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 커튼콜 (19/21)

외전

1. 커튼콜

낯선 기척도 꺼림칙한 마력도 느껴지지 않던 새벽에, 칼릭스는 이상한 꿈속으로 떨어졌다.

헤르난을 품에 안은 채로 잠이 들었던 그를 반긴 건 칠흑 같은 암흑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칼릭스는 혼자였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둠이 위험한 빛깔을 띠지 않았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오랜만이야, 칼릭스.」

귓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닿았다. 헤르난 말론을 몇 번이고 되살렸던 신적인 존재, 하지만 이제는 그의 인생에서 손을 뗀 흰 사슴의 것이었다.

뒤이어 흰 사슴의 형상이 칼릭스의 지척에 모습을 드러냈다. 별 무리 위에서 뒹굴다 오기라도 한 것처럼 털끝에 반짝임이 맺혀 있었다.

「언제쯤에야 네가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네줄까?」

여전히, 그 성별도 나이도 분간하기 힘든 목소리로 흰 사슴은 말했다. 늘어진 말꼬리 끝에 웃음이 스며 있었다.

「나를 반갑게 맞아 주는 건 꿈도 꾸지 않아.」

〈내 꿈속에 너라는 불청객이 찾아온 건지, 네 꿈속에 내가 초대된 건지 모르겠지만…… 용건이 있으니 말을 걸었겠지.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익숙하다는 듯 혹은 질린다는 듯 칼릭스는 물었다. 흰 사슴이 이런 식으로 그를 찾아온 게 처음이 아니라 나오게 된 반응이었다.

「지난번처럼 농담이나 주고받으려고 온 건 아니야.」

〈…….〉

「헤르난을 위해 분리하고 찢었던 시간의 선들을 보수하다가 아주 재밌는 걸 발견했어. 그걸 혼자 보는 것보단 너와 함께 구경하는 게 더 즐거울 것 같더라.」

가벼운 걸음으로 칼릭스의 바로 앞까지 온 흰 사슴이 말을 마쳤다.

칼릭스는 흰 사슴을 흘겨봤다. 헤르난을 위해 시간의 선을 분리하고 찢어 냈다는 게 무얼 뜻하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저것은 헤르난과 루체의 결혼 1주년을 기점으로 여러 갈래로 찢어져 버린, 더는 헤르난이 존재하지 않게 된 세상들을 입에 올리고 있었다.

쪼개진 세상은, 그곳에 더는 헤르난이 머물지 않게 된 후에도 계속해 존재하기는 했을 것이다. 헤르난이 독주를 받아 들었던 지난 세상의 시간 역시 그의 죽음 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 흘러가지 않았던가. 제가 흑마법사를 이용해 헤르난을 뒤쫓게 될 때까지 말이다.

「사실 너보단 헤르난과 함께 보고 싶었어. 하지만 그건 안 되지. 그 애를 데리고 또 다른 너를 보러 갔다는 걸 네가 알게 되면…… 난리가 날 테니까.」

〈잘 알고 있네.〉

「너 때문에 나의 숲이 불타는 상황은 막아야 하지 않겠니.」

어린아이처럼 목소리를 바꾼 흰 사슴이 키득댔다.

「그래서 헤르난 대신 너와 함께하려고.」

〈…….〉

「나의 인간 친구와 재밌는 구경을 함께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떨리는구나.」

흰 사슴을 보는 칼릭스의 자세가 삐딱해졌다. 저것이 즐거워하는 꼴을 보아하니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진 않았다. 불쾌하고 짜증 나는 꼴을 맞닥뜨리게 되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그 구경이란 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사슴은 또 다른 너를 보러 갈 것이라 말했었다. 아마…… 헤르난이 없는 세상의 칼릭스 히페리온을 보게 되겠지.

‘등신같이 살고 있겠군.’

칼릭스는 다른 세상의 칼릭스 히페리온이 얼마나 변했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엔 아주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헤르난이 그 꼴을 보게 하고 싶진 않았다.

혹여 다른 세상의 저가 불행 속을 떠돌고 있다면? 마음 약한 헤르난은 칼릭스 히페리온이 불행한 만큼, 아니 그 남자의 불행보다 더 큰 괴로움을 느낄 것이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이었다. 그러니…… 당장은 좋든 싫든 저 사슴의 비위를 맞춰 줘야 했다.

〈앞장서. 동트기 전에 구경을 끝내자고.〉

약간의 한숨이 섞인 칼릭스의 말에 화답하듯 흰 사슴이 무어라 말을 쫑알거렸다. 칼릭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어둠이 칼릭스와 흰 사슴을 집어삼켰다.

칼릭스는 낯선 공간으로 안내됐다. 그는 쌓인 피로를 술 한 잔과 맞바꾸는 노동자들이 가득한 곳에, 주말을 앞둔 저녁엔 유독 더 떠들썩해지는 평범한 주점 한복판에 도착했다.

