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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다섯 번째 아침 (18/21)

17. 다섯 번째 아침

수도 한복판에 자리한 여신의 신전에서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다. 르타 백작의 막냇동생 실반 마티아스와 네이로 후작 폰토스 히페리온의 결혼식이었다.

놀 수 있는 파티라면 어디든 간다는 잘생긴 망나니로 유명한 실반 마티아스와 자신의 하나뿐인 친구와 배우자가 눈이 맞은 것도 몰랐던 덜떨어진 남편으로 유명한 네이로 후작의 결혼식은, 매우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된 실반이 특히나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절로 주위의 눈치를 보게 만드는 음울한 결혼식이었다. 웃고 있는 사람은, 오직 후작의 남동생인 칼릭스 히페리온 한 사람뿐이었다.

칼릭스는 즐거웠다. 죽은 아버지 때문에 10살이나 어린 개망나니와 재혼을 하게 된 형이 조금은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형이 곤란에 빠졌다는 즐거움이 그 안타까움을 압살했다.

피로연에선 기분이 좋아진 칼릭스가 제 형을 다정히 끌어안으며 그의 결혼을 축복해 주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물론, 칼릭스는 그 축복 뒤에 말 한마디를 더했다. 폰토스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속삭임이었다.

“나랑 헤르난 인생에 참견할 생각 말고, 남편이랑 사이좋게 살아.”

“…….”

“아버지처럼 죽기 싫으면.”

폰토스는 한숨을 푹 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형제의 인사는 빠르게 끝이 났다. 폰토스는 칼릭스의 옆을 지키고 있는 헤르난에게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어 보인 후 그대로 자리를 떴다. 그런 폰토스의 뒤를 그의 어린 망나니 배우자가 마지못해 쫓았다.

“무슨 말을 하셨길래 저러시는 건지…… 걱정이 됩니다.”

“잘생긴 남편이랑 평생 잘 먹고 잘 살라고 축복해 줬어.”

의아한 얼굴을 하는 헤르난에게 팔짱을 끼며, 칼릭스는 말을 더했다.

“집으로 돌아가자.”

사이가 나쁜 형제지만 최소한의 도리는 했다. 뚱한 얼굴을 해 분위기를 망쳐 놓지도, 급이 떨어지는 형의 결혼에 어깃장을 놓지도 않았다. 피로연까지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제 누나는 일을 핑계로 참석조차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 정도 했으면…… 식장을 떠나도 되겠지 싶었다. 인맥이 넓은 백작 측 손님들로 북적이는 피로연장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돌아가면, 종일 널 안고 있을래.”

“……하셔야 하는 일은 끝마치고요.”

헤르난은 순순히 답을 내어 줬다. 그 끝에 슬쩍 잔소리 한마디를 더하긴 했지만 말이다.

두 사람은 돌아갈 채비를 했다. 하지만 몇 걸음을 더 떼기도 전에 헤르난이 누군가에게 붙잡혀 버렸다. 그를 붙잡은 건 헤르난과 칼릭스, 두 사람 모두에게 익숙한 남자였다.

“한참 찾았어요!”

루체 세이어. 그가 반갑다는 듯 웃으며 말을 건넸다.

루체는 2명의 신랑 중 하나인 실반의 초대장을 받고 이곳까지 왔다며 곧장 헤르난의 안부만을 물어 왔다.

그 뒤로도 이런저런 말이 오고 갔다. 막힘없이 이어지는 대화의 내용이나 다정한 어투에 비해 분위기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칼릭스나 루체나 서로를 보며 웃기는 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헤르난은 이번 삶에서 그들이 연인은 되지 못했을지언정 아주 험악하거나 나쁜 관계는 되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쉽지만, 이젠 오늘의 주인공께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다음에 또 봬요. 더 조용한 곳에서요.”

루체가 내놓은 말을 환영하며 칼릭스는 웃어 보였다. 그 웃음 뒤로는 헤르난의 작별 인사가 다정히 따라붙었다.

헤르난에게 눈인사를 보내는 걸 마지막으로, 루체는 뒤를 돌았다. 루체는 저 멀리 보이는 오늘의 주인공들에게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힘차게 앞을 향해 갔다.

헤르난은 조금씩 멀어져 가는 루체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러다간 칼릭스를 잠시 자리에 세워 두고 홀로 루체의 뒤를 쫓았다. 흰 눈을 한 칼릭스가 슬금슬금 따라올 게 분명해 마음이 급해졌다.

걸음이 느린 헤르난은 간신히 루체를 따라잡았다. 흘러나오려는 숨을 숨기며 루체의 어깨를 붙잡았다.

“세이어 씨.”

헤르난은 루체를 불렀다. 지난 삶에선 존재하지 않았던 또 다른 이름을 입에 담았다.

별안간 걸음을 멈춘 루체의 얼굴에 잠시 짜증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채고는 순순히 뒤를 돌아 줬다.

