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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입맞춤 (14/21)

13. 입맞춤

조세핀이 보낸 우편부가 오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하다고, 헤르난은 생각했다.

헤르난은 수도에 하나뿐인 마법 통신소를 방문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저택을 나섰다. 하지만 부지런히 움직인 게 무색하게도 별다른 소득을 얻진 못했다.

스칼라에 있는 조세핀은 마법사를 통해 이미 사람은 출발했다는 답변만을 되돌려 줬다. 근래 남부 지역의 포털이 먹통이 되는 경우가 많았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이 더해졌다.

포털을 이용하는 데 어려움이 생겨 우편부의 이동이 늦어지고 있을 확률이 가장 높다는 건 헤르난도 알았다. 며칠을 기다리다, 결국 말을 빌리거나 마차꾼을 고용해 느리지만 착실하게 디아만테로 달려오는 중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우편부가 예상치 못한 곤란에 빠졌을 경우도 생각해 봐야 했다.

헤르난은 우편부의 소식을 수소문하는 쪽을 택했다. 그는 크고 작은 정보 길드가 모여 있는 디아만테의 중심부로 나가 적당한 길드 하나와 계약을 했다. 우편부를 찾는 일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걱정이 완전히 사그라든 건 아니지만…… 일을 맡기고 나니 조금은 안심이 됐다.

저택 바깥에서의 일을 마친 헤르난은 먼저 마음을 식히기로 했다. 투박한 답답함을 품은 채로 저택에 돌아가는 대신, 디아만테의 중심부를 시원하게 가로지르고 있는 강줄기를 따라 천천히 걷는 쪽을 택했다. 푸른 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너른 다리 위가 그의 목적지였다.

다리 위에 올라선 뒤에도 걸음은 느리게 이어졌다. 하지만 머리칼을 흔들고 지나는 바람이 어쩐지 기분 좋게 느껴져 자꾸만 자리에 멈춰 서게 됐다.

헤르난은 저 아래에서 차분히 움직이고 있는 검푸른 강물을 내려다봤다.

당장의 마음을 강바람에 삭인다는 건 그저 핑계일지도 몰랐다. 칼릭스가 있는 저택에 돌아가는 게 어렵게 느껴져 대는 핑계였다.

헤르난은 히페리온 저택을 가꿨지만, 저택을 제집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자신의 역할을 저택의 손님 이상으로 두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이젠 단순한 손님이 아니라…… 불청객이 되고 만 것 같았다. 있어서는 안 될 곳에 뻔뻔하게 발을 디디고 있는 기분이었다.

기억을 잃은 칼릭스의 세상에서, 헤르난은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제게 이상한 관심을 내보이는 칼릭스를 밀어 내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고만 있었다. 폰토스에게 자신의 말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한 거냐며, 물러설 때를 모른다고 비웃음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작은 한숨과 함께 헤르난은 다시 길을 나섰다. 저택으로 돌아갈 용기는 나지 않았기에 뒤돌지 않고 계속해 다리 위를 걸었다.

걷고 멈추기를 반복하며 동냥을 하는 거리의 아이들에게 돈을 쥐여 주기도,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연주자들의 노랫소리와 뒤섞여 자아내는 낭만을 몇 걸음 뒤에서나마 느껴 보기도 했다.

저녁이 찾아올 때까지 이곳에 있자. 그 후에 저택으로 가자.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시간을 죽이면 될 것이다. 마음을 어지럽게 만드는 칼릭스와의 포옹도, 그의 웃음도 더는 떠올려선 안 됐다. 칼릭스를 마주하지 않는다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안녕.”

짧은 인사가 생각에 잠긴 헤르난에게 들이닥쳤다.

헤르난은 그 인사가 제게 건네진 것인 줄 몰랐다. 여자의 목소리가 한 번 더 울려 퍼지고, 낯선 손이 자신의 어깨를 툭 건드릴 때가 돼서야 그는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뒤를 돌았다.

헤르난과 눈이 마주친 여자가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조금 어색한 발음으로 내뱉은 안부 인사와 함께였다. 입에 익지 않은 언어나 이국적인 외모, 복식으로 볼 때 바다 건너 동쪽 대륙에서 온 이인 듯했다. 그녀의 뒤에 물러서 있는 일행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헤르난이 여자에게 물었다. 곤란한 일이 있기에 급히 말을 걸지 않았을까 싶어서였다. 다른 대륙의 언어는 간단한 인사말 외엔 알지 못하니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녀를 돕고 싶었다.

“도움? 아뇨, 아닌가?”

손사래를 친 여자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헤르난은 여자의 목소리에 최대한 집중하며 그녀가 자신의 앞에 늘어놓는 단어들을 조합해 봐야 했다. 대충 무언가가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뭐가 마음에 든다는 걸까. 헤르난은 여자의 의중을 파악해 도움을 주고 싶었으나 쉽지가 않았다. 그녀의 뒤에 있는 일행들 역시 제국어를 하지 못하는지 절 보며 둥글게 웃고만 있었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잠시 말을 잃고 빤히 헤르난을 올려다보던 여자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을 완성하기 전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별안간 나타나 헤르난의 옆을 차지하고 선 남자 때문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칼릭스였다.

헤르난의 어깨를 감싸 안은 그는 여자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것이 눈앞의 여자에게 익숙할 동대륙의 언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몇 마디 말이 더 오고 갔다. 칼릭스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일수록 여자의 얼굴엔 아쉬움이 퍼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여자는 헤르난에게 처음 말을 걸었을 때처럼 안녕, 하고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다시 길을 떠나는 여자를 그녀의 일행들이 따랐다. 떠들썩한 웃음과 함께였다.

“……좋은 오후입니다, 후작님.”

제 몸을 감싸고 있는 칼릭스의 팔을 슬쩍 풀어내며 헤르난이 말했다.

물어보고 싶은 건 많았지만 일단은 칼릭스와 떨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칼릭스 역시 여자에게 헤르난이 자신의 일행임을 알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의도가 없었는지 순순히 그를 놓아줬다.

“아, 그게, 일이 있어서 잠시 나왔다가…… 산책을 하는데, 저 멀리에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뭡니까. 곤란해 보이길래 말을 걸어 봤죠.”

어울리지 않게 느리게 말을 잇던 칼릭스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정말 대단한 우연이죠?”

말 그대로 신기한 우연이었으나 바라던 우연은 아니었다. 마주하지 않길 바라던 남자를 코앞에 두게 된 헤르난이 작게 웃어 보였다.

“말이 통하질 않아 곤란하던 차였는데 후작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한시름 놨습니다.”

“정말 다행이죠.”

