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겨울이 있던 자리에Ⅱ (9/21)

8. 겨울이 있던 자리에Ⅱ

루체 세이어는 편지를 썼다. 칼릭스가 아니라 스칼라 남작 헤르난 말론에게 보내는 세 번째 편지였다.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했던 첫 편지는, 편지라기보다는 남작에게 형을 대신해 바친 일종의 사과문과 같은 것이었다. 사냥 대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사과였다.

루체는 스칼라 남작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자신이 칼릭스를 잡아 둔 통에 그런 사달이 일어난 게 아닌가 싶어 미안했고, 권력 친화적인 형이 내놨던 부끄러운 말들과 대처 역시 미안했다.

그래서 루체는 최대한 솔직하게 그의 진심을 담아 편지를 써 내려갔다. 자신이 느낀 감정이 스칼라 남작에게 닿기를 바라며 말이다.

친절하게도, 편지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남작에게서 답장이 왔었다. 남작은 루체의 진심을 알아줬다. 그가 보내온 편지에 담긴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다정함이 묻어나 있었다. 심지어 남작은 자신이 받았을 충격을 걱정해 주기까지 했다.

스칼라 남작의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내내, 루체는 자신이 그에게 가졌던 반감에 약간의 창피함을 느꼈다. 배우자에게 흑심을 품었던 사람에게도 이렇게 다정하다니. 칼릭스가 의부증 걸린 남편처럼 남작을 싸고도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루체는 스칼라 남작의 편지에 다시 답을 했다. 그것이 두 번째 편지가 됐다.

답장을 보낸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사냥 대회 이후로 따로 연락을 한 적도 마주한 적도 없는 칼릭스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잘 지내는지 궁금한 건 아니었다. 그저 조금 걱정이 됐다. 칼릭스 히페리온 말고 스칼라 남작이.

사냥 대회의 밤에 봤던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가끔은 꿈에 나올 정도였다. 남작을 끌어안은 칼릭스와 눈이 마주쳤던 소름 끼치는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확실한 건, 그날 루체가 본 칼릭스는 그가 알던 어리고 잘생긴 친절한 남자와는 달랐다는 거였다. 루체의 천막에서 냉담하게 굴던 남자와도 달랐다. 호숫가에서 마주한 칼릭스는, 루체 세이어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루체는 남의 남자와 여자를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일을 크게 꺼리진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단단히 미쳐 있는 남자를 그 누군가에게서 뺏어 본 적은 없었다. 어차피 제가 무슨 짓을 한다고 한들 넘어오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루체는 칼릭스에게 남겨 두려고 했던 미련을 깨끗이 버렸다.

물론, 친구나 지인으로도 관계를 이어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칼릭스는 너무 무서웠다. 앞으로 저런 꼴을 보지 않으려면, 얽히지 않으려면, 주위에 연인도 배우자도 없는 사람만을 만나야겠다는 교훈을 느낄 정도였다. 루체의 가족이 환영할 법한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정상적인 연애관을 새롭게 다지기 시작한 루체는, 스칼라 남작의 두 번째 답장을 받아 들고 한참을 웃어야만 했다. 남작은 편지 내내, 혹시 칼릭스에게 마음이 남아 있다면 자신이 도와줄 수 있다는 말을 빙빙 돌려서 반복하고 있었다.

남작은 저와 칼릭스 사이에 무언가가 있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게 아닌가 싶었다. 어쩌다 그런 착각을 하게 된 건지…….

‘설마, 칼릭스 히페리온이 감당 안 돼서 나한테 팔아먹으려는 건가?’

루체는 남작에게 보내는 새로운 세 번째 편지에 자신은 칼릭스와 가까운 관계가 될 생각이 없다고, 그렇게 되지도 못할 거라고 확실히 못을 박았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쓸데없는 욕망은 빼고 말이다.

다음엔 편지를 통해 만나는 대신, 얼굴을 마주 보고 얘기해 봐요.

건강과 관련한 작별의 말을 마지막으로 긴 답장을 마무리한 루체가 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 그렇듯, 제국의 수도인 디아만테는 부산스러웠다. 하지만 요즘 들어선 부산스러운 정도를 넘어 엉망이 됐다. 기사들과 용병들, 무기를 실은 짐마차가 종일 바쁘게 수도 안팎을 오고 갔다. 사람이 만들어 내는 먼지와 소음이 불안의 덩치를 키워 내고 있으니 신경을 쓰지 않으려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흑마법사들이 다시 전쟁을 일으킬 거란 소문이 그냥 소문이 아닌 줄은 진작 알았지만, 생각보다 전쟁의 규모가 커지려는 모양이었다.

