있지 않습니까?"
“아냐, 에단. 이건 네가………!”
“하하. 세운 것이나 가라앉히고 그런 말을 하시지요.”
“넌 왜 날 죽이지 않는 거냐?!"
헨리의 몸을 더듬던 손이 멈췄다.
“차라리 날 죽이고 이 저택을 가져가. 이제 제발 이 저주받을 짓거리를 끝내 달란 말이다.”
“헨리.”
“나는, 난, 나는!”
가는 팔을 뻗어 에단의 멱살을 잡았다. 잔잔한 호수 같던 푸른 눈동자에 파도가 일렁였다. 헨리는 두 눈을 질끈감았다. 고여 있던 눈물이 양 뺨을 적셨다.
“네게 속죄하기 위해 자결조차 할 수가 없어.”
방 안에는 헨리가 흐느끼는 소리만 공허하게 울렸다. 에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헨리가 멱살을 잡은 손을 풀 때까지 미동도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에단, 날 용서할 수 없다면 그냥 죽여 줘. 제발.” 헨리."
에단은 헨리의 이마에 키스했다. 입술로 콧날을 더듬고인중에, 아랫입술에, 턱에 그리고 양 뺨에 헨리의 얼굴에키스로 성호를 그었다.
“아시겠습니까? 헨리, 당신의 모든 것이 제게 귀속되어 있다는 것을요. 제 허락 없이는 그 무엇도 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속죄? 그런 것은 없어요. 당신은 평생 제 곁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고 멍청한 도박에 빠져 돈을 빌리고 다리를 벌리고, 그렇게 남창처럼 몸을 팔며 안존하게 살면 됩니다."
“한나에게 보내 줘, 지옥에서 천국을 우러르며 그녀의 옷자락이라도 느낄 수 있게. 에단…………!”
“내 앞에서 그 여자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마!”
나는 에단이 그렇게 격노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방금 전까지 헨리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더듬던 손으로 그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얼굴을 바짝 가져갔다. 헨리는 와들와들 떨며 눈을 피했다.
“눈을 피하지 마세요, 헨리.”
그러나 이 말에 다시 에단의 암녹색 눈동자를 힘겹게, 정말 힘겹게 마주 보았다.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한나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겁니까?”
“자, 잘못했어, 에단………….”
“한나는 당신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의 품에 안겨 그 남자의 아이를 낳다 목숨을 잃었어. 그런데, 한나를 그렇게 만든 당신이 그녀를 그리워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미안해. 하지만 에단. 이것만은 알아줘. 난 정말로 한나를………!”
셔츠가 찢겨 나갔다. 옷을 다 벗기지도 않은 채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헨리는 그 자리에서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앤디!’ 에단은 성난 소리로 나를 부르다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쿵쾅거리며 손수 벽에 걸린 채찍을 잡아챘다. 귀를 찢는 소리가 들렸다. 헨리는 비명을 질렀다. 통증은 컸겠지만 상처는 깊지 않았다. 에단은 수차례 채찍을 휘둘렀다. 하지만 같은 부위를 두 번 이상 때리지는 않았다.
한참의 채찍질이 끝난 뒤, 에단은 씩씩 숨을 몰아쉬며 다시 헨리의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정신을 잃었는지 그가 끌고 가는데도 미동 한번 하질 못했다. 헨리를 침대에 엎어둔 채 에단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마른세수를 한번 하고 나서야 전과 같은 평정을 찾았다.
“앤디.”
“네?”
“차가운 물을 받아 와."
"예, 주인님."
은대야 가득 차가운 물을 담아 왔을 때 에단은 축 늘어진 헨리를 범하고 있었다. 헨리의 교성 대신 에단의 신음이방을 채웠다. 아니, 그것을 신음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은 마치 맹수의 포효와도 같았다. 허릿짓을 할 때마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그것도 아니면 어떤 원망과 같은 감정인지를 토해 내듯 소리 지르면서 그는 반응도 없는 헨리의 안에 파정했다.
"수건을 적셔 찜질해 주도록."
[6]
그렇게 모질게도 맞았는데 핏방울도 맺히지 않았다. 상처는 모두 안으로 곯아 거무튀튀한 피멍으로 자리 잡았다. 헨리는 며칠 동안 침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의사를 불러야 하지 않겠냐고 길버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에단은 아들과 헤어져 마음이 허해 저러시는 것이라고 일축하였다.
내가 가져온 약과 음식들은 모두 유리 파편이 되어 버렸다. 헨리는 접시를 깨고 방 안의 집기를 부수고 침대에 앉아 울다가 잠들기를 반복했다. 망설이다 에단에게 도움을 청했다. 적어도 그는 헨리가 죽길 바라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무슨 좋은 수를 낼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과연, 에단은 하녀장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하녀장은 걱정스러워하며 처음 보는 찻잔에 따뜻한 허브 차를 담아 약과 함께 내주었다.
헨리는 통증 때문에 똑바로 누워 있지 못했다. 돌아누워있는 그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잠을 잘 리 없건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일단 차부터 내밀었다. '목이라도 좀 축이셔야죠.’ 그 말에 헨리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다 찻잔을 집어 들었다.
또 던지겠구나. 각오를 다지고 있는데 헨리는 어금니를 콱 악문 채 무언가를 망설이다 다시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도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성가시게 하지 말고 나가!"
