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갈림길
스칼라는 길고 긴 여름을 지나고 있었다. 남부보다 느리게 계절이 변하는 수도 디아만테 역시 새로운 계절의 문을 열어젖힌 지 오래였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긴 여름을 나는 사이, 스칼라에도 자그마한 변화 몇 가지가 찾아왔다.
조세핀에게 연하의 남편이 생겼다. 스칼라의 시내에서 부모와 함께 대장간을 운영 중인 남자였다.
헤르난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조세핀의 결혼 선언에 놀라 들고 있던 찻잔을 떨궈야 했다. 그녀의 결혼식에선 꼭 여동생을 시집보내는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긴장해 손까지 떠는 헤르난을 보며 칼릭스는 즐겁게 웃다가, 그 떨리는 손을 단단히 잡아 줬었다.
남편이 생긴 조세핀처럼 남작성의 유일한 정원사인 폴로도 재능 있는 조수를 얻게 됐다. 헤르난도 잘 아는 이였다.
니콜라와 레온이 스칼라를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남작성으로 아주 낯이 익은 손님 하나가 찾아왔다. 셀. 세이어 상단의 사냥 대회에서 헤르난에게 도움을 받은 소년이었다.
후작 부인이 건넨 빵을 허겁지겁 삼키던 모습이 더는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모습을 하고, 셀은 헤르난에게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늘어놨다.
셀은 헤르난의 조언대로 마을과 마을을 부지런히 옮겨 다니며 지냈다고 했다. 오직 단검 한 자루만 쥔 채 홀로 다니는 셀을 도와준 사람이 많았는데, 마음씨 좋은 부부에게서 운 좋게 조경 일을 배우기도 했다며 그는 행복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쑥스럽다는 듯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남작님께 도움이 될 일을 하고 싶어서…… 왔어요.〉
놀란 헤르난은 셀에게 부채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법 비장한 얼굴을 한 셀은 스칼라에 오면 일자리를 내어 주겠다고 하셨던 걸 기억한다며, 헤르난에게 약속을 지키셔야 한다고 우겼다. 숙식만 제공해 주시면 평생 돈 안 받고 일할 수 있다며 그를 졸랐다.
결국, 셀은 정원사 폴로의 조수라는 직함을 얻게 됐다. 그리고 당연히, 노동량에 맞는 합당한 봉급 또한 받게 됐다.
성의 주인인 스칼라 남작을 통해 새로운 조수를 소개받은 폴로는 이제 막 성인이 된 데다 전보다 키만 자랐을 뿐 여전히 빼빼 마른 셀을 못마땅해했다. 저 몸으로 힘을 쓸 수나 있겠느냐는 투덜거림과 함께였다.
상대방을 못마땅해하는 건 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를 아니꼽게 바라보는 까칠한 아저씨를 굳이 좋게 봐줄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친절히 대할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둘은 꽤 죽이 잘 맞는 사이가 됐다. 집사장이 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기도 했다.
다른 사용인들에게 매사에 무기력하다는 잔소리를 듣던 폴로는 말 안 듣는 아들 같은 조수가 생긴 후로 잃었던 활기를 되찾았다. 잠시 접어 뒀던 꿈을 펼치고 싶다며 정원 이곳저곳에 꽃을 심기 시작했고, 얼마 전엔 폐쇄되어 있던 온실을 다시 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여러모로, 사랑이 넘치는 여름이었다.
그리고 스칼라 남작의 배우자인 칼릭스 히페리온에게도 변화의 전환점은 찾아왔다. 전쟁이라는 전환점이었다.
지난 몇 번의 삶에서 그래 왔듯, 이번에도 새로운 균열 전쟁은 북부에서 시작됐다. 많은 게 바뀐 세상에서도 평화 대신 전쟁이 반복되는구나 싶어 헤르난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흑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검은 안개가 중북부에 자리한 수도 디아만테에까지 닿았다. 황실에서는 도움을 요청하는 공문을 먼 남부의 귀족들에게도 보내왔다. 칼릭스가 꽤 오래 기다려 왔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막 이 새로운 세상에서 눈을 떠 자신만만하게 전쟁을 말했던 때와 달리, 칼릭스는 무언가가 마음에 걸린다는 듯 꽤 긴 시간 고민을 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스칼라를 떠날 준비를 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
칼릭스는 이번 주말이 지나기 전에, 수도 디아만테를 넘어 북부를 향해 갈 것이다.
헤르난은 다시 눈을 뜨게 된 7월에 칼릭스와 미리 해 뒀던 약속을 떠올려 봤다. 두 사람은 언제 시작될지 모를 전쟁이 끝을 맺을 때까지만 부부 관계를 유지하기로 했었다. 칼릭스가 전장에서 귀환하면 스칼라 남작 부부는 자연히 이혼 수순을 밟을 거다.
이혼과 함께 칼릭스의 곁을 떠나겠다는 건 아니었다. 헤르난은 칼릭스가 바란다면 계속해 그의 옆에 있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옆에 있어 주는 것과 부부로 함께한다는 건 다른 문제였다. 정리가 필요했다.
칼릭스가 완전한 자유를 얻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출정 준비를 마쳐 가는 칼릭스의 옆에서, 헤르난은 지난 시간을 그리고 앞으로 닥쳐올 시간들을 떠올려 봤다. 불안과 걱정, 초조함이 그의 손가락 끝을 간질였다.
