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5. 겨울
유학을 마친 루체 세이어가 수도 디아만테에 돌아왔다. 사람들의 마음을 괜히 들뜨게 만드는 연말, 겨울이 내뱉은 흰 숨이 눈이 되어 내리던 날이었다.
지독한 뱃멀미의 후유증이 가시기도 전에 루체는 꽤 빡빡한 일정 속에 밀어 넣어졌다. 후계자 승계를 거의 마친 벨라인이 동생인 루체를 상단의 얼굴마담으로 쓰려고 작정을 한 거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루체는 그를 위해 열리는 환영 파티 정도는 일정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다. 고작 유학을 다녀온 걸 두고 제국으로의 귀환을 축하한다며 파티를 여는 건…… 철없는 나르시시스트 도련님이나 할 법한 일 같았다.
하지만 그건 루체의 바람이었을 뿐, 이미 손님들에게 초대장이 날아간 지 오래이니 너는 예쁘게 차려입고 얌전히 서 있기만 하면 된다는 답만 받았다. 도련님처럼 보이기 싫어하다니, 우리 막내가 다 컸다는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과 함께 가족들의 뽀뽀 세례가 이어졌다.
그리하여 지금, 루체는 말 그대로 예쁘게 차려입고 저택의 연회장을 누비고 있었다.
고작 2년 사이에 더 성숙해지고 아름다워진 상단의 막내아들은 그의 미모만큼이나 보기 좋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손님들을 맞았다. 파티의 주인공다운 자태였다.
‘귀찮아.’
속으론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루체 세이어란 개인을 향한 관심은 보통 상단으로도 이어지고는 했으니까. 더군다나, 호감이 가득 담긴 타인의 관심과 선망은 자기애를 올리는 일에 보탬이 되곤 했다.
루체가 새로운 얼굴들을 마주한 건, 악수를 마친 그의 손을 은밀히 쓸어내리는 신사에게 망신을 줘 연회장 밖으로 쫓아냈을 때쯤이었다.
눈이 부신 미남자와 절름발이 남자.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 오는 두 남자를 보며, 루체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했다. 어젯밤 독파한 손님 명부를 떠올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스칼라 남작인 헤르난 말론과 그의 배우자인 칼릭스 히페리온이었다.
형인 벨라인이 손님 명부 속 손님들을 하나씩 짚어 주며 미리 설명해 준 대로, 남작의 배우자는 깜짝 놀라 말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남자였다. 눈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순간 어떻게 인사를 나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긴장이 됐다. 루체는 즐거운 긴장 속에서 칼릭스에게 또 그의 일행인 스칼라 남작에게 자신을 소개해야 했다.
“디아만테로 돌아오신 걸 축하드립니다.”
칼릭스는 루체에게 말했다. 듣기 좋은 목소리와 잘 어울리는 미소가 함께였다.
이어, 칼릭스는 루체와 그가 맡게 될 화랑에 대한 격려와 기대를 담은 말을 건넸다. 다른 손님들에게도 몇 번이고 반복해 들은 지루한 덕담이었지만 칼릭스를 통해 듣게 되니 기분이 남달랐다.
“……영광입니다.”
루체는 말했다.
칼릭스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자 괜스레 얼굴이 뜨거워졌다. 유부남만 아니었어도 말을 더 붙여 보는 건데. 루체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속으로 탄식했다.
입술을 달싹이던 루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분의 품에 안기게 된 작품에 대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제가 사랑하는 이들의 작품만을 택하셨는지, 함께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어요. ……지금처럼 시끄러운 곳이 아니라 차분하고 조용한 곳에서요.”
루체가 칼릭스를 따라 웃어 보였다. 칼릭스에게 호감이 가는 것과는 별개로 진심을 담아 한 말이었다. 그림 얘기를 나누는 건, 그것도 취향이 비슷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건 즐거운 일이니 말이다.
물론, 칼릭스와의 대화를 조금이나마 더 이어 가고 싶어 꺼낸 말이기도 했다.
“초대해 주시면 언제든 응하겠습니다.”
연회장의 환한 조명 아래에서 더욱 밝게 빛나는 파란색 눈이 그 안에 루체 세이어를 담고 있었다. 루체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칼릭스를 올려다봐야 했다.
배우자가 있는 사람한테 마음이 설레서야. 민망해진 루체의 시선이 과묵한 남작에게로 닿았다. 칼릭스와 어떻게 해 볼 생각까지 한 건 아니지만, 괜히 미안해서였다.
칼릭스의 왼편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선 남작은 몸이 아픈 사람처럼 안색이 좋지를 못했다. 묘하게 긴장한 것 같기도 했다.
“……무지한 저와 달리 예술에 애정이 깊으신 분이니, 두 분이 통하는 게 많으실 겁니다.”
눈이 마주친 남작이 어설피 웃으며 말을 붙여 왔다. 남작은 칼릭스와 자신이 친분을 쌓는 걸 환영하는 것처럼, 더 나아가 그걸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기분이 묘했다. 다른 귀족들은 자신의 남편 혹은 부인이나 애인을 루체와 만나지 못하게 하려 했다. 혹여 제 사람이 루체처럼 아름다운 남자에게 반해 불륜을 저지를까 봐 걱정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남작은 그런 걱정의 기색 하나 없이 대단히 속 편한 소리를 내놨다. 저가 칼릭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걸 봤을 텐데도 말이다.
‘자신감이 넘치시네.’
루체의 시선이 남작의 옆에 있는 칼릭스에게로 옮겨 갔다. 칼릭스는 남작을 보고 있었다.
칼릭스의 얼굴 어디에서도 웃음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리석으로 깎아 놓은 조각상의 온도가 칼릭스보다 더 높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조금 전까지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던 칼릭스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부부 사이가 별론가?’
칼릭스의 시선을 눈치챈 순간부터, 원래도 좋지 않던 남작의 안색이 더욱 파리해졌다.
루체는 칼릭스의 날카로운 얼굴에 웃음기를 돌려주고 싶었다. 웃을 때나 웃지 않을 때나 잘생긴 건 마찬가지지만 기왕이면 웃는 게 좋지 않겠는가? 칼릭스의 옆에 있는 남작의 숨이 넘어갈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고 말이다.
“새로운 우정을 시작할 수 있게 돼서 기쁘네요. 그것도 예술을 사랑하는 분과 함께요.”
귀족들 특유의 권위 의식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으니…… 일단은 우정이라는 말을 써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말을 마친 루체의 얼굴에 싱그러운 웃음이 퍼졌다.
칼릭스의 시선이 다시 루체 자신에게로 옮겨 오자 남작은 눈에 띄게 안도했다. 멀끔한 생김새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심하고 우울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외모는 훌륭하지만, 성격만은 영 맞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 뒤로 물러서기라도 했는지 남작과 칼릭스 사이의 거리가 조금 더 벌어진 것도 같았다.
하지만 벌어졌던 거리는 금세 좁혀졌다. 남작을 따라 반걸음 물러선 칼릭스의 손이 자신에게서 멀어지려는 남작의 손을 단단히 얽었다. 남작이 손을 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저 역시 기대가 됩니다.”
남작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칼릭스는 루체에게 답했다. 남작을 붙들고 있는 그의 손과 얼굴에 떠올라 있는 웃음의 간극이, 이상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부부 사이가 별로가 아니라…… 의부증이 있는 거였나.’
루체는 칼릭스와 남작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남작 부부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손님들과 새로운 대화를 이어 가는 동안에도, 루체는 손을 붙잡고 있던 두 남자를 떠올렸다. 설명하기 힘든 기시감이 들었다.
“아까 스칼라 남작 부부랑 같이 있던데. 무슨 얘기 했어?”
잠시 여유가 생긴 틈을 타 루체에게 다가온 벨라인이 물었다.
“왜? 중요한 사람들이야?”
“아니, 뭐. 껄끄러울 일은 없었지?”
“이상한 걸 물어보네.”
보는 사람 기분 찜찜하게 만드는 의뭉스러운 얼굴을 한 벨라인에게 루체는 말했다.
“소문이 소문이다 보니까 걱정돼서 그랬지. 그 사람들도, 너도.”
소문. 벨라인이 입에 올린 단어를 곱씹어 보며 루체는 남의 소문에 손톱만큼도 관심을 주지 않았던 지난날을 아주 짧게 후회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길 좋아하는 호사가가 바로 옆에 있으니 괜찮았다. 루체는 벨라인의 팔을 붙잡았다.
“소문 말고 사실은 없어?”
“남작 부부는…… 소문이 곧 사실일걸. 곁다리로 붙어 오는 것들까지 다 믿는 건 아니지만.”
“그럼 그 소문이 뭔지 말해 주라. 너무 말도 안 되는 얘기만 빼고.”
“남의 얘기엔 관심 없다더니.”
“저런 사람 앞에 딸린 소문이면 말이 달라지지.”
사람이 없는 연회장 구석으로 벨라인을 이끈 루체가 빨리 입을 열어 보라는 듯 눈짓했다.
벨라인의 말처럼, 평소의 루체라면 그와 관련이 없는 남의 얘기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루체는 형을 채근하기까지 해 칼릭스와 그의 배우자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려 했다. 두 사람에 대해 뭐라도 알아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네가 돌아온 걸 축하해 주려고 모인 거야. 그런데 축하받아야 할 주인공이 이런 구석에 박혀서 딴 얘기나 들으려고 하고…….”
“먼저 궁금하게 한 건 형이잖아.”
루체가 벨라인의 핀잔을 가볍게 넘겼다.
“알았어. 빨리 듣고 자리로 돌아가.”
목소리를 낮춘 벨라인은 남작 부부를 둘러싼 질 낮은 소문은 최대한 배제하고, 가장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루체에게 말했다.
이야기는 간단했다. 스칼라 남작은 본래 칼릭스 히페리온을 모시던 호위 기사였는데, 불경하게도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을 마음에 품었다.
칼릭스는 그런 남작의 마음을 거부했다. 하지만 남작은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해 그에게 매달렸다고 했다. 자식에게 무관심한 네이로 후작은 제 아들에게서 남작을 떼어 놓지 않고 방치했기에 그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구애는 몇 년을 이어졌다.
다행히 칼릭스가 남작에게서 벗어날 기회가 찾아왔다.
흑마법사들이 마족들을 지상에 불러들여 일으킨 균열 전쟁에 남작은 출정했다. 칼릭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히페리온 가문에 보탬이 되고 싶어서였다.
그때의 칼릭스는 남작이 죽기를 바랐을 거라고, 벨라인은 루체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칼릭스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남작은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돌아왔다.
일개 호위 기사였던 천애 고아에게 성씨가 생기고 작위가 생겼다. 그에게 과분한 아름다운 영지 또한 얻었다.
네이로 후작은 작지만 비옥한 땅의 주인이 된 남작과 그의 아들을 이어 줬다. 칼릭스는 남작과 억지로 부부가 된 거다.
“다리 하나는 못 쓰게 됐지만, 그 덕에 칼릭스 히페리온을 자기 옆에 앉히게 된 거니…… 손해는 아니지 않겠어?”
말을 마친 벨라인이 고개를 까닥여 보였다.
“생각보단 평범한 얘기네.”
“그렇지. 조금 기분 나쁜 정략결혼 얘기 정도? 평범하지 않은 건 그 뒤야.”
이어 벨라인은 루체의 앞에 남작 부부를 둘러싼 소문 몇 가지를 더 늘어놨다. 제법 그럴싸한 이야기와 마음을 주춤하게 만드는 자극적인 이야기가 엉켜 있었다.
“그런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낯빛이 어두워진 루체가 탄식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저 소심해 보인다고만 생각했던 남작이 저렇게 음흉한 짓을 저질렀을 줄이야. 의외였다.
물론, 만만한 사람 하나를 골라 우스갯거리로 만드는 일을 즐기는 족속들 사이에 퍼진 소문을 다 믿을 순 없었다. 형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말이다.
“나쁜 사람이 나 나쁘다고 얼굴에 써 놓고 다니겠어?”
“그래서 남작이 자기 남편 눈치만 보고 있었구나. 지은 죄가 있어서.”
“눈치를 봐? 반성이라도 하나? 하긴, 올해 들어 파티며 모임에서 칼릭스 히페리온을 봤다는 얘기가 계속해 들려오는 걸 보면…… 도련님을 가둬 두는 일은 그만두기로 했나 보네.”
다시 목소리를 낮춘 벨라인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속삭였다.
“가둬? 아냐. 사이가 아주 좋아 보이지는 않아도 그런 관계 같진 않았어.”
나는 갇혀 사는 게 칼릭스 히페리온이 아니라 스칼라 남작이 아닌가가 더 의심되는데. 그 말은 뒤로 삼켜 낸 루체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어쨌든, 사랑 없는 결혼이라니 최악이다. 나이도 나랑 비슷해 보이는데…… 고생하고 사네.”
사랑의 즐거움 없이는 살지 못하는 루체는 칼릭스가 안타까웠다. 빛나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음침한 남작의 옆에서 썩혀야 한다니. 너무 아깝지 않은가.
“사랑은 있잖아. 한쪽만 절절해서 그렇지.”
“안타깝네.”
“그게 안타까운 사람의 표정이야?”
올라간 루체의 입꼬리를 툭툭 치며 벨라인이 물었다.
“그냥, 평범한 부부는 아닌 것 같아서 재밌어.”
칼릭스와 남작 사이에 흐르고 있던 이상한 기류가 루체의 마음에 걸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엔 자로 잰 듯 딱 떨어지는 감정만 존재하는 게 아니니, 그저 자신은 모를 이야기 몇 개가 그들 사이에 있겠거니 하고 가볍게 넘기기로 했다.
‘진하게 사랑하는 사이는 아닐 거 아냐.’
루체의 두 눈이 인파를 헤집었다. 그는 별다른 수고를 들이지 않았음에도 단번에 칼릭스를 찾아낼 수 있었다. 거짓말처럼 칼릭스와 눈이 마주쳤다.
칼릭스의 키가 큰 편이기에 그를 찾기 쉬웠던 건 맞았다. 하지만 이리도 단번에 눈이 마주친 건, 칼릭스 역시 절 보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꽤 열렬한 칼릭스의 시선이 루체의 얼굴 위에 밝은 웃음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소문대로 참 대단한 미인이고 미남자였다. 옆에서 무어라 말을 건네는 벨라인의 말이 제대로 들리질 않았다. 따뜻한 물속에 깊이 잠기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칼릭스와 맞닿았던 시선이 떨어지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형. 후원자의 밤에 남작 부부도 오겠지?”
