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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느 때와 같은 (20/21)

2. 여느 때와 같은

요즘 칼릭스는 까마득한 초조를 느끼는 중이었다. 자신의 배우자와 함께 밖을 나설 때면 그 초조가 더욱 커졌다.

칼릭스 히페리온의 연인이며 배우자,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헤르난 말론에게 빈틈이 생겼다. 바로 그 빈틈이 칼릭스를 초조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었다.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하지만 순식간에 다른 사람으로 변하게 해 주는 건 아니었다. 그건 제 평생의 사랑을 마음껏 끌어안을 수 있게 된 헤르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전히 스스로를 의심했고 가끔은 불안해했다. 이따금 어두운 생각 속에 자신을 고립하려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니었다. 헤르난은 오랜 시간 그를 괴롭혀 왔던 음울한 고통을 완전히 떨쳐 내려고 애를 쓰지는 않았다. 다만 칼릭스가 말하는 미래와 희망, 사랑 따위의 따스함을 조금씩 받아들였다.

눈에 띄기 시작한 빈틈이란 건 그 받아들임의 과정에서 생겨난 변화였다. 물론, 헤르난 본인은 느끼지 못하는 변화였으나…… 주어진 여유 시간 대부분을 헤르난을 졸졸 쫓아다니는 것으로 보내는 칼릭스에겐 너무나 훤히 들여다보이는 변화였다.

달라진 건 헤르난의 내면만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 역시 좋아졌다. 화색이 돈다는 말이 딱 맞았다.

차가운 이목구비와 뒤엉켜 사람을 냉혹해 보이게만 만들던 음울한 분위기가 옅어지고, 잘생겼지만 욕망이 없어 언뜻 지루해 보이던 얼굴엔 묘한 생기가 얹혔다.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홀린 듯 입을 맞춘 게 벌써 수천 번이 넘을 거다.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찾아든 자그마한 빈틈이, 사소한 변화가 기뻤다. 내내 불안과 초조를 헤매던 이에게 드디어 여유라는 게 생긴 것 같아서였다. 헤르난 본인은 그럴 리 없다며 가만히 고개를 저을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인 칼릭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칼릭스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자 하는 헤르난을 돕는 게 좋았다. 그는 헤르난의 옆에 붙어 제 연인의 발목을 잡으려는 불안을 몰아냈고, 기어코 헤르난의 마음에 들러붙은 어둠 위에 입을 맞추며 사랑을 속삭였다.

문제는…… 이런 헤르난의 변화가 칼릭스에게만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게 아니란 거였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잡스러운 것들까지 제 사랑스러운 배우자의 변화를 반기고 있었다. 누구라고 특정 지어 말하기도 애매한 불특정 다수의 떨거지들이 말이다.

‘지금도 그렇지. 주제도 모르고 헤르난을 눈에 담으려 들잖아.’

칼릭스는 그와 헤르난 앞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턱을 들었다.

지금 두 사람이 있는 곳은 무도회나 파티가 열리는 연회장이 아니라, 꽤 오랫동안 비어 있던 로만 저택의 1층에 자리한 응접실이었다.

이 고풍스러운 저택의 주인은 서부에 배치된 기사단의 사령관이었는데, 잠시 수도에 머물게 된 틈을 타 거의 매일같이 모임이며 파티 따위를 열어 대고 있었다. 오늘의 조찬회 역시 사령관의 부탁으로 전날 오후에 갑작스레 잡힌 약속이었다.

소중한 주말 하루를 헌납하게 만든 짜증 나는 식사 자리에는 후작 부부 외에도 다섯 명의 손님이 더 있었다. 칼릭스보다는 헤르난의 또래로 보이는, 수다스러운 남자 역시 집주인이 조찬회에 초대한 다른 다섯 명의 손님 중 하나였다.

눈치라는 걸 길바닥에 내버리고 온 듯한 남자는 후작 부부에게 관심이 많았다. 다른 손님들이 소문이 무성한 그들을 어려워하거나 말거나, 남자만은 계속해 칼릭스와 헤르난에게 말을 붙여 왔다.

‘투자가라는 인간이 저리 눈치가 없어서야……. 곧 파산하겠군.’

물론, 남자의 끈덕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남자는 잘난 사람에게 줄을 대고 싶어 고개를 조아리는 유형의 인간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그 조아림이 과해 꼭 놀란 공벌레처럼 보이긴 했지만.

하지만 그 공벌레의 눈이 자꾸만 헤르난에게 돌아간다는 건 아주 큰 문제였다.

남자는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는 헤르난에게 굳이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불순한 눈으로 자꾸만 헤르난의 얼굴을 훔쳐보는, 눈치를 반만 챙긴 짓거리를 했다. 소문의-그 소문이 예전의 소문일지 근래의 소문일지는 알 수 없지만-남작을 직접 보는 게 신기해서, 혹은 그 소문의 남작이 저런 얼굴인 게 신기해서 저러는 것일 확률이 높았다.

‘혹은…… 저 자식이 삐뚤어진 취향을 가지고 있는 변태 새끼라서.’

남자의 눈에 어른거리는 기분 나쁜 호기심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연회나 만찬회 따위의 모임에 후작 부부가 들어섰을 때, 보통 사람들의 시선이 먼저 향하는 쪽은 칼릭스 히페리온이었다. 한 번 시선이 닿으면 쉽게 떨어져 나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몇몇은, 대개 며칠 굶어 독이 오른 지네 같은 눈깔을 소유한 이들은, 이따금 헤르난에게 끈덕진 시선을 보내곤 했다.

‘한 번만 더 헤르난을 보면, 눈을 파 버리고 싶어질 것 같은데.’

쓸데없이 유려한 어휘를 구사하는 남자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칼릭스는 생각했다.

“남작님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고견을 듣고 싶어요.”

그리고 역시나. 내내 기회를 노리던 남자가 헤르난에게 물음을 건넸다. 최대한 아래로 내려 깐 목소리와 이를 반쯤 드러낸 친절한 미소가 만나 역겨움이라는 악마의 자식을 탄생시킨 순간이었다. 지켜보던 칼릭스는 하마터면 헛구역질을 할 뻔했다.

내 앞에선 네발로 기더니, 헤르난의 앞에선 두 발로 서네. 개 흉내를 내던 광대가 다정한 신사인 척하는 꼴이라니. 같잖았다.

예전 같았으면 어땠을까. 남자는 소문의 스칼라 남작에게 지레 겁을 집어먹고 혹여 그와 말이라도 섞게 될까 무서워 자리를 떴을 것이다. 혹은 음침한 낯을 한 외톨이 악당을 보며 허세를 부리거나 우월감을 느꼈겠지.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로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시선을 돌렸다. 헤르난이 누군가와 말을 나누는 걸 막을 생각은 없었다. 대화를 주고받는 이가 저 덜떨어진 남자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속으론 남자를 바다에 수장시키는 망상을 하면서도 그랬다.

한때 헤르난이 저를 벗어나지 못하게 그를 고독 속에 가둬 뒀을 때가 있었다. 그를 억압한 거다. 칼릭스는 그때의 자신처럼, 테미스 백작처럼 굴고 싶지 않았다. 백작 성의 동쪽 별관, 그 가장 꼭대기 층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야 했다.

칼릭스는 헤르난을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

헤르난이 곤란해하는 기색을 보이면 바로 저 남자를 떼어 내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헤르난은 따지자면 칼릭스 히페리온의 사람일 낯선 남자에게 서먹하게 굴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이어 몇 번의 대답과 질문이 오고 가는 내내 한 번도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남자에게 성심껏 답을 해 주기도 했고 말이다.

‘……안 돼. 방해하지 말자. 방해하면 안 돼. 그러지 말자.’

칼릭스는 계속해 속으로 말을 되뇌었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어느 정도는 자기 최면이라고 봐도 좋았다.

사실, 문제는 헤르난의 변화만이 아니었다. 문지기처럼 헤르난의 옆을 지키고 선 칼릭스 히페리온이라는 사람의 존재 또한 저런 짜증 나는 인간들을 끌어모으는 데 큰 몫을 했다.

칼릭스는 소문이란 게 참 우습다고 생각했다. 단지 헤르난이 ‘그’ 칼릭스 히페리온과 갈라서지 않고 여전히 함께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오랜 시간 헤르난을 둘러싸고 있던 추잡한 소문들이 조금씩 희석되기 시작했다. 이혼은커녕 약간의 거리감도 없이 친밀하게 붙어 다니는 두 남자에 관한 소문이 더 미묘한 방향으로 변하기도 했다.

오랜 시간 짙은 음울 속에 가려졌던 헤르난의 겉모습 역시 그의 차가운 인상과는 별개로 소문 속의 남자와는 확연히 달랐기에, 소문에 붙은 또 다른 소문에 힘을 실어 줬다. 배우자를 억지로 붙들어 두고 있는 게 스칼라 남작이 아니라 황제의 검인 칼릭스 히페리온이라는 소문 말이다.

