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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스칼라 (15/21)

14. 스칼라

칼릭스가 스칼라에 들이닥친 지 벌써 이틀이 지났다.

그 이틀을 헤르난은 내내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보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고민에 잠기게 된 탓이었다. 그리고 칼릭스는, 그런 헤르난을 시끄럽게 따라다녔다. 수도인 디아만테에 있을 때보다 더 밝은 얼굴을 하고 말수가 적은 헤르난을 대신해 바쁘게 떠들어 댔다.

머지않아 헤르난 역시 정신을 차렸다. 장미 정원에서의 고백 이후로 더욱 끈끈하게 붙어 오는 칼릭스를 달래 다시 수도로 돌려보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뒤였다.

오늘, 헤르난은 큰마음을 먹고 칼릭스와 대화를 해 볼 생각이었다. 그에게 작은 거래를 제안하기 위함이었다.

칼릭스를 따로 찾아갈 필요는 없었다. 스칼라에 온 뒤로는 어디를 가든 칼릭스가 자신을 쫓아왔으니 말이다. 그건, 집무실에 앉아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책상 앞을 벗어난 헤르난이 향한 곳은 불씨가 사그라든 벽난로 앞의 소파였다. 마주 보고 있는 소파 중 하나를 칼릭스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몸을 반쯤 누인 채였다.

칼릭스는 가까워져 오는 헤르난을 빤히 바라봤다. 책상 앞에서부터 이어진 집요한 시선을 모른 척하기 위해 노력하며, 헤르난은 칼릭스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 헤르난을 따르는 칼릭스의 두 눈에 웃음이 떠올랐다.

“오늘, 아침 식사 자리에서부터 느낀 건데…….”

자세를 고쳐 잡은 칼릭스가 입을 열었다. 어딘가 불길하게 느껴지는 첫마디였다.

“당신한테 편한 곳에 있어서 그런가? 수도에 있을 때보다 더 멋있어 보여요. 왜 이렇게 잘생겼지? 나야, 내 남편이 잘난 게 좋지만…… 이상한 놈이 눈독을 들일까 봐 걱정되네.”

청량한 웃음과 상반되는, 농담을 넘어 괴담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말을 내뱉는 칼릭스 때문에 헤르난은 민망함과 창피함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앉아 있는 소파가 꼭 오래된 나무 의자만큼 딱딱하게만 느껴졌다.

“왜 눈을 피해요? 내가 부담스러워요?”

“아뇨. 아닙니다. 그저…….”

“그저?”

“그 말이…….”

헤르난의 입이 천천히 다물렸다. 칼릭스가 내뱉은 괴상한 소리를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내 말?”

“…….”

“혹시 내가 놀리는 것처럼 들려요? 표정이 딱 그런데.”

앞으로 몸을 숙인 칼릭스의 손끝이 헤르난의 턱에 닿았다. 곧, 그의 손이 헤르난의 시선을 조심스럽게 끌어올렸다. 손은 헤르난이 잘생겼다는 말을 몇 번이고 쏟아부어도 이상해 보이지 않을 아름다운 남자를 눈 속에 담은 후에야 순순히 물러났다.

“잘생긴 걸 잘생겼다고 한 게 문제가 될 줄은 몰랐는데요. 믿고 안 믿고는 당신 자유지만…… 빈말로 그런 소리를 뿌리고 다닐 얼굴은 아니잖아요, 내가.”

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칼릭스는 말을 더했다.

“정말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내가 당신한테 잘생겼다, 예쁘다 이런 소릴 한 번도 안 한 건 아니죠?”

칼릭스는 헤르난의 눈치를 살폈다.

침묵을 택하려던 헤르난은 자신도 모르게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너무 어렵게 생각해 봤자란 생각이 들었다. 칼릭스는 제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저런 듣기 좋을 소리를 쉽게 입에 담을 수 있는 거다.

잘 보이고 싶어서.

정말이지, 칼릭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왜 웃어요?”

“가끔, 보기 싫다는 말은 하셨습니다.”

그러니 괜히 칭찬에 힘들이지 마세요. 자그마한 속내를 숨기고 헤르난은 말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민망한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자신만만하던 칼릭스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설마 했는데. 진짜 미쳤었나 보네.”

말이 느릿하게 이어졌다.

“어디가 돌아 있었던 거죠. 시력에는 문제가 없는 걸 보면,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겠네요. 맞죠?”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물었다. 답을 듣기 위해 내뱉은 말은 아니고 반쯤은 혼잣말에 가까운 거였다.

