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사랑하는, 당신
북서부의 땅 솔스켄은 종일 눈이 내렸다.
남부의 스칼라와 북부의 솔스켄은, 칼릭스의 말처럼 서로 다른 풍경을 품고 있었다. 스칼라의 풍경을 만드는 색이 푸른색과 초록색이라면, 이곳 솔스켄의 풍경을 지배하는 건 하얀색이었다. 온 세상이 새하얀 빛을 냈다.
솔스켄에는 오로지 낮과 밤, 그리고 흰 눈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너무 신기해 헤르난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안 추워요?”
창밖을 내다보는 헤르난에게 칼릭스는 물었다.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괜찮습니다.”
헤르난은 창 너머의 풍경을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어느새 밖을 나설 채비를 완전히 마친 칼릭스가 헤르난의 앞에 있었다. 창문에 붙어 있던 제 모습이 너무 바보 같아 보였으려나 싶어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눈 때문에 땅이 얼어서 걱정이에요. 당신이 걷기 힘들 것 같아서.”
“괜찮습니다.”
“그 핑계로 안고 다니면, 창피해하겠죠?”
“네.”
헤르난은 다급히 답을 내놨다. 농담이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바로 어제만 해도 그랬다. 칼릭스는 마차에서 내리는 헤르난을 에스코트하다 못해 안아 들었다.
자리를 비워야 하는 영주를 대신해 솔스켄을 관리해 주고 있는 칼릭스의 사촌 동생과 사용인들의 묘한 시선이 제게 달라붙는 게 느껴졌었다. 남의 눈치 같은 건 조금도 보지 않는 칼릭스의 옆에서 헤르난은 홀로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금방 갔다 올게요.”
하얀 눈이 내리는 풍경을 등지고 선, 그 풍경과 참 잘 어울리는 헤르난을 보며 칼릭스는 말을 이었다.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 줘요. 테온은 믿을 만한 애니까 같이 놀아도 돼요. 그래도 너무 잘해 주지는 말고.”
“알겠습니다.”
“따뜻하게 있어야 해요.”
속을 간지럽게 만드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읊으며, 칼릭스는 헤르난의 옷깃을 한 번 더 여며 줬다. 마법으로 벽난로의 불을 피운 실내는 과할 정도로 따스한 데다 옷까지 잘 껴입어 추운지 모르겠는데도 자꾸만 걱정을 했다.
헤르난의 두 눈이 그를 살피는 칼릭스의 얼굴에 닿았다. 환하고 밝은, 상처 하나 찾아보기 힘든 깨끗한 시선이 아니라 보다 어둡고 축축한 시선이 헤르난을 붙잡았다.
‘……정말, 기억을 되찾은 걸까.’
의문은 계속해서 헤르난을 두드렸다.
사실, 의문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것이었다. 헤르난은 칼릭스가 기억을 되찾았음에도 제 앞에선 모른 척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니콜라의 파티에서 입을 맞췄을 때부터 이어져 온 생각이었다.
그리고 칼릭스가 이혼 서류를 빼돌렸던 걸 알게 됐을 때와 비슷한 의문이 헤르난을 찾아왔다.
왜, 기억을 찾았다는 걸 숨기는 걸까.
칼릭스의 행동이 달라진 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제 앞에서 밝게 웃었고 다정하게 대해 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굳이 되찾은 기억에 관해 말을 꺼내지 않는 걸 보면…… 헤르난 말론에게 사랑을 고백했었다는 사실이 너무 당혹스러워 일단은 모른 척을 하는 걸지도 몰랐다. 이해가 되진 않았다. 잠깐의 창피함이 이상한 계약 연애를 이어 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됐다.”
헤르난의 옷매무시를 열심히 단장시켜 주던 칼릭스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의 큰 손이 헤르난의 어깨에서 팔로,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기억을 잃은 남자의 천진함과는 거리가 먼 진득한 감정이 웃음을 머금은 파란 눈동자 속에 섞여 있었다. 청량한 여름 바다를 연상케 만드는 예쁜 두 눈이 가끔은 빗물을 머금은 늪에 비친 하늘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인 것 같았다.
발이 푹푹 빠지는 기분이 들게 하는 칼릭스의 익숙한 시선에 사로잡혀 헤르난은 눈을 깜빡였다.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칼릭스는, 이 마지막 삶에서 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흐릿한 모습으로 헤르난을 괴롭히던 의심이 완전한 확신으로 변했다. 물증은 없이 심증만이 있는 확신이었다.
“이제 작별의 인사를 해야겠어요. 이제 나가 봐야…….”
“인사는, 밖에서 마저 하겠습니다.”
떨어지려는 칼릭스의 팔을 급히 붙잡고 헤르난은 말했다.
“배웅해 드릴게요.”
말 한마디를 더한 헤르난이 칼릭스에게서 급히 손을 물렸다. 하지만 떨어지려는 손을 칼릭스가 다시 잡아 왔다.
“여기서 한 번, 밖에서 한 번. 두 번 배웅해 주면 안 되나?”
헤르난의 이마에 자신을 맞대며 칼릭스는 물었다. 닿아 오는 백금색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마음을 흔드는 확신 속에서 헤르난은 속으로 칼릭스의 이름을 되뇌어 봤다. 발목을 잡는 망설임을 모른 체하며 헤르난은 칼릭스에게서 몸을 떼어 냈다. 그리고 그와 눈을 맞췄다.
불현듯 찾아온 충동이 헤르난을 움직이게 했다.
“……전장에 나서기 전, 가족이나 연인에게 입맞춤을 받으면 다치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헤르난은 말했다.
그가 칼릭스에게 건넨 말은 한때 기억을 잃었던 이에게 보내는 어떤 신호와 같은 거였다. 나는 당신이 돌아온 걸 알고 있으니 솔직해져도 괜찮다고, 말속에 마음을 담았다.
“2년 전처럼, 입을 맞춰도 될까요?”
“…….”
“아직은…… 제가 도련님의 가족이니까요.”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진 알 수 없었다.
헤르난은 기억을 찾은 칼릭스가 자신에게 꿈같은 사랑을 건네며 웃어 주는 대신, 제 흔들리는 마음에 중심을 잡아 주고 선을 그어 주길 바랐다.
그저…… 그 어떤 이유도 가져다 붙일 수 없는 그리움 때문일지도 몰랐다. 지지부진하게 이어져 온 다섯 번의 삶에서 유일하게 저를 알아준 남자가 보고 싶어서. 돌아와 달라고 부탁을 하는 걸지도 몰랐다.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칼릭스의 얼굴이 복잡하게 변했다. 기쁨과 걱정이 한데 뒤엉켜 한 가지 색으로 섞이질 못했다.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고백 같은 걸 한 게 너무 창피하고 싫어서 이러는 거라면 나는 그런 고백 같은 건 다 잊어 줄 수 있다고, 모른 척해 줄 수 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헤르난은 칼릭스를 기다려 주고 싶었다.
칼릭스는 말을 삼키지도 뱉지도 못했다. 대신 불안한 손으로 헤르난의 뺨을 조심히 감쌀 뿐이었다.
내려앉은 정적 속에서, 칼릭스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헤르난을 바라봤다. 제 손바닥 아래의 온기를 더듬었다.
“나를 보고 싶어 할 줄 몰랐는데.”
가라앉은 칼릭스의 음성이 고요한 방 안을 채웠다. 괴로움이 그의 눈가를 스쳤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만은, 끝까지 눈치채지 못하길 바랐어. 너한텐 그게 좋은 거고 그게 맞는 거잖아.”
“…….”
“……기억을 찾은 걸 어떻게 안 거야?”
아주 오랫동안 당신의 눈을 훔쳐봤으니까요. 마음속의 초조와 불안을 지운 헤르난은 칼릭스를 향해 미소 지었다. 물음에 답을 하는 대신 말을 더했다.
“2년 전부터 지금까지, 내내 도련님을 기다려 왔습니다.”
“…….”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주셔서 기쁩니다.”
그 말이 침묵의 끝에 선 칼릭스를 앞으로 떠밀었다. 결국, 칼릭스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보였다. 그를 흔들던 고민이 웃음과 함께 흩어졌다.
“내가 돌아왔어, 헤르난.”
칼릭스의 눈에 빛이 들었다. 어쩌면 눈에 맺힌 물기가 빛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다시 한번 입을 맞춰 줘.”
몸을 숙인 칼릭스가 헤르난에게 속삭였다.
나의 오랜 죄를, 죽음을, 반복되는 시간을 알고 있는 남자가, 그럼에도 나에게 함께 나아가자고 말했던 남자가 돌아왔다.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기껏 공들여 여며 준 옷매무새가 엉망이 되고 마는 긴 입맞춤의 시작이었다.
* * *
미처 말을 나눌 새도 없이 칼릭스는 그의 기사들과 함께 마수가 나타난다는 하얀 숲을 향해 떠났다. 솔스켄 후작성에서 반나절 가량을 말과 함께 달려야 다다를 수 있는 곳이었다.
칼릭스가 바랐던 대로, 헤르난은 따뜻한 후작성 안에 틀어박혀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고된 전장을 지나온 칼릭스에게 마수 한 마리를 토벌하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걸 알면서도, 걱정이 돼 마음이 불안했다.
헤르난은 그 속에 칼릭스에게 묻고 싶은 것들을 한가득 쌓으며 시간을 버텼다. 칼릭스의 사촌이자 영주의 대리인인 테온 역시 너무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을 줬다.
칼릭스와 닮은 거라곤 눈 색 하나뿐인 그의 사촌 동생을 보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먼 옛날, 히페리온 가문의 가족 모임에서 어린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어딘가 주눅 들어 있는 모습이 칼릭스를 닮았던지라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었다.
솔스켄으로 오는 마차 안에서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테온에 관해 미리 언질을 줬었다.
테온은 작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없는 사남인 데다 어릴 적 학대를 받고 자란 탓에 항상 집을 벗어나고자 했던 이였다. 그리고 칼릭스는 그런 테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통뿐인 집에서 벗어나게 해 줄 구원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 그의 충성심을 산 거였다.
테온은 칼릭스의 배우자인 헤르난에게도 다정하고 상냥한 태도를 보였다. 예전의 어두운 모습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내내 웃는 얼굴을 하고, 후작성에 홀로 남은 헤르난과 함께 시간을 보내 줬다. 형님께 남작님을 잘 모셔야 한다는 협박을 받았다며 애교 섞인 푸념을 내놓기도 했다.