“……초대장은 보내 놨어.”
기대된다. 대화를 마무리한 루체가 호기심과 즐거움을 눈에 담고 웃어 보였다. 벨라인의 떫은 얼굴은 보이지도 않는 기쁜 밤이었다.
* * *
스칼라에도 겨울이 왔다. 따스한 햇볕은 그대로 간직한 채 바람만 차가워진, 하얀 눈은 찾아보기 힘든 짧은 겨울이었다.
장식품이나 다름없던 응접실의 벽난로에도 불이 붙었다. 따스한 불을 품에 안은 벽난로가 있는 응접실은 임산부인 니콜라의 구역이 됐다. 방마다 있는 몸을 녹일 벽난로가 응접실의 벽난로만큼 크고 따뜻하지는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레온은 제 사촌 형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저 형은 추위 안 타요. 그냥, 방보다 넓은 응접실에 사람들 많이 불러다 놓고 수다 떨고 싶어서 저래요.〉
옆에서 레온의 말을 듣고 있던 니콜라 역시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었다.
오늘, 니콜라의 초대 손님은 바로 어젯밤 디아만테에서 스칼라로 돌아온 헤르난이었다. 니콜라의 말로는 칼릭스도 불렀다는데 아침 식사도 거른 그가 이 티타임에 참석할 확률은 현저히 낮았다.
헤르난은 대공의 수하가 몰래 건네주고 간 편지를 니콜라와 레온에게 전했다. 아무나 열어 볼 수 없게 마법으로 봉해진 편지를 받아 든 니콜라의 얼굴에 반가운 웃음이 걸렸다.
그 뒤로, 헤르난은 니콜라가 쏟아 내는 말들을 홀로 어설프게 받아내야만 했다.
“다녀오신 파티는 즐거우셨나요?”
한참을 떠들던 니콜라가 별안간 눈을 빛내며 헤르난에게 물어 왔다.
남작성에 반쯤 갇혀 있다시피 한 니콜라는 바깥세상의 모든 일을 궁금해했는데, 특히나 아름다운 파티와 연회장 안을 맴돌던 소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틈틈이 스칼라를 찾아오는 연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로는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헤르난은 지난 파티의 풍경을 떠올려 봤다. 천장이 높던 아름다운 연회장과 잘 차려입은 사람들, 그들의 입가에 오래도록 머물던 미소, 부드럽게 흐르는 음악과 그 선율을 닮은 나지막한 웃음소리…….
억지로 끌려간 사냥 대회의 천막 안에서 사랑에 빠졌던 칼릭스와 루체는 연회장의 한가운데,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는 샹들리에 아래에서 다시 마주하게 됐다. 칼릭스와 루체의 눈이 마주친 순간에 걸맞은 아름다운 장소였다.
네이로 후작 아래에서 일하던 가난한 치료 마법사가 아니라 부유한 상단의 막내 도련님이 된 루체는 그에게 말 한마디라도 더 붙이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칼릭스도 헤르난도 한참이나 말없이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루체를 바라봤었다.
다시 루체를 만나면 그저 기쁨만이 느껴질 거라고, 헤르난은 막연히 생각했었다. 하지만 정작 살아 있는 루체를 마주하자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루체의 죽음을 통해 느꼈던 죄책감과 헤르난 스스로를 향한 불안과 의심,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강하게 목을 조여 왔다. 옆에 있는 칼릭스의 안색을 살필 여유도 없었다.
내가 또…… 일을 망치면 어쩌지. 작은 불안은 점점 커져 이내 헤르난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건 칼릭스를 따라 간신히 루체의 앞에 섰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헤르난의 불안은 루체의 웃음을 마주한 순간 씻은 듯 사라졌다.
루체는 정말,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리는 새벽 비를 맞고 있는 꽃처럼 위태로워 보이던 루체는 새로운 삶에서 햇살을 듬뿍 맞아 활짝 피어났다. 인사를 건네는 루체의 활기찬 분위기가, 너 따위는 절대 날 건드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아니, 헤르난 말론만이 아니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악의도 루체를 찌를 수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칼릭스 역시 그걸 느꼈을 것이다.
뒤로 물러선 헤르난은 한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는 칼릭스와 루체를 바라봤다. 사냥 대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없이 두 사람을 눈에 담았다.
저 같은 사람은 살면서 곁눈질로 훔쳐보지도 못할 아주 귀한 그림 속의 한 장면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저렇게 잘 어울리는 연인을 보며 질투하고 괴로워하던 과거의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염치도 없다며 절 비웃던 이들의 말이 딱 맞았다. 주제도 모르고, 어떻게 칼릭스 같은 사람의 옆자리를 원했던 걸까.
길어지는 헤르난의 상념을 깨운 건 칼릭스였다.
칼릭스는 루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헤르난의 손을 쥐어 왔다. 아플 정도의 힘이었다. 어디 도망치지 말고 루체를, 그리고 그를 똑바로 보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헤르난은 칼릭스가 원하는 대로 자리에 얌전히 서서 혀끝에 닿은 설탕처럼 달게 웃음 짓는 루체를, 그를 보는 칼릭스를 눈에 새겨 넣었다. 예전처럼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수도에서 보낸 짧은 시간을 더듬어 보던 헤르난은 니콜라에게 그날 자신이 본 아름다운 것들을 단 하나도 빼먹지 않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더듬더듬 이어졌다. 남들과 긴 대화를 나누는 일에 재능이 없는 헤르난이 늘어놓은 엉성한 이야기에도 니콜라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반응해 줬다. 말을 더 재밌게 하지 못하는 게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사실, 나도 알아요. 루체 세이어.”
헤르난의 말에 귀 기울이던 니콜라가 루체의 이야기를 듣다가는 말했다.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루체의 이름을 말할 때의 니콜라의 표정이 조금 묘했다. 니콜라뿐 아니라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레온의 미소 역시 서먹하게 변했다.
푹 한숨을 쉬어 보인 니콜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소꿉친구에게 오래 사귄 약혼자가 있었거든요. 그 약혼자란 쓰레기랑 루체 세이어가 아주 화려하게 바람이 났어요.”
“형이 그 친구분 대신 두 사람을 잡아다 목을 졸라 버리겠다면서, 아주 난리도 아니었어요.”
레온이 니콜라의 말 뒤에 추임새를 넣었다.
헤르난은 깜짝 놀랐다. 루체가 남의 남자를 뺏다니.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헤르난이 아는 루체는 연애에는 관심이 없던, 연인이라고는 오로지 칼릭스밖에 모르던 이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 예쁜 남자가 그 예쁜 낯짝만큼이나 예쁜 입술로 미안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냐면서, 저런 남자 말고 더 좋은 사람 찾아보라고 쫑알대는데……. 그땐 내가 어려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동그랗게 떴지, 지금이었으면 당장 멱살부터 잡고 봤을 거예요.”
허공에 주먹을 치켜들며, 심지어 그것을 휘휘 돌리기까지 하며 니콜라는 말을 이었다.
“그래 놓고 유학 간 것도 웃겨요. 그 쓰레기랑 엮여서 망신을 당할 것 같으니까, 도피성으로 간 거겠죠. 자리에 없는 사람 욕하긴 싫지만 그래도 할래요.”
“……그랬군요.”
니콜라에게 무어라 답을 해 줘야 할지 몰라 난처해하던 헤르난이 간신히 한마디를 내놨다.
“그 사람이 부군껜 관심 안 보였어요? 잘생긴 사람 좋아하는 걸로 유명한데.”
니콜라의 목소리가 더 뜨거워졌다.
“관심 같은 건 잘 모르겠지만…… 기분은 좋아 보이셨습니다.”
헤르난이 말을 얼버무렸다. 루체가 칼릭스에게 보인 호감은 평소 눈치 없는 편이란 소리를 자주 듣던 자신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말을 루체에게 약혼자를 뺏긴 이를 친구로 둔 니콜라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마음 아플 옛 생각을 곱씹게 하고 싶지 않았다.
“조심하세요.”
“…….”
“안 그래도 꽃같이 예쁘던 분이 이제는 너무 잘생겨지기까지 했잖아요. 체격도 확 좋아지셨고. 이젠 어딜 가도 사람들이 달려들겠죠? 큰일이네요, 큰일.”
치가 떨린다는 듯 고개를 젓는 니콜라를 향해 헤르난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처음엔 평평하게만 보이던 니콜라의 배가 4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며 커진 것처럼, 칼릭스 역시 뒤늦은 성장기를 맞아 쑥쑥 자라났다. 부지런한 훈련의 성과로 체격 역시 자라난 키만큼이나 커졌다.
헤르난보다 한 뼘 정도 작았던 그는 이제 더는 헤르난을 올려다보지 않아도 됐다. 헤르난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모습까지 자라려면 시간이 더 걸릴 테지만 말이다.
칼릭스의 얼굴 역시 변했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 아름다웠으나, 조금 더 선이 굵어졌다. 여러모로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는 외모였다. 아니, 사람이 아니라 몬스터조차 칼릭스에게선 눈을 떼지 못할 거라고 헤르난은 생각했다.
“남작님. 그렇게 자신 없어 보이는 얼굴 하시면 안 돼요.”
“네?”
“꼭, 두 사람이 눈 맞아도 어쩔 수 없지, 이런 생각하는 것 같잖아요.”
니콜라가 심각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딱히 그런 얼굴을 하진 않은 것 같은데요…….”
속내를 들킨 기분이 들어 민망했다. 무어라 말을 더해야 할지 몰라 헤르난은 그저 작게 웃어 보였다.
“그럼, 칼릭스 님뿐만 아니라 남작님도 조심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야기를 나누는 니콜라와 헤르난을 바라보던 레온이 뜬금없는 말을 내놨다.
“잘생기셨잖아요.”
그 말 한마디가 응접실에 긴 정적을 가져왔다. 말을 꺼낸 사람의 두 뺨을 발갛게 익혀 버릴 정도로 잠잠한 정적이었다.
“아, 아니. 아까 형이 잘생긴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고 하길래…… 그래서, 말씀을 드린 건데…….”
“그런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 봅니다.”
헤르난이 레온에게 답했다. 어울리지 않는 말을 들은 게 당혹스럽긴 했지만 놀리려고 그런 말을 꺼낸 게 아닌 걸 알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정말요? 말도 안 돼.”
이번엔 니콜라가 되물었다. 헤르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답을 대신했다.
니콜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들이라면 저를 비웃으려고 이러나 싶었을 거다. 하지만 두 사람의 다정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항상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남에게 칭찬의 말을 건네길 좋아했다. 여러모로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조금 쑥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헤르난은 가볍게 말했다.
“전 진심으로 한 말인데…….”
왜 믿지 않으시는 것 같죠. 레온이 말을 흐렸다. 니콜라는 왜인지 또 표정이 심각해져 버렸다.
갑자기 만들어진 오묘한 분위기에 어색함을 느끼며 헤르난은 말을 돌렸다. 마저 다 전하지 못한 파티에 관한 이야기였다.
루체에 대한 반감이 남아 있는 니콜라를 위해 더는 그의 이름을 언급하진 않았다. 어차피 그날 칼릭스가 얼마나 빛이 났는지, 그 미소는 또 얼마나 찬란했는지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부족할 터였다.
차를 한 잔 더 마신 후에야 헤르난은 응접실을 나설 수 있었다.
손님들의 성품만큼이나 따스하던 응접실과는 달리 복도에는 찬 기운이 내려앉아 있었다. 목깃을 여민 헤르난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칼릭스가 있는 방으로 돌아가기는 뭣했다. 낡은 저택의 방 안에서도,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도, 늦은 밤 발코니 난간에 걸터앉아 달을 올려다볼 때에도, 칼릭스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헤르난은 그런 칼릭스에게 홀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주기 위해 아침이 밝자마자 방을 나섰었다.
지금, 칼릭스의 머리와 마음에는 오직 루체 한 사람만이 가득 채워져 있을 거다. 시간이 가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잠을 자고 있다면…… 꿈속에서 루체를 만나고 있을지도 몰랐다.
칼릭스가 꿈속에 있건, 생각과 생각 사이를 헤매고 있건 헤르난은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헤르난은 방으로 가는 대신 집무실로 가 해야 할 일을 살피기로 했다. 자신을 대신해 서쪽으로 심부름을 떠난 조세핀이 돌아오기 전에 그녀 몫의 일까지 다 마쳐 두고 싶었다.
하지만 헤르난이 복도를 떠나기 전 응접실의 문이 다시 열렸다. 마치 헤르난을 붙잡으려는 듯 급히 열린 문 사이로 나온 이는, 레온이었다.
“깜빡 잊고 드리지 못한 말이 있어서요. 아, 따로 자리를 옮겨서 나눠야 할 정도의 내용은 아니고요.”
큰 소리라도 날까 조심히 응접실 문을 닫은 레온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남작님께서 수도에 가신 사이에 조세핀 님께 대검과 둔기 쓰는 법을 배워 봤어요. 저번에 해 주신 조언대로요.”
“……그냥 흘러가는 말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요.”
레온의 말을 들은 헤르난이 반색하며 웃음 지었다. 얼떨떨했다.
몇 주 전, 레온이 헤르난에게 조언을 구해 왔다. 검술을 연마하는 건 즐겁고 보람차지만, 언제부턴가 실력이 계속 같은 자리만을 맴도는 것 같아 답답하다는 말과 함께였다.
고민하던 헤르난은 그런 레온에게 조언이라고 하기엔 너무 별것 없어 민망한 데다, 그에겐 당황스럽기만 할 답을 내놨다.
〈대검을 한번 잡아 보시는 게 어떨까요? 도끼나 해머 같은 둔기류도 괜찮을 겁니다.〉
귀족가의 자제들은 대개 아름다운 롱소드를 썼다. 그들에게 있어 대검이니 도끼니 해머니 같은 것들은 무식하고 힘만 센 용병들이나 하급 기사들의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니 대검을 써 보라는 헤르난의 말은 평범한 귀족도 아니고 황실의 피가 섞인 대공가의 일원인 레온에게는 영 맞지 않는 조언이었다. 레온에겐 헤르난의 말이 모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다.
〈고귀하신 분들께는 낯선 무기란 걸 알지만, 한 번쯤은 말씀드려 보고 싶었습니다. 소공께선 힘이 좋으신 데다, 공격에서도 방어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이 정확하시니 대검이나 둔기류도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말하는 헤르난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었다.
레온이 제게 화를 내지나 않으면 다행인 말을 조언이랍시고 내놨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대검을 쥐어 봤다니. 헤르난은 기뻤다.
