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6화(2) (7/15)

담뱃재 2권

목차

6. (2)

7.

8.

9.

10.

에필로그.

외전 1.

외전 2.

외전 3.

6. (2)

잠시 후 두 사람은 차 밖으로 나왔다.

새소리가 나는 아침부터 이런 짓이라니. 정태주는 제 머리를 쓸어 넘기다가 멈칫했다. 시선은 닦아내어 깨끗한 손바닥에 닿았다.

여전히 그 감촉이 머무는 것 같았다. 뜨겁고, 미끌거리며, 거칠던. 딱딱하고 커다란 손과 깍지를 끼었던 감촉도 완전히 닦이지 않았다.

“가자.”

계범호가 태주의 붉은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고는 어깨를 감쌌다. 태주는 남자를 따라 걸으며 그제야 주위를 살폈다.

초록의 나무가 울창한 산이 보였고, 좁은 도로와 낡은 가게 몇 개가 보였다. 한적한 시골 동네의 풍경이었다.

그런데, 어딘가 낯이 익은 것 같았다.

천천히 움직이던 시선이 저수지에 닿았다.

“…….”

태주는 표정을 굳혔다.

그대로 남자의 손에 이끌려 걸어간 곳은 작은 식당이었다. 태주는 가게로 들어가기 전에 저수지 건너편으로 시선을 줬다.

그때와 달리 낮이고, 멀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낚시용품점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무표정했던 노인의 얼굴이 떠오르자 팔에 소름이 돋았다.

무거운 걸음으로 들어간 식당은 평범했다. 메뉴는 국밥밖에 없는 것 같았다.

드르륵, 의자를 빼고 계범호가 앉았다. 태주는 자연스럽게 그의 옆으로 가서 앉으려다가 커다란 손에 의해 제지당했다.

“거기 앉아.”

남자가 맞은편 자리를 턱짓했다. 태주는 네, 하고 의자를 빼서 앉으며 식당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뭘로 드려요?”

“소고기국밥 특으로 두 개 주십시오.”

주문은 계범호가 했다.

태주는 어쩐지 초조해져서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됐다. 운전기사가 함께 들어오긴 했지만 식당에는 손님 한 명과 이곳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그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청년도 있었다. 모두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기회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실행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계범호가 보고만 있을 리 없고, 만약 성공해도 태주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 같았고, 전에 낚시용품점 할아버지도 수상했으니 이 동네 사람들 모두 한패일지도 모르고… 또…. 기회를 놓쳐도 되는 이유를 태주가 꼭 변명처럼 늘어놓고 있을 때였다.

“머리 굴리느라 바쁘지.”

남자가 태주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평범한 식당 의자가 가여워 보일 정도로 커다란 덩치와 단단하고 서늘한 인상을 보고 있으니 덜컥 겁이 났다.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태주가 사색이 된 채 말했으나, 남자는 픽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는 이내 자세를 고쳐 앉으며 태주에게 몸을 기울였다. 의자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 동네 사람들 다 박 사장 돈 처먹었어.”

“…….”

“조용히 먹고 가자.”

태주의 뺨을 가볍게 두드린 남자가 다시 몸을 뒤로 물렸다.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낡은 식탁 위를 하나하나 채우는 반찬과 뚝배기를 보며 태주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 그날 노인이 자신의 위치를 알린 것이 맞았고, 이 동네 사람들 모두 한통속이었다.

“맛있게 드세요.”

주인의 친절한 목소리에 태주는 소름이 돋았다.

그날 이 동네로 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가게로 들어가는 대신 외지 사람일지 모르는 낚시꾼들에게 달려갔더라면 어땠을까. 그들에게 휴대폰을 빌려 경찰을 불렀더라면.

지금에 와서는 전혀 의미 없는 생각을 하며, 태주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뚝배기를 멍하게 쳐다봤다.

“먹어.”

“…네.”

남자의 말에 태주는 수저를 들었다.

그러나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고기는 입 안에서만 굴러다니고 삼키기가 영 어려워서 밥을 말아 국물만 조금 떠먹었다.

“또 깨작거리네.”

계범호가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정태주는 눈을 굴리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국밥 안 좋아해서요.”

그것도 뭐, 맞는 말이었다. 태주는 달고 짜고 느끼한 음식을 더 좋아했다.

“내가 반찬 투정까지 들어줘야 하나.”

맞은편에서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순간 정신이 들었다. 자신은 남자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입장이었다. 좀 잘해 준다고 잠깐 미쳤었나 보다.

“죄송합니다.”

그냥 빨리 먹고,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겠다.

정태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열심히 숟가락질을 했다. 그러나 양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남자가 물어보지도 않고 특대 사이즈를 주문해서 그런 거였다. 배가 더부룩해 국물을 숟가락으로 휘젓고만 있을 때였다.

드르륵 의자 소리가 났다. 태주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계범호가 안쪽의 카운터로 가 계산을 했다. 그러더니 무표정하게 턱짓했다. 정태주는 얼른 일어나 그의 옆에 붙었다.

식당을 나오고 나자 한숨이 흘러나왔다. 숨통이 조금은 트인 기분이었으나 제대로 숨을 쉬려면 이 기분 나쁜 저수지를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계범호는 당장 차로 갈 생각이 없는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물가로 천천히 걸어가며 안 오냐는 듯 시선을 보냈다. 태주는 무거운 걸음을 떼 남자의 옆에 섰다.

계범호는 담배 연기를 허공에 내뿜었다. 아침 해를 받아 반짝이는 수면을 무심히 보던 시선은 습관처럼 정태주에게로 갔다.

환한 햇빛 아래에서 창백한 피부가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눈동자는 조금 더 말간 빛을 띠고, 입술과 뺨의 색은 선명했다.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에서 볼 때보다 괜찮은 모습이었다. 기껏 데리고 나왔더니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봐줄 수 있을 만큼.

“가자.”

계범호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반색을 하고 따라오는 정태주가 우스웠다.