시간은 느리지만 지루하진 않게 흘러갔다.
하지만 테온이 만들어 준 평온함도 헤르난의 뒤를 따라붙는 불안까지 떨쳐 주진 못했다. 칼릭스가 떠나는 순간부터 헤르난을 쫓기 시작한 불안은 그가 테온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도, 늦은 밤 침대에 덩그러니 앉아 창 너머의 새까만 밤을 내다볼 때도, 계속해 헤르난의 귓가에 초조의 숨을 불어넣었다.
전장에서 기억을 잃었던 것처럼, 칼릭스에게 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됐다. 말도 안 되는 망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이제야 기억을 되찾은 칼릭스를 마주하게 됐다. 헤르난은 돌아온 칼릭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 많은 생각 중 무엇 하나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겠지만 괜찮았다. 칼릭스가 제게 답을 줄 테니까. 헤르난은 그렇게 믿었다.
어두운 하늘에 뜬 달의 얼굴을 훔쳐보며 헤르난은 칼릭스가 전장에 나서기 전날의 밤을 떠올렸다.
〈나는…… 너를 마음에 담고 있어, 헤르난.〉
〈내가 없는 사이에 네가 또 날 떠나 버릴까 봐 무서워서, 그래서 이렇게 이기적으로, 넌 원하지도 않을 속내를 내놓는 거야.〉
〈돌아오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아. 해 주고 싶은 게 많아. 기다려 줄래?〉
칼릭스에게 묻고 싶은 것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제가 정말 기다리고 있는 건…… 어쩌면, 칼릭스의 말을 듣는 것일지도 몰랐다.
칼릭스가 보고 싶었다.
낯선 솔스켄의 밤에 홀로 앉아 헤르난은 생각했다. 칼릭스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칼릭스를 그리워하는 스스로에게 창피함을 느끼면서도, 그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 * *
칼릭스가 돌아온 건, 헤르난의 기다림으로부터 하루가 더 지난 뒤였다.
해가 완전히 고개를 든 아침에 헤르난은 기사단이 귀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급히 케인을 챙겨 든 헤르난은 1층 로비로 향했다. 먼저 도착해 있던 테온이 그런 헤르난을 반겨 줬다.
본관의 대문 역시 이미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활짝 열린 문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서서, 헤르난은 테온 그리고 후작성의 사람들과 함께 칼릭스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헤르난은 작은 한숨과 함께 두 손을 꼭 모아 쥐어야 했다. 열린 문 너머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왜인지 마음이 떨려 손을 가만히 두는 게 힘들었다.
조금 불안해 보이는 헤르난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테온이 왼손으로 헤르난의 등을 부드럽게 짚었다.
“가장 먼저 후작님을 맞아 주셔야죠.”
헤르난을 자신의 앞으로 슬쩍 떠밀며 테온은 말했다.
좌우로 줄지어 선 사용인들의 시선이 모두 헤르난에게 향했다. 헤르난은 엉겁결에 사람들의 가장 앞에 서게 됐다. 이런 식의…… 사이좋은 배우자 역할을 해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화려한 옷을 입은 듯한 기분이 들어 민망했다.
침착해지기 위해 노력하며 헤르난은 다시 문 너머의 새하얀 세상을 내다봤다. 처음 솔스켄에 왔을 때처럼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바람이 많이 부는 탓에 그때와 같은 반짝임은 없는 채였다. 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흰 바람 사이로 말들이 발을 구르는 소리와 마차의 바퀴가 땅을 달리는 소리가 섞여 들기 시작했다.
둥근 눈이 바람을 맞아 부서지는 광경이 지나는 말과 수레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가렸다. 그리고 그 분주함 사이로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우아함보다는 튼튼함에 치중을 둔 듯 보이는 새까만 마차였다.
이내 마차의 문이 열렸다. 말에서 내린 기사 하나가 문을 열고 나온 남자를 부축했다. 하지만 이내 상대의 다급한 걸음과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휘청였다.
빤히 밖을 내다보던 헤르난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내디뎠다. 발을 움직여 눈이 내리는 곳을 향해 갔다. 케인이 바닥을 짚는 소리가 기사들의 무거운 발소리와 바람 소리에 묻혔다.
헤르난이 멈춰 선 건, 안과 밖에 걸쳐 선 남자를 앞에 두고서였다.
칼릭스. 헤르난은 작게 그 이름을 불러 보았다. 고작 몇 걸음을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인데, 가까이 다가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큰일 났네.”
중얼거린 칼릭스가 자신을 부축해 주는 기사를 벗어나 헤르난에게 성큼 다가갔다.
걷는 것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다만……. 헤르난의 시선이 칼릭스의 얼굴에 번진 핏자국을 지나 그의 팔에 단단히 덧대진 부목으로, 열어 둔 셔츠 사이로 보이는 붕대로 옮겨 갔다.
“헤르난.”
백금색 머리카락 위에 쌓인 눈을 치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칼릭스는 다급히 헤르난을 불렀다. 또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이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그럼에도, 헤르난의 시선은 도통 칼릭스의 얼굴에 닿질 않았다.
“아니, 크게 다친 건 아니고…….”
여전히 조금 아래로 떨어져 있는 헤르난의 시선을 따라가던 칼릭스가 변명을 꺼내 놨다.
“네 흉내 좀 내 보려다가 이렇게 됐네. 나는 너처럼 좋은 사람이 되진 못하려나 봐.”
하지만 그 변명은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끊겨 버렸다.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칼릭스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제야 창백한 낯을 한 헤르난이 고개를 들어 칼릭스와 눈을 맞춰 줬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곧장 칼릭스의 옆에 있는 기사에게로 옮겨 갔다. 영지의 주인을 대신해 말을 해 보라고 채근하는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스칼라 남작의 얼굴은 그 소문처럼 무서워 보이진 않았으나, 적어도 솔스켄의 날씨만큼은 서늘해 보였다. 헤르난과 눈이 마주친 기사는 당황해 입을 벌렸다.
“그, 그게…….”
사실을 고해야겠구나 싶었다.
마물을 잡기 위해 들어간 숲에서 벌어진 일이 기사의 입을 통해 짧게 요약됐다. 칼릭스는 곤란에 빠진 신입 기사를 구하려다 마물의 독에 당했다. 뼈가 부러진 건 덤과 같은 것이었다.
칼릭스는 기사의 말을 차마 끊어 내질 못하고 그저 웃어 보였다. 민망해서였다. 기사가 영주님도 신입 기사도 정말 운이 좋아 죽지 않았다는 말을 헤르난에게 눈치 없이 전할 땐, 정말 최선을 다해 웃었다. 입가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였다.
기사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하루 정도 깨어나질 못하셨기에…….”
“중요한 건, 내가 돌아왔다는 거지.”
칼릭스의 목소리가 기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낯빛이 저 밖의 눈처럼 새하얘진 헤르난이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급한 치료는 다 받았으니까 걱정할 필요도 없어.”
말을 마친 칼릭스가 부목을 대지 않은 멀쩡한 팔로 헤르난을 끌어안았다.
칼릭스의 품에선 약초와 포션의 냄새가 났다. 칼릭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낯선 냄새가 불안으로 변해 헤르난의 마음을 쑤셨다.
“나는 안 죽어. 그런 입맞춤을 받았는데 죽을 리가 있나.”
칼릭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그러니까, 걱정하지도 슬퍼하지도 마. 나는 널 걱정하다 속이 타들어 가도 괜찮아. 눈물을 쏟아도 돼. 하지만 넌…… 나 때문에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2년 전, 스칼라를 떠날 때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을 하고 칼릭스는 헤르난을 안심시켰다. 그의 목소리가 헤르난에겐 꼭 짧은 입맞춤처럼 느껴졌다.
“……듣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돌아온 칼릭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헤르난은 말했다. 칼릭스를 향한 걱정과 반가움, 애정과 서운함 같은 것들이 목구멍 너머로 새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막아 냈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넌, 내가 속에 쌓아 놓은 말이 얼마나 많은지 상상도 못 할 거야. 다 하려면 못해도 1년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걸.”
칼릭스의 속삭임에 웃음이 섞여 있었다.
가만히 선 채로, 헤르난은 바쁘게 이어지는 칼릭스의 투정을 들어줬다. 혹여 자신이 칼릭스의 상처를 들쑤시기라도 할까 봐 차마 그를 마주 안지는 못했다.
“나머지 얘기는…… 저 안에서 마저 듣겠습니다. 치료사를 만나신 뒤에요.”
하지만 결국 헤르난이 먼저 칼릭스의 말을 멈춰 세웠다.
잠시 망설이던 헤르난은 칼릭스의 뺨을 타고 흐르는 녹은 눈을 손끝으로 닦아 냈다. 하지만 손을 떼어 낼 순 없었다. 칼릭스의 손이 헤르난의 손등 위에 자신을 겹쳤다.
“……응.”
헤르난의 손바닥에 제 뺨을 기대며 칼릭스는 순순히 답했다. 차가움이 사그라든 그의 두 뺨에 기쁨을 닮은 분홍빛 열기가 퍼졌다.
* * *
솔스켄의 치료 마법사는 주인 방에서 다시 만난 칼릭스의 꼴을 보고 험악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금세 얼굴을 굳힌 그녀는 곧장 칼릭스의 윗옷을 벗기곤 그를 침대 위에 눕혔다. 그 뒤로는 언제 자신이 비명을 내질렀냐는 듯 침착하게 일을 해 나갔다.
꽤 긴 시간 동안 헤르난은 치료 마법사의 맞은편에 앉아 칼릭스의 손을 잡아 줘야 했다.
〈원래라면 보호자 역시 밖에서 대기해야 하지만, 후작님께서 배우자의 부재에 너무 큰 불안을 느끼시니…… 어쩔 수 없겠네요.〉
치료 마법사가 두 사람이 함께하는 걸 허락해 준 덕분이었다.
칼릭스는 그런 치료 마법사에게 무언가 삐딱한 답을 건네려 했지만, 걱정에 잠긴 헤르난의 얼굴을 보고는 입술을 꽉 깨물어 참아 냈다.
