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섯 번째 아침
새까만 어둠이 마음을 갉아먹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세상은 어느덧 7월 21일의 아침으로 모습을 바꾼다. 벌써 네 번의 죽음 뒤에 반복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무언가 달랐다. 헤르난 말론은 아주 오랫동안 그의 마음이 날카로운 이빨에 물어뜯기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도 세상은 여전히,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암흑 속에 잠겨 있었다.
수도 디아만테의 지하 감옥을 떠올리게 하는 어둠을 흘겨보며 헤르난은 이미 반쯤 깨져 있는 손톱을 짓씹었다.
다섯 번째 아침이 오지 않았다.
이것이 바닥에 몸을 말고 누워 빌었던 소원이 이루어진 결과물인지, 다시 겪을 고통스러운 삶을 위한 준비 과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때, 헤르난의 귓가에 나지막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그 성별을 알아챌 수 없는 묘한 음색이었다.
「아파 보이는구나.」
눈을 뜬 헤르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허공에 점처럼 작은 하얀빛이 떠 있었다.
새까만 세상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빛은 헤르난이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모습을 바꿨다. 빛은 그저 동그란 형태이기도 했고, 아름다운 여인이기도 했으며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남자이기도 했다. 잠시 후에는 아이나 노인의 모습이 되었다.
그것은 몸을 숨긴 채 헤르난의 눈앞에 빛의 들판을 만들었다가도 이내 새하얀 불꽃으로 그 들판을 태워 버렸다. 그러다가 결국엔, 눈처럼 흰 사슴의 모습을 하고 헤르난의 앞에 섰다.
눈을 찔러 오는 빛에 간신히 적응한 헤르난이 사슴을 올려다봤다. 따스한 감정을 품은 흰 사슴의 푸른색 눈 속에 추레한 남자가 비치고 있었다.
“내게 삶을 반복하게 한 이가…… 당신입니까?”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헤르난은 흰 사슴에게 물었다. 칼릭스의 앞에서는 안간힘을 써도 잘 나오지 않던 목소리가 어두운 공간을 울렸다. 꼭 남의 목소리를 빌려 오기라도 한 것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내가 너를 도왔지.」
도와? 헤르난의 얼굴 위에 의아해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헤르난을 향해 잠시 목을 굽힌 사슴이 말을 이었다.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네게 받은 도움을 갚은 것뿐이니.」
눈앞을 가득 메우는 빛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순간, 마른 장작에 불이 옮겨붙듯 머릿속에 반쯤 잊고 있던 과거의 조각이 떠올랐다.
「네가, 세이린 숲에서 나를 구했잖아.」
흰 사슴이 건넨 기억을 받아 든 헤르난이 눈을 깜빡였다.
세이린 숲은 흑마법사들이 일으킨 균열 전쟁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전쟁에 출정한 기사라면 한 번쯤은 지나야 하는 곳. 그곳에서, 헤르난은 마물의 발톱에 살이 짓이겨져 피를 흘리고 있던 흰 사슴을 만났다.
하지만 자신이 그 사슴을 도왔다고 말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헤르난은 쓰러져 숨을 헐떡이고 있는 사슴에게 가지고 있던 마법 약을 나눠 줬다. 고작 그뿐이었다.
이유 역시 별것 없었다. 지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사슴의 아름다운 푸른색 눈이 꼭 칼릭스의 것처럼 보여서. 그게 다였다.
「이유가 중요해? 다른 인간들은 모두 도망가기 바빴잖아. 아무도 나를 돕지 않았는걸. 너는 대지 신의 자식을 살린 것이니 자부심을 느껴도 좋아.」
마치, 헤르난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사슴이 말했다.
「감사의 뜻을 담아 거창한 선물을 하나 전해 주려 했는데, 네가 너무 빨리 죽어 버리더구나. 그것도 아주 큰 미련을 두 손 가득 붙들고선 말이야.」
“…….”
「그래서 힘을 쓴 거야. 적어도 네가 미련 없이 죽음의 강을 건너도록, 한 번 더 기회를 준 거지.」
말을 마친 사슴이 순식간에 형체를 바꿨다.
흰 사슴은 헤르난이 되었다. 길바닥의 걸인 같은 추한 행색이 아니라 균열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돌아왔던 때의 말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네가 칼릭스의 검에 심장이 꿰뚫려 죽은 건, 당연한 일이었어. 심지어 네가 먼저 신청한 결투였잖아. 마지막 발악이었던 걸까? 아니야, 아니지. 칼릭스 히페리온의 인생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싶어서 그랬을 거야.」
사슴은 즐겁다는 듯 소리 내 웃었다.
「질투와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후작과 손을 잡다니. 아주 어리석었어.」
……내가 왜 그랬지? 헤르난은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먼지가 잔뜩 묻은 낡은 기억을 헤집어야 했다.
〈헤르난. 칼릭스는 네가 보고 싶지 않대. 그래서 내가 대신 나온 거야.〉
〈우린 네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어.〉
〈네가, 죽기를 바랐어.〉
루체의 목소리가 헤르난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는 도련님을 위해서 싸웠어, 루체. 몇 번이나 죽을 뻔했는데, 그래도 그 사람이 보고 싶어서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어. 한 번만. 한 번만이라도 그 사람을 만나게 해 줘.〉
〈무슨 명목으로? 이제 넌 칼릭스의 호위 기사가 아니야.〉
〈…….〉
〈돌아가, 헤르난.〉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랬다. 고작 칼릭스가 헤르난 말론이란 하찮은 인간의 죽음을 바랐다고, 나를 그의 인생에서 완전히 떼어 놓으려 한다고, 버리려 한다고…… 자신은 칼릭스와 그가 사랑하는 루체를 갈라놨다.
심장에 박힌 새하얀 검을 부여잡은 채 죽어 가는 절 내려다보던 루체와 칼릭스, 두 연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타는 듯 뜨거운 분노와 차가운 혐오로 잔뜩 굳은 얼굴을 한 칼릭스의 품 안에서 루체는 다가올 행복을 예감한 듯 기쁨의 눈물을 흘렸었다.
흰 사슴을 둘러싸고 있던 빛이 사그라들었다. 여전히 헤르난의 모습을 한 사슴은 짧게 혀를 찼다.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 두 번째의 삶 역시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지. 예상대로 비슷한 결말을 맞더구나. 검이 가슴을 꿰뚫는 것에서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거로 바뀌긴 했지만 말이야. 그건 어쩌다 일어난 일이야? 너도 모르려나?」
자신이 계속해 헤르난을 지켜봤다는 걸 알리려는 양, 사슴은 조금씩 모습을 바꿔 나갔다.
지금껏 반복되었던 삶 속에서 헤르난이 그랬듯 그의 형상을 한 사슴은 점점 초라해지고 우스워졌다. 절뚝이며 걷기 시작하는 남자를 보던 헤르난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그래도 다음엔, 마물에게서 루체를 보호하다 죽더구나. 루체를 잃으면 칼릭스가 슬퍼할 테니까. 그래서 널 희생한 거지? 나는 너의 죽음에서 희망을 봤어. 나를 구해 준 이가 이제야 마음 편히 죽을 수 있겠구나.」
흰 사슴이 헤르난을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자신의 못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색을 가진 웃음이었다.
「하지만 어둠을 헤매던 너는 다시 눈을 떠 7월의 아침으로 돌아갔지. 도대체 무엇이 마음에 걸렸길래, 도대체 무슨 미련이 남았기에.」
헤르난은 곰곰이 자신의 세 번째 죽음을 떠올려 봤다. 루체를 대신해 죽음을 맞았을 때, 칼릭스가 슬퍼할 일은 일어나지 않겠구나 싶어 그는 안도했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다시 살기로 했다. 끝내 마주하지 못했던 칼릭스가 보고 싶어서 그랬다. 제 죽음을 지켜보던 서늘한 얼굴이 아니라 예전처럼……. 목뒤로 추잡한 미련의 말을 삼킨 헤르난이 눈을 감았다.
「너를 되살리는 게 힘든 건 아니야. 너 같은 인간 정도야 몇천 번, 아니, 몇만 번은 더 살려 낼 수 있지.」
하지만. 말을 흐린 사슴이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흰 사슴은 제자리에서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만들어진 빛의 가루가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이번 네 죽음은, 최악이었지.」
그래도 지난 삶에서 헤르난은 나름의 노력을 했다. 그는 자신의 욕심이 칼릭스와 루체의 삶을 망가지게 했다는 것도, 몇 번의 생을 다시 산다고 한들 칼릭스가 원하고 사랑하는 건 루체밖에 없을 거라는 것도 인정하고 또 이해했다.
자신의 사랑은 칼릭스와 루체가 품고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게 아니라, 그저 온갖 저열한 감정만이 모여 만들어진 찌꺼기에 가깝다는 것 또한 인정했다.
그래서 헤르난은 두 사람을 돕기로 했다.
언제나 그렇듯 루체와 부부가 된 지 1년째가 되는 7월 21일의 아침에 다시 눈을 뜬 헤르난은, 루체가 남작의 배우자가 아닌 루체라는 한 사람으로서 자립할 수 있게 도왔다.
혹여 아들인 칼릭스와 다시 만나기라도 할까 계속해 루체를 감시하는 후작에게서 그를 보호했고, 이혼 역시 소문이 나지 않게 차근히 준비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루체를 위한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 두기까지 했다.
전장에 나간 칼릭스가 지난 삶에서처럼 공을 세우고 돌아오면 그때, 헤르난은 자신이 붙잡고 있던 루체를 놓아주기로 했다.
하지만 운명은 헤르난이 지금껏 쌓아 온 죄를 눈감아 주지 않았다.
