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카인과 아벨 (5/12)

5. 카인과 아벨

[1]

내가 저택에 들어간 지 일 년째 되던 해 겨울은 유달리 길었다. 일찍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헨리는 겨울 내내 벽난로 근처에 몸을 웅크린 채로 에단에게 시달려야 했다. 한번은 헨리가 반항을 하자 에단이 쇠에 달군 부지깽이로 그를 위협하다 허벅지에 화상을 입히고 말았다. 내가 황급히 달려가 응급조치를 하여 상처가 덧나지는 않았지만 그 순간에단이 빨갛게 짓무르는 헨리의 살갗을 보며 묘한 황홀감에 젖는 것을 보았다. 불안감은 적중했다. 며칠 뒤 에단은 쇳덩이에 자신의 인장을 새겨 와 헨리의 허벅지 안쪽에 낙인을 찍었다. 나는 그가 고통에 울부짖는 내내 비명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을 틀어막고 있어야 했다.

“이건 지워지지 않겠네요.”

낙인은 아물며 끔찍한 흉터를 만들었다. 악마의 손톱자국처럼 헨리의 여린 살갗을 짓무르게 해 에단의 이름을 새겨 두었다. 헨리는 낙인이 찍힌 대가로 오천 파운드를 받았다. 도박에 쓸 줄 알았는데 그는 그것을 고스란히 조슈아에게 부쳤다.

방학을 해도 조슈아는 저택에 돌아오지 못했다. 에단은 런던 시내에 그가 머물 아담한 저택을 하나 사 두었다고 했다. 이런 시골 마을에 있는 것보다 사교계에서 인맥을 쌓는 것이 그에게도 좋을 것이라고, 자신의 경험을 빌려 그럴싸하게 이야기했다. 에단이 조슈아에게 넉넉하게 돈을 부쳐 준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학기가 끝나면 여행이라도 다니라며 몇 달은 사치를 부려도 될 액수를 보냈다. 그때는 친아들일지 모르는 조슈아에 대한 그의 사랑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저 헨리가 조슈아를 불러들일 구실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신경을 쓰는 척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슈아가 떠난 뒤로 헨리는 눈물이 더 많아졌고 나와 단둘이 있을 때면 자학적인 말을 하곤 했다. 포크나 나이프를 보면 치켜들고 자해를 하려 하다가도 내가 말리기 전에 먼저 떨궈 버렸다. 그는 에단에게 죗값을 모두 치르기 전까지는 에단의 명령-자신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몸을 해치지 말라는 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눈에 띄게 시들어 가고 있었다.

***

눈의 여왕이 흔드는 새파란 옷자락이 봄 처녀의 훈훈한 꽃냄새에 밀려갈 무렵, 저택에 낯선 손님들이 찾아왔다. 전마님의 조카이자 한나 달턴의 오라버니인 에반스와 그 부인이었다. 한나를 닮은 붉은 머리에 성격 좋은 도시 신사같은 호남형 얼굴, 멀대처럼 키가 쭉 솟은 에반스 씨는 웃을 때마다 입을 벌쭉하게 벌리면서 하하, 큰 소리를 내는 기분 좋은 사람이었다.

그들이 저택에 찾아온 것은 한나의 장례식을 제하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헨리와 접촉이 거의 없어 그런지 그들은 보기 드물게 헨리에게 호의적이었다. 헨리도 에반스부부가 저택에 들렀을 때만큼은 술도 입에 대지 않고 도박친구들도 부르지 않았다. 멀끔하게 차려입고 창백한 얼굴가득 예의 바른 미소를 머금은 채 마치 사진 속의 한나에게 그러하듯 다정한 어조로 대화를 나누었다. 에단은 그런헨리의 곁을 지키고 앉아 역시나 예의 바른 태도로 정중하게 이들을 맞았다. 그러나 그날 밤 헨리가 '오늘은 돈을 빌리지 않았잖아'라며 문을 닫아 붙였을 때만큼은 무시무시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렸었다.