“솔직히…… 남작님께 그 말을 듣고 놀랐어요. 나는 왜 그런 생각을 못 해 봤을까 싶더라고요. 실제로 검을 잡았을 때도 정말 좋았어요. 기다렸다는 듯 손에 감겨 들어오는 것 같더라고요. 두 손을 쓴다는 게 생각보다 안정적이기도 했고요.”
레온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었어요. 남작님께서 제 편견을 깨 주셨잖아요.”
“저는 이제 대검도 장검도 제대로 쥘 수 없게 됐지만…… 검을 쥐는 방법까지 잊어버린 건 아니니, 궁금한 게 있다면 언제든 물어봐 주세요.”
진심을 담아 헤르난은 말했다.
얼굴이 환해진 레온이 케인을 쥐지 않아 자유로운 헤르난의 오른손을 쥐었다. 헤르난의 메마른 손등 위에 어린 청년이 입을 맞췄다. 꼭 기사들처럼 감사를 전한 것이었다.
“남작님께서 아버지 밑에서 일을 하셨을 때, 제가 나무에 올라가 울기나 하던 어린애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검을 쥘 수 있는 나이였다면 남작님께 뭔가를 배울 수 있었을 텐데요.”
여전히 헤르난의 손을 붙잡은 채로 레온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복도에 스민 한기까지 도망가게 할, 참 해사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금세 두 사람의 시선이 사람의 기척이 들려온 곳으로 옮겨 갔다.
“본의 아니게 레온 님의 호위 기사를 뺏어 버린 것 같아 죄송하네요.”
칼릭스의 목소리가 헤르난의 귓가에 닿았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 칼릭스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대화를 엿들은 실례를 용서해 주세요. 제 배우자가 다른 남자에게 손이 붙잡혀 있는 걸 보면서…… 이 광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고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반기듯 칼릭스는 미소 지었다.
“남작님께 감사드릴 일이 있어서요.”
칼릭스의 말을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인 레온이 고개를 저으며 웃어 보였다. 다만 헤르난의 손은 조심히 놓아주었다.
“아, 감사였군요. 하마터면 오해할 뻔했습니다.”
말을 마친 칼릭스가 느릿한 걸음을 옮겨 헤르난의 옆에 섰다.
“가당치 않습니다.”
놀란 레온이 말을 더했다. 아무 의미 없이 내뱉어진 칼릭스의 농담에 땀을 뻘뻘 흘리는 레온의 모습에서, 아직 어린 그의 나이가 느껴졌다.
눈을 굴리던 레온은 헤르난에게 시간이 되실 때 연무장에서 폼을 봐 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곤 응접실 안으로 되돌아갔다.
“……마음에 안 들어.”
문이 닫히기 무섭게 칼릭스는 말했다. 세상에 레온 같은 이를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칼릭스인 모양이었다.
헤르난은 레온과 칼릭스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두 사람의 사이는 날이 갈수록 벌어지고만 있었다.
레온이 제게 보여 주는 살가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칼릭스가 저 정도로 날 선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닐까 싶어 고민이 됐다. 미운 사람한테 잘해 주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까지 함께 싫어진다고들 하지 않는가.
한 번 더 거리를 좁혀 온 칼릭스가 레온이 쥐었던 헤르난의 손을 잡아챘다. 그러곤 뭔가를 닦아 내려는 사람처럼, 그의 손바닥으로 헤르난의 손등을 툭툭 치다가는 비벼 대기까지 했다. 뜻을 모르겠는 걸 넘어 이상하게까지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쟤가 친한 척하는 거 받아 주지 마.”
“……모두에게 다정하신 분입니다. 딱히 제게 친밀감을 느껴서 저러시는 건 아닐 겁니다.”
저 때문에 칼릭스에게 괜한 미움을 받게 된 레온에게 미안해 헤르난은 변호 아닌 변호를 해야 했다.
“다정? 두 번만 더 다정하면 다음엔 침대 위에서 만나자고 하겠네.”
헤르난의 손을 놓아주며 칼릭스는 중얼거렸다. 퉁명한 목소리가 차가운 복도에 입김처럼 퍼졌다.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된다니까요…….”
예전, 레온에게 남작을 조심하라고 경고해 주던 칼릭스를 떠올리며 헤르난은 말을 흐렸다.
“나만 침대에 남겨 두고 홀랑 나가 버린 사람이 말은 잘하지.”
헤르난을 흘기는 칼릭스의 눈썹 한쪽이 삐뚤게 올라갔다. 헤르난이 무어라 말을 더할 새도 없이 칼릭스는 말을 이었다.
“앞장서. 네가 집무실로 가건, 방으로 가건, 밖으로 나가건 쫓아갈 거니까.”
“밀린 일이나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 전 신경 쓰지 마시고 편히 쉬시는 편이…….”
“쉴 건데?”
“…….”
“네 옆에서.”
어깨를 으쓱해 보인 칼릭스가 앞장서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왜인지 그런 칼릭스의 얼굴이 조금 뻔뻔하게 느껴졌다.
* * *
바늘 끝을 닮은 뾰족한 시선이 헤르난의 얼굴을 콕, 콕 찔렀다. 시선은 헤르난의 새까만 머리칼과 그림자가 진 눈을 타고 내려와 뺨으로, 턱으로, 단단히 잠긴 목깃으로, 서류를 쥔 손으로 옮겨 갔다.
칼릭스의 시선을 가만히 받고 있자니 새에게 쪼아 먹히기 직전의 벌레라도 된 기분이었다.
칼릭스가 집무실 벽난로 앞에 놓인 소파 위를 뒹굴며 일을 하는 헤르난을 감시하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그는 조세핀의 일과를 줄줄 꿰고 있다가 그녀가 자리를 비울 때가 되면 헤르난을 찾아오곤 했다. 노크도 없이 집무실의 문을 열어젖혀 사람 놀라게 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오늘의 칼릭스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거나 창밖을 내다보는 게 아니라, 책상 바로 앞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아 사람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문득, 수도의 지하 감옥에 있을 때가 생각났다. 헤르난이 루체를 죽였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디아만테의 지하 감옥에 갇혔을 때, 칼릭스는 간수를 매수해 어떤 절차나 허가도 받지 않고 헤르난을 찾아올 방법을 만들어 냈었다.
지하 감옥의 어둠 속에서 칼릭스는 그가 쫓아내 버린 간수의 몫이었던 낡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말없이 헤르난을 바라보고는 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을 하고서였다.
칼릭스는 왜, 먼 테미스에서 디아만테의 감옥까지 이유도 없이 몇 번이고 찾아왔던 걸까. 물을 수 없는 질문이 입 안을 맴돌았다.
“안에서 무슨 얘기 했어?”
칼릭스의 물음이 조용한 집무실에 퍼졌다.
“니콜라 님께서 제가 디아만테에서 무얼 보고, 무슨 얘길 들었는지, 파티는 어땠는지 궁금해하셔서…… 답을 해 드렸습니다.”
“아…….”
“…….”
“재미는 없었지, 파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칼릭스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파티엔 루체가 있었으니까요. 떠오른 말을 목 뒤로 숨기며 헤르난은 입을 다물었다. 루체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게 좋은 생각은 아닐 것 같았다.
“루체한테 몰려드는 인간들 꼴이 불빛에 달려드는 나방 떼 같아서, 그 꼴을 보는 게 웃기긴 했어.”
다행히 칼릭스의 입에서 먼저 루체의 이름이 나왔다.
“……밝고 아름다운 데다 상냥하기까지 하니 다들 마음을 뺏기는 게 당연합니다.”
“…….”
“제가 방해꾼 노릇을 하지 않았다면, 칼릭스 님도 정말 많은 숙녀분이며 신사분께 둘러싸이셨을 겁니다. 다들 말을 걸고 싶어 안달을 내더군요.”
헤르난이 웃어 보였다.
칼릭스가 사람들의 눈을 잡아끄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예전엔 다들 칼릭스를 어려워했다. 털을 잔뜩 세운 고양이처럼 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젠, 칼릭스는 파티에 초대된 손님 모두가 말 한 번 붙여 보고 싶어 할 정도로 부드럽게 미소 지을 수 있는 멋진 청년이 됐다. 저가 계속 그의 호위 기사 노릇을 했었다면, 도련님께서 철이 들었다며 기뻐했을 것이다.
묘한 뿌듯함이 헤르난을 찾아왔다.
“……왜 그렇게 웃어. 바보 같아.”
미간을 찌푸린 칼릭스가 헤르난에게 말을 던졌다.
그러나 답은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헤르난이 응접실에서 나눴던 니콜라와의 대화를 먼저 떠올린 덕이었다.
“니콜라 님께서 루체에 관해 해 주신 얘기가 있습니다.”
헤르난이 급히 말을 꺼냈다.
니콜라는 루체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헤르난에게 해 줬다. 조세핀의 보고서엔 쓰이지 않았던 그의 취향이며 취미, 호불호 따위의 사소한 것들이었다.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루체가 다른 사람의 남자를 뺏었다는 얘기는 빼고 자신이 전해 들은 모든 걸 전했다. 칼릭스에게 루체의 허물을 이야기할 자격이 제겐 없었다.
“그리고 잘생긴 사람을 좋아한다고…….”
헤르난이 뒷말을 흐렸다. 잘생긴 사람이라는 말 속에 담긴 뜻을 칼릭스도 잘 알아들었을 것이다. 칼릭스는 자신의 얼굴이 잘났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루체는 자기랑 체구가 비슷한 예쁜 사람을 더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취향이 달라졌다면 그건 그것대로 다행인 것 같습니다.”
여전한 기쁨을 담고 헤르난은 말을 이었다.
“지금, 정말 잘생기셨으니까요.”
하지만 헤르난은 곧장 입을 다물어야 했다. 칼릭스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쳐 버린 탓이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얼굴을 밝히게 된 거야?”
칼릭스의 말이 이어졌다.
“사람 보는 눈은 더럽게 없으면서 얼굴 보는 눈만 높아서 어쩌지? 제비 새끼들한테 목덜미 잡히기 딱 좋아.”
그렇게 말하는 칼릭스의 얼굴이 너무 심각해 보여 헤르난은 변명을 하는 대신 침묵하는 쪽을 택했다. 헤르난은 꽤 긴 시간 얌전히 칼릭스의 투덜거림을 들어야 했다.
칼릭스의 목소리가 사그라들자 고요가 두 사람 사이의 좁은 공간을 차지했다. 타닥, 타닥. 벽난로의 장작이 타는 소리만이 속삭임처럼 귓가에 닿았다.
“루체를 만나면 기쁘기만 할 줄 알았어.”
턱을 괸 칼릭스가 헤르난을 바라봤다. 어두운 혼란이 그의 얼굴 위를 지나고 있었다.
“당장 끌어안을 수도, 눈물을 흘릴 수도 있었지.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 기쁨? 기쁘긴 했지. 그런데 갑자기 내가 기쁜 건지 슬픈 건지도 판단이 안 될 정도로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거야.”
여름 바다를 닮은 새파란 눈 속에 창백한 남자의 얼굴을 담고 칼릭스는 말을 이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이 그 좆같던 사냥 대회의 치료사 천막 안인지, 파티가 열리는 연회장 안인지,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내가 아는 그 루체가 맞기는 한 건지…… 내가 바라던 광경이 맞긴 한 건지 헷갈렸거든. 아직도 그래. 짜증 나게 어지러워. 이 기분 나쁜 세상에 떨어지기 전엔, 걜 다시 만날 거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걸까?”
기다란 손가락이 이마를 덮은 백금색의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루체가 나한테 호감을 느끼는 게 분명하게 보이는데도, 난 걜 파티의 주최자 이상으로 대하질 않았어.”
“…….”
“말이 된다고 생각해?”
칼릭스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삐뚤어진 웃음이 어쩐지 기운 없어 보였다.
목이 타는 초조가 헤르난을 찾아왔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혼란과 불안을 원치 않았다. 칼릭스는 이 세상의 누구보다 행복해야만, 행복해져야만 했다.
“……말이 됩니다.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요.”
“…….”
“자다가 눈을 떴는데 먼 과거로 시간이 되돌려져 있고, 그것만도 견디기 힘든데, 싫은 사람의 배우자가 되어 이런 시골에 갇히기까지 하셨습니다. 게다가 좋아하는 사람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고…… 정말, 너무 말도 안 되는 일을 겪고 계신 겁니다. 고작 몇 개월 만에, 적응을 마쳤다며 넘겨 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헤르난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그 어수선한 통에 기억이 없는 연인을 만나게 되신 거잖아요. 마음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게 당연합니다. 그저 이 상황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신 겁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진심을 담아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말했다.
“루체와 자주 마주하다 보면, 단둘이 시간을 보내면서 긴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 어지러움도 금방 도망갈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확신할 수가 있지?”
칼릭스의 입 사이로 힘 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삐딱하게 걸려 있던 웃음 역시 그 기운을 잃어 갔다.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요.”
헤르난은 어설프지만 다정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조금 상기된 얼굴로 말을 더했다.
“재단사를 불러야겠습니다.”
엉뚱한 소리였다.
“후원자의 밤이 2주밖에 남질 않았으니까요. 지난 파티 때보다 더 멋진 모습을 루체와 사람들한테 보여 주셨으면 합니다. 그날도 정말 훌륭하셨지만, 기왕이면 새로운 색으로 정장을 한 벌 더…….”
“아니. 옷은 이미 많은데…….”
“루체를 마음에 품은 이들이 많을 겁니다. 도련님이라면 어떤 옷을 입건 눈에 띄겠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우습게 보지 않게 하고 싶어요.”
‘그놈의 도련님 소리.’ 칼릭스는 머뭇대면서도 할 말을 다 쏟아 내는 헤르난을 빤히 쳐다봤다. 잊고 있던 쓸데없는 옛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잘생긴 도련님이 옷까지 멋지게 차려입으시면, 저 같은 사람은 눈이 부셔서 똑바로 볼 수가 없다니까요.〉
함께 밖을 나서기 전이면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이렇게 말해 주곤 했다. 그런 말을 하면서 바보처럼 웃었었다.
그리고 지금, 헤르난은 그 먼 옛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도 갈 거지?”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물었다. 물음을 받아 든 헤르난의 얼굴 위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빛을 잃었다.
“너도 가야 해.”
말끝에 붙었던 물음표를 지워 버리고 칼릭스는 다시 한번 말했다. 초조가 담긴 목소리였다.