두 사람을 찾아온 새로운 소문이 칼릭스는 마음에 들었다. 일단 말도 안 되는 거짓이 아니라 사실이 퍼진 거라 좋았다. 더군다나 그런 이야기가 나도는 이상, 사람들이 헤르난을 쉽게 업신여기지 못할 테니 더 좋았다. 칼릭스가 바라던 바였다.

하지만 이 세상엔, 특히나 귀족 사회엔 막무가내로 살아 온 칼릭스의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개차반들이 가득했다.

악당의 손에 붙들려 있는 게 사실 스칼라 남작이라는 이야기가 솔솔 피어나면서부터 헤르난에게 같잖은 것들이 들러붙기 시작했다. 칼릭스는 그 같잖은 것들을 얼굴만 예쁜 악당에게서 절름발이 미남을 구해 내는 환상을 품은 변태들이라고 불렀다.

칼릭스는 그 음험한 종자들을, 헤르난을 자신의 아래로 받고 싶어 하는 놈이건, 깔아뭉개고 싶어 하는 놈이건, 하나씩 차곡차곡 모아 헤르난의 시야가 닿지 않을 곳으로 치워 버리고 있었다.

그 변태들을 들어내고 남은 건, 그보단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이전엔 헤르난에게 별 개 같은 것들만 골라 꼬였다면 지금은 상대적으로 조금은 멀쩡해 보이는 것들도 은근슬쩍 그에게 관심을 보여 왔다. 하지만 헤르난의 옆에 있는 것이 다른 사람도 아닌 칼릭스 히페리온이다 보니, 대부분은 칼릭스를 어려워하듯 헤르난을 어려워했다.

하나 그중에서도 간혹 머리가 망가진 것 같은 사람이 등장하곤 했다. 지금, 바로 제 눈앞에 있는 남자 같은 사람.

칼릭스는 시선을 돌려 다시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 맛있는 인간을 눈앞에 두고 침을 흘리는 오크와 저 남자가 다를 게 뭔가 싶었다.

‘……하지만 잘난 걸 숨기는 건 힘들잖아. 헤르난이 다정하고 잘생긴 걸 억지로 숨길 순 없지.’

어쩌겠어. 헤르난한테 꼬이는 벌레 새끼들을 잡으며 살아가는 수밖에.

생각을 마친 칼릭스의 입가에도 이내 보기 좋은 미소가 걸렸다. 헤르난을 따라 웃은 거였다. 그 눈빛만은 그와 시선이 마주친 남자의 얼굴에 퍼져 있던 웃음을 단박에 사그라들게 할 정도로 차가웠지만 말이다.

“세 분은 무슨 얘길 그리 재미있게들 하고 계시는가?”

때마침, 잠시 자리를 떴었던 저택의 주인이 부인과 함께 돌아와 물음 하나를 건넸다.

“자작께서 재밌는 이야길 많이 아시더군요.”

“오, 그래요?”

“……그렇게 재밌는 이야긴 아니었습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사령관을 향해 남자는 다급히 답을 내줬다.

“겸손하시군요.”

“…….”

“맞아요. 저이는 겸손한 면이 있죠. 자, 나머지 이야긴 밖으로 산책을 나가 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우리 신사분들께 아름다운 후원을 구경시켜 드리고 싶은데.”

사령관의 말을 들은 칼릭스가 남자를 향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입을 다문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 보이기까지 했는데, 헤르난의 눈에는 그 모습이 햇살을 받은 장미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남자의 생각은 달랐지만 말이다.

“아쉽지만…… 전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조금, 머리가 어지러워서 볕 아래에 서기가 무섭네요. 하하.”

칼릭스의 눈을 피한 남자가 사령관에게 느릿느릿 제 뜻을 전했다.

“저런. 아쉬워라.”

옆에 있는 헤르난의 손을 잡으며 칼릭스는 고개를 저었다.

꽤 오랫동안 이어져 오던 세 남자의 대화는 싱겁게 끝을 맺었다. 칼릭스의 속을 모르는 헤르난만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지 않아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그는 자작처럼 친밀하게 말을 붙여 오는 사람과 말을 나누는 일에 여전히 자신이 없었다.

“헤르난. 사령관의 후원 온실엔 희귀한 꽃들이 많대.”

몸을 슬쩍 기울인 칼릭스가 헤르난의 귓가에 속삭였다. 손을 맞잡아 준 헤르난 덕에 기분이 좋아져 자연스레 목소리가 들떴다.

“함께 보면 즐거울 거야.”

저택을 오랜 시간 방치했을 때도 정원만은 항시 사람을 붙여 관리했다는 사령관이 신경을 쓴 공간이니 후원도 온실도 필시 아름다울 것이다. 저 거슬리는 놈 없이 헤르난과, 그러니까 꽃을 좋아하는 배우자와 함께 그곳들을 돌아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빨리. 꽃 덤불 속에 선 헤르난이 웃는 걸 보고 싶었다. 들뜬 마음을 숨기지 않으며 칼릭스는 웃어 보였다.

* * *

다소 복잡한 심경으로, 헤르난은 제 다리를 붙잡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봤다. 남자는 조찬회 내내 안절부절못하며 헤르난의 안색을 살피던 그의 배우자였다. 당연하게도 말이다.

서부 기사단 사령관의 초대를 받아 참석한 조찬회는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별 탈 없이 끝이 났다. 이른 아침에 저택을 떠났던 마차가 다시 히페리온 저택에 들어선 건 보랏빛 저녁이 지나고 밤이 찾아왔을 무렵이었다.

마차 안에서부터 안절부절못하던 칼릭스는 헤르난이 씻고 나오기 무섭게 달려와 그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을 직접 말려 주기까지 해 헤르난을 질겁하게 한 건 덤이었다.

아무래도 칼릭스는 낯선 이들과 함께했던 식사 자리며 정신없이 이어졌던 대화, 뜻하지 않게 길어진 산책이 제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가끔 보면…… 칼릭스는 절 세심히 돌봐야 할 환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기 없이 보송보송해진 헤르난의 손을 잡아끈 칼릭스는 그를 다짜고짜 벽난로 앞의 소파 위에 앉혔다. 본인은 기사 서약을 하는 기사처럼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헤르난을 올려다봤다.

“마사지해 줄게. 네가 예전에 해 줬던 대로.”

헤르난이 입은 긴 가운 자락을 괜스레 손으로 들춰 보며 칼릭스는 웃음 지었다. 퍽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였으나 그의 표정이며 손길만은 꼭 장난을 치는 어린아이와 닮아 있어 귀엽게만 느껴졌다.

“오늘 하루 힘들었잖아.”

“아뇨, 편한 시간이었습니다. 몸을 혹사한 것도 아니고요.”

거짓 한 점 섞지 않고 헤르난은 솔직히 말했다.

하지만 그 거짓 없는 답변을 칼릭스는 곧이곧대로 믿어 주지 않았다. 그는 도대체 언제 소파 옆에 놓아둔 건지 모를 향유 병을 집어 들어 뚜껑을 열었다. 차가운 액체가 순식간에 그의 손을 적시고 헤르난의 다리에도 닿았다.

미끈해진 칼릭스의 두 손이 곧장 헤르난의 다리를 붙잡아 왔다. 검을 쥐는 사람답게 크고 단단한 손이었다. 자신이 망가뜨렸던 헤르난의 발목을 손끝으로 더듬어 보던 칼릭스의 얼굴에 오묘한 감정이 떠올랐다가 금세 자취를 감췄다.

언젠가 헤르난에게 직접 신발을 신겨 줬던 기억을 잃은 남자처럼 칼릭스는 헤르난의 발을 그의 허벅지 위에 올려놨다. 헤르난은 제 다리를 쥔 남자의 손을, 번들거리는 향유를 멍하니 바라만 봐야 했다.

벽난로가 만들어 낸 따스한 온도와 은은한 불빛이 두 사람이 만들어 낸 침묵을 감쌌다.

하지만 불현듯 찾아온 긴 침묵 속에서도 이제 헤르난은 예전과 같은 불안을 느끼진 않았다. 헤르난은 긴장을 풀었다. 그는 칼릭스가 저와 하고 싶어 하는 모든 걸, 가능하다면 함께해 주고 싶었다. 마사지쯤이야…….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겠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을 한다며 거부할 정도는 아니었다.

헤르난은 얌전히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절 만지는 칼릭스의 손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어쩐지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칼릭스의 손이 닿은 건 저 아래의 다리인데 괜히 목덜미가 간지럽기도 하고 서늘하기도 했다. 무릎 아래로는 섬세한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데도 그랬다.

문제는 붙잡힌 다리가 아니라 대충 풀어 헤쳐진 셔츠를 입은 아름다운 남자의 두 눈이 아닐까 싶었다.

“말 많은 주최자 덕에 산책이 너무 길어졌어. 어떻게 주최자부터 손님들까지 하나같이 말 많은 사람뿐이었지?”