* * *
곧 전장에 나서야 하거나 말거나, 칼릭스의 얼굴은 매일같이 밝았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이유도 없이 실실 웃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으면서도 어딘가 무섭게 느껴진다고, 사용인 중 하나는 동료에게 속삭였다.
칼릭스의 기분이 좋은 건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근래, 칼릭스는 헤르난의 건강에 부쩍 관심이 많아졌다. 지금 하는 산책 역시 최소한 하루에 두 번은 햇볕을 쬐어야 한다는 잔소리와 함께 시작돼 벌써 2주째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 산책길에서 칼릭스는 매번 헤르난의 지팡이가 되길 자처했다. 평범한 부부라도 된 것처럼 칼릭스와 팔짱을 끼고 후원을 거니는 일이 헤르난은 무척이나 민망하고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몸을 빼려고 하면 칼릭스가 서운하다는 얼굴을 해 오는 통에 결국 부끄러움 따위는 참기로 했다.
몸을 지탱해 주는 칼릭스의 단단한 팔이, 제게 맞춰 주는 느린 걸음이 싫지 않기도 했다. 사랑하는 연인도 가족도 친구도 뭣도 아닌 자신을 이렇게 챙겨 주는데…… 훗날 칼릭스와 부부가 될 이는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다.
그런 칼릭스의 옆자리에 루체가 없을 거란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들 때도 있었다. 그래도 헤르난은 아주 조금씩이나마 칼릭스의 뜻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어찌 됐건 두 사람의 새로운 짝 역시 그들과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랑스러운 사람일 거라고, 스스로에게 계속해 말을 건넸다.
“이미 지난 얘길 꺼내서 미안한데…… 자꾸 생각이 나서.”
슬쩍 헤르난의 눈치를 보던 칼릭스가 말을 건네 왔다.
“저번에 손님들이 떠날 때, 네가 멋있는 어른이 되겠다느니 뭐니 하는 애한테 그랬잖아. 기대하겠다고.”
이미 지나 버린 시간을 입에 담으며 이상한 미소를 짓는 칼릭스에게 헤르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줬다. 착하고 성실한 청년이 훌륭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기대하는 건 당연했다.
“나는? 나는 얼마나 더 멋있어질지 기대 안 돼?”
칼릭스가 스스로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거야 이미 알고 있는…….”
“그럼 더 먼 미래까지 생각해 봐.”
걸음까지 멈춘 칼릭스가 헤르난에게 말했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물음이 조금은 의아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말을 보태지 않아도 칼릭스는 알 것이다. 중년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나이가 되어도, 노인이 되어도 본인은 계속 아름답고 멋질 거란 걸 말이다.
“당연히…… 기대됩니다.”
“나이 든 모습까지 보고 싶어?”
“그럼요.”
굳이 제 의견까지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순순히 답을 내줬다. 하지만 괜한 말을 한 것처럼 느껴져 조금은 민망하기도 했다.
헤르난은 칼릭스를 따라 멋쩍게 웃어 보이고는 버릇처럼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입술이 쫓아왔다. 이마 위에 닿았다 떨어진 칼릭스의 입술은 헤르난이 고개를 들자 곧장 아래로 향했다.
어……. 헤르난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춘 칼릭스는 곧, 스스로의 행동에 놀라 얼빠진 소리를 냈다.
지금처럼, 칼릭스와 짧게 입을 맞추는 일이 늘어 가고 있었다. 매번 헤르난에게 입맞춤을 허락받던 남자는 전쟁을 앞둔 요즘에 와서는 이렇게 충동적으로 입을 맞춰 오곤 했다. 그 끝에 항상 사과의 말과 어색한 침묵이 따라붙는 짧은 입맞춤이었다.
“……다시 갈까요?”
두 사람의 주위를 맴돌던 침묵을 밀어 낸 건 헤르난이었다. 그 역시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별 의미 없었을 찰나의 입맞춤보다는 어색한 침묵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헤르난은 말이 없는 칼릭스를 힐끗 올려다봤다.
“혹시, 기분 나빴어?”
칼릭스는 물었다. 굳어 있는 얼굴과는 달리, 그의 두 뺨이 예쁜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무어라 설명하지 못할 이상한 기분을 불러 오는 칼릭스의 색깔을 보며, 헤르난은 평소보다 조금 더운 오늘의 날씨를 떠올렸다. 괜한 잡념은 지워야 했다.
“아뇨. 괜찮았습니다.”
다른 감정을 섞지 않고 헤르난은 솔직하게 말했다. 기분을 물어 오는 칼릭스에게 그저 느낀 그대로를 말한 거였다.
“다행이다.”
칼릭스는 쑥스럽다는 듯 말을 속삭였다.
원래, 헤르난은 제가 허튼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칼릭스가 저에게 다정하게 굴고 또 입을 맞춰 오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칼릭스가 해변에서 헤르난을 끌어안고 미래를 속삭인 날을 기점으로 그 추측은 빛을 잃었다.
그렇다고 한들 단순히 욕구를 풀겠다며 칼릭스가 자신에게 입을 맞출 것 같진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게 입을 맞추는 건 욕구를 푸는 게 아니라 기부를 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겠는가.
그럼…… 이유가 뭘까. 헤르난은 여러 번 생각해야 했다.
