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부-10. 귀환 (11/21)

3부

10. 귀환

전장의 시간이 멈췄다. 지긋지긋하다는 말로밖엔 표현할 길이 없는 흑마법사들과의 전쟁이 드디어 그 끝을 맺은 것이다.

황제가 신임하는 후계자인 황녀까지 검을 차고 나선 전쟁은 2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더디게 이어지기는 했지만, 결국 제국이 먼저 승리의 깃발을 빼 들게 됐다.

‘절반은 내 덕이지.’

황녀와 함께 승리의 선봉에 섰던 칼릭스 히페리온은 건방지게도 이런 생각을 했다.

사실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무도 칼릭스의 말에 토를 달진 못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진작 죽었을 기사며 용병이 작은 영지 하나를 채우고도 남았으니 말이다.

황녀를 포함해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한, 또 반대로 많은 마물이며 흑마법사들의 숨을 거둬 간 남자에겐 그가 세운 공로에 마땅한 포상이 내려졌다.

칼릭스는 드넓은 북서부의 영지 솔스켄을 얻었다. 돈이나 사치품 같은 것들 역시 덤처럼 그 뒤에 따라붙었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포상품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역시나 솔스켄 후작이라는 작위가 아닐까 싶었다. 아버지처럼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능력만으로 얻어 낸 거였으니까.

칼릭스는 아버지인 네이로 후작이 원치 않던 아들의 성공을 마주하지 못하고 죽어 버린 게 아쉬웠다. 그가 죽어서 기쁜 것과는 별개였다.

하지만 항상 좋은 것만 얻고 살 수는 없는 모양인지, 칼릭스는 이 균열 전쟁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기억이었다.

문제는 칼릭스가 잃은 기억이란 게…… 조금 특이하다는 데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세이린 숲에서 시작됐다. 칼릭스는 부대원들과 함께 야영지에 자리하고 앉아 선발대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눈처럼 하얀 사슴에게 시선을 뺏겼다. 칼릭스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사슴을 쫓아 다급한 걸음을 옮겼다. 부대원들이 칼릭스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한 이동이었다.

그 뒤로는 기억이 뚝 끊겼다.

정신이 다시 돌아온 건, 고작 10여 분 정도가 지나서였다. 칼릭스는 이미 자신의 두 발로 걸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상태였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부상은 없었다. 부상은커녕 몸은 가볍고 기분은 상쾌하기까지 했다.

칼릭스는 부대 내의 치료 마법사와 함께 자신이 마법이나 저주 따위에 현혹된 게 아닌가, 머리를 싸매고 고심해야 했다. 지금껏 정신을 조종하는 마법 따위에 넘어간 적이 없었기에 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어떤 수를 써 봐도 도통 숲에서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마법사들 역시 칼릭스에게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놨다. 그들은 칼릭스가 마주친 흰 사슴을 장난치길 좋아하는 숲의 정령쯤으로 여겼다.

숲의 정령? 칼릭스는 마법사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낯선 목소리가 내뱉은 말 몇 마디가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기억에 남은 탓이었다.

〈아예 존재를 지워 버리는 것보단 괜찮지?〉

〈얼마나 아름다운 결말이야.〉

〈여기까지 온 너의 근성을 어여삐 여겨 선물을 하나 줄게. 괜찮지?〉

분명, 칼릭스는 그런 말을 들었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지는 음흉한 음성이었다.

기억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된 건, 이상한 일이 벌어졌던 그날로부터 사흘 뒤였다.

황녀의 아래에 있는 칼릭스의 부대는 북부 변경백의 성에 당도했다. 머물 곳에 도착하자 긴장이 풀렸다. 속에만 아껴 뒀던 말들이 이곳저곳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말을 쏟아 낸 건, 칼릭스가 마음을 연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 테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칼릭스에게 물었다.

〈요즘 왜 편지를 안 써?〉

〈무슨 편지?〉

뚱한 얼굴로 되묻는 칼릭스를 향해 테인은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

〈연애편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마주한 칼릭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 모습을 본 테인은 칼릭스를 잡아끌고 변경백께서 친히 마련해 둔 의무실로 향했다.

창 너머에서 들어오는 따뜻한 오후의 햇살을 즐기며 꾸벅꾸벅 졸고 있던 치료 마법사를 깨운 테인은, 그에게 새로운 환자를 들이밀었다. 칼릭스였다.

마법사는 급히 칼릭스의 상태를 살폈다. 몇 개의 물음과 함께였다.

그리고 긴 침묵 끝에, 마법사는 선포했다.

〈기억을 잃으신 것 같습니다.〉

당황한 테인과 마법사의 질문 세례가 이어졌다.

앞뒤로 쏟아지는 셀 수 없이 많은 물음 속에서 칼릭스는 자신의 평생을 똑똑히 기억해 냈다. 칼릭스 본인과 관련된 것도 관련되지 않은 것도 잊은 것 하나 없었다.

다만, 딱 한 사람에 관한 기억만큼은 조금도 떠올리지 못했다. 법적으로 칼릭스 히페리온과 부부 사이인 스칼라 남작 헤르난 말론이었다.

칼릭스는 어릴 때는 자신의 호위 기사였고 커서는 자신의 배우자가 된, 아버지와의 거래를 통해 자신과 정략결혼을 했다는 작자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했다. 얼굴뿐인가? 그와 얽혀 있는 거의 모든 일이 칼릭스의 머릿속에서 자취를 감췄다.

