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밤의 무도회 (4/21)

3. 밤의 무도회

제논 제국, 남쪽 땅의 귀족들에게 있어 테리아 백작 칼린 도프와 그녀의 남편은 혐오의 대상이자 호기심의 대상이었으며 또 동경의 대상이었다.

귀족들은 백작 부부의 가벼움과 문란함, 음흉함에 대해 비웃음과 경멸이 섞인 조소를 날리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여는 파티의 초대장을 받고 싶어 안달을 냈다. 인맥을 쌓는 데엔 칼린 도프의 파티만큼 좋은 장소가 없었으니 말이다.

백작의 파티에는 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유력 상단의 주인들이며 후원을 바라는 예술가들, 작위만 없을 뿐인 저명한 학술가와 건축가 등 아주 다양한 위치에 자리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다양성이 바로 초대장의 값어치를 올려 줬다.

겉으로 드러내지만 않을 뿐, 인맥이 아니라 다른 쪽에 관심이 있는 이들 역시 많았다. 백작이 자신의 귀중한 손님들을 위해 마련해 둔 특별한 공간에 발을 들이고 싶어 하는 부류였다.

저마다의 이유와 목적을 갖고 사람들은 백작 부부를 찾았다. 백작과 단단한 관계를 맺고 싶어 했다. 그녀를 향한 개인의 호불호와는 별개로 말이다.

하지만 백작의 마음에 타인의 이름을 새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황제에게 직접 작위를 하사받는 일보다 어렵다고 해도 좋았다. 칼린 도프는 고작 첫인상만으로 사람을 판단했고 끝의 끝까지 자신의 판단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백작이 그녀 주위의 사람을 분류하는 기준에 대해 누군가는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했다.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그녀의 기준으로 아름답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이란 말과는 거리가 먼 이를 가까이 두고 싶어 하는 경우도 있었다. 바로 스칼라 남작 헤르난 말론 같은 남자였다.

칼린 도프가 그 음침하기 짝이 없는 스칼라 남작을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모두 비슷한 추측을 내놨다. 그들은 백작이 헤르난 말론에게 친근하게 구는 건 다 그의 배우자인 칼릭스 히페리온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칼릭스가 겁을 먹고 도망가지 못하게 남작을 통해 차근차근 접근하는 거라고 말이다.

연회장에 들어선 이래 계속해 귓가에 닿아 오는, 소문 사이를 둥둥 떠다니는 목소리들 사이로 칼릭스 히페리온이 백작 부부의 오늘치 사냥감이 아니냔 우스갯소리가 터져 나왔다. 헤르난의 신경을 잔뜩 흔들어 놓는 말이었다.

헤르난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연회장의 가장 그늘진 곳에 서서 칼릭스를 바라봤다. 예전 그의 호위 기사로 일했던 시절처럼 초조한 얼굴을 한 채였다.

칼릭스는 남서부에서 왔다는 자작가의 귀족 영애와 함께 춤을 추고 있었는데, 붉은색 곱슬머리를 가진 영애를 이끄는 그의 모습이 꼭 꿈에나 나올 법한 왕자님처럼 보였다.

연회장 안에 있는 많은 사람의 시선이 춤을 추고 있는 두 젊은이에게 향했다. 예술가라면 당장 캔버스 위에 또 무대 위에 순간을 새기고 싶어 할 만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헤르난은 사람들의 얼굴 위에 서려 있는 칼릭스를 향한 호기심을 봤다.

이전보다 더한 초조함이 느껴졌다. 백작 부부의 요새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울 정도로 쏟아져 들었었다. 평소 파티에서 보기 힘든 소문의 주역인 남작만 해도 재밌는 구경거리인데 그 옆에 아름답기로 유명한 비운의 청년 칼릭스 히페리온까지 함께하고 있으니, 이목이 집중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칼릭스는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입가에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채 부딪쳐 오는 관심을 마주했다. 사람들과의 교류를 내켜 하지 않던 예전의 그와는 다르게 말이다.

손님들이 그어 둔 보이지 않는 선을 넘은 칼릭스는 백작의 파티에 순식간에 녹아들었다. 그에게 말 한마디라도 붙여 보고 싶어 하던 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주위로 모여들었다.

칼릭스가 친절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더라도 사람들은 결국 그에게 다가갔을 것이다. 그런데도, 칼릭스에게 쏟아지는 여러 갈래의 관심들을 실제로 마주하자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이 백작성에 발을 들인 이들 중 백작 부부만큼 성벽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주 많을 거라고, 헤르난은 장담할 수 있었다. 백작의 파티에는 단순한 친목 외의 목적도 있었으니까.

칼릭스가 뒤늦은 성장기를 맞이했을 때의 건장한 모습이 아니라 훨씬 작고 예뻤던 시절의 모습을 하고 있어 더 걱정이 됐다. 그가 스칼라 남작에게 성적으로 학대를 당한다는, 그의 이름 뒤에 딸린 질 나쁜 소문도 문제였다.

‘당하고 있을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서 헤르난은, 칼릭스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계속해 그를 지켜보기로 했다.

종종 경멸 섞인 시선이, 묶여 있는 개를 훔쳐보는 것과 같은 호기심과 가벼운 비웃음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헤르난은 아주 먼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가만히 입을 다물고 칼릭스만을 눈으로 좇았다.