칼릭스가 전쟁 영웅이 되어 수도로 귀환한 후 사흘이 채 지나기도 전에, 루체는 스스로 목을 매 죽음의 강을 건넜다. 헤르난의 편지를 받은 칼릭스가 스칼라로 오기로 한 날이었다.
스칼라 남작에게 당한 치욕을 안고 칼릭스의 옆에 설 수 없다는 내용이 담긴 짧은 유서가 루체의 품 안에서 발견됐다.
하지만 곧 루체의 죽음이 자살로 위장된 교묘한 타살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람들은 루체의 안타까운 죽음을 헤르난에게 물었다. 숨어 있던 모든 증거가 헤르난 한 사람만을 가리키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헤르난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수도 디아만테의 지하 감옥 안에서 2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고문과 심문, 폭력과 어둠만이 있는 시간이었다.
헤르난은 진짜 범인이 칼릭스에 의해 덜미를 잡힌 뒤에야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더는 갈 곳도 머물 곳도 없어진 헤르난에게 칼릭스가 찾아왔다. 자신의 영지로 헤르난을 데려간 칼릭스는 그에게 백작성의 동쪽 별관, 가장 꼭대기 층을 내어 줬다. 안에선 문을 열 수 없는 공간이었다.
「내 축복이 너를 이렇게 끔찍한 꼴로 만들어 버렸구나.」
몸을 한껏 수그리고 앉아 있는 남자를 보며 흰 사슴은 혀를 찼다.
보기 싫게 풀어 헤쳐진 긴 머리카락과 불안 속에서 짓씹힌 깨진 손톱, 온몸에 퍼져 있는 오래된 흉터, 무릎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쓸모없는 왼쪽 다리, 그 어떤 열망도 남지 않은 눈. 다음 생이 이어진다고 한들 저 남자가 도대체 뭘 할 수 있겠는가 싶었다.
지금 헤르난 말론에게 남은 건 죽은 루체에 대한 죄책감과 칼릭스를 향한 두려움, 미안함, 망가진 애정,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미움과 혐오뿐이었다.
「내가 너에게 내린 축복이 더는 축복이 아니게 됐어. 이제 이 시간의 굴레를 끊어 줘야 할까?」
그렇게 말하는 흰 사슴의 목소리가 퍽 따뜻했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고 싶게 하는 온도였다.
고개 숙인 헤르난의 시선이 자신의 왼쪽 다리로 향했다.
처음 다리를 다친 건, 네이로 후작의 기사로서 출정했던 전쟁에서였다. 하지만 더는 전장에 나가지 못하게 됐을 뿐 사는 것엔 문제가 없는 정도의 부상이었다.
다리는 새로운 삶과 죽음의 반복 속에서 서서히 망가져 갔다. 그리고 지난 삶, 칼릭스의 구둣발에 짓이겨진 후엔 완전히 쓸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헤르난이 도망치려 했다고 오해한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마, 다시 눈을 뜨면 케인 없이는 걷기 힘들 것이다.
음침하고 못생긴 절름발이.
칼릭스뿐 아니라 그 누구도, 이런 사람은 사랑하고 싶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헤르난은 루체와 칼릭스를 다시 만날 자신이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헤르난은 수도의 지하 감옥 안에서, 그리고 칼릭스를 따라간 백작성 안에서 죽은 루체를 봐 왔다.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그는 제 앞에 나타났다. 너는 살인자가 맞는다는 걸 알리려는 듯 말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항상, 칼릭스가 헤르난을 찾아왔다.
칼릭스는 그저 말없이 헤르난을 지켜봤다. 머물다 가는 시간이 짧을 때도 길 때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가끔은 술 냄새를 풍기며 헤르난에게 본인의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도 있었다. 루체와도 헤르난과도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언제나, 헤르난은 벽난로를 등진 탓에 더욱 어두워진 칼릭스의 눈 속에서 용암처럼 끓고 있는 무언가를 봤다. 분명, 미움이겠지. 차마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헤르난은 몸을 웅크려야만 했다.
스스로 만들어 낸 어둠 속에서, 헤르난은 자신이 루체를 죽인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나는 죄 없는 이를 죽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축복이 아니에요. 지옥에 떨어져 내가 저지른 죄의 대가를 받는 것뿐입니다.”
「정말?」
무언가를 가늠하듯 가늘어진 눈으로 흰 사슴은 헤르난에게 물었다.
헤르난은 자신의 죄가 가진 무게가 겁이 났다. 그래서 칼릭스의 마음 한 조각이라도 얻어 보고자 계속해 발버둥 치던 모든 일을 그만두고 싶었다.
‘네, 멈춰 주십시오.’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그 말이 나가질 않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기억의 조각들이 헤르난의 살을 할퀴기 시작한 탓이었다.
후원의 가장 구석진 곳에서 목을 매단 루체. 차갑게 식은 루체를 바라보던 칼릭스. 5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선명하게 남은 기억이 나를 잊지 말라며 심장을 쑤셔 댔다.
“이대로 죽어 버리면…… 루체의 삶도, 제가 망쳐 놓은 칼릭스의 삶도…… 비극으로 끝나 버리겠죠?”
목이 막힌 사람처럼 힘겹게 숨을 쉬며 헤르난은 흰 사슴에게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구나. 이미 너를 떠난 지 오래인 이야기인 것을.」
피딱지가 들러붙은 두 손으로 헤르난은 얼굴을 가렸다. 별안간 머릿속을, 마음속을 파고든 생각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들려.」
“…….”
「다시 시간을 돌려 그들을 만날 셈이면, 정신 차리라는 말을 해 주고 싶구나. 나 역시 이 정도면 만족하고.」
눈을 가느다랗게 뜬 흰 사슴이 긴 주둥이의 끝으로 정신 차리라는 듯 헤르난의 얼굴을 찔렀다.
그 순간,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어느 기억이 헤르난의 머릿속을 물들였다.
〈가끔은, 네가 우리 형보다 더, 아니, 걔랑은 비교도 안 되게 내 가족처럼 느껴져. 사실…… 헤르난 네가 나랑 어릴 때 헤어진 내 진짜 형이고 폰토스는 사악한 마법사가 어머니 품에 버리고 간 악마 새끼인 거지.〉
바람이 차가워지기 시작한 어느 가을 오후, 가정 교사를 따돌린 어린 칼릭스는 군말 없이 자신의 일탈에 따라 준 호위 기사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돼요.〉
〈지금 나 말고 폰토스 편드는 거야?〉
〈저야 항상 도련님 편이죠.〉
미덥지 못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칼릭스는 헤르난의 손을 끌어 제 옆에 앉혔다.
〈걔 편들지 마. 내 편만 들어.〉
〈아무렴요.〉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이렇게 내 옆에 앉아서 내 편만 들어 줘야 해.〉
〈지겨우실걸요.〉
아닌 척 제 눈치를 보는 외로운 도련님에게 헤르난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얼핏 차가워 보이는 얼굴에 퍼져 있는 미소가 다정했다.
〈지겹긴. 평생 내 옆에 있어 달라고 하려다 참은 건데. 징그럽다고 도망갈까 봐.〉
따사로운 한낮의 햇살 아래에서 그 햇살보다 더 밝은 얼굴을 하고 칼릭스는 헤르난과 시선을 맞췄다. 헤르난이 다시 볼 수 없게 된 환한 웃음과 함께였다.
왜 하필 지금 이런 기억이 자신을 찾아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길어진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헤르난은 소리 내 웃음 지었다.
「……물론, 못 할 건 없지. 고작 시간을 돌리는 거니까. 하지만 네가 새로운 삶을 감당할 수 있을까?」
흰 사슴의 무감한 목소리가 헤르난의 귓가에 닿았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헤르난은 그 침묵의 끝자락에 다다라서야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한 번만…… 더 살아 보고 싶습니다.”
헤르난의 말이 더듬더듬 이어졌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나의 친구가……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내가 망쳐 버린 사람들이…… 외롭지 않게, 돕고 싶어요.”
헤르난의 어두운 눈동자 위에 빛이 닿았다. 그 빛이 너무 밝고 따가워 헤르난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쏟아야만 했다. 메마른 남자의 얼굴을 타고, 눈물이 아래로 뚝, 뚝 떨어져 내렸다.
그런 헤르난을 흰 사슴은 가만히 내려다봤다.
「마지막, 다섯 번째 아침을 네게 선물해 주마.」
“…….”
「이번 삶은 이때까지와는 다를 거야.」
나지막한 목소리는 곧 바람으로 변해 헤르난의 긴 머리칼을 헤집었다.
「네가 마음에 들어 할지는 모르겠지만…….」
새까만 어둠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부디 이번 생에선 네가 원하는 걸 이루길 바라마.」
곧, 빛이 헤르난을 둘러싼 어둠을 집어삼켰다. 흰 사슴의 목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 * *
남부의 작은 해안 도시 스칼라는 사계절 내내 따스하다. 그 온도에 걸맞은 밝은 햇볕 역시 매일 스칼라를 포근히 끌어안았다.
따사롭지만 뜨겁지는 않은 아침 햇살이 헤르난의 눈가를 간질였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여 빛에 적응한 뒤에야 그는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지난 삶의 후유증이 남기라도 했는지, 고작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만으로 온몸이 비명을 질러 댔다.
활짝 열려 있는 발코니 창문에 시선이 닿았다. 다채로운 색을 품고 있는 빛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헤르난은 한참이나 멍하니 그의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봤다.
아름다웠다.
삶을 거듭할수록 헤르난을 둘러싼 것들은 조금씩, 혹은 확연히 변해 갔다. 하지만 긴 어둠을 지난 뒤 다시 눈을 떠 마주하는 스칼라의 아침 햇살만은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었다. 흰 사슴에게 선물받은 이 마지막 삶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너무나 익숙한, 7월 21일의 아침에 헤르난은 눈을 떴다.
