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12. 포옹
성격 좋기로 유명하다는 라한 백작이 주최한 파티는 말 그대로 활기와 웃음이 넘치는 모임의 장이었다. 누군가는 라한 백작의 파티를 제국에서 열리는 가장 모범적인 파티라고 부른다고,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말했었다.
백작의 저택에서 시간을 보내 보니, 왜 그런 말이 나온 건지 알 것 같았다. 음악과 춤, 웃음과 대화가 어느 하나 모나지 않고 부드럽게 섞여 있는 연회장 안에선 어두운 퇴폐와 향락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분위기가 환하고 건전하다고 한들, 연회장을 우아하게 누비고 있는 이들이 소문의 스칼라 남작 부부를 궁금해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칼릭스 뿐 아니라 그의 옆에 있는 헤르난에게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호기심 어린 눈빛들이 꽂혔다. 칼릭스 히페리온이 왜 아직도 스칼라 남작과 함께인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일 거라고, 헤르난은 생각했다.
다행히, 괜한 시비를 걸어오거나 비웃음을 보내는 사람은 없었다. 헤르난이 듣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괜한 소리를 내놓는 이들 역시 없었다. 그건 헤르난이 칼릭스를 떠나 연회장 구석으로 도망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쉬고 돌아가겠다는 핑계를 대며 절 쫓아오려는 칼릭스를 돌려보낸 헤르난은, 동관으로 이어지는 복도 옆 발코니 근처에 마련된 벤치 소파 위에 자리를 잡았다. 불빛이 닿지 않는 공간에 만들어진 그늘이 그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줬다.
헤르난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연회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빛이 나는 세상 속에서도 가장 반짝이고 있는 칼릭스를 눈으로 따라갔다. 성별도 나이도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 밝게 웃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예전엔 호위 기사인 자신과 칼릭스 사이에 놓인 이 거리가 절대 좁혀지지 않을 마음의 거리처럼 느껴져 야속했었다. 이만큼의 거리도 충분히 아름다운데. 그때는 왜 그렇게 만족을 모르고 애달파 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일은…… 끝났다.
칼릭스의 예상과 달리, 파티에 참석한 손님 중 그가 잊은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헤르난이 다른 귀족들과 큰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닌 데다 이곳은 남부가 아닌 중부, 그것도 수도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수도의 가장 끝자락까지 칼릭스를 따라온 건, 말 그대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였다. 그 혹시 모를 일이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칼릭스가 웃음 짓자 주위의 사람들도 그를 따라 웃기 시작했다.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진 알 수 없지만, 다들 즐거워 보인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헤르난은 칼릭스가 여전히 자신과 함께하고 있다는 이유로, 혹여 사람들이 그를 나쁘게 볼까 봐 걱정했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인 모양이었다. 빛이 나는 사람은 그 옆에 무엇이 있건 본래의 빛을 잃지 않는 법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활기찬 분위기를 타고 어떤 남자 한 명이 칼릭스에게 말을 걸었다. 내내 그 근처를 맴돌던 이였다. 칼릭스는 자신에게 말을 붙여 오는 남자에게 화답했다. 거리가 멀어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필 순 없었지만, 마주하게 된 칼릭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듯했다.
남자는 검은색 머리칼과 어두운 눈동자 색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칙칙하고 우울해 보일 뿐인 저와는 다르게, 아름다운 데다 기품이 있어 보였다. 그건 멀어진 거리가 덧입힌 흐릿함도 숨길 수 없는 것이었다.
헤르난은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기 좋다는 생각을 했다. 제가 음침해 보이는 이유를 머리카락 색 따위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겠구나 싶어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때마침 서로의 팔짱을 낀 어린 영애들이 칼릭스의 잘생긴 외모에 대해 논하며 동관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지났다. 그 목소리에 흥분이 가득 담겨 있었다. 칭찬을 받은 건 자신이 아닌데,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아. 놀란 헤르난이 속으로 탄식하며 반사적으로 웃어 보였다. 얼핏 칼릭스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어두운 발코니 근처에 괜한 시선을 주지 않을 테니, 단지 혼자만의 착각일 확률이 높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웃음을 거둔 헤르난은 곧장 칼릭스의 시선을 피해 줬다.
헤르난은 연회장을 벗어나기로 했다. 자신의 앞으로 마련해 뒀다는 방의 위치를 칼릭스에게 미리 물어 둬 다행이었다. 칼릭스에겐 다시 돌아가겠노라고 해 뒀지만, 피곤하다는 뜻 역시 함께 비쳐 뒀으니 굳이 절 찾지는 않겠지 싶었다.
‘저 사람만 지나가면…….’
시야에 걸린 구둣발이 움직이는 걸 멍하니 바라보던 헤르난이 고개를 들었다. 그 구둣발이 그의 바로 앞에서 멈춰 선 탓이었다.
“저 기억하시죠? 아까 인사드렸었는데.”
잘 닦인 구두만큼이나 예쁜 얼굴을 가진 작은 체구의 남자가 말을 붙여 왔다. 흰 장갑을 낀 손에 샴페인 잔이 들려 있었다.
다행히, 헤르난은 자신에게 말을 건 이를 기억해 냈다. 연회장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돼 칼릭스에게 소개받았던 남자였다. 황녀의 아래에서 함께 싸웠던 전우 중 하나였다는 서북부의 백작 후계자. 칼릭스는 그를 틱스라고 불렀었다.
“마음 맞는 사람을 찾아서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뭐예요. 곧장 방향을 틀었어요.”
틱스는 헤르난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너무 친밀한 거리가 아닌가 싶었지만…… 소파의 폭이 좁아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말이 이어졌다.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거든요. 칼릭스는 덜렁 인사만 시켜 주고, 그 뒤론 남작께 말 한마디 못 붙이게 했잖아요. 일부러 그러던데요?”
“……말재주가 없는 절 대신해 대화를 이끌어 준 것뿐이지, 다른 뜻은 없으셨을 겁니다.”
남에게 소개하고 싶을 만한 배우자가 아니니까요.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며 헤르난은 틱스를 향해 멋쩍게 웃어 보였다. 이 가벼워 보이는 남자를 어떤 식으로 대해야, 저 때문에 칼릭스가 곤란을 겪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함께 말을 주고받을 사람은 많아도, 남작님처럼 내가 먼저 나서고 싶게 만드는 사람은 몇 없어요. 그런데 그 나서고 싶게 만드는 재밌는 사람을 칼릭스 혼자 차지하다니! 눈앞에서 선물을 뺏긴 기분까지 들었다니까요.”
“아쉽게도…… 저는 재밌는 사람이 못 됩니다.”
“그건 남작님만의 생각일걸요? 아하하.”
틱스의 물음 뒤로 그의 아름다운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웃음소리가 따라붙었다.
“이렇게 외진 곳에서 혼자 뭘 하고 계셨어요?”
“그저 쉬는 중이었습니다. 조금 어지러워서요.”
“세상에.”
짐짓 심각한 얼굴을 하고 틱스는 탄성을 내뱉었다.
“남작님처럼 근사한 분은 이렇게 어두운 곳에 혼자 계시면 안 돼요. 나같이 경박한 사람이 거머리처럼 들러붙고 마니까요!”
다리를 꼰 틱스가 더 가까이 붙어 왔다. 그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을 따라 잔에 담긴 술이 출렁였다. 금방이라도 밖으로 쏟아질 듯 아슬아슬한 모습이었다.
헤르난은 틱스의 말을 듣고 당황해 하마터면 쥐고 있던 케인을 떨어트릴 뻔했다. 칼릭스가 제게 틱스를 제대로 소개해 주지 않아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지만…… 틱스는 칼릭스의 또래처럼 보이기도, 그보다 한두 살 정도 더 어려 보이기도 했다. 어찌 됐건 자신보다 대여섯 살은 어린 게 확실했다.