“아뇨. 전 두 분이 가까워지는 일에 방해만 될 겁니다. 저는…… 칼릭스님의 배우자니까요.”
배우자.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미안해지고 민망해지는 단어를 말하며 헤르난은 고개를 떨궜다.
“난, 네가 내 옆에 없는 게 더 방해돼.”
“…….”
“그냥, 네가…… 내가 없는 사이에 어디 가서 허튼짓이나 하진 않을까, 당하진 않을까, 신경 쓰이니까…….”
어울리지 않게 말을 더듬으며 칼릭스는 헤르난과 눈을 맞췄다.
짧은 침묵이 찾아왔다.
입을 다문 칼릭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 걸 보니, 자신이 무어라 말을 더한다고 한들 제대로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헤르난은 침묵을 깨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눈에 닿을 만한 자리에서 가만히 있겠습니다.”
먼 옛날엔, 칼릭스를 지키기 위해 질투와 열등감 따위로 번질거리는 눈을 하고 그와 루체를 따랐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칼릭스에게 결백을 내보이기 위해 그들을 쫓아야 할 것 같았다.
그때처럼 행복한 두 사람을 보고 있는 게 괴롭게 느껴질까? 아니면 다시 만난 칼릭스와 루체를 봤을 때처럼 기쁘기만 할까?
뭐든 상관없었다. 기쁘거나 괴롭거나 어차피 시간이 지나 루체와 칼릭스의 사이가 깊어지면 그만두게 될 일이었다. 칼릭스도 방해꾼이 없는 자리에서 루체와 단둘이서만 만나고 싶어 할 거다.
칼릭스의 말을 긍정한 헤르난은 훗날의 일 대신 코앞으로 다가온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바라진 않는 것 같지만…… 그래도 재단사를 불러야겠지.’
후원자의 밤이 열린 연회장에 모인 모두의 시선을 받을, 또 루체의 눈을 반짝이게 할 칼릭스를 생각하며 헤르난은 속으로 웃음 지었다.
* * *
붉은 머리칼을 가진 사랑스러운 청년이 다리가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와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재단사가 가져온 옷감들을 구경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얼핏 보면 사이좋은 귀족 부부의 즐거운 한때처럼 보이기도 했다.
‘꼴같잖은 광경이군.’
눈을 가느다랗게 뜬 칼릭스가 헤르난과 니콜라를 보며 생각했다.
몸 여기저기에 바쁘게 줄자를 가져다 대는 재단사가 무어라 말을 건네는 게 느껴졌지만 칼릭스는 니콜라와 헤르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기만도 바빴다.
“남작님. 배 한 번 만져 보실래요? 애가 발길질을 하고 있는데.”
니콜라가 호들갑을 떨며 헤르난에게 말을 걸었다.
칼릭스는 어이가 없었다. 모자람 없는 고등 교육을 받았을 귀족 자제가 어떻게 애 아버지도 아닌 남자에게 저런 소리를 하나 싶었다. 하다못해 절친한 친구도 되지 못할 이에게 말이다.
놀란 건 헤르난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니콜라를 내려다보던 헤르난은 그래도 되냐며 재차 망설이다가, 니콜라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준 뒤에야 그의 배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신기하죠?”
니콜라가 웃으며 물었다.
곧, 헤르난의 입가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그 웃음은 칼릭스의 눈에도 들어왔다. 자신의 앞에선 어설프게 웃기만 하는 남자가 평소와 달리 눈까지 슬며시 접어 보이며 웃는 꼴이 눈에 걸렸다.
“나중에 남작님도 아이를 갖게 되시면, 더 신기할 거예요.”
칼릭스는 새처럼 쫑알대는 니콜라의 입을 막아 버리고 싶었다.
“흐음. 한 달 사이에 키가 많이 자라셨습니다. 체격도 훨씬 좋아지셨고요. 더 자라실 걸 고려해서 옷을 만들어야 할지…….”
“네. 더 자랄 겁니다.”
한참 더. 재단사의 말에 대충 답을 내놓은 칼릭스가 다시 헤르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재단사의 요청에 따라 내민 칼릭스의 오른손에 핏대가 서 있었다.
뚱한 얼굴을 하고 헤르난의 옆모습을 보던 칼릭스와 니콜라의 눈이 마주쳤다. 재단사에게 붙잡혀 있는 칼릭스를 마주한 니콜라는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칼릭스 님은 정말 좋은 남편을 만나신 것 같아요.”
니콜라의 말이 이어졌다.
“작위니 재산이니 다 떠나서, 남작님처럼 다정한 남편감은 흔치 않거든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건가 싶었다.
“제가 우리 이안 말고 남작님 같은 분을 남편으로 맞았다면, 남한테 뺏길까 봐 안절부절못했을 것 같아요.”
“……아닙니다.”
니콜라의 말을 들은 헤르난이 쑥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니콜라의 말을 분위기를 띄울 농담 정도로 생각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니콜라는 헤르난이 아니라 제게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칼릭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라면 매일 잘생겼다, 예쁘다, 속삭이고 쓰다듬어 주고, 손도 잡아 주고 입도 맞추고 하면서 옆에 꽉 붙들어 뒀을 텐데.”
하하하. 니콜라가 소리 내 웃었다.
“꼭,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셨으면 좋겠어요.”
부른 배 위에서 떨어져 나간 헤르난의 손을 붙든 니콜라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아주 작은 속삭임이었다. 아쉽게도,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칼릭스의 귀가 너무 밝아 속삭임이 속삭임이 아니게 됐지만 말이다.
허. 칼릭스는 헛웃음이 났다.
스칼라에 막 도착했을 때만 해도 서커스단에 억지로 끌려온 토끼 같은 눈을 하고 있던 니콜라는 고작 몇 개월 사이에 헤르난을 친한 형처럼 느끼고 있었다. 레온이나 니콜라나 수도에서 온 것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질 않았다.
“저는요, 남작님이 받고 계신 오해를 풀어 드리고 싶어요. 진심으로요. 아이를 낳고 수도로 돌아가면 남작님이 얼마나 친절한 분인지 열심히 소문 좀 내 보려고요.”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헤르난의 손을 다시 놓아주며 니콜라는 방실방실 웃었다.
“나중에 우리 모자라지만 잘생긴 형제들도 소개해 드릴게요. 다들 이상한 소문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막상 남작님을 만나게 되면 더 깊이 알고 싶어서 안달을 낼 거예요. 그러니까…… 초대를 거절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어떻게 니콜라 님의 뜻을 거절하겠습니까.”
니콜라가 무슨 뜻을 가지고 입 밖으로 말을 줄줄 내뱉는지도 모르고 헤르난은 웃기만 했다. 그런 헤르난을 뿌듯한 얼굴로 보던 니콜라가 칼릭스를 향해 슬쩍 시선을 옮겼다.
널 예쁘게 여겨 줄 사람들을 머릿속에 줄 세워 봤다. 훗날 하나씩, 하나씩 데려다가 너랑 엮어 보겠다.
칼릭스의 귀에는 니콜라의 말이 이렇게밖에 들리지 않았다. 니콜라의 귀여운 얼굴을 마주한 칼릭스의 입가에 삐딱한 웃음이 걸렸다.
실로 건방진 오지랖이었다.
니콜라의 말은 어쩌면, 너를 사랑해 주지 않을 사람에게 매달리지 말라는 조언과도 닿아 있었다. 물론,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칼릭스도 니콜라와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지난 삶 칼릭스 자신의 불행만큼, 아니 그보다 더 불행했을 헤르난에겐 평범한 삶을 다시 꾸려 나갈 권리가 있었다. 헤르난의 마음을 받아 줄 것도 아니면서 그를 계속해 소유하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욕심이란 걸 칼릭스는 알았다.
니콜라의 말대로 헤르난은 그를 사랑해 주는 평범한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다. 임신한 니콜라에게 팔짱을 내어 줬던 것처럼, 헤르난은 그의 배우자에게도 팔짱을 내어 주며 다정하게 웃을 것이다.
헤르난은 키가 크고 외모가 준수하니 옆에 여자든 남자든 누굴 세워 놔도 잘 어울려 보일 거다. 좋은 남편이, 그래, 어쩌면 좋은 부모가 될 수도 있겠지.
‘……아이는 헤르난이 갖는 건가?’
재단사가 내민 푸른색 옷감을 쏘아보며 칼릭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빴다. 헤르난은 남자 보는 눈이 정상이 아니니 배우자를 아껴 줄 제대로 된 인간을 만나지 못할 게 분명했다. 행복한 모습 대신 배가 잔뜩 부른 채로 혼자 절뚝이며 걸어 다니는 꼴밖에 떠오르질 않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애 가진 배우자가 혼자 다니게 내버려 둘 쓰레기가 세상에 존재할까? 암만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도 옆에서 지팡이 노릇을 해 주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칼릭스의 기분이 한층 더 나빠졌다. 평소에도 제대로 못 걷는 사람이 애까지 가졌는데, 발이 땅에 닿게 한다고? 안고 다니지는 못할망정? 그러려면 헤르난보다 키도 크고 체격도 큰 남자를 만나야 하는데…….
문득, 칼릭스의 머릿속에 덩치만 큰 금발 머리 남자애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씹.” 칼릭스의 입 사이로 흘러나온 욕에 놀란 재단사가 들고 있던 옷감을 재빠르게 조수에게 건넸다. 던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괜한 생각을 하는 데 시간을 허비했다. 순간 새하얗게 변했던 칼릭스의 머리가 다시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헤르난 말론을 살린 건 칼릭스 히페리온이었다. 그를 되살린 마법의 산물이 제 것이 아니라는 사실 따윈 상관없었다. 이상한 세상에 떨어진 헤르난을 꾸역꾸역 쫓아온 건 그 흑마법사가 아닌 자신이니 말이다.
칼릭스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니콜라 대신 헤르난이 맹한 얼굴을 하고 저를 보고 있었다. 헤르난은 차가운 칼릭스의 표정을 살피다가는 멋쩍게 웃으며 말 한마디를 건넸다.
짜증 날 정도로 사람 속을 뜨겁게 만드는 괴상한 웃음이었다.
“그 색…… 잘 어울리셨는데요.”
그렇게 말하는 헤르난의 얼굴에 아쉬움이 묻어나 있었다. 제 발치에 더듬더듬 내뱉어진 헤르난의 말을 주워 담으며 칼릭스는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헤르난은 내 것이다.
그의 불행을 책임지는 건, 나여야 한다.
또 한 번 같은 답이 나왔다. 칼릭스는 자신의 이기심에 웃음이 났다.
저는 태생부터 이기적인 존재였다. 어머니의 죽음과 맞바꿔 태어난 이래로 단 한 번도 이기적이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칼릭스는 자신의 이기심이 만들어 낸 욕심을 내버려 두기로 했다. 미움과 죄책감, 애정이 뒤엉켜 조잡한 색을 내는 욕심이었다.
언젠가 자신이 직접 헤르난의 짝을 찾아 주려고 드는 날이 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어쩌면 아예 그런 날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
칼릭스는 헤르난이 제게서 다시 도망가지 못하게 하겠답시고 그를 절름발이로 만들어 버린 일에 책임을 져야 했다. 너무 뒤늦게 그를 감옥에서 빼낸 것도, 오갈 곳이 없는 그를 자신의 세상에 가둬 둔 것도, 결국 허무하게 죽게 한 것에도 책임져야 했다.
그런데 그 책임이란 게, 하루아침에 사라질 만한 건 아니지 않은가? 평생이란 단어를 붙여도 모자랄지도 몰랐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칼릭스는 재단사에게 다시 옷감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곧, 칼릭스를 떠났던 옷감이 돌아와 그의 어깨 위에 걸쳐졌다. 겨울 바다를 닮은 짙푸른 색깔이 칼릭스의 아름다운 얼굴을 더욱 하얗게 빛내 줬다.
“마음에 들어?”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물었다.
“……네.”
귀 끝이 붉어진 남자의 기운 없는 얼굴 위에 잠시 기쁨이 감돌다가는 재빨리 자취를 감췄다.
헤르난은 그 오랜 치욕을 겪고도 여전히 저를 사랑하고 있다.
사랑. 여전히 낯설고 의심스럽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하지만 매일 온몸으로 다시 느끼게 되는 사실이기도 했다.
먼 옛날엔, 칼릭스에게 있어 헤르난의 사랑은 그저 원망스럽고 의문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헤르난의 사랑 역시 제가 책임져야 할 것 중 하나라는 생각을 하면 영 나쁘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잠시 생각에 잠겼던 칼릭스의 시선이 다시 헤르난에게 닿았다.
무어라 정의 내릴 수 없는 안도감을 느끼며, 칼릭스는 쑥스러워하는 헤르난을 대신해 다시 한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스칼라의 여름 햇살을 닮은 미소였다.
* * *
후원자의 밤은 세이어 상단이 서대륙 내의 전도유망한 예술가들과 그들의 후원자를 위해 여는 친목을 위한 파티이자 경매 행사였다. 분기마다 장소를 바꿔 가며 진행됐는데, 올해는 수도 디아만테 남쪽에 있는 소델 자작의 별장에서 행사가 열렸다.
이제 막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 헤르난과 칼릭스를 실은 검은 마차가 자작의 별장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분위기로 가득 찬 채였다.
그 분위기를 만들어 낸 건 칼릭스였다. 하지만 그 분위기란 게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거나 눈치를 보게끔 하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칼릭스는 그저 입을 꾹 다문 채로 헤르난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목에 무언가가 걸린 사람처럼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먼저 눈을 피하기도 했다. 칼릭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헤르난은 칼릭스가 이상하게 구는 이유를 대충은 알 것 같았다. 도통 이해는 가지 않지만…… 아마 지난밤 일 때문일 것이다.
칼릭스의 억지에 못 이겨 함께 방을 쓰긴 했지만, 헤르난은 자신이 금방 칼릭스의 침대 위에서 쫓겨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헤르난의 예상과 달리, 그는 계절이 바뀐 지금도 여전히 매일 밤 칼릭스와 같은 침대 위에서 잠이 들었다.
예상보다 길어진 칼릭스의 변덕이 만들어 낸 동침은 수도 디아만테 외곽의 낡은 저택에서도 이어졌다.
스칼라 남작성의 침대와 비교할 수 없이 작은 침대 위에서 헤르난은 최대한 칼릭스와 닿지 않으려 노력해야만 했다. 칼릭스는 그와 헤르난의 거리가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어김없이 손을 붙잡아 왔기에 소파로 가 대충 몸을 말고 잘 수도 없었다.
