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15)

7.

계범호는 또 한동안 방문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새벽, 술에 취한 채 찾아왔다. 연락을 받고 올라간 호텔 문 앞에서 남자가 곧장 자신을 끌어당겨 입을 맞출 때 그것을 알아차렸다. 손길은 억셌고, 숨결에서는 태주마저 취할 것처럼 독한 술 냄새가 났다.

“으응….”

태주의 양 뺨을 감싼 계범호의 자세가 구부정했다. 키 차이 때문에 태주가 고개를 바짝 들어도 남자는 잔뜩 등을 구부려야 했다.

“하아….”

태주의 아랫입술에 피가 맺혔다. 건조한 입술이 이리저리 뭉개지다 보니 살짝 찢어진 거였다. 물끄러미 시선을 주던 남자가 고개를 비틀어 그것을 핥았다. 피는 더 흘러나오지 않았는데 남자는 그것이 아쉬운 듯 상처 위를 혀끝으로 찔렀다.

간지러움에 가까운 감각이었지만 태주는 남자의 샤워 가운을 움켜쥐며 말했다.

“아파요.”

그 순간 태주의 아랫입술을 핥던 계범호의 눈에 잔인한 빛이 스쳤다.

“아!”

그가 아랫입술을 잇새로 콱 물자 상처가 벌어졌다. 어깨를 움츠린 태주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계범호는 조금 전보다 많이 흘러나온 피를 말끔히 핥았다. 입술 주름에 피가 고이면 기다렸다는 듯이 핥아내고 입맛을 다셨다.

“흐으….”

남자가 또 입술을 깨물까 봐 불안한 숨이 흘러나왔다. 흘긋, 입술을 빤히 보고 있던 집요한 시선이 태주와 눈을 맞췄다.

“엄살 부리면 혼나야지.”

말투가 느릿했다.

“네….”

주눅 든 채 대답하며 태주는 제 입술로 손을 가져갔다.

아릿한 통증이 있는 입술에 손끝이 닿기 전 계범호가 손을 붙잡았다. 하얀 손을 잠깐 주무르던 그는 이내 손을 놓아주고 태주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러곤 침대로 걸어갔다. 털썩, 남자가 침대에 걸터앉으니 베개가 가볍게 위로 튀었다.

남자는 그대로 제 가슴팍을 더듬었다. 씻고 가운을 입었으면서 습관적으로 담배를 찾는 거였다.

“아.”

낮은 음성을 흘려낸 남자가 인상을 쓰며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담배는 포기한 모양이었다.

대신 태주에게 손을 뻗었다.

남자가 생각보다 많이 취한 것 같아 조금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주저하며 발을 떼자 낮은 목소리가 재촉했다.

“안 깨물게.”

계범호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태주는 침대 위로 올라가며 “피 계속 나요.” 했다. 그러자 남자는 성가시다는 듯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태주의 팔을 덥석 붙잡아 끌어당겼다.

반쯤 베개에 기대어 누운 계범호가 태주를 와락 끌어안았다. 허리를 끌어안아 제 몸에 바짝 붙이며 머리에 코를 박고 숨을 쉬었다. 태주가 움찔 어깨를 굽히자 그가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나직이 물었다.

“잘 있었어?”

“네.”

“어떻게.”

남자가 툭 말을 내뱉었다. 태주는 단단한 어깨에 뺨을 대고 몸을 축 늘어뜨리며 답했다.

“그냥, 일하고요. 밥 먹고. 자고.”

별것 아닌 말을 남자는 재밌다는 듯 들었다. 그런 남자의 표정을 흘긋거리던 태주가 말했다.

“옷 보내 주신 거, 감사합니다.”

받은 옷은 아무것도 팔지 않았다. 계범호는 어차피 자신이 무슨 옷을 받았는지도 모를 것이고 한두 개쯤 판다고 해도 티도 안 날 텐데,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응.”

계범호는 목을 울리고는 태주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느슨하게 내리깐 눈이나 나른한 손길이나, 오늘 남자는 섹스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태주의 머리를 한참 지분거리던 남자는 문득 태주의 턱을 쥐고 고개를 바짝 들게 했다. 갑작스럽고 조심성 없는 손길에 태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를 올려다봤다.

“아…. 이게 자꾸 생각나서 집엘 못 갔잖아.”

계범호가 손에 쥔 턱을 가볍게 흔들며 비난했다. 어이가 없었다. 태주의 얼굴에서도 그게 보였을 텐데 남자는 하얀 뺨을 손으로 짓누른 채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데리고 다닐 수도 없고.”

남자가 중얼거렸다.

태주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섹스를 할 것도 아니면서 자신을 찾아온 계범호. 얼굴을 가만히 보는 눈빛.

“얌전히 있을게요.”

눈치를 살피며 한 말에 계범호가 피식 웃었다. 안 믿는다는 기색이었다. 태주는 눈을 조금 굴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안 믿길 것 같았다.

얼마간 침묵이 흐른 뒤 계범호가 문득 입을 열었다.

“2년이었던가.”

“네.”

대출 계약을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1년 반쯤 남은 그것.

“2년….”

얼굴에 닿은 남자의 시선이 살결을 따라 찬찬히 돌아다녔다. 남자는 이내 편편하던 미간에 굴곡을 만들며 말했다.

“그때까지 질리려나.”

심술궂은 손길이 태주의 뺨을 눌렀다.

“내가 너한테 질릴까.”

응? 태주야. 남자가 태주의 뺨을 괴롭히며 답을 재촉했다.

태주는 서늘한 눈매가 장난스럽게 휘어진 것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 순간에 온몸으로 와닿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른 채 태주는 말했다.

“아니요.”

내뱉고 나서는 제 말에 묘한 확신이 생겼다.

“…….”

계범호의 얼굴에서 차츰 웃음기가 사라졌다. 태주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짙고 어두운 것이 어른거렸다.

“눈치가 늘었네, 태주가.”

귓가로 파고든 낮은 목소리가 뺨에 소름을 일으켰다. 그 위에서 남자가 손끝을 세웠다. 솜털이 선 부분을 쓸며 관자놀이 근처를 톡톡 두드리는 남자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런 뒤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때는 납치할까.”

“…….”

계범호가 조금도 웃지 않고 태주를 바라보았다.

“납치해서… 어디 지하실 같은 곳에 둬야겠다. 창문으로는 뛰어내릴 수 있으니까.”

느릿느릿 말하던 남자는 마지막 말을 덧붙일 때가 되어서야 피식 웃었다. 태주는 마른침을 삼켰다. 술 취한 사람이 하는 말인데도 쉽게 여길 수가 없었다.

“…지하실이면 땅굴 팔 거예요.”

긴장을 감추듯 툭 내뱉은 말에 계범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내 태주를 강하게 끌어안고 머리를 비볐다.

“아, 이거 묶어놔야겠네.”

낮게 중얼거린 남자가 껴안은 태주의 머리를 지분거렸다.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휘감던 손길이 점점 느려졌다. 태주는 고개를 들었다. 계범호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내리깐 시선을 줬다.

자. 남자의 목소리가 살이 닿은 부분에 울렸다. 커다란 손이 태주의 머리를 제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태주가 그 손길을 따라 얌전히 뺨을 대자 남자의 손가락이 태주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곧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태주가 반쯤 올라와 있음에도 견고한 남자의 가슴팍이 규칙적으로 들썩였다.

태주도 눈을 감았다. 그러고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목이 뻐근했다. 베고 있던 계범호의 몸통이 너무 높아 그런 거였다. 잠들기 전 자신을 껴안고 있던 팔이 침대 위로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태주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허리를 전부 펴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팔을 잡아챘다. 자다 깬 사람 같지 않게 손길이 억셌다.

“어디 가.”

평소보다도 낮게 내리깔린 음성이 오싹했다. 당황한 태주는 “어… 목이 뻐근해서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계범호가 태주의 팔을 끌어당겼다. 침대에 도로 눕게 된 채 눈을 깜박이는데 어둠 속에서 불쑥 다가온 손이 팔 아래를 잡고 태주를 위로 끌어당겼다.

