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겨울이 있던 자리에Ⅰ
짧은 겨울이 지나 스칼라는 다시 본래의 온도를 되찾았다.
바로 그 따스한 봄에, 니콜라와 이안의 아이가 태어났다. 니콜라의 붉은 머리카락과 이안의 청색 눈동자를 사이좋게 물려받은 예쁜 딸이었다.
니콜라와 아이가 묵고 있는 방엔 아이의 아버지인 이안과 호위 기사 격인 레온, 남작성의 하녀장인 밀라와 치료 마법사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방문이 막혔다.
하지만 니콜라는 치료 마법사 몰래 스칼라 남작 부부를 그가 머무는 방으로 불러들이곤 했다. 매일 보는 얼굴들이 거기서 거기니, 지루해 죽을 것 같다는 연유에서였다. 헤르난은 그러면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결국 니콜라의 부탁에 못 이겨 그의 요청을 들어줬다.
그리하여 니콜라는 이틀에 한 번 친절한 남작과 성격 나쁜 칼릭스 히페리온을 마주하고 차 한잔을 나눌 수 있게 됐다.
사실, 칼릭스까지 만날 생각은 굳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웃는 얼굴을 하고 부득부득 헤르난을 쫓아와 어쩔 수 없이 반겨야 했다.
니콜라는 자신의 또래인 칼릭스와는 어느 순간부터 데면데면해졌다. 웃는 얼굴로 내숭을 떨던 칼릭스가 본인의 대단한 성격이며 경계심을 고스란히 드러내기 시작한 탓이기도 했고, 니콜라가 칼릭스를 헤르난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헤르난은 자신의 마음이 아픈지도 모르는 것 같지만-미운 놈으로 규정해 버린 탓이기도 했다.
그래도 칼릭스의 방문이 영 나쁘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니콜라는 자신의 딸 닉스의 남자 보는 눈을 저 하늘 끝까지 높여 주고 싶었다.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 칼릭스의 얼굴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요새 칼릭스를 보고 있자면 참 재밌었다. 정확히 말하면 헤르난과 함께 있는 칼릭스를 보는 게 재밌었다.
칼릭스는 니콜라가 처음 스칼라 남작성에 발을 디딘 첫날부터, 배우자인 헤르난에게 유쾌하지 못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걸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칼릭스는 헤르난의 모든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굴었고 딱 그만큼 그를 괴롭히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굴었다.
하지만 동시에 헤르난이 마치 언제든 불면 날아갈 민들레 홀씨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의 옆에 묶어 두려고 했다. 헤르난이 보이지 않으면 주인 잃은 개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웃긴 건, 날이 가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졌다는 거다. 헤르난이 있는 곳엔 언제나 칼릭스가 있을 정도였다.
니콜라는 칼릭스가 이중인격이라도 되는 건가 고민해야 했다. 싫으면 얼굴을 안 보고 살면 되는데, 굳이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사람을 괴롭히는 듯 아끼는 듯 헷갈리게 구는 칼릭스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헤르난이 칼릭스를 억지로 배우자 자리에 앉힌 건 잘못된 일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죄인을 넘어 거의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형수라도 된 것처럼 주눅이 들어 있는 헤르난의 모습이 니콜라는 안타까웠다. 자신의 사촌들을 소개해 주고 싶다며 가볍게 내놨던 말도 사실 진심이었다.
니콜라는 다정한 헤르난이 보답받지 못하는 마음을 붙잡고 사는 게 아까웠었다. 조금 그늘이 져서 그렇지 정말 매력 있는,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한 그의 얼굴도 아까웠다.
이 세상엔 헤르난이 다리를 저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다 못해 애틋하게 여겨 줄 사람이 있을 거라고 니콜라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제가 헤르난에게 사촌들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을 때의 칼릭스의 얼굴이 아주 가관이었다. 뒤늦은 성장기를 맞아 키며 체격이 훌쩍 커진 대단한 미남자는 태교에 좋지 않을 게 분명한 무서운 얼굴을 하고 니콜라를 노려봤었다. 무언의 경고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칼릭스는 이따금 그렇게 나이에 맞지도 않는 위압적인 얼굴을 할 때가 있었다. 특히 레온이 헤르난과 마주 보고 웃기라도 하면 눈에선 불꽃이 튀었다. 대장간의 화로도 그렇게 격렬한 불꽃은 내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겨울이 오면서부터 칼릭스는 누가 남작에게 추근거리기라도 할까 전전긍긍하며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만약 이안이 칼릭스처럼 굴었다면 니콜라는 주먹으로 뒤통수를 한 대 쥐어박았을 것이다.