오늘은 헤르난이 칼릭스가 사랑하는 루체와 부부가 된 지 1년째가 되는 날이었다.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움직여 이불을 걷은 헤르난이 자신의 다리를 봤다. 자연스레 무릎을 세운 오른쪽 다리와 달리 왼쪽 다리는 물을 잔뜩 먹은 솜처럼 침대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무릎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예상대로 다리는 완전히 망가졌다. 제 왼쪽 다리에서 시선을 뗀 헤르난이 주위를 둘러봤다. 침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케인이 세워져 있었다.
원래도 상태가 좋지 않던 왼쪽 다리는 칼릭스에 의해 발목이 완전히 짓이겨진 후로 아예 쓸모가 없어졌다. 아무래도…… 그 일이 이번 삶에까지 영향을 미친 모양이었다.
간신히 침대 밖으로 나선 헤르난이 케인을 향해 절뚝이며 걸었다.
‘가뜩이나 증오스러운 인간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절름발이이기까지 하니…… 얼마나 끔찍하게 느껴질까.’
세워져 있던 케인 중 하나를 대충 집어 든 헤르난의 어두운 갈색 눈에 그림자가 졌다.
〈다음엔, 다리 하나 못 쓰는 거로 안 끝나.〉
뼈가 부서지는 소리 위로 덧입혀지던 칼릭스의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둥그런 달을 등지고 선 남자의 얼굴에서 오직 두 눈만이 선명했었다.
지난 삶, 수도의 지하 감옥에서 풀려난 헤르난에게 칼릭스가 찾아왔다. 갈 곳이 없던 헤르난은 순순히 칼릭스를 따랐다. 그리고 쓰지 않는 건물이나 다름없는 백작성의 동쪽 별관에 갇혔다.
밖을 향해 나 있는 거라곤 크지 않은 창문과 커다란 철문뿐인 너른 공간에는 살기 위한 모든 게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삶을 위한 것 외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 기묘한 방 안에 매일 발을 들이는 건 오직 칼릭스뿐이었다.
드문드문 먹을 것과 벽난로의 장작을 넣어 주고 떠나는 하인이 있기는 했지만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모두가 역병이라도 옮을까 봐 걱정되는 사람처럼 헤르난에게서 바쁘게 도망을 쳤다.
어느 겨울밤, 헤르난을 바깥으로 인도한 건 사용인이 급히 빠져나가면서 제대로 잠그지 못한 문이었다.
방 안에 바람이 들이쳤다. 문이 열린 틈새에서 불어온 것이었다. 헤르난은 놀라 그도 모르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헤르난은 홀린 듯 문을 열고 제게 주어진 공간을 벗어났다. 잠결에 몽롱해진 정신으로, 그저 하늘이 보고 싶다는 생각만 했었던 것 같다.
헤르난은 텅 빈 1층에 다다라 아무 문이나 열고 밖으로 나섰다. 잘 관리된 아름다운 후원이 그런 헤르난을 반겨 줬다.
후원보다 더 아름다운 밤하늘을, 그 속에 보이는 크고 작은 빛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헤르난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가만히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시간이 흘렀다. 위를 향하던 헤르난의 고개가 내려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헤르난은 그 어디로도 발을 내딛지 못했다.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 칼릭스에게 팔이 붙잡혔다. 지금껏 본 적 없던 새빨간 분노가 칼릭스의 두 눈을 달구고 있었다.
‘붙잡아 둔 죄인이 죗값도 치르지 않고 도망가려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겠지.’
옛날, 헤르난에게 있어 칼릭스는 꼭 사람의 관심을 갈구하는 작은 고양이 같았었다. 가끔은 날을 세웠지만 항상 절 믿고 의지했다. 까칠한 말을 건네더라도 그 행동만은 늘 귀엽고 다정했었다.
그랬던 남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또 루체를 만나면서 조금씩 변해 갔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지나 루체를 잃으면서 또 한 번 달라졌다.
헤르난에게 루체를 빼앗긴 칼릭스는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동안 성숙해지고 단단해졌다. 너무 거칠어지고 사나워졌다는 평도 있었으나 그 거친 면모가 칼릭스의 아름다운 외모와 얽혀 특별한 매력이 됐다.
하지만 루체의 죽음 뒤, 칼릭스는 무어라 정의 내릴 수 없는 깊은 슬픔에 잠겼고 그 슬픔만큼 분노했다.
바로 그 분노가, 칼릭스로 하여금 자신을 백작성 안에 가두게 한 원인이 아닐까 헤르난은 추측했다. 가만히 뒀으면 알아서 죽었을 텐데, 죗값을 갚기도 전에 죽음으로 달아날 게 뻔한 절 가둔 것이다.
그렇지만 루체를 죽인 암살자의 고용인이 칼릭스의 아버지인 후작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후에도, 칼릭스가 제 아버지를 직접 처리한 뒤에도 헤르난은 백작성의 동쪽 별관을 나설 수 없었다.
결국, 칼릭스가 보내온 독주를 마시고 죽었지만 말이다.
헤르난은 억울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이 응당 받아야 할, 아니 죄인의 마지막으론 부족하기까지 한 죗값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헤르난의 어두운 상념을 깼다.
“부군께서 기다리십니다.”
음이 낮은 여자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헤르난의 하나뿐인 보좌관이자 남작성의 사병들을 통솔하는 훈련관이기도 한 조세핀이었다.
헤르난은 조세핀에게 곧 나가겠노라 답을 줬다. 언제나 그랬듯 그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준비를 해야 했다.
남작이란 작위도, 이 작지만 아름다운 영지도 흑마법사들이 일으킨 전쟁에서 작은 공을 세워 운 좋게 얻어 낸 것이었다.
본디 귀족과 가장 거리가 먼 존재였던 헤르난은 누군가 자신의 옷시중이며 목욕 시중을 든다는 걸 끔찍하게 생각했고, 성내의 사용인들에게 관련된 업무를 배당하지 않았다. 따로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걸 보면, 이번 삶에서 역시 크게 달라진 건 없는 모양이었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긴 헤르난이 그의 키만 한 거울 앞에 멈춰 섰다. 거울 안에 비치는 남자의 얼굴이 괜히 낯설게 느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멋대로 자라 허리까지 내려왔던 긴 머리카락은 짧게 정돈되어 있었고, 보기 싫은 얼굴은 여전히 추한 데다 음험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주 예전 디아만테의 감옥에 있을 때처럼 살이 없는 건 아니라 대충 사람처럼 보이긴 했다.
다시 살게 됐다.
거울 앞에 선 뒤에야, 그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멍하니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던 헤르난의 시선이 목에 닿았다. 아. 입 밖으로 짧은 탄식을 내뱉은 헤르난이 제 목 위에 남은 검푸른 자국을 매만져 봤다.
헤르난의 목에 깊게 새겨진 커다란 손자국은 그가 죽던 날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죽음이 자신을 찾아오기 며칠 전부터 헤르난은 정신이 흐릿했다. 타고나길 튼튼한 몸 덕에 수도의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고도 두 번의 겨울을 버텨 냈지만, 칼릭스를 따라 테미스 영지에 와서 맞이한 네 번째 겨울엔 망가져 있던 몸이며 정신이 더는 버티지 못하겠다는 듯 항복을 선언했다. 수도의 감옥과는 비교할 수 없게 좋은 환경임에도 그랬다.
그런 헤르난에게 칼릭스의 보좌관 제프란이 찾아왔다. 장례식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검은 옷을 빼입고, 제프란은 헤르난의 손에 독이 든 술이 담긴 잔을 쥐여 줬다.
〈백작님이 주는 마지막 선물입니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선물을 순순히 받아 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칼릭스가 던져 주고 갔던 두꺼운 털 모포를 자신의 구원자라도 되는 양 끌어안은 채로,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저 같은 인간이 갖기엔 너무 평화로운 죽음이었다.
정신을 잃어 가던 헤르난을 깨운 건 칼릭스였다. 정확히 말하면 뺨에 날아든 매서운 손이 헤르난을 깨웠다.
헤르난은 힘겹게 눈을 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칼릭스를 마주했다. 눈은 흐리고 귀는 먹먹해 칼릭스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또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파악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화가 잔뜩 났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몇 년 사이에 건장하게 자라난, 그러나 여전히 그림 속의 천사처럼 보이는 아름다운 남자의 손이 헤르난의 목을 틀어쥐었다.
하지만 그 커다란 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맥없이 떨어져 나갔고, 그 후 헤르난은 얼마인지 모를 시간을 앓다가 죽어 버렸다.
칼릭스가 화를 낸 이유는 몰랐다. 제대로 구경할 시간도 주질 않고 너무 빨리 죽어 버려서, 그래서 화가 난 걸까? 그런 추측만을 할 뿐이었다.
‘……내가 죽고, 축배를 들었겠지.’
지난 죽음을 떠올리던 헤르난이 거울을 등졌다.
목에 난 자국을 루체가 본다면, 이제는 자해까지 하는 거냐며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따뜻한 남부의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더라도 목을 가려 줄 옷을 입어야 했다.
‘……칼릭스를 스칼라로 불러와야 해.’
셔츠를 푸는 두 손이 잘게 떨렸다.
* * *
“오늘은 식당이 아니라 응접실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조세핀은 방을 나선 헤르난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유를 묻자 부군께서 응접실을 원하셨다는 답이 돌아왔다.
어딘가 낯설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 몇 번의 삶에서, 다시 7월 21일의 아침에 눈을 뜬 헤르난은 항상 똑같은 오전을 보냈었다. 헤르난은 언제나 침대 위에서 눈을 떴고, 아침을 먹고 있을 루체를 찾아 식당으로 향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루체는 헤르난을 그가 평소엔 찾지도 않던 응접실로 불렀다. 도대체 왜 자신을 그곳으로 부른 건지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루체를 만나면 알게 되겠지. 헤르난은 얌전히 루체의 부름에 응하기로 했다.
