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디아만테
짠 내음이 묻어 있는 미지근한 바닷바람이 헤르난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쳐 달아났다.
발코니 난간에 몸을 반쯤 기대고 선 헤르난이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푸른 바다를 바라봤다. 이제 막 수평선 위로 떠오른 아침 햇살이 바다 위를 빛으로 수놓고 있었다.
아직은 이른 아침, 헤르난을 발코니에 세운 건 지난 새벽녘 찾아온 꿈이었다.
꿈은 헤르난의 앞에 과거의 한 토막을 내어 놓았다. 굳이 꿈속에서가 아니더라도 이미 긴 세월 계속해서 떠올리고 또 떠올려 왔던 시간이었다.
헤르난은 칼릭스가 지금보다 조금 더 앳된 얼굴을 했을 때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켰다. 비밀이 까발려지면서 저도 모르게 내뱉은 어설픈 사랑 고백에 눈물 섞인 비난의 답이 돌아왔다.
〈나는 네가 내 가족이라고, 친구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나만, 나만 그렇게 생각했던 거네. 너도 다른 사람들이랑, 남자들이랑 똑같았어.〉
빛을 받은 보석처럼 반짝이는 파란색 눈동자에 선 핏발이, 흐르는 눈물이 안쓰러웠지만 헤르난은 차마 그 눈물을 닦아 줄 수 없었다.
〈나랑 자고 싶어서, 그래서 잘해 준 거야?〉
잔뜩 날이 선 눈빛과는 달리 칼릭스의 목소리가 떨렸었다.
헤르난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목소리가 나가지 않아 허튼 변명을 내어 놓을 수도, 그를 위로할 수도 없었다.
〈거짓말쟁이. 기만자. 역겨워.〉
칼릭스에게 맞은 뺨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사랑이 그에게 상처를 남겼다는 것이, 앞으로도 쭉 상처로만 남아 있을 거란 사실이 아플 뿐이었다.
곁에만 있게 해 주세요, 도련님. 주제넘은 마음을 품어서 죄송합니다. 헤르난은 그가 사랑하는 아름답고 상처 많은 도련님께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해야 했다.
깨고 싶어도 쉬이 깨지지 않는 꿈속에서 나가는 길을 찾지 못한 헤르난은 계속해서 같은 순간을 맴돌았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헤르난은 어둠 속에서 간신히 나가는 길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 길의 마지막에 다다라 만난 건 현실이 아니었다.
검은 피가 묻어 있는 갑옷을 입은 헤르난은 칼릭스와 루체를 마주해야 했다. 서로의 손을 꽉 잡은 두 사람은 헤르난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그렇지만 곧 루체가, 헤르난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는 헤르난에게 말했다.
〈돌아온 거야?〉
〈루체, 도련님은…….〉
〈헤르난. 칼릭스는 네가 보고 싶지 않대. 그래서 내가 대신 나온 거야.〉
새까만 그림자가 헤르난에게서 칼릭스의 얼굴을 숨겼다.
〈우린 네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어.〉
〈…….〉
〈네가, 죽기를 바랐어.〉
〈나는 도련님을 위해서 싸웠어, 루체. 몇 번이나 죽을 뻔했는데, 그래도 그 사람이 보고 싶어서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어. 한 번만. 한 번만이라도 도련님을 만나게 해 줘.〉
〈무슨 명목으로? 이제 넌 칼릭스의 호위 기사도 아니잖아.〉
〈…….〉
〈돌아가, 헤르난.〉
칼릭스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쫓겨났을 때처럼, 헤르난은 긴 꿈에서 쫓겨났다.
잠에서 깨어났을 땐 이제 막 해가 떠오르려는 이른 아침이었다. 헤르난은 숨을 쉬기 위해 한참이나 노력해야 했다. 무언가가 목에 걸린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질 않았다.
루체의 손에 이끌려 별장에서 쫓겨나고……. 칼릭스, 그래, 칼릭스가 보고 싶어서 파티에 찾아갔다가 술을 뒤집어썼는데……. 나는, 망신을 당한 것보다 칼릭스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움이 더 끔찍했지……. 칼릭스는 정말 내가 전장에서 죽길 바랐을까? 그런데 내가 그다음에 뭘 했지? 그래, 후작의 손을 잡고…….
칼릭스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뺏었구나.
헤르난은 나이트가운만을 입은 채로 침대를 빠져나왔다. 다리를 질질 끌며 걸음을 옮긴 그가 다급하게 발코니 문을 열어젖혔다. 그제야, 헤르난은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하늘에 뜬 해가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제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시간 역시 뜨고 지는 해를 따라 조용하게 흐르고 있었다.
헤르난에겐 칼릭스를, 그리고 칼릭스가 사랑하는 루체를 도울 기회가 있었다. 그 기회를 떠올리면 불안하던 마음에도 작은 고요가 찾아왔다.
죄를 갚을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게 기뻤다.
발코니 아래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경쾌한 웃음소리를 따라 무거운 발소리가 이어졌다. 연무장으로 가 아침 훈련을 하려는 사병들이었다.
헤르난은 멍하니 사병들을 내려다봤다. 부지런한 이들의 언뜻 보이는 옆얼굴이 가볍고 유쾌했다.
그런 사병들이 지나간 길을 느긋하게 뒤따라가는 남자가 있었다. 칼릭스였다.
오늘은 보수 공사를 마쳤다는 세이어 상단의 화랑이 자리하고 있는 수도, 디아만테로 가는 날이었다. 그런데도 사병들의 훈련에 끼다니.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조금 놀랐다.
시간을 되돌아 어려진 지금보다도 더 어릴 때의 칼릭스는 툭하면 훈련을 빼먹고 도망을 쳤었다. 그나마 공부를 하는 것보다는 검을 휘두르는 걸 좋아했지만, 그렇다고 수업을 빼먹고 도망치는 일을 멈추진 않았었다.
‘정말 어른이 됐구나. ……당연한 일이지만.’
한때, 헤르난은 자신이 칼릭스가 변해 가는 모습을 가장 자세히 지켜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 하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헤르난은 먼 디아만테의 지하 감옥까지 찾아와 말없이 창살 너머의 절 바라보고 또 바라보기만 하던 칼릭스도, 머물던 백작성 별채 바깥에서의 칼릭스도 잘 알지 못했다. 지금 이 새로운 세상에 함께 온 칼릭스를, 잘 알지만 잘 몰랐다.
상념에 빠져 있자니 칼릭스의 뒤를 누군가 황급히 따르는 것이 눈에 띄었다. 대공이 보낸 손님인 레온이었다.
레온은 칼릭스에게 무어라 말을 붙이는 것처럼 보였다. 레온은 칼릭스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해 친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마음이 넓다고 해야 할지 성격이 좋다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칼릭스에게 일방적으로 말을 건네던 레온이 문득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봤다. 조금 위에서 내리꽂히는 시선을 느낀 탓이었다.
발코니에 있는 헤르난을 발견한 레온이 자리에 멈춰 서 웃음 지었다. 황제의 권력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대공의 막내아들이라기엔 너무나 순한 웃음이었다.
슬그머니 주위의 눈치를 본 레온이 헤르난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헤르난은 그런 레온에게 어떻게 반응해 줘야 할지 몰랐다. 그저, 어설프게 레온을 따라 잠시 손을 흔들어 주기만 했다.
하지만 곧 멋쩍은 얼굴을 하고 손을 내렸다. 레온보다 몇 걸음 앞선 곳에 선 칼릭스와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떨어져 죽고 싶어?”
칼릭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발코니 안까지 날아들었다.
놀란 헤르난이 난간에서 몸을 물렸다. 싫은 인간이 한가롭게 노닥거리고 있는 꼬락서니를 이른 아침부터 봐 버렸으니, 얼마나 속이 뒤집힐까 싶어 미안하기도 했다.
언젠가 헤르난 역시 저 아래에서 발코니에 나와 있는 칼릭스를 올려다봤던 때가 있었다. 칼릭스는 그때도 화가 난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냥 오전 중엔 최대한 그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난간에서 물러선 헤르난을 노려보던 칼릭스가 눈을 도록도록 굴리고 있는 레온의 팔을 낚아채 그를 연무장으로 끌고 갔다.
* * *
“네가 꽃 같은 걸 좋아할 줄 몰랐는데.”
말들이 땅을 차고 달음박질하는 소리와 바퀴가 도는 소리만이 간간이 이어지던 마차 안에 칼릭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 어울려.”
