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종탑 위에서
[1]
서재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아내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진하게 우린 홍차와 과자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를 향해 애써 웃음 지었다. 아이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을 아내에게또 다른 걱정거리를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예배 이후부터 쭉 기분이 안 좋아 보여요. 스미스 부인께서 첫 예배를 그렇게 훌륭하게 진행하신 목사님은 처음봤다고 칭찬이 자자하셨답니다. 무엇이 마음에 걸렸는지모르겠지만 차차 나아질 거예요.”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고맙소."
잠에서 깼는지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아내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섰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태어난 뒤 그녀와 오붓한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함께 요람으로 갔다. 우는 아이를 안아 달래고 새 기저귀를 갈아입혔다. 방실방실 웃는 아이의 얼굴은 마치 성화에 그려진 아기 천사와도 같았다.
"잠깐 산책이라도 다녀오겠소?"
“아이를 혼자 두고요?”
“이 교회 앞으로만 한 바퀴 돌고 옵시다. 아이가 울면 소리가 들릴 게 아니오?"
아내는 수줍게 웃으며 아이의 주위를 다시 한 번 정돈했다.
교회 주변에는 꽃이 많았다. 화단에도 정원에도 이름 모를 풀꽃들이 만발했다. 한 송이를 꺾어 아내에게 주려 하니 그녀가 만류했다. ‘이것들도 모두 하나님이 내린 생명인데 그리 함부로 다루지 말아요.' 어쩌면 나보다 그녀가 더 목사라는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사랑스런 아내의 이마에 경건하게 입을 맞췄다.
“언덕길에 해바라기가 참 많던데 예전에도 그랬나요?"
“아니, 내가 고향을 떠날 때는 해바라기가 없었소.”
“마을의 풍경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렇소?”
잠시 멈춰 멀리 언덕 아래로 보이는 해바라기 무리들을 굽어보았다.
“해바라기는 항상 해를 향하고 있잖아요. 신실한 사람들의 모습 같아 보기 좋아요.”
해바라기 사이로 지나가던 에단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어 스테인드글라스 빛을 받아 더욱 싱그럽게 빛나던 그의 젊음을 상기하자 등줄기가 쭈뼛 곤두섰다. 아아 주님이시여, 부디 이 어린양을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아내와 맞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내의 얼굴에 다시 걱정스러운 빛이 맴돌았다.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입술이 쉬 떨어지지 않았다.
"앤더슨?"
그때 낯선 목소리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설마 앤더슨, 그 꼬마 악마 놈이냐?”
뒤돌아보니 교회 쪽에서 허리가 굽은 늙은이 하나가 지팡이를 짚으며 비틀비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내는 겁을 먹고 내 뒤로 숨어 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그 늙은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종지기 스티븐 생긴 것도 추악하고 언행이 거칠었지만 정작 사람들을 해할 만한 짓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 교회의 종지기오. 걱정 말고 먼저 들어가 쉬어요.”
스티븐은 제게 꾸벅 인사를 하고 총총히 달아나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다 누런 가래침을 찍 뱉었다.
“새 목사가 왔다고 하기에 이번에는 어떤 놈인가 하였더니 맙소사, 악마 놈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꼬마 악마였군. 세상이 어찌 될는지.”
좋지 않은 말만 늘어놓았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스티븐은 이 마을에 돌아온 후 나를 처음으로 먼저 알아봐 준 사람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스티븐 아저씨.”
“회개라도 한 게냐? 그렇다고 해도 악마의 심부름꾼을 한 죄가 씻기진 않을 게다.”
“악마라니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모르는 척하는군! 하, 저 저택의 시꺼먼 악마 놈 말고 이 마을에 악마가 더 있단 말이냐?"
그리고 에단의 본질을 알아본 첫 사람이기도 했다.
“에단 달턴 씨 말입니까?"
종탑에만 웅크리고 사는 그가 에단과 수도 없이 마주친 저택 하인들보다도 더 그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기에 나는 불현듯 호기심이 일었다.
“차라도 하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차? 계집애 같은 취향이로군.”
"그렇다면 브랜디라도"
스티븐은 다시 한 번 찍 침을 뱉고 어기적어기적 종탑 위로 돌아갔다. 승낙의 표시라고 생각했기에 나는 가파른 사닥다리를 타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2]
어디에서 난 것인지 스티븐은 독한 럼주를 커다란 잔에가득 따라 내밀었다. 나는 술을 즐기지 않았다. 술이라는놈이 헨리의 영혼을 갉아먹는 것을 낱낱이 지켜보았기에굳이 내 손으로 그것을 들이켜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도스티븐의 장단을 맞춰 줄 필요가 있어 한 모금 목을 축였다. 매캐한 알코올 냄새가 코끝을 찡하게 울렸다.
스티븐은 그런 것을 벌컥벌컥 잘도 들이마셨다. 질긴 육포를 질겅거리면서도 손을 한 자리에 가만두지 못했다. 이것을 만지고 저것을 달각거리면서 잔이 비면 내가 술병을들 새도 없이 잔을 채웠다. 그렇게 두 잔을 내리 비웠다.
“에단 달턴 씨에 대해서 무언가 알고 계십니까?"
취기에 겨워 둥그스름한 몸을 좌우로 흔드는 것을 보며나는 지금이 그의 입을 열게 할 적기임을 알았다.
“에단? 그 악마 말이냐?”
“다른 분들은 모두 형님이신 헨리 달턴 씨를 극진히 모시는 훌륭하신 분이라고 하던데요.”
“하하, 얼간이들. 어디 악마가 검은 뿔과 꼬리를 보란 듯매달고 나다니더냐? 겉보기는 사람과 똑같은 형상을 하고있지. 하지만 영혼이 검어. 안개 낀 밤하늘만큼이나 검은놈이야."