헤르난은 파티가 싫었다.

호위 기사 일을 하던 시절, 헤르난은 제가 모시는 도련님인 칼릭스를 따라 많은 파티에 참석했었다. 그의 임무는 지금처럼 먼발치에 물러서서 칼릭스의 주변을 감시하고 또 지키는 일이었다.

뒤에서 나쁜 짓을 많이 하고 산 후작 덕에 후작가의 일원들은 주기적으로 살해 협박을 받고는 했는데, 칼릭스에겐 살해 협박 말고도 다른 문제가 종종 생겼다.

어린 청년들은 달려든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칼릭스를 유혹하려 들었고, 나이 든 호색한들은 그에게 차마 입에 담기도 저급한 제안을 해 왔으며, 누군가는 사교계의 중심에 서 있는 아름다운 남자에게 절절 끓는 질투를 했다.

헤르난은 그 모든 위협으로부터 칼릭스를 지켰었다. 칼릭스에게 접근하는 더러운 인간들과 다를 바 없는 마음을 품고서, 그를 지켰다.

칼릭스가 루체와 사랑에 빠진 후엔 칼릭스뿐 아니라 그의 연인까지 지켜 내야만 했다. 눈을 맞추고 웃음 짓는 그들을, 밀어를 속삭이는 그들을, 발코니에서 입을 맞추는 그들을, 질척한 질투를 억누르며 지켰었다.

도련님의 세상엔 나밖에 없었는데.

이따금 칼릭스의 시선이 날아들 때면 아주 유치하게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칼릭스가 루체를 만난 순간, 칼릭스의 작은 세상 밖으로 밀려난 자신의 처지에 배신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긴 음악이 끝을 맺음과 동시에, 칼릭스와 자작 영애의 춤도 끝을 맺었다. 헤르난은 두 사람의 손이 떨어져 나간 후에도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주인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는 건 호위 기사의 기본이었다.

하지만 2명의 여자가 그런 헤르난의 시선을 막아섰다. 키가 크고 체격이 다부진 이들이었다.

“백작께서 따로 만나 뵙길 청하십니다.”

그중 한 여자가 헤르난에게 말했다. 곧장 말이 이어졌다.

“호위 기사 하나를 이곳에 두고 갈 것이니, 부군의 안전을 걱정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말을 건 여자의 곁에 서 있던 다른 여자가 가볍게 묵례했다.

“백작님이 계시는 곳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거절이란 선택지는 주지 않는, 통보에 가까운 말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혹여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바로 알려 주세요.”

걱정 어린 눈으로 칼릭스에게 잠시 시선을 던졌던 헤르난은 잠자코 여자를 따라나섰다. 케인 끝이 대리석 바닥을 짚어 내는 느낌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여자는 테리아 백작이 기다리고 있다는 별채로 헤르난을 안내했다.

헤르난은 백작성의 별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인지를 알았다. 남부에 사는 귀족이라면, 헤르난처럼 남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는 외톨이라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즐기기 위해서건 피하기 위해서건 알고 있어야 하는 특별한 장소로 안내하는 여자를 따라, 헤르난은 느릿한 걸음을 옮겼다.

별채는 밝고 화려한 연회장과 대조적인, 아주 어둡고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누군가는 발을 들이고 싶어 안달을 내는 곳이었지만 적어도 헤르난에겐 피하고만 싶은 장소였다.

그는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농밀한 입맞춤을 나누고 있는 이들을 모른 척 스쳐 지나갔다. 빛이 닿지 않는 구석에 얼굴을 숨긴 욕망들에 시선을 보내지 않으려 했다.

부끄러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헤르난은 불편한 다리를 최대한 바삐 움직였다. 그런 헤르난을 놀리듯, 누구의 것인지 모를 끈적한 숨소리와 교성이 등 뒤로 따라붙었다.

여자가 멈춘 곳은 긴 복도의 가장 끝 방이었다. 문이 없는 방 안으로 들어서는 헤르난을 테리아 백작 칼린 도프와 그녀의 남편이 반겼다.

부부는 집채만 한 거대한 덩치를 가진 백작의 남편도 포근히 감싸 안아 줄 정도로 커다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시중을 받고 있었다. 서로를 꽉 끌어안고 있는 다정한 부부의 모습이었다.

다만, 그들의 시중을 드는 이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 평범성을 깼다.

“오셨군요, 스칼라 남작.”

남편과의 포옹은 풀었으나 몸은 여전히 푹신한 소파에 기대 누운 채로 백작은 헤르난에게 손을 뻗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백작님.”

말을 마친 헤르난이 백작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부군께서도…….”

칼린 도프의 남편인 히어르에게 인사를 건네려던 헤르난의 말문이 막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히어르가 헤르난을 격의 없이 꽉 끌어안은 덕이었다. 밝은 웃음과 함께였다.

먼 동대륙에서 건너온 외국인인 백작의 남편은 조금 어눌한 발음으로 짧은 인사말을 건넨 후에야 헤르난에게서 몸을 뗐다. 뺨에 입을 맞춘 건 덤이었다.

백작은 두 남자가 나눈 포옹의 어디가 그렇게 즐거웠는지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그녀의 호쾌한 인상을 닮은 시원시원한 웃음소리였다.

“남작이 마음에 드나 봅니다.”