두 사람이 차에 오르고, 차는 곧장 매화로 향했다.

태주는 창문에 시선을 두었다. 살려 달라는 사람을 모른 척하는 사람들이 모인 마을이 점점 멀어졌다. 그제야 묘한 불안감이 잠잠해졌다.

매화까지는 금방이었다. 태주가 산을 넘어가 발견한 마을이 도로를 따라 차로 이동하면 매우 가까웠던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금방 붙잡혔지. 자조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커다란 손이 시야 끝에 걸렸다.

고개를 돌리자 남자가 수표를 내밀고 있는 게 보였다. 그것을 얼떨결에 받아 드는 태주의 귓속으로 낮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간식 사 먹어. 너 좋아하는 걸로.”

“…….”

태주가 올려다보자 계범호는 태주의 뺨을 거칠게 문질렀다.

“빵 쪼가리엔 환장하는 새끼가.”

말도 안 되지만 남자는 태주가 국밥이 싫어서 투정을 부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태주는 식당에서와 달리 부드럽게 풀어진 표정의 계범호를 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저 거기 싫어요.”

말해보라는 듯 남자가 가만히 시선을 줬다.

“저번에도….”

태주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남자는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붙잡힌 곳이 그 동네였나.”

태주가 거기서 붙잡혀 온 것을 몰랐던 것 같은 뉘앙스였다.

“…겁주려고 거기 데려간 거 아니에요?”

정태주가 물은 말에 계범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겁을 줄 필요성도 못 느낀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햇빛 좀 보라고 데리고 나왔더니.”

계범호가 혀를 찼다. 품 안에서 담뱃갑을 꺼내는 그를 보며 태주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생각보다도 남자는 매화와 관계가 깊지 않은 것 같았다. 그의 부하들이 매화에서 경호원으로서 일하는 것도 그가 하는 일과는 별개인 듯했다.

태주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에만 있어도 좋아요.”

계범호가 시선을 주자 정태주는 조금 다급하게 덧붙였다.

“저 진짜 도망 안 칠게요.”

남자는 담배를 꺼내려던 손도 멈춘 채, 태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내려, 하고 나직이 말하고는 차 문을 열었다.

뒤따라 차에서 내린 정태주는 도망친다고 오해받을까 봐 걱정이라도 하는지 남자에게 바짝 붙어 걸었다. 남자는 뒤쪽에서 걸리적거리는 녀석을 붙잡아 팔 아래에 끼웠다.

정태주의 어깨를 감싸고 건물 로비로 들어선 계범호는 곧장 근처의 깡패 하나에게 손짓했다.

“예, 형님.”

태주는 계범호가 지갑을 꺼내어 수표 몇 장을 깡패에게 주는 걸 의아하게 봤다. 계범호는 이곳에 있는 깡패들을 잘 알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깡패들도 서열이 있었고, 계범호는 가장 우두머리 격인 몇 놈만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저건 뭘까. 용돈 하라고 주는 건가. 백만 원이 넘을 것 같아 빤히 쳐다보는데, 남자가 말했다.

“당분간 못 오게 됐어. 한 3주 정도.”

“네?”

“좋아하는 티 내지 말고.”

“…아닌데요.”

태주는 정색하며 답했으나, 남자는 같잖다는 표정으로 태주의 뺨을 눌렀다. 그러더니 말했다.

“태주 간식 좀 사다 줘라.”

“예. 알겠습니다.”

깍듯하게 인사한 덩치가 멀어지는 걸 보며 태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인 뒤에는 고개를 들어 계범호를 보았다. 그는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간식 사 먹으라고 준 돈은 절대 안 쓸 거고.”

“…….”

“이렇게라도 해야지.”

멍하게 쳐다보는 태주의 얼굴이 우스웠는지, 남자의 입꼬리가 가볍게 휘어졌다.

“얌전히 지내.”

뺨을 쓰다듬고 남자가 뒤돌아섰다. 태주는 널찍한 출입문이 좁아 보이게 하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남자가 지나간 자리엔 환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둡게 필름이 붙여진 출입문이 닫히고, 그 사이로 새어 들어오던 햇빛이 끊기고 나서야 태주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낮은 목소리가 했던 말 몇 마디가 떠올랐다.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는 손길과 가만히 쳐다보는 눈빛도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새벽에 남자가 자신을 데리고 나갔던 것도, 바깥이 덥냐는 별 뜻 없는 질문 때문이었다. 오늘은 햇빛을 보게 해 준다고 굳이 아침부터 찾아왔다.

‘간식 사 먹어. 너 좋아하는 걸로.’

안 어울리게 사람을 달래 줬다.

자신 하나에 매달 돈 천만 원을 넘게 쓰면서, 밥 챙기고, 기분까지 살피고. 아무리 돈이 넘쳐난다고 해도 이게 수지타산이 맞는가.

‘꼭두새벽에 보러 올 정도로 빠졌으면서 왜 아직 여기 둔대?’

자신도 약간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혼했나….”

언뜻 들은 얘기가 떠올라 태주는 중얼거렸다. 그런데 계범호가 결혼을 한 것도 안 어울리고, 결혼했다고 누구 눈치 보며 사는 건 더 안 어울렸다.

하긴. 1억이 넘는 돈을 덜컥 갚아 주는 것도 이상하긴 하다. 지금도 충분히 많은 돈을 지불하고 있는데 그 돈을 주고 꺼내놨다가 금방 싫증이 날 수도 있지 않은가. 계범호가 그 정도 바보는 아닌 것 같았다.

거기다 굳이 꺼내 줄 만큼의 감정은 아닐 것이다. 그저 넘치는 돈을 좀 쥐여 주고, 시간 날 때 와서 들여다보고 싶은 정도겠지.

남자의 감정이 크든 작든, 어떤 것이든. 태주에게는 그 정도로도 행운이었다.

다른 형 누나들이 말했던 호구가 계범호인 것도 같았다.