오늘 하루 처리해야 할 일을 상세히 알려 주는 조세핀의 똑 부러진 목소리를 들으며 헤르난은 해가 잘 드는 복도를 느릿하게 걸었다.
지금은 멸문한 가문의 남작이 세웠다는 이 오래된 고성엔 유독 창문이 많았다. 그 덕에 낮 동안에는 성 내의 어딜 가도 그림자 한 점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헤르난은 창 너머로 보이는 푸른색 바다를 어색하게 훔쳐봤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바다였다. 가끔은 지겹게 느껴졌던 바다가, 지금은 꼭 그 안에 천국의 풍경을 담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오랫동안 밖을 내다볼 수는 없었다. 이전 삶에서도 다리를 쓰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아예 못 쓰게 되니 말 그대로 걷는 게 버거워졌다. 저절로 두 다리에 온 신경이 쏠렸다.
마주치는 사용인들에게 우습게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헤르난은 멀쩡한 다리에 힘을 주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남작님.”
응접실 앞에 서 있던 집사장이 헤르난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헤르난은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중년의 남자에게 작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 소문만큼이나 어둡기 그지없는 영지의 주인과는 어울리지 않게, 작은 남작성 안에서 일하는 이들은 대개 웃음이 많고 살가웠다. 그들에게 웃으며 화답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무시하고 싶지는 않았다.
집사장이 응접실의 문을 열자 긴 복도를 걸으며 축축하게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시 떨려 오기 시작했다.
루체의 얼굴을 어떻게 마주 봐야 할지, 그에게 자신이 생각해 둔 계획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저를 믿지 않는 그를 설득할 수 있을지…… 걱정이 들었다.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이나 한겨울 밤이 아니면 켜질 일이 없는 벽난로에 헤르난의 시선이 닿았다. 벽난로 앞에 놓여 있는 큰 소파 위에 누군가 편히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긴장감에 목이 말랐다. 단단히 잠겨 있는 셔츠의 목깃을 괜히 더듬게 됐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조세핀은 부군께서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신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저기 앉아 헤르난에게 뒤통수만 보여 주고 있는 이는 루체가 아니었다. 루체가 가진 달빛 같은 은발이 아니라 밝은 백금색 머리를 가진…….
아. 저도 모르게 탄식한 헤르난이 자리에 멈춰 섰다. 조세핀이 의아해하는 눈을 하고 그런 헤르난을 바라봤다.
한 걸음, 두 걸음. 헤르난은 뒷걸음질 쳤다. 케인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응접실 안을 사납게 울렸다.
곧, 스칼라 남작의 배우자가 남편을 맞이하고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남작님과 단둘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 자리를 비켜 주겠어요?”
소파 옆에 선 남자가 집사와 조세핀에게 말했다. 어딘가 날이 선 목소리였다.
이어, 응접실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헤르난의 귀를 때렸다.
헤르난보다 키가 한 뼘 정도 작은,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는 청년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헤르난을 향해서였다.
얼어붙은 헤르난의 앞에 서서 남자는 그와 눈을 맞췄다. 입가에 묘한 웃음이 번진 채였다.
“……기억하나 봐?”
굳어 있는 헤르난에게 남자는 물었다. 이른 오후의 바다처럼 새파란 눈 속에 뜨거운 빛이 감돌고 있었다.
누군가 밤하늘에 뜬 달과 별에서 떨어진 빛의 조각을 빻아 머리칼을 물들인 것 같다고 말하던 아름다운 백금색 머리카락과 새파란 눈, 화려하지만 부담스럽지는 않은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얼굴이 헤르난의 앞에 있었다.
남자는 마주친 시선을 피하려는 헤르난의 턱을 틀어쥐었다. 헤르난이 알고 있던 어린 청년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위압감이 있었다. 손에 별다른 힘을 준 것도 아닌데, 헤르난은 덫에 걸리기라도 한 듯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남자와 눈을 맞춰야만 했다.
“기억하는 거 맞잖아.”
남자의 눈이 헤르난의 얼굴 이곳저곳을 살폈다. 세상의 고통 한 점 맛본 적 없을 것 같은 사랑스러운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매서운 시선이면서, 동시에 조심스러운 시선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손이 헤르난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잡혔던 턱에 얼얼한 고통이 감돌았다. 하지만 헤르난은 아픔을 느낄 새가 없었다. 고통보다 몇 배는 더 덩치가 큰 두려움과 당혹이, 또 단단히 뒤틀려 버린 게 분명한 7월 21일의 아침이 헤르난의 목을 조여 오고 있었다.
“이 얼굴을 다시 올려다봐야 하는 날이 올 줄이야.”
“…….”
“반가워, 스칼라 남작. 다시 태어난 걸 축하해.”
말을 마친 남자, 칼릭스 히페리온이 헤르난에게 웃어 보였다. 한때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웃음 위에 다정함이 아닌 차가움이 묻어나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헤르난은 루체를 만나 칼릭스를 이곳에 불러오겠다는 이야기를 건네려 했었다. 지금의 칼릭스는 강압적이고 잔인한 아버지와 차가운 가족들 아래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술독에나 빠져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칼릭스가 후작가가 아닌 이곳 스칼라에서 제 도움을 받아 다시, 새롭게…….
혼란이 헤르난의 머릿속에 안개처럼 뿌옇게 퍼져 나갔다. 떠오르는 모든 생각이 길게 이어지질 못하고 뚝뚝 끊겼다.
‘왜. 칼릭스가 지난 삶의 기억을 가진 채로 내 앞에 있는 걸까.’
짧게 토막 난 생각의 덩어리 사이에 서서 헤르난은 단 한 가지의 의문밖에 떠올릴 수가 없었다.
“말 좀 해 봐. 되살아난 게 기쁘지 않아? 그것도 이렇게 멀쩡한 꼴로 말이야.”
칼릭스가 말했다. 다급히 꺼내 놓은 말속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왜인지 초조해하는 기색마저 띠었다.
헤르난은 자신이 처음 7월 21일의 아침으로 돌아갔을 때를 떠올렸다. 제 죽음이 꿈이 아니라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었다는 걸 인정하는 데에 한 달가량이,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데에는 1년여가 걸렸었다.
어쩌면, 그때 자신이 겪었던 혼란을 지금의 칼릭스 역시 느끼고 있을지도 몰랐다.
“도련님이 왜 이곳에…….”
“도련님?”
칼릭스는 헤르난이 간신히 내놓은 말을 듣고는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무심코 말을 내뱉었던 헤르난 역시 당혹감을 느꼈다. 저 어린 얼굴을 보자, 자신이 예전 그의 호위 기사로 일했을 때 썼던 익숙한 호칭이 자연스럽게 나와 버렸다.
“도련님. 나쁘지 않지.”
헤르난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로 칼릭스는 말했다. 그는 헤르난이 대꾸를 하거나 말거나 쭉 말을 이었다.
“내가 왜 여기 있냐고 묻고 싶은 얼굴이네?”
제법 친절한 투였다.
“그저 술을 먹고 잠들었을 뿐인데, 눈을 떠 보니 이렇게 세상이 변해 있었어. 처음엔 내가 꿈을 꾸는 중인가 했지. 이 작고 멍청하던 시절로 돌아오는 꿈을 자주 꿨으니까. 그런데…… 날 찾아온 하녀를 붙들고 물으니 여기가 스칼라 남작의 성이라고 말하더라. 나는 그 남작의 배우자고 말이야.”
“…….”
“아쉽게도, 나는 이딴 꿈을 꿀 정도로 상상력이 좋지는 못해서. 내가 흑마법사 새끼의 개 같은 마법에 휘말려 버렸다는 걸 깨닫게 됐지.”
흑마법사? 헤르난은 칼릭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네 그 맹한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이게 꿈이 아닌 걸 더 확실히 알겠네. 어디 이상한 세상에라도 떨어진 건가? 이게 우리의 과거는 아니잖아.”
“……그런 것 같습니다.”
더듬더듬, 헤르난은 간신히 입을 열어 칼릭스에게 답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칼릭스에게 자신이 되살아날 때마다 무언가가 조금씩 혹은 확연히 달라지곤 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다시 살아난 게 놀랍지 않아? 이상하게 익숙해 보여.”
“…….”
“나보다 먼저 이곳에서 지내게 된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왜 스칼라 남작과 부부라는 이름으로 묶인 건지 알 것도 같고.”
“아니, 전…….”
“다시 살아난 김에 나한테 복수라도 하고 싶었나 봐. 그래서 날 네 남편 자리에 앉혔고. 아니, 네 애를 낳아 줄 남작 부인이 되어 줬으면 했어?”
칭찬을 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알 수 없는 뉘앙스로 칼릭스가 말했다.
헤르난이 7월 21일 아침에 눈을 뜬 게 벌써 다섯 번째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그는 갑자기 달라져 버린 상황과 관련한 이전의 기억을 곧장 떠올리지 못했다.
새로운 시간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다시 살아나면서 달라진 것들 역시 스스로 알아 가야 했다.
하지만 자신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칼릭스를 배우자로 삼게 된 건지는…… 알 것도 같았다.
칼릭스를 향한 헤르난의 감정엔 사랑과 욕망만 있는 게 아니었다. 헤르난은 칼릭스가 미웠었다. 지금은 떠올리기만 해도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유치하고 저열한 감정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칼릭스가 말한 복수라는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헤르난은 자신을 내친 칼릭스에게 복수하는 마음으로, 또 평생 미움받을지언정 그가 내 옆에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칼릭스와 부부가 됐으리라.