그런데 사냥 대회에 다녀온 뒤로, 남작 부부 사이의 양상이 변했다.
그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다만, 헤르난의 얼굴에 남은 상처와 지쳐 보이는 얼굴을 보고 단순한 사고가 일어난 건 아닌가 보다 추측할 뿐이었다.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니콜라뿐 아니라 연애라고는 해 본 적도, 근처에 가 본 적도 없는 레온조차 남작 부부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알아챌 정도였다.
〈와, 니콜라! 두 분이 화해했나 봐!〉
도통 생각이 없는 이안 역시 그렇게 말했다.
여전히 칼릭스가 헤르난을 잡아먹을 듯 굴기는 했다. 하지만 예전과는 조금 의미가 달랐다. 지금의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그보다 더 은밀한…… 그래, 대충 발정 난 신사처럼 굴었다.
‘오늘도 눈이 돌아 있네.’
달콤한 차를 목 뒤로 넘기며 니콜라는 생각했다.
칼릭스는 니콜라가 내놓은 질문에 느릿느릿 답을 내어 주는 헤르난과 가깝게 붙어 앉아 있었다. 그는 헤르난의 이마 위로 내려온 까만 머리카락 한 올부터 가지런히 잘생긴 눈썹, 날카로운 눈매와 벌어졌다 닫히는 얇은 입술을 눈으로 샅샅이 훑고 있었는데, 자신의 눈에 스민 정염을 감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욕망이 드글드글 끓는다는 말을 쓰기에 부족함이 없을 시선이었다. 문제는 칼릭스 본인은 지금 자신의 눈이 얼마나 맛이 가 있는지를 모르는 눈치라는 데 있었다.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건 헤르난 역시 마찬가지였다.
……뒤늦은 첫사랑인가? 성장이 늦은 것처럼 사랑을 자각하는 것도 늦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칼릭스가 헤르난에게 저렇게 미성숙한 15살 어린애처럼 구는 게 이해됐다.
니콜라는 저 첫사랑의 결말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가 없다는 게 아쉬웠다. 아이를 무사히 낳았다는 건 스칼라를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였으니 말이다. 아이 소식을 두 집안 모두에게 공평히 전해 두었으니 이제 어떤 식으로든 답이 돌아올 것이다.
“스칼라에 자주 놀러 와도 될까요?”
빤히 남작 부부를 바라보던 니콜라가 테이블 위를 오가는 주제와는 전혀 맞지 않는 물음을 내놨다.
“……네. 그럼요.”
눈을 깜빡이며 물어 오는 니콜라에게 헤르난은 미소를 지어 줬다. 어쩐지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늦게 답을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마, 옆에서 절 노려보고 있는 칼릭스 때문일 것이다.
싱긋 웃어 보인 니콜라가 마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젠간 남작 부부가 세상 밖에 내놓을지도 모를, 그 성별이 무엇이건 얼굴 하나는 아주 잘날 게 분명한 자식과 자신의 어여쁜 딸 닉스가 손에 손을 잡고 예식장에 들어서는 그림을 그려 봤다.
* * *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 아래에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가 엎드려 있었다.
깊은 잠을 자는 듯 고요한 바다를 보고 있자니 머릿속을 떠다니던 뾰족한 생각들이 조금씩 둥글어져 가는 것만 같았다. 요즘 들어 이상하게 다정해진 칼릭스를 향한 두려움과 고민이 말도 안 되게 밝은 방향으로 선회를 하려 했다.
칼릭스가 다정하게 구는 건, 저를 괴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닐지도 몰랐다. 그저 칼릭스는 너무 행복한 거다. 그래서 저에게도 다정해진 것이다. 입을 맞추는 것도 저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헤르난은 칼릭스를 대신해 스스로를 비웃어야 했다. 자꾸만 칼릭스의 행동을 왜곡하려 드는 자신이 한심했다. 항상 최악만을 생각하고 살아야 했다. 뭘 기대해서도 바라서도 안 됐다.