“갑자기 붙잡아서 미안합니다. 묻고 싶은 게 있어 실례를 저질렀어요.”

“아뇨, 괜찮아요. 편히 물어보세요. 저 뒤에 계신 배우자께서 제 목을 조르러 오기 전에 어서요.”

헤르난의 뒤를 가리키며 루체는 속삭였다. 코까지 찡그려 웃어 보이는 모습이 연극에나 나올 법한 요정처럼 장난스러워 보였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막상 루체를 앞에 두자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루체에게 내놓을 말이, 그에겐 너무나 이상하게 들릴 거란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헤르난은 루체에게 묻고 싶었다.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만 같았다.

“……행복하십니까?”

헤르난은 루체에게 물었다. 그 짧은 물음이 헤르난의 심장을 불안한 속도로 뛰게 했다.

“왜 그런 걸 물으시는지 모르겠네요.”

“…….”

“그래도, 답은 드릴 수 있죠.”

예상치 못한 헤르난의 말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루체는 다시 웃어 보였다. 헤르난의 긴장을 풀어 주고 싶어서였다.

“네. 행복해요. 어제보단 오늘이 행복하고, 오늘보단 내일이 더 행복할 거라고 믿으면서 살고 있답니다.”

루체는 헤르난에게 가볍게 답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진실하게 내놓은 답변이었다.

“좀 더 괜찮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니까, 더 행복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해요. 뭐, 남작님 덕분이죠. 남의 마음에 상처 주다가 내 인생이 망할 수도 있겠다는 걸 아주 잘 느끼게 됐다고 할까요?”

말 한마디가 더해졌다.

“어쨌든, 저는 행복합니다.”

잠시 떠올랐던 민망함을 지우고 루체는 헤르난을 올려다봤다. 보기 좋은 미소와 함께였다.

헤르난은 마주한 루체의 미소 속에서 말로 풀어낼 수 있는 것 이상의 행복을 느꼈다. 이 새로운 세상의 루체가 자신만의 행복을 찾게 됐다는 걸, 완전히 인정할 수 있었다.

어느새 자신을 따라온 칼릭스에게 순순히 팔을 내어 주며 헤르난 역시 루체를 따라 미소 지었다. 불안도 미련도 보이지 않는 꾸밈 없는 기쁨이 헤르난을 찾았다.

웃음 뒤로는 작별의 순간이 찾아왔다. 가볍게 손을 흔들며, 루체는 헤르난을 떠났다.

헤르난은 떠나는 루체의 뒷모습을 다시 한참이나 바라봤다. 하지만 금세 그에게서 시선을 떼야 했다. 바로 옆에 있는 칼릭스의 투덜거림 때문이었다.

“왜 나한텐 그런 거 안 물어봐? 지금의 내가 쟤보다 더 행복한 상태인데 말이야.”

유치한 물음이 헤르난을 쿡쿡 찔렀다.

“행복하십니까?”

헤르난은 슬쩍 고개를 들어 칼릭스와 눈을 맞췄다. 루체에게 행복을 물었을 때처럼 조금 긴장이 됐다. 눈앞의 남자에게 행복하다, 사랑한다, 이 2가지 말을 매일 몇 번이고 반복해 듣고 있는데도 그랬다.

“응. 행복해.”

칼릭스는 빠르게 답을 내놨다. 하지만 그 간결한 답 뒤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아직 할 말이 남은 칼릭스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 초조함 때문이었다.

“……너는 어때? 행복해?”

칼릭스는 되물었다.

조심스러운 걱정이 담긴 칼릭스의 물음에 헤르난은 쉽게 답을 할 수 없었다.

헤르난에겐 행복이라는 단어가 사랑이라는 말만큼이나 어렵게 느껴졌다. 내가 그 아름다운 단어를 입에 담아도 될까? 입에 담는 순간 사라지게 되면 어쩌지? 그런 걱정이 들었다. 그래도…….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고개를 끄덕여 답을 했다.

나는 행복하다고 입을 열어 확실한 답을 내어 준 게 아니라 그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여 준 것뿐이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아주 대단한 답을 얻은 사람처럼, 그 작은 긍정과 비교도 되지 않을 커다란 희락을 헤르난에게 건넸다.

칼릭스는 헤르난을 끌어안았다. 말 그대로 행복을 끌어안은 사람처럼 반짝이는 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남의 피로연장에서 괜한 애정을 과시한다며 누군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칼릭스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헤르난은 도통 포옹을 풀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칼릭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고개 숙인 헤르난의 귀 끝이 붉어져 있었다.

* * *

날이 좋은 주말, 수도 중앙부를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강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누군가는 가만히 앉아 홀로 사색을 하고 누군가는 친구들과 또 가족들과 함께 가벼운 음식과 이야기를 나눴다. 연인들은 서로에게 팔짱을 내어 준 채로 산책로를 걸으며 수다스러운 새들처럼 짧게 입을 맞대곤 했다.

