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버려짐에 대하여 (11/12)

외전

1. 버려짐에 대하여

- 일기장을 통해 단편적으로만 나타났던 에단의 유년 시절 이야기

2. 새로운 빛

- 헨리가 백내장 수술을 받기 위해 조슈아와 런던에 와서 길포드 경과 조우하게 되는, 본편의 마지막과 이어지는 외전

외전 1. 버려짐에 대하여

[1]

“마사, 마사! 마사, 문 좀 열어 봐, 마사!"

방문은 항상 밖에서 잠겨 있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면 나는 목이 잠길 때까지 유모를 부르다 지쳐 문 앞에 쓰러지듯 잠이 들곤 했다. 유모 마사는 항상 옆방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잠귀가 어두웠다. 새벽같이 일어나 창이 젖어있는 것을 발견하면 항상 내 방으로 먼저 달려와 문을 열고 문 앞에 엎어져 있는 나를 깨웠다.

“아이고, 도련님. 왜 또 여기 나와 주무시나요. 이러다 감기에라도 걸리면 어쩌시려고요!”

“마사, 또 그 유령이 나타났어. 비에 젖어 산발이 된 머리를 너풀너풀 휘날리면서 창문에 붙어서 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어."

“비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라고 해도 그러시네요.”

“아냐, 진짜야. 까만 머리에 섬뜩한 초록색 눈을 한 마녀였어!”

여기까지 말하면 마사는 항상 울상을 짓는 듯 말 듯 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곤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귀신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도련님의 착각입니다. 나는 어쩌면 그것이 그녀의 말버릇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귀신은 도련님을 해하려고 온 귀신이 아닐겁니다. 도련님을 지켜 주기 위해 오신 것이지요.”

마사는 거짓말쟁이였다. 나는 그 귀신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마사가 오지 않던 어느 밤, 용기를 내 창문을 열었다. 온몸으로 밀어닥치는 비바람을 견디면서 나는 창밖에 너울거리는 귀신을 향해 물었다. ‘왜 자꾸 오는 거지? 내게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거야?' 나는 그때 귓전을 웅웅 울리며 울부짖는 귀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너를 원망한다, 에단 달턴. 내 혼백이 이승을 떠도는 한너와 이 저택에 영원히 저주를 내리고 말 것이야.”

창 너머로 바라본 그 귀신은 내 생각만큼 흉측하지는 않았다. 충혈된 녹색 눈에서 붉은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입술을 뻐끔거리며 또 무언가를 속삭였다. 나는 손을 뻗어귀신의 옷자락을 잡으려 하였다. 하지만 간신히 손에 닿는다고 생각했을 때, 젖은 옷자락이 미끄러지듯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이 방이 싫어. 나가고 싶어. 왜 유모는 매일 밤마다 밖에서 문을 잠그지? 유령이 나타나도 달아날 수가 없잖아."

마사는 내게 어린이용 책 하나를 가져다준 뒤 옆에서 하루 종일 뜨개질만을 했다. 무료하게 책을 읽다 커튼이라도 젖히는 날이면 손등을 탁 치며 얌전히 글을 읽으라고 다그쳤다.

그날은 햇살이 따사로웠다. 우중충한 커튼에 가려 볕을 받지 못하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볼멘소리로 마사를 채근했다. 그녀는 두툼한 입술을 뚜하게 내민 채 털실을 대충 훔쳐 감았다.

“그것은 도련님이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분이기 때문이지요."

"왜? 왜 내가 이 세상에 있어선 안 되지?"

"주인님의 적자가 아니시거든요.”

“적자가 뭐지?”

"주인님과 마님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적자지요.”

"그럼 나는? 나는 누구에게 태어났지?"

"주인님과 한 이방인 아가씨 사이에 태어났답니다."

"그럼 그분은 어디 가신 거야?"

"돌아가셨죠."

뜨개질감을 내려놓고 허리를 한 번 쭉 폈다. 마사는 누런 눈자위로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마치 사형을 선고하는 재판관처럼 엄하게 덧붙였다.

“아가씨는 도련님처럼 까만 머리에 녹색 눈을 한 아름다운 분이셨어요. 아마 도련님이 만난 그 귀신은 도련님의 친모일 겁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세요.”

며칠 뒤, 또 폭풍이 몰아쳤다. 나는 창틀에 매달려 그 귀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귀신은 오지 않았다. 그날도, 그 이후로도 마치 자신이 나의 친모임을 내가 알게 되었으니 자신의 소임을 다 했다고 털어 내듯 나를 버리고 천국으로 영영 떠나 버렸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버려지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를 알았다.