차라리 잘해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직 남작성의 후원 구석에 난 언덕길을 통해서만 올 수 있는 작은 해변에 앉아 헤르난은 생각했다. 그의 어깨 위에 칼릭스가 챙겨 온 따스한 모포가 둘러져 있었다.
이 조그맣고 비밀스러운 해변으로 헤르난을 이끌고 온 건 칼릭스였다. 네가 없이는 불안해서 아무 데도 못 간다고 졸라 대니, 결국 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리가 불편하다고 해서 내려가지 못할 길도 아닌데, 칼릭스는 헤르난을 거의 안아 들다시피 해서 해변까지 왔다.
헤르난은 눈치가 없는 편이었지만 아예 바보는 아니었다. 칼릭스의 손길은 원수를 바다에 수장하기 위해 끌고 가는 복수자가 아니라 에스코트를 하는 신사에 가까웠다.
칼릭스는 헤르난의 마음을 붕 뜨게 만들고 있었다. 헤르난은 자신의 마음이 가장 높이 떠올랐을 때 진창에 처박혀 버리게 될 것만 같아 무서웠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다정함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최악의 최악만을 상상하면서도, 그 최악을 계속해 되뇌면서도, 헤르난은 바다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칼릭스가 온다.
투명한 물 위에 연한 남색 잉크를 떨어뜨린 것 같은 아름다운 바다도, 청명한 하늘도, 환한 햇살도, 헤르난의 눈에는 모두 칼릭스를 더욱 빛나게 해 주는 배경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뭘 그렇게 멍하니 봐? 너무 잘생겨서?”
어느새 지척에 선 칼릭스가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헤르난에게 물어 왔다. 바다를 유영하고 돌아온 남자의 백금색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뚝, 뚝 떨어졌다.
내내 느껴야 했던 불안과는 별개로, 이렇게 햇살 아래에서 반짝이고 있는 칼릭스와 마주하니 기분이 좋았다. 헤르난은 품 안에 끌어안고 있던 수건을 칼릭스에게 건넸다. 수건을 쥔 헤르난의 손을 감쌌다 떨어지는 칼릭스의 손에 물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네가 안고 있던 거라 그런가? 엄청 따뜻해.”
칼릭스는 가볍게 웃었다. 그의 젖은 머리칼에 수건이 스칠 때마다 방울져 떨어지는 물방울이, 헤르난의 눈에는 꼭 진주 따위의 보석처럼 보였다.
날은 누군가에겐 조금 덥다 싶을 정도로 따뜻했지만 수온은 어떨지 몰랐다. 저렇게 헐벗은 채로 있다가는 감기에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르난은 황급히 자신이 두르고 있던 모포를 칼릭스에게 건넸다.
“됐어.”
모포를 받아 든 칼릭스는 몸을 숙여 헤르난의 어깨 위에 다시 그것을 둘러 줬다.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모포를 바라보던 칼릭스가 대뜸 헤르난의 앞에 앉아 버렸다. 왜 여기까지 와서 바다를 등지고 앉을까.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한 칼릭스의 시선에 어색한 미소만이 지어졌다.
“손님들이 돌아간 후에…… 스칼라에 루체를 초대해 보세요. 이 해변 역시 마테 호수만큼 좋아할 겁니다. 예전과 같다면요.”
도통 말이 없는 칼릭스의 눈 맞춤을 견디다 못한 헤르난이 먼저 말을 내놨다.
“그래?”
그렇게 묻는 칼릭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네. 물론, 굳이 이 해변이 아니더라도…… 어디에 있건 칼릭스 님과 함께면 뭐든 좋게만 느껴질 겁니다.”
“……너도 그랬어?”
갑작스러운 물음을 들은 헤르난의 눈이 다급히 칼릭스의 얼굴을 살폈다. 왜인지 표정을 읽기가 힘들었다.
“나랑 있으면, 어디에 있건 좋았어?”
칼릭스는 지금, 그가 긴 시간에 걸쳐 진저리쳐 왔던 헤르난 말론의 마음을 입에 올리고 있었다. 헤르난은 당혹감을 느끼며 고개를 떨궜다. 루체와 칼릭스의 만남을 입에 올린 게 잘못이었던 걸까? 하지만 이전에도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대답 안 해 줄 거야?”
