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6. 사냥
겨울, 사냥의 계절을 맞아 대륙의 산과 들, 숲에서 산발적으로 사냥 대회가 열렸다. 그 사냥 대회란 것의 대다수가 사냥이 목적인 대회라기보다는 사냥을 주제로 삼은 이틀간의 소풍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그리고 돈 많은 이들의 사냥 대회가 으레 그러하듯 세이어 상단의 이름 아래에서 개최된 사냥 대회 역시 수도에서 가까운 서쪽 숲을 무대로 삼았다.
서쪽 숲은 위험한 동물이나 괴물 따위가 살지 않는 데다 땅이 가파르거나 모나지 않고 평평해 사고가 날 위험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나무들 역시 적당한 거리를 두고 흩어져 있어 사람의 움직임을 크게 가로막지도 않았다. 숲의 외곽부에 있는 호수가 아름다운 건 덤이었다.
“개 같은 사냥 대회.”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공터에 늘어선 커다란 천막들을 볼 때부터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던 칼릭스가, 스칼라 남작 부부에게 배정된 천막 안으로 들어서며 기어이 욕을 내뱉었다.
곧, 말 한마디가 더 덧붙었다.
“재미도 없고 명목도 없는 짓거릴 질리지도 않고 반복해 대는 꼬락서니하고는.”
눈을 가느다랗게 뜬 칼릭스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천막 안을 둘러봤다. 그 삐딱한 자세며 표정이 뒷골목의 건달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잘난 얼굴이 그 불량함을 가려 줬음에도 말이다.
헤르난도 칼릭스를 따라 안을 둘러봤다. 일박 이 일간의 사냥 대회를 위해 마련된 손님들을 위한 거처는 수도에 있는 호텔의 객실 못지않았다. 헤르난은 천막을 둘러보며, 루체가 이런 부유한 상단의 막내아들로 다시 태어나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칼릭스의 시선이 침대 아래에 깔린 곰 가죽에 꽂혔다. 그것이 안 그래도 껄끄럽던 그의 기분을 한층 더 껄끄럽게 만들어 줬다.
떫은 얼굴을 하고 곰을 내려다보던 칼릭스가 의자 등받이에 걸린 붉은 벨벳 천을 던져 곰의 얼굴을 가려 버렸다. 천의 색깔 때문인지 그 모습 역시 썩 보기 좋지는 않았지만, 죽은 곰과 눈이 마주치는 것보다는 나았다.
칼릭스가 입을 다물어 버리자 천막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괜히 사람을 쭈뼛대게 만드는 묘한 침묵은 지난번, 칼릭스가 헤르난에게 불쑥 입을 맞춘 후로 전조도 없이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곤 했다.
허공을 헤매던 칼릭스의 시선이 헤르난에게로 닿았다.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평온한 눈빛에도 헤르난은 꼭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게 됐다.
헤르난은 언제나 그렇듯 칼릭스에게 미안했다. 입맞춤 역시 그랬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황포하던 칼릭스와의 입맞춤에서 죄책감을 느꼈다. 별안간 입을 맞춰 온 건 칼릭스였지만 그가 그런 짓을 하게 만든 건 다 헤르난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제 마음이 깨끗했다면, 칼릭스가 그걸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결백했다면…… 칼릭스는 절 의심하지 않았을 거다. 예전처럼 또 그를 배신할까 봐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걱정이 만들어 낸 불안을 그런 식으로 쏟아 내지도 않았겠지.
“혼자 있지 마.”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닿아 온 것은 단지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칼릭스의 손이 앞으로 흘러내린 헤르난의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 헤르난은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늦지 않게 올 테니까,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
무덤덤한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따뜻한 목소리로 칼릭스는 말했다.
쌀쌀한 겨울의 온도가 묻어 있는 손끝은 다시 헤르난의 머리칼을 지나 그의 귓바퀴를 타고 귓불을 훑은 후에야,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헤르난은 말 그대로 얼어붙은 채 칼릭스를 올려다봤다.
지금, 헤르난은 칼릭스가 그에게 입을 맞춰 왔을 때와 같은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칼릭스의 손길은 어지간히 눈치가 없는 사람도, 그러니까 헤르난도 금세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묘했다. 최소한 싫어하는 사람에게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여신의 탄생일 이후 칼릭스는 때때로 헤르난의 앞에 영문을 모를 다정함을 흘리곤 했다. 칼릭스 본인에겐 별것 아닌 조각이나 부스러기일 다정이었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이상 행동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했다. 그럼에도, 그의 비틀어진 마음은 칼릭스가 떨어뜨린 다정의 부스러기가 가뭄에 내린 소나기라도 되는 양 정신없이 그것을 핥았다.
이러지 않아도 전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몇 번이고 반복해 말하고 싶었지만 도통 입 밖으로 목소리가 나가질 않았다.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자괴감이 퍼져 가는 복잡한 속내를 숨기며 헤르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릭스의 손이 닿았다 떨어진 귓가가 붉어져 있었다.
그런 헤르난을 보며 칼릭스는 한 번 더 웃음 지었다.
* * *
나이와 계급, 직업 따위가 다양한 사냥 대회의 손님들 사이에서 채비를 마친 칼릭스가 말에 올랐다.
칼릭스가 선택한 새까만 말은 체격이 좋고 눈이 깨끗한 데다 몸체 역시 반질반질 윤이 났지만 명마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칼릭스가 안장 위에 올라 고삐를 잡자 말에 대한 평가가 변했다. 황실의 말이 사냥터에까지 납셔 주신 거냐는 우스갯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족이며 연인, 친우를 배웅하기 위해 모인 이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칼릭스의 외모에 관해 속삭였다. 숲속으로 사냥을 떠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반짝이는 미남·미녀였음에도 그랬다.
흐뭇한 마음을 숨기지도 못하고 헤르난은 먼발치에 서서 칼릭스를 바라봤다. 추운 겨울, 하얀 입김 사이로 퍼져 나가는 목소리들을 듣고 있자니 마음이 뿌듯해졌다. 칼릭스는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었다.
칼릭스의 근처에는 루체가 있었다. 활동적이고 편안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인지 평소보다 쾌활하고 귀여워 보였다. 검은 말을 탄 칼릭스와 흰 말을 탄 루체. 너무나 잘 어울렸다.
평소 사냥 대회를 끔찍하게 생각했던 칼릭스가 이곳까지 온 것도, 무기를 챙겨 말 위에 올라탄 것도, 모든 건 루체를 만나기 위해 또 그의 아름다운 얼굴 위에 퍼지는 밝은 미소를 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사냥 대회가 시작되기 무섭게 헤르난의 손을 붙잡고 외진 곳으로 도망쳤던, 사냥꾼들은 오지 않을 탁 트인 강이며 호수를 앞에 두고 콧노래를 부르던 어린 도련님은 이제 헤르난 옆에 없었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이 망쳐 버린 과거의 풍경을 떠올리며 헤르난은 칼릭스의 성장을 기뻐했다.
루체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던 칼릭스의 시선이 조금 더 뒤를 향했다. 헤르난을 보는 건지 아니면 그저 숲에 만들어 둔 공터에 남은 사람들을 보는 건지 모를 시선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헤르난은 쭈뼛대다가는 칼릭스를 향해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 줬다. 옆에 있는 귀족 부인이 그녀의 남편 혹은 부인에게 잘 다녀오라며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고 있길래 따라 해 본 거였다.
눈을 가늘게 뜬 칼릭스의 얼굴에 곧 웃음이 떠올랐다. 왜 웃는 걸까 궁금했지만…… 보기는 좋았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나팔 소리를 시작으로 말들이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무기를 쥔 사람들이 고요한 숲속으로 향했다.
헤르난은 덩그러니 홀로 남게 됐다.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절대 혼자 있지 말라고 몇 번이고 반복해 말했었다. 하지만 헤르난에겐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었다. 다시 천막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그가 가진 유일한 선택지였다.
그리고 그런 헤르난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금발 머리 청년이랑 함께 왔죠? 그가 평범한 기사는 아닌 것 같고, 연인? 배우자?”
아까 전, 헤르난의 옆에서 열심히 손을 흔들던 중년의 여자였다.
“……배우자입니다.”
헤르난이 멋쩍게 웃으며 답을 건넸다.
“저 미남 좀 보시라며 하녀들이 얼마나 소곤댔는지 몰라요. 우리 후작님만은 아니지만, 대단한 미모긴 하더군요.”
눈을 찡긋거리며 말을 마친 여자가 헤르난을 향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행동에서도 고아함을 풍기는 이였다.
헤르난은 반쯤 가려져 있던 자신의 얼굴을 여자에게 내보이기 위해, 칼릭스가 감기에 걸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목을 조르다시피 단단히 묶어 둔 목도리를 더듬더듬 풀어냈다.
“스칼라 남작 헤르난 말론입니다.”
장갑도 끼지 않은 여자의 작고 통통한 손을 조심히 맞잡으며 헤르난은 말했다.
다른 이에게, 특히 귀족에게 스스로를 소개하는 일이 달갑진 않았다. 대부분이 헤르난 말론이란 이름을 듣자마자 얼굴을 굳혀 버리니 말이다. 그건 이유 모를 관심을 갖고 먼저 다가왔던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는 놀란 기색도 불편한 기색도 없이 그저 고개를 까닥여 보였다.
“난 베로나 라토예요. 셀론의 오너이자 데살로 후작 부인이죠.”
웃으며 자신을 소개한 여자와 헤르난의 손이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갔다.
베로나는 악수를 끝마침과 동시에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남작께선 곧장 천막 안으로 돌아가실 예정이었나요?”
“아, 그렇습니다.”
“다들 저마다의 모임을 갖는 듯한데…… 혼자 있는 게 아쉽지 않아요? 혼자만의 시간이 중요하긴 하지만요.”
각자의 자리로 분주하게 흩어지는 사람들을 둘러보던 베로나가 말했다.
헤르난은 홀로 있는 게 편했다. 하지만 자신을 올려다보는 베로나의 진지하다 못해 심각한 얼굴을 보니 말이 아껴졌다. 답을 하는 대신 계면쩍게 웃어 보이자 베로나의 얼굴에도 다시 웃음이 떠올랐다.
“내가 남작을 작은 다과회에 초대한다면 받아 주겠어요? 디저트를 한 아름 싸 왔는데 함께 나눌 사람이 많지가 않네요. 물론, 나와 하녀들만이 아니라 다른 손님들도 함께할 거랍니다.”
베로나의 연갈색 눈이, 거절이라는 단어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마치 베로나 쪽으로 자신을 떠미는 것만 같았다.
깨진 마차 바퀴처럼 덜그럭거리는 감사의 말을 내뱉은 헤르난은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저 밝은 후작 부인께서 자신의 소문을 알고는 계신 건지 걱정이 됐다.
헤르난에게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 낸 베로나의 얼굴에 친절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렇게 헤르난은 베로나의 손에 이끌려 후작의 천막 안으로 걸음을 옮기게 됐다. 예정에는 없던 일이었다.
스칼라 남작 부부가 머무는 천막이 그저 호텔의 객실과 같았다면, 후작 부인의 천막은 호텔의 스위트룸이나 다름없었다.
아까 전 베로나가 했던 말처럼, 그 화려한 공간엔 이미 다른 손님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베로나의 하녀들을 제외하면 헤르난을 포함해 모두 넷이었다.
베로나가 마련한 작은 다과회의 손님들은 그녀의 하녀들과 그녀 또래로 보이는 중년 남자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 안색이 좋지를 못했다. 그들의 앞에 놓여 있는 달콤한 디저트며 추위는 상관없다는 듯 활짝 피어 있는 꽃들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아무래도, 후작 부인께선 친목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람들을 챙겨 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얼떨결에 천막 안으로 들어선 게 분명해 보이는 손님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며, 헤르난은 최대한 살가워 보이는 웃음을 짓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영 말수가 적은 이들 사이로 베로나의 밝은 목소리가 몇 번이고 오고 갔다. 신기할 정도로 따뜻한 활기가 넘치는 상냥한 사람이었다.
차를 마시며 가만히 베로나와 중년의 남자가 나누는 이야기를 듣던 헤르난의 시선이 한 남자에게서 멈췄다. 남자라고 칭하기엔 조금 어려 보이는…… 그래, 남자애였다.
이른 오후의 해를 받으면 붉게 보일지도 모를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애는 천막 안의 사람 중 가장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깡마른 몸에는 꼭 짐처럼 느껴질 무거운 옷이며 장신구를 걸친 모습이 헤르난의 눈에는 어쩐지 처량하게 보였다.
잔뜩 주눅이 든 얼굴을 한 남자애는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작은 말 한마디에도 깜짝 놀라 바쁘게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가는 조금 안정이 되면 고개를 조금 숙이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케이크며 파이, 빵 따위를 노려보기만 했다.
“여기선 먹고 싶은 대로 먹어도 되는데?”
남자애의 옆에 앉아 있던 베로나가 말을 이었다.