계범호는 태주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엉덩이를 대충 토닥였다. 그러곤 태주의 몸에 묵직한 팔을 올린 채로 다시 잠들었다.

고른 숨소리가 들리고, 주변은 어둑했다. 몰래 빠져나가는 것을 불가능했으므로 태주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도 눈앞이 컴컴했다. 아직도 새벽인가, 생각하다가 자신이 계범호의 옆구리에 찰싹 붙어 그의 팔 아래에 얼굴을 묻은 상태란 걸 깨달았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어 금방 알아차렸다.

개운한 기분을 느끼며 태주는 고개를 들었다. 계범호는 아직 자고 있었다. 솟은 콧대와 뚜렷한 얼굴선에 햇빛이 부서지는 것을 멍하게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잠든 얼굴이 훨씬 잘생겨 보이는 것을 보니 정말 인상이 무섭구나.

태주는 실없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번엔 계범호도 자신을 붙잡지 않아 무사히 침대를 빠져나왔다.

그대로 숙소로 올라갈까 하다가, 마음을 바꿔 욕실로 들어갔다. 어제 못 씻고 잔 탓에 조금이라도 빨리 씻고 싶었다.

기지개를 켜며 욕실로 들어간 태주는 상쾌하게 샤워를 마쳤다. 드라이어 소리를 내면 남자가 깰까 봐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나왔는데, 남자는 어느새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욕실을 등지고 앉은 남자의 커다란 등을 잠깐 보다가 태주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냈다.

정태주가 가까이 다가가서 생수를 건네자 계범호가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태주의 젖은 머리와 말간 얼굴을 잠깐 보다가 생수를 받아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생수 한 병을 단번에 비워낸 그가 그것을 손에서 구겨 옆에 내려놓고는 태주를 끌어당겼다.

태주가 휘청이며 그의 몸 위로 무너졌다. 단단한 어깨를 쥐고 중심을 잡자 남자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묘하게 기분 좋은 기색이었다.

남자는 그날도 태주를 데리고 나가 아침을 먹였다. 일전에 갔던 그 중국집이었다. 아침부터 먹기에 중국 음식은 부담스러운 편이지만 두 사람에게 그런 것은 없었다.

태주는 배가 빵빵해진 채 숙소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한참 잘 시간이라 발뒤꿈치를 든 채 살금살금 걸었다.

그런데 경준은 깨어 있었다.

“어, 형 안 잤어요?”

“응. 에너지 드링크를 너무 많이 마셨어.”

아…. 태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경준은 어제와 같은 차림의 태주를 흘긋 보고는 물었다.

“어디 갔다 와?”

“아침 먹고 왔어요.”

태주가 부른 배를 문지르며 옷장을 열었다. 그런 태주의 뒤통수에 시선을 주던 경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VVIP가 너 되게 좋아하나 봐.”

“예? 무슨….”

태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간밤의 말이나, 요즘의 손길 같은 것이 떠올라 표정이 조금 묘해졌다.

“빚 완전히 갚아 주고 데리고 나갈 생각은 없대?”

“그런 것 같아요.”

“음…. 태주야, 너 좀 적극적으로 그 손님 잡아야 돼. 손님 하나 잡아서 여기 나가는 것 아니면 평생 못 나가.”

태주는 저를 염려하는 것 같은 그의 표정을 보며 걱정 말라는 듯 웃었다.

“그래도 당분간은 계범호가 계속 찾아줄 것 같아요. 돈도 좀 모았고요.”

“…….”

경준은 물끄러미 태주를 쳐다보았다. 잘 잤는지 안색이 환했고, 뺨은 보기 좋게 붉었다. 입고 있는 구겨진 셔츠는 한 장에 백만 원쯤 하는 것이었다. 맨몸으로 와 제 옷을 빌려 입던 아이가 이제는 명품을 입는다. 꾸욱, 경준의 손이 이불을 움켜쥐었다.

“태주야. 너 진짜 몰라?”

고요한 공기 위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무척 갈라져 있었다.

“네?”

정태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김경준을 쳐다봤다.

“대충 알아서 도망친 줄 알았더니….”

“뭘요?”

중얼거리던 경준은 막상 태주가 묻자, 조금 난처한 얼굴을 했다. 후회도 스치듯 떠올랐다.

경준은 초조한 듯 이불을 구기다가 태주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팽개쳐놓은 수십만 원짜리 티셔츠에 시선을 주었다. 다물었던 입술이 스르르 벌어졌다.

“여기 애들 몇은 작업당한 거야.”

“…네?”

“박 사장 작업이라고. 너 조덕현 밑에서 일했다고 하지 않았어? 조덕현이랑 박의성이랑 짜고 치는 작업 잘하거든.”

그래서 너도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걸 알아서 도망쳤나, 했고.

태주는 멍하게 눈을 떴다. 경준의 말이 귓가에서 빙글뱅글 도는 것 같았다. 분명 들었는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그냥, 배달하다가 물건 잃어버려서…….”

중얼중얼 말을 내뱉는데, 서늘한 감각이 등줄기를 관통했다.

“네가 잃어버린 거 확실해?”

“…….”

몇 달 전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우연과 불행이 겹쳤다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물론 찝찝하고 억울한 부분이 있었고, 이곳에서 나가면 당연히 경찰을 찾아갈 생각이었지만.

“너희 할머니 일도 그래. 사장이 보이스 피싱 하는 놈들 몇 아는 것 같더라.”

경준이 참담한 목소리로 덧붙인 말에 태주는 눈을 부릅떴다.

조덕현에게 전화가 왔던 날이 불현듯 떠올랐다. 자신이 상환금을 보내지 못한 것도 아닌데 조덕현은 그날 왜 할머니를 찾아갔을까. 할머니가 시장에 며칠 나오지 않는다는 얘기를 굳이 왜 전했지.

할머니를 두고 협박해왔었으니, 만약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라면 숨기고 계속 협박하는 것이 더 말이 되는 거였다.

“…왜 전데요?”

태주가 불쑥 따지듯 물었다.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을 마주하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 새끼들은 그냥 재미로도 하는 짓이야.”

경준은 대답했다. 그는 조금 씁쓸하게 허공을 보다가, 태주의 얼굴에 다시 시선을 주며 말했다.

“빚을 좀 갚아도, 네가 돈이 된다 싶으면 어떻게 해서든 다시 빚을 늘릴 새끼들이야. 그러니까 손님 하나 잘 잡아서 여기서 꺼내 달라고 해. 그게 제일 확실하니까.”

VVIP한테는 장난질도 안 칠걸.

“…….”

태주는 여러 번 입술을 달싹였다. 혼란한 머릿속은 온통 뒤엉켰다.

그럼 계범호한테 여기서 꺼내 달라고, 아니. 그전에, 사장을 찾아가서 이게 사실이냐고 확인부터 먼저 해야 한다. 정말로 씨발, 할머니까지 엮은 거냐고.

그런데 물어본다고 순순히 대답해 줄 리가 없었다. 혹여 그렇다고 말한다면, 사실 확인까지 해 준다면…….

견딜 수 있을까.

“형, 저는 잠깐, 어… 잠깐 나갔다 올게요. 그, 주무세요.”

태주는 더듬더듬 말을 내뱉고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경준은 그런 태주의 뒷모습을 텅 빈 눈으로 쳐다보았다.

거실로 나온 태주는 휘청거리며 곧장 현관으로 직행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다. 사장과 조덕현을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 그들에게 가는 중인가 보다.

정태주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니 곧장 깡패들의 시선이 제게 쏠렸다.

“야, 야! 너 어디 가냐.”

엘리베이터에 내린 뒤 그 자리에 멍하게 서 있던 태주가 출입문 쪽으로 향하자 그들이 그제야 제지했다. 앞을 막아선 사내들을 보며 태주가 입을 열었다.

“사장님 좀 만나려고요. 아직 출근 안 하셨잖아요. 그래서 제가….”

정태주는 누가 봐도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깡패들은 서로 눈치를 교환했다. 태주를 막아선 사람 중 하나가 뒤쪽으로 빠진 다음 휴대폰을 꺼내 들었고, 다른 깡패들은 태주를 둘러싸고 말했다.

