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손님 (3/21)

2. 손님

“무서워. 무서워!”

마차에 난 창문을 통해 끝없이 이어지는 포도밭을 훔쳐보던 붉은 머리의 남자가 중얼거렸다.

“포도가 무서운 건 아니지?”

마찬가지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농담을 건넸다. 삯을 받고 달리는 평범한 마차라면 감당하지 못했을 게 분명한 커다란 덩치를 가졌지만, 그와는 대조되는 앳된 얼굴을 한 남자였다.

“스칼라가 가까워지고 있는 게 무섭다고!”

붉은 머리의 남자, 니콜라가 아직은 홀쭉한 배에 두 손을 얹고는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마치 스칼라라는 이름을 제 안에 있는 아이가 듣지 못하게 하려는 듯 말이다.

“소문을 믿어?”

얼굴 하나만은 저와 닮은 사촌 형 니콜라에게 레온이 물었다.

“반만 믿어.”

“반만 믿는다는 건 도대체 뭐야?”

“말 그대로 반만 믿는다고. 소문이 너무 많아서 뭘 믿어야 할지 모르겠거든.”

한숨과 함께 니콜라는 말했다. 흠. 그 말을 들은 레온이 동조하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막 사교계에 데뷔한 어린 레온 역시 스칼라 남작과 관련한 흉측한 소문을 많이 들었다.

그 어떤 마법 약도 듣지 않는 심각한 정신병이 있는 남작이 매일 밤 칼릭스 히페리온을 잔인하게 학대한다는 이야기부터, 반대로 칼릭스를 너무 소중히 여기는 나머지 새장 같은 감옥에 가둬 두고 한 발짝도 못 나오게 한다는 이야기. 그의 마음을 거부하는 칼릭스를 노예처럼 부리고 있다는 이야기며, 두 다리가 멀쩡하고 덩치가 산만 한 남자 노예를 사 와 칼릭스와 관계를 맺게 하고는 본인은 그 두 사람을 지켜본다는 이야기까지…….

정말이지, 이해하고 싶지도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소문들이었다.

“적어도 쇠사슬이나 개 목줄이 등장하는 소문은 진짜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매일 아침 목에 목걸이 대신 개 목줄을 차고 있는 칼릭스 히페리온을 본다고 생각해 봐. 태교에 좋지 않을 거야.”

“에이, 설마. 우리 앞에서 대놓고 그런 일을 하겠어?”

“그렇지?”

“나쁜 짓은 뒤에서 하겠지. 적어도 1년 동안은.”

“그래, 대공 아버지를 둔 너와 함께니 못 볼 꼴도 최대한 덜…….”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고개를 끄덕인 니콜라가 마저 말했다.

얼굴에 드리워졌던 그림자가 거짓말처럼 사라진 니콜라를 향해 레온 역시 싱그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언제나 그렇듯 니콜라는 기분 전환이 빨랐다.

이제 막 17살이 된 어린 레온과 이제 막 2개월 차 임산부가 된 니콜라는 제국 최고의 씹을 거리인 스칼라 남작 헤르난 말론의 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스칼라 행은 니콜라의 입장에선 일종의 도피였다.

니콜라는 사랑하는 연인의 아이를 가졌다. 문제는 그 연인이 니콜라가 속한 마르스 가문의 원수인 파이안 가문의 둘째 이안 파이안이라는 것이었다. 그 둘 사이에 솔솔 피어난 사랑이며 맺어진 사랑의 결실이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건 당연했다.

더군다나 동성 간의 임신은 마법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어쩌다 사고를 친 것도 아니고 아주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그들에게 괘씸죄가 얹어졌다.

두 집안 모두 니콜라의 배 안에 있는 아이를 없애려 드는 상황에서 니콜라는 삼촌인 대공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저랑 제 애 좀 보호해 주세요. 이 간단하지만 어려운 부탁을 받은 대공은 머리가 아팠다. 대공은 사랑스러운 조카인 니콜라를 돕고 싶었지만 대놓고 그를 도와줬다간 덩치 큰 두 가문의 미움을 사게 될 터였다. 더군다나 니콜라가 사라진다면 누이는 가장 먼저 자신을 찾아와 멱살을 잡을 테고 말이다.

고민하던 대공이 떠올린 건, 한때 자신의 기사단에서 나이를 속이고 일했던 스칼라 남작 헤르난이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남작이라면, 니콜라를 보호해 달라는 부탁을 들어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오른편에 바다를 끼고 있는 스칼라는 1년 내내 날씨가 좋은 데다 바다와 호수, 들의 풍경이 모두 아름다웠다. 태교에도 좋을 게 분명했다. 보상금이야 조카의 행복을 바라는 대공의 입장에선 얼마든지 내어 줄 수 있었다.

남작을 향한 소문이 좋지 않은 게 유일한 흠이었으나, 생각해 보면 더 잘된 일이었다. 마르스건 파이안이건 자신이 니콜라를 그런 흉측한 곳에 보냈을 리 없다고 여길 것 아닌가.

대공은 스칼라 남작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얼마 되지 않아, 니콜라의 방문을 환영한다는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대공은 곧장 제 귀여운 막내아들인 레온을 불러 앞으로 1년간 사촌 형인 니콜라의 호위를 맡아 달라 부탁했다. 제 아들이라면 입을 가볍게 놀리지도 마음이 변하지도 않고 니콜라를 지킬 것이니 말이다.

아카데미에 처박히기 전에, 먼 곳으로 여행을 가 이것저것 배워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고. 물론, 대공은 아들에게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면 미스릴 광산을 하나 선물해 주겠다는 달콤한 말도 덧붙였다.

그렇게 레온과 니콜라는 니콜라의 연인이자 마법사인 이안이 추적 방지 보호막을 쳐 준 마차를 타고 남부로 향하게 됐다. 이안은 가족들을 설득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이 니콜라를 찾으려는 걸 방해하기 위해 수도에 남았다.

“아, 임신이란 게 진짜 엄청나긴 하다.”

“또 왜요?”

“……아니, 긍정이 너무 잠깐 왔다 가 버려. 이젠 남작이 날 괴롭히면 어쩌나 이런 생각도 든다니까. 나는 왜 그런 무서운 곳에 남편 없이 홀로 가야 하나 서럽기도 하고.”

슬프다기보다는 화가 잔뜩 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니콜라는 중얼거렸다.

“괴롭힐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 데 왜 형을 괴롭히겠어.”

“난 예쁘잖아! 남작은 예쁜 사람만 보면 눈이 뒤집힌댔어. 아냐…… 예쁜 데다 금발인 네가 더 위험할까? 큰일이네.”

“혹여 그분이 형을 괴롭히더라도, 형 옆엔 내가 있잖아. 호위 기사가 된 사랑스러운 사촌 동생.”

괜한 불안을 느끼는 니콜라를 달래며 레온이 말했다.

“왜 삼촌은 스칼라가 나한테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한 건지 모르겠어.”

“아버지가 그러셨어. 스칼라 남작만큼 형을 돌봐 줄 사람이 없을 거라고. 아버지 사람 잘 보시잖아. 형도 대공님 안목을 한번 믿어 봐요.”

레온이 다시 한번 니콜라를 달랬다. 저렇게 걱정을 산더미처럼 해 놓고도 막상 스칼라에 도착하면 그 누구보다 잘 지낼 게 분명했다.

“게다가, 남작은 내가 어릴 때 날 돌봐 줬던 분이잖아. 관련해서 나쁜 기억은 하나도 없었어.”

“……알았어.”

한숨을 쉰 니콜라가 다시 밖을 내다봤다. 저 언덕 아래로 파란 바다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바다를 보니까 마음이 풀리네. 기대된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나도. 레온이 니콜라의 말에 동의했다.

* * *

〈생각보다 괜찮은 곳 같아.〉

역시나. 니콜라는 남작성에 도착한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가 품고 있던 근심과 걱정의 대부분을 날려 버렸다. 마차 앞까지 마중을 나와 준 스칼라 남작과 그의 보좌관을 보고 겁을 먹었던 것도 잠시였다.

아름다운 풍경과 좋은 날씨, 친절한 하녀장과의 수다, 그림자 없는 방 안의 평온한 고요가 니콜라의 마음을 녹인 것처럼 레온도 이곳 스칼라가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아직도 그 사람을 못 본 게 마음에 걸려.〉

물론, 가장 마지막까지 사라지지 않는 불안도 있었다. 바로 칼릭스 히페리온의 존재였다.

하지만 니콜라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칼릭스는 웃는 낯을 하고 저녁 식사 자리에 등장했다. 몸이 좋지 못해 앓아누웠던 터라 이제야 모습을 보인다고 미안해하며 말이다.

남작의 배우자인 칼릭스 히페리온은 남의 외모에 큰 관심이 없는 레온조차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였다.

다만, 그가 소문처럼 슬픔에 잠긴 유약한 청년으로 보이진 않았다. 정말 남작에게 학대를 당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칼릭스의 웃음 뒤에 가려진 눈빛만큼은 저의 검술 선생인 유리아 단장만큼 위압감이 있었다.

‘소문과 달라 보이는 건…… 남작 역시 마찬가지지.’

상석에 앉아 가만히 니콜라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남자를 보며 레온은 생각했다.

수도에서 먼 남쪽 영지, 스칼라의 주인인 절름발이 남작 헤르난 말론을 두고 사람들은 남작이 그의 악행만큼이나 추악한 얼굴을 가졌다고 말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열등감이란 종기를 한가득 달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며 웃어 댔다.

레온 역시 무의식중에 남작의 얼굴을 그런 쪽으로 상상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기사단에 있던 헤르난이 자신을 돌봐 줬던 건 기억나지만 너무 어릴 때의 기억인 통에 얼굴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소문에 의지하게 되는 게 당연했다.

아. 남작과 눈이 마주친 레온이 놀라 정신을 차렸다. 아무래도 남작이 제 시선을 느낀 모양이었다.

레온은 헤르난을 향해 반사적으로 미소 지었다. 어색할 때나 민망한 상황에서, 너처럼 잘생긴 사람은 대충 미소만 지어도 용서를 받을 거란 누나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었다.

헤르난은 그런 레온을 보고 눈을 깜빡이다가는 그에게 화답하듯 작게 미소 지어 줬다. 참으로 어색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이어 남작은 다시 니콜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주 옅게나마 미소를 지었던 게 거짓말인 듯 얼굴이 다시 어두워져 있었다.