저 나이 또래의 애들은 이런 식으로 농담을 거는 건가? 대놓고 비웃는 건데 내가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하는 건가?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 헤르난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제가 실례를 범하고 있는 걸까요?”
“……아뇨, 아닙니다.”
“다행이에요.”
헤르난과 눈을 맞추며 틱스는 속삭였다. 채도가 낮은 초록색 눈동자 위에 즐거움이 번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절 놀리고 싶은 게 맞는 모양이었다.
“남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게 질 낮은 행동이란 건 알지만…… 신기해서 그런지 자꾸 시선이 가요. 그 대단한 소문의 주인공이 바로 앞에 있잖아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모습을 하고 말이죠.”
헤르난은 틱스 같은 사람들이 참 어려웠다. 사교성이 좋고 말이 많은, 싱긋싱긋 웃는 얼굴을 한 조금은 무례하고 집요한 사람.
틱스 같은 이들은 저처럼 얼빠진 멍청이를 가지고 웃음거리로 삼는 걸 좋아했다. 오랜 경험으로 알게 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차마 자리를 뜰 수 없는 건, 틱스가 칼릭스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칼릭스와 함께 전장을 누비던 이였다. 목숨을 내걸고 함께 싸웠을 사람이었다. 헤르난은 틱스가 어떤 말을 내뱉든, 어떤 식으로 저를 깔보고 놀리든 참고 넘기기로 마음먹었다.
“소문이란 게 참 의미가 없죠? 그 누가 당신처럼 멋진 분을 그 스칼라 남작으로 보겠어요.”
하지만 이런 말에는 도무지 긍정을 내보일 수 없었다.
“나한테 당신 같은 남편이 있었으면, 매일 옆에 끼고 다녔을 텐데.”
거리가 너무 가까운 탓에 말을 건네는 틱스의 숨결이 귓가에 고스란히 닿아 왔다. 상당히 껄끄러운 감각이었다.
“지금처럼 외롭게 혼자 두지도 않을 거예요. 누가 훔쳐 가면 어떡해요!”
전과 같은 특이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헤르난은 예쁘게 휘어져 있는 틱스의 눈빛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틱스가 칼린 도프와 그녀의 남편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단순히 시비를 걸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지만 이내 헤르난은 그 말도 안 되는 징그러운 생각을 털어 내 버렸다.
그저, 백작 부부와 비슷한 사람에게 또 외로워 보인다는 소리를 듣게 됐네 싶어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이젠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처럼 속이 꽉 막힌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다시 무감해진 건지 괴로움이 해소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뭐가 됐건 다행인 일이었다.
“저와 무슨 얘기를 나누고 싶으신 건지 여쭙고 싶습니다.”
헤르난은 틱스에게 말했다. 계속해 웃는 낯을 유지하는 게 힘들었다.
“아, 본론이 궁금하셨구나. 마음이 급하셨어.”
“…….”
“일단 방으로 갈까요? 그 본론이란 거, 밤새 말해 줄 수 있는데.”
이전의 헤르난이라면 틱스의 말을 들리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틱스가 내놓은 말속에 숨은 뜻이 있다는 것 정도는 이젠 알아챌 수 있었다. 문득 들었던 의심이 단순한 의심이 아닌 모양이었다.
나에게 뭘 바라는 걸까.
헤르난은 피곤했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많구나, 정도의 생각밖에 나질 않았다.
아름다운 틱스와 함께 밤을 보내고 싶어 할 사람이 저 연회장 안에 얼마나 많을까. 세자면 열 손가락을 다 써도 모자랄 것이다. 틱스 본인도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런 사람이,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으면 저 같은 사람과 함께 하룻밤을 보내고 싶어 하겠는가.
더군다나, 아무리 이혼을 앞두고 있다고 한들 저는 아직 칼릭스와 부부로 묶여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전우의 배우자를 대하는 틱스의 행동은…….
밀려오는 자기모멸을 느끼며 헤르난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저런 한심한 남자조차 우습게 여기는 나는 도대체 얼마나 최악인 건가 싶었다.
“빠져나갈 핑계가 필요해요?”
“…….”
“칼릭스는 다른 사람들이랑 잘 놀고 있잖아요. 보는 눈 없는 사람은 두고 나랑 가요. 원하잖아요, 관심. 안 그래요?”
말을 마친 틱스가 헤르난을 향해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기울였다. 틱스는 놀란 헤르난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드러난 그의 셔츠 위에 그대로 술을 쏟아부었다.
“짠.”
“지금 이게 무슨…….”
“핑곗거리가 생겼네요.”
소파 아래에 대충 잔을 내려놓은 틱스가 헤르난을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헤르난은 꼭 술에 잔뜩 취한 사람처럼 비틀대며 그보다 키가 작은 틱스에게 의지해야 했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아, 남의 눈이 신경 쓰이셨구나! 역시! 아닌 척하면서 마음이 있었던 게 맞네요. 보는 눈이 있어서 몸을 사린 거야.”
“말이 왜 그렇게 이어집니까. 아뇨, 난…….”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남작님께서 이렇게 어둡고 외진 곳에 계셔 준 덕분에, 이 밀회를 눈치챌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본다고 한들 누가 누구인지도 알아보지 못할걸요?”
틱스가 속삭였다. 백작 부부보다 질이 나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르난은 틱스를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차마 자신보다 키도 체구도 작은, 언뜻 연약해 보이는 어린 남자를 힘을 줘 밀쳐 낸다는 게 망설여졌다.
헤르난은 결국 틱스를 조금 밀어 내는 쪽을 택했다. 그마저도 밀어 냈다기보다는 헤르난이 틱스에게서 물러난 것에 가까웠다.
“저는 이만 방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자리를 뜨는 걸 이해해 주세요.”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헤르난은 틱스에게 뜻을 전했다.
“쑥스러움이 많으시군요. 마음과 입이 따로 노는 그 모습이, 참 정숙해 보여요!”
밝게 웃어 보인 틱스가 헤르난의 팔짱을 껴 왔다. 그러고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헤르난의 귓가에 한마디를 더 속삭였다.
“남작께선 어떨지 모르겠는데, 나는 박히는 것도 잘하고 박는 것도 잘해요. 원하시는 대로 맞춰 드릴게요.”
지난 삶들을 겪어 오는 내내, 헤르난은 제게 이런 노골적인 욕망을 전해 오는 사람을 마주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삶에선 사랑 대신 저열한 관심이라도 받아 보라는 듯 자꾸만 이런 일이 생겼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나.
헤르난은 다시 틱스와 거리를 두려 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강한 힘이 헤르난을 얽어 왔다. 아예 내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전장에서 검을 들고 싸운 기사다운 힘이었다.
“지금…….”
“…….”
“나, 섰어요.”
헤르난과 눈을 맞추며 틱스는 귀엽게 웃어 보였다. 헤르난은 순간 얼이 빠져, 그를 따라 헛웃음을 쳐야 했다.
엮인 두 팔이 조금 풀어지려는 찰나에 누군가 헤르난의 어깨를 붙잡아 왔다. 연회장과 동관 사이를 잇는 복도 근처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틱스 못지않게 웃음이 잔뜩 섞여 있는 목소리가 헤르난의 귓전을 때렸다.
“안녕, 칼릭스.”
헤르난에게서 천천히 몸을 떼어 낸 틱스가 칼릭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의 얼굴을 닮은 예쁜 손이, 아쉽다는 듯 헤르난의 팔꿈치 위를 맴돌다간 떨어져 나갔다.
“무슨 일 있었나 봐.”
여전히 헤르난을 붙잡은 채로 칼릭스는 틱스에게 말했다.