다시 제 옆에 앉은 남편의 가슴팍을 손등으로 친 백작이 말했다.

헤르난은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백작 부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기다렸다는 듯 헤르난의 앞에 차를 내놨다.

어두운 공간을 밝히고 있는 불빛에서 느껴지는 묘한 색감도, 도자기 인형처럼 무감한 얼굴로 부끄러움도 없이 성기를 드러내 놓고 있는 시종도, 어딘가 즐거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자신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백작 부부도…… 헤르난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뿐인가, 별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귀를 찔러 오던 외설적인 소리가 마치 하나의 노래처럼 뒤섞여 이 복도 끝방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이 넓은 별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헤르난은 평생 알고 싶지 않았다.

“봉사를 해 드려야 할까요?”

흑단 같은 긴 머리칼을 하나로 모아 묶은 남자 시종이 헤르난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헤르난이 도움을 청하듯 백작을 바라봤다.

“음, 아니.”

다행히 백작이 손을 휘저어 시종을 뒤로 물렸다.

헤르난 쪽을 향해 몸을 반쯤 기울이고 앉아 있던 히어르가 백작에게 무어라 말을 건넸다. 헤르난은 알지 못하는 언어를 내뱉는 그의 얼굴에 백작의 것을 닮은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아까는 농담 비슷한 걸 한 거였는데. 지금 보니 내 남편이 남작을 정말 마음에 들어 하나 보네요.”

감사를 전하기라도 해야 하는 걸까. 의도를 모를 백작의 말을 곱씹으며 헤르난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뜻 모를 히어르의 말이 몇 마디 더 이어졌다. 백작은 히어르에 말에 공감을 표하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속내를 알 수 없어 부담스러운 시선과 함께였다. 지금 저들의 앞에 앉아 있는 게 칼릭스가 아니라 저여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예전부터 묻고 싶은 게 있었대요.”

백작의 말이 이어졌다.

“소문이랑 다르게 너무 순진해 보이는데, 닳고 닳은 게 순진한 척을 하는 건지 진짜 순진한 건지 알고 싶다는군요. 음, 크고 좋은 침대 위에서?”

말을 마친 백작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귀족의 의무와 체면 따위를 크게 중시하지 않는 풍조를 가진 남부의 귀족 중에는 백작 부부처럼 질 낮은 농담이나 과격한 말을 던지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기분 나쁜 농담을 입에 올리는 건 테리아 백작 부부밖에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나랑 남편이 왜 그렇게 남작이랑 같이 놀고 싶어서 안달을 냈는지 알아요?”

“……아뇨, 모릅니다.”

“모른다기엔, 생각해 뒀던 게 있는 얼굴 같은데? 너무 비장해 보여.”

옅은 미소와 함께 백작은 말을 이었다.

“소문처럼, 우리가 칼릭스 히페리온을 만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해요?”

케인을 쥔 헤르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긴장으로 목울대가 움직였다.

“나는 편지에 그 남자의 이름은 쓰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오해를 하네요. 뭐, 그런 오해를 할 수도 있어요. 우리가 아름다운 사람을 좋아하는 건 맞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칼릭스 히페리온이 아니라 당신과 더 친해지고 싶어요.”

“…….”

“우리는 아름다운 것들도 좋아하지만 그보단 속이 곪은 것들을 더 좋아하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백작이 가볍게 몸을 움직여 헤르난의 앞에 섰다. 그녀가 만들어 낸 그림자가 앉아 있는 헤르난 위에 드리워졌다.

“그게 무슨…….”

헤르난의 말끝이 흐려졌다.

백작은 말릴 새도 없이 헤르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고개를 살짝 올려 서로의 시선을 맞췄다. 당황한 헤르난은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백작을 따라나선 히어르가 헤르난의 뒤에서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렀다.

“백작님.”

“외롭죠?”

갑작스러운 물음과 함께, 백작의 손끝이 헤르난의 뺨에 닿았다.

“솔직하게 말해 봐요. 너무 외롭잖아.”

다정한 여자의 음성이 헤르난의 귀를 간질였다.

외로움. 그 한마디가 순간 헤르난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날카로운 검에 등을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숨을 내쉬는 일이 버겁게 느껴졌다. 몸이 굳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너무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가여워라.”

안타까움을 담아 백작은 말했다.

제 부인의 말에 호응하듯, 헤르난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커다란 두 손이 그녀의 목소리만큼이나 살갑고 다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작, 외롭다는 말 한마디가 사람을 이렇게 가련하게 만들 수 있다니…….”

백작의 손끝이 이마 위로 흘러내린 헤르난의 검은색 머리칼을 툭, 건드렸다.

“당신 이름이 붙여진 소문 중에 진짜는 없다는 거,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는 알아요. 처음 본 순간 한눈에 알았어. 당신의 외로움과 순결함을 말이야.”

백작의 나지막한 속삭임이 헤르난에게 닿았다.

“우리는 남작의 외로움을 달래 주고 싶어요.”

백작의 손이 헤르난의 뺨에서 목을 타고 내려왔다. 뒤에선 히어르가 헤르난은 알아듣지 못할 저급한 말을 계속해 속삭였다.

크고 억센 히어르의 손이 헤르난의 목을 단단히 감싸고 있던 옷깃을 갈랐다. 어울리지 않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섬세한 손길로 드러난 목덜미를 쓸었다.