“비밀로 해 줄게.”
“…….”
“자, 이건 어때? 후작 부인인 내가 이걸 먹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난리를 쳐서, 넌 억지로 먹어야만 하는 거지.”
베로나는 남자애의 손에 그 애가 노려보던 빵 하나를 쥐여 줬다.
그제야 남자애가 허겁지겁 빵을 먹기 시작했다. 빵에 묻어 있던 초콜릿이 순식간에 그의 손끝과 입가를 더럽혔다. 금세 빵 하나를 해치운 아이의 손에 베로나가 또 다른 빵을 건네줬다.
가장 무겁고 화려한 옷을 걸친 이가 꼭 며칠을 굶은 거리의 아이처럼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다. 천막 안에 있던 모두가 말을 잃고 남자애를 봤다.
흘러내린 옷 사이로 드러난 손목에 헤르난의 눈이 닿았다. 살 위에 푸른 멍 자국이 가득했다. 멍만이 아니었다. 날붙이가 길을 낸 상처며 화상 자국까지 보였다.
“세상에.”
헤르난의 옆에 있던, 북부 끝자락에 작은 영지를 가진 자작이라던 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남자애의 손목에 새겨져 있는 멍 자국을 본 모양이었다.
“저 아이를 모르시나 봅니다.”
놀란 자작의 눈치를 슬쩍 본 중년 남자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속삭였다. 극작가라던 소개에 걸맞은, 어딘가 연극적인 표정을 가진 이였다.
“나는 소문에 어두워서…….”
자작 역시 목소리를 낮추고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좋지 않던 안색이 더욱 하얗게 변했다.
“쟨 길럼 공작의 공식적인 애인은 아니고, 비공식적인 애인입니다.”
말이 이어졌다.
“그 변태 놈은 가난하고 왜소한 어린 남자들을 데려다 자기 애인 자리에 앉혀 두고 놀잇감으로 써요. 죽을 때까지요!”
속삭인다고 속삭였으나 자신의 귀에까지 다 들리는 남자의 과장된 말을 곱씹으며 헤르난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놨다.
“더 자라지 말라고, 밥도 굶긴다는군요.”
“길럼 공작이면 그 새까만 머리의 잘생긴…….”
“예. 미남이시죠. 역시, 사람은 얼굴만 봐선 판단이 안 된다니까요. 아, 여기까지 와서 저 꼴을 봐야 하다니! 마음이 쓰라릴 뿐입니다.”
남자애의 귀에도 저 수다스러운 극작가의 목소리가 닿았는지 그 큰 눈에 그새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다행히, 극작가와 친분이 있어 보이는 베로나가 무언의 경고를 해 그의 입을 닥치게 했다.
베로나가 저 남자애에게 먹을 걸 나눠 주려고 이 이상한 다과회를 연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이의 앞에 음식이 쌓여 갔다.
다행히 남자애는 당장의 서러움보다는 배고픔이 먼저였는지 먹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두 손에 파이 조각을 하나씩 쥔 채로 사막에 산다는 어떤 동물처럼 눈만 움직여 주변을 살피던 남자애와 헤르난의 시선이 마주쳤다.
머리카락 색과 마찬가지로 주홍빛이 나는 남자애의 눈동자가 공포로 커지는 게 보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손에 쥐고 있던 파이까지 떨어트렸다. 헤르난은 아이를 위해 슬며시 고개를 돌려 줄 수밖에 없었다.
이 얼굴이 보기 좋은 얼굴이 아닌 건 알지만…… 저렇게 겁을 집어먹게 할 정도로 무서운 얼굴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아예 모른 척하기엔 자꾸 신경이 쓰여 헤르난은 드문드문 남자애의 낯빛을 살펴야 했다. 그 애가 안타까워서 그랬다.
헤르난은 꽤 오랜 세월을 빈촌의 뒷골목을 전전하며 보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기를 당해서 혹은 빚을 갚기 위해서, 복잡한 여러 가지 이유로 귀족의 노리개가 되는 이들을 봐 왔다. 저 심약해 보이는 남자애에게도 사정이 있겠지 싶었다.
어린 시절의 루체 역시 그런 위협을 많이 받았었다. 루체에게 손을 대려는 쓰레기들에게서 그를 지키느라 헤르난은 주먹을 휘두르고 어설프게 단검을 빼 들었었다.
하지만 헤르난은 그 옛날 루체를 도왔던 것처럼 저 애를 도울 순 없었다. 여긴 검과 주먹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사람을 구해 내고 또 도망칠 수 있는 뒷골목이 아니었다. 남자애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람이 평범한 귀족이 아니라는 것 역시 문제였다.
그렇기에 후작 부인도 공작이 사냥을 떠난 시간을 이용해 남자애의 손에 빵을 쥐여 주는 일밖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밤에는 천막 밖으로 나가지 마세요.”
옆에 있는 자작과 계속해 무어라 말을 주고받던 극작가 남자가 헤르난에게도 들리게끔 슬쩍 말을 흘렸다.
“못 볼 꼴 보기 싫으시면요.”
기죽은 남자애에게 닿았다 떨어지는 그의 눈 속에 즐거운 안타까움이 칠해져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헤르난의 시선을 마주한 극작가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기분 나쁜 사람이었다.
* * *
헤르난이 비쩍 마른 남자애를 다시 만난 건, 새까만 어둠이 푸른빛을 밀어내고 찾아온 늦은 밤이었다.
고요한 숲을 향해 간 도살자들은 붉은 노을이 이 땅 구석구석을 적신 후에야 전리품을 싣고 귀환했다. 어떤 전리품은 저녁 식사의 재료가 됐고, 어떤 전리품은 전문가의 손에 쥐어졌다. 저택을 장식할 장식품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함이었다.
예상대로, 칼릭스는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돌아왔다.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눈이 녹지 않은 아름다운 숲을 돌며 좋은 시간을 보내다 왔다고 말했다. 루체와 함께 있었겠구나 싶었다. 칼릭스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상, 두 사람이 무얼 했는지 물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대강은 상상이 갔다.
모처럼 기분이 좋아 보이는 칼릭스를 보는 헤르난의 기분 역시 조금은 붕 떴다.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꺼림칙함도 조금은 흐릿해졌다. 남아서 뭘 했는지, 누구와 있었는지 작은 것 하나하나 캐물어 오는 칼릭스에게 답을 내놓느라 바빴던 탓이었다.
천막 안으로 돌아온 칼릭스는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계속해 말을 붙여 왔다. 입가에 숨길 수 없는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자라난 키만큼이나 단단해진 몸과는 어울리지 않는 앳된 티가 나는 웃음이었다.
고작 식사 자리에서 술 한잔 마신 것만으로 저렇게 기분이 좋아질 리는 없으니 루체의 힘이 대단하구나 싶었다. 그는 한 남자의 종일을 행복하게 만들어 줬다. 자신은 몇 번을 다시 살아나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식사 내내 칼릭스에게 말을 붙이고 싶어 제 형의 눈치를 살살 보던 루체도 그렇고, 좋은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칼릭스도 그렇고, 참 귀여웠다.
칼릭스가 행복하면 됐다. 그가 행복하면 저도 행복했다. 헤르난은 웃음 지었다.
“어릴 때, 대공이 자기 아버지 기일을 기념해서 사냥 대회를 연 적이 있잖아. 겨울이었는데. 기억해?”
그렇게 묻는 칼릭스는 조금 들뜬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한테 뒤지게 혼날 각오를 하고 너랑 도망쳐서, 숲 외곽에 있는 호수로 갔잖아.”
셔츠에 팔을 꿰어 넣으며 칼릭스는 말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잘 쪼개져 있는 근육의 모양이 더욱 선명하게 변했다.
“기억납니다.”
헤르난이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이 숲의 호수가, 그때 본 호수랑 똑같이 생겼어.”
칼릭스는 사냥 행렬에서 벗어나 호수로 갔던 모양이었다.
정말 신기한 광경이었다며 칼릭스는 몇 마디 말을 더 늘어놨다. 호수의 생김새야, 특히 겨울 호숫가의 풍경이야 어딜 가 봐도 거기서 거기였다. 그 재미없는 풍경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니 괜히 더 특별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아름답더라.”
한마디를 덧붙인 칼릭스가 웃음 지었다. 자신을 향한 웃음이 아닌데도 마음이 기뻤다.
“내일 숲을 떠나기 전에 같이 가 보자.”
“……저도요?”
“왜, 싫어?”
어울리지도 않게 눈을 동그랗게 뜬 헤르난에게 칼릭스는 새초롬히 물었다.
싫지 않았다. 싫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헤르난은 칼릭스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해 봐야 했다.
같이. 헤르난은 그 말을 곱씹어 봤다.
사냥을 할 필요도 없는데 루체와 단둘이 빠져나가기엔 보는 눈이 많으니 절 끼우려고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루체의 화랑에 함께 갔을 때처럼 말이다.
칼릭스와 루체가 함께 있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헤르난은 몇 번이고 그들을 따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호수에 갈 방도가 없었다.
헤르난은 불편한 다리 때문에 말을 타는 게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마차를 끌고 가기엔 너무 번거로웠다. 바닥이 미끄럽고 바람은 차기에 걷는 것 또한 힘들었다.
“다 큰 남자 둘이 말 위에 함께 앉는 꼴이 보기 좋진 않으려나. 알 바 없긴 하지만.”
칼릭스의 목소리가 생각에 잠겨 있던 헤르난을 깨웠다.
“아뇨, 그럴 리 없습니다. 꼭 그림처럼 보기 좋을 겁니다.”
헤르난이 확신에 차 말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아름다운 두 사람이 함께 말을 타는 것이 어떻게 꼴사나워 보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말을 타질 못하는 제가 함께 가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도 원하신다면…… 상단의 기사분들께 부탁을 드려 보겠습니다.”
어째선지 미간이 구겨진 칼릭스의 눈치를 보며 헤르난은 말했다.
“……미안한데, 지금 무슨 생각해?”
“…….”
“너랑 가겠다고. 너랑, 나랑, 둘이. 둘이서 보러 가고 싶다고.”
짧은 침묵이 서로 다른 의미로 얼굴이 굳은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아름답다는 호수를 왜 저와 보러 간다는 건가.
“너한테 보여 주고 싶다니까?”
칼릭스가 말 한마디를 더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초조한 기색이 느껴졌다.
그 이유야 어찌 됐건, 칼릭스는 정말로 헤르난과 함께 호수에 가길 원하고 있었다. 헤르난은 칼릭스가 바라는 바를 알 길이 없어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칼릭스는 이제 이상한 스킨십을 하는 것보다 훨씬 번거롭고 싫을 일까지 하려 하고 있었다. 이런 것 역시 제가 허튼짓을 저지를까, 가끔 다정함 한 조각씩을 던져 주기로 마음먹은 듯 보이는 칼릭스의 새로운 일 중 하나일까 싶었다.
〈제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당신 옆에서 가만히 있길 바라신다면…… 더 다정히 대해 주셔야죠.〉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후회가 헤르난의 속을 태웠다.
“내가 왜 두 다리 멀쩡한 사람이랑 같이 말을 타겠어. 너니까 함께하는 거지.”
“아뇨. 저와 말을 타는…… 그런 건…… 보기 좋지 않을 겁니다.”
“…….”
“호수에 가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칼릭스 님께서 마음을 써 주시는 것만으로도 기쁩니다.”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가며 헤르난은 거절을 표했다. 진심으로, 헤르난은 칼릭스가 저와 함께 묶여 타인의 비웃음을 사는 걸 원치 않았다.
“아까는 잘 어울릴 거라며.”
“그거야…….”
그 순간 작은 종소리가 헤르난의 말을 막았다. 누군가 천막의 문이 열리길 바라고 있었다.
제가 이겼다는 듯 고개를 치켜들고 씩 웃어 보인 칼릭스가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볍게 열린 문틈 사이로 얼핏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루체였다.
하지만 천막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은 채로, 루체는 칼릭스와 말을 나눴다. 서북부의 밤이 얼마나 추운지 루체가 말을 내뱉을 때마다 주위로 흰 숨이 길게 퍼졌다.
문득, 칼릭스가 고개를 돌려 헤르난을 봤다. 헤르난은 당황해 시선을 떨궜다. 말을 나누는 두 사람을 훔쳐보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루체를 등지고 돌아선 칼릭스는 거치대에 걸어 두었던 코트를 집어 들었다.
“……잠깐 나갔다 올게.”
다소 조급해 보이는 얼굴을 한 칼릭스가 말을 이었다.
“금방 올 거니까 어디 나가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누가 문을 두드려도 열어 주지 말고. 내가 올 때까지 먼저 잠들지도 마.”
꼭 7살 어린애에게나 할 법한 말이었다. 헤르난은 자신이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할 정도로 한심해 보이나 싶어 민망함을 느끼면서도 순순히 그러겠노라 답했다.
문 앞에서 몇 번이고 헤르난을 돌아보던 칼릭스가 마지못해 천막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조용한 천막 안을 크게 울렸다.
