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정태주는 호텔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날 그러고 숙소로 돌아갔는데, 잠시 후 덩치 하나가 와서는 짐을 싸서 아래로 내려가라는 것이다. 누구 명령인지는 뻔했고 순순히 움직이면서도 태주는 화가 났다.
때때로 자신도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화가 날 일은 아니라고. 계범호가 자신을 사람 취급 안 하고 멋대로 휘두르는 것이야 익숙한 일이었다. 그에게 화가 날 일은 오히려 이전에 많이 겪었던 게 아닌가.
“…….”
태주는 침대 위로 힘없이 드러누웠다. 사람을 호텔에 두고 계범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일주일째였다.
즉, 일주일째 아무하고도 대화를 못 했다. 끼니는 초인종이 눌리면 문 바깥에 놓여 있었고, 근처의 덩치들은 항상 이곳을 감시했다. 자신에게 빚이 있든 없든 그들은 계범호의 명령만 들었다.
자신은 매화와는 관계없이 이곳에 감금된 것이다.
만약 계범호가 빚을 갚자마자 자신을 데리고 나갔다면 이런 식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남들 그러는 것처럼 평범하게 약속을 정해 만날 리 없이, 무조건 태주를 어디 가둬놓았을 것 같았다.
끔찍한 상상이긴 하지만 어디든 매화보다는 나았다.
씩씩거리던 태주가 금세 텅 빈 눈으로 허공을 볼 때였다. 벨이 울렸다. 굴러떨어지듯 침대 밖으로 나가 문을 열자, 깡패 하나가 서 있었다.
“룸으로 내려오라신다.”
드디어 계범호가 온 모양이었다. 그에게 따지고 싶은 말이 한가득이었는데, 막상 왔다는 말을 들으니 조금 겁이 났다.
정태주는 쪼그라든 심장을 달래며 신발을 신었다. 깡패의 뒤를 따라가며 무심코 머리를 쓸어 올리다 까칠한 감촉에 손을 뗐다.
룸까지는 금방이었다.
태주는 금색으로 박아놓은 ‘VVIP’라는 글자를 쏘아보고는 문을 열었다. 노크를 안 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서 주춤했다가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곧장 계범호가 보였다. 테이블은 이미 세팅이 되어 있었고, 놓인 술병은 조금 비어 있었다. 평소라면 매화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을 찾았을 텐데 이번엔 그러지 않은 것이었다.
멀찍이 서서 테이블만 보고 있으니, 계범호의 시선도 이쪽에 와서 머물렀다. 정확하게는 태주의 얼굴 위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짧게 밀어버린 머리 말이다.
그날 복도를 지나다 경준을 만났을 때,
‘너도 맞았어?’
자신의 얼굴을 살피는 눈빛과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태주는 딴소리를 내뱉었다.
‘형. 저 뭐 좀 빌려주세요.’
그길로 숙소로 돌아가자마자 머리를 밀었다.
“…….”
태주는 훤히 드러난 귀 뒤와 목 쪽에 닿는 시선을 느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머리채 좀 잡았다고 반항이냐며 이번엔 제대로 손을 올릴지도 몰랐다. 그날도 결국 피 보는 일 없이 넘어가지 않았던가.
그런데 계범호는 술잔을 든 채 한참을 쳐다보다가 나직한 말만 흘렸다.
“성질은.”
태주는 흘긋 눈을 굴렸다. 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는 태주와 눈이 마주치자 술잔을 입에 댔다.
“와서 앉아.”
술을 머금은 입술이 무심히 벌어졌다.
정태주는 소파와 테이블 사이로 들어가 계범호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그러고 슬쩍 눈치를 살폈으나 그는 태주가 어디 앉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남자는 새 유리잔에 얼음을 담고 술을 부어 태주에게 넘겼다.
“…….”
태주는 머뭇거리며 그것을 받아 제 앞으로 끌고 왔다. 유리잔이 테이블을 긁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불편한 기분에 입술만 적실 정도로 술을 마시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계범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자신의 머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시야 끝에 걸려 있던 남자의 손이 불쑥 움직였다. 태주는 온몸을 긴장했다. 멀찍이 앉았다고 생각했으나 커다란 손은 힘들이지 않고 태주의 머리에 닿았다.
계범호는 유심한 표정으로 까끌까끌한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태주의 어깨에 손목을 걸치고 목덜미와 머리카락의 경계도 손끝으로 더듬었다. 이내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2년이 길어?”
태주가 얼굴을 구기자 계범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짧은데….
“손님한테 짧은 거잖아요.”
툭 내뱉은 말에 그가 태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마, 눈썹, 코, 눈가…. 느릿하게 눈 안에 담아내고 나서, 그가 “그래.” 하고 나직이 인정했다.
“저 나갈래요. 빚도 없는데 제가 왜 여기 있어야 해요?”
뾰족하게 눈을 뜨던 정태주는 뒤늦게 눈치를 봤다.
“빚 갚아 주신 건 감사합니다.”
눈을 굴리는 얼굴에 시선을 둔 남자가 태주야, 하고 입을 열었다.
“내가 너 헐값에 산 거야.”
“…….”
“여기서 나가도 달라지는 것 없어. 내 집에 갇혀서, 하루 종일 기다리다가 내가 오면 다리 벌리고.”
“…….”
“그게 그렇게 하고 싶은가….”
계범호가 고개를 기울였다. 태주는 남자의 어둑한 눈빛과 마주한 채 말했다.
“여기보다는 나아요.”
감정을 꾹꾹 누른 목소리를 들으며 남자는 뜻 모를 표정을 지었다. 그가 술을 마시는 것을 보며 손끝을 맞잡던 태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너무 싫어요. 진짜 돌아버릴 것 같고, 가끔씩 막….”
분명 제 감정을 누르고 남자를 설득하려 꺼냈던 말인데, 점차 말의 속도가 빨라졌다. 태주가 하던 말을 멈추고 입술을 질끈 깨무는 것을 계범호는 표정 없이 바라보았다.
“가끔씩, 뭐.”
“…화난다고요.”
태주가 얼버무리듯 말했다. 사실 원래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잊어버렸다.
계범호는 입을 다문 태주를 보며 테이블 위에 놓인 손가락을 움직였다. 툭, 툭.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끝이 멎었을 때, 남자가 입을 열었다.
“여기가 좆같긴 하지.”
그의 음성은 낮고 거칠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듯 내리깔린 시선도 싸늘하게 빛났다.
그런 그를 멍하게 보던 태주는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자신을 가둔, 앞으로도 가두겠다는 사람의 앞인 것치고 퍽 순종적이고 얌전한 태도였다.
“순진한 애 데리고 와서 몸을 팔게 시키질 않나…. 더 많이 팔게 하려고 어르신까지 건드리지 않나.”
조용히 흘러나온 말에 정태주는 눈을 부릅떴다.
“너 작업당한 거 맞아.”
확인 사살을 내뱉은 계범호가 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담배 하나를 빼 입에 물고 그가 가만히 정태주의 표정을 살폈다. 크게 뜬 눈에 여러 감정이 떠올랐다가 분노만 남는 모습을 지켜보며, 허공에 연기를 내뿜었다.
“여기서 꺼내 줄까.”
“네.”
