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기억
스칼라 남작과 그의 배우자인 솔스켄 후작의 앞으로 파티의 초대장이 찾아들었다. 스칼라의 귀한 손님이었던 니콜라가 보낸 것이었다.
소중한 딸 닉스가 마법사의 재능을 발현한 걸 기념하는 파티에 남작께서 꼭 참석해 주었으면 한다는 애정 어린 편지에 동봉되어 온 초대장은, 헤르난을 디아만테 서쪽에 자리한 니콜라 부부의 보금자리로 안내했다. 황실 마법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마탑과 가까운 곳이었다.
당연하게도, 헤르난은 니콜라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칼릭스 역시 그런 헤르난을 따라 디아만테로 향하기로 했다. 헤르난이 바라던 일은 아니었다.
칼릭스의 참석이 이상하게 느껴질 자리는 아니었다. 초대장 역시 헤르난 말론 한 사람이 아니라 스칼라 남작 부부의 앞으로 전해졌고 말이다.
헤르난은 그저, 조금…… 걱정이 됐다.
성격이 좋은 니콜라의 파티엔 많은 손님이 올 것이고, 대공가의 사람들 역시 얼굴을 보일 것이었다. 이안이 소속된 마법사단의 마법사들도 자리를 빛낼 예정이었다. 황녀의 즉위와 함께 기사단에 차출되어야 하는 칼릭스와 자주 얼굴을 보게 될 이들이었다.
분명, 디아만테와 황실 기사단의 구석구석에 칼릭스가 헤르난과 함께 파티에 참석했다는 이야기가 퍼질 것이다. 칼릭스가 귀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참석했던 라한 백작의 파티 때와는 사정이 달라졌다.
칼릭스 히페리온이 여전히 스칼라 남작과 함께하고 있다. 칼릭스에겐 악영향만 끼칠 이야기였다.
마차에 오르는 순간까지도,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안 좋은 소문이 덧입혀질까 봐 걱정해야 했다. 하지만 정작 소문에 시달리게 될 당사자는 혼자 파티에 가겠다고 나서려는 헤르난을 향해 걱정 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나는 소문나는 쪽이 더 좋아요. 기왕 나는 소문, 디아만테 말고 전 대륙에 퍼졌으면 싶은데.〉
이런 속 편한 소리와 함께였다.
결국, 두 사람은 디아만테로 향하는 마차 위에 함께 몸을 실었다.
어느덧 노을이 자취를 감춘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바깥의 색깔이 머무는 작은 창문에 잠이 든 칼릭스의 모습이 어스름히 내비치고 있었다. 뒤섞인 오묘한 색깔 속에 흐릿하게 잠긴 칼릭스를 보며 헤르난은 힘없는 웃음을 지어야 했다.
반대편 자리를 두고 굳이 옆에 붙어 앉아 지치지도 않고 한참을 떠들어 대더니, 이젠 제 오른쪽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자고 있었다.
창문에 비치는 인영이 아닌 진짜 칼릭스에게 헤르난의 시선이 닿았다. 그의 어깨 위에 칼릭스의 백금색 머리칼이 흩어져 있었다.
헤르난은 잠이 든 칼릭스를 말없이 바라봤다. 신기하게도, 아주 먼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칼릭스의 몸집이 자그맣던 시절이었다. 달리는 마차 안에서, 칼릭스는 지금처럼 제 호위 기사의 어깨를 베개 삼아 잠에 빠져들곤 했었다. 그 옛날보다 칼릭스의 덩치가 커지고 무거워진 탓에 전보다 어깨는 아파졌지만 말이다.
지난밤, 칼릭스는 헤르난을 찾아왔었다. 천둥 번개가 치는 게 무서워 홀로 잠을 이루기 힘들다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와 함께였다.
곤란하다는 듯 웃는 칼릭스에게 어쩔 수 없이 침대를 내어 주고 품을 내어 주면서도 헤르난은 그 말을 믿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렇게 깊게 잠이 든 걸 보니, 정말 천둥과 번개 때문에 잠을 설치기라도 했던 건가 싶었다. 기억을 잃기 전의 칼릭스에게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라 너무 쉽게 장난으로만 치부해 버린 걸지도 몰랐다.
‘정말 무서웠던 거면 미안한데…….’
속으로 생각하며, 헤르난은 칼릭스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줬다.
지금껏 기억을 잃은 칼릭스와 주고받았던 말들이, 그와 보낸 시간이 찬찬히 헤르난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헤르난은 그 크고 작은 기억들을 꽤 오랫동안 더듬어 봐야 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엔, 언제나 그렇듯 기억을 잃기 전의 칼릭스가 나타났다.
〈그러니까, 다른 데 눈 돌리지 말고 기다려 줘야 해.〉
마치 자신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웃으며 헤르난을 반겼다.
여전히, 헤르난은 기억을 잃은 남자를 축복하면서 동시에 그가 잃어버린 기억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헤르난은 스스로가 너무 하잘것없이 느껴졌다.
2년 전의 칼릭스와 지금의 칼릭스가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헤르난은 매일 매시간 느끼고 있었다. 다른 게 있다면 기억을 잃은 그가 제게 사랑을 고백하고 연인이 되어 달라 말한 것밖엔 없었다.
칼릭스 히페리온이 헤르난 말론에게 사랑을 말했다.
헤르난은 그 사랑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의 자신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의, 가장 처음 죽음을 맛봤던 그때의 저였어도 같은 생각을 했을 거다. 사람을 놀리는 거냐며 화를 냈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조금쯤은, 칼릭스가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쉽게 사그라들 가벼운 호기심이 아니라 진심으로 저를 마음에 담았을 거란 생각을 펴고 접었다.
그런 이상한 망상을 하게 된 후엔, 착각에 빠지지 말라며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했다.
자신은 기억을 잃은 남자를 속이고 있었다. 칼릭스가 그와 저 사이에 놓인 진짜 이야기를 알게 된다면 어떨까. 불운한 기억이 사라진 지금의 그는 2년 전처럼, 제 손을 잡아 주지 않을 것이다. 순수한 애정도 거짓말처럼 사라지겠지.
어차피, 그 진짜 이야기를 칼릭스에게 건넬 수도 없었다. 기억을 잃은 덕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남자에게 왜 즐겁지도 않은 과거를 말하겠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칼릭스에게 옛이야기를 내뱉느니 당장 혀를 깨물어 죽어 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제는 버렸다고 생각한 욕심이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칼릭스를, 사랑이라는 달콤한 착각에 빠진 그를 속여 보자고, 그가 내민 손을 모른 척 붙잡아 보자고, 자꾸만 부딪쳐 오는 그의 품에서 모든 걸 다 잊고 힘을 빼 보자고, 마음 가장 어두운 곳에서 자꾸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붙잡았다가, 칼릭스가 착각에서 깨어나게 되면? 결국, 폰토스의 말처럼 버림받게 되면? 헤르난은 그 후의 삶을 상상해 보기 힘들었다. 보이는 거라곤 죽음 뒤에 마주했던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도련님.”
죽어 버린 저를 따라 여기까지 온 남자를, 저를 끌어안고 눈물 흘리던 남자를, 제 추잡한 과거를 짊어져 주겠다고 말하던 남자를 떠올리며 헤르난은 중얼거렸다.
〈같이 가자, 헤르난.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대로…… 가지 못했던 길로 가 보는 거야.〉
가지 못했던 길.