치료를 받는 내내, 내가 기절이라도 한다면 아파서가 아니라 헤르난 네가 울어서일 거라고, 나 때문에 울면 안 된다고 끊임없이 중얼대던 칼릭스는 치료 마법사의 손길이 떨어져 나가기 무섭게 잠에 빠졌다. 마법의 힘이었다.
〈한동안 깨어나지 못하실 겁니다. 회복을 위한 수면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치료 마법사는 방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지의 대리인인 테온도 칼릭스를 찾아왔다. 하지만 헤르난이 함께 있는 걸 보곤 금세 자리를 떴다. 형이 정말 안 어울리는 짓을 한 것 같지 않냐는 농담과 함께였다.
그 후론 아무도 칼릭스를 찾지 않았다. 다시 처음처럼, 솔스켄 후작성의 주인 방엔 헤르난과 칼릭스 두 사람만이 남게 됐다.
헤르난은 잠이 든 칼릭스를 바라봤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핏자국과 어디서 온 건지 모를 그을음이 묻어 있던 얼굴은 물수건을 든 헤르난의 손 아래에서 깨끗해져 성을 떠나기 전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추위를 견제하듯 더욱 활활 타는 벽난로의 불빛이 칼릭스와 헤르난에게 붉은 그림자를 만들어 줬다.
칼릭스의 가슴팍 위에 대각선으로 새겨져 있던 검은색 상처가 옅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생김새가 거칠었다. 일이 벌어졌을 당시, 칼릭스의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칼릭스의 건강엔 문제가 없었다. 독은 완전히 제거됐고 상처는 아물어 가고 있었다. 흉터 역시 크게 신경 쓰이진 않을 정도로 흐려질 거라고 치료 마법사는 말했다.
그걸 알면서도 헤르난은 칼릭스가 큰 병을 얻기라도 한 것처럼 과민한 반응을 했다.
훌쩍 커 버린 칼릭스가 다친 걸 직접 마주한 게 처음이라 그럴지도 몰랐다. 마치 꿈인 것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질 않았다.
‘나한테 남 도와주다 다치지 말라고 하더니…….’
헤르난은 제게 잔소리를 늘어놓던 칼릭스를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차라리 내가 다쳤다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을 텐데. 헤르난의 손이 잠이 든 칼릭스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줬다. 아픈 아이를 달래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칼릭스는 쉽게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헤르난은 그가 더 깊은 잠을 잘 수 있게, 그를 홀로 두고 자신의 방으로 떠나야 했다. 하지만 도통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었다.
기억을 찾은 칼릭스가…… 제가 없는 사이에 다시 사라지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됐다. 그 바보 같은 상상에 헤르난은 겁을 먹었다.
헤르난은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칼릭스의 멀쩡한 손 위에 조심스레 제 손을 올려 봤다.
항상 따뜻하던 칼릭스의 손이 평소보다 차가웠다. 그 차가움이 싫어, 헤르난은 남은 손까지 들어 칼릭스의 손 전체를 앞뒤로 품었다. 다시 열이 지펴지길 바랐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헤르난은 안도 속에서 색이 있는 꿈을 구경하는 사람이 되었다가, 불안 속에서 다가올 폭풍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이상하게 마음을 붕 뜨게 만드는 따뜻한 공기가 머리마저 뜨겁게 만들었다.
하지만 마법으로 지펴진 벽난로의 불이 장작을 먹어 치우는 소리와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가 헛된 상념에 빠지려는 헤르난을 자꾸만 깨웠다.
망설이던 헤르난은 입을 열었다.
“기억을 찾아 놓고…… 왜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하셨습니까?”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물음을 아주 깊은 잠이 든 칼릭스의 앞에 떨어뜨렸다.
〈나를 보고 싶어 할 줄 몰랐는데.〉
헤르난은 칼릭스가 제게 남겼던 말이 조금은 억울하게 느껴졌다.
“많이 기다렸습니다. 많이 보고 싶어 했어요. 기억이 없는 당신을 앞에 두고도 이전의 당신을 그리워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헤르난의 목소리에 묘한 원망이 묻어 있었다.
헤르난은 그런 소리를 입에 담는 스스로에게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계속해 말을 이어 갔다. 치료 마법사가 만들어 준 꿈속에 빠진 칼릭스는 듣지 못할 텐데도 말을 멈추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그랬는데…… 당신은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더니, 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기억을 찾고도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또 한 번 말은 이어졌다.
“제게 사랑을 고백했던 게 문제라면 다 잊어 드리겠습니다. 다 없었던 일로 해 줄 테니까, 속에 쌓아 뒀다는 이야기를 편하게 해 주세요.”
힘 빠진 웃음이 입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 웃음을 따라 헤르난의 고개가 아래를 향했다. 칼릭스를 보는 게 창피했다.
“……그걸 왜 잊어.”
그리고 헤르난은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이 그를 찾아왔다.
“내가 얼마나 어렵게 한 고백인데, 그걸 잊으면 어떻게 해.”
간신히 잠에서 깬 남자가 초점이 돌아오질 않은 눈 속에 헤르난을 담으며 말했다. 그 얼굴이며 목소리에 졸음이 잔뜩 묻어 있었다.
“도련님.”
놀란 헤르난이 붙잡고 있던 칼릭스의 손을 놨다.
헤르난은 자신이 뭘 하고 있었는지도 잊고 곧장 몸을 숙여 칼릭스의 상태를 살폈다. 칼릭스는 수마에 쫓기고 있는 사람처럼 눈꺼풀이 무거워 보였다. 하지만 그 점만 빼면 크게 문제가 있는 곳은 없어 보였다. 적어도 몸의 고통이 그를 깨운 건 아닌 모양이었다.
“기분이 이상해. 잠에서 깨면 안 되는데…… 억지로 눈을 떠서 그런 걸까.”
눈을 꾹 감았다 뜬 칼릭스가 헤르난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주 조심히, 헤르난의 머리카락을 제 손끝으로 감아 봤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
“헤르난 네가 기억을 잃은 쪽을 원할 거라고 생각했어.”
칼릭스는 말했다. 헤르난을 담은 그의 두 눈에 빛이 돌아오고 있었다.
입가에 떠오른 웃음을 따라 칼릭스의 손이 움직였다. 전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거칠어진 손끝이 헤르난의 눈썹 위를 지나 피곤한 눈가에 다다랐다. 그러곤 아래로 미끄러져 헤르난의 뺨을 쓸었다.
“그게 당연하잖아. 나처럼 성격 파탄 난 놈보다는 기억이 없는 쪽이 나으니까. 네가 그 나은 놈이랑, 기억이 없는 나랑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말을 못 했어. 자존심 상하고 짜증 나는데, 그래도 그게 맞으니까.”
칼릭스의 말끝에 부드러운 웃음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런 칼릭스의 웃음이 헤르난에겐 마치, 나는 괜찮다고 조금은 허세를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창피함을 숨기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적막이 내려앉았다.
헤르난 덕분에 다시 온기를 되찾게 된 칼릭스의 손은 이제는 그 따뜻함을 헤르난에게 나눠 주고 있었다. 칼릭스가 내어 주는 온기를 느끼며 헤르난은 눈을 감았다.
눈꺼풀 뒤의 어둠에 숨어 헤르난은 입을 열었다. 그의 머릿속을 맴돌던 말을 칼릭스의 앞에 꺼냈다.
“기억을 잃기 전의 당신도, 기억을 잃은 당신도 제겐 모두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
“같다고 생각했으니까, 내치지도 거절하지도 못하고……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함께했습니다. 끌어안고 입을 맞췄습니다. 어쩌면, 평생 옆에 있어 달란 말에 붙들려서…….”
차분히 시작됐던 헤르난의 말이 끝내 음울한 물기를 머금어 흐려졌다.
말을 할수록, 어느 정도 정리해 뒀다고 여겼던 마음과 생각이 어지럽게 그 모습을 바꿨다. 자신의 마음을 포함한 모든 게, 여전히 어렵게 느껴졌다.
“헤르난. 나한텐 그 말이 다른 소리로 들려.”
“…….”
“나 때문에…… 기억을 잃은 머저리 옆을 지켜 준 거잖아. 날 사랑하니까.”
칼릭스는 헤르난이 차마 밖으로 낼 수 없었던 마음을, 어쩌면 끝까지 내보이지 못할 마음을 대신 입에 담았다.
그 모양이 삐뚤어져 모가 난, 녹슬어 더러운 데다 남의 피가 묻어 있는 기괴하고 흉물스러운 마음을 사랑이라고 인정해 줬다.
고요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칼릭스의 뺨이 설렘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붉게 물들었다.
“말도 안 되는 농담으로 치부해도 돼. 아니라고 부정해도 돼. 너는 나한테 사랑이라는 말을 할 필요도, 마음을 인정할 필요도 없어.”
입을 다문 헤르난을 향해 칼릭스는 웃어 보였다.
“사랑을 말하는 건 내가 할게. 너는 그냥…… 사랑만 받으면 돼.”
칼릭스는 헤르난을 붙잡았다. 헤르난이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기라도 할까 봐 필사적으로 그의 손을 붙들었다.
“돌아와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어. 내 진짜 배우자가 되어 달라고 너한테 말하고 싶었어. 네가 나한테 너무 아까운 거 알아. 그래도 떼를 쓰려고 했어.”
칼릭스는 다시 한번 헤르난과 눈을 맞췄다. 다급히 손을 붙잡았을 때처럼 헤르난을 제 눈 속에 붙잡아 뒀다.
“좋아해, 헤르난.”
“…….”
“나는 널, 사랑하고 있어.”
기억을 되찾은 남자가 헤르난에게 사랑을 말했다. 처음으로, 그의 마음을 솔직히 고백했다.
“내가 널 사랑해서 미안한데, 그래도 계속 사랑할 거라 더 미안해.”
불안한 눈을 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묻어나 있지 않았다.
“기억을 잃고 했던 고백도 다 내 진심이야. 몇 번의 기억이 날아가도 나는 결국 너한테 사랑을 말하게 될걸?”
이어지는 칼릭스의 속삭임을 귀에 담으며 헤르난은 혼란을 느꼈다.