새로운 세상과 달라진 연인, 마음이 쌓아 올려온 불안의 탑이 무너지면서 칼릭스에게 이상한 충동을 불어넣었는지도 몰랐다.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체온에 매달리게 된 거다. 이제는 기억이 흐릿해질 정도로 오래된 옛날, 헤르난도 해소되지 않는 불안에 괴로웠던 적이 있어서 알았다.
어쩌면, 칼릭스는 다섯 번째 삶을 살고 있다는 남자에게 나름의 동정을 표하는 걸지도 몰랐다. 헤르난은 자신이 떠벌렸던 지난 삶들이 칼릭스의 안에 이상한 죄책감이 되어 쌓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헤르난 말론이 원할 것 같은 일을 해 주고, 기쁘게 만들어 주려고 노력하는 거다.
무엇 하나 고를 수 없는 추측을 늘어놓기만 하며 헤르난은 급히 생각을 마무리했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칼릭스를 위해서라도 나쁜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일단은 의문을 표하지도 거부하지도 않고, 헤르난은 그저 칼릭스가 다시 정신을 차릴 때까지 그가 원하는 곳으로 함께 가기로 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다시 헤르난과 눈을 맞추며 칼릭스는 물었다. 그렇게 물어 오는 이의 목소리에 초조가 묻어나 있었다.
“도련님 생각을 했습니다…….”
자신보다 키가 커진 칼릭스를 올려다보며 헤르난은 답했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기분이 들어 괜히 말끝이 흐려졌다.
헤르난의 말을 들은 칼릭스의 눈이 커졌다. 입을 여닫길 반복하던 칼릭스는 급히 헤르난을 끌어안았다. 입맞춤도 없이 오랫동안, 그를 단단히 끌어안고만 있었다.
목덜미를 데우는 숨 덕에 칼릭스가 웃고 있다는 걸 얼핏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웃음을 따라 움직이는 보드라운 백금색 머리카락이 헤르난을 간질였다.
헤르난은 불안을 푸는 방법 같은 건 잘 몰랐다. 하지만 사람의 불안과 초조, 감정의 허기가 다른 이와 의미 없이 입을 맞추고 몸을 섞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닐 거란 것 정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칼릭스에게 필요한 건 입맞춤 하나 제대로 받아 주지도 못하는 재미없는 남자가 아니라, 안정된 사람과의 정서적인 교류와 사랑이었다.
새로운 연인이 생기면 칼릭스의 이런 행동들도 자연스레 멈출 것이다.
하지만 전쟁터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는 칼릭스가, 지금 당장 마음을 나눌 연인을 만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도 전쟁이 끝나고 무사히 돌아오면, 저와 제대로 이혼 절차를 밟으면…… 금방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될 거다.
헤르난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칼릭스의 새로운 연인을 그려 봤다. 기왕이면 칼릭스의 또래이거나 그보다 연하의 사람이 좋을 것 같았다.
‘……빨리,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하셔야 할 텐데.’
칼릭스의 품 안에 갇혀, 헤르난은 칼릭스의 아버지인 네이로 후작도 하지 않을 법한 생각을 떠올렸다. 왜인지 혀끝이 쓰게 느껴졌지만 끝내 모른 척을 했다.
* * *
창문을 열면, 기다렸다는 듯 안으로 바람이 몸을 밀어 넣는다. 종일 바쁘게 돌아다녔는지 밀려온 바람의 숨결 속에 바다와 꽃의 향취가 묻어 있었다.
한동안 머리카락을 괴롭히다가는 다시 밖으로 달아나는 바람을 따라 헤르난은 어두운 밤의 발코니로 나섰다.
헤르난에게는 새로운 취미 아닌 취미가 생겼다. 발코니에 나가 폴로와 셀이 가꾸는 후원을 구경하는 일이었다. 낮에는 햇살이 밤에는 달빛과 조명이 저 아래에서 매일 아름답게 변하고 있는 후원을 밝혀 줬다.
위험하다는 이유로 홀로 발코니 난간에 기대거나 걸터앉는 일은 금지됐다. 다만, 칼릭스의 품에 안겨 있을 땐 가능했다.
이제는 칼릭스의 품이 그와의 짧은 입맞춤만큼이나 익숙해졌다. 당장 오늘 아침만 해도 헤르난은 그를 끌어안고 있는 칼릭스가 깨어나길 기다리며 한참이나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처음엔, 자신을 자꾸만 품에 가두려 드는 칼릭스의 행동이 그가 제게 입을 맞추는 것과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예전에도 칼릭스는 툭하면 자신을 끌어안고는 했다. 가정 교사를 따돌리는 걸 도와달라고 하려고, 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 심심해서, 추워서,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 이유 한번 다양했었다. 가족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남자애의 응석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칼릭스의 포옹에서 다른 뜻을 찾으려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예전과 지금이 다르게 느껴지는 건, 칼릭스의 몸이 커져서 또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옳지 못한 방향으로 변해서 그런 것이다.
다정한 포옹이 싫은 건 아니었다. 가까운 거리감이 주는 민망함의 뒤로 작은 기쁨도 따라붙었다. 포옹은 칼릭스가 제게 예전처럼 군다는 증표였다.
아무래도, 칼릭스가 가지고 있는 헤르난 말론을 향한 원망이 정말 사라져 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그와의 포옹이 더 기쁘게 느껴졌다. 입을 맞출 때와는 달리 마음 한편이 불안하지도 않았다.
“보름달이 떴네.”
칼릭스의 목소리가 헤르난의 상념을 깼다.