두 사람의 혼인엔 후작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 고작 남작이란 작위를 가진 천민 출신의 절름발이 사위가 마음에 차지는 않았겠지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루체보다는 작지만 비옥하고 아름다운 땅을 얻은 헤르난 말론이 낫다고 여겨 무능력한 막내아들을 가볍게 팔아넘겼겠지.
하지만 적어도 조금 전 다시 살아난, 지금 제 앞에 있는 칼릭스가 기억하는 자신이 벌인 일은 아니었다.
“저도…… 루체가 아니라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건지 모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도 몰라요.”
헤르난이 다급히 자신을 변명했다.
칼릭스는 말이 없었다. 그의 앞에서 무어라 입만 벙긋대던 헤르난은 결국 칼릭스의 눈을 피하는 쪽을 택했다. 칼릭스의 화를 돋우고 싶지 않았다.
“네가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은 안 해. 하지만 자신할 수도 없지. 너는 날, 내 믿음을…….”
비웃음이 섞인 짧은 말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됐어.”
칼릭스는 헤르난을 내버려 둔 채 뒤를 돌았다.
“이곳에도 루체가 있어?”
자신이 다른 세상에 떨어진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칼릭스가 루체에 관해 물었다.
“……그것 역시 모릅니다. 오늘 아침에야 이곳에서 눈을 떴으니까요.”
루체는 칼릭스가 그랬듯, 어딘가에서 제 연인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루체가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감이 오질 않았다.
헤르난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 답을 한 칼릭스가 소파에 몸을 기대앉았다. 루체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까,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져 있었다.
“아침부터 여긴 어디냐, 나는 누구냐를 묻고 다녔으니 곧 사용인들 사이에 내가 미쳤다는 소문이 나겠어. 루체에 관해 물어도 저 인간이 미쳤구나 하고 순순히 답해 줄 거야.”
칼릭스가 헤르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언제까지 거기에 서 있기만 할 거냐 타박이라도 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헤르난은 칼릭스를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아까 본 여자에게 물으면 되겠지. 네 보좌관이었던가? 이름은 기억이 안 나네. 나한테 널 내놓으라며 바락바락 소리치던 것만 생각나. 예전에 말이야.”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헤르난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칼릭스의 시선이 그가 의지하고 있는 케인이며 불편한 다리에 닿고 있는 게 느껴졌다.
“당연하지. 내가 널 내놓지 않았으니까.”
칼릭스는 헤르난을 지나 문으로 걸어갔다. 따라나서려는 헤르난에게 징그럽게 따라붙지 말라며 손을 휘저었다. 헤르난은 그저 초조해하는 낯을 하고 칼릭스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릭스는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조세핀을 이끌고 돌아왔다. 아름다운 얼굴에 어울리는 상냥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그런 칼릭스의 모습이 헤르난에겐 지금껏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남자가 아니라 먼 옛날 자신이 모시던 어린 도련님처럼 보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자연스레 헤르난의 옆에 앉은 칼릭스가 조세핀을 향해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헤르난은 차마 옆을 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는 말 그대로 어색하게 굳어 앞만 바라봤다. 긴장으로 떨리는 손을 감추려 주먹을 쥐어야 했다.
칼릭스는 조세핀과 인사며 안부 따위를 몇 마디 주고받은 뒤, 본론을 꺼내 들었다.
“복용 중인 수면약 때문인지 간혹 기억이 흐려질 때가 있습니다. 성안에서 온갖 수발을 받으며 지내는 사람에게 큰 문제가 되는 일은 아니죠. 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요.”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칼릭스는 말을 이었다.
“근래, 루체라는 뜻 모를 이름이 자꾸 떠오르더군요. 남작께 그 이름을 나눠 봤지만 다른 남자의 이름을 이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질투가 나는지 답을 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이렇게 보좌관님께 여쭤보는 수밖에요.”
말을 마친 칼릭스가 조세핀의 얼굴을 살폈다. 헤르난은 그녀가 루체의 이름을 듣고 당황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헤르난의 예상과 달리, 조세핀은 약간의 의아함을 담고 이렇게 답했다.
“제가 아는 사람 중 루체라는 이름을 가진 이는 세이어 상단의 상단주인 데미안 세이어의 막내 아드님뿐입니다. 하나, 두 분과는 안면조차 없는 분이죠.”
차가운 정적이 응접실 안에 내려앉았다.
〈이번 삶은 이때까지와는 다를 거야. 네가 마음에 들어 할지는 모르겠지만…….〉
헤르난은 문득, 흰 사슴이 제게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을 떠올렸다.
소리 없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근거도 없으면서, 저 상단주의 막내아들이란 이가 자신이 알고 있는 루체가 맞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헤르난이 한 번 더 살아가길 바란 이유는 그저 칼릭스와 칼릭스가 사랑하는 루체가 행복해지길 바라서였다. 하지만 새롭게 시작한 이번 삶에 루체는 없었다. 아니, 존재하기는 하되 칼릭스를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칼릭스가 스칼라 남작성에서 자신의 배우자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도, 지난 삶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도, 루체가 칼릭스의 옆에 없다는 것도 모두 말이 되질 않았다.
“세이어. 어쩐지 익숙한 성씨군요.”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칼릭스는 말했다.
“예술품을 다루는 상단으로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니 칼릭스 님께서도 그 이름은 들어 보셨을 것 같습니다.”
“그 사람도 상단에서 일을 하고 있나요?”
“아뇨. 지금은 동쪽 대륙에서 유학 중이신 걸로 압니다.”
유학이라. 작게 중얼거린 칼릭스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루체 세이어에 관해 더 해 줄 말은 없나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 외엔 없습니다.”
칼릭스의 물음에 답한 조세핀이 설명을 바란다는 듯 슬쩍 헤르난에게 시선을 던졌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조세핀. 혹시 그 사람을 본 적 있니?”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헤르난이 조세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조세핀의 눈동자가 의아한 빛으로 물들었다.
“네. 딱 한 번 뵌 적 있습니다. 전쟁 전에, 상단의 호위를 맡은 적이 있어서요.”
예술엔 관심이 없는 조세핀이 예술품을 거래하는 상단의 존재며 가족 이력 따위를 알고 있는 게 의아했었다. 용병으로 일할 때 얻은 정보였던 모양이었다.
“루체 세이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나는 게 있다면 그게 뭐가 됐건 말해 줬으면 좋겠어.”
“……긴 대화를 나눠 본 건 아니었지만, 친절하고 아름다운 분이셨습니다.”
조세핀의 말이 이어졌다.
“은색 머리칼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게 흔치 않은 일이니 실례임을 알면서도 그분을 오래 바라봤었죠.”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색채란 색채는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제국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든 머리 색 중 하나가 은색이었다. 그 특이한 색과 루체라는 이름, 아름답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얼굴…….
헤르난은 머릿속으로 루체의 얼굴을 그려 봤다.
달빛을 머금은 듯한 은색 머리칼과 채도가 낮은 초록색 눈. 아침 이슬을 맞은 풀꽃처럼 청초한 사람. 칼릭스와 루체, 아름다운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면 꼭 황궁의 벽에 걸린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었다.
칼릭스는 안도를 담은 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조세핀의 말을 듣고 루체의 얼굴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헤르난은 그의 안도를 이해했다.
말을 마친 조세핀은 침묵 속에서, 응접실 전체에 퍼진 미묘한 분위기며 긴장감을 재빠르게 읽어 냈다.
“원하신다면 더 조사해 보겠습니다.”
헤르난의 안색을 살피던 조세핀이 말했다.
“……고마워. 그렇게 해 줘.”
말을 마친 헤르난이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조세핀은 헤르난과 전쟁터에서 인연을 맺은 이였는데, 이름 있는 용병단 출신으로 눈치가 좋고 일 처리가 확실했다. 바로 내일이면 상단의 막내아들이라는 루체에 관한 정보를 받아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조세핀은 응접실을 나섰다.
날 선 침묵이 헤르난과 칼릭스, 두 사람만 남은 응접실에 내려앉았다. 커튼이 쳐져 있지 않은 창문 너머에서 여름 햇살이 파도처럼 밀려오는데도 목덜미가 차가웠다.
“길거리 천민 출신인 가난한 치료 마법사가 아니라, 거상의 막내아들이라.”
칼릭스의 혼잣말이 침묵 위에 기다란 선을 남겼다.
네이로 후작은 막내아들인 칼릭스와 루체의 관계를 못마땅해했었다. 루체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천한 태생인 데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루체와 칼릭스를 떼어 놓고 싶어 하던 후작의 눈에 들어온 게, 바로 헤르난이었다.
첫 번째 삶에서 헤르난은 한때 자신의 고용주였던 후작이 내민 손을 잡고 칼릭스와 루체를 갈라놓았다. 바로 그 선택이 여러 번의 삶을 거쳐 결국 루체를 죽게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곳의 루체는 태생이 천하지도 가진 게 없지도 않았다. 그 변화가 칼릭스에게 어떤 생각을 하게 만들었을지 헤르난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네 보좌관이 루체의 정보를 가지고 오면, 그때 다시 만나.”
“……알겠습니다.”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 어차피 그 다리로는 멀리 갈 수도 없겠지만.”
오랜 침묵 끝에 한마디 말을 덧붙인 칼릭스가 헤르난을 향해 몸을 숙였다. 헤르난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칼릭스의 손끝이 헤르난의 머리칼에 닿았다. 예전처럼 짧아진 머리카락을 가만히 만져 보던 칼릭스의 입가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딘가 만족스러워 보이는 그 웃음이 뜻하는 바를 헤르난은 알 길이 없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칼릭스는 가볍게 걸어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낡은 성만큼이나 오래된 응접실의 문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제야, 헤르난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침묵이 찾아왔다.