어울리지 않게 뚱한 얼굴을 한 칼릭스가 헤르난에게 말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혹여 무릎이라도 닿을까 자신과 대각선 방향으로 떨어져 앉아 있는 칼릭스를 보며 헤르난은 멀뚱히 눈을 깜빡여야 했다.
“꽃을…… 크게 좋아하진 않습니다.”
“무슨. 아주 넋을 놓고 보던데.”
팔짱을 낀 칼릭스가 내놓은 말에 헤르난은 웃음을 흘렸다. 왜 그가 별안간 꽃 얘기를 꺼냈는지 알게 된 탓이었다.
디아만테로 가는 마차에 짐을 싣고 있을 때였다. 남작성으로 커다란 꽃다발 하나가 배달됐다. 회복을 마치고 다시 수도로 떠난 니콜라의 애인이자 태어날 아이의 아버지인 이안이 연인의 앞으로 보낸 것이었다.
마침 니콜라가 잠시 수도로 떠나는 남작 부부의 배웅을 하겠다며 마차 앞까지 나와 있던 터라, 이안의 선물을 바로 받아 볼 수 있었다.
흰색과 분홍색이 본디 한 몸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뒤섞여 있는 꽃다발을 품에 안은 니콜라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헤르난뿐만 아니라 모두가 봄처럼 환한 웃음을 머금은 사랑스러운 청년을 바라봤었다.
하지만 칼릭스가 넋을 놨다는 말을 꺼낼 정도면…… 제가 남들보다 오래 니콜라를 바라보긴 한 모양이었다.
“그랬나요.”
멋쩍은 기분을 느끼며 헤르난은 느릿한 말을 내놨다.
“그래. 평생 꽃다발 한 번 받아 본 적 없는 티를 내면서, 더럽게 불쌍하게 봤어.”
사실, 헤르난은 꽃다발을 본 게 아니라 니콜라의 얼굴을 본 거였다. 꽃향기를 맡는 니콜라의 모습이 꼭 향기가 아니라 사랑을 마시는 것처럼 보여 애틋했었다.
헤르난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을 보는 게 좋았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일은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던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랬던 것 같았다. 어딜 가서 말할 수 없는 이상한 취미였다. 당연히, 칼릭스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스칼라에 돌아가면 꽃집에라도 들러 봐야겠습니다.”
그래서 그냥 서먹하게 웃고 말았다.
“뭐…… 그러든가. 너 혼자 가진 말고.”
대충 대화를 마무리 지은 칼릭스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 칼릭스를 따라 헤르난 역시 창밖을 훔쳐봤다. 지나가는 풍경 속에 더는 남동부의 바다와 포도 농장이 보이질 않았다. 디아만테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수도에 몇 날 며칠을 머물러야 한다는 게 내키진 않았다.
가장 화려한 모습을 하고 대륙 여기저기에서 몰려오는 사람들을 포용하는 수도는 헤르난과 같은 거리의 아이까지 끌어안아 주지는 않았었다. 디아만테가 만들어 준 기억이라곤 버림받고, 쫓기고, 두들겨 맞고, 돈을 떼어 먹힌 것들뿐이었다. 죄인들을 가둬 두는 지하 감옥에서 2년을 보내기도 했다. 칼릭스가 꺼내 주지 않았다면, 아주 오랜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의 디아만테엔 루체가 있었다. 과거의 일들보다 중요한 일이 눈앞에 있었다.
헤르난은 루체를 떠올려 봤다. 칼릭스와 함께 있는 루체를 그려 보고 있자니 거짓말처럼 마음속 불안이 가셨다. 곧 루체 세이어에 관한 새로운 소식도 알게 되겠지. 조금씩, 마음이 들떴다.
* * *
디아만테 외곽에 마련해 둔 2층짜리 저택에 잠시 들렀던 헤르난과 칼릭스는 여독을 풀 새도 없이 곧장 세이어 상단의 화랑으로 향했다.
화랑은 수도에서도 황성과 가까운 중앙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다. 내부 보수 공사를 마무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하얀 건물은 주위의 풍경에 뒤섞이질 못하고 붕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 이질감이 화랑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 줬다.
스칼라에서 온 남작 부부는 곧장 화랑으로, 새하얀 세상으로 들어섰다.
헤르난에겐 예술적 감각이랄 게 없었다. 당연히 그림이나 조각을 보는 눈 역시 없었다. 그가 사랑하는 칼릭스나 루체와 다르게 말이다. 그러니 오늘, 상단과 거래할 예술품을 찾는 건 온전히 칼릭스의 몫이었다.
헤르난은 그저 느리게 걸어 상단 직원과 칼릭스의 뒤를 말없이 쫓았다. 그림을 보는 것보다 그림을 소개하는 직원의 말을 부드럽게 받아 주는 칼릭스를 보는 것이 더 좋았다.
그림이나 조각 몇 작품을 산 뒤 후원이건, 지속적인 거래건 계속해 세이어 상단과 함께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면…… 반년 뒤엔 루체의 귀환을 축하하는 환영 파티의 초대장이 스칼라로도 날아들 터였다.
예전, 여러 화랑을 돌며 데이트를 하던 연인은 이제 이 세이어 상단의 화랑에 걸려 있는 아름다운 그림들 사이에서 그림보다 아름다운 사랑을 속삭이게 될 것이다. 그 어떤 방해꾼도 없이.
“이 그림은…… 그림의 모델이신 루체 세이어 님의 개인 소장품입니다.”
직원의 목소리가 헤르난의 상념을 깨웠다.
칼릭스는 화랑의 직원과 함께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림 앞에 서 있었다. 조세핀이 말했던 루체의 초상화였다.
흰 벽 위에 걸려 있는 그림 속에서 루체는 웃고 있었다. 엄숙한 얼굴을 하고 앞을 바라보거나 화가를 향해 살포시 미소 짓는 대신, 그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누군가는 품위 없는 초상화라고 한마디를 거들 만한 그림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그림 속에서 웃음 짓고 있는 청년이 매력적이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묘했다. 화폭에 담긴 루체는 헤르난이 알고 있는 루체였지만 동시에 그가 알고 있는 루체가 아니었다.
헤르난은 저런 얼굴을 한 루체를 본 적이 없었다. 사랑하는 칼릭스의 옆에 있을 때도 그는 늘 가을 들꽃처럼 은은한 미소만을 짓곤 했다.
그러던 루체가 활짝 웃게 됐다. 아주 긴 시간 루체의 어깨를 짓눌렀던 불행과 가난이, 그것들이 만들어 낸 마음의 결핍이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자 루체는 진심으로 웃을 수 있게 된 거다.
그걸 깨닫자 가슴이 울렁였다.
식당에서 내다 버린 쓰레기를 뒤져 끼니를 해결하던 기억도, 추운 겨울 동상에 걸려 고생했던 기억도, 루체에게 몹쓸 짓을 하려는 사람들을 넘어뜨리고 도망쳤던 기억도, 일한 삯을 주지 않는 가게 주인에게 덤볐다가 뼈가 부러질 정도로 맞았던 기억도…… 이제는 온전히 혼자만의 것이 됐다는 게 이제야 실감이 났다.
이 세상에선, 아주 약간의 불행도 루체에게 닿지 못할 것이다. 문득 찾아온 확신이 헤르난을 기쁘게 했다.
칼릭스는 어떤 마음으로 루체의 초상화를 보고 있을까. 그의 마음이 가늠도 되질 않았다. 그저 지금은 칼릭스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거란 생각만이 들었다.
헤르난은 직원을 불러 그녀와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자세한 이야기는 칼릭스와 나누라며 미뤄 두고 그림의 값만을 먼저 치르기도 했다.
다른 직원과는 상단이 키우고 있는 예술가들의 후원에 관한 말을 나눴다. 칼릭스가 고른 그림을 그린 화가를 후원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하자 직원이 반색하며 웃음 지었다.
후원자들의 밤 행사가 분기마다 열리는데, 그곳에서 후원해 주신 화가들을 만나 볼 수 있을 거라는 설명이 따라붙었다. 잘된 일이었다. 상단의 파티건 후원 행사건 새로운 계절이 올 때쯤엔 루체도 그곳에 있을 테니 말이다.
얼마 안 가 칼릭스가 헤르난의 뒤를 쫓아왔다. 하지만 제대로 입을 열기도 전에 다시 상단의 직원에게 붙들려 갔다. 헤르난이 칼릭스 앞으로 잔뜩 미뤄 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화랑의 초입에 마련된 휴식 공간에 앉아 칼릭스를 기다리며, 헤르난은 할 일 없이 전면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내다봤다.