“그럼 출근까지 기다려.”

“아…. 네. 기다릴게요.”

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돌아서지 않고 그 자리에 멀뚱히 섰다.

“쯧. 이 새끼 왜 맛이 갔냐. 야, 뭐라셔.”

“지금 돌아오신답니다.”

통화를 마치고 온 남자가 대답했다. 그러자 태주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사장님 지금 온대요?”

“…그래. 오신다니까 소파 가서 앉아서 기다려라.”

정태주는 그제야 움직였다. 얌전히 소파에 가서 앉는 태주에게 감시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태주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달달 떨었다.

정말 그렇다고 하면 어쩌지.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게 운명이나 우연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그렇게 혼란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태주는 문득 드리운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뭐 해.”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태주는 꼭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벌떡 일어나 팔을 붙잡았다.

“저 여기 온 거, 사장이 작업한 거래요. 아니 확실한 건 아닌데, 경준이 형이 그런 애들 많대요.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계범호는 횡설수설 말을 내뱉는 정태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태주가 잡은 제 팔에 흘긋 시선을 주고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네?”

태주가 멍하게 남자를 올려다봤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별것 없다는 듯 말했다.

“박 사장 그러는 거야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니까.”

“…….”

태주는 입술을 달싹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더듬더듬 말했다.

“제가 잘못해서 생긴 빚이 아닌 거잖아요…. 할머니 일도요. 아, 저희 할머니가 보이스 피싱 당했는데, 그것도 사장 짓일 거래요. 제 빚 늘리려고요.”

태주의 말을 가만히 듣던 계범호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래서. 달라지는 게 있나.”

말투는 덤덤했다.

태주는 눈을 깜박였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길 반복하자, 차츰 정신이 돌아왔다.

남자의 말은 잔인했지만 사실이었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

솔직히 어느 정도는 의심해 보던 일이었다. 불운이 이렇게나 많이 겹친다는 게 너무 이상하니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넘겨버렸던 의혹과 의심이 정답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의 계획으로 굴러떨어지게 된 깊은 구덩이에서 그저 살아가야 했다.

이미 살고 있던 곳이다. 익숙해져 그럭저럭 편안함을 느낄 때도 있었다. 진실 하나 알게 되었다고 사는 곳을 끔찍하게 여길 필요는 없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정신을 차리고 여기서 벗어날 일만 생각해야 했다. 복수는 그 이후였다.

다만…….

자신의 말에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계범호를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도 가슴께가 응축되는 것 같았다.

그의 눈빛이나 말, 손길 같은 것들을 선연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 순간마다 느낀 남자의 감정은 분명 거짓이 아니었다.

계범호는 자신과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어 했다.

“저 여기서 꺼내 주시면 안 돼요?”

정태주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올려다보는 눈망울은 붉었다.

“도망 안 칠게요. 진짜예요. 나가서도 손님이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

간절해 보이는 얼굴을 보며 계범호는 바람 섞인 웃음을 흘려냈다. 잠깐 허공으로 눈을 굴린 그가 이내 태주를 똑바로 내려다봤다.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너를 왜 꺼내, 태주야.”

“…….”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정태주의 얼굴이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정태주는 입가를 잘게 떨며 물었다.

“제가 억울한데도요?”

남자는 서러움과 배신감이 뒤엉킨 조그만 얼굴을 눈에 담았다. 그의 감정이 정확히 어떤 형태이고 얼마만큼의 크기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 것처럼 저렇게 서러워했다.

“꺼내 주면, 뻔하지.”

계범호는 정태주의 뺨을 감싸고 엄지로 눈 밑을 살살 문질렀다. 그의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경찰서로 달려갈 거고, 잡아 놓으면 어떻게 해서든 탈출하려고 할 거고.”

“…….”

“밖에서 우리 태주가 날 상대나 하겠어.”

눈을 내리깔고 웃는 남자를 보며 태주는 숨을 들이마셨다. 급히 삼킨 숨은 목구멍에 걸린 듯 불편한 감각을 줬다.

“사람 하나 가둬두기에 여기만큼 좋은 곳이 없지.”

마주친 눈빛은 어둡고 싸늘했다.

태주는 가슴을 들썩였다. 목구멍에 걸린 숨이 영 빠져나오지 않아 밭은 호흡만 내쉬며, 새빨개진 눈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계범호는 그런 정태주를 표정 없이 내려다보며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딴생각하지 말고, 하던 대로 해.”

“…….”

“2년 짧아.”

속이 시렸다. 작은 중국집의 오래된 에어컨으로는 가시지 않는 더위를 고작 몇 시간 전 느꼈는데. 저 남자와 함께 땀을 삐질삐질 흘려댔는데.

이상하게도 추웠다.

“올라가.”

계범호의 말에 태주는 말없이 돌아섰다. 열을 올리고 씩씩거리던 사람 같지 않게 표정을 지운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닫히는 문 사이로 남자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정태주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묵직한 것으로 짓눌리는 가슴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제 억울함에 남자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던가. 또 편을 들어 주고, 박 사장을 때리기라도 할 줄 알았나.

지금 자신이 느끼는 배신감이 믿음에서 비롯된 거라면, 모두 애초에 자리 잡아선 안 되는 감정이었다.

계범호의 말도 맞다. 자신이 여기서 나가면 깡패 새끼를 어디 상대나 할까. 그가 물어본 적은 없어도 서로 답을 아는 거였다.

계범호와 자신은 그저 조금 견고한 단골과 판매자의 관계일 뿐이었다. 그는 이미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있고, 그 이상의 사정을 봐줄 필요도 이유도 가치도 없었다.

주고받는 것이 돈과 섹스인 관계다. 그걸 잠깐 잊어버리기라도 했었나 보다.

“씨발….”

공허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숙소로 돌아간 태주는 현관문을 열었다. 쇠창살이 있는 거실 창 앞에 서 있던 경준이 곧장 고개를 돌려 시선을 줬다.

“어디 갔다 와? 너 설마 사장 찾아다니고 그런 건 아니지?”

“사장 출근 안 했잖아요.”

태주가 작게 대답한 말에 경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태주를 걱정스럽게 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마. 어차피 그 새끼들 우리가 날뛴다고 꿈쩍도 안 해. 괜히 반항하다가 끌려가서 맞거나 죽을 수도 있어.”

“…….”

계범호에게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제 생각 역시도 비슷했다. 진실을 안다고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달라지는 것은 없었고, 그저 조금 더 고통스러워졌을 뿐이었다.

“그럼 형은, 그 얘기 왜 했어요?”

“어?”

조용히 물은 말에 경준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태주는 그런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전엔 그런 얘기 안 했잖아요.”

“아…. 어, 근데 나는 네가 좀 더 적극적으로 VVIP 잡아야 할 것 같아서. 몇 달 내내 네 빚 갚아 주는 사람이 빚 전부 갚을 능력이 안 될 리도 없고. 용돈만 해도 많이 주는 것 같던데.”

대답이 길었다. 상기된 표정의 경준에게서 시선을 떼며 태주는 볼 안쪽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허공을 응시하는 눈두덩이가 뻐근하게 아파질 때쯤, 태주는 말 한마디를 내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형도 제 편은 아니었네요.”

***

태주는 잘 지냈다. 서빙과 청소도 열심히 했고, 사장을 찾아가지도 않았다.

밥도 잘 먹었다. 다만 목구멍으로 넘기기가 힘들어서 끼니마다 물에 밥을 말아 먹었다. 그렇게 먹으면 여태까지는 그럭저럭 삼킬 수가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밥알이 까끌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꿋꿋이 한 그릇을 비워냈다. 물과 쌀알이 목 끝에서 찰랑거리는 기분이 들었으나 태주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바쁘게 일을 하며 돌아다니는 동안에도 속은 편해지지 않았다. 명치를 눌러 보며 인상을 쓰고 있는데, 새로 온 매니저가 말했다.

“정태주 씨. 호텔에서 대기하세요.”