“내가 실수로 남작님께 술을 쏟았지 뭐야. 어찌나 죄송한지……. 수습하는 걸 도와드리려고 했지.”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틱스는 말했다. 헤르난은 안타까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번들거리는 눈을 마주하기 껄끄러워 시선을 돌렸다. 기분이 나빴다.
“이제 내가 도와드리면 되겠네.”
칼릭스의 말이 이어졌다. 헤르난을 향한 것이었다.
“시간 잘 맞춰 왔죠?”
살갑게 말을 붙여 오는 칼릭스에게 헤르난은 맥없는 웃음만을 보였다. 칼릭스는 그저 즐겁다는 듯 웃고 있는데, 괜히 눈치가 보였다.
헤르난은 틱스와 자신이 나눈 싸구려 같은 대화를 칼릭스가 모르게 하고 싶었다. 알게 되면, 제가 먼저 틱스에게 수작을 부렸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틱스는 루체처럼 체구가 작은 미인이니까.
〈믿어요. 당신 말, 믿는다고요.〉
칼릭스가 건네줬던 친절한 말을 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의 믿음은 상황에 따라 그 견고함의 정도가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헤르난은 그가 칼릭스에게 변명을 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오지 않길 바랐다. 칼릭스가 셀과 제 관계를 오해했던 때와는 상황이 달랐기에 더 그랬다.
틱스는 기억을 잃은 칼릭스에겐 그의 배우자보다 익숙할 사람이었다. 함께 전장을 돌며 무수히 많은 위험을 헤쳤을 테니 말이다. 틱스가 아닌 제 편을 들어줄 칼릭스는 그의 기억과 함께 사라졌을 거라고, 헤르난은 생각했다.
헤르난은 슬쩍 틱스를 내려다봤다. 그 역시 칼릭스에게 저와 있었던 일을 말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다행이었다. 헤르난은 자신에게 향하는 칼릭스의 호기심이 사그라지길 바랐지만 이런 식으로 사라지게 되는 건 원치 않았다. 욕심이었다.
“저는, 이만 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헤르난은 다시, 작게 웃어 보였다.
“두 분 모두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헤르난은 그를 빤히 보는 칼릭스에게 또 틱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도망치듯 어두운 복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틱스에게서 억지로 일으켜 세워지면서 놓쳐 버린 케인을 집어 들 정신은 없었다.
헤르난이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칼릭스는 그의 불안한 걸음걸이를 지켜봤다.
까만 어둠 속에 헤르난이 잠겼다.
한숨과 함께 칼릭스는 몸을 숙였다. 다시 몸을 세웠을 땐 칼릭스의 손에 바닥을 뒹굴고 있던 케인이 들린 채였다.
“너. 무슨 짓을 했어?”
케인을 주워 든 칼릭스는 틱스에게 물었다. 평소 그와 말을 나눌 때처럼 무감한 목소리였다.
“무슨 짓이라니. 남작님을 도왔다니까.”
“그래. 도와주는 것 같더라.”
마주한 두 사람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뾰족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어졌다.
“칼릭스, 나야말로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묻고 싶어.”
“묻는 건 자유지.”
“아니, 네가 오니까 남작께서 겁을 잔뜩 먹고 도망을 치잖아.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꼭 학대당하는 개처럼 보여. 누가 보면 오해하겠다.”
삐딱하게 선 칼릭스가 틱스를 내려다봤다. 그제야 아차, 하는 얼굴이 된 틱스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학대라는 말은 이상하지. 교육이라고 해야겠다. 못된 남편한테 벌써 네 나름의 교육을 해 둔 거야?”
“……왜? 그런 느낌이 들어?”
눈을 동그랗게 뜬 칼릭스를 마주한 틱스가 안도를 담은 가벼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니. 재교육이 필요할 것 같아서. 여기까지 데려온 거 보면 당분간은 옆에 둘 생각인 것 같으니까, 조언을 해 주는 거지.”
“그래? 계속 말해 봐.”
칼릭스는 틱스를 따라 웃었다. 그의 손에 들린 케인의 끝이 대리석 바닥을 긁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크게 할 말은 없어. 그냥, 다들 네가 남작을 어떻게 처리할지 기대하고 있다는 것 정도만 알아 두라고.”
“너도 기대하고 있어?”
“그럼. 옆에서 구경할 수 있게 해 주면 좋겠다 싶을 정도야.”
“재밌는 소리를 하네.”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는 칼릭스의 얼굴에 여전한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분위기 역시 헤르난이 떠나기 전보다 한결 밝아졌다. 안도감을 느낀 틱스가 칼릭스를 따라 다시 웃어 보였다.
“아, 그런데…….”
곧장 말을 이어 가려던 틱스의 목소리가 흐릿해졌다.
“그런데?”
“이런 말을 더 해도 괜찮나 몰라.”
틱스는 칼릭스의 답변을 기다렸다. 스칼라 남작에게 수작을 부리는 걸 대놓고 걸린 이상, 조금은 수습을 해야 했다. 물론,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걱정은 없었다. 누가 남작의 말을 믿어 주겠는가. 그건 명목뿐인 배우자인 칼릭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사람 얘기에 눈치 볼 필요가 있어? 얼마든지 해 봐.”
칼릭스는 틱스가 원하는 답을 줬다. 역시나였다.
“그게, 아무래도 남작께서 많이 외로우신가 봐. 뭐라고 해야 할까…… 상스러운 말 써도 되지?”
“눈치 보지 말라니까.”
칼릭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 나한테 꼭 발정 난 개처럼 꼬리를 흔들더라!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사랑을 못 받아서 그런 걸까?”
“아.”
“너도 내가 쾌락에 약한 걸 알잖아. 남작이 아직 네 배우자라는 것도 깜빡 잊고, 그대로 넘어갈 뻔했어.”
“…….”
“그래도 넘어가진 않았으니, 오해는 하지 마.”
말을 마친 틱스는 후련하다는 듯 활짝 웃어 보였다. 칼릭스 역시 그를 따라 다시 소리 내 웃었다.
“틱스.”
어느새,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응.”
“널 볼 때마다 하던 생각이 있어.”
커다란 손이 틱스의 목깃을 대번에 틀어쥐었다. 미처 피할 새도 없었다.
“이 새끼를 죽일 순 없을까?”
칼릭스는 단단히 목이 졸린 남자를 끌고 발코니로 향했다. 그의 발길질에 닫혀 있던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로 젖혀졌다. 다행히, 틈 없이 이어지는 악사들의 연주가 칼릭스가 만들어 낸 거친 소리를 슬그머니 감춰 줬다.
머리칼을 헝클이는 차가운 밤바람을 느끼며 칼릭스는 발코니 난간 위로 틱스를 밀어뜨렸다. 틱스의 상반신이 순식간에 난간 너머의 허공으로 밀려났다.
“야! 나, 나 떨어져!”
틱스가 황급히 외쳤다.
지금, 틱스를 지탱해 주는 건 오로지 칼릭스의 왼손뿐이었다. 뒤집힌 코트 자락이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게 느껴지자 온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떨어질 거야. 그 생각이 틱스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칼릭스는 틱스의 멱살을 잡은 손을 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계속 쥐고 있을 생각 역시 없어 보였다.
“연회장을 왜 이런 고층에 만들어 놨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네.”
“……왜, 왜 이러는 거야.”
“뭐야? 왜 그렇게 무서워해. 떨어져도 죽지 않을 거 알잖아. 죽은 다음에 떨어지는 거면 몰라도.”
“칼릭스, 칼릭스.”
틱스의 두 손이 답을 주지 않는 칼릭스의 팔을 다급히 부여잡았다. 그런 틱스를 환영하듯 칼릭스가 손에 힘을 줬다. 일순간에 목이 졸렸다.
“왜.”