마음에 새겨져 있는 선명한 목소리 위에 자신의 목소리를 덧씌워 보며 헤르난은 잠이 든 칼릭스를 따라 눈을 감았다.
어느덧, 마차는 디아만테로 들어서고 있었다.
* * *
마법사 가문의 진정한 일원이 된 아이를 축복하기 위한 파티는 저택 내부를 넘어 후원에 마련된 야외 연회장에서까지 이어졌다.
연회장 전체에 니콜라를 닮은 밝은 분위기가 그의 웃음소리처럼 즐겁게 퍼져 있었다. 하지만 그 편안한 분위기도 긴장한 헤르난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지는 못했다. 배우자인 칼릭스에게 꽂히는 온갖 시선 때문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헤르난과 달리 칼릭스는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얼굴로 은은하게 웃고만 있었다. 남들의 시선이나 뒷얘기 따위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칼릭스의 속 모를 미소는 오늘의 주인공이자 닉스의 부모인 니콜라와 이안에게도 닿았다. 이제는 진짜 부부가 된 두 사람이 칼릭스를 묘한 눈으로 보는 것만 같아 헤르난은 계속해 말을 돌려야 했다.
칼릭스에겐 미리 니콜라와 이안에 관한 이야기를 해 뒀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 꽤 긴 시간을 스칼라에 머물렀던 분들이라는 말과 함께였다.
니콜라에게 칼릭스의 상태를 따로 말하진 않았다. 니콜라가 저 아래에서 은근하게 떠돌고 있는 칼릭스의 기억과 관련한 소문 위에 또 다른 소문을 더할까 걱정해서는 아니었다. 왜인지 저와 칼릭스의 사이가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는 니콜라가 괜한 마음을 쓰게 만들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오랜만에 뵈니 꼭 다른 사람 같으세요.”
“마물들과 싸우다 어른이라도 됐나 봅니다.”
니콜라와 칼릭스가 이따금 짧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어딘가 연극적인 웃음소리와 함께였다.
다행히, 이야기의 화제는 오늘의 주인공인 닉스에게로 금세 넘어갔다. 니콜라는 애를 키우느라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헤르난에게 투정 섞인 말을 내놨는데, 지루함을 논하는 사람답지 않게 입가에 다정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행복을 닮은 것이었다.
전쟁이 이어지던 시기에 헤르난은 니콜라를 만난 적이 있었다.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북부에 가족을 둔 니콜라의 얼굴이 좋지 못해 헤르난은 내심 그를 걱정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니콜라는 그때와 달랐다. 얼굴 전체에 천진한 웃음이 퍼져 있었다. 니콜라가 더없이 기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 헤르난 역시 기분이 좋았다.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짓는 헤르난을 따라, 칼릭스 역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두 사람을 힐끗 눈에 담았던 니콜라는 이어지는 대화의 끝자락에서 헤르난의 귓가에 대고 말 한마디를 속삭였다. 헤르난과의 신장 차이 때문에 까치발을 들어야 했다.
“부군께서 성숙해지신 건지, 연기가 느신 건지 모르겠어요.”
말은 헤르난이 니콜라에게 몸을 숙여 줄 틈도 없이 빠르게 끝이 났다.
다시 똑바로 선 니콜라는 그 이상의 말을 더하진 않았다. 대신, 동료 마법사들에게 끌려간 이안을 뒤로하고 헤르난을 다른 손님들에게로 안내했다. 그의 사촌 형제들이었다.
니콜라는 그가 스칼라에 머물던 시절에 입에 담았던, 모자라지만 착한 사촌 형제들을 모아 헤르난과 칼릭스에게 소개해 줬다. 아카데미에 발목 잡혀 있는 레온만 빼고 자신의 사촌들 모두가 닉스를 축복하기 위해 모였다는 설명이 덧붙었다. 칼릭스의 낯빛을 살펴보는 니콜라의 얼굴에 즐거움이 담겨 있었다.
마주하게 된 남자들은 모두 성격이 좋고 친절했다. 니콜라와 레온을 조금씩 닮은 그들은 스칼라 남작을 앞에 두고도 편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다른 사람들처럼 헤르난에게서 어색하게 웃으며 물러서지도, 무례한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헤르난은 그것이 니콜라가 절 좋게 말해 준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남을 즐겁게 해 주거나 호감을 살 만한 뭔가를 해낼 자신은 없어 헤르난은 그저 그들의 말을 열심히 경청했다.
가끔은 칼릭스가 그를 대신해 남자들의 말을 받아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연회장 곳곳에 꽃처럼 피어 있는 하얀빛이 칼릭스의 생기 있는 얼굴을 환하게 비추고 있어서인지, 더욱 눈이 갔다.
“나한테 열렬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누군가 했더니.”
가끔 닿았다 떨어지는 시선을 알아챈 칼릭스가 헤르난에게 몸을 붙여 왔다.
“피곤해요?”
헤르난의 귓가에 대고 칼릭스는 물었다. 허리를 감아 오는 팔이 간지러웠다.
“……사람들이 봅니다.”
바로 직전까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남자들의 눈치를 살피며 헤르난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악단의 연주 소리가 어지간한 목소리는 가려 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라고 이러는 건데.”
웃는 얼굴로 칼릭스는 말을 이었다.
“내 사람한테 눈독 들이지 말라고, 더럽고 유치하게 경고하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헤르난은 차마 제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 니콜라의 사촌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 칼릭스였다. 헤르난 말론이 아니었다. 그 눈독이란 걸 받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게 관심을 두는 이는 아무도 없는데 왜 이럴까 싶어 민망했다.
다행히, 칼릭스가 다시 앞을 향해 시선을 돌려 줬다. 하지만 헤르난을 단단히 붙든 팔까지 떼어 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제 허리를 감싸고 있는 칼릭스의 손 위에 꽂히는 니콜라와 남자들의 시선을 느끼며 헤르난은 멋쩍게 웃어 보여야 했다.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칼릭스가 우리는 이쯤에서 잠시 쉬어야 할 것 같다며 가벼운 작별의 말을 남겨 버린 덕이었다.
간결한 눈인사를 끝으로 칼릭스는 헤르난과 함께 자리를 떴다. 칼릭스 스스로 케인이 되길 자처하며 헤르난의 왼편에 선 채였다.
걷는 내내 고민에 잠겼던 헤르난은 파티가 열리는 후원의 중심부를 벗어난 뒤에야 칼릭스를 멈춰 세웠다.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헤르난이 살짝 고개를 들어 칼릭스와 눈을 맞췄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을 하고 급히 입을 열었다.
“후작님께서 말씀하신 그 연애……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곧장 말이 이어졌다.
“스칼라에선 뭘 하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장소에서는, 특히 수도에선 이런 식의 접촉은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왜요?”
“……후작님을 위해섭니다.”
헤르난의 답변을 들은 칼릭스의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았다. 하지만 엷게 감돌고 있던 웃음까지 잃지는 않았다.
“나를 위해서라. 그 배려가 고맙긴 해요. 하지만 환영하고 싶진 않네요. 내가 더 믿음직한 사람이었다면,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
“남작님. 난 남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떠들건 상관없어요. 신경도 안 씁니다. 난 그것보다, 우리 사이가 아무것도 아닌 줄 아는 사람들이 당신한테 이상한 관심을 두는 꼴이 더 거슬려요.”