분노하다가도 곧장 대답하는 정태주에 계범호가 픽, 웃었다. 커다란 손이 가볍게 태주의 턱을 두드렸다.
“말은 끝까지 듣고.”
혹여나 남자가 말을 무를까 봐 태주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계범호는 그런 태주의 뺨을 문지르고는 말을 이었다.
“너는, 나가서 아무것도 하지 마.”
“…아무것도요?”
“그래. 그러겠다고 하면 데리고 나가 줄게.”
정태주는 언뜻 서늘해 보이는 계범호의 얼굴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남자는 손님의 입장이긴 해도 매화와 연관이 있었다. 그 외에도 뒷세계는 어떻게든 연결이 되어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을 건드리면 남자가 싫어하는 성가신 일이 생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말라면서, 자신이 작업당했다는 사실은 왜 확인시켜 줬을까. 모르는 게 좋을 불편한 진실을 얘기하는 사람들에겐 다른 의도가 있는 법인데…….
“그게 싫으면 여기 있고.”
계범호가 태연히 내뱉은 말에 정태주는 하고 있던 생각도 멈추고 남자를 붙잡았다. 굵은 팔을 양손으로 붙잡고 애원하듯이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할게요. 도망도 안 칠게요. 데려가 주세요….”
남자는 그런 태주를 보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을 싫은 기색으로 읽었는지 정태주가 그의 팔을 조금 더 힘주어 움켜쥐었다.
계범호는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정태주는 얼마 전에도 그를 이렇게 붙잡았었다. 그런 뒤 그가 했던 말에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
“태주.”
남자의 부름에 정태주의 눈썹이 위로 솟았다. 계범호는 제법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말 잘 들을 수 있겠어?”
“네. 네.”
계범호는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 정태주의 팔을 끌어당겼다. 미끄러지듯 끌려온 몸이 자연스럽게 그의 허벅지 위로 올라왔다.
“그래. 나가자.”
“…감사합니다.”
정태주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눈동자에는 여러 감정이 떠올랐으나 깜박여 감추었다.
“가둔다는데 감사해?”
남자가 태주를 올려다봤다. 눈시울이 조금 붉은 것을 잠깐 쳐다보던 그는 태주의 뒤통수를 붙잡으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정태주가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언제 나가요?”
코끝이 닿은 채 정태주가 속삭였다. 목덜미를 안은 손도 재촉하듯 깍지를 꼈다. 계범호는 품 안의 무게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지금.”
“지금요? 진짜요?”
번쩍 고개를 들고 묻는 정태주의 얼굴이 오랜만에 환했다. 눈을 반짝이며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
계범호는 그대로 고개를 비틀어 입을 맞췄다. 격한 감정 때문인지 정태주는 혀끝도 가만히 두지를 못했다. 남자는 자꾸 들썩이는 태주의 등을 쓰다듬으며 조금 더 입을 맞추다 물러났다.
“짐 챙겨.”
“가지고 갈 거 하나도 없어요.”
다 싫어요. 흥분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으면서 그 말을 중얼거릴 때 정태주의 낯빛은 어둡게 바뀌었다.
계범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비스듬히 시선을 주며 물었다.
“꼬박꼬박 모은 돈은. 그것도 싫어?”
“아. 아니요!”
태주가 다급한 대답을 내놓자, 계범호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오늘 그의 태도는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자신이 바라던 대로 매화에서 꺼내 주겠다고도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
태주가 숙소에 올라갔다가 내려왔을 때, 계범호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태주는 곧장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신의 휴대폰이었다.
“저…. 저한테, 줘요?”
얼떨떨하게 물은 말에 계범호는 알 수 없는 눈빛을 했다. 그러다 태주의 정수리를 꾹 누르듯 쓰다듬으며 말했다.
“휴대폰이 있어야 전화를 하겠지.”
“네?”
태주가 되물은 말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또 시험하는 것일까. 정태주는 두 손으로 제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네모난 물체를 쥔 손안의 감각이 이상했다. 계범호를 따라 건물 밖으로 나가면서는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일이 이렇게 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몇 번 탄 적이 있는 차에 오르기 전에 태주는 뒤를 돌아보았다. 5층짜리 건물을 꼭대기까지 훑어보는데, 울컥 가슴에서 무언가 솟구쳤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끝난 게 아니니까.
“작별 인사 필요해?”
“아니요.”
태주는 단호히 대답하고 남자를 따라 차에 탔다. 올 때 그랬던 것처럼 나갈 때도 몸만 나갔다.
태주는 주머니 속의 제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허공에 시선을 둔 태주를, 계범호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남자의 집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사실은 모르겠다. 태주는 상념에 젖어 있느라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내려.” 하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놀라 차에서 내렸을 뿐이었다.
도착한 곳은 지하 주차장이었다. 정태주는 조금 어색한 태도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먼저 걷는 계범호를 따라 걸었다.
태주는 무심코 남자의 팔을 붙잡다가 내려다보는 시선에 움찔 손을 뗐다. 평범한 사람들이 있는, 평범한 곳이란 생각이 들어 남자에게 늘 하는 행동을 하기가 껄끄러웠다.
계범호는 그런 태주의 행동에 별로 관심 없는 듯 고개를 돌리고 걸었다. 태주는 남자를 따라 그의 집으로 올라가는 내내 손가락을 꿈지럭거렸다. 시선은 주위를 살피다가도 남자의 팔이나 손에 닿았다.
“태주야.”
등 뒤에서 현관문이 닫히고, 남자가 태주를 불렀다. 태주는 놀라 고개를 들고 남자를 올려다봤다.
“함부로 나가지 마.”
그의 눈빛이 서늘했다. 말 한마디의 경고인데도 등줄기가 오싹했다.
“안 묶어 놓을 테니까.”
말을 덧붙이는 계범호의 눈에 웃음기가 어렸다.
“…저도 안 뛰어내릴게요.”
“그래.”
웃으며 대답한 계범호는 태주의 머리에 손을 얹고는 까칠한 촉감이 새로운지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한참 열중해서 문지르다가 자기도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는 돌아섰다. 현관에서 이러는 게 태주도 어이가 없긴 했다. 그래서 긴장이 좀 풀렸다.
현관은 넓고 길었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대리석을 계범호가 청소했을 리는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거실로 들어섰을 때, 태주는 눈을 크게 떴다.
거실 전면을 채운 창 바깥으로 도심이 한눈에 보였다. 반짝거리는 불빛들에 더불어 멀리 한강도 보였다. 새카맣고 밝은 바깥을 보며 멍하게 있는데 계범호가 팔을 붙잡아 끌었다.
“씻어.”
“아까 오시기 전에 씻었는데요.”
“더러운 곳에 있다가 왔으면 씻어야지.”
더러운 곳…. 태주는 그 더러운 곳에서 반년을 넘게 보냈다. 그런 생각을 하니 태주도 씻고 싶다는 욕구가 치솟았다.
계범호는 욕실을 손으로 가리키고는 복도 쪽으로 들어갔다. 자기 방으로 가는 게 아닐까 싶었다.
홀로 남은 태주는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꺼내지 않고, 옷을 그대로 벗었다.
정태주는 넓고 화려한 욕실을 제대로 감상하지 않았다. 굳은 표정으로 샤워기 아래에 서서 묵묵히 씻을 뿐이었다.