“달턴 씨, 아직도 새 부인을 맞을 마음이 없는 건가요?"밝은 갈색 머리에 아담한 키, 통통하게 살이 올라 유달리 앳되고 귀여워 보이는 얼굴, 살결이 유난히도 곱고 흰에반스 부인이 아침 식사를 하던 중 호들갑을 떨었다.

“네, 저는 아직.....….”

“물론 저희도 아가씨를 그리워하는 달턴 씨의 마음에는감사해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달턴 씨는 아직 젊잖아요. 이제 슬슬 재혼을 해서 아가씨에 대한 마음도 정리하고 달턴씨의 삶을 찾아야죠. 그래야 아가씨도 기뻐하실 거랍니다?"

이들이 오랜만에 달턴가를 찾은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로서는 덜떨어진 동생 한나를 사랑해 준 헨리의 마음이 더없이 고마웠을 것이고 헨리가 그런 한나 때문에 재혼도 하지 않고 홀로 술에 빠져 지낸다는 소문을 들을 때마다 마음에 적잖은 짐이 되었을 것이다. 헨리는 난처하다는 듯 웃기만 했다. 하지만 에단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한 마디 첨언도 하지 않은 채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거칠게조각내기만 했다.

"집안에 안주인이 없으니 이리 초췌해진 겁니다."

에반스 부인은 걱정스런 어조로 말하며 헨리의 여윈 손목을 감쌌다.

“좋은 아가씨가 있다는데도 그러세요.”

그래도 헨리는 몇 번이나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들은 못내 아쉬워하며 대신 다른 제안을 했다.

“그렇다면 봄 소풍이라도 나가는 것이 어때요? 이 저택에만 갇혀 있으니 낯이 파리해지지 않아요. 저 고개 너머에 호수가 하나 있죠. 새파란 물빛이 참 아름다운 곳이에요. 이맘때쯤 되면 항상 봄꽃이 만발한답니다. 혹시 가 보신 적이 있나요?"

"네. 예전에 한나와…………."

헨리는 이 말 끝에 어금니를 악물었다.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려는 그를 보며 에반스 부인도 손수건을 적셨다. 감동적인 풍경이었다. 한 발짝 뒤에 물러서 이를 지켜보는 에단을 지워 버릴 수만 있었다면 말이다.

결국 에반스 부인의 끈질긴 부탁에 헨리는 소풍 약속을 잡고 말았다. 에반스 부부는 흡족해하며 자신들이 모든 준비를 할 테니 몸만 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

며칠 뒤, 헨리와 에단은 나와 마부 주먹코만을 시종으로 대동한 채 재 너머 호수로 향했다. 나도 한번 가 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헨리의 눈동자만큼이나 새파랗고 아름다운 호수였다. 그 그림 같은 풍경을 다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헨리도 모처럼의 나들이에 잔뜩 들떠 있었다. 그래서 딱딱하게 굳은 에단의 표정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아담하게 차려 놓은 소풍 장소로 가니 에반스 부부의 곁에 성품 고와 보이는 아가씨 하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에반스 부인이 헨리를 가리키며그녀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아가씨의 얼굴이 잘 익은 산딸기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부부는 자꾸만 둘을 같이 앉히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부추겼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헨리도 조금씩 말문을 열었다. 시든 꽃송이 같던 얼굴에 새 이파리가 피어나듯 조금씩미소가 번졌다. 아가씨는 푸른 호수를 바라보며 헨리의 눈동자가 마치 저 빛깔과 같다고 칭찬했고 헨리는 그런 그녀에게 수줍게 시를 읊어 주었다.

My mistress' eyes are nothing like the sun;

Coral is far more red than her lips' red;

If snow be white, why then her breasts are dun;

If hairs be wires, black wires grow on her head.

I have seen roses damask'd, red and white,

But no such roses see I in her cheeks;

And in some perfumes is there more delight Than in the breath that from my mistress reeks.