“……관심, 그런 건 정말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관심이라는 말을 입에 담으며 헤르난은 멋쩍음을 느꼈다.
늘 차고 넘칠 정도의 관심을 받고 사는 사람이라 그럴까. 칼릭스는 제게 잠시 닿았던 남들의 시선 모두를 그에게 닿는 관심과 비슷한 것으로 느낀 모양이었다. 그것도 성애적인 무언가가 섞인 모양새로 말이다.
저를 스쳐 지나간 시선들은 호감이 담긴 관심이 아니라 특이한 것을 향한 호기심이었다. 그저 소문의 스칼라 남작이 신기해서 눈에 담아 보고 말을 걸어도 본 거다.
“남작께서 눈치가 없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습니다.”
헛웃음을 지어 보인 칼릭스가 말을 더했다.
“당신이랑 나랑 연애한다고 세상에 소문을 내지는 못하더라도, 당신을 귀찮게 할 것들을 밀어낼 수 있게는 해 줘요. 당신은 그런 걸 잘 못 하니까, 내가 대신해 줄게요.”
헤르난의 드러난 이마 위에 내려온 머리카락을 넘겨 준 칼릭스가 말했다. 눈썹 위에 새겨진 흉터를 훑고 떨어지는 손끝이 쑥스럽게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칼릭스에게서 시선을 떨어뜨리며 헤르난은 답했다. 내가 너를 보호하겠노라 말하는 다정한 목소리를 귀에 담고 있자니 계속 눈을 마주하기가 어려워 급히 답을 내놓은 거였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났다.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시 잡아야 했다. 수도에 오게 된 김에 연락을 줬었던 중매쟁이를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릭스와 거래 아닌 거래를 하긴 했지만, 헤르난은 직접 그의 맞선 상대를 수소문해 볼 생각까진 없었다. 중매쟁이가 계속해 약속을 잡아 줄 거라고 여긴 탓이었다.
하지만 헤르난의 예상과 달리, 칼릭스가 히페리온 저택에서 로베를 만난 후로 중매쟁이들이 잠잠해졌다. 연락 또한 그 빈도가 현저히 줄었다. 로베를 소개해 줬던 중매쟁이는 아예 얼굴을 내비치지 않게 됐다.
이젠 제가 먼저 중매쟁이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칼릭스에게 그리고 그의 맞선 상대가 될 이들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래도 헤르난은 해야만 했다.
반강제적인 맞선이라고 한들 첫눈에 마음이 가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칼릭스 역시 제 말을 듣길 잘했다고 생각할 거다. 맞선 상대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정말 칼릭스를 위한 일일까? 떠오르는 물음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창백한 헤르난을 보며 칼릭스는 코트를 벗었다. 칼릭스는 그가 벗어 든 남색 코트를 헤르난의 어깨 위에 둘러 줬다.
“추워 보여서요.”
다시 마주한 시선에 반가움을 느끼며 칼릭스는 말을 더했다.
“이렇게 키도 크고 멋있는 남자를, 애처럼 챙겨 주고 싶단 말이죠. 좋아해서 그런 거겠죠? 너무 좋아하니까.”
좋아하니까. 몇 번을 들어도 낯설게만 느껴지는 말이었다.
괜히 칼릭스가 둘러 준 코트를 매만져 보며 헤르난은 침묵을 지켰다. 감당하지 못할 후회를 밖으로 내뱉지 않게,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늘 위에서 자그마한 파열음이 들려오기 시작한 탓이었다.
소리는 점점 커졌다. 이내 천둥보다는 작은 소리가 하늘을 가득 채웠다. 마치 천둥과 함께 오는 번개처럼, 소리의 끝에 환한 빛이 붙어 왔다.
“아. 저택의 안주인께서 허가를 받았다고 자랑하시던 게 저건가 보네요.”
칼릭스의 두 손이 헤르난에게 닿았다. 그는 헤르난의 몸을 돌려세웠다. 찬란한 색이 터져 나오고 있는 하늘을 더 잘 올려다볼 수 있게 헤르난을 이끌었다.
칼릭스의 바람대로, 헤르난은 두 눈에 밤하늘을 담았다.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폭죽이 아니라,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오색찬란한 빛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아름답고 신기했다.
헤르난은 칼릭스와 나누던 대화도 잠시 잊고 마치 춤을 추는 듯 유려하게 움직이다 터져 버리는 빛을, 그것들이 남긴 빛무리를 바라봤다. 그의 멍한 얼굴 위로 여러 가지 색이 모습을 바꿔 가며 내려앉았다 떠나가길 반복했다.
“불꽃놀이를 처음 보는 사람 같아요.”
뒤에서 헤르난을 끌어안은 칼릭스가 속삭였다. 파란 눈 속에 빛이 유영하는 밤하늘 대신 헤르난을 담았다.
“호위 기사 일을 할 땐…… 불꽃놀이를 볼 수 없었습니다.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문제를 만드는 사람들이 많아서…… 눈을 뗄 수 없었어요.”
헤르난이 느릿한 말을 내뱉었다. 여전히 하늘에 시선이 닿아 있는 채였다.
“문제를 만드는 사람들은 내가 없애 줄 테니까, 걱정 말고 실컷 위를 봐요.”
빛 아래에 선 두 사람의 몸이 더 가까이 겹쳐졌다. 칼릭스가 내어 준 속삭임이 안심돼 헤르난은 계속해 반짝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거짓말처럼 걱정이 사라졌다.
다시 살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아름다운 풍경이 저 위에 펼쳐져 있었다. 그 풍경을 놓치지 않게 도와주고 있는 게 칼릭스라는 사실이 더더욱 꿈같기만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좋았다.
아주 먼 옛날 밤의 연회장에서 딱 한 번 상상해 본 적 있던 순간이, 죽음의 목전에까지 가져갈 진짜 기억이 됐다.
짧은 불꽃놀이가 끝나고 하늘은 다시 어둠을 되찾았다. 그제야 헤르난은 몸을 돌려 다시 칼릭스를 봐 주었다. 그의 어두운 눈동자 위에 보기 드문 순수한 기쁨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귀여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칼릭스는 눈앞에 선 남자의 뺨에, 입술에 입을 맞췄다.
정말, 진심이에요. 몇 번이고 말을 반복하며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자꾸만 입을 맞췄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칼릭스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귓가에 닿아 오는 통에, 헤르난은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입 맞춰도 돼요?”
이미 입을 맞춰 놓고.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물었다.
헤르난은 막무가내의 도련님을 향해 그저 힘없이 웃어 보였다. 또 한 번 예전 생각이 나서 그랬다.
기억을 잃기 전에도, 칼릭스는 매번 헤르난에게 입을 맞춰도 되냐고 물어 왔었다. 하지만 대개 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먼저 입술을 부딪쳐 왔다. 이미 입을 맞춰 놓고 물을 때도 많았다.
“왜 그렇게 웃어요? 내가 너무 늦게 물어봤나? 그래도 우리 연애하는 거니까…… 입 맞춰도 되잖아요.”
조금은 부끄러워하며 칼릭스는 속삭였다.
그런 칼릭스에게 헤르난의 시선이 붙들렸다.
아름답게 터져 나가는 빛 아래에 서서, 칼릭스는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밤하늘의 아름다움엔 관심도 주지 않고 헤르난만을 바라봤었다.