호구치곤 좀 많이, 무섭긴 한데…… 진짜 안 어울리는 단어 같긴 한데… 어쨌든 그랬다.

***

3주가 지날 동안 계범호는 매화를 방문하지 않았다. 전에도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그때와는 달랐다. 태주는 초조하지도 불안하지도 않았다.

먹기도 잘 먹었다. 계범호가 간식 먹으라고 깡패 한 놈에게 백만 원 넘게 쥐여 줬으니 그 돈을 조금은 써야 했다.

‘저기. 저 호빵 좀 사다 주세요. 피자 맛으로요.’

‘…….’

폭언과 폭력은 없었지만 짜증스러운 눈빛을 받긴 했다. 아무리 먹어도 백만 원어치만큼은 먹지 못할 테고, 그럼 남은 돈은 자기가 가질 거면서 그는 태주를 무척 성가셔했다.

그렇게 부탁해 먹은 간식들은 매화까지의 거리 때문에 항상 좀 식어 있었지만 매화에서 먹는 음식보다는 맛있었다.

몸도 편안했다. 남자와의 섹스가 유난히 길고 집요했던 날에는 종종 몸에 열이 날 때가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것도 없었다. 달고 살았던 근육통과 붉은 자국도 없어지고, 몸 상태는 여느 때보다 좋았다.

그리고 제 일이 된 서빙, 그것만 열심히 하면 됐다. 팁을 받으려 아무에게나 절박하게 매달리는 일은 안 해도 됐다.

“아, 태주야. 손님이 그렇게 말하는데 잠깐 앉아 있다가 가지.”

물론 서빙만 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태주는 같은 방에 들어갔던 형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들에게는 미안하고 껄끄러운 감정이 있었다.

“죄송해요.”

“그거 잠깐 앉는다고 죽냐? 우리는 씨발, 이 방 저 방 다니면서 한두 푼 받자고 재롱떨고 있는데.”

예전부터 말을 비꼬아 하던 남자 하나가 말을 보탰다. 태주의 표정이 조금 굳어지자 그가 과장되게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이를 거냐? 부러워서 그런다, 부러워서.”

아, 세상 참 불공평하네. 들으라는 듯 중얼거린 그가 거칠게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남은 사람들은 슬쩍 태주의 눈치를 살폈다.

태주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그때 서빙을 하라는 무전이 들려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갈게요.”

자신이 대기실을 나오자마자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제 얘기인 것만 같아 가슴이 서늘하게 식었다.

착잡한 기분은 서빙을 하러 들어가서도 나아지지 않았다. 벌써 한참 놀다가 인터폰으로 주문을 한 듯 테이블은 어수선했다. 태주는 굴러다니는 술병과 빈 접시들을 치우고 주문한 음식을 다시 세팅했다.

“저기요.”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가 5만 원짜리 몇 장을 건넸다. 태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것을 받아 뒷주머니에 넣었다. 고작 서빙으로 이 정도 팁을 주는 손님은 흔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네….”

손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달싹였다.

“아직도 서빙만 해요?”

“네.”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전에도 온 적이 있었던 듯싶었다.

“아….”

멋쩍게 뺨을 긁적이는 남자에게 그의 친구로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어후, 게이 새끼 이거. 남자 옆에 앉을 수 있는지부터 물어봐야지.”

태주는 흘긋 눈을 굴렸다. 혼자 앉은 남자와 달리 그의 친구는 옆에 여자 직원과 함께였다. 이쪽은 게이인데 저쪽은 아닌 것 같았다.

좀 의외였다. 사람들 사고방식이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이런 곳에도 같이 오다니.

“아, 됐어. 크흠. 다음에 또 봬요.”

“네. 즐거운 시간 되세요.”

태주는 공손히 인사를 한 뒤 트레이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룸으로 들어갈 때보다는 기분이 좀 좋아졌다. 뒷주머니 속 5만 원짜리 몇 장 덕분이었다.

자신에게 팁을 준 남자는 평범한 직장인처럼 보였었다. 인상도 선했고, 말투도 매너 있었다.

그런데 저 남자 옆에 앉은 제 모습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몇몇 다른 손님의 얼굴을 생각해 봐도 그랬다.

인상이 무섭고 덩치가 커다란 남자가 아니면 다 이상했다.

“…….”

멈칫. 걸음을 멈췄던 태주는 이내 고개를 흔들며 트레이를 밀었다.

새벽 4시가 다 되도록 계범호가 오지 않아, 오늘도 오지 않겠거니 했다.

전에 그가 거의 두 달 동안 오지 않았을 때는 그가 오기만을 목 빼고 기다렸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지 않아도 이번 달 상환금은 지불해 줬으니까.

그러니까 자신이 계범호를 기다릴 이유는 없었다. 정말로.

태주는 하나둘씩 비는 룸을 누구보다 열심히 청소했다. 월급은 꼬박꼬박 제 통장으로 입금되고 있었으므로 그만한 값은 해야 했다.

“넌 왜 혼자 일해.”

뒤에서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가 익숙했다.

돌아선 태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계범호가 문가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3주 만에 봐서 그런지 남자는 더 거대해진 것 같았다. 피부가 조금 그을렸나. 3주 사이에 머리도 조금 자란 것 같았다. 얇은 셔츠와 바지를 입은 것으로 보아 일을 하다가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편한 옷을 입은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밤낮 안 가리고 일만 하는 건지, 깡패들은 원래 그런 건지.

태주는 자신이 계범호를 멍하게 보고 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스스로도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박이고 나서야 남자의 물음에 대한 답이 흘러나왔다.

“저 왕따예요.”

그 말에 계범호는 눈썹을 올렸다. 음, 하고 목을 울리며 생각하는 듯하던 그가 말했다.

“괜찮네, 그거.”

“…….”

악만가? 성격 진짜 이상하다.

속으로 한 욕을 들은 것처럼 계범호가 비딱한 시선을 줬다. 태주는 어색하게 웃었고, 남자는 그런 태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팔을 벌렸다.