부드럽기만 하던 손길이 끈적한 모습으로 변해 갈 때가 돼서야 헤르난은 정신을 차렸다.

이 사람들은 제게 질 낮은 농담을 건넨 게 아니었다. 진지한 제안을 한 것이었다.

헤르난은 자신의 뒤를 막아선 남자의 뜨거운 손과 앞을 막아선 여자의 붉은색 시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여차하면 휘두를 생각으로 헤르난은 케인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뒤에 있는 히어르가 조금 더 가까워졌을 때…….

“이런. 우리가 조금 흥분했네요. 아직 허락도 받질 못했는데.”

하지만 헤르난보다 먼저 백작이 행동했다. 그녀는 덫에 걸린 동물처럼 몸을 굳힌 헤르난에게서 손을 떼어 냈다. 긴장한 헤르난의 굳은 얼굴이 그녀에게 즐거움을 줬다.

“저는, 이런 이유로 백작님을 찾아뵌 것이 아닙니다.”

백작과 거리가 벌어진 틈을 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세운 헤르난이 말했다. 다행히 백작 부부 중 그 누구도 헤르난을 막아서지 않았다.

“먼저 돌아가야만 하는 실례를 이해해 주세요.”

“그럼요, 남작. 이해합니다.”

항시 그늘져 보이던 남자의 잘생긴 얼굴 위에 떠오른 곤혹스러움과 두려움, 수치를 맛보며 백작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더했다.

“외로움이 너무 커져서 그걸 다 잊고 싶어질 때, 언제든 찾아와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게 해 줄 테니까.”

“…….”

“이건 제안이지 강요가 아니에요. 그냥, 외로울 때마다 우리를 떠올리면 좋겠다 싶어서 한 제안. 강제로 남의 몸을 여는 취미는 없답니다.”

헤르난을 따라 일어선 백작이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백작의 손등에 입을 맞췄던 헤르난처럼, 백작은 헤르난의 손을 잡고 그 손등에 입을 맞췄다. 여자의 새빨간 눈동자만큼이나 높은 체온이 차가운 손등에 닿았다 떨어져 나갔다.

벌어진 옷깃 사이로 드러난 목에는 남자의 입술이 닿았다. 짧은 입맞춤을 끝낸 히어르는 헤르난에 귀에 대고 그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속삭였다.

“또 봐요.”

그 뒤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엉성한 인사말을 던져 둔 채, 헤르난은 급히 백작 부부에게서 멀어졌다. 그를 별채까지 안내해 줬던 안내자는 배웅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는 듯 뒤로 물러났다.

헤르난은 어두운 복도를 걸어 도망치듯 별채를 빠져나왔다. 저를 지탱해 주는 케인이 없었다면 진즉 고꾸라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문득, 헤르난은 연회장에 있을 칼릭스가 보고 싶어졌다.

그를 마주하면……. 아니. 머릿속에 떠오른 그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헤르난은 가까스로 무시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당황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얼빠진 모습을 칼릭스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믿음직하고 멋진 남자와 거리가 멀어졌다는 걸 알았다. 칼릭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 역시 이미 틀렸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릭스에게 이런 비웃음만 살 모습까지 가감 없이 보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아.”

목적지도 없이 걸음을 옮기던 헤르난의 발이 엉켰다. 헤르난은 균형을 잡으려 노력할 새도 없이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이상하게, 다시 일어설 힘이 나지 않았다.

헤르난은 주위를 둘러봤다. 그제야 지금, 자신이 사람 없는 후원의 초입에 볼썽사납게 주저앉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일어나야 하는데…….”

하지만 그 혼잣말이 무색하게도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발치에 떨어져 있는 케인을 주워 들 여력도 없었다.

남부 지역 특유의 후덥지근하면서도 끈적하진 않은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헤르난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곧, 침묵이 그를 찾았다.

헤르난은 가만히 고개만 들어 후원을 밝히고 있는 불빛을 바라봤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새하얀 불빛들이 마치 반딧불이처럼 보였다.

연회장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와 후원의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연인들의 웃음소리가 헤르난이 완전한 고요에 잠기는 것을 막아섰다.

헤르난은 한참이나, 어둠 속을 배회하는 작은 빛을 바라봤다.

〈솔직하게 말해 봐요. 너무 외롭잖아.〉

칼린 도프의 목소리가 헤르난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외로움이, 백작의 말을 듣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폐부 깊은 곳까지 쏟아져 들어왔다.

백작의 말이 맞았다. 헤르난 말론은 외로웠다. 아주 긴 시간 모른 척하고 살아왔을 뿐이었다.

헤르난은 칼린 도프와 그녀의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몸이, 마음이 어디서 왔는지 모를 불씨를 맞아 조금씩 타들어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 혼란스러운 온도를 식힐 수만 있다면, 차라리 백작성의 별채에 남아 있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길 위에 홀로 버려졌던 것처럼 홀로 죽게 될 거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당연히 홀로 감내해야 할 그깟 외로움이 뭐라고.

헤르난은 자신을 찾아온 사치스러운 감정이, 주제 모르는 마음이 괴로웠다. 당장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빛도 없이 새까맣던 디아만테의 지하 감옥에서도 품어 본 적 없던 생각이 헤르난을 덮쳤다.