레온은 그런 헤르난을 빤히 바라봤다. 새까만 머리칼과 짙은 갈색 눈, 악인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차갑고 우울한 인상. 여러모로 따스하고 평화로운 남부의 해변이 아니라 차가운 북부의 설원을 떠올리게 만드는 남자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스칼라 남작은 미남자였다. 하지만 그에게 진득하니 달라붙어 있는 초조함과 불안 따위의 부정적인 그림자가 꽤 잘난 편에 속하는 외모를 가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작의 미천한 출신이 소문을 더욱 험악하게 만드는 건지도 모르지. 아니, 분명 그럴 거야.〉

여전히 헤르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레온은 아버지가 해 줬던 말을 떠올렸다.

부부의 일에 입을 댈 건 아니지만 예상과 너무 다른 두 남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소문의 진실이 뭘지 조금은 궁금해졌다. 뭐가 됐건, 칼릭스 히페리온이 그의 남편을 싫어한다는 것만은 확실할 테지만 말이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 것처럼 보이십니다. 뭐든 편히 말해 주세요.”

헤르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레온을 향했다. 남작뿐 아니라 칼릭스와 니콜라까지 레온을 보고 있었다. 실례를 범하려던 건 아닌데, 아무래도 남작의 얼굴을 너무 빤히 본 모양이었다. 괜한 민망함에 뺨이 달아올랐다.

“그게, 남작님을 뵈니 어릴 때 생각이 나서요.”

남의 시선을 어려워하는 것 같은 헤르난을 향해 최대한 순하게 웃어 보인 레온이 말을 이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무에 오를 땐 언제고, 막상 내려갈 때가 되니 겁이 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절 도와주셨었죠. 품에 안겨서 정말 큰 소리로 울었었는데. 남작님을 뵙고 나니 흐릿했던 기억이 점점 깨끗하게 변하는 것 같아요.”

“……저도 기억납니다. 어릴 때도 키가 크셨죠.”

기억을 더듬어 보던 헤르난이 다시 입을 열었다. 긴장한 것처럼 보이던 헤르난의 얼굴이 조금, 정말 아주 조금 편해진 듯 보였다.

“그래 봤자 남작님의 허리를 조금 넘는 정도였었죠.”

“이제는 제가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멋지게 자라셨네요.”

마치 어린아이에게 칭찬을 건네듯 헤르난은 자상하게 말했다.

기분이 묘했다. 남작이 덩치가 집채만 한 자신을 아이 보듯 보는 것도, 보통의 어른들보다 더 크게 느껴졌던 그가 지금은 자신보다 작은 데다 어쩐지 약해 보이기까지 하다는 것도 그랬다.

“더는 나무에서 내려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헤르난이 말 한마디를 더했다. 역시나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말투였다. 이상하게 쑥스러운 기분에 레온은 커다란 손으로 괜스레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혹시 높은 곳에서 내려올 일이 있으시면 그땐 제가 남작님을 도와드리겠습니다. 편히 부리세요.”

헤르난과 눈을 맞추며 레온은 말했다.

그런 레온의 옆에 앉아 있던 니콜라가 소리 내 웃어 보이더니 쓰고 싶은 대로 편히 쓰시라며 그 대신 생색을 내기 시작했다. 저택에 도착한 직후, 남작의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던 자신을 완전히 잊은 듯 보였다.

하지만 부드럽던 분위기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말없이 대화를 지켜보던 칼릭스가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친근하게 구시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칼릭스가 레온을 향해 웃음 지었다.

“네?”

“곤혹스러운 일을 당하기라도 하실까 걱정이 돼서요.”

예쁜 얼굴 위에 떠오른 보기 좋은 웃음이나 가벼운 말투가 얼핏 칼릭스의 말을 농담처럼 느껴지게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말이 아주 심각한 경고처럼 들리기도 했다. 칼릭스의 두 눈이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아서였다.

니콜라가 슬쩍 헤르난의 눈치를 봤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말에 곤란함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본인이 화가 나거나 창피해서가 아니라 저 말을 들은 레온의 기분이 상했을까 걱정하는 듯했다.

칼릭스의 시선은 여전히 레온에게 향한 채였다. 저 눈은 자신의 악당 같은 남편이 혹 피해자를 한 명 더 늘릴까 걱정하는 사람이라기보단…….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레온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됐다.

“……대공께, 니콜라 님의 태교에 좋은 것들을 자주 보여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당황한 어린 청년을 보던 헤르난이 말을 돌렸다. 말을 돌리는 일에 큰 재능이 없어 보이는 남작을 도와 니콜라가 대공에 관한 농담을 더하지 않았다면 분위기가 더 어색해질 뻔했다.

대화가 이어졌다.

“스칼라에는 아름다운 명소가 많으니 바깥바람을 쐬고 싶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되도록 사람이 없는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남작께서도 함께 가시나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역시나,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남작을 만나기 무섭다며 울상을 짓던 니콜라가 헤르난에게 되물었다. 쏘아보는 칼릭스의 눈빛에 살짝 마음이 위축되었던 레온도 다시 헤르난에게 시선을 돌렸다.

헤르난은 당황한 듯 말을 아꼈다. 수도에서 온 손님들이 사람과 부대끼는 걸 좋아하는 부류의 인간들인지 몰랐던 모양이다.

“아뇨. 저는 두 분의 여행에 짐만 될 겁니다.”

헤르난이 짧지만 부드러운 거절의 말을 내놨다.

“그래도…… 여럿이 함께 가는 게 더 즐거우니까요.”

니콜라에 이어 레온도 말을 더했다.

칼릭스가 식사 자리 한가운데에 내던진 날 선 말이 아예 신경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곤혹스러운 일이라니. 단지 밝은 금색 머리카락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칼릭스처럼 아름다운 이와 자신을 같은 선상에 두기엔 무리가 있었다. 남작 역시 절 그저 어린애 보듯 보는 것 같았고 말이다.

똑 닮은 얼굴로 싱글벙글 웃고 있는 레온과 니콜라를 향해 있던 헤르난의 시선이 칼릭스에게 닿았다. 칼릭스는 그런 헤르난을 향해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헤르난은 그제야 니콜라에게 알겠노라며 그가 바라던 답을 건네줬다.

칼릭스는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헤르난과 니콜라를 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입을 열었다.

“저 또한 그 소풍에 함께했으면 싶은데, 초대해 주시겠어요?”

“그, 그럼요.”

평소 당황하는 일이 거의 없는 니콜라가 칼릭스의 물음에 조금 버벅대며 답을 했다. 칼릭스의 아름다운 얼굴을 신기하다는 듯 열심히 훔쳐보던 게 찔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답을 받아 낸 칼릭스의 시선이 레온에게로 돌아갔다.

“아까는 말 그대로 농담을 한 것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칼릭스는 짐짓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 다정함에서 레온은 위화감을 느꼈다. 아까 전부터 이어져 온, 무어라 설명하지 못할 위화감이었다.

‘이곳에서 계속 시간을 보내다 보면 알 수 있으려나…….’

속으로 생각한 레온이 그저 멋쩍게 웃어 보였다.

* * *

피곤하다.

소파에 등을 기대어 앉으며 헤르난이 생각했다. 7월 21일에 눈을 뜨고, 이제 고작 일주일이 지났다. 하지만 고작 그 일주일 사이에 감당하기 힘든 일만 연달아 일어나고 있었다.

스칼라에 1년에 가까운 긴 시간을 머무를 손님들이 온다는 사실을 바로 엊그제 조세핀의 보고를 들은 후에야 알게 됐다. 갑작스러운 손님들의 방문 역시 칼릭스가 제 배우자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껏 거쳐 온 삶에선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야 할 손님들이, 그것도 임산부가 남작성을 찾은 건 꽤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혼자만의 사랑에 취해 다른 이의 삶을 파괴한 사람 근처에 소중한 조카를 두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공은 아이를 가진 조카와 자신의 아들을 함께 묶어 스칼라로 보냈다.

〈내가 아는 자네라면 우리 식구들을 잘 보살펴 주겠지.〉

편지의 말미에 쓰여 있던 대공의 말을 떠올리며 헤르난은 한숨을 쉬었다.

헤르난 말론이란 사람이 대공의 기억 속에 어떻게 남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먼 기억 속에서 대공에게 좋은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해 묵묵히 일만 한 게 다였다.

헤르난은 고작 1년 정도 대공의 기사단에서 일을 했었다. 눈에 띌 만한 일을 한 건 아니었다. 나이에 비해 얼굴이 앳되다는 이유로-일자리를 얻기 위해 나이를 속였으니까-대공의 막내아들을 호위하는 일 정도만이 떨어졌다.

마법에 재능을 보이는 루체와 함께 학비가 저렴한 작은 마법 학교가 있는 네이로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수도를 떠난 후에는 그들을 완전히 잊게 됐다.

전쟁이 끝나고 참석한 연회에서 스치듯 인사를 나눈 적이 있지만, 그게 다였다. 그마저도 이 세상에선 이미 1년도 더 전의 일이었을 테고 말이다.

……7월 21일에 눈을 뜬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 가만히 앉아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굴려 보던 헤르난이 고개를 저었다.

손님들은 이미 스칼라에 도착했다. 헤르난의 기억에는 없을지언정, 그는 이미 대공에게 보상을 약속받고 남작성에 손님들을 모시기로 했다. ‘왜’라는 생각은 접고 남은 1년간 그들을 잘 대접할 생각만 해야 했다.

칼릭스가 대공의 가족인 레온이나 니콜라와 이렇게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어찌 보면 무척 잘된 일이었다. 그들과 가까워진다면, 훗날 칼릭스가 새로운 작위를 얻어 네이로 후작에게서 독립할 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이가 가까워지는 일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말이다.

〈저 애새끼의 보모 역할도 했었나 봐? 내 호위 기사가 경력직인 걸 몰라봤었군.〉

손님들이 떠난 식당에서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말했었다. 뭔가에 기분이 상한 건 분명한데 그 이유를 집어내기 힘들어 헤르난은 칼릭스의 앞에서 쩔쩔맸었다.

그래도 수도의 지하 감옥이나 백작성의 어두운 방 안에서 그를 마주할 때에 비하면 지금이 훨씬 나았다. 그땐 칼릭스의 표정이며 분위기를 읽기가 지금보다 몇 배는 더 힘들었다.