기척도 없이 다가온 그는 헤르난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막 씻고 나온 남자의 몸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열기며 채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가운을 적시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예전에, 전쟁에 출정하던 날 밤에도 오늘 같은 보름달이 떴어. 다시 어려지기 전에 말이야.”
칼릭스는 말했다.
헤르난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말에 홀로 죄책감을 느꼈다. 제가 저지른 짓이 아니었다면, 칼릭스는 사랑하는 연인의 입맞춤을 받으며 전장으로 떠났을 것이다. 어쩌면 저 역시 떠나는 칼릭스에게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건넬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자신의 후회를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칼릭스에게 물음 하나만을 조심히 건넸다.
“……긴장되십니까?”
이 밤이 지나면 칼릭스는 스칼라를 떠나야 했다. 헤르난에게 믿을 만한 호위 기사를 붙여 주는 것으로 그의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아니.”
칼릭스는 답했다. 아마, 지금의 그는 여느 때보다 더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조금 무섭기도 해.”
짓고 있을 표정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말을 내놓은 칼릭스가 헤르난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무서움이라고는 도통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래도…… 저런 말을 들으니 덜컥 걱정이 됐다.
하고 싶은 게 뭐든 다 지원해 줄 수 있다는 헤르난의 제안을 거절하고 전장에 나서길 원한 건 칼릭스였다. 하지만 출정을 앞두고선, 내심 누군가 그의 선택을 말려 주길 바라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망설이던 헤르난이 자신을 끌어안은 남자의 손등을 조심히 붙잡았다.
“그건 안 돼.”
단호한 목소리로 칼릭스는 말했다.
“평생을, 옆에 붙잡아 두고 싶은 사람이 있어. 그런데 내가 잘못한 게 너무 많아서…… 이 얼굴 하나만 가지고는 붙잡질 못할 것 같아. 적어도 내 작위, 내 땅 정도는 있어야겠지.”
“…….”
“사실, 싫다고 해도 어떻게든 붙잡아 둘 거야.”
말이 이어졌다. 속삭임에 가까운 것이었다.
“헤르난. 널 내 옆에 억지로 붙잡아 두면, 날 미워할 거야?”
칼릭스의 물음이 헤르난을 두드렸다.
헤르난은 당황했다. 칼릭스가 꺼내 놓은 이야기를 듣고, 헤르난은 그가 자신도 모르는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건가 싶어 마음이 철렁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저에게 하는 말이었던 모양이었다. ……해변에서 했던 말을 더 간지럽게 내어 놓은 것 같았다.
헤르난은 여전히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칼릭스의 품에서 평정심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억지로 붙잡아 둔다는 말은 맞지 않았다. 칼릭스는 절 붙잡을 필요가 없었다. 칼릭스가 바란다면, 내내 곁에서 새로운 길로 나아가려는 그를 도울 것이니 말이다.
칼릭스를 둘러싼 상황이 달라져 끝내 바로 옆에서 돕지는 못하게 되더라도 그가 바란다면 멀리서나마 계속해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먼 미래를 말하는, 평생을 말하는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헤르난 말론의 지난 삶들을 알게 된 후, 칼릭스는 제게 이해할 수 없는 죄책감과 연민을, 묘한 애정을 갖게 됐다. 나아가 이런 절 책임지고 돌봐 주려까지 하고 있었다. 도망가지 못하게 목줄을 채워 묶어 두려는 게 아니라, 먼 옛날처럼 다정히 손을 잡으려 했다.
그저 도움을 바라며 옆에 두려는 것과 책임을 지겠다며 옆에 두려는 건 너무 다른 일이었다. 헤르난은 그 책임에 감사를 표할 수도, 갚아 줄 수도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저라는 사람의 쓸모가 사라져 가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 사실을 차마 입 밖으로 내기 힘들어 헤르난은 괴로웠다.
적막이 흘렀다. 칼릭스는 말을 잇지 못하는 헤르난을 오래도록 기다렸다. 종내엔 말을 하지 않아도 좋다며 웃었다.
“……미워하지 않을 겁니다. 작위가 없어도, 땅이 없어도요. 분명, 그럴 겁니다.”
헤르난은 결국 진심을 담은 답을 내놓았다.
칼릭스가 바라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인정하면 안 돼서, 그가 원하는 답변을 들려주기 무서워 헤르난은 이 상황을 회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출정을 앞둔 칼릭스가 돌아옴을 말하며 내어 준 이야기에 거짓을 댈 수 없었다.
고요한 발코니에 울려 퍼지는 헤르난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는지, 다시 소리 내 웃던 칼릭스가 품 안의 남자를 더 꽉 끌어안았다.
“일을 마치고 돌아올게, 헤르난. 불순한 종자들이 감히 내 사람에게 호감을 표할 생각 따윈 하지 못하게, 해를 가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더 대단한 사람이 될게.”
칼릭스의 느릿한 말을 귀에 담으며 헤르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칼릭스는 말 그대로 예전의 저 같은 불순한 종자에게서 누군가를 지켜 낼 수 있는 사람이 됐다. 그런데 그보다 더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니. 헤르난은 고민도 잊은 채로 괜한 대견함을 느꼈다.
그리고 내 사람, 그 말에 담긴 소유욕을 곱씹어 봤다.
“헤르난. ……입 맞춰도 돼?”
헤르난의 머리칼에 뺨을 비비며 칼릭스는 물었다.