“어째서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스티븐은 잠시 경계하는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시 술 반 잔을 거푸 들이켰다.
“계집아이들은 나를 무서워하지. 네 아내처럼 말이다, 앤더슨. 그것들은 겉모습이 그럴싸한 것들만 좋아하거든.”
"스티븐, 그건 당신이 거친 말을 해서 그런 겁니다. 제 아내는 겉모습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 그래. 너는 그리 믿고 살거라."
아내를 모욕하는 것이 불쾌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하지만 그 애들은 달랐어.”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릴리와 한나."
한나라는 이름을 여기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한나 달턴 말입니까?"
“그래, 이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꼬마 악마야. 릴리 달턴과 한나 달턴 말이다.”
“릴리 달턴은 누구죠?"
스티븐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누구긴 누구겠냐. 악마를 낳은 불쌍한 계집이지. 네아내에게도 꼭 일러라. 계집아이들은 방심을 하면 언제든 악마가 뱃속으로 숨어들 수가 있어. 릴리도 그랬지. 참으로 신실하고 순수한 아이였는데 결국 열 달 동안 악마에게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고 말았어. 그 망할 것을 낳은 뒤 자살했지. 자살을 한 사람은 신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데. 이해는 간다. 이미 악마에게 몸을 내준 계집이니 어차피 신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릴리 달턴과 친하셨나요?”
스티븐의 누런 눈자위가 불그스름하게 충혈되었다. 이번에는 내가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그렇게 한 잔을 마저 비운 뒤 스티븐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옛날이야기를 시작했다.
릴리가 이 마을에 온 것은 50여 년 전, 스티븐이 교회의 하인으로 일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지금은 교회의 괴팍한 종지기로 통하는 그였지만 젊은 시절 그의 별명은 '난쟁이 괴물'이었다고 했다. 남들의 허리에밖에 차지 않는 키로농사일도 변변히 돕지 못하는 그를, 부모는 교회로 보내 허드렛일을 돕게 하였다. 스티븐에게도 그편이 나았다.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다 객사할 팔자였던 그에게 교회는 적어도 잘 곳과 먹을 것을 마련해 주었다.
[3]
어느 겨울밤이었다. 스티븐은 여느 때처럼 예배당 청소를 하고 있었다.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고 했다. 또 누군가 싶어 문을 여니 한 어린 소녀가 그의 품으로 와락 뛰어들었다. 얇은 옷만 걸친 소녀는 추위에 새파랗게 얼어 떨고 있었다. 스티븐은 정신을 잃은 소녀를 간신히 업고 목사에게로 달려갔다. 목사는 급하게 의사를 불러 소녀를 추슬러 주었다.
며칠 동안 심한 열에 시달리다 소녀는 간신히 회생했다고 했다. 새까만 머리에 짙은 녹색 눈동자를 한 소녀는 어색한 말투로 자신의 처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는 따뜻한 남부 지방의 ‘산골 마을’ 출신으로 어느 날 마을에 왔던 집시 무리들이 그녀를 납치해 이곳까지 끌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과 달리 피부가 희고 예쁘장한 릴리에게 집시의 옷을 입히고 춤을 추게 하였다고 했다. 제대로 돈을 벌지 못하면 모진 매질을 했기 때문에 매일매일이 지옥 같았노라 그녀는 치맛자락을 적셨다.
그러다 집시 무리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무작정 도망 나왔다고 했다. 그녀는 이곳이 어디인지도 자신이 살던 곳이 어디였는지도 몰랐다. 따뜻한 남쪽. 그렇게만 말을 하였으나 억양을 보아 이 나라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사는 그녀의 고향이 어디인지 수소문해 보겠다고 하였으나 소녀조차도 자신의 고향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지 않았다. 소녀는 자신을 릴리라고 부르라 했다.몸을 회복하자마자 그녀는 교회의 허드렛일을 도우며 마을에 녹아 들어갔다.
사람들은 밝고 쾌활한 성격의 릴리를 좋아했다. 이국적인 검은 머리칼과 햇볕에 가무잡잡하게 탄 얼굴, 얼굴 가득짓고 있는 함박웃음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했다. 마을의 남자라면 누구나 릴리에게 흑심을 품어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스티븐 역시 그런 마을의 남자 가운데 하나였으나 자신의 추한 외모를 생각해 조용히 들꽃을 꺾어주는 것 이외에 그녀에게 어떤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바라만 보아도 기분 좋은 아이. 그것이 릴리였다. 하지만그녀가 어엿한 처녀티를 내기 시작하며 상황이 달라졌다.그저 그녀에게 첫사랑과 같은 풋풋한 감정을 품고 있던 대부분의 남자들과 달리 릴리에게 못된 욕망을 품은 놈들이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예배를 위해 교회에 모인 어느 주일. 예배가 끝난 뒤 대접할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마을 우물에 물을 길러 갔던 릴리는 괴한에게 납치되어 헛간으로끌려갔다. 마을의 골칫거리였던 남자였다고 했다. 릴리는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코피가 터져 온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 정도로 얻어맞았지만 끔찍한 일을 당하기 직전 도망칠수 있었다. 정신없이 교회로 뛰어 올라갔다. 남자는 끈질기게 그녀의 뒤를 쫓았다. 마침 예배가 끝나 사람들이 나오는중이었다. 릴리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자신을 끌고 가려는 남자에게 날카롭게 저주의 말을 뱉었다.
"이거 놓지 못해, 이 불한당아! 이런 짓을 하려 하고도 신의 용서를 구하려는 거냐? 신이 널 벌하지 않으면 내가 널저주할 거야! 죽어 버려!”