[2]

아버지는 매일 한 번씩 내 공부를 봐주기 위해 찾아왔다. 어머니는 가끔씩 아버지와 함께 방에 들러 내게 선물을 안겨 주었다. 대부분은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감사하다며 그것을 갈무리해 두긴 했지만 다시 꺼내 가지고 논 적은 없었다. 그들이 함께 온 날은 항상 내 손을 하나씩 맞잡고 내게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사랑한다, 사랑한단다, 에단 그러니너도 우리를 사랑해야 해. 에단, 우리를 사랑하니? 나는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네, 사랑해요. 아버지, 어머니.' 그런 대답을 들은 날이면 두 사람은 기분이 좋아져내 이마와 뺨에 키스를 해 주었다.

그들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체면보다 더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이든 들어줄 것처럼 소원을 말해 보라고 했으면서도 방 밖으로 나가게 해달라는 말 만큼은 무시해 버렸다. '조금 더 자랄 때까지 기다리렴.’ 그 말에는 내가 알아서 입조심을 할 나이가 되면 어떻게든 사람들의 눈속임을 하여 내보내 주겠다는 함의가담겨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말한 뒤 내가 시무룩해지면 두손을 잡고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나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하는 그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에단, 용서해 주겠니?”

"뭐를요?"

"무엇이든,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를 사해 주겠다고 말해다오.”

“그럴게요."

나는 그렇게 대답을 해야만 그들이 나를 놓아줄 것임을알았다. 어찌나 손을 세게 붙잡고 있었는지 손마디가 욱신거렸다.

“용서해 드리는 대신에 커튼만 걷을 수 있게 해 주세요.”

머리가 조금 굵어지기 시작하며 나는 그들이 요구하는대답에 나의 요구를 섞기 시작했다. 커튼을 열자 쏟아져 내려오는 햇살이 내 방을 새하얗게 비췄다. 낯설었다. 나는창가에 의자를 끌고 다가가 책을 읽는 체하며 하루 종일창밖을 바라보았다. 정원에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지금까지 내가 볼 수 있었던 이는 마사뿐이었지만 창밖의 세상에는 다양하게 생긴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정원을 가꾸고 무언가를 바쁘게 날랐다.

그 아이는 그들의 사이에 섞여 있었다. 바쁜 사람들 사이를 누비면서 뭐라 열심히 말을 붙였지만 사람들은 마치 그가 유령이라도 되는 양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의치맛자락 사이를 누비면서 정원수를 만지작거리기도 했고큰 소리로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기도 했다.

문득 바람이 불었다. 아이의 모자가 허공으로 치솟았다.아이는 두 팔을 벌리면서 모자를 쫓았다. 내 방 창문 아래까지 뻗은 나뭇가지에 모자가 걸렸다. 폴짝폴짝 뛰던 아이와 문득 눈이 마주쳤다. 햇빛이 눈부시게 내리쬐던 날이었다. 아이의 황금빛 머리칼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태양같이.

새파란 눈동자 가득 내 모습이 담겼다.

“샐리, 샐리, 저기 이상한 애가 있어. 저 아이가 누구지?”누군가가 내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마사였다. 그녀는 뭐라 투덜거리며 커튼을 쳐 버렸다. 밖에서는 아이가 시끄럽게 '저 위에 까만 머리를 한 애가 있었어!'라고 소리쳤고 뒤이어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짜랑짜랑 뒤따라 왔다.

"뭐가 있다는 거예요? 또 거짓말을 하는 거죠?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는 아이를 어찌 한다고 말씀드렸었죠?”

“진짜야! 내가 분명 봤어. 저 3층 방에 말야. 거짓말 같으면 같이 가서 확인을 해 보면 되잖아!”

“아이참, 왜 이리 성가시게 구신다? 오늘은 일이 많으니얌전히 계시라고 하였잖아요, 도련님. 이러다 또 주인님과마님께 혼이 날 겁니다!"

이 말에 아이는 조용해졌다.

“저 아이는 누구야?"

마사는 쯧쯧 혀를 찼다.

“이러기에 제가 밖을 내다보지 말라고 했던 겁니다. 저분은 헨리 도련님이에요."

“헨리?"

“네. 주인님의 적자시죠."

나는 전에 마사가 했던 말을 기억했다.

“같이 놀면 안 돼?"

"주인님께서 허락해 주시기 전까지는 안 됩니다.""왜?"

“두 분이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가 되어야 하니까요. 도련님은 적당한 나이가 되시면 주인님의 먼 친척 아이라고 소개되어 이 집에 들어오실 겁니다."

“하지만 난 처음부터 여기 살고 있었는데?”

“그렇지요. 그래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겁니다. 두 도련님모두요."