* * *

평범한 하인 잭스는 테리아 백작성의 규모에 걸맞은 휘황찬란한 파티에서 웨이터 노릇을 하는 중이었다. 길고 지루한 일이었다.

잠시 한가한 틈을 타 휴식 공간이 있는 후원 근처로 빠져나온 잭스는 미리 말아 둔 연초를 품에서 꺼내 입에 물었다. 하지만 불을 붙이기 직전, 조금 이상한 사람을 발견했다.

어떤 남자가 후원 초입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귀찮게.”

잭스는 혀를 찼다.

파티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돌아다니다 길을 잘못 든 이가 분명했다. 반갑지 않은 취객이 더 큰 소동을 벌이기 전에 남자를 안전한 곳으로 안내해야 했다.

아껴 둔 연초를 다시 조끼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은 잭스가 남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 선생님…….”

잭스가 울고 있는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참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곧, 눈물에 젖은 남자의 어두운 갈색 눈동자가 그 안에 잭스를 담았다. 잭스는 순간 말을 잃었다. 피우지도 않은 연초의 쓴 냄새가 목구멍에 걸린 기분이었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남자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차라리 술에 취한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그 꼴이 엉망이었다.

차마 여밀 생각도 못 한 듯 벌어져 있는 옷깃이며 헝클어진 머리칼, 눈물에 젖은 얼굴. 이 백작성에 처음 들어설 때만 해도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괜찮으세요?”

슬쩍 남자의 옆에 쪼그려 앉은 잭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잭스는 남자가 혹시 몹쓸 짓이라도 당한 게 아닌가 걱정됐다. 조금 마른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꽤 좋은 체격을 가진 남자를 다른 곳에서 봤다면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테리아 백작의 성이었다. 그것도 파티가 열린.

“혹시, 무슨 일이 있으셨다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서대륙의 변태란 변태들은 다 모이는 백작의 파티에선 간혹 순진한 사람들이 몹쓸 짓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곤 했다. 하지만 아주 의외로, 그리고 다행히도, 성의 주인인 칼린 도프는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관계를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나쁜 일이 벌어지는 경우엔 아주 대단한 방법으로 확실한 처리를 해 줬다. 그러니 이 남자도 백작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고, 말을 전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말들은 눈물에 파묻혀 끝내 하나의 문장이 되지 못했다.

“일단은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배정받으신 방이 있다면 그쪽으로, 아니면 다른 손님방을 열어 드릴게요.”

눈물을 닦아 줘야 하나? 하지만 그게 위협적인 행동으로 느껴지면 어쩌지? 열심히 머리를 굴려 고민하던 잭스가 간신히 말을 건넸다.

“……친절은 감사하지만, 혼자 갈 수 있습니다.”

침묵하던 남자가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혼자 못 갈 것 같은데요. 손을 움직여 무언가를 찾는 남자를 보며 잭스는 생각했다.

말을 잇는 걸 포기한 잭스가 남자의 주변을 살펴봤다. 곧, 잭스의 눈에 남자의 발치에 떨어져 있는 케인이 걸렸다. 제 눈앞의 남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다리가 불편한가? 손님들 중에 누가……. 하지만 잭스의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누군가, 그의 목덜미를 말 그대로 낚아챘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숨통이 막혔다. 놀란 잭스는 주위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그러나 죽어도 제 목깃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단단한 힘이 잭스의 손을 가볍게 가로막았다.

잠시 후에야, 잭스는 그에게 갑작스러운 고통을 안겨 준 이름 모를 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울고 있던 남자가 잭스에게서 흉포한 손을 떼어 내 줬기 때문이었다. 그저 남자가 놀란 얼굴을 하고 그의 쪽으로 절 끌어당겨 주기만 했을 뿐인데, 목을 누르던 힘이 순식간에 약해졌다.

멱살을 잡아 올리듯 자신의 목깃을 쥐었던 손아귀에서 벗어난 잭스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봤다. 도대체 뭐 하는 새끼길래 다짜고짜 남의 목을 조른 건가 싶었다.

어쩌면, 그 손의 주인이 손님을 울린 못된 인간일 수도 있었다.

“……뭐야.”

달을 등지고 선 이의 새파란 시선이 잭스에게 닿았다. 남자에게 붙잡혔던 목덜미 위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 이 백작성에 모인 모든 이들 중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을 남자가 저를, 아니, 어쩌면 울고 있던 남자까지 총 두 사람을 죽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의 예쁜 얼굴과 대조되는 험악한 시선에 담긴 절절 끓는 살기를 마주하며 잭스는 울고 있는 손님을 자신의 뒤에 숨기려 노력했다. 그 어설픈 모습을 마주한 다른 남자의 표정이 더욱 심상치 않게 변했다.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러야 도와줄 사람이 올까.’

얼굴이 하얘진 잭스가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갑자기 나타난 남자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잭스의 뒤에 있는 남자에게 시선이 붙잡힌 탓이었다.

“너…… 왜 우는 거야.”

남자의 성난 목소리가 잭스의 뒤에 있는 손님에게로 향했다.

잭스의 머리가 다시 한번 바쁘게 돌아갔다. 이 남자가 저 손님에게 몹쓸 짓을 한 변태 새끼가 맞나 보다. 예쁜 얼굴은 자신이 저지르는 쓰레기 짓을 숨기기 위한 위장이 분명하구나.