답을 들어야겠다는 듯 다시 한번 물어 오는 칼릭스를 향해 헤르난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답은, ‘네. 좋았습니다.’였다.
“그랬구나.”
반가운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밝아진 칼릭스가 짤막한 말을 내놨다. 헤르난은 그런 칼릭스의 반응이 얼떨떨해 눈만 깜빡여야 했다.
이어, 손바닥에 묻은 모래알을 털어 내는 소리가 침묵 사이사이에 거칠게 박혔다.
“……전쟁이 일어나고 출정해 전국을 떠돌던 때에, 스칼라 같은 해안 도시에 머물다 기습을 받은 적이 있어. 정말 간신히 살아남았지. 전투가 끝났을 땐, 다들 일어설 기운도 없어서 한참을 모래 위에 드러누워 있어야 했어.”
다시 입을 연 칼릭스가 말을 이어 갔다.
“햇살 때문에 눈이 부셔서 제대로 쉬진 못했어. 누운 채로 그 짜증 나는 빛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까 바다가 보이더라. 그런데 웃긴 게, 바다를 보니까 네가 생각나는 거야. 아, 헤르난이 이런 바다 옆에 살고 있지. 내가 있던 곳은 서쪽, 그것도 저 위 북부였는데…… 왜 동쪽에 있는 스칼라 생각을 했는지 몰라.”
“…….”
“미워 죽겠는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아는 데도 그랬어.”
고요한 바다에서 느리게 밀려 나온 파도가 모래 위를 잠시 머물다가 바다의 품으로 되돌아가길 반복했다. 그 만남과 작별의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채웠다.
“헤르난.”
“네.”
“고민이 너무 많았는데, 이제 다 해결됐어.”
“……축하드립니다.”
헤르난은 별안간 방향을 튼 이야기를 앞에 두고 황망한 얼굴을 했다.
“꼭 해야 할 일을 찾았어. 너와 함께 하고 싶은 일이야. 그런데 그 전에…… 헤르난 너한테 해야 할 말이 있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칼릭스는 말을 전했다.
헤르난의 마음이 무어라 설명할 길 없이 세차게 흔들리며 부풀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잠시 후, 칼릭스의 말 한마디에 짓밟혀 형체를 알 수 없는 곤죽처럼 변했다.
“나, 루체 세이어를 사랑할 생각 없어.”
다른 곳을 향하려 하는 헤르난의 시선을 제게 돌려놓고 칼릭스는 말했다. 이로 말할 수 없이 침착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고요 한편에 후련함과 기쁨, 걱정, 기대 따위가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도대체 칼릭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 헤르난은 한참이나 눈만 깜빡여야 했다.
“확실히 말해 줘야 알 것 같아서.”
“…….”
“그 애랑 만나지 않을 거야. 마음이 가지 않으니까. ……사랑하지 않으니까.”
세찬 바닷바람이 칼릭스의 단호한 얼굴에서 물기를 앗아 갔다.
“……저 때문입니까?”
“왜 그렇게 생각해. 그런 거 아냐.”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어 오는 헤르난에게 칼릭스는 급히 답했다. 무언가 숨기는 게 있어 보였다.
헤르난은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칼릭스는 아니라고 말하며 딴소리를 하지만, 헤르난은 믿지 않았다. 칼릭스가 저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입에 담는 이유가 헤르난 말론이 아니라면 뭐겠는가. 여러 가지 생각이 헤르난을 뒤흔들었다.
말문이 막혔다.
시험을 하는 걸까? 그렇다면 칼릭스가 원하는 답은 침묵이 아닐 것이다. 그럼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칼릭스가 제 진심을 알아줄까.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헤르난.”
곧 쓰러질 사람처럼 얼굴에 핏기가 사라진 헤르난을 마주한 칼릭스의 표정이 굳었다. 칼릭스는 조심히 헤르난의 이름을 불러 봤다.
잠시 가라앉았던 헤르난의 마음은 칼릭스를 보자 다시 뒤집혔다.
“사랑하지 않는다니,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떨리는 목소리만을 간신히 다잡은 헤르난이 말했다.
“정말…… 말도 안 됩니다.”
칼릭스는 틀렸다. 저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면서, 이런 쉬운 문제를 잘못 풀어 버렸다. 어떻게든 틀린 걸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이, 칼릭스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체를 사랑하시잖아요.”