아무래도, 거의 10년 전의 어린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 칼릭스에게 영향을 준 게 아닌가 싶었다. 청소년기 못지않게 감정의 제어가 힘들었던 시기니 말이다.

그러나 오늘 칼릭스가 날 선 태도를 보인 것과는 별개로, 헤르난은 그가 손님들과 좋은 관계를 맺게 되리라 믿었다.

혹여 행선지를 들킬까 포털을 이용하는 대신 저 먼 수도에서부터 마차만을 타고 달려온 손님들은 밝고 구김이 없었다. 오랜 시간 사랑받고 자란 사람들 특유의 시끌벅적한 친화력과 살가움 역시 밉지 않았다. 귀족들 특유의 오만함도 보이지 않았다.

헤르난은 칼릭스가 내심 그런 사람들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분명, 대공의 손님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칼릭스도 예전의 밝은 모습을 되찾게 될 것이다. 자신만 칼릭스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그의 화를 돋우지 않게 조심히 뒤로 물러서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으면 됐다.

환하게 웃는 칼릭스를 멀리서나마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머릿속을 맴돌던 걱정이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활짝 열린 발코니 창문 틈 사이로 밤바다가 움직이는 소리가 밀려들어 왔다.

헤르난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근래 잠을 제대로 자지 않은 걸 타박받듯 자꾸만 졸음이 몰려왔다. 어두워져 가는 세상 속에서, 헤르난은 아주 먼 옛날의 칼릭스를 꿈처럼 떠올렸다.

〈헤르난!〉

아무것도 아닌 남자의 이름을 외치며, 칼릭스는 이 세상의 빛을 모조리 끌어안은 사람처럼 밝게 웃었었다.

* * *

집무실의 흑갈색 원목 책상 위에 편지를 올려 둔 채 헤르난은 깊은 고민에 잠겼다. 1시간 전, 조세핀에게 편지를 전해 받은 뒤부터 내도록 이어진 고민이었다.

시들지 않게 마법을 걸어 둔 붉은 장미 한 송이와 함께 도착한 편지의 발신인은 스칼라에서 멀지 않은 테리아의 주인인 백작 칼린 도프였다.

테리아 백작은 헤르난이 거쳐 온 모든 삶을 통틀어 그에게 호감을 보인 유일한 귀족이었다. 하지만 보좌관을 통한 게 아닌, 그녀의 자필 편지를 받아 보는 것은 이번 삶이 처음이었다. 심지어 헤르난이 아닌 다른 이가 먼저 편지를 확인하지 못하게끔 따로 봉인을 걸어 두기까지 했다.

문제는 칼린이 이중 언어를 사용한다는 거였다. 화려하기로 유명한 필체는 덤이었다.

먼 옛날 칼릭스의 도움으로 글을 배워 까막눈 신세에서 벗어난 이후, 헤르난은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계속해 읽고 쓰는 연습을 해 왔다. 어느 순간부턴 비비 꼬아 쓴 어지러운 필체도 느리게나마 읽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가끔은 도무지 읽을 수 없는 글자를 마주하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기도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칼린 도프가 편지를 쓰는 데 사용한 멸망한 옛 왕국의 고어였다.

아주 오랜 시간을 제국의 기득권층으로 살아온 이들이 이따금씩 사용하는 옛 언어는 주로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은밀한 이야기를 꼼꼼히 포장해 주는 역할을 했다. 명망 있는 남부 귀족이자 수많은 논쟁의 가운데에 선 난봉꾼인 백작이 쓰기에 딱 맞는 언어였다.

바로 그 비밀스러운 포장이, 헤르난으로 하여금 칼린 도프의 편지를 읽을 수 없게 만들었다. 보좌관이 읽지 못하게 마법을 써 편지를 봉하기까지 한 그녀의 정성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내용을 숨긴 걸까.’

아마, 반가움을 느낄 만한 내용은 아닐 것이다.

칼린 도프와 그녀의 남편은 이상한 밤 취미가 있는 걸로 유명했는데, 그 취미를 숨기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녀의 편지 속에 담긴 내용이 자기네의 아름다운 노예를 빌려줄 테니 너도 우리에게 칼릭스 히페리온을 빌려주지 않겠느냐와 같은 되먹지도 않은 소리일 확률도 있었다.

그런 경우를 생각하면 굳이 편지를 확인하지 않는 편이, 엮이지 않는 쪽이 좋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아예 무시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스칼라의 포도 농사가 어려워졌을 때 큰 도움을 줬던 게 다름 아닌 칼린 도프였으니 말이다.

“……큰일이네.”

침울한 얼굴을 하고 헤르난은 편지를 내려다봤다.

남작성에 있는 이들 중, 백작의 편지를 읽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칼릭스와 대공의 손님들뿐이었다. 하지만 니콜라와 레온에게는 편지의 해독을 부탁할 수 없었다. 백작의 편지 안엔 칼릭스와 관련한 이야기가 담겨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 내용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헤르난은 먼저 조세핀을 찾아보기로 했다.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조세핀이라면 귀족들의 수수께끼 같은 언어를 알지도 몰랐다.

자리에서 일어난 헤르난이 꽃향기가 묻어 있는 편지를 품에 넣고 집무실을 나섰다. 바쁜 조세핀을 직접 만나기 위해서였다. 목적지는 후원 외곽에 있는 작은 연무장이었다.

조세핀은 평일 오전 시간의 대부분을 작은 연무장에서 사병들을 훈련시키는 일에 쓰곤 했다.

제국의 남작은 그 아래에 기사단은 둘 수 없지만 40명 이하의 사병은 둘 수 있었다. 영지며 성을 지키고 관리하기 위한 최소한의 인원이었다. 그런 사병들의 훈련을 맡은 게 조세핀이었다. 가끔은 헤르난이 그 일을 맡기도 했다.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저 멀리에서부터 들려왔다. 대충 바닥에 앉아 있는 걸 보니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조세핀 역시 그들의 옆에서 크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헤르난의 걸음을 멈추게 한 건 조세핀도 사병들도 아니었다. 연무장 근처, 구석에 놓인 무기 거치대 앞에 선 칼릭스가 헤르난의 시선을 붙들었다.

한 손에 활을 든 칼릭스가 다른 한 손으로 화살을 고르고 있었다. 화살촉을 살피는 걸 보니 가장 날카로운 걸 찾는 모양이었다.

헤르난은 넋을 놓고 그런 칼릭스를 봤다. 칼릭스가 검을 든 모습이야 무수히 많이 봐 왔지만, 활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검 한 자루도 버거워하곤 했던 시절과 가까운 모습으로 말이다.

“구경할 거면 오고, 생각 없으면 가.”

칼릭스의 목소리가 헤르난의 정신을 들게 했다.

“……활을 쥐신 건 처음 봅니다.”

망설이던 헤르난이 주춤주춤 칼릭스에게로 향했다. 일단 마주쳤으니 무슨 말이건 해야 할 것 같았다.

칼릭스는 말을 건네는 자신을 반기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시하고 가 버리는 것도 기분 나빠 할 거다. 그러니 딱 몇 마디. 의미 없는 말만 나누다 칼릭스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는 게 가장 좋은 답일 듯했다.

이내 마음에 드는 화살을 골라 낸 칼릭스가 헤르난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배웠지. 전장에선 모든 무기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며. 네가 알려 줬잖아.”

무감한 얼굴로 칼릭스는 말했다. 다행히 저와 마주하고 있는 게 기분 나쁘진 않은 모양이었다.

칼릭스는 헤르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활에 화살을 걸었다. 그 손에 들린 투박한 나무 활이 꼭 황실 대장장이가 만들어 낸 작품처럼 보였다.

“바보 같은 얼굴 하고는.”

가볍게 혀를 찬 칼릭스가 활 사위를 당겼다.

헤르난은 순간 칼릭스가 자신을 겨냥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활은 헤르난의 머리가 아닌 하늘로 쏘아 올려졌다.

“벌레 새끼 한 마리가 날아들었어.”

칼릭스가 속삭이듯 말했다. 이어 새가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가, 화살촉이 새의 날갯죽지에 틀어박히는 소리가 후원을 울렸다.

헤르난이 급히 뒤를 돌았다. 화살을 맞은 파랑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헤르난의 시선을 느낀 파랑새가 애처로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마치 헤르난을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칼릭스가 심심풀이로 새를 죽일 사람은 아니다. 그가 별안간 새에게 활을 겨눈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헤르난은 일단 파랑새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만 헤르난이 파랑새를 돕는 것보다 칼릭스가 파랑새를 낚아채 손에 쥐는 게 먼저였다. 피이, 피. 칼릭스의 손에 갇힌 새의 애처로운 울음소리는 점점 커져, 곧 연무장 너머로까지 퍼져 나갔다.

“내가 너 같은 마법사 놈들한테 아주 민감하거든. 당한 게 많아서.”

칼릭스의 손이 새의 아직 멀쩡한 날개에 닿았다.

“나머지 것도 뜯어 버리기 전에 빨리 본모습으로 돌아와.”

그렇게 말하는 칼릭스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저, 아무래도 기절할 것 같으니 일단…….”

바르르 떨고 있는 새와 칼릭스를 번갈아 보던 헤르난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칼릭스에게 붙잡힌 파랑새는 위험한 존재라기엔 너무 심약해 보였다.

“일단? 널 죽이려고 온 거면 어쩌려고 그런 소릴 해?”

그리고 예상대로 칼릭스는 헤르난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칼릭스가 파랑새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줬다. 그와 동시에 펑, 하고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후원을 울렸다. 파랑새가 내뿜은 보라색 연기가 사방으로 퍼지기 전에 헤르난은 반사적으로 칼릭스를 붙잡아 품 안에 숨겼다.

“이런 미친…….”

얼결에 헤르난의 품에 갇힌 칼릭스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나가 버렸다. 하지만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는 칼릭스의 목소리를 듣고도 헤르난은 포옹을 풀 수 없었다.

맞닿았던 두 사람의 몸이 떨어진 건, 연기가 바람과 함께 사라진 후였다.

포옹을 푼 뒤, 헤르난은 가장 먼저 칼릭스를 살폈다. 다행히 파랑새를 쥐고 있던 손도, 연기가 닿은 얼굴도 다친 곳 없이 멀쩡했다. 다행이었다.