“……혹시, 그분이 제게 뭘 원하셨던 건지 여쭤도 될까요? 제대로 된 답을 드리지 못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아. 원하는 답을 들려줬으니 걱정 안 해도 돼요.”

칼릭스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내가 당신 남편이라는 것도 친절하게 알려 줬고요.”

“…….”

“그 여자가 남작님한테 관심이 있다잖아요. 그래서, 당신이 유부남이란 사실을 친히 알려 줬죠. 반지를 끼고 있지 않아 몰랐다며 미안해하더군요.”

칼릭스의 말끝에 그의 자세만큼이나 삐뚜름한 웃음이 따라붙었다. 칼릭스가 가진 아름다운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꼭 뒷골목의 건달처럼 불량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 삐딱한 느낌만은 기억을 잃기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 듯했다.

“왜 말이 없어요? 당신도 그 여자가 마음에 들던 차였는데, 내가 눈치 없이 쫓아 버린 거예요?”

여전히 웃는 낯을 하고 칼릭스는 물었다. 눈가에 장난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뭐라 말을 드려야 할지 몰라서…….”

헤르난의 말이 더 이어지질 못하고 흐려졌다.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을 받아들이는 데엔 항상 시간이 걸렸다. 농담을 알아듣지 못하고 어울리지도 않게 진지한 반응을 내보이는 거면 어쩌나 싶어 곧장 답을 내놓는 게 망설여지기도 했다.

“잘 쫓아 버린 것 같네요. 앞으로도…… 잘 쫓아낼 수 있어야 할 텐데.”

중얼거리던 칼릭스가 곧장 말의 방향을 돌렸다.

“내 외국어 실력 어땠어요? 괜찮지 않았나?”

이전의 대화는 잊으라는 듯, 칼릭스는 삐딱한 자세를 풀며 활짝 웃어 보였다. 순식간에 그를 둘러싼 분위기가 바뀌었다.

“저는 타국의 언어를 잘 모르지만…… 조금도 어색하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대단하십니다.”

헤르난은 칼릭스가 앞서 내놨던 말들을 단편적으로만 이해하고 깊이 생각하진 않으려 했다. 예상치 못한 문제에 골머리를 앓는 것보다는 칼릭스가 이끄는 대화의 방향을 따르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사실, 대단한 정도는 아니에요. 용병들한테 배운 거라 어투가 거친 게 흠이기도 하고요. 뭐, 지금 당장 동대륙 한가운데에 떨어진다고 해도…… 언어 문제로 당신 고생시킬 일은 없겠지만요.”

칼릭스는 쑥스럽다는 듯 헛기침을 하면서도 그 끝에 슬쩍 자랑을 끼워 넣었다.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랬다.

“그런데 꼭 선생님처럼 칭찬을 해 주시네요. 그 격려가 이렇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호위 기사 시절에 내 선생님 노릇도 해 준 모양이에요. 너무 내 맘대로 생각하는 건가?”

“제대로 된 선생님은 아니었습니다. 저보단 후작님께서 더 선생님 같으셨죠.”

제법 정확한 추측을 내어놓은 칼릭스에게 헤르난은 답을 줬다. 괜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요? 자세한 얘기를 듣지 못하면 잠을 설치게 될 것 같은데요. 너무 궁금하네.”

“……후작님께서, 제게 글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정도의 얘기는 괜찮겠지. 망설이던 헤르난이 답했다. 옛 기억을 알리는 것에 대한 걱정이나 까막눈이었던 시절을 향한 부끄러움보단, 글을 가르쳐 준 칼릭스에 대한 고마움이 더 컸기에 내놓을 수 있는 말이었다.

“내가 잘 가르쳐 줬어요?”

살짝 고개를 기울여 헤르난과 시선을 맞춘 칼릭스가 물었다. 그의 밝은 백금색 머리카락 위로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한 세상의 색깔이 섞여들고 있었다.

“네. 최고의 선생님이셨습니다.”

말을 마친 헤르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짧은 적막이 두 사람 사이에 놓였다. 하지만 이내 칼릭스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침묵이 지키고 있던 자리를 빼앗았다.

“또 한 번 내 학생이 되는 건 어때요? 아까 그 여자가 쓰던 동대륙 말을 알려 줄게요.”

“…….”

“아, 일단 거절하는 말부터 가르쳐 줘야겠다. 그렇죠?”

속삭임에 가까운 물음에 바람이 답을 대신했다. 바람이 모자를 훔쳐 갔다는 탄성이 저 멀리에서 들려올 정도로 세찬 답변이었다.

머뭇대던 칼릭스의 손이 헤르난의 머리 위에 닿았다. 갑작스러운 바람을 맞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기 위함이었다. 헤르난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가만히 서서 칼릭스를 올려다봤다. 마찬가지로 바람에 헝클어진 칼릭스의 머리카락을, 웃음 띤 얼굴을 또 그의 손길만큼이나 부드러운 두 눈을 바라봤다.

순간, 칼릭스와 제 사이가 너무 친밀하게 느껴진다는 이상한 착각이 일었다.

하지만 헤르난은 금세 정신을 차렸다. 제가 칼릭스에게 동대륙의 말을 배울 시간은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이혼을 앞두고 있었다. 함께 지내는 걸 상상할 수 없는 관계였고 칼릭스도 그걸 알았다.

단지…… 대화를 이어 가기 위해 가볍게 건넨 말이겠지.

“모자란 학생을 가르치는 게 답답하실 겁니다.”

그래도, 헤르난은 칼릭스의 기분을 맞춰 주기로 했다. 즐거워 보이는 칼릭스에게 실현 불가능한 일을 말하신다며 찬물을 끼얹을 순 없었다.

“나는, 하나뿐인 학생에게 어떻게 굴었어요?”

칼릭스는 물었다. 하지만 헤르난이 답을 할 새도 없이 황급히 물음 하나를 덧붙여왔다.

“잘해 줬죠?”

“네. 많이 답답하셨을 텐데도 제게 화 한 번 내질 않으셨습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칼릭스는 그랬었다. 칼릭스는 사실 그에게 교육자의 재능이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헤르난에게 상냥한 선생님이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헤르난의 말을 귀에 담은 칼릭스가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나한테 당신은, 아주 특별한 학생이었을 테니까.”

칼릭스는 곧장 헤르난을 향해 팔을 내밀었다. 하지만 헤르난이 에스코트를 할 준비를 마친 칼릭스를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자 슬금슬금 거리를 좁혀 왔다.

“이미 여러 번 내준 팔이잖아요. 익숙해질 때가 된 것 같은데.”

“…….”

“내가 케인보다 훨씬 튼튼해요. 안정적이고.”

헤르난의 눈치를 보며 칼릭스는 말을 늘어놨다.