“듣기 싫으면 앞으론 그런 소리 안 할게요. 그런데 입이 뚫려 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말을 나불댈 수도 있어요. 감탄사 같은 거 있잖아요. 그러니 조금만 이해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전에 해 주신 말도 좋게 생각할 테니, 괜한 마음 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늦게나마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답을 줬다. 기가 죽은 것 같다는 착각이 들게 만드는 칼릭스를 바라보다 얼떨결에 내뱉은 말이었다.

다행히, 헤르난의 답을 받아 든 칼릭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기억이 날아가기 전의 나를 대변하고 싶진 않지만…… 분명 그때의 난, 당신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너무 떨려서, 그걸 감추려고 그딴 개소릴 싸가지 없이 지껄였을 겁니다.”

“…….”

“그러니까, 내가 당신 얼굴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오해 같은 건 하지 마세요. 내 앞에서 고개 숙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무리 호감이 있다고 한들 칼릭스가 제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헤르난은 작은 혼란은 감추고 일단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다시 칼릭스의 손에 붙들리게 될까 봐 고개를 숙이진 못했다.

이제는 헤르난이 칼릭스에게 물을 차례였다. 헤르난은 눈 속에 칼릭스를 담은 채로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속으론 칼릭스에게 건네야 할 말을 침착하게 정리해 봤다.

하지만 칼릭스가 먼저 선수를 쳤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해도 돼요?”

칼릭스는 헤르난이 답을 할 새도 없이 말을 이어 갔다. 아니, 눌러 담아 뒀던 말을 헤르난을 향해 쏟아 냈다.

“……수도에서, 스칼라에서 온 우편부를 만났어요. 당신 몰래 그 사람에게 우편물을 건네받았습니다. 그걸 비밀에 부쳤고요. 당신이 준비해 뒀던 서류들은 저택의 서재 책상 서랍 안에 잘 보관되어 있으니 분실에 관한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칼릭스의 말이 다급히 이어졌다.

“당신이 우편부의 행방을 수소문해 달라 의뢰를 넣은 길드가 내 꼬리를 잡지 못하게 수를 썼어요. 여러 사람 입을 막아 두기도 했습니다.”

서명만 하면 끝날 일을 앞에 두고, 칼릭스는 쓸데없는 공을 들여 스칼라에서 온 서류들을 숨겼다. 그리고 여전히 그 모든 걸 비밀에 부친 채로 제게 마음을 고백해 왔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가장 확실한 추측 앞에서 일부러 눈을 돌렸다.

그런 헤르난의 안색을 살피던 칼릭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남작님과 이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짓을 저질렀어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이는 헤르난을 앞에 두고 칼릭스는 새로운 다짐을 했다. 자꾸만 모른 척하고 싶어 하는 헤르난도 외면하기 힘들 정도로,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자.

“좋아하는 사람한테 거짓말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말하는 거예요.”

“…….”

“앞으론 거짓말할 일 없을 겁니다. 믿어 주세요.”

칼릭스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게 헤르난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사랑 고백이라는 말도 안 되게 큰일을 먼저 겪어서 그런지, 놀란 마음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길드가 의뢰에서 손을 놓은 게 이상하다 싶었었다. 그 배후에 칼릭스가 있었을 줄이야.

이혼을 미루려 했던 게, 다른 이유가 아니라 정말 칼릭스의 마음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지긴 했다. 어쩐지 긴장이 됐다. 모아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지금 스칼라에 계신 걸, 보좌관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하고 싶은 다른 말은 뒤로 미루고 헤르난은 일단 칼릭스에게 물었다. 그가 자신보다 먼저 스칼라에 도착한 건, 유리가 몰랐기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분명 별다른 말없이 마차에 몸부터 실었을 거다.

“아, 지금은 알고 있을 겁니다. 그래도 편지는 두고 튀었으니까.”

묘하게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칼릭스는 속삭였다.

옛날, 가정 교사들을 따돌리고 도망칠 때의 모습이랑 달라진 게 하나 없었다. 아니지. 그래도 편지는 써 두고 도망을 왔으니 어른 비슷한 게 되기는 했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새로운 보좌관인 유리를 떠올려 봤다.

지난 삶에서 제게 독주를 건넸던 제프란 대신 칼릭스의 보좌관 자리에 앉은 유리는 헤르난이 지금껏 마주해 본 적 없던 새로운 얼굴이었다.

헤르난이 알기로 제프란은 칼릭스가 전쟁터에서 만나게 된 동료였었다. 여러 번 목숨을 구해 준 것에 고마움을 느껴 저를 따르고 있다고, 제프란의 헌신에 대해 칼릭스가 말을 한 적도 있었다.