혼자 남은 헤르난은 침대의 가장자리에 앉아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칼릭스는 얌전히 자신을 기다리라고 했지만…… 날이 밝기 전에 그가 돌아오는 일은 없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더는 호수에 함께 가자는 이상한 소리를 하지도 않을 거다.
며칠 전 내린 눈이 아직도 녹지 않은 바깥과 다르게, 천막 안은 무척이나 따스했다. 그런데도 손끝에 자꾸만 한기가 돌았다.
그럴 리 없지만, 꼭 어딘가에서 바람이 몰래 새어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오래된 상처들이 문신처럼 새겨진 두 손을 모아 쥐고 나서야 헤르난은 작은 안정을 찾았다.
때마침 사나운 바람이 천막을 치고 지나갔다. 쉭쉭대는 바람의 숨결 사이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헤르난이 천막 너머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적당히 술을 즐긴 사람들이 즐거운 듯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높낮이가 다른 웃음소리가 길게 이어질수록 헤르난의 마음엔 영 불쾌한 불안이 퍼졌다.
……어쩌면, 극작가 남자가 했던 말 때문일지도 몰랐다.
〈밤에는 천막 밖으로 나가지 마세요. 못 볼 꼴 보기 싫으시면요.〉
경고를 해 주려는 건지 재미난 구경거리를 보러 가라고 부추기려는 건지 모를 얼굴로 그는 속삭였었다.
깡마른 몸과 어울리지도 않는 크고 화려한 옷을 입고 있던 어린 남자애의 시퍼런 팔목을 생각하니 마음이 더욱 껄끄러워졌다. 고작 팔만 그런 게 아닐 걸 알아서 더욱 그랬다.
어린 시절 헤르난이 본, 질 낮은 귀족에게 팔려 가거나 끌려갔던 이들은 어느 날 싸늘하게 식은 채로 뒷골목의 쓰레기장에 버려지곤 했다.
〈애들을 후원에 풀어 두고 사냥했대. 동물을 대신해서 말이야.〉
오가며 몇 번 얼굴을 마주쳤던 또래 여자애는 얼이 빠져 있는 헤르난에게 자신이 알아낸 진실을 나눠 줬었다.
‘그 애와 관련된 일 같지.’
목 뒤로 말을 삼킨 헤르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릭스는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고 했지만…… 잠시 나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만 확인하는 건 괜찮을 거다. 망설임 속에서 헤르난은 자신의 생각을 합리화했다.
헤르난은 천막을 나섰다. 차마 제대로 된 외투를 챙겨 입을 생각도 못 하고 케인만을 챙길 정도로 그 걸음이 다급했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빛의 덩어리가 천막이 늘어서 있는 공터 이곳저곳을 떠다니고 있었다.
가장 밝은 달빛만을 모아 둔 것처럼 새하얀 빛은 공터 바깥,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까지 이어졌다. 추위 때문인지 근처에 불을 피워 둬 모여 있는 사람들의 면면이 더욱 잘 보였다.
별안간 무리 지어 있던 사람들 사이로 환호 소리가 터져 나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옷을 입은 남자애가 무리 바깥으로 밀려 나왔다. 낮에 베로나의 천막에서 봤던 것과는 다른, 새까만 밤에 홀로 하얀 모습이 너무나 눈에 띄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남자애에게 키가 큰 남자 하나가 다가가 무어라 말을 늘어놨다. 남자의 몸을 감싸고 있는 모피 코트가 안 그래도 커 보이는 그의 덩치를 더욱 커 보이게 만들었다. 저 남자가 바로 길럼 공작이 아닐까 싶었다.
헤르난은 멀찍이서 소동을 구경 중이던 남자 하나를 급히 붙잡았다. 그리고 물었다.
“……저건, 뭘 하는 겁니까?”
팔이 붙잡힌 남자가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헤르난의 얼굴을, 그가 짚고 있는 케인을 본 뒤엔 목소리를 조금 낮춰 답을 내줬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나쁜 소문이 도움 되는 날도 있구나 싶었다.
“관심이 있으십니까?”
“…….”
“사냥입니다. ……밤의.”
때마침 숲으로, 남자애가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힘이 없어서인지 몸이 아파서인지 그 걸음이며 속도가 케인을 짚고 다녀야 하는 헤르난만큼이나 형편없었다.
누군가 남자애의 느린 뜀박질을 향해 야유를 보냈다. 회중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하는 사람도 보였다. 도망칠 시간을 충분히 준 뒤에 그 사냥이라는 것이 시작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말을 데리러 가는 것인지, 사냥을 위한 채비를 하러 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깊은 숲으로 들어가는 길의 초입을 벗어나 다시 공터로 향했다.
이 사냥 대회에 참석한 거의 모두가 공작이란 남자의 기행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학대를 받고 있음이 분명한 남자애를 위해 나서지 않았다. 다른, 그것도 높은 작위를 가진 귀족이 자신의 애인이나 배우자를, 노예를 어떤 식으로 다루는지에 대해 함부로 입을 댈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런 사냥이니 뭐니 하는 일도 다 알면서 눈을 감아 주는 거다. 헤르난이 가진 대단한 소문도 겉으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넘겨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나서 봤자 달라질 건 없었다.
당황한 남자애는 어딘가에 몸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하고 크게 난 길을 따라 정신없이 뛰기만 할 것이다. 그러다 활이나 창에 몸이 꿰뚫리겠지. 꿰뚫린 채로 아무도 없는 황량한 숲속을 홀로 내달리다가 맥없이 죽고 마는 것이다.
“알려 줘서 고맙습니다.”
남자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헤르난이 무기 거치대 위에 대충 걸쳐져 있던, 누군가 입었던 짙은 색의 후드 케이프와 단검 한 자루를 주워 들었다.
헤르난은 그 남자애를 돕기로 했다.
훗날 그 애가 공작에게 잡히건 잡히지 않건 일단은 먼 곳으로 도망치게 해 주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오지랖이란 걸 알지만, 저 광경을 보고도 모른 척할 순 없었다.
칼릭스가 루체와 작별의 인사를 나누기 전에만, 그때까지만 돌아오면 될 것이다.
사람들이 사라진 틈을 타 헤르난은 어둠만을 밟아 숲으로 향했다. 남들보다는 느린 속도였지만 느린 건 그 남자애 또한 마찬가지니 서두른다면 그 애를 만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헤르난의 예상대로, 그는 숲에 들어선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서럽게 울고 있는 남자애를 마주하게 됐다.
위아래로 차려입은 흰색 옷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이 숲에 예민한 육식동물이나 괴물이 살았다면 남자애는 사람들이 그를 찾아내기도 전에 몸이 찢겨 죽었을 것이다.
남자애는 도망치다 넘어지기라도 했는지 한쪽 신발이 벗겨져 있었다. 피가 묻어 있는 것도 같았다. 제 다리가 멀쩡했으면 업어 주면 됐을 텐데. 속으로 탄식하며 헤르난은 남자애를 붙잡았다.
“으, 으아…….”
공포에 젖은 남자애의 두 손이 헤르난을 밀쳤다. 헤르난은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대는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난, 널 잡으러 온 사람이 아니야.”
남자애와 눈을 마주하며 헤르난은 말을 이었다.
“기억해? 아까 낮에 우리 만났었잖아. 내가 네 맞은편에 앉아 있었는데.”
헤르난의 얼굴이 기억난 모양인지 혹은 정신이 조금 돌아온 모양인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남자애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소리를 낮추자.”
남자애에게서 몸을 떼어 낸 헤르난이 들고 있던 후드 케이프를 그에게 씌웠다. 그의 빈손에는 단검을 쥐여 줬다. 헤르난에게도 맞을 것 같은 긴 케이프의 기장 덕분에 남자애의 새하얀 옷이 다 가려졌다. 다행이었다.
크게 숨을 내쉰 헤르난이 자유로운 오른손을 뻗어 남자애의 손을 붙잡았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손이 얼은 통에 제대로 된 감각이 느껴지질 않았으나, 믿음직스럽게 보이길 바라며 최대한 힘을 줬다.
“시간. 얼마나 줬어?”
“……한, 한 시간이요.”
헤르난의 눈치를 보며 남자애는 답했다.
1시간. 사냥이 시시하게 끝나는 걸 막기 위한, 너무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가자.”
“……어디로요?”
“가면서 말해 줄게.”
터무니없는 헤르난의 말에 반박할 법도, 도망을 칠 법도 하건만 남자애는 겁먹은 눈을 하고서도 순순히 헤르난의 손을 잡았다. 얼마나 믿을 사람이 없으면 저 같은 사람까지 믿을까 싶어 안타까웠다.
헤르난은 칼릭스가 자리를 비웠던 오후 동안 그가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 홀로 쓸데없는 상상을 하며 숲의 지도를 들여다봤었다.
헤르난은 기억을 더듬어 다시 숲의 지도를 떠올려 봤다. 지도에 따르면, 그리고 호숫가의 풍경이 대공의 사냥 대회에서 봤던 것과 똑 닮았다고 말하던 칼릭스의 말에 따르면, 호수 일대는 지나온 숲의 풍경과는 달리 임목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을 것이다.
체격이 작은 남자애가 몸을 숨기는 데에는 나무가 많은 게 유리했다. 일단 호숫가에 있다는 작은 동굴 근처에 몸을 숨기고 사람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조심히 움직여 숲의 외곽으로 빠져나가면 되겠지.
혹여 들키더라도 아이는 나무들 사이로 달아나게 하고…… 제가 나서면 됐다. 운이 좋으면, 겨울밤에 홀로 돌아다니는 미친 인간 취급 정도나 당하지 않겠는가.
헤르난은 자꾸 넘어지려는 남자애의 몸을 받쳐 주면서, 조금씩 길을 헤매며 호숫가 외곽에 당도했다.
밤을 걸어 조급히 찾아온 호수는 칼릭스의 말처럼 정말 아름다웠다. 다만, 저 멀리에서 반짝이던 빛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걸 알아챈 후로는 아름다운 호수도 그 위에 비친 달도 별도 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리에 주저앉은 남자애의 헐떡임이 사라지자 침묵이 이어졌다.
“꼭 저 나무 사이로 도망쳐야 해.”
남자애처럼 체격이 작은 사람이나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좁은 동굴 입구를 들여다보던 헤르난이 말했다.
저 동굴 안에 몸을 숨기고 있으면 적어도 그 공작이란 작자는 남자애를 끌어내지 못하겠지만…… 안심한 그 애가 다시 도망쳐 나오길 기다릴 수는 있었다. 더군다나,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를 동굴에 남자애 홀로 들어가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몸에 힘 빼지 말고 마음의 준비 하고 있어. 이제 숲을 빠져나가야 하니까.”
“……숲을 빠져나가면요?”
“…….”
“다음은요?”
“열심히 살아야지.”
어찌 보면 속 편한 대답을 내놓은 헤르난이 멋쩍다는 듯 웃어 보였다.
헤르난이 남자애에게 전해 줄 수 있는 도움은 여기까지였다. 공작에게 붙잡히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후의 일은 모두 남자애 스스로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안 추우세요?”
스스로를 꽉 끌어안고 있던 아이가 뜬금없는 물음을 내놨다.
“응. 안 추워.”
얇은 외투 하나 걸치지 못한 제 몸을 잠시 내려다보던 헤르난이 가볍게 답했다.
“……추워 보이는데요.”
“괜찮아. 어른이잖아.”
우물쭈물하던 남자애가 다시 고개를 들어 헤르난을 봤다.
“공작님이랑 닮아서, 무섭다고, 나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죄송해요. 남작님이 아니었으면, 전…….”
끔찍한 상상을 하며 남자애는 말을 흐렸다.
좋은 사람 아니니까 미안해할 필요는 없는데.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하고 헤르난은 그저 손만을 뻗어 남자애의 후드 모자를 푹 내려 줬다.
“숲을 지나서 나오는 마을에서 오래 머무르지 말고, 바로 다른 마을로 넘어가. 그 사람은 존재도 모를 그런 작은 마을로.”
“…….”
“언젠가 남부로 오게 되면 스칼라에 와. 일자리를 내줄게.”
헤르난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남자애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잠시 저 멀리를 내다보던 헤르난이 남자애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제 손을 맞잡은 남자애를 일으켜 세워 준 헤르난이 이어 말을 더했다.
“앞으로 5분. 그만큼만 함께 갈 거야. 그 뒤로는 너 혼자 가야 해.”
“……남작님은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도망치느라 바쁜 와중에 그런 게 궁금해?”
“네.”
“헤르난.”
빽빽하게 늘어선 나무 사이로 걸음을 옮기며 헤르난은 답했다.
“저는 셀이에요.”
그런 헤르난의 뒤를 쫓으며 남자애, 셀은 말했다. 넘어져 삐끗한 다리에 힘을 주며 셀은 침착하게 걸음을 옮겼다. 오직 두려움만이 넘실대던 눈 속에 빛이 돌아와 있었다.