어느덧, 세상이 까만 어둠에 잠겼다.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화랑에서 보냈구나 싶었다. 오래도록 불편하게 말을 몰았을 마부를 저택에 두고 따로 마차를 부른 게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그에게 미안할 뻔했다.
가만히 밖을 내다보던 헤르난은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화랑을 나섰다. 화랑 바로 앞이자 작은 광장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분수대가 그의 목적지였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빛이 물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는 큰 분수대 난간에 아이 하나가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아이와 조금 떨어진 곳에 헤르난 역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이가 경계심이 어린 눈으로 저를 흘겨보는 게 보였다. 하지만 딱히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길 생각은 하지 않는 듯했다.
헤르난의 시선이 때가 잔뜩 묻은 옷을 입은 아이의 발치에 놓인, 반쯤 빈 꽃바구니에 닿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네.’
루체와 함께 수도의 뒷골목을 헤매고 다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끽해야 열넷이나 열다섯 정도 먹은 소년들의, 하지만 그때의 헤르난에겐 한없이 어른처럼만 보이던 아이들의 아래에서 보호를 받은 적이 있었다.
소년들은 갈 곳 없는 아이들의 밤을 보호해 주는 은인임과 동시에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악인이었다.
아이들은 다양한 일을 했다. 지금 자신의 옆에 있는 아이처럼 귀염성 있게 생긴 아이들에게는 꽃을 파는 일이 돌아갔다. 소매치기 일을 하거나 힘쓰는 일을 해야 했던 아이들은 모두 꽃을 파는 아이들을 부러워했었다.
하지만 꽃을 파는 아이들에게도 고충은 있었다. 할당받은 꽃을 무리의 대장이 원하는 만큼 팔지 못하면 말 그대로 죽어라 맞아야 했다. 남들보다 쉬운 일을 줬는데 그거 하나 제대로 못 하냐는 게 폭력이 가중되는 이유였다.
“꽃을 파니?”
헤르난은 아이에게 물었다. 망설이던 아이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꽃을 사고 싶은데.”
“……이걸 사신다고요?”
화들짝 놀란 아이가 작은 몸을 돌려 헤르난을 봤다.
“다 시든 꽃인데요.”
아이의 풀죽은 음성처럼 바구니에 들어 있는 샛노란 꽃들도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내일 아침이 되기도 전에 쓰레기통에 처박힐 게 분명한 행색이었다.
“괜찮아. 마법사가 마법을 걸어 주면 다시 살아날 테니까.”
“정말요?”
“응.”
우물쭈물하던 아이가 발치에 있던 바구니를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꽃을 팔고는 싶지만 이런 꽃을 팔고 돈을 받아야 한다는 게 미안해 자꾸만 망설이게 됐다.
“시든 거니까…… 은화 한 닢만 주셔도 돼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아이는 말했다.
헤르난이 아이에게 은화를 건넸다. 돈을 받아 든 아이는 바구니에 있던 꽃을 꺼내 한데 모아 끈으로 묶었다. 그 나름대로 작은 꽃다발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받으세요.”
겸연쩍은 얼굴을 한 아이가 헤르난에게 노란색 꽃다발을 건넸다.
“꽃다발을 만들어 줄 줄은 몰랐는데. 고마워.”
말을 마친 헤르난이 아이에게 동전 몇 개를 더 건넸다. 다만 은화가 아니라 금화였다.
“빼앗기지 않게 발 아래에 숨겨 둬.”
금화를 보고 깜짝 놀라 차마 받아 들 생각도 하지 못하는 아이의 작은 손에 헤르난은 직접 금화를 쥐여 줬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뒤늦은 답을 한 아이가 벌떡 일어나 헤르난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곧장 뒤를 돌아 어둠을 향해 뛰어나갔다.
헤르난은 아이가 만들어 준 꽃다발에 가만히 코를 대어 봤다. 다 시들었다며 울상을 짓던 아이의 말이 무색하게도, 꽃은 겉모습은 추레할지언정 그 속에는 여전히 향기를 품고 있었다.
저절로 웃음이 나올 만큼 달콤한 향이 헤르난의 마음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나 없이 멀리 나가지 말라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칼릭스였다.
“……화랑 바로 앞인걸요.”
급히 고개를 든 헤르난이 조심히 말을 건넸다. 한창 기쁜 마음일 칼릭스의 신경을 긁고 싶지 않았다.
“혼자 있기엔 너무 어둡잖아.”
“금방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 이상한 건 뭐야?”
칼릭스의 시선이 헤르난의 품에 안겨 있는 작은 꽃다발에 뒤늦게 닿았다.
“아주 귀여운 친구가 줬습니다.”
“쓰레기장에서 건져 올린 거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래도…… 향기는 좋아요.”
헤르난이 멋쩍게 웃어 보였다. 꼭 이 못생긴 꽃다발의 대변인이 된 기분이었다.
“지나가던 애한테 꽃이라도 샀나 보지.”
정확한 추측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친구와는 다시 만나질 않는 게 좋겠어.”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보인 칼릭스가 곧장 말 한마디를 더했다.
“돌아가자.”
한 손에는 케인을, 다른 한 손에는 꽃다발을 쥔 헤르난이 몸을 일으켰다.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는 칼릭스에게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헤르난은 자신의 막돼먹은 마음이 어디까지 삐뚤어질 수 있는지를 잘 알았고 혹여 이번에도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웠다.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으면 제 간악한 마음도 조금쯤은 눌러질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바랐다.
이 꽃들처럼, 겉은 초라해도 그 속은 향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헤르난은 칼릭스를 따라 느린 걸음을 옮겼다. 낡은 저택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따스한 남부의 날씨와는 달리, 디아만테가 자리한 중북부는 거의 종일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초가을만 되어도 찬바람이 사람들의 뺨을 얼렸다.
기침이 나는 것도 눈가에 열이 오르는 것도 다, 바로 그 차가움 때문이었다. 헤르난은 그에게 갑자기 들이닥친 감기 기운을 은근슬쩍 날씨 탓으로 돌렸다.
확실히, 제게 주어진 마지막 삶에서 이 몸뚱이는 한층 더 쓸모없이 변한 듯했다. 어지간하면 걸리지 않던 감기에 걸린 것부터가 그랬다. 수도에 도착한 지 고작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낡은 저택을 지키는 하나뿐인 하우스 키퍼가 미리 약을 구비해 뒀던 덕분에, 그나마 침대에 누워 기침을 해 대는 것 정도에서 고통이 그쳤다. 그녀의 준비성이 아니었다면 종일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 앓기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곧장 침대를 벗어날 수 있게 된 건 아니었다. 헤르난은 외출이, 아니 방을 나서는 일이 금지됐다. 칼릭스 때문이었다.
어떻게 수도에 온 지 하루도 되지 않아 감기에 걸릴 수 있냐며 헤르난을 한심해하던 칼릭스는 폐병 걸려 죽기 싫으면 방 밖으로 나갈 생각도 말라며 엄포를 놨다. 칼릭스가 침대 위에 잔뜩 쌓아 버린 이불과 모포에 갇혀, 헤르난은 별다른 대꾸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20대 초반의 헤르난은 자신의 마음이 칼릭스에게 닿지 못할 걸 알면서도, 그의 세상에 이제 헤르난이란 사람이 없다는 걸 알게 됐으면서도, 칼릭스에게 끊임없이 잘 보이고 싶어 했다. 내세울 건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가 뒤를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었었다.
그런데 지금의 자신은 칼릭스에게 짐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로 쓸 곳이 없었다. 테이블 위 화병에 꽂혀 있는, 물을 머금었음에도 고개가 꺾인 노란색 꽃들이 꼭 제 모습처럼 보였다. 그래도 꽃에는 향기가 있으니 저들이 헤르난 말론보다는 쓸모가 있었다.
지난 오전, 잠시 헤르난의 방을 찾았던 칼릭스는 대공에게 니콜라의 소식을 전해 주고 오겠다며 곧장 저택을 나섰다. 아픈 배우자를 대신해 일을 하는 게 남편의 역할이 아니겠냐며 비뚜름한 웃음을 지은 채였다.
대공과는 안면이 있으니 걱정은 되지 않았다. 아버지인 네이로 후작 때문에라도, 헤르난이 대공을 찾아가는 것보다는 주위의 의문을 살 일도 적었다. 그저 칼릭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게 미안할 뿐이었다.