텅 빈 응접실의 소파 위에 앉아 헤르난은 창밖을 내다봤다. 새들이 우는 소리가 창틈을 비집고 들어와 헤르난의 귓가에까지 닿았다. 평화를 닮은 소리였다.
다섯 번째로 맞이하게 된 이 삶에, 루체는 헤르난과 칼릭스의 가까이에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루체의 행복은 그들과 엮이지 않아야 성립될 수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루체는 뒷골목에 버려진 어린 헤르난의 손을 잡아 줬던 애꾸눈 노숙자가 쓰레기장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
루체가 잘 걷지도 못하던 시절부터 쌓아 온 모든 기억이 이제는 오직 헤르난 한 사람만의 것이 됐다. 하지만 그 기억이라고 해 봤자 온통 고통스럽고 구질구질했던 것뿐이니 루체에겐 잘된 일이었다.
그리고 헤르난은 칼릭스를 생각했다. 루체의 연인이었던 그는 조세핀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칼릭스는 단지 술을 마시고 잠들었다 깨어났을 뿐인데 그토록 증오하고 미워하던 남자와, 드디어 죽었다며 기뻐했을 남자와 부부로 얽혀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사랑하는 사람과는 아예 모르는 사이가 됐다.
이 엉망이 된 상황은 모두 헤르난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또다시 칼릭스와 루체를 괴롭히게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상념에 잠겨 있던 헤르난이 나지막한 숨을 내뱉었다. 생각해 보면, 루체와 칼릭스가 모르는 사이라는 건 별다른 문제가 되질 않았다.
두 사람은 대공이 열었던 사냥 대회에서 처음 만나 서로에게 반했다.
무릎이 까져 칭얼대는 칼릭스를 직접 치료 마법사인 루체에게 안내해 준 건 다름 아닌 헤르난이었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바로 옆에서 그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바라봤었다. 그가 제 짝을 찾아내는 걸 봤었다.
칼릭스와 루체는 다시 사랑에 빠질 것이다.
루체가 세이어 상단의 자식이 맞는다면 그들의 결합 역시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을 터였다. 칼릭스에게 배우자가 있다는 것도 문제가 되질 않았다. 어차피 사랑 없는 결혼이 아닌가. 자신의 존재는 지난 삶에서처럼, 그들의 사랑을 더 뜨겁고 단단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떨리는 두 손이 헤르난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칼릭스를 행복하게 해 줘야 돼. 아무도 죽지 않게, 행복하게, 웃을 수 있게.”
그리고 자신은 칼릭스의,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지켜본 뒤에 그들의 인생에서 물러날 것이다.
“할 수 있어.”
헤르난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걸렸다. 따사로운 햇살이 머리를 감싸 쥔 남자의 굽은 등을 비췄다.
* * *
긴 밤. 밀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시 눈을 감은 짧은 시간 동안 헤르난은 꿈을 꿨다. 이제는 아주 멀게만 느껴지는 먼 옛날의 일이 그를 찾아왔다.
헤르난은 자신이 네이로 후작의 늦둥이 막내아들을 모셔야 하는 호위 기사가 된 날을 떠올렸다. 원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기사단에서 나이가 가장 어리다는 이유로 그 자리를 맡게 됐었다.
칼릭스는 헤르난이 살면서 보았던 모든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다. 하지만 그저 아름답다는 이유로 칼릭스에게 호감을 느끼지는 않았었다.
그가 모시게 된 도련님은 천사 같은 얼굴과 달리 성격이 악독했으니 말이다. 후작성에서 일하는 이들 모두가 뒤에서 칼릭스를 마계에서 올라온 악마 새끼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칼릭스의 심술은 자신의 새로운 호위 기사에게도 향했다. 벌써 10명이 발을 담갔다 뺀 호위 기사 자리를 11명이 발을 담갔다 뺀 호위 기사 자리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헤르난은 도련님이 그에게 심술을 부리거나 말거나 묵묵히 그를 쫓아다녔다. 헤르난은 돈을 벌어야 했다. 그에겐 루체라는 피만 섞이지 않은 가족이 있었다. 헤르난은 루체가 돈 걱정은 하지 않고 그저 열심히 마법이나 배우길 바랐다.
오직 돈만 생각하며 버티다 보니,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헤르난은 칼릭스가 치는 사고들이 가족의 관심을 받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걸 알게 됐다.
제 어머니의 죽음 속에서 탄생했다는 도련님은 아주 외로운 소년이었다. 드넓은 땅 위에 세워진 네이로 후작성에서 칼릭스는 늘 혼자였다. 그에겐 가족이 있었지만 가족이 없었고, 친구가 있었지만 친구가 없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부터 헤르난은 칼릭스에게서 더욱 시선을 뗄 수 없어졌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따돌림을 당하는 것들을 보면 가만히 있질 못하는 괜한 오지랖 때문이었다.
〈왜 나한테 잘해 줘?〉
평소 후작성 대신 수도에 있는 대저택에 머무는 네이로 후작은 아주 오랜만에 만난 아들에게 쓸모없고 멍청한 놈이라는 소리를 했었다.
바로 그날, 칼릭스는 저를 따라 후원의 유리온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헤르난에게 그리 물었다. 울음을 참느라 평소보다 더 불퉁한 얼굴을 하고 말이다.
〈돈 때문에 그래?〉
〈……기사단 월급이 많지는 않아요.〉
〈…….〉
〈나중에 후작이건 백작이건, 여하튼 대단한 사람이 되시면 저한테도 한자리 주십사 해서…… 그래서 잘해 드리는 거예요.〉
헤르난은 웃으며 칼릭스에게 말했었다.
〈내가 어떻게 작위를 물려받아, 바보야. 난 작은 광산 하나도 못 가질걸.〉
〈꼭 물려받을 필요가 있나요. 언젠가 스스로 작위를 얻으시면 되죠.〉
〈……얼굴 빼면 뭐 잘하는 거 하나 없는 멍청이가 어떻게 작위를 얻겠어. 기회도 없을 거야. 아버지는 때가 되면 날 애가 필요한 늙은 귀족한테 팔아넘기기나 할 텐데.〉
‘그래도 본인이 잘생긴 것 하난 아주 잘 알고 계시네요.’ 그런 칼릭스가 귀여워 헤르난은 속으로 웃었다.
〈언젠가 도련님이 쥔 검이, 작위를 내려 줄지도 모르죠.〉
〈왜 자꾸 검을 쥐어 보래?〉
〈한 번만 믿어 보세요.〉
〈검술 선생이 나한테 하는 소리를 너도 들었잖아.〉
‘도련님 같은 몸치는 태어나서 처음 봤다고 하셨죠.’ 속으로 말을 삼킨 헤르난은 그저 작게 미소 지었다.
헤르난은 체계적으로 검술을 배워 본 사람도 아니었고 대단한 실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칼릭스의 재능에 대해선 그 검술 선생이라는 작자에게 동의할 수 없었다.
헤르난이 보기에, 칼릭스는 참 가진 게 많은 사람이었다. 그저 자신이 가진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걸 두려워할 뿐이었다. 너무 긴 시간 냉대받고 무시당해서 그렇게 된 것이리라.
〈도련님만 괜찮으시면, 제가 레처드 선생님 몰래 검 쓰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뭐?〉
〈그분만큼 잘 가르쳐 드리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보는 눈만은 제가 더 나은 것 같거든요.〉
헤르난의 제안을 들은 칼릭스는 한동안 입을 벙긋대기만 했다. 두 눈에 의심을 한가득 담고서 말이다.
〈수업료는 됐어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언젠가 한자리 선물해 주시면 됩니다.〉
울음을 참느라 눈이 빨개진 탓에 꼭 흰 토끼처럼 보이는 칼릭스가 망설이다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나한테 잘해 줘서.〉
그 말이 뭐가 그렇게 부끄럽다고 칼릭스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헤르난에게 말했다.
〈언젠간…… 정말, 정말 좋은 선물을 해 줄게.〉
〈확실히 기억해 두겠습니다.〉
칼릭스는 헤르난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칼릭스를 따라나서며 헤르난은 웃었다. 꼭 사탕 몇 알을 한꺼번에 삼킨 사람처럼 입 안이 달게 느껴졌었다.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는, 하지만 잊고 있던 그날의 단내를 느끼며 헤르난은 잠에서 깨어났다. 옛 기억을 품은 꿈에서 밀려났다.
나쁜 새끼. 눈을 뜬 헤르난이 과거의 자신에게 속삭였다.
외로운 칼릭스를 위해 주는 척, 다정한 척은 다 하던 사람은 종내엔 칼릭스를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를 깊이를 모를 고독 속으로 밀어 버렸다.
모든 건 헤르난 말론이란 작자가 자신을 유일한 친구로, 어쩌면 형제로 생각하는 칼릭스에게 질척한 마음을, 애착을 품은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한번 깨달으니 마음을 멈추기가 힘들었다. 나이 든 남자에게 팔려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살아온 칼릭스가 그를 성애의 대상으로 보는 이들을, 특히 건장한 남자들을 끔찍이 여기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헤르난은 배신감에 몸을 떠는 칼릭스에게 매달려 곁을 허락받은 뒤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칼릭스가 그 누구도 아닌 루체와 사랑에 빠진 후엔 더욱 끔찍한 사람이 됐다.
헤르난 말론이 미웠다.
핏기 없이 하얘진 얼굴을 하고 헤르난은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했다. 부디 이번 생에서만큼은 칼릭스가 외롭지 않게 해 달라고.
* * *
남부에서 가장 높은 산인 베른산의 꼭대기에 있는 떡갈나무로 만들었다는 두 쪽짜리 문 앞에 선 헤르난이 잠을 못 자 뻑뻑해진 눈을 깜빡였다.