빚이 사라졌다. 지난 몇 개월간 태주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든 그것 말이다.
그것이 생길 때만큼이나 빠르고 쉽게 사라졌다.
“…….”
빠르고, 쉬웠나.
그 한마디에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태주는 고통을 느끼는 사람처럼 얼굴을 찌푸린 채 샤워를 마쳤다. 몸을 닦고 수건으로 대충 아래를 감싸 밖으로 나온 그는 욕실 앞에서 잠깐 망설이다가, 계범호가 사라졌던 복도로 향했다.
늦여름인데도 하루 종일 에어컨을 틀어놓았는지 공기가 서늘했다. 물기가 말라 차가운 피부를 문지르며 태주는 열린 방문을 빼꼼히 들여다보았다.
계범호는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물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직 욕실에 있는 것 같았다.
태주는 머뭇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의 공기도 선선해 맨몸을 움츠리고 서 있다가 침대를 흘금거렸다. 맞춤 제작을 한 듯 커다란 침대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여전한 물소리가 들리는 욕실과 침대를 번갈아 보다가 태주는 걸음을 옮겼다. 주인도 없는 침대에 혼자 들어가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맨몸으로 멀뚱히 서 있는 꼴도 웃겼다.
태주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깨가 서늘해서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올려 몸을 가리는데, 벌컥 욕실 문이 열렸다.
무표정한 얼굴의 계범호가 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나왔다. 그리고 돌아서자마자 태주를 발견했다. 그의 시선이 이불을 끌어당긴 태주의 손과 그 위로 내민 동글동글한 머리, 하얀 얼굴에 차례로 닿았다.
“입을 옷이 없어요.”
빤히 보는 시선이 멋쩍어 태주가 꺼낸 말에 그가 큰 보폭으로 다가왔다. 침대에 마음대로 올라가서 화났나. 태주가 슬그머니 바닥에 발바닥을 대는데, 커다란 손이 태주의 양 뺨을 붙잡았다.
“으읍….”
남자는 태주의 입술을 깨물고는 다른 곳으로 입술을 옮겼다. 뺨과 눈가, 이마. 그때만 잠깐 가벼워졌던 입맞춤은 금세 농밀해졌다.
계범호는 태주가 움켜쥐고 있는 이불을 거칠게 빼앗아 던지고, 흰 살결을 입술로 더듬었다. 목선을 타고 내려가다 자기가 전에 남겼던 흔적을 만나면 없어질까 염려하듯 물고 깨물었다.
“아….”
태주는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에 닿는 촉감은 단단하고 뜨거웠다. 욕실에서 나온 남자 역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이었다.
어깨와 가슴을 따라 입술을 내리던 남자는 자세가 여의치 않은지 태주의 허리를 감싸고 뒤로 던지듯 옮겼다. 허공에 몸이 떴다가 돌아와 뒤로 팔꿈치를 짚고 누운 태주의 위로 남자가 거대한 몸을 드리웠다.
계범호는 태주의 머리에 시선을 주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는 짧게 깎은 머리를 보기만 해도 우스워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이상한가. 태주는 무심코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까칠까칠한 머리 감촉을 느끼고 있으니 남자의 손도 제 손 위에 겹쳐졌다. 손가락을 얽은 채 가만가만 머리를 만지던 남자가 문득 물었다.
“태주야, 나 말고 누가 네 후장을 찢는대?”
“…….”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빛에는 살기와 애정이 공존했다. 태주에게 향한 것은 후자였다.
눈가에 열이 올라 태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놓았다. 그러고 퉁명스럽게 말을 내놓았다.
“하나 고르기도 어려워요.”
“그래?”
되물은 계범호는 조그만 얼굴을 뒤덮은 분노와 억울함을 바라보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고르면 얘기해.”
“…….”
꾹 다문 태주의 입술이 아래로 움찔거렸다. 남자는 고개를 비틀어 그 입술에 입을 맞췄다.
거친 손과 뜨거운 체온은 태주에게 익숙한 쾌감을 줬다.
공간이 이지러지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분명 매화에서는 벗어났는데, 이곳이 매화인지, 호텔인지, 계범호의 집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로지 계범호와 자신, 둘만 남았다. 살에 닿은 단단한 촉감이나, 숨소리, 쾌감, 가까이에서 진동하는 말 몇 마디만 선명했다.
“큰일이네, 태주.”
남자의 말은 뜻 모를 기대이기도,
“어디서 이런 게 와서 사람을….”
노골적인 마음이기도 했다.
정태주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남자를 끌어안았다. 엉덩이를 들어 보라는 말에도 태주는 단단한 어깨를 감은 팔을 풀지 않았다. 등이 침대에서 뜰 정도로 대롱대롱 매달리자 그가 핀잔을 줬다.
“뭐 하는 짓이야.”
그러나 목소리는 서늘하지 않았다.
계범호는 태주의 몸을 떨어뜨리는 대신 그대로 껴안아 상체를 세웠다. 자세가 바뀌니 내벽을 채운 살덩이가 불쑥 깊이 들어왔다. 태주가 버둥거리며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자, 그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대로 털썩 침대에 앉은 남자는 안쪽을 찌른 성기에 괴로워하는 태주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미간을 찌푸린 태주가 고개를 들자 곧장 그의 입술이 닿았다.
언제든 마찬가지였다. 넓은 침대 위를 뒹굴고, 서로 이를 악물고 쾌감을 좇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도 허릿짓은 멈추지 못해 뺨을 핥거나 이로 입술을 긁기도 했다.
몇 번의 절정에 오르고 완전히 지쳐 침대에 누웠을 때, 태주는 남자의 입술이 찢긴 것을 발견했다. 자신이 깨물었던지, 이로 부딪혔던지. 혹은 그 둘 다였던 것 같았다.
정태주는 자신의 허벅지를 깨무는 계범호를 물끄러미 보았다. 섹스가 끝나자마자 담배를 입에 댔던 때가 있었는데…. 아니지. 섹스를 하면서도 담배를 피우던 때가 있었지, 참.
자신의 발치에서 등을 잔뜩 구부린 거대한 남자를 가물가물하게 보고 있는데, 그가 고개를 들었다.
“자.”
짧은 말을 내뱉은 남자는 태주의 허벅지를 한 손으로 문지르고는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당연한 듯 태주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등을 끌어당겼다. 태주의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에 담배를 끼울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컴컴하고 따뜻한 품에 코를 박고 있자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정태주는 힘주어 눈을 감았다.
***
계범호와 함께 잠들면 스스로 놀랄 만큼 깊이 잠들던 때와 달리 선잠을 잤다.
그래서 남자의 빈자리도, 갑작스럽게 뒤쪽에 닿는 손길이나, 몸을 문지르는 수건의 감촉도 느낄 수 있었다.
블라인드를 내리는 소리도 들었다. 그 후 다시 침대에 돌아와 자신을 끌어안는 강인한 팔도, “새벽이야, 더 자.” 하는 낮은 목소리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눈을 떴을 때, 속눈썹이 눈꼬리에 엉겨 붙어 있었다.
“…….”
정태주는 눈을 비비며 주변을 살폈다. 어둑히 보이는 낯선 방 안에, 익숙한 남자는 없었다.