“그래, 셀. 이제 내 앞으로 갈래?”
셀을 앞으로 보내며 헤르난은 말을 이었다.
“이제 앞만 보면서 뛰어. 뒤돌아보면 안 돼. 누군가 널 붙잡으면 단검을 휘둘러.”
속삭임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 무방비하게 내놓아진 창백한 안색의 남자 뒤로 마른 나무가, 흰 달이, 그리고 멀리로 검은 인영이 보였다. 말을 탄 길럼 공작이었다.
헤르난의 손이 얼이 빠진 셀을 밀쳤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셀은 헤르난의 바람대로 앞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짙은 색의 후드 케이프와 빼곡한 나무가 순식간에 그의 작은 체구를 어둠 속으로 숨겨줬다.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쉰 헤르난이 뒤를 돌았다. 말에서 내린 남자가 느긋하게 걸어 헤르난에게로 오고 있었다. 달아나는 셀을 봤음에도 여유로워 보였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빛만이 혼자 남은 헤르난의 주위를 바쁘게 떠다니기 시작했다.
“누군가 사냥감을 도와줬다. 그 누군가가 바로 소문의 남작님이시다. 이거, 생각도 못 했던 그림인데.”
“…….”
“헤르난 말론. 더러운 소문을 함께 짊어져 주는 스칼라 남작님. 되게 반갑네.”
말을 마친 길럼 공작이 히죽 웃어 보였다. 한겨울이 만들어 낸 설원처럼 차가워 보이던 남자의 인상이 순식간에 짓궂게 변했다.
공작의 시선이 헤르난의 머리에서부터 발끝을 느리게 훑었다. 한겨울에 외투도 없이 숲을 헤매는 도망자. 여러모로 제정신은 아닌 듯 보이는 꼴이었다. 그만큼 정신없이 셀을 도왔다는 뜻도 됐다.
“사냥감이 달아났으니, 새로운 사냥감을 찾아야 하나? 바로 옆에 있던 걸로?”
얼굴을 굳힌 남자가 헤르난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남자가 걸치고 있는 검은 모피에서 그을음의 냄새가 나고 있었다.
“……공작께서 왜 이런 일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감당할 수 없이 차가운 바람이 헤르난의 머리칼을 헝클이고 달아났다. 케인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같은 말을 하네. 뭐, 나도 대충 악당처럼 답을 해 줄게.”
“…….”
“재밌어서 이런 일을 해.”
“아무 죄도 없는 애를…….”
헤르난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공작의 손에 들려 있던 무거운 산탄총의 총구가 가슴팍에 닿았다.
총은 아직 보급화되지 않은, 전쟁 때나 사용하는 무기였다. 사냥 대회에서 역시 황실의 사람이 아닌 이상 총과 같은 무기는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어린 남자애 하나 괴롭히겠다고 총을 챙겨 든 꼴이…… 헤르난의 얼굴에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이 퍼졌다.
“죄? 죄가 없는 사람을 괴롭히면 안 된다는 건가?”
“…….”
“그럼, 무결하지 못한 사람을 사냥하는 건 이해해 줄 거야?”
헤르난의 가슴을 누르던 총구가 떨어져 나갔다.
“내가 그 앨 찾지 않길 바란다면, 네가 걜 대신해.”
거리를 좁힌 남자가 헤르난의 귓가에 속삭였다. 금방이라도 귀를 물어뜯을 것처럼 가까이 들러붙은 그의 숨결에서 술 냄새가 났다.
“고작 너 같은 게 나한테 덤비려면 그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춰 오는 공작을 보며, 헤르난은 이를 꽉 깨물었다.
헤르난은 자신이 공작을 붙잡아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남자가 어느 정도는 억지로라도 예의를 차려 줄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헤르난이 간과한 것은 그 자신이 바로 스칼라 남작이라는 거였다. 길거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운 좋게 작위를 얻은 절름발이, 아껴 줄 사람 하나 없는 인간. 지금 공작의 눈에 비친 헤르난은 숲으로 도망간 셀과 다를 게 없었다.
길럼 공작의 혼탁한 회색 눈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생각이 많아 보이네.”
검은 가죽 장갑을 낀 공작의 손이 헤르난의 머리칼을 쓸었다.
“재미없게 하면 난 그 앨 쫓아갈 건데.”
“……내가 당신에게서 도망이라도 치면 됩니까?”
헤르난은 물었다.
셀이 도망갈 수 있는 시간을 벌려면, 공작이 바라는 대로 그의 사냥감이 되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셀을 쫓아 여기까지 온 것이 공작 한 사람뿐인 게 다행이었다.
공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곧, 그의 손이 헤르난의 턱을 잡았다. 검은 모피가 품고 있는 열이 전달될 정도로 가깝게 몸이 겹쳐졌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접촉이었다.
“너무 웃겨. 나랑 다를 것도 없는 게 어디서 순결한 성자 흉내를 내. 칼릭스 히페리온이 보면 원통해서 눈물을 흘리겠어.”
헤르난은 꼭 입을 맞출 듯 얼굴을 붙여 오는 남자를 밀어냈다. 동상에 걸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굳은 헤르난의 손을 그러쥐며 공작은 말을 이었다.
“그래도 괜찮아. 나는 이중적인 것들을 좋아하니까.”
속삭이던 공작이 돌연 헤르난의 멱살을 쥐었다. 그는 헤르난에게서 케인을 빼앗은 다음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조건은 똑같아야지.”
공작은 그대로 헤르난을 질질 끌어 옮겨 그를 나무 사이의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자, 도망쳐 봐.”
다시, 헤르난을 향해 총구를 겨누며 길럼 공작은 미소 지었다. 눈동자 위에 번들번들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 * *
주인인 루체의 밝은 성격에 맞춰 꾸며진 천막 안의 온도는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칼릭스에겐 바깥의 온도나 이 안의 온도나 별다를 게 없이 느껴졌다. 홀로 남겨 두고 온 누군가를 향한 불안 때문이었다.
천막의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루체는 칼릭스에게 이상한 말을 꺼내 놨다.
“칼릭스 님과 남작님, 두 분 관계는 조금 특이한 것 같아요.”
“…….”
“미워하는 건지 아끼는 건지 모르겠다고 해야 할까요.”
“내가 남작을 미워한다고 했던가요?”
루체가 안내해 준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칼릭스는 물었다.
“아니었나요?”
눈을 동그랗게 뜬 루체가 장난스럽게 답했다.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기대앉은 루체는 토라진 듯한 얼굴을 하고 말을 이었다. 속삭임을 닮은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끼기도 하시죠. 가끔은, 너무 집착하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집착이라. 생각지도 못한 단어를 불쑥 들이민 루체를 보며 칼릭스는 속으로 헛웃음을 쳐야 했다.
루체 세이어가 절 그렇게 볼 줄은 몰랐다. 칼릭스 역시 자신이 헤르난에게 집착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딱히 토를 달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고작 저딴 말이나 하려고 날 불러낸 건가?’
칼릭스의 입가에 부드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눈은 어딘가 사나운 채였다.
칼릭스 역시 할 말이 있어 루체를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이니 그가 무어라 지껄이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조금 신경에 거슬렸다. 낮 동안 숲을 누빌 때 그랬듯, 웃는 얼굴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제가 전쟁터에서 죽길 바라셨던 거, 죽지 않아 실망하신 거…… 얼굴도 보기 싫다며 루체를 통해서 전해 주셨던 말들……. 조금도 잊지 않고 분수를 파악하는 일에 쓰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얼굴을 묻은 헤르난이 했던 말이, 짜증 날 정도로 슬픈 음성이 루체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떠올랐다. 지금 제 눈앞에 있는 남자와 자신이 아는 루체가 같지만 다른 걸 알면서도 그랬다.
헤르난은 마치 칼릭스 자신이 루체의 입을 빌려 그에게 떠나라는 말을 전한 것처럼 말했었다. 칼릭스는 꿈에서조차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루체라는 사람에 대한 의구심이 칼릭스를 찾아왔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이가, 한순간에 아예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도대체 왜? 이미 죽어 버린 루체에게 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이곳의 루체는 그런 말을 들어 봤자, 자신은 들킬 거짓말은 안 한다며 음흉하게 웃기나 할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루체가 제 입을 빌려 헤르난에게 물러섬을 종용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헤르난을 깊이 찔렀고, 그리하여 헤르난은 칼릭스 히페리온을 떠나게 됐다.
칼릭스는 여신의 탄생일 이래로 매일 그 사실을 곱씹어야 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했다. 생각에 잡아먹힐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매초, 매시간, 지난 삶을, 루체를, 헤르난을 떠올렸다.
마음의 온도가 끝 간 데 없이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배신감과 허무함이 속을 뒤집어 놨다.
자신의 멍청함을 탓하다가는 머리가 아파 정신없이 술을 마시기도 했다. 하지만 웃기게도, 헤르난이 다 죽어 가는 얼굴을 하고 걱정하기라도 할까 봐 정신을 잃을 정도로 들이붓진 못했다.
머리를 까맣게 태우는 답답함을,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헤르난에게 나누고 싶기도 했다. 나는 너에게 그런 말을 한 적 없다고, 헤르난을 단단히 붙들어 두고 말해 주고 싶었다. 스스로를 해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그럴 수 없었다.
칼릭스는 헤르난의 오해를 풀어 줄 수도 차마 그의 결백을 입에 담을 수도 없었다.
그 끝은 악연으로 물들었다고 한들 루체는 오랜 시간 헤르난의 하나뿐인 가족이고 친구였다. 헤르난이 루체를 얼마나 보석처럼 귀하게 여겼는지는 바로 옆에서 헤르난을 지켜봐 왔던 칼릭스도 잘 알았다. 누구에게 향하는 건지 모를 질투를 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리고 루체는, 헤르난이 가진 죄책감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똑같지만 새로운 세상에서 다시 눈을 뜬 지금까지도 헤르난은 루체의 행복을 바라고 있었다. 칼릭스 히페리온, 그리고 루체의 행복이 마치 자신이 가진 사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헤르난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루체가 자신을 우롱하고 속였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와 칼릭스 히페리온의 사이를 단절시키고, 결국 그의 인생을 단단히 꼬이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헤르난은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면 죽은 헤르난을 마주했던 때처럼 온몸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칼릭스는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진실을 그의 마음속에 묻어 두기로 마음먹었다. 헤르난에겐 절대 들켜선 안 될 일이었다.
헤르난 말론을 배신한 건, 그를 버린 건, 이전에도 지금도 칼릭스 히페리온 한 사람이어야 했다. 헤르난이 평생을 건사하고 마음을 준, 칼릭스는 가늠도 못 할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루체는 안 됐다. 그는 헤르난이 감당하기 힘들 새로운 괴로움으로 다시 고통받지 않길 바랐다.
속내를 감춘 칼릭스가 루체와 시선을 맞췄다. 그 시선을 기다렸다는 듯 루체가 다시 말을 붙여 왔다.
“집착이란 말이 거북하게 들리시나요? 하지만 남작께서 다른 사람과, 특히 괜찮은 남자와 함께 있는 걸 내버려 두질 못하시던데요. 항상.”
예쁜 얼굴 위에 귀여운 웃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야릇한 분위기를 풍겨 보는 사람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 법했다.
“칼릭스 님의 그런 면이 싫은 건 아니에요. 전 연인…… 에게 집착이 심한 사람들이 좋더라고요.”
연인. 루체는 칼릭스가 헤르난에게 가지고 있는 집착이 미워하는 이에게 품을 만한 것은 아니라고, 정상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고 에둘러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속에, 칼릭스 본인도 인정하는 집착과 성애적인 감정까지 엮었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게 취미인가?’
칼릭스는 연인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는 성미가 아니었다. 연인이나 배우자의 인간관계며 행동반경 등에 집착하는 머저리들의 생각이나 감정 따위가 아예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와닿지는 않았다.
칼릭스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러니까 그 옛날의 루체에게도 그런 식의 집착을 해 본 적은 없었다. 어떻게 사랑이라는 명목하에 연인의 일거수일투족까지 간섭하고 구속하겠는가.
질투라는 말도 자신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칼릭스는 아름다운 루체의 주위를 맴도는 날벌레들이 신경 쓰이지도 않았었다. 왜? 그중에 칼릭스 히페리온 같은 사람은 없었으니까.
자신이 헤르난에게 가진 집착은 그저 애정이 깃든 소유욕에 가까운 것이다. 내 사람이 다시 망가지기라도 할까 봐, 내 눈앞에서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돼서 그런 거다. 다른 남자랑 있는 게 꼴 보기 싫은 것도, 그저 남자 보는 눈 하나 없는 어수룩한 헤르난이 걱정돼서…….
왜인지 쉽게 이어지지 못하는 생각에 칼릭스는 얼굴을 구겨야 했다.
“처음 만났을 땐, 칼릭스 님이 저한테 반한 줄 알았어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칼릭스의 얼굴을 집요하게 들여다보며 루체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 헷갈리더라고요.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생각이 드는 거예요.”