어젯밤 역시 헤르난은 칼릭스의 옆에서 잠이 들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밤이 깊은 새벽에 눈을 뜨게 됐다.
사람의 뒤척임에 시트가 쓸리는 소리가, 길게 늘어진 숨소리를 닮은 앓는 소리가 헤르난의 귓가에 닿았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헤르난의 시선이 그의 옆에 있는 칼릭스에게로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창 너머에서 들어온 달빛이 칼릭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이마에 맺혀 있는 식은땀이며 어지러이 흩어진 머리카락, 잔뜩 찌푸린 미간이 그를 악몽 속에서 헤매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칼릭스가 앓고 있는 건 악몽이 아니라 때늦은 성장통이었다.
얼마 전, 무릎을 부여잡고 낮게 신음하는 칼릭스를 본 헤르난이 깜짝 놀라 치료 마법사를 불러온 덕에 알게 된 병명 아닌 병명이었다.
〈이 나이에 성장통을 앓는 모자란 새끼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라는 게…… 재밌네.〉
시간을 되돌아온 덕에 뒤늦은 성장통을 두 번이나 겪게 된 칼릭스가 투덜댔었다.
헤르난은 홀로 앓고 있는 칼릭스가 안쓰러웠다. 망설이던 헤르난은 천천히 손을 뻗어 칼릭스의 이마 위에 흩어져 있는 머리칼을 정리해 줬다. 땀에 젖은 백금색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짙은 색을 하고 있었다.
이미 너무 오래전 일이 됐지만, 갑작스럽게 키가 자란 헤르난 역시 성장통의 고통을 알았다. 헤르난은 칼릭스가 느끼고 있을 고통을 어떻게 해서든 줄여 주고 싶었다.
17살이었던 헤르난이 성장통의 고통을 이겨 내는 데 도움을 준 건 같은 기사단에서 일하던, 그보다 대여섯 살 정도가 많았던 동료였다. 무릎을 부여잡고 끙끙 앓는 어린 남자애가 안타까웠는지 동료는 틈만 나면 제 다리를 마사지해 주곤 했는데, 아직도 그 방법이 기억날 정도로 효과가 좋았다.
……괜한 짓을 하는 게 아닐까.
주저하던 헤르난은 결국, 몸을 움직여 칼릭스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칼릭스는 그의 몸에 자신이 닿는 걸 원치 않겠지만, 고통을 덜어 주려고 이러는 거란 걸 알면 이해해 주지 않을까 싶었다.
헤르난의 두 손이 칼릭스의 왼쪽 발목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아킬레스건 아래의 움푹 들어간 살을 부드럽게 눌러 주던 손이 단단한 종아리를 짚고 올라가 무릎을, 무릎 뒤의 오금을 간질이듯 마사지했다.
칼릭스가 눈을 뜬 건, 헤르난의 손이 그의 허벅지를 눌러 주고 있을 때였다. 깨어난 칼릭스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키긴 했으나, 그답지 않게 얼빠진 얼굴을 하고 헤르난을 봤다.
〈……뭐 해?〉
헤르난은 여전히 칼릭스의 허벅지 위에 손을 얹은 채로, 통증을 가시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말을 더듬더듬 내놨다.
칼릭스는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헤르난은 칼릭스의 오른쪽 다리로 손을 옮겼다. 긴장한 근육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게 손바닥 아래로 느껴졌다.
동료에게 받았던 마사지를 곰곰이 떠올려 보며 헤르난은 열심히 칼릭스의 다리를 만져 줬다. 칼릭스의 발목이며 종아리, 무릎에서 허벅지를 그는 턱 아래로 땀방울이 흘러내릴 정도로 열심히 마사지했다. 묘한 뿌듯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허벅지 안쪽의 근육을 눌러 주던 헤르난이 고개를 들어 칼릭스를 봤다. 잔뜩 짜증이 난 얼굴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예상과 달리, 칼릭스는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당황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혹은 뭔가를 참는 것 같기도 했다.
얼굴이 새빨개진 칼릭스는 두 팔을 뻗어 헤르난을 밀어 냈다. 하지만 막상 헤르난이 뒤로 밀려나자 그가 침대 밖으로 떨어지기라도 할까, 몸을 숙여 헤르난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두 손이 붙잡힌 채로 제 뺨에 쏟아지는 거친 숨소리를 들어야 했다.
맞닿은 손이며 숨결이 너무 뜨거워, 헤르난은 혹여 칼릭스가 감기라도 걸린 게 아닌가 걱정이 됐다. 수도의 겨울은 스칼라가 있는 남부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추웠으니 말이다.
〈말도 안 돼…….〉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릭스의 욕지거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걸까. 멋쩍은 헤르난의 시선을 알아챈 칼릭스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아. 조금 뒤에야 헤르난은 칼릭스가 이상한 반응을 보인 이유를 알아챘다. 큰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부들부들 떠는 칼릭스를 보며 헤르난은 말을 고르고 또 골라야 했다.
마사지 때문에 발기를 한 게 창피한 일은 아닙니다. 마사지라는 게 아프기도 하지만 간지럽기도 하고, 기분이 좋으니까요.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충분히 그런…… 그럴 수 있다고 말을 해 줘야 하는 걸까?
하지만 헤르난은 결국 칼릭스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못했다. 홀로 씩씩대던 칼릭스가 이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린 탓이었다.
〈어디 도망갈 생각 하지 마.〉
칼릭스는 이 말 한마디만을 남기고 쌩하니 방을 나섰다. 그리고 꽤 긴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질 않았다.
아무래도, 칼릭스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손길에 무언가를 느낀 게 화가 난 모양이었다. 꼭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서 돈을 뺏은 못된 어른이 된 것만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열리지 않는 문을 바라보며 헤르난은 자신이 괜한 짓을 했다고 후회의 후회를 반복했다. 하지만 칼릭스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긴 시간 내도록 눈만 깜빡이다가 까무룩 잠이 든 통에 사과를 건네지는 못했다.
아침이 되어서야 칼릭스를 다시 마주하고 어설프게나마 사과의 말을 전하긴 했지만, 칼릭스에게 너는 속 편해서 좋겠다는 쌀쌀맞은 답만을 받아 들어야 했다.
그 후론 계속…… 이 상태였다.
칼릭스는 헤르난을 피했다. 정확히는 헤르난의 시선을 피했다.
“그딴 건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내내 침묵을 고수하던 칼릭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시선 역시 흔들리지 않고 헤르난에게 꽂힌 채였다.
“그딴 거요?”
“……마사지.”
“제가 성장통으로 힘들어하는 걸 본 동료가 시간이 날 때마다 마사지를 해 줬습니다. 정말 많은 도움이 됐어요. 그래서 혹시 도움이 될까 하고 지난밤에…….”
“변태 새끼.”
얼굴을 찌푸린 칼릭스가 헤르난의 말을 잘랐다.
“네?”
“그 동료란 인간, 변태라고.”
“…….”
“대가리가 제대로 달린 인간이 아니니 괜히 일 잘하고 있었을 너를 틈만 나면 불러다 그딴 식으로 만지작거린 거 아냐. 내가 아는 새끼야? 아직도 일해?”
“그분은 대공의 기사단에 있을 때…….”
당황한 헤르난이 말을 얼버무렸다. 도대체 그 마사지의 어디가 변태적이라고 하는 건지 헤르난은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저를 변태라고 비난하진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인가 싶었다.
“씨발. 눈치도 없는 둔한 걸 골라서…… 그런 짓을 하는 건 잡아서…….”
입에 담기에도 무서운 소리를 뒤이어 중얼거리며 칼릭스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려 했다. 익숙한 버릇이었다.
하지만 손안에 머리카락이 잡히질 않았다. 헤르난이 칼릭스의 손을 조심히 붙잡은 탓이었다. 두 손이 만들어 낸 그림자 아래에서도 빛을 머금어 반짝이는 파란색 눈이 헤르난의 얼굴을 느릿하게 훑었다.
그 눈빛에 지레 겁을 먹은 헤르난이 칼릭스에게서 재빠르게 손을 뗐다.
“머리가 망가지십니다.”
말을 마친 헤르난이 서툴게 웃어 보였다.
“……앞으로 마사지 같은 거 해 주지 마.”
헤르난의 바람대로 예쁘게 정돈된 머리를 더는 망가트리지 않고 칼릭스는 말했다. 곧장 말 한마디가 덧붙었다.
“다른 사람한테도.”
“네.”
헤르난의 짧은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까 전까지만 해도 초조해 보이던 칼릭스의 얼굴에 이전과 같은 여유가 조금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헤르난과 오랫동안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 * *
길었던 경매 행사가 끝이 난 후에야 칼릭스는 루체와 마주할 수 있었다. 후원자의 밤에 참석한 예술가들과 후원자들이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게 꾸며진 연회장에서였다.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했던 약속대로 그의 시선이 닿을 만한 곳에 얌전히 앉아 연회장의 풍경을 눈에 담아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연회장에서 가장 빛이 나는 두 남자의 모습을 눈에 담고 있었다.
내내 바랐던 것처럼, 칼릭스는 오늘 이 연회장에서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호감이 가는 상대와 재회하게 될 걸 알아서일까? 칼릭스의 앞에 서서 조잘대고 있는 루체 역시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더 환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칼릭스 님은 제가 잘 보필해 드릴게요. 너무 염려 마세요.〉
몸이 좋지 않아 잠시 쉬어야 할 것 같으니 두 분은 마저 이야기를 나누시라는 말에 루체는 반색하며 답했었다.
누군가 저를 싫어하기라도 할까 항상 걱정하고 불안해하던 루체는, 그래서 속마음을 바깥으로 표현하기 어려워하던 루체는 변했다. 루체를 둘러싼 환경이 변했으니 그 속에 있는 사람까지 변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헤르난은 그 변화가 기뻤다. 루체는 칼릭스를 욕심내면서도 자신이 욕심을 부리는 걸 알면 그가 자신을 떠나기라도 할까 봐 겁을 먹어 도통 겉으로 마음을 드러내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루체는 욕심나는 것이면 뭐든 쟁취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일단은 칼릭스의 배우자인 저를 보는 눈에서도 묘한 호승심이 느껴졌다.
변한 건 칼릭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거칠어지고 어두워졌다. 복수는 끝마쳤지만, 손에 남은 건 하나도 없는 삶에 허무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 칼릭스를 루체의 밝은 웃음이 양지로 이끌어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헤르난 자신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칼릭스의 웃음이 헤르난의 눈에 자연스레 박혔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간지러워지는 웃음이었다. 칼릭스를 보는 헤르난의 입가에도 곧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헤르난은 기뻤다. 칼릭스가 저를 향해 진심으로 기쁘게, 환하게 웃어 주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칼릭스가 저렇게 웃는 걸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찼다.
“이미 완성된 그림 같네요.”
누군가 말을 걸어 왔다.
혼잣말에 가까운 말을 건넨 이는,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작은 수첩 안에 무언가를 부지런히 그리던 여자였다. 완성된 그림이라는 건 칼릭스와 루체를 가리켜 말한 게 아닐까 싶었다.
“델마 오션입니다, 스칼라 남작님.”
헤르난과 눈을 맞춘 여자가 쾌활한 인상만큼이나 시원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미 자신을 알고 있는 이에게 헤르난 역시 짧은 인사를 마주 건넸다. 하지만 인사를 끝마친 후에도 델마의 시선은 헤르난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얼굴을 구석구석 훑는다는 말을 붙여도 될 정도로 집요한 것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남의 얼굴 살피는 게 예의 없는 행동이란 건 알지만,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초상화를 많이 그리거든요. 말을 더하는 델마의 고갯짓을 따라 긴 머리카락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괜찮습니다.”
벽에서 등을 뗀 델마가 원래도 가깝던 헤르난과의 거리를 줄였다. 다짜고짜 헤르난의 옆에 앉은 델마는 손에 들려 있던 수첩을 헤르난에게 내보였다. 아주 자그마한 스케치북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림 같은 얼굴을 진짜 그림으로 그리려니까, 영 어렵네요.”
델마가 내민 수첩을 보고 헤르난은 순간 입 밖으로 바보 같은 감탄사를 내뱉을 뻔했다. 손바닥 한 뼘만큼도 되지 않는 작은 화폭 속에 칼릭스가 담겨 있었다.
손이 가는 대로 펜을 휘갈겨 남긴 스케치였다. 하지만 그림을 그린 사람의 능력 때문인지, 델마의 그림이 헤르난에겐 이미 완성된 작품처럼 보였다.
지금 칼릭스의 앞에 있는 루체의 모습은 그림 속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음에도 칼릭스의 앞에서 사랑스럽게 웃고 있을 그의 존재감 또한 느껴졌다.
“잘 그리죠?”
“네. 대단하십니다.”
헤르난의 진심이 담긴 순순한 대답에 델마가 즐겁다는 듯 소리 내 웃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림을 그리고 싶진 않지만,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저절로 손이 움직이게 되니…… 사는 게 피곤해요.”
기분이 좋아진 델마가 작은 스케치북이나 다름없는 수첩을 그대로 헤르난의 손에 쥐여 줬다.
“선물로 드릴게요.”
말이 이어졌다.
“원래는 남작님을 그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너어무 열렬한 시선으로 저쪽을 보시길래, 따라 보다가 모델이 바뀌었죠. 뭐, 이래저래 제가 가지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라 드리려고요. 천재 화가에게 해 주신 칭찬도 감사하고.”
“하지만…….”
“그림값은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내 주시는 거로 받죠. 제가 이 재미없는 잔치에서 무려 3시간을 더 버텨야 하거든요.”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어 보인 델마가 말을 이었다.
“같이 있어도 돼요?”
델마의 손이 남은 소파 자리를 부지런히 두드렸다.
편히 담소를 나눌 손님들을 위해 연회장 구석에 마련해 둔 자리니, 머무는 것은 그녀의 자유였다. 헤르난이 허락을 하고 말 문제가 아니었다.
헤르난의 두 눈이 급히 칼릭스를 찾았다. 칼릭스는 여전히 루체와 말을 나누는 중이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 다 즐거워 보였다. 얼마 전, 칼릭스가 제게 고백했던 혼란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다행인 일이었다.
‘눈이 닿을 곳에만 있으면 된다고 했으니…….’
델마에게 받은 수첩을 조심히 쥔 채로 헤르난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네. 괜찮습니다.”
헤르난의 답을 들은 델마가 신이 난 얼굴을 하고 파티의 사용인을 붙잡았다. 곧 샴페인이 가득 담긴 잔 2개가 델마의 손에 들렸다.