I love to hear her speak, yet well I know

That music hath a far more pleasing sound;

I grant I never saw a goddess go;

My mistress, when she walks, treads on the ground:

And yet, by heaven, I think my love as rare As any she belied with false compare.

내 연인의 눈은 조금도 태양 같지 않아라

산호는 그녀의 입술보다도 붉고 

눈이 희다 하면 그녀의 가슴은 검은 편. 

머리털이 금사라면 그녀의 머리털은 실오리라. 

나는 붉고 흰 장미들을 보았지만 

그녀의 뺨에서는 그런 장미를 볼 수 없어라 

어떤 향수는 그녀의 입김보다 

더 좋은 향을 간직하고 있구나. 

나는 그녀의 음성을 사랑하지만 

음악만은 못한 것을 아노라. 

여신이 걷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느니

나의 여신은 언제나 땅을 밟도다. 

그러나 단언컨대 나의 사랑은 

그릇되게 비유한 무엇보다 진귀하여라.

-윌리엄 셰익스피어, <소네트 130번>

꿈꾸는 듯 웃고 있는 헨리를 보며 나는 그가 눈앞의 아가씨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는 이 호숫가에서 한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알 리 없는 아가씨는 산들거리는 바람이 헨리의 금빛 머리칼을 어루만져 반짝반짝 빛을 흩뿌리고 그의 눈동자가 잔잔한 수면처럼 일렁이는 모습을 넋 놓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그날 헨리는 처연하리만치 아름다웠다.

“언제 한번 저택에 놀러가도 될까요?"

“언제든 환영하겠습니다.”

소풍은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 에단은 마차 안에서 헨리의 입을 틀어막았다.

"잡아."

화가 났을 때의 에단은 정말이지 무서웠다. 나는 에단이 헨리를 범하는 동안 그의 상반신을 꾹 짓누르고 있어야 했다. '에단, 이 망할 자식! 오늘은 돈을 빌리지도 않았어. 그런데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악을 쓰는 헨리에게 에단은 이대로 마차 문을 열어 모든 사람들에게 이 꼴을 보여주겠다고 협박했다. 헨리는 내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비명을 삭였다. 에단은 그의 안을 풀어 주지도 않고 다짜고짜 자신의 것을 밀어 넣었다. 쿵, 쿵. 헨리의 금발 머리가 내 그곳에 자꾸만 부딪쳤다. 나는 부푸는 것을 감추기 위해 허벅지에 힘을 꾹 주었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헨리는 고통스런 신음을 흘렸다. 에단은 사정한 뒤 헨리의 헝클어진 머리를 잡아당겼다.

“안에 것이 흘러나오면 안 되지 않습니까.”

작은 남근 모양의 조각 같은 것을 헨리의 안으로 꾹 쑤셔 넣었다. 헨리의 눈가가 파들파들 경련했다. 에단이 손갈퀴로 헨리의 머리칼을 정성스럽게 빗어 주었다. 헨리는 안을 자극하는 조각 때문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에단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하인들에게는 오랜만의 외출로 헨리의 건강이 악화되었다고 둘러댔다. 에단은 방에 들어와 뒤처리를 핑계로 한 번 더 헨리를 범했다.

“더러운 자식!”

헨리는 그 모든 행위가 끝나고 나서야 에단의 뺨을 때렸다.

“내가 뭘 했다고 이런 짓을 하는 거냐! 돈을 빌리지도 않았고 잘못을 한 것도 없어. 누가 소풍에 따라오라고 강요했어? 네 멋대로 따라온 게 아냐! 그런데 왜 내게 손을 대는 거지? 대체 왜!"

에단은 당황한 것 같았다. 마차에서의 행위도 이곳에 와서 재차 범한 것도 그의 계획에 있던 일이 아니었다. 그는 헨리를 그냥 강간하지 않았다. 헨리가 한 어떤 일의 대가로 그를 취하는 것처럼 꾸몄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순수한 분노 때문에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헨리의 몸을 유린했다.