“미안해. 컥. 내가…… 너랑 남작 사이를 조금 오해했나 봐.”
“…….”
“잘못했어.”
“사과는 내가 아니라, 내 남편한테 해야지.”
오른손에 쥔 케인의 손잡이 끝으로 칼릭스가 틱스의 뺨을 툭툭 쳤다.
“할게, 사과할게.”
“아니다. 사과하지 마. 그 사람이 네 좆같은 상판을 또 봐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나빠.”
같잖은 열등감을 품고 사방에 똥을 싸지르던 한심한 인간, 자신을 그의 아래로 끌어내리고 싶어 수작질을 하던 머저리, 역겨운 취향을 가진 변태 새끼. 그런 틱스를 칼릭스는 감내했었다. 그곳이 참고 또 참아야 하는 전쟁터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칼릭스는 헤르난이 아닌 자신이 틱스의 모욕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것처럼 분노를 느꼈다. 억지로 웃어 보이던 헤르난의 어색한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머릿속이 새까매졌다.
“너 같은 게, 네까짓 게 감히…….”
칼릭스는 천천히, 손에 힘을 풀었다. 얼빠진 얼굴을 한 틱스가 벌레처럼 팔다리를 움직이며 매달리는 꼴을 빤히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틱스가 요란한 고함과 함께 완전히 뒤로 넘어가기 직전에야, 다시 그의 목깃을 잡아 줬다.
이대로 틱스를 저 아래 바닥에 처박아 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 내며 칼릭스는 말을 이었다.
“내가 뭐라고 할 건지, 알지?”
칼릭스의 목소리가 머물렀던 자리에 침묵이 똬리를 틀었다. 그 갑갑한 침묵 속에서 한참이나 숨을 정리하던 틱스가 비굴하게 웃어 보였다.
“그, 그럼. 앞으로 절대, 네 남편 앞에 안 나타날게.”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틱스는 말했다. 자신이 내놓은 답이 칼릭스의 마음에 들길 바랐다.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면 안 돼.”
“…….”
“네 이름이 그 사람 귀에 들어가는 것도 안 돼.”
“……그, 그럼. 진짜 조심할게.”
칼릭스는 말이 없었다. 대신 바람 소리가, 그의 침묵 위에 내려앉았다.
칼릭스의 손아귀가 틱스를 끌어 올려 발코니 바닥으로 내던졌다.
이어, 틱스의 손에 칼릭스의 구둣발이 닿았다. 어떻게 할까. 헤르난의 몸을 지분대던 것이라고 생각하니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케인을 쥔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몸을 말아쥐고 앓는 소리를 내는 틱스를 두드려 패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 게 힘들었다.
운 좋은 새끼. 읊조리는 칼릭스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지금 이곳이 자신의 영지였다면, 하다못해 디아만테의 저택이었다면 틱스는 진작 박살 난 팔을 혹은 다리를 붙든 채 울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날이 밝을 때까진 평화로운 파티에 참석한 손님의 본분을 다해야 했다. 그래야, 다음에 일을 쳐도 한 번은 모른 척을 해 줄 테니.
“실족사로 뒈지기 싫으면 알아서 꺼져.”
죽이고 싶다는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칼릭스는 친히 몸을 숙여 틱스에게 말했다.
쓰레기를 태우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었다.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됐다. 지금은 그보다 급한 게 있었다. 빨리, 헤르난에게 가야 했다.
하지만 그 전에, 틱스를 죽이진 못해도…… 몇 대 더 후려칠 수는 있겠지. 일어서려는 틱스를 구둣발로 멈춰 세우며 칼릭스는 헤르난의 케인을 그러쥐었다.
* * *
라한 백작이 솔스켄 후작과 그의 배우자 앞으로 마련해 준 방 앞에 선 칼릭스는, 달밤의 뜀박질에 흐트러진 숨을 말끔히 지워 냈다.
똑똑. 긴장한 칼릭스가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제법 힘을 준 노크 소리에도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예의가 아닌 걸 알면서도 괜스레 마음이 급해졌다. 속으로 숫자를 세어 보던 칼릭스는 결국 아홉을 넘어 열을 외기도 전에 벌컥 문을 열어 버렸다.
너른 손님방의 풍경을 눈에 담은 뒤에야, 칼릭스는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남들보다 걸음이 한참 느릴 수밖에 없는 남작 역시 이제 막 안으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헤르난은 소파 위에 벗은 코트를 올려 둔 채, 협탁 위에 놓인 조명등을 켜고 있었다. 저택의 주인인 백작의 취향에 맞춰진 은은한 불빛이 그런 헤르난을 비춰주고 있었다.
“후작님?”
기척을 느낀 헤르난이 칼릭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칼릭스의 시선이 헤르난의 얼굴에서 젖어 있는 셔츠 앞섶으로 느릿하게 내려갔다. 젖은 부분이라고 해 봐야 반 뼘밖에 되지 않는 데다 얇은 옷감이 살 위에 달라붙어 있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괜히, 그 모습이 묘하게 느껴져 민망했다.
다 남작이 가진 분위기 탓인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고작 셔츠 따위가 아니라 눈이 젖은 걸 보고 싶게 만드는…….
‘미친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칼릭스는 황급히 웃어 보였다. 별안간 찾아온 추잡한 생각을 감추고 지어 보인 뻔뻔한 웃음이었다.
“갑자기 쳐들어와서 미안해요. 문을 두드렸는데, 답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생각에 빠져 있느라…….”
“잃어버린 거 돌려주려고 따라왔어요.”
케인을 쥔 손을 슬쩍 들어 올리며 칼릭스는 말했다.
미안하다는 듯 어쩔 줄을 몰라 하던 헤르난은 대뜸 너른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걷었다. 방이 너무 어둡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달빛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걸 확인한 후에야 헤르난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빠른 걸음으로 칼릭스에게 왔다. 힘없이 끌려가는 헤르난의 왼발을 멍하니 보던 칼릭스는 제 앞에 헤르난이 선 뒤에야, 제가 먼저 그에게 갔어야 했다는 후회를 했다.
케인을 받아 든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거 하나 챙겨다 준 게 뭐라고 저렇게 고마워할까 싶었다.
‘고마울 일을 얼마나 안 하고 살았으면…….’
지금껏 헤르난에게 떨어 온 지랄이 너무 창피해 스스로 기억을 없애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갈 정도였다. 숲에서 들은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의심이 의심으로 끝나지 않았을 거다.
가학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야 스칼라 남작처럼 냉랭한 인상을 가진 미남자가 벌벌 떨며 눈치를 보고, 작은 일에도 황송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즐거울 거다. 하지만 칼릭스는 아니었다. 헤르난이 제게 보여 주는 저런 모습 하나하나가 당혹스럽고 미안하기만 했다.
마음이 쓰였다.
“후작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아뇨. 건강합니다, 건강해요.”
갑자기 찾아든 헤르난의 말에 칼릭스는 당황했다.
건강? 상황에 맞지 않는 헛소리를 내뱉은 스스로를 저주하며 칼릭스는 탄식을 내뱉었다. 재미없는 얼간이가 된 기분이었다. 순간 얼이 빠져 버린 절 걱정해 주는 헤르난의 얼굴을 마주하자 두 뺨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정적이 찾아왔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충분한, 오랜 정적이었다.
“……물이라도 한 잔 드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역시나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헤르난은 말했다.
헤르난은 티 테이블을 향해 뒤를 돌았다. 초조한 낯을 한 칼릭스가 물이 든 찻주전자에 손을 대는 헤르난을 빤히 바라봤다. 옆에 놓여 있던 잔에 물을 따르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 셔츠의 주름이 다시 만들어지고 펴지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달빛도 조명등도 완전히 밝히지 못한 어둠 속에서, 헤르난 말론만이 이상할 정도로 선명했다. 오묘한 기분이 칼릭스의 발끝에서부터 머리끝으로 따끔한 궤적을 그리며 움직였다.