그런데…… 오늘 파티에 초대된 손님 중에 저 정도로 잘난 얼굴을 가진 남자는 하나밖에 없지 않나?

그 순간 먼발치에서 봤던 남작 부부의 모습이 잭스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남작님이셨군요.”

눈을 똥그랗게 뜬 잭스가 뒤를 돌아봤다. 평범한 손님인 줄 알았던 남작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선, 자신의 두 뺨을 적시고 있던 눈물을 황급히 닦아 내고 있었다.

불쌍해. 남작을 둘러싼 소문을 순식간에 다 잊어버린 잭스가 황급히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곧, 그의 뒷덜미를 잡았던 손에 이끌려 바닥에 나뒹굴게 됐지만 말이다.

아름다운 남자, 그러니까 치료가 필요할 정도의 폭력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칼릭스 히페리온이 남작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어떤 행동도 말도 없이 남작만을 눈에 담고 있는 칼릭스의 얼굴이 매우 초조해 보였다. 보면 안 될 것을 봐 버린 사람처럼 당황한 듯 보이기도, 길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정신없어 보이기도 했다.

귀족 부부 사이의 일에 저같이 평범한 사람이 끼어들 수는 없었다. 남작 부부처럼 소문이 무성한 경우엔 더 그랬다.

하지만 너무 슬퍼 보이던 남작의 얼굴을 생각하면, 이대로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잭스는 도망치지 않고 그들을 지켜보기로 했다.

“대답해. 왜 우는 거야.”

칼릭스가 남작의 어깨를 쥐고 말했다. 남작은 도무지 멈추지 않는 눈물에 당황해 제 얼굴을 가리기 바빠 보였다.

“수도 감옥에서도 울지 않던 사람이, 뒈질 때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던 사람이 너잖아. 그런데…… 왜…….”

칼릭스가 남작에게 무어라 중얼거렸다. 잭스는 알아듣지 못할 불안이 담긴 말들이었다.

“헤르난. 뭐라고 말 좀 해 봐.”

돌아오지 않는 답에 답답함을, 혹은 분노를 느끼던 칼릭스가 짧은 욕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새끼 때문이야?”

날아드는 매서운 시선에 잭스는 다시 한번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칼릭스가 자신을 향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오자 진심으로 겁을 먹었다. 말도 안 될 정도로, 삶의 위협을 느꼈다.

그러나 다시 멱살이 잡히진 않았다. 남작이 입을 열어 잭스를 변호해 준 덕이었다.

그에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칼릭스는 영 내켜 하지 않는 얼굴을 하고서 잭스를 내려다봤다.

“너. 저 사람이 왜 우는지 알아?”

이번엔 그의 시선을 닮은 따가운 물음이 날아들었다.

“아, 아뇨. 모릅니다.”

“그럼, 아는 거 있어?”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남자의 얼굴이 무섭게 변해 갔다.

자신이 남작의 눈물에 조금이라도 얽혀 있다면, 이 자리에서 죽이고도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작을 저렇게 만든 게 칼릭스 히페리온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의 안에 양심이라는 게 존재하고 있다면 말이다.

“몹쓸 짓을 당했을지도 모를 분 앞에서 너무 흥분하시면 안 됩니다. 보세요. 겁을 먹으셨잖아요.”

남작이 듣지 못하게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잭스가 칼릭스에게 속삭였다.

말을 잘 알아들은 모양인지 칼릭스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곧, 그가 남작을 위해서 입을 다문 게 아니란 걸 알게 됐다. 칼릭스는 그저 잭스의 말을 제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반복하느라 잠시 조용해졌을 뿐이었다.

“씹…… 이런 미친, 말도 안 되는…….”

다시 입을 연 칼릭스의 희게 질린 얼굴을, 그 흰 얼굴 위에 칠해진 새까만 분노를 잭스는 홀로 마주해야 했다. 연회장으로 일을 하러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칼릭스의 초조한 시선이 남작에게로 옮겨 갔다. 눈물 자국이 남은 얼굴을 더듬던 시선이 누군가 헤집어 놓은 듯 헝클어져 있는 머리칼이며 단추 몇 개가 풀어 헤쳐져 구겨지고 벌어진 셔츠로, 훤히 드러난 목으로 옮겨 갔다. 이제야 그것들이 눈에 들어온 듯 보였다.

“누구야.”

칼릭스는 아까와 같은 질문을 다시 한번 남작에게 던졌다. 다만, 그 안에 품은 뜻이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같은 물음을 던진 칼릭스에게 남작 역시 아까와 같은 행동을 취했다. 남작은 그저 침묵했다. 도대체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사람이 어설프게 만들어 낸 침묵이었다.

“말해 봐. 누가 널 울게 한 거야.”

몸을 숙여 남작의 뺨을 쥔 칼릭스가 남작의 귓가에 다정히 속삭였다. 칼릭스의 차가운 얼굴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다정함이었다.

“그 사람이 누구건, 내가 대신 죽여 줄게.”

“…….”

“네 눈앞에서 그 새끼를 토막 내 줄 테니까, 그러니까, 울지 마. 응?”