그 애정 어린 시선을 어색하게 느끼면서도 헤르난은 기뻤다. 칼릭스와 하는 연애라는 것은, 설령 그것이 어설픈 반쪽짜리일지라도 더없이 행복한 것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헤르난은 그 행복 속에서 한 가지 사실을 알아챘다.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기대를 품게 된다면, 그와의 입맞춤에서 기쁨을 느끼게 된다면, 자신은 그것이 끝이 났을 때 견디지 못할 것이다.
칼릭스가 기억을 잃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분명, 칼릭스가 저를 원한다는 핑계로 오랜 시간을 그의 옆에 있었겠지. 칼릭스의 행복을 목도한 뒤엔 그의 삶에서 물러서겠다던 처음의 다짐마저 모른 척했을 것이다.
폰토스의 말처럼, 칼릭스가 입에 담았던 마음이 오래된 장난감에게 갖는 애착과 소유욕에 가까운 것일지라도 헤르난은 칼릭스가 자신의 평생을 원한다는 걸 받아들였다. 그 역시 이 마지막 삶에서야 간신히 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기억을 잃은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소유욕과는 다른 감정을 내밀었다. 그가 쥐여 준 애정은 오랜 시간을 거쳐 쌓여 온 어두운 소유욕이 아니라, 깨끗하고 밝은 것이었다.
헤르난은 차마 그 환한 것을 매도하고 흠집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소리를 하면서도 칼릭스가 입에 담은 사랑을 끝내 부정하지 못했다. 칼릭스의 애정을 붙잡는 게 무서워 계속해 부정적인 생각을 이어 가면서도, 손 위에 있는 애정을 놓아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칼릭스의 사랑이, 여기서 얼마나 더 이어질 수 있을까.
결국, 나는 혼자 남게 될 거다.
그걸 알면서도 바보같이 굴면 안 됐다. 그런데도…… 그걸 아는데도, 헤르난은 지금, 칼릭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손끝을 저리게 만드는 떨림을 이제는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며 헤르난은 자조했다.
헤르난은 칼릭스를 사랑하지 않는 방법을 몰랐다. 다섯 번의 삶을 살면서도 고쳐먹을 수 없는 마음이었다.
사실, 헤르난은 제 앞에 놓인 깨끗한 마음을 모른 척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제 손길이 닿길 바라는, 덩그러니 놓여 있는 칼릭스의 마음에 가끔은 먼저 말을 걸어 보고 싶었다. 쓰다듬어도 보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게 힘들어졌다.
헤르난은 자신의 앞에 성큼 다가선 어리석은 파멸이, 지지부진하게 이어 온 긴 삶의 마무리로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운이 좋다면, 헤르난 말론이라는 이름이 칼릭스의 인생에서 잠깐이나마 함께하며 즐거움을 느꼈던 옛 배우자로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분수도 모르고 빛을 향해 다가서다가…… 타 죽어 버리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무거웠던 마음이 이상하게 편안해졌다.
헤르난의 손이 칼릭스의 뺨에 닿았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말에 답을 주는 대신 그에게 먼저 입을 맞췄다. 그저, 입술을 맞댔다.
연인의 입맞춤이라기엔 온도가 낮은, 경애의 표현과 다를 바 없는 요령 없고 재미없는 입맞춤은 싱겁게 끝이 났다.
별안간 입을 맞출 땐 언제고 헤르난은 놀라 칼릭스에게서 제 입술을 떼어 냈다. 헤르난은 급히 뒤로 물러났다. 충동적으로 저지른 행동이 너무나 부끄러워 칼릭스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당혹스러운 건 칼릭스 역시 마찬가지인지, 그는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어지러운 얼굴을 하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칼릭스는 침묵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떴을 땐, 어느새 그의 새파란 눈에 다시 빛이 돌아와 있었다.
곧, 칼릭스의 입 사이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 웃음은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삽시간에 웃음기가 사라진 칼릭스의 손이 그에게서 물러서려 하는 헤르난의 손을 붙잡았다.
가까워진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칼릭스는 헤르난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무거운 감정이, 풍랑을 맞은 배처럼 그의 눈 속에서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무언가 말을 하려던 칼릭스의 입이 다시 다물렸다. 입 속에 말이 갇히기라도 한 사람처럼 답답함을 느끼는 것만 같았다.
헤르난은 이상하게도, 제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칼릭스에게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왜인지 머릿속에 떠오른 남자를 불러 보고 싶었다.
“도련님…….”
먼 옛날의 호칭이 얽힌 시선 사이에서 흩어졌다.
마법사들의 불꽃놀이가 자취를 감춘 세상에, 억지로 만들어진 소음이 아닌 진짜 천둥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곧, 소나기가 쏟아질 듯했다.
“너무 옛날 호칭을 쓰시는 것 같은데.”
헤르난과 눈을 맞춘 칼릭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훌쩍 몸을 붙여 오는 칼릭스의 손이 뺨을 붙잡고 입을 맞춰 오는 통에, 헤르난은 잠시 생각에서 멀어져야 했다.
벌어진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혀가 뜨겁고 거칠었다. 오랜 시간을 굶은 포식자처럼 칼릭스는 정신없이 헤르난을 붙잡고 입술을 부딪쳐 왔다.
칼릭스의 혀가 어색하게 굳어 있는 남자의 혀를, 딱딱한 입천장을 더듬었다. 귀중품을 감정하는 감정사라도 되는 듯 섬세하게 움직여 온몸을 간지럽게 만들다가도 도굴꾼이라도 된 듯 엉망으로 헤집고, 참을 수 없다는 듯 조급히 밀어붙여 와 정신을 빼 놨다.
맥없는 신음이 숨길 수도 없이 멋대로 새어 나왔다. 칼릭스가 직접 어깨 위에 둘러 줬던 코트는 등을 지분대는 손길에 휩쓸려 아래로 떨어졌다. 케인 역시 바닥을 뒹굴게 된 지 오래였다. 헤르난을 지탱해 주는 건, 오직 칼릭스의 두 팔뿐이었다.
어두운 하늘에서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 무거운 소리를 따라 쏟아지는 비가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적시고 뺨을 차갑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혀가 얽혔다.
하지만 입맞춤이 너무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짧은 욕지거리와 함께 칼릭스는 아쉽다는 듯 헤르난에게서 물러섰다. 빗줄기 너머로 보이는 그의 새파란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칼릭스는 다급히 코트를 주워 그것을 헤르난에게 덮어씌웠다. 케인 역시 그의 손에 쥐여 줬다. 그리고 그대로, 헤르난을 끌어안아 둘러멨다.
“후작님.”
당황한 헤르난이 칼릭스를 불렀다.
칼릭스는 자신을 부르는 헤르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대려는 헤르난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목에 어쩔 수 없이 팔을 둘러야만 했다.
“감기 걸려요. 빨리 갑시다.”
웃어 보인 칼릭스가 서둘러 저택 안으로 향하는 사람들에게로 빠른 걸음을 옮겼다. 헤르난의 손에 들린 케인이 칼릭스의 걸음에 맞춰 흔들렸다.
커다란 남자가, 마찬가지로 키가 큰 편인 남자를 짊어진 풍경에 사람들의 눈이 모이는 게 느껴졌다. 밀려오는 민망함에 헤르난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칼릭스의 코트가 얼굴을 가려 주고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 * *
세이린 숲에서 흰 사슴 한 마리를 마주한 후, 칼릭스 히페리온은 헤르난 말론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 전쟁의 승기가 제국의 편으로 기울어지던 때였다.