헤르난은 델마에게 그의 시간을 내주기로 했다. 이 파티에서의 시간을 버텨야 하는 건 헤르난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대화는 빠르게 이어졌다.
주로 초상화를 그려 먹고사는 화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델마는 영업 능력이 부족한 예술가는 이렇게 구석 신세를 면치 못한다며 헤르난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스칼라 남작에 관한 소문 뒤의 얘기엔 관심이 없는 건지, 다행히 델마는 헤르난에게 별다른 물음을 건네지 않았다. 다만 연회장에 넘쳐 나고 있는 술만은 그 종류를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건네 왔다. 헤르난은 그녀의 청을 거절할 타이밍을 잡지 못해 계속해 술을 홀짝여야 했다.
“그림이 정말 마음에 드시나 봐요.”
델마의 말에 헤르난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민망하게도, 작은 종이 위에 새겨져 있는 칼릭스의 얼굴에 자꾸만 시선이 머물게 되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저기 진짜 사람을 두고, 너무 그림만 보고 있는 거 아니에요? 제가 대단히 잘난 화가긴 하지만 저 정도 얼굴을 실물보다 낫게 그리진 못해요. 대충 비슷하게 흉내만 내는 정도죠.”
“진짜 사람은 제게 웃어 주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그림을 쓸어 보던 헤르난이 가볍게 말했다.
“세상에. 올해 들어 본 말 중에 최고로 안타까운 말이네.”
헤르난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 낸 델마가 웃어 보였다.
고작 술 몇 잔 마셨다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쉽게 속내를 내뱉었다. 델마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 다행이었다. 뒤늦게 찾아온 멋쩍음에 헤르난의 목덜미가 붉어졌다.
헤르난은 델마에게 받은 수첩을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어떻게 그런 소리를 입 밖에 내놨을까, 창피했다.
델마는 아까 전 사람을 붙잡아 받아 낸 와인 병을 들어 다시 잔을 채웠다.
“친구도 없고 연인도 없는 사람들은 술이나 마셔야죠.”
“술을…… 잘 못 합니다. 지금까지 마신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아요.”
“어우, 그래요? 되게 잘할 것처럼 생기셨는데.”
“덩치가 아깝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헤르난의 입가에 겸연쩍은 웃음이 걸렸다.
“제가 더 많이 마시면 되죠, 뭐.”
잔을 부딪친 델마가 말 그대로 입 안에 술을 털어 넣었다. 이곳에 모인 귀족들에게 상스럽다고 욕먹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그런 델마를 보고 있자니 거리에 버려진 저를 거둬 이름을 붙여 줬던 애꾸눈 노인이 떠올랐다. 그 노인 역시 저렇게 술을 마셨었다.
언젠가 함께 술잔을 기울이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그는 이미, 아주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다. 멀쩡한 이빨이 몇 개 없던 노인의 걸걸한 웃음을 떠올리며 헤르난은 괜히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에 다시 입을 대었다.
“저기, 진짜 사람이 남작님을 보고 계시네요.”
델마의 말처럼 칼릭스는 헤르난을 보고 있었다. 세세한 표정을 다 알아챌 수 없는 거리에서도, 칼릭스의 얼굴이 루체를 마주할 때와는 다르게 차갑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헤르난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조금은 민망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술. 한 잔 더 주실래요?”
“그럼요, 그럼요.”
고개 숙인 헤르난의 잔을 꽉 채운 델마가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진짜 사람 말고도 많이들 쳐다보네요. 소문이 나쁜 사람 둘이 붙어 있어서 그런가 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델마는 남들의 시선 같은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스칼라 남작과 함께 있는 화가는 후원자들이 좋아할 것 같지 않은데요. 신경 쓰이지 않으십니까?”
“제 소문이 어떤지 아세요?”
델마가 헤르난에게 되물었다. 난생처음 본 이의, 그것도 예술가의 소문을 헤르난이 알 턱이 없었다. 저를 향해 몸을 숙인 델마에게 헤르난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소문에 따르면…… 전 애인이 남녀 가리지 않고 무려 열다섯에, 혼외 자식이 넷인 디아만테 최고의 바람둥이라고 하네요? 현실은, 애인은커녕 간질간질한 마음을 나눌 사람 하나 없이 이렇게 연회장 구석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는 초라한 예술가지요. 그래도 오늘은 덜 외롭네요. 남작님이 제 옆에 계셔 주니까요.”
구시렁대던 델마가 말을 이었다.
“뭐, 남작님 소문이야 이미 잘 알고 있으니 굳이 얘기해 주실 필요는 없고요.”
다시 자세를 고쳐 잡은 델마는 벌써 1년째 애인이 없는 작금의 상황을 헤르난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현재 저보다 연상인 위험한 분위기의 남자를 홀로 탐내고 있다는, 딱히 알고 싶지는 않았던 사실을 알게 된 건 덤이었다.
그래도 헤르난은 말이 많은 델마의 목소리를 차분히 들어 줬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헤르난을 향해 델마가 씩 웃어 보였다.
“왜 남편을, 다른 사람이랑 놀게 내버려 두시는 거예요? 본인은 이런 구석진 곳에서 이 천재 화가가 그린 그림이나 들여다보면서?”
조금 무례한 질문이었다. 헤르난은 딱히 그렇게 느끼지 않았지만 말이다.
“저 두 사람…… 너무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헤르난은 델마에게 답을 하는 대신, 별안간 엉뚱한 말을 꺼내 놨다.
“이상한 소리네요. 꼭 자식 자랑을 하는 부모 같기도 하고.”
“그런가요.”
헤르난은 다시 한번 웃어 보였다. 술에 약하다는 말이 진짜였는지 술 몇 잔 마신 거로 눈가가 발개져 있었다.
“칭찬으로 한 말은 아닌데요. 뭐, 잘 어울리긴 하네요. 왕자님 둘이 연애하는 것 같고. 질투는 안 나시나 봐요?”
“질투? 많이 했습니다.”
술기운이 올라오는 걸 느끼며 헤르난은 길게 눈을 감았다 떴다. 헤르난의 말이 이어졌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질투도 어느 정도 수준이 맞는 사람이나 하는 건데…….”
“에이. 왜 그런 소리를 하실까. 너무 자신을 비하하진 마세요. 남작님 같은 분이 그런 모습을 보이면, 변태가 꼬여요.”
델마는 헤르난에게 자기 비하라는 말을 꺼내 놨다.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헤르난은 그의 평생을 저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며 살아왔다. 매 순간 자신이 얼마나 모자란 사람인지, 사랑하는 사람과, 그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지를 곱씹어야 했었다.
“제가 분위기를 망친 것 같군요.”
가까이 몸을 숙여 들어 줘야 할 만큼 힘없는 목소리로 헤르난은 말을 더했다. 그래도 곧, 델마를 따라 웃어 보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델마의 말 때문에 곧 입을 다물어야 했다.
“저기요, 남작님.”
“네?”
“남작께서 좋아하시는 분이 이쪽으로 오는데요?”
델마가 헤르난의 귓가에 속삭였다. 술기운에 멍해진 얼굴을 하고 헤르난은 즐겁다는 듯 웃고 있는 그녀를 봤다.
누군가에게 어깨가 붙잡혔다. 헤르난은 반사적으로 위를 올려다봤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 그 사람이 어느새 앞에 와 있었다. 헤르난과 눈이 마주친 칼릭스의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
하. 짧은 탄식과 함께 칼릭스의 입매가 삐뚤게 휘어졌다.
“미쳤군.”
헤르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칼릭스가 다짜고짜 헤르난의 뺨을 부여잡았다. 그러고는 빤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눈이 풀릴 정도로 취한 거야?”
“안 취했습니다.”
“취했잖아.”
어이가 없다는 듯 칼릭스는 헛웃음을 쳤다.
“……아니에요.”
제 뺨을 쥔 칼릭스의 손을 조심히 떼어 내며 헤르난은 말했다. 짜증이 칼릭스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쪽이 술 먹였습니까?”
재밌는 구경을 하며 술을 마시던 델마에게 칼릭스가 물었다. 눈빛도 목소리도, 저 멀리에서 부드럽게 웃고 있던 남자와는 영 딴판이었다.
“술은 제가 아니라 부군께서 먹이셨죠.”
갑자기 시비가 걸린 델마가 술잔을 휘휘 돌리며 말했다.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어디서 그딴 말장난을…….”
“말을 그렇게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도련님.”
헤르난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칼릭스를 붙잡으며 속삭였다.
“처음 뵙는 숙녀분껜 상냥한 말투를 쓰셔야죠.”
“안 취했다고 우기더니, 너는…….”
신경질적인 음성이 나오려다가 말았다. 입 안으로 말을 삼킨 칼릭스는 헤르난에게서 케인을 뺏어 들더니 이어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은 대충 델마에게 넘겨 버렸다.
헤르난의 어깨를 단단히 끌어안은 칼릭스가 양손에 술잔을 쥔 여자를 내려다봤다. 화려한 이목구비와 어울리는 날카로운 눈매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납고 더럽게 변해 있었다. 참으로 생동감이 넘치는 표정이었다.
술에 취한 자신의 남편을 품에 가둔 칼릭스는 살벌한 낯을 하고 연회장을 떠났다.
“……아, 수첩까진 주지 말걸. 아까보다 더 멋있는 그림이 나왔을 텐데.”
칼릭스의 훤칠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델마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곧장 종이를 찾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칼릭스는 저택 바깥에 있는 벤치 위에 헤르난을 앉혔다. 마차에 타기 전, 어느 정도 술이 깬 상태로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화내지 마세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칼릭스는 속이 뜨끔했다. 화가 난 게 맞으니 말이다. 다만 왜 화가 난 건지 도통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얌전히, 가만히 있었습니다. 정말 어쩌다 보니…… 대화 상대가 생겼을 뿐입니다. 그래도 추태를 부리지는 않았어요. 술도 조금만 마셨습니다.”
헤르난이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았다. 여전히 술에 취한 사람처럼 눈가가 붉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더욱 이상해졌다. 저러다 또 울기라도 하면 어쩌지. 밑도 끝도 없는 초조가 칼릭스를 찾아왔다. 곧 무너질 절벽 끝에 서서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하고 앞으로 닥칠 일만 기다려야 하는 등신이 된 기분이었다.
“……누가 화낸대?”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헤르난은 고개를 들어 칼릭스와 눈을 맞췄다. 어느덧 익숙해진 바보 같은 웃음이 입가에 걸려 있었다.
칼릭스는 그에겐 항상 어른 같았던 헤르난이 술 몇 잔에 정신이 흐려져 버리는, 다른 사람의 뒤치다꺼리가 필요한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라니.
“네가 취한 걸 본 거, 오늘이 처음이야.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네.”
칼릭스가 중얼거렸다.
“제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십니까.”
“뭘.”
“술을 입에 대지 않으려고요.”
“…….”
“실수로라도 도련님 앞에서 추태를 부릴까 봐…… 얼마나 걱정하고 조심했는데요.”
헤르난의 시선이 칼릭스에게서 비껴갔다.
“왜? 취해서 내 욕이라도 할까 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 그래도 바보 같던 헤르난의 웃음이 더 바보같이 변했다.
“아뇨. 제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말을 죄다 꺼내 놓게 될까 봐. 그래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지금이라도 해 보든가.”
팔짱을 낀 칼릭스가 대충 고개를 까닥였다. 말을 나누다 보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겠지 싶었다.
헤르난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보나 마나 저를 원망하는 말을 내놓을 테지만. 너무 당연해서 자신은 무어라 변명할 것도 없는 그런 원망의 말 말이다.
칼릭스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서서 헤르난이 자신에게 쏟아 낼 원망을 감내하기로 마음먹었다.
“……한 번만.”
바닥을 보면서, 헤르난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은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침묵이 두 사람의 주위를 맴돌았다.
칼릭스는 가만히 헤르난을 기다렸다. 아주 긴 망설임이 지나간 후에야 헤르난은 다시 입을 열었다. 술기운에 붕 뜬 마음이 그의 입을 열게 한 거였다.
“한 번만, 다정하게. 저한테도 웃어 주시면 안 됩니까?”
헤르난의 말이 어둠 속으로 느릿하게 흩어졌다.
칼릭스는 헤르난의 물음에 아무런 답을 줄 수 없었다. 그는 얼굴을 굳힌 채로, 그저 헤르난을 내려다봤다. 마법이 만들어 낸 흐릿한 빛과 밤의 그림자가 그의 위를 번갈아 지나고 있었다.
말을 잃은 칼릭스가 만들어 낸 침묵 속에서 헤르난은 탄식했다. 머리를 말랑말랑하게 만들던 술기운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황급히 고개를 든 헤르난이 칼릭스의 눈치를 살폈다. 역광 때문에 칼릭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차가워진 손으로 눈가를 쓸며 헤르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묵을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몸을 일으키기만 했을 뿐, 칼릭스에게 케인을 돌려 달라고 말하기는 어려워 그저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의지할 곳이 없어 마음이 불안했다.
조금 늦게, 칼릭스의 시선이 헤르난을 따라왔다. 칼릭스는 속내를 알아채기 어려운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의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는 거였다.
“술. 다 깼습니다.”
헤르난은 말했다. 이어 의미 없는 사과의 말 몇 마디가 더 이어졌다.
“이제 다시 들어가셔야죠. 인사도 없이 갑자기 사라지시면 루체가 당황할 겁니다.”
“……약속을 잡아 놨으니 다시 돌아갈 필요는 없어.”
예상과는 다른 잠잠한 목소리로 칼릭스가 말했다.
헤르난은 그런 칼릭스에게 답을 하는 대신,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멍청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약속인지 안 물어봐?”
칼릭스는 물었다.
도대체 칼릭스가 무슨 답을 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헤르난은 입만 달싹여야 했다. 하지만 칼릭스 역시 딱히 답을 들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지, 별다른 반응 없이 두 걸음 정도를 걸어 헤르난의 앞에 섰다.
“세이어 상단의 이름으로 여는 사냥 대회에 초대받았어.”
예전, 루체와 처음 만났던 사냥 대회가 떠올랐는지 칼릭스의 눈에 묘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헤르난은 무어라 답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 그저 잘됐다는 말만을 내놨다.
“헤르난 너랑 같이 갈 거야.”
“…….”
“부부잖아, 우리.”
헤르난과 시선을 맞춘 칼릭스가 말했다.