사흘 만에 계범호가 오려나 보다.

태주는 구겼던 미간을 펴고 복도로 나섰다. 억울하게 빚을 진 사람들이 웃음과 몸을 파는 방들을 지나 로비로 나왔다.

로비의 조명은 어둑한 매화의 그것보다는 밝았으나 여름 해보다는 훨씬 어두웠다. 출입문에 무심히 시선을 주는데, 때마침 계범호가 그쪽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태주는 인사를 흘리고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계범호는 그 자리에 잠깐 멈춰 있다가 태주의 옆으로 와서 섰다.

정태주는 아무것도 없는 엘리베이터 문에만 시선을 주고 있었다. 남자는 무표정한 태주의 얼굴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외해?”

남자를 힐긋 보고 정태주가 “아니요.” 했다. 그냥 대답만 하는 거였다. 그러고 열린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들어갔다.

침묵이 흘렀다.

태주도, 남자도 호텔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말이 없었고, 그래서 이전에 제법 대화를 많이 했다는 사실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태주는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침대 근처로 갔다. 침대 옆에 우두커니 서서 손가락을 잠깐 움직이다가, 옷과 속옷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가 앉았다.

계범호는 그런 태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벗은 몸을 조금도 가리지 않고 침대에 앉아 있는 모습이 무기력해 보였다.

그는 앉은 태주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내린 태주의 발끝과 닿을 정도로 가까이 서서 태주의 턱을 들어 올렸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그가 중얼거렸다.

“잘 지낸다더니.”

“…저 감시하세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던 깡패와 그 후 찾아왔던 계범호. 사흘 전 일이 떠올라 물은 말에, 계범호는 여상한 태도를 보였다.

“안 되나.”

“아뇨.”

짧게 대꾸하고 정태주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계범호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나갔다 올까.”

“…….”

태주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턱에 닿아 있던 거친 손가락이 어울리지도 않게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뺨을 만지는 것이, 화가 났다.

“왜 제 생각해 주는 척해요?”

불쑥 내뱉은 말에 뺨에 닿은 손길이 멈췄다. 정태주는 계범호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냥 섹스나 해요.”

“…….”

당돌하게 눈을 치켜뜬 모습을 보며 계범호가 싸늘한 웃음을 흘렸다. 이 새끼가…. 음산한 중얼거림도 뒤따랐다. 그는 뺨에 닿아 있던 손을 거둔 뒤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뭐 해.”

계범호가 말했다.

태주는 그와 눈을 맞추지 않은 채 바닥으로 내려갔다. 무릎을 꿇고 남자의 다리 사이로 들어가는데, 명치가 쿡쿡 쑤시듯 아팠다. 손발은 찼다. 며칠 내내 그랬던 것처럼 몸이 춥고 코는 자꾸 시큰거렸다.

태주는 그 모든 감각을 모른 척했다. 진실만큼이나 중요하지 않은 제 감정이다. 쓸모없는 감정이 만든 몸의 이상 현상은 무시하는 게 옳다.

턱이 아플 만큼 입을 크게 벌리고, 구역감을 삼켰다. 숨이 가빠 몸을 들썩이자 억센 손이 머리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제대로 안 해?”

머리 위로 떨어진 서늘한 음성과 함께 뒤통수가 꽉 붙잡혔다. 움찔 눈을 감자 굵직한 살덩이가 목구멍을 찢을 듯 파고들었다.

“커흐, 으…. 허억….”

“눈 떠.”

태주는 힘겹게 눈을 뜨고 남자를 올려다봤다. 무서운 인상의 남자는 표정 없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식의 행위가 오랜만이란 것을 문득 깨달았다.

욱신. 명치의 고통이 조금 더 심해졌다. 꿇어앉은 몸을 저도 모르게 뒤트는데, 그 순간 목구멍이 깊이 쑤셔졌다.

“우욱…!”

남자의 허벅지를 거칠게 밀어냈으나 가깝게 붙어 있던 터라 소용이 없었다. 계속 목구멍 아래에서 출렁이던 것들이 결국 입 밖으로 쏟아졌다.

“허억, 헉….”

고통스러운 숨을 가다듬기도 전에 정태주는 눈을 크게 떴다. 엉망이 된 남자의 바지가 보였다.

그전에 대들던 것은 그의 몸에 토한 것에 비하면 장난이었다. 한기가 몰려와 태주는 덜덜 떨며 말했다.

“죄송… 으….”

겁에 질린 채 남자를 올려다보다 말고 정태주는 입을 틀어막았다. 손이 가늘게 떨렸다. 화장실로 가려고 땅을 더듬는 손은 힘이 없어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했다.

고개를 숙인 태주의 시야에 남자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눈을 질끈 감는데, 그 손은 태주의 팔 아래에 들어와 흉곽을 단단히 붙잡았다.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제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계범호가 자신을 안아 올린 거였다.

단단한 팔뚝으로 엉덩이 아래를 받친 그가 걸음을 뗐다. 욕실로 향하는 듯했다. 더러운 바닥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태주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는 욕실로 들어간 다음에야 태주를 내려주었다. 벽처럼 커다란 남자의 앞에서 태주는 움칠 등을 웅크렸다.

“토할 것 같….”

덜덜 떨며 말을 내뱉고는 또 헛구역질을 했다.

희게 질린 안색을 잠깐 쳐다보던 계범호가 태주를 변기 쪽으로 돌려세웠다. 허리를 굽히게끔 하고 등을 큰 손으로 쓰다듬었다. 태주가 헛구역질만 할 뿐 토해내지 못하자 벌린 입 속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허억… 흐으….”

겨우 쏟아낸 후 태주는 힘이 빠진 채 헉헉거렸다. 혀를 찬 계범호가 허리를 굽혀 태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냉랭함이라곤 없는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다 했어?”

태주는 대답 대신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런 얼굴을 가만히 보던 남자가 물을 내리고 태주를 데려가 입을 헹구게 했다.

힘없이 손을 떠는 모습이 답답했는지 계범호는 직접 태주를 씻겨 줬다. 눈물로 범벅된 눈가를 문지르고 말간 콧물이 맺힌 코 아래도 손으로 훔쳤다. 남자의 손길은 부드럽지도, 섬세하지도 않아서 살갗이 조금 붉어졌다.

태주는 훌쩍거리며 눈을 깜박였다. 토하고 나니 속이 한결 편해졌다. 세면대와 거울 아래쪽이 보이는 시야도 맑았다.

“저 여기 아파요.”

힘없는 목소리로 한 말에 남자의 손이 태주의 가슴팍에 닿았다. 젖은 손이 차갑게 느껴져 움찔 몸을 떨자 계범호가 허공에 대충 손을 털어내고는 다시 살갗을 만졌다.

태주는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깜박였다. 이내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병원 가야 할 것 같아요….”

“…….”

배를 살살 쓰다듬어 주던 손길이 멈췄다.

손을 거둔 남자가 태주의 턱을 들어 올렸다. 안색을 살피는 듯한 눈빛에 태주는 아픈 척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남자가 피식 웃은 걸 보면 별로 통하진 않은 것 같았다.

“헛소리하는 거 보니까 살 만한가 보네.”

“아직 아픈데요….”

계범호가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거짓말하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것 같은 눈빛에 태주는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네…. 좀 나아졌어요.”

“그래.”

남자가 뺨을 가볍게 문질렀다. 태주는 그와 잠깐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가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이 창피했고, 서러웠다.

눈가에는 점점 열이 몰렸다. 조금 전까지 무섭게 굴던 계범호가 하필 짜증 하나 내지 않는 것도 문제였다.

눈시울이 간지러웠으나 참아야 했다. 토하면서 울었던 것이야 생리적인 현상으로 우길 수 있겠지만 지금 울면 변명거리도 없었다.

그런데 계범호는 고개까지 기울여 태주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입술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하니 그가 허리를 폈다.

그러곤 벽에 걸려 있던 샤워 가운을 태주에게 입혀 주었다. 남 병원 신세 지게는 자주 해봤어도 남의 수발을 들어 본 적 없는 손길에는 어색함이 묻어났다.