기침을 하던 헤르난이 다시 침대에 누웠다. 칼릭스와 함께 후작이 머물고 있는 히페리온 저택에 가려면 빨리 몸이 나아야 했다. 그 기분 나쁜 공간에 칼릭스를 혼자 보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칼릭스가 돌아온 건 창문 너머의 풍경이 주홍색으로 물든 늦은 오후가 돼서였다.
“뭐야, 아직도 아파?”
노크도 없이 헤르난의 방에 들이닥친 칼릭스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는 헤르난에게 물었다.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느껴지는 방 안의 공기 사이로 칼릭스가 끌고 들어온 차가운 바람이 퍼졌다. 그 차가움이 헤르난의 가물가물하던 정신을 깨어나게 해 줬다.
“……이제 괜찮습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헤르난은 말했다.
“은근히 거짓말을 자주 한단 말이지.”
“아뇨. 정말 이 정도 감기는 금방 낫습니다.”
약간의 허세를 담아 건넨 헤르난의 말에 칼릭스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헤르난은 자신이 내일 일정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는 걸 칼릭스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수도에 살 때, 얼어 죽을 뻔한 적이 많습니다. 그 와중에도 감기는 이틀 이상 앓아 본 적이 없어요.”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굴려 보던 헤르난은 말했다.
“지금 걸린 감기에 옛날얘기가 왜 나와.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칼릭스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구질구질하게 산 건 알았지만…… 도대체 어느 정도였길래 얼어 죽을 뻔했단 소리가 그렇게 쉽게 나와?”
“……루체가 말을 안 하던가요?”
“그래.”
잠시 말을 멈췄던 칼릭스가 헤르난과 눈을 맞췄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도. 나한테 그런 얘기 안 했잖아.”
칼릭스라면 루체가 겪었던 힘든 일들을 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에게 저가 평생 겪어 낸 고생을 모조리 읊어 주면서 잔뜩 투정을 부릴 거라고, 루체는 말했었으니까.
하지만 느껴지는 의아함과는 별개로, 루체가 칼릭스에게 그의 고된 삶에 관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더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랬나 봐요.”
“…….”
“루체도 저도.”
칼릭스의 시선을 피하며 헤르난은 웃어 보였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루체도 칼릭스에게 잘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칼릭스가 자신을 나쁘게 보지 않길 바라서, 큰 흠이 있다고 여기지 않길 바라서, 그래서 작은 투정도 부리지 못했겠지.
하지만 루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를 더 자세히 알았다면, 칼릭스는 고난에도 꺾이지 않은 루체를 더 사랑하게 됐을 거다. 헤르난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 궁금했는데, 아무 얘기도 듣질 못했어.”
칼릭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붉은 노을빛 사이로 흩어졌다.
“네 얘기야.”
“…….”
“나한테 네 얘기 한 번을 해 주지 않았잖아. 네가 힘들게 살았다고 해서, 내가 널 우습게 볼 줄 알았어?”
말을 마친 칼릭스가 창가에 놓여 있는 티 테이블로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는 침묵하려 했다. 하지만 곧, 인상을 잔뜩 찌푸리곤 물음 하나를 더 내놓았다.
“아니, 뭐 저런 걸 화병에 꽂아 두기까지 해? 낮에는 없었잖아.”
아이에게서 산 노란 꽃이 꽂혀 있는 화병을 가리키며 칼릭스가 물었다. 그의 손끝이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쭈그러든 꽃잎을 툭, 건드리자 꽃이 송이째로 떨어졌다.
어……. 헤르난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그래도 하루는 더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헤르난은 버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져 나간 꽃송이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결국 고개가 꺾여 버린 꽃에서 헤르난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런 그를 보는 칼릭스의 시선이 미묘하게 변했다. 입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데, 가까스로 참아 내고 있는 모양새였다.
“……너, 기다려.”
그 말을 침대 위에 던져 두고 칼릭스는 방을 나섰다. 헤르난이 반문할 틈도 없었다.
하늘을 메우던 붉은색을 몰아내고 슬슬 보라색과 남색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칼릭스는 꽃향기와 함께 되돌아왔다.
이마에 땀이 맺혀 있는 칼릭스의 품에 커다란 꽃다발이 안겨 있었다. 꽃다발 속의 하얗고 노란 꽃들이 칼릭스의 움직임에 맞춰 춤을 추듯 움직이자 멋없는 방 안에 금세 싱그러움이 퍼졌다.
칼릭스는 헤르난이 있는 침대 쪽엔 시선도 주지 않고, 곧장 티 테이블로 향했다. 꽃다발의 포장을 푼 그는 이어 화병에 꽂혀 있던 노란 꽃들을 쥐어 밖으로 빼내 버렸다.
곧, 새로운 꽃들이 화병으로 자리를 옮겼다.
“봐. 얼마나 보기 좋아?”
화병을 가득 채운 꽃들을 보는 칼릭스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피어올랐다.
빨리 뭐라도 반응을 해 보라는 듯 칼릭스가 헤르난을 향해 슬쩍 시선을 줬다. 피곤하지도 않은지 눈이 생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헤르난은 그런 칼릭스의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밖에서 좋은 일이 있었던 걸까? 어제 아이에게서 산 노란 꽃들이 정말 보기 싫었을 수도 있었다. 커다란 꽃다발을 주는 것이 귀족들의 병문안 예절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이유가 뭐건 칼릭스는 굳이 헤르난에게 꽃을 줄 필요가 없었다.
어쩐지 마음이 불편했다.
되돌아보면 오늘 하루 칼릭스는 헤르난을 많이도 배려해 줬다. 그는 혼자 일을 마쳤고 도움은 못 줄망정 방해만 되고 있는 자신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계속 찾아와 안색을 살폈다. 종내엔 이렇게 꽃을 사다 주기까지 했다.
이런 칼릭스의 친절에 붙일 만한 이유를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불편했다.
헤르난은 칼릭스를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는 제게 약간의 시간도, 아주 약간의 마음도 쓸 필요가 없었다. 그 모든 건 루체를 위해 아껴 둬야 했다.
“……너무 잘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뭐?”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헤르난이 입을 다무는 것과 동시에, 자그마한 방 안으로 침묵이 찾아들었다.
“별 이상한 소리를 하네. 잘해 줘? 내가?”
칼릭스의 입가에 삐딱한 웃음이 걸렸다. 하지만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진짜로 잘해 줬다가는 기절이라도 하겠어.”
“……죄송합니다.”
놀란 헤르난이 뒤늦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꽃을 사 와서 그래?”
“…….”
“이상한 상상 하지 마. 나는 너한테 꽃을 준 게 아니라, 이 화병에 꽃을 준 거야. 저 다 시든 것들을 빨리 내다 버리고 싶어서.”
칼릭스는 아이에게서 샀던 노란 꽃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 칼릭스에게서 다른 이유를 찾아내려 하다니. 예나 지금이나 저는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았다. 하나같이 우스운 결과만 가져다주는 망상이기도 했다.
“절대 오해 같은 거 안 하겠습니다.”
헤르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망함에 귀 끝이 발갛게 변해 있었다.
“……봐. 꽃만 바꿨을 뿐인데, 이 낡아 빠진 방이 꽤 괜찮아 보이잖아.”
티 테이블에 딸린 의자에 걸터앉은 칼릭스가 말했다.
그렇게나 예뻐 보이던 화병 속의 꽃들이 칼릭스가 바로 옆에 앉자 순식간에 빛을 잃었다. 헤르난의 눈엔 이제 칼릭스밖에 보이질 않았다. 아름다운 남자의 능력에 감탄하며 헤르난은 작게 웃음 지었다.
“그렇게 좋아?”
꽃이 좋냐 묻는 칼릭스에게 헤르난은 차마 솔직한 마음을 전할 수 없어 그저 “네.”라고 답했다.
“……안 어울리게.”
팔짱을 낀 칼릭스가 고개를 저었다. 이어 칼릭스는 느릿하게 말 한마디를 더 던졌다.
“빨리 나아. 아픈 사람 끌고 다니는 취미는 없으니까.”
낮과는 다른 밤의 빛깔이 칼릭스의 얼굴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어슴푸레한 그림자 속에서 더욱 빛나는 남자에게 헤르난은 답을 건넸다.
화병에 꽂힌 꽃들의 향기가 이리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이미 감기 따위는 다 나은 것 같았다.
* * *
네이로 후작이 소유한 히페리온 저택은 귀족들의 별장이며 대저택이 모여 있는 수도 디아만테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헤르난이 후작의 저택을 찾은 건, 모든 삶을 통틀어 이번이 네 번째였다.