다시금 느껴지는 칼릭스의 온기에 헤르난은 작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마음대로 하시라는 말이 도통 입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여기서 입맞춤을 받는다면, 칼릭스가 제게 내어 준 이야기를 핑계 삼아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될 것만 같았다.
헤르난은 이 상황에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야 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바라보듯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냉정히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헛된 기대와 망상 따위를 품지 않게 사방을 경계해야 했다. 찾아온 강박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느끼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긴장으로 굳은 얼굴을 한 헤르난이 칼릭스의 품에서 벗어났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부탁을 받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상한 고민이 만들어지지 않게 하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에 빠진 헤르난의 등을, 저 마음 아래에 수장된 줄 알았던 충동이 떠밀었다.
“……전장에 나서기 전, 가족이나 연인에게 입맞춤을 받으면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안과 충동이 손을 잡고 완성한 말이 흘러나왔다. 저 스스로가 꺼낸 말 같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느리게나마 말은 이어졌다.
“마물의 손톱에 몸이 꿰뚫렸는데도 죽지 않고 돌아온 용병이 알려 줬습니다. 자기는 가족들에게 입맞춤의 축복을 받아서 죽지 않은 거라고 말했어요.”
“그래?”
뒤돌아 마주하게 된 칼릭스의 얼굴에서 의아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어찌 됐건 지금 저와 도련님은 가족이니까…… 제가…… 잠시만 입을 맞춰도 될까요?”
헤르난의 뺨이 창백하게 질렸다가는 붉어지길 반복했다.
놀란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답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곧, 살짝 고개를 내려 헤르난과 시선을 맞췄다. 그러고는 원하는 걸 해 보라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줬다. 능숙한 행동이었지만 긴장한 탓에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뺨에 그리고 입술에 입을 맞췄다. 고작 몇 초나 될까 싶은 짧은 입맞춤일 뿐인데도, 말 그대로 축복을 바라는 입맞춤일 뿐인데도, 죄를 저지르는 것만 같아 마음이 벌벌 떨렸다. 그럼에도 헤르난은 결국, 칼릭스에게 입을 맞췄다.
몇 번의 삶이 반복됐다. 그 반복되는 삶의 가장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헤르난은 처음으로 칼릭스에게 스스로 입을 맞췄다. 네 번의 죽음을 지나는 시간 이래, 처음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먼저 입을 맞춰 본 것이었다.
헤르난의 입맞춤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자 그가 주제도 모르고 내보인 마지막 욕심이었다.
이번 삶에서, 칼릭스는 곧 그가 원하던 작위와 땅을 얻게 될 것이다. 돌아오면 예정대로 이혼을 할 것이고 스칼라를 떠나 새로운 세상을 향해 갈 것이다. 함께 있길 원한다고 해도 그에게 열릴 다른 삶이 그걸 허락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괜한 걱정도 기대도 할 필요가 없었다.
칼릭스에게 입을 맞추자 신기하게도 마음을 괴롭히던 불안이 사그라들었다. 칼릭스는 절대 죽지 않을 거라는 확신만이 헤르난의 머릿속을 밝혔다.
“……이제 주무셔야죠.”
빠르게 아래로 시선을 내린 헤르난이 다급히 칼릭스를 지나쳤다. 하지만 발코니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칼릭스에게 붙들렸다.
무어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칼릭스는 입술을 부딪쳐 왔다. 맞닿은 몸에선 여전히 이전과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헤르난은 말을 듣지 않는 왼발 대신 오른발을 끌어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입맞춤을 쉽게 끝낼 생각이 없다는 듯 칼릭스가 허리를 잡아채 왔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품에 갇힌 채 정신없이 이어지는 입맞춤을 받아 내야 했다.
원한 건 그저 칼릭스의 행운뿐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입을 맞추게 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칼릭스가 바라는 대로, 헤르난은 힘을 풀고 순순히 그를 받아들였다. 입 안을 헤집는 칼릭스의 혀가, 맞닿은 입술과 몸이 뜨거워 머릿속이 뿌옇게 변한 탓에 생각을 이어 나가는 게 힘들었다. 옷 역시 흐트러져 엉망이 됐다.
허리춤을 지분거리던 칼릭스의 손이 더 아래로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온몸으로, 불온한 감각이 퍼져 나갔다.
지금까지의 입맞춤과는 달랐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어깨를 반사적으로 밀어 냈다. 하지만 밀려나는 건 칼릭스가 입고 있는 가운뿐이었다.
떨어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맞붙은 몸 사이로 서로의 숨결이 얽혔다.
“……미안해.”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사과를 건넸다. 얼굴 위에 스스로를 향한 당혹감과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침묵이 바람을 타고 지나갔다.
“아니……. 말로만 미안한 것도 웃기지. 머릿속으론 온갖 추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 주제에. 덜떨어진 짐승 새끼처럼 너한테 달려들고 싶어 안달이 났으면서…….”
칼릭스가 말을 중얼거렸다. 새파란 열기가 어린 두 눈에 죄책감과 정염이 동시에 타오르고 있었다.
불안이 촉발한 입맞춤이 몸을 섞는 걸로 이어지는 걸까.
전쟁을 앞둔 칼릭스를 끌어안아 줄 연인이 부재한 지금, 그의 불안을 받을 사람은 저 하나뿐이었다. 칼릭스의 요동치는 불안을 잠재워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제게 있다면, 그게 뭐든 들어줄 수 있었다.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깟 두려움은 헤르난이 가진 칼릭스를 향한 애정의 가장 끝자락에도 닿지 못했다.