헤르난과 칼릭스 역시 강변의 산책로를 함께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볕 좋은 자리에 천을 깔고 앉아 수다를 떠는 이들을, 그늘 밑에서 웃고 있는 연인들을 천천히 지나쳤다. 누군가는 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하다고 느낄 만큼 느긋하게 걸어서였다.

하지만 칼릭스는 헤르난의 불편한 다리가 만들어 내는 그들의 느림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헤르난의 지팡이 노릇을 하며 그와 더 오래, 더 가까이 붙어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칼릭스의 질척한 후회를 닮은 기쁨이었다.

평탄하게 이어지던 산책로는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 근처에서 끝을 맺었다.

잠시 헤르난의 안색이며 몸 상태를 살피던 칼릭스는 이내 새로운 길로 방향을 틀었다. 이전, 기억을 잃은 칼릭스와 헤르난이 우연히, 아니, 칼릭스가 우연을 가장해 헤르난을 찾았던 다리 위로 걸음이 이어졌다.

언제나 기분 좋은 활기가 감도는 명소의 한가운데서 칼릭스는 멈춰 섰다. 악사들의 연주 소리며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품에 안은 강바람이 멈춰 선 두 사람의 주위를 맴돌았다.

“기억나? 여기서 동대륙 여자한테 관심받았던 거.”

해를 등지고 선 칼릭스가 헤르난에게 물었다. 조금씩 주홍빛으로 변해 가는 세상의 색깔이 칼릭스의 백금색 머리카락 위에도 퍼지고 있었다.

“네. 기억납니다.”

헤르난은 제게 웃으며 말을 건넸던 외국인 여자를 기억했다.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운 좋게 마주하게 된 칼릭스가 자신을 대신해 그녀와 말을 나눠 주고, 일을 해결해 줘 다행이었다.

“그게 다, 결혼반지를 안 끼고 다녀서 그랬던 거잖아.”

어울리지 않게 긴장한 얼굴로 칼릭스는 말했다.

“반지가 어디에 있을지 모르겠지만…… 스칼라에 돌아가 다시 찾아보겠습니다.”

헤르난은 민망했다. 그때도, 결혼반지를 말하는 칼릭스에게 지금과 비슷한 답을 줬었다. 하지만 도통 시간이 나지 않아 일을 미뤘다가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냐.”

헤르난의 말을 다급하게 끊어 낸 칼릭스가 곧장 말을 이었다.

“멀리 갈 거 없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얼굴이 굳어 가는 칼릭스를 마주한 헤르난 역시 덩달아 긴장하기 시작했다. 약간의 틈도 없이 가깝게 붙어 있던 칼릭스가 제게서 몸을 떼어 내자 그 긴장이 배가 됐다.

“매일 들고 다니길 잘했다. 이렇게…… 음, 드디어…… 줄 수 있게 됐네.”

그 손에 검이라도 한 자루 쥐여 줘야 할 것처럼 비장한 얼굴을 하고, 칼릭스는 외투 왼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무엇을 망설이는지 손에 쥔 것을 쉽게 꺼내진 못했다.

그런 칼릭스를 다시 움직이게 한 건 아무런 감도 잡지 못하고 있는 헤르난의 얼굴이었다. 기대 대신 걱정만이 가득한 어수선한 얼굴을 마주하자 행동이 빨라졌다.

외투 주머니를 벗어난 칼릭스의 손에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혹시 헤르난에게 그 존재를 들킬까, 오른쪽 주머니에는 실수로라도 넣지 않았던 것이었다.

애써 긴장감을 지워 낸 칼릭스의 얼굴에 보기 좋은 미소가 걸렸다.

“오늘부턴, 아무도 이상한 수작 못 걸 거야. 네 약지가 비어 있지 않을 테니까.”

“…….”

“……받아 줄래?”

상자를 연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물었다.

단정한 외관의 반지가 노을이 져 가는 하늘 아래에서 은은하게 반짝였다. 헤르난은 화려함 없이도 아름다운 반지를, 그리고 그 가운데에 박힌 보석처럼 새파란 눈을 가진 남자를 올려다봤다.

시선이 맞닿길 기다렸다는 듯 칼릭스는 헤르난의 손을 잡아 왔다. 초조가 완전히 걷힌 듯 보였던 얼굴과 달리, 헤르난에게 매달려 오는 손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정말로 이상한 순간이었다.

거듭된 시간을 지나오기 전에도,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반지를 받아 볼 거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헤르난의 꿈과 망상 속에서 칼릭스와 함께 반지를 나눠 끼는 건 루체 혹은 루체만큼이나 아름다운 이들뿐이었다. 꿈속의 헤르난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칼릭스의 구혼을 지켜보다 박수를 보내 주는 것밖엔 없었다.

그런데 지금, 칼릭스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제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려 했다. 생각지도 못한 풍경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버렸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울렁였다.

왜인지 오래전, 칼릭스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자신이 그의 호위 기사 일을 했던 때였다.