태주는 쥐고 있던 행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남자에게로 곧장 가서 허리를 끌어안았다. 거의 달려오다시피 한 걸음에도 껴안은 몸은 흔들리지 않았다.

왜 뛰어왔지. 뛰어올 필요는 없었는데.

태주가 문득 생각할 때, 낮은 웃음소리가 들리며 등에 묵직한 것이 내려앉았다. 계범호가 자신의 등을 끌어안는 거였다.

“오랜만에 봤다고 반갑기라도 해?”

그럴 리가. 말도 안 된다.

그런 생각과 달리 태주는 남자의 품에 뺨을 댔다. 코끝에 스민 익숙한 담배 냄새에는 묘하게 이국적인 냄새가 섞여 있었다.

“어디, 갔다 오셨어요?”

“대만.”

여상히 대답하고 남자가 태주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그동안 오지 못한 건 대만에 갔다 와서 그런 거였나 보다. 단단한 어깨에 이마를 대고 몸을 축 늘어뜨리는데, 남자가 말했다.

“태주야. 뒷주머니에 그거 뭐야.”

“네? 아…. 아까 팁 받았어요.”

그러자 뒤통수를 쓰다듬던 손길이 목덜미를 가볍게 짓눌렀다. 태주는 움찔 고개를 젖혔다가 서늘한 눈빛과 마주했다.

“꽤 많은 것 같은데. 우리 태주, 뭐 팔았어?”

“그냥 서빙하고 받은 거예요.”

태주가 억울함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말하고 보니 더욱 억울해졌다. 여기서 서빙만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데. 융통성도 없고 자기만 아는 못된 놈이 되어서 오늘도 얼마나…….

“그래?”

여상히 되물은 계범호가 태주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다시 가만가만 머리칼 사이를 쓰다듬는 손길에 태주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기울여 그런 태주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조금 웃었다. 그는 이내 태주의 어깨를 감싸고 돌아섰다. 그대로 밖으로 향하는 남자를 따라가다가 태주는 멈칫 걸음을 멈췄다.

“청소 마무리해야 돼요.”

“딴 새끼들이 하라고 해.”

“저 안 그래도 왕딴데….”

태주가 말끝을 흐리자, 계범호가 낮게 말했다.

“한 번 말하면 안 듣지, 정태주는.”

“죄송….”

“말은 계속 잘라먹고.”

서늘하지도 위협적이지도 않은 무감한 말투였으나 태주는 찔끔 입을 다물었다. 계범호는 태주를 잠깐 내려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봐주는 거 보니까…….”

뒷말은 거의 중얼거리다시피 하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바짝 몸을 붙인 상태라 태주는 정확히 들었다.

“…….”

보고 싶긴 했나 보다고.

정태주는 저보다 훌쩍 큰 남자를 멍하게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다시 걸었고, 태주는 그런 그의 팔에 갇혀 함께 걸었다.

계범호는 어수선한 매화를 지나 로비로 나갈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서야 태주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딴 건 안 팔았고, 왕따 당하는 중이고. 또 뭐.”

나직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간질였다.

“…간식 먹었어요.”

칭찬하듯 태주의 뺨을 문지른 그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살도 좀 찐 것 같아요.”

닿은 시선에 불신하는 기색이 보이는 것 같아서 태주는 말을 덧붙였다.

“보면 아실걸요.”

-1층입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계범호가 태주의 팔을 붙잡고 올랐다. 어딘가 바쁜 듯한 움직임이었다.

“오늘 출근하세요?”

“아니.”

“근데 이따 저녁에 안 오고 왜 공항에서 바로 왔어요?”

정태주가 낯선 냄새를 맡느라 계범호의 어깨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그러곤 “대만에 파인애플 과자 유명하다던데.” 하고 중얼거렸다.

유난히 조잘거리는 정태주를 보며 계범호는 입 속에서 혀를 굴렸다. 안 본 지 좀 됐다고 슬슬 까부는 것이었다. 분명 그런 것인데, 그는 물었다.

“여권 있어?”

“아니요.”

뜬금없는 말에 동그랗게 뜬 눈이 말갛다. 계범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가만히 있을 리가 없겠지.”

“네?”

태주가 되묻는 말에는 대답해 주지 않은 채, 계범호는 스스로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가 태주의 어깨를 감싸고 끌어당겼다.

호텔 방까지는 금방이었다. 남자가 성미가 급한 것은 직원 모두 아는 사실이라 빠르게 안내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태주도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으므로, 남자가 곧장 단추를 푸는 것을 보고 저도 옷을 벗었다. 셔츠를 벗고 바지를 허벅지 반쯤까지 내렸는데 상의를 탈의한 계범호가 성큼 다가왔다.

“어어….”

그러더니 태주를 달랑 안아 들었다. 남자는 그대로 이동해 침대 위에 태주를 내려놓고 반쯤 벗은 바지와 팬티를 한 번에 끌어내려 벗겼다. 옷이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에 엎드린 태주가 뒤를 돌아보았다.

계범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태주의 엉덩이 아래를 가볍게 쥐며 말했다.

“봐도 모르겠는데.”

“아….”

“간식 사 먹으랬다고 간식만 사 먹는 놈이 어딨어.”

“뭐 먹었는지 모르잖아요.”

태주의 말에 계범호는 답이 없었다. 문득 이상한 기분에 태주가 고개를 뒤로 돌렸으나, 그 순간 엉덩이 사이를 문지르는 손가락에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남자는 평소보다 성급했다. 오랫동안 성기를 받지 않은 아래는 좁았고, 젤을 흠뻑 적신 손가락 하나를 넣는 것도 빠듯했다. 그런데 그는 손가락 개수를 빠르게 늘려 금방 손가락 세 개를 밀어 넣어 휘젓더니, 곧장 성기를 들이밀었다.

“으….”