칼릭스는 기억을 되찾았다. 하지만 여전히 헤르난에게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제가 가진 것에 대한 소유욕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돌아와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어. 내 진짜 배우자가 되어 달라고 너한테 말하고 싶었어.〉
이상했다. 헤르난은 마치 버릇처럼 칼릭스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도통 입 밖으로 목소리가 나가질 않았다.
“……두 번이나 고백을 받았네요.”
대신 이런 실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칼릭스에게 잡힌 손이 너무 뜨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헤르난은 그 뜨겁고도 익숙한 손을 쳐 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대로, 그에게 붙잡혀 있고 싶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기억이 돌아와 기뻤다. 나의 지난 시간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예전처럼 나를 붙잡아 줘서 좋았다. 외면할 수도 모른 척할 수도 없는 기쁨이었다.
불이 따뜻하다고 착각해 몸을 불 속에 처박아 버린 바보가 된 것만 같았다. 남은 건 몸이 검게 타 버리는 것뿐일 텐데.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도움을 바라듯 헤르난은 칼릭스와 눈을 맞췄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 헤르난 넌, 그냥 네 인생을 살면 되는 거야.”
칼릭스의 말 뒤로 예전의 기억이 따라붙었다.
〈같이 가자, 헤르난.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대로…… 가지 못했던 길로 가 보는 거야.〉
스칼라의 해변가에서 칼릭스가 해 줬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신을 받쳐 주던 단단한 몸이 생각났다.
“하지만 혼자는 안 돼. 날 옆에 끼고 살아 줘. 내 마음을 받아 줄 필요는 없다면서 이러는 거, 더럽게 징그럽고 이기적이란 거 알아.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말을 마친 칼릭스가 숨을 몰아쉬었다. 멀쩡한 손을 들어 스스로의 머리칼을 헝클었다. 자꾸만 수마 속으로 제 머리통을 담그려 드는 마법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내가 마법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아니, 제정신이 아닌 것도 맞는데, 지금 하는 말 다 진심으로 하는 거야.”
중얼대던 칼릭스가 결국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헤르난은 재빨리 칼릭스를 부축했다. 문득, 칼릭스와 자신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칼릭스가 헤르난을 붙잡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옛날에, 가정 교사가 그랬어. 사랑이란 말은 입 밖으로 끄집어져 나올 때마다 그 의미가 퇴색되니까 너무 쉽게 내뱉으면 안 된다고.”
“…….”
“그런데 나는 안 그럴 거야. 계속 끄집어낼래. 감춰 두고 숨겨 두기만 하면 좆 된다는 걸 너무 잘 알게 됐으니까…….”
벽난로의 불이 너무 활활 타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사랑을 입에 담았기 때문인지 칼릭스의 두 뺨이 아까보다 더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언뜻 거칠게 느껴지는 붉은색과 칼릭스의 아름다운 얼굴이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멍하니 칼릭스를 바라보던 헤르난은 그도 모르게 작게 웃어 버렸다. 그 웃음을 따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헤르난을 가득 채우던 긴장이 슬금슬금 힘을 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헤르난의 웃음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애매한 경계에 걸치게 됐다.
어려웠다. 내내 바랐던 칼릭스의 사랑이 바로 앞에 있는데, 기억을 잃은 칼릭스가 제게 마음을 고백해 왔을 때처럼 그것을 쉽게 잡을 수 없었다. 같은 자리를 계속해 맴도는 기분이었다.
헤르난은 긴 시간을 헤매며 칼릭스의 인생엔 제가 없어야 함을 깨달았다. 그런데 이 다섯 번째 삶에서 저를 가장 잘 아는 칼릭스가, 그의 인생에 자신이 없으면 안 된다고 반복해 말하고 있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헤르난 말론을 원하고 있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행복하면 안 돼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헤르난은 칼릭스의 앞에 약한 소리를 내놨다.
“내가 네 옆에 있는데, 감히 누가 너를 벌하겠어.”
“…….”
“설령 나는 모르는 죄가 너한테 있다고 해도 상관없어. 그 죄, 다 나한테 줘. 내가 갚을게. 어떻게 해서든, 내가 널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야.”
헤르난의 시선을 집요하게 따르며 칼릭스는 말했다. 벽난로에서부터 퍼져 나온 주홍빛이 칼릭스의 눈 속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내게 옆을 허락해 줘, 헤르난.”
칼릭스의 말이 헤르난의 귓가를 간질였다.
분수도 모르고 빛을 향해 날아들다가 타 죽어 버리겠구나. 다가올 파멸을 곱씹으며 했던 생각이 되풀이됐다. 그때, 헤르난은 기억을 잃은 칼릭스에게 먼저 입을 맞추며 자신의 끝을 예감했었다.
그런데…… 지금 제 앞에 있는 칼릭스를 보고 있자니 기묘한 착각이 들었다. 저 빛이 나를 태워 죽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이었다.
헤르난의 입 속에서 사랑, 그 짧은 말이 맴돌았다. 하지만 결국 그 말을 밖으로 내보이진 못했다.
“당신이 붙잡으면 나는 아무 데도 못 갑니다.”
“…….”
“하지만 나는 당신의, 도련님의 옆에 있는 것밖엔 못 해요. 그 이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헤르난의 목소리에 작은 울먹임이 묻어났다.
“내가, 내 마음을 말하면 이 세상이 망가질지도 몰라요. 한순간에 모든 게 어긋나고, 나는 아주 긴 꿈에서 깨어나는 겁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나타날 어두운 세상에서…… 다시 7월 21일로…… 똑같은 시간을 반복하게 되고…….”
헤르난은 도망을 치는 대신 두 손으로 스스로의 얼굴을 가리려 했다. 하지만 칼릭스의 손이 헤르난의 손을 잡아 왔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곳엔, 당신도 없을 겁니다. 보고 싶은 도련님은 있지만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는 당신은 없을 거예요.”
“…….”
“나는, 그게 무섭습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얼굴로 헤르난은 말했다. 속삭임에 가까운 작은 목소리였다.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사랑을 말하는 대신 그의 두려움을 전했다. 스스로를 쥐어짜 간신히 내놓은 말이었다.
“신은 더 이상 너를 찾지 않을 거야.”
“…….”
“그리고 이 세상은 꿈이 아니야. 아니, 이 모든 게 네가 꾸고 있는 꿈이라고 해도 괜찮아. 내가 여기까지 널 쫓아왔잖아. 네 꿈에까지 따라 들어온 인간이, 꿈 밖으로 따라가질 못하겠어?”
칼릭스는 헤르난을 끌어안았다. 다친 팔 덕에 엉성해져 버린 포옹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한 포옹이었다.
그 포옹 속에서 헤르난은 칼릭스가 제게 건네준 말을 속으로 곱씹어 봤다. 꿈 밖으로도 저를 찾아와 주겠다는 말이 아주 불가능한 것으로만 느껴지지 않아 신기했다.
이 사람이라면, 정말 나를 쫓아와 줄지도 몰라. 헤르난은 스스로에게 말을 건넸다.
“나를 떠나지만 마. 버리지만 마. 나는, 그것만으로도 평생을 행복해하면서 살 수 있어.”
도망가도 쫓아갈 거지만. 작게 말을 읊조린 칼릭스가 헤르난의 어깨 위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보고 싶었어, 헤르난. 지난 2년 동안, 매일, 매시간 너를 그리워했어.”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목소리가 헤르난에게 닿았다. 말끝에 담긴 울먹임에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묻어 있었다.
망설이던 헤르난은 천천히, 아주 조심히 칼릭스를 마주 안아 봤다. 자신에게 맞붙어 온 남자의 부드러운 금빛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고 뜨겁게 열이 오른 살 위에도 손을 대 봤다.
정말, 칼릭스가 돌아왔구나. 뒤늦은 실감이 헤르난을 찾아왔다.
“저도……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헤르난은 말했다. 꾸역꾸역 눌러 왔던 그리움을 눈을 뜬 칼릭스에게 솔직히 고백했다.
칼릭스는 헤르난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줬다. 눈물과 웃음이 함께였다.
긴 밤, 두 사람은 어색한 포옹 속에서 아주 오랜 시간 서로의 체온을 그리고 숨을 나눴다. 서로를 끌어안은 채로 잠이 들 때까지였다.
* * *
칼릭스가 치료를 받는 사흘 내내 눈은 그치지 않고 거세게 솔스켄을 때렸다.
산책이라도 해야 몸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텐데, 도통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걱정이었다. 하지만 칼릭스의 치료가 끝이 난 오늘 거짓말처럼 눈이 그쳤다.
살벌하게 세상을 휘돌던 눈보라가 사라졌다. 남은 건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하얀 눈더미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눈 밟기 전에, 우리가 먼저 나가자. 후원 너머에 있는 언덕길로 가 볼까?”
칼릭스는 밖을 내다보는 헤르난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팔이 다 나았으니 땅이 미끄럽더라도 걱정이 없다는 말이 더해졌다. 언제든 헤르난을 부축해 주고 안아 줄 수 있으니 말이다.
헤르난은 아직 회복을 완전히 마치지 못한 칼릭스의 몸이 걱정됐다. 하지만 그의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칼릭스가 잠깐이나마 바깥 공기를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헤르난은 칼릭스와 함께 후작성 후원 너머의 언덕으로 향했다. 칼릭스가 두 사람을 따르려는 사용인들을 손사래 치며 쫓아 버렸기에, 그들을 뒤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헤르난은 눈치채지 못하게 이루어진 일이었다.
파란 하늘을 뺀 모든 것이 새하얗게 변한 세상을, 헤르난과 칼릭스 두 사람이 느리게 걸어갔다.
칼릭스는 케인을 대신해 다리가 불편한 헤르난을 단단히 받쳐 줬고 헤르난은 어색해하면서도 결국 그의 도움을 받아들였다. 땅을 덮은 흰 눈 위로 서로 다른 모양의 발자국이 찍혔다.
헤르난이 기억을 되찾은 칼릭스에게 사랑 고백을 받아 든 뒤에도 두 사람의 관계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이전과 다름없이 또 지난 몇 달과 다름없이 서로의 곁에 있을 뿐이었다.
낮은 언덕의 중턱에서 두 사람은 걸음을 멈췄다.
“아름답지.”
몸을 기대어 오며,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속삭였다.