태주는 침대에서 내려와 블라인드 사이를 살짝 엿보았다. 바깥은 환했고 도심은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태주는 딱딱한 감촉의 블라인드를 손끝으로 잠깐 문지르다가 돌아섰다.
방 안의 욕실 앞에는 드레스룸이 있었는데, 가장 먼저 보이는 선반에 편한 옷 몇 가지가 놓여 있었다. 집에서 입는 옷인 것 같았다. 태주는 반팔 티셔츠와 긴바지를 꺼내어 입었다.
반팔 티셔츠는 품이 컸지만 그래도 입을 만은 했는데, 긴바지는 너무 길어서 발끝이 겨우 빠져나왔다. 줄줄 흘러내리는 고무줄 바지의 끈을 묶으며 태주는 방 바깥으로 나왔다.
집 안은 조용했다.
“손님….”
이따금 목소리를 내며 넓고 낯선 집을 돌아다녔으나 남자를 볼 수는 없었다.
평일이니까 출근한 게 아닐까. 거실에 놓인 시계가 오전 11시를 가리키는 걸 보아 가능성 있는 추측이었다.
거실 한 가운데 멈춰 있던 태주는 뒤돌아 어제 자신이 씻었던 욕실로 향했다. 욕실 문밖에 개어 놓았던 옷은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무릎을 구부려 앉은 정태주는 옷 주머니를 더듬어 휴대폰을 빼냈다. 배터리가 없어 켜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잠깐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거실 TV장 앞으로 갔다. 충전기를 연결한 뒤 손끝으로 기계를 초조하게 두드렸다.
계범호는 매화에서 자신을 데리고 나오면 감금할 것처럼 얘기해놓고,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빼앗겼던 휴대폰은 직접 회수해 돌려줬고, 묶어 놓지도 않았으며, 현관문에도 아무런 장치가 없었다.
“아….”
혹시 바깥에 누가 있나.
태주는 거실에서는 보이지 않는 현관 쪽을 돌아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넓은 현관을 살금살금 걸어 태주가 문손잡이를 쥐었다. 슬그머니 밀자 그대로 문이 열렸다.
“으악!”
그런데 곧장 웬 남자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비명이 튀어나왔다. 심장이 철렁해 재빨리 문을 닫았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밀어 열었다.
정장을 입은 다부진 몸의 남성은 매화에서 익숙히 보던 유의 사람이었다.
“필요한 것 있습니까?”
그가 별로 친절하지는 않지만 예의는 지킨 말투로 물었다. 정태주는 잠깐 눈을 깜박이다가 말했다.
“필요한 것 있으면 사다 주세요?”
“예.”
“직접요?”
“…….”
태주를 이상하다는 듯 보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좀 이따 말할게요….”
태주는 스르륵 문을 닫았다. 쿵, 쿵 뛰어대는 가슴에 손을 얹고 거실로 돌아왔다. 몇 번 현관문을 흘긋거리다 태주는 휴대폰 전원을 켰다.
다행히 휴대폰은 무리 없이 켜졌다. 전화도 잘 걸리는 것 같았다. 익숙한 신호음을 들으며 태주는 시계를 흘금 보았다. 12시 조금 전이었다. 손님이 있나. 그런 생각을 할 때 전화가 연결됐다.
-여보세요.
“응, 할머니.”
-휴대폰 고쳤나 보네.
“어. 할머니 밥은 먹었어?”
-이제 먹으려고. 우리 손자는, 밥 먹었어?
따뜻한 목소리를 듣던 태주는 순간 미간을 좁히며 통화 음량을 높였다. 할머니의 목소리 뒤로 묘한 소란이 느껴졌다. 시장의 소음과는 어딘가 달랐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TV 소리, 다른 사람들의 말소리….
그리고 조금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 식사하세요.
“…할머니 어디야?”
-으이. 시장이지.
할머니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그런데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식사하시고, 약 꼭 챙겨 드세요.’ 했다.
“할머니 어디냐고.”
태주는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할머니는 잠깐 말이 없다가 태주가 재차 재촉하자 조용한 투로 말했다.
-병원인데… 별건 아니고 넘어졌다가 허리를 좀 삐끗했어. 근데 내일 퇴원할 거야.
할머니의 목소리 뒤로 누군가 이어 말했다.
-그래, 태주야! 느이 할머니 건강하다. 뼈도 안 부러지고 완전 통뼈라니까, 통뼈.
“…영주 할머니 같이 계셔?”
-응. 심심하다고 아침부터 놀러 왔는데 귀찮아 죽겠어, 그냥.
할머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다친 것도 아주 심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철렁 내려앉은 심장은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태주는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 현관 쪽을 흘금 보았다. 잠깐 초조하게 흔들리던 눈빛은 이내 또렷해졌다. 태주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했다.
“병원 어디야? 나 지금 갈게.”
***
계범호의 집을 빠져나오는 것은 생각보다 너무 쉬웠다.
문 앞의 남자는 떡볶이를 사다 달라는 말에 곧장 자리를 비웠다. 그사이 태주는 입고 있던 계범호의 옷을 벗어 다시 드레스룸에 넣어놓고, 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집을 빠져나왔을 뿐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오며 남자를 마주칠까 걱정했는데, 그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다. 태주는 무사히 도로로 나와 버스를 탔다.
탈출이 쉬워 그런지 마음이 무척 불편했다. 계범호는 자신을 믿은 것일까.
매화를 나오게 된다면 경찰에 곧장 신고를 하겠다고 여러 번 다짐했었다. 자신과 할머니를 괴롭힌 사람들에게 복수를 해야 했다. 제 잘못으로 생긴 빚과 불행이 아니니, 그들에게 벌을 줘야 했다.
계범호의 집에서 이렇게 빨리 나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 생각이 변한 적은 없었다.
그에게는….
죄를 제대로 따져 그 새끼들한테서 돈을 받으면, 그 돈을 돌려줄 생각이다. 그럼 계범호와 자신 사이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애초에 주고받는 게 돈과 섹스인 관계였다. 다른 것을 주고받는 것이 더 이상한 관계란 얘기다.
계범호가 자신을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긴 했다. 그럼 할머니를 데리고 도망이라도 다녀야 할까.
그건 솔직히 불가능에 가까우니, 경찰에 도움을 청하는 게 좋겠다.
그러고 나면 계범호가 자신을 보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얼마나 많이 화를 낼까. 경찰이 평생 보호해 주는 것은 아닐 텐데, 그 이후엔 어떻게 될까.
섬찟한 기분이 들어 태주는 제 손가락을 괴롭혔다. 창밖을 보는 시선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아무것도 하지 마.’
그런데 어떻게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빚이 없어지고 매화에서 빠져나왔으므로 더 나은 처지가 된다고 해도, 결국 자신은 계범호에게 팔려 온 셈이지 않은가. 보잘것없어도 평범했던 제 인생이 달라진 거였다.
만약 그 빚이 제 잘못으로 생긴 빚이었더라면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큰 산을 넘었다는 생각에 뿌듯해하면서 이제는 계범호를 잘 구슬릴 생각을 하고 있겠지.
그런데 애초에 자신에게는 정말 아무 잘못이 없었다.
할머니와 통화를 하고 나서는 불현듯 이런 생각도 들었다.