이 새로운 세상에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한들, 그것들을 되짚어 보는 일에 열 손가락을 다 쓸 정도는 아니었다. 달라진 것보단 예전 그대로인 게 훨씬 많았다.

지나온 여러 삶에서처럼, 칼릭스는 전쟁터에서 제프란을 만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삶에선 인상 좋은 어린 청년이 제프란의 자리를 대신하게 됐다. 칼릭스가 직접 선택한 낯선 변화였다.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을 하고 있는 유리에게 이번 일을 계기로 이전보다 더 미움을 사겠구나 싶어 헤르난은 민망했다. 의욕 넘치는 어린 친구에게 미안함도 느꼈다.

“그렇게 힘들게…… 스칼라까지 오셔서 하고 싶으신 게 뭔지 알고 싶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헤르난이 힘들게 입을 열었다. 반쯤은 예상이 갔지만, 자신이 결론 지은 그 예상이란 걸 믿을 수가 없어 내놓은 말이었다.

“나를 사랑하지만 원하진 않는 배우자가 나를 원하게 하고 싶어서. 그래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칼릭스는 답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기억을 잃었다는 건 참 끔찍하면서도 편하죠. 이렇게 뻔뻔하게, 당신의 사랑을 원한다고 외치며 그 앞에 얼굴을 들이밀 수 있으니 말이에요. 기억을 잃기 전의 난 하지 못했을 겁니다.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다시 앞으로 몸을 숙인 칼릭스가 헤르난의 손을 잡아 왔다. 그 얼굴만큼이나 아름답지만 오랜 시간 검을 휘두르면서 거칠어진 손이, 헤르난의 손등을 포옹하듯 감싸 안았다.

헤르난은 맞붙은 손에서부터 느껴지는 이상한 기분을 모른 척하며 다시 칼릭스와 눈을 맞췄다.

“하시고 싶은 일…… 다 하셔도 괜찮습니다. 매일 이렇게 찾아오셔도 괜찮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길 얼마든지 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준비했던 말들이 제멋대로, 조금도 단단해 보이지 않는 모양으로 흘러나왔다. 울렁이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헤르난은 말을 이어 갔다.

“스칼라에 계속 머물길 원하신다면, 약속을 지켜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약속이요?”

여전히 헤르난의 손을 붙잡은 채로 칼릭스는 되물었다.

“약속보다는 조건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저 말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 보세요.”

“친구를 만들라는 얘기는 아니겠죠?”

“네. 새로운 가족을, 아니, 일단은 연인이 될 그런 사람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

“다들 제가 후작님을 억지로 붙잡아 두고 있다는 걸 압니다. 곧 이혼할 거란 것 역시 잘 알고 있어요. 후작님께서 뭘 하시건 이상하게 볼 사람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알아 가는 일 역시 편하게 하실 수 있을 겁니다.”

혹시나 말이 막히게 될까, 헤르난은 다급히 칼릭스의 앞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늘어놨다. 지난 이틀간의 고민이 만들어 준 어설픈 밀어냄이었다.

“아. 배우자를 위한 중매쟁이가 되시겠다.”

눈을 가늘게 뜬 칼릭스가 중얼거렸다.

“얼마나 많이 만나야 해요? 당신이 원하는 만큼? 아니면, 폰토스 히페리온이랑 중매쟁이들이 원하는 만큼?”

칼릭스는 그의 형인 폰토스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지난번 로베와의 만남이 폰토스가 제게 넘긴 중매쟁이의 작품이란 걸 잘 아는 눈치였다.

“……마음이 맞는 분을 만나시게 될 때까지요.”

“내 마음이 가볍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겠죠?”

“…….”

“평범한 남자였으면 조금 상처받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이야말로 나랑은 비교도 안 되게 큰 상처가 있겠죠.”

웃어 보인 칼릭스가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네. 누구든 만나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듣기 어려울 거라고 예상했던 승낙의 말을 앞에 두고 헤르난은 짧은 감사의 말을 전했다. 평범한 안도만을 느껴야 할 마음이 소란스럽게 뛰었다.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그리고 칼릭스의 고백이 불러온 이런 상황에 아무런 생각도 마음도 품지 않으려 했다.

칼릭스가 전한 고백이 순백한 진실이더라도 헤르난만은 그 마음을 완전히 믿으면 안 됐다. 아무것도 모르는 칼릭스 대신 그를 의심해 줘야 했다. 칼릭스의 앞에 열린 새로운 행복을, 새로운 시작을 먼저 막아서는 짓은 하면 안 됐다.