어쩌다 전쟁에 참전하기로 마음먹은 건지도 제대로 기억나질 않는 걸 보면, 그 결심 역시 스칼라 남작과 연관이 있겠거니 싶었다.

헤르난 말론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남작과 얽혀 있는 제 기억을 날카로운 무언가가 더러운 모양새로 긁어 놓은 것만 같았다.

저주로 인한 부분적 기억 상실. 칼릭스는 치료 마법사의 진단을 받아 들고 한숨만 쉬어야 했다.

별안간 뒈진 아버지가 제 앞에 남긴 수도의 대저택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칼릭스는 생각을 이어 나갔다.

느긋하게 나아가는 마차에 딸린 작은 창문 너머의 세상을 내다보고 있자니, 사람들이 입에 담던 참담한 소문이 자꾸만 머릿속에 두둥실 떠올랐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게 만드는 이야기들이었다.

칼릭스는 실체 없는 소문을 믿지 않는 편이었다. 그 내용이 뭐든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하지만 그런 칼릭스도 주변 사람들이 몇 번이고 반복해 같은 말을 나불대자 슬슬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못생긴 절름발이 남작이 칼릭스 히페리온을 성에 가둬 두고 학대했었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소문을 모아 대충 한 줄로 요약해 보자면 이거였다.

그 뒤로 따라붙는 부차적인 소문들은 입에 담기도 싫었다. 속 역겹게 만드는 소리였으니까.

자세히 따져 보면 너무 앞뒤가 맞질 않아 말도 안 되고 웃기는 소리였다. 내내 갇혀 있던 사람이 어떻게 이런 체격을 갖게 됐다는 건지. 체격만인가? 전쟁에 출정하기까지 했다.

그냥, 자기들이 원하는 이야기에 사람을 끼워 맞추려 드는 거 아냐? 칼릭스는 속으로 투덜댔다. 소문이 신경 쓰이는 것과는 별개의 생각이었다.

〈그래도 이제 작위가 생겼으니까, 이혼 못 할 걱정은 없겠다.〉

〈맞아. 네가 전쟁터로 나오게 내버려 둔 걸 봐. 덩치가 제란곰처럼 자라서 정이 떨어진 거야. 잘된 거지.〉

동료들은 스칼라 남작과 다시 마주해야 할 칼릭스를 위한답시고 이런저런 말을 내놨다. 쥐뿔도 도움이 안 됐다.

친분도 없는 것들이 찾아와 입을 나불대는 꼴을 보이기도 했는데, 칼릭스는 그들의 촉새 같은 입에 주먹을 꽂아 넣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사실 한 번 정도는 그냥 꽂아 넣었다.

소문이 아닌 사실을 말해 주는 이도 있었다. 테인처럼 마음을 터놓고 지내게 된 몇 안 되는 친구인 메리언은, 칼릭스에게 소문과 걱정을 말하는 대신, 아주 의외의 이야기를 꺼내 놨다.

〈처음 황녀님의 부대가 꾸려졌을 때, 네 앞에서 스칼라 남작 얘길 했던 놈들이 있었어. 엄청 상스러운 소리였지. 듣는 내 수준까지 낮아지는 느낌? 그래도 다들 네가 그 얘기에 동조할 거라고 생각했어. 당연히, 너는 남작을 혐오할 테니까.〉

〈…….〉

〈그런데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진 거야. 눈이 돌아 버린 네가 그대로 주먹을 들어서, 걔네 얼굴을 말이 씹다 뱉은 건초처럼 만들어 놨거든. 나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 그 뒤로 스칼라 남작에 대한 얘기가 싹 사라졌어.〉

메리언의 말에 칼릭스는 당황했었다.

그는 자신의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란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눈이 돌아서 사람을 패는 건…….

칼릭스는 예전의 자신이 남작에 관한 말만 들어도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너무 개 같아서 그런 짓을 한 건가 싶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당했길래? 소름이 돋는 물음이 떠오를 때면 목 뒤가 서늘해졌다.

혼란 속에 칼릭스를 던져 놨던 메리언은 바로 어제, 그에게 이상한 이야기 하나를 더 건넸다. 스칼라 남작을 만나야 한다는 말을 하다가 나온 것이었다.

〈궁금하네. 네가 남작을 마음에 들어 할지, 아닐지.〉

〈왜 그런 게 궁금해.〉

〈편지 때문에.〉

별안간 메리언은 편지에 대한 말을 꺼냈다. 편지. 테인에게 듣긴 했으나, 급히 치료 마법사에게 가느라 잊어버렸던 얘기였다.

〈난 네가 틈만 나면 사랑 편지를 써 대는 걸 장장 1년이나 봐 왔어. 굳이 편지에 꽃을 딸려 보내겠다고 들이랑 숲을 뒤지고 다녔는데, 음흉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정말 꼴 보기 싫었지.〉

몸을 웅크리고 꽃을 찾아다니는 자신의 모습이 칼릭스는 상상도 가질 않았다. 그런 낯간지러운 일까지 할 정도로 편지의 수신인은 제게 소중한 사람이었던 모양이었다.

문제는 그 소중한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는 거다.