꿈속에서 또 다른 꿈을 꾸게 된 것만 같았다.

「아무도 우리를 보지 못해, 칼릭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흰 사슴의 목소리가 칼릭스를 스쳐 지나갔다.

중년 남자의 손에 들린 술잔으로 외관을 바꾸고 있는 걸지도 모를 흰 사슴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며 칼릭스는 주변을 살폈다. 흰 사슴이 이런 곳으로 절 데려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역시나. 끓는 냄비 가장자리에 눌어붙은 치즈를 떠오르게 하는 쿰쿰한 활기 속에서, 칼릭스는 주변의 풍경과 뒤섞이질 못하고 있는 남자를 마주했다.

후드를 깊게 눌러 쓰는 것으로 자신의 환한 백금색 머리카락이며 아름다운 얼굴을 가린 남자는 허름한 주점의 행색에 걸맞은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주위의 떠들썩함이 무색하게도, 남자의 시선은 작은 무대 위에 올라 어설픈 연기를 펼치고 있는 배우들에게 고정된 채였다. 그는 주점 구석이 아니라 커다란 극장 한가운데에 앉은 사람처럼 차분한 얼굴로 어설픈 연극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 수준 낮은 연극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대에서 눈을 떼거나 자리를 뜰 생각은 없어 보였다.

칼릭스는 그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챘다. 하지만 반가운 만남은 아니었기에,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며 그저 남자를 따라 무대 위로 시선을 돌려 봤다.

주점의 주인이 음유 시인과 떠돌이 극단의 배우들을 위해 마련해 둔 작은 무대 위에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 취하지 않은 이들 몇몇이 무대 앞에 앉아 배우들을 격려해 주고 있었다.

팔짱을 낀 칼릭스는 허우대만 멀쩡한 남자들이 바보같이 움직이며 대사를 나누는 걸 무심히 바라봤다.

물에 빠지기라도 한 사람처럼 세상의 소리를 똑바로 받아들이는 게 힘들었다. 하나 제대로 듣지 못해도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무대에 새로운 배우가 얼굴을 비친 순간.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차가운 인상의 배우가 입을 연 순간. 제 옆에 있는 남자의 어깨가 굳어 버린 순간. 칼릭스는 지금 저 무대 위의 주인공들이 누군지를 알게 됐다.

“……헤르난.”

후드를 눌러 쓴 남자가 중얼거렸다. 주점 안 그 누구의 귀에도 닿지 못한 아주 작은 목소리였으나 꿈에 잠긴 칼릭스의 귀에는 남자가 내뱉은 헤르난의 이름이 뚜렷하게 닿았다.

다른 세상의 칼릭스 히페리온이 헤르난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 순간, 사람을 멍청하게 만들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듯 어지럽게만 느껴지던 이상한 세상의 풍경이 조금씩 선명하게 변해 갔다.

칼릭스 역시 남자를 따라 멍하니 무대를 바라봤다.

“……네가 이런다고 ……가 널 봐 줄까? 너처럼…… 남자를?”

“그래. ……없겠지. 하지만…… 상…… 겠어?”

배우들의 격양된 목소리가 여전히 조금은 눅눅한 채로 칼릭스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저를 닮은 남자처럼, 칼릭스 역시 무대 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연극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흘러갔다. 음유 시인의 짧은 기타 연주를 따라 어설픈 장면 전환이 쉼 없이 이어졌다.

해설자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이야기의 길이를 조절했다.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소수의 관객을 제외하면 연극에 관심을 주는 이가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맥주 위의 거품이 아닌 무대 위로 향하기 시작했다.

칼릭스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돌려 후드를 쓴 남자를 바라봤다. 후드가 만들어 낸 그늘 밑으로 보이는 새파란 눈에 불안과 초조가 떠오르고 있었다.

칼릭스는 자신과 똑 닮은 남자가 숨기지 못하고 드러낸 감정에 심장이 뛰었다. 그리고 곧, 그 불안을 남자와 함께 뒤집어쓰게 됐다.

두 명의 배우가 검을 맞댔다.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배우와 금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배우였다.

몇 번이고 맞붙었다 떨어지는 모형 검을 보며 칼릭스는 헤르난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날. 헤르난이 바다에 몸을 던지려고 했던 그날, 그는 자신을 막아선 제게 그가 내내 숨겨 왔던 비밀을 토해 냈었다.

〈난, 뭘 했냐면…… 그냥 모든 걸 망칠 심산으로, 최악의 인간으로나마…… 당신의 기억 속에 남아 보려고……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헤르난의 두 눈은 가늠할 수도 없이 커다란 두려움이 섞인 채로 흐릿했었다. 그 속에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두 눈에 자신을 욱여넣겠다 발악하며 칼릭스는 떨리는 속내를 감췄었다.