저택은 후작이 본인의 영지인 네이로의 관리는 장남인 폰토스에게 맡긴 채 추운 겨울을 제외한 모든 계절을 보내는 곳이었다. 수도의 돈을 긁어모으는 일에 몰두하면서 말이다.
그런 히페리온 저택에 처음 방문했을 때, 헤르난의 옆에는 어린 칼릭스가 있었다. 수도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부터 잔뜩 풀이 죽어 있던 칼릭스는 종일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아버지의 눈초리를 피하느라 바빴었다. 단 한 번도 웃지 못했었다.
두 번째 방문에서는 후작의 냉담함 위에 친척들의 비웃음까지 더해졌었다.
세 번째 방문은 시간이 훌쩍 지난 후에 이루어졌다. 처음으로 칼릭스 없이 히페리온 저택에 발을 들이게 된 그날, 헤르난은 후작이 내민 손을 잡았다. 그 악수가 칼릭스와 루체 사이를 갈라지게 만들었다.
좋은 기억은커녕, 자신이 지은 죄만 떠오르게 만드는 거대한 히페리온 저택 안에서 헤르난은 몇 시간 내내 억지로 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헤르난은 칼릭스처럼 새파란 눈을 가진, 키가 크고 풍채가 좋은 후작을 살폈다. 기분 좋아 보이는 후작의 얼굴은 눈 색이며 눈썹 모양 따위를 빼면 칼릭스와 닮은 부분이 거의 없었다. 칼릭스가 그의 아버지보다는 죽은 어머니를 닮아서 그랬다.
바로 지난 삶에서, 네이로 후작은 아들인 칼릭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계속해 변해 가던 삶 속에서도 처음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어느 날, 칼릭스는 가벼운 인사를 건네듯 헤르난에게 후작의 죽음을 알렸다. 그는 네이로 후작이 살해를 당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칼릭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에 대해 그림자 아래의 헤르난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마치 자신의 신에게 죄를 고하는 사람처럼 엄숙한 목소리였지만 그 눈만큼은 웃고 있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네이로 후작은 자신과 눈이 마주친 헤르난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언뜻 험악해 보이는 인상과 어울리지 않는 다정함이 느껴졌다.
언제나 그렇듯, 후작은 그의 아들에겐 관심조차 주지 않은 채 헤르난에게 계속해 말을 붙여 왔다. 많은 것이 달라진 세상에서도 여전한 것 중 하나는 네이로 후작의 칼릭스를 향한 괄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헤르난은 식사를 하면서, 또 차를 마시면서 계속해 칼릭스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칼릭스는 웃는 낯을 하고 그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저 웃음 뒤에 어떤 마음이 들끓고 있을지 알기에, 웃는 칼릭스를 보고 있는 게 힘들었다.
지난 삶에서 네이로 후작은 헤르난과 손을 잡고 루체를 스칼라 남작에게 종속되게 만들었다. 모든 일은 루체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강제성을 가지고 진행됐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영웅이 된 칼릭스가 귀환해 연인을 되찾으려 하자 후작은 루체를 죽였다. 자살로 위장시켰지만, 타살임이 드러나면 의심의 화살이 헤르난에게 향하게 설계를 했다.
하지만 후작이 저지른 일은 모두 지난 삶의 것이었다. 이번 삶에서 그는 루체에게 손을 대지도, 그를 불행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후작은 그저, 아들인 칼릭스의 의사는 무시한 채 오랜 말버릇대로 그를 다른 남자에게 팔아치웠다. 헤르난과 칼릭스의 결혼을 추진한 거다. 칼릭스에겐 끔찍한 일이겠지만, 후작의 입장에선 별 것 아닌 일이었다.
‘그래도…… 언제든 다시 일을 저지를 사람이지.’
그나마 다행인 건, 루체가 예술계를 꽉 쥐고 있는 상단주인 아버지와 후계자인 형을 뒤에 두고 있다는 거였다. 사람을 작위가 아니라 재산으로 판단하는 후작이라면, 루체를 영웅이 된 아들의 짝으로 나쁘지 않게 여길지도 몰랐다.
“남작께 산책을 청하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갑작스러운 후작의 물음에 헤르난의 생각이 멈췄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단둘이 산책을 나가자고 하는 건지 가늠이 되지를 않았다. 너무 살갑게 느껴지는 후작의 어투가 헤르난의 걱정을 더했다.
하지만 그 걱정이 산책을 거절할 명목은 되지 못했다. 헤르난은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어설피 웃으며 후작의 청을 받아들였다.
“저도 동행할게요.”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칼릭스가 별안간 대화에 끼어들었다.
“……너는 듣기 불편한 대화만 이어질 텐데?”
“듣다가 속이 거북해지면 알아서 돌아가겠죠. 비위가 좋질 못해서요.”
후작은 조금 놀란 얼굴을 하고 칼릭스를 봤다.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말 한마디도 똑바로 건네질 못하고 더듬어 대기나 하던 모자란 막내아들이, 속 모를 웃음을 지은 채 제 아버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칼릭스의 말이 이어졌다.
“사랑하는 남편과 일분일초도 떨어지기 싫은 마음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남작과의 결혼에 세상의 멸망을 앞둔 사람처럼 굴던 칼릭스가 할 말은 아니었다. 당황한 네이로 후작의 미간이 모아졌다 풀어지길 반복했다.
“더군다나, 남작은 거동이 불편하신 분이 아닙니까. 제가 옆에서 보필해 드려야죠.”
“……그래. 대화를 방해는 말고.”
떨떠름한 얼굴을 한 후작이 칼릭스에게 말했다. 남들보다 걷는 게 힘든 남작을 산책 길에 세우려 든다는 비난을 들은 것만 같아 어이가 없었다.
헤르난은 모든 게 걱정됐다. 네이로 후작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산책을 요청한 건지, 칼릭스는 왜 함께 나서려는 건지…… 무엇 하나 예상 가는 게 없었다.
여전히 남아 있는 감기 기운 탓에 까슬한 목구멍이 괜히 더 따갑게 느껴졌다.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긴장감을 느끼며, 헤르난은 후작을 따랐다.
칼릭스는 말 그대로 헤르난에게 딱 달라붙어 아름다운 후원의 산책로를 걸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두어야 할 적정 거리를 무시한 건 후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히페리온 부자 사이에 껴서 고작 5분여를 걸었을 뿐인데, 벌써 진땀이 났다.
“스칼라는 여전히 여름이겠죠?”
헤르난과 보폭을 맞춰 주며 후작이 물었다.
“……네. 사실, 1년 내내 여름이나 다름없습니다. 딱 보름 정도만 제외하면요.”
“정말이지 축복받은 땅이에요.”
후작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추운 게 싫어요. 아주 질색입니다. 내 영지가 남부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겨울이 되면 그런 생각만 하게 된다니까요.”
고개를 저은 후작은 이어 남부의 귀족들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좋은 날씨와 건강한 흙, 맛있는 음식 덕에 다들 걱정 없이 즐겁게만 사는 것 같다고 말이다.
“남작께서도 아주 비옥하고 아름다운 남부의 땅을 가지셨죠.”
“……운이 좋았습니다.”
“그 비옥한 땅 위에 우리 히페리온의 핏줄이 퍼질 거란 게, 난 아주 기쁩니다.”
헤르난과 시선을 맞춘 후작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사위에게 보이는 것치곤 과하게 상냥한 웃음이었다.
후작은 스칼라가 헤르난이 황제에게 선물 받은 성씨인 말론의 땅이 아니라 히페리온의 땅이 될 거라 말하고 있었다. 칼릭스와의 혼인을 허락하면서 다른 계약이라도 한 건가 싶었다. 암만 계약이래도, 이렇게 대놓고 말을 꺼내다니. 정말 솔직한 사람이었다.
후작의 말에 토를 달고 싶은 건 아니었다. 꽤 이전부터 칼릭스나 그의 자식에게 스칼라와 남작 위를 넘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니 말이다. 제게 사랑하는 배우자와 자식이 생길 일은 없을 테니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일 처리를 앞당기는 방법도 있었다. 칼릭스와 이혼을 하기 전에 제가 죽는다면, 굳이 공증을 받은 유언장을 마련할 필요도 복잡한 절차를 거칠 필요도 없었다. 스칼라는 자연히 남작의 배우자인 칼릭스의 땅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당장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헤르난은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을 지워 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헤르난이 후작을 향해 작게 웃어 보였다.
후작의 걸음이 멈췄다. 헤르난과 칼릭스 역시 그를 따라 자리에 멈춰 섰다. 자신을 따라 멈춰 선 이들을 보는 후작의 얼굴에 만족감이 서렸다.