의문이 떠오른 순간, 칼릭스는 깨달았다. 편지의 주인은 제 기억에 없는 사람인 남작 혹은 그와 엮여 덩달아 잊히고 만 사람이겠구나.

〈그 편지의 수신인, 네 남편이야. 스칼라 남작.〉

당황한 칼릭스의 앞에 메리언은 답을 내줬었다.

〈확실해?〉

〈너무 궁금해서, 너한테 누구한테 편지를 쓰는 거냐고 슬쩍 물어본 적이 있었거든. 네가 그러던데? 내 배우자한테 쓴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어. 부끄러워하는 것 같아서 소름 끼쳤거든.〉

〈왜 그걸 이제…….〉

〈비밀은 최대한 많이 쥐고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그래도 넌 내 친구잖아. 우리 길드 투자자이기도 하고. 우정도 지키고 돈값도 해 줘야지.〉

말을 끝마치며 메리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칼릭스는 메리언을 믿었지만 기억이 사라지기 전의 자기 자신까지 믿지는 않았다. 편지야, 남작의 이름만 빌려서 애인에게 쓴 걸지도 몰랐다. 떳떳하게 내세울 일은 아니니 거짓말을 한 것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어쩌면, 스칼라에 남작 말고 다른 애인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것도 남작과 관련된 사람으로.

‘……쓰레기 아냐?’

스스로를 제국 불륜계의 새싹으로 만들면서까지, 칼릭스는 최대한 부정적인 방향으로 망상을 했다.

스칼라 남작과의 정략결혼은 따지자면 매매혼에 가까운 것이었다. 언제든 칼릭스를 팔아 버릴 준비를 하고 있던 아버지가, 성공해 돌아온 남자를 통해 그 바람을 이룬 것이다.

칼릭스는 자신이 스칼라 남작 같은 사람을 사랑하게 됐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비밀은 아는 이들 역시, 얼마나 싫었으면 남작에 대한 기억이 싹 사라졌겠느냐고 말했다. 칼릭스는 그 말에 동감했다.

“그래. 얼마나 싫었으면 그랬겠어.”

백금색 머리카락이 커다란 손아래에서 신경질적으로 헝클어졌다.

자세를 고쳐 잡은 칼릭스는 소문 속의 남자를 떠올려 봤다. 우울하고 음침한 절름발이 남작. 얼굴 역시 그 마음만큼이나 못생겼다고 사람들은 수군댔다.

……그런 사람도, 그래도 배우자라고 날 기다렸을까? 나를 걱정했을까? 아니면,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날 저주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기분이 묘해졌다.

이제 곧, 칼릭스는 기억에도 없는 자신의 배우자와 만나야 했다. 칼릭스 히페리온이 미워하는 것으로 유명세가 자자한 배우자 말이다.

마주해 봤자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겠지만,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지 않을까 걱정됐다. 어떻게 해서든 불편한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여러모로 꺼림칙한 만남이었다. 그래도 확실한 관계 정리는 해둬야 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수도의 저택을, 자리를 비운 자신을 대신해 관리해 줬다는 얘기를 듣고는 고맙기도 했으니…… 후에 제게 해를 가하지 못하게 적당한 선에서 함정을 파 두는 정도로 끝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혹시나 기억을 찾기라도 하면 그 마음이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크게 가능성이 있는 일은 아닌 듯했다.

칼릭스가 얻게 된,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억 상실을 두고 치료 마법사들은 자신들은 고칠 수 없다는 말만을 반복했었다. 저주 풀이로 유명하다는 마법사를 만나 봐도 이건 저주가 아니라며 도망을 치니, 별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미래의 황제 폐하가 될 황녀님께서 관을 쓸 때까지, 그녀가 하사해 준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을 때까지 칼릭스의 앞엔 4개의 계절이 더 남아 있었다.

주어진 여유 시간 동안, 칼릭스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것 보단 새로운 삶의 기반을 다지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옛 기억에 관한 미련은 없었다.

‘……일단, 이혼부터 해야겠네.’

그리고 새로 시작하는 거다.

새로운 시작. 칼릭스는 그 가볍고 경쾌한 말을 입 속에서 굴려 봤다. 거짓말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 * *

창백한 낯을 한 스칼라 남작 헤르난 말론이 칼릭스 히페리온의 시선을 피했다. 맞은편 소파에 편히 몸을 기대앉은 칼릭스가 그런 헤르난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헤르난은 칼릭스가 귀환할 거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 황급히 수도 디아만테를 찾았다. 끊긴 편지 때문에 생긴 걱정이며 전쟁 영웅이 기억을 잃었다는 진위를 모를 소문에 대한 불안이 마음에 잿더미처럼 쌓인 상태였다.

히페리온 저택에 도착한 헤르난이 가장 먼저 알게 된 사실은, 호사가들 사이를 돌던 소문이 진짜라는 거였다.

〈후작께선 남작님을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유리 메데리스라고 자신을 소개한 칼릭스의 새로운 보좌관은 민망하다는 얼굴을 하고 헤르난에게 말했다. 헤르난만을 기억하지 못할 뿐, 다른 기억은 멀쩡하다는 말이 더해졌다.

헤르난은 유리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떻게 그 많은 기억 속에서 단 한 사람만을 잊는 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정말 칼릭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한들 그를 직접 마주하기 전에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남작님에 관해선 아무런 기억도 나질 않습니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더 성숙해지고 거칠어진, 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남자는 말했다.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려 지어 보인 부드러운 미소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놀랍죠?”