에단은 화를 내지도 않고, 그렇다고 사과하지도 않고 방을 나가 버렸다. 헨리는 손에 잡히는 대로 방 안의 집기들을 집어 던졌다. 나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그의 분노가 풀리기만을 기다렸다.

[2]

“이제야 잠이 드셨습니다.”

“그래?”

에단은 외알 안경을 벗으며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질렀다. 

“수고 많았다. 미안하지만 한 가지 더 심부름을 해 줘야겠는데.”

“네, 무엇이든 시켜 주십시오.”

에단은 나를 데리고 3층 구석의 방으로 올라갔다. 잘 꾸며 놓은 어린아이의 놀이방이었다. 조슈아의 방은 2층이었기에 나는 조금 의아해졌다.

“이곳에서 물건을 하나 찾아내."

“무슨 물건 말입니까, 주인님?"

“나무 조각들일 거다. 한・・・・・…”

그는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쯧, 불쾌하다는 듯 혀를 찼다.

“예닐곱 개의 덩어리와 자잘한 부품들. 아마 상자에 담겨 있을 거야.”

“그냥 나무 도막입니까?"

“원형이 병정 모양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병정이요?"

에단은 어깨를 으쓱였다.

“호두까기 인형이었거든."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조각난 호두까기 인형이라면 분명 헨리가 어린 시절 그렇게도 갖고 싶어 하던 그 물건일 것이다. 에단은 지금 헨리에게 사과를 하고 싶은 걸까? 호두까기 인형을 주면서 조금 전의 난폭했던 행동을 보상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그가 헨리에게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을 멈추는 것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 더 헨리의 기분을 맞춰주고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기만 바랐다. 만일 에단이 호두까기 인형을 고쳐서 돌려준다면 헨리는, 그 착한 헨리는 분명 감동받을 것이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내게 에단이 준 선물을 자랑할 것이다.

나는 잠을 자는 것도 잊은 채 방 안을 샅샅이 뒤졌다. 찬장 구석에 먼지가 뽀얗게 쌓인 낡은 상자가 있었다. 기침을 해 가며 끄집어 내렸다. 기대에 벅차 뚜껑을 열었으나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낡아 빠진 책 몇 권뿐이었다. 그만 맥이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심코 책 한 권을 펼쳐 보았다. 반듯한 정자체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어린아이가 적은 일기장 같았다. 맨 앞으로 주르륵 넘겼다. 첫 장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에단 달턴.

방문을 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에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문을 닫고 안쪽에서 걸어 잠갔다. 왜 잠갔냐고 묻는다면 다른 사람이 들어와 무엇을 하냐고 물어볼까 봐그랬다고 답해야지, 그렇게 계획을 세워 가며 일기를 펼쳤다.

5월 12일 맑음

어머니 앞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했다. 어머니는 내 바이올린 소리를 좋아하신다. 함께 차를 마시고 있는데 헨리가 들어왔다. 작은 바이올린을 들고 들어왔다가 나를 보고 뒤로 감춘다. 어머니는 헨리를 보자마자 얼굴을 찡그렸다. 

“나가.” 

헨리가 나를 노려보았다.

몇 장을 더 넘겼다.

5월 30일 맑음

햇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태양 같다.

다음 장.

5월 31일 흐림

아버지께서 라틴어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칭찬해 주셨다. 헨리가 라틴어로 말을 걸었다. 아직 내가 모르는 단어였다. 대답을 하지 못하자 아버지는 헨리에게 동생을 약 올리는 사악한 마귀라고 욕을 했다. 헨리는 울었다.

주로 그런 일상들이었다. 기대했던 내용은 아니었다. 그 책을 내려놓고 다음 권을 펼쳤다. 조금 전과 달리 필체가 능숙했다. 어느 정도 자란 뒤 쓴 일기 같았다.