최대한 빨리, 폰토스를 통해 접촉해 온 중매쟁이들에게 연락을 넣어야 했다. 그들은 히페리온 저택에서 만났던 로베처럼 멋지고 빛나는 이들을 칼릭스에게 소개해 줄 것이다.

사랑받고 자란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그림자 한 점 보이지 않는 환한 미소를 마주하다 보면, 추레한 남자를 향한 왜곡된 마음 따위는 금세 잊히겠지 싶었다.

그렇게 완전히 잊힌 뒤에는……. 헤르난의 생각이 멈췄다. 여러 번의 죽음 뒤에 봤던 까만 어둠에 가로막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중요한 일은 아니니 생각을 잇지는 않았다.

“대신, 나도 조건 하나 걸래요. 부탁이라고 해야 하나? 부탁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음, 나 역시 당신이 원하는 그 맞선을 흔쾌히 받아들이긴 어려울 것 같군요.”

칼릭스의 목소리가 헤르난의 불안을 거둬갔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뭐든지?”

“네. 뭐든지 들어 드리겠습니다.”

“엄청 위험한 말인데.”

칼릭스의 엄지손가락이 헤르난의 손등 위에 둥그런 원을 그렸다. 장난스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한 웃음소리와 함께였다.

“나랑 연애해요.”

경쾌한 칼릭스의 목소리가 집무실에 퍼졌다.

“반년만이라도 좋으니까, 해요. 그 뒤에도 나랑 헤어지고 싶으면 이혼해 줄게요.”

놀란 헤르난의 얼굴이 칼릭스의 파란 눈 속에 담겼다. 제 시야를 가득 채운 헤르난의 얼굴이 만족스럽다는 듯 칼릭스는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싫어요? 하지만 이혼을 미루고 미루면서 맞선만 보러 다니는 것보단 낫잖아요. 내가 다 늙은 할아버지가 돼서도 마음 맞는 사람을 못 찾으면 어쩌려고요. 그때까지 맞선 보러 다닐 거란 걱정은 안 해 봤죠?”

당황스러울 정도로 갑작스러운 칼릭스의 물음에 헤르난은 적절한 답을 찾지 못했다. 입을 다문 채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 뿐이었다.

연애와 이혼. 너무 대수롭지 않게 그 단어들을 입에 담는 칼릭스 때문일까, 지금 저와 칼릭스 사이의 거래 아닌 거래가 너무나 가볍게 느껴져 혼란스러웠다.

“딱 반년.”

머뭇대는 헤르난을 향해 칼릭스는 한마디를 더했다.

“끝나게 된다면, 너무 짧은 연애다. 안 그래요?”

헤르난은 칼릭스가 내놓은 시간을 머릿속에 그려 봤다. 너무 짧지도 그렇다고 너무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기억을 잃은 남자가 새로운 연인을 맞이하기엔, 그의 배우자에게 품게 된 관심과 호감을 떠나보내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알겠습니다.”

침잠한 눈을 하고 헤르난은 답했다. 그 모습이 배우자의 고백을 받아들이는 사람보단, 의원에게 남은 수명을 선고받은 환자에 더 가까워 보였다.

“연애하자는 말을 이렇게 감흥 없는 얼굴로 승낙하는 사람도 있네요.”

헤르난이 내놓은 짧은 답변의 어디가 그렇게 즐거웠는지, 칼릭스는 헤르난의 손등 위에 얼굴을 파묻고 웃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개새끼처럼 살았는진 몰라요. 그래도, 적어도 이 빈 머릿속의 기억으론, 누구한테 사랑 고백해 본 게 처음이거든요. 그리고 차였죠. 그다음엔 연애하자 소리를 했더니…… 이렇게 거절 같은 승낙이 나왔고.”

다시 고개를 든 칼릭스가 헤르난의 손을 끌어 올려 입을 맞췄다.

“나도 당신도, 갈 길이 먼 것 같아요.”

말을 마친 칼릭스가 불쌍한 척 눈썹을 아래로 늘어트렸다.

“저는…….”

우물쭈물 말끝을 흐리는 헤르난과 시선을 맞추며 칼릭스는 어울리지도 않는 불쌍한 척을 때려치웠다.

칼릭스는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곧, 그의 입술이 헤르난의 손등을 떠나 붙잡힌 손목에 닿았다 떨어졌다.

소파 사이에 놓인 낮은 커피 테이블 위로 칼릭스가 올라탔다. 여전히 헤르난의 손을 붙든 채로 칼릭스는 입술을 붙여 왔다. 손등에 입을 맞췄던 것처럼 짧은 입맞춤이었다. 다만, 그 짧은 입맞춤이 몇 번이고 간지럽게 반복됐다.

