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부-0. 해피엔딩 (1/21)

1부

0. 해피엔딩

“아, 질투에 눈이 먼 남작의 커다란 손이 가련한 루체의 손목을 비틀어 잡았다!”

허름한 주점 구석에 마련된 작은 무대 위에 있던 배우들이 해설자의 목소리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길을 헤매는 걸인처럼 새까만 머리칼을 엉망으로 풀어 헤친 남자가 싸구려 가발을 쓴 아름다운 남자를 몰아세우자 객석에서 야유가 흘러나왔다.

이제는 너무 흔한 이야기가 되어 버린, 테미스 백작 칼릭스 히페리온과 스칼라 남작 헤르난 말론, 그리고 아름다운 루체의 치정을 다룬 삼류 연극의 연출가이자 해설자인 남자는 객석을 살폈다.

사람이 많은 금요일 저녁임에도 주점에는 앉을 자리가 반도 더 남아 있었다. 그나마 자리에 궁둥이 붙이고 앉아 있는 관객들도 하나같이 얼굴에 진득한 술 냄새를 묻힌 상태였다.

하지만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와 고함, 장난스러운 야유 따위는 그와 같은 생계형 극단의 주인에겐 마치 오랜 친구와도 같은 것이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작게 어깨를 으쓱거려 보인 해설자가 다시 극을 이어 나갔다.

“루체는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가족이었던, 하지만 지금은 그를 나갈 길 없는 수렁에 처박아 버린 남작을 쏘아보며 눈물을 흘렸다.”

해설자의 손끝이 무대를 향했다.

루체 역할을 맡은 앳된 얼굴의 배우가 제게 주어진 대사를 더듬더듬 읊기 시작했다. 그 연기력이, 참으로 삼류 연극에 걸맞은 배우라 칭할 만했다.

“어……. 음, 나의 친우 헤르난은 이미 내 안에서 죽었어. 그 아이가 한낱 사랑 따위에, 질투에 눈이 멀어 나를 배신할 리 없으니 악마가 나의 헤르난을 죽이고 그 몸을 차지한 게 틀림없지.”

말이 이어졌다.

“헤르난. 네가 이런다고 칼릭스가 널 봐 줄까? 너처럼 흉악한 남자를?”

“……대사!”

목소리를 잔뜩 낮춘 해설자가 이번엔 키가 큰 배우를 향해 외쳤다.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던 남자가 놀라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럴 리 없겠지.”

당황한 남자가 입 안에 담아 뒀던 대사를 빠른 속도로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겠어? 칼릭스가 더는 나를 보고 웃어 주지 않아도, 나날이 메말라 가다 결국 시들어 버려도…… 나는 너희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데.”

정말이지, 악당이나 할 법한 대사였다. 일방적으로 매달리던 칼릭스의 아버지와 결탁해, 그의 연인인 루체를 억지로 제 배우자 자리에 앉혀 버린 악당 말이다.

남작 역할을 맡은 배우의 얼굴에 비딱한 웃음이 걸렸다. 대사를 틀리지 않았다는 뿌듯함이 담긴 것이었다. 대사를 쓴 극작가이며 연출가이자 해설자인 남자 역시 중요한 대사를 날려 먹지 않은 배우를 보며 묘한 안도를 느꼈다.

하지만 배우들의 연기가 해설자는 만족시켰을지 몰라도 객석까지 만족시키진 못했다. 남작이 루체의 손목을 비틀어 잡았을 때처럼, 취객들의 야유가 무대를 향해 쏟아졌다.

“빨리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누군가 외쳤다.

“백작은 도대체 언제 와?”

“남작이 루체한테 개같이 구는 걸 20분은 더 봐야 오겠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던 여자가 옆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음유 시인의 노래며 시, 소설, 연극, 소문, 하물며 애들이 보는 인형극에서도 이미 너무 많이 반복되고 재생산된 남작의 악행을 구경하는 일이 지겨웠다.

무섭게 생긴 남자가 체구가 작은 데다 아름답기까지 한 다른 남자를 함부로 대하고 괴롭히는 꼴을 보는 게 역겹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몇천 번, 몇만 번 반복되더라도 결코 지겨워지지 않을 부분은 있었다. 악당을 물리친 연인이, 이내 완전한 사랑의 결실을 맺는 이야기의 결말부였다.

아버지가 만들어 낸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던 유약한 남자 칼릭스 히페리온은 자신에게 발정하는 추악한 악당 헤르난 말론에게 아름다운 연인 루체를 빼앗기고 방황한다.

그러나 남자는 연인을 구해 내겠다는 마음 하나로 다시 일어서고, 제 앞에 펼쳐진 고난과 역경을 하나씩 넘으며 성장한다. 그리고 결국, 악당의 손아귀에 사로잡혀 있던 연인을 구해 낸다. 오랜 악연으로 이어져 있던 악당의 가슴에 검을 깊게 박아 넣으며.

악당이 등장하는 연인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그 달콤함을 잃지 않았다. 사람들은 한때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야기의 마지막 단락을 음미하기 위해 테미스 백작 부부의 러브 스토리를 찾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아! 그렇게 3년의 시간이 흘렀다.”

객석의 눈치를 보던 해설자가 별안간 외쳤다. 잠시간의 정적 후, 무대 뒤에 있던 극단원이 가볍게 북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주정뱅이들에게 팁을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면 최대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진행해야 했다. 관객들의 눈치를 보던 해설자는 연극의 상영 시간을 대폭 줄이기로 했다. 언제나처럼 말이다.

“소년의 모습을 벗어 던지고 완전한 남자가 된 칼릭스 히페리온이 피와 쇠 냄새를 풍기며 귀환한다!”

무대 위로 백금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가 다급히 등장했다.

“……나의 사랑하는 루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전쟁을 이 검으로 베어 내고, 내가 돌아왔소!”

고개는 빳빳하게 세우고 가슴은 최대한 내민, 강해진 모습을 표현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담은 자세와 함께였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칼릭스 히페리온의 재등장에 관객들이 환호를 보내자 주점 구석을 가득 메우는 술내 나는 웃음소리를 듣던 해설자의 얼굴에도 안도의 빛이 스쳤다.

이제, 악당을 처단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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