“……내가 아는 루체는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
“설령 내가 알던 그 애가 여기 나타난다고 한들, 사랑할 생각 없어.”
그래, 나는 꿈을 꾸고 있구나. 꿈이 아니라면 칼릭스가 저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헤르난의 심장이 쿵, 쿵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디아만테의 감옥에 있을 때처럼, 별안간 온몸이 아프다며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 댔다. 말들에게 질질 끌려가는 바퀴 빠진 마차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 애는 루체가 맞습니다.”
헤르난의 목소리가 커졌다. 지금 그가 느끼는 초조함과 불안, 당혹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거친 음성이었다.
“잘 몰라서, 그래서, 도련님이 그런 생각을 하시는 겁니다. 도련님, 도련님은 시간을 되돌아왔을 뿐입니다. 모든 게 그대로…… 아니, 겉모습은, 상황은 변했어도, 루체는, 사람들은 다 당신이 아는 그대롭니다.”
칼릭스의 팔을 붙잡으며 헤르난은 말을 이었다.
“나는, 전, 그저 하나밖에 안 바랍니다. 도련님이 루체와 행복한 거, 그거면 되는데 왜, 왜, 왜 그런 말을 하세요!”
“헤르난.”
“더는 바라는 게 없는데, 도대체 왜…… 루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 겁니까.”
잠시 흐려졌던 헤르난의 시야에 칼릭스의 얼굴이 담겼다. 낯이 잔뜩 굳어 있는 칼릭스가, 그 얼굴이, 그 눈이, 조금도 행복해 보이질 않았다.
헤르난은 절망을 느꼈다.
“이번에도…… 제가 다 망친 건가요?”
힘없는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칼릭스를 붙잡았던 헤르난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어쩌지. 이젠…… 다시 살아날 수도 없는데.”
마음 둘 곳 없는 긴 침묵이 헤르난의 어깨를 짓눌렀다.
“아뇨. 아니에요. 부탁해 보겠습니다, 빌어 보겠습니다.”
“…….”
“제발 한 번만 더 살려 달라고 말을 하면…… 들어줄지도 몰라요…….”
중얼중얼 말을 늘어놓던 헤르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당황한 칼릭스를 뒤로하고 바다로 향했다. 망가진 왼쪽 다리가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위로 질질 끌렸다.
정신을 차린 칼릭스가 헤르난의 뒤를 쫓았다.
“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칼릭스가 헤르난을 붙잡았다. 저 멀리에서 밀려온 파도의 잔해가 해변에 선 두 사람의 발을 적셨다가 달아났다.
“네 말…… 정말 이상하게 들리는 거 알아?”
무거운 적막이 두 사람 사이로 내려앉았다. 그 괴괴한 시간의 가장 끝에 다다라서야, 헤르난은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온몸에 피가 다 빠져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낯이 창백했다.
“이상하죠. 네. 저도 믿기질 않습니다. 내가 당신의 행복을 망쳐 놓은 게…… 벌써 다섯 번째라니.”
헤르난은 웃었다. 죽음 뒤, 가장 어두운 공간에서 길을 헤맬 때처럼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다섯 번이라는 게, 무슨 뜻이야?”
“그러게요.”
“…….”
“어쩌다…… 다섯 번이나, 이렇게 됐지…….”
“말해 봐. 뭐가 됐건 상관없으니까, 해 줘.”
칼릭스는 언제든 다시 바다에 뛰어들 것 같은 남자에게 마구잡이로 속삭였다. 반쯤 정신을 놓은 남자를 붙잡은 두 손이 떨리고 있었다.
“말, 말을…… 뭘 해야…….”
헤르난과 칼릭스의 시선이 부딪쳤다. 순간 새하얗게 변했던 헤르난의 세상에, 흐릿하게나마 칼릭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역시 결국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헤르난은 덜컥 겁이 났다. 자신을 이 망가진 세상에 혼자 남겨 두고, 칼릭스가, 처음으로 제 죽음을 알아 준 남자가 사라질까 봐 무서웠다. 바다에 뛰어들어 죽으려고 했던 주제에, 칼릭스의 인생에서 사라지겠노라 마음먹었던 주제에, 두려움을 느꼈다.
“기억났습니다.”
붉어진 눈을 하고 헤르난은 다시 웃어 보였다. 그는 언뜻 비굴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을 하고 자신을 붙들고 있는 칼릭스의 팔을 간신히 붙잡았다.