〈내 우스운 도발에 넘어가서 결투를 승낙한, 검을 든 당신이…… 훌쩍 커 버린 도련님이 정말 멋있어 보인다는 생각을 했어요. 당신이 내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을 때…… 난 기뻤습니다. 다신 만나지 못하는 것보단 당신의 손에 죽는 게 나았으니까. ……분명,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헤르난의 첫 번째 죽음이었다.

헤르난 말론은 칼릭스 히페리온에게 제 심장을 바쳤다. 작은 무대 위에 오른 저 남자 역시 그가 사랑하는 이의 검에 가슴이 꿰뚫려 허무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칼릭스는 헤르난의 고백 속에 등장했던 다른 세상을, 더는 헤르난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훔쳐보고 있었다.

흰 사슴이 끌고 온 이 이상한 세상의 주인공은 칼릭스 히페리온이었다. 헤르난이 지나쳐 온 다른 시간의, 더는 헤르난 말론을 볼 수 없게 된 칼릭스 히페리온. 그리고…… 헤르난의 심장에 직접 검을 박아 넣은 유일한 칼릭스 히페리온.

「봐. 헤르난 말론을 죽인 칼릭스 히페리온이야. 바로, 너지.」

흰 사슴은 웃었다.

〈저건 내가 아냐.〉

「왜 그렇게 생각해?」

나는 저 남자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칼릭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괜한 대꾸를 해 흰 사슴을 기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헤르난을 제 옆에 묶어 두고 도망치지 말라며 다리까지 망가뜨린 사람이 입 밖으로 내놓기엔 너무 뻔뻔한 소리라는 것 역시 알았다.

그래.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순 없지. 입을 다문 칼릭스의 시선이 후드를 쓴 남자에게 잠시 닿았다 떨어졌다.

남자는 싸구려라고 이름을 붙이기에도 민망한 연극을 보며 과거의 순간을 상기하고 있었다.

헤르난 말론이라는 악당을 처단한 스스로에게 뿌듯함을 느끼면서? 그 당시에 느꼈던 행복을 음미하면서? 루체에 대한 사랑을 곱씹으면서?

아니다. 남자는 고작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이곳에 앉아 있는 게 아니다. 칼릭스는 알 수 있었다.

예상대로 또 예정대로, 돌아온 영웅의 검이 검은색 머리칼을 가진 배우의 심장에 박혔다. 취객들이 만들어 낸 휘파람 소리와 박수 소리, 웃음소리가 순식간에 주점을 가득 채웠다.

쓰러진 남자를 발치에 두고 돌아온 영웅과 그의 연인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루체. 이건 나의 승리가 아니야. 이건, 사랑의 승리야.”

그건 영웅의 마지막 대사이자 이 연극의 마지막 대사였다. 준비된 대사를 끝마친 금색 머리칼의 배우는 웃음 지었다. 다른 배우 역시 그 웃음에 화답하듯 환하게 웃어 보였다. 죽어 가는 악당에겐 그 어떤 관심도 주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무대 위의 결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그랬듯 지금도 한 사람만을 보고 있었다. 오직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배우를, 헤르난 말론을 봤다. 남자는 다른 두 주인공의 행복엔 관심이 없었다.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임에도 그랬다.

“……일어날 수 있잖아.”

그는 무대 위에 쓰러진 채로 움직이지 않는 검은 머리칼의 남자를 보며 몇 번이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일어날 거잖아.”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 같기도 했다.

해설자의 손짓과 함께 작은 무대 앞면에 붉은색 커튼이 쳐졌다. 앞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커튼의 움직임을 따라 기침을 내뱉을 정도로 그 위에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급히 입을 막았다. 저 먼지 묻은 커튼이 다시 젖혀질 거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예정대로, 커튼콜이 시작됐다.

보는 사람을 괴롭게 하는 고난도, 안타까운 비극도, 통쾌한 웃음과 먹먹한 눈물도, 끝내는 죽음마저 무대에 막이 내리면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 다시 커튼이 걷힌 무대에 남는 건, 오직 환한 웃음과 벅찬 미소뿐이었다. 그건 이 소란스러운 주점의 허술한 연극도 마찬가지였다.

스칼라 남작 헤르난 말론의 역할을 맡았던 배우는 자신이 언제 죽음을 맞이했었냐는 듯 다시 일어나 사람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아주 조금쯤은 헤르난을 닮은 남자였다.

이 세상의 칼릭스 히페리온은, 되살아난 배우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그를 따라 웃었다. 남자의 자그마한 미소에 뜨거운 기쁨이 묻어나 있었다.

남자는 연극을 보기 위해 이 주점을 찾은 게 아니었다. 그는 커튼콜을 보기 위해 저 너절한 연극을 견뎌 낸 사람이었다.

‘미친 새끼.’