“…….”
“나는 이용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루체가 칼릭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앉아 있는 남자의 어깨 위에 루체의 손끝이 닿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너는 아직도 날 사랑해?”
몸을 살짝 숙인 루체가 칼릭스에게 말했다.
“배우자의 마음을 시험하는 일에 절 이용하고 계신 거 아니에요?”
루체의 입에서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칼릭스는 루체의 말을 듣고 아무런 답을 할 수 없었다. 루체를 따라 웃을 수도 없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너는 아직도 날 사랑해?
오직 그 말 한마디만이 칼릭스의 머릿속에 몇 번이고 반복해 울려 퍼졌다.
잠시 칼릭스의 어깨를 쥐었던 루체의 손이 이내 생각에 빠진 남자의 뺨에 닿았다. 칼릭스는 제게 곧장 입을 맞춰 오려는 루체의 손목을 붙잡아야 했다.
칼릭스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눈앞에 있는 사랑스러운 남자와 입술을 맞대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아아, 이것 봐요.”
칼릭스에게서 완전히 손을 뗀 루체가 고개를 저어 보였다.
“미안하지 않으세요?”
“……배우자가 있는 남자가 선을 긋는 게, 왜 미안해야 할 일이 된 거지? 이해가 안 되네.”
“여지를 줄 땐 언제고 그런 말씀을. 의외로 뻔뻔하시네요.”
무감한 얼굴을 한 칼릭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통 선명해지지 않는 생각에 머리가 아파 루체를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속내를 들키니 말투도 바꾸시고 말이죠.”
“말투?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 아닌가?”
칼릭스가 표정을 바꿔 웃어 보였다. 다만, 그가 이전까지 두르고 있던 온화한 분위기는 거짓말처럼 깨어진 채였다.
“제가 한 말, 인정하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
그 얼굴만큼이나 무심한 답을 내놓는 칼릭스를 보며 루체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칼릭스 님한테 정떨어졌다는 건 아니에요. 조금만 더 관계를 명확히 해 보자는 거죠. 전 우리가 단순한 파트너 관계가 된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내가 그 대단한 배우자를 천막에 홀로 남겨 두고, 왜 여기까지 왔을까?”
“모르죠.”
“앞으론 서로에게 관심 끄고 살자는 말을 하고 싶어서.”
칼릭스의 말을 들은 루체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기분 나쁠 정도로 자신만만한 얼굴을 한 남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기운이 빠졌다.
“아. 오늘은 뭐가 됐건, 관계가 진전될 줄 알았는데…… 분위기를 보니 그른 것 같네요.”
“궁금한 게 있는데, 원래 성격이 그런가? 나 못지않게 욕심 많고 뻔뻔한 것 같은데.”
여전히 웃는 낯을 하고 칼릭스는 물었다.
“네. 원래 이래요. 당신도 원래 성격이 그러세요?”
“아쉽게도.”
자리에서 일어선 칼릭스가 말했다. 일단은 이 천막 안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다음에 봬요.”
“…….”
“남작님을 위한 시험에 계속 어울려 주는 것도 재밌을 듯해서요.”
웃어 보이는 루체에게 대꾸도 하지 않고, 칼릭스는 천막을 나섰다.
아늑한 루체의 공간에서 빠져나온 그는 헤르난이 기다리고 있을 천막으로 가는 대신, 상단이 사냥 대회의 손님들을 위해 만들어 둔 작은 산책로로 걸음을 옮겼다.
제가 없는 사이에 헤르난에게 곤란한 일이라도 일어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계속해 몸을 부풀렸다. 사람들 사이에 미친 개새끼가 하나 껴 있는 걸 알기에 더 신경 쓰였다.
하지만 당장 천막으로 가 헤르난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무어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이유에서였다. 칼릭스는 신경질적으로 걸으며 루체 세이어와 나눈 대화를, 그를 거부한 자신의 행동을 곱씹어야 했다.
칼릭스는 루체 세이어와 함께 있을 때의 자신이 이상하다는 걸, 몰랐던 비밀을 알게 되기 전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이전의 루체와 지금의 루체는 아주 사소한 것 하나까지 완전히 달랐으니까. 비밀을 알게 된 후엔 루체를 예전과 같은 눈으로 보는 게 아예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칼릭스의 손이 백금색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천막 안을 채우던 말들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기분은 나빠지고 마음만 혼란스러워졌다.
〈배우자의 마음을 시험하는 일에 절 이용하고 계신 거 아니에요?〉
문득, 칼릭스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루체가 늘어놓은 지금의 이야기에서 보다 먼 과거를 불러와야 했다.
팔짱을 낀 루체와 제 뒤를 묵묵히 따르던 호위 기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게 생기 있었던,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던 헤르난의 얼굴이었다.
칼릭스는 그와 루체를 바라보던 헤르난의 모든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집요하게 따라붙는 헤르난의 시선이 거슬려 본 적 없었다. 가끔 심술을 부리듯 헤르난을 따돌렸지만 그의 눈 속에 제가 담기는 것이 싫어 그런 건 아니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칼릭스는 그를 마음에 품은 헤르난의 눈빛을 핑계로 호위 기사 따윈 쉽게 갈아 치울 수 있었음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고, 헤르난의 따가운 시선을 무시할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눈을 맞췄다. 집요한 시선을 보내던 건, 헤르난이 아니라 칼릭스 자신이었을지도 몰랐다.
칼릭스는, 칼릭스 히페리온이라는 사람을 담은 헤르난의 눈이 무감해지지 않기를 바랐다.
“하…….”
탄식에 가까운 비웃음이 흰 숨과 함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운데 명확한 답이 나오질 않았다. 아니. 답은 나왔지만 모른 척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헤르난의 얼굴을 보면…… 확실한 답이 나올지도 모른다.
칼릭스는 그가 헤르난을 피해 이 쓸모없는 산책로에 발을 디뎠다는 것도 잊고 다시 뒤를 돌았다. 침대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을,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저를 기다리고 있을 헤르난을 봐야 했다. 마음이 다급했다.
하지만 칼릭스는 엉킨 생각을 풀어 줄 헤르난 대신 텅 빈 천막만을 마주하게 됐다.
비어 있는 천막 안의 풍경 위에, 별관의 열린 문 너머에 있던 어두운 방의 모습이 덧입혀졌다. 칼릭스는 차마 천막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하고 멈춰 섰다.
고작 후원에서 길을 잃고 덩그러니 서 있던 헤르난의 모습이 칼릭스의 눈앞에 그려졌다. 겨울, 오늘처럼 하얀 입김이 나오는 밤이었었다.
머리를 주무르던 온갖 생각들이 하얗게 타들어 갔다. 표정 하나 없는 서늘한 낯을 한 칼릭스는 천막을 떠나 다시 길을 나섰다.
* * *
눈썹 위, 찢어진 살 틈으로 뜨거운 피가 흘렀다. 가까스로 피한 총탄이 만들어 낸 상처였다.
손등으로 대충 피를 닦아 낸 헤르난이 숨을 몰아쉬었다. 흘러내리는 피가 자꾸만 시야를 가려 앞이 잘 보이질 않았다.
길럼 공작은 미쳤다. 헤르난은 확신할 수 있었다.
공작은 총을 들었음에도 헤르난에게 치명상을 남길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일부러 비껴가도록 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총알은 그저 팔뚝을, 종아리를 가볍게 스쳐 갔다. 피는 흘리되 도망갈 수 있게는 만드는 거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길럼 공작이 셀이 아니라 자신을 쫓고 있다는 거였다. 헤르난은 공작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를 두고 답이 정해진 술래잡기를 하는 중이었다. 혹여 공작이 셀을 잡겠다며 방향을 틀까 걱정이 돼 거리를 많이 벌릴 수는 없었다.
헤르난은 자신이 곧 잡힐 거라는 걸 알았다.
예전 같지 않은 몸이 계속해 앓는 소리를 내며 지쳐 가는 사이, 공작은 아주 느긋하게 헤르난을 쫓았다.
공작은 언제든 헤르난의 목덜미를 잡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때가 오면 기분 나쁘게 히죽대며 일부러 헤르난을 놓아줬다. 그가 바라는 게 뭔지는 몰랐다. 저 이상한 남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걱정은 됐다.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설마 죽이려 들지는 않겠지 싶었지만……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저 남자라면 충분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것이다.
“있잖아, 스칼라 남작.”
바로 근처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헤르난이 숨을 멈췄다. 기척도 없이 다가온 남자는 헤르난의 앞에 쪼그려 앉아 턱을 괴고 웃었다.
“아직 남작을 잡고 싶지는 않은데,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걸 보니까…… 다른 놀이를 하고 싶어졌어.”
헤르난의 얼굴에 번진 피를 손끝으로 닦아 내 주던 공작이 별안간 모피 코트를 벗어 바닥에 내던졌다. 추워 보인다는 친절한 말과 함께였다.
붙잡은 사냥감의 배를 가르는 일에 온기가 필요할까. 헤르난은 공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는 너무 나이 들고 맛도 없어 보이는 데다 덩치도 크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어.”
공작은 곧장 헤르난의 목을 그러쥐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제 발로 사냥감이 되겠다고 기어들어 온 것도, 토 나오게 착한 척하는 것도 다 좋아. 다리가 망가진 걸 빼면 우리 애들보단 튼튼한 것도.”
공작이 아이처럼 몸을 흔드는 통에 헤르난은 나무 기둥에 쿵, 쿵, 머리를 박아야만 했다. 눈앞이 잠시 하얗게 변했다가 본래의 색을 찾길 반복했다. 기분이 더러웠다.
“널 나한테 달라고 하면, 칼릭스 히페리온도 좋아하겠지?”
헤르난의 시선이 공작에게 닿았다. 공작은 어울리지도 않게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공작의 손이 자신을 찾아온 시선을 반기듯 헤르난의 목울대를 꾹 눌렀다. 참을 수 없이 기침이 터져 나왔다.
“대충 호수에 빠져 죽은 걸로 처리하자고 하면 돼. 그다음에 나한테 널 팔라고 할게. 얼마를 주겠다고 해 볼까? 칼릭스 히페리온은 돈 안 받고도 팔겠다고 하겠지만……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지.”
“…….”
“기대된다.”
피가 묻어 있는 헤르난의 차가운 뺨에 입을 맞추며 공작은 말을 이었다.
“나랑 오래 놀자, 스칼라 남작.”
귓가에 와 닿는 낮은 음성에 몸서리가 쳐졌다. 절 지금 당장 죽일 생각은 없어 보이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연달아 이어진 총소리에도 여전히 이곳엔 헤르난과 공작 단둘뿐이었다. 모두가 모른 척 눈감아 주고 있는 이 사냥의 시간은 공작과 그의 일당만의 것이었으니 당연했다.
천막을 나가지 말라고 당부했던 칼릭스의 얼굴이 잠시 떠올랐다. 혹시, 자신이 사라진 걸 알게 됐을까 궁금했다. 하지만 물음은 금세 지워졌다. 모를 것이다. 칼릭스는 루체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테니 말이다.
“아침이 오기 전에…… 돌아갈 수 있습니까?”
날이 밝고 천막으로 돌아온 칼릭스에게 둘러댈 변명거리를 생각하며, 헤르난은 공작에게 물었다.
“그건, 네가 날 얼마나 즐겁게 해 주느냐에 달렸지.”
고문을 당하는 건 익숙했다. 체념한 헤르난은 몸에서 힘을 뺐다.
“어차피 돌아가도 반겨 줄 사람이 없잖아. 아침에 돌아가서 뭘 하겠어, 꼴이 역겹다고 욕이나 먹을걸? 그러니까, 포기해.”
공작은 속삭였다.
헤르난은 공작에게 답을 하지 않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느끼지 못했던 추위와 피로가 한 번에 밀려왔다.
하지만 채 1분여도 지나기 전에, 헤르난은 다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별안간 뼈가 산산이 조각나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렇지만…… 몸 어디에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헤르난은 더는 웃음소리를 내지 않는 공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 헤르난은 그의 위에 올라타 있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만들어지지 못한 소리가, 그저 한 덩어리로 모인 숨이 허공에 흩어지고 있었다.
공작의 눈동자가 혼란에 잠겼다. 입을 뻥긋거리며 컥컥대던 공작이 손을 뻗어 그의 등을 훑었다. 날붙이에 몸이 꿰뚫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공작은 벌벌 떨고 있었다. 벌어진 입 사이로 씹힌 혀를 타고 핏물이 흘러나왔다.
메마른 땅을 밟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공작의 몸이 옆으로 넘어간 것은, 발소리의 주인이 걸음을 멈춘 것과 동시였다.
“잡았다.”
겨울밤과는 어울리지 않는 열기를 담은 목소리가 침묵하는 호숫가를 울렸다.
흐억. 공작은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공작의 오른쪽 어깨뼈 부근에, 괴물을 잡을 때나 쓰는 굵은 볼트 화살이 결코 빠지지 않을 것처럼 단단히 틀어박혀 있었다.