고요한 후원에 칼릭스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잭스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남작 부부를 바라봤다.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칼릭스 히페리온은 남편인 남작을 죽일 생각만 하고 산다던데, 증오해 마지않는 사람이 저 꼴을 하고 있다면 즐거워해야 하는 게 아닌가. 저렇게 사나운 초조와 불안을 느낄 일이 있나 싶었다. 묘한 공포를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덧, 눈물을 멈춘 남작이 자신의 뺨에서 칼릭스의 손을 떼어 냈다. 계면쩍은 웃음과 함께 남작은 칼릭스의 눈을 피했다.

말이 이어졌다.

“다 제 잘못입니다.”

“…….”

“두 분께 민폐를 끼친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사과를 건네는 남작에게, 놀란 잭스가 답했다.

남작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저는 먼저…….”

말을 멈춘 남작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그라들었다. 그 위로 삽시간에 우울이 밀려들었다.

“아닙니다. 아직 파티는 끝나지 않았으니, 다시 돌아가야겠군요.”

“장난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칼릭스가 자리에서 남작을 일으켜 세웠다. 잭스의 뒷덜미를 잡고 내팽개칠 때와는 달리 제법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파티는 무슨 파티. 내가 그 시끄러운 새끼들 입을 죄다 찢어 버리는 꼴을 보고 싶은 게 아니면, 잠자코 마차로 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케인까지 집어 든 칼릭스가 그것을 제 손에 쥐며 말했다.

“하지만 이곳에 혼자 머무르시기엔…….”

남작은 조금은 당황한 얼굴로, 조금은 겁을 먹은 얼굴로, 또 조금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칼릭스의 눈치를 봤다.

“머물러? 내가? 아, 네가 널 그 꼴로 만든 돼지도 안 먹을 새끼가 누군지 알려 주면 머무를 수도 있겠지. 그런데 넌…… 나한테 말할 생각이 없잖아.”

아까와 달리 조금 거칠어진 손길로 칼릭스는 남작의 흐트러진 옷차림을 정리해 줬다.

“스칼라로 돌아갈 거야.”

한숨과 함께 칼릭스는 남작을 잡아끌었다. 무어라 항변하려는 남작의 허리춤을 자신의 팔로 단단히 붙들었다.

걸음을 옮기려던 칼릭스가 잠시 잭스를 향해 고개 돌렸다.

“넌 따라오지 마.”

아니, 따라갈 생각도 없었는데요. 차마 그렇게 말은 하지 못하고 잭스는 안녕히 가시라는 공손한 작별을 건넸다. 반쯤 미친 게 분명해 보이는 칼릭스 히페리온이 아니라 남작을 향한 인사였다. 적어도 그의 마음속에선 말이다.

칼릭스 히페리온은 그가 그토록 미워한다는 스칼라 남작을 옆에 끼고 후원을 빠져나갔다. 남작을 따라 느리게 걷는 칼릭스의 모습이 꼭 보물을 끌어안고 있는 사람처럼 보여 이상했다.

짧은 꿈을 꾼 기분이었다. 잭스는 조금씩 멀어져 가는 남작 부부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연초를 피울 생각은 싹 가셨다. 어디서 농땡이를 부리다 이제 오냐며 성을 낼 게 분명한 동료들에게 저 부부의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다. 다들 놀라 입을 다물 것이다.

* * *

다시 스칼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헤르난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내보인 추태가 너무 창피했고, 말이 없는 칼릭스가 걱정됐다.

칼릭스의 침묵은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를 분노를 품은 상태로 이어지고 있었다. 괜한 열이 올라 뜨거워진 머리로도 그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어 낼 수 있었다.

이 분위기가 테리아 백작성의 후원에서부터 시작된 건 알았다. 하지만 헤르난은 후원에서의 일을 선명하게 떠올리지 못했다.

그저 제가 덩칫값도 못 하고 누군가에게 맞거나 비웃음을 당해 울고 있었다고 여긴 칼릭스가, 헤르난 말론같이 덜떨어진 남자와 묶여 있어야만 하는 본인의 상황에 분노하고 있는 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의미 없는 추측이었다.

헤르난은 망상을 멈추기로 했다. 오늘 테리아에서 일어난 일로 칼릭스가 절 한심하게 여길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겠지만, 그 뿐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칼릭스가 백작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테리아를 떠나 버렸다는 거였다. 그의 평판이 나빠질까 봐 걱정됐다. 스칼라 남작이 집으로 돌아가자며 난리를 치는 통에 칼릭스 히페리온이 억지로 밤의 마차에 올라야만 했다는 소문이라도 흘려 둬야 하나 싶었다.

“억지로라도 답을 들어서, 그 자리에서 널 건드린 인간을 찾아냈어야 했는데.”

그때 칼릭스의 침잠한 목소리가 침묵 위에 내려앉았다. 놀란 헤르난이 고개를 들어 칼릭스를 봤다.

“너는…….”

“…….”

“너는,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난 건지 알겠어?”

마차의 작은 창문을 가득 메우고 있는 새까만 어둠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칼릭스는 말했다. 잘 닦여 반질반질한 창에 비치는 아름다운 얼굴이 가라앉지 않은 분노로 달궈져 있었다.

“나도 몰라서 물어보는 거야.”

헤르난이 창을 통해 칼릭스를 훔쳐보고 있었던 것처럼, 칼릭스는 창에 비치는 헤르난과 눈을 맞추며 말을 건네 왔다.