그저, 걱정되는 건…….
“징그럽고 소름 끼치지.”
입을 다물고 있는 헤르난에게 칼릭스는 말했다. 곧, 고개 숙인 남자의 백금색 머리칼이 헤르난의 어깨 위로 흩어졌다.
“나도 이런 내가 쪽팔려. 수치도 없이 네 귓가에 이런 얘길 떠들어 대고 있다는 것도, 아직도 널 붙잡고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다…… 괜찮습니다.”
칼릭스의 말에 헤르난은 답했다. 곧, 말이 이어졌다. 방금의 답과는 달리 목소리에 걱정이 잔뜩 묻어 있었다.
“하지만…… 재미는 없으실 겁니다.”
“…….”
“저와 몸을 섞는 건, 너무 우스워서…… 후회하실 겁니다. 전 다른 남자를 만족시키는 방법 같은 것도 모르고…….”
거의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헤르난.”
고개를 든 칼릭스의 목소리가 헤르난의 말을 잘랐다.
“난…… 너한테 봉사를 바라는 게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얼굴에 고통과 참담함이 묻어나 있었다.
“너는 이해 안 하려고 하겠지만,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다시, 칼릭스는 헤르난을 끌어안았다.
나는 괜찮으니 필요하다면 언제든 나를 사용해도 된다고,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절 끌어안은 칼릭스의 목소리가 너무 슬프게 느껴져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후회를 물어야 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야.”
“…….”
“난, 네 후회가…… 무서워.”
칼릭스의 말이 느리게 이어졌다.
“헤르난. 네가 날 믿지 않을 걸 알아. 내가 원하는 것들이 너에겐 환영받지 못할 걸 알아. 그래도…… 네 옆에 있게 해 줘. 곁을 내줘. 오늘을 말하는 게 아냐. 앞으로를 말하는 거야. 나는…….”
“…….”
“나는…… 너를 마음에 담고 있어, 헤르난.”
차마 사랑을 입에 올릴 수 없는 남자가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말을 내놨다.
너를 마음에 담고 있다니. 이상한 말이었다.
애초에 마음에 담고 있다는 게 뭘까. 내 마음에 칼릭스가 존재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여러 가지 물음이 헤르난의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너무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발을 옮기게 될 것 같았다. 이해해야 함에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긴장이 갑작스럽게 풀어졌다. 지금이 현실인지 꿈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전쟁에 나가는 건 하나도 무섭지 않은데…… 널 두고 가는 게 무서워. 내가 없는 사이에 네가 날 떠날까 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까 봐 무서워서, 그래서 이렇게 이기적으로, 넌 원하지도 않을 속내를 털어놓는 거야. 제대로 된 말을 하지도 못하고 빙빙 돌려서는…….”
순간, 멍해져 있던 헤르난의 머릿속에 따가울 정도의 빛이 들어왔다.
“날 떠나지 마. 포기하지 마, 헤르난.”
어깨가 젖고 있었다. 제 어깨에 이마를 묻고 있는 칼릭스의 눈에서 흐른 눈물 때문이었다.
심장이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헤르난은 황급히 칼릭스를 끌어안았다. 헤르난의 두 팔이,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던 일을 붙잡은 채 벌벌 떨렸다.
“도련님. 울지, 울지 마세요.”
“…….”
“절대 떠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헤르난은 더듬더듬 말을 더했다.
“옛날에, 백작성에서…… 그때도 도망가려고 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문이 열려서 저도 모르게 나갔는데…… 말을 못 드렸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갈 곳이 없습니다. 도련님만 허락해 주시면, 전, 항상 도련님 옆에 있을 테니까, 정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울지 마세요. 아이를 달래듯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계속해 말했다.
“……응. 안 울게.”
칼릭스의 몸이 헤르난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곧, 그의 손이 헤르난의 메마른 뺨에 닿았다.
“돌아오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아. 해 주고 싶은 게 많아.”
“…….”
“기다려 줄래?”
칼릭스는 물었다. 눈물 젖은 남자의 얼굴이 달빛 아래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쉽게 믿으면 안 될 말을 너무 많이 들었다.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 될 말이었다. 경계하고 의심해야 했다.
하지만…….
“네. 기다리겠습니다.”
생각을 멈춘 헤르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칼릭스에게 답을 내줬다. 기다림을 말했다. 그가 지나쳐 온 모든 삶 속에서,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칼릭스는 헤르난의 뺨 위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다시 입술 위에서, 오랜 입맞춤이 이어졌다.
* * *
헤르난은 짧은 입맞춤을 받고 잠에서 깨어났다.
칼릭스는 눈을 뜬 헤르난에게 조금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웃음만큼이나 계면쩍어 보이는 눈을 하고서였다.
어색한 건 헤르난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난밤, 제가 칼릭스에게 했던 말들이, 칼릭스가 제게 해 줬던 말들이 계속해 떠올랐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아니, 완전히 이해하지는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헤르난도 칼릭스가 자신에게 이상한 소유욕과 애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 정도는 확실히 알게 됐다.
다 망가진 장난감만큼의 재미도 주지 못할 사람을 가져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칼릭스가 그것을 원한다면 헤르난은 기꺼이 그의 소유물이 되어 줄 수 있었다.
다만, 칼릭스가 말하는 평생을 믿지는 않았다. 언제든 버려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담아 둬야 할 것이다.