불현듯, 헤르난의 손등 위에 칼릭스의 시선이 닿았다.
“잠깐만, 그대로 있어 볼래요?”
칼릭스는 돌아보려는 헤르난을 막아섰다. 그는 익숙한 듯 순순히 칼릭스의 말을 받아들였다. 물이 든 잔이 티 테이블 위에 놓이는 둔탁한 소리가 조용한 방을 울렸다.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다가갔다. 가장 먼저 손끝이, 헤르난의 어깨에 닿았다. 손은 어깨에서 등으로, 흰 셔츠에 진 주름을 따라 내려갔다. 이해할 수 없는 충동이 칼릭스를 두드리고 있었다.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떨고 있어요, 당신.”
칼릭스가 헤르난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대로, 그를 조심히 끌어안았다. 머리로 생각이란 걸 하기 전에 몸이 먼저 나간 거였다.
사람을 대뜸 끌어안다니. 나랑 틱스 새끼가 다를 게 뭐란 말인가. 그걸 알면서도, 칼릭스는 헤르난을 놓아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헤르난의 불안을 나눠 갖고 싶었다. 밀착한 몸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도와 뺨을 간질이는 검은색 머리칼이 기분 좋게 느껴지듯, 그 역시 제 온도를 기분 좋게 느끼길 바랐다. 안도를 느끼길 바랐다.
나는…… 이 남자를 끌어안고 싶었던 거구나. 품에 가두고 싶었었구나.
칼릭스는 헤르난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느꼈던, 하지만 그 뜻을 몰라 이름을 붙일 수 없었던 이상한 감각의 정체를 알게 됐다. 숨길 수 없는 만족감이 헤르난을 끌어안은 칼릭스의 입가를 간질였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헤르난을 안심시키는 일이었다. 혹시나 갖게 됐을지 모를 이상한 오해 역시 풀어 줘야 했다. 커다란 짐승에게 붙잡힌 초식 동물처럼 겁을 집어먹고 있는 그를 달래야 했다.
“틱스와는 무슨 얘길 했어요?”
조금씩 힘이 빠져 가고 있던 헤르난의 몸이 틱스의 이름을 듣는 순간 다시 어색하게 굳어졌다.
역시, 그 새끼를 그렇게 놔주는 게 아니었다. 저 아래로 처박지는 못해도 반쯤 죽여 놨어야 했는데. 후회가 칼릭스의 혀끝을 가시처럼 찔렀다.
“걔가 당신을 불안하게 한 거 알아요.”
칼릭스는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헤르난에게 말했다.
“아뇨.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뭐가 걱정돼서, 이렇게 긴장을 해요?”
차분히 귓가에 속삭이자 헤르난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지만 길어지려는 침묵이 거북했는지 이내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갔다.
“혹시 오해하실까 봐…….”
“무슨 오해요?”
“제가 친구분께 실례를 저질렀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 걱정했습니다. 그런 오해를 하셔도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전…….”
칼릭스의 힘 빠진 웃음소리가 헤르난의 말을 끊었다.
틱스에게 추근댔다는 오해를 살까 봐 걱정했다고? 기가 찬다는 소리밖엔 나오질 않는 생각이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후작님께선 의부증이 심하셨어요. 상담이 필요해 보일 정도로요.〉
루체 세이어에게 들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바로 어제, 칼릭스는 디아만테의 아름다운 화랑에서 헤르난이 입에 담았던 그 루체 세이어를 만났다. 한 달 뒤에나 시간을 내주겠다는 남자의 답변을 무시하고 다짜고짜 화랑에 들이닥쳐 얻어 낸 성과였다. 그러니까, 예의와 품위를 내던지고 얻어 낸 만남이었다.
별안간 칼릭스를 맞닥뜨리게 된 루체는 침실에 나타난 커다란 집게벌레를 독대한 사람처럼 싸늘한 얼굴을 했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곤 먼저 칼릭스에게 인사를 건네 왔다. 어딘가 모르게 언짢은 얼굴을 한 채였다.
장사꾼이 대놓고 떨떠름한 얼굴을 한다는 건,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과 루체 세이어의 사이가 개 같았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이유가 뭘까. 칼릭스는 도통 접점이 없어 보이는 루체와 자신의 관계에 의아함을 느껴야 했다.
그럼에도 칼릭스는 루체에게 도움을 요청해 보기로 했다. 어정쩡한 인사를 마친 루체가 내놓은 말이 칼릭스에게 확신을 줬다.
〈남작께선 오시질 않고…… 혼자 오셨네요.〉
고작 그 말 한마디가 확신의 전부인 건 아니었다.
칼릭스는 루체가 혼자인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며 헤르난을 찾는 것이나 자리에 없는 사람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것에서 그가 가진 헤르난을 향한 호감을 느낄 수 있었다.
최소한 쓸데없는 소문이 퍼지는 걸 걱정할 필요는 없겠구나 싶었다. 루체 세이어가 제 사라진 기억을 나쁘게 이용할 것 같지도 않았다. 칼릭스 히페리온이라는 사람에게 애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예 얽히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칼릭스는 루체에게 자신이 얻게 된 괴상한 기억 상실을 고백하며, 헤르난에 대해 알고 싶다고 호기롭게 외쳤다.
루체는 칼릭스의 말을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칼릭스가 그런 루체를 물고 늘어진 통에 기억을 잃은 남자는 그 답을 알 수 없을 몇 개의 물음을 억지로 입에 올려야 했다.
짧은 대화의 끝자락에서 루체는 칼릭스의 말을 믿게 됐다. 그 과정에서 애써 펴 놨던 얼굴이 다시 구겨졌지만, 다시 웃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루체는 그의 사무실로 칼릭스를 안내했다. 다만, 칼릭스가 누군가에게 붙잡혀 버린 통에 금세 걸음을 멈춰야 했다.
칼릭스를 붙잡은 건 낯은 익지만 이름은 가물가물한 남자였다. 강제로 참석해야 했던 자작의 모임에서 제게 몇 번이나 말을 붙여 왔던, 어디 자작인지 백작인지 뭔지의 셋째 아들.
그 이름 모를 남자는 저돌적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칼릭스에게 강하게 말을 붙여 왔다. 제가 유부남이라는 걸 모르나 싶어 짜증이 났지만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는 루체의 앞에서 성질을 부리기 뭐해 일단은 웃는 얼굴로 그를 떼어 놔야 했다. 모임에 참석하는 건 일단 남편과 먼저 상의를 해 본 뒤에 결정하겠다는 답변과 함께였다.
작은 실랑이를 마친 뒤에야, 두 사람은 아쉬움을 내보이는 남자를 지나 루체의 사무실에 들어설 수 있게 됐다.
〈그래도…… 오늘은 거절이란 걸 하셨네요. 기억이 사라지셔서 그런가.〉
비꼬는 게 분명한 어투로 루체는 말했다.
〈이전엔 거절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네. 적어도 저를 거절하시진 않았죠. 아니, 저 한 사람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남작님을 괴롭히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이용하셨을지…….〉
칼릭스는 루체의 말을 듣고 놀라 하마터면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엎을 뻔했다.
더 엉망진창인 이야기가 이어졌다. 칼릭스는 루체가 차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쏟아 내는 말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남작을 괴롭히기 위해 연인 비슷한 걸 만들었다는 것도, 그게 하필 저 남자였다는 것도 모두 믿기 힘들었다.