마을사람들이 호통을 쳐 남자를 쫓아냈다. 아주머니들이 목 놓아 울고 있는 릴리를 달래 주었다. 그렇게 일이 마무리되는가 싶었다. 다음 날, 그 남자가 술에 취해 도랑에거꾸러져 죽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누가 먼저 퍼트린 것인지는 모르나 릴리가 집시들에 의해 악마가 씐 마녀라는 악의 가득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처음에는 그녀에게 동정적이던 동무들도 하나둘씩 등을돌리기 시작했다. 새삼스레 돌을 던지고 침을 뱉진 않았지만 그녀는 조용히 외톨이가 되어 버렸다. 스티븐은 그녀를위로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다가갈 수가 없었다.그렇잖아도 놀림감이 된 그녀가 난쟁이와 어울린다는 소문이 돌았다간 더욱 조롱거리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릴리는 마치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붉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주방에 박혀 일만 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시들어 가는 그녀의 정신과 달리, 릴리의 외모는 더욱 화사하게 꽃피어 그녀를 악마라 경멸하는 사람들조차 릴리를 앞에 두고는 차마 욕을 하지 못했다. 어느 날 목사가 릴리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달턴 부인에게 보내야 할 답례품이 있는데 부인께서 심부름꾼으로 릴리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었다. 마을에 소문이 자자한 마녀를 구경하고자 하는 것이겠지. 릴리는 불쾌했겠지만 목사의 말을 거절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날, 릴리는 밤이 늦어서야 교회로돌아왔다.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듯 양 볼이 빨갛게 상기된채 기쁨에 들떠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스티븐! 내 말 좀 들어봐요.”
그녀는 밤이 새도록 수다를 떨어 댔다. 대부분은 달턴 부인이 자신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는지에 대한 찬사였다. 그 이후로도 달턴 부인은 릴리를 다과회에 초대하기도 하고 언제든 놀러 오라며 그녀를 수시로 저택에 끌어들였다. 마을 처녀들은 마치 이야기 속의 세계로만 여겼던 달턴 저택에 그녀가 드나드는 것을 부러워했다. 멀어져 갔던 무리들이 차츰 릴리의 곁으로 다시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릴리가 그들을 거부했다. 스티븐에게 달턴 부인이 준 선물들을 보여 주기도 하고, 화사한 옷을 입은 채 빙글빙글 돌며 허영심에 부풀어 매일매일 주제에 맞지 않는 꿈을 꿨다. 스티븐은 참다못해 그녀에게 부자들을 너무 믿지 마라, 달턴 부인이 왜 네게 그리 잘해 주는지 잘 생각해 봐라, 하고 타일렀다. 그 이후로 릴리는 스티븐과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
그날이 어떤 밤이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인 것만은 분명했다고 스티븐은 전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내려가니 릴리가 조그마한 보따리를 들고 교회를 몰래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달턴 부인이 저택의 고용인으로 일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셨어요. 말이 고용인이지 부인의 이야기 상대만 하면 된대요. 부인은 헨리 도련님을 낳고 심신이 많이 지치셨어요. 그래서 내가 필요하다고 하셨단 말이에요. 스티븐, 제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줘요. 제가 그냥 야반도주를 했다고 말해도 좋아. 하지만 부인이 교회의 종을 빼앗아 갔다는 누명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말을 누가 했지? 교회의 종을 빼앗는다는 누명을 쓸 수 있으니 몰래 도망 나오라는 말을 누가 했어, 릴리!”
“달턴 부인이 걱정하는 것을 들었어요. 제게 직접 말하신건 아니에요. 제발 약속해 줘요. 내가 어디로 갔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응?"
스티븐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에게 매달려 애원하는 이제는 그보다 훌쩍 커 버린 릴리를 말릴 수 없음을 알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는 스티븐의 양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 곧장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
여섯 달 뒤, 저택을 꾸밀 정원수를 나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티븐은 일꾼들의 무리에 섞여 달턴 저택으로 들어갔다. 릴리가 잘 살고 있는지 먼발치에서라도 보기 위해서였다. 릴리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정원 한구석에 살짝 부푼 배를 끌어안고 혼이 나간 듯 앉아 있었다. 일꾼들이 들어오자 하녀 하나가 릴리를 강제로 잡아 일으켰다. 저택으로 끌려가는 그녀의 뒤를 쫓았다.
원래 하인들은 그를 끌어낼 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티븐을 발견한 릴리가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결국 릴리를 위해 하인들이 물러섰다. 둘은 아주 잠시 대화를 나눴다. 릴리는 그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 주었다. 헨리를 낳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 되어 버린 부인이 남편이 다른 여자들과 외도하지 않도록 릴리를 그의 침실로 밀어 넣었다는 것이었다. 달턴가의 주인, 제임스 달턴은 체면치레를 하듯 두어 번 부인의 뜻을 거절하더니 결국 릴리의 탐스러운 젊음을 게걸스럽게 탐했다.
“이곳에 악마의 씨앗이 들어 있어, 스티븐."
릴리는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며 다시 돌아온 하녀들에게 이끌려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네 달 후, 스티븐은 릴리가 자살을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 푼, 두 푼 모아 온 돈을 들고 저택 앞까지가 아무 하인에게 돈을 쥐여 주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는 달턴 부인의 뜻에 따라 첩으로 들어온 릴리가 아이를 낳고 그 우울증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였다고 했다. 그 뒤 머뭇거리다 그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죽기 전에 작은 마님께서 말입니다, 그렇게 외치셨다고 하지요. ‘악마가 태어났다'라고.”
릴리는 그렇게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4]
스티븐에게 릴리는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 같았다. 감정이라고는 모두 말라비틀어졌을 법한 삼나무 껍질 같은 늙은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졌을 때 나는 그의 해묵은 분노를 느꼈다. 스티븐은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나는 창고로 내려가 말린 과일과 육포 등을 챙겨 다시 종탑에 올라갔다. 안주 같은 것은 필요 없노라 구시렁거리면서도 거절하지는 않았다.