망설이던 헤르난은 결국 칼릭스가 내민 손을 잡았다. 거절의 말을 건네 봤자 못 들은 척하리란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헤르난은 칼릭스가 온갖 핑계를 대며 더 몸을 붙여 오기 전에, 보다 가벼운 부축을 받는 편을 택했다.

“……감사합니다.”

칼릭스를 받아들이며 헤르난은 작게 말했다.

“부부 사이에 감사는요.”

혹시 놓쳐 버리기라도 할까, 헤르난을 단단히 붙잡아 주며 칼릭스가 웃어 보였다. 그 웃음 속에 수줍음이 녹아 있었다.

“다리 끝으로 가서, 함께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가요. 아니다. 밖에서 식사를 마치고 들어갈까요? 좋은 곳을 아는데.”

쉽게 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예상했다는 듯 칼릭스는 헤르난의 귓가에 대고 계속해 말을 이어 갔다.

“나는 디아만테가 아직도 별천지같이 느껴져요. 못 해 본 게 많아서 그런가 봐요. 너무 마음 아프죠? 그래도 이렇게 우연히, 이 예쁜 다리 위에서, 하나뿐인 남편과 만나게 돼 다행이에요. 나랑 같이 놀러 가자고 조를 수 있잖아요.”

못 해 본 게 많다니. 거짓말. 헤르난은 속으로 웃어 보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기억을 잃은 남자의 투정이 귀엽게 느껴졌다.

동시에 곧장 저택으로 가자는 말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칼릭스의 말속에 담긴 분위기가 평범한 부탁과는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거절을 입에 담기가 힘들었다.

“……원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헤르난은 칼릭스를 거절하지도 물러나지도 못했다. 칼릭스의 호기심에 선을 확실히 그어야 함을 알면서,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것마저 칼릭스가 원하는 대로 따라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느덧, 하늘 전체에 붉은 노을빛이 퍼졌다.

불그스름한 빛을 받은 칼릭스의 얼굴에도 기쁨이 번졌다. 위를 향하는 그의 입꼬리를 따라 새파란 두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 모습이, 강바람이 금빛 머리칼에 입을 맞추고 떠나는 풍경이 아주 느린 속도로 헤르난을 지나갔다.

〈나는…… 너를 마음에 담고 있어, 헤르난.〉

자신을 반쯤 끌어안은 칼릭스의 옆에서, 헤르난은 2년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나쁜 짓을 저지르는 아이처럼 심장이 뛰었다.

헤르난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봤다. 도망칠 수 없게 붙잡힌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회피였다.

“다리 아프면 말해요. 업어 줄게요.”

칼릭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헤르난에게 다정한 말을 건넸다. 깜짝 놀란 헤르난은 괜찮다는 답을 몇 번이고 반복해 내놔야 했다.

그 민망한 대화를 끝으로, 두 사람은 앞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새로운 악곡을 펼쳐 든 악사들의 노랫소리가 그들의 뒤를 쫓았다.

* * *

괜히 왔다.

이제는 솔스켄 후작이 된 칼릭스 히페리온을 앞에 두고 로베 파텔은 생각했다.

로베는 헤르난을 통해 히페리온 저택을 찾은 손님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헤르난의 손님이면서 동시에 폰토스가 헤르난의 앞으로 떠넘겨 버린 중매쟁이가 모신 손님이었다.

중매쟁이는 로베가 지인인 헤르난과 그의 배우자인 칼릭스를 만나 함께 차를 마시는 상황을 만들었다. 실상은 곧 전남편이 될 남작이 낀, 로베와 칼릭스의 예비 맞선이었다. 다만 칼릭스 히페리온은 이것이 맞선인 걸 몰라야 했다.

정해져 있던 순서에 따라, 헤르난은 차 한 모금을 목 뒤로 넘기기 무섭게 칼릭스의 보좌관인 유리에게 이끌려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스칼라에서 온 사용인들에게 일이 생겼다는 핑계와 함께였다. 당연히 일 같은 건 없었다. 로베와 칼릭스의 원활한 대화를 위해 빠져 준 거였다.

헤르난이 사라진 응접실엔 로베와 칼릭스 둘만이 남게 됐다. 이혼을 앞두고 있다곤 해도 여전히 배우자와 함께인 남자를 결혼 상대로 살펴봐야 하다니. 로베의 입장에선 참 민망한 상황이었다.

로베는 아버지의 등쌀에 못 이겨 반쯤은 강제로 이곳 히페리온 저택까지 오게 됐다. 영 껄끄러운 시작이었다. 하지만 로베의 걱정은 그의 맞선 상대를 만나기에 앞서 헤르난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부드럽게 풀렸다.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차가운 인상을 가진 스칼라 남작은 보기와 다르게 상냥한 사람이었다. 칼릭스 히페리온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그가 자신의 배우자를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가 느껴졌다.

그런 헤르난 덕분에, 로베는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상대방이 마음에 들면 잘해 보자는 마음을 갖게 됐다. 곧 전남편이 될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다니. 칼릭스 히페리온이 꽤 괜찮은 사람인가 보다 싶었다.

하지만 헤르난이 사라진 응접실에 칼릭스와 단둘이 남은 후에는 말이 달라졌다. 로베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긍정적인 생각이 티포트 안의 찻잎만큼도 남지 않게 된 탓이었다.

헤르난은 로베에게 칼릭스와 그가 아주 잘 맞을 것 같다는 얘기를 해 줬었다. 어찌나 진심으로 사람을 칭찬해 주는지, 로베는 헤르난의 말처럼 자신이 정말 칼릭스와 잘 맞을 줄 알았다. 영혼을 교감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처음엔 정말 느낌이 좋았다. 내내 분위기가 화기애애했고 오고 가는 이야기를 만드는 칼릭스의 목소리에도 웃음이 묻어 있었다. 헤르난은 말없이 작게 웃고만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헤르난이 자리를 비우게 되면서부터 분위기가 급변했다. 칼릭스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웃음이 순식간에 사그라든 게 그 시작이었다.

“당신, 뭡니까?”

응접실 문 너머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던 칼릭스가 로베에게 물었다.

듣기 좋다고 느꼈던 다정한 목소리와 반짝이던 파란색 눈이 순식간에 교만함을 둘렀다. 별것 아닌 침입자를 향한 짜증 섞인 경계심이 그 교만을 뒤따랐다.

너무 빠르게 변한 칼릭스의 모습에 로베는 순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중매쟁이도 스칼라 남작도 칼릭스 히페리온의 인격이 2개로 쪼개져 있다는 말은 안 했으니 당연했다.

당황한 로베는 미리 준비해 놨던 말들을 칼릭스의 앞에 모조리 늘어놨다. 일자리를 구할 때나 할 법한 자기소개와 자신이 스칼라 남작과 잘 아는 사이라는 거짓말이 한데 뒤섞였다.