패전한 지 3년 만에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니. 이 세상을 마계화하겠다는 뭣 같은 뜻을 위해 참 부지런히도 사는구나 싶었다. 그들의 성실함과 추진력이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다시 얼굴을 보는 건 전쟁이 끝난 뒤에나 가능하겠네.’

허풍이 되어 버릴 것 같은 자신의 세 번째 편지를 생각하며 루체는 한숨을 쉬었다.

* * *

헤르난은 칼릭스를 피하고 있었다. 아니, 어딜 가든 그의 뒤를 쫓아오는 칼릭스를 피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칼릭스를 마주하고 있기가 힘들어 후원의 가장 외진 곳까지 몰래 도망쳐 나온 헤르난의 뒤를, 그 마주하기 힘든 상대가 졸졸 따르고 있었다. 헤르난의 보폭에 맞춰 걸어서였다.

헤르난은 자신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걷고 있는 칼릭스가 신경 쓰였다. 모른 척하기도 힘든 존재감을 가진 덕에 더 그랬다.

원래라면, 헤르난은 이상하게 쭈뼛대는 칼릭스가 걱정돼 먼저 말을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칼릭스와 함께 해변에서 보냈던 시간을 아직 잊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도…….

“헤르난.”

헤르난. 헤르난. 몇 번이고 이렇게 이름을 불러 오면 답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십니까?”

멈춰 선 헤르난이 뒤돌아 칼릭스를 마주 봤다. 그러나 시선이 묘하게 칼릭스의 얼굴에서 벗어나 있었다. 눈을 마주치는 일이 여전히 힘든 탓이었다.

“아니.”

“…….”

“…….”

“그런데 왜 부르신 건지…….”

“얼굴, 보고 싶어서.”

슬쩍 눈치를 보던 칼릭스가 손을 뻗어 헤르난의 빈손을 붙잡았다. 순식간에, 더없이 단단하게 손이 얽혔다.

“손잡아도 돼?”

“……이미 잡으셨습니다.”

헤르난의 시선이 칼릭스에게 붙들려 있는 그의 손으로 내려갔다.

“내가 말보다 행동이 빨라.”

멋쩍다는 듯 웃으며 칼릭스는 답했다. 다시 눈이 마주친 건, 칼릭스의 웃음소리가 사그라든 후였다.

마주한 칼릭스의 새파란 눈이 긴장으로 울렁이고 있었다. 웃는 얼굴 역시 시선이 맞닿는 순간 어색하게 허물어져 버렸다.

자그마한 해변에서 긴 대화를 주고받았던 후로, 칼릭스는 이렇게 내내 헤르난에게 낯설게 굴고 있었다.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으나 마음이 불편했다.

헤르난은 해변에서 일어났던 일을 완전히 기억하진 못했다. 꼭 누군가 자신의 기억을 끄집어낸 뒤 투박하게 토막이라도 내놓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정신이 빠진 상태로 칼릭스에게 지난 몇 번의 삶을 떠벌렸던 것 정도는 확실히 기억났다. 그가 제게 나아감을, 행복을 말했던 것 역시 그랬다.

칼릭스는 그날 그가 듣게 된 이상한 이야기를 모조리 믿어 주는 것 같았다. 시간을 되돌아오는 일을 한 번 겪은 후라, 쉽게 믿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헤르난은 그가 살아온 지난 삶들이 칼릭스에게 혐오감만을 안겨 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헤르난이 예상했던 혐오 대신 미안함과 죄책감 따위를 마음에 담았다. 헤르난은 그것이 싫었다. 미안함을 느껴야 하는 건, 그의 행복을 망쳐 버린 것에 사과해야 하는 건 헤르난 자신이었다. 그저 원치 않는 사랑을 받아 주지 않았을 뿐인 칼릭스가 아니었다.

헤르난은 칼릭스가 차라리 예전처럼 제게 화를 냈으면, 미워했으면 했다. 그러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모른 척 잊어 주길 바랐다.

“……도련님.”

헤르난은 먼 옛날의 호칭을 입에 담았다.

“지난번에 제가 했던 말들은, 주정뱅이가 쏟아 낸 망상과 다름없으니 마음 쓰실 필요 없습니다.”