무대 위와 무대 아래의 서로 다른 웃음 사이에서 칼릭스 히페리온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칼릭스는 무심코 남자를, 헤르난을 잃은 바보 같은 남자를 비웃었다. 하지만 동시에 무거운 초조를 느꼈다. 흰 사슴이 헤르난에게 저 남자를 보여 주지 않았다는 것에서, 지금 제 옆에 헤르난이 없다는 것에서 안도를 느끼기도 했다.

「연극이 끝나 버렸네.」

흰 사슴의 목소리가 칼릭스의 귓전을 때렸다.

별안간, 꿈속의 배경이 변했다.

발을 디디고 있던 부산한 주점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 뒤 나타난 공간은 칼릭스에게도 아주 익숙한 곳이었다. 이전 삶에서 자신의 것이었던 테미스 백작성의 풍경이 칼릭스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 익숙한 풍경 속에서 칼릭스는 다시 그를 닮은 남자를 만나게 됐다. 집무실의 벽난로 앞에 이 세상의 진짜 칼릭스가, 얼굴을 가리기 위해 후드 망토를 입고 있던 주점 안의 남자가 있었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은 남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무기력하고 우울해 보이는 낯짝이었다. 칼릭스는 그런 남자의 모습이 수마를 맞아 쓰러진 나무보다도 꼴사나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칼릭스는 습관적으로 창 너머를 내다봤다. 금세 비가 쏟아질 듯한 우중충한 날씨 때문에 지금이 이른 아침인지, 이미 해가 저문 늦은 오후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정말 피곤해 보인다. 그렇지 않니?」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흰 사슴이 칼릭스의 옆에 섰다. 당연하게도, 이 세상의 칼릭스 히페리온은 자신의 공간을 침범한 불청객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때? 저 남자한테 동정심이 들고 그래? 안쓰러워 보여?」

〈아니.〉

헤르난이라면 저 멍청한 남자의 지친 얼굴을 보며 안타까워했겠지. 하지만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너무 냉정한 거 아냐?」

답을 줄 생각은 없다는 듯 입을 다문 칼릭스가 창문에서 벽으로 시선을 옮겼다. 가장 마지막으로 눈이 닿은 건, 벽에 걸리지 못한 채 바닥에 멋대로 널브러져 있는 그림 위였다.

초상화 속의 귀족 부부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는 남자처럼 벽에 등을 기댄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부부를 캔버스 안에 옮겨 담은 평범한 초상화였다. 그림 속의 주인공이 칼릭스와 루체라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다.

두 남자가 가만히 앞을 응시하고 있는 그림 위에는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쉽게 닦이지 않을 짙은 그을음이 마치 두 사람이 지나온 시간을 알리는 것만 같았다.

「극작가들은 죄다 거짓말쟁이야.」

흰 사슴은 말했다.

칼릭스는 입을 열지 못했다. 생각에 빠진 탓이었다. 그는 헤르난을 그리고 루체를 떠올렸다. 루체를 이용해 헤르난의 마음을 시험하던 남자를, 헤르난의 두 눈 속에 아로새겨진 한결같은 애정을 확인하며 안도감을 느끼던 머저리 같은 칼릭스 히페리온을 떠올렸다.

칼릭스는 그 시험과 안도의 시간을 저 남자와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엔, 저 남자의 옆엔 헤르난 말론이 없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채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 사랑 뒤에, 자기 손으로 으스러트린 사랑 뒤에 홀로 남은 칼릭스 히페리온은 어떻게 됐을까.

「칼릭스, 너는 괜찮았어. 한 한 달 정도는 말이지.」

불현듯 찾아온 긴 적막 속에서 칼릭스는 다시 남자를 봤다. 그의 얼굴을 밝혀 주는 주홍색 불빛을 두 눈으로 따랐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을 땐 몰랐는데 남자는 지금의 저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헤르난의 죽음 이후로 몇 년의 시간이 흐른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제게도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헤르난과 함께 다른 세상에 떨어지기 전, 거울 속에서 봤던 제 모습이 저 남자의 얼굴에서 보였다.

칼릭스도 잘 알고 있는 숨 막히는 시간이, 그때보다 더 짙고 우울한 색을 하고 남자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남자는 삶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칼릭스는 낮이 없는 밤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것과 다름없는 남자를, 그의 남은 인생을 비관할 수밖에 없었다.

저 칼릭스 히페리온은, 남자는, 평생 그가 원하는 목적지로 가 닿지 못할 것이다. 그의 인생에 하나뿐이었던 나침반을 스스로 깨부숴 버렸으니까.

칼릭스는 남자를 비웃었다. 반쯤은 통쾌했고 반쯤은 혐오감이 들었다. 그것은 이곳의 칼릭스 히페리온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혐오이기도 했다.

저 역시 이 세상의 남자와 다를 게 없었다. 죽은 헤르난을, 다시 살아난 그를 따라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 못했다면? 칼릭스는 자신이 저 남자와 다를 바 없는 꼴을 하고 꾸역꾸역 삶을 살아 나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러는 건지 제대로 된 답을 찾지도 못한 채로 말이다.