부대원들과 함께 선발대의 소식을 기다리던 칼릭스는 별안간 나타난 흰 사슴에게 시선을 뺏겼다. 사슴은 자신에게 닿아 오는 칼릭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까만 눈을 빛내며 마찬가지로 빤한 눈길을 줬다.
따라오라는 말을 건네는 사람처럼, 사슴은 칼릭스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인간에게 고갯짓하는 새하얀 사슴이라니. 평범한 동물이 아니라 삿된 존재일 게 자명했다.
그걸 알면서도, 칼릭스는 사슴을 쫓아 걸음을 옮겼다. 말도 안 되는 짓을 한다는 걸 스스로 인지하면서도 저절로 발이 움직였다. 부대원들 역시 마법에 홀린 듯 칼릭스의 이탈을 눈치채지 못했다.
칼릭스는 몇백 년, 아니 몇천 년은 더 살았을 거대한 떡갈나무 앞에 다다라서야 걸음을 멈췄다. 기이할 정도로 고요한 적막에 둘러싸인 나무 아래에 흰 사슴이 있었다.
흰 사슴과 칼릭스는 약간의 거리를 둔 채로 서로를 마주 봤다. 하지만 그들 사이의 침묵이 오래가진 않았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어느덧 코앞에 흰 사슴이 다가와 있었다. 미쳤군. 칼릭스는 속으로 욕을 내뱉어야 했다.
저 이상한 짐승이 흑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괴물이나 평범한 마법사들이 부리는 사역마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숲에 붙은 정령 혹은 저 오래된 떡갈나무에 가까운 존재겠지.
저것의 목적이 뭘까.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사슴과 눈싸움 아닌 눈싸움을 하며 칼릭스는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했다.
「안녕.」
다행히, 흰 사슴이 먼저 칼릭스에게 말을 걸어 왔다.
「왜 답이 없지?」
“……언제 봤다고 사이좋게 인사를.”
「적어도 나는, 이 정도 인사는 건넬 수 있을 만큼 널 봐 왔단다.」
그 성별도 나이도 파악하기 힘든 목소리에 괴이한 웃음이 섞였다.
“징그러운 소리를 하네.”
칼릭스의 말을 끝으로 흰 사슴은 자취를 감췄다.
머물던 자리에 뿌연 연기를 남기고 사라졌던 사슴은 그가 남긴 연기 속에서 다시 등장했다. 다만, 겉모습을 바꾼 채였다. 사슴은 칼릭스의 호위 기사 일을 하던 즈음의 헤르난으로 변해 있었다.
그 순간, 칼릭스는 저 흰 사슴의 이름을 ‘좆같은 새끼’라고 명명하기로 마음먹었다.
“너. 뭐야.”
낯을 굳힌 칼릭스가 흰 사슴과 시선을 맞췄다.
「좋아하는 사람을 오랜만에 본 건데, 왜 반가워하질 않지? 이상하구나.」
말을 마친 사슴이 헤르난을 흉내 내 작게 웃어 보였다.
아까처럼, 단숨에 거리가 가까워졌다. 헤르난의 얼굴을 한 사슴은 칼릭스를 끌어안았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연인 사이의 갈급함을 담은 듯한 거친 포옹이었다.
「보고 싶었어, 칼릭스. 전쟁이 끝나면 가장 먼저…… 나를 찾으러 올 거지?」
“…….”
「아니, 죽이러 올 건가?」
헤르난의 목소리로, 흰 사슴이 속삭였다.
칼릭스의 손이 헤르난의 모습을 한 흰 사슴을 밀쳐 냈다. 답 대신 내놓은 따가운 욕설 위에 사슴의 웃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삐뚜름하게 웃어 보인 흰 사슴은 칼릭스를 놀리듯 그에게 가장 익숙한, 절름발이 스칼라 남작으로 다시 제 모습을 바꿨다.
「이 모습이 나아?」
“……네가 그 새끼구나. 헤르난한테 저주를 내린 파탄자.”
흰 사슴을 따라 칼릭스는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눈만은 웃고 있지 않았다.
「신의 자식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불경하구나, 건방진 아이야.」
사정없이 구겨진 칼릭스의 얼굴에 대고 혀를 찬 사슴이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언젠간 이곳으로 올 줄 알았단다. 그런 기대를 품고, 기다렸지.」
“…….”
「더러운 흑마법으로 내 축복에 재를 뿌린 침입자를 마냥 내버려 둘 순 없었거든.」
흰 사슴이 칼릭스의 어깨를 도닥여 줬다.
「너를 어떻게 할까. 아주 오랫동안 고민해 봤단다. 처음엔, 널 죽여 버리려고 했지. 그게 깔끔하잖니.」
“…….”
「하지만 내 예상보다 재밌는 그림이 나오기에 한 번 풀어놔 봤지. 그러다 이상한 정이라도 든 걸까? 아니면, 내 은인의 마음에 영향이라도 받은 걸까?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이 변하더구나. 여기까지 따라온 용기가 가상하니…… 헤르난 말론이 있는 기억 정도만 가져가는 건 어떨까, 그런 마음을 갖게 됐지.」
말이 이어졌다.
「이 내가 친히 네 기억을 없애 주마. 그 정도로만 끝내는 거야. 어때. 아예 존재를 지워 버리는 것보단 괜찮지? 그저 헤르난 말론 한 사람만을 잊는 거잖아.」
걸음을 멈춘 흰 사슴이 칼릭스에게 다정히 몸을 붙였다. 곧, 칼릭스의 뺨에 사슴의 손이 닿았다. 하지만 짜증 섞인 얼굴을 한 칼릭스가 자신에게 닿아 온 손을 곧장 잡아챈 탓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됐다.
「무식하게 힘만 세구나?」
그 뒤로 잔소리 몇 마디가 이어졌다. 헤르난과는 어울리지도 않는 표정을 짓고 말을 나불대는 꼴이 짜증 났다.
“사슴 새끼가 개소리도 할 줄 아네.”
「힘만 무식하게 센 게 아니야. 말도 무식하게 해.」
붙잡힌 손을 빼내며 흰 사슴은 말을 이었다.
「뭐가 불만이길래 이러는 거지? 너는 헤르난을 잊고, 헤르난은 자신을 잊은 너와 아름답게 이별하고. 각자 갈 길 가는 거잖아. 얼마나 아름다운 결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흰 사슴의 얼굴에 의아함이 묻어 있었다. 그 의아함을 들여다보며, 칼릭스는 저 삿된 존재가 헤르난에게 내린 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허접한 흑마법 하나 제대로 막지 못한 걸 반성해야지. 몇 번이고 반복된 삶을 이제야 간신히 입 밖에 내어 놓게 된 사람한테서, 처음으로 그 시간을 다른 사람과 나눠 볼 수 있게 된 사람한테서 나를 뺏으려 들면 안 되잖아.
「왜 나를 나쁘게 보는 거지? 적어도 넌, 헤르난을 살려 준 내게 감사함을 느껴야지.」
칼릭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들끓으려던 분노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저 새끼는 헤르난이 삶을 백 번을 반복하건, 만 번을 반복하건 끝내 그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지금처럼 자기가 원하는 상황이 올 때까지 헤르난의 인생에 참견하겠지.
“그러지 마.”
「응?」
“네가 신이라는 사실이, 그 사람을 괴롭힐 이유는 못 돼.”