차가운 바람이 높이 쌓인 눈더미를 쓸고 지나가자 하얀빛들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헤르난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보석처럼 반짝이는 새하얀 풍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 덮인 북부 땅에 처음 발을 디뎌 본 건 아니었다. 눈을 처음 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꼭 모든 게 처음인 사람처럼 마음이 떨렸다.
마수와 기사들, 용병들이 밟아 짓이겨진 회색 눈이 아니라 그저 새하얀 눈이, 검은 재가 섞인 바람이 아니라 투명한 숨이, 반쯤 몸이 잘린 나무가 아니라 흰 눈을 옷처럼 걸쳐 입은 숲의 나무들이, 자신을 안고 있는 칼릭스가…… 꼭 다른 세계의 일처럼 느껴졌다.
“유리가 오면 일이나 하라고 잔소리를 할 테니까, 조금만 더 있다 가자.”
“……그래도 일은 하셔야죠.”
“응. 알았어.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있자.”
헤르난의 말을 들은 칼릭스가 기쁘다는 듯 웃었다.
평화로운 침묵이 두 사람을 끌어안았다. 그 편안함 속에서 헤르난은 내심 궁금했던 이야기를, 유리의 이름이 나온 김에 조심히 꺼내 봤다.
“혹시…… 왜 보좌관을 바꾸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헤르난은 칼릭스가 왜 제프란을 그의 보좌관으로 고용하지 않은 건지 의아했다. 그가 제게 준 독주 때문일까 싶었지만…… 너무 과대 해석인 것 같아 생각을 접었다.
“그 새끼가 너한테 독주를 줬잖아. 남한테 이용당해서 그랬건, 독단적으로 일을 저질렀건 상관없어. 너를 건드린 놈을 내가 왜 돕겠어.”
무정해 보여도 어쩔 수 없어. 칼릭스는 말했다. 아무래도, 접으려 했던 생각이 정답이었던 모양이었다.
헤르난은 답을 하는 대신 얌전히 고개를 끄덕여 줬다. 제게 독주를 전한 건 칼릭스가 아니었다. 헤르난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 흑마법의 힘을 빌린, 그래서 이곳까지 오게 됐다는 칼릭스의 말을 믿었다.
헤르난은 다시 파헤칠 수도 없는, 책임을 물을 이가 사라진 과거의 일에 의아함을 느끼지 않기로 했다. 너무 아래의 기억까지 더듬고 싶지 않기도 했다.
어쩌면 칼릭스에게 사랑이란 말을 들었을 때부터, 헤르난은 지난 몇 번의 삶들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게 됐다. 너무 오랜 시간 머릿속에 그것들을 담게 되면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불안이 찾아왔다. 칼릭스에게 간신히 전했던 말처럼, 사랑이라는 꿈에서 깨어나 옛날의 일들을 다시 반복하게 될까 봐 두려워 그런 거였다.
칼릭스 역시 헤르난에게 더는 제프란에 관한 말을 전하지 않았다. 그저 헤르난을 뒤에서 끌어안은 채 중얼중얼 말을 내뱉었다. 평생 이러고만 살고 싶다는 속 편한 소리로 끝을 맺는 투정이었다.
투덜대는 칼릭스의 모습이 그래도 어릴 때의 그에 비하면 많이 성숙해 보여서, 헤르난은 칼릭스를 따라 소리 없이 웃었다.
칼릭스는 많이 변했다. 고독이 묻어 있던 어두운 얼굴이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좋았다.
“……솔스켄이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어도 나쁘지 않은 정도는 돼?”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물었다. 하지만 당장 답을 듣는 건 불안했는지 굳이 몇 마디의 말을 더했다.
“보통은 디아만테에 있어야겠지만, 그래도 솔스켄이랑 스칼라를 오가면서 살게 될 거잖아. 솔스켄이 네 마음에 안 들면 안 돼. 너랑 계속 함께해야 하니까.”
“…….”
“나는 널 혼자 둘 생각 없어. 어디서든 함께 하고 싶어.”
헤르난을 더욱 꽉 끌어안으며 칼릭스는 말했다. 별다른 말이 없는 헤르난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마음에 듭니다.”
“정말?”
“네. 아름다워서 좋습니다.”
헤르난이 늦게나마 내어 놓은 답이 칼릭스의 얼굴에 웃음을 피워 냈다. 등 뒤에 붙은 칼릭스의 몸이 기쁨으로 들썩이는 게 느껴졌다.
포옹을 푼 칼릭스는 시선이 맞닿고 싶다는 듯 헤르난의 앞으로 갔다. 새하얀 세상이 만든 아름다운 풍경을 등지고 두 눈 속에 헤르난을 담았다.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입을 맞췄다. 차가운 입술 위에 입술을 맞대며 따스함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자꾸 웃음이 나오는 통에 긴 입맞춤을 이어 가는 게 힘들었다.
“또 안아도 돼?”
입을 맞추는 건 마음대로 하더니. 안아도 되느냐고 물어 온다. 무언가 순서가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헤르난은 칼릭스를 향해 긍정의 답을 내어 줬다.
기다렸다는 듯, 칼릭스는 헤르난을 꽉 끌어안았다. 하지만 포옹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슬쩍 안아 든 채로 빙글빙글 제자리를 돌았다. 당황한 헤르난이 칼릭스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 봤지만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작은 한숨과 함께 헤르난은 몸에서 힘을 뺐다. 칼릭스가 너무 즐거워 보여 반쯤은 포기한 거였다.
하지만 다행히 금세 땅에 발을 붙이게 됐다. 별안간 쏟아지기 시작한 비 때문이었다.
푸르기만 하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장대비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위를 올려다보던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서로에게 닿았다.
“솔스켄은…… 스칼라에 비하면 날씨가 너무 개 같지?”
말을 마친 칼릭스가 멋쩍다는 듯 웃어 보였다.
쾌청한 하늘에 먹색이 섞여 들고 있었다. 눈을 대신해 긴 비가 쏟아지려는 모양인지 그 빛깔이 심상치 않았다. 어쩌면 내리는 비가 다시 눈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돌아가자, 헤르난.”
소나기가 내리던 니콜라의 파티에서 그랬던 것처럼,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자신의 외투를 씌워 줬다.
아직 몸이 완전히 낫지 않았을 텐데. 감기에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이럴까. 잔소리를 입에 담으려던 헤르난은 순순히 칼릭스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다. 낯섦을 감내하는 게 별것 아닌 이야기로 칼릭스를 빗속에 머물게 하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 * *
헤르난은 칼릭스와 함께 후작성으로 돌아왔다. 밖을 나설 때와는 달리 헤르난이 칼릭스의 등에 업힌 채였다.
자신보다 어린 남자의 등에 업히게 된 이유가 고작 내리는 비가 언 땅을 미끄럽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헤르난은 너무 창피했다.
헤르난은 후작성으로 향하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만 했다. 성안으로 들어선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순순히 외투를 받아 든 탓에 일이 이렇게 된 건가 하는 후회와 함께였다.
다행히 그 이상의 망신을 겪진 않았다. 이렇게 젖은 모습을 남들한테 보여 줄 수 없다며 사용인들을 물리고 주인 방의 문까지 걸어 잠근 칼릭스 덕분이었다.
헤르난은 그를 대신해 비를 잔뜩 맞은 칼릭스의 외투를, 벽난로 앞에 놓인 소파 위에 대충 걸쳐 뒀다.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와 함께였다.
그리고 헤르난은 다시 한번 칼릭스의 손을 붙잡았다. 장갑을 벗겨 주기 위함이었다.
“안 챙겨 줘도 되는데.”
칼릭스는 말했다.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는 소리와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빗소리에 파묻힐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괜히 한 번 지껄여 본 거라 그랬다.
짧게 헛기침을 한 칼릭스는 헤르난의 앞에 순순히 제 두 손을 내어 놓았다. 곧, 젖은 장갑 역시 불가의 의자 위에 자리를 잡게 됐다.
헤르난의 손은 칼릭스의 셔츠 위에도 닿았다.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감기에 걸린다는 생각만이 헤르난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원래도 느슨했던 셔츠의 끈을 풀어내자 다물려 있던 앞섶이 헤프게 벌어졌다. 벌어진 옷 사이로 옅은 색으로 변한 검은 상처의 끝자락이 보였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옷을 벗겨 주려 했다. 하지만 당황한 칼릭스에게 손이 붙들려 버렸다. 헤르난을 붙잡은 칼릭스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 그, 내가 벗을게.”
“…….”
“어, 내가, 애도 아니고…….”
헤르난의 손을 놓아준 칼릭스가 뭔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다급히 옷을 벗었다.
잠시나마 칼릭스의 손에 들리게 됐던 젖은 셔츠는 이내 카펫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헤르난의 시선 역시 칼릭스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긴장한 얼굴로, 그 아래로 보이는 물기 어린 상체로 떨어졌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을 눈으로 더듬어 봤다. 전쟁터에서 만들어진 크고 작은 상처들과 이곳 솔스켄에서 신입 기사를 돕다 얻게 된 새로운 상처들이 모두 그를 간호하며 봤던 그대로였다.
칼릭스는 건강해 보였다. 헤르난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쉬었다. 비 오는 날 사람을 업고 뛰었다고 해서 이미 다 아문 상처가 덧나는 것도, 갑자기 쇠약해져 앓아눕게 되는 것도 아닌데 너무 바보 같은 걱정을 한 것 같았다.
“너도…… 그대로 있으면 감기 걸릴 텐데.”
어딘가 멋쩍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칼릭스는 말했다.
벽난로를 등지고 선 칼릭스의 뺨이 그의 뒤로 보이는 불빛처럼 발개져 있었다. 추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불가에 서자 몸이 놀란 모양이었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말을 따라 순순히 셔츠의 끈을 풀었다. 축축한 옷이 몸을 가라앉히는 기분이 들어 빨리 벗어 내고 싶었다.
하지만 완전히 옷을 벗어 내려는 헤르난의 손을 칼릭스가 붙잡아 왔다.
칼릭스는 말없이 헤르난과 시선을 맞댔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지만 망설이는 것 같은 눈치였다.
눈싸움 아닌 눈싸움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헤르난, 나는…….”
간신히 내뱉어진 말이 완성되지 못하고 다물린 입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결국 무언가를 마음먹은 듯 칼릭스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두 눈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넌 내 몸을 봐도 아무런 생각이 안 들어? 떨린다거나, 차마 보기 힘들다거나…… 대충 그런 거.”