“…….”

“잊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을 쏟아 낸 건 저이면서, 칼릭스에게 잊어 줄 것을 바란다. 헤르난은 자신의 한심함에 대고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니. 난 거짓말로라도 잊어버리겠다는 말 못 해.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난, 그걸 잊으면 안 되잖아.”

“…….”

“네 마음이 불편하다면…… 그냥 모른 척을 할게.”

둘 사이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나는, 헤르난 네가 내가 했던 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모른 척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널 달래겠답시고 생각 없이 내뱉은 것도 가볍게 던진 것도 아니니까, 기억해 줘.”

어울리지 않게 머뭇대던 칼릭스가 다시 고개를 들어 헤르난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널 죽게 만들었다는 독주 같은 거 나는 몰라. 그게 뭔지 알았다면, 내가 지금 여기에 어떻게 있겠어.”

말이 이어졌다.

“너는 다 잊으라고 말하니까. 나한테 자세한 이야긴 해 주지 않을 걸 알아. 그래도, 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말하고 싶었어. 잘못한 게 그렇게 많은데…… 고작 그거 하나를 집어서 덜어 낸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겠지. 네 죽음은…… 내가 널 바로 옆에 두고 눈을 떼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나는, 독주 같은 거 모른다고 확실하게 말할래. ……너한테 조금이라도 덜 미움받고 싶어서 그래.”

칼릭스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헤르난에게 말을 전했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말속에서 진심을 읽어 냈다. 그렇다면…… 제프란이 가져다준 독주는 뭘까. 하지만 생각도 고민도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뚝, 뚝 끊어지기만 했다.

헤르난은 지쳐 있었다. 그는 이미 지나가 버린 죽음의 시간을 되짚는 것을 포기했다. 자신은 언제나처럼 죽음을 맞이했고, 한 번 더 살아났다. 제게 마지막 죽음을 선고한 것이 칼릭스가 아니라는 사실이 기쁜 건지, 슬픈 건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그럼에도 헤르난은 몇 번이고 칼릭스의 말을 곱씹어 봤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였다. 잘못한 게 많다니. 아닌데,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진 못하고, 헤르난은 그저 속으로 말을 중얼거렸다. 칼릭스와의 대화가 이쯤에서 끝나길 바라서였다.

답이 없는 헤르난을 대신하듯 후원의 새들이 울어 댔다. 괴팍한 노인의 역정을 닮은 이상한 소리였다. 그 울음이, 두 사람 사이에 세워졌던 적막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저따위로 우는 새도 있네. 칼릭스의 입가에 허탈한 웃음이 번졌다.

“……대공의 손님들이 항구 구경을 하고 싶다고 하던데. 우리도 따라가 볼까?”

“……네.”

칼릭스는 헤르난의 바람대로 말을 돌려 줬다. 화제를 돌리며 조금은 건방지게 웃어 보이는 칼릭스에게 헤르난은 짧은 답을 내어 줬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은 편치 않았고 칼릭스와 시선을 맞추는 것도 힘들었다. 하지만 칼릭스가 말했던 새로운 행복과 새로운 길을 찾는 일에 도움을 주려면 그를 따라 조금이라도 움직여야 했다.

헤르난은 눈을 딱 감고, 느리게나마 칼릭스를 뒤따라 보기로 했다. 모든 것은 그의 행복을 위해서였다.

익숙하게 헤르난을 부축해 오며, 칼릭스는 먼저 발을 내디뎠다. 칼릭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느린 걸음을 헤르난이 뒤따랐다.

* * *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칼릭스가 옆을 내려다봤다. 커튼이 쳐 있지 않은 창문 너머에서 들어온 달빛이 곤히 잠들어 있는 헤르난의 얼굴을 밝히고 있었다.

칼릭스는 몸을 숙여 헤르난이 숨을 쉬고 있는 걸 확인했다. 그와 같은 방을 쓰기 시작하면서 생긴 버릇이었다.

바다에 뛰어들려는 헤르난을 목도한 후로 그의 숨에 대한 불안과 집착이 더 심해졌다. 헤르난이 파리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걸 보면 그가 죽어 가던 때의, 아니, 죽었을 때의 모습이 생각나 도저히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도 헤르난이 숨을 쉬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면 마음이 가라앉았다.

칼릭스의 손이 헤르난의 이마 위에 흩어져 있는 머리칼에 닿았다. 자정의 밤하늘만큼이나 까만 머리카락이 칼릭스의 손 아래에서 흩어졌다.