〈남작님은, 후작님의 새로운 결혼식을 직접 준비해 주고도 남을 분이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루체는 화제를 돌렸다. 가늘어진 눈빛 사이로 별것 아닌 얘기가 오고 갔다. 하지만 갑작스레 찾아 온 짧은 침묵 뒤에, 다시 대화의 양상이 바뀌었다.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저를 찾으신 건 아니겠죠?〉
이상한 물음 하나가 칼릭스 앞에 던져졌다.
〈아까, 내가 그 사람을 괴롭혔다고 했죠.〉
〈네.〉
〈이제 그러고 싶지 않아서 당신을 찾아온 겁니다. 상처 주기 싫어서 옛날 일을 알고 싶어졌어요.〉
〈……항간에, 두 분이 이혼을 앞두고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요.〉
더럽게 건방지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칼릭스는 루체를 향해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가 해 주는 이야기를 마저 듣고 싶었으니 말이다. 자신과 남작에 관해 이 정도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게 반갑기도 했다.
〈나는 그럴 생각 없습니다.〉
〈남작님도 그렇게 생각하실까요?〉
〈모르죠.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어찌 될지 모른다는 생각 정도는 하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남의 이혼에 대고 뭘 그렇게 캐물어요? 헤르난 말론에게 관심이라도 있습니까?〉
루체는 칼릭스의 말을 듣고 얼굴을 구겼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말을 이었다.
〈제가 두 분 관계를 잘 아는 건 아니에요. 남작님과도…… 얼굴을 맞대는 대신 편지를 주고받은 일이 더 많았고요. 기억을 잃기 전의 후작님과는, 음, 뜬구름 잡는 얘기나 했었죠.〉
〈…….〉
〈그래도 제가 아는 것들은 다 말해 드릴 수 있어요. 괜히 두 분 사이에 끼어들었다가 큰일을 겪기도 했으니까요.〉
〈……고마워요.〉
〈감사는 사무실 밖의 화랑에서 보여 주세요.〉
루체가 바라는 감사에 관해 곧장 긍정적인 답을 내놓은 칼릭스 덕에 이야기는 급물살을 탔다. 꽤 긴 시간 동안, 루체는 자신의 기억을 모조리 끌어모아 칼릭스에게 전해 줬다.
루체가 해 줬던 얘기 중에 하나가…….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후작님께선 의부증이 심하셨어요. 상담이 필요해 보일 정도로요.〉
바로 의부증이었다.
루체 세이어의 말을 의심하진 않았다. 하지만 끝끝내 미덥지 않게만 느껴졌던 의부증 소리마저 진짜인 모양이었다.
남작이 다른 사람이랑 말만 섞어도 난리를 쳤겠지? 아니, 인사만 나눠도 사람을 쥐 잡듯 잡았을 거야. 상대방은 반쯤 죽여 놨으려나.
과거의 자신을 향한 짜증이 마음에 다 담기 힘들 정도로 덩치를 키웠다. 하지만 아주 조금은 이해가 가는 구석도 있었기에 대놓고 욕을 퍼부을 순 없었다. 틱스와 함께 있는 헤르난을 과하게 신경 쓰던 제 모습 역시 남들에겐 충분히 이상해 보였을 테니까.
“그런 오해를 할 리가요.”
어울리지 않게 상냥한 어투를 쓰려고 애쓰며 칼릭스는 말했다.
어떻게 하면 남작을 안심시켜 줄 수 있을까. 도통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남을 달래는 일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달램을 받아 본 기억 역시 없어서, 모든 게 어색하고 어렵게만 느껴졌다.
“내가 한 건 걱정밖에 없어요. 틱스 그 개새끼가, 아니 틱스 그, 씹새끼가 당신 옆에 붙어 있는 걸 봤으니까요.”
“…….”
“아주 질이 나쁜 새끼예요. 전장에서 억지로 붙어 다니는 내내 몰래 죽여 버릴까, 죽인다면 어떻게 죽여야 할까, 그런 고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요.”
진심에 가까운 농담이었다. 아니, 농담에 가까운 진심이었다.
틱스는 스칼라 남작 같은 사람을 좋아했다. 그는 배우자에게 사랑 못 받는 사람을, 막 이혼하거나 사별한 사람을 데리고 노는 걸 즐기는 미친놈이었다. 위태로운 사람을 골라서 단물만 빼먹고 질린다며 버리는 게 취미와 다를 바 없었다. 칼릭스는 그것이 참 역겹다고 생각했다.
“나 때문에, 그 새끼가 남작님을 곤란하게 한 겁니다. 괜히 당신까지 밉게 보고 해코지를 하려고 한 거예요.”
말 한마디가 덧붙었다.
“미안해요. 내가 사과할게요.”
칼릭스는 헤르난을 더 꽉, 끌어안았다.
건넨 사과엔 괜찮다는 말이 돌아왔다.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괜찮습니다. 헤르난은 제게 그 세 가지 말밖에 못 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남들한테도 저러는 거면 어쩌나 싶어 걱정이 됐다.
“앞으론 그 새끼가 당신한테 아는 체할 일 없을 거예요. 그렇게 만들어 둘 겁니다. 약속할게요. ……오늘처럼 떨어져 있으면 안 되겠어요. 그런 새끼 꼬일 일 없게 내가 옆에 붙어 있어야지.”
칼릭스는 중얼거렸다.
의아함을 느끼는 헤르난의 기척을 알아챈 후에야 아차 싶어졌다. 옆에 있어 주겠다니. 웃으며 이혼을 말했던 사람이 할 소리란 말인가?
“이제…… 연회장으로 돌아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여전히 칼릭스의 품에 안긴 채로 헤르난은 말을 걸어왔다. 다른 분들이 기다리고 계실 거라고 몇 번을 반복해 말을 더했다.
헤르난은 허둥대고 있었다. 목소리는 한없이 침착했지만, 적어도 칼릭스가 보기엔 그랬다.
인사도 없이 급작스럽게 무리에서 빠져나왔으니 돌아가야 하는 것도 맞지만…… 채근하는 헤르난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저를 밖으로 내보내고 싶어 저러는 게 분명하니 말이다.
‘나만, 계속 이렇게 있고 싶은 건가.’
이딴 말도 안 되는 유치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헤르난과 제 자세가 이혼 이야기가 오고 가는 부부 사이엔 부적절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와의 포옹을 풀고 싶지 않았다. 배우자와 연인을 위한 예절이라는 걸 배우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순순히 제 품에 안겨 주면서도 동시에 저를 밀어 내는 남자가 칼릭스의 마음을 툭, 툭 건드렸다. 자꾸만 말을 걸고 싶고 관심을, 시선을 끌고 싶었다.
“돌아갈 생각은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어투가 꼭 삐친 10살짜리 애새끼의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헛웃음이자 비웃음이었다.
칼릭스의 말이 이어졌다.
“있잖아요, 남작님. 우리 사이에서 못되게 군 건 당신이 아니라 나라는 게 확실해진 것 같아요.”
“……아닙니다.”
“내 뭐가 예쁘다고 편을 들어주는 건지 모르겠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헤르난의 얼굴 위에 가만한 웃음이 떠올라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자주 끌어안고 그랬어요? 기억은 없어도 버릇인지 뭔지는 남았나 봐요. 너무 익숙해요.”
칼릭스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아주 예전엔 그러셨습니다.”
“어릴 때요? 남이랑 닿는 걸 싫어하면 싫어했지 포옹에 환장했던 기억은 없는데.”
“저한테는 그러셨습니다.”
머뭇거림이 묻어 있는 음성이 자그마하게 들려왔다.
기분이 묘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다 큰 남자에게 포옹이니 뭐니 하면서 매달렸다는 게 상상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헤르난이 꼭 죄를 지은 사람처럼 그 사실을 털어놓는 걸 보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린 걸 핑계로 수작을 부린 건 아무래도 나 같은데…… 이 사람은 반대로 생각하는 것 같지.’