대충 끈을 묶은 계범호는 태주를 안아 올렸다. 태주가 머뭇거리다 남자의 목덜미를 안자 그가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호텔 방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직원이 금방 달려왔다. 태주는 남자가 방을 옮기겠다고 하는 말을 들으며 숨듯이 남자의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다른 방의 침대에 눕는 것은 금방이었다.

더러워진 옷을 정리하고 샤워 가운을 입고 온 계범호는 몇 번 그랬던 것처럼 태주에게 팔베개를 해 줬다. 오늘은 배를 가볍게 쓰다듬는 손길도 더해졌다.

“눈 굴리지 말고 자.”

“…지금 잘 시간 아니에요.”

밤 10시는 평소 새벽 6시쯤 잠드는 태주에게는 초저녁도 아니었다.

“슬슬 까불지.”

무섭게 말해놓고 계범호는 태주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이마와 뺨에 손바닥을 대보고 목덜미도 만졌다. 태주는 어둠 속 실루엣을 보며 물었다.

“저 열나요?”

“아니.”

대답한 남자가 손을 거두고 다시 태주의 배를 만졌다. 거칠거칠한 손으로 문지르는 살갗이 좀 간지러웠으나 속은 전보다 훨씬 편해졌다. 억지로 밥을 먹어서 급체라도 했던 모양이었다.

아파서 그런 것인지 주변이 어두워 그런 것인지. 문득 할머니 생각이 났다. 한번 그 주름진 얼굴이 떠오르자 걷잡을 수 없이 머릿속을 채웠다.

여기 오기 전에는 연락도 잘 안 했으면서. 평소에 워낙 없는 손자처럼 지냈으니 자신이 이곳에 감금되어도 할머니는 그걸 모르는 거였다.

…다행인가.

“…….”

불쌍한 할머니. 사고만 치던 손자 때문에 결국 겪지 않아도 될 일까지 겪었다. 가슴 근처에 돌연 통증이 일어 태주는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배를 문지르던 손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태주는 남자를 흘긋 보았다.

“손님.”

계범호는 답이 없었으나, 태주는 잠깐 입술을 달싹이다 물었다.

“할머니한테 전화 한 통만 해도 돼요?”

“…….”

어둠 속에서 남자가 제 얼굴을 살피는 듯한 눈빛이 느껴졌다. 태주는 눈을 깜박인 뒤 무덤덤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안 해도 되고요.”

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잠이나 자야겠다는 생각에 눈을 감는데, 계범호가 몸을 일으켰다. 팔베개를 해 주고 있던 그가 몸을 일으키니 태주의 고개가 침대로 툭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던 그가 다시 침대로 돌아왔을 때, 파란 불빛이 태주의 눈을 찔렀다. 눈을 깜박이고 보니 계범호가 휴대폰을 제게 내밀고 있었다.

“어… 제가, 번호 눌러요?”

몸을 일으킨 태주가 얼떨떨하게 물었다. 매화에서는 전화할 때는 항상 누군가가 번호를 대신 눌렀기 때문이었다.

“숫자 몰라?”

그런데 계범호는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 말했다.

“…알아요.”

태주는 휴대폰을 공손히 받아들었다. 키패드 위를 잠깐 머뭇거리던 손가락은 숫자 3개 대신 11개를 눌렀다.

태주가 작년에 바꿔 줬던 통화 연결음이 들렸다. 그게 길게 이어지자 조금은 울적해졌다. 그러고 보니 벌써 10시가 넘었다. 할머니는 막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여보세요.

“어, 여보세요?”

계범호는 어둠 속 정태주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애새끼가 아프다고 징징거리며 울까, 싶었는데 정태주는 덤덤하고 편안한 목소리로 통화를 이어갔다.

“응, 할머니. 나 태주. 어. 휴대폰 고장 나서 문자랑 통화가 안 돼. 근데 뭐… 쓸 일도 없어서 당분간 그냥 지내려고.”

수화기 너머에서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정태주가 “아, 좀. 낼 돈 있어.” 하고 약간 짜증을 냈다. 그러더니 목을 가다듬고는 다시 말했다.

“돈은 제대로 갚은 것 맞지? 응. 맞아, 요즘 덥더라. 여기는 시원해. 어…?”

자연스럽게 이어 가던 말이 잠깐 끊겼다.

“…당분간은 못 갈 것 같아.”

계범호는 태주의 실루엣을 집요히 좇았다. 단정한 모양의 콧대나 덤덤한 목소리를 흘리는 입술, 턱선.

“추석 때? 글쎄…. 아, 사고 안 쳐. 오토바이도 안 탄다니까. 나 요즘 진짜 열심히…….”

열심히 살아.

뜸 들이다 덧붙인 말에는 고저가 없었다.

“응. 끊을게.”

정태주는 차분하게 통화를 끝냈다. 남자에게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하는 목소리 역시 담담했다.

계범호는 정태주가 내미는 휴대폰을 돌려받았다. 그런 뒤에도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정태주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가만한 시선으로 태주를 바라볼 뿐이었다.

***

자고 일어났을 때 계범호는 없었다.

어둑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태주의 시선이 창에 닿았다. 커튼은 닫혀 있었다. 커튼 틈으로 새어 들어온 햇빛을 멍하게 보다가 태주는 몸을 일으켰다.

커튼을 젖히자 햇빛이 강하게 눈을 찔렀다. 여름 해는 빨리 뜨니 새벽에 가까운 아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계를 봤을 때 조금 놀랐다. 벌써 정오가 지나 있었다.

“…진짜 오래 잤네.”

그것도 한 번을 안 깨고.

정태주는 미간을 구긴 채 서 있다가 욕실로 들어갔다.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아팠고, 조금 울었고, 열두 시간을 넘게 잤으니 그럴 만도 했다. 피부가 당기는 기분이 들 정도로 부은 얼굴에 태주는 찬물을 끼얹었다.

씻고 나와 숙소로 올라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발을 내디디는데, 문 바로 옆에 무언가 놓여 있었다.

무엇인지는 금방 알아보았다. 프랜차이즈 죽집의 종이 백을 들어 올려 태주는 안을 열어 보았다. 몇 개의 플라스틱 용기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

태주는 그것을 들고 숙소로 올라갔다. 모두 잠들어 고요한 숙소에서 살금살금 움직이며 죽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었다.

무언가를 넘기기 힘든 목구멍도 죽은 잘 넘겼다. 찬물에 만 밥보다는 훨씬 나았다. 반쯤 비운 그릇을 숟가락으로 긁다가, 태주는 중얼거렸다.

“죽까지 챙겨 주고….”

보자마자 계범호의 지시일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에게 죽을 챙겨 줄 사람은 남자밖에 없으니까.

태주는 반쯤 남은 죽을 노려보다가, 뚜껑을 닫고 냉장고에 넣었다.

어젯밤과 오늘 아침에 그치지 않고 계범호는 그날 밤에도 어울리지 않는 짓을 했다.

호텔로 올라가라는 지시를 받고 방으로 가면서는 어제 제대로 섹스를 못 해서 오늘 또 온 건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방으로 들어섰을 때, 계범호는 탁자 앞에 앉아 전화를 받고 있었다. 물량이 어쩌고 하며 일 얘기를 하는 남자는 바빠 보였다.

태주는 흘긋 눈치를 살피다 셔츠 단추로 손을 가져갔다. 단추를 풀고 셔츠가 벌어지자 남자의 시선이 닿았다.

한쪽 귀에 휴대폰을 댄 남자가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다가가자 그가 팔을 끌어당겨 태주를 제 한쪽 허벅지 위에 앉혔다.

계범호는 태주의 허리를 안고 통화를 이어 나갔다. 시선은 열린 셔츠 사이와 얼굴을 느릿하게 옮겨 다녔다.

잠시 후 통화가 끝났다.

“어제보다 낫네.”

붓기가 덜 빠진 태주의 얼굴을 보며 남자가 한 말은 그거였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라.”

정태주는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고 가는 계범호를 멍하게 보다가, 뒤늦게 물었다.

“자요? 저 혼자요?”