칼릭스가 원하는 답을 줘야 했다.
헤르난은 말을 이어 나갔다. 공황 상태에 빠져 되는대로 지껄여 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앞뒤가 맞질 않는 기억을 그저 토해 내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도 말을 멈추기 힘들었다.
“전쟁이 끝나고…… 공을 세우고 돌아온 도련님이, 루체를 되찾으려고 절 찾아왔습니다.”
“…….”
“난, 뭘 했냐면…… 그냥 모든 걸 망칠 심산으로, 최악의 인간으로나마…… 당신의 기억 속에 남아 보려고……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내 우스운 도발에 넘어가서 결투를 승낙한, 검을 든 당신이…… 훌쩍 커 버린 도련님이 정말 멋있어 보인다는 생각을 했어요. 당신이 내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을 때…… 난 기뻤습니다. 다신 만나지 못하는 것보단 당신의 손에 죽는 게 나았으니까. ……분명, 그랬던 것 같습니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여전히 칼릭스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당황한 헤르난의 손이 칼릭스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갈 곳을 잃었던 헤르난의 두 손은 아무것도 보지 않겠다는 듯 자기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난, 죽었습니다. 분명, 죽었는데…… 왜인지 되살아나서…… 도련님께 루체를 빼앗았을 때로……. 나는……. 왜 다시 죽었지?”
오직 바람 소리만이 귓가에 닿아왔다. 어쩐지 비웃음처럼 들리는 그 소리를 곱씹으며 헤르난은 계속해 말을 중얼거렸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함정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나를 함정에 빠뜨린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요. 하지만 나 같은 인간에게 잘 어울리는 최후였으니 그 이유가 뭐건 상관없겠죠. 루체와 당신이 다시 만나는 걸 봤으면 미련이 없었을 텐데…… 이유도 모르고 형장에서 죽어 버린 게 억울해서…… 나는 또 살아났어요.”
“…….”
“그, 그래도 다음엔 루체를 지키다 죽었습니다. 루체가 다치거나 죽으면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도련님이 슬플 테니까…… 마음 아플 테니까…… 그냥, 내가 대신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엔…….”
헤르난의 입가에 뾰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반사적으로 지어 보인 것이었다.
“도련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헤르난.”
“그래도, 그 죽음 역시 도련님이 주신 거라 괜찮았습니다. 주신 독주가…… 검에 찔렸을 때처럼…… 목이 잘렸을 때처럼 아프지도 않았어요.”
당혹감에 젖어 차갑게 굳어 있던 칼릭스의 얼굴에 균열이 갔다. 헤르난의 말을 받아 든 그의 마음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도련님은 흑마법이 저를 살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몇 번이고 나를 살려 낸 건…… 마법사가 아니라 신입니다.”
신. 그 말을 입에 담으며 헤르난은 얼굴을 찌푸렸다.
“처음, 그 반짝이던 흰 검에 심장이 꿰뚫렸을 때, 그때 끝냈어야 했는데…… 좋아하는 사람 손에 죽는 걸, 당신의 기억 한구석에나마 남을 수 있다는 걸 영광으로 알고 그대로 죽어 버렸어야 했는데. 왜 욕심을 부려서, 멈추질 못하고 여기까지…….”
헤르난의 음울한 목소리가 바다가 움직이는 소리 사이로 흩어졌다. 거센 바람이 그의 머리를 헝클었다.
어쩌다 이런 얘기를 시작했는지도 가늠이 안 됐다. 두서없는 이야기의 끝에 남은 건, 그저 자괴감뿐이었다.
“그래도 이번엔, 잘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를 살렸다는 신이 처음으로 제 앞에 나타났고……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했어요. 도련님이, 루체와 만났고, 모든 게 잘되어 간다고 생각했는데 왜, 왜 이렇게 된 걸까요.”
“…….”
“죄송해요, 도련님.”
긴 침묵의 끝에서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의 얼굴을 가린 손만큼이나 메마른 목소리였다.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습니다.”
헤르난은 말 그대로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긴 시간을 쌓아만 뒀던 작고 큰 서러움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헤르난……. 헤르난.”
이어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칼릭스가 헤르난을 끌어안았다. 헤르난의 몸을 감싸고 있던 모포가 떨어져 나가 해변의 모래 위를 나뒹굴었다.