〈잘 봤어.〉

「교훈도 얻었어?」

〈교훈은 이미 스스로 얻은 지 오래인데.〉

「흥. 잘났다니까.」

〈헤르난 덕분이었으니 내가 잘난 건 아니지. 이제 나를 똑똑한 헤르난에게 돌려보내 줘.〉

무감한 얼굴로 칼릭스가 말했다.

헤르난이 보고 싶었다. 간신히 다시 닿게 된 남자를 품에 안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매시간, 매분 매초, 그가 살아 있다는 걸 느끼고 싶었다.

흰 사슴이 절 이곳에 평생토록 박아 둘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가 종잡을 수 없는 존재긴 했으나 약속을 어기진 않을 거라고 여겼다. 헤르난의 인생에 더는 관여하지 않기로 한 약속 말이다.

헤르난에게서 저를 빼앗는 건, 헤르난의 인생에 관여하는 걸 넘어 그의 인생을 난도질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지독하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건방진 생각인 걸 알지만 흰 사슴 역시 그리 생각할 걸 알았다.

그러나 흰 사슴의 대답이 아닌 노크 소리가 먼저 칼릭스의 귓전에 닿았다. 부드러운 노크는 짧게 끝을 맺었다. 집무실의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였다.

별다른 물음 없이 문을 열어젖힌 이는 대꾸 없는 주인이 익숙한 듯 자연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제프란. 지난 삶에서 절 위해 일했던 보좌관이자 헤르난에게 죽음을 안겼던 남자가 집무실을 찾았다. 헤르난이 지나온 시간 속에서 제프란이 제 보좌관이 아니었던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헤르난에게 독주를 내밀었지.’

눈을 가늘게 뜬 칼릭스가 제프란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언제나처럼 침착하고 무심한,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에서 칼릭스는 제프란의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 말 그대로, 전쟁터에서 그를 구하지 않았다. 다시 시간을 되돌아가지 않는 이상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른 이를 가까이 둘 생각이 없어서였다. 헤르난에게 해를 가한 남자를 어찌 제 옆에 두겠는가. 미리 죽여 두지는 못할망정. ……위험에 빠진 그를 구하지 않았으니 죽인 것과 다름없긴 했다.

그리고 제프란의 뒤를 따라 누군가 집무실에 발을 들였다.

「이걸 안 보고 갈 순 없지.」

목소리를 낮춘 흰 사슴이 속삭였다.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헤르난?’

집무실의 손님을 본 칼릭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제프란이 데려온 손님을 눈에 담은 칼릭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풀어지길 반복했다. 하지만 이내 순순히 인상을 풀었다. 당연하게도, 손님은 헤르난이 아니었다. 그저 헤르난을 닮은 남자가 제프란과 함께 온 거였다.

조금 긴장한 낯을 한 남자는 지금의 저보다도 훨씬 어려 보였다. 하지만 어둡던 집무실이 순간 밝게 느껴졌었을 정도로 그는 헤르난을 닮아 있었다. 저와 함께하는 지금의 헤르난이 아니라…… 먼 옛날, 어린 절 돌봐 주던 호위 기사 시절의 헤르난을 떠오르게 했다.

정적은 눈을 뜨지도, 답을 주지도 않는 남자의 비위를 맞추며 오랜 시간 이어졌다.

길어지는 침묵 속에서 칼릭스는 헤르난을 닮은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제프란이 데리고 온 남자는 단순히 헤르난의 얼굴을 닮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는 헤르난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손님은 헤르난 말론을 닮은 사람이 아니라, 헤르난 말론으로 꾸며진 사람이었다. 머리카락 길이도 옷차림도, 표정도…… 모두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헤르난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제프란의 목소리가 집무실을 한 번 더 울린 후에야 남자는 눈을 떴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찾아온 두 사람을 바라봤다. 주인의 시선을 알아챈 제프란이 뒤로 물러나자 남자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생김새만큼은 지금까지의 헤르난 말론 중 가장 완벽하다고 생각합니다.”

제프란은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남자는 헤르난을 닮은 이에게 다가갔다.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연극을 보던 때처럼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저를 만나러 온 손님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그는 자신보다 키가 작은 남자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봤다. 보는 사람의 속을 거북하게 만들 정도로 집요하고 느릿한 손길이었다.

“헤르난.”

남자는 헤르난의 이름을 불렀다.

칼릭스 히페리온은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헤르난 말론을 찾고 있었다.

기분 나쁜 풍경을 비추던 벽난로의 불빛이 흔들리며 불길한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 위로도 까만 어둠이 스쳐 지나갔다.

백작 성의 주인과 눈이 마주친 어린 손님은 남자에게 답을 하는 대신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아름답지만 어딘가 소름이 끼치는 남자를 향한 두려움과 새로운 삶을 향한 기대가 엉킨 웃음이었다.