어리둥절한 말에 커다란 발이 멈춰 섰다. 고개를 돌린 남자는 태주에게 비스듬한 시선을 줬다.

“재워 줘야 자는 건 아닐 테고.”

“…….”

“오늘은 여기서 자.”

태주는 여전히 의문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봤다. 그러자 남자가 성가시다는 듯 서늘하게 말했다.

“여러 번 말하게 할래?”

“아! 아뇨. 여기서 잘게요.”

계범호는 정태주가 눈을 굴리는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지레 겁먹고 뒷걸음질 치는 녀석의 팔을 낚아채듯이 붙잡고 고개를 내렸다.

입술을 깊이 누른 채 습관처럼 혀를 밀어 넣다가, 그는 돌연 미간을 구겼다. 흘긋. 시선이 또 시계를 살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위에서 가져오고.”

조금 짜증스럽게 물러난 남자가 태주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

어물쩍거리던 좀 전과 달리 곧장 대답하는 태주를 보며 그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부드러운 기색을 눈에 담은 채 그가 물었다.

“속은.”

“괜찮아요.”

남자는 손끝으로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태주의 배에 손바닥을 댔다. 명치 부근을 쓰다듬던 손은 다시 태주의 뺨에 와 붙었다.

“올라갈 때 옷은 제대로 입고 가.”

“…네.”

아쉬운 사람처럼 태주의 셔츠 깃을 만지작거리던 남자가 혀를 차며 손을 거뒀다. 그러고 이번엔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보폭이 넓으니 나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계범호는 무척 바빠 보였다.

…그런데도 굳이 들렀다.

정태주는 침대로 가서 앉았다. 하얀 시트에 혼자 앉아 있는 일은 자주 있었다. 주로 계범호를 기다릴 때였다.

그런데 오늘은 여기서 일 대신, 잠만 잔다.

“…….”

태주는 손을 들어 제 명치에 얹었다. 커다란 손이 닿았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솔직히 모르기가 어려웠다.

계범호가 제게 가진 감정은, 쉬이여길 수 없는 종류였다.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는 머뭇거리게 되지만, 단순한 호기심과 흥미, 집착만으로 이루어진 감정은 아니었다.

편의를 위해 자신의 불행을 이용하면서도 남자는 때때로 불편함을 느꼈다. 자신을 걱정했고, 자신의 평안을 바랐다. 가끔은 자신이 매화에 있는 것을 싫어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가둬두고 싶다면서.”

혼잣말을 내뱉고 나니 불쑥 화가 났다. 물건처럼 손에 넣고 휘두르고 싶은 거라면 계속 그렇게만 할 것이지 왜 사람을…….

“…….”

태주는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적당한 말을 다시 찾아냈다.

왜, 희망을 주냐고.

남자가 흘린 다정함이 태주에게는 치명적인 희망이 되어버렸다.

결정적인 일에는 잔인해지는 남자가 심어놓은 희망인데도, 그걸 놓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붙잡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지 않게끔 해야 했다.

그것이 자신을 이 구덩이에서 끌어 올려 줄 유일한 동아줄이라서. 썩은 동아줄이든 아니든 붙잡고 매달려야 하는 거였다.

‘집에는 언제 올 거야. 추석에는 올 수 있어?’

태주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제는 정말,

집에 가고 싶었다.

***

정태주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널 왜 꺼내.’

잔인함에는 체념했으면서,

‘오늘은 여기서 자.’

다정에는 독기를 품었다.

누군가의 개입으로 엉망이 된 제 인생이 가엽고 불쌍했다. 그게 정확히 누구든, 죽여버리고 싶었다.

몸을 파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곳도 지긋지긋했다. 대부분 비슷한 처지에 자신이 더 나은 처지라고 따돌림을 하는 것도 거지 같고, 부러움과 질투가 뒤섞인 시선은 역겨웠다. 매일 맡는 술 냄새와 음식 냄새,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도 싫었다.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불쌍한 할머니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달그락. 태주는 빈 그릇을 싱크대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몇 개의 시선이 쏠렸으나 관심 두고 싶지 않았다.

곧장 뒤로 돌아 주방을 벗어난 태주는 복도로 나오자마자 표정이 굳었다.

“어, 이게 누구야. 봉 잡은 남창 새끼 아니야.”

얼굴이 벌건 박의성이 실실거리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장실로 들어가려다 태주를 발견한 것 같았다.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시선은 기민하게 박의성의 얼굴을 살폈다. 저 새낀가. 내 인생을 망친 게 저 새낀가, 하고.

“후우…. 근데 계 전무는 너 왜 아직 여기 둔다냐?”

“…….”

지독한 술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정태주는 온몸에 힘을 줬다. 방심하는 순간 박의성에게 달려들 것 같았다.

“빚도 다 갚아놓고…. 씁, 신혼집 꾸미느라 바쁜가.”

박의성이 킥킥거리며 태주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기분 나쁜 시선이었다.

그런데,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빚을 다 갚았다고요?”

정태주가 물은 말에 박의성의 입꼬리가 살짝 내려갔다. 그는 인상을 팍 쓰며 자기 머리를 거칠게 긁었다. 아이, 씨발. 술 냄새가 섞인 욕설도 내놓았다.

“언제요?”

“뭘 언제는 언제야. 옛날에 다 갚았지. 씹, 어우, 머리 아파.”

박의성이 태주의 어깨를 툭, 치고 비틀거리며 지나갔다. 태주는 그 자리에 남아 멍하게 허공에 시선을 뒀다.

빚을 다 갚았다고…?

태주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메마른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을 때, 매니저가 태주를 불렀다.

“정태주 씨. 서빙 들어가 주세요.”

“…네.”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을 펴 태주는 트레이 손잡이를 쥐었다. 그대로 밀면서 걷는데, 머릿속이 온통 복잡해서 들어가야 할 방을 지나쳤다. 태주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되돌아갔다.

그러니까… 계범호가 자신의 빚을 전부 갚았다고?

1억이 넘는 그 빚을?

박의성이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오래전에 갚은 것 같았다. 그래놓고 자신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사람 하나 가두기에 여기만큼 좋은 곳이 어딨어.’

가둬놓으려고.

“씨발….”

“네?”

무심코 흘러나온 욕설에 되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태주는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들었다. 시야가 어지러웠다. 분명 복도에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자신은 룸 안에 들어와 테이블을 세팅하고 있었다. 완전히 정신을 놓은 채로 몸만 움직인 거다.

“아닙니다.”

정태주는 꾸벅 고개를 숙인 다음 테이블 위로 접시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갔고, 기계적인 행동은 그리 섬세하지 못했다. 태주가 내려놓은 접시가 물컵을 쳐 그대로 물이 쏟아졌다.

“앗, 차가!”

“죄송합니다.”

태주는 당황한 채 황급히 수습을 했다. 다행히 컵이 깨진다거나 테이블 아래로 떨어지진 않았지만 테이블을 흠뻑 적신 물이 손님의 바지에도 떨어졌다. 베이지색 반바지 아랫단이 젖어서 짙은 색이 된 것을 보고 태주는 새 행주를 꺼내 손을 뻗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때, 손님이 행주를 가볍게 밀어냈다.

“괜찮아요. 제가 닦을게요.”

30대로 보이는 남자는 기분 나쁠 법한 일에 표정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그는 태주에게서 행주를 받아 들고 제 바지와 다리를 닦았다. 그러면서 흘금 태주를 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기분 안 좋아 보이는데, 그냥 간단히 술 한잔 같이 할래요?”

친구 녀석이 갑자기 못 온다고 해서 혼자기도 하고, 진짜 제가 이상한 짓 하려는 건 아니고요.

손사래를 치는 남자를 보던 태주는 아, 하고 외마디 소리를 냈다. 기억났다. 전에도 온 적이 있는 손님이었다.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듯 보였고, 매너가 좋았고, 서빙에 팁을 20만 원이나 준.

“근데 서빙만 하신다고 하셨죠. 아, 또 남자 옆에 앉으시기도 좀….”