“나, 네가 하는 말이 뭔지 제대로 정리가 안 돼서 머리가 아파. 너무 끔찍하고 싫어……. 그런데 그 엉망진창인 얘기보다, 지금 당장은 네가…… 꼭 죽고 싶어 하는 사람 같다는 게, 그게 더 미칠 것 같아. 왜 그런 얼굴을 해. 왜 그런 말을 해. 그러지 마. 어?”
“…….”
“내가 루체를 만나면 돼? 그러면 네가…….”
칼릭스의 말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헤르난이 발작하듯 쏟아 낸 말들이 칼릭스의 안에서 정리되어 갔다.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던 길지 않은 말 몇 마디 속에 숨은 이야기의 전부를 알 순 없었다. 헤르난에게 물어도 답을 듣지 못할 걸 알았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드러난 표면만 훔쳐봐도 충분히 개같은 이야기였다. 도무지 믿기 힘든 말이었으나 칼릭스는 끝내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죽을 듯 슬픈 음성으로 내뱉는 말이, 어떻게 거짓일 수 있겠는가.
칼릭스는 헤르난이 고백한 그의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자신과 함께했던 네 번째 삶을 떠올려 봤다. 독주. 가장 마지막까지 자신은 몰랐던 죽음을 입에 올리던 목소리를 되짚어 봤다.
칼릭스는 루체와의 결혼 일주년에 다시 눈을 뜨는, 축복이 아닌 저주의 덫에 발목을 잡힌 헤르난의 삶을 반추했다.
헤르난 말론에게 있어 칼릭스 히페리온은 유일한 사랑이 아니라, 갚아야 할 죄일지도 몰랐다. 그 사실이 칼릭스의 세상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스칼라의 여름에서 다시 눈을 뜨기 전, 칼릭스를 찾아왔던 두려움이 고개를 들이밀고 그를 비웃었다. 헤르난이 죽던 날의 밤, 꺼져 가던 헤르난의 불씨가 칼릭스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불안을 숨겨야 했다. 저의 불안이 헤르난을 더 큰 절망에 빠지게 할 것이다. 칼릭스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칼릭스는 헤르난을 위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쪽을 택했다. 바람에 고꾸라진 들풀처럼 입가가 떨렸다.
긴 침묵이 끌어안은 두 사람 위에 또 한 번 내려앉았다. 하지만 정적이 더 길어지기 전에 칼릭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싫어.”
헤르난에게 빈틈도 없이 붙어 있던 칼릭스의 몸이 조금 떨어져 나갔다.
칼릭스는 여전히 얼굴을 가리고 있는 헤르난의 두 손을 붙잡았다.
천천히 손을 떼어 내자, 눈물에 젖은 얼굴이 드러났다. 헤르난은 죄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칼릭스는 알지 못할 공포와 허무가 그를 사로잡은 채였다.
칼릭스의 손이 헤르난의 뺨을 쥐었다. 바닷물을 헤치며 차가워진 손이 잔뜩 열이 오른 살과 맞닿아 서로의 온도를 나눴다.
텅 빈 눈동자에 오직 자신만이 가득 차길 바라며 칼릭스는 헤르난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의 어두운 눈동자에 빛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칼릭스는 헤르난의 뺨에, 눈가에 입을 맞추고 스스로도 그 뜻을 모를 말들을 계속해 귓가에 속삭였다. 너무 커다란 감정의 무게에 짓눌려 굳어 버린 몸과 힘겨운 숨은 불안과 함께 숨겼다.
헤르난의 머릿속을 까맣게 태우던 우울한 분노가 차츰 가라앉았다. 발작이 잦아들었다.
“헤르난.”
칼릭스는 헤르난의 이름을 몇 번이고 입에 담았다. 언제나처럼 듣기 좋은 목소리였으나 그 안에 어두운 초조가 담겨 있었다.
헤르난이 칼릭스에게 시선을 건네고 나서야 그는 헤르난의 이름을 부르는 걸 멈췄다.
“내가 이러는 건, 다 나 때문이야. 내가 잘못해서, 내가 너무 많이 달라져서 그래.”
헤르난의 뺨을 적신 눈물을 닦아 주며 칼릭스는 속삭였다.