소드 벨트에 걸려 있는 검을 쥔 칼릭스가 중얼거렸다.
「……나한테 덤비려고 하는 거야? 네가 마신 하나 죽인 건 아는데, 걔랑 나랑은 달라.」
흰 사슴은 칼릭스에게서 물러섰다.
「재밌네. 하지만 성격이 너무 급해. 아직 내 말은 안 끝났어, 칼릭스. 실망부터 하고 보면 어떡해. 난 나의 형제자매들처럼 자비 없는 존재가 아니란다.」
흰 사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여기까지 온 너의 근성을 어여삐 여겨 선물을 하나 줄게. 괜찮지?」
“…….”
「기억을 완전히 없애진 않을 거란다.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 있게 잠시 잠가 두는 거야.」
조금은 황급히, 흰 사슴은 칼릭스에게 작은 숨을 불어 넣었다. 그런 사슴을 보는 칼릭스의 눈이 사나워졌다. 몸이, 머리가 굳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려 하는 게 느껴진 탓이었다.
「대신, 열쇠를 쥐는 건 네가 아니라 나의 은인이란다. 헤르난 말론이 너에게 먼저 입을 맞추면…… 기억을 풀어 줄게. 굉장히 동화 같지?」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쉽진 않을 거야. 나의 은인은 네가 기억을 잃었다는 걸 알면 모든 걸 포기하고 순순히 떠날 테고, 너는 그 작별을 환영할 거 아니겠니. 빨리 날 떠나 달라고 먼저 쫓아버릴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걱정 마. 네 기억은 내가 잘 보관해 줄 테니.」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말끝에 따라붙었다. 칼릭스는 헤르난의 얼굴을 한 흰 사슴을 따라 웃어 보였다.
“내가 기억을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 내기할래?”
굳은 몸을 움직여, 칼릭스는 간신히 흰 사슴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런 칼릭스를 보는 사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그라들었다.
「내기에 걸고 싶은 게 있겠지?」
“헤르난 말론의 인생에서, 완전히 손 떼.”
칼릭스는 말했다. 자신만만한 웃음과 함께였다.
「……정말 우습구나. 아주 즐거워.」
잠시 침묵했던 흰 사슴의 눈가에도 칼릭스 못지않은 자신만만한 빛이 떠올랐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어차피 하겠다고 할 거면서 시간 끌지 마.”
칼릭스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온 장검이 하늘을 업은 떡갈나무 틈새로 흘러들어온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 빛을 눈에 담으며 흰 사슴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승낙하지.」
말을 마친 흰 사슴의 손끝이 칼릭스의 이마에 닿았다. 그 짧은 접촉을 마지막으로 칼릭스의 세상이 새까맣게 변했다.
칼릭스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지친 기사들과 용병들이 늘어서 있는 야영지 앞이었다. 무언가 마음이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 * *
이제는 남작 부부가 아니라 후작 부부가 된 두 사람은 곧장 스칼라로 돌아가는 대신 디아만테에 이틀을 더 머물게 됐다. 칼릭스가 수도에서 확인해야 할 일이 생긴 탓이었다.
칼릭스는 그의 보좌관인 유리에게,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발목이 잡혔다.
〈어떻게 반나절 이상을 손도 못 잡고 얼굴도 못 보고 떨어져 있을 수 있지? 우리 연애는 남들이랑 다르잖아요. 일분일초가 소중하다고요.〉
이렇게, 칼릭스가 난리를 피운 덕분이었다.
여러 이유로 디아만테에 남은 탓에, 꽃을 보러 가자던 약속은 스칼라가 아닌 히페리온 저택에서 이루어지게 됐다.
오전 내내 헤르난의 눈치만 슬슬 보던 칼릭스는 결국 제 연인이자 배우자의 손을 붙잡고 아름다운 후원을 방문하는 걸 택했다. 일에 파묻혀 시간을 보내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어 두고 싶다는 명목에서였다.
발을 맞춰 걸으며,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정원에 관한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라 댔다. 얼마 전 서로 고백과 거절을 주고받았던 장미 정원으로 향하는 길은 모른 척 피해 버리면서 말이다.
폴로와 셀, 두 정원사가 정성으로 가꾼 히페리온 저택의 후원은 아주 짧은 겨울을 제외하면 1년 내내 따스한 스칼라의 후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언제나처럼 꽃이 한가득 피어 있는 건 장미 정원뿐만이 아니었다.
마법에 걸린 후원을 두 사람은 천천히 돌아봤다. 꽃구경이란 말은 가져다 붙일 수도 없는 별것 아닌 산책인데도 기분이 좋아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칼릭스는 헤르난 역시 자신처럼 기분이 좋길 바랐다.
홀로 꽃 덤불을 다듬고 있던 셀이 멀찍이 보이는 헤르난과 칼릭스에게 인사를 건네 왔다. 셀의 밝아진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환한 웃음과 함께였다.
칼릭스는 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천천히 훑었다. 제법 예쁘장한 얼굴이 힘쓰는 일을 하는 사람들 특유의 건강함과 섞여 그에게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스칼라를 떠나기 직전에 봤던 모습이 쉽게 겹쳐지지 않을 정도로 다른 사람 같았다.
그래도…….
‘나랑은 비교가 안 되지.’
자신이 헤르난의 몸종이라도 되는 양 그의 옆에 딱 달라붙어, 칼릭스는 생각했다.
칼릭스는 간간이 말을 내놓고 웃음을 지어 보이며 헤르난과 셀이 나누는 대화를 지켜봤다. 가끔 짜증이 치솟아 두 사람을 떼어 놓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참아 내야 했다. 헤르난이 셀을 좋아하니 말이다. 쳐 내는 건, 헤르난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새끼들이면 됐다.
‘그래도 너무 친하게 지내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속으로는 유치한 생각이 이어졌지만 말이다.
칼릭스 히페리온은 기억을 되찾았다.
내가 돌아왔다고,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당장에라도 외치고 싶었다. 그를 끌어안으며 입을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그 바람과 달리, 막상 헤르난의 앞에 서면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에 진실을 담는 게 힘들었다.
헤르난은 그를 잊은 남자에게 먼저 입을 맞춰줬다. 전쟁에 나선 기사가 무사히 귀환하길 바라며 한 입맞춤이 아니라,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입을 맞춘 거였다. 헤르난의 앞에 건네진 사랑에 입을 맞춘 거였다.
그 애틋한 입맞춤이, 흰 사슴의 저주를 날려 버렸다.
지워졌던 기억이 제 부재 속에서 생겨난 새로운 기억과 제대로 된 순서도 지키지 않고 엉망으로 뒤엉켰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기억을 정신없이 받아들이며 칼릭스는 얼굴을 굳혀야 했다.
칼릭스는 아무리 기억이 없다고 한들 자신이 헤르난이 떠나는 걸 두고 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실패를 반복하더라도 언젠간 헤르난에게 옆을 허락받게 될 거라고 믿었다. 해낼 거라고 믿었다. 아주 긴 시간이 흐른 뒤에라도, 결국, 헤르난이 제게 입을 맞춰 줄 거라고 자신했었다.
하지만 막상 헤르난에게 입맞춤을 받고 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헤르난이 먼저 입을 맞춰 줬다는 감격과 기억이 돌아왔다는 기쁨, 엿보게 된 헤르난의 옛이야기들이 준 벅참 뒤로 불안이 따라붙었다.