태주는 어색하게 웃는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계범호가 빚을 갚고도 모른 척했다.

그에게 돈이 문제일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렇게 큰 돈을 한 번에 지불하는 것이 부담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그러니까 자신이 마냥 떼를 쓸 수는 없는 거라고, 그도 자신을 여기서 꺼내어 주고 싶지만 여건이 어려울 수 있다고. 그의 다정함에 편을 들듯 생각했었나 보다.

그런데 계범호는 정말 돈과는 상관없이, 이 시궁창 같은 곳에 자신을 감금하고 싶어 하는 거였다.

“네. 술 한잔해요.”

태주가 내뱉은 뒤늦은 대답에 손님이 반색을 하며 제 옆자리를 내어 줬다. 태주는 조금 경직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앉았다.

미친 짓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머리는 터질 것 같고 속은 답답했다. 술이 고팠다. 빚도 없는데 왜 일을 해야 하지. 지금 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계범호를 자극하고 싶다는 충동도 컸다. 자기가 그렇게 좋아하는 매화, 여기서 자신은 다른 사람을 충분히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의 시간과 몸을 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아도 몇 있었다.

말도 없이 빚을 전부 갚아 주었으니 고마운 감정을 가지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했다.

자꾸 화가 났다.

계범호가 2년이란 그 시간을 기어이 채우려 하니까. 2년 동안 자신을 남창으로, 두겠다는 거니까.

자기가 갚은 빚이 사실 누군가의 계획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태주의 억울함을 알면서도, 속였으니까.

그런 눈빛과 행동을 해놓고 정작 제일 끔찍한 곳에 두려고 하니까.

“대학생이에요?”

말없이 술을 마시는 태주를 흘금거리며 보던 손님이 물었다. 태주는 잔을 내려놓고 덤덤히 답했다.

“대학 안 갔어요.”

“그렇구나. 요즘엔 대학 안 가는 사람 많죠. 근데, 혹시 고등학생은 아니죠?”

“…….”

태주가 쳐다보자 손님이 불안한 눈빛을 했다. 어차피 이런 곳에서 남자를 만나면서 미성년자 만나는 건 무서운가.

“고등학생 아니에요.”

“다행이다. 어디 고등학교 졸업했어요? 아, 이런 거 여쭤보면 안 되나….”

“졸업 안 했어요.”

담담한 대답에 선한 인상의 남자는 그럴 수 있죠…. 하고 말했다. 침묵이 흘렀다.

태주는 문득 좆같은 기분을 느꼈다. 자신은 남들 다 가는 대학도 안 가고, 고등학교도 졸업을 못 했다. 지금은 몸을 파는 중이었다.

밑바닥 인생을 제대로 보여주는 게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자,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어디로 향해야 하는 분노인지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래도, 계범호는 빚을 갚아 주지 않았는가.

멍청한 새끼. 말도 안 되는 빚인 걸 알면서도 그걸 갚아 주냐. 내가 뭐라고 그걸 다 갚아.

그런데 내가 뭐라도 되는 거면, 이렇게 놔두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씨….”

태주는 무심코 욕설을 내뱉으려다 옆의 손님을 인지하고 도로 삼켰다. 그때 손님이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어렵네요. 기분 좀 풀어 드리고 싶었는데.”

“제 기분을요?”

태주는 멍하게 물었다. 보통 이런 곳에 와서는 직원이 손님 기분을 풀어 주지 그 반대는 되지 않았다.

“그게, 제… 이상형이셔서요.”

남자가 벌겋게 얼굴을 물들였다.

“진짜 잘생기셨어요. 스타일도 좋으시고요.”

“유니폼인데요.”

“아… 그, 핏이 좋으시다고요.”

정태주는 다급해 보이는 남자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남자는 슬금슬금 시선을 피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

계범호랑은 정말 달랐다.

만약 저 남자에게 많은 돈이 있다면 그는 빚을 갚아 주고 곧장 자신을 꺼내 주지 않을까. 그리고 연애를 하자든가, 말하지 않을까.

그러나 좀 생각해 보자 그 상상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상형이라는 이유로 빚을 갚아 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보다 더 나아가 자신을 좋아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1억이 넘는 빚을 갚아 줄 사람이 있을까.

계범호 말고는 없을 것이다.

“…….”

태주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쓴 한숨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갔다.

“왜 그러세요? 혹시 어디 아프신 거예요?”

옆의 남자가 갑작스러운 태주의 행동에 놀라 걱정스럽게 물었다. 태주는 고개를 들며 그에게 시선을 줬다.

“죄송한데, 이제 나가 보겠습니다.”

홧김에 앉으면서는 계범호에게 한 방 먹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건 또 겁이 났다.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이 시간을 재고 있을지도 몰랐다.

“벌써요? 조금만 더 있다가 가요.”

“죄송합니다.”

태주가 뜻을 굽히지 않자 손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네? 제가 뭐 다른 것 한다는 것도 아니고. 좀만 더 있어요.”

지갑을 꺼낸 남자가 5만 원짜리 두 장을 내밀었다. 태주가 받지 않으니 태주의 허벅지 위에 내려놓으며 무릎을 슬쩍 만졌다.

미간을 구긴 정태주가 남자의 돈을 움켜쥐고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러자 손님이 “아, 씨….” 하고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 나빴으면 미안한데, 그… 남자랑도 한다면서요?”

“…….”

모르는 척하더니, 어디서 말을 들은 것인지 몰랐다.

“얼마 주면 돼요?”

“…안 하는데요.”

“아, 그럼 휴대폰 번호라도 알려 줘요. 비싸게 굴지 말고.”

그는 이제 가면을 반쯤 벗었다. 매너 같은 건 처음 잠깐이면 되는 거였다. 이런 곳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번호 좀 줘요. 밖에서 저녁 사 주고 싶어서 그래요.”

“괜찮아요. 갈게요.”

표정이 굳어진 태주가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키려던 차였다.

벌컥, 문이 다소 거칠게 열렸다. 큰 소음에 손님도 태주도 움찔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

벌어진 태주의 입술 사이로 신음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갑작스럽게 침입한 커다란 남자는 그 자리에 선 채 안쪽을 훑어보았다. 서늘한 시선이 테이블 위의 술병과 두 개의 술잔, 5만 원짜리 지폐, 그 앞에 앉은 정태주와 손님을 스쳤다.

“나와.”

계범호가 표정 없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무감한 것에 가까웠으나 태주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뭡니까. 태주 씨 아는 사람이에요?”

계범호의 덩치에 조금 주눅이 든 듯하면서도 손님이 물었다. 태주는 네, 하고는 옆으로 걸었다. 그런데 그가 덥석 태주의 팔을 붙잡았다.

“가시려고요? 무서운 사람 같은데…. 암튼, 그럼 번호만 좀 주고 가요. 당분간 못 올 것 같아서 그래요.”

등 뒤로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런 뒤 구둣발이 다가오는 듯했다.

“놔요.”

태주는 다급하게 손님의 손을 흔들어 떼어냈다.

“아, 좀. 비싸게 굴지 말고.”

손님은 물러나는 듯하다가 태주의 손목을 다시 붙잡았다. 태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떼어내려고 하는데 뒤쪽에서 팔뚝이 강하게 붙잡혔다.

억센 손길은 그대로 태주를 뒤로 끌어냈다. 테이블과 소파 사이에 서 있던 태주는 쿵, 테이블에 부딪히며 넓은 공간으로 빠져나갔다.

“뭐 하시는 겁니까!”

큰 소리를 내는 손님을 무표정으로 내려다보던 계범호는 조금 전 태주의 손목을 쥐었던 손에 시선을 줬다.

“싫다는데 왜 귀찮게 해.”

낮은 말을 뱉어낸 그가 손님의 손을 비틀었다.

“아아악!”

비명이 공간을 채웠을 때부터, 계범호는 꾸며낸 평온을 집어던졌다. 눈을 형형히 뜨고, 입매를 비틀었다.

뼈마디가 불거진 주먹이 연이어 얼굴을 내리쳤다. 퍽, 퍽 살벌한 소리를 들으며 태주는 얼어붙었다.