“……입 맞춰도 돼요? 원래, 연인이 되면 입부터 맞추고 보잖아요.”

환해진 칼릭스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번졌다.

키스는 별 게 아니다. 칼릭스를 통해 그걸 배웠었다. 하지만 지금의 헤르난은 마치 칼릭스와 처음 입을 맞춰 보는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이미 몇 번씩 맞대 온 입술인데, 받아 낸 불안인데. 그걸 잘 알면서도 눈앞의 칼릭스와 입을 맞춘다는 게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연애라는 말에 묶인 뒤여서 그럴지도 몰랐다.

기억을 잃은 칼릭스와 이래선 안 된다는 마음과 그가 바라는 연애라는 약속에 협조해야 한다는 느슨한 마음이 두서없이 뒤섞였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요.”

칼릭스가 속삭였다.

“……알겠습니다.”

망설이던 헤르난은, 결국 칼릭스에게 답을 줬다.

순순한 헤르난의 얼굴엔 욕심이며 정염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두 눈 가득 다른 그리움을 담고, 칼릭스를 바라봤다. 헤르난은 그 존재도 모르고 있는 그리움이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달랐다. 그는 단번에 헤르난의 눈 속에서 먼 그리움을 읽어 냈다. 스스로를 향한 질투가 칼릭스의 속을 긁었다.

자신을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남자에게, 칼릭스는 참지 못하고 입을 맞췄다.

소파의 등받이로 헤르난의 몸이 밀려났다. 낮은 테이블을 완전히 넘어온 칼릭스가 그의 입맞춤만큼이나 빈틈없이 몸을 붙여 온 탓이었다.

천과 천이 비벼지는 거친 소리가 입술이 맞닿아 만들어 내는 젖은 소리 사이로 섞여들었다.

칼릭스의 품에 갇힌 채 그와 숨을 나누며, 헤르난은 무심코 지난 입맞춤의 순간들을 떠올렸다. 지금의 칼릭스는 예전처럼 다급했고 또 흥분해 있었다. 일단 입을 맞추고 보는 것 역시 그때와 똑같았다.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먼, 칼릭스의 거칠고 집요한 입맞춤을 헤르난은 자신이 그의 연인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었다. 하지만 그 사나운 입맞춤은 기억을 잃은 칼릭스가 제게 사랑을 말하고, 연애를 하자며 부딪쳐 온 뒤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전과 똑같은 입맞춤이 헤르난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왜…….”

간신히 입을 뗀 헤르난이 말을 이었다.

“왜 이렇게 급하게 입을 맞추십니까.”

“싫었어요?”

가쁜 숨을 몰아쉬는 헤르난을 멍하니 보던 칼릭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탓을 하는 게 아니라…….”

“눈이 돌아가서 그래요. 너무 좋으니까 조급해지잖아요. 마음 같아선 입맞춤뿐인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핥고 싶어지는데 그러면…….”

“아, 아뇨. 더는 말 안 해 주셔도 됩니다.”

“입맞춤은, 마저 해도 돼요?”

차마 칼릭스의 눈을 마주하진 못하고 헤르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동적으로 던진 물음에 답을 얻게 되니 마음이 더 혼란해졌다. 기억을 잃기 전의 칼릭스도 지금의 그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그런 의미 없는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상념은 곧 끝을 맺었다. 칼릭스가 다시 입을 맞춰 온 탓이었다.

헤르난이 뒤통수를 받친 칼릭스의 손이 새까만 머리칼을 헤집었다. 부드럽게 간질이는 그의 손끝이 꼭 입 속의 혀 같다고, 헤르난은 생각했다.

급하다는 말이 신경 쓰였는지 입맞춤은 이전보다 느리고 친절한 모습으로 이어졌다. 눈을 꾹 감은 채 간지러운 붉은 어둠 속을 헤매던 헤르난은 불현듯 칼릭스가 보고 싶어졌다. 눈을 뜨면, 다시 기억을 되찾은 남자가 제 앞에 있을 것만 같다는 이상한 착각이 들었다.

헤르난은 용기를 냈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하지만 몇십 초도 버티지 못하고 다시 어둠 속으로 도망가게 됐다. 흐릿한 시야가 선명해지기도 전에, 칼릭스의 새파란 시선부터 마주하게 된 탓이었다.