〈고마워. 나한테 잘해 줘서. 언젠간…… 정말, 정말 좋은 선물을 해 줄게.〉

어린 도련님이 말하던 선물이 꼭 지금 칼릭스의 손에 들려 있는 반지처럼 느껴졌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이거 꿈 아니야. 못 믿겠으면 내 얼굴 한 대 쳐 봐. 손이 아플걸.”

말이 없는 헤르난의 마음을 추측해 보던 칼릭스가 황급히 말을 꺼내 놨다.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제 속을 들킨 것 같아 민망해졌다.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이 세상은 꿈이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헤르난은 여전히 아주 조금쯤은, 자신에게 찾아온 행복을 작은 꿈이라고 생각하며 보내고 있었다. 커다란 꿈속에서 칼릭스와 함께하는 작은 꿈을 꾸고 있는 거다. 꿈은 언제든 깨질 수 있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며 살아야 했다.

하지만…… 저 반지를 끼는 순간 꿈에서 깨어나게 될지라도, 그것을 잡아 보고 싶었다. 승낙의 말 뒤에 붙을 칼릭스의 찬란한 웃음을 맛보고 싶었다. 아주 조금만 더 욕심을 내보고 싶었다.

“반지가 아름답습니다.”

떨리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헤르난은 다시 칼릭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약지에 끼면 더 예쁘겠지?”

“……네.”

헤르난은 뒤늦은 답을 내놨다. 어두운 눈 속에 여전한 불안이 넘실거렸다. 하지만 그만큼의 기쁨 역시 함께하고 있었다.

칼릭스는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 들었다. 빈 상자는 바람을 맞아 바닥을 구르게 되거나 말거나 옆에 내팽개쳐 뒀다.

붙잡은 헤르난의 손등 위에 짧게 입을 맞춘 칼릭스가 곧장 헤르난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반지를 든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으나, 반지를 받은 사람 역시 긴장해 손을 떤 덕분에 티가 나지 않았다.

제 손가락에 딱 맞는 반지를 바라보는 대신 헤르난은 칼릭스를 올려다봤다.

헤르난의 바람대로, 칼릭스의 얼굴 위에 스칼라의 해보다 환한 웃음이 떠오르고 있었다. 손끝을 간지럽게 만드는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웃음이었다.

“많이 사랑하고 있어.”

칼릭스는 헤르난의 귓가에 속삭였다.

입을 맞춰 오는 사랑에 헤르난은 답을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제 사랑을 완전히 긍정하는 게, 사랑이란 말을 입에 담는 게 어렵게 느껴졌다.

“답을 해 줄 필요 없어. 내가, 몇 번이고 대신해 줄 테니까.”

헤르난의 머뭇거림을 알아챈 칼릭스가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런 칼릭스를 따라 헤르난은 자그맣게 웃어 보였다. 칼릭스의 뻔뻔한 웃음이 헤르난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답을 드리지 못하면 어쩌죠.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변한 뒤에도 그러면요.”

헤르난이 말했다. 충동적으로 내뱉은 것이었다.

“할아버지 될 때까지 나랑 살아 줄 거야?”

그 자신 없는 말 뒤로 당황스러운 물음이 뒤따라왔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물음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입을 벌려야만 했다.

“진짜지?”

“그게…….”

“네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말 못 해도 괜찮아.”

“…….”

“어차피, 난 죽어서도 널 쫓아갈 거야. 유령이 제정신 유지하면서 얼마나 살 수 있는진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사람보다는 오래 살 거 아냐. 우리한텐 시간 많아. 그때 들으면 돼. 아니면, 다시 태어나자.”

기쁨에 찬 칼릭스가 바쁘게 내뱉은 말들이 결국 헤르난의 입가에 또 한 번 미소를 그려 줬다. 반 정도는 안심이 돼서 반 정도는 어이가 없어서 웃어 버린 거였다.

“웃는 건 좋은데…… 왜 비웃음같이 느껴지지?”

“아닙니다.”

“진짜?”

되물었던 칼릭스는 답은 바라지도 않는다는 듯 헤르난을 따라 웃어 버렸다.

오후의 햇살이 사랑하는 칼릭스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다. 헤르난 말론 단 한 사람을 위한 웃음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헤르난. 나한테 네 옆을 허락해 줘서 고마워.”

작은 속삭임과 함께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입을 맞췄다. 헤르난이 삶을 거듭하는 내내 그토록 바라 왔던 다정이 그의 붉어진 눈가로, 두 뺨으로, 입술 위로 쏟아졌다. 강변을 거니는 여느 연인들과 같은 입맞춤이었다.

그 입맞춤 속에서, 헤르난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마지막 삶을 떠올려 봤다.

달콤한 과실 한 모금 정도를 맛볼 수 있게 해 준 시간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한 모금이 또 다른 한 모금으로, 다른 한 모금으로 이어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제 앞엔 평생을 지나도 다 맛보지 못할 만큼 커다란 행복이 놓여 있었다.