되물어오는 칼릭스를 앞에 두고, 헤르난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정말 헤르난을 모르는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평생 써 본 적 없는 높임말을 쓰는 것만 해도 그랬다. 지금, 칼릭스는 처음 만난 낯선 남자에게 내키지 않는 예의를 차리는 중이었다.

헤르난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려 칼릭스의 눈을 피했다. 칼릭스의 새파란 눈 속에 보이는 경계심을 마주하는 게 힘들었다.

“여러 가지 소문은 전해 들었습니다. 하지만 소문이란 걸 크게 믿진 않아요. 어차피 잃은 기억, 굳이 그쪽과 내 관계의 진위를 이 자리에서 따지고 싶지도 않고요.”

“…….”

“아예 따지지 않겠다는 건 아니고. 소문이 아니라 사실을 알게 되면, 언젠가?”

농담처럼 가벼운 말이 웃음과 함께 나왔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말에서 자신을 향한 자그마한 의심을 읽어 냈다.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 속에서, 헤르난은 칼릭스를 다시 만나면 하고 싶었던 말들을 떠올려 봤다. 발신지 없는 편지에 혼자 해 봤던 답들을 떠올려 봤다. 하지만 그중 무엇 하나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헤르난은 그저…….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칼릭스의 앞에 이 말 한마디만을 내놨다.

이상하게 마음이 고요해졌다. 건강한 모습으로 귀환한 칼릭스가 제 앞에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게 괜찮게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의지할 곳이 필요하다는 듯 조심히 스스로의 두 손을 모아 쥐는 헤르난에게로 칼릭스의 시선이 닿았다.

“남작께선 기억이 사라진 배우자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기억이 돌아오길 바라십니까?”

겹쳐진 헤르난의 두 손을 빤히 바라보며 칼릭스는 물었다. 어쩐지 삐딱한 음성이었다.

“아닙니다.”

망설이던 헤르난이 느릿한 말 한마디를 내놨다.

칼릭스가 등받이에서 몸을 뗐다. 조금 가까워진 것뿐인데, 당황스러울 정도로 위압감이 느껴졌다.

“뭐, 내 기억이 남작을 찌르게 될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기억이 도대체 왜 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되찾기 힘들 거라고 하더군요.”

다신 되찾지 못할 기억. 그 말이 헤르난의 머릿속에 질척하게 엉겨 붙었다.

“……필요하신 게 있다면 뭐든 말씀해 주세요.”

헤르난은 말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내뱉은 소리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단호한 음성이 헤르난에게 닿았다. 눈치가 없는 저와 같은 사람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칼릭스는 자신과 그 사이에 확실한 선을 긋고 있었다.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칼릭스는 말했다. 하지만 답을 기다리기 힘들다는 듯 곧장 말을 이었다.

“난 당신과 관련된 모든 걸 잊었습니다. 내가 왜 전쟁터로 나서게 됐는지도 모르는 멍청이가 됐어요. 내 출정이 그쪽과 연관이 되어 있는 모양인데, 물으면 솔직히 답을 해 줄 건가요?”

“……공을 세워 작위를 얻는 게 목적이셨습니다.”

“왜요?”

칼릭스의 물음을 품에 안고 헤르난은 한동안 침묵해야 했다.

〈평생을, 옆에 붙잡아 두고 싶은 사람이 있어. 그런데 내가 잘못한 게 너무 많아서…… 이 얼굴 하나만 가지고는 붙잡질 못할 것 같아. 적어도 내 작위, 내 땅 정도는 있어야겠지.〉

2년 전, 칼릭스가 귓가에 속삭여 줬던 말들이 헤르난의 주위를 맴돌았다.

〈싫다고 해도 어떻게든 붙잡아 둘 거야. 헤르난. 널 내 옆에 억지로 붙잡아 두면, 날 미워할 거야?〉

복잡한 상황 속에서 헤르난은 길을 잃었다. 기억이 없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는 것만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칼릭스가 답답함을 느낄 걸 알면서도 쉬이 말이 나오질 않았다.

“혹시, 이혼을 위해섭니까?”

칼릭스가 말이 없는 헤르난에게 물었다.

이혼.

그 말이 헤르난의 고개를 다시 들어 올렸다. 칼릭스는 빤한 시선으로, 낯빛이 창백한 남자를 반겼다.

“……맞습니다.”

마법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헤르난은 답했다.

무거운 고요가 응접실에 내려앉았다.

헤르난의 말을 들은 칼릭스는 왜인지 당혹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헤르난은 미간을 찌푸린 남자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그저 티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찻잔만을 바라봐야 했다.

지금 이 시간이 스칼라에서 꾸고 있는 꿈처럼 느껴졌다. 현실감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요? 아니, 예상했던 바이긴 한데, 뭔가…….”

무심코 속마음을 내뱉었던 칼릭스가 말끝을 흐렸다. 헤르난은 어설프게 웃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짧은 순간, 칼릭스와 헤르난의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기억을 잃은 칼릭스의 무감하고 싸늘한 얼굴을 보면서 계속 웃는 낯을 유지할 자신이 없어, 헤르난은 금세 아래로 눈을 떨궜다.