9월 10일 흐림

그들이 내게 속죄하고 있음을 안다. 멍청하게 속아 아버지의 첩이 되어 아이를 낳고 죽어 버린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내게 풀고 있다. 그렇게 한다고 주님의 곁으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들은 자신의 죄를 모두 헨리에게 미룬다.

불쌍한 헨리.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는 죄악의 표상이고 나는 속죄의 표상이다. 마치 카인과 아벨 같지 않은가.

다음 일기는 글씨가 조금 비뚤거렸다.

9월 11일 비

비가 오면 헨리는 기분이 처진다. 오늘도 벽난로 앞에서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졸고 있었다. 머리를 만졌다. 부드럽다. 뺨도 부드러웠다. 헨리가 깼다. 무슨 짓이냐고 나를 밀었다. 서너 걸음만 더 가면 계단이었다. 아프겠지만 굴렀다. 팔이 부러졌다.

9월 12일 비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어."

헨리는 울고 있었다. 나 때문에. 나를 위해.

9월 13일 맑음

계단을 구르는 것은 자제해야겠다. 상처가 너무 큰 것은 1년에 한 번 정도면 족하다. 저번처럼 잉크병을 던질 때 맞아주는 편이 낫다.

팔이 부러진 이야기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헨리가 전 주인님과 하인들에게 이복동생을 괴롭히는 못된 형이라고 경멸당하는 것을 그는 담담하게 지켜만 보았다. 건조한 글에서 기쁨이 느껴진다고 한다면 단순한 내 착각이었을까? 나는 낡은 책장들을 파르르 훑으며 맨 뒷장까지 넘겼다.

10월 9일 맑음

헨리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구겼다가 편 자국이 가느다랗게 남아 있었다. 나는 다시 문으로 가 귀를 기울였다.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다음 책을 꺼냈다.

12월 1일 맑음 

멍청한 계집.

12월 2일 맑음

당장 저것을 이 집에서 치워 버렸으면.

12월 3일 맑음 

펜을 달라고 했다. 헨리는 짜증을 부리며 집어 던졌다. 손등을 찔려 주었다. 그러려 한 게 아니라고 말했다. 한나, 그망할 여자는 헨리의 말을 믿어 주었다.

12월 4일 맑음

반짝거린다. 태양 같다.

12월 5일 맑음

비가 내렸으면.

초반의 일기들은 모두 이런 단문들뿐이었다. 중간 부분이 또다시 구겼다가 편 것처럼 우그러져 있었다. 끝을 잡고 넘기자 쉽게 펼쳐졌다.

4월 5일 흐림

너를 고독하게 만들기 위해 나는 그 모든 것을 인내했는데 너는 아직도 고독하지 않구나, 헨리.너는 고독해야만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데.

4월 6일 비

헨리의 사랑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그가 평생 내 그림자에 갇혔으면 좋겠다. 영원히.

다음 날의 일기는 창세기의 한 구절을 베껴 쓴 것 같았다.

4월 7일 비

여호와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카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카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카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분해하고 안색이 변하는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카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노하였다.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그 아우 아벨을 처 죽였도다.

여호와께서 카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나,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는구나.

땅이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랑하는 자가 되리라.

카인이 여호와에게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땅에서 나를 쫓아내신다면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랑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일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일곱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카인에게 징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창세기 4장 4절-15절)

4월 8일 흐림

사랑만큼이나 변덕스런 감정이 또 있을까. 사랑은 변한다. 그러나 죄의식만은 뼛속에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는다. 카인에게 새겨진 낙인처럼.

4월 8일 비

그 계집을 빼앗으면 너는 날 죽일까? 신을 빼앗긴 카인이 아벨을 죽이듯 나는 네게 지워지지 못할 낙인이 되는 거야.

4월 9일 맑음

사랑해.

9일의 일기에 적은 그 하나의 단어에는 취소선이 몇 차례나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조그마한 글씨로 덧붙여 놓았다.

호두까기 인형은 옷장 아래 두었다. 이제 다시 찾을 일은 없을 것이다.