할머니가 다친 게 혹시, 조덕현의 짓은 아닐까? 혹은 박의성이 자신을 조금 더 괴롭히고 싶어서 수를 썼나?
솔직히 그들이 악마 같은 새끼들이라고 한들 아무 의미도 없는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움직인 건 항상 돈 때문이니까.
그런데 태주는 이제 모든 불운과 불행을 그들과 연관시켜 생각하게 됐다. 앞으로 평생 그럴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잊고 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은 견고했다. 억울함을 풀고 싶은 욕망도 또렷했다.
버스 창밖을 보던 태주는 문득 주위를 살폈다. 평일 오후의 버스라 승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모두 평범한 인상인 것을 보고 나서야 태주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지금쯤이면 문 앞의 남자가 태주의 부재를 알게 되었을 것 같았다. 계범호가 잡으러 오는 게 아닐까. 덜컥 겁이 났으나 어느 정도의 시간은 있을 것이다.
할머니를 확인하고, 경찰에 신고할 만큼의 시간쯤이야.
그런데 쫓기는 사람처럼 초조했다. 할머니의 안전 먼저 확보한 뒤 경찰에 전화를 할 생각이었는데, 태주는 결국 휴대폰을 들었다. 112. 몇 달 전부터 상상하던 대로 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그 뒷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묻는 말 몇 가지에 대답한 뒤, 제 얘기는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관할 경찰서로 신고를 접수하라는 안내를 받았다. 관할 경찰서까지 겨우 연결이 됐으나 그 과정에서 태주는 경찰이 당장 출동할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현행범이 아니라 그런 거였다.
-음…. 선생님 말씀은 오토바이 배달로 물건을 잃어버렸는데, 사실 확인 없이 배상을 하셨다는 거죠?
“네, 네. 맞아요.”
-우선 경찰서로 방문하셔서 접수하세요. 변호사랑 상담도 해보시고요.
“…….”
태주는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경찰이 “성매매 업소 부분은….” 하고 운을 떼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눈을 또렷이 떴다.
-관할 경찰서로 신고하셔야 되시겠습니다.
“아.”
정태주는 와락 얼굴을 구겼다.
전화를 끊고 나서 태주는 안내받은 관할 경찰서로 전화를 걸어 귀에 휴대폰을 댔다.
그때 마침 안내 방송이 들렸다. 벌써 내려야 할 때였다. 태주는 서둘러 버스에서 내리며 말했다.
“불법 성매매 업소 신고 하려고 하는데요.”
-아… 예. 위치가 어디죠?
“그게 위치가….”
태주는 대략적인 위치만 알았다. 그것도 낚시터 이름을 기억해 겨우 찾아낸 것이었다. 그것을 말하자 경찰이 “음….” 하고 뜸을 들였다.
-근데 증거는 있어요?
“네?”
-이게 증거가 있어야 조사가 되거든요. 영장도 없이 막 쳐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학생.
“제가, 제가 거기 갇혀서 일했어요. 납치당해서, 거기서 일했다고요.”
-남자가요?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시큰둥했다. 태주는 와락 얼굴을 구기며 씩씩거렸다.
“같이 동행하면 되잖아요.”
-아잇, 거참. 답답하네. 증거가 있어야, 출동할 수가 있다니까요? 뭐… 사진이나 동영상 있어요?
경찰이 성가시다는 듯 물은 말에 정태주는 주먹을 꾹 쥐었다.
“있으면요?”
-있어요?
놀란 듯 되묻는 말에 돌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마을 사람들도 돈을 받았는데, 경찰이 돈을 받지 않았을까?
“증거 있으니까, 인터넷으로 신고 넣을게요.”
잇새로 말하고 전화를 뚝 끊었다.
정태주는 내내 경찰을 믿었다. 조덕현과 억지로 계약서를 쓸 때도, 매화에서도. 탈출만 하면 경찰의 도움을 받을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 당연한 것이 요원해지니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태주는 씨발, 개새끼들. 욕설 몇 마디를 중얼거리며 이를 악물었다. 마른세수를 하는 태주의 손이 잘게 떨렸다.
“하아.”
정태주는 심호흡을 한 뒤 걸음을 옮겼다.
우선은 할머니부터 봐야겠다. 얼마나 다쳤는지 확인부터 하고 그 좆같은 증거든 뭐든, 변호사든 뭐든 다시 생각해 보자.
정태주는 뛰다시피 병원으로 들어갔다. 그때부터는 다른 것보다 할머니 걱정이 더 커졌다. 이전에 들었던 말처럼, 할머니는 나이가 들었으니 정말 가볍게 넘어져도 크게 다칠 수 있는 거였다.
영주 할머니도 괜찮다고 했으니까 괜찮은 거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여 보아도 병실을 찾아 복도를 뛰는 걸음을 늦출 수는 없었다.
“뛰시면 안 돼요.”
“죄송합니다.”
옆을 지나던 간호사가 한 말에야 겨우 멈춰 섰다. 마침 그 자리가 504호, 할머니가 있다는 병실이었다. 태주는 문 옆에 붙은 여러 개의 이름 가운데서 할머니의 이름을 찾아냈다.
곧장 병실로 들어가 정태주는 눈을 두리번거렸다. 침대마다 낯선 사람들뿐이었고,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간 다음에야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태주 오기 전에 가라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내가 무슨 헛소리를 해.”
태주는 커튼을 급하게 걷었다. 그 안에 있던 두 명의 노인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쪽을 쳐다봤다.
“아이고, 태주야!”
할머니가 반가워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에는 과도가 들려 있었는데, 그걸 잊은 듯 구는 바람에 영주 할머니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내 정신 좀 봐라.”
태주의 할머니는 멋쩍게 웃으며 무릎에 놓인 쟁반에 과도를 내려놓았다. 복숭아를 깎아 먹고 있었던 듯했다.
“태주 오랜만이다. 이제 총각이 다 됐네.”
“안녕하세요.”
태주는 영주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면서도 시선을 면밀히 움직였다. 다행히, 할머니는 크게 다친 게 아닌 것 같았다.
“할머니 괜찮아?”
말은 그다음에야 흘러나왔다.
“괜찮대도. 근데 태주야, 머리는 왜 그래? 인물이 좋으니 깔끔하긴 한데.”
“그니까. 태주가 꼭 텔레비전 나오는 탤런트처럼 생겼다이가.”
“우리 태주가 그렇지. 아참참, 애를 세워놓고. 태주야, 여기 앉아서 복숭아 좀 먹어. 달달한 게 너무 맛있다.”
할머니가 손짓했다. 태주는 손을 저었다.
“나 어디 좀 가야 돼서. 오래 못 있어.”
“어디? 공장에 또 바로 가?”
“아니. 나 거기 그만뒀어.”
“그럼. 또 서울에서 지내?”
“서울인데….”
커다란 남자를 생각하던 태주는 고개를 저은 뒤 물었다.
“할머니. 나 그냥 할머니랑 같이 살까? 여기도 잘 구해 보면 나 알바 할 자리는 있겠지.”
“그럼. 서울보다는 적긴 해도….”
할머니의 반응이 이상했다. 옆에서 계속 눈치를 보는 영주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태주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할머니를 보며 물었다.
“근데 어쩌다 넘어진 거야?”
“아니, 이 할매가 요즘에 돈독이 올라서 일을…….”