까만 안개가 걷힌 머릿속으로, 구김 없는 순수한 사랑을 전하는 남자와 그런 남자를 따라 조심히 웃어 보이는 헤르난이 찾아왔다. 그 자그맣지만 진심이 담긴 웃음은 기억을 잃은 칼릭스에게도 기억을 되찾은 칼릭스에게도 서로 다른 의미로 선명히 남았다.
헤르난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건, 기억이 없는 나일지도 모른다.
한여름의 장맛비처럼 거세게 쏟아지는 기억을 맞으며 칼릭스는 그런 생각을 했다. 자기 자신에게 느끼는 우스운 질투와 박탈감이 그의 어깨를 적셨다.
헤르난이 칼릭스 히페리온이자 칼릭스 히페리온이 아닌 남자에게 마음의 빗장을 풀게 된 건 당연했다.
칼릭스는 자신이 헤르난에게 품은 감정을 내내 부정하고 의심해 왔다. 그러면서도 기어코 제 옆에 헤르난을 붙잡아 두고는 모른 척, 한 걸음을 물러섰다. 제 마음에 소유욕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 두고 그것을 핑계 삼아 일을 쳤다. 하나같이 정상적이지 못한 짓거리였다.
삐뚤어진 집착은 헤르난에게 편한 휴식이 됐을지도 모를 이번 삶까지 이어졌다. 흰 사슴의 말대로, 기어코 이 이상한 세상에까지 쫓아와 헤르난의 인생에 훼방을 놨다.
칼릭스 히페리온은 헤르난의 삶을 어그러뜨렸다. 제 마음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해서, 겁을 먹고는 손에 쥔 것을 들여다보지 않아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해서 헤르난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난 삶을, 헤르난을 잊은 자신은 달랐다.
그는 헤르난에게 재수 없게 굴었을지언정 금세 제 마음을 깨닫고 행동을 고쳐먹었다. 빠르게 알아챈 만큼이나 가감 없이 그 마음을 헤르난의 손에 쥐여 줬다. 적어도 헤르난의 앞에선 그에게 솔직하려고 노력했다. 칼릭스 히페리온이라는 거짓말쟁이에겐 쉽지 않았을 일이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기억을 잃기 전의 남자는 긴 시간 동안 해내지 못했던 일을, 기억을 잃은 남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해냈다. 헤르난이 거쳐 온 다른 삶 속의 또 다른 자신 역시 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헤르난의 불행은 칼릭스 히페리온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러니 그 불행의 끝을 맺는 것도 칼릭스 히페리온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게 꼭 모든 걸 알고 있는 칼릭스 히페리온이어야 할까?
그 물음을 붙들고 칼릭스는 지난 며칠의 시간을 보냈다.
처음엔, 그래도 제 기억이 돌아왔다는 걸 헤르난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마음이 들었다.
내가 기억을 찾은 걸 알면 실망할지도 몰라.
조금씩 열려 가던 헤르난의 마음이, 나 때문에 다시 닫힌다면? 내가 기억을 찾는 걸 원치 않는다면?
헤르난의 마음이 기우는 곳이 기억을 잃은 남자의 순수한 사랑이라면,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그걸 주고 싶었다.
차라리 기억이 제대로 박힌 제가 기억이 없던 때의 멍청이보다는 조금이나마 절제라는 걸 할 줄 아니, 지금의 자신이 이전의 저를 흉내 내는 쪽이 나을지도 몰랐다.
칼릭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생각은 헤르난과 셀의 대화가 끝을 맺으면서 멀리로 달아났다.
“수고해요.”
꾸벅 인사를 하고 폴로에게로 떠나는 셀을 향해 칼릭스는 대충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칼릭스를 빤히 올려다보는 헤르난에겐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다정한 미소를 건넸다.
칼릭스와 헤르난은 아름다운 정원을 말없이 함께 걸었다. 침묵마저 따스하게 느껴지는, 색이 없는 전장을 도는 내내 칼릭스가 그리워했던 순간이었다.
상황이 어지럽게 꼬였다. 헤르난을 끌어안고 건네주고 싶었던 말들은 쉽사리 밖으로 나와선 안 될 말이 됐다. 헤르난을 향한 마음은 제 것이되 제 것이 아니어야 했다. 남아야 하는 건 밝고 사랑스러운 것이지 어둡고 음습한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칼릭스는 행복했다. 지난 삶에서 여기까지 헤르난을 쫓아왔듯 저주를 넘어 다시 헤르난의 옆에 설 수 있다는 게 기뻤다.
〈제게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해 준 게…… 그래서 계속 살게 해 준 게, 예전의 후작님이셨습니다.〉
칼릭스는 옛날 헤르난이 제게 품었던 사랑의 이유를 이 이상한 세상에 떨어지고 난 뒤에야 그리고 모든 걸 잊은 후에야 알게 됐다. 흑마법의 힘을 빌려 헤르난을 쫓아오지 않았다면,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평생 알지 못했을 이야기였다.
헤르난이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해 줘야 했다. 지친 그에게 필요한 건 이전의 제가 아니었다. 지금의 헤르난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줄 사람이 되어야 했다.
칼릭스는 그렇게 마음먹었다. 나이지만 내가 아닌 남자를 흉내 내는 일이 답답하게 느껴질 땐, 헤르난이 아무것도 모르는 제게 해 줬던 옛이야기를 곱씹으면 됐다. 잠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쁨에 절여져 등신 같은 웃음을 짓게 되니 말이다.
“……혹시, 내일 시간이 되십니까?”
생각에 잠긴 칼릭스의 안색을 살피던 헤르난이 물었다.
멈춰 서 시선이 맞길 기다리던 헤르난의 목소리며 눈빛에서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내키지 않는 소리를 억지로 입에 담아야 할 때의 망설임 같기도 했다.
“왜요?”
칼릭스는 모른 척 헤르난에게 되물었다.
“후작님을 뵙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아. 칼릭스는 헤르난의 말속에 담긴 뜻을 곧장 이해했다. 빌어먹을 맞선이었다. 뒤에서 그렇게 훼방을 놨는데, 이렇게 또 사람을 구하다니. 대단하신 중매쟁이의 얼굴을 한번 봐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자가 있는 남자가 맞선을 보는 꼴이라니.’
이혼은 없다며 뻔뻔하게 들러붙는 남자를 떼어 내는 방법으로 맞선을 고른 게 참 헤르난다웠다.
칼릭스는 그와 맞선 상대의 운명적 만남을 기대하는 듯한 헤르난의 모습이 못내 서운했다. 하지만 그 서운함 또한 헤르난을 거쳐 간 몇 명의 칼릭스 히페리온이, 그리고 저 자신이 초래한 것이었다. 헤르난에게 제대로 된 믿음을 주지 못한 스스로를 원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헤르난의 선택과는 별개로, 그의 머릿속에 맞선이라는 선택지를 쑤셔 넣은 건 필시 다른 사람일 것이다. 당연히, 폰토스 히페리온이겠지.
바람난 배우자한테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다 이혼까지 당한 놈이 왜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동생 부부를 방해하고 지랄이었을까. 조만간 친애하는 형님을 찾아뵙고 이전에 하지 못했던 상냥한 경고를 해 드려야겠구나. 칼릭스는 다짐했다.
“누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할까요?”
어울리지도 않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칼릭스는 물었다.