“릴리 달턴의 일은 처음 알았습니다. 저택에 있을 때에도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듣지 못했죠."
“그것들에게 릴리 달턴은 미친 이방인 계집애였을 뿐이었으니까."
"왜 진실을 알리려 하지 않으셨습니까?"
“교회에서 밥이나 빌어먹고 사는 난쟁이 괴물의 말을 누가 들어 주겠나. 그리고 내가 그런 말을 섣불리 퍼트렸다가는 릴리의 아들이 다칠 수 있었어. 그때는 그 애가 낳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몰랐으니까 말이다."
저택 사람들은 에단의 출생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에단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에게도 릴리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제임스 달턴과 전 마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종교와 같았으니 말이다. 이 절대적인 애정은 그들의 자식조차도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없었다. 부부가 간택한 자식에게만 그 애정이 계승되었다. 안타깝게도 헨리는 선택받지 못한 편이었다.
제임스 달턴은 그렇다 치더라도 전 마님이 친아들인 헨리보다도 에단을 더 아낀 이유가 궁금했었다. 몇 번을 망설이다 하녀장에게 물어보았었다. 그녀는 머뭇거리긴 하였으나 못 할 말도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큰 주인님은 태어날 때부터 까탈스러웠거든. 난산이었지.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꼬박 진통을 하셔야 했단다. 그때 전 마님께서 몸을 크게 상하셨어. 결국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 되고 말았지. 전 마님께서는 참으로 다정하신 분이었지만 그 이후로 우울증이 생겨 가끔씩 소리를 지르고 자해를 하셨단다. 그래서 전 마님과 주인님은 헨리 도련님을 이기적인 아이라고 부르셨지. 사실 에단 도련님이 사생아로 태어난 것도 헨리 도련님께서 전 마님을 그리 만든 탓이니 ・・・・・・ 아참, 이 말은 못 들은 셈 치거라.".
헨리는 그 집의 모든 죄악을 한 몸에 짊어져야 하는 존재였다. 부모의 과오가 그를 원죄처럼 짓눌렀고 작은 실수만 해도 마치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양 손가락질당해야 했다. 헨리는 그 모든 것을 운명처럼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가 용인하지 못한 것은 단 하나.
"한나 달턴에 대해서도 무언가를 알고 계신 것 같던데
요.”
한나를 에단에게 빼앗기는 것뿐이었다.
“한나.”
스티븐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다시 기억을 더듬었다. 취해 있어서 그런지 한나를 회상하는 그는 마치 꿈속을 떠도는 사람처럼 몽롱해 보였다.
“그 애 역시 참으로 순진하고 멍청한 계집애였지. 저택의 것들은 한나를 어떻게 말하던가?"
“몸이 약한 귀부인이었다고요. 성정도 착하고………….”
사실 그들은 한나에 대해 많은 말을 해 주지 않았다. 그들조차도 한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그들이 한나에 대해 언급할 때는 오직 에단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전할 때뿐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귀결은늘 헨리의 비열함으로 이어졌다.
"하. 그것들은 한나에게 관심이 없었어. 그 계집애는 정략결혼의 도구가 되기 위해 저택에 왔지. 전 마님은 말이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자신이 쫓겨나지 않기 위해 집안의계집애를 헨리와 결혼시켜 집에 들여앉힐 계획을 했어. 그렇게 온 아이가 한나지. 그거 아나? 한나는 문맹이었어.”
“네?”
달턴 가와 정략결혼을 할 정도로 부유한 집안의 딸이 문맹이라니.
“글을 가르쳐 주면 금세 잊어버렸지. 내 말하지 않았냐.그년은 정말 멍청한 계집애였어.”
그제야 달턴 저택의 사람들이 왜 한나에 대해 말을 아끼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은 자신이 신격화하던 마님이 직접헨리의 짝으로 데려온 아이가 덜떨어진 바보였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우스운 건 말이다, 그 자존심 강하고 오만한 헨리가 바보 계집애를 좋아하게 됐다는 거지.”
초상화를 향해 시를 읊어 주던 헨리의 모습이 떠올랐다.한나의 이야기를 할 때면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미안해,한나. 내가 잘못했어.' 그는 펜던트를 두 손으로 꼭 움켜쥔채 수도 없이 그녀에게 용서를 빌었다.
술병에 술이 떨어졌다. 새 병을 냉큼 가져와 코르크를 열었다. 스티븐은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5]
한나 달턴, 아니 한나 에반스는 어린 나이부터 헨리의 정혼자로 낙점되어 달턴 저택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했다. 스티븐이 처음 그녀를 만난 것은 뜻밖에도 헨리 때문이었다.
“헨리 달턴 씨가 이 종탑에 왔었다고요?”
나는 참지 못하고 그의 말에 끼어들었다. 스티븐은 불쾌하다는 듯 낯을 찌푸리더니 거푸 술을 두 잔이나 들이마셨다.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래. 헨리는 이 종탑을 좋아했지."
헨리가 처음 종탑에 온 것은 스티븐이 종지기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왔던 헨리는 뎅그렁거리는 종소리에 호기심이 동했는지 달턴 부부가 사람들과 환담을 나누는 사이 몰래 종탑 위로올라가 종을 잡아당겼다. 어린 아이의 힘이라 종이 울리진않았다. 다행이었다. 만일 그대로 종이 울렸다면 헨리는 귀를 다쳤을지도 모를 테니까. 스티븐이 단박에 따라와 종을빼앗았다. 헨리는 조금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그에게 대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나쁜 짓을 한 것처럼 굴 필욘 없잖아. 종을 친다고 종이 닳는 것도 아닌데!”
스티븐은 이런 것에 질 위인이 아니었다.