불쑥 말을 내뱉던 영주 할머니가 순간 표정을 찡그리며 말을 멈췄다. 할머니가 꼬집은 것 같았다.
“네? 뭐라고요?”
“아니야. 태주 복숭아 먹어, 복숭아.”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할머니야. 태주도 알아야 할 것 아니야. 이제 공장도 그만두고 같이 살 거라는데.”
영주 할머니가 씩씩거리자 할머니가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태주야. 느이 할머니 요즘 새벽같이 나가서 과일 떼서 판다. 그 무거운 걸 번쩍번쩍 들다가 넘어졌다이가.”
“네? 할머니가 왜 일을 그렇게….”
멍하게 눈을 깜박이던 태주는 고개를 돌려 제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멋쩍은 미소를 띤 채, 주저하며 말했다.
“내 실수 메우자고 손주가 고생하면서 번 돈을 쓸 수가 있나….”
“…….”
설마. 뇌리를 스치는 추측에 태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물었다.
“혹시 할머니 내가 보내 준 돈 안 쓰고, 전세 빼서 대출 갚았어?”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어색한 표정에서 태주는 답을 읽었다. 와락 얼굴을 구기자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집주인이 사정 딱하다고 당분간은 다른 사람 안 받는단다. 그래도 우리가 그 집에서 십몇 년 살았으니까 정이 있는 거지.”
“아, 할머니…. 내가, 전세금 빼지 말라고 했잖아.”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할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태주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타이르듯 말했다.
“돈 아직 꽤 남았고, 경찰서에 신고도 했고. 응? 과일 파는 건 계속할 거 아니고 저기, 저… 누가 애 보는 일 소개해 준다고 해서 이제 그 일 하려고. 몸도 편하고 꼬물거리는 것들도 보고 얼마나 좋아. 금방 집 다시 찾을 수 있어. 걱정 마.”
줄줄 흘러나오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어 반대쪽 귀로 빠져나갔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손발이 서늘해지고 머릿속이 멍해지는 가운데,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럼 할머니 지금 어디서 지내?”
“나 한 몸 지낼 데야 많지.”
그녀는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자 옆의 영주 할머니가 답답하다는 듯 대신 나섰다.
“태주야. 이 노인네 지금 거, 어디고, 고시원? 거기서 지낸다. 사람 몸 하나 겨우 누울 자리에서 그 궁상을 떨며 지내는데. 내가 진짜 답답해서.”
손주가 돈을 보내 줬으면, 그걸 써야지. 돈이 있는데 왜 안 쓰냐고 이 답답한 할망구야. 영주 할머니가 씩씩거리며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
태주도 움찔 등을 구부렸다. 심장이 뻐근하게 부풀어 터질 것 같았다. 숨은 거칠어지고 코끝은 시큰거렸다.
“괜찮다니까, 태주야.”
“쓰라고 보내 준 거잖아! 내가, 꼭 그거 쓰라고 했잖아.”
할머니의 손을 뿌리치며 태주가 언성을 높였다. 놀란 시선 몇 쌍이 이쪽으로 쏠렸으나 태주는 그것에 신경 쓸 수 없었다. 넘실거리는 감정을 감당하기 벅찼다.
“그 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그래, 그래. 할머니가 돈 하나도 안 썼으니까, 우리 태주 검정고시도 따고 대학도 갈 수 있어.”
“…….”
태주는 할머니의 다정한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 위로 아주 오래전에 했던 것 같은 다짐이 스쳐 지나갔다. 이내 태주는 주먹을 움켜쥐며 눈을 부릅떴다.
“내가 언제 검정고시 본댔어? 나 그런 거 안 봐. 대학도 안 가.”
격앙된 목소리는 잘게 떨렸다.
“네 마음 내가 모르면 누가 알아.”
애써 웃는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었다.
아. 탄식하며 정태주는 제 팔로 눈가를 가렸다. 맞닿은 살갗은 금방 뜨겁고 축축해졌다.
“우리 태주가 언제 이렇게 컸어. 공부할 거라고 돈도 열심히 모으고.”
그 돈 열심히 모은 돈 아닌데.
“태주야. 다들 이러고 살아. 가끔 실수도 하고, 운 나쁘면 안 좋은 일도 생기고 그러는 거지.”
운이 나빠 생긴 일이 아니라, 누군가 작정하고 꾸민 일이다.
“또 그러면 좋은 일도 생기는 거고. 태주 다시 공부하고, 훌륭한 사람 돼서…….”
좋은 일은 씨발. 몸 팔던 새끼가 어떻게 훌륭한 사람이 될까. 태주는 팔로 눈가를 꾹 누른 채 한참을 들썩였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젖은 입술이 작은 목소리를 흘렸다.
“할머니.”
“응, 태주야.”
정태주는 숨을 들이마셨다. 갈비뼈가 부러질 듯이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가, 숨을 내쉬며 팔을 내렸다. 발개진 눈가에는 물기가 번져 있었다.
“나 어디 좀 다녀올게.”
태주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던 할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주는 차분해진 눈으로 병실 안을 둘러보았다. 환자와 보호자로 북적거리는 데다가 간호사도 자주 오는 것 같았고, 양옆으로도 병실이 늘어서 있었다.
“내일 퇴원하지 마. 이참에 좀 쉬어, 할머니.”
“몸이 하나도 안 아픈데….”
“좀, 할머니. 병원에 며칠 더 있어. 응?”
손자의 얼굴이 애달파 보여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주는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했다.
“갈게.”
그러고 난 뒤에는 휙 돌아섰다. 뒤에서 할머니가 걱정스럽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
정태주는 반년 전 자주 왔던 허름한 건물로 들어섰다. 좁은 계단을 두 칸씩 성큼성큼 올라가는데 덩치 큰 남성 하나가 위에서 내려왔다.
“뭐…… 배달?”
그는 태주를 위아래로 훑다가 앳된 얼굴에 빤히 시선을 주고는 물었다. 태주는 조용한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들어가 봐라.”
정태주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좁은 계단의 벽에 붙었다. 사내가 먼저 지나간 다음, 태주는 다시 걸음을 움직였다.
계단을 다섯 칸쯤 올라가자 문이 보였다. 심부름센터라고 작게 이름이 붙여진 철문은 영업 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게 허름했다.
정태주는 손잡이를 당겨 열었다. 곧장 시선 몇 쌍이 쏠렸으나 차분히 내부를 훑었다. 한쪽에 있는 테이블에서는 깡패들이 고스톱을 치고 있었고, 소파가 있는 테이블에서는 대낮부터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럴 때만 운이 좋은 것인지, 그곳에는 조덕현뿐만 아니라 박의성까지 있었다.
“어! 이게 누구야. 새끼 오랜만이다?”
취기가 오른 듯 목이 붉은 조덕현이 반가운 사람을 만난 것처럼 손을 들었다. 박의성은 그 옆에서 술잔을 입에 대며 위아래로 시선을 줬다.
“안녕하세요.”
태주는 인사를 하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태주의 등장에 잠깐 시선을 줬던 깡패들은 금방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놀았다.
담배 냄새와 술 냄새로 어지러운 곳이었다. 매화처럼.