“……그러려면 빨리 자식을 낳게 해야지요.”
살짝 몸을 숙인 후작이 헤르난에게 말을 속삭였다.
헤르난은 얼빠진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칼릭스의 얼굴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잔뜩 일그러져 있을 것이다.
“식을 올린 지 벌써 1년이 훌쩍 지났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어 걱정입니다.”
과장된 웃음과 함께 후작은 말을 이었다.
“나는 내 아들 때문에 아직도 아이 소식이 없는 건가 했습니다. 그런데 칼릭스가 이리 남작을 생각해 주는 걸 보니, 마음의 문제는 아닌 것 같군요.”
역시. 소문은 믿을 게 안 되나 봅니다. 헤르난에게 붙어 있는 칼릭스를 힐끗 본 후작이 재밌다는 얼굴을 했다.
좋지 못한 소문을 들었으면 스칼라로 찾아와 보기라도 하지. 하다못해 사람이라도 보냈어야지.
자식의 얼굴이 사랑에 빠진 얼굴인지 원수를 보는 얼굴인지 구분도 못 하는 아버지에게 바라기 힘든 일이란 걸 알면서도 마음 위로 침울함이 퍼졌다.
“그렇다고 해서 저 애가 10달 동안 얌전히 아이를 품고 있을 인물도 아니죠. 조심성도 없이 쏘다니다 사고나 치고.”
몸을 숙인 후작이 헤르난의 귓가에 속삭였다. 예전 같으면 대놓고 말을 했을 텐데, 그래도 오늘은 칼릭스에게 말이 들리지 않을 방법을 택했다.
후작의 말이 이어졌다. 전보다 느릿한, 얼핏 농담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남작이 허락만 한다면야, 히페리온의 핏줄을 가진 아이를 볼 방법은 많습니다.”
“그게 무슨…….”
의아하다는 얼굴로 헤르난은 후작을 올려다봤다.
그 시선을 반기듯, 칼릭스의 것을 쏙 빼닮은 후작의 파란색 눈이 헤르난의 얼굴 이곳저곳을 살폈다. 누군가에겐 초상화의 스케치 작업을 앞둔 화가처럼, 다른 누군가에겐 상품에 값을 매기는 상인처럼 보일 모습이었다.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후작이 다시 입을 열기 전, 칼릭스가 오고 가는 말 속으로 끼어들었다.
“아직 신혼이잖아요.”
칼릭스가 말했다.
“식을 올린 지 이제 고작 1년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 벌써 아이를 가질 준비를 해야 하나요?”
“네 친구들은 진작 부모가 됐다는 걸 모르는 건지, 모른 척하는 건지.”
철없는 아이를 보듯 칼릭스를 보며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급한 건 질색이라.”
히페리온 부자 사이에서 헤르난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두 사람의 기분을 살폈다. 어떻게 해야 후작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칼릭스의 편을 들 수 있을까 싶었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 제가 마음만 먹으면…… 남작님 배가 꺼질 틈이 없을 테니까.”
“…….”
“하지만 남작께선 몸이 약하시니, 자식은 하나만 낳아야겠죠. 아니지. 아예 아이를 입양하는 방향도 괜찮겠군요.”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후원 한가운데에 어정쩡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색하게 얼굴을 굳힌 사람들 사이에서 칼릭스는 청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칼릭스에게 후작은 기가 차다는 듯 웃어 보였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칼릭스가 내뱉은 말속에 담긴, 그러니까 아이를 가질 사람이 아들인 칼릭스가 아니라 남작이라는 사실이 후작의 입을 닫게 한 건 아니었다. 조금 의아하긴 했으나 이해는 갔다.
그저, 후작은 너무 많이 변해 버린 아들이 놀라웠다. 너는 남작과 결혼을 해야 한다고 통보했을 때도, 칼릭스는 반항은커녕 아무 소리 못 하고 등신처럼 입만 다물고 씩씩대던 놈이다.
그런데 고작 1년 사이에 어디 전쟁터에서 구르다 온 용병처럼 눈빛이 변했다. 대놓고 말을 비꼬고 속이 빤히 보이는 웃음을 날리는 건 도대체 어디서 배워 먹은 버릇인가 싶었다. 옆에 있는 남작을 괴롭히다 저렇게 성격이 더러워진 건가 싶을 정도였다.
말을 잃은 건 헤르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칼릭스에게서 자신에게로 시선을 옮긴 후작의 빤한 눈빛이 부담스러워 급히 고개를 숙였다.
“……내 욕심으로는, 빨리 손주를 보고 싶군요. 아이의 머리색이 칼릭스처럼 백금색일지, 남작처럼 검은색일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할아버지를 닮아 진한 금색일 수도 있겠군요.”
후작은 능숙하게 침묵을 수습했다. 칼릭스가 어울리지도 않게 날카롭게 구니 일단 한발 물러서 준 거였다.
헤르난은 후작에게 칼릭스의 아이는 백금색 혹은 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천사일 거라고 말을 해 주고 싶었다.
“……네. 저 역시 궁금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후작에게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헤르난의 걸음에 맞춰 다시 느릿하게 산책이 이어졌다.
이 마지막 생에 다다라서야, 헤르난은 네이로 후작이 사실은 굉장한 수다쟁이라는 걸 알게 됐다.
* * *
네이로 후작의 저택을 빠져나와 수도 외곽의 낡은 저택에 다다를 때까지, 칼릭스는 말이 없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한 낯을 한 채였다.
정신을 차린 칼릭스가 헤르난을 붙잡은 건 2층의 침실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였다. 놀란 헤르난과 눈을 맞추며, 칼릭스는 그 어느 때보다 무감한 얼굴로 당혹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스칼라에 돌아가면 같은 방을 써야겠어.”
“네?”
“……아버지라면 널 죽일지도 몰라.”
“…….”
“그 사람이라면 가능해. 고작, 스칼라를 히페리온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이유만으로 널 죽이려 들 거야.”
칼릭스의 말이 이어졌다.
“언제 생길지 모를 손주가 스칼라 땅을 쥐는 걸 보는 것보다, 내가 지금 당장 스칼라의 주인이 되는 걸 보는 게 더 쉬울 테니까. 즐거운 구경거리를 얻고 싶으니까.”
헤르난은 당황해 입을 다문 채 칼릭스의 말을 되새겨 봤다. 헤르난 역시 그런 생각을 해 보긴 했었다. 하지만 자식 얘기를 늘어놓을 때의 네이로 후작은 진심으로 후계자의 탄생만을 바라는 것 같았었다. 비옥한 남부에 퍼질 자신의 핏줄을 말이다.
“이해가 안 돼? 우리가 이혼이라도 해서 땅이 날아가 버리기 전에 널 죽일지도 모른다고.”
“…….”
“……입에 담기도 싫은 헛소릴 꺼낸 것도 이상해.”
헤르난의 시선이 어느 틈엔가 칼릭스에게 붙잡힌 손목에 닿았다.
그 이유야 어찌 됐건, 칼릭스는 제가 후작의 손에 죽기라도 할까 봐 신경을 써 주고 있었다. 루체와 사이가 깊어지고 후작이 그것을 알아챌 때쯤이면 이미 칼릭스에게 있어 자신의 이용 가치는 다 떨어져 있을 텐데도 말이다.
돌아보면 칼릭스는 내내 헤르난이 다시 죽지 않기를 바랐다.
남은 평생 쌓아 둔 죄를 곱씹으며 고통받기를 바라는 것일 수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일 옛정의 흔적을 더듬어 보다 동정을 느끼게 된 걸 수도 있었다. 혹은 그저 죽음이란 걸 떠올리기만 해도 루체가 생각나 저러는 걸지도 몰랐다.
칼릭스가 나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서, 그의 옆에 있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 같았다. 침묵 속에서 헤르난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나는 정말 끔찍한 사람이구나. 칼릭스가 사람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 지금 당장 토악질을 하지 않을까 싶었다. 헤르난의 입가에 잠시 떠올랐던 미소가 그 어느 때보다 우울한 빛으로 사그라졌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도의 지하 감옥에서도 죽지 않고 목숨을 이어 간 사람이 저란 걸 아시지 않습니까. 쉽게 죽지 않을 겁니다.”
“……쉽게 죽지 않아?”
“…….”
“죽었잖아. 그것도, 내 앞에서 죽었어.”