그 행복은 모두 칼릭스가 건네준 거였다.

입맞춤 사이로 작은 웃음이 번졌다. 헤르난은 다시 입을 맞춰 오는 칼릭스를, 그의 행복을 꽉 끌어안았다.

* * *

헤르난은 제 손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칼릭스를 내려다봤다. 깊은 잠에 빠진 칼릭스의 얼굴을 이른 아침의 햇살이 밝혀 주고 있었다.

빛 속에 잠긴 칼릭스는 꼭 천사처럼 보였다. 누군가는 천사가 아니라 전쟁의 신이 아니겠냐고 하겠지만…… 적어도 헤르난의 눈에는 칼릭스가 여전히 천사처럼만 보였다.

헤르난을 붙든 칼릭스의 왼손에도 헤르난의 것과 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똑같은 반지를 맞춘 건 칼릭스였지만, 그의 손에 반지를 끼워 준 건 헤르난이었다. 새벽녘의 침대 위라는 많이 민망한 상황에서였다. 땀과 눈물에 범벅이 된 제 모습 역시 그 상황만큼이나 보기 흉했겠지만…… 약지에 반지를 낀 칼릭스가 행복해 보여 당장의 창피함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뒤늦은 창피함이 찾아왔다. 지난밤을 생각하고 있자니 마음이 멋쩍어져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괜히 제 가운을 여며 봤다. 온몸에 남아 있는 흔적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헤르난의 시선이 다시 잠이 든 칼릭스에게로 닿았다.

지난밤, 칼릭스는 내내 헤르난에게 사랑을 속삭이며 입을 맞춰 왔다. 사랑한다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는데 한 번도 되돌려 주지를 못했다.

미안함을 느끼며 헤르난은 칼릭스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조심히 매만져 줬다.

칼릭스는 눈을 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예정보다 앞당겨진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 임명을 코앞에 두고 칼릭스는 내내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사람도 일도 계속해 칼릭스를 찾아왔다. 아무리 체력이 좋은 그라도 피곤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헤르난은 수마에게 붙잡힌 칼릭스의 얼굴을 찬찬히 눈에 담아 봤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걸 돕기 위해서라도 칼릭스를 깨워 줘야 했다. 하지만 곤히 자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도련님.”

아주 작은 목소리로 헤르난은 칼릭스를 불러 봤다. 당연하게도, 잠이 든 칼릭스에게선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헤르난의 시선이 칼릭스의 약지를 빛내고 있는 반지에 닿았다. 그 반지가, 헤르난을 찾으려던 불안을 물려 줬다. 하지만 낯설고 묘한 충동이 익숙한 불안을 대신해 헤르난의 등을 두드렸다.

칼릭스가 아무것도 듣지 못하잖아. 지금이라면, 비밀을 고백할 수 있어.

부드러운 백금색 머리카락에 닿아 있던 헤르난의 손이 굼뜨게 움직였다. 헤르난은 제 손으로 칼릭스의 귀를 조심히 막아 봤다. 말도 안 되고 바보 같은 짓을 한다고 느끼면서도 밀려오는 충동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이러다 정말, 꿈에서 깨게 되면 어쩌지. 잠시 멀어졌던 불안이 다시 헤르난을 찾았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헤르난은 용기를 냈다. 입을 열었다. 숨을 내뱉은 것에 가까운 아주 작은 속삭임을 칼릭스에게 전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 헤르난은 제 마음을, 못생긴 사랑을 입 밖에 꺼내 봤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정신없고 시끄럽게 변하고 있었다.

헤르난은 자신이 직접 바깥으로 내놓은 고백이 두려워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나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잠이 든 칼릭스는 그 사랑을 듣지 못했음에도 그랬다.

눈을 감은 채, 헤르난은 제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거칠게 이어지는 소리가 불안 속에 파묻힌 헤르난을 흔들었다. 금방이라도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아서, 무너진 세상을 새까만 어둠이 덮을 것 같아서 두려웠다.

언젠가부터는 심장이 뛰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게 됐다. 오랜 적막이, 헤르난을 짓눌렀다. 그는 그 적막을 잠이 든 칼릭스의 손이 전해 주는 온기로 견뎌 냈다.

이 세상이 사라지지 않길. 제 앞에 있는 칼릭스가 사라지지 않길. 헤르난은 믿지도 않는 신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헤르난의 불안이 만들어 낸 적막을 깬 건, 또 다른 소리였다.

헤르난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봤다. 바람에 몸을 씻는 새의 지저귐이, 그 새를 지나친 바람이 창문을 흔드는 소리가, 뒤이어 나무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헤르난을 찾아왔다.

그리고 햇살이, 헤르난의 감긴 눈꺼풀을 더듬었다. 용기를 내 보라는 듯 그의 속눈썹을 간질였다.

헤르난은 천천히 눈을 떴다.

까만 어둠을 뒤집어쓰지 않은 세상이 헤르난을 기다려 주고 있었다.