“교회의 종을 치는 것은 종지기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임이란 말입죠. 그것을 도련님이 빼앗으려 하였으니 얼마나 큰 죄랍니까? 그것도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숨어 들어와서 말입니다.”
헨리의 온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스티븐은 그것이 그가 성이 나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에게 이르겠다며 큰 소리를 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헨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미안. 매일 종이 울리는 것을 보다보니 궁금해서 올라왔어. 종을 치는 것이 네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 줄은 몰랐다.”
스티븐은 그때 기분이 이상했다고 전했다. 그는 그때까지 헨리를 탐탁찮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헨리를 처음 봤을 때처럼 그의 눈에도 헨리는 오만하고 버릇없는 꼬맹이로 비쳤을 것이다. 자신의 잘못도 끝까지 인정하지 않은 채 바락바락 악만 쓰는 멍청이라고 생각했는데.
“종을 치는 것을 보고 싶습니까?”
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티븐은 솜을 가져와 헨리의 귀를 막고 줄 끝을 내어주었다. ‘괜찮겠어? 그대의 소임이라며.' 헨리는 주저했지만 함께 당기자는 말에 냉큼 줄을 움켜쥐었다.
뎅그렁뎅그렁. 귀를 막았어도 온몸을 전율케 하는 거대한 울림에 헨리는 한참이나 얼빠진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여운이 가시고 나서야 그는 스티븐에게 인사했다.
“고마워. 귀를 막지 않았다면 크게 다칠 뻔했네.”
그리고 그 후로 자주 종탑에 올라와 스티븐이 일을 하는 것을 지켜봤다고 했다.
처음의 좋지 않던 감정은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티븐은 헨리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느끼진 않았던 것 같았다. 적어도 마을 아이들처럼 귀찮게 굴지는 않으니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그 정도로 헨리의 방문을 방치했다. 그러던 어느 날 헨리가 빨간 머리 여자아이 하나를 데리고 왔다. 그녀가 바로 한나였다.
“스티븐, 한나에게도 종을 한번 쳐 보게 해 주면 안 돼?” 당연히 안 된다고 말하려 했다. 한번 기회를 주니 자꾸기어오르는구나 싶어서. 그러나 한나라는 아이가 좀 이상했다. 생긴 것은 수수한 동네 계집아이처럼 생겼으나 눈이 흐리멍덩했고 말을 하는 것이 어눌했다. 헨리는 그런 한나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고 그녀의 귓가에 '여기는 교회의 종탑이야. 한나, 발코니에서 봤지? 저 멀리 교회의 종이 울리는 걸 말야. 바로 저분이 매시간 종을 쳐 주시는 거야’라는 뻔한 말을 속삭였다.
한나는 그 말에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스티븐은 어쩐지 그의 청을 거절해선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두 아이에게 솜을 내밀었다. 헨리는 한나의 귀를 꼼꼼히 막아주고 자신의 귀도 막았다. 종이 울리자 한나가 입을 헤벌린 채 벙싯거리며 웃었다. ‘종이 울려, 뎅뎅뎅!’ 그 말에 헨리도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일상생활을 못할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지만 한나는 그런 아이였다. 헨리는 그런 한나를 데리고 다니며 옛날이야기를 읽어 주고 시를 읊어 주었다. 한나는 그럴 때마다 두 손을 단정하게 모으고 헨리의 목소리에 얼굴을 붉혔다. 둘은 서로를 좋아했다. 적어도 스티븐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아무도 날 믿어 주지 않아. 하지만 한나는 날 믿어 줘.” 한나의 어디가 좋으냐고 넌지시 물었을 때 헨리는 그렇게 대답했다.
“헨리는 상냥해요. 제가 바보라고 놀리지도 않아요.”한나도 마찬가지였다.
스티븐은 헨리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한나에게는 살갑게대해 주었던 것 같았다. 한나는 혼자서도 가끔 종탑 위로올라와 스티븐과 이야기를 나눴다. 헨리만으로 가득 찼던그녀의 일과에 어느 순간부터 '에단'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에단은 헨리와 똑같이 그녀에게 시를 읊어 주고 이야기책을 읽어 주었다. 그리고 헨리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해 주지 못한 그 말. '사랑한다'라는 말을 속삭여 주었다.
“한나, 너는 헨리를 좋아하지 않았니?”
“그렇지만 에단은 저를 사랑한다고 했어요
“헨리도 너를 사랑할 거다.”
헨리는 절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는걸요?"
"그럼 너는 헨리가 아닌 에단을 사랑하는 게냐
?"
“둘 다 좋아요. 둘 다 제게 책을 읽어 주는걸요. 그렇지만 에단은 제게 사랑한다고 했고 헨리는 아니니까.”
“둘을 좋아하는 마음을 저울의 양끝에 올려 두었을 때같다면 에단을 택하는 것이 좋겠구나. 그렇지만 한쪽으로기울어진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라."
한나는 스티븐이 만들어 준 양팔 저울을 만지작거렸다.
"사실은 헨리가 조금 더 좋아요.”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한쪽에 자갈돌을 몇 개 더 얹었다.양팔 저울이 기울었다.
“헨리는 저를 다정하게 봐 줘요. 에단은 가끔씩 조금 무서운 눈을 하는데 말이에요.”
“만약 헨리가 네게 사랑한다고 말하면 너는 헨리를 받아들이겠구나?”
“그렇지만 헨리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헨리는 점차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마을에 올 때에도 그는 늘 혼자였다. 종탑을 찾아온 한나의 이야기 속에서헨리의 이름이 사라졌다. 에단은 그녀가 좋아하는 것만을 보여 주었고 듣고 싶어 하는 말만을 골라 해 주었다. 스티븐은 솔직히 릴리의 아들인 에단이 잘되는 것이 기분 좋았었다. 릴리를 죽게 한 자들의 아들인 헨리의 것을 에단이 빼앗는 것에 대리 만족을 느끼며 한나에게 헨리에 대한 마음을 상기시키려 하는 일을 그만뒀다.