저렇게 웃는 사람은 헤르난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헤르난의 흉내를 낼 수도 없을 거다. 이질적인 광경을 눈앞에 두고 칼릭스는 생각했다.

그걸 느낀 건 칼릭스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칼릭스 히페리온의 입가에 떠올랐던 웃음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잠시 빛이 돌아왔었던 새파란 두 눈이 불가에서 시간을 죽이던 때처럼 어두워졌다.

“당장 데리고 나가.”

얼굴을 찌푸리고 남자는 말했다. 누군가에게 향하는지 모를 경멸을 눈에 담고 헤르난을 닮은 손님에게 닿았던 손을 손수건에 닦아 냈다. 오랜 시간 쓰레기를 손에 쥐었어야만 했던 사람처럼 신경질적으로 손을 털었다.

“내가 원하는 건 헤르난 말론이지 저런 싸구려 남창이 아니야.”

“…….”

“제대로 된 걸 구해 와.”

“알겠습니다.”

미미한 웃음을 입에 머금은 제프란이 헤르난 말론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를 남자의 팔을 쥐고 집무실을 나섰다.

헤르난의 흉내를 내던 이는 당혹감을 느끼며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그가 원하던 아름다운 백작님은 이미 그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린 뒤였다. 손님에게 닿았던 손을 닦아 낸 손수건이 어느새 벽난로에 처박혀 활활 타고 있었다.

닫힌 문 너머에서 이어지던 시끄러운 걸음 소리가 아득히 멀어져 갔다. 집무실에는 이전과 같은 고요가 찾아왔다.

처음처럼, 남자는 혼자 남게 됐다.

그는 뒤를 돌아봤다. 헤르난을 닮은 남자가 서 있던 자리에 그의 시선이 닿았다.

“……헤르난.”

남자는 이젠 볼 수 없게 된 사람의 이름을 다시 입 속에 머금어 봤다. 몇 번이고 반복해 헤르난의 이름을 불렀다. 닿을 데 없는 부름이었다.

잔뜩 옥죄여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은 마음을 건넬 곳이 없어 떨리던 남자의 손이 이내 스스로의 얼굴을 덮었다.

숨을 몰아쉬는 남자가 품은 그리움을 칼릭스는 규정할 수 없었다. 다만 그 그리움 속에, 자신의 마음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는 후회와 헤르난을 저버렸다는 후회가 묻어 있을 거라고 가늠해 볼 뿐이었다.

기분 나쁜 꿈속에 갇힌 칼릭스는 길을 잃어버린 멍청한 남자를 따라 침묵했다. 그를 연민할 생각은 없었다. 저 남자가 앓고 있는 고통은 헤르난이 품은 괴로움의 반도 되지 못할 테니까.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그가 지나온 시간에 관해 물은 적이 없었다. 때문에 헤르난이 그가 떠나온 세상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지,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헤르난은 칼릭스가 행복하길 바랄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런 헤르난이 저 남자의 초췌한 낯짝을 본다면? 멍청한 꼬락서니를 본다면? 그는 불행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 충격을 받을 거다. 타는 듯한 가여움을 느낄 테지. 저 멍청한 작자를 끌어안아 주지 못해 슬퍼할 거다. 소리도 없이 울 것이다.

‘그래선 안 되지.’

벽에 등을 기대고 선 채로, 칼릭스는 그런 생각을 했다.

「무슨 생각을 해?」

〈……이런 꿈을 꾸는 게 헤르난이 아니라 나라서 다행이란 생각.〉

「재미는 없었나 보다.」

〈재밌으라고 데려온 거 아니잖아.〉

「재밌으라고 데려온 거 맞는데, 우리의 유머 감각이 잘 맞는 편은 아닌가 봐. 나중에, 더 재밌는 일이 일어나면 다시 데려와야겠어.」

흰 사슴의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준 칼릭스가 이내 비스듬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흰 사슴과 눈을 맞추며 다시 입을 열었다.

〈헤르난이 저놈의 존재를 알게 되면 재미없을 줄 알아. 네가 했던 말 그대로, 네 숲에 불을 지를 거야.〉

「흥. 영웅이라는 놈이 꼭 악당처럼 구는구나. 다음에도 나랑 놀아 줄 거면서.」

〈…….〉

「뭐, 너의 세상에도 동이 터 오고 있으니 이쯤에서 헤어지자. 헤르난에게도 나의 안부를 전해 주렴.」

말을 마친 흰 사슴은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더니, 작은 웃음소리 아래에 빛의 잔상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 순간, 집무실의 창 너머로 빛이 번쩍였다.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였다. 어둡던 하늘은 비구름이 보낸 예고장과 같은 거였던 모양이었다.