“……이혼 준비는 이미 다 끝내 뒀습니다. 공증인을 옆에 두고 서명만 하시면 끝날 일입니다.”

후작님. 그 낯선 단어를 입에 올리며 헤르난은 말했다.

이혼 서류 같은 건 대충 불에 던져서 태워 버리라고, 칼릭스는 말했었다.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결국, 이렇게 금방 사용할 곳이 생기게 됐구나. 헤르난은 이상한 허무를 느꼈다. 칼릭스의 말을 무시하고 끝까지 서류를 모아 둔 건 자기 자신이면서 말이다.

“……도대체 언제 준비를 한 거예요?”

“오래전부터 해 왔습니다. 넉넉잡아 사흘 안엔 서류를 받아 볼 수 있게 하겠습니다. 염려 마세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내가 그냥 말로만 이혼해 달라고 했습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따 거울 한 번 봐 보세요. 이혼 안 해 주면 찢겨 죽을 줄 알라고 협박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보여요.”

“아뇨, 그럴 리가요. 아닙니다.”

놀란 헤르난이 급히 칼릭스의 말을 부정했다. 기억이 사라진 칼릭스의 상상력이 너무 과격해진 게 아닌가 걱정이 됐다.

“그럼 왜 그렇게 순순히 이혼을 해 주려고 합니까?”

“…….”

“스칼라 남작이 칼릭스 히페리온을 그렇게 사랑한다고, 온 세상 사람들이 떠들어 대던데.”

마주한 시선을 제게 붙잡아 놓으며 칼릭스는 말을 더했다.

“내 기억이 없어진 게 어떻게 보면 그쪽한테는 기회 아닌가? 나 같으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좋아하는 사람을 옆에 붙잡아 둘 텐데요.”

몸을 기울여 오는 칼릭스의 물음에 헤르난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만 깜빡여야 했다.

“할 수 있는 말 많잖아요. 사실, 소문과 달리 우리는 정말 사랑하는 사이였다. 죽고 못 사는 사이다.”

“저는…… 그런 거짓말은 못 합니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파란 두 눈 속에 붙들린 채로 웃어 보였다. 칼릭스가 바보같이 웃지 말라며 툴툴대던, 계면쩍은 얼굴이었다.

“욕심 없네요. 말도 안 될 정도로.”

얼핏 혼잣말에 가까운, 답 아닌 답을 내놓은 칼릭스가 묘하게 제게서 시선이 엇나가 있는 헤르난의 얼굴을 눈으로 훑었다. 헤르난은 사냥꾼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덫에 걸린 동물처럼 몸을 굳혀야 했다.

“내가 많이 못되게 굴었어요?”

칼릭스의 물음이 헤르난의 시선을 다시 끌어 올렸다.

“이미 들어 아시겠지만, 못되게 군 건 후작님이 아니라 접니다.”

“……미치겠네. 못된 짓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 하는 건 알죠?”

칼릭스는 의중을 모를 웃음을 지었다. 승리를 거머쥐고 돌아온 남자의 얼굴은 전장으로 나서기 전의 칼릭스와도 지난 삶에서 마주했던 칼릭스와도 달랐다. 삐뚤어진 것 같으면서도 이상한 천진함이 느껴졌다.

“예. 압니다.”

헤르난은 변명 없이 말을 마쳤다.

“내가 스칼라에서 당신이랑 무슨 짓을 하면서 살았을지 상상이 안 가는군요. ……스칼라에 대해 알아 둬야 할 만한 건 없습니까?”

대화를 끝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던 칼릭스는 또 한 번 괜한 물음을 내놨다.

“……아무것도 없으십니다.”

고개까지 저어 가며 헤르난은 답했다.

“너무 수상한 답변 아닌가?”

“좋은 거 하나 없이, 기억하실 필요가 없는 쓸데없는 것들만 가득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랬군요. 느릿한 어투로 칼릭스는 말했다.

응접실의 고요를 닮은 침묵이 그들을 찾아왔다. 대화를 마무리할 때가 왔다는 걸 알리는, 이전과 다른 정적이었다.

“남작과 나 사이에 처리해야 할 남은 일들은 내일 마저 해치우도록 하죠. 지금은 살짝 피곤하네요.”

칼릭스는 헤르난을 향해 미소 지었다.

“내일 정오가 지나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다만…… 길이 혼잡한 시간이라, 조금 늦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로 가려고요?”

“네?”

“여기 있을 거 아니에요?”

헤르난의 말을 들은 칼릭스가 반복해 물었다.

“디아만테 외곽에 머물 곳이 있습니다.”

“왜 거기까지 가요? 여기서 지내면 되잖아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칼릭스가 말을 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 이 저택을 돌봐 줬다고 들었어요. 이전처럼 편하게 써 주세요.”

칼릭스는 짐짓 친절한 얼굴을 하고 헤르난에게 말했다. 나를 너무 냉담하게 보는 거 아니냐는 농담이 따라붙어 왔다.

히페리온 저택에 머무르는 동안 헤르난은 내내 3층의 손님방을 써 왔다. 이런 일이 생길지 모르고 한 선택이었지만,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그러겠노라 답했다. 그 순순한 답변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대화가 끝을 맺었다.