기이한 일이었다. 곁에 서서 그의 분이 풀리기를 기다렸다.
"왜 나가지 않고 있는 거지?"
“약을 드시면 통증이 덜할 겁니다. 약을 드세요, 나리.”
“날 혼자 좀 내버려 둘 수 없나?”
"약을 드시면 자리를 비켜 드리겠습니다."
헨리는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가져와.”
그리고 드디어 내가 내민 약을 먹었다. 안정 효과가 강한 진통제였다. 통증이 나아졌는지 표정은 밝아졌지만 사지가 축 늘어져 몸을 제대로 가누질 못했다. 헨리는 힘없이 침대에 몸을 묻었다. 나는 이불을 정돈해 준 뒤 나가려 하였다.
“여기 있어.”
그렇지 않아도 힘들 그에게 괜한 말을 쏘아붙이고 싶진 않았다. 뜻대로 해 주었다.
“앤디, 성경은 어디까지 읽었지?"
"이제 창세기가 끝나갑니다."
“생각나는 구절이 있나?"
“글쎄요, 아직은 제대로 외우고 있지를 못해서………
“아무 구절이나 읊어 봐."
왜 하필 그 구절을 생각났던 것일까.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촉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으로 받아들이고,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놓으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 돌아왔는데 부리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놓으매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창세기 8장 9절-12절).”
‘더 외울까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료하게 곁을 지키다 빈 찻잔을 보았다.
“왜 저 잔은 던지지 않으셨습니까?”
“・・・・・・ 첼시에서 어렵게 주문한 도자기 세트다. 모두 팔아버렸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는 남아 있었나 보군. 있던 자리에 넣어 둬.”
“값비싼 물건이군요?"
“값이 문제가 아니야.”
찻잔을 바라보는 헨리의 눈에는 어떤 깊은 애정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솜씨 좋은 장인이 혼을 담아 만든 예술품이기 때문이다.”
“예술품이요?”
그러고 보니 헨리는 늘 방의 집기를 부수곤 했지만 그림이나 조각품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난 예술품은 부수지 않아.”
찻잔에 흠이라도 갈세라 조심조심 협탁에 얹었다. 그리고 다시 가지고 갈 때 옷으로라도 한 번 더 감싸야 하는 게 아닌지 망설였다.
“예술품이라고 하니 그것이 떠오르는군."
그사이 헨리는 약 기운 때문인지 느릿하게 자신의 추억을 되짚었다.
“아버님이 살아 계실 때, 예전의 일이지. 독일에 다녀오며 호두까기 인형 하나를 사 오셨어. 아버님은 나와 에단 가운데 더 우수한 아들에게 그 인형을 주겠다고 하셨지. 에단은 여러모로 나보다 나은 놈이었으니 아마도 아버님은 에단을 염두에 두고 그 인형을 사 온 것일 거야."
하녀장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버님은 모르셨어. 에단도, 우리를 평가한 스튜어트 부인도 몰랐지. 정교한 장치나 만듦새를 보아 그 인형은 단순한 장난감이 아닌 어느 이름 모를 장인의 예술 작품이었어. 이 집에서 나만이 그 가치를 알아봤지. 내가 그것을 가져야 했어. 나라면 그것의 가치를 알아줄 수 있었어. 그러나 아버님은 에단에게 호두까기 인형을 주셨지. 아, 정말이지.....….”
그는 허탈하게 웃다가 마치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그건 훌륭한 예술품이었는데….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리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
이불을 덮어 주며 생각했다. 헨리는 호두까기 인형을 훌륭한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헨리는 예술품을 부수지 않는다.
하녀장은 에단이 밤새 산산조각이 난 호두까기 인형 파편들을 들고 다니며 고쳐 달라고 도움을 청했다고 했다. 내가 아는 에단은 부서진 장난감에 미련을 가질 사람이 아니었다.
헨리는 한나를 사랑했다. 한나는 새까만 머리칼을 한 아이를 낳았다.
“오래 머무르고 있더구나, 앤디?”
방문을 열자마자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하마터면 잔을 깨트릴 뻔했다.
“나리께서 야, 약을 드실 때까지 기, 기다린 것입니다, 주인님."
“수고했다.”
에단이 저벅저벅 내게로 다가왔다. 잔을 받친 손이 덜덜 떨렸다.
“이 잔은 던지지 않았지?"
"예? 예, 주인님."
“헨리는 이런 것들을 좋아했지. 허영심만 가득 차선 예술품인지 뭔지를 열심히 사 모으더니 결국 도박 빚에 모조리 팔아 치워 버렸어.”
에단은 쟁반 위에 놓인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이건 결혼식 예물로 쓰기 위해 첼시에서 주문했던 물건일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남겨 둔 모양이지?”
문득 찻잔 입구를 만지던 손가락에 꾹 힘을 주었다. 쟁반이 기울어지면서 찻잔이 허망하게 바닥으로 추락했다. 퍽.
“이런."
에단은 코웃음을 한번 치더니 내 곁을 스쳐 가 버렸다. 산산조각 난 찻잔, 아니 '예술품'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눈물이 불쑥 솟았다. 북받치는 설움을 꾹꾹 짓누르면서 나는 왜 우는지도 모르는 채로 눈물을 떨궜다.
헨리는 다시 찻잔을 찾지 않았다. 그는 아마 찻잔이 깨진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호두까기 인형이 망가진 것을 알지 못하듯이.
영영.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