“헤르난.”

낮은 목소리가 고요한 실내를 작게 울렸다. 당연하게도 잠이 든 남자에게선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칼릭스의 입술이 잠든 헤르난의 뺨에, 또 입술에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그 입맞춤의 끝에서 칼릭스는 웃었다. 스스로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옛날부터, 칼릭스는 육욕 가득한 인간들을 이해하질 못했다. 감정의 교류보다 몸을 섞는 일이 더 우선시 된다는 게 더럽고 지저분하게 느껴졌다. 번식을 목적으로 하는 짐승 간의 교미도 저러진 않겠다 싶었다.

그랬던 칼릭스는, 한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의 얼굴에 주먹을 꽂지 않기 위해 애를 쓰던 그는, 지금은 매일 헤르난에게 달려들어 입을 맞추려 들었다. 입을 맞춘다 뿐인가, 가끔은 더한 짓도 하고 싶어졌다.

지금껏 칼릭스는 자신이 헤르난을 향해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소유욕에서 온 것이라고 믿어 왔다. 하지만 그 믿음은 이미 의심으로 범벅되어 처분된 지 오래였다. 새로운 답을 찾아 버렸으니까.

“아주 볼썽사나운 사랑에 빠진 사람 같지?”

오랜 침묵이 지나간 뒤에야, 다시 말이 이어졌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너는 도망쳐 버릴 거야.”

헤르난의 머리카락을 괴롭히는 걸 그만둔 손끝이 그의 눈썹 위에 남은 흉터를 더듬었다. 유리 공예품을 만지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면서 울지도 몰라.”

깊은 잠에 빠진 남자의 지친 얼굴을 눈에 담으며 칼릭스는 말했다. 들어줄 이 없는 혼잣말이었다.

입을 다문 칼릭스는 헤르난을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 그가 보여 주는 작은 기척을, 살아 있다는 증거를 샅샅이 눈에 담았다.

내가, 평생을 지켜 줘야 할 남자.

문득 떠오른 생각을 입 안에서 곱씹어 봤다.

옛날, 저를 지켜 주던 헤르난과 지금 제 앞에 있는 헤르난은 다른 사람 같았다. 자신의 호위 기사는, 옛날의 헤르난은 매사에 불안감을 느끼던 유약한 자신과는 달랐다. 그는 단단한 사람이었다. 딱딱하다고 하기엔 부드러웠고 마냥 부드럽다기엔 그 품이 의지가 됐다.

어릴 땐 그런 헤르난이 부러웠다. 칼릭스는 헤르난처럼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닮고 싶은 그에게 웃는 법을, 말하는 법을, 듣는 법을 배웠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새롭게 터득하게 된 거였다.

그랬던 헤르난을 망친 건 칼릭스였다.

헤르난은 잔뜩 금이 간 낡은 도자기 인형처럼 변해 버렸다. 툭,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금이 간 자리에서 파편이 떨어져 나왔다. 손에 쥐기라도 하면 완전히 부서질 것 같아 두려웠다.

죄책감과 혼란에 발목을 붙잡힌 채로 칼릭스는 먼 기억 속을 한참이나 헤매야 했다.

하지만 헤르난의 입술 위에 손끝이 닿자 어두워졌던 머릿속이 다시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칼릭스의 굳어 있던 입매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중요한 건, 헤르난이 아직 저를 떠나지 않았다는 거였다. 떠나지 않은 게 아니라 떠나지 못하게 억지로 붙들어 둔 것에 가깝지만 상관없었다.

헤르난은 살아났다. 살아서, 이렇게 제 옆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망가져 부서지기 직전이라고 해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옆에 있었다.

“헤르난. 이렇게 못돼먹은 마음이, 정말 사랑일 수 있을까?”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속삭였다.

지금껏 그에게 했던 모든 말과 행동이, 저지른 일들이, 갚아야 할 죗값이 되어 칼릭스의 앞에 쌓이고 있었다. 헤르난이 발작처럼 늘어놓았던, 저는 모르는 아주 오랜 시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든 일은 칼릭스 히페리온이 스스로의 마음을 부정한 것에서 시작됐다. 그러니 제가 헤르난에게 지은 죄는 평생을 갚아도 마저 갚아 내지 못할지도 몰랐다.

……평생을 갚아야 할 죄. 평생이라는 말은 얼마나 끔찍한가, 그리고 얼마나 달콤한가?