구멍을 압박하며 굵직한 것이 천천히 밀려 들어왔다. 불편한 감각에 태주가 꿈지럭거리자 계범호는 태주의 엉덩이를 벌리고 있던 손으로 앞쪽을 더듬었다. 반쯤 발기한 태주의 성기를 붙잡아 흔들며 그가 태주의 등에 가슴을 붙였다.

“으응….”

“좀 만져 줬다고 금방 낑낑거리지.”

웃음기가 섞인 낮은 목소리가 태주의 귓바퀴를 간질였다. 태주가 움찔 하고 고개를 비트니 그가 귓가에 입을 맞췄다.

남자는 침대를 짚은 태주의 손 위를 누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속살이 남자의 좆에 달라붙어 마찰되는 감각이 여전히 불편했으나, 쾌감은 점차 선명해졌다.

계범호는 엎드린 태주의 등에 완전히 붙은 채, 한 손은 태주의 손등 위를 누르고 다른 손으로는 태주의 성기를 가볍게 흔들었다.

앞에서 쾌감이 오니 경직된 뒤쪽도 자연스럽게 풀려갔다. 전보다 쉽게 출입을 반복하며 계범호가 낮은 숨을 내쉬었다.

“아! 으읏, 으….”

“팔에 힘줘.”

어느 순간 깊이 들어와 안쪽을 짓누르는 성기에 눈앞이 번쩍 튀었다. 거기다 앞쪽을 흔드는 손길도 멈추지 않아 태주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흐으….”

깊숙이 들어온 선단이 전립선을 누르자 결국 태주의 팔이 꺾였다. 시트에 얼굴을 묻은 태주의 뒤에서 남자가 혀를 찼다.

이내 태주의 몸이 가뿐하게 돌아갔다. 안쪽에 성기가 걸쳐진 채라 태주는 얕은 신음을 흘렸다.

바뀐 시야에 적응하려 눈을 깜박이자 계범호가 자신을 빤히 보는 게 보였다. 눈을 맞춘 채, 그가 깊이 삽입했다.

“으응….”

정태주는 미간을 좁힌 채 입술을 벌리고 신음했다. 그 상기된 뺨과 풀린 눈을 물끄러미 보며 계범호가 말했다.

“이게 낫네.”

태주도 누운 자세가 더 편하긴 했다. 자세 제대로 못 잡는다고 엉덩이를 맞을 일도 없고.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자, 계범호는 피식 웃더니 태주의 뺨을 가볍게 문지르고 입을 맞췄다.

그런 다음에는 또 거칠고 성급하게 움직였다. 태주의 골반을 억세게 틀어쥔 채 좆을 쑤셔 박았다. 남자의 단단한 아랫배와 태주의 살갗이 퍽퍽 소리를 내며 맞부딪혔다.

잔뜩 발기한 태주의 성기도 허공에서 흔들렸다. 좀 전까지 남자가 만져 주어 사정 직전까지 갔다가 쾌감이 뚝 끊겨버린 게 아쉬워 태주는 제 성기로 손을 댔다.

계범호의 움직임 때문에 몸이 정신없이 흔들려 성기를 붙잡고 흔드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태주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뒤쪽의 쾌감과 앞쪽의 쾌감이 어우러져 시야가 금방 흐릿해졌다.

턱을 치켜들며 밭은 숨을 내쉴 때였다. 코앞의 절정을 향해 빠르게 움직이던 손이 덥석 붙잡혔다.

“손님보다 먼저 가면 안 되지.”

“…네?”

단호한 목소리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태주는 멍하게 되물었다. 계범호는 조금 짓궂은 눈빛으로 “손대지 마.” 하고 낮게 주의를 줬을 뿐이다.

그러고 내벽을 자극당하자 정태주는 움찔 눈을 감았다 떴다. 좆을 만지고 싶어 아랫배에서 손을 꿈지럭거리다가 제 살갗만 꼬집었다.

“씨발….”

정태주는 쾌감에 겁을 상실한 듯했다. 그러나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하는 욕이 우습고 같잖아 계범호는 웃기만 했다.

“아아!”

오므라든 정태주의 다리를 활짝 벌리고 성기를 끝까지 쑤시자 하얀 손가락이 그의 팔을 덥석 쥐었다. 그는 그것에 흘긋 시선을 주며 허리를 움직였다.

“읏, 흐으….”

절정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왔기 때문인지, 성기가 내벽을 가볍게 비볐을 뿐인데도 정태주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계범호는 정태주의 한쪽 다리를 팔로 감싸며 다른 손으로 터질 것처럼 부푼 태주의 성기를 붙잡았다.

“아윽….”

곧장 납작한 아랫배가 움찔거렸다.

계범호는 태주의 성기를 가린 제 손을 펼쳐 보았다. 흰 액체가 손가락에 묻어 있는 것을 본 뒤 그의 시선은 허공에 발딱 서 있는 불그스름한 성기로 옮겨갔다. 아직도 울컥울컥 정액을 뱉어내는 성기를 보며 남자가 피식, 웃었다.

“이건 뭐, 닿기만 해도 싸.”

“아아악!”

아래를 꽈악 움켜쥐는 손길에 태주가 눈을 번쩍 떴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남자의 손을 밀어냈으나 억센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싸지 말라고 했어.”

남자의 눈매에는 옅은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그러나 그 눈동자만큼은 어둡고 짙은 감정으로 일렁거렸다.

“네, 네. 으으….”

새카만 눈동자와 마주한 채, 태주는 남자의 팔뚝에 손톱을 세웠다. 헐떡이며 올려다보고 있으니 계범호의 눈이 묘한 색으로 빛났다.

“흐으, 안 쌀게요. 놔주세요….”

태주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애원했다. 마침내 손에 힘이 풀렸을 때는 안도의 한숨이 흩어져 나왔다.

그러나 위기는 금방 찾아왔다.