정태주는 조덕현과 박의성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생각해 보면 조덕현은 이전에도 누군가와 여기서 대낮부터 술을 마실 때가 있었다. 그때 태주는 다른 직원에게 물건만 받아 곧장 배달을 갔기 때문에 손님의 얼굴까지 볼 수는 없었는데, 그 뒷모습이 박의성이었던 것도 같았다.
“두 분 친하신가 봐요.”
“그러니까 내가 너 거기 꽂아 준 거 아니냐. 봐라. 결국 빚도 다 갚고. 너 이 새끼 거물 하나 물었다며?”
조덕현의 말에 태주는 움찔 뺨을 떨었으나 큰 표정 변화 없이 입을 열었다.
“짜고 친 거 다 알아요. 제가 물건 잃어버린 거 아니잖아요.”
잠깐 정적이 흘렀다. 조덕현과 박의성은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재밌는 건지 저들끼리 한참 박장대소를 하더니, 조덕현이 털썩 소파에 기대며 말했다.
“그런가?”
“물건 잃어버린 것처럼 해놓고, 대출 계약서에 억지로 사인시킨 거 맞죠.”
태주가 감정을 누르며 내뱉은 말에 조덕현은 박의성을 흘금 보며 또 웃었다. 그는 제 뺨을 벅벅 긁더니 “어떻게 알았지?” 했다.
“병신 새끼가 지가 빈 상자 배달한 줄도 모르고.”
조덕현이 낄낄거렸다. 옆에서 박의성이 아, 그런 거였어? 하고는 같이 웃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정태주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서 천직 찾았잖아. 내가 저런 얼굴이 요즘 먹힌다 했지.”
“…할머니 피싱한 거, 사장님 짓 맞죠.”
조용조용한 태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박의성은 그 말에 놀라는 기색도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쉽다는 듯 말했다.
“아, 할매 전세 뺐다길래 한 번 더 치려고 했는데.”
“그래 봤자 피싱하는 애들 다 떼 주고 나면 남는 돈이나 있냐?”
“빽 하나 살 돈은 떨어지지. 다음 주에 마누라 생일이거든.”
“그래? 제수씨 축하한다고 전해 드려라. 뭐 그때 부부끼리 같이 밥이라도 할까.”
“그러든가.”
저들끼리 태연히 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며 태주는 거칠게 호흡했다.
저런 식이었을 거다. 자신을 타깃으로 잡을 때도 저랬을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자신을 보고 “야. 이번엔 쟤 어때?” 하고 물었을지도 모른다. 남의 인생을 망칠 계획이란 것이 그리 세밀하고 장황히 세워지지도, 거창하게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저급한 계획에 자신은 무참히 걸려들었다.
“잘돼 가냐?”
주먹을 움켜쥔 채 고개를 푹 숙인 태주에게 문득 박의성이 말했다.
고개를 들자 박의성이 묘한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태주를 위아래로 훑으며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뭐, 녹음하고 있는 거 아냐?”
정태주는 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휴대폰을 넣어둔 바지 주머니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이쪽을 쳐다보는 사내들을 흘긋거리며 다리에 힘을 줄 때,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녹음한 거 가지고 경찰서로 달려가든, 인터넷에 올리든 해봐.”
“…….”
“병신. 너 하나 지랄한다고 내가 뭐 감방이라도 갈 것 같아? 씹, 경찰이며 높으신 분들이며 내 돈을 얼마나 드셨는데.”
태주는 박의성이 비릿하게 웃는 것을 멍하게 보았다. 박의성은 그런 태주를 위아래로 훑고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계 전무 아니었으면 넌 벌써 죽었어, 씨발아.”
“이야, 살벌하다.”
“저렇게 나대는 새끼들은 가만두면 끝도 없이 사람 귀찮게 하는 거 모르냐. 장기 몇 개 팔고 치우는 게 낫지.”
조덕현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정태주에게 살벌한 시선을 주고 말했다.
“야. 조용히 살아.”
정태주는 눈을 부릅떴다. 움켜쥔 주먹부터 팔, 온몸이 덜덜 떨렸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피가 빠르게 돌았다.
“노인네는 무슨 잘못이냐. 후장 파는 손자 때문에 말년에 인생 조까치 되겠네.”
혀를 차는 뻔뻔한 말에 눈앞이 새빨개졌다. 씨발. 욕설을 내뱉으며 악마 같은 새끼들을 죽여버릴 듯 노려보고 있는데, 뒤에서 몸이 거칠게 당겨졌다. 발 몇 개가 바닥으로 내팽개쳐진 태주의 주위를 둘러쌌다.
“야야. 건드리지 마라. 그거 주인 있단다.”
조덕현이 제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사내들이 태주의 뒷덜미를 잡고 일으켰다.
“저어기 건물 밖에 버리고 와라.”
그들은 꼭 태주를 물건 대하듯 말했다. 전부터 그랬다. 빚을 만든 건 그쪽이면서, 태주를 사고팔았다.
“놔. 씨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반응하는 사람은 없었다. 닫히는 문 사이로 보이는 조덕현과 박의성은 태연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사내들은 태주를 계단 밑으로 끌고 갔다. 좁은 계단이라 몸이 사내들 사이에 꽉 끼여 발이 허공을 밟았다.
“입 다물고 갈 길 가라. 곱게 보내 줄 때.”
그들은 태주를 건물 밖으로 내팽개친 다음 무섭게 눈을 부라렸다.
정태주는 벌떡 일어나려 했으나 발목이 욱신거려 뒤로 주저앉았다. 끌려 내려오다가 발을 잘못 디딘 것 같았다. 전에 매화에서 탈출하다가 다쳤던 곳이라 쉽게 다치는 것이었다.
그것에도, 화가 났다.
태주는 울퉁불퉁한 아스팔트에 주저앉아 가슴을 들썩였다. 그런데도 도저히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가슴을 주먹으로 퍽, 퍽 두드렸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매화를 벗어났음에도, 경찰에 신고를 했음에도, 녹음을 하고 직접 증거를 만들었음에도.
이후로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무언가 바꿔 보려 행동할수록 제 삶은 물론 할머니의 삶까지 위태로워질 것이다.
“허억, 헉….”
낄낄거리며 웃던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태주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고통스럽게 웅크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자신은 그대로인데 주위의 세상은 빙글빙글 돌아가며 자신을 비웃었다.
호흡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아 땅바닥을 기던 태주는 한참 만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주변은 어둑해져 있었다.
전화…. 중얼거리며 크게 뜬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자 하얀빛이 주변에 퍼졌다.
[녹음중]
그들은 녹음 파일을 빼앗지도 않았다.
“씨발….”
태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욕을 하며 녹음을 종료했다. 그런 다음 지갑을 열어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어두워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아서 태주는 손등으로 눈을 거칠게 비볐다. 물기가 묻어났던 것 같았다. 이마 위에서 떨어진 땀방울인지 다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휴대폰 불빛으로 비춰가며 겨우 숫자를 읽어냈다. 휴대폰에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통화를 걸었다.
…받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에 또 덜컥 호흡이 목에 걸릴 때, 연결음이 멎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은 것이었다.
정태주는 입을 벙긋거렸으나 색색 소리만 날 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쿵, 쿵. 가슴을 세게 치고 나서야 겨우 목소리가 나왔다.
“나왔는데… 집이 어딘지 모르겠어요.”