칼릭스는 다시 한번 웃었다. 죄책감과 미안함, 기쁨과 애정이 한데 뒤엉켜 칼릭스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느릿하게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칼릭스는 헤르난이 겪은 그 모든 시간 역시 자신이 짊어져야 할 죄라고 생각했다. 지난 삶의 칼릭스 히페리온들이 헤르난이 죽은 옛 시간 속에 남아 죄를 곱씹고 있건 아예 사라져 버렸건, 알 바 없었다.

지금 헤르난의 옆에 있는 건 자신이었다. 그에게 죄를 갚아야 하는 건 저 한 사람이면 됐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청히 헤르난을 떠나보낸 다른 것들은 끼어들 수 없었다.

칼릭스는 헤르난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미안하니 놓아주겠다는 소리를 하기엔, 저는 너무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감옥에서 나온 헤르난을 데려다 백작성에 가둔 건, 그가 또 제게서 도망쳐 숨어 버릴 거라는 불안 때문이었다. 저의 애정과 증오를 동시에 뒤집어쓴 남자가, 나의 헤르난이, 자신이 볼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었다. 그 개 같은 일을 두 번씩이나 겪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등신 같은 짓이었다. 아무도 발 들이지 못할 곳에 가두는 게 아니라, 그 누구도 헤르난을 건들지 못하게 바로 옆에 두고 어디든 함께해야 했다. 호위 기사며 치료 마법사를 잔뜩 붙여 뒀어야 했다.

칼릭스는 후회했다. 하지만 헤르난을 손에 쥐었던 건, 헤르난의 다리를 망가뜨린 건, 후회하지 않았다. 그런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지금의 자신이 헤르난의 옆에 멀쩡한 기억을 갖고 붙어 있을 수 있는 거니까. 그건 칼릭스가 헤르난에게 느끼고 있는 미안함이나 죄책감과는 별개의 음습한 감정이었다.

나는…… 남은 평생 헤르난의 지팡이가 되어 줄 거다.

헤르난이 절대 잃어버릴 일 없는 지팡이가 될 것이다. 손에서 놓고 싶어도 놓지 못하는 존재가 될 거다. 칼릭스는 속으로 되뇌었다.

끔찍한 인간. 칼릭스는 스스로를 평가했다.

헤르난의 입술에서 칼릭스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칼릭스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잠이 든 헤르난에게 다시 입을 맞췄다. 새까만 머리칼 위에 백금색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흩어졌다. 그 짧은 입맞춤이 마음을 울렁이게 했다.

칼릭스 히페리온은 헤르난 말론을 사랑한다.

아주 뾰족하고 흉측한 데다, 도대체 언제 시작됐는지도 모를 정도로 퀴퀴하게 묵은 질척한 감정이었다. 오래된 감정들을 걷어 낸 후에야 알게 된 것이었다.

짧은 입맞춤이 끝남과 동시에 헤르난은 잠에서 깨어났다.

헤르난은 그의 위에 있는 남자를 올려다봤다. 흐릿하던 짙은 갈색 눈에 차츰 빛이 들어오는 광경을 칼릭스는 말없이 바라봤다.

완전히 잠에서 깬 헤르난은 칼릭스를 향해 놀란 기색을 내보였다. 헤르난이 눈치를 보게 만든 건, 시선을 피하게 만든 건 그 누구도 아닌 칼릭스 본인이었다. 그걸 아는 데도 헤르난의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목이 졸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을 쉬는 게 어려워졌다.

당장이라도 헤르난을 끌어안고 마음을 고백하고 싶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네가 날 싫어하든 좋아하든 난, 평생 네 옆에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헤르난의 귓가에 자신이 품은 어두운 감정을 속삭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헤르난은 믿지 않을 것이다. 큰 혼란에 빠질 거다. 루체와 만나지 않겠다고 하자 충격에 빠졌던 것처럼 마음이 깨져 버릴지도 몰랐다.

헤르난은 제게 그가 겪은 다섯 번의 불행을 벌벌 떨며 고백했다. 그 얘기를 들어 놓고, 나도 너를 사랑하게 됐노라 다짜고짜 소리칠 수 없었다.

칼릭스는 헤르난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가 과거를 헤매며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헤르난을 향해 옅은 미소만을 지어 보였다.

“……잠이 안 와.”

칼릭스의 말이 이어졌다.