“나는 너무 오래…… 과거에 붙잡혀 있었어. 나한테 중요한 게 뭔지도 모르고 등신처럼, 헐겁게 쌓인 시간만 끌어안고 살았어.”
이어 말 한마디가 덧붙었다.
“이제 앞으로 나아갈래.”
“…….”
“같이 가자, 헤르난.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대로…… 가지 못했던 길로 가 보는 거야.”
모른 척 기대고 싶게 만드는 목소리가 그 누구도 아닌 헤르난 말론에게 닿았다. 계속해 흐르는 눈물 덕에 엉망진창으로 변했을 얼굴을 쓸어 주는 손 역시 더없이 다정했다. 꼭, 먼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너한테 그 말을 하고 싶었어.”
칼릭스의 떨림이 헤르난에게 전해졌다.
“……내가 행복해지길 바란다고 했잖아.”
꺼져 가는 불씨처럼 힘없이 흔들리는 헤르난을 붙잡고 칼릭스는 협박을 하기로 했다.
“나는 여기서도 행복할 수 있어. 루체 없이도 행복하게, 네가 날 도와주면, 그렇게 만들어 주면 되잖아. 응?”
“…….”
“뭘 해야 네가 만족할 만한 행복을 보여 줄 수 있을지 그건 모르겠어. 그래도 네가 있으면 어떻게든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아.”
헤르난은 멍하니 칼릭스를 올려다봤다. 흐릿하게만 보이던 칼릭스의 얼굴이 어느새 선명해져 있었다.
행복. 그 사랑스러운 단어가 헤르난의 입 속을 굴렀다.
루체가 없이 행복한 칼릭스의 모습이 헤르난의 머릿속에는 잘 그려지지 않았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상상을 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정작 말을 내뱉은 칼릭스는 루체가 없어도 행복이라는 걸 언제든 쟁취할 수 있다는 듯 자신만만해 보였다.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가라앉은 목소리로 헤르난은 간신히 답을 내놨다.
“싫어?”
“…….”
“그럼 어쩌겠어. 억지로 안아 들고서라도 같이 가야지.”
바다에 올 때처럼 말고, 진짜 안을 거야. 웃어 보인 칼릭스가 농담을 말했다. 다만 그 눈만은 긴장으로 굳어 있는 채였다.
헤르난은 한참 동안 칼릭스를 바라봤다.
〈같이 가자, 헤르난.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대로…… 가지 못했던 길로 가 보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칼릭스의 눈에선 진심이 느껴졌었다.
지친 헤르난은 그저 칼릭스에게 자신을 맡겨 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쓸렸다. 칼릭스는 어쩌면, 정말 새롭게 다다른 행복의 끝에서 저를 향해 예전처럼 웃어 줄지도 몰랐다. 먼 옛날에 그랬듯, 헤르난 말론을 믿을 수 있는 형처럼 친구처럼 대해 줄지도 몰랐다.
변한 상황도 달라진 칼릭스의 뒷면도 헤르난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두려웠다. 하지만 칼릭스가 고민의 끝에 답을 내놓은 것처럼 헤르난도 그에게 답을 내어 줘야 했다.
칼릭스의 행복이 루체가 아니라면 헤르난은 그걸 받아들여야 했다. 그가 나아가길 원한다면 축복해야 했다. 당장은 해내지 못하더라도, 해내야 했다.
헤르난은 말을 잊은 사람처럼 한참을 침묵했다. 칼릭스는 헤르난이 다시 저 바다로 걸어 들어갈까 봐, 제게서 도망이라도 갈까 봐 무서워 황급히 그를 끌어안았다. 칼릭스에게서 전해져 온 기대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떨림이 헤르난의 심장 부근까지 간질였다.
멈춰 선 두 사람을 얼마의 시간이 스쳐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꽤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헤르난은 다시 입을 열었다.
“행복을 찾으실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
칼릭스의 품 안에 갇혀 헤르난은 중얼거렸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칼릭스의 만면에 기쁨이 떠오르게 하기엔 충분했다.
헤르난을 품에 안고, 칼릭스는 소리 없이 울었다. 그 역시 헤르난에게 들켜서는 안 될 울음이었다.
헤르난은 다시 숨을 쉬었다. 곧, 그의 느릿한 시선이 칼릭스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바다에 닿았다. 그새 잠잠해진 바다가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