조금 전 절정에 오른 탓에 예민한 내벽은 남자의 성기가 어디를 쑤셔도 경련했다. 눈앞이 새하얘져 몸이 붕 떠오르는 듯한 기분에 태주는 덜덜 떨며 남자를 붙잡았다. 낮은 웃음소리를 들었던 것 같았다.

“흐으, 손님, 손님….”

반쯤 눈을 뜬 태주는 시야에 짐승의 발이 있는 것을 보았다. 겨우 눈을 깜박여 다시 보니 그것은 남자의 어깨에 있는 문신이었다.

“쌀 것 같아요.”

퍽퍽, 틈을 주지 않는 남자의 어깨에 매달린 채 태주가 헐떡이며 말했다. 그러나 “참아.” 하는 매정한 목소리만 돌아왔다.

“흐으으…. 싸게 해 주세요. 제발….”

계범호는 제 귓가에서 간질거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흰 목덜미를 붉힌 채 바들바들 떠는 정태주가 보였다. 움직임을 잠깐 멈추자 정태주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흣, 싸고 싶어요…. 네?”

물기 어린 눈동자가 반질거렸다. 남자의 턱에 닿은 숨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는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래. 착하게 허락받아야지.”

남자의 눈이 태주의 얼굴을 곳곳이 살폈다. 홍조 띤 뺨, 떨리는 입술, 애타게 올려다보는 눈동자.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가 태주의 성기를 쥐었다. 겁을 먹고 눈을 질끈 감는 태주를 보며 계범호는 조금 웃었다.

“가도 돼.”

“하윽…!”

정태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정했다.

무슨 바람이 든 것인지, 그 뒤로도 계범호는 태주의 사정을 통제하려 들었다. 태주로서는 좆같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쉽게 허락을 해 주지도 않았다.

무척 흥분한 남자는 그 전과 달리 별로 태주를 놀리고 싶은 마음도 없는 것 같았다. 웃음기 하나 없이 점점 빠르게 안을 들쑤시며, 태주의 성기를 꽉 붙잡아 요도구를 거칠게 틀어막았다. 태주가 발버둥을 치며 어깨를 밀어내도 단단한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벽 깊숙한 곳에 사정을 하고 나서야 태주의 성기를 풀어 주었다. 그러나 억지로 사정이 막혀 있던 태주의 것은 곧장 사출해낼 수가 없었다.

혀를 찬 계범호가 태주의 성기를 흔들었다. 태주는 고통스럽게 사정하며 눈꼬리를 적셨다. 억울하고 분해서 눈시울을 붉힌 채 씩씩거리고 있으니 남자가 물끄러미 시선을 줬다.

“울기는.”

계범호는 작게 웃으며 태주의 뺨에 입을 맞췄다.

급한 욕구가 잠재워진 남자는 그다음부턴 다른 걸 채우려 들었다. 태주의 온몸을 지분거리며 새하얀 몸을 물고 빨고…. 거칠게 휘둘리지 않아도 태주는 기진맥진해졌다.

만족할 만큼 자국을 남기고 나서야 그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태주는 흘긋 그를 쳐다보았다. 창에서 아침 햇빛이 쏟아져 남자의 얼굴 윤곽이 짙은 주황색을 띠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남자의 움직임이 조금 느렸다. 대만엔 무슨 일로 간 것인진 모르겠지만, 새벽에 한국으로 돌아와 밤을 샜으니 피곤한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남자보다는 태주의 상태가 더 안 좋았다. 가물거리는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고 있는데,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자고 싶어요….”

태주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계범호는 잠기운이 덕지덕지 묻은 태주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다가 담배를 껐다. 재떨이에 꽂힌 장대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베개를 베고 눕는 남자의 움직임에 침대가 출렁거렸다. 지진이라도 난 것 같은 진동이라 태주가 무심코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런데 팔 아래쪽에 불쑥 들어온 커다란 손이 몸을 가볍게 끌어올리는 바람에 손이 비게 됐다.

계범호는 태주의 목 아래에 팔을 넣고 축 늘어진 몸을 끌어안았다. 태주는 잠깐 눈을 떴으나 등을 가볍게 토닥이는 손길에 다시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자.”

낮은 목소리에 주문이라도 걸린 것처럼 태주는 깊이 잠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태주는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는 손길을 느꼈다. 할머닌가. 잠결에 생각하다 그게 아니란 걸 곧장 깨달았다. 할머니의 손 치고는 너무 커다랬고, 희미한 담배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다.

다른 감각도 하나둘씩 돌아왔다. 뺨에 닿은 단단하고 부드러운 살갗, 온기, 묘하게 답답한 기분….

태주는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렸다가 금방 내려놓았다. 시야는 어두웠고, 몸을 누르는 압박감은 포근했다. 조금 더 자고 싶었다.

그때 머리에 닿아 있던 손길이 멈췄다.

다시 움직였을 때는 이전과 달리 조심성이 없었다. 이마에서부터 귀 위쪽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큼직한 손길에 어둑해지려던 정신이 차츰 맑아졌다.

태주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는 거대한 벽이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박인 태주는 꾸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

계범호다.

멍한 머릿속이 천천히 굴러가며 상황파악을 했다. 자신이 베고 있는, 베개치곤 따뜻하고 딱딱한 이것은 계범호의 팔이고, 거대한 벽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남자의 가슴팍이었다.

즉 자신은 계범호의 품에 안겨 잔 것이다.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까무룩 잠들었던 것 같은데 그가 왜 아직 여기 있을까. 생각보다 시간이 별로 안 지났나.

어쨌든 눈 뜨자마자 보기엔 좀 무서운 얼굴이었다. 아무리 느슨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한들, 이상하게도 죄지은 기분이 들었다.

“…몇 시예요?”

태주가 잠긴 목소리로 머뭇대며 물었다. 그러자 줄곧 제 얼굴에 닿아 있던 남자의 시선이 흘긋 옆으로 이동했다.

“2시.”

자연스레 대답한 계범호가 문득 눈을 내리깔고 웃었다.