헤르난은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서야 했다. 하지만 그 간단한 일을 해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문 너머에 칼릭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르난은 지난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눈을 감았다 뜨면 제가 있는 곳이 테미스 백작성일까 봐, 지난 하루는 그저 어두운 방 안에서 홀로 꾼 꿈이었을까 봐 마음이 불안했다.
한때는 검을 쥐고 흉악한 마물을 베어 내던 남자가 망상에 가까운 두려움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헤르난은 스스로가 아주 우습게 느껴졌다.
어차피 백작성에서 눈을 뜨나 남작성에서 눈을 뜨나 헤르난은 칼릭스를 마주해야 했다.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지금 저 문 너머에서 헤르난을 기다리고 있는 건 백작성 동관 별채에서 마주해 왔던 칼릭스였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엔 선명한 빛이 있었다.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이 만들어 내는 빛 따위가 아니었다. 낮에는 따스한 햇볕이, 밤에는 달빛과 별빛이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빛이 헤르난의 불안을 아주 조금이나마 덜어 줬다.
헤르난은 조세핀에게 루체 세이어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칼릭스가 글을 가르쳐 주기 전까진 오랜 시간 까막눈으로 살았던 헤르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간결한 필체로 쓰인 보고서였다.
보고서를 확인한 헤르난은 곧장 이 성의 주인 방에 있을 남자를 찾았다.
지금껏 루체에게 가장 큰 방을 내어 줬던 것처럼, 조금 달라진 시간에서도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그가 써야 했던 방을 내어 줬다. 한 층을 통째로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넓은 방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본인은 그 방과 가장 거리가 먼, 본성 가장 구석진 자리에 있는 작은 방을 썼고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 나가던 헤르난이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칼릭스를 마주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은 헤르난은 노크를 하기 위해 문 위에 손을 얹었다.
“그 앞에 가만히 서서 뭘 꾸물대고 있는 거야?”
하지만 안에서 문이 열리는 게 더 빨랐다.
“루체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어색하게 손을 내린 헤르난이 저보다 키가 작은 칼릭스를 내려다봤다. 제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져 버린, 몇 번이고 반복되어 온 특정한 시간 속의 칼릭스와는 다른 어린 청년의 모습이 어쩐지 낯설었다.
뭔가 내키지 않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빤히 헤르난을 올려다보던 칼릭스가 뒤를 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걸음이 향한 곳은 작은 티 테이블이 놓여 있는 발코니였다.
칼릭스는 바깥 풍경이 훤하게 내다보이는 발코니에서 말을 나누는 걸 좋아했었다. 루체와 칼릭스가 발코니에서 다정히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얼마나 자주 지켜봐야 했었는지 모른다.
헤르난은 햇빛 아래에 선, 혹은 밤하늘 아래에 선 반짝이는 그의 연인을 향해 주제도 모르고 열등감과 패배감을 느끼곤 했었다.
차양이 만들어 준 옅은 그림자 밑에 자리하고 앉은 칼릭스에게 헤르난은 최대한 다급히 걸어갔다.
“우스워.”
헤르난을 올려다보며 칼릭스는 말했다. 차양 안까지 흘러들어 온 햇살이 칼릭스의 백금색 머리칼 위에 수줍게 내려앉아 있었다.
“네가 너보다 키도 덩치도 작은 애새끼한테 벌벌 떠는 게, 우습다고. ……불순한 눈으로 나를 보던 기사님은 어디로 갔을까.”
칼릭스가 꺼내 놓은 건, 이미 헤르난에겐 너무나 멀어진 뜨거운 감정이었다. 그 감정을 떠올리기 위해선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헤르난. 여긴 네 세상이야. 네 땅 위에서 이렇게 기가 죽으면 어떻게 해. 좋은 옷을 입고 멀끔한 척을 해도 본래 타고난 기질은 가려지지 않는 거야, 아니면…….”
“…….”
“아직도 이곳이 테미스 백작성 같아?”
차마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멍청히 서 있는 헤르난에게 칼릭스는 물었다. 어울리지 않게 다정한 목소리였다.
아주 먼 옛날이었다면 자신의 열등감을 쑤셔 오는, 제 신분이며 마음을 비꼬는 칼릭스의 말을 듣고 발끈했을지도 모른다. 얼굴을 붉히며 예민하게 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그저 고개를 저어 보이기만 했다. 칼릭스의 말에 틀린 건 없었으니까.
헤르난은 칼릭스 앞에 조세핀에게 건네받은 보고서를 내려놨다. 말 없는 헤르난을 보던 칼릭스가 다시 테이블 위로 시선을 옮겼다. 칼릭스의 손에 보고서가 쥐여졌다.
자신이 그랬듯 칼릭스 역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후에 전하면 됐다. 헤르난은 케인을 쥔 손에 힘을 줬다.
“그럼, 전 이만…….”
“어딜 가려고. 내 앞에 앉아야지.”
“…….”
“너랑 할 얘기가 많아.”
헤르난은 보지도 않은 채로 칼릭스는 말했다. 언제나처럼 헤르난은 칼릭스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칼릭스의 앞에 마주 앉은 헤르난에게로 한낮의 여름, 고지대의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다시는 느껴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스칼라의 여름 바람이었다.
“루체가 맞네.”
조세핀이 올린 보고서 속에 글자로 조각되어 있는 한 남자의 삶을 훑어본 칼릭스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예술품을 주로 거래하는 세이어 상단의 막내아들인 루체 세이어는 이름이나 대략적인 외향, 성격 따위가 모두 헤르난이 알고 있는 이와 똑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헤르난이 알고 있던 루체와는 조금 달랐다. 그는 헤르난과 함께 거리를 헤매며 고생하던 루체가 아니라 화목하고 평화로운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루체였다.
보고서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밝고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인지, 빛이 나는 사람인지가 느껴질 정도였다.
“……반년 안에 서대륙으로 돌아올 거라 하더군요.”
헤르난이 보고서의 내용을 보충했다. 조세핀에게 전해 들은 대로였다.
“후엔 상단의 후계자인 형을 도와 수도에서 화랑을 운영할 거라고 합니다.”
말을 마친 헤르난이 입을 다물었다. 때맞춰 칼릭스 역시 들고 있던 보고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헤르난의 예상대로, 칼릭스는 초조해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루체가 죽은 지 벌써 4년이 지났다. 루체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고작 반년 정도를 더 기다리는 것 따윈 일도 아닐 것이다. 비록 루체가 아무런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라도 말이다.
“디아만테에 있는 상단의 화랑에 루체의 초상화가 있다는군요. 그 초상화를 확인할 겸 상단의 고객이 될 겸…… 조만간 수도에 들러 보려 합니다.”
루체가 유학을 끝마치고 돌아온 직후 자연스럽게 그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라도 헤르난은 스칼라의 남작으로서 세이어 상단과 연을 맺어 둬야 했다.
“함께 가.”
헤르난의 말을 들은 칼릭스가 답했다.
스칼라가 자리한 남부에서 수도인 디아만테까지 가는 데에는 중간에 포털을 한 번 이용한다고 해도 꼬박 하루가 걸렸다. 칼릭스에게 괜한 고생을 시킬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혼자 가겠다고 말하려던 헤르난이 입을 다물었다. 혹시 루체의 초상화를 확인한 자신이 거짓말을 할지 모르니 감시를 해야겠다는 답을 듣게 될 것 같았다.
침묵이 바람을 따라 두 사람 사이를 헤집다가 달아났다.
“지금 이맘때의 나를 꿈에서라도 만나면, 그 얼굴에 대고 해 주고 싶은 얘기가 많았어. 그중 하나가 빨리 정신 차리라는 거였지.”
머리를 쓸어 넘긴 칼릭스가 말을 이었다.
“넌 후계자는커녕 마을 촌장이나 다름없는 작은 작위도, 광산도 뭣도 물려받지 못할 게 뻔하니 빨리 네 앞가림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하는데…… 학자를 하자니 대가리에 든 게 부족하고 성직자가 되기엔 성격이 더럽고, 장사를 하려 해도 투자금을 대줄 가족이 없고. 그나마 할 줄 아는 거라곤 검이나 좀 휘두르는 것뿐이니, 그 검이라도 잘 써 봐야 하지 않겠냐.”
헤르난과 눈을 맞춘 칼릭스가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런데 내가 바로 그 한심한 작자가 되었으니 조언을 해 줄 일은 없어졌네. 곧장 실천하면 되니까.”
“…….”
“이 땅에 흑마법사들이 존재하는 한 언젠간, 어떤 식으로든 전쟁이 일어나겠지. 마물 토벌을 해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을 테고. 그게 뭐가 됐건 난 거기서 공을 세우고 작위를 얻을 거야.”
가벼운 투로 칼릭스는 말했다.
칼릭스는 그가 입 밖으로 내뱉은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굴었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자신감을 이해했다. 바로 지난 삶, 그가 해냈던 일들에 비하면 제가 이뤘던 일은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제국의 그 누구도, 심지어 일평생 칼릭스를 삐딱한 시선으로 지켜봐 온 그의 가족들조차도 유약하던 칼릭스의 과거를 쉽게 떠올리지 못하게 됐다.
“그러려면 부지런히 살아야겠지. 저 뒤에 있는 허접한 연무장에서 네 보좌관이 사병들을 훈련시키고 있던데. 거기에도 한 번 껴 보려고. 혼자 검을 쥐고 설치는 것보단 그쪽이 더 재밌을 테니.”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칼릭스가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듣자 하니, 스칼라 남작이 그의 남편을 너무 사랑해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하고 산다던데…… 그 어여쁜 배우자가 손에 무거운 검을 쥐어도 될까요?”