계속해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도무지 칼릭스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헤르난은 슬쩍 고개를 숙였다.
“헤르난.”
칼릭스는 자신을 봐 주지 않는 헤르난의 뺨을 부드럽게 만졌다. 그리고 곧, 칼릭스의 손끝이 긴장한 헤르난의 턱에 닿았다.
“좋은 아침이야.”
고개를 들어 주는 헤르난과 시선을 맞추며 칼릭스는 말했다.
칼릭스의 웃는 얼굴이, 헤르난의 눈 속에 새겨졌다. 제게 지어 주는 거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다정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헤르난은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칼릭스를 멍하니 바라봐야 했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네.”라고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헤르난을, 칼릭스는 지난밤처럼 끌어안았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헤르난의 두 팔이 그에게 붙어 오는 칼릭스의 등을 천천히 마주 안았다.
꽤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칼릭스는 헤르난에게서 물러났다. 하지만 두 손은 여전히 헤르난의 어깨를 쥔 채였다.
칼릭스의 턱 근처를 헤매던 헤르난의 시선이 조심스레 그의 두 눈으로 향했다. 빛 없이도 반짝이는 파란색 눈동자가 그 안 가득 저를 담고 있는 모습이 이상해 다시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었다.
“넌, 내가 돌아오면 이혼 얘기부터 꺼내겠지? 분명 그럴 거야.”
확신이 담겨 있는 칼릭스의 물음에 헤르난은 멋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혼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약속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칼릭스의 앞에서 이혼을 말하는 게 눈치가 보였다. 어제 그에게 들은 묘한 말들 때문일 것이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런데 어쩌지. 난 이혼 서류에 서명 안 해 줄 건데.”
“하지만…….”
“하지만 같은 건 없어. 준비해 뒀던 건, 대충 불에 던져서 태워 버리면 돼.”
답이 없는 헤르난을 대신해 칼릭스는 슬쩍 미소 지었다. 설렘과 걱정이 뒤섞인, 어쩌면 수줍다는 말까지 붙일 수 있을 법한 미소였다.
“우린 헤어지지 않아.”
칼릭스의 얼굴이 이내 자신만만한 색으로 그 모습을 바꿨다. 커다란 창문 너머에서 쏟아져 내리는 스칼라의 햇살이 칼릭스의 웃는 얼굴을 밝혀 줬다.
불행도, 저주도 닿을 수 없는 찬란한 웃음은 오직 헤르난 말론 한 사람을 향한 것이었다. 조금 전 헤르난이 맛봤던 다정하고 아름다운 미소보다도, 훨씬 눈부신 것이었다.
칼릭스의 아름다운 얼굴 위에 아직 덜 자란 소년 같던 도련님의 웃는 얼굴이 겹쳐졌다. 지금, 헤르난을 향한 칼릭스의 미소는 그의 추억 속에 새겨져 있는 환한 미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정말, 도련님은 나를 용서했구나.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자신은 과거를 뒤로하고 새로운 길을 찾고 싶다고, 나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 저와 같은 사람에게도 미래를 속삭이며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어 줄 수 있게 됐다.
이 새로운 세상에서 칼릭스와 루체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과거를 뒤로하고 각자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헤르난은 이제야, 그 나아감이 실감 났다.
“바라시는 대로 얌전히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니까…….”
헤르난의 말이 느릿하게 이어졌다.
“다치지 말고…… 꼭, 돌아오세요.”
말이 끝을 맺기가 무섭게 헤르난의 목소리가 입 속으로 갇혔다. 칼릭스가 입을 맞춰 온 탓이었다.
그 다급함은 입맞춤이 끝난 뒤에도 이어졌다. 급히 입을 연 칼릭스는 변명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헤르난의 앞에 내놨다.
“출정 전에 입맞춤을 받아야 오래 산다며. 시간이 바뀌었으니까 한 번 더 해야지.”
누가 먼저 입 맞추건 상관없다고 봐. 그렇게 말하고, 칼릭스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한참을 웃었다. 창피해서 그랬다.
“지난밤에도 말했지만…… 돌아와서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 그러니까, 다른 데 눈 돌리지 말고 기다려줘야 해. 눈 돌려도 할 말 없긴 하지만…… 그래도.”
짧은 침묵이 눈을 맞춘 두 사람의 뺨을 간질였다.
“헤르난.”
“…….”
“네가 보고 싶을 거야.”
그리고 한 번의 입맞춤이 더 이어졌다. 그 어떤 것도 자신과 헤르난 사이에 끼어들 수 없게 만들겠다는 듯 칼릭스는 헤르난을 꽉 끌어안았다.
* * *
정오가 지난 오후의 뜨거운 햇볕을 등지고, 칼릭스는 스칼라를 떠났다. 그가 눈여겨봐 둔 사병 몇과 함께였다.
떠나는 가장 마지막 순간에도 칼릭스는 웃고 있었다.
헤르난은 칼릭스를 떠나보낸 자리에 서서 한참이나 그가 없는 세상을 바라봤다. 사나운 바람 속에 갇히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너를 마음에 담고 있어, 헤르난.〉
그 마음이란 것이 오해할 만한 특별한 무언가는 아닐 거라고 믿으면서도, 헤르난은 속으로 몇 번이고 칼릭스의 말을 다시 되뇌었다. 이제는 자신을 용서한 남자를, 그토록 바라던 환한 웃음을 품 안 가득 안겨 준 남자를 떠올렸다.