괜찮냐 물으려던 말을 간신히 목 뒤로 삼킨 헤르난이 슬쩍 뒤로 물러섰다. 불편한 다리를 지탱해 주던 케인이 바닥을 구르고 있는 걸 보니, 정말 다짜고짜 칼릭스를 끌어안은 게 맞구나 싶어 그에게 조금 민망하고 미안해졌다.

“저는, 저는 암살자가 아닙니다!”

헤르난의 바로 뒤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랑새의 울음소리처럼 어딘가 애처로운 음성이었다.

“비켜.”

손에 쥐고 있던 활대를 내던진 칼릭스가 헤르난을 밀치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남자에게로 갔다. 소란을 느끼고 달려온 조세핀과 사병들도 남자를 둘러쌌다.

“암살자가 아니면, 뭔데.”

칼릭스가 화살이 박혀 있는 남자의 팔을 부여잡으며 물었다. 남자의 입에서 소리 없는 비명이 흘러나왔다.

“아뇨, 그게요, 전, 전, 그저 제 연인을 보러 왔을 뿐인데요…….”

남자는 울먹이며 말을 마쳤다. 그리고 칼릭스 너머로 보이는 헤르난에게 도와달라는 듯 간절한 시선을 던졌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케인을 주워 든 헤르난이 두 남자에게 향했다.

“그럼, 혹시…….”

“네, 네. 그 혹시가 혹시가 맞아요. 전 이안 파이안입니다. 니콜라의 연인이요.”

칼릭스의 손을 떼어 내려고 노력하며 남자는 말했다.

“치료사를 부르는 게 좋겠습니다.”

머뭇대던 헤르난의 손이 이안을 붙들고 있는 칼릭스의 손등 위에 닿았다. 조심스럽게, 헤르난은 칼릭스의 손을 잡아 이안에게서 떼어 냈다. 누군가에겐 별것 아닌 일일지 몰라도 헤르난에겐 꽤 큰 용기를 내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칼릭스의 시선이 헤르난에게 닿았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매가 매서웠다. 하지만 다행히, 칼릭스는 더 이상 화를 내지도 버티지도 않고 이안에게서 손을 물렸다.

맞닿은 살의 감촉에 칼릭스가 불쾌함을 느끼기 전에 헤르난은 재빨리 그에게서 손을 뗐다.

“이 성의 주인이십니까?”

이안이 훌쩍이며 물었다. 마법이 풀리며 만들어진 연기가 완전히 걷힌 뒤 햇볕 아래에서 다시 마주한 남자의 얼굴이 니콜라보다도 앳되어 보였다.

“변신 마법을 쓰신 걸 보고 제 배우자가 오해를 한 것 같습니다. 죄송하다는 말밖엔…… 드릴 말씀이 없군요.”

헤르난이 혼자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이안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쥐새끼처럼 남의 영토에 숨어들어선, 하늘을 빙빙 돌아 대는 마법사를 보고 오해 안 할 사람이 어디 있어? 머리통을 날리지 않은 걸 감사히 여겨야지.”

이안이 헤르난이 내민 손을 붙잡기 전에 칼릭스가 먼저 그의 목깃을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끌어 올렸다. 그 힘에 이끌려 이안은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 그렇게 안 보이시는데…… 힘이 아주 좋으시네요.”

이안이 서러움을 담아 또다시 울먹였다.

조세핀에게 치료사를 대기시켜 달라 부탁한 헤르난이 주위를 둘러봤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니콜라는 오전엔 후원을 산책할 생각이라며 자신의 계획을 늘어놨었다.

어쩌면 니콜라와 이안이 마주치게 될지도 몰랐다. 헤르난은 아이를 가진 니콜라에게 피를 흘리며 울먹이고 있는 연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제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부축? 지팡이 없인 혼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게 부축은 무슨 부축.”

“아, 아뇨. 괘, 괜찮습니다. 저 혼자 걸을래요. 그럴 수 있어요!”

다짜고짜 자신의 팔을 어깨에 얹으려 하는 칼릭스를 피해 헤르난에게로 도망쳐 온 이안이 말했다. 소문 속의 가련한 칼릭스 히페리온과 닮은 거라곤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 예쁜 얼굴밖에 없는 저 남자가 이안은 무서웠다.

결국, 이안을 부축하게 된 건 조세핀의 옆에 있던 사병이었다.

일이 벌어진 연무장에서부터 본성 1층에 있는 치료 마법사의 방까지 거리가 멀지 않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채 열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이안이 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발목을 붙잡은 건, 연인의 목소리였다.

“이안!”

저 멀리서 놀란 얼굴을 한 니콜라가 외쳤다. 후원을 산책하던 니콜라와 그의 옆을 지키던 레온이 다급히 소동의 주인공에게로 다가왔다.

“니, 니, 니콜라.”

연인을 마주하자 이안이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을 빠르게 닦아 냈다.

“이게 무슨 일이야?”

화살이 박힌 이안의 팔을 보며 니콜라가 얼굴을 굳혔다.

“그게…… 내가 새로 변해서 널 찾다가…….”

“제 부주의 때문에 다치셨어요.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안의 말을 부드럽게 끊어 낸 칼릭스가 정말 미안하다는 얼굴을 하고 니콜라와 시선을 맞췄다.

자신에게 말을 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칼릭스의 말투에 이안은 당혹감을 느꼈다. 그러나 차마 무어라 말은 못 하고 입을 벌렸다 다물기만을 반복했다.

“……야! 내가 새로 변하는 짓 좀 그만하랬지! 그러다가 화살이라도 맞으면 어쩔 거냐고 했잖아!”

얼굴이 붉어진 니콜라가 손바닥으로 이안의 등짝을 내려쳤다. 이안의 억울한 목소리가 파묻힐 정도로 큰 파열음이 들렸다.

손을 갈무리한 니콜라가 멋쩍은 웃음과 함께 헤르난과 칼릭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속으로 말을 고르던 니콜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가 내놓은 건 남작 부부에게 전하는 사과의 말이었다.

“죄송해요. 이 친구가 절 몰래 보러 온답시고 새로 변했던 모양이에요. 이안이 정문을 거치지 않고 찾아올 수도 있다고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아뇨, 다짜고짜 활을 쏜 제가 더 죄송하죠.”

칼릭스는 시선을 슬쩍 이안에게로 돌리며 답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후에 나누고…… 일단 이안 님을 치료실로 안내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켜보던 헤르난이 니콜라에게 말했다. 칼릭스가 임산부를 놀라게 할 만한 일을 벌이지 않고 먼저 사과를 해 다행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겁에 질려 있던 이안은 연인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풀렸는지 니콜라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아파 죽겠다며 칭얼대는 이안의 등을 니콜라가 한 번 더 후려친 후에야 사람들의 걸음이 치료실로 옮겨 갔다.

무사히 팔에서 화살을 제거한 이안은 니콜라의 손을 꽉 붙잡고 동관에 마련된 손님방으로 돌아갔다. 혹시 모를 돌발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레온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헤르난은 복도를 걸어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제법 따끔한 치료를 받는 내내 서로의 귓가에 사랑의 말을 속삭이던, 또 서로를 향해 웃음 짓고 입을 맞추던 어린 연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유별날 정도로 엄숙한 가풍을 가진 것으로 이름난 두 가문에 소속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밝고 사랑스러운 이들이었다. 그러니 사이 나쁜 부모들의 눈을 피해 저렇게 사랑에 빠졌겠지.

“별…… 가지가지 하네.”

걸으면서도 끝없이 서로의 눈가며 뺨에 입을 맞추는 니콜라와 이안을 보며 칼릭스가 중얼거렸다. 짧은 욕지거리와 함께였다.

칼릭스는 확실히, 어릴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입버릇이 나빠졌다. 전장에서 도대체 어떤 사람들과 어울렸기에…… 저렇게 됐을까.

루체는 입이 거친 남자를 싫어할 텐데. 헤르난은 주제넘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모시는 도련님의 말버릇에 조금쯤 참견할 수 있던 친밀한 호위 기사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니콜라와 이안을 보고 욕을 내뱉기엔, 칼릭스 역시 항상 루체에게 가까이 가고 싶어 안달을 내지 않았던가. 연인도 아닌 일개 호위 기사에게도 자주 몸을 붙여 왔던 도련님다웠었다.

루체의 앞에 다시 서게 되면, 자기가 저런 말을 했던 것도 잊겠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 헤르난이 작게 미소 지었다.

“뭘 웃어?”

못 볼 걸 봤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칼릭스가 물었다.

“아뇨. 그냥…… 제가 보기엔 귀여워서요.”

황급히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운 헤르난이 답을 내놨다. 그 답을 들은 칼릭스의 예쁜 얼굴이 사정없이 찌그러진 걸 보아, 괜찮은 답은 아닌 모양이었다.

“귀여워?”

“……서로 좋아하는 게 눈에 보이니까요.”

곤혹스러움을 느끼며 헤르난은 말했다.

칼릭스는 그런 헤르난에게 무언가 대꾸를 하려다가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헤르난은 칼릭스를 가만히 바라봤다. 자신에게 날아들 뜻 모를 날 선 말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편지.”

하지만 칼릭스는 지금까지의 이야기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말을 헤르난의 발치에 던졌다.

“네?”

헤르난은 바보처럼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쯤 말귀를 잘 알아들으려나 몰라, 하고 가볍게 중얼거린 칼릭스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칼린 도프에게서 온 편지였다.

“이거 뭐야?”

칼릭스가 물었다.

헤르난은 공연히 자신의 가슴팍을 만져 봤다. 안주머니에 넣어 뒀던 편지가 사라진 상태였다. 아무래도 칼릭스를 보호하겠답시고 나서는 중에 떨어뜨렸던 모양이었다.

“중요한 거면 잘 챙겼어야지.”

헤르난에게 편지를 내밀며 칼릭스는 말했다.

칼릭스에게 급히 감사의 인사를 전한 헤르난이 곧장 편지를 받아 들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이 닿기 직전, 칼릭스가 편지를 뒤로 물렸다.

“무슨 내용일까 궁금하네.”

“…….”

“왜 놀라? 나는 보면 안 되는 비밀이라도 적혀 있어? 봉인이 잘린 걸 보니 이미 읽은 모양인데.”

헤르난은 당황스러웠다. 저 편지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헤르난은 알지 못했다. 문제는 칼릭스와 관련한 이야기가 저 편지 안에 적혀 있을 확률이 낮지 않다는 데 있었다.