“기분이 참….”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태주의 뺨을 문질렀다. 그는 사르륵, 눈앞으로 내려온 머리칼도 뒤로 넘겨주고 나서야 손을 태주의 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뒤에 태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묘한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뭘까. 태주는 그 감정이 궁금해 남자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계범호가 살짝 미간을 구기며 태주의 뺨을 꼬집었다.

“아….”

태주는 욱신거리는 뺨을 붙잡고 인상을 찌푸렸다.

계범호는 이내 몸을 일으켰다. 그의 팔 위에 올려져 있던 태주의 머리가 시트로 툭, 떨어졌다.

“일어나.”

“저는 조금 더 자면 안 돼요?”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당기며 한 말에 가만히 보는 시선만 돌아왔다. 태주는 스르르 이불을 다시 내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계범호는 욕실에 들어갔고, 태주는 멍하게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날씨가 좋은 듯했다. 보통 이런 날이면 너무 밝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데, 오늘은 푹 잤다. 시간상 평소보다 덜 잔 것인데도 몸이 개운했다.

“아.”

문득 어둡던 시야와 넓은 가슴팍이 떠올랐다.

계범호 때문인가. 거대한 덩치에 안겨 코를 박고 잤으니 햇빛이 가려진 것 같았다.

태주는 눈을 비비다가 문득 제 허벅지 사이를 더듬었다. 뒤처리도 못 하고 그대로 잠들었는데, 흘러나온 것 없이 피부가 보송했다.

의아함을 띤 눈동자가 이내 아래로 향했다. 침대 아래에는 대충 내팽개쳐진 수건 한 장이 있었다.

“…….”

수건을 보며 얼마나 생각에 잠겨 있었는지 모르겠다. 욕실 문이 열리고, 계범호가 머리를 털며 바깥으로 나왔다. 느슨하게 묶은 가운 속으로 보이는 근육 사이마다 짙은 그림자가 고여 있었다.

태주는 제 몸을 힐끔 내려다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창가로 향하는 남자의 옆을 지날 때는 걸음이 빨라졌다. 남자가 쳐다보는 게 느껴졌으나 숨듯이 욕실로 쏙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 남자는 옷을 입은 채였다. 어제와는 다른 옷이었는데, 누군가 가져다준 것 같았다.

태주는 눈을 굴리다 바닥에서 제 셔츠를 찾았다. 아무렇게나 벗어두어 잔뜩 주름이 져 있었다. 최대한 탁탁 털어서 입었지만 별로 소용은 없었다.

“거지꼴이네.”

꼬깃꼬깃한 셔츠를 입고 준비됐다는 듯 쳐다보는 태주에게 계범호가 한마디 했다.

“…아침에 빨았어야 했는데 바로 잠들어서요.”

“그거밖에 없어?”

계범호가 한쪽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네.”

고개를 끄덕인 태주를 남자는 빤히 쳐다봤다. 거지꼴이라 보기 싫어 그런 건가. 하여튼 성격 까다롭고 이상하다. 속으로 생각했으나 태주는 눈치를 보며 물었다.

“…숙소에서 입는 옷 있는데, 갈아입고 나올까요?”

그런데 역효과였던 것 같다.

계범호는 심기가 불편해진 얼굴로 태주의 셔츠를 노려봤다. 손님? 태주가 조심스럽게 부른 말에 무섭게 미간을 찌푸린 그가 이내 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고는 말했다.

“됐어.”

짧은 말이 싸늘해 태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옷 입고 어딜 가.”

“아….”

짐작은 했지만 어딜 갈 생각이 있었나 보다. 좀 아쉬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성큼성큼 걷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그가 멈춰 섰다. 계범호가 고개를 돌려 태주에게 서늘한 시선을 주며 말했다.

“안 와?”

아. 잠옷 입지 말라는 뜻이었구나. 태주는 반색을 하며 남자에게 걸어가 옆에 붙어 섰다.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붙잡자 한숨 소리가 들렸다. 올려다보니 계범호가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의 시선은 얼마간 태주의 얼굴에 머물렀다.

태주의 짐작대로 남자는 태주를 데리고 또 밖으로 나갔다. 드라이브를 시켜 주려나 보다 했는데, 남자는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적당히 사람 없는 식당으로 가.”

“…고속도로 빠지기 전에 손짜장집 하나 있습니다. 거기로 모실까요?”

잠깐 생각하는 듯하던 기사가 물었다.

“그래.”

태주는 태연해 보이는 계범호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린 그는 무감한 시선을 줄 뿐이었다.

도착한 식당은 정말 허름했다. 점심시간이 아니라 그런지 가게는 텅 비어 있었고, 낡은 선풍기가 달달 돌아가는 소리와 작게 틀어놓은 TV 소리만 났다.

계범호와 태주가 들어가자 의자에 앉아 TV를 올려다보고 있던 주인이 몸을 일으켰다.

“어서 오세요.”

적당히 친절한 인사를 하며 돌아서던 주인이 순간 눈을 크게 떴다. 태주의 옆에 선 계범호의 덩치나 인상을 보고 놀란 듯했는데, 뒤늦게 시선을 피하며 “아무 데나 앉으세요.” 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 가게의 주인은 매화 사장에게 돈을 받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깡패 처음 보는 사람처럼 놀라는 모습이 딱 그랬다.

먼저 앉는 계범호에 맞은편에 앉으며 태주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인 혼자 주방과 홀을 보는 것 같았고, 다른 사람은 없었다.

계범호는 그런 태주를 관찰하듯 살폈다. 어떻게 하는지 보겠다는 듯이, 느슨하게.

“…전 짜장면이요.”

태주가 말하자 계범호도 벽에 붙은 메뉴판으로 시선을 줬다.

가게 안의 오래된 에어컨은 성능이 좋지 못한 것 같았다. 남자는 셔츠 소매 단추를 풀며 주인을 불렀다.