“못 견딜 정도로 긴 산책은 아니었습니다.”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니. 힘들었던 거 맞네.”

이상한 해석을 한 칼릭스가 말을 이었다.

“네 다리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어느 정도에서 피로를 느끼는지, 내가 헤르난 너보다 더 잘 알아.”

“…….”

“넌, 고통에 너무 둔감해. 몸이 아픈 걸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고.”

중얼거린 칼릭스는 드러난 헤르난의 다리에 짧게 입을 맞췄다. 종아리 위에도 무릎 위에도 그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하지만 헤르난을 향한 시선만은 다른 곳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무릎 아래에 손을 넣어 다리를 벌리고 허벅지를 가린 가운 위에 입을 맞출 때에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헤르난을 향해 있었다.

헤르난은 순간 말을 잊고 그런 칼릭스를 바라만 봤다. 그는 칼릭스가 이따금 내보이는 욕망 섞인 시선을 해석하는 게 어려웠다. 지금도 그랬다. 정말 아픈 다리가 걱정돼 피로를 풀어 주려고 하는 건지, 몸을 섞기 전에 분위기를 잡으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헷갈렸다.

헤르난은 칼릭스와 몸을 섞으면서도 그가 자신에게 욕정한다는 사실을 여전히 믿기 힘들어했다. 아니, 믿는 게 힘들다기보단 이해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분위기’라는 걸 파악하는 게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런 헤르난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칼릭스는 자신이 언제 입을 맞췄었냐는 듯 그저 다정히 웃어 보였다.

칼릭스는 곧장 헤르난의 왼쪽 발목을 잡았다. 그는 늦은 성장통을 앓는 자신의 다리를 마사지해 주던 헤르난을 떠올리며 손을 움직였다.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순간을, 떠올리면 금세 얼굴이 붉어지는 순간을 좇았다.

“나 때문에 네가 고생하는 것 같아서 미안해.”

칼릭스는 기억 속의 헤르난을 따라 움직였다. 아킬레스건 아래의 움푹 들어간 살을 손끝으로 부드럽게 눌렀고, 종아리를 짚고 올라가 무릎을 쥐었다. 이어서 그 뒤의 오금을 간질였다. 느릿하고 집요한, 어쩌면 끈덕지다고 느낄 법한 손길이었다. 왼쪽 다리에 감각이 없는 헤르난은 느낄 수 없는 끈적임이 담긴 것이기도 했다.

“아닙니다.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만찬이고 파티고 모임이고, 다 사라졌으면 좋겠어. 지긋지긋해.”

헤르난이 무어라 답을 할 새도 없이 칼릭스의 말이 이어졌다.

“은퇴하면 수도엔 발도 안 붙일 거야. 스칼라에 틀어박혀서 종일 너랑만 있을래. 지겹다고 도망가도 소용없어. 바로 쫓아갈 거니까. 지금처럼 하루 반나절이나 보지 못하는 일은 없을 거야.”

투정이었다. 이상하지만 꿈같은 투정.

가만히 앉아 칼릭스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손끝이 간지러워졌다. 고됨 같은 건 느끼지도 못하는 제 왼쪽 다리를, 칼릭스는 바다 건너에서 온 유리 공예품처럼 조심히 다루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사지라는 본분은 잊지 않고 열심히 뭉친 근육을 풀어 줬다.

역시나 칼릭스에게는 다른 뜻이 없었다. 그는 그저 제 배우자가 오늘 하루 힘들었을까 걱정돼서 이렇게 신경을 써 주고 있는 거였다. 괜히 칼릭스의 진심을 이상하게 곡해할 뻔했다. 헤르난은 마음이 쑥스러워졌다.

자신이 민망한 의심을 했다는 걸 칼릭스에게 고백할 순 없었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은 전하고 싶었다. 헤르난은 고개 숙인 남자의 머리칼을 조심히 쓰다듬어 봤다. 결 좋은 백금색 머리카락이 손 틈 사이를 간질이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든 칼릭스는 헤르난의 손을 잡아 아래로 끌었다. 그리고 그 손에 자신의 뺨을 기댔다. 내도록 칼릭스의 입가에 기분 좋게 걸려 있던 웃음은 어느새 잠잠히 가라앉아 흔적도 남질 않은 채였다. 기분이 좋지 않아 그런 건 아니었다. 자신의 온 신경을 헤르난과 눈을 맞추는 일에 쓰느라 그런 거였다. 헤르난은 그런 칼릭스를 대신해 다시 웃어 보였다.

제 왼쪽 다리를 쥔 칼릭스의 손길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것에서 오는 아쉬움과는 별개로, 헤르난은 기분이 좋았다.

칼릭스 히페리온에게 이런 마사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적어도 여기 이 다섯 번째 세상에 나 말고 또 있을까? 없을 것이다. 바로 그 평범한 특별함이 헤르난을 들뜨게 했다. 너무 수준 낮은 생각이란 걸 알면서도 그랬다.

하지만 가운을 젖힌 칼릭스의 손이 허벅지 안쪽에 닿으면서 헤르난의 웃음 역시 빠르게 자취를 감추게 됐다.

웃음은 머물 곳을 옮겨 갔다. 여전히 헤르난과 눈을 맞추고 있는 칼릭스의 눈가에 순식간에 웃음이 번졌다.

힘이 들어간 단단한 손이 허벅지며 종아리의 뭉친 근육을 느릿하게 지분대다가는 별안간 힘을 빼고 무릎 안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길 반복했다. 그 일련의 과정에 다른 의도는 없었다. 적어도 헤르난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저 칼릭스는 저와 마주 보고 있는 평화로운 시간 자체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헤르난은 칼릭스를 따라 웃고 싶었지만…… 자꾸 어설픈 미소만을 그리게 됐다. 왜 이전의 칼릭스가 자신의 마사지에 이상한 반응을 보였던 건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헤르난은 잔뜩 말려 올라간 가운을 모른 척 슬그머니 내렸다. 벽난로 속 불꽃이 푸른색이 아니라 붉은색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들 정도로 얼굴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뺨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을 게 분명했다.

칼릭스가 나를 만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다니. 예전 같았으면 조금도 그런 기분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도련님께 감사함만을 느꼈겠지.

헤르난은 살며시 시선을 돌려 칼릭스의 눈을 피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금세 칼릭스에게 붙잡혔다.

“헤르난. 무슨 생각해?”

“네?”

헤르난은 놀라 되물었다. 가벼운 물음에 너무 유난한 얼굴을 한 것 같아 후회됐다.

“무슨 생각을 했길래, 그런 음흉한 얼굴을 하는 건가 싶어서.”

음흉……. 칼릭스의 말속에 담긴 뜻을 곱씹어 보던 헤르난이 놀라 입을 벌렸다. 뒤늦은 당혹감이 그를 흔들었다.

“그런 생각 안 했습니다.”

다급히 말하는 헤르난은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칼릭스는 그런 헤르난을 넋을 놓고 보다간 곧장 손을 뻗어 그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부끄러움이 많은 배우자가 도망가기라도 할까 다급히 몸을 붙였다.

“창피해할 필요 없어.”

“…….”

“나는 그보다 더한 생각을 했으니까.”

가까워진 시선에 헤르난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입을 맞춰 오기 직전의 칼릭스는 항상 저런 얼굴을 하니까. 그리고 헤르난의 예상대로, 칼릭스의 입술이 긴장한 그를 찾았다.

별안간 시작된 입맞춤은 언제나 그렇듯 다급하고 거칠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들이닥친 혀는 헤르난의 입 안을 무자비하게 헤집어 놨다. 이따금 아랫입술이 씹히기도 했다. 하지만 아픈 입맞춤은 아니었다. 칼릭스 히페리온은 헤르난에게 아주 작은 생채기도 낼 수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

칼릭스와 입을 맞춘다는 것도 그와 몸을 섞는다는 사실도, 자신을 향한 칼릭스의 욕망도, 헤르난에겐 여전히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저 혼란뿐인 수수께끼만은 아니었다. 헤르난은 그 수수께끼가 좋았다. 확실한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안겨 준 것이라 그랬다.

“……마사지는 끝난 것 같네요.”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헤르난은 말했다. 이제는 마사지에 담겨 있던 칼릭스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게 됐다. 그 과정이며 이유가 어찌 됐건, 다시 입을 맞추게 될 테니 말이다.

“아니, 계속될 거야.”

칼릭스의 손끝이 헤르난의 목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다른 방식의 마사지겠지만.”

이미 잔뜩 흐트러져 있던 헤르난의 가운을 젖히며 칼릭스는 속삭였다. 귓가에 불어 넣어진 숨이 간지러웠다.

두 사람은 다시 입을 맞췄다. 전보다 부드러워진 입맞춤에 휩쓸리다 정신을 차렸을 땐, 헤르난이 칼릭스의 허벅지 위에 앉은 상태였다.