“아. 우리 형 때문에…… 스칼라 남작을 알게 되셨다고요. 내가 전쟁터에 나간 사이에.”

그리고 칼릭스 히페리온에게 비웃음만 샀다.

“이상하네요. 남작에게 붙어 있는 떨거지, 아니, 내키지 않는 사람 중에 당신 같은 사람은 없었는데요. 내게 직접 소개해 줄 만큼 아끼는 사람은 더더욱 없고 말이죠.”

“…….”

“그 사람한텐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참 이상해요.”

꿈에서 다시 볼까 무서운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칼릭스는 말했다.

로베는 이 맞선의 전초전이 망해 버렸다는 걸 느꼈다. 구겨진 분위기를 다시 펴 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칼릭스와 로베의 만남은 발을 앞으로 디뎌 보기도 전에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도대체 왜, 중매쟁이는 제게 이런 남자를 들이밀었을까. 자기 배우자에게 집착하고 있는 남자를 만나서 뭘 하라고? 로베는 한참을 고민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런 로베에게 곧, 한 가지 깨달음이 찾아왔다.

‘……남작이 도망치려는 모양이네.’

소문과 다르게 얌전해 보이던 헤르난의 모습이 로베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쩐지, 구린 소문이며 음울한 분위기가 마음에 걸림에도 그에게 인간적인 호감이 간다 했었다. 칼릭스 히페리온이 자기 남편을 독점하려고 세간에 나쁜 소문을 뿌린 게 분명했다.

그 못된 배우자에게서 도망치고자, 남작은 새로운 남자들을 칼릭스 히페리온에게 소개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언젠간 하나쯤 걸려들겠지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난…… 저 남자의 몇 번째 맞선 상대일까.’

그런 생각을 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너무나 따뜻하게 느껴지던 히페리온 저택의 풍경이 로베의 안에서 점점 어둡게 변해 갔다. 유령의 집에 발을 잘못 디뎌 버린 기분이었다.

“혹시, 우리 맞선 보는 겁니까?”

칼릭스는 로베에게 물었다. 제법 친절한 웃음과 함께였으나 로베는 그의 친절을 믿지 않기로 했다.

“예. 맞습니다.”

반쯤은 억지로 이 자리에 끌려온 절 다독여 주고 마음을 써 주던 스칼라 남작에게 안타까움과 배신감을 동시에 느끼며, 로베는 칼릭스에게 이 만남의 진실을 고백했다.

로베에게 진실을 전해 들은 칼릭스는 다시 웃어 보였다. 히페리온 저택의 모든 게 흉물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한 로베의 눈에는 그런 칼릭스의 손에 들린 찻잔이 꼭 흉기처럼 느껴졌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의 배우자와 갈라설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헤르난 말론은 그가 칼릭스 히페리온과 이혼이라는 평화로운 절차를 밟을 수 있을 거란 꿈에서 빨리 깨어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자기 남편에게 맞선을 보게 하는 게 아니라, 남작 자신을 도울 사람을 구해 히페리온 저택을 탈출하는 편이 맞았다.

당장 중매쟁이를 찾아가야지.

로베는 마음먹었다. 중매쟁이가 남작을 돕고 있는 게 아니라면…… 최대한 빨리, 그에게 솔스켄 후작이 미쳤다는 걸 알려 줘야 했다.

* * *

장미 정원의 한가운데에 서서, 헤르난은 영원히 시들지 않을 꽃들을 바라봤다.

2명의 정원사와 1명의 마법사가 함께 완성시킨 장미 정원은 헤르난이 칼릭스를 위해 마련한 공간이었다. 내내 활짝 피어 있을 꽃들 사이에 선 칼릭스가 보고 싶어서…… 지금 생각하면 낯 뜨겁기만 한 우스운 마음이 꾸려 낸 정원 속의 정원이었다.

그런 의미가 담긴 곳에 칼릭스가 아닌 자신이 발을 들인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헤르난은 마음이 불안할 때면 버릇처럼 후원 왼편의 장미 정원을 찾았다. 그건 저택의 주인이 돌아온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헤르난의 손끝이 물기를 머금은 하얀 장미 위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달지만 무거운 향기 속에서, 헤르난은 저택을 찾아온 손님을 떠올려 봤다. 빛을 받으면 금빛이 도는 연한 갈색 머리칼과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단정한 외관의 미인을,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칼릭스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봤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이야기 사이로 침묵이 끼어들 틈은 없을 것이다. 편안한 미소를 머금은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하게 앉아 있던 불청객이 빠졌으니, 분위기 역시 더 좋아졌을 거다.

폰토스가 말했던 중매쟁이가 별안간 히페리온 저택에 찾아왔을 때, 헤르난은 조금 당황했었다. 하지만 중매쟁이가 웃는 얼굴을 하고 내놓은 맞선 상대에 대한 정보를 듣고는 그의 뜻에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어떻게 해야 칼릭스와 로베가 자연스럽게 서로를 인지하게 될까, 대화를 주고받게 될까. 제법 긴 시간 동안 헤르난은 고민해야 했다. 그럼에도 끝내 제대로 된 답을 낼 수 없었기에, 결국 중매쟁이가 마련한 방법을 쓰게 됐다. 헤르난이 직접 로베를 저택에 초대하는 정공법이었다.

로베를 만났을 때만 해도 헤르난은 중매쟁이의 계획에 의문을 품었었다. 칼릭스가 단둘만이 남은 응접실의 상황을 내심 거북하게 느끼진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의 사회성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님을 알기에 그랬다.

자신과 별다른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로베를 지인으로 소개했다는 게 너무 어설프게 느껴지기도 했다. 눈치가 빠른 칼릭스라면 그에게 닥친 상황을 부자연스럽게 느낄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헤르난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마주 앉게 된 칼릭스와 로베는 조금도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헤르난이 무어라 말을 더할 필요도 없었다. 헤르난은 끊길 새 없이 즐겁게 이어지는 대화를 귀에 담아 보기만 했다.

역사 깊은 테이란 백작가의 둘째 아들인 로베는 그의 맞선 상대인 칼릭스와 공통점이 많았다. 선호하는 것들과 불호하는 것들부터 취향과 취미, 나아가 직업 또한 그랬다.

로베는 황실 기사단에 소속된 마도학자였다. 내년이 되면 칼릭스 역시 황실의 기사단에서 일하게 될 테니…… 두 사람의 만남이 성사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을 것 같았다.