제겐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벌써부터 칼릭스가 그리웠다.
* * *
칼릭스가 전장으로 떠난 지 반년여가 지났다.
그 짧으면서도 긴 시간 동안 칼릭스는 꾸준히 스칼라로 편지를 보내왔다. 답을 보낼 수 있는 주소는 없는, 오직 수신인만이 표기된 편지였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매번 달랐으나 편지가 짧을 때나 길 때나 서두는 항상 비슷했다. 헤르난의 건강에 대한 염려였다. 그 뒤로는 칼릭스 본인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어떨 때는 칼릭스가 지나오고 있는 치열한 시간 속의 소소한 일상에 관한 이야기가, 어떨 때는 호위 기사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아니, 호위 기사보다는 다른 남자들과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묘한 경고 같은 게 담겨 있었다.
그 장문의 편지는, 그걸 받아 든 사람이 헤르난 말론이라는 점만 빼면 칼릭스가 편지의 수신인에게 간지러운 사랑을 느끼고 있구나 하고 착각할 정도로 다정한 정성이 느껴졌다.
가끔은 말린 꽃들이 편지에 동봉되어 왔다. 대개 칼릭스가 발 디딘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는 들꽃이었다.
아무래도…… 칼릭스는 여전히 제가 꽃을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헤르난은 그 오해가 싫지 않았다.
헤르난은 칼릭스가 실어 보낸 마른 꽃들을 편지와 함께 모았다. 그리고 가끔, 혼자 그것들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곤 했다.
* * *
흑마법사들과의 전쟁이 발발한 지 1년째. 전쟁의 주요 무대인 북부며 중부와는 달리 남부는 비교적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스칼라의 계절만큼이나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큰일은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칼릭스의 아버지인 네이로 후작이 죽음을 맞이했다. 어느 새벽녘에 벌어진, 마차와 말들이 추돌하는 사고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네이로 후작과는 어울리지 않는 허망한 죽음에 대고 누군가는 후작이 살해를 당한 것이라고 외쳤다. 하지만 꽤 오랜 수사에도 타살에 관한 확실한 증거는 나오질 않았고, 결국 후작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사로 결론을 맺게 됐다.
그런 결론이 도출된 후에야, 미리 작성해 두었던 후작의 유언장이 세상에 공개됐다.
칼릭스의 형인 폰토스 히페리온이 아버지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아 새로운 가주가 됐고, 후작에게 딸려 있던 다른 작위는 둘째인 셀레네의 몫이 됐다.
놀랍게도, 미워하던 막내아들 칼릭스 히페리온의 앞으로 남긴 몫도 있었다. 후작은 자신이 반평생을 보낸 수도의 히페리온 대저택을 칼릭스에게 넘겼다.
헤르난은 수도로 올 수 없는 칼릭스를 대신해 상속 과정을 밟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저택의 일도 떠맡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본인이 직접 저택을 관리해 보겠다며 나선 거였다.
칼릭스가 돌아오면 그는 스칼라가 아닌 히페리온 저택에 주로 머무르게 될 거다. 헤르난은 칼릭스가 돌아올 때까지 그의 저택을 잘 지켜 주고 싶었다. 이전보다 더욱 아름다워 보이게, 저택의 담벼락 아래에 잔뜩 쌓인 좋지 못한 추억을 칼릭스가 잊을 수 있게…… 저택의 풍경을 바꿔 주고 싶었다.
후작의 죽음 이후, 헤르난은 아직 계약 기간이 남은 제 호위 기사 제나에게 자신이 아닌 저택을 지켜 달라는 부탁을 했다.
새로운 영주를 맞이할 네이로의 후작성으로 일터를 옮긴 탓에 비어 버린 저택 하녀장의 자리며 사용인들의 자리는 스칼라의 하녀장인 밀라가 소개해 준 이들이, 정원사 자리는 일단은 남작성의 정원사인 폴로와 셀이 채우게 됐다.
그렇게 히페리온 저택은 점점 변해 갔다. 저택의 풍경을 바꾸고 싶다던 헤르난의 뜻이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이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특히, 정말 필요한 것만이 존재하던 정원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날마다 그 모습을 조금씩 바꿔 나가더니 세 번의 계절이 바뀔 때가 되자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다워졌다.
칼릭스가 돌아올 때면, 아직은 군데군데 비어 있는 저택의 후원에도 꽃이 만발할 것이다. 마법사를 불러 꽃이 시들지 않게 처리해야겠지. 평생 지지 않을 활짝 핀 꽃들 사이에 선 칼릭스를 생각하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고통만을 안겨 주던 공간이 더는 그에게 해를 가할 수 없게 될 거라는 게 기뻤다.
이제 남은 건, 칼릭스가 돌아오는 것뿐이었다.
칼릭스가 건강하게 돌아와 새로운 행복을 되찾을 수 있길. 저 역시 칼릭스가 원하는 자리에 서서 그의 행복한 모습을…… 지켜볼 수 있길.
헤르난은 소망했다. 다른 건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 * *
다시 시간이 흘렀다.
스칼라 남작성으로 날아들던 칼릭스의 편지가 거짓말처럼 끊겼다. 전쟁이 끝나간다는 이야기가 대륙에 퍼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리고 호사가들 사이로, 전쟁에서 공을 세운 영웅 하나가 숲의 저주를 받았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저주가 앗아 간 것은 그의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