헤르난의 시선이 다시 칼릭스의 벗은 몸으로 향했다. 헤르난은 여전히 칼릭스에게 손을 붙잡힌 채로 그의 물음에 대한 답을 생각해 봐야 했다.
“몸이 정말 좋으십니다.”
꽤 진지한 얼굴로 헤르난은 느린 답을 내놨다. 곧, 말 한마디가 더 덧붙었다.
“옛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니, 우리 상황도, 내 몸도 옛날이랑은 다르잖아.”
칼릭스가 당황해 외쳤다. 방황하던 시선을 어느새 헤르난의 얼굴에 고정한 채였다.
헤르난은 칼릭스가 내놓은 말을 곱씹어 봤다. 그의 말이 맞았다. 예전, 칼릭스의 몸이 그림 속의 아름다운 청년과 같았다면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칼릭스의 몸은 조각가들이 모델로 삼고 싶어 눈을 빛내고 있을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남성적인 아름다움으로 꽉 차 있었다.
그 몸이라는 것에 대해 자꾸 생각하자니 기분만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헤르난은 너무 가까워진 칼릭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슬쩍 고개를 내렸다. 하지만 어디로 눈을 두건 계속해 칼릭스의 몸이 보이는지라, 다시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칼릭스는 그런 헤르난의 손을 조심히 붙잡았다. 그리고 그의 왼쪽 가슴 위로 손을 이끌었다.
헤르난의 시선이 겹쳐진 두 사람의 손에 닿았다. 손바닥 아래로, 칼릭스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헤르난.”
잔뜩 열이 오른 목소리로 칼릭스는 자신을 안달 나게 하는 남자의 이름을 불러 봤다.
칼릭스와 헤르난의 눈이 마주쳤다. 문득, 헤르난은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칼릭스의 두 눈이 담고 있는 열감을 눈치챈 순간, 익숙해졌던 방의 풍경이 너무나 낯선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벽난로의 열기가 칼릭스의 뺨을 붉어지게 한 게 아니었다. 그걸 깨닫자 헤르난의 얼굴에도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칼릭스는 붙잡은 헤르난의 손을 아래로, 더 아래로 이끌었다.
헤르난의 손은 긴장감에 뻣뻣해진 근육을 지나 마르지 않은 천 위에 닿았다. 당황한 헤르난은 손을 떼어 내려 했다. 하지만 칼릭스가 자신을 떠나려는 헤르난을 그의 손 아래에 부드럽게 가뒀다.
팽팽하게 당겨져 주름 하나 없어진 천 너머의 온도가 뜨거웠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단단한 살덩이의 양감이 헤르난을 혼란스럽게 했다.
차마 아래를 내려다보지 못하고 헤르난은 반사적으로 칼릭스를 올려다봤다. 자신의 성기 위로 손을 잡아끈 칼릭스 역시 헤르난 못지않게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비에 젖은 널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됐어.”
칼릭스의 목소리가 헤르난의 귓가에 닿았다.
“옷을 벗은 것도 아닌데.”
이미 단단해져 있던 성기가 헤르난의 손 아래에서 그 덩치를 키웠다. 헤르난에게 자신을 과시하려 들었다.
처음으로, 헤르난은 칼릭스가 가진 날것의 욕망을 마주했다. 마음을 흔드는 이상한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떠야 했다.
칼릭스는 헤르난의 손을 놓아줬다. 하지만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았다는 듯 다시 손깍지를 끼어 왔다.
두 사람의 몸이 또 한 번 가까워졌다.
“나는 너한테, 이런 감정까지 품고 있는 거야.”
칼릭스가 귓가에 불어 넣는 목소리가, 다시 맞닿은 몸으로 느끼게 된 기립한 열망이 헤르난의 머릿속을 엉망으로 헤집으려 들고 있었다.
숨소리도 없는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조심히 입을 맞췄다. 이내 능숙하게 입술을 벌리고 들어오는 남자의 혀를 받아 내며 헤르난은 눈을 감아야 했다.
칼릭스의 혀가 입 안의 이곳저곳을 건드릴 때마다 가쁜 숨이 흘러나왔다. 칼릭스와의 입맞춤은 가끔은 부드러웠지만 대개 이렇게 급작스럽고 거칠었다. 잡아먹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버겁기도 했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데도 봐주질 않고, 대신 몸을 더 꽉 끌어안아 왔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칼릭스가 입맞춤보다 더한 걸 원할지도 모른다고 느낀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처럼 강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헤르난은 자신이 잠겨 있지 않은 문고리를 쥔 채 가만히 선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고 문 너머의 칼릭스를 그려 보기만 했다.
문을 열어 칼릭스를 마주한 후에는, 다시 뒤를 돌아볼 수 없게 될 거다. 헤르난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두려웠다.
하지만 이상하게 심장이 떨리기도 했다. 칼릭스가 자신을 진심으로 원한다는 사실이, 저처럼 별 볼 일 없는 남자를 품는 일에 흥분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고 징그러운 기쁨을 줬다.
먼 옛날, 마음 깊은 곳에 사장했었던 욕심이 떠올랐다. 내가 도련님의 시선을, 마음을, 욕정을 모두 붙들어 둘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그걸 해결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헤르난은 자신의 도련님을 보며 그런 몹쓸 생각을 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망상이었다.
그런데 그 망상이 어쩌면 조금쯤은…….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딴생각할 정신은 있어?”
칼릭스가 속삭여 왔다. 숨이 닿자 소름이 돋았다. 간지러움을 닮은 것이었다.
답을 들을 생각은 없다는 듯 칼릭스는 헤르난의 뺨에, 눈썹 위의 흉터에, 벌어진 셔츠 깃 사이로 드러난 목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따끔할 정도로 세게 물어 왔다. 자신이 붙잡은 사냥감에 대한 소유권이라도 주장하듯 이를 박아 넣었다.
하지만 종내엔, 붉어진 살이 안타깝다는 듯 헤르난의 목을 핥았다. 평생 제 표식이 지워지지 않길 바라는 듯 짙은 자국을 남기려 들던 걸 까먹은 사람처럼 다정하게 말이다.
‘정말, 칼릭스와 몸을 섞게 될까?’
멍해진 머릿속에 떠오른 물음을 받아 들고 헤르난은 급히 칼릭스를 밀어 냈다.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물어야 할 것 같았다.
아주 조금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헤르난은 칼릭스를 올려다봤다.
“후회하실지도 모릅니다. 입을 맞추는 것과는 다를 겁니다. ……이런 건, 당신의 마음과는 다른 문제일지도 몰라요.”
2년 전의 밤에 그랬듯 헤르난은 다시 후회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흥분한 남자에게 경고를 했다. 칼릭스와 헤르난 모두를 향한 경고였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칼릭스는 헤르난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대신, 그 밤과는 다른 답을 헤르난의 앞에 내놨다.
“후회 같은 거 안 해.”
헤르난을 향해 칼릭스는 웃어 보였다. 여전히 저를 모르는, 완전히 믿을 생각이 없는 헤르난에게 다시 입을 맞췄다.
짧은 입맞춤 끝에 포옹을 푼 칼릭스는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바지를 끌어 내렸다. 느릿하게 속옷을 벗어 내자 짓눌려 있던 성기가 드러났다. 그것은 숨을 쉴 수 있는 곳에 나와 껄떡이다가는 배 위로 붙었다.
젖어 있는 욕망의 산물에서 눈을 떼려는 헤르난의 시선을 칼릭스는 붙들어 왔다.
칼릭스는 헤르난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헤르난의 손을 이끌어 제 성기를 쥐게 했다. 그 커다란 욕망을, 돋아난 혈관을, 붉어진 색을, 온도를 느끼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네가 이렇게 만들었어. 그 누구도 아닌 헤르난 말론이 날 돌아 버리게 했다고.”
칼릭스가 만들어 준 파란 세상 속에서 헤르난은 자신을 툭, 툭 쳐 대는 스스로의 욕심을 모른 척해 보려 했다. 하지만 쉽지가 않았다.
말이 이어졌다.
“헤르난. 나는 너한테 묻고 싶어.”
“…….”
“후회할 것 같아?”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물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헤르난은 그런 말을 시작하려다가 말 대신 웃음을 먼저 내보였다. 손끝을 타고 올라온 열기가 몸 전체에 퍼지고 있었다.
내가 원한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나의 욕망은 그저 죄가 아닐까 걱정이 됐다. 그래서 헤르난은 자꾸만 칼릭스의 핑계를 대려 했다. 이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지만 칼릭스가 원하니까 들어주는 거라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 했다.
헤르난은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다신 오지 않을 처음을 핑계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후회 안 합니다.”
헤르난은 답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후련함이, 그리고 정반대에 선 불안이 헤르난의 마음속으로 동시에 흘러들어 왔다.
답을 기다렸다는 듯 칼릭스는 급히 입을 맞춰 왔다. 앞선 고민과 불안을 잊을 정도로 집요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벽에 등이 닿아 있는 채였다.
벽과 칼릭스의 사이에 낀 채로 헤르난은 숨을 헐떡였다. 입술이 부딪힐 때마다 기립한 칼릭스의 성기가 헤르난의 바지 앞섶에 비벼졌다.
입맞춤을 멈출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칼릭스는 헤르난의 바지를 풀었다. 이전보다 거칠어진 칼릭스의 손이 성기를 쥐어 오자 당혹감과 민망함이 머릿속을 달궜다.
“너도. 나 때문에 섰네.”
칼릭스는 기쁘다는 듯 헤르난의 귓가에 속삭였다.
헤르난은 자신을 변호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도 칼릭스를 말리려는 말도 모두 입맞춤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둥근 모양을 만든 엄지와 검지가 기둥을 쓸어내렸다. 무어라 딱 떨어지게 말하기 힘든 노골적인 소리를 만드는 게 오가는 혀인지, 성기를 쥐고 흔드는 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손끝이 요도구를 가볍게 긁고 지나가자, 헤르난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칼릭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도련님.”
“…….”
“도련님…….”
“그런 호칭으로 부르면 그만둬 달라는 건지, 더 해 달라는 건지 모르겠잖아.”
짧은 욕지거리와 함께 손을 뗀 칼릭스는 이내 쿠퍼액으로 번들거리는 성기를 맞대 왔다.