칼릭스의 눈은 헤르난이 감당하지 못할 뜨거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헤르난은 그 뜨거움이 자신을 활활 태우기라도 할까 무서워졌다. 눈을 뜨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에 창피하고 민망하기까지 했다. 어디 풀어낼 수도 없는 당혹감에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발갛게 변하길 반복했다.

귀여워. 헤르난의 감긴 눈 위에 입을 맞추며 칼릭스는 웃었다.

뇌를 설탕에 절이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감각에서, 모든 생각에서 단내가 풍겼다. 반쯤 미친 게 분명했다. 날이 갈수록 제정신이 아니게 되어 가고 있는 스스로에게 혀를 차며 칼릭스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헤르난의 흐려진 흉터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칼릭스의 말이 이어졌다.

“입 안 맞출 테니까, 나 좀 봐주면 안 돼요?”

그 다정한 속삭임을 무시하기 힘들어 헤르난은 다시 눈을 떴다. 잘 벼려진 칼처럼 날카롭던 헤르난의 눈이, 열이 올라 잔뜩 흐려진 채로 그 안에 칼릭스를 담았다. 단정하게 뒤로 넘겼던 머리카락이며 옷이 잔뜩 흐트러진 채였다.

제 아래에서 정갈함을 잃어버린 헤르난을 보며 칼릭스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대로 저 남자의 옷을 벗겨 내느냐, 원래대로 돌려놓느냐. 두 가지의 생각이 서로에게 달라붙어 칼릭스를 비웃었다.

“이런 모습을 남에게 보여 줄 순 없으니까.”

관자놀이에 핏대가 설 정도로 눈을 꾹 감았다 뜬 칼릭스가 선택한 건, 헤르난의 뻗친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고 그의 옷매무시를 가다듬어 주는 일이었다.

“진도는 천천히 나가야겠다. 그렇죠?”

말을 마친 칼릭스가 헤르난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느슨해진 헤르난의 목깃마저 다잡아 준 칼릭스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손에 헤르난의 벗겨진 왼쪽 구두가 들려 있었다.

칼릭스는 자신의 허벅지 위에 헤르난의 발을 올려놨다. 구두를 신겨 주기 위함이었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손이 제 종아리를, 발을 감싸는 모습을 외면했다. 무릎 아래론 별다른 감각이 느껴지질 않아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온몸이 따끔거려 겁이 났다.

헤르난의 발에 잃어버린 구두를 되돌려 준 칼릭스가 살짝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춰 왔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네요. 안 그래도 잘난 얼굴, 남들이 눈독 들일까 봐 예쁘게 꾸며 주기 싫은데…… 그래도 흐트러진 것보단 나으니까. 그건 정말 나만 봐야 해요.”

말을 마친 칼릭스가 헤르난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곧장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음엔, 더 잘해 볼게요.”

활짝 핀 웃음과 함께였다.

* * *

스칼라의 시간은 언제나 그렇듯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건 잠시 수도로 떠났던 영지의 주인이 전장에서 귀환한 배우자의 손을 잡고 남작성으로 돌아온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남작성의 사용인들은 헤르난과 이혼을 준비 중이라던 칼릭스가 곧장 수도인 디아만테로 돌아갈 거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스칼라에 온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칼릭스는 여전히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떠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칼릭스는 자신의 배우자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고 있었다. 과묵한 헤르난을 보며 실실 웃기만 하는 칼릭스의 모습이 항간을 떠도는 소문 속의, 이혼을 앞둔 전쟁 영웅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런 칼릭스를 두고 그를 겪어 본 적 없던 새로운 고용인들은 사랑이 없는 결혼이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의아해했다. 왜 저렇게 신난 개처럼 빨빨대며 남작님을 쫓아다니는 거냐고 수군대는 건 덤이었다. 당연히, 모든 대화는 뒤에서 몰래 이루어졌다.

스칼라의 주인이 바뀌는 것을 두 번이나 지켜봐 온, 성에서 일한 경력만 도합 25년을 자랑하는 로지는 무감한 얼굴을 하고 그들에게 말했다.

〈예전엔 성난 개처럼 쫓아다녔어. 신난 개처럼 변해 다행이네.〉

칼릭스를 이미 알고 있던 사용인들 모두 로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뒤에서 그런 소리를 듣는 칼릭스도 가끔은 헤르난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찾기도 했다. 주로 헤르난의 최측근인 조세핀이나 집사장, 하녀장 등 헤르난을 잘 알거나 남작성에서 일한 지 오래된 이들이었다.