이제 이 세상에서 쫓겨나겠구나. 여전히 제 손에 얼굴을 박은 채로 어둠 속에 잠겨 가는 남자를 보며 칼릭스는 생각했다.

그리고 누군가 칼릭스를 불렀다. 까만 어둠 속에 몸을 담그려 드는 남자가 아니라, 저를 부르는 소리였다. 칼릭스는 그를 찾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도련님. 여전히 먼 옛날의 호칭을 고수하는 남자는 잠시 뒤엔 후작님을 찾았다. 그 뒤론 칼릭스, 라고 제 이름을 불러 왔다. 도련님이나 후작님 같은 소리를 들으면 일부러 눈을 뜨지 않는 심술을 부리는 배우자 때문에 간신히 내뱉게 된 이름이었다.

「칼릭스.」

그 다정한 목소리가, 흰 사슴이 데려온 이상한 세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꿈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칼릭스는 무심코 이 세상의 저를 눈에 담았다. 어느새 손을 내리고 민얼굴을 드러낸 남자가 칼릭스를 보고 있었다. 왜인지 눈이 마주친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 시선이 선명했다.

하지만 금세 남자의 눈길이 떨어져 나갔다. 남자는 독한 술에 취한 사람처럼 흐려진 웃음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헤르난……. 그렇게, 자꾸만 나를 부르면서. 왜 내 앞에, 내 앞엔 나타나 주지 않는 거야.”

혼잣말과 함께였다.

흰 사슴이 말한 찢어진 시간, 그 틈 사이로 새어 나온 헤르난의 부름은 남자를 흔들어 놓지 못했다. 새로울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미 그는 매일같이 헤르난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너를 내 옆에 둘 수 있을까.”

짧은 정적을 뒤로하고 남자는 중얼거렸다.

잠시 흐려졌던 남자의 푸른 눈이 음험한 색으로 빛났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모습을 바꾸는 남자의 속내를 다른 사람은 파악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칼릭스는 저 남자를 알았다. 헤르난 말론을 사랑하는 칼릭스 히페리온은 알 수 있었다.

칼릭스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기분 나쁜 생각을 머리에 담고 웃는 남자를 저대로 두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하지만 칼릭스는 흰 사슴이 열어 둔 새까만 어둠 속으로 군말 없이 걸음을 옮기는 쪽을 택했다. 헤르난이 보고 싶었다.

* * *

밤사이의 긴 꿈에서 깨어난 칼릭스는 황급히 눈을 떠 헤르난을 찾았다. 제 사랑스러운 배우자와 시선을 맞추고 그의 부름에, 헤르난의 부름에 화답해 주고 싶었다.

“……몸이 좋지 않으십니까?”

누워 있는 칼릭스에게로 몸을 숙이며 헤르난은 물었다. 그의 짙은 갈색 눈 속에 걱정이 담겨 있었다.

몸이 좋지 않냐고 묻다니. 절 걱정해 주는 헤르난을 향한 애틋함에 마음이 저릿해지는 것과는 별개로 칼릭스는 약간의 민망함을 느꼈다. 꼭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서였다.

이름을 불러도 답을 주지 않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진 이가 헤르난이었다면, 당장 침실로 치료 마법사들을 불러오는 게 맞았다. 그는 몸이 약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저처럼 과하게 건강한 남자가 그런다면, 그건 그냥…… 늦잠이나 자는 거라고 여기는 게 맞았다.

“네 눈엔 내가 아직도 어린애로 보이나 봐.”

민망해진 칼릭스가 중얼거렸다.

“……어린 건 맞으니까요.”

어젯밤에도 그 어린애랑 할 거 다 해 놓고. 그렇게 말하려던 칼릭스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런 소릴 했다간 헤르난이 도망갈 것 같아서였다.

입가에 말 대신 웃음을 머금고 칼릭스는 헤르난의 까만 머리칼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눈썹 위에 옅게 남아 있는 흉터를, 아직 붉은 기가 어려 있는 눈가를, 그 아래의 뺨을 천천히 쓸어 봤다. 헤르난은 의아하다는 눈을 하고서도 칼릭스를 저지하지는 않았다. 그저 가만히 칼릭스의 손에 자신을 맡겨 줬다.

“헤르난. 내 이름 불러 줘서 고마워.”

두 눈에 헤르난만을 가득 담은 채로 칼릭스는 속삭였다.

“좋지 못한 꿈을 꾸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헤르난은 계면쩍게 웃어 보였다.

한때 바보같이 웃는다고 여겼던 그 웃음이 칼릭스를 붙잡고 있던 불안을 순식간에 녹였다. 마법을 부리기라도 한 건가 싶을 정도로 마음이 편해졌다.

자리에서 그대로 몸을 일으킨 칼릭스가 헤르난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익숙한 살냄새를 맡았다.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헤르난. 여전히 웃는 걸 어려워하는 남자를 품에 가득 안고 붉어진 귓가에 몇 번이고 말을 던졌다.