몸이 조금 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칼릭스의 손이 이끄는 대로 2개의 성기가 문대졌다. 흥분한 성기의 기둥이, 또 귀두 끝이 순서를 바꿔 가며 엉망으로 짓찌르고 또 치대 왔다. 맞닿은 몸이 주는 쾌감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빈손으로 헤르난의 셔츠를 들어 올린 칼릭스가 드러난 몸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쇄골 아래에, 가슴 위에, 그리고 오랜 흉터 위에 칼릭스 히페리온의 흔적을 남겼다.
그러다가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어 다시 입을 맞춰 왔다. 손 아래의 성기가 마치 추삽질을 하는 것처럼 서로에게 부딪혔다.
“아……! 잠깐만, 흐윽.”
허리를 바짝 세우게 만드는 감각에 몸을 떨며 헤르난은 참지 못하고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칼릭스의 어깨를 밀어 내는 대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끝내 눌러 담지 못한 신음에 울먹임이 담겨 있었다. 참 사랑스러운 소리라고, 칼릭스는 생각했다. 징그러운 변태 새끼가 된 기분이었다.
칼릭스는 결국 스스로의 얼굴을 가려 버린 헤르난의 손등 위에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혀를 세워 손가락 사이의 틈을 벌리고, 그 벌어진 틈 사이를 음미했다.
“헤르난. 내 생각을, 하면서, 한 적 있어?”
칼릭스는 물었다. 그의 입 사이로도 거친 숨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헤르난은 답을 하지 못하고 얼굴이 빨개진 채로 숨만 헐떡였다. 아주 먼 옛날엔, 첫사랑에 얼굴을 붉히던 시절엔…… 그런 적이 있었다. 다만, 헤르난은 그가 도련님에게 안기는 몽상을 하진 않았다. 지금과는 반대의 상황을 그려 봤었다. 아주 허술하고 어색한 상상이었다.
“나는 있어.”
속삭인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완전히 몸을 붙여 왔다.
벽과 칼릭스 사이에 갇혀 헤르난은 칼릭스의 단단한 어깨 위에 머리를 비볐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던 감각이 헤르난을 잡아먹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나는, 너랑…… 침대 위에서 뒹구는 상상을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몇백 번이고 했어.”
칼릭스는 부끄러움도 수치도 없이 자신의 욕망을 헤르난에게 속삭였다. 그 나름의 고해였다.
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열기가 느껴지는 음성이, 유혹처럼 느껴지는 고백이 헤르난의 귀 끝을 붉어지게 만들었다.
빨라지는 손의 움직임을 따라 마찰이 거칠어졌다.
몸이 잔뜩 눌린 채로 헤르난은 칼릭스의 손안에서 절정을 맞이했다. 그건 칼릭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몫의 백탁액이 칼릭스의 손 전체를 적셨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품에 갇혀 숨을 쉬었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수치심도 창피함도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칼릭스의 손이 떨어져 나간 뒤에도 성기는 여전히 맞닿아 비벼졌다. 성기가 스치는 감각이 기운이 빠진 몸을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찾아온 창피함에 헤르난은 울고 싶어졌다. 여기서 무얼 더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정말 칼릭스를 기쁘게 해 줄 수 있긴 한 건가 걱정이 됐다.
손에 묻은 것을 털어 낸 칼릭스는 다리에 힘이 빠져 자꾸만 아래로 미끄러지려는 헤르난을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헤르난. 나,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아.”
여전히 흥분감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칼릭스는 말했다.
그의 성기가 다시 단단해지고 있었다. 칼릭스에 의해 몸이 조금 들린 탓에 기립한 성기의 끝이 자꾸만 회음부를 쑤시는 꼴이 됐다. 두꺼운 귀두가 부드러운 살을 쑤실 듯 건드리다가 뒤로 미끄러지길 반복했다.
헤르난은 그 이상한 감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여기에서 계속 이러고 있다간, 그 무엇도 끝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침대로 가요.”
칼릭스를 끌어안으며 헤르난은 중얼거렸다.
“이거. 유혹이라고 생각해도 돼?”
말을 붙여 오는 칼릭스에게 헤르난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여 줬다. 도대체 제 행동 어디가 그에게 이상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칼릭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러길 원한다면 그게 맞다고 해 주고 싶었다.
칼릭스는 헤르난을 그대로 안아 올렸다. 이미 몇 번 들어 올려진 적이 있음에도, 옷을 벗고 있어서인지 더욱 기분이 이상했다. 저보다 한 뼘이나 작았던 칼릭스가 어쩌다 이렇게 커진 건지…….
“나도 침대로 가고 싶었어, 헤르난.”
칼릭스의 흰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웃음이 번졌다.
곧, 딱딱한 벽이 아닌 부드러운 침대가 헤르난을 뒤에서부터 끌어안았다. 그런 헤르난의 조금 벌어진 다리 사이로 칼릭스가 자리 잡았다.
칼릭스의 손이 힘이 없는 헤르난의 왼발을, 발목을, 종아리를 더듬어 올라갔다. 칼릭스는 그가 평생을 짊어져야 할, 자신의 달콤한 죄를 손에 쥐고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내 옅은 웃음이 뒤엉킨 감정 위에 덮였다.
성기를 쥐었던 손이 이제는 두 다리를 천천히 벌려 왔다. 헤르난의 다리 사이에 완전히 자리를 잡은 칼릭스는 제 아래에 누운 남자를 내려다봤다.
황홀한 기쁨과 만족감이, 쉽게 채워지지 않을 갈망과 초조가 칼릭스를 흔들었다.
칼릭스는 말려 올라간 셔츠 아래로 보이는 보기 좋은 몸을 손끝으로 더듬어 봤다. 옛날, 호위 기사를 하던 때에 비하면 말랐지만 지난 삶보다는 살이 오른 몸이 기뻤다. 헤르난의 숨을 따라 선명해지는 근육이 사랑스러웠다.
더러운 모양새로 엮인 사랑과 소유욕이 칼릭스의 온몸을 옭아맸다. 그 속에서 최소한의 이성을 놓지 않기 위해 칼릭스는 노력해야 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아니, 눈이 뒤집힐 정도로 돌아 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헤르난의 처음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흐려진 헤르난의 눈을 바라보며 칼릭스는 자신의 손가락을 혀로 핥았다.
제가 무얼 하려는지 눈치챈 헤르난이 당혹감을 느끼는 게 보였다. 하지만 헤르난은 칼릭스의 눈을 피하고 싶어 하면서도 결국 그러지 못했다. 칼릭스는 그런 헤르난을 향해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칼릭스는 성기를 애무하듯 스스로의 손가락을 핥았다. 헤르난의 안에 들어갈 것이니 더욱 성심껏 빨아야 했다.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헤르난은 멍하니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칼릭스가 몸을 숙여 오자 긴장해 몸을 굳혔다.
“내가 들어가도 돼?”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물었다.
헤르난이 겁이 난다고 말하면, 싫다고 말하면 그는 물러설 생각이었다. 하지만 허락을 받게 된다면 절대 뒤로 무르지 못할 것이다. 마음이 약한 헤르난에게 몸을 치대서, 몸정이라도 더 얻어 보겠다며 몇 번이고 달려들 게 분명했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열이 오른 얼굴을 빤히 보다간 자신의 팔로 칼릭스의 목을 감쌌다. 그리고 그를 아래로 끌어 내렸다. 칼릭스는 졸지에 헤르난에게 안긴 꼴이 되어 그에게 다시 한번 어깨를 빌려주게 됐다.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망설이던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속삭였다.
마음대로. 칼릭스는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가 펑, 하고 터지는 느낌을 받았다. 더는 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헤르난이 제 어깨에 얼굴을 묻게 두고, 칼릭스는 손을 내렸다. 반쯤 선 성기를 더듬고 괜히 손안에 고환을 굴려 봤다. 모르는 척 손가락 끝으로 회음부를 누르고 간질였다.
칼릭스의 손안에서 헤르난은 몸을 떨었다. 신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칼릭스는 예민한 반응을 내놓는 헤르난 때문에 흥분하면서도 동시에 마음이 차가워졌다. 헤르난의 이런 모습을 아는 사람은 저뿐이어야 했다. 상대가 없는 질투심에도 마음이 탔다.
아래로 내려간 손끝이 다물린 구멍의 주름을 느릿하게 훑었다. 타액으로 범벅이 된 손가락이 구멍을 벌리고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이내 완전히 그 안에 자신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칼릭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침입자를 압박해 오는 뜨거운 내부를 느껴 봤다. 헤르난 역시 저를 느끼길 바랐다.
“헤르난, 느껴져?”
“……네.”
“아프지 않아?”
헤르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흉한 물음에 온순한 답변을 줬다.
칼릭스는 다시 손을 움직였다. 탐색이라도 하듯 이곳저곳을 누르고 휘저었다. 절 밀어 내는 건지 잡아끄는 건지 모를 안이, 헤르난과 처음 입을 맞췄을 때처럼 생생하게 또 생경하게 느껴졌다.
칼릭스는 손가락을 뺄 듯 뒤로 물렸다가 다시 안으로 박아 넣었다. 그는 헤르난에게 기쁨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더 그의 안을 헤집었다.
툭, 왼쪽에 불거져 나온 살을 건드리자 안 그래도 힘이 들어가 있던 헤르난의 몸이 단단히 굳어 버렸다.
“도련님. 저, 저는…… 이런 건.”
헤르난은 망연자실한 사람처럼 탄식하며 말을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순진해 보이는 얼굴을 한 남자의 안은 낯선 쾌락 속에서 부드럽게 풀어져, 한 번 더 저를 기쁘게 해 달라며 칼릭스를 졸라 댔다. 마치 손가락이 성기라도 된 듯 머리에 피가 몰렸다.
칼릭스는 다시금 손끝으로 안쪽의 살을 짓눌렀다. 약 올리듯 긁고 누르고 쑤셨다. 계속해 손을 움직이자 헤르난은 멀쩡한 오른쪽 다리를 버둥대기 시작했다. 헤르난의 두 손이 칼릭스의 등 위를 헤맸다.
“흑, 흐읍…… 이제, 제발 그만…….”