소파에 등을 기댄 칼릭스는 다리가 불편한 배우자의 피로를 풀어 주던 다정한 손으로 이제는 배우자의 몸을 희롱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일어선 젖꼭지를 굴리고 놀리듯 잡아당기다 그것을 입 안에 머금고 빨았다. 등을 받치고 남은 손으론 반쯤 선 성기를 괴롭혔다. 미끈한 손이 손끝을 세워 귀두 끝을 살살 긁자 다물어진 잇새로 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칼릭스는 흐트러진 헤르난의 모습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제 눈에 담았다. 밖으로 새어 나오는 나지막한 신음이며 숨이 아까워 그것을 족족 입맞춤으로 집어삼켰다.

헤르난의 모든 게 달게 느껴졌다. 누군가 말도 안 되는 머저리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비웃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평생 이 달콤함을 모르고 살아갈 것들이 불쌍할 뿐이었다.

수줍음을 타는 배우자가 자꾸만 뒤로 빼려는 몸을 단단히 붙든 칼릭스가 헤르난의 등을 짚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쪽이 덜 민망할까?”

“무슨…….”

곧, 척추뼈 아래의 움푹 파인 곳을 간질이던 손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 엉덩이 골을 쓸었다. 향유가 묻어 미끈거리는 중지와 검지로 다물려 있던 구멍을 벌렸다가 그 안으로 손가락 한 마디를 넣고 돌리며 장난질을 쳤다. 그러다간 손가락을 굽혀 내벽을 꾹 눌러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손가락 두 개를 한 번에 박아 넣고 느긋하게 안을 풀었다. 뭉친 부분이 느껴지면 힘을 줘 누르고 그 주변의 연약한 살을 간질이며 출납을 반복했다.

“아…….”

황급히 자신의 입을 막은 헤르난의 손등 위에 칼릭스는 입을 맞췄다. 핏대가 선 성기가 회음부의 연약한 살을 쑤셔 박기라도 할 듯 거칠게 찔러 댔다.

하지만 칼릭스의 손만은 느긋하고 다정하게 움직였다. 헤르난의 아픈 다리를 마사지해 주던 때의 손길과 다를 바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못돼 먹은 생각을 하는 것 역시 매한가지였고 말이다.

하지만 그 반응은 달랐다. 칼릭스의 위에 올라타 앞과 뒤 모두 그에게 가로막힌 채로, 이제 헤르난은 반쯤 흐느끼고 있었다. 이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이 흐려진 상태에서도 밖으로 신음을 흘리는 게 창피한지 입술을 깨물었다.

칼릭스는 그 답답하고 사랑스러운 남자의 뺨에 입을 맞추고, 달뜬 얼굴을 한 헤르난의 눈물을 혀로 핥았다.

젖은 손가락이 눅진하게 풀어진 구멍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손가락이 빠져나간 자리에, 이미 한계를 맞이한 제 성기를 단박에 박아 넣었다.

쾌락의 얼굴을 한 하얀 침묵이 흘렀다.

칼릭스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성기를 조이는 안쪽의 움직임을 음미했다. 성직자처럼 금욕적인 얼굴을 한 남자의 속이 이렇게 깊고 뜨겁고 축축하다는 걸, 다른 남자의 성기를 그 안에 빠듯하게 담고 더 깊이 들어오라며 조를 수 있다는 것을 누가 알까. 그건 오직 칼릭스 히페리온만이 아는, 알아야만 하는 황홀함이고 비밀이었다.

“아……. 이, 이게…….”

하지만 울먹임이 묻은 목소리가 쾌락에 잠겼던 칼릭스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

눈을 뜬 칼릭스가 본 것은 당황한 헤르난이었다. 두 눈은 절정의 여운에 젖어 축축했고 귀 끝은 붉었지만 안색이 창백했다. 칼릭스의 시선이 헤르난의 시선을 따라 조금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헤르난의 곤란을 곧장 이해하게 됐다. 사실, 이해는 안 가지만 그에겐 충격적인 일일 수도 있었다.

일은 칼릭스가 헤르난의 안에 자신의 성기를 한 번에 박아 넣은 탓에, 앞선 애무에 그의 성감이 달궈진 데다 지금의 자세가 너무 깊은 삽입을 돕게 된 탓에 벌어졌다.

헤르난은 단지 삽입만으로도 절정에 달했다. 그리고 절정의 순간이 만들어 낸 백탁액이 흔적을 남겼다. 헤르난과 칼릭스 두 사람 모두의 위에 말이다.

쾌락에 녹은 머릿속에 서로 색이 다른 폭죽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웃음이 나왔다. 여러 번의 긴 밤을 보내고도 달라지지 않는 이 뻣뻣함이 헤르난이라는 사람과 너무 잘 맞아떨어져서 좋았다.

“나는 네…….”

끝내 말을 완성하지 못하고 칼릭스는 입을 다물었다.

칼릭스를 막아선 건 헤르난이었다. 혼란에 빠진 그는 칼릭스의 말을 들어 볼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반쯤 눈을 감은 헤르난은 한 손으로 칼릭스의 턱을 붙잡곤 혀를 내밀어 그의 뺨에 튄 하얀 흔적을 핥았다. 여전히 자신의 안에 칼릭스의 성기를 품은 채로, 그 아래처럼이나 뜨겁고 축축한 혀를 움직였다.

헤르난은 그저 창피했다. 너무 창피해서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누군가와 처음 몸을 섞어 본 어린애처럼 흥분해 일을 친 기분이었다. 이런 데서 사람이 어설픈 게 티가 나는 걸까 싶어 우울해지기도 했다.

당황스러움과 곤혹을 동시에 느끼며 헤르난은 몸을 숙였다. 붉은 혀는 칼릭스의 턱 끝을, 도드라진 목젖을, 그 아래의 쇄골을, 갈라진 가슴팍 위에 옅게 남은 상처를 핥았다. 혀를 넓게 펴서, 때로는 혀끝을 세워 핥으며 눈에 보이는 자신의 흔적을 정성껏 닦아 냈다.

하지만 완벽히 일을 끝내진 못했다. 칼릭스의 두 손이 헤르난의 골반을 단단히 쥔 탓이었다. 헤르난은 순간 자신의 몸이 조금 들어 올려지는 걸 느꼈다. 안쪽을 가득 채우고 있던 커다란 성기가 더 깊이 들어올 것을 예고하듯 밖으로 몸을 뺐다.

“아…….”

헤르난은 스스로에게 탄식했다. 이렇게 정신없고 창피한 와중에도, 칼릭스의 움직임에 발끝이 곱아들 정도로 흥분하는 게 창피해 뺨을 붉혔다.

헤르난은 눈을 떠 칼릭스를 봤다. 칼릭스는 웃고 있었다. 다만, 그 두 눈에서만은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게 좋은 신호일지 나쁜 신호일지 헤르난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한 가지 확실한 건, 칼릭스가 이 행위를 멈출 생각은 없다는 것이었다.

“미안해, 헤르난.”

“…….”

“미리 사과할게.”

그 안에 멍청한 얼굴을 한 남자를 담은, 유난히 짙어 보이는 푸른색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칼릭스는 말했다. 탁해진 목소리에 뜨거운 열감이 묻어나 있었다.

저 같은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인 걸 알면서도, 헤르난은 먼저 칼릭스를 끌어안았다. 곧 다가올 격랑을 예감하며 칼릭스에게 의지했다. 그 격랑을 불러올 이가 저 남자란 걸 알면서도 맞닿은 그의 온도에 안도를 느꼈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전보다 거친 삽입이 시작됐다. 헤르난의 안을 오로지 자신으로만 채우겠다는 듯, 칼릭스는 자신의 성기를 가장 깊숙한 곳까지 박아 넣었다.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깊은 삽입이었다.

움직임이 거칠어질수록 머릿속에 빛이 번쩍였다. 살과 살이 부딪칠 때마다 요란하게 물이 튀는 소리가 더운 숨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아……. 아흑…….”

헤르난은 말을 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숨을 내뱉기만 했다. 쾌락이 하얗게 만들어 버린 세상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칼릭스를 더 단단히 끌어안는 일뿐이었다.

“나를 봐, 헤르난.”

“…….”

“너에게 입을 맞추게 해 줘.”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눈을 맞추고 끝내 조심히 입을 맞추는 것뿐이었다.

새로운 입맞춤 속에서, 헤르난은 다시 한번 절정을 맞았다. 이번엔 칼릭스와 함께였다. 긴 밤의 시작이었다.

* * *

안 그래도 인상이 차가운 편인 헤르난의 얼굴에 평소보다 더 냉랭한 기운이 서렸다.

헤르난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마주하기 꺼림칙한 존재나 영 풀리지 않는 일을 앞에 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거울을 보고 있었다.

다만 거울이 사람이었다면 스칼라 남작이 저를 싫어한다고 오해를 했을 게 분명할 정도로, 헤르난은 거울 속의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한 눈싸움이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헤르난이 먼저 시선을 돌린 덕분이었다.

‘정말…… 못되게 생겼군.’