응접실 전체에 어색한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칼릭스에게 헛소리나 다름없는 두서없는 인사를 남기고, 헤르난은 몸을 일으켜 응접실을 떠났다. 쓸모없는 왼쪽 다리며 어설픈 걸음을 따라붙는 칼릭스의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헤르난은 그가 절름발이라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헤르난은 이 새로운 세상에 떨어지게 된 이래 처음으로 멀쩡하지 못한 자신의 다리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오늘 이후로 칼릭스가 저를 쓸모없는 절름발이로만 기억하게 될까 무서웠다.

* * *

계단을 올라 방으로 돌아간 헤르난은, 아무도 찾아올 리 없는 공간의 문을 단단히 잠갔다.

오늘 일이 꿈일 거라는 착각은 하지도 말라는 듯 창밖의 풍경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조금씩 모습을 바꿔 갔다.

어느덧 붉은 노을이 세상을 덮었다.

반쯤 젖혀진 커튼 틈 사이를 비집고 나온 붉은 노을빛이 춤을 추듯 헤르난의 구두 끝을 건드렸다가 뒤로 물러서길 반복했다. 중북부의 날씨를 닮은 조금 차가워 보이는 색이었다.

불이 꺼진 방 안을 밝혀 주는 장난스러운 빛을 보며 헤르난은 얼굴을 찌푸렸다. 칼릭스가 헤르난 말론이란 인간을 향한 모든 기억을 잃었다는 게 이제야 실감이 났다.

헤르난은 편지가 끊긴 칼릭스의 소식을 수소문하다 아름다운 전쟁 영웅이 저주를 받아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을 접했다. 하지만 그 소문의 주인공이 칼릭스일 거란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지 않으려 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칼릭스에 대한 소문이 단순한 소문이 아니었다는 걸 몸소 알게 됐다.

헤르난 말론은 칼릭스에게 작은 점조차 되지 않는 의미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혼을 앞둔 정략결혼 상대이자 언젠가 벌을 내려야 할지도 모를 그저 그런 벌레 같은 인간 중 하나가 됐다.

당연한 일인데, 어쩐지 그 사실이 이상하게 괴롭게 느껴졌다. 하지만 괴로움이 몸집을 키워 갈수록 다른 한 가지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변해 갔다.

칼릭스의 행복엔 내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머릿속을 뒤덮고 있던 뿌연 안개가 걷히려 했다. 칼릭스가 말하던 미래도, 행복도, 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을 뿐이라고 누군가 끊임없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헤르난은 기억을 잃은 칼릭스가 당혹스러웠다. 옆을 내어 달라던 말을 까맣게 잊어버린 그가 조금은 원망스러웠으며 또 조금은 미웠다. 하지만 그 원망만큼 기쁘기도 했다.

칼릭스가 기억을 잃은 건, 그에게 진짜 행복을 찾아 주기 위해 이 세상이 움직인 덕일지도 몰랐다.

죽음을 넘어 다시 시작한 이 삶에서 루체에게는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루체가 바라는 건 뭐든 해 줄 수 있는 좋은 가족이었다. 그런 루체처럼, 칼릭스에게도 새로운 시작점이 생긴 거다.

칼릭스를 괴롭히던 네이로 후작이 거짓말처럼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칼릭스라는 사람을 갉아먹기만 할 좋지 못한 기억 역시 소리 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

이제 칼릭스의 앞에 남은 건 그가 바라던 명예와 권력, 그리고 헤르난 말론이 없는 완전무결한 삶이었다. 칼릭스는 그가 했던 말처럼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갈 수 있게 됐다.

‘칼릭스가 기억을 잃은 건…… 정해져 있던 운명이나 다름없는 거야.’

헤르난은 생각했다.

잘된 일이야. 정말 잘된 일이야. 헤르난은 몇 번이고 그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내 지난 삶들을 잊지 않겠다고 했잖아. 기억해 주기로 했잖아. 평생을 옆에 있어 달라고 말했잖아. 길을 찾는 걸 도와달라고 했잖아.

아니다. 그런 원망은 하면 안 됐다. 헤르난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기적인 생각이 뾰족하게 돋아나는 걸 막아야 했다. 헤르난은 쓸데없는 생각들을 털어 내려 했다.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워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상황을 만들지 않아야 했다.

먼 기억 속에 있는 남자의 모습으로, 하지만 진득한 어둠을 뒤집어쓰는 대신 환한 빛을 눈 속에 품고 칼릭스는 돌아왔다.

그야말로 7월 21일의 아침에 다시 눈을 뜨며 바랐던 변화가 아닌가. 말도 안 되는 부드러운 분위기에 절여져서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헤르난은 웃었다.

긴 시간을 돌아, 헤르난은 칼릭스와 루체 두 사람 모두에게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됐다. 올바른 자리를 찾아낸 거였다. 그걸 감사히 여기진 못할망정 눈물을 흘린다는 건, 억울해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축하해 줘야지. 좋은 일이잖아.”

작은 방 안을 헤매며 헤르난은 계속해 중얼거렸다. 그의 찬 목소리와 불편한 발이 끌리는 소리가 조용한 방을 울렸다.

〈돌아오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아. 해 주고 싶은 게 많아.〉

불현듯 헤르난은 칼릭스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기다려 줄래?〉

칼릭스가 하고 싶었던 말은 뭐였을까. 결국, 아무 말도 듣지 못하게 됐으니 궁금해할 것도 없었다.