헤르난은 로베가 칼릭스보다 어린 것도, 어딘가 루체를 닮은 청초한 분위기를 가진 것도, 훌륭한 부모를 둔 것도, 똑똑한 것도, 다 좋게만 느껴졌다. 아버지인 백작의 뜻에 따라 억지로 이 낯선 저택까지 오게 됐음에도 과정이야 어찌 됐건 마음에 들면 잘해 보겠다며 웃음을 지어 보이던, 답답하지 않은 시원한 성격 역시 좋았다.

헤르난은 히페리온 저택에서 초조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 초조 속에서 다신 볼 수 없을지도 모를 남자의 새로운 배우자감을 찾는 일까지 하게 됐다. 제가 원해서 하게 된 일인지, 폰토스에게 등이 떠밀려 하게 된 일인지 구분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깊이 생각하진 않으려 했다. 헤르난은 그저 자신과 칼릭스가 이혼을 하는 것보다, 칼릭스가 새로운 연인을 만드는 일이 더 빠르게 이루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 정도만을 마음에 담았다.

정보 길드에 우편부의 자취를 알아내 달라 의뢰했던 게 벌써 일주일 전의 일임에도 헤르난은 여전히 우편부의 행방을 몰랐다. 사람 하나 정도는 이틀이면 찾아낼 수 있다며 떵떵대던 길드장에게 한 번 더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그는 그저 우편부가 사고를 당한 건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만을 건넸다.

헤르난은 칼릭스가 새로운 시작을 하길 바랐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길 바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는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웃음이 넘쳐나던 응접실에서 칼릭스의 보좌관이 저를 빼내 주지 않았다면, 자신이 먼저 도망쳐 나왔을지도 몰랐다.

예전이었다면……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텐데.

헤르난은 오지 않는 우편부를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는 걸 멈추기로 했다.

이혼에 필요한 서류를 다시 만들 거다. 칼릭스가 도와준다면 금세 끝날 일이었다. 우편부가 이른 시일 내에 저택에 당도하는 게 가장 좋기야 하겠지만, 그를 기다리느라 하염없이 이혼을 미루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나았다. 헤르난은 길드장의 말처럼 우편부가 건강한 상태이기만을 바랐다.

헤르난은 그를 흔들어 놓으려는 불안과 초조 따위를 모두 이 장미 정원에 남겨 두고 가기로 했다. 다신 발 디디지 못할 정원에 말이다.

뜻 모를 한숨이 입 사이로 흘러나왔다.

“일은 잘 해결됐어요?”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헤르난의 귓가에 닿았다. 칼릭스였다.

“여기 있는 걸 보면, 정원에서 일이 났던 거겠죠?”

헤르난은 칼릭스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놀란 사람답지 않게 무감해 보이는 얼굴을 한 채였다.

“일은 잘 처리했습니다.”

“다행이네요.”

“곧장 자리로 돌아가려다…… 장미가 눈에 밟혀 잠시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제 앞에 선 칼릭스의 눈치를 보며 헤르난은 말했다. 제 거짓말이 너무 이상해 보이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헤르난의 소망은 칼릭스의 옆에 로베가 없는 걸 확인한 뒤 바로 나가떨어져 버렸다. 좋지 못한 예감을 느낀 헤르난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었다.

“아, 손님은 떠났습니다. 글쎄, 당장 해결해야 할 급한 일이 생겼다고 발을 동동 구르시지 뭡니까. 그래서, 저 로비 앞까지 배웅해 드렸죠. 인사도 없이 떠나는 실례를 범해서 죄송하다고, 남작께 대신 말을 전해 달라고 하던데요?”

아무래도 두 사람의 만남이 좋게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분명 로베도 칼릭스도 즐거운 얼굴을 하고 서로를 바라봤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없으니 칼릭스와 로베가 이른 작별을 나눈 걸 아쉬워할 수도 없었다.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이는 헤르난을 향해 칼릭스는 모르는 척 순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칼릭스는 치미는 답답함을 꾹 눌렀다. 재미없고 짜증 나는 맞선이었다고, 헤르난에게 솔직한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저를 혼자 남겨 두고 가 버려서 서러웠다고 투덜대고 싶었다. 하지만 그 솔직함이 헤르난에겐 우울을 안겨 줄지도 모르니, 한 번은 모른 척을 하기로 했다.

칼릭스는 말을 돌리는 쪽을 택했다. 눈이 닿은 곳은 그들이 서 있는 장미 정원이었다.

“꼭 동화 속에 나오는 마법의 정원 같네요. 모난 건 한 송이도 보이질 않고 활짝 피어선.”

신기하다는 듯 주위를 살피던 칼릭스가 말을 이었다.

“마법의 힘인가요?”

“네. 마법사님께서 수고해 주신 덕에, 아주 오랜 시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게 됐습니다.”

“재밌네요.”

칼릭스가 후원 외곽에 있는 장미 정원에 발을 디뎌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공을 들인 게 느껴지는 아름다운 장소였다. 다만, 지금 제 앞에 있는 헤르난 말론처럼 흥미가 가지는 않았다.

마법에 걸려 시들지 않게 된 꽃들이 눈에 들어오긴 했다. 평소의 칼릭스였다면 그것들을 보며 징그럽다고 혀를 차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원을 꾸미는 일에 정원사 못지않게 신경을 썼을 게 분명해 보이는 헤르난과 함께하자 마음이 달라졌다. 헤르난이 그의 입에 잠시 머금었던, 아주 오랜 시간이라는 말 역시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이 장미 덤불을, 펜스에 몸을 기대고 있는 장미들을 흔들고 지나갔다.

흰색의 또 푸른색의 잎들은 바람을 타고 허공을 헤매다가 헤르난의 까만 머리칼 위에 그리고 어깨 위에 하나둘씩 내려앉았다.

칼릭스는 봄비처럼 소리 없이 쏟아지는 꽃잎을, 그 아래에 선 헤르난을 바라봤다.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닐, 어쩌면 헤르난 본인에게도 아무것도 아닐지 모를 순간을 눈에 담으며 웃었다. 떠오르는 즐거움을 숨길 생각 같은 건 하지 못했다.

그냥, 너무 좋아서 웃었다.

“아름다워요.”

“…….”

“정원에 더 자주 와야겠어요.”

헤르난과 눈을 맞추며 칼릭스는 말했다.

곧, 헤르난의 입가에도 칼릭스의 웃음을 닮은 자그마한 기쁨과 안도가 번졌다.

“……다행입니다.”

영원한 아름다움 속에서, 다 시든 꽃처럼 버석한 남자가 미소 지었다.

칼릭스의 웃음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침묵은 바람과 함께 정원을 지났다. 휘도는 바람 속에서 칼릭스는 말없이 헤르난 말론을 바라봤다. 바람에 휩쓸린 장미 꽃잎이 다시 한번 두 사람에게 내려앉을 때까지.