외설스럽고 치욕적인 내용이 쓰여 있으면 어쩌지. 나 때문에 칼릭스가 그런 취급을 당하고, 그걸 본인이 알게 된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했다.

“……확인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네가 직접 내용을 알려 주면 되겠네.”

“…….”

“뭔데?”

말을 마친 칼릭스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헤르난에겐 어렵게만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편지를 확인하긴 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이 무엇인진 모릅니다.”

달라붙어 오랜 시간 떨어지지 않을 끈적한 민망함을 뒤집어쓰고 헤르난은 말했다. 마음만큼이나 가라앉은 목소리로 건넨 부탁이었다.

자신이 읽지 못하는 글이 이미 사장된 언어라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칼릭스는, 그의 사람들은 모두 읽을 수 있는 것이니까.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자신이 여전히 편지 한 장 제대로 읽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걸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부끄러운 상황이 일어나는 것보다 칼릭스가 편지를 읽는 게 더 싫었다.

“못 읽어?”

그런데도 내가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칼릭스는 물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을 몇백 번은 더 겪었다. 그러니까, 한때 까막눈인 절 불쌍히 여겨 직접 글을 가르쳐 줬던 이가 무식하고 교양 없는 남자에게 질리게 되는 상황 말이다. 그러니 칼릭스에게 싸늘한 시선 몇 번 더 받는 것이나 한 소리 듣는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 당시엔, 가끔씩 그런 상황 자체에 상처를 받았던 것도 같았다. 보호해 줄 울타리 하나 없는, 어렵고 위험한 환경에서 힘들게 자란 건 루체나 저나 마찬가지인데, 뭐든 금방 깨우치고 똑똑한 루체 때문에 열등감 또한 많이 느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의미 없는 마음이었다는 걸 이제 헤르난은 알았다.

“네. 읽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 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내용을 알게 되면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헤르난은 씁쓸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편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칼린 도프의 편지는 쉬이 헤르난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누구한테 읽어 달라고 하려고? 이걸 네 보좌관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진 않고……. 아, 다른 손님?”

슬쩍 편지를 본 칼릭스가 다시 웃어 보였다.

헤르난은 무어라 답을 하는 대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들에게도 편지를 보여 줄 수 없긴 매한가지지만 일단은 그들을 방패 삼아서라도 이 대화를 끝마치고 싶었다.

“발신인이 누군데?”

“……테리아 백작이십니다.”

“칼린 도프? 그 변태? 그 여자가 왜 너한테 편지를 보내? 같은 부류끼리 잘 지내 보자는 거야, 뭐야.”

칼릭스의 얼굴이 삽시간에 구겨졌다.

“그런가 봅니다.”

반쯤 체념한 헤르난이 답을 했다.

고작 편지 한 장 가지고 칼릭스와 이런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제게 무슨 말을 해도 괜찮으니 어찌 됐건 편지만 넘겨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헤르난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벽에 등을 기댄 칼릭스가 편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헤르난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그를 말리는 걸 포기했다.

곤혹스러운 상황을 맞아 목 뒤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헤르난은 케인을 쥔 자신의 손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케인을 꽉 쥔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글씨 한번 좆같네. 네가 아니어도…… 못 읽는 사람이 많을걸.”

편지를 읽던 칼릭스가 툭, 말을 던졌다. 헤르난이 무어라 답을 할 새도 없이 말은 이어졌다.

“헤르난. 네가 꼭 파티에 참석해 줬으면 좋겠대.”

칼릭스의 말을 들은 헤르난이 작게 탄식했다.

고작 파티에 관한 이야기였다니, 다행이었다. 헤르난은 하마터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을 뻔했다.

“밤에 추는 춤 운운하며 절름발이를 파티에 초대하다니, 취미 한번 더럽게 고상하시지.”

칼릭스가 편지를 대충 구겨 버렸다.

“놀림감으로 삼으려고 부른 건 아닐 겁니다. 가서 얼굴만 비치고 대충 말을 맞춰 주면…….”

말을 흐린 헤르난이 어색한 웃음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백작에게 놀림감인지 아닌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서였다.

백작 부부는 기본적으로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가끔은 그들이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렇게까지 중요한 사람들인가? 내 기억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수도에 계신 분들껜 별다른 영향력이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남쪽에 있는, 특히 저같이 모자란 사람에겐 중요한 분들입니다.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고요.”

헤르난이 민망하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래도 편지에 이상한 내용이 담겨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관련한 이야기를 제게 건넬 게 분명하지만, 또 그게 제가 초대받은 파티에서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칼릭스가 그 헛소리를 마주하는 상황만 만들지 않으면 됐다.

“그래? 그렇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네?”

“내 남편을 도와야지. 글쎄, 꼭 부부 동반으로 참석해 달라고 쓰여 있지 뭐야.”

다 구겨진 편지를 팔랑팔랑 흔들며 칼릭스는 말했다.

“아뇨. 말만 그렇게 하셨을 뿐이지 혼자 간다고 해서 서운해하진 않으실 겁니다.”

당황한 헤르난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안 되지. 그 중요하다는 분이 평범한 초대장 대신 이렇게 친서를 써 주셨잖아?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되나.”

“그렇지만…….”

“됐어. 재밌겠네, 파티.”

헤르난의 빈손에 억지로 편지를 쥐여 준 칼릭스가 곧장 앞을 향해 가벼운 걸음을 옮겼다.

고요한 복도에 홀로 남게 된 헤르난은 기운 빠진 한숨을 내쉬었다.

백작 부부라면 분명 칼릭스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일 것이다. 만약 그들이 칼릭스에게 치근덕대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그들에게서 칼릭스를 지켜내야 할까.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 * *

이안은 팔이 나아 다시 마법을 쓸 수 있을 때까지만 잠시 스칼라에 머물게 됐다. 남작성에 아주 튼튼하고 확실한 방어막을 쳐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였다. 그가 무사히 회복을 한다면 말이다. 니콜라에겐 잘된 일이었다.

니콜라는 그의 연인이자 아이의 아버지인 이안이 남작성에 머물게 된 후로 더욱 밝고 활기차졌다.

칼릭스는 또래인 자신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니콜라에게 갓 태어난 토끼 새끼 같다는 평을 내렸으나, 그가 아주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귀찮아하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헤르난은 남작성을 환하게 밝혀 주는 손님들을, 그리고 칼릭스를 먼발치에서 지켜봤다. 평화와 행복에 관한 망상을 하게 만들어 주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과 가까워지길 바란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다 함께 호수에 가 보고 싶다는 말씀이시군요.”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어린 남자와 눈을 맞추며 헤르난은 말했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의 오후에 레온은 헤르난을 찾아왔다. 그는 헤르난에게 이런저런 의미 없는 말들을 늘어놓다가는 별안간 호수에 함께 가자는 말을 꺼냈다. 니콜라와 이안의 데이트에 합류하라는 얘기였다. 칼릭스도 함께하기로 했다는 뜻밖의 말이 더해졌다.

“네. 형이 남작님께 직접 말을 드리기 민망했던 모양인지 대신 이야길 전해 달라고 부탁해서요.”

방긋 웃어 보인 레온이 말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철이 없다는 소릴 들어도 할 말 없을 사람이죠.”

“……아닙니다.”

“그저 조금 긴 산책을 나가는 거라고 생각해 주세요. 부담을 느끼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속삭임에 가까운 레온의 목소리가 헤르난의 귓가에 닿았다. 커튼이 쳐져 있지 않은 창문 너머에서 들어온 빛이 레온의 얼굴을 더욱 부드러워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헤르난은 처음 대공의 손님들과 식사를 했던 때를 떠올려 봤다. 스칼라의 명소를 돌아볼 수 있게 해 드리겠다는 말에 니콜라는 남작님도 함께였으면 좋겠다는 답을 내놨었다. 여럿이 함께하면 더욱 즐거울 거라며 말이다.

헤르난은 니콜라의 말이 그저 예의상 내놓은 친목의 말이라고 생각했지, 진심으로 건넨 것일 줄은 몰랐다.

“영지의 주인 된 사람으로서 손님들께 안내자 역할을 해야 하는 건 맞지만…… 연인들의 소풍에 안내자는 없는 편이 나을 겁니다.”

망설이던 헤르난이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수도에서 온 손님들이 만들 밝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제 배우자 역시 저와의 동행은 원치 않을 테고요.”

어쩐지 자신을 쉽게 놔주지 않을 것 같은 레온에게 헤르난은 말했다. 레온도 제 말을 잘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레온 역시 칼릭스가 그의 배우자를 싫어하는 걸 느끼고 있는 중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칼릭스 님께서 꺼리는 건 남작님이 아니라…… 제가 아닌가 싶은데요.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게 화가 나신 건 분명합니다.”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린 레온이 느릿하게 말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풀이 죽은 얼굴을 한 채였다.

“그저 낯을 가려 잠시 거리를 두는 것뿐이지, 그분도 금방 소공께 마음을 열 겁니다. 화가 난 것도 아니고요.”

안심하라는 듯, 헤르난은 레온을 향해 어색하게나마 웃어 줬다.

“그렇지만, 지금은 절 싫어하시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걱정이 됩니다. 형이 연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전 칼릭스 님과 도대체 어떤 대화를 나눠야 할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레온은 말했다.

아무래도 이 어린 친구는 칼릭스에게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었다. 누군가에게 사소한 미움 한 번 받아 보지 않았을 밝은 이이니 칼릭스의 비꼬는 말투며 사나운 눈빛이 마음에 걸릴 법도 했다.

“하지만 남작님께서 함께 계셔 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얼굴 위에 드리워져 있던 우울을 금세 걷어 낸 레온이 헤르난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결국, 헤르난은 걱정이 많아 보이는 레온을 한 번 더 거절하지 못했다. 고작 17년을 산 어린 친구가 기가 죽어 건네는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헤르난의 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레온은 웃어 보였다. 속없이 밝은 웃음이었다. 칼릭스에게 또 한 소리 듣겠구나, 걱정 중인 헤르난의 마음은 모르고 말이다.

* * *

스칼라의 날씨는 사람을 멍청하게 만든다. 칼릭스 히페리온은 차가운 중북부의 바람을 그리워하며 생각했다.

멀리로는 바다가, 가까이로는 남작성의 후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발코니 난간 위에 걸터앉아 세상을 둘러보고 있자면, 순간순간 평화를 닮은 몽롱함이 찾아왔다.