‘너를 저버렸던 남자는 후회와 고통 속에서 너의 망상을 붙든 채 살고 있어. 나는 그 머저리와 달라. 나는, 끝까지 너를 저버리지 않아.’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 칼릭스는 헤르난이 숨겨 둔 상처를 들쑤시고 싶지 않았다.

스칼라의 바다에서, 공황에 빠졌던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그가 비밀스럽게 품고 있던 이야기를 내보였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고통이 되는 시간을 곱씹었었다.

그 후로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그가 반복해 온 시간에 관해 묻지 않았다. 대신 언젠가는 헤르난이 제게 모든 걸 이야기해 줄 거라고 믿었다. 잘 보이고 싶어서, 칼릭스 히페리온에게 자신의 불행을 숨겼던 옛날을 생각하면 쉬운 얘긴 아닐 테지만 말이다. 물론, 꼭 그렇게 만들어 줄 거지만.

하나 그러한 배려가 칼릭스가 입을 다물기로 한 유일한 이유만은 아니었다.

칼릭스는 헤르난의 상처가 아물고 난 뒤에도 그에게 오늘의 일을 말하지 못하리란 걸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흰 사슴이 오늘처럼 제게 몇 번의 초대장을 더 보내오더라도, 불행한 백작이 주최한 우울한 파티의 유일한 손님이 되어 시간을 보내게 되더라도 마찬가지일 거다. 칼릭스는 헤르난의 앞에서 입을 다물게 될 거였다.

‘헤르난이 마음 쓸 칼릭스 히페리온은 이 세상에 나 혼자여야 해.’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나는 어린애가 아니라고 툴툴거리기도 민망한, 유치하고 추잡한 생각을 했다. 이기적인 마음을 품었다.

“좋지 못한 꿈을 꾸긴 했어. 즐거운 꿈은 아니었으니까. 커튼콜을 보겠다고 길고 재미없는 연극을 견디고 있는 남자를…… 밤새 바라보기만 해야 했거든.”

“커튼콜을요?”

“응. 진짜 이상하지.”

“연극에 나오는 배우를 좋아하는 분이었나 봅니다.”

조심히 칼릭스를 마주 안아 주며 헤르난은 말했다.

“깨워 줘서 고마워. ……네가 없었으면 나는, 남은 평생을 이상한 꿈에 홀로 갇혀 있었을 거야. 그 남자랑 똑같이, 그 남자를 따라서.”

마음의 안도를 닮은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가 정말 보고 싶었어.”

“잠을 자는 동안에요?”

“왜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투정이 묻어난 중얼거림이었다. 칼릭스는 곧장 물음 하나를 덧붙였다.

“너는 안 그랬어?”

“……저도 그랬습니다.”

마주 보지 않아도, 지금 헤르난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가 눈앞에 훤히 그려졌다. 칼릭스는 헤르난을 따라 웃음 지었다.

제게 안긴 남자의 온기를 느끼며 칼릭스는 긴장을 풀었다. 이상한 꿈의 끝자락에서 문득 느꼈던 불안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헤르난을 쫓아 여기까지 왔듯, 제 손으로 헤르난을 죽인 그 남자 역시 사라진 헤르난을 쫓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설령 그가 헤르난을 찾아 이곳까지 오게 된다고 한들, 제게서 이 온기를 빼앗을 수 없을 것이다. 칼릭스는 자신 있었다.

‘마음이 약한 헤르난이 알기 전에 처리해야지. 그 새끼가 눈길도 못 받게 하면 돼.’

헤르난의 옆에는 내가 있어야 해. 평생, 그의 옆에서 나의 죄를 갚기로 약속했으니까.

포옹을 푼 칼릭스는 조심히 헤르난의 손을 잡았다. 헤르난의 왼손 약지에 자리한 반지를, 그가 제게 내려 준 용서와 허락을, 사랑을 담은 증표를 매만졌다.

오랜 시간을 돌아 간신히 맞잡게 된 손이었다. 칼릭스는 그 손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방해하는 건 모두 치워 버리면 됐다. 제게서 헤르난을 떼어 내려는 이가 설령 자기 자신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헤르난. 말은, 언제쯤 편하게 놔줄 거야?”

“……노력해 보겠습니다.”

갑작스러운 화두에 당혹감을 느끼며 헤르난은 답을 얼버무렸다. 언제나처럼 말이다.

“네가 나한테 말을 편하게 하는 것보다, 내가 너한테 말을 높이는 게 더 빠를 것 같아.”

“…….”

“안 그래요, 남작님?”

계면쩍은 얼굴을 한 헤르난의 뺨에 입을 맞추며 칼릭스는 웃어 보였다. 당장, 헤르난에게 답을 닦달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은 입을 맞추는 게 먼저였으니 말이다.

막을 내린 꿈이 사라진 자리를 박수 대신 입맞춤이 채우게 된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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