잠시 멈췄던 환복을 이어 가며 헤르난은 생각했다. 갑작스레 불유쾌한 일을 겪은 사람처럼 어색한 얼굴을 한 채였다.

그는 거울을 보는 일을 즐기지 않았다. 아주 먼 옛날에도, 지금도 그랬다. 하지만 요즈음에 들어선 자꾸만 거울과 의미 없는 눈싸움을 하게 됐다. 칼릭스 때문이었다.

벌써 1년째, 칼릭스는 매일 밤 헤르난의 귓가에 대고 자신의 배우자가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 어디가 어떻게 잘났는지를 구체적으로 속삭이고 있었다. 붙잡은 포로를 세뇌하려 드는 악당처럼 고요하지만 열성적인 얼굴을 하고 말이다.

처음엔 민망해 듣지 못한 척을 했다. 특히나 외모에 관한 얘기가 나올 땐 있는 힘껏 모른 척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 말을 얼버무려도, 당황해 등을 돌려도, 칼릭스는 개의치 않고 그에게 끊임없이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칼릭스가 잠시 기억을 잃었을 때, 그때의 그는 낯선 배우자의 외관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칭찬을 내뱉곤 했었다. 곱살스러운 웃음은 덤과 같은 것이었다.

기억을 되찾은 뒤론 그런 소리를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칼릭스는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건 오직, 이상하면서도 단내가 풍기는 말끝에 귀여운 웃음 대신 질척한 입맞춤이 찾아온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 점점 이상한 착각이 들기 시작하는 거다. 적어도, 칼릭스의 눈엔…… 내가 예전보다는 괜찮아 보이는 걸까? 그런 생각을 머리에 담고 자꾸만 거울을 훔쳐보게 됐다.

헤르난은 버릇처럼 거울을 향해 힐끔 시선을 줬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음침하게만 느껴지는 남자가 거울 속에서 저를 보고 있었다.

다행히 거울과의 눈싸움이 반복되지는 않았다. 헤르난의 시선이 얼굴이 아닌 목에 닿은 탓이었다. 채 여미지 못해 벌어진 옷깃 사이로 민망한 흔적들이 보였다.

차마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지는 못하고 헤르난은 제 목 위에 남은 붉은 흔적에 조심히 손을 대어 봤다. 그가 이 다섯 번째 세상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지니고 있던 검푸른 손자국이 아니라, 조금은 과격한 애정과 정욕이 담긴 붉은색 자국을 매만졌다.

자리를 비운 칼릭스를, 헤르난은 그가 제게 남긴 흔적을 더듬으며 느끼고 있었다. 칼릭스와 함께하는 나날은 그와 몸을 섞는 일처럼이나 낯설고 어려웠지만 이렇게 때때로 사람의 마음을 붕 뜨게 했다.

‘어제는…….’

헤르난은 머릿속에 떠오르려던 생각을 재빨리 지웠다. 지난밤의 기억이,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칼릭스에게 저지른 추태를 담은 기억이 머릿속을 헤집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헤르난은 거울을 등지고 서는 걸 택했다. 하지만 하필 시선이 닿은 곳이 지난밤 일을 저질렀던 소파 위였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바쁜 칼릭스가 아침 일찍 저택을 떠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칼릭스가 이런 제 모습을 봤다면…… 또 무슨 엉큼한 생각을 하기에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거냐며 놀리듯 입을 맞춰 왔을 테니 말이다.

‘그만 생각하자.’

눈을 꾹 감았다 뜬 헤르난은 그의 머릿속에 꽤 오래도록 남을 창피를 지우려 노력하며 셔츠의 목깃을 올렸다. 그 위에 검은색 크라바트를 두르고 정갈한 모양새로 매듭을 묶었다.

케인까지 챙겨 든 헤르난은 문간을 나서기 전 작은 원형 테이블 앞에서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을 붙잡은 건 흰 도자기 화병에 한 아름 담긴 색이 다른 꽃들이었다.

꽃은 물을 머금은 채로 활짝 피어 있었다. 꼭 꽃들이 크게 웃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로 싱그러워 보였다.

헤르난은 조심히 고개를 숙여 그것들이 머금은 향기에 코를 대어 봤다. 거짓말처럼 달콤한 향기와 그 사이로 섞여든 물 내음을 맡으며 옅게 미소 지었다.

누구의 마음이건 차분하게 만들어 줄 아름다운 꽃들은 바로 이틀 전, 칼릭스의 품에 안겨 히페리온 저택의 가장 너른 주인 방에 당도했다. 정확히는 칼릭스의 품에서 헤르난의 품으로 옮겨 간 뒤에 화병으로 오게 됐다.

칼릭스는 여전히 헤르난이 꽃을 좋아한다는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칼릭스에게 헤르난은 굳이 진실을 고백하지 않았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쪽을 택한 거다. 그답지 않은 선택이었다.

정말로 꽃이 좋아져서, 없던 취향을 새로이 갖게 돼서 칼릭스의 앞에서 침묵한 건 아니었다. 그저 아름다운 꽃들 사이에 선 칼릭스를 보는 게 너무 좋아서…… 제 손을 잡고 파란 장미 정원으로 향하는 그의 얼굴에 환하게 피어난 웃음이 좋아서, 칼릭스의 품에 안겨 있는 꽃다발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절 위한 것이라는 게 좋아서, 헤르난은 침묵하게 됐다.

다시 허리를 세운 헤르난은 자세를 고쳐 잡고 방을 나섰다. 그의 검은색 크라바트에 노란 꽃가루가 묻어 있었다.

* * *

히페리온 저택의 서재는 헤르난의 공간이 되었다. 서재 특유의 평화로운 고요 속에서 헤르난은 칼릭스를 돕기 위해, 저택을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일했다.

스칼라의 일 역시 조세핀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해 나가고 있었다. 가끔은 칼릭스가 소개해 준 훌륭한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그녀와 음성으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말이다.

사실, 스칼라에 더 자주 방문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수도 디아만테에서 스칼라까지는 포털을 타면 채 하루도 걸리지 않으니 크게 고된 이동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헤르난은 도통 디아만테를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이곳에 칼릭스를 홀로 두고 떠나는 게 내키지 않아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스칼라에 일주일 이상을 머무는 것도 아닌데, 꼭 넓은 집에 어린아이를 홀로 내버려 두고 떠나는 부모라도 된 것처럼 마음이 쓰였다.

물론, 칼릭스가 어린아이는 아니었다. 그는 그저 조금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헤르난의 옆을 떠나지 않는 사람일 뿐이었다.

칼릭스는 헤르난이 스칼라로 가야 할 때면 본인도 시간을 내서 함께했다. 일정이 꼬여 같이 출발하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어떻게 해서든 밤이면 헤르난과 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잤다. 하지만 그런 칼릭스도 가끔은 수도에 홀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새로이 즉위한 황제의 검으로 살게 된 이상 당연한 일이었다.

그럴 때의 칼릭스는 대장간의 용광로처럼 뜨거운 눈을 하고 헤르난 대신 그의 짐을 꾸렸다. 떠나는 날에는 방어 마법을 두른 마차의 상태를 몇십 번은 더 확인하고 그가 직접 고용한 호위 둘을 붙여 줬다. 마부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둘을 붙였는데 그들 역시 검 쓰는 일에 능한 이들이었다. 해적이 득세한 대신 도적을 찾아보기 힘든 남부 기준으로는 과한 처사였다.

고작 사나흘을 보지 못하는 것뿐인데도 칼릭스는 불안해했다. 떠나려는 헤르난을 끌어안고 목소리에 걱정을 담아 한참을 중얼거렸다.

〈위험한 일이 생기면 어쩌지? 갑자기 몸이 아프면? 밤에 내가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할 거야? 나는 네가 보고 싶어서 잠도 못 잘 게 분명한데. 너도 그렇지?〉

상황이 이렇다 보니…… 헤르난은 칼릭스를 혼자 두는 일을 어지간하면 만들지 않게 됐다. 스칼라에 영주가 필요한 큰일이 생긴다거나, 조세핀이 도움을 요청할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조세핀에게서 온 편지를 내려 둔 헤르난은 커튼 틈 사이로 들어온 햇살을 눈에 담았다. 공중을 부유하는 먼지를 비출 정도로 환한 빛이었지만 스칼라의 빛처럼 따사롭지는 않았다.

히페리온 저택은 꼭 봄의 호수 같았다. 아름답긴 하지만 화려하진 않았고, 누군가에겐 재미없다는 소리를 듣겠구나 싶게 모난 곳 없이 차분했다. 그래서 헤르난은 이 저택이 좋았다.

헤르난이 자신을 히페리온 저택의 손님이라고만 규정했던 때와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제 그는 이 저택을 스칼라의 남작 성만큼이나 친밀하게 여기고 있었다.