일기장을 조심스럽게 정리해 상자 뚜껑을 덮었다. 옷장 아래를 두드렸다. 안이 비어 있는 소리가 났다. 밑판을 잡아당기자 덜컹거리며 떨어졌다. 그 안쪽에 낡은 상자가 있었다. 안에는 에단이 말한 대로 호두까기 인형 조각들이 잘 정리되어 담겨 있었다.

다른 것들을 모두 제자리에 정돈한 뒤 인형 상자를 가져갔다. 에단은 별다른 것은 묻지 않고 수고했다며 늘 그랬듯이 은화 한 닢을 던져 주었다.

에단은 헨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그를 고립시켰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에게 다가가 달콤한 말로 유혹하려 했을 것이다. 악마란 것들이 늘 그렇듯 말이다. 그러나 헨리에게 한나가 있어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서 한나를 빼앗았다. 질투에 눈이 먼 헨리가 자신을 해치라고. 아마도 그의 패거리였을 무리에게 지시했을 때 에단은 기뻤을까? 아니면 마음 약한 헨리가 한나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그리고 헨리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깨닫고 절망했을까.

그래도 에단은 자신의 계획을 착실히 이행했다. 헨리에게 끔찍한 죄의식을 남기고 모습을 감췄다. 헨리와 한나를자신의 그림자에 가둔 채 영영 고통 받게 만들고 말이다.그것으로 계획이 완성되었을 텐데 에단은 복수라는 가면을 뒤집어쓴 채로 다시 나타났다.

………아마 한나가 죽었으니까. 헨리가 에단의 망령을 떠올릴 가장 강렬한 매개체가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런 것이겠지.

그때는 그저 일기장을 훔쳐본 것이 걸릴까 봐 전전긍긍하며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에단은 처음 돌아올 때부터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모른다. 헨리는 지독한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불쌍한 산 꿩같았다. 퍼덕거릴수록 날개를 옭아맨 올가미가 살갗을 파고들어 깃털 한 올 한 올이 붉은 피에 물들고 목을 길게 뺀채 구슬프게 울어도 도와주는 이는 하나 없건만 끝까지 살아날 길을 찾아 발버둥치는 가련한 산 꿩 말이다.

***

다음 날 에단은 수도에 일이 있다며 며칠 동안 저택을비웠다. 돈을 빌려줄 사람이 없어서인지 그 기간 동안 헨리는 도박 친구들을 부르지 않았다. 대신 에반스 부부가 전의아가씨를 데리고 저택을 방문했다. 나는 헨리의 곁에 바짝붙어 앉아 시답잖은 말을 걸며 수줍게 웃는 아가씨에게 알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 헨리도 호수에서처럼 그녀를 살갑게 대하지는 않았다. 팔짱을 끼려 하는 그녀를 정중히 밀어내고 에반스 부부에게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권했다.

“수줍어하지만 말고요. 심성이 참 고운 아가씨예요. 한나 아가씨와 성격도 많이 비슷하고 얼굴도 좀 닮지 않았나요? 한번 잘해 봐요. 그러다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 이렇게 시도도 해 보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에반스 부부는 기어코 둘을 붙여 놓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 헨리는 지병을 핑계로 일찌감치 침실로 올라가 버렸다. 아가씨는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하녀장이 손님방으로 등을 떠미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큰 주인님이 몸이 좋지 않다는 소문을 들은 거야.” 하녀장은 그녀를 마뜩찮게 생각했다.

“에반스 부인께서 에반스 씨께 하는 말을 엿들었지. 저여자가 먼저 큰 주인님을 소개시켜 달라고 졸랐다더라고. 두 부부야 전 마님의 일도 있으니 이참에 부담을 덜자, 하고 냉큼 데려와 버린 거지."