“추워서 그런가 봐.”

더 가까이 몸을 기대며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속삭였다.

헤르난은 서대륙의 그 어느 지역보다 따스한 스칼라의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헛소릴 지껄이는 칼릭스의 품 안에 갇혔다.

눈을 깜빡이던 헤르난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그를 끌어안은 칼릭스의 등을 천천히 도닥여 줬다. 당장에라도 입을 맞추고 싶은 욕망을 누르며 칼릭스는 가만히 눈을 감아야 했다.

천천히 헤르난에게 제 마음을 속삭여야지. 너무 놀라지 않게, 너무 놀란 나머지 도망치지 않게 해야지.

어쩌면, 가장 마지막까지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말한다고 한들 끝내 거부당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괜찮았다. 헤르난의 옆에서 지금처럼 그를 지켜 주면 됐다. 함께하기만 해도 좋을 것이다.

칼릭스는 헤르난을 끌어안은 채로, 다시 웃어 보였다.

* * *

바로 어제, 니콜라와 레온 그리고 이안이 스칼라를 떠났다. 며칠 전 들이닥친 어린 연인의, 아니, 이제는 부부가 될 이들의 가족과 함께였다.

니콜라의 부모는 서북부의 한겨울을 버티던 차림 그대로 더운 남부까지 달려왔다. 그들은 땀과 눈물을 동시에 쏟으며 손녀를 끌어안았다. 우리 집안에 파이안의 피가 섞인 아이를 들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며 호통을 쳤던 게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그건 이안의 어머니와 삼촌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찬가지로 찬 겨울 기운을 그대로 품은 채 스칼라에 당도한 그들은 걸치고 있던 외투를 모조리 바닥에 내던져 버리고는 손녀를 찾았다.

니콜라와 이안의 사랑스러운 아이 닉스는 두 조부모의 품을 옮겨 다니며 연신 방싯방싯 웃음 지었다. 그들 사이에 있는 보이지 않는 두꺼운 벽을 부수겠다는 듯 귀엽게 팔을 휘젓기까지 했다.

하룻밤이 지나는 내내 어색한 낯을 하고, 혹은 시비를 걸고 싶은 걸 꾹 참는 것 같은 눈으로 상대의 눈치만 보던 파이안과 마르스의 사람들은 결국 아침 식사 자리에서 서로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남부 햇살이, 그 햇살을 듬뿍 받고 태어난 사랑스러운 닉스가 얼어붙었던 어른들의 마음을 녹인 덕이었다.

아이가 두 가문의 성씨 모두를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길었던 니콜라의 도피는 끝을 맺었다. 니콜라도 이안도 아이도 다시 많은 가족을 갖게 됐다.

대공에게 받았던 부탁과는 별개로, 헤르난은 상냥하고 밝은 니콜라가 언제나 행복하길 바랐다. 그래서 다시 가족과 만난 니콜라를 보며 큰 기쁨을 느꼈다.

칼릭스 역시 니콜라와 이안을 축하해 줬다. 남들이 하는 축하와는 뜻이 조금 달랐지만 말이다. 칼릭스는 그저, 불청객들이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기뻤다.

스칼라까지 단둘이 마차를 타고 왔던 니콜라와 레온은 그들의 가족과 함께 포털을 향해 떠나게 됐다.

마차에 올라타기 전, 니콜라는 헤르난을 찾아와 손을 붙잡고 말했다.

〈전, 아이의 성별이 여자건 남자건 상관없어요.〉

〈……네?〉

〈그런 게 있어요. 닉스의 생일이 되면 스칼라로 초대장을 보낼 거니까, 꼭 오셔야 해요!〉

약속드린다는 답을 세 번이나 반복해 듣고 나서야 니콜라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 후엔 칼릭스에게 무어라 말을 속삭였는데, 니콜라의 말을 들은 칼릭스의 입가에 삐뚜름한 웃음이 걸린 걸 보아 단순한 작별 인사는 아닌 듯했다.

인사를 건네 온 건 레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음에 뵐 땐, 지금보다 더 어른이 된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기왕이면 멋있는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할 텐데.〉

참 해맑고 사랑스러운 청년이라고, 헤르난은 레온을 보며 생각했다.

〈기대하겠습니다.〉

레온에게 답을 건네며 헤르난은 작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대공의 손님들은 스칼라 남작 부부와 작별했다. 어색한 미소와 악수가 아니라 다정한 포옹과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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