그 멍청한 기분 속에서, 칼릭스는 매번 헤르난이 죽던 날을 떠올렸다. 좆같게도 말이다.

수도에 가 있느라 잠시 성을 비운 며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몇 날 며칠간 이어진 공작의 파티 따위에 참석한 게 잘못이었다. 제가 있었다면, 감히 죽음도 헤르난을 찾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칼릭스는 단언할 수 있었다.

성에 도착한 칼릭스는 그 무엇보다 먼저 죽어 가는 헤르난을 마주해야 했다. 자신의 빈자리를 눈치채고 찾아온 죽음이 커다란 손으로 헤르난의 발목을 감은 채 조금씩 그를 삼키고 있었다.

그것이 증오건 애정이건 그 둘 다건, 자신의 인생에서 결코 떼어 낼 수 없는 남자가 홀로 죽어 가고 있었다.

차갑게 식어 가고 있는 헤르난을 마주한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칼릭스는 자신이 헤르난의 죽음을 바란다고 생각했었다. 제가 원한 것이 죽음이 아니었다면 헤르난을 사람이 드나들 수 없는 외딴곳에 고립시켜 뒀을 리 없었다. 하지만 막상 죽음이 헤르난의 옆에 서자…… 그는 두려움을 느꼈다.

사실, 칼릭스가 바란 건 헤르난의 죽음이 아니었다.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하던 사실이었다. 칼릭스가 바란 건, 그의 눈과 손이 닿는 곳에 헤르난이 존재하는 거였다.

칼릭스는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창백한 남자를 어둠에서 건져 냈다. 그 순간만큼은 칼릭스의 머릿속에 어떤 의문도 망설임도 떠오르지 않았다.

헤르난은 본성으로 옮겨졌다. 수많은 치료 마법사와 의사가 백작성을 오고 갔다. 죄다 사람 정신 하나 제대로 돌려놓지 못하는 머저리, 돌팔이 새끼들이었다.

고작 이틀도 버티지 못한 헤르난은 칼릭스의 침대 위에서 유언 한 마디 남기지 않고 죽어 버렸다.

당연하게도 눈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배신자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칼릭스는 그저 말없이, 같은 자리에 앉아 더는 숨을 쉬지 않는 헤르난을 몇 시간이고 지켜봤다.

예전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게 마른 몸. 그 몸 여기저기에 새겨진, 수도의 지하 감옥에서 얻은 고문의 흔적. 제가 망가뜨린 왼쪽 발목. 멋대로 자라나 길어진 새까만 머리카락과 물어뜯은 자국이 있는 입술. 색이 없는 얼굴.

칼릭스는 갈 곳이 없어진 헤르난을 데려와 자신의 세상에 묶어 뒀다. 하지만 그저 살아가게 했을 뿐 그 이상의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헤르난을 저 꼴로 내버려 둔 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칼릭스는 헤르난이 괴로워하길 바랐다. 왜? 그가 아버지와 손을 잡고 루체를 제게서 빼앗았으니까. 루체의 죽음에 일조했으니까.

평생을 내 옆에 있겠다더니, 나를 버리고 떠났으니까.

칼릭스는 걸음걸음마다 죽음이 번져 나가는 전쟁터에서도 제게서 달아난 남자를, 자신을 배신한 남자를 생각했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헤르난을 떠올렸다.

가진 게 헤르난 한 사람밖엔 없는 것처럼 계속해 그를 생각했다. 빨리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한다고, 뒤늦은 변명을 늘어놨다.

하지만 그 죗값이란 건, 제 옆에서 치르지 않는 한 의미가 없었다.

〈네가 나를 떠나지 않았으면…… 아버지와 손을 잡고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면…… 하다못해 나를 봐 줬다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거야. 그렇지?〉

미운 남자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변명을 속삭였다. 물음에 답을 주지 않는 건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옛날엔 말만 잘했으면서.

물을 잔뜩 먹은 수채 캔버스처럼 흐릿해진 옛 연인의 얼굴이 칼릭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악인의 죽음을 기념하며 파티라도 열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보채 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칼릭스는 그 목소리를 모른 척했다.

보좌관 제프란이 집사와 함께 칼릭스를 찾아왔다. 자신이 모시는 주인만큼이나 사나운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태울까요, 버릴까요. 아니면, 걸인들의 묘지에 묻을까요?〉

제프란이 물었다. 그중 어느 것도 칼릭스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마음에 차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누군가 심장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기라도 한 것처럼 화가 났다.

헤르난에게 손을 대는 새끼는 그게 누구건 목을 날려야지. 찾아온 두 남자를 쫓아낸 칼릭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칼릭스는 마법을 쓰지 못하게 구속구를 채워 둔 흑마법사를 찾아갔다.

〈사람 하나를 살려 내. 성공하면, 너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주지.〉

겁을 먹은 남자에게 칼릭스는 말했다. 새로운 신분과 돈, 안전을 약속했다.

마법사는 쉽게 답을 할 수 없었다. 눈앞의 남자가 무서워서 그랬다. 흑마법사들의 힘을 빌리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금기를 어기겠다는, 나라를 배신하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는 제안을 하면서 저렇게 밝은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사, 살아난다고 한들…… 어떤 방식으로 살아날지는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처럼 변할 수도 있고…… 두 눈이 안 보일지도 몰라요. 다른 곳을 못 쓰게 될지도 모르고…… 어쨌든 멀쩡한 꼴로는 못 살 겁니다.〉

〈숨만 쉴 수 있으면 돼. 어떤 문제가 생기건 상관없어. 내가 옆에 있어 주면 되니까.〉

흑마법사의 앞에서 칼릭스는 제 본심을 내놨다.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어 내고 나서야, 칼릭스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됐다.

칼릭스는 망가졌다. 루체의 죽음에 얽힌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더러운 세계에 손을 뻗고, 필요하다면 사람을 죽이고 망가뜨렸다. 하지만 그딴 것 따위는 지금 자신이 하려는 짓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침실로 끌려와 마법진을 그려 내는 흑마법사를 보며 칼릭스는 소리 내 웃었다. 마법사가 겁에 질린 얼굴로 절 훔쳐보는 게 느껴졌다. 미친 인간을 보는 눈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이미 죽어 버린 남자를, 그 남자의 죽음에 관여한 듯 보이는 인간이 다시 살려 내려 하는 꼴이었으니까. 자신이 잡아들인 흑마법사의 손을 빌려서까지 말이다.

〈헤르난. 네가 살아나면, 나는 귀찮아지겠지?〉

더는 말을 할 수 없는 남자에게 칼릭스는 물었다.

〈할 일이 많아질 거야. 지금 그 꼴로는 어린 애새끼는커녕 네 몸 하나 지키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 내가…… 널 죽음으로부터 지켜 줘야지.〉

피가 돌지 않아 차가워진 손을 붙잡고 칼릭스는 다정히 속삭였다.

〈네가 그랬잖아. 평생 내 옆에 있고 싶다고. 소원을 이뤄 줄게. 바라던 대로 너는 평생을, 내 옆에 있게 될 거야.〉

그것이 칼릭스가 헤르난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헤르난은 되살아났다. 그의 부활은 흑마법사의 말대로 조금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칼릭스는 헤르난과 함께 과거의, 아니 과거의 모습과 닮았으나 진짜 과거는 아닌 이상한 세상으로 떨어졌다.

“……생각을 말자.”

얼굴을 구긴 칼릭스가 자꾸만 눈을 간질이려는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헤르난만 생각하면 머리가 아팠다. 차라리 흑마법사의 말처럼 눈이 먼 채로 되살아났다면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세상에 떨어진 건 칼릭스에게는 행운이었다. 가진 배경이며 성격이 자신이 아는 모습과는 다를지언정, 이곳엔 루체가 있었다. ……그리고 헤르난이 있었다. 그러니 머리가 조금 아픈 것쯤이야 넘어갈 수 있는 문제다.

무어라 확실한 정의를 내리기 힘든 찝찝한 침묵이 칼릭스의 어깨를 눌렀다.

뒤이어, 음은 낮지만 그 어조는 경쾌한 남자의 말소리가 3층에 있는 자신에게까지 들려왔다. 성량 한번 좋은 인간이었다.

칼릭스의 시선이 아래를 향해 내려갔다. 대공의 손님들이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색이 옅은 그늘 밑에서 레온과 헤르난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근처에 있는 벤치엔 니콜라와 이안이 징그럽게 붙어 앉아 말을 속삭이고 있었다.

허. 탄식 같은 숨이 흘러나왔다.

한때 헤르난의 보살핌을 받았다던 덩치 큰 어린애는 틈만 나면 헤르난의 곁을 알짱거렸다.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남자에게 귀여움받고 싶어 안달이 난 개 같은 덜떨어진 꼴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부터 짜증이 올라왔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자란 게 분명한, 머릿속이 꽃밭이다 못해 유리온실 속 화초 수준인 니콜라의 사촌 형제가 싫은 건 아니었다. 웃는 얼굴에 욕을 뱉기가 어디 쉬운가.

하지만 저게 헤르난 옆에 있는 걸 보면 이상하게 속이 꼬였다.

칼릭스가 아는 헤르난은 언제나 혼자였다.

자신과 함께였을 때도, 먼발치에 서서 절 바라볼 때도, 말 한마디 없이 곁을 떠나 버렸을 때도,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나게 됐을 때도…… 죽어 갈 때마저 그는 혼자였다.

헤르난의 주위엔 사람이 없었다. 인간관계에 서툰 그가 의도치 않게 벽을 세웠기 때문이기도 했고 사람들과 교류할 심적 여유가 없었던 탓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거의 모든 이가 헤르난을 둘러싼 괴이한 소문에 겁을 집어먹고 도망쳤다.

칼릭스는 지금껏 헤르난이 누군가와 붙어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헤르난이 제게 품은 마음을 모르던 시절엔 가끔 제 호위 기사가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까 상상해 보기는 했었다.

키가 크지 않은 다정하고 귀여운 여자 혹은 남자. 적어도 칼릭스의 상상 속에 레온처럼 모자라게 웃는 덩치 큰 어린애는 없었다.

헤르난이 작게나마 웃고 있다는 게 멀리에서도 보였다. 헤르난은 레온을 귀엽게 생각하고 있었고, 저 덩치만 좋은 놈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저렇게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겠지.