헤르난의 시선이 곧장 그가 고백한 사랑에게로 닿았다. 시간이 지나 더욱 선명해진 햇살이 잠이 든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칼릭스.”

마침내, 헤르난은 칼릭스의 이름을 다시 입에 담았다. 그 나지막한 부름이 칼릭스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

정신을 차린 칼릭스는 곧장 헤르난을 찾았다. 무거운 졸음 탓에 잠시 빛을 잃었던 눈에 총기가 들기 시작했다. 이내 그 속에 헤르난을 가득 담았다.

“……좋은 아침이야, 헤르난.”

말을 마친 칼릭스가 헤르난의 손을 더욱 꽉 잡아 왔다.

보기 좋은 웃음과 함께 칼릭스는 헤르난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손등을 지나 손목으로, 팔뚝으로, 드러난 목과 뺨으로, 그리고 입술로 이어질 입맞춤이었다.

다가올 입맞춤을 기다리며 헤르난은 칼릭스를 따라 웃었다. 창백하던 얼굴에 새로운 기쁨이 서렸다.

헤르난 말론의 사랑이 세상을 허물어트리지 않은,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이었다.

〈다섯 번째 아침 끝〉

에필로그

‘너무 잘 그렸어.’

액자 속에 담긴 칼릭스 히페리온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자칭 제국 최고의 화가인 델마는 생각했다.

몇몇 귀족과 예술가들은 델마 오션이 일류가 되지 못하는 이유로 겸손을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태도를 들먹이곤 했었다. 하지만 델마는 그들의 말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는 태도를 고쳐먹을 생각도 없었다. 겸손의 미덕을 챙기기엔 제 능력이 너무 출중했으니 말이다.

저 초상화만 봐도 그랬다. 칼릭스 히페리온의 잘난 얼굴을 저 정도 수준까지 화폭에 옮겨 놓을 수 있는 화가는, 제국에 저 한 사람밖에 없지 않을까 싶었다. 그림을 벽에 걸고 있는 사용인들도 연신 감탄을 내뱉고 있지 않은가.

솔스켄 후작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은 꽤 급작스럽게 찾아온 일거리였다. 스칼라 남작 헤르난 말론에게 직접 의뢰를 전해 받은 델마는, 말 그대로 헐레벌떡 히페리온 저택으로 뛰어갔다. 좋아서 그랬다.

제 앞으로 굴러들어 온 의뢰가 델마는 반가웠다. 남작이 지급을 약속한 액수가 꽤 묵직하다는 게 반가웠고, 유명 인사를 그리는 일이 제 몸값을 올려 줄 거라는 사실이 반가웠다.

그 특이하던 남작 부부를, 아니 이젠 후작 부부이기도 한 칼릭스와 헤르난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점 역시 그녀에게 반가움을 안겨 줬다.

스칼라 남작에게 그림을 선물했던 과거의 자신을 칭찬하며 델마는 히페리온 저택에 머물게 됐다.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였다.

지난 일주일 동안, 델마는 아름다운 모델에 취한 채 정신없이 그림 작업에 매달렸다.

집중이 깨지려 할 때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럴 때면 스칼라 남작이 작업실을 찾아와 영감을 주고 떠났다.

헤르난은 델마에게 곁을 허락받고는 그저 말없이 칼릭스의 초상화를 바라봤다. 델마의 눈에는 그 바라봄이, 붓 대신 눈으로 캔버스 위에 애정을 칠하는 것으로 보였었다. 델마는 헤르난의 애정을 흉내 내며 붓을 움직였다.

그리고 황금 같은 주말 오후, 칼릭스 히페리온의 초상화가 드디어 대저택의 벽에 걸리게 됐다. 정확히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참의 벽 자리에 걸리게 됐다. 델마의 예상과는 동떨어진 의외의 위치 선정이었다.

하지만 금세 그 연유를 알 수 있었다. 칼릭스 히페리온이 스칼라 남작에게 하는 귓속말이, 아니 대놓고 전하는 말이 귀에 박혀 버린 덕분이었다.

“헤르난 네가, 계단을 오르고 내릴 때마다 내 얼굴을 볼 거라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아.”

왜인지 낯간지럽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소름이 끼쳐, 델마는 죄 없는 팔을 벅벅 긁어야 했다. 벌레에 물린 척을 하면서였다.

쑥스럽다는 듯 웃어 보인 헤르난은 그저 말없이 계단 위에 걸린 그림을 올려다봤다. 언젠가의 파티에서 델마가 건넸던, 자그마한 수첩 속에 그려진 배우자를 들여다볼 때처럼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서였다.

그런 남작을 보고 있자 꽤 흐릿해졌던 몇 년 전의 기억이 조금씩 선명하게 변해 갔다. 역시. 스칼라 남작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참 한결같구나 싶었다. 자신의 배우자를 향한 그의 마음도 성격도 말이다.