〈나는…… 너를 마음에 담고 있어, 헤르난.〉

하지만 혹시라도…….

제멋대로인 데다 의미마저 없어진 망상 속에 잠겨 헤르난은 멍청하게 웃었다.

“다시 태어난 걸 축하드려요.”

침묵 속에 우두커니 멈춰 서서, 헤르난은 말했다. 칼릭스에겐 닿지 못할 속삭임이었다.

* * *

말뿐인 배우자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리 나쁘지 않았던 칼릭스의 기분은, 속된 말로 잡쳐진 상태가 됐다. 영 답이 안 나오는 문제가 그의 머릿속을 휘돌고 있었다.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네.”

벽난로 앞 소파에 깊숙이 등을 기대앉은 칼릭스가 중얼거렸다. 답이 안 나오는 문제 그 자체인 헤르난 말론을 향한 말이었다.

스칼라 남작 헤르난 말론은 소문이란 건 쉽게 믿을 만한 게 못 된다는 걸 몸소 증명하는 듯한 남자였다. 외모며 성격, 분위기부터 그와 나눈 대화까지…… 모든 게 칼릭스의 예상과 달랐다.

외면도 내면도 도통 그 악명과 맞지 않는 남자는, 제법 잘생긴 얼굴이 저런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 달린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가 죽어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보였다.

신경질적이고 파괴적이란 말과도 거리가 멀어 보였다. 소문처럼 음침해 보이긴 했으나 그보다는 위태로워 보이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 헤르난 말론이 우울한 낯짝으로 내뱉는 모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칼릭스의 뾰족하던 마음을 갈 곳 없게 만들었다.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며 대화를 미룬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당황해 물러난 거였다.

제아무리 온몸에 호승심을 두르고 다니는 사람일지라도, 스칼라 남작은 이기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활활 타던 가슴속 뜨거움도 미미한 웃음을 짓는 남작의 앞에선 채 5분도 못 가 바람을 맞은 모래성처럼 무너질 테니까.

물론, 남작이 예상과 다른 인물이라고 해서 그가 과거에 저질렀던 일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남작에게 역겨운 일을 당했을 것 같진 않았다. 팔려 가긴 했어도 말이다.

‘내가 그 사람한테 몹쓸 짓을 했을지도 모르지.’

툭, 툭 튀어나오는 이런 맥없는 생각이 안 그래도 아픈 머리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고작 반 시간여를 본 사람에게 느끼기엔 너무 과한 생각과 감정이 사방에서 칼릭스를 두드리고 있었다. 사라진 기억이 마음 밑바닥에 붙어 있던 복잡한 감정의 찌꺼기까진 데려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정말 이상하지만, 메리언의 이야기가 맞을지도 몰랐다. 제가 남작에게 연애편지 비슷한 걸 보냈다는 이야기 말이다. 편지의 본래 주인이라든가, 숨겨진 연인 따윈 없는 거다.

〈할 수 있는 말 많잖아요. 사실, 소문과 달리 우리는 정말 사랑하는 사이였다. 죽고 못 사는 사이다.〉

〈저는…… 그런 거짓말은 못 합니다.〉

하지만 마주한 남작이 내놓은 말이며 눈빛, 행동 모두 사이좋은 배우자를 앞에 둔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기억을 잃은 남편과의 대화가 어색해 그러는 게 아니라, 다른 이유로 자신과 말을 섞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내가 말을 너무 재수 없게 해서 놀랐나?’

다시 만나면 조금 부드러운 말투를 쓰는 게 낫겠어. 헤르난을 만나기 싫어 오만상을 찌푸렸던 건 까맣게 잊고, 칼릭스는 의미 없는 고민을 이어 갔다.

생각의 늪에 잠겨 가던 칼릭스의 정신을 깨운 건 그의 보좌관인 유리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고요한 서재 내부에 울려 퍼졌다. 방문자를 닮은 가볍고 빠른 소리였다. 망설임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경박한 소리기도 했다.

칼릭스는 유리가 서재 안으로 발을 들이는 걸 허락했다. 멍청한 생각만 반복하느니 유리에게 일이나 건네받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스칼라 남작의 얼굴을 저 멀리 날려 보내고 싶었다.

“안녕.”

여전히 소파 위에 늘어진 채로 칼릭스는 인사를 건넸다.

“후작님께선 과하게 즐거운 오후를 보내고 계시는 것 같네요.”

칼릭스 또래의 젊은 남자는 짧은 비꼼과 함께 간단한 인사를 마쳤다.

“이 저택에 관해 말씀드릴 게 많습니다.”

유리는 칼릭스가 삐딱한 얼굴로 자신을 보거나 말거나 허튼소리는 하지 않고 곧장 본론을 꺼내 놨다. 또. 스칼라 남작 얘기였다.

언제나처럼 밝은 유리의 목소리는 제법 긴 시간 동안 막힘없이 이어졌는데, 그가 칼릭스 앞에 내놓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말을 대강 요약해 보자면 이랬다.

히페리온 저택은 스칼라 남작이 다시 태어나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 그대로 이 저택이 품고 있는 모든 것이, 하다못해 바닥을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마저 남작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었다.

사용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칼라 남작은 기존에 있던 히페리온 가문의 사용인들 모두를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네이로 후작이 된 폰토스에게 돌려보냈다고 했다.