"하지만 큰 주인님께서 몸이 좋지 않으면 그 아가씨께도 좋지 않은 게 아닌가요? 병든 남편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런 순진한 녀석. 큰 주인님이 죽는다면 이 집을 자신이 가로챌 수 있다는 생각에 저러는 게 아니겠어? 불쌍한 여자.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거지. 이 저택은 빛 좋은 개살구고 알맹이는 모두 에단 님의 재산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저 여자는 모르는 거야.”

아가씨는 끈질기게 이 집에 붙어 있었다. 집사장 길버트씨는 그녀에게 에둘러 돌아가 달라고 부탁하기도 지쳤는지 에단이 돌아오면 따끔하게 말을 해 내쫓아야겠다고 투덜거렸다.

***

“얘, 그래 너 말이다. 이름이 뭐니?” 헨리의 잠자리를 봐 주고 나온 어느 날이었다.

"앤디입니다."

아가씨가 나를 붙잡았다.

“이 방이 달턴 씨의 방이지?"

아니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누가 봐도 뻔한 것을 굳이 부정하고 싶진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날 좀 안내해 다오.”

“아가씨, 밤이 늦었습니다. 큰 주인님께서도 잠이 드셨을 것이고요. 하실 말씀이 있다면 내일 해 주시는 것이 어떨지요?"

"건방진 꼬마구나. 내가 하라면 하는 거야. 나중에 안주인이 되면 후한 상을 주마.”

그래도 그녀는 좋은 집안의 아가씨일 것이다. 하인인 내가 무턱대고 거절을 할 수는 없었다.

“제가 먼저 들어가 여쭤 보겠습니다.”

뒤척거리고 있는 헨리를 깨웠다. 그는 반복되는 아가씨의 채근질에 짜증이 치민 것 같았다. 얼굴을 찡그린 채 옷을 걸쳤다. ‘따끔하게 한마디 해야겠어.’ 헨리는 전에 없이 단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내가 단추를 다 채워 주기도 전에 아가씨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도 헨리도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채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나는 좋은 가문의 아가씨가 남자의 방에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

"자꾸 절 피하시는 것 같아 이리 무례를 범했어요, 달턴씨."

하지만 우리가 더욱 놀란 것은 따로 있었다. 아가씨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두르고 있던 숄을 벗어 던졌는데 그 안에는 가슴이 깊이 파인, 창녀처럼 외설스런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하얀 젖무덤이 드러나는 바람에 내 얼굴도 홧홧해졌다. 헨리는 안절부절못하며 시선을 피했다. 당장 나가라고 하고 싶었을 테지만 여자라면 한나와 같이 수수한 시골 아가씨만 봐 온 헨리는 이런 저돌적인 접근에 어찌 대처해야 할지 손방이었다.

아가씨는 치마를 끌어 올려 하얀 종아리를 드러낸 채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내 어깨를 잡고 옆으로 휙 밀어내 버렸다. 나는 그만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방해꾼을 치워 버린 아가씨는 그대로 헨리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해버렸다. 밀어내지도 잡아당기지도 못한 채 헨리는 양손으로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아가씨가 그 한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 위에 얹었다.

드레스 어깨끈이 주르륵 흘러 내려갔다. 가슴을 간신히 덮었던 드레스가 딸려 내려가며 하얗고 풍성한 젖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헨리는 마치 석고상 같았다. 그대로 굳어 여자가 손으로 제 손등을 감싸고 주물거리는 시늉을 하자 엉겁결에 따라 아가씨의 젖가슴을 만지작거렸다.

아가씨는 그 사이 헨리의 입술을 벌리고 진하게 입을 맞췄다. 숨결이 달아올랐다. 정신을 가다듬은 헨리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쉬 밀려나질 않았다.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그가 작게 외쳤다. '그만, 그만하세요. 그러나 다음 입맞춤에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자리를 비켜 줘야 하나 아가씨를 말려야 하나. 나는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곧 다시 다리가 풀려주저앉고 말았다.

활짝 열린 방문 너머에 서 있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했기에.

・・・・・… 에단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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