하지만 사람은 같을지언정 그 상황만은 그때와 지금이 완전히 달랐다. 쓸쓸하게 수첩을 들여다보던 스칼라 남작의 옆에, 종이 쪼가리 속의 칼릭스 히페리온이 아니라 진짜 칼릭스 히페리온이 함께 있게 됐다.

〈진짜 사람은 저한테 웃어 주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그것도, 웃는 얼굴을 하고서였다.

“뭐야, 왜 나는 안 보고 저것만 봐.”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속삭였다. 목소리에 투정이 섞여 있었다. 헤르난은 그 유치한 투정을 귀에 담은 후에야 칼릭스에게 시선을 돌려줬다.

“질투 나니까, 저건 내가 네 옆에 없을 때만 봐. 지금은 말고.”

제 배우자에게 속닥거리는 칼릭스를 보며 델마는 혀를 찼다. 솔스켄 후작이 의부증인 걸 스칼라 남작만 모른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진짜인 듯했다.

찰싹 달라붙어 있으려 드는 배우자가 더럽게 귀찮겠다 싶었다. 물론, 칼릭스 히페리온이 귀찮음을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얼굴을 가지고 있긴 했다. 안 그래도 아름다운 얼굴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웃음을 머금기까지 하니…… 눈이 부실 정도였다. 어딜 가도 얼굴로는 질 일이 없겠구나 싶었다. 델마의 취향은 칼릭스보다는 헤르난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빈 벽의 중앙에 초상화가 완전히 자리를 잡음과 동시에, 칼릭스는 그의 보좌관에게 잠시 붙들렸다. 칼릭스는 이 찰나의 멀어짐이 아쉽다는 듯 헤르난에게 몸을 가까이 붙이고 또 무어라 말을 속삭였다. 정말…… 징그럽다는 생각만 들었다.

칼릭스와 그의 보좌관이 로비 뒤편으로 잠시 자리를 옮긴 후에야 델마는 그녀의 의뢰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됐다.

헤르난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지, 곧장 델마에게 감사를 전해 왔다. 멋진 그림을 그려 줘 고맙다는 인사였다.

몇 마디 말이 더 이어졌다. 의뢰인과 대화를 나누는 걸 즐기진 않지만, 헤르난에게 여러모로 고마운 게 많았기에 델마도 말이 많아졌다.

대화는 칼릭스가 돌아오면서 슬며시 끝을 맺게 될 게 분명했다. 여전히 이쪽을 보고 있는 칼릭스의 시선을 확인한 델마가 헤르난에게 슬쩍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칼릭스는 듣지 못할 말을 헤르난에게 속삭였다.

“이제, 진짜 사람이 웃어 주네요.”

가벼운 윙크와 함께였다.

방긋 웃는 델마에게 화답하듯 헤르난은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쑥스러움을 들키기 싫어서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 거구나 싶었다.

델마는 황급히 헤르난에게서 물러섰다. 칼릭스 히페리온과 단둘이 이어 가야 할 말이 남은 이상, 남작님과의 대화는 여기서 끝을 맺어야 할 것 같았다. 칼릭스의 살벌한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으니 말이다.

헤르난과 세찬 악수를 하며 델마는 다음을 기약했다.

걱정하던 칼릭스와의 독대는 저택을 떠나는 마차 앞에서 이루어졌다.

당연하게도, 칼릭스의 옆에 헤르난은 없었다. 칼릭스가 델마와 헤르난이 저택 안에서 작별의 인사를 나누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본인은 다른 핑계를 대며 델마를 따라 밖을 나섰다. 이유는…….

“그림은 요청하신 대로 보좌관님 앞에 맡겨 뒀습니다.”

그림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스칼라 남작을 그린 그림이었다.

“갑작스러운 부탁이었을 텐데, 일을 잘 끝마쳐 줘서 고마워요.”

어울리지 않게 친절한 어투로 칼릭스는 말했다.

‘보수를 그렇게 챙겨 주셨는데, 그깟 시간이 뭐가 중요할까요. 잠은 죽어서 자면 됩니다.’

속으로 생각하며 델마는 칼릭스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최대한 갸륵한 얼굴을 하려고 노력하면서였다.

“제가 잡아낸 남작님의 순간이 황실 기사단 건물에, 그것도 단장님의, 아니지, 부단장님의 집무실에 자리하게 되다니……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델마는 칼릭스 히페리온이 제게 의뢰를 해오던 날을 떠올려 봤다.

아직 색이 칠해지지 않은 본인의 초상화 앞에서, 칼릭스는 고된 전투를 앞둔 사람처럼 긴장한 얼굴을 하고 델마에게 부탁을 해 왔다.

〈기사단 집무실에 당신의 초상화를 걸어 두고 싶다고 말하면, 내 배우자는 기절할지도 모릅니다. 무조건 안 된다고만 하겠죠.〉

그래서 이렇게 몰래 온 거구나. 델마는 칼릭스의 마음을 재빨리 알아채 줬었다.