조롱이 섞인 물음이었다. 아무래도 사용인들에게 부부 관계와 관련한 이야기를 전해 듣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조세핀에게 말해 두겠습니다. 함께 대련할 사병들의 수준이 대단하진 않지만…… 조세핀은 좋은 선생이니 뭐라도 배울 게 있으실 겁니다.”
“너를 상관으로 두고 매일 마주하는 사람이니 배울 거야 있겠지.”
헤르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같은 남자를 따라야 하는 조세핀의 인내심이며 너그러움은 얼마나 대단한가? 자신이 조세핀이었다면 진즉 도망쳤을 것이다. 헤르난 말론이 전장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줬었거나 말거나 말이다.
“……차라리 어두운 곳에서 볼 때가 나았어.”
조용한 헤르난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칼릭스가 중얼거렸다.
바람이 칼릭스의 머리카락을 간질이는 게 보였다. 살랑이는 바람 덕분인지 날카롭게 변하려던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다.
“루체가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 머무셨으면 좋겠습니다.”
풀어진 분위기를 틈타 헤르난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햇볕 아래의 고양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칼릭스가 말없이 헤르난과 눈을 맞췄다. 눈을 마주함과 동시에 표정이 사라진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이 안 그래도 가늠하기 어려운 속내를 완전히 감춰 버렸다.
표정을 알기 힘들다는 건 일종의 위험 신호였다. 경험에 의한 학습이었다.
“전, 칼릭스 님과 루체를 방해할 생각도 해를 가할 생각도 없습니다. 두 분이 행복하길 바랄 뿐이에요.”
헤르난은 다급히 말을 이었다. 헤르난은 그저 칼릭스가 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가까운 곳에, 가능하다면 여기 스칼라에 오래 머무르길 바랄 뿐이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어떻게든 도움을 드릴 테니까, 원하는 게 있으시다면 다 들어드릴 테니까…… 이곳에 계셔 주세요.”
“돕겠다고? 네가 나를?”
칼릭스가 물었다. 그는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즐거워 보였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오면 루체를 놓아주겠다고 했던 말, 진심이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
“지금 제 앞에 있는 게 루체였다고 해도 마찬가지예요. 편지를 써서 당신을 이곳으로 오게 했을 겁니다. 그리고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도왔을 거예요.”
말을 잇는 헤르난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떨렸다.
“이혼은 조금만 더 뒤로 미루고 이곳에 머무르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말고는 칼릭스 님을 도울 사람이 없는 거 압니다. 후작성으로 돌아가실 생각이 없으시다는 것도 알고요.”
헤르난이 칼릭스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칼릭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두려워했던 만큼 그를 미워했다.
후작은 제 부인을 잡아먹고 태어난 아이라며 칼릭스가 자라는 내내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래 놓고 칼릭스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자 한 번이라도 가문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냐며 그 사랑을 막아섰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돌아온 뒤에는 태도를 바꿔 칼릭스의, 아니, 히페리온 가문의 앞길에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하다며 루체를 죽이기까지 했다.
칼릭스는 후작성으로 돌아가기는커녕 지금 당장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싶을 것이다. 이전의 삶에서 그랬듯 말이다.
“루체에게 죄책감이 들어서 그런 거야? 아니면…….”
칼릭스는 손에 턱을 괸 채로 헤르난을 바라봤다. 헤르난은 그의 새파란 눈동자를 피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곧, 말이 이어졌다.
“아직도 나를 사랑해?”
두려운 물음이었다.
“……아닙니다.”
입을 달싹이던 헤르난은 그대로 고개를 저었다.
헤르난이 내놓은 답은 거짓이자 진실이었다. 칼릭스를 향한 마음은 그 모양이 삐뚤어져 모가 나 있었고 녹슬어 더러운 데다 남의 피가 묻어 있었다. 그 기괴하고 흉물스러운 것을 어찌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헤르난은 그렇게 생각했다.
긴 침묵이 지나갔다.
“안 그래도 난, 내 남편한테 쭉 붙어 있을 생각이었어.”
칼릭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시선을 든 헤르난과 칼릭스의 눈이 마주쳤다. 턱을 치켜든 앳된 칼릭스의 얼굴에서 익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고작 반년? 아니, 난 나한테 기회가 올 때까지 내내 너한테 붙어 있을 작정이야. 스칼라 남작의 이름이며 재산을 열심히 뽑아 먹을 생각인데,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나처럼 어리고 예쁜 걸 배우자로 삼았으면 그 정도는 감당해야지.”
헤르난은 그 말에 긍정했다.
칼릭스의 말이 맞았다. 지금 제 눈앞에 있는 남자는 이제 막 20살이 됐다. 결혼했을 땐 19살이었다는 얘기였다. 막 성인이 된 애들보다 고작 2살이 많은 나이에 결혼이라니. 지금의 헤르난이 한 선택은 아니었지만, 못 할 짓을 저지른 것만 같았다.
“이혼은 내가 예전처럼 공을 세워 내 작위를 얻어 낸 다음에. 그때 할 거야. 그때까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
저보다 한 뼘은 작은 연하의 남자를 앞에 두고 이렇게 졸아붙어 있는 절 보고도, 칼릭스는 배신하지 말라는 말을 한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믿지 못하는지가 깊이 느껴졌다.
이 뒤틀린 시간 속에 떨어진 게 칼릭스 한 사람뿐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무런 기억도 없는 자신은 칼릭스를 돕지 않았을 것이다. 온갖 수를 써 가며 칼릭스와 루체의 행복을 방해했을지도 몰랐다.
지난 삶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헤르난 말론이 칼릭스와 함께하게 돼 다행이었다. 칼릭스가 들으면 제 얼굴에 침이라도 뱉었을 생각이지만 말이다.
“……제 기억이 멀쩡해서 다행입니다.”
“…….”
“기억이 없었으면 도와드리지 못했을 테니까요.”
헤르난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네가 기억을 못 할 리 없다고 생각했어.”
확신에 찬 음성이 헤르난의 귓가에 닿았다.
팔을 뻗어 헤르난의 목깃을 잡아챈 칼릭스가 헤르난을 향해 몸을 숙여 왔다.
“내가, 이 칼릭스 히페리온이, 뒈진 널 되살리려고……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흑마법사 새끼랑 계약을 했거든. 그 등신이 모자란 탓에 이딴 일이 벌어졌지만 말이야.”
여름 바다를 닮은 파란색 눈동자가 그 안에 추레한 남자를 담았다. 헤르난은 화가 나 보이는 칼릭스의 모습에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못했다.
칼릭스가 나를 되살리려 했다.
이상한 얘기였다. 이 삶은 헤르난의 선택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칼릭스가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 정도는 그 흑마법이란 것의 여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헤르난은 칼릭스가 왜 금지된 마법까지 끌어들여 그런 기괴한 일을 벌인 건지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칼릭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단단히 목깃을 고정해 둔 핀이 풀어진 게, 혹은 떨어져 날아간 게 느껴졌다. 헤르난은 당황해 칼릭스를 바라봤다.
“내가 도망치지 말라고 했잖아.”
그렇게 말하는 칼릭스의 얼굴은 몇 번이고 수도의 지하 감옥을 찾아와 헤르난을 들여다보던 남자와 닮아 있었다.
칼릭스의 시선이 헤르난의 목에 닿았다. 벌어진 목깃 사이로 색이 조금 옅어진, 하지만 여전히 선명한 모양을 한 손자국이 보였다.
“네가 또 나만 두고…… 너무 쉽게 도망쳐 버렸는데 내가 가만히 있어야 해?”
칼릭스의 눈빛이 잠잠히 가라앉았다.
지금, 칼릭스는 헤르난 말론이 죽음으로 도망쳤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칼릭스가 바란 것이야말로 내 죽음이 아니었던가. 칼릭스는 그 죽음을 보기 위해 절 손수 백작성으로 인도하고 지켜보다가, 때가 됐다고 여겨 독주를 건넸었다. 적어도 헤르난이 아는 진실은 그것이었다.
이해가 되질 않아 헤르난은 그저 바보처럼 입만 벙긋댈 수밖에 없었다. 항변하고 싶었지만 무어라 말이 나오질 않았다.
칼릭스의 손이 헤르난의 목울대에 닿았다. 그는 과거의 자신이 남겨 둔 손자국 위에 제 손을 가만히 대어 보았다. 또래보다 늦은 성장을 맞이하기 전인 지금의 칼릭스는 완전히 가리지 못할 커다란 자국이었다.
“차가운 네 몸에서 유일하게 온도가 느껴지던 게…… 이 목이었어.”
말없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칼릭스가 중얼거렸다.
짧은 욕지거리와 함께 곧 헤르난에게서 손이 떨어져 나갔다. 목이 졸릴 거라고 생각했던 헤르난이 뒤늦게 숨을 몰아쉬었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눈을 다시 마주한 후에야 그의 마음을 추측할 수 있게 됐다. 칼릭스는 오랜 시간 고통 속에서 뒹굴어야 할 자신이 고작 4년 만에 죽어 버려서 화가 난 것이다. 보좌관을 통해 독주를 건네긴 했지만 막상 죽어 버리고 나니 너무 일찍 죽은 거 같아 후회가 된 거다.
속에 담아 둔 증오가 얼마나 크기에 금지된 흑마법까지 써 가며 죽은 날 살려 내려고 한 걸까.
“죽을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마. 살려 낼 방법은 많으니까.”
“…….”
“앞으로 잘 부탁해.”
칼릭스는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내 남편이자, 후견인.”
자신의 반려이자, 하나뿐인 사랑이며, 사형 집행인인 아름다운 남자가 헤르난에게 말했다.
미지근한 바람이 부는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