그 후, 남작은 히페리온 저택 전체를 자신의 사람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정원사의 조수라는 작은 자리까지도 말이다.

이야기의 끝에서, 유리는 칼릭스에게 히페리온 저택의 사용인들은 모두 남작의 충직한 종과 다름없으니 찜찜하다면 스칼라로 돌려보내거나 해고할 것을 추천했다.

하지만 칼릭스는 유리에게 그럴 필요 없다는 답을 내놨다. 사용인들을 갈아 치운 게 문제가 될 일인가 싶었다. 아니, 고맙기까지 했다. 아버지와 형의 사람들은 저도 싫었다.

“전혀 수상하게 여기질 않으시네요. 이상할 정도로요.”

“내가 남작을 수상하게 여겨야 해?”

“기억을 잃은 배우자를 붙잡아 두려고 수작을 부릴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저택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남작의 편이니 일을 저지르기 편할 겁니다.”

“너는,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것 같아.”

“조심성이 많은 거죠.”

떨떠름한 표정을 한 유리가 말했다.

“내가 보기에 남작은 아무런 계획이 없어.”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가 그 남자 얼굴을 5분만 마주 보고 있어 봐. 내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을 테니.”

칼릭스의 눈앞에 헤르난 말론의 얼굴이 다시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스칼라 남작이 비 맞은 개같이 불쌍한 꼴을 하고 뒤로는 나쁜 짓을 꾸미고 있는 그림이 잘 떠오르질 않았다. 세간에 퍼져 있는 추잡한 소문과 자신이 본 남자를 도통 섞을 수 없었던 것처럼, 역시나 유리가 내놓은 이야기들이 고작 한 번 만난 게 다인 남자와 섞이질 못했다.

정말 유리의 말처럼 남작에게 꿍꿍이가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가정이 영 소름 끼치고 짜증 나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애처로운 얼굴을 한 남작이, 그보다 더한 마음으로 자신을 원한다는 게…… 오묘한 즐거움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대해 아는 거라곤 뒷조사의 산물인 서류 속 글자들이며 수준 낮은 소문뿐이면서. 제대로 아는 건 없으면서.

칼릭스는 지금 자신이 남작에게 느끼고 있는 제멋대로인 감정들이며 허황된 상상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까요? 원하시는 대로 진행해 보겠습니다.”

유리의 물음에 칼릭스는 쉽게 답을 주지 못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의심과 경계가 힘없이 허물어지고 마음은 미지근해졌다. 확 끓어오르지 못했다. 무언가가 피어나려는 불씨 위로 자꾸만 찬물을 부어 대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마. 남작과 관련한 일은 다 나한테 맡겨. 아무리 그래도 부부 사이인데…… 내가 챙겨야지.”

유리의 예상과 달리 너무 침착한, 하물며 편안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로 칼릭스는 말했다. 부부 사이라는 말을 붙인 게 웃기긴 했지만 아주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뭘 하시려고요?”

“글쎄.”

굳이 뭘 해야 하나. 그 말은 목 뒤로 삼키고 칼릭스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남작이 말한 이혼 서류를 앞에 두고 깨끗이 관계를 정리하기 전까지만이라도, 그를 알아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싶었다. 은근슬쩍 말을 뭉개고, 무언가를 숨기려 애를 쓰던 헤르난 말론의 진짜 마음과 생각이 궁금했다.

“아무래도, 그 사람과 시간을 보내 봐야겠어. 네가 걱정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면서 말이야.”

칼릭스의 말을 들은 유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원하시는 걸 얻어 내기 어렵지 않을까요. 만만찮아 보이던데요.”

“굳이 뭘 얻어야 해? 난, 그냥 이것저것 알고 싶은 거야.”

마치 변명을 늘어놓듯 칼릭스는 말을 이어 갔다.

“……만약에, 나랑 그 사람 사이가 사실 아주 괜찮았으면 어떡해.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걸 수도 있잖아.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이혼부터 한다? 큰일 나는 거지.”

“사이가 아주 괜찮은 것치곤…… 후작님을 보러 가던 남작님의 얼굴이 너무 차갑던데요. 누가 봐도 긴장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네가 그 사람을 얼마나 봤다고? 잠깐 본 게 다잖아. 대충 봐서 그래. 사연이 있는 얼굴이었다고.”

“…….”

“적어도 난, 아주 말이 안 되는 가정은 아니라고 봐.”

칼릭스 역시 자신이 웃기는 소리를 내뱉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편지며 꽃 얘기만 아니었어도, 아니, 스칼라 남작을 만나지만 않았어도 이런 헛소리를 하지 않았을 텐데. 칼릭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밖으로 내뱉은 마음을 무를 생각은 없었다.

“유리. 난 그게 뭐가 됐건 후회할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아.”

칼릭스는 가까이서, 아니 남작의 바로 옆에서 그를 지켜보기로 했다. 반쯤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내지른 결심이었다. 계획이랄 것도 없었다.

“앞으로, 남작을 자주 만나 봐야겠지? 기왕이면 식사도 함께하는 편이 좋겠어.”

“예, 예. 마음대로 하세요.”

“……당분간 심심할 일은 없겠네.”

유리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칼릭스는 웃음 지었다.

주위를 빙글빙글 돌던 꺼림칙한 기분이 단번에 사라졌다. 그것만으로도, 칼릭스는 그가 내린 선택이 아주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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