***
비 오는 날이었다. 누군가가 종탑의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여니 비를 쫄딱 맞은 한나가 엉금엉금 기어 올라왔다.
"헨리가 제게 사랑한다고 했어요!"
추위에 떠는 그녀에게 담요를 둘러 주었다. 한나는 기쁨에 겨워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소리쳤다.
“헨리가?”
"제가 에단에게 가는 것이 싫대요. 저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녀는 그때 이미 에단과의 혼사가 진행되던 중이었다. 그러나 한나는 그런 것을 몰랐다. 이해하질 못했다.
“에단에게는 어떻게 말할 거냐?”
“그치만 아저씨가 말하셨잖아요. 저울이 기운 쪽으로 가야 한다고요."
그런 것은 용케도 기억을 했다. 스티븐은 괜한 덤터기를 쓴 것 같아 기분이 찝찝했다.
“에단도 이해해 줄 거예요. 좋은 사람이니까요.”
"그래? 그런 것을 이해해 줄 만큼 좋은 사람인 게냐?"
“네. 사람들은 다 에단이 정말 착하고 다정한 분이라고 말하는걸요?"
“너는,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한나는 그때만큼은 머뭇거렸다.
"좋은 분이에요. 그런데 좀 ・・・・・・.”
스티븐의 시선을 피하며 파랗게 질린 입술을 달싹였다.
"......무서워요."
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그렇지만 스티븐은 그것이 그저 헨리에게 마음이 기운 그녀의 착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흘 뒤, 에단과 처음으로 마주치기 전까지 그는 에단을 릴리의 분신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6]
그날, 스티븐은 교회 주변을 순찰하고 있었다. 교회 뒤에는 낡은 창고가 하나 있었는데 축제 때나 쓰는 물건들이나낡은 장신구들을 넣어 두는 그런 곳이었다. 그 앞을 지날 때 스티븐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으윽, 살려 줘요, 윽, 으흑!"
계집아이의 가는 신음 소리였다. 동네의 못된 무리들이 가끔 고약한 짓을 하려고 이 창고를 이용한다는 소문을 들었었다. 스티븐은 발소리를 죽여 몽둥이 하나를 들고 다시 창고로 다가갔다. 낡은 문짝을 툭툭 두드렸다. 안에서 나던 소리가 뚝 끊겼다.
“누구냐, 어느 놈이 신성한 교회에서 못된 짓거리를 하는 게야!"
걸쇠가 걸려 열리질 않았다 문을 몇 번 더 쿵쿵 두들겼다. 잠잠하던 신음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아저씨, 아저씨, 살려 주세요.’ 분명 스티븐을 부르는 소리였다. 그제야 그는 이 목소리가 자신이 아는 음성과 닮았음을 깨달았다.
"한나?"
문을 부숴서라도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한나의 목소리에 그는 그만 굳어 버리고 말았다.
“에단, 제발 이러지 마, 아파, 아파아………!”
그녀를 범하고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에단 달턴이라는데에.
한나가 헨리에게 가겠다는 말에 노한 것일까? 말려야 하나? 하지만 그가 한나를 강간했다면 한나는 어쩔 수 없이 에단에게 시집을 가야 할 것이다. 소리를 듣자 하니 이미 늦은 것이 아닌가. 스티븐은 쳐들고 있던 몽둥이를 떨구고 말았다. 그는 릴리의 아들을 위해 한나가 끔찍한 꼴을 당하는 것을 방조했다. 대신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조용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헨리에게 가겠다고? 멍청한 계집. 이미 늦었다는 것을 왜 몰라? 보름 전에 월경을 했지? 너는 그것을 감출 줄도 모르는 년이잖아. 오늘 내 아이를 가지게 될 거야. 내 아이를 가지고 헨리와 결혼을 할 순 없을 거 아냐? 넌 헨리에게 갈 수 없어, 한나."
그때 마른하늘에 벼락이 쳤다. 나는 스티븐의 그 말만큼은 온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을 과장하려 지어낸 것일지도 모르고, 아니라면 스티븐이 만들어 낸 환청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종지기들은 다들 귀에 어떤 이상이 있곤 하니 말이다.
"한나, 한나, 한나. 내가 좋은 말로 사랑한다고 했을 때 받아들였어야지. 그랬다면 이런 험한 꼴을 보지 않았을 텐데. 한 줌 가치도 없는 계집. 어디서 주제도 모르고……………”
술을 한 모금 더 마시더니 또다시 말했다. '그때 나도 내귀가 어찌 된 줄 알았어. 하지만 진짜라고.'
…헨리를 넘봐?”
그리고 또 한참이 지난 후에야 에단이 나왔다. 스티븐과 마주쳤는데도 그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달빛을 받아 유달리 반짝이는 암녹색 눈동자로 가늘게 웃으며 그에게 은화 한 닢을 던져 주었다. 스티븐은 얼결에 그것을 받았다.
유유히 멀어져 가는 에단의 뒷모습에서 스티븐은 악마의 날개와 꼬리를 보았다고 했다. 릴리가 죽기 전 부르짖었던 말을 그제야 이해했다.
그녀는 악마를 낳았다.
[7]
나는 스티븐의 이야기 끝에 문득 에단에게 무참한 짓을 당하고 난 뒤 창백한 달빛을 받은 채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헨리의 모습을 떠올렸다. 여느 때처럼 흔적을 태우고 돌아온 내게 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었다. '벌을 받고 있는 거야. 한나를 고통스럽게 만든 벌이다.'그는 그렇게 말한 뒤 얼굴을 가린 채 또다시 흐느꼈다. 나는 그의 어깨에 따뜻한 담요를 둘러 주었었다.