그때는 마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온전히 알아들을 수가없었다. 다만 그 아이, 헨리에게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들키면 안 된다는 것만 간신히 이해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커튼을 빠끔히 젖히고 창 아래에서 놀고 있는 헨리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헨리는 항상 사람들의 뒤를 쫓아다니며 무언가를 말했고 사람들은 그런 헨리에게 관심이없었다. 우두커니 서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인형의 팔을 떼어 바닥에 집어던졌다. '인형이 고장 났어!’ 헨리의 말에 하인 하나가 혀를 차며 다가와인형을 다시 조립해 주었다. 그리고 다시 스쳐 지나가 버렸다.

컵을 던지고 사람들의 뒤에 작은 돌멩이 같은 것을 던지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돌아보면 제자리에서 폴짝거리며 외쳤다. '내가 한 거 아냐, 집요정이 그랬어!' 사람들은 그때만 헨리에게 관심을 보이다 다시 그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해 버렸다. 헨리는 하루 종일 그렇게 혼자 놀았다. 

“헨리, 헨리.”

헨리가 내 창문 아래의 꽃밭 앞에 웅크리고 앉아 키 작은 꽃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을 때 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러보았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나는 커튼 뒤에 숨어 버렸다.

"누가 날 불렀어! 샐리, 샐리! 누가 날 불렀다고!"

“아이 참, 누가 도련님을 불렀다고 그러세요."

“방금 헨리, 헨리, 하는 목소리가 들렸단 말야!”

“또, 또 거짓말. 그렇게 자꾸 거짓말만 하면 지옥에 갈 겁니다."

헨리는 거짓말이 아니라고 엉엉 울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발을 동동 굴렀다. 하인들이 지나가며 한 번씩 혀를 찼다.

“왜 이리 소란인 게냐?"

나는 아버지가 화 같은 것은 낼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창밖에서 아버지는 누군가 자신을 불렀다고 내 방 창문을 똑바로 가리키는 헨리를 향해 올바른 소리는 듣지 못하고 삿된 소리만을 듣고 다니는 꼬마 악마놈이라고 욕을 하며 엉덩이를 모질게 때렸다. 헨리는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저택 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잠시 후 아버지가 내 방을 찾아왔다.

“네가 헨리를 불렀니?"

망설였지만 아니라고 둘러댔다.

“그래. 네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지, 에단. 넌 착한 아이이니 말이다."

아버지는 내 말을 믿었다.

헨리의 목소리가 들리면 창문을 열었다. 커튼을 아주 조금 젖히고 좁은 틈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헨리는 항상 반짝반짝 빛이 났다. 태양 같은 황금빛 머리칼을 찰랑거리면서 정원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나는 턱을 괴고 그의 모습을 지켜보다 가까이로 다가오면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알아챌 때도 있었고 알아차리지 못할 때도 있었다. 헨리는 귀를 만지작거리다가 좌우를 둘러보았고 마지막으로는 고개를 홱들어 위쪽을 쳐다보았다. 나는 커튼 뒤에 몸을 숨기고 그가 하는 양을 바라보며 키득키득 웃곤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헨리, 헨리' 조용히 속닥거린 뒤 창틀 아래 숨어 버렸다. 헨리는 전처럼 누가 자신을 부른다고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다만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을 때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조금 실망했다.

"찾았다!"

길게 고개를 빼고 창밖 화단 아래를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항상 멀찍이서만 들려오던 그 맑은 목소리가 내 뒤통수를 때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나도 모르게 커튼 뒤로 숨어 들어가고 말았다. 뱅글뱅글돌며 커튼을 몸에 감았다.

“너였지? 매일매일 날 부르던 게 너였지?”

헨리는 내게 쪼르르 달려와 커튼 끝을 잡고 막무가내로 잡아당겼다. 그만 그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몸에 말고 있던 커튼이 빙그르르 풀려나갔다. 헨리가 그 자리에 엎드려 커튼 아래로 기어 들어왔다. 얼굴이 마주쳤다. 파아란 눈동자에 내 모습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마치 꿈결처럼 내 뺨을 간지럽히는 그의 금발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헨리가 어깨를 움츠렸다.

“아파.”

[3]

금발 한 가닥이 손에 들어왔다. 그것을 꾹 움켜쥐었다.

“넌 누구야? 누군데 여기 있는 거지? 누구기에 내 이름을 아는 거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금발을 쥐었던 손을 펴는 순간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날아가 버려 그만 그것을 찾느라 바닥을 뒤적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집요정이지? 그렇지?”

결국 머리카락 한 가닥을 더 잡아당겼다. 헨리는 아프다하면서도 날 밀어내지 않았다.

"난 집요정이 있을 줄 알았다구! 진짜진짜 보고 싶었어." 대신 나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나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잠시 숨을 들이켰다. 헨리에게는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보송보송한 구름 냄새 같기도 했다. 나도 손을 들어 그를 꼭 끌어안았다. 금발이 뺨에 닿을 때마다 간질거렸다. 재채기가 나올 것만 같았다.