칼릭스의 손이 헤르난의 어깨 위에 매달린 흰색 꽃잎을 집었다. 잠시 헤르난에게 머물렀던 꽃잎들이 하나씩 칼릭스의 손에 이끌려 땅으로 떨어졌다.

남은 건, 감히 헤르난의 머리칼 위에 몸을 누인 푸른색 꽃잎뿐이었다. 하지만 칼릭스의 손은 그 건방진 것을 털어 내는 대신 조심히 헤르난의 뺨에 자신을 대어 보았다.

헤르난의 온기가 손안에 담기고 나서야, 칼릭스는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가까워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먼저 눈을 피한 건 언제나 그렇듯 헤르난이었다.

지금의 칼릭스 히페리온은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하기 힘든, 그는 알지 못하는 가장 깊은 밑바닥에 깔린 불안이 자신을 알아 달라는 듯 사납게 몸을 흔들어 댔다.

칼릭스는 저를 봐 주지 않는 남자의 시선을 붙잡고 싶었다. 부서질 준비를 하고 있는 메마른 남자에게 자신을 나누고 싶었다. 지금 당장 그와 숨을 나누고 싶다는 충동이 거세게 등을 떠밀었다.

긴장한 입술이 헤르난의 눈썹 위에 남은 오래된 흉터에 닿았다. 그 아래의 뺨 위에 그리고 입술 위에 닿았다 떨어졌다. 너무나 짧은 입맞춤이었다.

그제야 헤르난은 그의 어두운 눈 속에 칼릭스를 담았다. 남자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언뜻 무감해 보이는 차가운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붉어진 귀 끝이, 끝내 새하얗게 변할 두 뺨이 속이 뒤집힐 정도로 안타깝고 사랑스러웠다.

“……남작님, 헤르난.”

칼릭스는 헤르난을 불렀다. 헤르난 말론이란 사람이 제 앞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릴까 봐 무서웠다.

두서없는 말이 이어졌다.

“나는 당신을 잊은 사람이에요.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이 나질 않아서, 남들에게 이야기를 동냥하고 얻은 이야길 내 멋대로 추측하면서 나는 모를 사정을 그렸어요. 할 수 있는 게 그런 것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지금 내가 성급하게 꺼내려는 말이 당신에게 상처가 될지 기쁨이 될지 그런 것조차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오늘도 입을 다물고 넘어가진 못하겠어요. 당신이 지금 당장이라도 날 떠날 것 같아서…… 말하고 싶습니다.”

칼릭스의 시선이 흔들리는 헤르난을 끈질기게 붙잡았다. 새파란 눈 속에 헤르난 한 사람만을 가득 담았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바람이 멈춰 고요한 장미 정원에 오직 칼릭스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고백이 남긴 건, 긴 적막이었다.

헤르난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니, 차마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칼릭스는 자신의 고백이 남작에게 기쁨이 아니라 상처가 됐을까 두려웠다.

“당신이 마음에 품고 있는 게 지금의 내가 아니라 기억을 잃기 전의 나라는 걸 알아요. 마음에 품었단 거창한 말을 쓰긴 했지만…… 당신 마음이란 게 곧 사그라들 불씨처럼 위태롭단 것도 압니다.”

칼릭스의 손끝이 그의 예상대로 창백해진 헤르난의 뺨을 안타깝다는 듯 쓸어내렸다. 자신의 뜻을 전한 걸 후회하진 않지만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걸 알면서도……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알아 달라고, 나 좀 봐 달라고 떼를 쓰고 있는 거예요.”

말이 이어졌다.

“사라진 기억이 남기고 간 뭔가가 나를 움직이게 한 게 아니에요. 과거의 내가 아니라 지금의 내가, 당신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요.”

그 말을 들은 헤르난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걸렸다. 고백을 받은 사람답지 않은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후작님은 아무것도 모르시니까, 아무것도 모르셔서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겁니다.”

한숨과 같은 목소리가 칼릭스의 귓가에 닿았다. 헤르난은 칼릭스에게서 한발 물러섰다. 닿아 있던 손 역시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갔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서, 모르니까, 기억에 없는 사람이라는 게 신기해서 호기심 때문에…….”

헤르난의 말끝이 차가운 침묵에 먹혀들어 갔다.

이상했다. 헤르난은 저에게 말을 건네는 게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다. 칼릭스 히페리온이라는 사람이 그에게 마음을 품을 리 없다고, 그저 한순간의 재미로 그를 건드려 보는 것일 거라고, 아주 가벼운 마음일 거라고 자기 자신을 세뇌하는 것만 같았다.

“오늘 하신 말씀은 듣지 못한 걸로 하겠습니다. 저는 이제 그만…….”

“내가 남작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 그러면 뭐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

“내가 모든 걸 알게 되면, 그땐 이렇게 도망도 못 칠걸요. 내가 놔주질 않을 거니까.”

칼릭스는 제게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려는 헤르난의 빈손을 붙잡았다. 힘없이 감겨 오는 헤르난의 손이 오랫동안 바람을 맞아서인지 차가웠다. 하지만 괜찮았다. 곧, 나의 체온이 그를 데워 줄 테니 말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거창한 소릴 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나는 그냥, 지금처럼…… 당신이랑 함께하고 싶어요.”

“…….”

“지금 당장 나한테 절절 끓는 사랑이니 애정을 느끼길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조금만 자리를 내줘요. 그 박살 난 믿음, 주워 담아 볼게요. 주워 볼 만큼의 믿음도 없다면 만들면 돼요. 나, 할 수 있어요.”

칼릭스의 말이 천천히 이어졌다.

“당신이 원하지 않으면 기억을 되찾을 생각도 없어요. 하지만 원한다면, 기억을 잃기 전의 내 흉내를 내서라도 당신이 바라는 모습으로 살게요.”

겹쳐진 손을 끌어당긴 칼릭스가 헤르난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예쁘게 안 봐 줘도 되니까 옆에 붙어 있게만 해 줘요.”

칼릭스는 속삭였다.

다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헤르난은 고개를 떨궜다.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떻게 해야 칼릭스의 헛된 생각을, 마음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제대로 된 생각이 도무지 떠오르질 않았다.

들으면 안 될 이야기가 도통 끝날 생각도 하지 않고 계속해 이어지고 있었다.

붙잡힌 손이 너무 뜨거웠다. 두려움인지, 혹시나 하는 기대인지 모를 감정에 치여 마음이 쉼 없이 덜컹거렸다. 정신없이 엮여 버린 생각들이 높낮이를 바꿔 가며 헤르난 말론이라는 사람을 들쑤셨다.

〈나는…… 너를 마음에 담고 있어, 헤르난.〉

칼릭스가 말을 건넸을 때, 헤르난은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만은 헤르난의 기억 속에 너무나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 남았기 때문이었다.