칼릭스의 표정이 시금털털하게 변했다.
“내가 사용인들이랑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했었잖아요. 어이가 없었겠어요. 당신이 나처럼 사람을 끌어안고 있던 것도 아닌데.”
“아뇨. 그런 말씀을 하실 만했습니다.”
“아닌 것 같은데.”
“ …….”
“그런데 정말 이상해요. 어릴 때만 그랬다기엔 지금도 너무 편하게 느껴지거든요.”
10대 시절의 자신은 바닥에 붙어 다니는 땅꼬마나 진배없었다. 그런 제가, 키가 큰 헤르난을 품 안 가득 끌어안는 감각이 익숙할 리 없지 않은가. 매미가 나무에 매달리듯 헤르난에게 매달려 있던 감각이 익숙하면 몰라도.
“그 옛날 옛적의 꼬맹이가 더한 짓은 안 했어요?”
네. 칼릭스의 물음에 헤르난은 짧은 답을 내놨다.
비밀 많아 보이는 다급한 목소리를 곱씹으며 칼릭스는 헤르난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줬다. 할 줄 아는 거라곤 안아 주는 것밖엔 없는 천치가 된 것 같았다. 그를 달래 주고 싶은데, 역으로 달램을 받는 것만 같았다.
그냥…… 제 품 가득 저 남자가 들어와 있다는 게, 제 시야를 벗어난 곳으로 가지 못하게 붙잡아 뒀다는 게 기분 좋기도 했다.
기억을 잃기 전부터 마음속에 진득하게 붙어 있었을 게 분명한 소유욕이, 사라진 기억을 따라 숨어 있다가 조금씩 바깥으로 고개를 쳐들려는 모양이었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칼릭스는 자신이 욕심 많은 인간인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열이 오른 남작의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누르며 칼릭스는 웃어 보였다. 그놈의 의부증이 도지면 어쩌나 싶었다.
“파티는 끝났어요.”
헤르난을 놓아주며 칼릭스는 말했다.
풀려난 헤르난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칼릭스가 앞으로 할 말을,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뭘 하건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안타까웠다.
“쉬어야겠죠? 남작님도 저도.”
칼릭스가 놀란 얼굴을 한 헤르난을 마주하게 된 건 그가 코트를 벗어 들었을 때였다. 헤르난의 반응이 당황스럽긴 했지만, 칼릭스는 웃으며 그와 눈을 맞췄다. 이제야 돌아봐 주네 싶어 반갑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 먼저 씻으세요.”
조금…… 어감이 이상한가. 많이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방을 따로 쓰는 게 아니었나요?”
하얀 낯을 하고 헤르난은 물어 왔다.
방을 따로 쓰는 게 아니냐니. 칼릭스는 헤르난 못지않은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사냥 대회에선 같은 침대를 쓰려고 했었던 거 안다며, 나도 들은 게 있다며 당장이라도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헤르난을 놀라게 하긴 싫으니 속내를 숨기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밖에 사람 많은 거 봤잖아요. 방이 모자라요.”
“…….”
“이 방이 아니면 난…… 차가운 복도에서 잠들게 되겠죠?”
헤르난은 칼릭스가 불쌍한 척 내뱉은 말에 또 한 번 당황했다.
곤란해하는 남작의 모습이, 그러면 안 되는데 귀엽게 느껴졌다. 딱히 귀여울 구석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보고 있자니 뺨이 뜨거워졌다.
잠시 고민에 잠겼던 헤르난은 말을 잃은 칼릭스에게 이런저런 대안을 내놓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두 사람이 함께 밤을 보내지 않을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잠자코 헤르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칼릭스가 말 한마디를 내놓은 탓이었다.
“고민은 자고 일어나서 마저 합시다.”
칼릭스는 내버려 두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헤르난의 말을 막아섰다. 너무 황당해 뭐라고 대꾸하기도 힘든, 논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을 앞세워서였다.
칼릭스는 줄이 끊어진 목각 인형처럼 어색하게 구는 헤르난을 방에 딸린 욕실로 친히 안내해 줬다. 그뿐인가. 소매를 걷어 올리곤 하인을 대신해 욕조에 물을 받기도 했다. 목욕 시중 얘기까지 꺼냈다간 남작이 기절할지도 모르니 괜한 말을 더하진 않았다.
일단 씻고 난 뒤엔 방을 나서지 않겠지. 헤르난의 정신을 빼 놔야 한다는 소정의 목적을 달성한 칼릭스는 이따 다시 보자는 짧은 작별 인사와 함께 문을 닫았다.
그 후 칼릭스는 비어 있는 소파를 향해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욕실 앞에 쭈그려 앉아 남이 씻는 소리나 엿듣는 미친 인간이 될까 봐 무서워 달아나는 거였다.
창가에 덩그러니 놓인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은 후에야 마음이 진정됐다. 입 사이로 안도의 숨이 흘러나왔다.
‘……같은 공간에서 밤을 보내는 게 그렇게 싫은가?’
제가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함께 있어 줬을까? 이런 덜떨어진 생각이 덤으로 따라붙었다.
칼릭스는 도려져 나간 기억의 자리를 채우고자 과거에 대한 추측이며 망상을 계속해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나마 루체 세이어에게서 얻어 낸 이야기가 있어 별안간 생겨 버린 망상증의 증상이 조금은 덜어졌다.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은근슬쩍 비교하게 되는 부작용이 생기긴 했지만 말이다.
조금 더,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갈증이 났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천장에 매달려 있는 아름다운 등을 올려다보며 칼릭스는 중얼거렸다.
이혼 서류는 숨기고 모른 척 남작과 시간을 보내자. 칼릭스는 단순한 마음으로 일을 저질렀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헤르난이 생각보다 강하게 이혼을 원하고 있다는 거였다. 기억을 잃은 자신이 그와 가까워지는 걸 원치 않는 듯했다.
그 사람은 아직도 날 사랑하잖아. 그 사실에 우쭐했었던 마음이, 오만했던 자신감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자꾸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헤르난은 칼릭스 히페리온이 기억을 잃은 걸 중요한 기회로 여기고 있을지도 몰랐다. 지긋지긋한 배우자에게서 도망칠 기회 말이다. 그건 남작이 여전히 품고 있는 마음과 분리된 선택일 것이다. 사랑만으로는 견딜 수 없는 것도 있지 않겠는가.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나랑 헤어지려는 걸까.’
쓸데없이 목을 조르는 셔츠 깃을 풀어 내린 칼릭스는 루체 세이어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계속해 더듬어 봤다. 자신이 헤르난에게 상처를 줬다던 일들을 계속해 머릿속에 그려 봤다.
10분은 더 넘는 시간을 그러고 있자니 조금은 마음이 침착해졌다. 하지만 아직은 진정할 때가 아니라는 듯, 조금 전 복도에서 일어났던 일이 다시 칼릭스를 에워쌌다.
헤르난을 예의 주시하고 있지 않았다면, 분명 그는 틱스 그 역겨운 변태 새끼한테 머리부터 발끝까지 뼈도 안 남고 발라 먹혔을 거다.
〈제가 친구분께 실례를 저질렀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 걱정했습니다. 그런 오해를 하셔도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전…….〉
남작은 세상 사람 모두가 그를 질 낮고 추잡한 변태쯤으로 여긴다고 믿는 듯했다. 반쯤은 남작 본인도 스스로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남들에게 자신을 변명하거나 오해를 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부터가 그랬다.
그런 남작의 마음을 이용할, 나쁜 쪽으로만 눈치가 더럽게 좋은 새끼들이 많을 것이다. 그는 그런 놈들한테 목덜미가 붙잡힌 뒤에도 피해를 호소할 생각을 하지 못할 테니 더 큰 일이었다.