칼릭스는 그들을 찾아가 가볍게 인사를 건네며 웃어 보였다. 그러곤 슬쩍슬쩍 물음을 던졌다. 보통 스칼라 남작에 관한 것이었다. 칼릭스는 자신이 자리를 비웠던 지난 2년간의 헤르난을 알고 싶어 했다. 헤르난에게 벌어졌던 크고 작은 사건들을 모두 알아내려 들었다. 가끔은 옛이야기를 캐내기도 했고 말이다.

오늘의 칼릭스는 옛이야기 대신 헤르난의 뒤를 쫓는 쪽을 택했다.

칼릭스는 관광에 뜻이 있기라도 한 사람처럼 자신이 스칼라에서 해야 할 즐거운 일들을 헤르난의 앞에 바쁘게 늘어놨다. 죄다 노는 얘기였다.

“바쁜 일 끝나면, 나랑 밖으로 꽃구경 가요. 아. 내가 일을 도와주면 더 빨리 끝낼 수 있지 않을까요?”

“꽃구경을 왜…….”

자신의 팔을 붙든 채로 부담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남자를 향해 헤르난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바다를 보는 것도 좋아요.”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이 스칼라를 지루하게만 여겼다던 헤르난의 말과는 달리, 이곳의 모든 게 칼릭스에겐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풍경이 아름다워서, 기온이 따뜻해서, 제가 갖게 된 북부의 땅 솔스켄이나 수도에선 볼 수 없는 바다가 있어서, 칼릭스는 스칼라가 좋았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풍경이 헤르난의 것이라, 이곳에 헤르난이 있어서, 스칼라가 마음에 들었다.

“고작 꽃을 보러 가자, 바다를 보러 가자 이런 말을 한 것뿐인데 심장이 엄청 뛰네요. 웃기죠?”

칼릭스는 스칼라의 모든 걸 눈에 담고 싶었다. 기왕이면 헤르난과 함께 말이다.

“그래도 당신이 싫다고 하면 욕심 안 낼게요. 연애도 시작했고 입도 맞추긴 했지만, 아무래도 우리 사이엔 시간이 필요한 거 같으니까요.”

“……꽃을 보면서 뭘 하고 싶으신 건지 여쭙고 싶습니다.”

칼릭스는 답을 내어 준 헤르난과 눈을 맞췄다. 약간의 의심과 머뭇거림이 담긴 듯 보이지만 어쨌거나 제게 대꾸해 주는 헤르난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뭘 하긴요. 나는 말 그대로 꽃구경을 하고 싶은 겁니다. 다른 사람 말고 당신이랑, 연인들이 하는 건 다 해 보고 싶어서요.”

“알겠습니다.”

조금의 민망함을 느끼며 헤르난이 답을 내놨다.

예전의 헤르난이었다면 무조건 그러겠노라 답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칼릭스가 연인의 입장에서 눈을 빛내며 물어 오자 답을 하는 게 어려워졌다. 그 연애라는 게 단순한 계약이며 대단히 진지한 것도 아니고, 제대로 된 과정을 거쳐 시작된 게 아님에도 그랬다. 애초에 연애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어 뭘 받아들이고 뭘 피해야 할지 몰라 더 어려웠다.

“말 바꾸기 없어요. 약속해요.”

새끼손가락을 흔들며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약속?”

가볍게 양옆으로 움직이는 새끼손가락을 본 헤르난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진짜 약속한 거죠?”

“……네.”

그 자그마한 답을 들은 후에야, 칼릭스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옛날의 앳되던 모습을 떠오르게 만드는 소년 같은 웃음이었다.

“이렇게 남작성을 구경하다 보니까 다른 것도 보고 싶어져서 그래요.”

칼릭스의 말처럼, 지금 두 사람은 남작성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매일 매시간 자신을 따라다니는 칼릭스를 데리고 남작성의 이곳저곳을 조금씩 돌아보는 게 헤르난의 새로운 일과가 됐다.

오늘의 목적지는 작은 온실이 있는 후원의 외곽이었다.

산책은 평화롭지만 시끄럽게 이어졌다. 헤르난은 거의 5분에 한 번씩, 다리가 아프면 업어 주겠다고 나서는 칼릭스를 말리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그뿐인가, 칼릭스에게 단단히 붙잡혀 그와 함께 걷는 내내 헤르난은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옆에 있는 칼릭스가 틈만 나면 뺨에 입을 맞춰 와서 그랬다.

기억이 사라진 칼릭스의 성격은 예전보다 밝아졌다. 자신이 그의 호위 기사를 하던 시절과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솔직하고 귀엽고, 기분을 파악하기가 쉬웠다. 웃기도 잘 웃었다. 거기에서 조금 더 철만 들었을 뿐이었다.