〈유령의 집을 다시 태어나게 한 건 너잖아. 그러니, 저택의 실질적인 주인은 내가 아니라 너지. 나는 너한테 빌붙어 사는 거고.〉

어쩌면, 그런 말을 칼릭스가 몇 번이고 반복해 들려준 덕분일지도 몰랐다.

〈저택도 나도 다 네 거니까, 소중하게 여겨 줘. 버리면 안 돼.〉

제 손을 꼭 붙들고 전하던 속삭임까지 떠올리자 공연히 마음이 머쓱해졌다. 칼릭스를 버리다니…… 꿈에서조차 그런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잡념을 접은 헤르난은 페이퍼 나이프를 들어 그의 앞으로 온 다른 우편물을 열었다.

빳빳한 봉투 안에서 나온 건 금색 리본을 단 초대장과 편지였다. 한때 스칼라에 머물렀던 손님인 니콜라에게서 발송된 것이었다. 편지는 새처럼 재잘대길 좋아하는 니콜라가 쓴 것답게 분량이 길고 내용이 자세했다. 동봉된 초대장 탓에 조금 긴장한 헤르난은 니콜라의 편지를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눈 안에 담기 위해 노력했다.

초대장과 관련한 이야기는 편지의 말미에 적혀 있었다. 니콜라의 배우자인 이안의 어린 사촌 마르타 영애의 무탈한 사교계 데뷔를 위해 꽤 성대한 파티가 열리는 모양이었다. 장소는, 수도를 조금 벗어나 북쪽으로 가면 나오는 아름다운 파이안 저택이었다.

헤르난은 본래 낯선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자초한 고립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몇몇 일을 겪으면서 더욱더 그런 성향이 짙어졌고 말이다.

하지만 요즈음에 들어선 다른 이들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것이 만찬으로의 초대건 무도회나 파티, 사교모임으로의 초대건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이 아름다운 저택에서 직접 모임을 주관하기도 했다.

어떤 식으로든 인맥을 넓혀 두는 게 훗날 칼릭스에게 도움이 될 테니까.

가문을 등에 업고 성공한 게 아닌 칼릭스에겐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 태생부터 칼릭스가 녹아들어야 하는 권력자들의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제겐 대단한 능력도 번듯한 배경도 풍족한 재산도 없었다. 사람들의 호감을 살 매력적인 인물상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칼릭스가 나를 원하니까, 함께하길 바라니까…… 그를 떠날 순 없었다. 헤르난은 걱정과 불안을 뒤로한 채 자신의 자리에 서서 나름의 노력을 하는 걸 택했다. 남들이 보기엔 하찮고 별것 아닌 일일지라도, 그게 무엇이건 칼릭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도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게 예전만큼 두렵고 어렵지는 않았다. 언제 어디서든, 칼릭스가 옆을 지켜 줘서일 거다.

헤르난은 적어도 사교 행사에서만큼은 어딜 가든 칼릭스와 함께하고 있었다. 헤르난이 초대받은 만찬 자리에 배우자 없이 홀로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정확히 그 이후부터였다.

헤르난을 초대한 만찬의 주최자는 주색잡기를 좋아하는 공작이었다. 그가 악명 높은 스칼라 남작을 초대한 이유가 오직 호기심 때문이란 걸 알았기에, 헤르난은 한창 기사단에서 자리를 잡는 중인 칼릭스와 함께하지 않았다. 소문이 좋지 못한 저와 함께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괜한 입방아에 오르내릴까 걱정이 돼서였다.

공작의 앞에서 내도록 억지웃음만을 짓다가 돌아온 헤르난이 히페리온 저택의 입구에서 마주한 건, 일 때문에 귀가가 늦는다고 했던 칼릭스였다. 그는 오랫동안 바람을 맞아 창백해진 얼굴로 헤르난을 맞았다.

〈헤르난. 아직…… 내가 어려워?〉

어울리지 않게 우울한 얼굴을 하고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물었다.

〈아니면, 내가 부끄러운 거야?〉

〈네?〉

〈공작의 만찬에 배우자 없이 혼자 갈 정도로?〉

목소리 역시 초조로 끝이 흐렸다.

헤르난은 그 밤 내내, 칼릭스에게 안긴 채로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놔야 했다.

〈뭐든 나한테 물어봐 줘. 나는 네가 가는 곳이 어디든 다 따라갈 거야. 시간이야 만들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좋은 옷에는 좋은 장신구가 필요해. 네가 쥔 케인을, 나를, 세상에 보여 줘야지. 사람들한테 내가 이런 걸 가졌다고 나를 자랑해 줘. 네가 그랬으면 좋겠어.〉

그 후로 헤르난 홀로 사교 모임에 가는 일은 없어졌다. 그것이 파티이건, 개인 무도회이건, 만찬이건, 단순히 차를 즐기는 자리이건 간에 말이다. 당연히, 모두가 황제의 검이자 아름다운 영웅이며 몇 년 안에 기사단장 자리에 오를 남자의 등장을 환영했다.

오래되지 않은 추억을 더듬던 헤르난은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칼릭스가 돌아오면 이야기를 나눠 봐야지. 니콜라의 초대에 답을 보내는 건 그다음이었다.

* * *

준비된 마차 앞에서 칼릭스는 헤르난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곧, 검은 장갑을 낀 칼릭스의 손 위에 헤르난의 손이 자연스럽게 얹혔다.

마차에 올라타는 배우자의 에스코트를 끝마친 칼릭스는 헤르난이 자리를 잡은 걸 확인하곤 가볍게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칼릭스가 착석한 곳은 헤르난의 바로 옆자리였다. 자리가 좁아 어깨가 부딪혀도 상관없었다. 두 사람 사이의 빈틈은 없을수록 좋으니 말이다.

괜스레 마차 안을 둘러보던 칼릭스가 슬쩍 헤르난의 손을 붙잡았다. 헤르난이 손을 빼 버리기라도 할까,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네가, 내 손을 경계하지 않아서 좋아. 걱정 없이 맞잡아 줘서 기뻐.”

칼릭스는 그의 마음을 입 밖으로 솔직하게 내놨다. 칼릭스 히페리온이 얽힌 생각이나 그를 향한 감정 따위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버거워하는 헤르난을 대신해 일부러 자신의 마음을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거였다.

붙잡힌 손을 내려다보던 헤르난은 자신이 지나온 긴 시간을 잠시 더듬어 봤다.

이제는 그 시간들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고작 몇 년 사이에 아주 많은 것이 변했다. 특히나 지난 1년은 꿈과 현실을 분간하는 게 어렵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대부분의 변화는 칼릭스에게서 시작됐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칼릭스 히페리온이 가져온 것이기에 헤르난은 그가 바라는 변화를 받아들이려 노력했고 결국 이렇게 익숙해져 버렸다.

붙잡아 오는 손과 다급한 입맞춤, 따뜻한 체온. 저 한 사람만을 가득 담은 새파란 눈과 그의 눈동자를 더 아름다워 보이게 하는 애정 어린 빛. 다정한 웃음과 귓가를 맴도는 사랑의 말.

‘……가끔은 당황스러울 때도 있지만.’

마차에 오르며 칼릭스의 손을 잡았던 것처럼, 헤르난은 저를 꼭 붙들고 있는 칼릭스의 손등 위에 자신의 다른 손을 얹었다. 조용한 미소 위로 쑥스러움이 섞여 들었다.

“말만 편하게 해 주면 더 좋을 텐데.”

헤르난의 눈치를 보던 칼릭스가 몸을 더 가까이 붙이며 속삭였다.

말을 편하게 한다는 게 헤르난에겐 참 어려운 일이었다. 아직은 제 ‘배우자’인 칼릭스 보다 자신이 모셨던 ‘도련님’인 칼릭스가 더 익숙해서 그럴지도 몰랐다.

그런 속내를 알아차려서인지 칼릭스는 틈만 나면 헤르난에게 넌지시 제 뜻-말을 놓길 바란다는-을 전하곤 했는데, 서로 간에 오고 가는 호칭이며 말투에 약간의 집착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헤르난도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긴 했다. 적어도 칼릭스에게 더는 도련님 소리는 하지 않을 정도는 됐다. 그나마 몸을 섞을 땐 칼릭스가 이끄는 대로 조금 편하게 말을 하기도 했다. 그 아래로 더 정신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형이라고 부르면, 나를 어린 남편 취급해 줄 거야?”

형이라니. 친형제 사이에나 쓰는 단어를 입에 담는 칼릭스를 보니 안 그래도 멋쩍던 마음이 더 민망해졌다.

“후작님이라고 불리는 것도 좋지. 하지만 그건 공적인 자리에서나 좋은 거고, 사적인 자리에선 당신을 더 가깝게 느끼고 싶어.”

“…….”

“저택의 새로운 사용인 몇몇은 네가 내 보좌관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후작님은…… 보좌관과 입을 맞추십니까?”

헤르난은 물었다. 칼릭스를 보는 그의 두 눈은 언제나처럼 담담한 색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엔 웃음기가 서려 있어 얼핏 칼릭스를 놀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말이 이어졌다.