어느새 바닥을 기고 있는 공작에게서 헤르난은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석궁을 쏜 사람이 누군지 차마 확인하지도 못하고 떨리는 손을 모아 잡아야만 했다.
헤르난, 하고 그가 제 이름을 부르는데도 호응해 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날이 밝은 뒤에나 다시 볼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헤르난의 앞에 있었다.
“한참을 찾았어.”
“…….”
“고개 좀 들어 봐, 헤르난.”
어느새 헤르난의 앞에 선 칼릭스가 다정한 어투로 말을 건넸다. 우습게도, 칼릭스의 목소리에 날카로운 분노가 서려 있지 않다는 걸 느낀 후에야 헤르난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출 수 있었다.
“저 새끼가 널 이렇게 만들었지?”
엉망으로 흐트러진 아름다운 백금발이 어슴푸레한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다만 그 아래로 보이는 푸른 눈 위에는 짙은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아냐. 답 같은 거 안 해 줘도 돼. 내가 직접 봤잖아.”
손에 들고 있던 석궁을 내던진 칼릭스가 공작의 발치에 뒹굴고 있던 산탄총을 집어 들었다.
빛 한 점 없이 잠잠히 가라앉아 있는 칼릭스의 두 눈이 지나치게 고요해 보여 헤르난은 두려웠다.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이지?”
말을 마친 칼릭스가 헤르난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의 새로운 목적지는 길럼 공작이었다.
칼릭스의 발이 공작의 어깨뼈에 박혀 있는 볼트 화살을 툭, 건드리자 소리 없는 비명이 퍼졌다. 칼릭스는 무감한 얼굴을 하고 다시 화살을 걷어찼다.
금이 가고 조각난 뼈가 무자비하게 헤집어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 어떤 치료 마법사도 이제는 공작의 상처를 고쳐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꽉 막혀 있던 공작의 목소리가 뒤늦게 세상 밖으로 터져 나왔다. 다리가 잘린 벌레처럼 몸을 바르작대면서, 그는 포효했다. 길고 긴 비명이었다.
“너. 사람 괴롭히는 거 좋아하잖아. 네가 당하는 건 싫어? 너무 아파?”
칼릭스의 웃음에 경멸이 묻어 있었다.
“왜, 억울하면 말 좀 해 봐.”
삐딱하게 선 칼릭스가 공작의 등을 지르밟으며 말을 걸었다. 하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공작의 시선이 칼릭스에게 닿았다. 표정이 사라진 칼릭스가 다시 한번 그를 걷어찼다. 볼트 화살이 뼈를 으스러뜨릴 때처럼 둔탁한 파열음이 났다.
헤르난은 자신이 칼릭스의 많은 얼굴을 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지금껏 저런 얼굴을 한 칼릭스는 본 적이 없었다. 제가 루체를 죽인 줄 알았을 때도, 저런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소리가 멈췄다. 곧, 칼릭스가 든 산탄총의 총구가 공작의 머리로 향했다.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린 헤르난이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통에 반쯤 기다시피 해서 걸음을 옮겨야 했다. 칼릭스의 발치에 다다라서야, 헤르난은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헤르난은 칼릭스를 붙잡았다. 하지만 팔을 붙잡아 봐도, 옷자락을 붙들어 봐도, 칼릭스는 자꾸만 제 손을 빠져나갔다.
“그만, 그만하세요.”
헤르난은 다급히 칼릭스를 끌어안았다. 두 팔에 힘을 줘 가까스로 칼릭스를 붙잡은 거였다. 칼릭스의 어깨에 닿은 헤르난의 뺨이며 허리를 쥔 팔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도련님.”
“…….”
“그러지 마세요.”
헤르난은 말했다.
“공작을 죽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칼릭스의 물음에 헤르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도련님이 살인자가 되는 게 싫습니다.”
“……내가 전쟁 영웅 소릴 듣던 걸 잊었나 봐. 사람 많이 죽인 새끼한테 주는 명예잖아, 그거.”
귓가에, 힘없는 웃음소리가 닿았다. 칼릭스의 마음이 누그러졌다는 게 느껴졌다.
“저 때문에 사람을 죽이지 마세요.”
간곡함을 담아 헤르난은 말했다. 칼릭스가 사람을 죽이는 걸, 그것도 제가 설친 탓에 사람을 죽이게 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상대는 공작이었다. 엄폐한다고 될 살인이 아니었다. 아무리 칼릭스가 그 네이로 후작을 아버지로 뒀다고 한들, 빠져나가기 힘들 것이다. 공작을 죽이지 않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폭행 역시 문제가 될 거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길럼 공작의 앓는 소리만이 끊길 듯 끊기지 않으며 헤르난과 칼릭스, 두 사람의 발치를 맴돌았다.
“……알았어. 네 말 들을게.”
헤르난에게 붙들려 얌전히 선 채로 칼릭스는 중얼거렸다.
자신을 붙잡은 헤르난의 손등에 가만히 제 손을 겹쳐 보던 칼릭스가 조심히 그에게서 벗어났다. 잠깐만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였다.
칼릭스는 주인에게 벌어진 소동을 같은 자리에 서서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길럼 공작의 말에게로 향했다.
칼릭스의 손이 말의 안장에 매달려 있는 가방을 끌어 내렸다. 사냥꾼들이라면 으레 지니고 다니는, 활과 검에 바를 독과 포션 따위가 든 작은 가방이었다.
가방에서 검지만 한 포션병을 모두 끄집어낸 칼릭스가 다시 길럼 공작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놀라 자신을 보는 공작을 향해 더없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칼릭스는 병을 열었다.
칼릭스는 몸을 숙여 공작의 뺨을 아프게 쥐었다.
“나는, 사라진 배우자를 찾기 위해 숲을 헤맸어. 그러다 어떤 짐승이 내 배우자를 잡아먹으려는 꼴을 보게 됐지.”
공작의 입을 억지로 벌린 칼릭스가 그 안에 포션을 들이부었다. 구역질을 하지 못하게 입을 막아 가면서 그 행동은 두어 번 반복됐다. 텅 빈 포션 병이 공작의 발치에 버려진 뒤에야 칼릭스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내가, 널, 가만둘 줄…….”
“내 말 안 끝났는데.”
칼릭스의 발끝이 공작을 가볍게 쳤다. 컥컥대는 기침 소리 위로 칼릭스의 목소리가 얹어졌다.
“난 당연히 석궁을 쥐었지. 그 짐승을 향해 쐈고. 그런데 다시 보니까, 내가 쏜 게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잖아. 그것도 대단하신 공작님 말이야.”
칼릭스는 남아 있던 마지막 포션을 열어 볼트 화살이 꽂힌 어깨뼈 부근에 모조리 쏟았다.
“나는 너무 놀라서 포션을 찾아 공작님께 먹이고, 상처에 부었어. 할 만큼 한 거지. 안 그래?”
“개새끼, 헛소릴…….”
“공작께선 어떻게 나오실까.”
말이 이어졌다.
“네 이름이 스칼라 남작의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게 얌전히 살아. 그 싸구려 정체가 사방에 까발려지는 꼴이 보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응?”
“…….”
“사생아만도 못한 게 수작을 부려 작위를 받아먹었으면 열심히 살아야지, 이게 뭐야.”
“네, 네가…… 어떻…… 게…….”
“왜? 더 자세히 말해 줄까?”
칼릭스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는 저 너머에서,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잘 이어지지 못하고 뚝뚝 끊기는 음성이었다.
그런 공작에게 칼릭스는 몇 마디 말을 더 속삭였다. 바람이 부는 소리에 가려져 잘 들리지 않았다.
한숨과 함께 뒤돌아선 칼릭스는 다급한 걸음으로 헤르난에게 돌아왔다.
“돌아가자, 헤르난.”
칼릭스는 간신히 서 있는 헤르난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장갑을 끼지 않아 차가운 손이 헤르난의 목덜미에 닿았다.
〈널 내게 달라고 하면, 칼릭스 히페리온도 좋아하겠지?〉
길럼 공작은 헤르난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공작이 했던 말처럼 칼릭스가 자신의 고통에 행복해하지 않아서, 자신을 그에게 팔지 않아서, 헤르난은 안도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사람처럼 순식간에 마음이 풀어졌다. 우스운 일이었다.
헤르난은 차마 칼릭스를 마주 안지는 못하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사냥의 밤, 헤르난이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 * *
큰 창이 있는 아름다운 방 안에서 헤르난은 눈을 떴다. 창 너머로 이른 아침의 색깔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는 소리가, 겨울바람이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악사들의 연주처럼 요란하게 방 안을 채웠다.
멍하니 그 소리에 귀 기울이던 헤르난이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평범한 이불을 3겹 정도 묶어 만든 것처럼 두꺼운 이불 위에 손을 얹고, 헤르난은 주위를 둘러봤다.
지금껏 본 적 없는 낯선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익숙한 것도 있었다. 옆에 누워 있는 남자였다.
칼릭스의 예쁜 백금색 머리가 털 모포에 비벼진 탓인지 하늘을 향해 뻗쳐 있었다. 헤르난은 저도 모르게 칼릭스의 뻗친 머리카락을 아래로 쓸어내려 줬다. 하지만 그 손길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머리카락은 아래로 가라앉기는커녕, 더욱 사납게 위로 뻗쳤다.
당혹감을 느끼던 헤르난은 모른 척 손을 거뒀다. 칼릭스의 머리가 뻗친 건, 다…… 저 털 모포 탓이었다.
“……이틀 만에 깨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머리카락으로 장난치는 거야?”
어느새 눈을 뜬 칼릭스가 헤르난에게 물었다.
“재밌으면 됐어. 더 해.”
잠시 빛에 적응하는 듯 흐릿하던 파란색 눈이 빠르게 본래의 선명함을 되찾고 있었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에 묻어난 장난기가 귀여웠다.
“……아닙니다.”
“조금 숙여 봐.”
헤르난은 착실히 칼릭스를 향해 몸을 숙여 줬다.
뻗어진 손끝이 헤르난의 뺨을 스쳤다. 칼릭스의 손은 천천히, 헤르난의 이마 위로 옮겨 갔다. 그의 손끝이 헤르난의 눈썹 위에서부터 관자놀이께까지 길게 남은 흉터를 쓸었다. 아문 지 얼마 되지 않은 상처 위로 간지러움이 퍼졌다.
“흉이 안 남을 거라더니…… 거짓말이었잖아. 돌팔이 새끼.”
칼릭스의 평온하던 얼굴 위에 짜증이 번졌다.
멍하니 칼릭스를 바라보던 헤르난의 머릿속에 뒤늦게 사냥 대회의 밤이 떠올랐다. 꼭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기억이었다.
“뭘 그렇게 당황해?”
헤르난의 새까만 머리칼을 만지작대며 칼릭스는 말을 더했다.
“미안하다는 소리를 하고 싶어 하는 얼굴인데.”
정곡을 찔렸다.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모든 일을 떠넘기고 정신을 놔 버린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칼릭스 혼자 어떻게 그 사태를 수습했을지, 또 어떻게 절 옮겼을지에 대해 생각할수록 헤르난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 갔다.
“지금은 혼날까 봐 걱정하는 얼굴이고.”
“…….”
“잘못한 게 하나는 있지. 천막 안에서 얌전히 있으랬더니, 천막 안은 무슨…… 저 숲까지 기어들어 갔으니.”
칼릭스의 말이 이어졌다.
“널 그 쓰레기한테 바치고 튄 애새낀 감쪽같이 사라졌어. 아무도 쫓지 않은 것 같아.”
셀은 숲 너머로 잘 도망간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헤르난의 어둡던 얼굴 위에 은은한 안도가 감돌았다. 풀어진 헤르난의 표정을 보는 칼릭스의 눈매가 샐쭉해졌다.
“너는 옛날부터 그랬지. 불쌍한 것들이 보이면 지나치질 못하고, 고맙단 소리도 못 들을 일에 나서기나 하고.”
“…….”
“구두 닦는 애 하나 돕겠다고 설치다 다쳐서 온 널 보고 길길이 날뛰었던 게 바로 어제 같은데…… 10년이 더 지나서도 이러고 있네. 훨씬 규모를 키워서 말이야.”
칼릭스의 손이 느리게 떨어져 나갔다.
“또 그럴 거야?”
“……아뇨.”
“거짓말.”
“진짭니다.”
면목이 없어 차마 칼릭스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헤르난은 답했다.
“길럼 공작이 계속 가만히 있진 않을 겁니다.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신경 쓰실 필요 없게 처신하겠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헤르난이 더듬더듬 말을 꺼내 놨다.
“내가 친 사고를 왜 네가 수습해? 걘 걱정할 필요 없어.”
찬찬히 상체를 일으켜 세운 칼릭스가 그 자세만큼이나 비스듬한 웃음을 지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헐벗은 상체에 조각된 근육이 차가운 공기를 맞아 딱딱해지는 게 보였다.