때때로 천진한 잔인함이나 사나운 위압감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잔인함도 사나움도 헤르난에겐 닿지 않았기에 알아채기 힘들었다.

칼릭스 히페리온이라는 사람을 구성하던 분위기 역시 헤르난을 잊으며 완전히 달라졌다. 칼릭스에게서 때때로 보이던 어두운 불안과 차가운 그림자를 눈앞의 남자에게선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가끔은 자신의 초조를 드러냈지만 대개 자신만만했고 여유로워 보였다.

헤르난은 그런 칼릭스의 변화를 좋게 생각했다. 그를 감당하는 게 버겁게 느껴지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하지만 가끔은…… 저 환한 웃음 속에서 상처받은 남자의 얼굴을 찾게 되기도 했다. 자신을 따라 이곳에 왔던, 그리고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그의 기억을 떠올렸다.

가 보지 못했던 길로 함께 나아가자더니, 나만 이곳에 남겨 두고 앞서 가 버렸구나.

그런 우스운 생각을 하다 스스로에게 욕을 뱉기도 했다.

“당장 내일은 같이 시내에 나가 볼까요?”

바닷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후원의 가운데에 서서 칼릭스는 물어 왔다. 어딘가 들떠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였다.

기억이 사라진 칼릭스 히페리온의 눈 속에 무해한 애정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 반짝이는 애정이 닿은 곳은 시원한 바람도 따스한 햇볕도, 아름다운 후원의 풍경도 아닌 헤르난 말론이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다고 웃으며 넘겨 버려야 하는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제 앞에 있는 이가 칼릭스가 아니었다면, 저 사람이 제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반년 뒤에도, 저 남자가 사랑을 말하면 어쩌지?

헤르난은 그의 마음을 툭, 툭 건드리는 물음을 지워 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아 결국 눈을 돌려 버리는 쪽을 택했다.

“……제가, 후작님을 즐겁게 만들어 드릴 수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우니 괜찮아요.”

칼릭스는 헤르난의 자신 없는 목소리를 붙잡았다. 무슨 대단한 비밀을 알려 주려는 사람처럼 헤르난에게 가까이 몸을 붙였다.

“즐겁다 뿐인가. 당신이 웃기라도 하면 엄청 행복해져요.”

“…….”

“당신이 웃는 거 보면 좋다고요.”

칼릭스는 헤르난의 귓가에 한 번 더 말을 속삭였다. 잠시 닿았다 떨어진 그의 숨결이 더없이 민망하게 느껴졌다. 귀 끝이 붉어졌을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감사합니다.”

어떤 반응을 해야 할까. 속으로 말을 고르던 헤르난이 일단은 칼릭스에게 감사를 전했다.

“웃는 거 자주 보고 싶어요. 억지로 웃는 거 말고요. 아무래도…… 내 역할이 중요하겠죠?”

말이 이어졌다.

“적어도 내 앞에선, 진심으로만 웃을 수 있게 해 줄게요.”

자신만만한 얼굴로 칼릭스는 선언했다.

스칼라의 햇볕이 칼릭스의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환한 빛을 머금어 반짝이는 남자에게서 헤르난은 눈을 뗄 수 없었다.

헤르난은 작은 떨림을 느꼈다. 이미 느껴 본 적이 있었던 떨림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빛에 닿은 그림자라도 된 것처럼 화들짝 놀라 얼굴을 굳혔다. 혼란에 빠져 입만 달싹이던 헤르난은 결국 말 한마디를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칼릭스를 등졌다. 그를 뒤로하고 도망치듯 앞선 걸음을 걸었다. 예의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될까 봐 겁이 났다.

그런 헤르난의 뒤를 칼릭스가 천천히 쫓았다. 여전히 웃는 낯을 한 채였다.

“남작님, 헤르난. 나랑 같이 가요.”

부름에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칼릭스는 그저 평소처럼, 제게서 멀어지려는 헤르난의 뒤를 따르다가 모른 척 먼저 손을 잡았다. 또 모른 척 그에게 손깍지를 꼈다.

“굳이 내 말에 답 같은 거 해 줄 필요도 없어요. 내가 당신 몫까지 더 얘기하면 되니까.”

“…….”

“남작님. 나는 당신이 정말 좋아요. 좋아하는 만큼, 내가 더 열심히 나불댈게요.”

헤르난의 느린 걸음에 발을 맞추며 칼릭스는 계속해 말을 늘어놨다. 언제든 헤르난을 받쳐 줄 수 있게끔, 그의 왼편에 몸을 붙인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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