사냥 대회에서 그 누구보다 쓸모없는 사람이 되겠구나.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헤르난은 칼릭스를 향해 그저 천천히 고개만 끄덕였다. 헤르난은 칼릭스가 그를 필요로 한다면 그게 무엇이건 할 수 있었다. 해내야 했다.
“이제 돌아가자.”
말을 마친 칼릭스의 손이 헤르난의 어깨를 감싸 왔다.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케인을 돌려주는 대신 그의 왼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허리에 둘렀다.
“술도 안 되겠어.”
칼릭스의 말이 이어졌다.
“앞으로 술을 마실 거면, 내 옆에서만 마셔. 나도 네 옆에 있을 때만 마시는 걸로 하면 공평하지?”
헤르난을 슬쩍 흘겨본 칼릭스가 느릿하게 걷기 시작했다.
“……네.”
케인이 아니라 칼릭스에게 의지한 채로, 헤르난은 그가 마음에 들어 할 긍정을 내놨다.
헤르난은 칼릭스가 제게 화를 내지도 비웃지도 않고 옆을 내어 줬다는 게 기뻤다. 꼭 그의 호위 기사 일을 했을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바랐던 다정하고 따스한 웃음은 아니었지만, 꼭 그 웃음을 받아 든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헤르난의 입 사이로 흘러나온 희미한 웃음이 하얀 연기를 만들며 차가운 밤 속으로 퍼져 나갔다.
* * *
매해 돌아오는 12월의 마지막 주 수요일은, 여신 셀레네스가 이 서대륙 땅에 처음으로 생명을 선물해 준 탄생일이었다.
대륙 이곳저곳에서 여신을 기리는 시끌벅적한 축제와 파티가 이어졌다. 신을 믿는 이들은 신실한 마음으로 술잔을 들었고 신을 믿지 않는 이들은 신을 핑계로 즐겁게 놀았다.
교류니 모임 따위와는 영 거리가 먼 스칼라 남작의 성에서도 탄생일 주간을 맞아 파티가 열렸다. 다만, 다른 귀족들의 성에서 열리는 것과 같은 파티는 아니었다.
작년 연말, 스칼라 남작의 보좌관인 조세핀과 남작성의 집사와 하녀장, 세 사람의 주도하에 열렸던 자그마한 파티가 올해도 이어졌다.
스칼라 남작의 승인과 지원 아래에서 열리는 탄생일 파티의 손님은 남작성에서 일하는 모든 사용인이었다. 올해는 특별히, 대공의 손님인 니콜라와 레온도 함께였다.
죽은 공간이나 다름없던 낡고 텅 빈 연회장이 신이 난 사람들의 손길 아래에서 아기자기하게 변했다.
누군가 자기 집 창고에서 끄집어내 왔다는 거대한 셀레네스 여신의 인형도 벽에 걸렸다. 그보다는 작게 만들어진 여신의 자식들도 함께였다.
술과 음식도 잔뜩 준비됐다. 지난번, 헤르난을 대신해 출장을 갔던 조세핀이 선물로 받아 온 샴페인과 레몬주를 연회장 한가운데에 궤짝으로 쌓아 둔 모습에서 파티에 참여하는 사용인들이 가진 무언의 의지가 느껴졌다.
밴드 역시 연회장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악기를 연주하는 걸 좋아하는 주방 하인 둘과 남작성에 하나뿐인 정원사, 사병 하나가 자체적으로 결성한 임시 밴드였다.
그 실력이 참 어설펐지만 연주하는 사람들도 그걸 듣는 사람들도 그런 사소한 것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침 이안이 스칼라로 날아와 있던 중에 작은 파티까지 열리자 니콜라는 신이 났다. 제법 많이 친해진 하인들과 함께 괴상한 춤을 추기도 했다.
그 뒤엔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게 아쉽다며 이안을 붙잡고 술이란 술을 죄다 그의 입에 부었다. 대리만족이었다.
그리고…… 칼릭스 역시 술이란 술을 죄다 입에 붓고 있는 중이었다.
사용인들의 즐거운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던 헤르난은 가벼운 인사만 건네고 연회장을 떠나려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사람들이 헤르난을 붙잡아 왔다. 그 옆에 붙어 있는 칼릭스의 눈치를 보면서도 말이다.
칼릭스는 헤르난을 대신해 말을 걸어오는 사용인들을 맞으며 그들과 잔을 부딪쳤다. 헤르난은 입에 잔을 댈 새도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헤르난이 제 옆에 있는 칼릭스를 향해 물었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어쩐지 걱정이 됐다.
“왜?”
뚱한 얼굴을 하고 칼릭스는 물었다.
“술을 많이 드신 것 같아서요.”
“괜찮아.”
“대신 마셔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 제가 취한다고 한들, 남작성 안이니 걱정은 안 하셔도…….”
“넌, 저 어린애처럼 주스나 마셔.”
칼릭스가 헤르난과 저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드는 레온을 가리키며 말했다.
레온은 정신이 반쯤 나간 이안 대신 신이 난 니콜라를 쫓아다니는 중이었다. 한 손에 주스가 든 잔을 든 채였다. 겉만 보면 완전한 어른인데 이런 데서 아직 어린 티가 났다.
“왜 그렇게 웃어.”
“……귀여워서요.”
헤르난이 솔직한 답을 내놨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칼릭스를 제외한 모두가 레온을 귀엽게 여기는 중이기에 내놓을 수 있는 말이었다.
“옆에서 대신 술 마셔 주는 남편을 두고, 과일 주스나 마시는 애새끼한테 그런 말을 하시면 섭섭합니다.”
투덜댄 칼릭스가 잔에 남아 있던 술을 입 속으로 삼켰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이었으나 비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술이 들어가 발음이 살짝 부드러워진 탓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헤르난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은 기쁜 날이니 말이다.
근래 루체와 함께 있는 칼릭스의 어른스러운 모습만 봐서 그런 걸까. 저렇게 투덜대는 모습이 괜히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절대 입 밖으론 꺼내지 못할 말이었다.
칼릭스가 후원자의 밤에서 말했던 대로, 세이어 상단에선 스칼라로 사냥 대회의 초대장을 보내왔다. 하지만 사냥 대회까지 기다리는 게 힘들었던 루체는 다시 칼릭스에게 편지를 부쳤다. 만남을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디아만테의 화랑에서 두 사람의 만남은 한 번 더 이루어졌다. 하지만 루체가 칼릭스에게 바라던 데이트는 아니었다. 불청객인 헤르난 탓이었다.
일단은 루체와 칼릭스가 이상한 소문에 휩싸일까, 또 그 소문이 후작의 귀에 들어갈까 봐 걱정된다는 연유에서 헤르난은 두 사람과 함께 하게 됐다. 정확히는, 헤르난을 혼자 둘 수 없다는 칼릭스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호위 기사 일을 할 때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의 데이트를 지켜봤다. 매초, 매분. 헤르난은 그와 칼릭스 사이에 놓여 있는, 절대 넘을 수 없는 거리에 대해 곱씹어야 했었다.
이젠 그보다 훨씬 가까이에서 칼릭스와 루체를 봐야 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마음이 괴롭지는 않았다. 칼릭스의 애정을 바라지 않게 됐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헤르난은 칼릭스의 옆에서 가만히 입을 다물고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가끔은 칼릭스의 상냥한 얼굴을 훔쳐봤다. 너무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을 보며 속으로 감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만남을 기점으로 새로운 불안이 헤르난을 찾았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기에 찾아온 불안이었다. 제가 또 일을 망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시도 때도 없이 헤르난의 뒷덜미를 쓸었다.
칼릭스와 루체, 그리고 스칼라 남작의 이상한 모임이 더는 이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칼릭스와 절 마주 보던 루체의 표정이 내내 어두웠던 걸 보면, 조만간 그가 칼릭스에게 둘만의 만남을 요청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루체의 요청을 기다리는 것보단,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지금처럼 칼릭스가 부드러워져 있을 때 말이다.
“감사합니다. 대신 마셔 주셔서.”
칼릭스와 눈을 맞추며 헤르난은 감사의 말을 건넸다.
“……별말씀을.”
힐끔 헤르난을 본 칼릭스가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술잔에 가려진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얼마 전 실연을 당한 세탁실 하인이 밴드 자리에 올라서서 청승맞은 노래를 시작한 무렵에, 헤르난은 말수가 적어진 칼릭스와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벌컥 문을 열어젖힌 칼릭스가 그의 뒤에 선 헤르난을 봤다. 먼저 들어가라는 신호였다. 칼릭스는 헤르난이 방 안으로 들어서는 걸 확인한 뒤, 단단히 문을 잠갔다.
헤르난을 지나친 칼릭스는 곧장 발코니 쪽으로 향했다. 취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똑바른 걸음이기는 했지만 과음을 한 것만은 분명한 남자를 헤르난은 안절부절못하며 바라봐야 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려던 건 아니었는지 칼릭스는 그저 커다란 유리문 앞에 서서 밤을 내다봤다.
그런 칼릭스를 따라 헤르난도 걸음을 옮겼다. 케인이 바닥을 짚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취침 준비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칼릭스의 옆에 선 헤르난이 말이 없이 잠잠한 남자의 옷에 손을 올렸다. 칼릭스가 남의 시중을 꺼린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의 그에겐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았다.
“내가 취한 것 같아?”
헤르난을 향해 몸을 돌린 칼릭스가 웃으며 물었다. 삐딱한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 꽤 사랑스러운 웃음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게 저런 웃음을 보여 주는 걸 보면 확실히…… 칼릭스는 취해 있었다.
어깨 위에 걸쳐져 있는 케이프의 끈을 풀어 주며 헤르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네.”
칼릭스의 목소리 끝에 따라온 숨결이 헤르난의 검은 머리칼을 간질였다. 칼릭스의 키가 그새 더 큰 모양이었다.
〈나는…… 정말 평생 이따위 키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 너무하지 않아? 이런 얼굴을 줬으면 그 얼굴이랑 잘 어울리는 키도 줘야지, 어떻게 이래.〉
평균에 가까운 키를 굳이 매일 아침 다시 확인해 보면서, 밤새 조금도 자라지 않은 키에 절망을 느끼면서, 칼릭스는 울상을 지었었다. 몇 년 뒤엔 이렇게 키가 커지게 된다는 걸 모르고 말이다.
‘정말 열심히 크는구나.’
칼릭스에게 참 잘 어울리던 붉은색 케이프를 벗겨 내며 헤르난은 웃음 지었다.
“남의 옷 벗기면서 그렇게 웃으면, 되게 이상해 보이는 거 알지.”
그 말에 놀란 헤르난이 케이프와 케인을 함께 끌어안은 채로 한 걸음 물러섰다.
“키가 많이 크셨다 싶어서요.”
“그래서 이제 별로야? 조그맣고 예쁜 애가 아니라?”
“……체격이 좋아지셔서 기뻤습니다. 항상 키가 크길 바라셨으니까요.”
“엄청 바랐지. 키 좀 크게 해 달라고 매일 밤 기도를 하기까지 했으니.”
헤르난과 다시 거리를 좁힌 칼릭스가 그의 품에 들려 있던 케이프를 빼내 대충 소파 위에 던져 놨다.
“그렇게 돼먹지도 않은 기도를 하고 나면 꼭 꿈을 꿨어. 내가 너보다 훌쩍 커져서, 널 내려다보는 꿈이었는데…… 네가 이제 도련님도 어른이 다 되셨다면서 칭찬을 해 줬어.”
칼릭스는 말했다. 목소리 끝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아무래도, 칼릭스는 술에 취하면 평소의 그보다 조금 더 둥그레지는 모양이었다.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금주령을 내릴 정도로 술에 취해 말이 많아진 그를 질색했지만, 헤르난은 어쩐지 칼릭스의 술버릇이 좋게 느껴졌다.
“정말 어른이 다 되셨습니다.”
헤르난은 진심을 담아 칼릭스에게 말했다. 칼릭스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평생 듣지 못했을, 그만 알던 이야기를 전해 듣자 마음이 흐뭇해졌다.
지금 헤르난은 칼릭스의 바로 옆에 서서 날이 서지 않은 옛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전 삶에선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순간이었다. 꼭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다시 눈을 떠 칼릭스를 만날 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달에 한 번이나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었다. 그런데 이렇게…….
이 마지막 삶에서 자신은 정말 많은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기쁨에 감사할 줄 모르고 칼린 도프의 성에선 외롭다며 추하게 눈물을 흘리기나 했다. 외롭다니, 철없는 소리도 작작 해야 했다.
장갑을 벗어 케이프 위에 둔 칼릭스가 헤르난을 봤다. 그는 온실에 핀 겨울 꽃처럼 서늘하면서도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루체를 바라볼 때만큼은 아니지만 적어도 헤르난 말론이란 사람에게 보이기엔 너무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저…….”
그런 칼릭스를 보며 헤르난은 입을 열었다.
“다음 루체와의 약속엔 혼자 나가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왜?”
“그야, 데이트는 셋이 아니라 둘이 하는 거니까요…….”
헤르난이 자신 없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아무리 데이트를 해 본 적이 없다고 해도 데이트는 셋이 아니라 둘이 하는 것이란 사실 정도는 알았다.
“싫어.”
눈을 접어 웃으며 칼릭스는 말했다.
“하지만 루체는 저 때문에 마음 편히 말을 하질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데이트도 아닌데, 무슨. 따지자면 사교 모임 아닌가? 그 애도 네가 있어서 더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루체와 단둘이 만나고 싶어 절 따돌리던 시절을 다 잊으신 것 같습니다.”
헤르난이 이상한 고집을 부리는 칼릭스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때랑 상황이 다르잖아.”
칼릭스는 말했다.
헤르난은 별안간 말하는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때와 다른 상황이라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은, 헤르난 말론이 칼릭스와 루체를 갈라놓은 뒤였다.
“……혹시, 질투가 나서 그래?”
“아닙니다. 감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헤르난이 급히 웃어 보였다. 칼릭스가 자신의 결백을 믿어 주길 바랐다.
“이 얘긴 이제 그만해. 싫은 일 안 시킬 테니까.”
이어 헤르난이 답을 할 새도 없이 칼릭스는 말을 돌렸다.
“소원은 빌었어?”
소원. 준비하던 말을 목 뒤로 넘기며 헤르난은 오늘 저녁에 빌었던 자신의 소원을 떠올렸다.
탄생일 주간에는 그때가 언제건 한 번은 소원을 빌어야 했다. 소원을 비는 장소는 어디든 상관없었다. 스칼라의 바다를 10여 분 가로지르면 나오는 여신의 신전에서, 일터에서, 집에서, 해변에서 기도가 이어졌다.