억눌린 신음에 울먹임이 섞여 드는 순간을 음미하며 칼릭스는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그리고 헤르난에겐 미안하지만, 자신을 꽉 붙들고 있는 그에게서 벗어났다. 얼굴이 보고 싶었다.
“헤르난.”
칼릭스는 헤르난의 이름을 불렀다.
누구에게나 차갑다는 오해를 받을 서늘한 얼굴이 열감으로 흐려져 있었다. 헤르난은 계속해 눈을 감고 뜨길 반복했다.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손가락이 안을 쑤셔 오는 감각에 다시금 눈이 풀렸다. 모난 데 없이 곧은 성기 역시 발기한 채로 액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손가락은 점점 빠르게 출납을 반복했다. 물기 어린 소리가 방 안 전체를 채웠다.
헤르난의 두 눈이 칼릭스를 찾았다. 칼릭스 역시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헤르난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칼릭스는 자신을 찾는 헤르난을 반기며 그가 원할 지점을 계속해서 쑤셨다. 들린 허리를 붙들고 위로 도망가지 못하게 막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밖으로 흘러나온 헤르난의 신음 소리가 멋없게 뚝, 뚝 끊기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새빨갛게 변하고 있었다. 이상했다. 정말 이상하다는 말밖엔 나오질 않았다.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더는 참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릭스의 손가락이 헤르난의 안에서 빠져나갔다. 젖은 손가락을 자신의 복근 위에 대충 닦아 낸 칼릭스가 제 성기를 손에 쥐었다. 발산되지 못한 열기가 성기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두꺼운 귀두 끝이 그 주인의 차갑고 단정한 얼굴과 달리 음탕하게 벌름대는 구멍에 맞춰졌다.
천천히, 칼릭스는 헤르난의 안으로 제 성기를 박아 넣기 시작했다. 손가락 대신 흉포한 성기를 받아들이게 된 구멍이 주름 없이 팽팽해져 갔다.
“……아파?”
칼릭스의 물음에 헤르난은 답을 하는 대신 그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손에 얼굴이 가려져 그 표정까진 볼 수 없었다. 답을 믿을 순 없었다. 헤르난은 아파도 안 아프다고 할 사람이니까.
헤르난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을 칼릭스는 조심스럽게 치워 냈다. 얼굴이 빨개진 헤르난은 숨을 헐떡이며 칼릭스를 받아 내고 있었다. 손이 치워진 줄도 모를 정도로 아래에 정신이 쏠린 채였다.
헤르난의 골반을 붙잡아 위로 띄우며 칼릭스는 조금 몸을 숙였다. 엉덩이가 들린 헤르난이 반사적으로 칼릭스를 봤다가 다시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봐. 네가 날 품고 있어.”
칼릭스의 눈만큼이나 번들거리는 성기가 헤르난의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그 안으로 반도 들어오지 못한 채였다. 다만, 금방이라도 헤르난의 안을 짓이겨 버릴 것처럼 그 기세가 흉흉했다.
연결된 접합부를 간질이던 칼릭스의 손끝이 헤르난의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예민해진 성기가 잡히자 다시 몸에 힘이 들어갔다. 아래를 끊어 먹을 듯 조여 오는 내부에 칼릭스는 미간을 찌푸려야 했다.
하지만 손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대신 부드럽고 느리게 움직였다. 입맞춤은 덤과 같은 것이었다. 그 단 입맞춤 속에서 헤르난은 다시 눈을 감았다. 잔뜩 굳어 있던 몸이 긴장을 풀고 있었다.
그런 헤르난을 놀리듯 칼릭스의 성기가 단숨에 가장 안까지 틀어박혔다. 퍽, 소리와 함께 단번에 쑤셔진 성기를 헤르난의 안은 아플 정도로 쥐어짰다.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황홀함이 칼릭스를 흔들었다. 그 황홀 속에서, 칼릭스는 제 아래에서 몸을 떨고 있는 남자를 자신의 두 눈 속에 선명하게 담았다.
“아…… 아아…….”
헤르난은 울먹이고 있었다. 그의 성기 끝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복근 위에 흩뿌려진 채였다.
헤르난이, 제 성기를 그 안에 품자마자, 절정에 달했다.
그 사실이 칼릭스의 머리를 때렸다. 칼릭스는 자신을 뒤로 물렸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헤르난은 다시 몸을 떨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도련님, 제발.”
절정을 맞아 예민해진 몸을 하고 헤르난은 애원해 왔다.
칼릭스는 당장에라도 거칠게 몸을 움직이고 싶은 걸 참아 내야 했다. 그는 땀에 젖은 헤르난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며 억지로 웃었다.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떡하지…… 네가 좋아할 곳이 내 좆이 박히는 자리보다 아래에 있어서…… 내가 여기서 물러나도, 더 쑤셔 박아도 싸게 되는 건 똑같을 텐데.”
점점 이성이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헤르난이 겨우 제게 허락을 건네줬으니까, 다음에도 하고 싶게 해야 하는데……. 칼릭스는 계속해서 자신을 세뇌하듯 속으로 말을 되뇌어야 했다.
“입을 맞출 테니까, 창피할 신음도 말도 다 그 안에 내어 놔. 그 소릴 듣는 건 나밖에 없을 테니까.”
웃음기가 사라진 칼릭스는 잠시 뒤로 몸을 물렸다. 하지만 곧, 다시 헤르난의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
헤르난의 안은 침입자에게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밀어 내기는커녕 더 깊은 곳으로 인도했다. 아닌 척 욕심이 많은 곳이었다.
본격적으로 출납을 반복하기 위해,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입을 맞췄다. 헤르난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헤집고 그의 뒤통수를 받쳤다.
기다렸다는 듯 헤르난은 칼릭스와의 입맞춤 속에 자신의 숨을 불어 넣었다. 조각난 신음이 입맞춤에 먹혀들어 갔다.
헤르난은 자신을 혼돈에 빠뜨린 장본인이자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칼릭스에게 매달렸다. 헤르난이 야릇한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지 않을 사람인 걸 알면서도, 칼릭스는 그 보채는 듯한 몸짓에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어야 했다. 위로, 아래로 헤르난이 주는 자극이 너무 과했다.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물이 튀는 낯 뜨거운 소리가 두 사람의 숨소리 사이로 섞여 들었다.
“도련님, 너무, 빨라요. 흐윽…… 저는.”
입맞춤 속에서 말은 이어지지 못하고 끊겼다. 칼릭스의 움직임이 헤르난의 애원을 받아들여 느릿하게 변했음에도 그랬다.
빠른 속도에 버거움을 느끼던 남자는 느리게 쑤셔 박혀 오는, 머리를 하얗게 태우는 지점을 뭉개 버리는 성기에 더욱 몸을 떨었다.
“그냥 다, 다시 빨리해 주세요.”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애원의 말을 내놨다.
“네가 원했던 거잖아, 헤르난.”
“아뇨, 아닙니다. 그냥…….”
서러움을 느끼기라도 할까, 칼릭스는 헤르난을 놀리는 걸 멈추고 그에게 입을 맞춰 줬다. 이 이상 참아 내는 것도 힘들었다.
몸을 뒤로 빼 구멍에 귀두만 박아 넣은 채로 칼릭스는 헤르난의 골반을 붙들었다. 몸을 단단히 잡아 오는 두 손에 의아함을 느끼며 헤르난은 물기를 머금은 시선을 보내 왔다.
칼릭스는 헤르난과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다시, 단번에 헤르난의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퍽, 퍽, 과격한 소리와 함께 몸이 접붙여질 때마다 칼릭스의 머릿속에서 빛이 번쩍였다. 헤르난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었다.
“아, 흐윽…… 아…… 도련님.”
정신없이,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자신을 새겼다. 어쩔 줄을 몰라 하는 헤르난을 붙잡고, 과민해진 그의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칼릭스는 헤르난과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저만 흥분해 있는 게 아니란 사실에 말도 안 되는 기쁨을 느꼈다.
헤르난의 안이 저만을 기억하길 바라며 그의 목소리가 커지는 지점을 따라 길을 냈다. 몇 번이고 반복해 성기를 박아 넣었다.
그렇게 다다른 가장 깊은 곳에, 칼릭스는 제 욕망을 분출했다. 별안간 제 성기를 끊어 먹을 듯 조여 오는 내부에 자신을 쏟아부었다.
거친 숨이 고요 위로 내려앉았다.
칼릭스와 헤르난의 몸이 겹쳐졌다. 칼릭스는 헤르난의 안에서 빠져나가지 않은 채로, 낯선 쾌락에 젖어 제대로 된 말을 내뱉지 못하는 사랑스러운 남자에게 입을 맞췄다.
제 몸 아래에 깔린 헤르난의 성기가, 그의 배가, 정액을 품은 아래처럼 엉망진창으로 잔뜩 젖어 있다는 게 미치게 기뻤다.
헤르난. 헤르난. 헤르난. 칼릭스는 사랑하는 남자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나는 너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그리고 헤르난의 귓가에 속삭였다. 베개 옆에 너부러져 있는 손을 끌어다 깍지를 꼈다.
“그러니…… 너도 나를 놓지 마.”
귓불을 깨물어 오는 칼릭스에게 헤르난은 답 대신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칼릭스는 헤르난의 안에 박혀 있는 성기를 천천히 뒤로 뺀 후에 다시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느릿하게 움직이다간 이내 가장 깊은 곳까지 자신을 밀어 넣었다. 평화로운 만족감이 퍼졌다.
이대로, 계속해서 헤르난과 연결되어 있고 싶었다. 그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제 안에서 또 한 번 단단해진 성기가 만들어 내는 뜨거운 압박감과 날카로운 쾌감 속에서 헤르난은 신음했다. 칼릭스가 안에 쏟아부은 정액이 다시 시작된 움직임을 따라 구멍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헤르난의 두 팔이 자신과 연결된 남자를 끌어안았다.
“네. 평생 옆에 있겠다고 말씀하셨으니까…….”
꿈을 꾸는 사람처럼 멍해져 헤르난은 정신이 없는 채로 자신의 속내를 중얼거렸다.
“맞아. 평생. 네 옆에 붙어 있을 거야.”
칼릭스는 헤르난의 감긴 눈 위에, 뺨에,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다시, 긴 입맞춤이 시작됐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어두운 창 너머의 풍경은 잊힌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