헤르난은 그때의 칼릭스가 말했던 마음이 사랑일 거란 생각은 하려고 하지 않았다. 먼 옛날 어린 도련님이 제게 품었던 애정 혹은 그 애정 뒤에 숨은 단순한 소유욕이라고 한들, 헤르난은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모든 기억을 잃은 남자가, 그때와 똑같은 목소리로 제게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2년 전 자신에게 해 줬던 말과 다를 바 없는 말을 내놨다.

거짓말쟁이처럼 보이지 않는 눈을 하고, 칼릭스는 사랑을 입에 담았다.

두려움에 발이 푹 빠진 채로 헤르난은 그에게 마음을 고백한 남자를 밀어 냈다. 칼릭스는 순순히 헤르난에게서 물러나 줬다. 다만 그의 새파란 시선만은 혼란한 헤르난을 놓지 않고 따라붙었다.

헤르난이 칼릭스를 올려다봤다. 차마 그림자도 닿지 못한 칼릭스의 아름다운 얼굴 위에 마저 숨기지 못한 초조가 스쳤다. 하지만 이내 꽃처럼 피어난 웃음이, 그 안에 담겨 있는 기대와 수줍음이 그의 초조를 덮었다.

칼릭스가 정말, 나를 마음에 두려 한다.

모든 걸 잊은 남자가 보이는 진심 앞에서 헤르난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굳어 버렸다.

‘왜?’

침묵 속에서 헤르난 말론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헤르난은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물음과 답이 자리를 바꿔 가며 이어지는 지겨운 반복 속에서, 투박했던 의문은 조금씩 모습을 바꿔 갔다. 그러다 이내 헤르난 자신에게 건네는 질책으로 완전히 변해 버렸다.

기억을 잃은 칼릭스가 저 같은 사람에게 이유 없이 호감을 느끼게 됐을 리 없었다.

‘……내가 칼릭스를 저렇게 만든 거야.’

이혼이 늦어지는 건 우편부의 소식이 끊겨서 벌어진 소동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소동이 소동으로 끝나지 않은 건, 칼릭스가 저렇게 된 건, 저 스스로가 자초한 사고였다.

헤르난 말론은 낯선 배우자에게 호기심을 가진 칼릭스에게 선을 그어야 했다. 하지만 선을 긋기는커녕 그의 호기심을 더 부추겼다. 웃으며 선을 넘어오는 칼릭스를, 가까이 붙어 오는 그를 밀어 내지 않았다. 기억을 잃은 칼릭스에게 잘 보이고 싶어 그의 눈치를 살폈다. 끌어안아 오는 남자의 품에서 벗어났어야 했음에도 기다렸다는 듯 가만히 서서 그가 나눠 주는 체온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칼릭스의 시선이 제게 닿는다는 것에 은근한 기쁨을 느끼고 아닌 척, 모든 걸 포기한 척을 하면서 기대를 품었을지도 몰랐다. 입으로는 칼릭스의 행복을 운운해 놓고 아직도 미련을 가져서…… 다시, 그의 옆에 있을 수 있게 될지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몰랐다.

지난 시간을 되짚어 가던 헤르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아주 잠시 붕 떠올랐던 마음이 바닥을 쳤다.

커져 가는 칼릭스의 관심을 꺼트리는 일은 간단했을 것이다. 헤르난은 한때 칼릭스가 혐오했던 모습 그대로를 기억이 없는 그에게 보여 주고 또 알려 주면 됐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았다. 칼릭스가 저를 나쁘게 보지 않길 바랐으니까.

헤르난 말론은 칼릭스가 기억을 잃은 게 아주 커다란 축복이란 걸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유일한 사람이, 칼릭스에게 닿은 빛을 가리려 들었다. 칼릭스가 저 같은 사람을 눈 속에 담고 사랑이라는 말을 하게 만들었다.

사는 내내 제대로 된 선택을 해 본 적이 거의 없는 헤르난은 자신의 앞에 놓이는 모든 갈림길이 두렵고 어려웠다. 평탄한 길이란 게 눈에 보이는데도 쉽게 발을 내딛질 못했다. 아무런 선택을 하지 못하고 멍청히 있다가 남에게 휩쓸려 버리기 일쑤였다.

이번 삶에서도 그랬다. 도망치려는 자신을 붙잡고, 주저앉으려던 저를 일으켜 세워 다른 길로 함께 가 보자며 손을 잡아 준 건 칼릭스였다.

헤르난은 내심 칼릭스가 또 한 번 자신을 붙잡아 주길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다. 아니,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그 확신이 헤르난을 괴롭게 만들었다.

〈걜 위해 떨어져 나갈 마음이 있다면, 그게 진짜라면 힘 좀 내봐요.〉

폰토스가 건넸던 말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던 헤르난을 불러 세웠다.

“……저는 스칼라로 돌아가겠습니다.”

고개를 든 헤르난이 다급히 말을 내뱉었다.

이혼을 서둘러야 했다. 그 명료한 생각이 어지럽던 헤르난의 머릿속을 비워 줬다.

“오지 않는 우편부를 기다리고만 있을 순 없습니다. 이미, 후작님께도 너무 많은 폐를 끼쳤어요. 스칼라에 돌아가 다시 준비를 마치고 돌아오겠습니다. 혹시 제게 일을 맡기는 게 불안하시다면, 후작님께서도 따로 준비를 해 두셨으면 합니다.”

“…….”

“날을 정해 합의를 마친 후에…… 공증인 앞에서 서명까지 끝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헤르난은 말했다.

이렇게 몇 마디 말로 간단하게 끝낼 수 있는 일을, 이 저택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어서, 그 머묾을 핑계로 칼릭스와 함께하고 싶어서…… 서두르지 않았던 거구나. 헤르난은 모른 척해 오던 자신의 허물과 욕심을 마주하게 됐다.

헤르난은 기억을 잃은 칼릭스를 마주했던 첫날의 다짐을 다시 떠올렸다. 그 다짐 위에 쌓여 있던 먼지를 털어 냈다. 칼릭스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빨리 디아만테를 떠나야 했다.

칼릭스는 여전히 헤르난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바늘이 뺨이며 눈가를 찌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따가운 그의 시선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헤르난은 두려웠다.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칼릭스를 데우던 열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는 것 정도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언제쯤 출발할 생각이에요?”

그럼에도, 칼릭스의 목소리는 그 속에 여전한 다정을 품고 있었다.

“……내일 정오가 지나기 전에 떠나겠습니다.”

“그렇군요.”

직전까지 수줍은 사랑을 말하던 남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속내를 파악하기 힘든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설렘과 기대 따위가 사라져 버린 얼굴을 마주하는 게 힘들어 헤르난은 시선을 내려야 했다.