“계단에서, 후원에서…… 사람들이 보고 있거나 말거나…….”

“내가 졌어. 닦달 안 할게. 뭐…… 시간이야 많으니까.”

살짝 풀이 죽은 칼릭스를 보며 헤르난은 미소 지었다. 꼭 어릴 때의 도련님 생각이 나서 그랬다. 헤르난의 마음속에는 먼 옛날의 칼릭스가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칼릭스가 왜 자신의 소년 시절을 창피해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왜 그렇게 웃어? 나 유혹하려고?”

헤르난의 뺨에 입을 맞춘 칼릭스가 물었다. 역시나. 풀이 죽은 게 아니라 풀이 죽은 척을 한 거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건네는 남자에게 헤르난은 답을 주지 않았다.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도 믿지 않을 걸, 이미 여러 경험을 통해 알게 됐으니까. 이 뒤로 이어질 일 역시 많은 경험을 통해 예측할 수 있게 됐다.

“머리 망가질 일은 하시면 안 됩니다.”

“머리만 안 망가지면 돼?”

헤르난에게 몸을 기울이며 칼릭스는 대꾸했다. 참으로 뻔뻔한 미소와 함께였다.

“뭐든 안 됩니다. 지난번에도…….”

헤르난의 말끝이 흐려졌다. 머리가 망가지지 않은 대신 옷이 잔뜩 흐트러졌던 때가 떠올라서였다.

그날 역시 마차에서 일이 벌어졌다. 예쁘게 넘긴 머리를 망가뜨리지 않겠다고 약속한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입을 맞췄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조심스럽던 입맞춤은 칼릭스의 성정을 따라 조금씩 거칠어졌다. 어느 순간부턴 그와 입을 맞추고 있는 곳이 마차 안인지 침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목깃을 모아 주던 핀은 어디론가 날아가 사라졌고 옷은 잔뜩 주름이 졌으며, 조끼의 단추 역시 핀을 따라 실종됐었다. 그뿐인가, 헤르난이 고심해서 매듭지어 준 칼릭스의 크라바트는 7살짜리 어린애가 손을 댄 것처럼 엉성한 모양새로 늘어져 버렸다. 연회장에 도착했을 땐 두 사람 모두 괴한에게 쫓기기라도 한 행색이었다.

“지난번? 하지만…… 다들 얼굴 보느라 바빠서 다른 덴 안 보던데.”

“제가 신경 씁니다.”

“알았어. 마차에선 얌전히 있을게.”

칼릭스는 순순히 물러났다. 그러나 곧장 물음 하나를 덧붙였다.

“파티가 끝난 다음엔, 입을 맞춰도 되지?”

칼릭스의 질문을 들은 헤르난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입 밖으로 내기엔 너무 쑥스러운 답이 될 것 같아서 그랬다.

민망해진 헤르난은 도망치듯 칼릭스의 시선을 피했다. 귀 끝이 발개진 채로 마차 밖의 세상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마차 창문에 어슴푸레하게 비친 칼릭스를 봤다. 그는 참, 예쁘게도 웃고 있었다.

* * *

칼릭스의 두 눈이 어두운 밤을 내다보고 있는 헤르난을 훑었다. 달빛을 받아 창백한 남자의 옆모습을, 그의 안색을 살폈다. 헤르난의 눈가에 스며 있을지도 모를 우울을 잡아내려 애쓰는 중이기도 했다.

대저택의 손님방은 넓고 아름다웠다. 후원 이곳저곳을 떠다니는 하얀 불빛 덕에 창밖의 어두운 풍경이 지루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창 너머를 내다보는 헤르난 역시 여느 때처럼 차분했다. 제 말에 다정히 답을 해 주는 것 역시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자꾸만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신발 밑창에 작은 돌이 박힌 사람처럼 찜찜한 기분을 느끼며 헤르난을 살피게 됐다.

니콜라의 초대로 참석하게 된 파티는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무사히 끝을 맺었다. 사실 헤르난의 손을 붙잡고 중간에 빠져나온지라 무사히 끝을 맺었는지 단언할 순 없었다. 하지만 파티의 주인공이었던 어린 영애의 사교계 데뷔가 문제없이, 아니, 꽤 화려하게 이뤄졌으니 무사한 수준을 넘어 성공적으로 끝을 맺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거다. 내일의 정오 만찬 역시 파티에서의 좋은 분위기를 이어받아 부드럽게 진행되겠지. 오늘처럼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자리가 아니니 더욱 걱정 없었다.

‘……내가 놓친 게 있나?’

소파에 등을 기댄 칼릭스가 기억을 더듬어 봤다. 파티 내내 자신이 보고 들었던 것들을, 내놨던 말들을, 그리고 매 순간의 헤르난을 떠올려 보고 곱씹어 봤다.

사람을 작은 별처럼 보이게 해 주는 드레스를 입은 영애는 사람들의 애정 어린 관심과 날카로운 재단을 웃어넘기며 자신을 찾아온 신사, 숙녀들을 친절히 맞이했다.

그녀는 칼릭스며 헤르난과도 짧지만 어색하지 않은 대화를 나눴었다. 자신이 어린 영애와 영식들에게 북부의 설인처럼 무서워 보일 거란 착각을 단단히 한 헤르난이 그녀보다 더 긴장했었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그러니…… 오늘의 주인공이 제 신발 밑창에 박힌 돌멩이는 아닐 것이다.

쇠약해진 길럼 공작이 자신이 괴롭혔던 노예들의 수발을 받으며 죽느니만 못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기묘한 이야기를 전해 들어서? 하지만 그게 내 알 바인가? 칼릭스는 쓰레기의 고난엔 관심이 없었다. 감시 목적으로 그에게 붙여 둔 사람을 떼어 낼 정도는 아니지만…… 알아서 벌을 받고 있다니 희소식이기도 했고 말이다.

헤르난에게 허튼수작을 부리던 놈도, 들어주기 힘든 개소리를 지껄이는 놈도 없었다.

다리가 불편한 헤르난의 옆을 지키고 서 있다 못해 그와 한시도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이는 칼릭스에게 눈치 없이 춤을 신청해 오는 사람도 없었다.

‘스칼라 남작이 미친 후작의 목줄 노릇을 한다는 소문이 나서 그럴지도 모르지.’

파티 내내, 칼릭스는 혹여 헤르난이 저 때문에 곤란함을 느끼는 상황이 올까 최대한 얌전히 굴었었다. 성격을 죽이고 입을 다문 채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안면이 있는 니콜라 같은 이들과도, 낯선 이들과도 좋은 분위기 속에서 부드러운 대화를 나눴다. 음험한 작자가 헤르난에게 관심을 보이지 못하게 감시는 했지만.

관심?

그 짧은 단어가 이상하게 입 안을 맴돌았다. 규모가 큰 파티였음에도, 헤르난에게 관심을 보인 간 큰 새끼는 없었다. 하지만 제게 쓸데없이 친밀하게 굴었던 인간이…… 하나 있었지.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 마법사라던 남자. 이름뿐인가? 남자와 나눴던 대화 역시 주고받았던 인사말만큼이나 지루하기 그지없어 그 내용도 목소리도 기억나는 게 없었다. 대충 체구가 작은 남자가 귀찮게 굴었다는 사실 정도만 머릿속에 어렴풋이 남은 상태였다.

‘설마. 헤르난이 그 이름 모를 걸 신경 쓰고 있을까?’

별안간 떠오른 물음에 칼릭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내내 신경이 거슬렸던 게 아무래도 그 남자 때문인 것만 같았다. 제게 불필요한 친밀함을 내비치던 인간을 보면서 헤르난이 혹시 다른 생각을 했을까 봐, 칼릭스는 그게 걱정됐다. 그리고 무서웠다. 조금씩 나아지곤 있지만…… 헤르난은 그 속이 망가져 있으니까. 헤르난을 그렇게 만든 게 나니까.

‘그 남자 때문에 주눅이라도 들었으면 어쩌지? 혼자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잡스러운 생각이 머릿속을 쿡쿡 찔렀다. 마음이 급해진 칼릭스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야만 했다.

칼릭스는 내내 헤르난의 가장 옆에 서서 그를 지켰다. 헤르난을 중심으로 흐르는 시간의 순간순간을 제 눈에 담았었다. 그렇기에 그 마법사 남자를 앞에 두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의 헤르난이 어땠었는지 역시 금세 떠올릴 수 있었다.

헤르난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을 괜찮다는 의미로만 해석해선 안 됐다. 헤르난은 등신같이 굴던 저와 루체가 함께 있는 걸 보면서도 웃었으니 말이다.

칼릭스는 헤르난이 질투 같은 걸 하지 않을 사람이란 걸 알았다. 헤르난은 같잖은 질투로 마음을 끓이는 저와 달랐다. 그는 체념으로 마음을 식힐 사람이었다.