그 시선에 붙들려 눈을 피하지도 못하고 헤르난은 속으로 해야 할 말을 골랐다. 하지만 그 어느 답도 허술한 추측에 불과해 칼릭스를 만족시켜 줄 것 같진 않았다.

“……죄송합니다.”

그래서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사과를 건넸다.

“네가 죄송할 게 뭔데?”

“…….”

“죄송하면, 무슨 일을 당한 건지 솔직하게 말해. 백작성에 있던 것들을 하나하나 찾아가서 네가 내 남편한테 손댔냐고 멱살을 잡기 전에.”

창문에서 눈을 뗀 칼릭스가 헤르난을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렸다.

“내가 못 할 것 같아? 지금은 네가 하도 비 맞은 개새끼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어서, 그래서 마차로 온 것뿐이야.”

얼어붙은 헤르난과 시선을 맞추며 칼릭스는 말을 이었다.

“너는 모르지? 갑자기 사라져서는 나타나질 않는 널, 내가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모르잖아. 어디 벽에 머리라도 잘못 박고 뒈졌을까 봐, 미친 사람처럼 찾아다녔어. 그런데…… 그보다 더한 꼴을 보게 됐네.”

칼릭스의 손끝이 헤르난의 머리칼에 닿았다. 애써 뒤로 넘긴 게 무색하게 헝클어져 이마 위로 흘러내려 온 머리카락을 정리해 줬다.

말이 이어졌다.

“네가 지금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절름발이라고 해도, 한때는 기사였던 남자잖아. 키도 크고 말이야. 너한테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많지는 않을 거야.”

“…….”

“도대체 어떤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너를 울렸을까? 너를, 범하려고 했을까?”

헤르난은 당황스러웠다. 소름 끼치는 일을 겪긴 했지만, 칼릭스가 생각하는 정도의 사건이 일어난 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게 자신이 부린 추태의 원인 역시 아니었기에 헤르난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끝까지 갔어도, 너는 나한테 아무 일 없었다고 말했을까? 그랬겠지.”

칼릭스가 헤르난의 짧은 머리칼을 아프지 않게 쥐어 보았다. 언젠가, 쥐면 자신의 손을 가득 채우던 긴 머리카락을 떠올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한 가지 일만, 그것도 너랑 관련된 일만 계속 생각하기 싫어. 그런데 자꾸 생각이 나서 돌아 버릴 것 같아.”

다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내 호위 기사를 모욕하는 건 날 모욕하는 거나 다름없어.〉

불현듯 먼 옛날 칼릭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칼릭스가 그때처럼 모욕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으나 싫으나 자신이 그의 남편 자리에 있는 상태니 말이다.

“……자존심이 상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얼굴이 하얘진 헤르난이 짧은 말 한마디를 내뱉었다.

헤르난은 칼릭스가 그저 자신만을 한심해하며 이 일을 넘어가기를 바랐다. 부족한 저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않길 바랐다. 모욕감을 느끼지 않길 바랐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냥, 술에 잔뜩 취해서 정신이 없는 그런 사람한테,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창부 취급을 받고 나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헤르난은 대충 칼릭스가 오해하고 있는, 자신을 가장 한심하게 여길 만한 방향을 짚었다. 더듬더듬 말이 이어졌다.

“술이 무섭긴 합니다. 저 같은 남자한테도 그런 짓을 하려고 들고. 아니, 어쩌면 제가…… 고마워하면서 화대를 쥐여 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네요.”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은 헤르난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칼릭스가 그런 헤르난을 따라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었다. 헤르난은 칼릭스를 따라 더 크게 웃어 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네가 너무 놀라서 그딴 헛소리를 나불대고 있는 것 같으니까, 일단은 넘어가 줄게.”

칼릭스가 몸을 뒤로 물리며 말을 이었다.

“속아 주겠다는 뜻은 아니야.”

칼릭스라면 자신의 말을 듣고 술김에 너랑 몸을 섞을 뻔한 그 사람이 안 됐다며 소리 내 웃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전보다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헤르난은 당혹스러웠다.

“이름 모를 그 새끼한텐 참 다행이지. 좆을 놀리기라도 했으면, 우리가 지금처럼 마차에 앉아 말이나 주고받고 있지도 못했을 텐데.”

“……이름에 해가 될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게 조심하겠습니다.”

진심을 담아 헤르난이 말했다. 그러나 칼릭스가 혀를 차는 걸 보니 제대로 된 말을 내뱉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헤르난.”

칼릭스가 이름을 불러 왔다.

“앞으로 내 시야에서 벗어날 생각 하지 마. 어딜 가든 함께 움직일 거야.”

명령조인 어투와 맞지 않는 다정한 목소리로 칼릭스는 말했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착각이 들게 할 정도였다.

“테리아엔…… 다시 발 들일 필요 없게 해 줄게.”

“…….”

“가진 건 얼굴밖에 없는 시절로 돌아와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니. 이제껏 못되게 살아온 보람이 있네.”

칼릭스가 짧게 웃음 지었다. 곧, 말 한마디가 더 덧붙었다.

“궁금해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 줄 거지?”

헤르난은 자신의 발목을 붙잡아 오는 기이한 착각에 홀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언제나처럼 칼릭스를 향해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차는 밤을 달려 다시, 스칼라로 향해 갔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