계범호가 폭력을 쓰는 모습은 자주 봤지만, 저렇게 분노하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자신이 이유라는 생각이 들자 오금이 저릴 정도로 겁이 났다.

“흐어…. 살, 살려 주세요.”

비명도 못 지르고 맞던 손님이 겨우 애원할 때가 돼서야 폭행이 멈췄다.

조금 차분해진 남자의 시선이 피떡이 된 얼굴을 살폈다. 틀어쥔 멱살을 놓자 손님이 실이 끊긴 인형처럼 소파 위로 떨어졌다. 기절했는지 아예 움직임이 없었다.

“아… 씨발.”

계범호가 낮은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는 흉곽을 크게 부풀리며 심호흡을 하고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돌아섰다.

분노를 억누른 시선과 겁에 질린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쟤가 너 나가게 도와준대?”

계범호가 새카만 눈빛으로 물은 말에 정태주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필사적인 부정에 남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시체처럼 늘어진 사람에게 흘긋 시선을 주며 말했다.

“근데 어쩌지. 이제 못 도와줄 텐데.”

피식 웃은 남자가 태주를 돌아보며 순식간에 웃음기를 지워냈다.

넓은 보폭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그림자를 피하려 태주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피 묻은 손은 힘들이지 않고 태주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아악!”

“봐주니까 무서운 줄을 모르지.”

곧장 머리가 뒤로 젖혀진 채 눈이 마주쳤다. 두피가 뜯어질 것처럼 당기는데, 마주친 눈빛이 무서워 태주는 더 신음하지도 못했다.

이후 계범호는 태주의 머리채를 붙잡고 끌고 나갔다.

아래를 보는 태주의 시야가 정신없이 바뀌었다. 비틀거리며 끌려가는 태주에게 몇몇 시선이 쏠렸으나 태주는 그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어지러운 시야에 문의 아래쪽이 보였을 때, 곧 쾅 소리가 들리고 주변이 고요해졌다.

익숙한 곳이라 어딘지는 금방 알았다. VVIP 룸이었다.

머리에서 손이 거두어졌다. 욱신거리는 두피를 만져 볼 틈도 없이 태주는 벌떡 고개를 들었다.

“정말 다른 거 안 했어요. 술만 마셨어요.”

남자는 다급하게 늘어놓은 말을 비웃었다. 사색이 된 태주가 고개를 저으며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진짜예요. 바로 일어나려고 했어요. 그냥 잠깐….”

계범호가 저를 붙잡은 태주의 손을 잠깐 보더니 손목을 붙잡고 떼어냈다. 그리고 태주의 턱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니가 저 안에서 구멍을 팔았는지, 다른 걸 팔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태주야.”

억울함과 두려움이 뒤섞인 얼굴을 내려다보며 남자가 눈을 번득였다. 그는 겁에 질린 태주가 숨을 잘못 들이켜 잔기침을 내뱉고 나서야 턱을 거칠게 놓았다.

“벗고 엎드려.”

태주는 손을 웅크려 모은 채 남자를 보았다. 그는 손목시계를 풀어 던지듯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태주가 좆 하나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은데…. 다른 건 안 되겠고, 주먹이라도 먹여 줄게.”

피가 묻은 커다란 손에 태주의 시선이 닿았다. 저런 것이 들어갈 리 없었다. 뻣뻣하게 굳은 채 고개를 저어도 그는 싸늘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후장 찢어지면 딴 새끼 받을 생각은 안 하겠지.”

“…….”

그 순간, 창백히 질려 있던 태주의 뺨이 움찔 굳었다.

비슷한 방식으로 이 방에 끌려 들어왔던 날이 불현듯 떠올랐다. 얻어맞은 사내들과 달리 자신의 벌은 강간이었던 날. 언젠가부터 저에 대한 욕에는 꼭 들어가던 단어도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태주의 눈동자가 멈췄다. 이내 그 안에서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떨리던 턱은 힘주어 이를 다물었다. 그 사이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씨발, 다들 왜 내 후장을 찢는대.”

계범호의 시선이 중얼거리는 정태주의 입술에 닿았다. 가슴을 들썩이던 정태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나는, 잘못하면 후장이 찢겨요?”

조금 전에도 한 사람을 피떡이 되도록 때렸으면서. 제게 주어진 벌은 그런 거였다.

눈가가 시큰거리며 분노가 솟구쳤다. 여기까지 머리채를 붙잡고 질질 끌고 온 계범호에게도, 착한 척하더니 사실은 자신을 쉽게 보던 손님에게도, 잠깐 마주쳤던 박의성에게도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아니 그 전부터였다. 평범한 남자에서 남창이 되어버린 반년이란 시간이. 제 처지가.

“나는 왜 안 때리냐고요.”

정태주는 억눌린 목소리로 말하며 새빨개진 눈을 부릅떴다. 주먹을 움켜쥐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적막이 내리깔렸다.

“…….”

계범호는 감정을 짐작할 수 없는 얼굴로 태주를 바라보다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달칵.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허공에 매캐한 연기를 내뿜었다. 내리깔린 시선을 정태주의 얼굴에 둔 채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제대로 맞을 수나 있고?”

낮은 목소리가 흘린 말에 정태주는 눈에 힘을 줬다. 때리라는 듯이 이를 악물고 남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도 그 눈빛이 또렷했다. 계범호는 그런 태주를 물끄러미 보며 입에 담배를 댔다.

정적이 흘렀다. 일렁이는 담배 연기만 태주의 살갗에 닿을 뿐, 폭력은 오지 않았다. 정태주는 입술을 꾹 깨물고 나서 물었다.

“…제 빚은 왜 다 갚아 줬어요?”

그 말에 계범호가 눈썹을 올렸다. 예상 못 한 말을 들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잠깐 허공에 시선을 둔 그는 “아, 그래서.” 하고 알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계범호는 담배를 마저 피웠다.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이따금 담뱃재를 털며, 태주를 서늘한 시선으로 훑었다. 하나를 다 피워내고 재떨이에 비벼 끈 다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넌 이제 일하지 마.”

“…….”

“아무것도 하지 말고, 방에서 내 연락만 기다려.”

알겠어? 낮게 물으며 계범호가 무감한 시선을 줬다. 태주는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남자는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올라가.”

짧은 명령만 했을 뿐이었다.

표정 없는 계범호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움찔거리던 태주는 이내 돌아섰다. 주먹을 꾹 움켜쥐고 문을 거칠게 열고 나갔다.

머리채를 붙잡혀 끌려왔던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지났다. 그러다 자신이 좀 전까지 있었던 룸 앞에서 멈칫 걸음을 멈췄다. 문은 닫혀 있었다. 뒷수습은 아마 매니저가 했을 것이다.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서웠던 계범호의 분노가 떠오르자 손에 땀이 났다. 태주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머리카락이 넘어가는 자극에도 두피가 욱신거리며 아팠다. 미간을 구기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태주야. 너 괜찮아?”

경준이었다. 고개를 돌린 태주가 말없이 보고 있으니 경준이 걱정스럽게 태주를 살폈다.

태주는 경준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제게 잔인한 진실까지 알렸으면서. 여전히 자신을 걱정했다. 둘 중 어떤 것이 진짜인가. 그런 감정이 함께 공존할 수가 있는 것인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투성이였다.

홀로 남은 룸에서 계범호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담배 하나를 빼 물고, 담뱃갑을 테이블 위로 가볍게 던졌다. 달칵. 담뱃불을 붙이는 그의 시선이 피가 말라붙은 제 손가락에 닿았다.

그는 등을 기대며 허공에 한숨 같은 연기를 뱉어냈다. 창백한 얼굴이 그곳에 어른거렸다. 부릅뜬 눈이나 희게 질린 뺨, 굳게 다문 입, 피가 묻은 턱. 생각해 보니 뺨에도 피가 좀 묻었던 것 같아 그는 불쾌한 낯을 했다.

남의 피 좀 묻은 게 무슨 대수라고. 계범호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정태주…. 담배 연기와 함께 흘린 이름에서는 쓴맛이 났다.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