그 순간 밖을 내다보던 헤르난이 뒤를 돌았다. 대뜸 자리에서 일어난 칼릭스가 낮은 테이블에 다리를 부딪치는 바람에 난 요란한 소리 때문이었다. 다만, 칼릭스 본인은 조금도 아프지 않은 모양인지 그 자리에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선 채로 헤르난을 쏘아보고 있었다.

놀란 헤르난은 케인 없이 느린 걸음을 걸어 칼릭스에게 다가갔다.

“나는 너 말고 다른 사람한텐 관심 없어.”

그리고 정말 뜬금없는 말을 전해 듣게 됐다.

“나는 네가, 키가 큰 게 좋아. 네가 잘생긴 것도 좋아. 무뚝뚝하게 보이는 것도 좋고 목소리가 낮은 것도 좋아. 나는 그냥, 네가, 네 모든 게 좋아.”

“……네?”

“누가 나한테 관심 보여 봤자, 나는 너 보느라 바빠서 그딴 관심 제대로 기억도 못 해.”

어느새 헤르난의 어깨를 붙든 칼릭스가 말했다. 침착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에도 갈수록 말이 빨라졌다.

헤르난은 그 속을 모를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듯 곤란해 보이기도, 수심에 차 보이기도, 쑥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칼릭스는 다른 사람의 표정을 읽는 것에 능했지만 이렇게 헤르난의 앞에만 서면 승률 낮은 도박꾼처럼 보는 눈이 형편없어졌다.

“나는 네가 다른 사람이랑 붙어 있는 것만 봐도 속이 뒤집혀. 그 사람 나이가 적어도 짜증 나고 많아도 짜증이 나, 얼굴이 잘나도 못나도 싫어.”

이젠 상관도 없는 얘기까지 입 사이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안 그러고 싶은데, 너한테 달라붙는 벌레들을 무시하질 못하겠어. 내 성격 더러운 걸 대륙 전역에 소문내게 돼.”

칼릭스는 당황스러웠다. 도대체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도 모를 정도로 두서없고 황당한 말이 내뱉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칼릭스 본인도 제어하기 힘든 충동 때문에 계속해 말을 이어 갈 수밖에 없었다.

“너한테 관심 보이는 새끼들 발목에 돌을 매달고 저 바다 아래에 던져 버리고 싶어. 일을 마친 뒤엔 모른 척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소금기 하나 없는 상태로 네 옆에 붙어 있을 거야.”

칼릭스는 헤르난을 향해 몸을 숙였다.

“하지만 너는…… 나랑 달라. 다 넘어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부드럽게 웃기만 해. 나에게 항상 다정하고…….”

말끝이 흐려졌다. 헤르난을 붙든 칼릭스의 모습은 꼭 불안이 목에 걸린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금세 말이 덧붙었다. 다만, 전보다 그 어조가 차분해져 있었다.

“나한테 뭘 해 달라는 게 아니야. 나는…….”

“…….”

“나는 무서워. 무서워, 헤르난.”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자신도 모르게 쌓아 왔던 불안을 고백했다.

“네가 날…… 아직도…… 언젠가 널 떠날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봐, 그래서 무서워.”

신발 밑창에 돌멩이를 박아 넣은 건 다름 아닌 칼릭스 자신이었다. 밖에서 굴러온 것이 아니라, 제 마음속에서 덜그럭대며 돌아다니던 불안을 주워 깊게 박아 넣은 거였다.

“난 헤르난 네가 하란 대로 할 거야. 네가 다른 사람이랑 말을 섞지 말라고 하면 입을 다물 거야.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 하면, 그래, 그러지 뭐.”

칼릭스의 말이 이어졌다.

“나를 사랑하잖아. 그러니까…… 나를 떠나보낼 생각 같은 건 하지 마. 걸리는 게 있으면 드러내 줘. 마음껏 싫어해 줘.”

자신의 말이 헤르난에게 또 다른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그걸 알면서도 이딴 말을 내뱉고 있는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헤르난의 앞에선 자꾸만 옛날의 어린애처럼 멍청한 행동을 하게 됐다.

헤르난은 조금 놀란 얼굴을 하고 칼릭스를 바라봤다. 하지만 곧, 조금 쑥스럽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신경을 쓰지 않는 건, 후작님이 다른 분들의…… 그런 식의 관심에 어울려 주지 않을 걸 알아서 그런 겁니다.”

“…….”

“이제는 당신이 저를 떠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어렸을 때 제게 하셨던 약속들, 다 지켜 주셨으니까요. 평생 함께일 거란 약속도 지키실 걸 압니다.”

말을 마친 헤르난과 칼릭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 속에서 잠시 망설이던 헤르난은 결국 용기 내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질투는…… 당신만 하는 것도 아니에요.”

헤르난은 불안을 느끼는 칼릭스에게 그의 속내를 솔직히 고백했다. 하지만 다짜고짜 평생이니 질투니, 그런 말을 하다니. 너무 무겁고 부담스러운 말을 내놨나 싶어 걱정도 됐다. 제 말을 듣고 칼릭스의 불안이 해소된다면 좋겠지만…… 반대로 징그럽다거나 이상하게 느끼면 어쩌나 싶었다.

헤르난은 칼릭스의 시선을 마주하는 게 어색해 고개를 슬쩍 내렸다. 하지만 그런 헤르난을 칼릭스가 곧바로 좇았다. 헤르난이 고개를 더 숙이더라도 자신을 계속해 눈에 담을 수 있게 다짜고짜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대로 앉아 버렸다.

헤르난이 질투를 한대. 하지만 나를 믿는대. 그런 거에 어울려 주지 않을 걸 믿는대. 나랑, 평생 함께해 줄 거래.

헤르난을 올려다보는 칼릭스의 머릿속이 떠들썩해졌다. 그는 활짝 웃었다. 헤르난이 나를 믿는다는데, 어떻게 웃지 않겠는가.

허풍이며 거짓말을 숨 쉬듯 내뱉는 주위의 귀족들과 달리 헤르난은 헛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가 제게 건넨 말들은 정말 단단한 진심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칼릭스는 지금 당장 몸을 일으켜 헤르난을 끌어안고 입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헤르난이 그의 속내를 결코 가볍게, 쉽게 꺼내지 않은 걸 알기에 충동을 참아 냈다. 여기서 끌어안아 버리면 다시 입을 다물고 말 테니까.

“누군가의 질투가 이렇게 고맙게 느껴지는 날이 올 줄 몰랐어.”

“…….”

“헤르난. 나는, 네가 싫어하는 건 아무것도 안 할 거야. 남은 평생 질투 같은 거 할 일 없게 해 줄게.”

찬란한 미소와 함께 건네어진 말이 헤르난의 두 뺨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런 헤르난을 보고 있자니 칼릭스 역시 얼굴이 뜨거워졌다. 온몸에 하얀 눈을 묻힌 채로 벽난로 앞에 서게 된 어린애처럼 낯이 발갛게 달아올랐을 게 분명했다.

“그냥, 다른 사람들한테…… 그렇게 웃어 주지만 않으시면 됩니다.”

헤르난은 칼릭스에게 속삭였다.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칼릭스가 자신의 연인을 끌어안았다.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단단하게 헤르난을 붙들었다.

칼릭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커다란 기쁨을 느꼈다. 그는 행복했다. 사실, 헤르난이 제 마음을 받아 준 후로 행복하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말이다.

“다른 사람 앞에선 이렇게 안 웃어. 나는 네 앞에서만 멍청해지니까. 네가 너무 좋아서 바보같이 크게 웃게 되는 거야.”

몸을 떼어 낸 칼릭스가 헤르난과 눈을 맞췄다. 눈 속에 서로를 담은 상태에서 똑바로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마차에서 하지 못했던 거, 이제 해도 돼?”

칼릭스는 헤르난에게 물었다.

헤르난은 답이 없었다. 안 그래도 차가운 느낌을 주는 그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냉랭해진 걸 보니 쑥스러워서 그런 모양이었다.

“그리고 여기엔 우리 둘뿐이니까……. 높임말을 쓰면, 저잣거리의 애들처럼 굴래. 형이라고 부를 거야.”

애교 섞인 칼릭스의 목소리를 들은 헤르난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입 사이로 흘러나오게 된 건, 조금 뒤 약간의 망설임이 지나간 후였다.

“……해도 돼.”

“…….”

“머리가 망가지는 것도 옷이 망가지는 것도, 이젠 상관없으니까.”

차마 칼릭스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는 못하고 헤르난은 말했다.

그는 황급히 칼릭스를 끌어안아 버렸다. 편하게 말을 놓는 일이 너무 낯설고 어색했기에, 포옹으로 도피한 것이었다. 얼굴을 보고 있으면 민망하니까.

“고마워, 헤르난.”

허락의 뜻을 받아 낸 칼릭스는 헤르난을 기쁘게 마주 안았다. 정신없이 입을 맞추게 될 때까지 품속의 헤르난과 온기를 나눴다.

칼릭스의 불안이 헤르난의 솔직함 속에서 녹아내리게 된 어느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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