“다신 네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만들 거니까.”
뒤이어 칼릭스는 헤르난의 앞에 몇 가지 이야기를 늘어놨다. 헤르난은 칼릭스와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그가 내뱉는 말들을 주워 담아야 했다.
헤르난이 쓰러진 후, 사람들이 몰려왔다고 했다. 그 사이엔 길럼 공작과 함께 사냥에 나섰던 이들도, 세이어 상단의 후계자와 루체도, 베로나 후작 부인과 그녀의 배우자도 있었다.
칼릭스는 그들이 오기 전 공작과의 대화를 마쳤다고 했다. 칼릭스는 대화라고 했지만, 아마 공작에겐 통보였을 것이다. 공작은 칼릭스가 쥐고 있는 비밀과 그 비밀이 얼마나 화려하게 세상 밖으로 터져 나올 수 있는지를 알게 됐다.
공작은 바꿔치기 된 자식이라고 칼릭스는 말했다. 다시 돌아온 지금 이 세상에서, 적어도 지금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길럼 공작의 어머니와 공작, 칼릭스 히페리온 세 사람뿐이라는 말이 덧붙었다.
“그런 걸 알고 계셨습니까?”
헤르난은 조심스레 물었다.
“……전우 하나랑 조금, 더러운 정보 길드를 함께 운영했었어. 그 기분 나쁜 변태 새끼의 비밀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 다행이었지. 아니면 네 말을 무시하고 죽였어야 했으니까.”
딱히 입에 올리고 싶은 화제는 아니었는지 칼릭스는 금방 말을 돌렸다.
더러운 정보 길드. 그건 칼릭스의 아버지인 네이로 후작의 영역이었다. 평소 그런 쪽 일엔 관심이 없던 칼릭스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자신이 디아만테의 감옥에 있는 동안, 그리고 백작성의 별관에 있는 동안 칼릭스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뒤이어 칼릭스는 사람을 짐승으로 착각해 벌어진 일로 대충 사건을 마무리했다는, 친절하게도 공작께선 아무런 보상 따위를 바라지 않았다는 다소 허망한 결말을 헤르난에게 들려줬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왜 안 믿어? 후작 부인께서 내 편을 들어 주니 분위기가 기울더라. 인망이 아주 높으신가 봐.”
눈을 접어 웃어 보인 칼릭스가 말을 이었다.
“덕분에 무사히 공터로 돌아갔지. 네가 그렇게 질색하던 대로 함께 말을 타고 말이야.”
그 뒤로, 헤르난은 자신이 치료 마법사들에게 치료를 받았다는 것과 지금 이곳이 바로 후작 부부의 별장이라는 걸 알게 됐다.
환자가 오랜 시간 마차를 타면 안 된다며 가까운 별장에 방을 내어 준 후작 부부도 지금 이곳에 함께 있다고 했다.
“후작 부인이 널 아주 마음에 들어 하던데, 유부녀라 다행이지?”
이상한 소리를 하며 웃는 칼릭스를 보며 헤르난은 입을 달싹였다. 칼릭스는 사냥 대회에서 있었던 일을 잘 해결했다며 대충 넘겨 버렸지만, 아예 아무것도 모르고 넘어가기엔 마음이 불안했다.
“궁금한 거 있어?”
어쩐지 뿌듯해 보이는 눈을 하고 칼릭스는 물었다.
솔직한 답을 주지 않을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길럼 공작에 관해 더 물어야 할까. 아니면 그 엉망진창인 광경을 보고 놀랐을 루체에 대해 물어야 할까. 헤르난은 속으로 고민했다.
“……어떻게 호수까지 오셨습니까?”
하지만 정작 칼릭스의 앞에는 이런 싱거운 물음만을 내놨다.
“천막 안에 네가 없길래 눈 뜨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붙잡고 헤르난 말론 어디 갔냐고 물었지. 아주 신사적이고 친절하게.”
“놀랐습니다. 아침이 돼서야 천막으로 돌아오실 거라고 생각해서…….”
“넌, 날 뭐로 보는 거야?”
잘생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칼릭스가 중얼거렸다.
헤르난은 그런 칼릭스의 반응에 당황해 이상한 변명을 늘어놔야 했다. 그 말을 들을수록 칼릭스의 표정은 나빠졌지만 말이다.
“헤르난. 나는 네가 죽기라도 할까 봐, 종일 뭐 마려운 개 새끼처럼 같은 자리를 빙빙 돌면서 살고 있어. 제발 지금이라도 알아주라.”
너무 따뜻한 방 안의 온도며 두꺼운 이불 탓에 볼이 붉어진 헤르난의 얼굴을 들여다본 칼릭스가 느릿하게 말했다. 우아한 발음과는 맞지 않는 사뭇 과격한 내용이었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물었다.
이해가 되지 않아 몇 번이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문제가 칼릭스의 입 사이에서 흘러나오자 얼결에 ‘왜’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칼릭스가 눈을 뜬 후로 내내 떠들썩했던 방 안이 다시 고요에 잠겼다.
질문을 받아 든 칼릭스의 미간이 깊이 팼다. 손이 부스스한 백금색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쓸었다.
“……미안해서.”
“…….”
“무서워서.”
칼릭스가 제게 미안할 게 뭐가 있고 무서울 게 뭐가 있다는 말인가. 특히, 무섭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추측도 하기 힘들었다.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버거운 말이었다.
“……넌, 네가 눈을 감고 있는 이틀 동안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를 거야. 내가 왜, 네가 죽는 걸 무서워할 것 같아?”
“……모르겠습니다.”
“왜 네가 날 떠나는 게 무서울까.”
물음이 아니라 혼잣말에 가까운 것이었다.
주고받던 말이 별안간 뚝 끊겼다. 하지만 머지않아 칼릭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아. 이상하지?”
침대 헤드에 머리를 기대며 칼릭스는 말을 더했다.
“어쨌든, 너도 내가 눈 뒤집힌 거 봤잖아. 혼자 다니지 마.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같이 도울 테니까.”
창문 너머에서 들어온, 막 눈을 떴을 때보다 밝아진 빛이 칼릭스의 얼굴 위에 내려앉았다. 칼릭스가 저를 보며 다정하게 웃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할 만큼 환한 햇살이었다.
헤르난은 빛을 머금은 남자의 얼굴을 마음에 새기며 속으로 말을 골랐다.
“저는 마땅히 받아야 할 죗값을 치른 것뿐입니다. ……그러니 제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전, 제게 남은 시간을 당신을 위해 쓸 테니까요.”
이해하기 힘든 말은 뒤로 물려 두고 헤르난은 일단 이렇게 말했다. 요즘 들어 비슷한 얘기를 반복해 입에 담게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고민 끝에 내놓은 말 뒤로 한마디가 더 이어졌다. 앞선 망설임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머뭇대다가는 간신히 꺼낸 것이었다.
“그래도, 와 주셔서…… 도와주셔서 기뻤습니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말을 마친 헤르난의 그늘진 얼굴 위에 평상시와 같은 어정쩡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한편에 미처 그림자 속에 숨기지 못한 자그마한 기쁨이 묻어 있었다.
칼릭스의 빤한 시선에 쑥스러움을 느끼며 헤르난은 도망치듯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곧, 칼릭스의 손끝이 헤르난의 턱을 들어 올렸다.
“헤르난. 나는 널 남에게 빌려줄 생각도, 팔아치울 생각도 없어.”
칼릭스는 말했다. 그의 침잠한 두 눈에 묘한 빛이 퍼져 있었다.
어쩌면 길럼 공작이 한 말을 들었던 걸까. 하지만 괜한 생각은 이어지질 못했다. 침대에 놓인 제 손 위에 칼릭스의 손이 겹쳐졌다. 투박한 손가락 사이사이로, 칼릭스의 곧고 예쁜 손가락이 비집고 들어왔다.
“네가 그걸 원한다고 해도 안 돼. 그게 무슨 이유건, 다른 사람 옆은 안 돼.”
“…….”
“내가 사람 죽이는 거 보고 싶지 않다며. 그러니까…… 그러지 마.”
헤르난을 붙잡은 칼릭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흰 손등을 가로지르며 불거진 핏대가 그의 눈매만큼이나 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너는 내 거잖아, 헤르난.”
흉포한 기색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으며 칼릭스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입꼬리에서부터 천천히 번지기 시작한 달콤한 웃음이 이른 아침의 햇볕보다 먼저 헤르난을 감쌌다.
〈너는 날 떠나지 않을 거지?〉
몇 번이고 반복해 물어 오던 어린 도련님의 얼굴이 눈앞의 남자와 겹쳐졌다.
〈싫다고 하셔도, 저는 계속 도련님 옆에 있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응. 너는 내 거잖아. 내 사람이잖아.〉
확신에 찬 얼굴로 너는 내 것이라 선언하는 도련님을 보며 헤르난은 웃었었다.
그 후 많은 시간이 지났고 그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이제 헤르난은 예전처럼 자신의 도련님을 쉽게 끌어안아 주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헤르난이 지나쳐 온 긴 시간 동안, 그는 칼릭스의 것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헤르난은 칼릭스가 자신을 버렸을 때도, 자신의 우스운 도발에 넘어간 칼릭스가 결국 제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을 때도…… 항상 칼릭스를 주인으로 섬겼다.
“네. 저는 도련님 겁니다.”
채도가 낮아 어두운 눈동자 안에 그의 세상에서 홀로 반짝이는 아름다운 남자를 담고, 헤르난은 순순히 말했다.
강한 힘이 헤르난을 붙잡았다. 어느 틈엔가 헤르난은 칼릭스의 품에 안겨 있었다.
부드러운 숨이 귀 끝을 간질였다. 창문 밖의 계절을 잊게 만드는 따스한 온기 속에서 헤르난은 홀린 것처럼 칼릭스를 마주 안았다. 잔뜩 겁에 질린 사람처럼 창백한 낯을 한 채였다.
칼릭스는 헤르난의 눈썹 위에서부터 시작되는 긴 상처 위에 입을 맞췄다. 입술은 감긴 눈꺼풀과 뺨을 지나 메마른 입술에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입 맞춰도 돼?”
이미 입을 맞춰 놓고.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칼릭스는 속삭이듯 물었다. 뺨에 닿은 칼릭스의 손이 가라앉은 목소리와 다르게 뜨거웠다.
칼릭스가 제게 보이는 다정함이 헤르난은 두려웠다. 애정 없는 입맞춤에 홀로 황홀함을 느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괴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칼릭스의 다정함이 목줄 묶인 개에게 던져 주는 먹이라고 해도, 순전히 동정에서 기인한 것일 뿐이더라도, 가장 마지막 순간에 더 크게 비웃기 위해 꾸며진 것이라고 해도…… 헤르난은 빛을 향해 달려드는 벌레처럼 칼릭스에게 몸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네.” 헤르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스스로가 너무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 짧은 승낙만을 기다렸다는 듯 칼릭스가 입술을 부딪쳐 왔다. 입술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사나운 침입자를 어설프게 받아 내며 헤르난은 다시 눈을 감았다.
두 번째 입맞춤이었다.
* * *
세이어 상단으로부터 편지와 선물이 도착했다.
칼릭스는 헤르난이 상단의 편지를 확인하지 못하게 막아선 뒤, 그것을 대충 손으로 찢어 벽난로의 불길 속에 던져 버렸다.
헤르난이 당혹스러워하는 게 보였지만, 일이나 하라며 등을 떠밀어 자리에 앉혀 버렸다. 헤르난이 저 편지를 읽는 꼴을 보면, 사냥 대회와 관련된 귀족 새끼들이건 상단의 후계자건 길럼 공작이건 간에 누구 하나는 잡아다 죽이고 싶은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세이어 상단의 후계자가 주최한 사냥 대회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피가 식을 정도로 칼릭스의 기억 속에 개같이 남았다.
사냥 대회의 주최자도 손님들도, 후작 부인인 베로나와 그녀의 배우자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길럼 공작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하지만 칼릭스에겐 왜 이렇게 일을 키웠냐는 말들과 함께 원망 어린 시선이 꽂혔다.
헤르난이 남자애를 위해 나서지 않았다면, 하다못해 칼릭스가 나서서 길럼 공작을 저 꼴로 만들지 않았다면 밤은 평온하게 지나갔을 거라고 그들은 말했다. 아무것도 아닌 남작의 남편이 도대체 무얼 믿고 공작에게 덤볐냐며 혀를 찼다.
상단 역시 그 원망에 일조했다. 길럼 공작이 당장은 당신을 감옥에 넣을 생각이 없어 보이지만 곧 긴 싸움을 걸어 올 거란 말을 친히 전해 줄 땐 묘한 책망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정작 길길이 날뛰어야 할 공작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그의 영지에 틀어박혔고, 상단을 향해 괜한 시비를 걸어오는 건 칼릭스 히페리온이니…… 편지니 선물을 보낸 건 다 그 때문일 것이다.