“사교계의 보석으로 불리는 백작가의 자제십니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현명한 데다 아름다운 분이시라고…….”
“얼마나 어린데요?”
“후작님보다 4살이 어리십니다.”
“아. 너무 어려서 안 되겠네요.”
고개를 저으며 칼릭스는 답했다.
“……후작님께서는 저보다 5살이 어리십니다.”
머뭇대던 헤르난이 답을 내놨다.
“당신 나이에서 5살 어린 거랑 내 나이에서 4살 어린 건 다른 것 같은데.”
“후작님과 제가 올해 막 부부가 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논리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말에 헤르난이 당황하는 게 보였다.
“난, 4살이 어린 것보단 5살이 많은 쪽이 좋은 것 같아요. 기왕이면 머리카락이 새까만 미남자면 더 좋겠고요. 아, 조금 차가워 보이면 더 좋고요. 그래도 겉보기랑 다르게 속은 다정하고 착해야 해요.”
은근슬쩍 헤르난에게 몸을 기대며 칼릭스는 주절댔다. 기억을 잃었던 시절 저질러 놨던 멍청한 행동들 덕분에 이 정도로 뻔뻔하게 구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졌다.
“……원하시는 바를 잘 전달해 보겠습니다.”
자기 얘기를 하는 걸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아마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거겠지. 입맞춤까지 먼저 해 줘 놓고 말이다. 입 밖으로 내어 놓을 수 없는 안타까움에 혀끝이 씁쓸해졌다.
몸을 떼어 낼 생각은 하지도 않고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몇 마디의 말을 더했다. 맞선 보기 싫다는 투정이었다. 중매쟁이들의 씨를 말려 버릴 때까지만이라도, 칼릭스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헤르난을 졸라 볼 심산이었다.
“어차피, 당장은 너무 바빠서 사람을 만날 수도 없어요. 내 보좌관이 눈에 불을 켜고 나를 감시하는 거 봤잖아요.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을 시키려고.”
작은 목소리로 칼릭스는 말했다. 헤르난의 마음이 약해지는 게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나실 땐 약속을 지키셔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기쁘게 웃어 보인 칼릭스가 헤르난을 끌어안았다. 항상 차가운 두 손과 달리 그 품만은 남부 땅의 주인답게 따뜻했다.
“솔직히 말해 봐요. 내가 맞선 보는 거, 당신도 싫죠? 싫을 거야.”
칼릭스는 자신의 품에 갇힌 헤르난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워하던 남자를 품 안 가득 끌어안은 칼릭스의 목소리가 잔뜩 들떠 있었다.
“……아닙니다.”
“거짓말.”
“정말입니다.”
“나는 못 믿겠는데요.”
왜인지 들떠 보이는 칼릭스의 목소리를 귀에 담으며 헤르난은 그와의 유치한 대화를 포기했다. 대신 조심스럽게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후작님께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뭐든 물어봐요.”
헤르난은 망설였다. 칼릭스가 기꺼이 내놓은 긍정에도 쉽게 입을 떼기 힘들었다.
“혹시, 기억이…….”
하지만 간신히 입을 열고 난 뒤에도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방해꾼 탓이었다.
칼릭스의 보좌관인 유리가 두 사람에게로 뛰어오고 있었다. 놀란 헤르난은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칼릭스를 급히 밀쳐 냈다.
별안간 뒤로 밀려나 버린 칼릭스는 헤르난의 시선이 닿는 곳을 향해 뒤를 돌았다. 최대한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이려 노력하면서였다.
지척에 멈춰 서 숨을 몰아쉬던 유리는 빠르게 분위기를 파악했다. 내가 상관의 즐거운 한때를 망쳐 버렸구나. 결론을 낸 유리는 반 정도는 멋쩍은 얼굴을 하고, 나머지 반은 상관의 연애가 역겹다는 얼굴을 하고 칼릭스에게 말을 전했다.
“솔스켄에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말이 이어졌다.
유리는 칼릭스에게 그의 영지인 솔스켄에서 벌어진 일을 전했다. 눈 덮인 산 중턱까지 이어지는 하얀 숲에 마수가 나타났다는 내용이었다.
전쟁 통에 벌어진 균열을 틈타 흘러들어 온 마수를 처리하는 일은 솔스켄의 기사단 안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수의 출현은 칼릭스가 영지의 새로운 주인이 된 후 처음으로 벌어진 문제고 사건이었다.
칼릭스는 솔스켄의 사람들에게 그가 자신의 영지에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 줘야 했다. 앞으로 꽤 오랜 시간을 솔스켄이 아니라 충성을 바쳐야 할 황제가 있는 디아만테에서 지내야 했기에 더욱 그랬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칼릭스는 곧장 북서부행을 택했다. 당분간 맞선 걱정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겠구나 같은 다소 유치한 생각이 그 결정 뒤로 따라붙었다.
그리고…….
“같이 가 달라고 해도 돼요?”
슬쩍 고개를 돌린 칼릭스가 헤르난에게 물었다.
역시나 답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헤르난은 칼릭스를 향해 진지한 시선을 건넸다.
헤르난이 절 똑바로 봐주는 게 좋아 칼릭스는 기분이 좋았다. 한편으론, 헤르난의 눈 속에 뜻을 모를 걱정과 불안, 망설임이 묻어 있다는 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칼릭스는 헤르난을 불안 속에 홀로 두고 싶지 않았다.
“솔스켄은 스칼라와는 다른 세상이에요. 정반대의 풍경을 볼 수 있어요. 눈이 더럽게 많이 내리긴 하는데, 보기 싫지 않고 예뻐요.”
헤르난이 칼릭스 히페리온과 관련한 일에는 쉽게 나서지 못한다는 걸 알기에, 칼릭스는 조금 더 떼를 써 보기로 했다.
“전쟁터에 나섰을 때를 빼면, 북부에 가 본 적 없는 거 알아요. 전장에선 풍경이 아름다운지 미운지 판단하기도 전에 검부터 들어야 했을 거고요. 검을 놓은 뒤엔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을 테니 뭘 제대로 볼 정신이 없었을 거예요.”
“…….”
“이번 기회에, 북부의 아름다움을 다시 판단해 봐요. 나랑 같이.”
말을 마친 칼릭스의 손이 헤르난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을 얽었다. 손을 붙잡힌 헤르난의 마음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배우자의 영지에 함께 가는 게 뭐라고. 헤르난은 좋다는 짧은 말을 내뱉는 것도 어려워하고 있었다. 분명, 말도 안 되는 애먼 생각을 하며 갈등하고 있을 것이다. 부족한 자신을 솔스켄의 사람들에게 보이면 안 된다는 그런 생각 말이다.
헤르난의 마음을 눈치껏 잘 알아채야 했다. 칼릭스는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기분 따위는 알고 싶지도, 궁금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헤르난의 기분과 생각을 더듬는 일은 언제든 기쁘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뒤늦은 답을 내놨다.
승낙을 들은 칼릭스가 헤르난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알겠습니다, 고작 그 한마디가 뭐라고 마음이 벅찼다.
평생. 헤르난이 싫다고 해도, 나는 내게 주어진 평생을 그에게 쓸 것이다. 헤르난을 잃어버리지 않게 옆에 붙어 있을 거다. 아주 오랜 시간, 무대 위의 광대처럼 기억이 없는 척 얼빠진 연기를 해야만 한다고 해도 좋았다.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로 칼릭스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