헤르난 말론이라는 사람의 벽은 보기와 다르게 아주 허술하고 연약한 모양이었다. 살짝 두드리기만 해도 쉽게 허물어져 버리는 듯 보였다. 수도에서 온 어린 멍청이가 실실 쪼개며 치대는 걸 다 받아 주는 것만 봐도 그랬다.

‘기분 나빠.’

왜 기분이 나쁜지 모르겠는데 기분이 나빴다. 레온의 부슬부슬한 금색 머리통을 과녁 삼아 화살이라도 날리면 기분이 조금 풀어질 것 같았다.

칼릭스는 짧게 욕을 내뱉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제멋대로 바뀌어 대는 감정의 폭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칼릭스와 헤르난이 눈을 뜬 곳은 익숙한 테미스 백작성이 아니었다. 1년 내내 따스한 작은 시골 도시 스칼라에서 헤르난은 오직 다리 한 짝만이 망가진 채 다시 살아났다.

……헤르난은 수도 디아만테의 지하 감옥에서 이미 그가 지은 죄를 다 갚았다. 칼릭스 히페리온이라는 사람 탓에, 어쩌면 본인이 저지른 죄보다 더 많은 고통을 받았을지도 몰랐다.

헤르난에겐 이 이상한 세상에서 새로운 인생을 다시 시작할 권리가 있었다.

그 권리에는 헤르난 말론이 칼릭스 히페리온을 뒤로하고 그를 목숨처럼 아껴 줄 다른 사람을 만나 새로운 삶을 꾸리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헤르난을 어떤 마음으로 살려 냈는데. 감히 누가, 내게서 헤르난을 빼앗아 갈까.’

이기적이고 사악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 이기적인 사악함이야말로 제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옳은 마음인 것처럼 느껴졌다.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는지 헤르난이 위를 올려다봤다. 눈이 부실 텐데도 끝내 제 눈을 피하지 않는 헤르난의 얼굴 위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평생, 도련님을 지켜 드릴게요.〉

먼 옛날 이미 헤르난은 제게 평생을 맹세했다. 죽음으로도 무를 수 없는 기사의 맹세였다. 그 누구의 강요도 없이 헤르난 스스로 선택한 거였다.

“……헤르난. 너는 나의 것이지?”

중얼거리는 칼릭스의 목소리가 고저 없이 차가웠다. 하지만 그의 새파란 눈만은 스칼라의 보드라운 햇빛을 맞아 아름답게 반짝였다.

헤르난의 어설픈 미소에 화답하듯 칼릭스 역시 입꼬리를 끌어 올려 환한 웃음을 지었다.

* * *

오늘은 수도에서 온 대공의 손님들이 원하는 대로 남작성 밖으로 조금 긴 산책을 떠나기로 했다.

사람들을 호숫가에 실어 나르기 위한 마차 2대가 준비됐다. 원래는 3대의 마차가 준비됐으나 바퀴의 결함이 뒤늦게 발견된 탓에 2대로 움직이게 되었다.

대기하고 있던 마차들 중 하나엔 이안과 니콜라만이 타기로 했다. 대단한 마법사인 이안과 함께니, 니콜라의 안전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레온이 빠져 준 덕이었다.

〈저 두 사람을 딱 1시간만이라도 안 보고 싶어요.〉

형 대신 스칼라 남작 부부와 함께 마차에 오르는 걸 택한 레온은 헤르난에게 몰래 제 속을 털어놨었다.

‘에스코트를 받으면 싫어하겠지.’

미리 문을 열어 둔 마차 앞에 서서 헤르난은 생각했다.

그 사이가 좋거나 나쁘거나, 스칼라 남작에겐 친애하는 상대이자 배우자인 칼릭스를 에스코트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니 헤르난은 마차에 오르는 칼릭스에게 손을 내밀고 그가 마차 안에 들어설 때까지 지탱해 주어야 하는 게 맞았다.

문제는 칼릭스가 그 행위를 아주 끔찍하게 여길 거란 거였다.

그러나 제법 길게 이어졌던 헤르난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두 연인과 함께 등장한 칼릭스는 헤르난이 손을 내밀 새도 없이 먼저 마차 안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니콜라와 이안이 다가와 몇 마디 인사말을 건네고 다른 마차에 오른 뒤에야 헤르난은 긴장을 풀었다. 칼릭스가 기분 나쁠 일이 생기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칼릭스의 기분이 상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오늘 하루, 헤르난은 최대한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말들이 예뻐요.”

마부석으로 가 말들을 구경하고 온 레온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곤 곧장 헤르난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깜빡이니 그제야 말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지팡이보다는 제 손이 더 편하실 거예요. 아주 조금이라도요.”

말을 마친 레온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제 불편한 다리가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헤르난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레온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가벼운 부축일 뿐인데, 레온의 몸에 밴 귀족적인 태도 때문인지 꼭 어울리지도 않게 에스코트를 받는 것처럼 느껴져 민망했다.

“생각보다 손이 단단하죠?”

레온의 물음에 헤르난이 웃음으로 긍정했다.

다 자란 칼릭스의 손처럼 크고 곧았지만 그래도 그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손이었다. 아직 어리다는 게 이런 식으로 티가 날 수 있구나 싶었다.

레온 덕에 수월하게 마차에 오른 헤르난은 얌전히 칼릭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원래라면 배우자인 칼릭스의 옆에 앉는 것이 맞지만, 팔짱을 끼고 앉아 절 죽일 듯 노려보는 남자의 옆에 뻔뻔한 낯으로 앉을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게 칼릭스를 더 화나게 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하고 말이다.

칼릭스가 무서운 건 마찬가지인 레온 역시 자연스레 헤르난의 옆에 자리했다.

“오늘 날씨가 참 좋은 것 같아요.”

레온이 말했다. 칼릭스를 향한 너스레였다. 도통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을 느끼고 있음에도, 여전히 칼릭스와 친해지고 싶은 모양이었다.

“네. 나들이에 제격인 날씨네요.”

꽤 친절한 투로 레온에게 답을 건네는 칼릭스를 보며 헤르난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쉬었다.

마차의 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말들이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작은 창문 너머로 보이던 풍경의 색들이 마차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뭉그러졌다.

왈칵 쏟아져 들어온 이른 오후의 햇살이 그늘져 있던 마차 안을 환하게 밝혔다.

그 빛 속에서, 헤르난은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꼈다. 쏟아져 들어오는 빛만큼이나 아름다운 사람들 사이에 잘못 끼어든, 초대장 없는 불청객이 된 느낌이었다.

눈을 찌르는 햇살을 피하려 눈을 감았다 뜬 헤르난이 왼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레온의 시선이 느껴진 탓이었다.

“제 덩치가 커서 불편하지는 않으실지…… 걱정이 됩니다.”

헤르난과 눈이 마주친 레온이 멋쩍다는 듯 말을 흐렸다. 아무래도 어깨가 계속 닿는 게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진심이었다. 여기서 마음을 써야 할 사람은 레온이 아니라 미리 마차의 결함을 확인하지 못한, 또 더 큰 마차를 마련하지 못한 자신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이 칼릭스의 맞은편에 앉는 바람에 손님을 혼자 앉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으니…….

“소공께선 나이가 어떻게 된다고 하셨죠?”

별안간 칼릭스가 레온에게 말을 걸어왔다. 헤르난과 레온 두 사람 모두의 시선이 단번에 칼릭스에게로 향했다.

“이제 막 열일곱이 됐습니다.”

잠시 찾아왔던 의아한 기색을 완전히 지워 낸 레온이 성실히 답했다.

“아. 정말 어리시네요. 신기할 정도로요.”

“어리긴 하지만…… 그래도 이제 성인이니까요. 이 덩치도 얼굴도 제 장점이 될 수 있는 나이가 돼 참 기쁩니다.”

레온이 살갑게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훌륭한 장점이죠. 인기가 많으시겠어요. 체격이 좋은 것도 모자라 미남이기까지 하시니까.”

칼릭스의 말에 레온이 하하, 소리 내 어색하게 웃었다.

“음, 인기가 좋지는 못합니다.”

“스칼라를 떠난 뒤에 차차 알게 되실 겁니다. 소공 앞으로 사람들이 줄을 설 테니까요.”

“그런가요…….”

“그땐 어떤 사람을 만나고 계실지 궁금하네요.”

눈을 동그랗게 뜬 레온을 향해 칼릭스가 웃으며 말을 더했다.

“이상형에 가까운 분을 만나고 계시길 바랍니다.”

“이상형이요?”

“없으십니까? 놀라운데요.”

물음을 받아 든 레온이 도움을 요청하듯 헤르난을 봤다. 헤르난이라고 이 대화를 부드럽게 만들어 줄 능력이 있는 게 아닌데 말이다.

헤르난은 그저 힘을 내라는 듯 레온을 향해 멋쩍게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세요.”

레온의 시선이 다시 칼릭스에게로 돌아갔다.

“이상형 같은 걸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음, 아무래도, 그냥 다정하고…… 착하고…… 왠지 인생을 바쳐서라도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그런…… 여성분이면 좋을 것 같아요.”

도움을 요청하는 일에 실패한 레온이 순순히 답을 내놨다. 두 뺨까지 빨개져선 말이다.

“아. 여성분이요.”

레온이 부끄러워하며 내놓은 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칼릭스는 한 번 더 웃음 지었다. 꽤 기분이 좋아 보이기도 했다.

헤르난은 그 얼굴만큼이나 예쁘게 웃는 남자를 조심히 훔쳐봤다.

“소공께선 저와 취향이 비슷하신 것 같습니다.”

“그, 그럴까요.”

말을 마친 레온의 시선이 잠시 헤르난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바로 앞에 배우자를 두고 이상형 이야기를 하는 칼릭스 때문에 눈치를 본 건가 싶었다.

헤르난이 생각하기에도 두 사람의 이상형이란 게 참 비슷한 것 같았다. 헤르난은 다정하고 착한, 지켜 주고 싶게 만드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을 머릿속에 떠올려 봤다. 루체였다.

자신은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칼릭스에게 호감을 사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 기억이 없는 채로 만나게 되더라도 말이다.

“……네. 정말 그런 것 같네요.”

레온의 작은 중얼거림이 바퀴가 덜컹거리는 소리 아래로 파묻혔다.

* * *

니콜라와 이안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닐 일은 절대 없을 거라던 레온의 예상과 달리, 지금 그는 두 연인을 따라 호숫가를 거닐고 있었다.