“같이 놀자.”

헨리가 말했다.

“응.”

내가 대답했다.

헨리는 내 손을 꼭 맞잡고 커튼에서 기어 나왔다. 내게 자신의 장난감을 보여 주겠다고 했다. 나는 이 방을 나가서는 안 된다는 말도 잊은 채 헨리를 따라 나갔다. 3층 복도를 지나는 동안 아무도 우리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헨리의 방이 있는 2층으로 내려왔을 때 몇몇 사람들이 나를 보며 수군거렸다. 헨리는 그들의 말에 개의치 않았다. 방으로 나를 데려와 침대에 앉히고 자신이 아끼는 곰 인형을 품에 안겨 주었다. 그리고 어디서인가 이야기책 하나를 꺼내와 큰소리로 읽어 주었다.

나는 헨리의 냄새가 배어 있는 곰 인형에 얼굴을 묻은채 헨리의 목소리를 들었다. 조그마한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커다란 몸짓을 하면서 이야기책에 나온 기사의 무용담을 실감나게 연기해 주는 그를 보며 어쩐지 간질거리는 기분에 발을 동동 굴렀다.

우리의 만남은 그리 오래지 않아 끝이 났다. 고용인들이 말을 한 것인지 아버지가 헨리의 방에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보세요! 집요정이에요!”

헨리는 아버지를 보자마자 책을 집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내 목을 끌어안았다. 행복하게 웃는 옆모습이 보였다. “헨리, 이 멍청한 꼬마 악마 놈!”

그러나 아버지는 난폭하게 헨리의 어깨를 잡고 내게서 떼어 내 버렸다. 헨리는 그만 바닥에 발라당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푸른 눈동자 가득 의문의 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 신이시여, 용서하소서. 너는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 저 녀석과 말을 섞어서는 안 돼! 저 녀석은 죄악의 증거란 말이다. 널 더럽히고 말 거다. 어서 돌아가자, 어서!"

헨리는 울지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와 내 뒤를 졸졸 따라오려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방문으로 나를 내보낸 직후 매서운 손으로 헨리의 뺨을 후려쳐 버렸다. 헨리는 그만 다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히끅거리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다시 방에 갇혔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붙잡고 정화의 기도를 올렸다. 그들은 나를 이 방에 가두는 것이 방금 전에 보았던 꼬마 악마로 인해 타락을 할까 두려워서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렇게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을 말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들의 말 중 옳은 것도 있었다. 헨리로 인해 내가 타락하고 말 것이라는 말. 그것만은 옳았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매일같이 헨리를 지켜보았으나 그를 부르지는 않았다. 헨리도 더 이상 고개를 들어 이쪽 방을 쳐다보려 하지 않았다. 이 년 동안이나 나는 그를 지켜보았고 그는 나를 외면했다.

여덟 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나를 사람들에게 소개시켜주었다. 아버지는 나를 '먼 친척 댁에서 데리고 온 양자'라고 불렀으나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헨리를 다시 만나 이제는 숨을 필요도 없이 그와 함께 놀 수 있으리라는 사실에 들떠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고용인들의 뒤쪽에 서서 이쪽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헨리가 보였다. 환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헨리는 나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버지의 손을 놓고 달려갔다. 헨리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푸른 눈동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그가 왜 그렇게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지, 나를 꼭 안아 주던 두 팔로 나를 거칠게 밀어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저리 가!”

“헨리! 네 동생에게 무슨 짓이냐!"

“아버지의 아들은 저잖아요! 전 이런 것을 동생으로 둔적 없어요!"

“이런 것이라니! 신이시여, 저 독사가 혓바닥을 놀리는 것을 부디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나는 그래도 다시 한 번 헨리의 손을 붙잡았다. 헨리는 징그러운 벌레라도 닿은 듯 진저리를 치며 나를 밀었다. 아버지가 나를 일으켜 주었다. 다시 한 번 헨리에게 호통을 치며 당장 방으로 들어가 근신하고 있으라고 명령했다. 헨리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노려보다 홱 돌아서 버렸다.

내가 집요정이 아니라 화가 난 거야?

아니면 나 때문에 아버지에게 혼나서 기분이 상한 거야?

아니, 아니다. 그 무엇도 아님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무어라 위로를 하며 달랬지만 그 무엇도 내 귀에 닿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헨리는 나를 잊었다. 우리의 만남을 기억 속에서 깨끗하게 지워 버렸다.

버려지는 것에는 익숙할 줄 알았는데 잊히는 것이 버려지는 것보다 비참하다는 사실을, 나는 그날 깨달았다.

헨리, 헨리, 나의 태양, 나의 사랑. 다시는 나를 잊지 말아줘, 제발.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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