더군다나, 남작은 위험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란 게 아예 없는 듯 보였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낮아 보이는 자존감이며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자신감 탓인 게 분명했다. 어떻게 저 얼굴을 가지고 매일 주눅이 들어 있을 수 있는 건지. 여러모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설마. 내가 못생겼다고 구박까지 했나?’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이 그 정도로 돌아 있던 인간일 거라고 믿고 싶진 않지만……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런 소린 안 했겠지.칼릭스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었다. 그의 연한 백금색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완벽한 모양을 잃고 흐트러졌다.
“씹.”
스스로가 내뱉은 욕지거리 뒤로 작은 탄식이 이어졌다. 제가 내뱉은 것이 아니었다.
칼릭스는 감았던 눈을 급히 떴다. 소파에 있는 절 내려다보며 헤르난이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시간이 참 빨리도 갔다.
공들여 넘긴 게 아깝게 엉망으로 헝클어져 버린 머리에서 슬그머니 손을 뗀 칼릭스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마주한 헤르난의 몸을 가려 주고 있는 검은색 가운에서 창백한 피부로, 그림자 진 눈동자와 물을 머금은 머리칼로 자연스레 시선이 올라갔다.
가운이, 아니, 왜 가운을 저렇게, 파인 걸 입었지. 방 안의 온도가 삽시간에 뜨거워졌다. 남작의 몸에 남아 있는 따스한 열기 때문인 것 같았다.
왜 저런 걸 입었냐니. 백작이 준비해 놓은 게 저런 거니까 그렇겠지. 순간 몹쓸 잡념에 빠졌던 칼릭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불현듯 이상한 걱정이 쏟아져 들기 시작했다.
칼릭스는 헤르난과 같은 침대를 써야 한다는 것에 별다른 생각이 없는 상태였다. 조금 쑥스러울 수도 있겠다 정도의 작은 걱정만이 잠시 그를 찾아왔다 떠났었다. 하지만 지금 제 앞에 멀뚱히 서서 멋쩍게 웃고 있는 남작을 보자, 마음이 끝 간 데 없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칼릭스는 이 초조의 이유를 빈틈 하나 없이 몸을 꽁꽁 싸매고 다니던 사람의 무방비한 모습을 보게 돼 그런 것으로 돌리기로 했다. 저 허술한 모습에 적응이 되면, 이 이상한 당혹감도 사라질 거라고 믿었다.
“당신한테 욕한 거 아니에요.”
황급히 말을 건네는 칼릭스의 입가에 어물쩍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모습이 꼭 도둑질이라도 하다 들킨 사람처럼 보였다.
말을 마친 칼릭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를 일으켜 세운 건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초조였지만 그를 움직이게 한 건 헤르난이 열어 뒀던 창문을 닫아야겠다는 일념이었다.
저런 가운 하나만 입고 바람을 맞아 봐.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해? 바람 한 점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 창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칼릭스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바보 같은 짓을 저질러 버리기 전에, 할 필요 없는 말을 내뱉어 버리기 전에, 칼릭스는 도망 아닌 도망을 치기로 결심했다.
“……나도 씻어야겠네요. 피곤하면 먼저 자요.”
안 피곤하면 어쩔 건데. 되는 대로 내뱉어진 제 말을 곱씹으며 칼릭스는 한심함을 느꼈다.
“함께 침대를 쓰는 게 불편하실 겁니다.”
걱정이 담긴 얼굴로 헤르난은 칼릭스를 붙잡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머뭇대나 했더니, 저를 밀어 내려는 말이었구나.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불편할 게 뭐가 있겠어요. 나보단, 당신이 불편할 게 걱정이죠.”
칼릭스는 말했다. ‘나는, 내가 입에 담지도 못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이어 가다 결국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게 될까 무서워요. 일을 칠까 무섭고요.’ 그런 속내를 까발리고 마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제 어지러운 마음을 헤르난이 알아채지 않길 바라며, 칼릭스는 다시 미소 지었다.
그의 아름다운 미소가 오래가진 않았다.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좋은 시간 보내고 계시라는 등의 헛소리를 횡설수설 늘어놓다간 욕실로 달아났다. 적어도 겉모습만큼은, 엉망이 된 머릿속과는 달리 여유가 가득해 보였다.
그리고 그 밤, 칼릭스는 헤르난의 옆에서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불편할 게 뭐가 있겠느냐며 웃어 댔던 게 무색해지는 시간이었다.
친절하게도, 소파 위에 얌전히 앉아 칼릭스가 씻고 나오길 기다려 줬던 헤르난은 침대 위에선 조금 뒤척이는가 싶더니 금세 잠이 들었다.
저와 한 침대에 눕는 일 자체를 꺼리는 것 같던 남작은 막상 침대 위에선 더없이 평온한 얼굴을 보여 줬다. 같은 침대를 쓰는 게 처음이 아닌 것이 확실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거였다. 애초에, 의부증이 있는 인간이 배우자를 밤에 홀로 뒀을 리 없지 않겠는가. 루체 세이어 역시 남작과 제가 사냥 대회에서 같은 천막을 썼다고 말을 해 줬고 말이다.
처음은, 오직 기억을 잃은 칼릭스에게만 적용되는 문제였다. 처음으로 헤르난과 한 침대를 쓰게 된 칼릭스는 뾰족한 가시덤불로 만들어진 침대 위에 올라탄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다. 졸음은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달아나 버린 지 오래였다.
잠들기를 포기한 칼릭스는 침대 헤드에 등을 세우고 앉았다.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질 않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든 헤르난을 내려다봤다.
남작의 새까만 머리카락도 어두운 분위기도, 사랑스러운 구석은 보이질 않는 차가운 이목구비도, 큰 키도 모두 칼릭스의 취향과는 맞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꾸만 그의 얼굴 구석구석을 몰래 훔쳐보게 됐다.
〈외모니 취향이니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어지는 사람이 언젠간 눈앞에 나타나게 된다니까요?〉
참, 나. 술잔을 들고 떠들어 대던 나이 든 용병의 우스갯소리를 떠올리며 칼릭스는 헛웃음을 쳤다.
남작과 이런 식으로 엮여 있지 않았으면, 평범한 파티에서나 우연히 마주쳤다면 어땠을까. 남작은 분명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고 저 구석에 서서 불쌍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거다. 그런 남자를 어쩌면 제가, 바보 같은 소리를 하면서 꼬셨을지도 모르지.
칼릭스의 머릿속에 수많은 망상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대개 그가 헤르난에게 추근대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망상이었다. 차이는 것까진 떠올리지 않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해야 할 일. 잠이 든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조금씩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미래의 황제 폐하가 될 황녀께서 관을 쓸 때까지, 그녀가 하사해 준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을 때까지, 칼릭스의 앞엔 4개의 계절이 더 남아 있었다. 그 후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겠지만 적어도 임명식이 있을 때까지는 자유로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칼릭스에겐 그 시간이 필요했다. 이혼을 원하는 남편에게 기억을 잃은 자신도 예뻐해 주면 안 되냐며, 이전의 그놈과 저는 다르다고 옷자락을 붙잡을 수 있는 시간 말이다.
‘천천히 다가가야 할 텐데.’
들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고백이라도 해 버리면 큰일이 날 거다. 겁을 먹고 도망을 치겠지. 하지만…… 도망쳐도 괜찮았다. 쫓아가면 되니까.
단단한 손끝이 하얀 베개 위에 흩어진 헤르난의 검은색 머리칼을 괜스레 비비 꼬아 댔다.
자신과 한 침대에 눕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배우자가 어쩐지 서운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기억을 잃기 전의 저가, 적어도 틱스 같은 짓은 저지른 게 아닌 것 같아서 말이다.
다시 몸을 누인 칼릭스가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잠이 든 헤르난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꿈 대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