오래 걷기 힘든 헤르난의 옆을 지키겠다는 칼릭스의 말에 놀란 니콜라가 좋은 시간을 보내셨으면 좋겠다며 레온을 끌고 간 덕이었다.

제 사촌 형과 무어라 말을 나누며 투덕대던 레온이 벤치에 앉아 있는 남작 부부를 향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까 전엔 열심히 손을 흔들더니, 너무 격 없어 보인다며 한 소리 듣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저 천진함은 어린 나이에서 오는 것일까, 타고난 것일까. 헤르난은 자신이 저 해맑은 청년의 또래였던 때를 떠올려 봤다.

몸 누일 작은 방 하나 구하지 못해 거리에서 노숙을 하고, 일을 하고도 돈을 떼어 먹히고, 아름다운 루체에게 눈독을 들이는 놈들과 싸우다 얻어터지기도 하고……. 웃을 시간이 도통 없었다.

하지만 루체는 헤르난과 달랐다. 같은 상황 속에서도 루체는 대공가의 도련님인 레온처럼, 어쩌면 그보다도 더 천진하고 사랑스러웠었다.

지금은 더욱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헤르난은 레온의 천진함은 타고난 것이라고 결론 내리기로 했다.

“저건 왜 저렇게 웃는 거야? 산책 나와서 신난 애도 아니고.”

헤르난과 거리를 벌리고 앉은 채로 칼릭스는 말했다. 아무래도 레온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애’. 칼릭스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 말을 꺼냈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의도야 어찌 됐건 헤르난의 귀에는 그 말이 참 귀엽게 들렸다. 어울리지도 않는 작은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설마, 쟤가 귀여워 보여?”

헤르난을 향해 몸을 틀기까지 한 칼릭스가 물었다. 하지만 딱히 답을 들으려는 건 아니라는 듯 곧장 질문 하나를 더했다.

“금발 머리를 가진 예쁘장한 남자면 다 좋은 건 아니지? 덩치가 크거나 작거나 상관없이.”

잠시 웃음이 머물렀던 헤르난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칼릭스는 말했다. 칼릭스 본인도 이해하지 못할 충동이 토해 낸 말이었다.

오해를 사는 건 헤르난에겐 너무 익숙한 일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마음을 그저 껍데기만 보는 호색한의 욕망으로 여기고 있다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그런 오해를 칼릭스 역시 가지고 있다는 걸 마주하는 일은 조금 힘들었다.

“전……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당신을 사랑한 게 아닙니다. 금색 머리칼도 예쁜 얼굴도 그저 제가 마음에 담게 된 사람의 일부였을 뿐이에요.”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스스로를 변호했다. 웃기는 일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제 사랑은 칼릭스에게 꺼림칙하고 기분 나쁘기만 할 텐데 말이다.

하지만 변명의 시간이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헤르난은 조용한 칼릭스의 시선을 피하며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찾아온 고요 속에서 헤르난은 다시 저 멀리 대공의 손님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헤르난은 마차에 올라타기 전에 했던 다짐대로 최대한 말을 아낄 생각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 눈치를 보고 있자니, 처음 손님들과 식사를 했을 때 칼릭스가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렇게 친근하게 구시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네?〉

〈곤혹스러운 일을 당하기라도 하실까 걱정이 돼서요.〉

그때도 칼릭스는 제가 레온을 건드리기라도 할까 봐 걱정했었다. 지금의 대화 역시 그날 저녁의 연장선일지도 몰랐다.

망설이던 헤르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칼릭스의 염려를 덜어 주기 위함이었다.

“제가 저 친구를 곤란하게 만들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말을 스스로 꺼내야 한다는 게 민망했다.

혹시 레온도 칼릭스와 같은 걱정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그에게도 말을 전해 줘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이 됐다. 정말 창피하겠지만 앞으로 1년 가까이 얼굴을 봐야 할 이를 불안 속에 살게 할 순 없었다.

“곤란하게 만들 일은 없다…….”

여전히 헤르난을 향해 몸을 튼 채로 칼릭스는 중얼거렸다. 말이 이어졌다.

“저게 널 곤란하게 만들면 어쩌려고?”

레온을 향한 모욕적인 언사에 놀란 헤르난이 칼릭스를 봤다. 칼릭스의 입가에 그의 눈빛만큼이나 삐딱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십니다.”

“……그래. 말도 안 되지.”

“…….”

“그럴 리가 없잖아. 저 어린애의 취향이 대단히 독특한 게 아닌 이상.”

얼굴을 굳힌 칼릭스가 헤르난에게서 재빨리 눈을 뗐다.

칼릭스 본인도 자신이 내놓은 소리가 말도 안 된다는 걸 잘 알 것이다. 레온의 바로 앞에 앉아 그의 이상형까지 들어 놓고, 왜 굳이 저런 말을 꺼낸 걸까. 헤르난은 그 이유를 가늠하기도 힘든 심술이었다.

헤르난은 대화의 방향을 돌리기로 했다.

“세이어 상단이 소유한 화랑의 보수 공사가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화랑이 있는 중부를 기준으로, 가을이면 재개장을 할 것 같습니다.”

“…….”

“호텔에 쓰실 방을 예약해 두겠습니다.”

“너는?”

“수도 외곽에 작은 저택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면 됩니다.”

“……나도 같이 가. 어차피 같이 움직여야 하는데 번거롭게 호텔까지 갈 필요가 있어?”

쌀쌀맞은 칼릭스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헤르난은 알겠노라고 답했다.

수도에 올라가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세이어 상단의 화랑을 찾아가 루체의 초상화를 확인하고 또 상단과 장기적인 계약을 맺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대공께 찾아가 손님들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야 했고, 히페리온 저택에 머물고 있을 네이로 후작도 찾아가야 했다. 칼릭스는 내키지 않아 하겠지만 말이다.

네이로 후작을 마주하는 일이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것과는 별개로, 칼릭스가 힘을 얻을 때까지는 히페리온 부자의 사이가 틀어지면 안 됐다.

후작은 이미 루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전적이 있는 남자였다. 이 뒤바뀐 세상에서 또 어떤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으니, 가능한 한 가까운 곳에서 그를 지켜보는 게 맞았다. 적과의 거리는 가까울수록 좋다는 걸 칼릭스 역시 잘 알고 있을 거다.

‘많은 게 바뀐 것처럼…… 후작도 조금쯤은 나은 사람이 되어 있으면 좋을 텐데.’

칼릭스를 따라 반짝이는 호수 위로 시선을 던지며, 헤르난은 생각했다.

찾는 이가 없어 고요한 호숫가를 닮은 정적이 느릿하게 흘러갔다.

〈스칼라를 떠나면 다신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을 거야. 그래도…… 이 호수와 바다는 조금 그리울 것 같네.〉

몇 번째 삶에서였는지 모를 언젠가, 루체는 헤르난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헤르난은 지금 이 벤치 위에 루체와 칼릭스가 앉아 있는 모습을 떠올려 봤다. 분명 그림처럼 보기 좋을 것이다. 자신과 함께 있는 칼릭스의 모습과는 다르게 말이다.

“루체가 좋아하는 곳이었습니다.”

“…….”

“지금 그의 기억엔 없을 테지만, 다시 좋아하게 될 겁니다.”

제 말을 듣고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칼릭스는 그저 알겠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줬다. 제 말을 악당의 조롱이 아닌, 한때는 루체의 가족 같은 친구였던 이의 조언으로 여겨 준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예쁘네.”

칼릭스가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그마한 새 두 마리가 칼릭스에게로 날아들었다. 어린아이의 주먹보다도 작은 하얀 새들이 칼릭스의 어깨와 무릎 위에 순식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짜증 나.”

그래도 마법사가 변신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칼릭스는 그저 인상만을 찌푸렸을 뿐 새들을 쫓지 않고 내버려 뒀다.

예전부터, 칼릭스에겐 가끔 이렇게 작은 동물들이 다가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동물들도 예쁜 걸 좋아하는 모양이라며 진심 섞인 농담을 내뱉곤 했었다. 칼릭스는 질색을 하면서 입을 삐죽였지만, 결국엔 어쩔 수 없다는 듯 제 호위 기사를 따라 웃어 줬었다.

“너희, 허튼짓하면 죽일 거야.”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과 달리 칼릭스의 손은 자신의 무릎 위에 앉은 새의 이마를 다정히 간질여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자니 칼릭스가 처음으로 참여했었던 사냥 대회가 떠올랐다.

억지로 사냥 대회에 끌려간 후작가의 막내 도련님과 그의 호위 기사는 호숫가 근처에 몸을 숨기고 앉아 사냥 대회가 끝나기만을 기다렸었다. 그날 역시 오늘처럼, 새 몇 마리가 칼릭스의 주변으로 날아들었다.

자신의 어깨에 내려앉은 새를 쓰다듬어 주며 칼릭스는 말했었다.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는 맹수나 몬스터도 아니고 고작 사슴 같은 거나 잡으면서 더럽게 허세 부리는 거, 진짜 꼴 보기 싫어. 평생을 저런 멍청이들이랑 얽혀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니까.〉

칼릭스의 툴툴거림을 들으며 헤르난은 기쁘게 웃었었다. 제가 모시는 도련님이 다른 귀족들과 달라서, 그게 좋아서 웃었던 것 같다.

사냥 대회가 끝나면 기사단장에게 불려 가 크게 혼날 게 분명했다. 그걸 알면서도 헤르난은 툴툴대는 칼릭스의 옆에 얌전히 입을 다물고 앉아 그와 함께 시간을 보냈었다.

헤르난은 그 옛날처럼, 가만히 입을 다물고 앉아 칼릭스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새의 보드라운 털을 쓸어 주는 다정한 손끝을, 햇살을 받아 더욱 하얗게 빛나는 아름다운 얼굴을, 한여름의 호수보다 청명한 파란색 눈동자 속에 번지고 있는 여름의 빛을 봤다.

흰 사슴이 이 이상한 여름을 제 앞에 놔두고 간 건 저를 골탕 먹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헤르난 말론에게 선물을 준 거였다. 자신이 이곳에서 조금이나마 죄를 갚고 벌을 받으러 떠나기 전에, 달콤함 한 조각 정도는 맛볼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헤르난은 칼릭스 몰래 그를 따라 웃음 지었다. 꼭 예전처럼 밝은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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