〈쑥스러움이 많은 그 사람에게 들키지 않게, 모든 게 비밀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그림을 옮기는 것도.〉

그리하여 델마는 칼릭스의 초상화를 그리는 틈틈이 또 다른 작업을 진행해 왔다. 자신의 배우자 앞에서만 나오는 남작의 미소를 작은 화폭에 담았다.

칼릭스는 델마의 작업물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예상대로였다.

“네. 아직은 부단장입니다.”

“예. 그럼요. 아직은요.”

“다음엔 부부의 초상화를 의뢰할까 합니다. 한…… 서너 작품 정도.”

“맡겨만 주세요. 제국에서 가장 완벽한 부부인 두 분을, 최대한 그 잘생기고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화폭에 담아 보겠습니다.”

비장한 얼굴을 하고 델마는 답했다.

“내 배우자 덕에 이렇게 능력 좋은 예술가를 알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말을 마친 칼릭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남작을 향하던 것과는 영 딴판인, 가식이 듬뿍 묻어 있는 미소였다.

하지만 가식이 뭐가 문제랴. 델마는 고마운 의뢰자를 따라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 * *

칼릭스는 계단을 올랐다. 어느새 계단참까지 올라 제 남편의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는 헤르난에게 가기 위함이었다.

가볍게 걸음을 옮긴 칼릭스는 헤르난의 왼편에 섰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바로 지척에 선 줄도 모르고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는 헤르난의 왼편에 섰다.

“헤르난.”

사랑하는 남자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몸을 붙였다.

“아까 했던 말 진심이었는데. 질투 나니까, 저 그림은 내가 옆에 없을 때만 보라고 한 거.”

조금 전, 그림과 눈을 맞추고 있던 헤르난의 옆모습을 떠올리니 마음이 불퉁해졌다. 더럽게 유치하게도 말이다. 하다 하다 그림을 질투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이제 안 보겠습니다. 오셨으니까요.”

헤르난은 멋쩍다는 듯 웃어 보였다.

“응. 잘생기긴 했어도 실물보단 못하잖아. 저거 볼 시간에 나를 더 봐.”

자신을 봐 주는 헤르난에게 칼릭스는 말했다. 농담처럼 가볍게 말했지만, 사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었다.

계단참의 초상화는 칼릭스 히페리온이라는 사람의 대용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헤르난을 두고 하루 이상 자리를 비워야 하는 일은 최대한 만들지 않을 생각이니, 대용품이란 말을 쓰기에도 민망하지 않을까 싶었다.

텅 빈 손님방에 홀로 앉아 작은 수첩에 그려진 저를 바라보던 헤르난을 생각하면 속이 쓰렸다. 기억이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당장 헤르난을 끌어안아 줬을 텐데, 기억이 없어 뭣 같은 짓거리나 했었다.

칼릭스는 헤르난이 자신을 그리워할 새 없게, 외로움을 느낄 새 없게, 내내 그의 옆에 붙어 있을 생각이었다.

언제나처럼 칼릭스는 헤르난의 손을 잡아 왔다. 옭아맨 헤르난의 손을, 손마디를 더듬어 봤다. 헤르난의 네 번째 손가락에 걸린 사랑의 표식이 뿌듯했다.

‘……결혼식도 다시 올려야지.’

지금 당장은 헤르난이 허락을 해 줄 리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헤르난이 저를 더 믿어 주게 되면, 마음 편히 저를 받아 줄 수 있게 되면 그때…… 청혼을 할 생각이었다.

헤르난의 허락을 받아 드는 게 몇 년 뒤여도, 몇십 년 뒤여도 상관없었다. 그저 언젠가는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영원한 사랑의 입맞춤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헤르난. 우리, 다음 휴가 땐 스칼라에 가자. 호수도 바다도 다시 가 볼래. 너랑 단둘이서만.”

언제 올지 모를 미래를 마음 한편에 소중히 담아 두고, 칼릭스는 당장의 바람을 그의 입에 담았다.

“……네. 좋습니다.”

잠시 머뭇대던 헤르난이 칼릭스에게 답했다. 쑥스러움이 묻어난 얼굴을 하고도 끝까지 칼릭스와 눈을 맞춰 줬다.

“응. 고마워, 헤르난.”

헤르난이 건네준 자그만 답변이 그리고 시선이, 칼릭스를 아주 값진 선물을 받아 든 어린애로 만들어 줬다. 마음이 들떴다.

칼릭스는 헤르난을 끌어안고 그에게 천천히 입을 맞췄다. 새어 나오는 웃음 속에서, 두 사람의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하지만 이내 완전히 포개져 서로의 숨을 나누게 됐다.

사랑스러운 웃음이 퍼부어지는 입맞춤 속에서 헤르난은 칼릭스를 따라 웃었다. 그리고 조심히 칼릭스의 손을 맞잡았다. 차가웠던 손이 따스한 온기를 머금게 된 순간이었다.

〈에필로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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