기도하는 이의 마음이 간절하면 여신께서 그 소원을 들어준다는, 누구에겐 믿음이고 누구에겐 미신인 전통 때문이었다.
지금껏 헤르난은 한 번도 탄생일 소원을 빌어 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 그는 매일 이 세상의 모든 신에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부모를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었다. 하지만 그토록 간절하게 빌었던 기도를 들어준 신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탄생일에 소원을 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다만 올해는 조금 달랐다.
“네. 레온 님이 소원을 빌어야 한다고 말해 주셔서요. 그분을 따라 저도 한번 빌어 봤습니다.”
“……무슨 소원을 빌었어?”
목깃을 풀어내던 칼릭스가 물어 왔다.
그 물음을 받아 들고 헤르난은 어떻게 답을 해야 하나 싶어 입을 달싹였다. 너무 솔직한 답을 내놓으면 칼릭스의 기분이 나빠질 것 같아 걱정이 된 탓이었다.
하지만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자신의 소원을 털어놓는 쪽을 택했다. 제 소원이 이렇게라도 한 번 더, 세상을 엿듣고 있을 여신의 귀에 들어가길 바랐다.
“당신의 행복을 빌었습니다.”
“…….”
“처음으로 빌어 본 탄생일 소원이니까…… 조금 더…… 여신님의 눈에 띄겠죠?”
헤르난의 느릿한 목소리가 어두운 방을 밝히는 하얀 달빛 위로 쏟아졌다.
하. 칼릭스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칼릭스는 어설프고 바보 같은, 조금도 사랑스러워 보이는 구석 하나 없이 멍청히 웃고 있는 남자의 턱을 쥐고 충동적으로 입을 맞췄다.
당황한 손이 칼릭스의 어깨를 잡아 왔다. 헤르난이 그의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쥐고 다니는 케인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칼릭스의 귓가에 닿았다.
이제 의지할 곳이라곤 칼릭스 한 사람밖에 남지 않은 헤르난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칼릭스는 자꾸만 제게서 떨어지려는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붙였다.
가쁘게 흘러나오는 숨만큼이나 멋없는 얼굴로 헤르난은 칼릭스의 입맞춤을 받아 내고 있었다. 키스는커녕 짧은 입맞춤 한 번 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얼빠진 모습이었다.
욕이 나왔다. 별안간 찾아온 충동이, 헤르난에게 입을 맞추게 한 그 충동이 자꾸만 사람을 부추겼다. 눈앞이, 머릿속이 온통 새빨간 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내가 왜, 헤르난 말론에게 욕정을 해?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칼릭스는 제게서 벗어나려 하는 헤르난을 붙잡았다. 유리문과 칼릭스 사이에 껴서 더는 도망갈 곳이 없어진 헤르난을 다급하게 몰아붙였다.
칼릭스의 어깨를 붙잡은 헤르난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부드럽지 못한 입술을, 길을 헤매는 것처럼 정신이 없는 남자의 혀를 칼릭스는 자신의 혀로 옭아맸다.
왜인지 웃음이 나왔다. 곧 울 것처럼 발갛게 변한 헤르난의 눈이 보이는데도 더는 초조하지 않았다.
칼린 도프의 후원에서 헤르난이 우는 걸 봤을 땐 세상이 거꾸로 뒤집히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저 음울한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고 싶었다.
……미친 생각이었다.
까맣게, 붉게 요동치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정신이 돌아온 칼릭스는 그의 머릿속을 빙글빙글 맴돌고 있는 괴이한 욕망을 떨쳐 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칼릭스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품에 가둬 둔 남자를 놓아줄 생각까진 없어 보였다. 칼릭스는 가만히, 헤르난을 바라봤다. 어둠을 머금은 파란색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헤르난은 눈앞이 캄캄했다.
칼릭스를 밀어 내려 했지만 두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칼릭스의 팔이 아니었다면 진작 볼썽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헤르난은 자신과 칼릭스 사이에 흐르고 있는 침묵을 견딜 수 없었다. 이 이상한 상황을 바로잡아야 했다.
“술 때문에…… 사람을, 사람을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숨을 몰아쉬며 헤르난은 더듬더듬 말을 내놨다.
술에 취한 칼릭스가 사람을 착각했다. 그래서 제게 입을 맞춘 것이다. 칼릭스의 거친 부딪침을 받아 내며 헤르난이 간신히 내놓은 결론이었다.
“내가, 사람 하나 분간 못 하는 머저리로 보여?”
칼릭스의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갔다. 하지만 그 웃음 위로 보이는 남자의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아 헤르난은 덜컥 겁이 났다. 그가 뒤이어 무슨 말을 내놓을지 두려웠다.
침묵이, 그리고 칼릭스의 두 눈이 헤르난을 묶어 움직일 수 없게 했다. 헤르난은 처분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칼릭스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고작 입맞춤이 뭐라고.”
“…….”
“가끔 이렇게…… 네가 원하는 걸 줬으면, 네가 날 배신하지도…… 날 떠나지도 않았을까?”
칼릭스의 들뜬 목소리가 헤르난을 찔러 왔다.
날 먼저 떠난 건, 떠나보낸 건 당신이면서.
너무 오래돼 색이 사라진 원망이 헤르난을 붙잡았다.
불에 닿기라도 한 사람처럼 헤르난은 칼릭스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을 뒤로 물렸다. 하지만 금세 칼릭스에게 다시 손목을 붙들리고 말았다. 손목을 쥔 남자의 손은 차가운 얼굴과는 달리 뜨거운 열기를 품고 있었다.
두려움과 의문으로, 마음 한구석에서 끓기 시작하던 이름 붙일 수 없는 떨림으로 어지러웠던 헤르난의 마음이 한순간에 식었다.
먼 옛날엔 헤르난도 칼릭스와의 입맞춤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입맞춤은 이렇게 거친 것이 아니었다.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입맞춤을 선물해 주고 싶었었다.
이런 건, 사랑이 없어야 가능한 입맞춤이 아닌가.
〈가끔 이렇게…… 네가 원하는 걸 줬으면, 네가 날 떠나지도…… 날 배신하지도 않았을까?〉
술에 취해 사람을 착각한 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왜 입을 맞춘 건지, 칼릭스의 말을 듣고 나니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헤르난 말론이라는 인간에게 불안을 느끼는 건 저 혼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칼릭스는 키우는 개에게 먹이를 던져 주듯 제게 입을 맞춰 준 것이다.
‘……차라리 허튼짓할 생각 말라며 두들겨 맞는 편이 나았을 텐데.’
헤르난은 평소처럼 칼릭스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바보 천치처럼 보일 거란 걸 알았지만, 그게 지금 헤르난이 유일하게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아뇨.”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뒤늦은 답을 내놨다.
“고작 입맞춤으로는 안 됐을 겁니다. 더 많은 걸 바랐겠죠. 아시잖습니까. 제가 얼마나 욕심 많은 인간인지.”
마주해 오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헤르난은 말했다.
칼릭스의 눈엔 그런 헤르난이 곧 눈물을 쏟아 낼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절대 울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끝끝내 눈물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상하게 목이 탔다.
“제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당신 옆에서 가만히 있길 바라신다면…… 더 다정히 대해 주셔야죠.”
농담을 건네는 사람처럼 헤르난은 가볍게 말했다.
앞을 가로막고 선 칼릭스를 밀어 내며 헤르난은 말을 이었다.
“술이 깨는 약을 가져오겠습니다. 치료사님은 파티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셨으니 금방 가지고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헤르난이 원하는 대로 칼릭스는 그에게서 순순히 물러나 줬다. 바닥에 나뒹굴고 있던 케인을 주워 든 헤르난은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
칼릭스는 가만히 서서 케인이 바닥을 짚는 소리를, 힘없는 발에 끼워진 구두가 끌리는 소리를, 잠긴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헤르난을 잡지 못했다.
머리를 뜨겁게 만드는 이상한 욕망과 분노가 식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칼릭스는 이 영문 모를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헤르난은 칼릭스가 술에 취해 사람을 착각했다고 말했다. 칼릭스는 그 말이 기분 나빴다. 내가 너를, 그 누구도 아닌 너를, 아무것도 아닌 것들과 헷갈리겠어? 하마터면 그런 말을 할 뻔했다.
“……왜 진작 이러질 않았을까?”
칼릭스는 말을 중얼거렸다. 충동적으로 헤르난에게 입을 맞추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아무런 보상도 없이 헤르난을 질질 끌고 다니면서 그가 평생 제 옆에 있어 주길 바라면 안 됐다. 진작 헤르난에게 그가 바라는 걸 줬으면 어땠을까. 입을 맞춰 주고, 안아 줬으면…….
〈가지 마, 칼릭스. 상처받을 거야. 헤르난은 이제 네 호위 기사가 아냐. 걘, 널 원망하고 미워해.〉
〈내 말이 맞지? 뒤도 안 돌아보고 널 떠날 거라고 했잖아.〉
〈땅을 얻고 작위를 얻었잖아. 당연해, 상황이 달라지면 모든 게 변하는 거야. 이제 헤르난한테 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걸 인정해야 해. 나는…… 네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날 떠나지 않았겠지. 날 버리지 않았을 거야.
내내 마음 한구석에 고여 있던 생각이 뚫린 구멍 사이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신경을 써 줬다면, 헤르난의 마음이 말라비틀어지지 않게 물을 줬다면 그는 저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터에서 다리를 다친 사람에게 계속 호위 기사 일을 시킬 수는 없으니까 그냥 아무 일이나, 제 옆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게 뭐가 됐건 자리를 내주고…… 헤르난이 원하는 걸 해 줬다면. 어설픈 연인 흉내라도 내 줬다면. 그랬으면 절 떠날 생각 같은 건 안 했을 텐데.
‘하다못해 헤르난이 내 아이를 가졌다면.’
순간, 제 머릿속에 펼쳐진 풍경에 칼릭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루체는? 그 애는 뭐가 되는데?
뒤늦게, 그 물음이 떠올랐다. 땅 아래에 산 채로 파묻히기라도 한 것처럼 잔뜩 경직되어 있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가슴팍을 두드려 대던 이상한 충동 역시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하…….”
칼릭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스스로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자신이 헤르난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헤르난은 아주 오래전부터 칼릭스 히페리온의 것이었다. 그렇게 괴롭혔는데도 기어이 제 옆에 달라붙어 제가 의지하고 마음을 주게 했다.
헤르난이 품은 마음을 알게 됐을 때도 칼릭스는 그를 내칠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평소 제게 욕정하는 연상의 남자들을 찢어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혐오하던 걸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칼릭스는 이제 헤르난에 대한 고민 따위는 하지 않기로 했다. 칼릭스는 헤르난이 자신에게 무슨 잘못을 하건 그를 옆에 둘 생각이었다.
헤르난이 원하건 원치 않건 칼릭스는 그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루체가 헤르난이 제 곁에 있는 걸 원하지 않는대도 상관없었다.
평생, 옆에 둘 거다. 그러기 위해 헤르난을 살린 게 아닌가. 이 이상한 세상에 떨어져 버린 게 아닌가. 모든 걸 인정하자 마음이 편안히 가라앉았다.
〈제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당신 옆에서 가만히 있길 바라신다면…… 더 다정히 대해 주셔야죠.〉
다정함. 헤르난이 바란다면 그걸 안겨 주면 됐다. 헤르난이 저를 떠나지만 않는다면 그에게 뭐든 줄 것이다.
칼릭스는 방을 나섰다. 홀로 나간 헤르난을 찾기 위함이었다. 어두운 복도며 계단을 혼자 걷다가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그를 홀로 두겠는가?
마음을 닮아 조급하던 칼릭스의 걸음이 멈췄다. 아래를 향하는 계단 위에서였다.
칼릭스는 헤르난을 찾아냈다. 치료 마법사에게로 간다던 말이 무색하게, 헤르난은 계단참 아래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다가오는 이의 기척을 눈치챈 헤르난이 안 그래도 숙이고 있던 고개를 더 아래로 떨궜다. 칼릭스는 헤르난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그보다 한 칸 아래의 계단 위에 걸터앉았다.
헤르난을 닮은 음울한 침묵이 둘 사이의 거리를 메웠다.
“여기서 뭐 해.”
먼저 입을 연 건 칼릭스였다.
“죄송합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헤르난은 별안간 칼릭스에게 사과의 말을 내놨다.
“너는 항상 사과만 해. 사과할 필요가 없는 일에도.”
“아뇨. 제가 사과드릴 일입니다. 혼자, 쓸모없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말도 안 되는 신경질을 부렸습니다.”
벽에 머리를 기댄 칼릭스가 헤르난을 바라봤다. 비 맞은 개 같은 꼴을 하고 말을 주절대는 걸 보고 있자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헤르난이 아닌 칼릭스 본인을 향한 짜증이었다.
“당신이…… 네가 날 떠났다고 말했던 게, 그 말이, 그게 억울했나 봅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닌 걸 알면서…….”
스스로가 만든 그림자 속에 몸이 파묻힌 채로 헤르난은 말을 이었다. 그의 걸음만큼이나 느릿한 말이었다.
“제가 전쟁터에서 죽길 바라셨던 거, 죽지 않아 실망하신 거…… 얼굴도 보기 싫다며 루체를 통해서 전해 주셨던 말들……. 조금도 잊지 않고 분수를 파악하는 일에 쓰고 있습니다.”
“……뭐?”
“그러니 제가 당신에게, 루체에게 허튼짓을 할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헤르난의 기운 없는 목소리가 고요를 울렸다.
칼릭스는 꽤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차가운 얼굴이 밤의 어둠 속에 잠겨 더욱 흐릿하게 보였다.
헤르난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침묵하는 칼릭스의 얼굴을 살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와의 입맞춤이,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대화가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주 긴 침묵이 흐른 뒤에야, 칼릭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헤르난.”
칼릭스는 헤르난의 이름을 불렀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냉랭한 목소리였지만 그 말투만은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러웠다.
“약은 필요 없어. 다시 방으로 돌아가자.”
딱딱한 손이 헤르난의 어깨 위에 닿았다. 헤르난은 여전히 아래를 본 채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케인을 전해 주는 대신, 본인이 케인의 역할을 자처했다. 차가운 계단 위에서 헤르난을 일으켜 세우고 닫힌 문 안으로 그를 안내했다.
바람이 부는 소리가 텅 빈 복도 위로 미끄러졌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