헤르난의 손목을 쥐고 있던 칼릭스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목숨을 네 마음대로 쓰라고, 대충 쓰다 버려도 되는 것쯤으로 생각하라고, 내가 널 되살린 것 같아? 아니, 너는 못 죽어.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내가 칼릭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곤 그를 화나게 하는 것밖엔 없구나. 칼릭스의 따가운 시선을 마주하며 헤르난은 새삼스럽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평생, 옆에 있게만 해 달라고…… 네가 먼저 말했어. 맹세했잖아.”
아무래도 칼릭스는 헤르난 말론이 오랜 세월 자신의 죄를 곱씹으며 고통받기를 바라는 쪽이었던 모양이었다.
“네……. 평생, 옆에서 도련님을 지켜 드려야죠.”
헤르난이 지키지 못할 약속을 입에 담았다. 음침한 낯짝을 빼닮은 듣기 싫은 음성이었다.
칼릭스는 말이 없었다. 그의 침묵을 헤르난은 알아서 해석해야 했다.
내일이 되어 다시 오늘을 떠올리게 되면, 칼릭스 역시 당황스러울 것이다. 순간의 감정에 휩싸여 평생을 입에 담았으니 말이다. 저와 같은 거머리들은 주제 파악을 못 해 그 말을 진심으로 믿을지도 모르는데.
헤르난은 빨리 방으로 돌아가 잠을 자고 싶었다. 여태 남아 있는 감기 기운이 자꾸만 머리를 뜨겁게 만드는 것 같았다.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괜히 밖을 서성이다 감기라도 옮기면 안 되니까요.”
“…….”
“대화는 날이 밝고 마저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헤르난은 짧은 인사와 함께 뒤로 돌며 급한 걸음을 옮겼다. 계단참을 의지해 절뚝이며 계단을 오르는 남자의 뒷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헤르난.”
칼릭스는 제 곁을 떠나려는 이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헤르난의 시선이 다시 칼릭스에게로 향했다.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칼릭스가 바로 아래에서 헤르난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이, 먼 수도의 지하 감옥에까지 자신을 찾아오던 남자가 아니라, 백작성 별채의 그림자 속에서 절 지켜보던 남자가 아니라, 먼 옛날의 기억 속에 남은 어린 도련님을 닮아 있었다.
“……화내서 미안해.”
헤르난의 옷자락을 붙잡고 칼릭스는 말했다.
“그러니까, 울 것 같은 얼굴 하지 마.”
찬 기운이 묻어 있는 소맷자락에서 손목으로 칼릭스의 손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이내 두 사람의 손이 맞닿았다. 칼릭스는 제게서 도망치려는 헤르난의 손을 꽉 쥐었다.
헤르난은 당혹스러웠다. 칼릭스가 별안간 건넨 사과의 말도, 그 뒤에 한 말도 모두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거울을 볼 수 없으니 자신이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아볼 방법도 없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괜찮아요. 도련님이 화를 낸 거란 생각도 안 했습니다.”
헤르난이 다급히 변명을 늘어놨다. 칼릭스를 달래려는 듯 다정한 음성이었다.
“제 마음, 기분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옆에 두지 마시고 멀리하시고, 항상 경계하고 내칠 준비를 하세요.”
곧장 말이 이어졌다. 다만 시선을 마주하고 말하기가 민망해 괜히 고개를 돌리게 됐다.
“마음 편히 미워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헤르난의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칼릭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눈 한번 맞춰 주려 하지 않는 헤르난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여전히 헤르난의 손을 꽉 쥔 채였다.
몇 분여의 침묵을 견뎌 낸 후에야 헤르난은 칼릭스의 부축을 받아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 *
며칠 만에 돌아온 스칼라는 당연하게도, 달라진 것 하나 없이 평화로웠다.
변한 게 없는 건 손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니콜라는 칼릭스가 대공과 가족들의 소식을 전해 주자 가족들이 보고 싶다며 엉엉 울었고, 레온은 그런 사촌 형의 등을 두드려 줬다. 지겨워 죽겠다는 얼굴과는 상반되는 상냥한 다독임이었다.
평소와 달라진 건, 오직 헤르난이 머무는 침실뿐이었다.
저녁을 지나 찾아온 가장 어두운 밤에 칼릭스는 노크도 없이 다짜고짜 헤르난의 방에 들이닥쳤다.
“왜 내 방으로 안 와?”
이런 물음과 함께였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헤르난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청객을 어정쩡한 자세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안 와서 내가 왔잖아.”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헤르난을 말린 칼릭스가 싱긋 웃어 보였다.
〈스칼라에 돌아가면 같은 방을 써야겠어.〉
수도에서 함께 방을 써야 한다고 했던 게 진심이었던 모양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그 진심이 헤르난은 당황스러웠다.
“여기서 같이 자는 게 더 좋은 거야? 이 좁아터진 침대에서 나랑 몸을 부대끼며 자고 싶어서 오지 않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아뇨. 그럴 리가요…….”
헤르난이 황급히 말을 꺼냈다.
“아니긴.”
“제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안절부절못하는 헤르난을 가느다란 눈으로 내려다보던 칼릭스가 새침한 얼굴을 했다.
“그게 싫으면 방을 옮겨야지. 쓸데없이 큰 침대 위에선, 적어도 등 부딪칠 일은 없을 거 아냐.”
헤르난의 방을 대충 둘러본 칼릭스가 말을 이었다.
“자기 몸 지킬 무기 하나 제대로 갖춰 놓질 않았네. 그래 놓고, 어떻게 그리 쉽게 나는 안 죽네 어쩌네 소리를 했어?”
어슴푸레한 야간등 불빛 아래에서도 홀로 선명한 파란색 눈이 그 속에 헤르난을 담았다.
칼릭스의 시선에 사로잡혀 입만 달싹이던 헤르난은 결국, 그를 따라 방을 나서야만 했다. 오늘 하루만 그의 기분에 맞춰 주면 될 거라는 가벼운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한때 자신이 썼던 방이라기엔 너무 낯설게만 느껴지는 주인 방에 헤르난은 억지로 발을 들여야 했다. 열려 있는 발코니 문 사이로 들어온 바람이 커튼을 춤추게 하고 있었다.
칼릭스가 방문을 잠그는 소리가 이어졌다.
“다른 방으로 도망갈 생각은 마.”
그 말 한마디만을 남기고, 칼릭스는 씻겠다며 방 가장 오른편에 있는 욕실로 떠나 버렸다.
헤르난은 성인 남성 넷을 끌어안고도 남을 것 같은 넓은 침대를 바라보다가는 방향을 돌려 소파로 향했다. 푸른색 소파 끝자락에 걸터앉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절 여기까지 끌고 오긴 했지만…… 칼릭스가 진심으로 같은 침대를 쓰겠노라 선언한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침대는 바라지도 않았다. 소파에서만 잘 수 있게 해 줘도 충분했다.
아니, 소파 정도면 괜찮다 못해 훌륭한 선택지였다. 잠자리 따위는 헤르난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긴 밤을 칼릭스와 단둘이 보내야 한다는 거였다.
칼릭스와 함께 있을 때면 헤르난은 행복했다. 하지만 동시에 고통스러웠다. 입이 마르고 겁이 났다. 어릴 때의 모습으로 돌아간 영향이 있는 건지, 화를 내서 미안하다며 영문을 모를 사과를 할 정도로 칼릭스가 유해졌음에도 그랬다.
마음 같아선 쓰고 있던 방으로 당장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칼릭스 역시 큰마음을 먹고 자신을 그의 방으로 불러들였을 테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건, 칼릭스는 제 죽음에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 흔들리는 커튼을 바라보던 헤르난은 결국 칼릭스의 과도한 걱정을 덜어 주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길어도 며칠 안에 끝날 변덕이었다. 다시 방 밖으로 쫓겨날 때까지만 칼릭스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면 됐다.
밤바다를 내리치는 파도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같은 음정과 세기로 몇 번이고 반복되는 밤의 소리를 듣고 있자니 눈이 감겨 왔다.
병든 닭이라도 된 것처럼 자꾸만 잠을 자고 싶었다. 감기려 드는 눈을 비벼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이 찾아왔다. 디아만테의 저택 침대에 누워서도 했던 생각이었다.
노인이나 되어서야 이런 생각을 할 줄 알았는데. 힘없이 웃어 보인 헤르난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시야가 삽시간에 검게 변했다. 파도에 휩쓸려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게 된 것만 같았다.
그리고 헤르난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부드러운 시트가 깔린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가물거리는 정신을 다잡으려 노력하며 헤르난은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상체를 제대로 세우기도 전에 팔이 붙잡혔다.
“어딜 가?”