“한나는 에단을 사랑했어. 그런데 난 내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한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아서 둘 모두에게 몹쓸 짓을 하고 말았지.”
그가 항상 에단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이상하다 생각했었기에 나는 조심스레 되물었다.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나리?”
“사람들을 시켜 에단을 폭행하라고 했어
“폭행이요?”
"한나와 함께 마을로 내려갔을 때 그녀의
앞에서 창피를 톡톡히 당하게 해 주라고 지시했지."
그때에도 참 어린애 같은 수법이라고 생각했었다.
“난 신에게 맹세코 정말 거기까지만 지시했어. 아아, 그런 짓을 해서는 안됐는데. 한나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보내주었어야 했는데.”
“작은 주인님이 심하게 다치셨었나요?"
“난 정말 그런 지시를 하지 않았어. 정말이야.”
“무슨 지시 말입니까?"
무엇이 그리 두려운지 와들와들 떠는 헨리를 달래 주었다. 그는 더듬더듬 내게 자신의 죄악을 고백했다.
헨리가 유치한 지시를 내린 사람들은 저택 출입이 잦았던 친구들의 하수인들이라고 했다. 불량배들로 구성된 무리였는데 헨리는 친구들의 부추김에 떠밀려 얼결에 백 파운드를 주며 한나의 앞에서 에단을 창피 주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그날 저녁 헨리를 찾아와 ‘지시한 일'을 처리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일은 헨리가 지시한 것과는 많이 동떨어진 것이었다.
"시키신 대로 창피를 줬습죠. 계집의 앞에서 울며 애원할 때까지 강간하였습니다."
“뭐라고?"
“창피를 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사내놈이 사내에게 뒤를 뚫리는 것만큼 수치스런 일이 또 있을까요.”
“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그냥 조금 때려주라고 지시했었잖아.분명 그렇게 말했다,내가 언제…………!”
“글쎄요. 저희는 그렇게 전해 들었습니다만?”
에단은 그날 짐을 챙겨 저택을 떠났다. 한나는 껍데기만 남아 헨리에게 돌아왔다. 헨리는 차마 한나에게 왜 돌아왔느냐 물을 수가 없었다. 공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목석처럼 안겨 드는 한나를 품은 채 자신이 저지른 죄악과 끔찍한 대가에 몸서리쳤다.
“제가 들은 바는 이렇습니다.”
스티브의 이야기와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헨리에게 들은 전말을 옮겼다. 맹세코 내가 다른 사람에게 그들의 일을 이야기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어리석은 헨리. 하긴, 어리석다고 할 순 없군. 악마의 속내를 그 순진한 놈이 어찌 모두 헤아리겠나."
“그럼 저것이 진실이 아니란 말인가요?"
"한나는 모든 걸 알고 있었네. 악마에게 끔찍한 짓을 당한 날 그래도 자신을 추슬러 준 사람이 나라는 생각에 이후에도 내게만은 비밀을 털어놓았지."
스티븐 씨는 이를테면 갈 곳 없는 비밀이 모여드는 소각장과도 같았다. 사람들과 교류가 없는 그에게라면 어떤 말을 해도 이 자리에서 사라지리라. 한나는 그래서 그에게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헨리가 내게 그랬듯, 나약한 사람들에게는 항상 고해할 대상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8]
에단과 마을에 내려갔을 때 한나는 이미 임신을 하고 있었다. 마을의 의원에게 진찰을 받고 나오는데 에단이 낯선 남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 에단의 표정이 어두워 보였다. 그는 간간히 한나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고 했다. 에단은 한나를 데리고 어느 외딴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분풀이를 하듯 그녀를 몇 번이나 범했다. 한나는 아프고 무서웠지만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면 아까 보았던 남자들에게 이 짓을 시킬 것이라는 말에 입을 막고 비명을 참았다.
“헨리에게 가고 싶지?"
그가 이죽거렸다. 불쌍한 한나는 마음을 감추는 법을 몰랐다.
“네, 헨리에게 보내 주세요……………”
“내 아이를 배고 헨리에게 가겠다고?"
그러나 그 말에만큼은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울었다고 했다.
“생각이 바뀌었어. 보내 주지.”
“네?”
“너를 붙잡고 있어 봤자 헨리는 항상 네년만을 바라볼 뿐, 내게는 눈길 한번 주질 않을 거다. 그런 건 내가 원하는게 아니거든."
이 부분에서는 조금 의아해져 스티븐에게 물어보았다. 한나가 이런 말을 정말 그대로 옮겼느냐고. 스티븐은 그녀가 한 말은 내가 알아듣기에는 앞뒤 없는 헛소리로 들릴 것이기에 자신이 통역하듯 재구성한 것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그의 재구성이 사실을 왜곡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헨리가 네년에게 품은 감정을 솔직히 과소평가했었어. 그런 사랑을 받을 만큼 대단한 년이 아니었으니까. 한나, 나는 헨리가 나만을 바라보길 원해. 일생 동안 내 그림자에 갇혀 몸부림쳐도 빠져나갈 수 없도록 그렇게 나만을 생각하고 내게 짓눌려 벗어나지 못하길 바란다. 뼛속 깊이 각인되어 지우지 못할 흔적처럼. 한나, 헨리에게 가.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아 봐. 다른 놈의 씨를 품었다는 죄책감에 빠져 평생 그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하면서, 언제 이 죄악을 들킬까 벌벌 떨며 살아 헨리도 역시 평생을 죄책감에 떨며 살겠지. 하하, 그래. 네년 얼굴을 볼 때마다 네년을 망가트린 자신의 과오와 내게 저질렀다고 생각할 그 죄의 대가를 떠올릴 거다. 죽는 그 순간까지 내 모습을 떨쳐 내지 못할 거야."