그러고 나서 주문한 것은 짜장면 곱빼기 하나, 탕수육 대자 하나, 손만두, 볶음밥 곱빼기, 냉면 곱빼기였다.

주인이 주문을 받아 적으며 막 돌아서려고 할 때, 태주가 “어!” 하고 큰 소리를 냈다. 주인의 시선과 계범호의 날카로운 시선이 태주에게 닿았다.

“저도 냉면이요! 짜장면 말고 냉면.”

계범호가 헛웃음을 지었다.

“냉면도 하나 같이 주십시오.”

“예. 그러면 냉면 곱빼기 하나, 그냥 하나, 짜장면 곱빼기, 탕수육 대자, 손만두, 볶음밥 곱빼기 맞으시죠?”

주문을 확인한 주인이 바쁘게 주방으로 갔다. 둘이 와서 많이 시켜서 놀란 듯했으나 계범호에게 되묻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짜장면 안 먹고 냉면 먹는다는 거였는데요. 운전기사님도 같이 먹는 거 맞죠?”

태주가 물은 말에 계범호가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쟤 오면 뭐 하게.”

“아니…. 많은 것 같아서요.”

계범호는 내리깐 눈으로 잠깐 시선을 주다가 턱짓했다.

“음료수나 가져와.”

태주는 그가 눈짓한 곳을 쳐다봤다. 냉장고는 주방 바로 옆에 있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계범호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손에 조금 땀이 났다. 어색하게 느껴지는 걸음으로 냉장고 문 앞에 서자 주방에 난 창으로 주인이 시선을 줬다. 여기서 그에게 속삭여도 계범호로서는 볼 수 없는 위치였다.

그러나 태주는 말했다.

“음료수 두 개 가져갈게요.”

태주는 곧장 냉장고를 열어 콜라와 사이다 한 병씩을 손에 들고 돌아섰다. 그대로 자리로 와서 앉자 남자가 물끄러미 시선을 줬다.

***

그날 출근해서는 좀처럼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 많은 음식을 둘이서 다 먹었다. 뭘 그렇게 많이 시키나 했는데 푸짐한 탕수육이랑 만두를 가운데 두고, 각자 식사류 두 개씩을 앞에 놓고 먹는 거였다.

계범호는 볶음밥과 냉면 두 가지를 곱빼기로 시켰는데도 남김없이 다 먹었다. 먹는 양이 엄청난 것 같았다. 하긴, 그 덩치를 유지하려면 엄청 먹어야겠지.

그래도 태주도 많이 먹었다. 따뜻하고 바삭한 탕수육이나, 불기 쉬운 짜장면은 매화에서는 절대 먹지 못하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먹는 중국 음식이 맛있어 배가 부른데도 자꾸 손이 갔다.

바쁘게 우물거리고 있으면 이따금 계범호의 시선이 닿았던 것 같다.

허튼짓할까 봐 감시하느라 그랬나 본데…….

어쨌든 태주는 괜한 짓을 할 생각이 없었다. 주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계범호가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경찰이 계범호에게서 자신을 지켜 주지는 못할 거란 이상한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도망갈 의지가 줄어들었다는 것이었다.

매달 계범호가 빚을 갚아 주고 있고, 월급과 그에게서 받는 용돈도 꼬박꼬박 모으고 있다. 게다가… 그 이상도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돌연 들었다.

그러니까, 그 생각은 방금 한 생각이었다.

퇴근하고 돌아와 숙소 방문을 열었는데 제 옷장 아래에 종이 백이 가득했다. 뭔가 해서 살펴보니 전부 옷이었다. 셔츠 몇 장이 먼저 보였고, 티셔츠, 바지, 잠옷, 속옷…. 옷이란 옷은 종류별로 다 갖다 놓은 듯했다.

제 자리에 있으니 제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다면 이걸 줄 사람은 계범호뿐이었다. 태주가 얼떨떨하게 옷을 뒤적이고 있는데 경준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게 다 뭐야?”

“모르겠어요. 계범호가 보낸 것 같은데….”

반팔 티셔츠 하나를 꺼내어 제 몸에 대어보는 태주를 경준은 물끄러미 보았다.

“그거 다 비싼 건데.”

“진짜요?”

“응. 니가 들고 있는 티셔츠도 몇십만 원 할걸.”

“예에?”

태주가 기함을 하며 티셔츠를 노려보았다. 작은 로고만 있는 평범한 티셔츠가 왜 몇십만 원이나 한단 말인가.

“돈으로 주지.”

그죠, 형? 태주가 장난스럽게 경준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경준은 웃고 있지 않았다.

“형?”

“아…. 그러게.”

경준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근데 그거 너한테 사이즈 맞아?”

“아뇨. 바지 같은 건 좀 커요.”

계범호의 지시를 받은 사람은 그리 성의 있는 쇼핑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옷의 사이즈나 모양보다는 무난한 종류로 개수를 맞추는 것에 더 신경 쓴 것처럼 보였다. 태주의 사이즈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듯, 어떤 건 크고 어떤 건 좀 작았다.

하지만 옷이 꼭 맞았다면 더 놀랐을 것이다. 계범호는 그리 섬세한 성격이 아니었다.

“딴 애들한테 팔아.”

물끄러미 옷을 쳐다보던 경준의 말에 태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으라고 준 걸 파는 건 좀….”

“VVIP가 어떻게 알아. 그리고 받았으면 니 거지. 팔면 쏠쏠할 것 같은데?”

경준이 웃으며 말을 내뱉고는 “나 먼저 씻을게.” 하고 방 밖으로 나갔다. 태주는 방문을 잠깐 보다가 바닥에 놓인 쇼핑백들로 시선을 줬다.

자신은 들어 보지 못한 브랜드인데 명품인가 보다. 이러다가 차도 사 주고 집도 사 주고 하는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하며 태주는 피식 웃었다.

무릎을 굽히고 앉아 태주는 옷을 전부 꺼냈다. 셔츠를 옷걸이에 걸 때는 작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잘해 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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