자신의 것 같지 않게 매우 지친 목소리였다.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얼마간 침묵 후, 낮은 음성을 내보냈다.
-타고 와.
뚝. 전화가 끊겼다. 허망하게 휴대폰을 보는데 뒤에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쏟아졌다. 고개를 돌리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그 안에서 내린 남자 몇 명이 태주에게 다가왔다. 계범호의 사람으로 보이는 그들은 태주를 쭉 따라다녔던 듯했다.
그럼 왜 자신을 곧장 붙잡아 가지 않았을까. 의문에 대한 답은 찾지 못한 채 태주는 절뚝이며 그들을 따라갔다.
이번에도 태주는 남자의 주소를 파악하지 못했다. 차 안에 구부정하게 앉은 채 덜덜 떨다가 차 문이 열렸을 때 내렸다. 그대로 사내 세 명에게 둘러싸여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으로 홀로 들어섰을 때는 땀에 젖은 몸이 차갑게 식었다. 희게 질린 얼굴에는 여러 감정이 공존했다. 분노, 억울함, 자책, 후회, 두려움, 슬픔….
그리고 창가에 선 남자를 마주하자, 두려움이 확연히 커졌다.
계범호는 정태주를 천천히 훑었다. 창백한 뺨, 하얗게 마른 입술, 땀에 젖은 옷. 남자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함부로 나가니까 집을 못 찾지.”
“…자, 잘못했어요.”
정태주는 겁에 질려 얼어붙었다.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는 계범호를 보며 그 자리에서 떨기만 했다.
“하지 말라는 짓은 다 하고.”
태주의 앞에 멈춰 선 남자가 손을 들었다. 두꺼운 손바닥이 허공에 잠깐 멈췄을 때, 태주는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이내 커다란 소음과 함께 몸이 옆으로 날아갔다. 정태주는 자신이 바닥에 쓰려졌다는 것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시야가 컴컴하게 죽었다 살아난 뒤에는 눈앞이 빙빙 돌았다. 자신이 입술 사이로 신음을 흘리는 것도 몰랐다.
계범호는 정태주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는 태주가 몸을 일으키려 애쓰는 것을 빤히 내려다보다 말했다.
“제대로 맞을 수 있다며.”
“네….”
정태주는 바닥을 짚은 손에 힘을 줬다. 코에서 흘러나온 코피가 손등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겨우 무릎은 꿇었으나 몸이 휘청거렸다.
계범호가 혀를 차며 손을 뻗었다. 영 가누지 못하는 고개를 바로잡아 주려 턱에 살짝 손을 댄 것도 모르는 듯 정태주는 가물거리는 눈을 깜박이기만 했다.
“죄송해요. 한 번만 봐주세요…. 저, 경찰에 손님 얘기는 하나도 안 했어요.”
조금 정신을 차린 다음에는 덜덜 떨리는 말을 쏟아냈다.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핏방울이 튀고 안으로 피가 스며들었다.
“경찰?”
되물은 계범호가 피식 웃었다. 그는 순진하네, 우리 태주 하고 중얼거리곤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래서 네가 뭘 할 수 있는지는 확인했고?”
“아….”
태주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들어 왔으나 태주는 비리고 쓴맛도 느끼지 못했다.
“응? 태주야. 네가 나 없이 할 수 있는 게 있어?”
계범호가 다정한 말투로 재차 물었다.
정태주는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너 작업당한 거 맞아.’
아무것도 하지 말라면서, 불편한 진실을 확인시켜 준 이유 말이다.
그는 자신이 할 행동을 예상했던 것이었다. 그러길 바라며, 허술하게 감금했다. 미행을 하고 있으면서도 태주가 움직이게끔 내버려 뒀다.
현실이 어떤지, 스스로가 얼마나 무력한지, 알게 하려고.
태주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땅을 짚은 손은 손끝을 세워 무언가를 움켜쥐듯 힘을 주었다. 메마른 입술이 열렸다.
“저는 손님 없이는 안 돼요.”
아무것도 못 해요, 저는. 할 수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서늘한 시선 앞에서 태주는 억눌린 고백을 토해냈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가 원하는 대로 완전히 무너졌다.
정태주는 숨이 막혀와 밭은 숨을 내쉬었다. 불안한 눈빛으로 계범호를 올려다보며 “살려 주세요.” 하고 속삭였다.
“누가 죽인대?”
계범호가 비딱하게 물었다. 그러자 정태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쏟아냈다.
“그게 아니라, 할머니 좀 살려 주세요. 제가, 저 때문에 할머니가….”
마른침을 급하게 삼킨 정태주가 남자의 옷자락을 덥석 붙잡았다. 눈동자를 전부 드러내며 그곳에 남자를 담았다.
“조덕현이 자꾸 할머니 얘기를 해요.”
“…….”
겁에 질린 얼굴을 보던 남자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태주도 자신이 붙잡은 남자의 바짓단을 쳐다보았다. 어디서 묻은 것인지 제 손은 피범벅이었고 남자의 옷도 그 때문에 더러워졌다. 움찔, 손등을 떨었으나 태주는 남자를 놓지 않았다.
제가 잘할게요, 이제 정말 아무것도 안 할게요, 더 때리셔도 돼요, 하고 중얼거렸다.
계범호는 한숨을 내쉬며 마른 입술을 핥았다. 이내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다른 건, 태주야.”
그 말에 정태주가 고개를 들었다. 계범호는 드러난 얼굴을 집요히 응시했다.
“…해 주실 수 있어요?”
머뭇거리며 묻는 정태주의 눈에 점차 뜨거운 감정이 어렸다. 핏물로 엉망이 된 입술은 잠깐 달싹이다가 작은 목소리를 내보냈다.
“그 새끼들 죽여버리고 싶어요.”
부릅뜬 눈에서는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살의만 넘실거렸다.
“원하시는 거 뭐든 할게요. 제가 모은 돈도 다 드릴게요.”
쉰 목소리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던 계범호가 돌연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는 가여운 얼굴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사람 둘 보내는 데, 코 묻은 돈으로 되겠어?”
커다란 손이 턱을 적신 피를 닦고 코 아래 맺힌 핏방울도 훔쳐냈다. 손은 금방 피범벅이 되었으나 남자도, 태주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계범호는 팔을 무릎에 대고 손을 늘어뜨린 채 정태주를 바라보았다. 절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새기듯 눈에 넣으며, 그가 말했다.
“다 줘야지.”
“…다요?”
태주가 멍하게 물은 말에 그가 그래, 하고 답하며 눈을 번득였다. 그는 정태주의 전부를 원했다. 몸, 시간, 삶을 포함한 모두를.
“…….”
정태주는 계범호의 눈빛에 어린 어둡고 짙은 감정을 바라보았다. 때때로 본 적이 있는 감정이었다. 틈 없이 짙은, 평생 그곳에 머무를 것 같은 무거운 것.
“다 드릴게요.”
태주는 망설임 없이 말하며 남자를 또렷이 바라보았다. 그 흔들림 없는 시선을 마주한 채 계범호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누가 널 판 거 아니고, 내가 산 것도 아니고. 네가 주겠다고 한 거야.”
이제 봐주는 것 없어. 그가 서늘하게 덧붙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정태주를 보며 계범호는 입꼬리를 올렸다. 만면에 짙은 만족감이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