어리석은 한나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헨리에게 돌아가지 않겠다고 외쳤다. 어떤 결과가 올지는 모르나 적어도 자신이 헨리에게 돌아간다면 헨리가 불행해지리라는 그 사실만큼은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돌아가지 않겠다고? 꼴에 머리를 굴리는군."
어떤 협박에도 굴종하지 않겠다고 결의를 다지던 한나였지만.
“그렇다면 지금까지 네년이 당했던 일을 헨리에게 해 주겠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거든."
이 말에는 무너지고 말았다. 에단은 그날 떠났고 한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헨리에게로 돌아갔다. 헨리는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지만 한나는 끝끝내 자신이 그에게 죄를 지었다는 생각에 온전히 행복을 누리지 못했다. 아마도 그 근심이 그녀의 약한 몸을 더욱 쇠잔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한나는 조슈아를 낳은 뒤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예배당에서 치러진 장례 미사에서 헨리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고 했다. 송별사도 읽지 못하고 그는 장례 미사 도중 비틀거리며 예배당을 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불쌍한 부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까지 무례하게 군다며 그를 욕했다. 오직 스티븐만이 그가 왜 그리하는지 알아챘지만………….
***
“....…잠깐, 헨리는 제게 말할 때까지 아무런 진상도 알지 못하고 있었어요. 헨리에게 이 일에 대해 말해 주지 않은 겁니까?!"
그는 비릿하게 웃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뭐라고요? 진상을 알았다면 헨리는 그렇게 고통스러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헨리는 자신이 에단을 짓밟고 한나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매일 밤을 술로 지새우며 망가져 갔는데!”
“말했잖나. 에단은 악마야. 내가 만일 헨리에게 그런 말을 전했다면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 내가 목숨까지 걸어가며 헨리에게 진상을 말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야?"
“헨리는 당신에게 우호적으로 대했잖습니까. 당신을 친구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 그러나 그 더러운 부부의 피를 이어받았지.”
“부모가 저지른 죄악의 대가를 죄 없는 헨리가 치르게 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입니다!”
스티븐은 술기운에 뻘겋게 상기된 얼굴을 찡그렸다.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는 것은 합당하나 죄악을 물려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우스운 소리를 하는군.”
나는 그만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괴팍하기는 하나 아마도 속에는 온정이 남아 있는 늙은이일 것이라 생각했으나 지금 보니 스티븐은 영락없는 늙은 악마, 그 자체였다. 에단이 악마라면 그는 저급한 악마의 하수인이었다. 악마를 욕하면서도 그 자신이 악마가 되어 가는 것은 알아채지 못한 추악한 늙은이.
종탑을 빠져나갔다. 정신없이 언덕길을 내려갔다. 무작정 저택을 향해 달렸다. 이 일을 헨리에게 알려 주어야다. 이미 늦었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모든 사실을 깨닫고 에단의 저주에서 해방되어야 했다.
언덕길을 오르는데 새하얀 빛이 눈앞에 번뜩였다. 잠시 후 요란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발길을 재촉했다. 저택 앞에 다다라서야 간신히 문을 두드렸다. 몇 번을 소리친 뒤에야 하녀 하나가 문을 열어 주었다.
“목사님 아니세요? 이 밤중에 여기는 무슨 일이신가
요?"
“헨리 달턴 씨를 뵐 수 있을까요? 급한 일이라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또 한 번 뇌성이 울렸다. 하녀는 겁먹은 눈으로 하늘을 힐끗거렸다.
“큰 주인님께서는 건강이 좋지 않으셔 잠자리에 일찍 드신답니다. 지금쯤은 주무시고 계실 거예요."
“그래도 한번 물어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이참.”
하녀는 일단 들어오라며 로비로 나를 안내했다. 저택은 십 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녀가 어디론가 달려갔다. 하녀장에게 물어보려는 것이겠지. 하녀장은 집사를 부를 것이고 집사는 곧장,
…………에단에게 갈 것이다.
새삼스레 몸이 떨렸다. 다시 한 번 벼락이 내리쳤다.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새까만 머리칼, 새까만 정장. 검은 그림자가 2층 난간에 모습을 드리웠다. 나는 차마 그를 볼 수 없어 시선을 떨궜다. 집사장이 에단을 대신해 거실로 내려왔다.
"죄송합니다. 목사님. 작은 주인님께서 큰 주인님의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나중에 자리를 마련해 주시길 부탁드리라 전하셨습니다."
“아, 예․ 갑자기 찾아와 결례를 범했군요.”
도망치듯 저택을 나왔다. 대문을 나서는데 거센 장대비가 쏟아졌다. 양심을 어기고 악에 굴복한 나에 대한 주님의 비난이 전신을 두들기는 것만 같았다. 이에 쫓기듯 언덕을 반쯤 내려갔을 때, 나는 문득 흠뻑 젖은 고개를 들어 저택쪽을 돌아보았다. 눈으로 헨리 달턴이 있을 방을 더듬었다. 2층 헨리의 방에서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창문 언저리로 그림자가 비쳤다. 그 그림자는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빗줄기가 눈앞을 가렸지만 나는 그 실루엣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쐐기 같은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나는 정신없이 달렸다. 마치 에단을 처음 만났던 그날과 같은 폭우 속에서 살기 위해 달리면서 소리쳤다. 오오 주님이시여, 부디 저를 악으로부터 구원하소서. 아아, 나는 교회로 돌아올 때까지 단 한 번도 헨리의 구원을 기도하지 않았다.
악마의 하수인이 된 것은 스티븐뿐만이 아니었다. 나역시 그와 다를 바 없는 추악한 악의 화신이었다.
악마의 손아귀에서 살아남은 악의 동류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