헤르난 말론은 칼릭스 히페리온의 마음을 밀어 냈다. 그를 사랑해서 밀어 낸 거였다.

“작별의 인사를 할 시간도 주지 않고 도망칠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요.”

칼릭스는 말했다. 순간 차갑게 가라앉았던 그의 분위기가 장미 정원에서 처음 마주했던 때와 같은 온도를 찾아가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죄송합니다.”

헤르난은 용기를 내 다시 칼릭스와 시선을 맞췄다. 차마 인사를 하러 찾아뵙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모든 게 다…… 죄송했습니다.”

웃어 보이는 칼릭스에게, 헤르난은 그는 원치 않을 사과를 다시 한번 건넸다. 참을 수 없이 흘러나온 말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지나간 자리에 바람이 비집고 들어왔다. 칼릭스의 손에 이끌려 바닥으로 떨어져 나갔던 꽃잎들이 바람에 휩쓸려 잠시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헤르난의 구두 위로, 바닥으로 힘없이 내려앉았다.

헤르난은 칼릭스에게서 몇 걸음을 더 물러섰다. 그리고 차마 작별의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한 채 다급히 장미 정원을 빠져나갔다.

칼릭스는 자신의 배우자가 그를 위해 꾸민 아름다운 정원에 홀로 남게 됐다.

시들지 않을 꽃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서, 칼릭스는 멀어져 가는 헤르난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자신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풍경을 바로 뒤에 두고, 헤르난은 끝내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 *

새로운 날의 해가 뜨기 무섭게 헤르난은 스칼라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칼릭스를 찾아가 인사를 건네지는 못했다. 그와 마주하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았다. 저택을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다시 그의 주위를 맴돌게 될까 무서웠다.

헤르난은 간단한 짐만을 챙겨 히페리온 저택을 나왔다. 언제든 떠날 수 있게 미리 준비를 해 뒀던 터라 따로 챙길 건 없었다. 가지고 있는 짐 자체가 없기도 했다. 사용인들의 처우와 향방은 다시 디아만테에 돌아오는 날 결정하면 될 것이다.

함께하면 안 될 사람의 옆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 뭐가 옳은 건지 알면서, 그것을 못 본 척하고 욕심을 부렸다. 이제라도 그걸 깨닫게 돼서 다행이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헤르난은 해가 저물어 가는 세상을 내다봤다. 그리고 쓸데없는 상념들을 끌어모아 머릿속에 욱여넣었다. 사랑을 말하던 칼릭스의 얼굴을,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문제가 생겼을 거라고 짐작했었던 포털을 지나 다시 스칼라에 발을 딛게 됐을 땐, 아직 세상이 깨어나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다.

차가운 디아만테의 바람이 아니라 스칼라의 미지근한 바닷바람이, 돌아온 헤르난을 반기듯 그의 코끝을 간질였다.

돌아온 헤르난을 반긴 건 바람만이 아니었다. 미리 연락을 넣어 뒀던 것도 아닌데, 본성의 낮은 계단 앞에 조세핀과 집사장이 나와 있었다. 짧은 인사를 마친 그들은 평소 같지 않은 어색한 웃음을 지은 채 마부를 대신해 헤르난의 짐을 내려 줬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이상했던 이유를, 헤르난은 남작성의 로비에 들어선 뒤에야 알게 됐다.

“왔어요?”

따뜻한 남부 날씨에 걸맞은 가벼운 옷차림을 한 아름다운 남자가 헤르난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그리고 긴 다리를 움직여 헤르난의 앞에 성큼 다가섰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여전히 웃는 낯을 하고 칼릭스는 말했다. 남작성의 주인에게 접대를 받는다고 착각을 할 정도로, 칼릭스는 그에게 낯설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당황해 얼이 빠진 헤르난의 시선이 집사장과 조세핀에게로 옮겨 갔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그 시선을 받아 주지 않고 모른 척 응접실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짐마저 대충 헤르난의 옆에 내려 둔 채였다.

“나, 당신한테 차였잖아요.”

칼릭스의 목소리가 헤르난을 붙들었다.

“나처럼 유치하고 성격 더러운 사람은, 그런 거절을 당하면 곧장 마음을 접어요. 나도 너 안 좋아한다고 소리치고 뒤돌아 버리는 게 보통일 겁니다. 그런데 당신한텐 그러고 싶지 않더라고요. 내가 왜 이럴까. 곰곰이 생각해 봤죠. 답이 쉽게 나오던데요?”

한 발짝 더, 헤르난의 앞으로 다가가며 칼릭스는 말을 이었다.

“당신을 아주 많이 좋아하니까. 계속 좋아하기로 했으니까. 옆에 붙어서 지팡이 노릇을 해 주겠다고 했으니까.”

“…….”

“그래서 여기까지 왔어요.”

칼릭스가 헤르난 옆에 놓인 가방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당신이 내 마음을 가벼운 관심보단 조금 나은 정도로만 생각하는 거 알아요. 그래서 나를 밀어 내는 것도 압니다.”

웃어 보인 칼릭스가 헤르난의 빈손을 붙잡아 왔다.

“그런데 가벼운 관심으로 퉁치기엔…… 내가 당신한테 너무 징그럽게 구는 것 같지 않아요?”

말을 마친 칼릭스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겨 헤르난과 팔짱을 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는 채였다.

“나는 내가 알지도 못하는 죄를 갚을 생각은 열 번 죽었다 다시 살아나도 할 생각이 없는 인간인데, 지금은 그러고 싶어요. 과거의 내가 당신을 힘들게 했던 거, 그게 뭐든 납작 엎드려 살면서 갚아 보려고요.”

“후작님…….”

“싫다는 사람 쫓아와서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하고 싶죠? 더럽게 뻔뻔해 보이죠? 맞아요. 내가 당신이어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

“뭐, 어찌 됐건 합의 이혼은 불가능할 것 같네요.”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몸을 기대 왔다. 그의 귓가에 말을 속삭이기 위함이었다.

“당신, 나 같은 놈한테 잘못 걸렸어요.”

그렇게 말하는 칼릭스의 목소리가 경쾌했다.

도통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에 빠진 헤르난은 칼릭스의 말을, 행동을, 그리고 웃음을 속으로 몇 번이고 곱씹어 봤다. 그러다……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힘들었죠? 같이 방으로 돌아가요. 당신 보좌관한테 성의 지리를 아주 잘 배워 뒀으니, 길 잃을 걱정은 마세요.”

당황한 헤르난을 계단으로 인도하며 칼릭스는 다시 웃어 보였다.

고요하던 로비가 칼릭스 한 사람으로 들썩이게 된, 너무 이른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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