강한 힘이 헤르난의 몸을 왼편으로 끌어 내렸다. 헤르난은 하마터면 칼릭스의 위에 제 몸을 겹칠 뻔했다. 자유로운 손으로 간신히 침대를 짚어 내지 못했다면……. 헤르난이 속으로 안도의 숨을 쉬었다.
헤르난의 시선이 칼릭스에게 닿았다. 협탁에 놓인 조명등이 켜져 있는 데다 칼릭스의 다른 손에 책이 쥐어져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제 옆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딜 가려는 게 아니라…….”
헤르난은 말을 골라야 했다. 하지만 그런 헤르난을 답답하게 여긴 칼릭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소파에서 자고 있었던 거야?”
“죄송합니다. 깜빡 잠이 들었어요.”
소파에서 잠을 자다 일어나선 침대를 찾아 여기까지 기어들어 온 건가. 헤르난은 민망했다. 자신이 소파에 있던 걸 칼릭스가 아는 걸 보니 침대에 누워 그 꼴을 다 지켜봤겠구나 싶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떨려서 잠 못 자는 꼴을 보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칼릭스가 헤르난의 팔을 놓아주며 말했다.
헤르난은 황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떨림은 사치라는 걸 깨달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추한 꼴을 보이고 싶은 건 아니었다. 흐트러진 가운을 조심히 정리한 헤르난이 메마른 뺨을 쓸었다.
“……다시 소파로 갈 생각 말고 거기 누워.”
칼릭스의 말에 헤르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대로 눕기엔 칼릭스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다짜고짜 침대로 기어들어 간 주제에 칼릭스의 옆에 붙기까지 했구나.
헤르난은 최대한 침대의 바깥쪽으로 자리를 옮기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칼릭스에게 붙잡혀 말 그대로 얌전히, 침대에 몸을 파묻을 수밖에 없었다.
헤르난은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창피했다.
“날이 밝으면, 방으로 짐을 옮기는 대신 호위 기사를 구해 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자신 없는 목소리로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리 작은 작위를 가진 귀족이라도 호위 기사 하나쯤은 옆에 두고 산다지만, 적어도 헤르난은 호위 기사를 고용해 본 적도 고용할 생각을 한 적도 없었다.
마음이 불편해 개인적인 시중도 받지 않는 헤르난이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야 하는 호위 기사를 들이는 걸 꺼리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제 죽음에 예민해져 있는 칼릭스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그가 괜한 걱정을 할 필요 없게 하기 위해서라도 호위 기사가 필요할 것 같았다. 지금 같은 모습을 칼릭스에게 단 하루라도 더 보이고 싶지 않기도 했다.
“호위 기사가 생기면 그 사람이 절 지켜 줄 테고…… 어딜 가든 혼자 두지도 않을 겁니다.”
이제야 호위 기사의 존재를 떠올린 자신의 아둔함에 혀를 차면서도, 헤르난은 늦게라도 그 존재를 떠올려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남작성에는 따로 기사단이 없으니 용병을 구하면 될 것 같습니다. 호위 기사 일은 숙식도 제공되고 보수도 높은 편이니 사람을 구하기 쉬울 겁니다.”
말을 마친 헤르난이 칼릭스의 낯을 살폈다.
“어디서 굴러먹던 건지 모를 놈이 온다는 얘기네.”
헤르난을 내려다보던 칼릭스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이전보다 길어진 백금색 머리카락이 그의 고갯짓을 따라 눈썹 아래로 내려왔다.
“그래도 혼자 있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일을 가르쳐 주면 됩니다.”
“…….”
“저 역시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 모르는…… 제대로 된 호위 기사가 아니었는걸요.”
왜인지 협조적이지 않은 칼릭스에게 헤르난은 답했다. 어설펐던 과거를 회상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멋쩍음이 묻어 있었다.
“괜찮은 구석 하나 없는 모자란 것들이랑 널 같은 선상에 두지 마.”
“…….”
“호위 기사가 고용주와 애인 사이가 되는 일이 빈번하다던데. 작정하고 한몫 챙기겠다며 귀족성에 발을 들이기도 한다지?”
옛 호위 기사를 높이 평가하는 낯선 반응에 이어, 너무나 뜬금없는 이야기가 칼릭스의 입에서 나왔다. 이상한 인간에게 걸려 많지도 않은 재산을 탈탈 털릴 수도 있다는 조언 아닌 조언도 이어졌다.
잔뜩 긴장해 있던 헤르난의 어깨가 아래로 처졌다. 너무 황당한 소리를 듣게 되니 기운이 빠졌다.
“스칼라 남작이 못생긴 변태라는 건 서대륙 사람이면 모두가 알고 있으니,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한숨 같은 말이 헤르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누가 자신을 꾀려고 호위 기사 일을 자처할까. 게다가 스칼라는 그저 위로는 포도밭이 아래로는 염전이 있는 예쁜 시골 바닷가일 뿐이다. 좋은 땅이긴 하지만 한몫 챙긴다는 말과 함께 둘 정도는 아니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일을 하고 싶다고 찾아올 정도면, 정말 그 일이 간절해서일 겁니다. 머무를 곳이나 돈이 필요한 사람은 많으니까요.”
헤르난의 말에 칼릭스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아 보였는데, 정작 입을 열지는 않았다.
칼릭스는 협탁 위 조명등을 끄고 대충 자리에 누워 버렸다.
“호위 기사는 이미 구해 놨어.”
“그게 무슨…….”
“앞으론 내가 네 호위 기사 노릇을 할 거야. 고작 호위 일을 하기엔 너무 과한 인재지만, 어쩔 수 없지.”
짧은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몇 개월 뒤면…… 스칼라가 아니라 수도에 더 오래 계시게 될 텐데요.”
놀란 헤르난이 다급하게 말을 꺼내 봤지만 칼릭스의 목소리에 뒷말이 먹혔다.
“나는 그럴 생각 없어.”
“…….”
“너는 그냥, 돈 한 푼 안 드는 호위 기사가 네 옆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이나 느끼면 돼.”
밖에서 흘러들어 온 흰 달빛이 칼릭스의 얼굴을 비췄다. 그의 옆모습이 처음 이 새로운 시간에 떨어졌을 때보다 조금 성숙해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헤르난은 답했다.
칼릭스가 가지고 있는, 제 죽음에 대한 이상한 집착은 그가 루체와 다시 만나게 되면 사라질 것이다. 저 호위 기사 소리 역시 빠르게 잊히겠지 싶었다.
“내가 왜 저러나 싶지? 미친 건가 싶고.”
칼릭스의 말이 이어졌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도 나를 이해하는 게 힘들어. 아주 단단히 돌아 버린 것 같아.”
이불 속에 숨어 있던 헤르난의 손을 찾아낸 칼릭스가 그것을 제 손으로 꽉 쥐었다.
“헤르난 너는 죽지 못해.”
“…….”
“아무도 너를 죽이지 못할 거야.”
칼릭스의 손아귀 힘을 느끼며 헤르난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뜨겁게 달궈진 덫에 붙잡힌 것만 같았다. 칼릭스의 손이 자신의 손을 감쌀 만큼 커졌다는 게 느껴져 더욱 기분이 이상했다.
남들보다 늦지만 빠르게, 칼릭스는 자라고 있었다.
헤르난의 기억 속 칼릭스는 지켜 줘야 할 가냘픈 청년이었고, 동시에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아름다운 남자였다. 제가 칼릭스에게서 루체를 빼앗은 직후나, 절망에서 다시 일어선 칼릭스가 전장에 나섰을 때의 모습은 몰랐다.
칼릭스가 자라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 것 역시 마지막 삶에서 받게 된 선물 중 하나가 아닐까 싶었다.
몇 년 후면 칼릭스는 자신의 기억 속에 가장 강하고 깊게 남아 버린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가장 처음, 제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던 남자의 사납고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색이 없는 추억을 헤매다 보니 웃기게도 잠이 왔다. 절 붙들고 있는 칼릭스의 손이 뜨겁고 또 따뜻해서 그런 것 같았다.
가물가물해지는 시야에 천장이 걸렸다. 그래도 가을이라고, 겨울이 다가온다고, 따뜻한 남부의 밤에도 조금은 차가운 빛이 섞였다.
‘이제 곧…… 루체가 오겠구나.’
헤르난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걸렸다. 루체와 칼릭스가 마주 보고 행복하게 웃음 짓는 모습을 떠올리자 절 붙잡고 있는 칼릭스의 손이 더는 덫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오랜만에, 헤르난은 악몽을 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