제가 헤르난을 찾겠다고 나서지 않았다면? 길럼 공작은 날이 밝을 때까지 즐겁게 헤르난을 가지고 놀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공작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겠지. 헤르난은 남작 위를 빼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고 공작은 가진 게 많은 사람이니 말이다.
칼릭스에게 있어 공작은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다. 헤르난이 칼릭스를 끌어안고 공작을 죽이지 말라 부탁하지 않았다면, 조금만 늦게 호숫가에 도착했다면, 칼릭스는 그 밤 공작을 죽였을 것이다.
공작은 운 좋게 살아남았다. 칼릭스는 길럼 공작이며 그 패거리, 상단에게 잊지 못할 경고를 해 줘야 했다. 다신 스칼라 남작에게 기어오르지 못하게.
물론, 모든 건 헤르난 몰래 진행해야 할 일이었다. 저 바보는 자신이 당한 건 생각도 못 하고 자신을 말릴 게 분명하니 말이다.
높은 계급도 차고 넘치는 부도 공포를 막아 낼 순 없다. 지난 삶, 칼릭스의 가장 큰 무기는 무력이 아니었다. 그는 남이 숨겨 둔 약점을 잡아채 흔들어 대는 비열한 짓거리에 손을 대는 걸 꺼리지 않았다. 그 추잡한 무기를 이 이상한 세상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지금의 제겐 힘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고작 그걸 가지곤 이미 반쯤 무너져 있는 헤르난의 세상을 죽음의 위협 따위는 닿지 않을 평화로운 온실처럼 만들어 줄 수 없었다. 이전 삶보다 더 위로 올라서야 했다.
‘권력과 돈…… 명예. 그게 필요해.’
긴 겨울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중북부와 달리 스칼라는 벌써 겨울의 끝자락에 접어들었다. 이틀 뒤면 쓸모가 없어질 벽난로에서 한 걸음 물러선 칼릭스는 집무실 책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칼릭스는 골몰히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 헤르난을 훔쳐봤다. 눈썹 위에서부터 관자놀이까지 길게 이어진 흉터에 자꾸만 시선이 닿았다. 이미 많이 아물어 흔적만 남은, 유별나게 눈에 띄는 상처도 아닌데 보면 볼수록 기분이 나빴다.
칼릭스는 여전히 사냥 대회의 밤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밤을 구성하는 절반은 분노였고 남은 절반은 당혹감이었다.
헤르난이 잠에 빠져 눈을 뜨지 못했던 이틀간, 칼릭스는 지금처럼 헤르난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의 안에 떠오른 물음들에게 답을 내놨다.
칼릭스를 괴롭게 하는 건 지난 삶의 기억이었다. 칼릭스는 계속해 자신이 루체를 사랑하던 때를 떠올려 봐야 했다. 루체에 대해서도 헤르난에 대해서도 사실은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칼릭스와 루체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연인이었다. 칼릭스를 마음에 둔 다른 남자가 바로 옆에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특별히 대단한 부분도, 특별히 엉망인 부분도 없었다. 말수가 적고 다정한 루체를 닮아 잔잔하고 편안한 연애라고, 칼릭스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전장에 나섰던 헤르난이 돌아온 후 모든 게 달라졌다. 돌아오겠다는 말만을 남기고 칼릭스를 떠났던 헤르난은, 정말로 다시 돌아오게 된 후엔 내내 그를 기다려 왔던 칼릭스를 버렸다. 그리고 루체를 빼앗아 갔다.
칼릭스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때의 자신이 느꼈던 분노를 곱씹어 볼 수 있었다.
옆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된 칼릭스 히페리온은 자신의 연인을 데리고 스칼라로 떠나 버린 헤르난에게 분노했다. 그를 떠난, 헤르난에게 분노했다.
이별은 루체가 만들어 낸 불씨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때의 칼릭스는 멍청하게도 한 번 더 헤르난을 붙잡아 보질 못했다. 헤르난의 하나뿐인 가족이고 친구인 루체가 거짓을 말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헤르난이 긴 잠에 들었던 동안, 칼릭스는 더는 물을 수도 원망할 수도 없어진 남자를 완전히 떠나보냈다. 마음 줄 곳 없이 흐지부지 이어지던 긴 연애를 끝낸 기분이었다.
쓸데없이 덩치만 커다란 허무와 우울이 곧장 이 의미 없는 결말의 뒤를 따라올 줄 알았건만, 칼릭스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허무와 우울은 눈을 감고 누워 있는 헤르난 위로 지난 삶, 제 침대 위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그의 얼굴이 겹쳐졌을 때나 찾아왔다.
종일 칼릭스에게 들들 볶인 치료 마법사의 입을 통해 헤르난이 고작 잠이 든 거란 걸 몇 번씩 확인받았음에도 그랬다.
이제 완전히 벽난로를 등지고 선 칼릭스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너는 아직도 날 사랑해? 배우자의 마음을 시험하는 일에 절 이용하신 거 아니에요?〉
루체가 내놓았던 말이 칼릭스의 귓가를 맴돌았다. 반쯤 풀어 놓은 의문이, 남은 절반만큼의 풀이를 요구하며 나섰다. 칼릭스 역시 완전한 답을 얻고 싶었다.
칼릭스는 뜨겁게 끓는 속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옆에 있던 의자를 끌고 책상 앞으로 향했다. 그제야 헤르난이 시선을 들어 칼릭스를 봐 줬다.
헤르난과 눈을 맞추며, 칼릭스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참으로 뻔뻔한 얼굴이었다.
칼릭스는 여전히 생각할 게 많았다. 그 생각이란 걸 기왕이면 제 머릿속을 가장 어지럽게 만드는 사람 앞에서 하는 것도 좋겠지 싶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
한순간에 가까워진 거리감이 낯선지 헤르난은 슬쩍 칼릭스의 눈을 피했다.
고작 시선이 맞지 않은 것뿐인데 심한 거부라도 당한 사람처럼 마음이 불퉁해졌다. 아주 예전부터 그랬다. 칼릭스는 헤르난이 자신을 봐 주지 않는 게 싫었다.
“헤르난.”
칼릭스는 헤르난의 어두운 갈색 눈이 항상 그 속에 저만을 담고 있길 바랐다. 그래서 괜히, 자신을 봐 주지 않는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그토록 맞닿길 원하던 헤르난의 눈 속에 꼭 며칠 굶은 산짐승처럼 초조한 얼굴을 한 남자가 담겨 있었다. 칼릭스는 조금 놀랐다. 자신의 고요한 마음과는 너무 다른, 헤르난의 눈 위에 비치는 얼굴이 너무 낯설었다.
“……그냥. 보고 싶어서.”
헤르난이 제 징그러운 욕망을 눈치채지 않길 바라며 칼릭스는 얼굴을 바꿨다. 아름다운 미소가 순식간에 그의 얼굴 위로 번졌다.
* * *
그 밤, 칼릭스는 꿈을 꿨다. 한심하게도…… 헤르난과 입을 맞추는 꿈이었다.
꿈이 꿈인 걸 알아채는 건 쉬웠다. 헤르난이 제게 먼저 몸을 붙이고 입을 맞춰 왔으니, 꿈이 아닐 리 없었다.
칼릭스는 자신에게 입을 맞춰 오는 헤르난에게 고개를 숙여 줬다. 꿈에서조차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입맞춤을 도운 것이었다.
제 주인만큼이나 뻣뻣하게 굳어 있는 혀를 건들자 헤르난은 눈을 꽉 감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헤르난이 귀여워 칼릭스는 웃음을 지어야 했다.
어쩌다 입을 맞추게 됐는지, 왜 이런 꿈속에 빠졌는지는 이제 칼릭스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칼릭스는 저 어설프기 짝이 없는 남자와의 입맞춤을, 한때는 밉다고 생각했던 남자와의 입맞춤을 꿈에서조차 갈구하고 있었다. 종일 입만 맞추고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입맞춤은 금세 끝이 났다. 헤르난이 몸을 뒤로 물린 탓이었다.
천천히, 다시 눈을 뜬 헤르난은 꼭 먼 옛날처럼 칼릭스를 보며 밝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물었다.
〈죽은 사람과 입 맞추는 기분이 어때?〉
칼릭스의 꿈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잠에서 깨어난 칼릭스는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한참이나 가쁜 숨을 몰아쉬던 남자의 손이 자신의 옆에 있어야 할 헤르난을 찾았다. 차마 시선을 돌려 옆을 확인할 생각은 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다행히, 칼릭스의 손 위에 그가 찾아 헤매던 이의 손이 겹쳐졌다.
“……꿈을 꾸셨습니까?”
칼릭스를 따라 일어난 헤르난이 물었다.
몸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던 공포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칼릭스는 고개를 돌려 헤르난을 봤다. 창문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온 달빛이 피곤해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어슴푸레하게 비추고 있었다.
말없이 헤르난의 얼굴을 살피던 칼릭스가 그를 향해 몸을 숙였다. 칼릭스가 만들어 낸 그림자가 헤르난 위에 머물고 있던 달빛을 순식간에 몰아냈다.
나는 아직도 꿈속에 있는 걸까.
아니. 어쩌면, 이 새로운 세상에서 보낸 모든 시간이 꿈일지도 몰랐다. 더는 숨을 쉬지 않는 헤르난을, 결국 흑마법사도 살려 내지 못한 남자를 끌어안고 긴 꿈을 꾸고 있는 거라면…….
어지러운 생각이 칼릭스를 따갑게 찔렀다.
헤르난. 칼릭스는 눈앞의 남자를 불렀다.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 그의 이름을 외웠다.
〈죽은 사람과 입 맞추는 기분이 어때?〉
꿈이 아닌 온기를, 헤르난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그가 지금 제 옆에 있다는 걸, 칼릭스는 느끼고 싶었다.
“……입을 맞춰도 돼?”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물었다.
말도 안 되는 떼를 쓰는 거였다. 잠에서 깨어나 팔을 허우적대다가, 별안간 입을 맞추자며 들이댄다. 미친놈, 한심한 놈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칼릭스의 손끝이 헤르난의 뺨에 닿았다. 손은 느릿하게 움직여 종내엔 뺨을 타고 내려가 꾹 다물어진 입술 위에서 멈췄다. 헤르난 역시 칼릭스처럼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헤르난은 간신히 칼릭스와 눈을 맞췄다. 다음에 나올 말은 뻔했다. 입맞춤 같은 거 없이도 나는 당신을 도울 것이다.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그 대답을 받아 들고 웃으며 다시 잠자리에 들겠지.
하지만 왜인지 헤르난은 별다른 사족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칼릭스를 허락했다.
도대체…….
칼릭스는 놀라 헤르난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생각은 더 길게 이어지질 못했다. 허락을 받아 낸 칼릭스는 다급히 헤르난에게 입을 맞췄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무르려는 헤르난의 등을 받치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제 혀를 밀어 넣었다.
도망가려는 혀를 옭아매자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타액이 묻은 입술이 부딪히는 끈적한 소리 아래에 깔린, 아무것도 아닌 그 짧은 탄식이 칼릭스를 멈칫하게 했다.
헤르난은 살아 있다.
여기, 나의 옆에서, 살아 숨을 쉬고 있다.
뒷덜미가 오싹해질 정도의 기쁨이 칼릭스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원래도 시끄럽게 끓어 대던 욕망이 바깥으로 흘러넘쳤다.
“헤르난. 내 목에 팔을 둘러.”
칼릭스가 헤르난의 귓가에 속삭였다.
귓불을 아프지 않게 깨물어 오는 칼릭스에게 낯섦을 느끼면서도 헤르난은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헤르난이 하는 키스만큼이나 허술한 몸놀림이었다.
헤르난의 손끝이 칼릭스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만져진 건 머리카락인데, 온몸이 간지러워졌다. 칼릭스는 다시 헤르난에게 입을 맞췄다. 그를 꽁꽁 감싸고 있는 옷가지를 풀어 헤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
〈남작께서 다른 사람과, 특히 괜찮은 남자와 함께 있는 걸 내버려 두질 못하시던데요. 항상.〉
루체 세이어의 말이 맞았다.
헤르난이 자신이 아닌 누군가와 이렇게 입을 맞춘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새빨갛게 자라났다. 존재도 하지 않는 그 상대를, 헤르난이 다신 볼 수 없는 곳으로 보내 주고 싶었다. 기왕이면 바다 아래가 괜찮겠지.
헤르난의 어설픈 입맞춤을 아는 것도, 그보다 더한 것을 아는 것도 오직 칼릭스 히페리온 한 사람만이어야 했다.
이런 유치하고 추한 질투를 하게 만드는 감정이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세간에선 이런 마음을 사랑이라고 할 것이다.
허무한 사실이 칼릭스의 앞에 놓였다. 칼릭스는 몇 번이고 반복해 스스로를 크게 비웃어야 했다.
‘……내게 널 사랑할 자격이 있을까?’
헤르난과 입을 맞추며, 칼릭스는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품에 갇힌 남자를 놓고 싶진 않았다.
스칼라의 짧은 겨울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